소설리스트

20장 (39/71)

20장

옥토절은 매우 떠들썩했다.

심묘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백로와 상강이 급히 달려왔다.

“아가씨, 성안에서 불꽃놀이를 한대요. 오늘밤 계속 터뜨린다니 무척 아름다울 거예요.”

그들은 기대감을 숨길 수 없었다. 곡우는 심묘의 머리를 빗겨주며 그런 둘을 질책했다.

“허둥대기는. 이따 가서 볼 건데, 급할 게 어딨어?”

그때 심구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교교야, 다 준비했어? 바깥 대청에서 부모님께서 기다리셔.”

경칩이 밖에서 대답했다.

“큰 공자님, 아가씨는 머리를 아직 빗지 않으셨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머리 빗는 게 어찌 이렇게 오래 걸릴 수 있지. 병사가 갑옷 입는 시간도 이것보단 짧겠네.”

심구가 중얼거리고는 방을 향해 외쳤다.

“난 먼저 바깥 대청으로 가서 기다릴게. 빨리 와.”

곡우는 머리 빗는 것을 끝내고, 상자 안에서 머리 장신구를 세심하게 골랐다. 그녀는 옥비녀 하나를 심묘 머리 위에 꽂았다. 심묘는 거울을 보고 멍해졌다.

“어째서 이걸?”

“제가 볼 때 이 비녀가 오늘 옷과 아주 딱 맞아요. 세밀하면서도 잡다하지 않아서 오늘 머리 모양과 잘 어울리는걸요.”

곡우는 미소 지었다. 심묘는 머리 위 비녀를 어루만졌다. 이 비녀는 사경행이 그녀에게 준 옥으로 만든 매화 비녀였다. 여종들은 그 비녀를 보고 엄청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묘는 그 비녀를 처음엔 사경행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곧 마음을 바꿨다. 언젠가 변통하기 어려울 때 이것으로 은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혹 사경행이 알게 된다면 아쉬워할까. 심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상일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그라면 선물로 주었으니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라며 피식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곡우는 심묘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가씨, 별로세요? 그럼 다른 거로 바꿀게요. 큰 공자님께서 궁중 하사품에서 많은 보석 장신구를 골라 보내주셨으니 예쁜 비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심묘는 마음을 정한 듯 그녀를 만류했다.

“괜찮아. 더 찾다간 시간을 맞추지 못할 거야. 이렇게 가자.”

심묘는 사경행이 어떻게 느끼든 자신에게는 은자에 불과하니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되었네요.”

곡우는 마지막으로 심묘의 옷깃을 정리하고 피풍의를 걸쳐주었다.

“난로를 잊지 마세요.”

경칩이 손난로를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심부의 사람들은 이미 중앙 대청에 모여 있었다. 심부는 올해도 함께 옥토절 구경을 갈 예정이었다. 진약추와 심만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모는 연분홍색 긴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내의가 무척 얇아 보였고 복숭아색 피풍의도 보기만 좋았지 보온성은 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본인은 오늘 옷차림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심묘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심묘.”

심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심귀 쪽을 보았다. 올해는 이전과 달리 임완운과 심원백이 없었다. 이전에는 그들도 함께 참여했지만, 지금은 임완운은 헛것을 보는 등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심원백은 나이가 너무 어렸고 거리에는 유괴범이 많았기에 노부인이 그를 데리고 부 안에 남아 있기로 했다. 심원은 심귀의 곁에 서 있었고, 심귀 뒤 만 이낭은 한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심동릉이었다. 그녀는 심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동릉은 살구색 긴 겹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마 ‘감기’ 때문인 듯 겹저고리가 두껍고 커서 도리어 심동릉의 마른 몸매를 드러냈다. 만 이낭의 아름다움을 닮았지만, 존재감이 희미해 거의 자리에 없는 듯했다. 그녀는 심묘와 인사하지 않고 침묵하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부끄러운 건지 냉담한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심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교교야, 너 지금 진짜 예쁘다!”

심신이 그를 걷어찼다.

“괘씸한 놈. 네 여동생이 언제는 안 예뻤더냐!”

나설안도 웃으며 심묘의 곁으로 가 그녀의 손을 끌었다.

“우리 교교도 이젠 아가씨지.”

심부 사람들이 모두 심묘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은 다른 기색을 가지고 있었다. 작년 심묘는 금은으로 잔뜩 치장하고 흰색 벽보다도 두꺼운 화장을 해서 돈만 밝히는 시골 아가씨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적홍색으로 수놓인 솜옷에 모란색 피풍의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옥비녀 하나만 꽂았지만 화려하고 부귀한 기운이 있었다.

분위기만 온유해도 아이 티가 날 만한 차림새였으나 그녀는 단정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꼿꼿이 서 있었다. 구천 위 고고한 달처럼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녀에 비하면 온 부 여인은 비속하고 우둔한 여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심모의 눈 속에 질투가 스쳤다. 그녀는 예전부터 자신이 심묘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심부에서 그녀와 자신을 같은 선상에 두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심묘에게 자리를 빼앗긴 듯했다. 심모는 학자풍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용모에 가장 자신이 있었으나 오늘 심묘를 보니 자신이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모친의 눈 속에도 심묘에 대한 경시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진약추의 엄중한 모습에, 심모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만 이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기도 모르게 심동릉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녀는 심동릉이 아무리 총명해도 적녀로서 손색없는 사람은 심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오히려 반응이 없었다. 심원과 심구를 제외하고 심귀와 심만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심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묘를 주시하는 시선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진약추는 화제를 돌렸다.

“사람이 모두 왔으니, 출발하죠.”

심부 안에는 심 노부인, 심원백, 임완운, 이방의 첩실들이 남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거리로 나가 옥토절의 번화한 모습을 구경했다. 왕년이라면 가는 길에 모두 이야기꽃을 피웠을 테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심신과 심구는 나설안과 심묘랑만 대화했다.

심부의 호위들은 그 뒤를 따랐다. 정경성은 치안이 뛰어난 편이라 매년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오늘 같은 날은 유독 강도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성의 수비 인원들을 거리 곳곳에 많이 배치하는 편이었다.

심귀와 심만은 굳이 불편함을 자처하고 싶지 않아서 심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심모는 이전 같았으면 심청, 심묘와 함께 걸었을 터였다. 그녀는 심묘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더욱 교양 있고 우아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심묘를 자신을 돋보이는 장치로 쓸 수도 없었고, 애초에 심묘가 상대도 해주지 않으니 심동릉과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만 이낭은 그 모습에 내심 기뻐했지만, 심동릉은 부끄럼을 타는 듯 열성적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오히려 겁을 먹은 듯했다. 이에 심모도 곧 흥미를 잃어 입을 닫았다. 거리를 걷는 심부 일행의 분위기는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소문과는 달리 화목해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걸으며 사방의 화등과 등롱에 달린 수수께끼를 뚫어지게 보았다. 심구는 그녀에게 원한다면 화등은 그냥 사줄 테니 힘들게 수수께끼를 풀어 화등을 받을 필요 없다고 말을 건넸다. 심구는 등롱 수수께끼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장 가문의 거친 사람답게 쓸데없이 추측하게 만드는 물건에는 흥미가 없었다. 심구는 진약추 일행의 ‘풍아함’을 이해하지 못해 그들이 수수께끼를 얼른 다 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그들은 걸음을 다시 재촉했고, 만 이낭이 심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인, 오늘밤 만예호에서 옥토선자가 춤을 춘답니다. 올해는 옥토 등도 호수에 놓는다니, 가서 보시지요.”

그러자 진약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옥토선자는 보향루에서 나온 사람이야. 우리는 오늘 아가씨들을 데리고 왔으니 보기에 좋지 않을 것 같네.”

보향루는 정경성 안의 가장 크고 번화한 청루로 그곳의 아가씨들은 부드럽고 향기로운 피부를 가졌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저버리고 그녀들과 잠을 자기 위해 돈을 물 쓰듯 쓰는 곳이기도 했다. 본처들은 보향루를 치욕으로 여겼다. 그러나 보향루의 아가씨들이 출중한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기 때문에 올해의 옥토선자 역시 보향루의 아가씨가 맡게 된 것이었다.

만 이낭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공연일 뿐이에요. 그리 많은 사람 앞에선 옥토선자도 이상한 일을 할 리 없습니다. 즐겁게 보는 것뿐이니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실 필요 없어요.”

만 이낭은 진약추와 다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약추의 청렴한 모습과 시시각각 학자 가문의 잣대를 들이대는 모습이 예전 임완운처럼 보여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만 이낭은 임완운보다 진약추를 더 싫어했다. 만 이낭이 극단 출신이기 때문에 오늘 진약추가 보향루를 흉보는 건 의심할 바 없이 만 이낭을 깔보는 것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날카롭게 맞서자 분위기는 더욱 이상해졌다. 남자들은 체면 때문에 여인들 다툼에 끼어들 수 없었다. 심동릉은 만 이낭의 손을 잡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심모는 진약추를 위해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적녀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누가 만예호에 옥토선자만 보러 간답니까?”

심묘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이 등을 놓는 성황은 매일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출신은 선택할 방법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경시할 필요도 없죠. 그녀가 원래 무슨 신분이든 오늘 그녀는 옥토선자일 뿐입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면 그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둘 필요가 있을까요?”

멍한 사람들 사이에서 심신이 크게 웃었다.

“교교의 말이 맞다. 출신이 부귀하고 비천한 것은 선택할 방법이 없으니, 다른 사람의 능력을 경시할 수 없지!”

나설안도 미소를 드러냈다. 심가 군 병사들은 관가 출신은 극히 일부고 대부분 백성이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입대 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지낼 만큼 가난해서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하는 등 사연이 다양했다. 출신 역시 이야기하자면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병사로서의 능력은 출신이나 배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심신 부부는 가난한 사람을 경시하지 않았고, 당연히 심묘의 말에 아주 흡족했다.

동생이 기특했던 심구도 심묘의 어깨를 토닥였다.

“심묘야, 너는 천하를 마음에 품은 큰 인물이구나. 이런 기개는 오라비도 부끄럽게 만드는걸.”

반쯤은 자신을 놀리려고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묘는 일순 넋을 잃었다. 전생에 그녀는 부수의에게 시집을 가 황후가 된 뒤, 황후로서의 크나큰 부담과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다. 그녀를 짓누르는 압박감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라서는 안 되었고 그저 모든 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즐겁게 일하도록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아껴야 했다.

파랗게 질렸던 진약추의 얼굴이 이번엔 창백해졌다. 자신의 위선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심만의 표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심모는 다시 한번 분노했지만 심묘를 비꼴 몇 마디를 도로 삼켰다.

만 이낭은 심묘가 자신을 도운 거라 여겨 희색을 띠었다. 심동릉은 그 모습에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심원은 여전히 냉소하고 있었다.

“그럼 만예호로 갑시다.”

나설안이 명령하듯 호쾌하게 제안했다. 여장군인 그녀가 이끄니 모두 따라 움직였다.

만예호는 정경성 중심 서쪽에 위치해 성과 가까웠다. 봄에는 벽옥이 비추는 듯했고, 겨울에는 눈이 오면 배를 띄워 데운 술과 함께 역사를 논하니 역시 풍취가 있었다. 오늘도 눈이 내렸다. 집마다 등을 켜두어 내리는 눈송이는 윤기 도는 투명한 꽃같이 보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꽃은 호수 주변 버드나무에도 가득히 피어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등인지 확실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예호 언저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장막 안에서 불꽃이 크게 터졌다. 눈이 부셨다. 넘치는 인파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손을 잡고 있었고, 가족들은 화기애애했다. 모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불꽃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아가씨, 아가씨! 빨리 보세요. 오늘 밤새 불꽃을 터뜨린대요!”

경칩은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예쁘다.”

곡우도 넋을 잃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심구는 나설안에게 말했다.

“정경성은 확실히 정말 번화하네요. 우리 서북쪽보다 놀이가 많아요.”

고향에 자부심이 대단한 나설안도 이 말만은 부정하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사람들이 일제히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심신은 달려가는 남자 한 명을 붙잡아 물었다.

“이보게, 앞에 무엇이 있길래 모두 앞으로 달려가는 건가?”

“옥토선자가 왔수! 모두 옥토선자를 보러 가는 거요! 귀형은 새로 왔수? 올해 옥토선자는 보향루의 류형 소저라오. 귀형도 서두르시오!”

남자는 빠르게 말하고는 다시 달려갔다. 심신이 고개를 돌리자 나설안은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게 말했다.

“류형 소저를 보러 빨리 안 가고 뭐 해요?”

심신은 이마 위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부인, 무슨 말씀을. 난 부인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오. 류형 소저니 뭐니 해도 부인의 미모와 호방한 기개에는 미치지 못할 거요.”

하지만 나설안도 사람들의 흥을 깨뜨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류형이다! 류형 소저가 왔다!”

사람들이 흥분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질렀지만, 키가 작은 심묘는 볼 수가 없었다. 심구는 그녀를 끌어 옆의 높은 곳에 올려주었다. 그 후 그는 심묘의 곁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꽃마차가 주위에 사람들을 끌어모은 채 가까이 오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꽃마차는 생화로 잔뜩 단장해 준비한 사람의 열정을 볼 수 있었다. 울긋불긋한 꽃 사이로 마차 안의 사람이 분명히 보였다. 묘령의 여자가 마차 안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달빛 같은 면사, 긴 치마, 털 피풍의를 걸쳐 확실히 선인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썹과 가지런한 이를 가졌다. 좁고 긴 눈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그 운치를 더했다. 차갑지만 매력적이고 희미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가 등장하자 바람도 향기를 가진 것 같았다. 옥토선자. 신선이라기에는 속세의 먼지가 살짝 덮였으며 인간이라기에는 요염한 듯 적막해, 이 세상에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류형의 생김새만 놓고 본다면 아주 아름답진 않았다. 만 이낭과 비교해도 부족했다. 그러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쌀쌀함과 요염함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옥토선자는 신선이자 요괴였다. 이런 여인은 평범한 남자를 홀려 목숨을 빼앗는 법이었다.

심묘는 류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왔는지 궁금했지만, 한참을 찾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구는 주위를 돌아보는 그녀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교교야, 뭘 보는 거야?”

“오라버니, 어째서 류형 소저를 보지 않는 거야?”

심묘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심구는 멍청한 편은 아니었지만, 심묘의 말과 행동에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는 심묘의 물음에 바로 답했다.

“난 저런 유형은 좋아하지 않아.”

심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심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묘는 전생의 심구가 악랄한 새언니와 혼인해버린 탓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다행히 지금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이번 생의 새언니는 누가 될지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저쪽으로 가자.”

심구가 심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심신 일행과 삼십 척(尺, 1척은 약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구경을 다 했으니 일행에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합류한 다음에 같이 만예호에 등을 놓으러 갈 생각이었다.

심묘가 심구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오려 할 때였다.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십 척가량 떨어진 상점 위 대들보에 서너 살 먹은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장난이 심한 아이가 높은 대들보 위에 올라가서 류형 소저를 보려다 미끄러진 듯했다. 떨어지면 큰일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서둘러 사다리를 가져왔지만, 아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포기한 듯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교교야, 여기서 기다려.”

상황을 목격한 심구는 심묘에게 말했다. 그들이 있는 곳과 아이가 매달린 곳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무공을 할 줄 아는 심구는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곧 아이는 힘이 풀렸는지 손을 놓아버렸고 주위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심구는 한 발로 기둥 위를 가볍게 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심구는 무사히 아이를 받았고, 아이는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주위 사람은 그의 등장에 갈채를 보냈다. 아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감사를 표했다. 별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영웅이라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 심구는 부끄러워졌다. 얼른 모자를 달랜 심구는 심묘에게 가려고 몸을 돌렸지만 곧 멍해졌다. 심묘가 어디에도 없었다.

심구는 군중을 돌파해 심묘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 심묘는 흔적조차 없었다. 심구는 곳곳을 찾아보며 큰 소리로 심묘를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방금 이곳에 어린 아가씨가 서 있지 않았소? 그 아가씨를 보지 못했소?”

그 사람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무슨 아가씨? 없어, 없어! 어느 집 아가씬지 몰라도 유괴당한 게 아니겠소? 옥토절에는 유괴사건이 아주 많소. 호위가 없거나 가족과 떨어지면 십중팔구 유괴당하는 거지!”

심구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강적과 맞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 * *

만예호 언저리.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남색 적삼을 입고 옥관을 쓴 소년은 위풍당당한 외모를 지녔고, 멋스러운 자줏빛 옷차림의 소년은 그림처럼 용모가 준수했다. 둘 다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남자였으나, 특히 자주색 옷을 입은 이의 입가에는 우아하며 담담한 웃음기가 걸려 있어 주위 여자들이 수시로 힐끔댔다.

“너, 날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사경행이 물었다. 소명풍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즐거운 명절인데, 친한 벗으로서 당연히 함께 다녀줘야지. 구태여 날 밀어낼 이유가 있어?”

“난 할일 있어.”

“초대받는 건 우연히 만나느니만 못하지. 우연히 만났으니까 같이 다니자. 우리 둘이서 옥토절에 함께 다닌 적 없잖아. 아님,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소명풍은 불만스러웠다. 오늘 소명풍은 소가 사람과 함께 나와 우연히 사경행을 만났다. 이후 고집을 부려 이렇듯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소가와 사가는 우호적인 관계이기에 소욱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소욱은 그들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너 오늘 또 혼자 외출해서 네 아버지께서 화내시지 않으셨어?”

소명풍이 물었다. 옥토절에는 모두 가족끼리 나와서 구경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사경행은 일언반구도 없이 홀로 나온 모양이니 사정은 필시 분노했을 것이다. 전생에 원한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이렇듯 냉담한 아들을 두기도 힘들다고 한탄할 터였다.

“아들들이 함께해줘서 내가 없어도 즐거울 거야. 나도 그렇게 한가하지 않고.”

사경행은 무심하게 말했다.

“대범하네.”

소명풍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젓다가 앞에서 어떤 일행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멍해졌다.

“심 장군 아니야?”

심신이 급히 걸어오고 그 뒤를 심구와 나설안이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 뒤로 한 무리의 호위가 따랐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었고 안색이 어두웠다. 소명풍은 턱을 쓰다듬었다.

“심가에 무슨 말썽이 생겼나 보네. 어째서 모두 저런 표정일까?”

기쁨이 넘쳐나는 군중 사이에서 심가 사람의 심각한 표정은 매우 눈에 띄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소욱도 그들을 발견하고 멈춰 서 말을 걸었다. 사경행과 소명풍은 멀찍이 서 있었지만 무공을 익혔기에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심 장군, 어디를 가십니까?”

“하하, 아내가 갑자기 몸이 좋지 못해 먼저 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즐겁게 구경하십시오.”

심신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심가와 소가는 정견(政見)이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 심신이 이렇게 대놓고 대화하기 싫다는 모습을 보이니 소욱은 불편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참견을 하기 싫었다.

“심 장군이 이렇게 급하다니. 큰일이 생긴 듯한걸? 심 부인의 몸이 불편해도 이렇게 많은 호위를 데려갈 필요는 없잖아.”

소명풍이 말했다. 사경행의 시선이 그 호위 무리를 스쳤다.

“심묘가 없어.”

“아?”

소명풍은 당황했다.

“심묘가 없어.”

사경행은 심가 대열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심묘와 이방, 삼방의 관계로 볼 때 심묘가 자신의 모친을 두고 양방과 함께 등을 감상할 리 없었다. 그런데 대열 안에는 심묘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심묘도 오늘 분명 구경을 나왔을 것이다. 설령 심묘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큰 명절에 그녀를 혼자 부에 두지 않을 터였다.

그때,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심묘 누나가 안 보여!”

소명랑이 언제인지 소욱 옆에서 미끄러져 나와 소명풍의 곁으로 달려왔다. 그는 소명풍의 옷깃을 잡고 낭랑한 목소리로 심묘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번 더 외쳤다.

“나 방금 몰래 저들을 쫓아갔었는데, 다들 빨리 심묘 누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어.”

소명랑은 작은 찹쌀경단 같아서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면 눈에 띄지 않았다. 담력이 큰 그는 군중 속에서 가족과 떨어진다 해도 자신이 길을 잃고 미아가 될 거라고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과 떨어져서도 잘 돌아다녔다.

“게다가 심묘 누나가 어쩌면 납치당했을 거라고도 했어. 형님, 우리가 누나를 구해주자!”

“보이지 않는다고?”

사경행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멀어진 심가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알려져선 안 돼. 나 먼저 간다.”

그는 떠나기 전 고개를 숙여 소명랑에게 사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심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떠들고 다니면 난 널 유괴범에게 팔아 버리겠어.”

* * *

매년 옥토절에는 무수한 아이가 납치당했다. 남아면 후미지고 으슥한 곳으로 팔려가 아이를 못 낳는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 여아는 더 처참했다. 얼굴이 곱지 못하면 인신매매 업자를 몇 번 거쳐 대부호의 하급 여종으로 팔렸고 예쁘면 극단이나 청루에 팔렸다. 아니면 아예 훈련을 받아 즐거움을 제공하는 노리개가 되었다. 부잣집 아이도 얼마든지 납치당했다. 유괴범은 부잣집이든 일반 백성이든 닥치는 대로 납치했다.

계우서가 벌떡 일어나 걱정을 드러냈다.

“심묘가 납치당했다고? 심묘는 예쁘게 생긴 데다가 분위기가 출중하니 유괴범 손에 떨어지면 반드시 팔려갈 거야. 난 작약 소저를 좋아하지만 심묘가 그런 불쌍한 신세가 되길 원친 않는데. 형, 우리 심묘를 구하러 갈까?”

고양은 계우서의 말에 코웃음 쳤다.

“글쎄? 심 소저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데, 설마 납치를 당하겠어? 유괴범은 혼자 있는 아가씨나 길 잃은 애한테나 손을 쓰지. 심신과 심구가 심묘와 붙어 다녔으니 유괴범도 바보가 아닌 이상 굳이 심묘를 고르지 않았을 걸세. 그렇다고 심묘가 절세미인인 것도 아닌데. 근본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아.”

고양의 말이 맞았다. 유괴범은 모두 부주의한 틈을 타서 납치했다. 관리 집안 아가씨를 유괴하여 팔아먹으려고 해도 일단 그 아가씨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를 기다려야 했다. 소식통에게 들으니 당시 심묘는 만예호 언저리에 있었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니 유괴범이 손을 쓰기는 쉬우나 발견됐을 때 도망치기가 힘들 것이었다. 대상이 절세미인이라면 위험을 무릅써도 수지맞는 장사이겠으나, 심묘는 생김새나 분위기는 괜찮아도 이성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심신과 심구가 근처에 있었다. 자고로 악당들은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한 법이니 많고 많은 아가씨 중에 하필 대장군 심신의 여식을 건드릴 리 없었다. 돈벌이가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유괴범은 없으니까.

계우서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유괴된 게 아니구나? 그럼 누구지? 분명 심묘를 노린 건데, 예친왕부의 잔당일까?”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친왕 일에 심묘가 관련 있는 것은 모를 텐데. 혹시 심가 사람인가? 듣자니 심가는 가족끼리 화목하지 않다던데, 이방이나 삼방은 아닐까?”

옆에서 줄곧 침묵하며 앉아 있던 사경행이 일어났다.

“‘그들’이야.”

고양은 단번에 얼굴을 굳히고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들? 그들이 이미 발견한 건가?”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야. 그들이 손쓰길 기다렸는데 기미가 없었어. 지금 깨달았는데 그들은 밀실 일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그날 심묘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까지를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의문이긴 한데. 아무튼 우리 신분을 심묘의 입으로 알아낼 속셈일 거야.”

계우서는 머리가 아팠다.

“그들이 온 거라고? 망했네. 그들은 수완이 보통이 아니니 제아무리 심 소저라도 버티지 못할 거야.”

“묵우군 암부 사람을 보내서 만예호 주위를 찾게 해. 사람들 눈이 많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사경행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의 얼굴 위 무심한 표정은 이미 사라졌다. 그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한기를 뿜고 있었다. 고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묵우군을 출동시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닐세. 지금 정경성 안에서 자넬 주시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위를 놀라게 하면 말썽이 커질 걸세. 그들에게 성문을 지키게 하고 내일 너희 부 사람에게 성안을 수사하게 하면 찾아낼 수 있을 걸세. 지금 쓸데없이 상대의 경계를 사서는 안 되네.”

계우서는 그 말에 펄쩍 뛰었다.

“내일까지 기다리자고? 내일이면 이미 심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계우서는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 성미가 급했다. 게다가 그는 심묘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정치적으로 잔인하고 무정한 고양과 달리 계우서는 여전히 소년의 천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심묘 생각인가? 자칫하면 우리 신분이 모두 폭로될 거라고!”

고양은 분노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암부의 사람을 보내. 난 두 번 말하기 싫어.”

사경행이 차갑게 말했다. 고양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경행! 계집 하나 때문에 중요한 계획을 망칠 건가? 자네가 한 말을 잊지 말게.”

“고양, 말조심해.”

사경행은 미간을 찡그리며 사납게 경고했다. 새까만 눈빛은 정경성의 겨울밤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그가 내뿜은 세찬 노기에 고양은 몸이 떨려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계우서가 얼른 중재했다.

“오늘 일은 워낙 갑작스러워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어. 어쩌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르니 먼저 어찌할지 생각해보자.”

사경행이 잠시 침묵한 후 말했다.

“누굴 위한 게 아니야. 내 구역에서 건방을 떨다니 거슬린다고. 호기롭게 왔을 테니 오늘밤 그들에게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는 건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지.”

* * *

만예호 연안.

여전히 인파가 넘쳤다. 그들의 환호성과 웃고 떠드는 소리에 다른 소리는 전부 파묻혔다. 관리 집안 딸이 없어진 일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은 것 같았다. 심부 사람이 소문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소문이 나더라도 사람들은 눈앞의 성황을 감상하기에 바빠 관심을 가지지 않을 터였다.

옥토선자가 이미 춤을 끝냈는데도 남자들은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질투심에 휩싸여 그녀가 여우 요괴 같다며 욕했다. 대단히 큰 옥토 등은 눈같이 하얀 천으로 만들었다. 겉에는 옥토끼가 즐겁게 뛰어다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초가 들어 있어 밝았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하며 호수 위를 느릿느릿 떠다녔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직접 만든 화등을 들고 호수로 달려갔다. 그들은 내년 소원을 적은 작은 종이를 말아 화등 안에 넣고 물 위에 띄웠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만예호는 화등 불로 찬란하게 빛났다. 사람들은 모두 탄성을 지르며 만예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옥토절에는 매년 큰 행사를 치렀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는 처음이었다.

평소 귀족들은 호수 중심에 화려하게 치장한 놀잇배를 띄워 술을 마시며 즐겼다. 오늘도 몇 척의 놀잇배가 있었지만 빽빽한 화등 때문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등불을 환히 켜지 않은 놀잇배 하나가 천천히 하류로 향했다. 멀리서 보면 그 놀잇배는 화등에 둘러싸인 듯했다. 배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 호수 중앙에서 멀어졌다. 하류 쪽에는 사람이 적었다.

심묘는 그 배의 가장 안쪽 방에 갇혀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은 작은 등불 하나만 켜져 있어 어두웠다. 심묘의 입은 천으로 틀어막혀 있었고, 손과 발은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겁먹은 기색 없이 차가운 눈으로 앞의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가 난생처음 보는 베옷을 입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사람이 잠시 뱃머리로 나가 주변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는 키 작은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됐어, 이곳은 사람이 없어.”

키 작은 사람이 웃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심묘의 입안 천을 뺀 후 말했다.

“심 소저, 이곳에는 사람이 없다. 소리치지 말도록. 소리치면 우리는 널 죽이고 도망칠 능력이 있어. 게다가 우리 말고도 사람이 더 있지.”

심묘는 말없이 시선만 움직였다. 이 유괴범들은 다른 사람들의 예측과 반대로 행동했다. 보란 듯이 많은 사람들 앞에 놀잇배를 띄워 심묘를 그곳에 가두다니. 누구도 풍류를 즐기는 배에 유괴범이 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심신 일행은 호숫가에서만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정작 그녀는 만예호 위에 있었다.

심묘가 아이를 구하러 간 심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막은 채 끌고 갔다. 두 사람의 동작은 굉장히 민첩해 심묘가 이렇다 할 저항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꽁꽁 묶어 배로 던졌다.

심묘가 소리를 지르지 않자 키 작은 사람은 만족스러워했다. 키 크고 마른 사람이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아주 침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 소저, 우리는 솔직한 사람들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우리가 당신을 찾은 건 한 가지 일에 대해 물으려는 거다.”

마른 사람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발산했다. 그 때문에 보통의 강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예친왕부의 밀실, 그날 이미 가보았지?”

심묘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납치되고 나서 그녀는 온갖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숙부들이나 심원의 사람이거나 예친왕의 옛 부하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심지어 부수의도 의심해보았다. 하지만 밀실 때문에 자신을 납치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밀실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사경행과 고양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부수의가 몇 년 앞당겨 알게 된 건가 싶었다. 상대방이 이미 알고 왔으니 심묘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네, 그날 오라버니가 예친왕부로 일을 처리하러 갔습니다. 전 다실에서 기다리다가 우연히 그 밀실을 발견했어요. 호기심에 가봤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키 작은 사람이 말했다.

“그럼 반드시 밀실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을 거야. 그 사람이 누구지?”

심묘가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 이들은 밀실의 존재나 그 안의 물건을 노리는 게 아니었다. 거길 찾아온 사람이 목표였다. 그날 밀실에는 사경행과 고양이 있었고 만약 자신이 그 두 사람을 얘기한다면 두 사람이 숨긴 비밀도 폭로될 것이었다.

심묘는 경계하는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한마디 내뱉었다.

“다른 사람?”

마른 사람이 흉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심 소저, 우리 앞에서 교활한 계략을 세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날 네가 밀실에 들어간 건 우연이라고 쳐도 밀실 안 물건은 이미 누군가 가져갔다. 밀실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지? 말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심묘는 그를 주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밀실의 일을 조사했으나 누가 물건을 가져갔는지 그 정체는 몰랐다. 그렇다면 이들은 사경행과 고양을 찾고 있는 셈이었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밀실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물건은 난 보지도 못했구요. 내가 들어가기 전 당신들이 말한 그 사람은 이미 떠난 것 같네요.”

마른 사람은 그녀를 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불가능해! 말하지 않는다면 쓴맛을 봐야…….”

키 작은 사람의 눈이 빛났다. 그는 한 손으로 심묘의 얼굴을 잡으며 음란하고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피부가 부드럽구나. 날 시중들 테냐, 아니면 생각을 하겠느냐?”

그는 심묘의 단추를 풀었다.

“당신이 날 건드리면 난 혀를 깨물고 자결할 테니 무엇도 알아낼 수 없을 거예요. 순결을 잃고 사그라든 재와 같이 절망하기 전에 혀를 깨물 겁니다. 그렇게 되어도 내 말을 유도할 기회가 있을 것 같나요?”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키 작은 사람은 손을 멈추고 마른 사람을 한 번 보았다. 마른 사람이 심묘를 주시하며 물었다.

“누군지 아는 거야?”

심묘는 살짝 웃었다.

“어쩌면 생각해낼지도.”

키 작은 사람은 눈이 풀렸고, 마른 사람의 눈빛은 침울했다. 심묘가 너무 침착하고 냉정해서 당황한 듯싶었다. 심묘가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자신들을 위협하는 게 의외라고 느꼈을 터였다. 심묘의 위세 등등한 모습은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규방 소녀가 아닌 거리 위 무뢰한 같았다. 심묘가 밀실 안 사람이 누군지 정말 안다면 그녀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건드리면 평생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심묘의 시선이 더욱 차가워졌다. 사람은 모두 약점이 있다. 두 사람의 절박한 낌새를 보아하니 그들은 밀실 안 사람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하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녀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들이 원하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연약한 관가 소저라면 울며불며 진상을 털어놓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전생에 궁에서 모진 고통을 모두 겪은 황후였다.

“무엇을 원하는 거지?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하면 모두 들어주겠다.”

키 작은 사람은 심묘에게서 손을 떼고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를 달래는 듯 부드러운 말투였다. 심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지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른 사람이 냉소했다.

“우리 두 사람이 누군지 알아서 네게 무슨 이득이 있지?”

“내가 그 사람이 누군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심묘가 미소 지으며 응수했다.

“너,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거지?”

심묘는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키 작은 사람이 냅다 심묘의 뺨을 후려쳤다.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괘씸한 것,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겠다고 하다니! 너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 거다. 심신의 병사가 유능하니 우리도 나가지 못할 터. 먼저 널 데려간 다음…….”

그의 웃는 얼굴이 비틀렸다.

“네가 사실을 말하게 하겠어!”

그가 몸을 아래로 숙여 구역질 나는 손으로 심묘의 뺨을 매섭게 쓰다듬었다.

“얘야, 내가 지금 수고를 덜고자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살아 돌아가고 싶다면 내 성질을 건드리지 말아라!”

심묘가 갑자기 손에 든 칼로 남자의 얼굴을 찔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키 작은 사람은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얼굴이 깊게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심묘의 손발을 묶은 끈은 언제인지 이미 풀려 있었다. 그녀는 외출하기 전 늘 소매 안에 비수 하나를 숨기는 습관이 있었고, 지금 그 비수를 꺼낸 것이었다. 그녀는 방 밖으로 달려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살려주세요!”

그러나 심묘는 곧 잡혀 끌려가 바닥에 던져졌다. 내동댕이쳐지면서 등이 나무 탁자에 세게 부딪혔다. 그녀는 아픔에 숨을 헉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밖으로 다시 달렸다. 마른 사람은 냉소하며 한 발로 그녀의 무릎을 걷어찼다. 넘어져 바닥에 구른 심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을 붙잡고 일어나 비수로 그의 눈을 찌르려 했다. 마른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비수를 피했고 독한 여자라 욕하며 비수를 빼앗았다. 심묘는 안간힘을 써서 선실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도망치려고?”

마른 사람은 냉소했다. 그는 비수를 심묘가 도망친 곳으로 던졌다. 비수는 심묘의 종아리를 스쳤다. 새빨간 핏자국이 호수 위로 퍼졌다. 심묘는 헤엄칠 줄 알았지만 섣달 밤의 호수는 얼음굴처럼 차디차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간신히 몇번 더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으나 몸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심묘가 밀실 안 사람의 행방을 쥔 유일한 열쇠이니 마른 사람은 물로 뛰어내려 심묘를 건져내려 했다. 그때, 하늘에서 폭죽 소리가 들렸다. 서쪽이 밝아지면서 불꽃이 보였다.

“상황이 변했다! 철수!”

키 작은 사람은 얼굴 위 핏자국을 닦으며 외쳤다.

“먼저 저 계집을 데리고!”

마른 사람이 욕설을 내뱉으며 물속으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선체가 갑자기 흔들렸다. 뱃머리에 흑색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두 남자의 어깨에는 황금 독수리가 수놓여 있었다. 키 작은 사람은 그 문장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묵우군! 이곳에 어째서 묵우군이?”

심묘를 납치한 두 사람이 전투태세에 들어가기도 전에 은색 칼날이 그들의 몸을 통과했다. 두 사람은 놀란 표정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심묘는 팔다리의 감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었다. 키 작은 사람과 마른 사람의 말로 미루어 보면 배후에 다른 큰 세력이 있는 것 같았다. 심묘는 이 일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일임을 직감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게 되면 강한 뒷배가 힘을 쓸 테니 심가는 영원히 흉수를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걱정이 들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사의 각오를 다지고 뛰어내렸는데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줄이야.

두 사내는 그녀를 구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심묘의 머리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귓가에는 윙윙 알 수 없는 소리만 들렸다. 물결 따라 흘러가는 반짝이는 화등이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곳에서 죽는 건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때 먼 곳에서 사람이 헤엄쳐오는 게 보였다. 건장한 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화등이 떠다니는 호수의 빛을 온몸에 두르고 그는 그녀 쪽으로 헤엄쳐왔다. 의식을 잃은 심묘의 허리를 껴안고 그는 수면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지독하게 추운 날 혼자 헤엄치는 것도 힘든데 그는 한 사람을 데리고도 수월하게 헤엄쳤다. 놀잇배에 도착한 그 사람은 심묘를 위로 던지고 올라왔다.

심묘는 물을 토하고 계속 기침했다. 심묘를 구해준 사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경행이었다.

그녀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선실 안에는 시체가 보였다. 좀 전의 마른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었다. 선실에서 두 명의 흑색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한 사람은 사경행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경행이 손짓하자 두 사람은 시체 두 구를 가지고 떠났다. 떠나기 전 선실 안 핏자국도 깨끗이 치웠다.

심묘는 두 사람이 누군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바보라도 그 두 사람이 사경행의 수하인 걸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니 온몸이 쑤셨다. 차가운 물에서 한참을 버틴 데다가 세게 부딪친 등과 걷어차인 무릎도 아팠다. 가장 아픈 곳은 종아리였다. 심묘는 고개를 숙여 치맛자락을 보았다. 치마는 물에 젖어 몸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종아리가 무척 쓰라렸으나 핏자국은 치마 위 붉은색 자수와 한데 섞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몰랐다. 마른 사람이 던진 비수에 다친 상처였다.

심묘는 춥고 아파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사경행은 그 모습을 보고는 선실로 걸어가 화로에 불을 붙였고 숯덩이 하나를 안에 집어넣었다. 화로는 금세 따뜻한 온기를 내뿜었다.

사경행은 심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옷을 갈아입을 참인데, 눈뜨고 있을 건가?”

놀잇배에는 난로 말고도 옷가지와 여러 용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심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낯선 사경행의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가벼운 웃음소리가 난 후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됐다.”

심묘가 눈을 뜨자 사경행이 마지막 단추를 끼웠다. 그는 짙은 검은색 비단 장포와 흰여우 털로 만든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냉담하면서도 경건한 느낌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웃는 듯 마는 듯 심묘를 주시했다.

“너도 갈아입을래?”

찬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로로 완전히 말리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터였고 그때까지 기다리다간 감기에 걸릴 게 뻔했다.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인 심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평온히 물었다.

“다른 옷도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사경행이 일어나 나무 탁자 위의 천 가방 속에서 옷을 꺼냈다.

“내 부하가 보내준 옷이다. 지금 상황에서 네게 여자 옷을 찾아줄 수 없어. 갈아입으려면 내 옷을 입어야 할 거야.”

출가 전의 여자가 가족이 아닌 남자의 옷을 입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선정적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악질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황이 정말 그런 것인지 아니면 고의로 자신을 골탕 먹이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렇듯 심묘에게 사경행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마주하는 모든 사람을 ‘심 황후’의 시선으로 마주했다. 심구도 오라비로 대할 방법이 없어 어떤 때에는 자신이 도리어 심구를 보살피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늘 심묘를 얼떨떨하게 했다. 이렇게 희롱당하는 건 황후였을 때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경행 앞에서는 순간순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숙한 소녀가 되곤 했다.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대답했다.

“줘요.”

사경행은 대답이 의외인 듯, 그녀를 한 번 스윽 쳐다보고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내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이곳에 다른 옷은 없다면서요?”

사경행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옷을 던졌다. 심묘는 짜증을 참고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소후야, 뒤돌아주세요.”

사경행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시선은 까탈스럽고 불쾌했지만 지금 심묘는 성질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린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의 난처한 모습은 평소 단정한 자태가 아니었다.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도 여자라고 부끄러워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사경행은 우습다는 듯이 대꾸했다.

“뭐도 없고, 예쁘지도 않으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품위 있게 고개를 돌려 심묘를 보지 않았다. 심묘는 긴장을 풀고 사경행의 옷을 살펴봤다. 푸르스름한 회색 차렵 장포였다. 소매 길이는 적당했고, 옷감과 자수는 모두 일품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옷을 어루만졌다. 이런 바느질은 전생에서도 궁에서만 누릴 수 있었다. 임안후부가 적국만큼 부유하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심묘는 천천히 겉치마를 벗은 후 중의도 벗었다. 축축한 옷을 난로 곁에 말려두고 몸의 물기를 깨끗이 닦은 후 사경행의 옷을 들었다. 사경행의 옷은 입는 법이 복잡해 제대로 입기가 쉽지 않았다. 다친 종아리는 심각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피투성이였다. 허리띠가 상처를 쓸어내리자 심묘의 숨소리가 순간 거칠어졌고, 결국 그녀는 중심을 잃고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사경행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닥에 넘어진 심묘를 부축해 일으켰다. 심묘의 제지는 그보다 느려서 그녀는 사경행의 품에 온전히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입지 못한 옷은 몸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고,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과 훤히 드러난 흰 어깨는 심묘를 한층 청아해 보이게 했다. 여태 침착하던 심묘도 수줍어하며 허둥거렸다. 그때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심묘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어찌 된 거야?”

심묘는 멍했다. 함부로 몸을 만지니 사납게 소리쳐야 했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사경행의 물음에 성실히 답했다.

“도망칠 때 비수에 다쳤어요.”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품 안을 더듬어 약병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약 발라.”

심묘는 말없이 약을 바르려 했다. 하지만 차가운 호수에서 오래 헤엄친 까닭에 힘이 없어 일어날 수 없었다. 사경행은 그녀를 작은 간이침상까지 부축해 앉혔다. 심묘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어 더 이상 사춘기 아가씨가 아니었기에 이전 와룡사에서 사경행과 함께 있었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사경행의 옷을 걸친 채 눈처럼 하얀 어깨를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서 추운 건지 이 상황이 거북한 건지 어깨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사경행은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따뜻한 물건을 그녀의 머리 위에 놓았다. 사경행의 여우 모피였다. 따뜻한 기운에 심묘가 무의식중에 몸을 싸맸다. 그 순간, 모피 사이로 손바닥 크기의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심묘는 마치 보송보송한 어린 여우처럼 보였다.

사경행은 무언가를 갖고 와 심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올렸다.

“뭘 하려는 거예요?”

심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네 상처, 약을 바르지 않으면 내일 곪을 거야. 내가 이익에만 밝다고 생각 마.”

심묘는 사경행의 말이 밉살스럽다고 생각했다. 단정한 표정으로 이익에만 밝다고 말하다니.

“내가 할게요.”

사경행은 두말하지 않고 일어났다. 그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는 걸 지켜보지.”

심묘가 몸을 숙였다. 약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납치한 두 사람과 다투면서 여기저기 부딪힌 몸이 시큰거렸다. 겨우 약병을 열고 나서도 내용물을 모두 쏟지 않으려고 애를 쓸 정도였다. 한참 고군분투하던 심묘는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사경행에게 쉽게 패배를 인정하기 싫었다. 그녀는 눈처럼 하얀 여우 모피 속에서 사경행을 흘겨보기만 했다.

사경행은 웃고 말았다. 그가 약병을 빼앗아 다시 쪼그리고 앉아, 심묘의 다리를 잡고 무심하게 말했다.

“난 성인군자가 아니야. 네가 날 울컥하게 하면 이 다리는 어떻게 될지 몰라.”

심묘는 침묵을 지켰다. 사경행은 천천히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차가웠다. 아름다운 손이었으나 무공을 연마한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여기저기에 잡혀 있었다. 여린 피부에 거친 굳은살이 닿아 불편했다. 피부도 사경행의 손을 따라 뜨거워지는 듯했다. 피가 굳으면서 상처 위에 달라붙어 있던 옷감이 다리에서 떨어지자, 심묘는 자칫 격통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상처가 깊군.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사경행은 상처를 자세히 살피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이렇게 선의를 베풀 거라 생각 못 했어요.”

그 말 그대로였다. 심묘는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 줄 몰랐다. 오늘 사경행이 심묘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두 사람의 정이 깊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군자는커녕 선량한 사람도 아니다. 심묘는 사경행이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알 수 없었다. 다리 상처를 치료해준 일은 차후에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사경행은 탁자에 올려뒀던 주전자에 호숫물을 가득 채워 난로 위에 놓고 끓였다.

“나는 확실히 선의는 베푸는 사람이 아니지. 그러나 너도 의리를 지켰으니 이번만은 좋은 사람이 되겠어. 모두 심신이 충의가 대단하다고 한입으로 말하는데, 그 딸도 의리를 아는지는 몰랐네. 내 정체를 밝히지 않은 거 고마워.”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심묘는 굳이 그가 오해하고 있다고 해명하지 않았다. 납치당했을 때 바로 사경행의 이름을 말했다면 그 두 사람은 그 즉시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시간을 벌 수 있는 계책이 있는데 써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자신과의 의리 때문에 심묘가 말을 안 해서 빚진 거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불필요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심묘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녀가 조금 전에 밀실 안에 있던 사람이 사경행이라고 납치범들에게 밝혔어도 그의 능력이면 탈 없이 문제를 해결했을 수도 있었다는 걸. 또한,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자기네 동료가 더 있다고 했는데 지금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걸 봐선 이미 누가 처리했다는 것도.

사경행은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는 옷을 찢어 뜨거운 물에 적셨다. 그러고는 심묘의 종아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린 후 젖은 옷으로 상처 주변의 피를 닦았다. 심묘의 다리는 사경행 품 안에 떠받쳐 그의 차가운 옷자락에 닿았다. 냉소적이고 짓궂은 그에게도 따뜻한 마음이 있는지 손은 따뜻하고 섬세했다.

심묘는 이 상황이 거북해서 고개를 돌렸다. 묘한 긴장감에 발가락은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전생에 그녀는 부수의 외에 남자와 이렇게 친밀하게 살을 맞댄 적이 없었다. 부수의 역시 ‘황제’로서의 의무를 하고 있다는 느낌만 줬을 뿐 그에게서 친밀한 남녀 간의 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심묘가 어색함을 떨치고자 화제를 찾았다.

“그들은 누구예요?”

그녀가 말한 ‘그들’은 당연히 그녀를 납치한 일행이었다. 사경행은 말없이 심묘의 종아리의 피를 깨끗이 닦고 가루약을 뿌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싸맸다. 매우 진지한 얼굴에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상처를 싸매는 동작은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듯 자연스러웠다. 배 위의 등불은 밝았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고 만예호의 화등은 비단 같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췄다. 그의 출중한 얼굴에서 짧은 반짝임 속에 부드러움이 보였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경행이 그녀의 다리를 내려놓고 심묘의 몸 옆으로 두 손을 지탱해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가까운 거리에선 보는 사람을 취하게 하고도 남았다. 심묘 역시 웃는 듯 마는 듯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자 호흡을 잊을 정도였으나 그녀답게 침착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사경행 역시 그녀를 조용히 주시하다가 손을 떼고 담담하게 답했다.

“너무 많이 알면 좋을 것 없어.”

“그럼 됐어요. 그냥 날 연루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에요.”

갑자기 당한 부상으로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사경행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본성이 튀어나와 버렸다. 함부로 분풀이하고 제멋대로 말하는 성격. 그녀는 자신의 언동에 순간 정신이 멍했다.

“네가 분별할 줄 알면 널 연루시킬 사람은 없을 거야.”

사경행은 담담히 주변의 옷들을 정리했다. 그는 긴 막대기를 찾아 심묘의 젖은 옷을 걸어 말렸다.

“난 언제 떠날 수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어서 지금 바깥으로 나가면 입방아에 오를 거야. 그럼 내가 누명을 쓸 수 있거든.”

그의 짓궂은 말은 여전히 사람의 성질을 긁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내 결백을 위해 배가 물가에 닿으면 널 데리고 공주부로 갈 거야. 그 후 공주부 사람이 널 집으로 보내줄 거다.”

심묘는 살짝 당황했다.

“공주부?”

“송신 공주가 도와줄 거야.”

사경행이 숯덩이를 가지고 놀며 말했다.

송신 공주는 선황제의 비 출생이었다. 옥청 공주를 향한 총애에는 비할 수 없으나 선황은 송신 공주 역시 깊이 사랑했다. 선황의 자식 중 옥청 공주와 송신 공주는 자매의 정이 깊었다. 성장 후 옥청 공주는 임안후에게 시집을 가고, 송신 공주는 당대 장원랑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원랑은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그 후 송신 공주는 재혼하지 않고 공주부로 돌아와 과부살이를 했다.

옥청 공주와 송신 공주의 우애가 깊으니 송신 공주는 사경행을 도와줄 것이 분명했다. 심묘가 사경행을 한 번 바라보았다. 함부로 장난을 치는 듯해도 그는 실상 멀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심부 사람들을 이곳에 부른다면 미혼 남녀인 심묘와 사경행이 단둘이, 그것도 단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기 때문에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심가와 사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송신 공주가 나서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심묘는 창에 몸을 기대려다가 소리를 듣고 밖을 바라보았다. 알록달록한 불꽃이 정경성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백로와 상강이 말한 것처럼 밤새 계속될 것이었다. 지금 고요한 수면 위에서 불꽃을 감상하는 건 인파가 넘치는 거리에서 구경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저런 걸 보는 게 좋으냐?”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뇨, 좋아하지 않아요.”

심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연회 때마다 황제는 후궁들을 한데 모아놓고 시간을 보냈다. 어화원 안에서는 무수한 폭죽을 터뜨리곤 했는데 심묘가 막 진국에서 돌아오던 날, 부수의는 미 부인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심묘는 곤녕궁 안에서 오직 완유, 부명과 함께 불꽃놀이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녀가 본 가장 차가운 불꽃이었다. 그 후 그녀는 불꽃놀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사그라드는 불꽃이 뭐가 대단하다고요. 보기만 좋지 아무 데도 쓸모없는걸요.”

심묘의 말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으나 눈빛은 슬프고 처량했다. 사경행은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내 그는 곧 일어나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심묘의 곁으로 걸어가 꺼낸 물건을 심묘에게 건네주었다.

“배가 물가에 닿으려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오늘은 옥토절이니 너도 화등을 놔.”

심묘는 화등을 바라보았다. 배에서 놀고 간 사람이 남긴 듯, 여러 개가 평평하게 포개져 있었다. 만예호 수면은 화등으로 가득했고 그 위를 배가 왔다 갔다 하니 마치 은하수를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초를 넣어 화등을 만들었다. 그는 물 위로 화등을 밀어 보냈다. 무심한 손길이었다.

“왜 소원을 쓰지 않나요?”

옥토절 화등 안에는 종이를 넣는데, 그 종이에는 소원을 적어야 했다. 그래야 천지신명이 기도를 들어 내년에 등을 놓는 사람의 일이 이루어지게 돕는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난 신을 믿지 않으니까 쓰지 않아.”

사경행은 나른하게 대답했다. 심묘는 이토록 고집스럽고 오만한 그가 천지신명의 보우를 바라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수긍했다. 그녀는 화등을 두 개 만들었지만, 그녀 역시 소원을 쓰지 않고 초도 넣지 않았다. 그저 화등 가장 위에 있는 꽃송이에 불을 붙여 강으로 밀어 넣었다. 화등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불타올랐고, 호수 위에는 두 덩이의 불이 어색하게 모습을 드러났다.

사경행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건 제사를 지내는 등이잖아. 뭐 하는 거야?”

화등을 태우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낼 때 하는 일이었다. 호수 위에 화등이 별꽃처럼 피어난 지금, 심묘는 죽은 사람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심묘가 불을 붙인 화등은 금세 화염에 휩싸였다가 금세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삶을 반복하다 보니, 어떤 일은 다시 할 수 있으나 어떤 일은 다시 할 방법이 없었다. 전생에서 완유와 부명과 영원히 이별했고, 이번 생에서는 부드럽고 대범한 공주와 신중하고 철든 태자는 만날 수조차 없었다.

“어째서 또 울어?”

심묘가 고개를 들자 사경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뺨이 젖어 있었다. 즐거운 풍경이 도리어 묻어둔 슬픔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울었는데도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심묘는 앞에 놓인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 네 의리를 잊지 않으마. 그러니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도 돼.”

심묘는 그의 이유 모를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굳센 옆모습은 호수에 가득한 화등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그는 창문에 기대 심묘를 바라보았다. 눈빛 속에 복잡한 빛이 스치더니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난 빚지는 거 싫다. 오늘 네가 날 폭로하지 않았으니 나도 널 푸대접하지 않겠다. 적지 않은 말썽을 불러일으킨 것 같은데, 내 쪽에 요청하러 올 일이 있으면 그때 나도 도움을 주지.”

“감사합니다, 소후야.”

사경행이 웃더니 갑자기 심묘를 바라보았다.

“돕는 건 돕는 거고. 너, 날 사랑하면 안 된다.”

그의 말투 속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심묘는 당황스러웠지만 웃으며 대꾸했다.

“소후야, 너무 생각이 많으시네요.”

“그래?”

높은 곳에 있던 사경행은 침상 위에 앉은 심묘를 굽어보았다. 그는 심묘의 머리에서 비녀를 뽑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럼 넌 무엇 때문에 ‘내’가 준 비녀를 한 거지?”

사경행은 ‘내’에 일부러 강세를 두었다.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여종이 고른 거라고 변명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오늘 넌 날 더듬고 만졌지만 네가 몸을 허락한다고 해도 이쪽에서 사양이야.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는걸. 난 아무리 배고파도 찬밥 더운밥을 가릴 줄 알거든.”

그의 웃음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의 가시 돋은 독설은 사실마저 왜곡했다. 전생을 포함해 심묘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정의롭고 위엄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렇게 세 치 혀로 사람을 화나게 하는 무뢰한은 처음이었다.

“전 소후야를 좋아하지 않고,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심묘는 비웃듯 내뱉었다.

“그거 잘됐네.”

사경행은 그녀를 주시했다. 웃음기가 걸쳐진 입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순간, 칠흑 같은 눈에 무심한 경고가 담겼다.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사경행이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그녀 역시 속으로 자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전생과는 다르게 지금 그녀는 악랄하고 독했다. 결코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배는 조용히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또다시 눈이 소복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호수는 희게 빛나는 눈송이와 알록달록 반짝이는 등불로 가득했고, 그 빛이 반사된 하늘은 오색찬란했다. 올해 옥토절은 유난히 특별했다.

사경행은 창가에 기대어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이 지난 후, 그가 고개를 돌리자 심묘는 이미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빨갛게 튼 뺨은 오늘 한바탕 겪은 수난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큰 여우 모피에 폭 둘러싸여 흰 얼굴만 살짝 드러내고 있어 사경행의 말마따나 정말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젖은 머리카락은 난로 덕에 약간 말라 있었다. 그때 긴 머리카락이 눈을 간지럽힌 듯 심묘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사경행은 심묘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는 소매 안쪽을 더듬어 그녀에게서 뺏은 옥 매화 비녀를 꺼내 한 바퀴 빙 돌리더니, 다시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꽂아주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심묘가 달게 자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듯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편히 잠들다니, 정말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잠시 후, 배의 흔들림이 갑자기 멈추었다. 마침내 기슭에 닿은 모양이었다. 사경행이 뱃머리로 걸어가니 기슭에서 흑색 옷을 입은 사람이 몇 명 나타났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전부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지금 바로 부로 돌아가실 겁니까?”

사경행이 고개를 돌려 선실을 한 번 흘깃 보고 분부했다.

“먼저 공주부로 갈 것이다. 철의, 마차를 끌고 오너라.”

사경행은 다시 선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심묘는 겨우 잠에서 깬 듯 살짝 고개를 들었다.

“물가에 닿았어.”

“도착했나요?”

심묘가 단번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창밖을 보더니 밖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다리의 상처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사경행은 곧바로 심묘의 팔을 꽉 붙잡아 여우 모피로 싼 후, 품에 껴안고 걸어 나갔다. 심묘가 깜짝 놀라 사경행의 목을 껴안았다. 얼핏 보니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가만히 있어. 나한테 마음 있다고 의심하기 전에.”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경행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와 등을 끌어안아 떨어지지 않도록 도왔으나 힘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그의 품 안에 기대어 굳세고 단단한 가슴과 힘찬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그녀는 또다시 괜히 불편했다.

배 밖으로 나온 심묘는 흑색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경행이 아가씨를 껴안고 나온 모습을 보고 놀랐으나 그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 그 탓에 모두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경행은 마차로 걸어가 심묘를 태우고 마부에게 분부했다.

“공주부로 간다.”

마차가 떠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중 젊고 키 큰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철의, 주인님은 어째서 여자아이를 껴안고 나온 겁니까? 그 여자아이와 주인님은 무슨 관계죠?”

다른 여인이 걸어 나와 턱을 매만지며 읊조렸다.

“맞아요. 여러 해 주인님을 모셨지만 이렇게 주인님이 가까이한 여인은 보지 못했어. 주인님이 저런 취향이셨구나.”

그녀는 알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때였다. 사랑스럽고 성숙하게 생긴 여자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토를 달았다.

“흥, 누가 그래? 저런 어린 계집아이가 뭐 볼게 있다고?”

“화롱, 네가 주인님을 좋아하는 걸 알지만 질투하면 안 돼.”

앞서 말했던 여자가 웃으며 달랬고, 잠시 후 철의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철의, 최근까지 주인님을 따라 다녔잖아요. 저 아가씨는 누구예요? 어떻게 된 건지 말해주세요.”

“모두 입 다물고 돌아가! 그렇게 한가하면 내일 탑뢰를 지키러 가도록!”

중간에서 잠자코 있던 철의는 드디어 인내심이 바닥난 듯 크게 외쳤다. 사람들은 곧 일사불란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네.”

“방금 그들 시체는 깨끗이 처리했나?”

“먼저 암부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할게.”

“오늘 정말 위험했어.”

모두가 사라진 다음에야 철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공주부.

송신 공주는 이미 여러 해 전 자식이 없는 채로 과부가 되어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같이 온 가족이 함께 떠들썩하게 보내는 명절이면 더욱 고독했다. 문혜제와 오누이긴 했지만 동복(同腹)이 아닌 탓에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게다가 설령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궁중에서 황제와 함께 지내는 것은 혼자 있으니만 못한 법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송신 공주는 매 옥토절에 입궁하지 않고 부 안에서 조용히 있었다.

긴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자 송신 공주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냈다. 그때 갑자기 하인이 달려와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사경행이었다. 송신 공주는 놀라서 급히 옷을 갈아입고 그를 맞이하러 나왔다. 대청으로 나오니 사경행이 이미 의자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용 이모.”

송신 공주의 규방 이름은 옥용으로, 사경행은 옥청 공주와 자매의 정이 깊은 그녀를 용 이모라고 부르곤 했다.

“어째서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게야?”

송신 공주는 뜻밖의 방문에 웬일인가 싶어 놀랐지만 기쁨이 앞섰다. 그녀는 옥청 공주를 예뻐해 그녀의 아들인 사경행도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했다. 옥청 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하며 사정에게 욕을 심하게 퍼붓기도 했다. 이후 혼자가 된 사경행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고, 그 마음을 아는 사경행 역시 송신 공주 앞에서만은 악동처럼 굴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매우 존중해서 명절에 공주부를 방문하곤 했다. 늘 미리 연락 후 방문하던 사경행이 올해는 옥토절에 갑자기 왔으니 송신 공주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용 이모가 보고 싶어 보러 왔습니다. 용 이모는 제가 반갑지 않으십니까?”

사경행이 웃으며 말했다. 출중한 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운치 있게 말하자 전당 안 시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송신 공주가 그의 이마를 살짝 때리고 미소 지었다.

“감히 날 놀리는구나. 요 녀석, 담력이 점점 커져서는.”

“용 이모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오늘 온 것은 이모의 도움을 부탁할 일이 있어서예요.”

송신 공주는 일순 멍해졌지만 바로 자세를 바로 한 다음 정색했다.

“무슨 곤란한 일을 만난 것이니? 처리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나에게 말하렴.”

사경행은 웃으며 해명했다.

“사소한 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 친구가 화등을 구경하다 그만 가족들을 잃어버렸고 사람들에 밀려 호수에 빠졌어요. 다행히 제가 그 애를 구했고 몸에 별 이상은 없으나 용 이모가 걔를 돌려보내 주셨으면 해서요.”

그는 간단하게 말했으나 송신 공주는 말하지 않은 사정을 알아들었다. 명제는 남녀 사이 일에 비교적 개방적이지만 여인의 청렴한 명예에는 아주 민감했다. 자칫 유언비어가 퍼지면 그녀의 앞날이 고달파질 것이었다. 송신 공주가 사경행을 가만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네 친구가 아가씨라고?”

사경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신 공주는 갑자기 앙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 해 동안 네 곁에 아가씨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경행아, 너도 다 컸구나. 그 아가씨는 몇 살이니? 정혼자는 있고?”

사경행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 이모, 제 친구는 아직 어려요. 단지 제가 빚진 게 있어 어쩔 수 없이 돕는 거예요. 용 이모는 절 돕지 않으실 거예요?”

송신 공주는 짐짓 분노한 척했다.

“무슨 말이냐? 내가 널 돕지 않는다니? 됐다, 됐어. 그 아가씨는 지금 어디 있느냐?”

“바깥 마차예요. 용 이모, 기왕 도와주시는 김에 제 친구가 옷도 갈아입도록 해주세요.”

송신 공주는 사경행을 더욱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송신 공주의 눈빛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해명조차 하기 싫다는 웃음이었다. 송신 공주는 시녀에게 심묘를 부축해 부 안 침실로 데려가 휴식을 취하게 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사경행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 내게 대답해주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녀는 어느 가문의 아가씨냐?”

“위무대장군의 적녀, 심묘라고 해요.”

사경행은 마지못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송신 공주는 차를 마시다가 자칫 찻물을 내뿜을 뻔했다. 그녀는 사경행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 머저리? 그녀는 부수의를 짝사랑하지 않느냐?”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했다. 송신 공주는 조심스레 단어를 골라 말했다.

“경행아, 세상에 아가씨는 아주 많단다. 네가 지금은 나이가 어리니…… 더 기다려 보자꾸나.”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같았지만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송신 공주와 사경행이 이야기를 나눌 때 심묘는 송신 공주의 침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시녀들이 오고 가며 자신의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정리해주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생 송신 공주는 심묘를 대할 때 줄곧 냉담했다. 그녀의 재학이 보잘것없어서인지 아니면 혼전에 가출을 해 명예를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심묘가 황후가 되어서도 송신 공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심묘에게 송신 공주는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세심하게 자신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완전히 바뀐 송신 공주의 태도에 심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잠시 후 송신 공주가 들어왔다. 그녀는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심 소저, 몸은 좀 괜찮은가. 주방에 생강차를 내오라 했네. 하필 이런 추운 날 물에 빠지다니. 몸을 따뜻하게 해야 감기에 걸리지 않아.”

심묘 역시 미소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공주마마.”

지금의 온화한 얼굴에서는 전생의 쌀쌀맞던 태도를 조금도 찾을 수 없어서 심묘는 앞의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그 송신 공주인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송신 공주도 심묘를 관찰하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송신 공주는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정경성에 퍼진 유언비어는 그녀의 귀에도 전해졌다. 그녀는 평소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심묘의 바뀐 행보에 대한 새로운 소문을 아직 듣지 못했고 그 탓에 심묘를 여전히 머저리로 알고 있었다.

송신 공주는 심묘가 담이 작고 연약해도 남자에게 구애하는 일에는 얼굴이 두껍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재능과 덕이 없으며 대단히 저속하니 용모와 재학 모두 상등인 사경행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보니 심묘의 용모는 수려했고 눈빛은 물과 같이 맑고 깨끗했다. 나이보다 모습이 고귀하니 소문이 유언비어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오늘밤 만예호는 인파가 붐볐을 텐데, 가족과 헤어져서 놀랐을 것이다. 생강차를 다 마시면 내가 집에 돌려보내 주마.”

송신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떠보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고를 당한 너를 내 조카가 도왔다고?”

‘조카’는 당연히 사경행이었다. 심묘는 송신 공주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사 소후야는 의협의 기개와 풍모가 있으신 분인데, 제가 오늘 폐를 끼쳤습니다.”

심묘는 말하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통을 삼켰다. 사경행이 의협의 기개와 풍모가 있다니, 그의 속은 분명 새까말 터였다. 오늘 심묘는 사경행의 험한 일에 연루된 것인데, 오히려 그녀가 사경행에게 은정을 입은 듯 감사를 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송신 공주는 심묘가 사경행과 관계없는 척 거리를 두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웠다. 만일 심묘의 욕망이 끝이 없어 사경행과 특별한 관계인 양 강조했다면 송신 공주는 두말하지 않고 심묘를 경시했을 것이다. 소년과 소녀는 사랑을 이루고 싶겠지만 예법이 지극한 황실 사람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은 짓일 뿐.

송신 공주는 친근하게 웃었다.

“무슨 폐를 끼쳤다고. 경행, 그 아이가 다 말했단다. 넌 경행의 친구니 친구 사이에 예의를 차릴 필요 없다. 경행은 내 조카다. 둘 사이에 우정이 있다면 나를 네 이모로 여겨도 된단다.”

차를 마시던 심묘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송신 공주를 이모처럼 여기라니. 전생에 그녀가 부수의와 혼인해 송신 공주가 정말 시고모가 되었을 때 심묘는 송신 공주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송신 공주는 차갑게 말했다.

“됐다, 나에게 너 같은 조카며느리는 없느니라.”

사람을 앞에 두고 모욕을 서슴지 않던 송신 공주였는데, “날 네 이모로 여겨도 된단다.”라니, 심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얼빠진 심묘를 보고 송신 공주는 더욱 심묘가 마음에 들었다. 권문세가 아가씨에게 별다른 꿍꿍이가 없는 듯하니 드문 경우였다. 흡족한 그녀는 심묘의 손을 끌어 잡았다.

“나는 아이가 없으니 네가 날 이모로 여기고 이곳에 놀러 와도 무방하다. 이것을 내가 너에게 주는 첫인사 선물로 하자.”

송신 공주는 팔찌를 풀어 심묘에게 채워줬다.

“너무 귀중한 것이라 받을 수 없습니다.”

심묘는 깜짝 놀라 정중히 거절했다. 송신 공주의 팔찌는 모두 다섯 개의 금고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팔찌는 무려 송신 공주의 생모였던 선황제의 비가 직접 마련해준 혼수로, 송신 공주가 출가할 때 받은 것이었다. 심묘는 이 팔찌의 진귀함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네가 착용하거라. 대단치 않은 선물일 뿐이다. 금은보화는 너희 심부에도 많을 테지만 이것을 싫어하지 말거라.”

송신 공주는 웃으며 말했다.

“선황비마마의 팔찌를 제가 어찌 감히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너무 귀중한 물건이라…….”

송신 공주가 멍해졌다.

“네가 어떻게 이게 선황비마마의 팔찌인 걸 아느냐?”

심묘는 당황했다. 그녀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심묘는 황후였으니 당연히 궁중 사람들의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일개 신하의 딸일 뿐, 황가의 사적인 일을 알 리 없는 위치였다. 송신 공주의 의심하는 눈빛을 보고 심묘가 기지를 발휘해 웃으며 말했다.

“소후야께 들은 적 있습니다. 사 소후야께서 공주마마와 사이가 좋으신지 늘 공주마마를 언급하십니다.”

송신 공주의 안색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랬구나. 나는 경행을 아들이라 여긴다. 다행히 경행도 내게 좋은 마음을 지녔어.”

그러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가 심묘를 보는 시선이 또 달라졌다.

“그렇다고는 하나, 경행이 이런 일까지 너에게 말하다니…….”

심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경행이 정말 널 ‘친구’로 여기는 모양이구나. 경행, 그 아이는 보기에 장난이 심하지만 좋은 아이야. 더욱이 경행을 여러 해 보았지만, 어느 댁 아가씨와 이렇게 친분을 쌓는 것을 본 적 없단다.”

송신 공주는 기쁘고 안심한다는 듯 심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네가 처음이야.”

송신 공주는 정말 사경행의 친모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경행이 심묘를 지켜보는 것은 애정이 아닌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사경행같이 똑똑한 사람과 왕래하니 정말 한 걸음을 나아가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그때 시녀가 뜨거운 생강차를 가져왔다. 송신 공주는 심묘가 생강차를 마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송신 공주는 심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심묘가 소문 속 머저리와는 달리 아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이 많고 식견도 넓음을 알아챘다. 마음속 기백과 도량이 넓어서 간단한 잡담에도 융통성이 있으니 규중 소녀가 어떻게 이런 넓은 안목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한 일이 떠오른 송신 공주는 걱정스러웠다. 부수의도 조카지만 그녀는 부수의보다 사경행을 더욱 아꼈기 때문이었다. 송신 공주는 이렇게 우수한 아가씨를 사경행이 놓치길 바라지 않아 심묘 앞에서 조금 과할 정도로 사경행을 계속 칭찬했다.

송신 공주의 성격은 평소 냉담하고 완고해서 문혜제를 마주해도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 오늘 낯선 아가씨와 즐겁게 이야기하니 공주부 하인들은 모두 놀라 턱이 빠질 뻔했다. 그러나 전생의 심묘는 부수의 곁 모든 친척과 친해지길 바라 송신 공주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보았으니, 지금 와서는 비위 맞추기가 쉬웠다. 전생에는 효과가 미미했는데 사경행과의 관계가 더해진 이유로 송신 공주의 마음에 수월하게 들어갔다. 송신 공주와 이토록 쉽게 친분을 쌓을 수 있음을 알았다면 전생에서도 사경행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을 터다.

향이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야 아직 흥이 식지 않은 송신 공주가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부로 돌아가지 않으면 심 장군과 심 부인이 애태울 게야. 마차를 준비했으니, 이제 널 데려다주마.”

심묘가 송신 공주를 따라 나와 본 광경은 놀라웠다. 송신 공주의 마차는 화려했고, 그 뒤로 칼을 찬 호위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송신 공주는 빙긋 미소 지었다.

“오늘 길 위의 사람이 많으니 많은 사람이 지켜야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 게다.”

송신 공주의 호의를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앞으로 송신 공주의 위엄을 빌어 이방과 삼방을 혼내주기도 더 수월할 것이었다. 심묘는 흔쾌히 송신 공주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불꽃놀이가 밤새 그칠 줄 모르니 정경성 거리의 인파 역시 줄지 않았다. 그사이로 위세를 자랑하듯 지나가는 마차와 호위 무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거리 모퉁이 성벽 위에는 여우 모피를 걸친 사경행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곁을 따르는 철의가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께서 이리 많은 호위를 파견해 심 소저가 부로 돌아가는 길을 보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용 이모의 비위를 맞추기는 쉽지 않은데. 심가 소저의 능력이 대단하군.”

사경행은 흥미진진한 듯했다.

“오늘 잡은 포로는 어떠냐?”

“모두 탑뢰에 가뒀는데, 그중 세 명은 독약을 먹고 자진했으며 남은 세 명은 죽으면 죽었지 말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온몸의 뼈를 부숴.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 내가 따로 가르칠 필욘 없겠지.”

철의는 주저하다 말했다.

“네. 성 침입자는…….”

“찾아내. 용서할 수 없지.”

* * *

정경성은 여전히 늦은 줄도 모르고 웃고 떠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심부에서만은 그 즐거움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심부 대청에 모든 사람이 모여 경건하게 서 있었다. 가장 중앙에 있는 심신 부부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고, 심구 역시 온 얼굴이 근심으로 물들었다.

저녁 내내 이 잡듯 만예호 주변을 수색해도 심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심신 부부도 바보가 아니니 심묘가 유괴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심가의 적녀 심묘의 납치를 강행할 유괴범은 없기 때문이었다. 심신 부부는 예친왕부의 일은 모르지만 심구는 예친왕부 멸문과 심묘가 연관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예친왕부 잔당이 주인을 위해 복수에 나선 것이라면 심묘가 그들 손에 떨어졌을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심신은 심가군에게 비밀리에 성문을 지키라 분부했다. 하지만 정경성 집집을 돌아다녀도 심묘는 찾지 못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심신 일가는 그야말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보다 못한 진약추가 부드럽게 달랬다.

“아주버니, 형님, 지금은 방법이 없는 듯합니다. 차라리…… 관아에 알립시다. 관아에 알리면 경조윤이 나설 테니 곧 좋은 수가 생길 겁니다. 지금 우리끼리 이렇게 수색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심만도 맞장구쳤다.

“그래요, 형님. 지금 오래 끌수록 심묘에게 불리합니다. 심가군이 밖을 돌아다니는 걸 보고 사람들이 괜한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심모는 진약추 뒤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입가가 올라간 것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꼴좋다, 심모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심묘의 실종은 오늘 들은 일 중 가장 기쁜 일이었다. 심모는 심묘가 심청처럼 순결을 잃어 돌아오길 바랐다. 그러면 심가의 적녀 중 그녀가 유일한 대세가 되기 때문이었다. 심신 부부가 병권을 손에 쥐고 심구가 보살핀다고 해도 무슨 소용인가. 심묘는 명예를 잃고 한평생 고개를 들지 못할 텐데.

나설안은 아름다운 눈썹을 치켜세우고 진약추를 노려보았다.

“안 돼! 관아로 가면 교교의 명예는 완전히 실추될 거야!”

심신 부부는 오늘 심묘의 실종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심가 사람은 모두 세상 물정에 훤했기에 종이로 불을 쌀 수 없듯 심묘가 보이지 않는 일은 조만간 소문이 날 것을 알았다. 얼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니 일단 수하에게 계속 찾으라 하고 심신과 심구는 먼저 부로 돌아온 것이었다.

진약추가 진실한 척 표정을 만들었다.

“형님. 교교의 명성이 중요합니까? 생명이 중요합니까? 딸의 명예를 생각하다 생명을 잃게 하면 형님은 장래 후회할 겁니다.”

“진약추, 누굴 저주하는 거야!”

나설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 다른 사람이 심묘에게 나쁜 말을 하도록 둘 나설안이 아니었다. 줄곧 침묵하던 심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눈에 핏발이 선 노부인은 나설안을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뭐가 어쨌다고 소리를 지르느냐! 셋째 며느리의 말이 틀렸느냐? 시간을 오래 끌면 심묘의 목숨도 없을 텐데, 그때 가서 무슨 명예를 논할 것이냐!”

노부인의 말은 심묘를 위하는 것 같으나 어쩐지 다른 속셈이 있는 듯도 해 나설안은 불편했다. 그녀가 반박하려 할 때 심원이 나섰다.

“맞아요. 심가군이 이렇게 곳곳을 수색하며 사람을 찾으니 관아에 보고하지 않아도 어차피 내일이면 알려질 겁니다.”

심원은 심묘를 눈엣가시로 여겨 빨리 제거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혔다. 그녀에게 손을 쓰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재앙을 당하니 손 쓰지 않고서도 코를 푼 셈이었다. 심귀는 심원보다 더욱 기뻤으나 애석해하는 얼굴을 가장했다.

“에효, 심묘가 어째서 이런 일을 당한 건지. 형님, 무슨 원수라도 지셨습니까?”

사실 심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심신이었다. 공로가 탁월한 심신은 조정에서 심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심귀는 일부러 심신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격인 말을 골랐다. 만일 심묘가 심신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라면 심신은 일생의 가책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 이낭은 심동릉을 데리고 심귀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첩이라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에 낄 자격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며 몰래 심동릉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유괴당한 게 심동릉이 아닌 데 안도하고 있었다. 심동릉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없었다.

“지금 관아에 심묘의 상황을 알려주거라.”

노부인의 눈에 광채가 스쳤다. 그녀는 노장군 본처가 낳은 아들 때문에 자기 아들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게 가장 싫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그 여식 심묘가 변변찮아 괜찮았지만, 언제부터인지 심묘는 심청, 심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서고 있었다.

게다가 원래 같으면 1년에 한 번 왔다가 곧 떠나는 심신 부부와 심구가 이번에는 부 안에서 활개 치고 다니기까지 하니 노부인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심묘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하자 그녀는 남몰래 기뻐했다. 심신이 부로 돌아오고 나서 들은 소식 중 가장 기쁜 것이었다. 그녀는 한시바삐 관아에 알려 모든 사람이 심묘가 유괴당한 것을 알길 간절히 바랐다. 물론 심묘가 순결을 잃어 심신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된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심신과 나설안은 말이 없었다. 심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혈기왕성한 소년이라고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표면상 구구절절 심묘를 위한다지만 눈이 유독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심묘의 불행을 기뻐하며 해를 가하려는 기색이 분명했다. 1년 사이 심묘가 그렇게 크게 변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다움을 잃어버리고 궁리가 깊은 성숙한 아가씨가 된 건 이런 독사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심묘가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어떻게 핍박을 받았는지 이렇게 뚜렷하게 인식했던 적은 없었다.

나설안과 심신은 서로 바라보았다. 시선은 흉악했다. 사당에 불난 것은 원인을 찾지 못해 오해할 수 있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은 분명했다. 나설안은 분노했고 심신은 실망했다. 심신 부부는 평소 노부인은 물론 이방, 삼방 모두를 진실하게 대하고 존중하며 도왔다. 하지만 그들이 심묘에게 사고가 나자 몰래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신은 기억 속 가족의 화기애애하고 화목했던 모습이 우스워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심모는 짐짓 크게 상심한 척 눈물까지 흘렸다.

“그들이 심묘를 어찌할까요? 심묘는 예뻐요. 듣자니 예쁜 아가씨는 유괴범이 아주 먼 곳으로 팔아버린다고…….”

조용히 서 있는 심동릉의 눈에 잠시 비웃음이 스쳤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형님, 관아에 알릴 겁니까?”

심만이 재촉하듯 다시 한번 물으며 대방과 이방, 삼방이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설 때였다. 갑자기 바깥에서 남종이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며 뛰어왔다.

“주인어른, 심묘 아가씨께서 돌아왔습니다! 아가씨께서 공주부 사람과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심묘가 돌아왔다는 소리에 놀랐다. 심신 부부는 진정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공주부라는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황한 심만이 물었다.

“어느 공주부?”

흥분한 듯한 남종이 밭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송신 공주마마께서 많은 사람을 보내 심묘 아가씨를 부로 호송해 주셨습니다. 호위가 지금 부 입구에 서 있습니다!”

진약추는 걸음을 멈췄고, 단번에 입술을 깨물었다. 송신 공주는 조정의 일과 관련이 없어 남자들에겐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경성 귀족 여자들에게는 다른 존재였다. 궁중 여자들은 모두 송신 공주의 체면을 세워줬다. 게다가 평소 송신 공주는 엄격하고 고루하여 친해지기는 아주 어려웠다. 수많은 부인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다가 손해를 봤다. 가장 완고한 공주가 직접 심묘를 이렇게 화려하게 돌려보내다니 진약추는 질투로 미칠 것 같았다.

심신과 나설안은 두말하지 않고 부 입구로 걸어갔다. 사람들도 뒤따랐다. 심부 입구에는 한 무리의 백성이 심부가 술책을 부린 줄 알고 즐겁게 구경하고 있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멍해졌다. 심묘를 데려온 호위는 한둘이 아니었다. 따라온 하인이 심묘를 부축해 내려줬다. 나설안은 얼른 날 듯이 뛰어가 심묘를 맞이했다.

“교교!”

나설안은 심묘가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그녀는 심묘의 안색이 평소와 같은 걸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묘를 부축해준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공주마마께서 만예호로 구경을 가셨을 때 공교롭게도 길 잃은 심묘 아가씨를 만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마차와 부딪히셔서 공주부에 모시고 가 안정을 취하게 해드렸습니다. 공주께서 심 장군과 심 부인이 걱정하게 만드셨다며 제게 대신 사과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거리낌 없이 심묘가 어째서 송신 공주와 함께 있었는지 설명했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송신 공주의 말을 전하는데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호위가 따라왔고 구경하는 사람도 주변을 가득 메웠으니 누군가 나쁜 유언비어를 퍼트리려고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터였다. 심묘의 결백이 완전히 입증된 셈이었다.

노부인은 분노해 안색이 검푸르러졌다. 심묘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하길 기다렸는데 오히려 송신 공주라는 거물을 등에 업고 나타나다니. 노부인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 송신 공주를 원망했다.

“별말씀을. 공주마마께서 제 딸을 구해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신이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시녀는 얼른 몸을 숙여 피하고 미소 지었다.

“소인은 감히 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배웅을 마쳤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또 무언가 생각난 듯 심묘의 곁으로 걸어갔다.

“공주마마께서 오늘은 경황이 없었으나 아가씨가 이후 시간이 날 때 공주부에 놀러 오시면 공주마마께서 반드시 극진하게 대접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마차를 따라 호위 대열과 떠났다. 송신 공주가 심묘를 공주부로 초대하다니. 이렇게 많은 인원을 붙여 보내준 것도 그렇고, 심묘가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가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 심모는 격노해 자칫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손수건을 비틀어 찢을 뻔했다. 그녀 역시 당연히 송신 공주를 알았고, 그녀와 친해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는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송신 공주와 친해진 것 같았다. 황실과 관계를 맺었으니 장래 부수의와도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심모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심동릉이 시선을 움직였을 때, 모친 만 이낭의 아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 소저, 정말 행운이구나. 공주마마의 초대를 받다니.”

심원은 차갑게 흥 소리를 내며 자리를 떠났다. 심묘는 개의치 않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제가 모두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습니다.”

심묘의 말에 심신 부부는 조금 전 희색을 감추지 못하던 심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그들의 안색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이방과 삼방은 심묘가 아무 탈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한 눈치였고, 노부인은 심지어 화가 치미는 듯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몇 마디 질책한 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발걸음을 돌렸다.

심묘는 심구를 따라 서원으로 향했다. 그녀는 나설안과 심신 부부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그들이 심가의 실체를 진정 깨달았다는 걸 눈치챘다. 심묘는 일부러 공주부 사람이 심부에 소식을 일찍이 알리지 못하게 했다. 우환과 재난은 사람의 진심과 가심(假心, 거짓된 마음)을 드러나게 하는 법이었다. 심가를 대하는 심신의 태도를 하루아침에 변하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생에서 그녀가 흰 비단 끈에 목이 졸리게 돼서야 부수의에게 희망을 버렸듯 사람의 인식과 감정을 변하게 하려면 시간과 계기가 필요했다.

마침 이번 일을 기회로 심가 사람들이 얼마나 흉악한 무리인지 제대로 보게 할 수 있었다. 심신 부부가 부에 있을 때조차 그들은 심묘가 재난을 만났을 시기에 해를 가하려고 했다. 덕분에 심신 부부는 자신들이 정경성에 없을 때 심묘가 당했을 일을 모두 추측할 수 있었다.

서원에 도착하자 심신과 나설안은 심묘에게 오늘밤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별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꼭 안정을 취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고 떠났다. 급히 심구를 부르는 걸 보니 무슨 일을 상의하려는 게 분명했다.

세 사람이 떠난 후, 심묘는 바지를 들어 올렸다. 상처를 감싼 새하얀 붕대에는 아직 사경행의 온기가 머무르는 것 같았다. 의외의 일이 가득했던 하룻밤 동안 심묘는 사경행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듯했다. 알면 알수록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니 교류를 최대한 적게 하는 것이 자신이나 가족 모두에게 이로울 터였다.

* * *

심부 동원.

심원은 방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임완운이 정신을 놓은 후 그녀를 거의 만나러 가지 않았다. 심귀에게는 더욱 소원했다. 심원은 친동생에게도 살수를 쓸 정도로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정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심원은 오늘밤 심묘가 재난을 피하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그녀는 탈 없이 돌아왔을 뿐 아니라 놀랍게도 공주부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이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강한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항상 괴롭힘이나 당하던 머저리 심묘가 지금은 감히 얕볼 수 없는, 심기 깊고 수완이 악랄한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고루한 송신 공주마저 심묘의 뒷배가 되었다. 심묘가 마음만 먹으면 송신 공주보다 더욱 강대한 사람도 배후로 끌어들일 수 있을 듯했다. 심원은 심묘가 많은 사람을 그녀의 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자신을 처리하려 드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어린 아가씨를 적수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자만심이 넘치는 심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어린 소녀가 이방을 이렇게 몰아세웠음을 인정했다. 심묘가 이방을 이렇게 해쳤으니, 언젠가 창끝을 자신에게 겨눌 수도 있었다. 심원은 지금까지 후환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를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대도 배후의 심신과 나설안은 어려웠다.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심가 대방이 병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후계자가 없다면…… 허물어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심묘와 심구를 건드리면 심신 부부도 임완운처럼 정신을 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원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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