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장 (6/71)

21장

명제 69년을 앞둔 밤. 한밤 내내 큰눈이 내렸다. 때맞추어 내리는 눈은 풍년의 징조였다. 백성은 모두 기뻐하며 내년의 풍작을 기원했다.

올해를 돌아보니 1년 내내 심부에 기이한 일이 계속 발생했다. 심부에서는 세 형제가 분가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로 유명했는데 이제는 다 옛말이 되었다. 권세가 가장 큰 대방과 양방 사이에 메꾸지 못할 틈이 생긴 듯 서로 몹시 소원했다. 게다가 이방은 심청을 잃었고 임완운은 미쳤다. 심청과 예친왕의 혼인을 정했던 황실은 심청의 일로 심가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하지만 그들은 평소 정경성에 없는 대방에게는 분풀이하지 않았다.

심묘와 정혼한 위가에는 나설안이 직접 나서 큰 오해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위가 사람은 나설안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다. 게다가 심신도 조정에서 위 대인을 돕겠다고 약속해 위가는 기분 좋게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심묘만은 전생과는 비할 바 아니게 기쁜 마음으로 새해가 밝길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은 부수의의 부인이 아니었고 예친왕과 심청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임완운도 반송장이나 다름없으니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심묘와 달리 다른 한 사람은 새해 운이 좋지 않았다.

송경당. 심원백이 심 노부인의 곁을 기어 다녔다. 노부인은 그 귀여워하던 심원백도 귀찮다는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얼굴의 쪼글쪼글한 주름마다 증오가 깊게 끼어 있었다.

“첫째는 갈수록 나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구나. 올해 공동 자금 은자도 가져오지 않다니. 이전에 궁중에서 하사한 보물도 전부 자신의 뜰 안에 두고! 그것들은 도대체 어쩔 생각인 거야? 내가 안중에 있기는 하느냐고!”

노부인은 분노했다. 예전 심신은 평소 궁에서 하사받은 물건을 알아서 공동 자금으로 넣어두는 편이었다. 심신 부부는 자신들은 평소 정경성에 없으니 많은 물건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심묘 몫으로 일부만 떼어놓고 떠났다. 덕분에 노부인은 온몸에 금은보화를 두르고 다디단 부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이 양방과 거리를 두며 은자도 보내지 않는 태도에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마님, 화내지 마십시오, 며칠 후면 큰 주인어른은 화를 푸시고 물건을 보내주실 겁니다. 이전 심묘 아가씨 일로 불만스러우신가 봅니다.”

곁에 있던 장 유모가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위로가 오히려 역효과를 부른 듯 노부인은 재차 소리를 질렀다.

“심묘가 뭐? 심묘가 클 때까지 이리 오래 길러줬거늘, 불만이라고? 날 어미로 인정하지 않는 게야! 은혜를 원수를 갚는 거라고! 게다가 나설안과 심묘가 갑자기 총명해졌으니. 배후에서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일 수도 있어!”

장 유모는 노부인의 분노한 모습을 보고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심묘 아가씨는 성장해서 생각도 깊어지신 듯합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마님 곁에서 자라고 마님의 말을 대단히 잘 들었으니 여전히 마님을 존중할 겁니다. 마님, 아가씨를 불러 잘 이야기하고 달래는 게 어떨까요. 지금 잠시 고집을 부린다 해도 결국 어린 아가씨인데 금세 구슬릴 수 있을 겁니다. 큰 주인어른과 큰 마님은 아가씨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못해 안달이시니 심묘 아가씨를 손에 넣으면 큰 주인어른 일가족을 손에 넣는 게 아니겠습니까?”

노부인은 저열한 수완을 발휘해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나쁜 짓을 끊임없이 해왔다. 곁의 장 유모는 입이 무거운 편이라 여러 해 동안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나더러 구슬리라고? 그 계집을 보면 그 천한 것이 떠올라. 죽은 지 오래된 귀신 주제에 주인어른의 마음을 차지했지. 게다가 주인어른은 매번 대방 편을 들었지. 그래도 나는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계집의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고? 난 그것의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

격분하는 노부인을 보며 장 유모는 유감스러웠지만, 다시 한번 권유하려 입을 열었다. 그때 입구에서 여종의 말이 들렸다.

“둘째 공자님, 오셨네요.”

심원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심원아.”

심원을 본 노부인의 태도는 아주 부드러워졌다. 침상 위 심원백도 희희 웃으며 자신의 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심원은 심원백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했다.

“조모를 뵈러 왔습니다.”

“뭐 하러 보러 온다고.”

노부인은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얼굴 위엔 기쁨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자 중 심원에게 가장 기대가 컸다. 심원은 재학이 출중해 어린 나이에 벼슬길에 들었다. 모두 그를 칭찬하며 그녀의 체면을 아주 많이 높여줬다.

“요행히 옥설고 한 병을 얻어 특별히 조모께 드리러 왔으니, 조모께서는 손자의 호의를 헛되이 하지 말아 주십시오.”

심원은 웃으며 노부인에게 병을 건넸다. 노부인은 놀라고 기뻤지만 짐짓 화난척했다.

“내가 이리 나이가 많은데 이런 걸 써서 뭐 하려고. 날 놀리는 게지?”

하지만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노부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병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녀는 늙어서도 매일같이 화장을 했고 좋은 화장품을 찾았다. 심원은 그걸 진작부터 알고 있어 종종 화장품을 선물하며 비위를 잘 맞췄다. 덕분에 노부인은 날이 개듯 기분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직 젊으시니 이런 좋은 물건은 당연히 조모께서 쓰셔야지요.”

심원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아첨했다. 영리한 심원이 그녀가 좋아할 말만 골라 하니 송경당 분위기는 좀 전과 달리 아주 훈훈해졌다. 심원백은 노부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혼자 놀았다. 그때 심원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말을 흘렸다.

“며칠 후에 조모의 종손이 온다면서요?”

노부인은 잠시 멍해졌지만 바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종손은 무슨. 그 오누이들은 며칠 머무르고 바로 떠날 것이다.”

노부인의 본적은 소주였다. 하지만 노부인은 가족들과 오랜 시간 지내지 못했다. 그녀의 가족이 어린 그녀를 청루로 팔아넘겼으니까. 이후 심 장군이 그녀를 정경성에 데리고 와 부인으로 삼아주자 그녀는 즉시 가족과 왕래를 끊었다.

그런데 올해 그 가족이 어디에서 소식을 들었는지 갑자기 종손자와 종손녀를 심부로 보내겠다고 전갈을 보내온 것이다. 그들은 노부인을 보러 온다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려고 하려는 게 뻔했다.

노부인은 사리사욕에 눈이 먼, 의리라고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리 여러 해를 가족들과 만나지 않았으니 혈육의 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하기도 꺼리는 것이었다.

심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들을 본 적 없지만 아마도 심묘와 나이가 비슷할 테지요. 아, 듣자니 백부가 형님을 위해 아가씨를 고르려는 듯해요.”

“심구가 아내를 찾는다고? 내가 왜 이 일을 모르는 게지? 심원아, 너는 그들이 어느 집 아가씨를 고를지 아느냐?”

노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모릅니다. 그러나 백부는 당연히 권세 높은 부의 아가씨를 고르실 테지요. 형님은 지금도 이렇게 전도가 유망하니 만약 형수의 지지가 있으면 범이 날개를 얻은 격일 테고, 한층 승승장구할 겁니다.”

심원이 말을 할수록 노부인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그 댁 아가씨가 심구를 마음에 들어 하겠느냐?”

심원은 노부인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그는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님의 마음이지요. 형님이 좋아하면 가세가 대단한 집안의 아가씨가 아니더라도 무방할 겁니다. 혹 오누이 중 여동생이 형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때 인척 사이에 또 혼인을 맺을 수도 있겠지요.”

노부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심원의 말에 반박했다.

“무슨 허튼소리냐? 그 애가 어떤 신분인데, 어찌 첫째의 마음에 들겠어?”

“그냥 생각난 대로 말한 것입니다. 개의치 마세요.”

심원은 빙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는 떠나기 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장 유모를 한 번 바라보았다.

심원이 떠난 후 노부인은 심원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아무리 후원에서만 지내는 그녀라고 해도 심원의 말이 현실적이지 않음은 알 수 있었다. 심신 부부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해도 자기의 친척처럼 낮은 신분의 며느리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심구는 여색을 밝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하늘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성사시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노부인은 심원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심구가 높은 가문의 소저를 아내로 맞는다면 위세가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심구가 잘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시샘으로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런데 만약 종손녀가 심구의 아내가 된다면 그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요, 대방의 재수 없는 일이 될 터였다.

장 유모는 노부인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마님, 사실 저는 둘째 공자님의 말이 일리 있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큰 공자님과 마님의 종손녀 아가씨가 혼인하면 마님께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혼인이 이뤄지면 장래 은자를 얻는 일도 수월해질 겁니다. 그녀의 은자는 곧 마님의 은자가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노부인의 눈빛이 맑아졌다. 종손녀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심구가 그녀와 혼인한다면 자신은 다시 대방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게 될 터였다. 이에 장 유모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에 마님의 종손자 공자와 심묘 아가씨까지 혼인하면 겹경사겠지요. 장래 온 대방의 은자가 전부 마님의 것이 될 겁니다.”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대방의 전 재산을 빼앗는 계략이라니. 그녀는 대방을 안에서부터 어지럽힐 생각에 아주 즐거웠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걱정이 다시 일었다.

“말은 쉬우나 그 아이들은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다. 심신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둘 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텐데?”

장 유모가 빙긋 웃었다.

“이전 수완을 잊으셨습니까? 남녀 사이 일이 어디 그리 복잡합니까? 조금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노부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려 했으나 그녀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실제로는 괴기하고 추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남녀 간 일은 그런 방법이 있지.”

노부인은 장 유모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 속에서 깊은 뜻을 보았다.

“여봐라, 내 방에서 보석함을 찾아오라. 아이들이 찾아오면 첫인사 선물을 줘야지.”

멀리 가지 않고 서 있던 심원은 송경당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 냉소가 스쳤다. 그는 천천히 뜰 문을 나섰다.

* * *

서원.

심묘가 대뜸 금권 열 장을 모경에게 건넸다.

“보향루로 가서 류형이라는 아가씨를 찾아라. 은자 백 냥이면 그녀의 하룻밤을 살 수 있다. 이 은자를 가져가 그녀와 하룻밤 앉아 있다 와라. 무엇도 하지 말고, 사흘마다 한 번 가는 게다.”

모경은 ‘보향루’ 세 글자를 듣고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 그러나 이어진 ‘하룻밤’ 얘기에 얼굴색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금권을 받지 않고 한동안 심묘를 바라만 보았다.

“저와 농담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 농담하는 것을 본 적 있느냐?”

심묘의 얼굴은 평소처럼 엄숙하고 단정했다. 모경 역시 심묘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놀리거나 농담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조리 있고 진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청루로 가는 건 정도를 벗어난 일이었다. 모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붉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제가…… 어째서 보향루에 가야 하는지.”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전생의 심묘는 모경이 어느 아가씨에게 마음을 둔 걸 본적 없었다. 그때는 그저 궁중 규율이 엄격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의 당황한 모습을 보니 꼭 그래서만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사정은 그 자신의 것일 뿐이었다.

“가라면 가는 것이다. 류형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모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보며 심묘가 사납게 몰아쳤다.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냐?”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모경이 서둘러 말했다. 그는 당당한 대장부로 심구 휘하에서도 적수가 없는 인재였다. 하지만 어째서 규중 소녀인 심묘의 호령에는 이토록 긴장하는지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는 심묘의 안전을 위해 일했지만, 지금 정확히 따지자면 심구의 수하가 돼 있었다. 심구를 대할 때보다 심묘 앞에서 더욱 부하로서 공경하는 자세를 취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류형 아가씨는 아첨을 잘하고 수완도 좋다고 한다. 보향루의 간판이라 칭할 수는 없으나, 그녀의 석류 치마 아래 굴복한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기에 그곳에서 인정받는 아가씨라는구나. 내가 네게 명한 것은 네가 정인군자(正人君子, 마음씨가 올바른 군자)로 의지가 확고해서 한밤 앉아만 있으라면 그리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회를 틈타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사내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일을 망치면 더 이상 심가군에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모경의 안색은 다시 한번 한바탕 푸르렀다가 붉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난처한 적이 없었다. 심묘는 노골적으로 모경을 살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다리 사이에 잠시 멈추었다. 심묘가 아니었다면 모경은 무례에 분노를 표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그는 심묘가 어떻게 성장했길래 이런 성격을 가진 건지 궁금했지만, 자신은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며 결국 심묘의 뜻대로 움직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묘는 모경의 얼굴이 자줏빛이 된 것을 보고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손을 휘둘렀다.

“가거라, 내 말 잊지 말고.”

모경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들어오며 그와 마주친 경칩이 심묘에게 물었다.

“모경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매우 괴로워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나요?”

지금까지 모경은 줄곧 일 처리가 침착했다. 그래서 여종들은 모경이 이렇게 난처해하는 모습을 처음 본 듯했다.

“별거 아니다. 부끄러워서 그럴 뿐. 물어본 일은 어떻게 됐느냐?”

경칩은 심묘가 말한 부끄럽다가 무얼 이야기하는지 몰라 의아했으나 곧 착실히 답했다.

“확실히 알아봤습니다. 노부인 마님의 종손자와 종손녀가 이틀 후 온답니다.”

심묘는 담담히 웃었다.

“그래? 그 소저의 규방 이름이 형초초지?”

“아가씨, 어떻게 아세요?”

경칩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심묘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눈 속 살기를 숨겼다.

당연히 알고 있지. 전생의 올케니까.

* * *

이틀 후, 아침이 밝았다. 심묘는 일찍 일어나 뜰 안에서 심신과 심구가 대련하는 걸 구경했다. 추운 날씨에도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릴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호위들도 주위에서 응원에 매진하고 있던 차에 노부인의 여종 희아가 달려왔다. 그녀는 노부인의 가족들이 도착했으니 모두 송경당으로 급히 가셔야 한다고 전했다.

심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왔다고? 난 어째서 모르는 거지?”

나설안은 빠르게 알아챘다.

“노부인 친정 쪽 친척이야. 여태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왔는지 모르겠구나.”

심신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노부인은 그의 계모였지만, 그녀의 비천한 신분은 상류사회에 걸맞지 않았다. 더욱이 노부인의 친정에서는 여러 해 일말의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노부인과 그 일가가 그저 소주 쪽 사람인 것만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멀리서 왔고, 노부인이 환대하는 것 같으니 자신들도 만남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심신과 심구는 검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교교야, 어째서 갑자기 즐겁지 않은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 좋아 보였는데.”

심구는 입구에 서 있던 심묘의 표정이 차가워진 것을 보고 곧바로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신을 차린 심묘는 심구를 한 번 보고 웃으며 대꾸했다.

송경당에 가까워지자 노부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부인은 심청의 사고 이후 매일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 탓에 심신과 나설안은 오랜만에 접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송경당에 들어가니 이미 이방과 삼방은 와 있었다. 노부인 앞에는 남녀가 한 명씩 서 있었다. 노부인은 심신 일행이 온 것을 보고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저기가 네 당숙 일가족이다. 이쪽은 내 형제의 손자와 손녀, 관생과 초초다.”

형관생과 형초초는 얼른 몸을 돌려 심신 일행에게 고개를 숙였다. 심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평온한 시선으로 눈앞의 두 사람을 관찰했다.

형관생과 형초초는 심모와 심묘처럼 한창 좋을 나이였다. 형관생은 통통하고 평범한 외모였으나 피부는 하얀 편이었다. 갈색 장삼을 입었는데 옷감은 좋았고 마름질이 대범했다. 그러나 두 눈 속에 있는 듯 없는 듯한 교활한 빛이 서려 있어 그의 우아한 분위기를 깎아내렸다.

그에 반해 형초초는 아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에게서 노부인의 젊을 적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꽃처럼 아름답고 고운 아가씨였다. 연꽃이 수놓인 연한 녹색 홑저고리와 석류나무가 수놓인 연노랑 치마가 아주 섬세했다. 그러나 그녀는 부끄럽고 어색한 듯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쳐다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심묘가 그녀에게 인사를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언니, 어째서 땅만 바라보고 있는 거야? 내가 땅에 있어?”

형초초는 즉시 고개를 들었으나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노부인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형초초는 막 와서 낯을 가리는 게다. 심묘야, 예의를 지키거라.”

노부인이 거리낌 없이 형초초를 두둔하자 일순간에 심신 일가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들은 일말의 혈연관계도 없는, 어느 연줄인지도 모를 친척 때문에 심묘가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들은 바로 형초초에 대한 태도를 차갑게 바꾸었지만, 노부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원 역시 노부인의 태도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으나 내색하지 않고 심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심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낯설어서 그런가 봐. 며칠 있으면 괜찮을 거야. 친해지겠지.”

심묘의 말씨는 친절했고 드물게 다정했다. 형초초는 심묘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고개를 숙여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금방이라도 얼굴을 붉힐 듯 수줍어하는 모양새였다. 반면에 형관생은 오히려 심묘를 온화하고 교양 있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심묘는 형초초만 주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초초는 늘 이렇게 부끄럼을 타는 아가씨처럼 어색하게 행동했다. 마치 모두가 그녀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양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전생에 심구가 술을 마신 후 그녀와 한 침상에서 잔 것을 본 사람들은 심구가 짐승만도 못하다고 욕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말의 꿍꿍이도 없는, 순결한 백지 같은 아가씨는 바람을 피워 살인이 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게다가 혼인 후에 심구는 늘 군무에 착오가 생겼고,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도 겪었다. 이 모든 일이 형초초와 관계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심구의 시체가 연못에서 발견됐을 때 형초초는 심가 대방의 은자를 가지고 줄행랑쳤으니까.

심묘는 이 토끼같이 온순한 형초초의 얼굴이 독사보다 악랄하다고 느껴졌다. 전생의 심구는 누명을 쓰고 좋아하지도 않는 형초초와 혼인했음에도 이후 그녀를 성심껏 대했다. 그는 부인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 진실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형초초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었다.

심묘는 계속 형초초를 주시했다. 무딘 성격의 심구도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교교야?”

형관생도 물었다.

“심묘는 어째서 계속 초초를 쳐다보는 거지?”

형초초가 한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긴장했는지 몸을 기울여 형관생의 뒤로 숨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언니가 너무 예뻐서 계속 쳐다보게 되네.”

심모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심묘는 아름다웠고, 그런 심묘 때문에 자신이 응당 누려야 할 칭찬을 많이 빼앗겼다. 그런데 여기에 형초초까지 더해졌으니 질투심에 몹시도 괴로웠다.

형초초는 얼굴이 붉어져 심묘에게 작게 속삭였다.

“동생도 아름답게 생겼어.”

심묘는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노부인이 두어 번 기침한 후 말했다.

“초초와 관생은 우리 부의 손님이자 가족이다. 심묘, 심구. 너희가 그들을 데리고 다니거라.”

심부에 손주가 심묘와 심구 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심원과 심모, 심동릉도 있었다. 그런데도 노부인은 두 사람을 콕 집어 분부했다. 심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형초초를 다시 한번 바라보는 걸 잊지 않았다.

“언니를 잘 챙기겠습니다.”

심묘의 용모는 수려했으며 심부 사람 중 특별히 침착해 보였다. 막 피어난 꽃처럼 웃는 얼굴은 우아한 자태가 있었다. 형관생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묘의 온순한 태도에 노부인은 매우 만족했다.

“모두 물러가라. 난 초초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여러 해 보지 못했으니 집안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진약추는 노부인의 자애로운 모습이 의심스러웠으나 공손히 대답하고 사람들을 따라 떠났다.

송경당 밖으로 나온 형관생이 심묘에게 말을 걸었다.

“심묘는 평소 집에서 무얼 하길 좋아해?”

심신과 나설안은 가장 앞에서 걷느라 형관생의 말을 듣지 못했고 심구만이 그의 말을 들었다. 심구는 경계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별거 없어요. 책을 봐요.”

“나도 부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해. 네게 가르침을 청할 수 있겠는걸.”

형관생은 웃으며 말했다. 심묘는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에 담긴 무시를 심구도 느낄 수 있었다. 초면에 심묘가 왜 이렇게까지 우호적이지 않은지 의아할 정도였다.

“됐어요. 오라버니 부에 소장한 책도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제게 가르침을 청한다니……. 사람을 시켜 책 몇 권을 오라버니에게 드릴게요. 세상에 한 권씩밖에 없는 책들이랍니다.”

심묘는 형관생의 출신이 가난해서 싫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형관생의 안색은 단번에 굳어졌다.

송경당 안에서는 노부인이 형초초의 손을 잡아끌며 자애롭게 물었다.

“어린 나이에 이렇게 아름답다니, 정혼은 했느냐?”

“아직 안 했습니다.”

노부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직 안 했다고? 네 용모와 심성을 보니, 우리 심부의 손주며느리가 되면 좋을 것 같구나.”

고개를 숙인 형초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손을 꼭 쥐었다. 그들 형가는 보통의 소상인 집안이었다. 그녀는 조부의 여동생, 심 노부인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길 바랐다. 수도에서 잘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온 것임에도 막상 심부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부귀함에 놀란 상태였다. 심부에 시집을 오면 평생 먹고 입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높은 신분의 귀족 부인으로 지내게 될 터였다. 그녀는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 듯 부풀었다. 하지만 얼굴에 흥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부인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네 나이는 첫째네 심구와 어울릴 것 같구나. 우리 심구는 지금 부장이란다. 더욱 좋은 건, 그 아이도 아직 정혼하지 않았단 거야.”

* * *

형초초와 형관생이 온 후부터 심부는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부 사람들은 모두 노부인의 성품이 인색하고 이기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가 여러 해 만난 적도 없는, 돈을 뜯으러 온 종손자와 종손녀를 당연히 냉대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노부인은 매우 친절했고 심지어 선뜻 은자와 선물을 주기까지 했다. 노부인이 그들을 환대하자 하인들도 두 사람을 아주 깍듯이 모셨다. 이에 두 사람은 부에 장시간 머무르려는 듯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동원의 채운원.

어느 곁방, 만 이낭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여러 색깔의 망사주머니가 만들어지고 있었고, 심동릉은 병풍 뒤에 앉아 서예 연습을 하고 있었다.

“노부인의 성격이 변한 걸까? 네게 하시는 것보다 그들에게 더 잘해주시는 것 같아.”

“노부인은 꿍꿍이 없이는 잘해주시지 않으세요.”

병풍 뒤에 앉은 심동릉의 안색은 이전처럼 그렇게 핏기없지 않았다. 요새 늘 만 이낭 곁에서 지내는 심귀가 가끔 심동릉에게 약재를 주기도 했다. 채운원 하인들은 심귀의 바뀐 태도를 진작에 눈치챘으나 개중에는 아직 사태를 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임완운이 미치긴 했어도 심원은 여전히 적출 공자가었다. 반면, 만 이낭이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심동릉은 서출 소저일 뿐이었다.

“너도 이상하다 느끼지? 노부인이 무엇 때문에 두 사람에게 잘해주실까?”

만 이낭은 망사주머니를 뜨던 손을 멈추었다. 심동릉은 웃으며 대꾸했다.

“노부인은 그 젊은 소저와 공자가 누군가를 유혹하길 바라고 있어요.”

만 이낭은 놀랐다.

“대체 누구를?”

“노부인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요.”

심동릉이 조심스레 붓을 종이로 떨어뜨렸다.

* * *

심부 서원.

뜰에서 검술 연습을 마친 심신과 심구는 잠시 쉬려던 차였다. 그때 저편에서 노란 옷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왔다. 꽃 같은 얼굴의 소녀가 가냘픈 팔목에 큰 대바구니를 걸고 있으니 한층 가녀려 보였다. 그녀는 걸어오면서 조심스럽게 그들을 불렀다.

“오라버니, 당숙.”

형초초였다. 나설안은 병사들에게 훈련을 지시하고 있어서 그녀를 보지 못했다.

“동생, 여긴 뭘 하러 온 거지?”

심신과 심구는 예상치 못한 방문이 의아했다. 심구는 경계하며 말을 건넸다. 그는 ‘육촌 동생’의 존재가 무척 낯설었다. 십여 년간 본 적도 없는 이들이 가족이라면서 갑자기 부에서 함께 지내는 건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형초초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녀는 대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작게 말했다.

“제가 음식을 만들어서요. 오라버니, 연습하느라 피곤하지요? 오라버니와 당숙의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요.”

그녀는 바구니를 열었다. 상자가 몇 개 있었는데 그 안에 담긴 간식은 모두 세밀하고 귀여웠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자 먹보인 심구는 이미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심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담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형초초가 사람들을 챙길 줄 안다는 생각에 속으로 조금 기뻐했다. 담이 작든 크든, 손재주 있는 아가씨는 어디에서든 환영받기 마련인 데다가 형초초는 얼굴도 예뻤다. 더욱이 나설안은 가사에 관심이 없었기에 형초초는 심신 부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여러 날 폐를 끼쳐 늘 죄송해요. 저는 별다른 재주가 없어서, 음식으로나마 감사를 표하고자 해요.”

형초초의 말은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얘기였다. 심신 부자는 이렇게 인정과 도리를 아는 사람을 가장 좋아했다. 정을 중시하는 무장에게 그녀의 태도는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이곳을 집으로 여기고 편히 지내도록 해. 가족끼리 폐를 끼치고 말고 할 것 없어.”

심구의 말에 형초초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심구가 떡을 한 입 먹으려 할 때였다.

“오라버니.”

심구가 고개를 돌리자 심묘가 있었다. 뒤에는 그녀를 따라온 네 명의 여종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구는 갑자기 무안해져 무의식중에 떡을 내려놓고 물었다.

“교교야, 어떻게 온 거야?”

심묘는 대답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곡우, 경칩, 백로, 상강이 바구니를 들고 있자 심신이 물었다.

“교교, 저 바구니 안에는 무엇이 담겼느냐?”

“오늘 날씨가 추운 데다, 검술 연습을 하면 목이 마르실 것 같아 국을 끓였어요.”

심묘는 담담히 심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왠지 모르게 등이 서늘했다.

“병사들도 와서 국을 마시게 해요. 버섯 닭국을 끓였으니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예요.”

“갑니다!”

심구 곁에 서 있던 아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말을 전하자마자 뜰 안에 있던 몇십 명의 병사가 모두 모여들었다. 심묘는 경칩에게 국을 나눠주게 했다. 그들은 국을 맛본 후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가씨께서 저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군요! 아가씨, 정말 마음씨가 좋으십니다!”

병사들은 모두 심신과 심구의 곁에 있는 유능한 수하들이었다. 심묘는 이 거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국, 정말 맛있어요!”

아지는 감탄하며 국을 두세 번 만에 후루룩 마시고 빈 그릇을 경칩에게 건넸다.

“한 그릇 더!”

경칩은 아지에게 눈을 흘겼다.

“당연히 맛있지요. 우리 아가씨가 직접 끓이신 거니까요.”

심신과 심구가 그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교, 네가 직접 끓였어?”

“응.”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내 것이다! 모두 먹지 마! 허락할 수 없어!”

심신이 크게 소리치며 곡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사발을 주거라!”

백로가 준 국을 마신 나설안도 매우 의아했다.

“교교, 이 국을 네가 했다고? 요리 실력이 어떻게 이리 좋아진 거야?”

사람들은 맛과 향이 좋은 국 때문에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대충 책 보고 만든 거예요.”

전생에서 심묘는 처음 몇 년간 부수의의 환심을 사려고 갖은 방법을 써 요리기술을 단련했었다. 진국에 가서도 어려운 요리법을 많이 배웠고, 양국 황실 요리의 견문을 넓혀 안목과 수완을 높인 바 있었다. 정경성에 처음 온, 가난한 집에서 자란 아가씨와는 견줄 수 없는 실력이었다.

심묘가 형초초를 빤히 주시했다. 형초초는 기둥 뒤에 서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직 국을 마시고 있는 즐거운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매우 속상해 보였다. 적출 아가씨가 직접 끓인 국은 먼 친척 아가씨가 한 간식보다 더욱 값진 법이었다. 게다가 심묘는 모든 병사의 몫까지 챙겨왔다. 심신 부자에게만 간식을 만들어준 형초초는 너무 인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형초초는 부끄럽고 화가 났다. 심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원망의 기색이 어렸다.

심구도 국을 마시려 했으나 곡우가 그에게는 국을 주지 않았다. 그는 심묘가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을 알았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이 빠지게 심묘를 쳐다봤다. 심묘는 다른 사람이 다 먹어갈 때가 되어서야 백로를 향해 바구니 가장 아래에 있는 것을 심구에게 건네주라고 명했다.

“오라버니는 단 걸 좋아하지. 여기에는 벌꿀을 넣었으니까 마셔.”

“교교, 너밖에 없다!”

심구는 단박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심묘는 그의 게걸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병사들은 직접 끓인 국을 나눠준 심묘의 마음 씀씀이에 무척 감동했다. 그들은 심묘에게 한바탕 아첨을 했다. 심묘는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화했을뿐더러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선녀 같았다. 심묘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였고, 형초초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떠나려 했지만 이를 악물고 남았다.

잠시 후 검술 연습이 다시 시작되었다. 심신과 나설안도 함께했다. 심구는 돌사자 위에서 휴식을 취했고 심묘는 형초초에게 다가갔다.

“언니, 간식을 예쁘게 잘 만들었네. 그런데 이들은 무예를 단련하는 사람들이야. 대낮 검술 연습은 힘들고 목이 마르지. 그런데 언니가 한 간식을 먹으면 오히려 입이 마르고 열이 나지 않겠어?”

심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다음에는 국을 만들어.”

형초초의 안색이 푸르게 변했다가 창백해졌다. 심묘는 그녀가 간식을 가져온 것은 방문의 구실일 뿐, 진심으로 무술을 익히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을 생각했다면 이렇게 바싹 마른 음식을 가져올 리 없었다. 형초초는 화가 났지만, 여전히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두려운 기색이 읽혔다.

“알려줘서 고마워.”

형초초는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심구에게 던졌다. 그녀는 심구가 자신을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도와주길 희망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성실하고 진실한 심구는 남녀 사이의 일은 잘 몰랐다. 그저 형초초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오라버니, 방금 언니가 만들어온 떡을 먹으려 하지 않았어? 지금 먹어봐.”

심구는 손을 내저었다.

“방금 국을 먹어서 배불러. 더 못 먹어. 나중에 먹을게.”

심묘는 아주 만족했다. 심구에게 유달리 많은 양을 건넨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심구가 그 국을 다 먹으면 형초초의 떡을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형초초는 그의 말에 실망한 눈치였다.

“나 다시 연습하러 갈게.”

심구가 일어나 뜰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멀어져가는 심구의 뒷모습을 형초초는 달갑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술을 깨물었다. 심묘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언니의 떡은 식으면 못 먹을까 걱정이네. 개의치 않으면 둘째 오라버니에게 보내줘도 좋을 거야.”

“둘째 오라버니?”

형초초가 의심스럽다는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내 오라버니는 1년 내내 서북의 몹시 가난한 곳에 있어서 이렇게 세밀한 물건을 식별하지 못하지만 둘째 오라버니는 달라. 어린 나이에 벼슬에 올라 지금은 정경성에 부임해 있어. 장래 전도가 밝지.”

심묘는 웃음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곁에서 오라버니의 생활을 돌봐줄 사람이 없네. 남자는 입고 먹는 것에 잘 신경 쓰지 못하잖아. 언니의 소주식 떡, 아마 둘째 오라버니의 입맛에 맞을 거야.”

형초초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위안은 됐지만 확신이 없는 듯했다.

“둘째 오라버니가 아내를 맞는다면, 올케는 늘 먹을 복을 누릴 거야. 어느 댁 아가씨가 이런 복이 있어 내 둘째 올케가 될지 모르겠네. 언니는 모를 테지만, 둘째 오라버니는 정경성 많은 관가 아가씨들이 마음에 둔 사람이거든.”

“둘째 오라버니…… 는 지금 사모하는 아가씨가 없는 거야?”

형초초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심묘는 탄식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종일 조정 일로 바쁜데, 어디 아가씨를 볼 시간이 있겠어?”

형초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심묘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조용히 연습을 구경했다. 한참이 지나도 심구의 연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형초초는 계속 기다리는 모양새가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듯 자신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다.

형초초가 떠나자 심구가 심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교교야, 오늘 이상하다?”

심묘는 불쾌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방금 내가 오라버니에게 떡을 못 먹게 해서 화난 거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심구가 놀라 얼굴까지 붉어졌다. 심묘는 개의치 않고 손을 휘둘렀다.

“됐어. 오라버니, 지금 좋은 나이니 아가씨들이 오라버니를 간절히 바라볼 거야. 장래 올케를 고르려면 눈을 크게 떠.”

심묘의 말을 알아들은 심구도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교교야, 무슨 말이야. 육촌 동생도 그런 뜻은 아닐 거야. 그냥 떡을 가져온 건데.”

“오라버니가 정말 육촌 언니를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많이 먹어.”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났다. 심구는 심묘가 이렇게 성질을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 매우 놀랐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곡우가 물었다.

“아가씨, 육촌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이렇게 크게 화내실 리 없지요.”

“그래, 좋아하지 않아.”

심묘가 이마를 문질렀다. 좋아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싫었다. 저렇게 자랑스러운 심구가 그녀 탓에 다리가 부러지고 간통 사건에 휘말리고 살인죄로 감옥에 갇혔다니. 심묘는 뱀 같은 마음씨를 가진 형초초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기지 못해서 한이 맺힌 상태였다. 성격이 선량한 심구는, 사람이 작정하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심묘는 그가 전생에 이어 현생에서도 형초초에게 당할까 봐 염려스럽다 못해 분통이 터졌다.

“아가씨, 육촌 아가씨와 둘째 공자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육촌 아가씨는 둘째 공자님에게 관심을 두겠네요.”

심묘는 형초초와 이야기 나눌 때 곡우를 곁에 두었다. 그래서 그녀는 심묘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아둔하지 않아. 내 몇 마디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형초초가 아니지. 그러나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뀌었다면 좋은 일이겠지.”

심묘는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여종들은 심묘가 무엇 때문에 연약하고 담이 작아 보이는 형초초를 강적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 * *

보향루는 정경성 내에서 가장 큰 청루였다. 단지 규모만 대단한 게 아니라 명실상부한 1등급 청루이기도 했다. 풍만한 사람, 마른 사람, 괄괄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거친 사람, 귀여운 사람, 천진한 사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미인이 보향루에 있었다. 그들 중 아무나 골라도 평범한 가게에서는 간판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보향루는 가장 비싼 값을 부르는 가게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입구에서 향기 나는 손수건을 흔들며 손님을 환영했다. 그러나 갑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들어오자 아가씨들은 그를 여러 번 바라보기만 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보향루에 오는 사람은 모두 부자나 귀인으로, 부귀한 집안 공자나 관가 대인이 손님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갑옷을 입은 이 남자는 행색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흉악한 기운까지 풍기니 아가씨들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나 빨간 옷을 입은 우아한 자태의 중년 부인이 걸어와 아는 체를 했다.

“모 공자, 또 오셨네요? 오늘도 류형을 찾으시나요?”

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에서 금권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 여인은 금권을 받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따라오세요. 위층으로 데려가 드릴게요. 류형이 당신을 며칠 동안 기다렸답니다.”

모경은 불편한 기색을 강하게 억누르며 담담한 얼굴로 따라갔다.

보향루의 아가씨는 모두 아주 훌륭했다. 류형은 보향루의 간판까지는 아니지만, 꽤 명성이 있는 편이었다. 사실 보향루에는 매일 새로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각자 아름다우며 재주도 뛰어났다. 남자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류형을 찾는 손님은 예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하지만 최근 류형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젊은 남자가 자주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매번 단독으로 와 한 아가씨만 찾는 손님은 거의 보기 힘들었기에 다들 그 손님이 돈을 지불하고 류형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건 아닐지 수군거렸다.

모경이 위층의 아담한 방에 도착하자 중년 부인은 웃으며 물러갔다. 부드러운 침상 위에 묘령의 여자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회색빛을 띤 연한 붉은색 망사옷을 입은 그녀는 옥으로 장식한 금을 연주했다. 눈동자는 정을 머금은 듯했으나 입꼬리는 애매했다. 어깨의 반을 드러낸 의상은 끝없는 상상의 여지를 주었다.

모경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지한 태도로 탁자 앞에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멍하게 앉아 차를 따랐다. 금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류형이 분노한 표정으로 모경에게 다가갔다.

“모 공자는 몇 번이나 오셔서 저를 보고도 보지 않는 척하시니, 혹시 절 놀리시는 건가요? 제 몸이 더럽다 느끼시나요?”

남자는 그녀와 단독으로 만나길 원했고, 그래서 보향루 아가씨들은 그녀가 드디어 이곳에서 벗어날 거라며 류형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보기에만 좋지 쓸모가 없었다. 어떤 수완으로 유혹해도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않으니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모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말없이 눈앞 찻잔만을 주시했다. 유감스러웠다. 심묘의 말대로 류형은 추파를 잘 던지는 여인이었고, 그 유혹을 견디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에게 계속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하라고 했으니 그래야만 했다.

류형은 화가 치밀수록 유혹하는 미소를 짙게 했다. 그녀는 모경의 허벅지 위에 살짝 걸터앉은 후 보드라운 손을 뻗어 목을 껴안고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모 공자, 절 이렇게 앉혀만 두면 아깝지 않나요?”

그 순간, 모경이 류형을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 * *

보향루 맞은편의 쾌활루에는 흥겨운 음악이 가득했다.

어느 방 안. 탁자에는 진귀한 음식이 담긴 옥쟁반이 가득했다. 중앙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호위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와 머리를 숙이며 가장 중앙에 앉은 사경행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계우서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왜 심묘는 자신의 호위에게 보향루로 아가씨를 만나러 다니게 시키는 거지?”

“게다가 이 호위는 보기만 할 뿐 건드리지도 못해.”

고양이 덧붙였다.

고양과 계우서는 심묘를 보통 장군 가문의 아가씨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하는 일마다 매우 깊은 뜻이 깔려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심묘가 모경을 보내 보향루의 아가씨를 찾게 하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당연히 심묘가 또 누굴 함정에 빠뜨리려 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날 동안 그곳에 사람을 보내 관찰한 결과 눈이 빠질 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묘의 호위는 류형을 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한참 앉아만 있다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류형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지만 청루에 팔린 여자일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심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어 난감했다.

“혹시 심묘가 태감 하나를 길러 심복으로 만들려고 하나? 지금 호위는 태감으로 지낼 날에 대비하는 건가?”

계우서의 생각은 늘 특이했다. 그러자 고양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자네 생각은 늘 기묘하군. 내가 볼 때 그녀는 류형을 이용하려는 거야. 심가 이방, 삼방 사람을 대처하는 방편으로 쓰려는 것일 테지.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꼭 류형을 찾을 필요는 없네. 보향루에는 류형보다 매혹적인 아가씨가 많지 않나. 사경행, 자넨 이 일을 어떻게 보는가?”

고양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밖을 보다가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희, 아주 한가한가 봐?”

“형은 심묘와 우정이 끈끈하잖아. 설마 관심 없어? 3형은 똑똑하니 이유를 알 텐데.”

“알고 싶지 않아. 나 조만간 성을 한번 나가봐야 해.”

사경행이 계우서의 말을 끊었다.

“옥토절 일 때문에?”

고양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황제가 봄에 사 영감을 출정시킬 거야. 기다릴 수 없어.”

사경행이 말한 ‘사 영감’은 당연히 임안후 사정을 가리켰다. 고양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늦을까 걱정이군.”

“듣자 하니 최근 부수의와 심원이 아주 가까운 것 같아. 심가 대방을 칠 준비를 하는 것 같던데?”

그 말을 들은 사경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묘가 또 재수 없는 일을 당하려는 거야? 왜 그쪽을 건드린 거람. 부수의는 좋은 놈이 아닌데. 부수의에게 주의를 끌어 좋은 결말을 얻은 사람이 없잖아!”

놀란 계우서의 말에 고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부수의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일세. 권세에 생각이 없는 듯 보이지만, 군사력이 작지 않고 곁에 사람도 적지 않아. 심신은 병권을 쥐고 있지. 평범한 사람은 죄가 없으나 재능이 있으면 그게 바로 죄목이 되어 화를 입지. 황실은 심가의 큰 세력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부수의가 손을 쓴다면 심신은 크게 다칠 걸세.”

계우서는 얼른 고개를 돌려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심묘가 위험하지 않겠어? 형, 어떻게 도울 거야?”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왜 심묘를 도와야 하지?”

계우서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두 사람 친구인 거 아니야? 이전에 심묘를 구하지 않았어? 돕지 않을 생각이야?”

사경행은 웃는 듯 마는 듯 그를 보았다.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었지만, 내뱉는 말은 무심했다.

“난 심가가 나를 도와 시간을 끌어주면 족해. 부수의가 심신을 처리한다고 해도…… 나쁠 것 없지.”

계우서는 그의 비정한 말에 몸서리쳤다.

* * *

정왕부.

대청 안에는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는 옅은 색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생김새는 냉혹했으나 아랫사람과 이야기할 때는 매우 친절해 보였다. 부수의였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부수의의 막료였다. 부수의는 인재를 중시했고, 그에게는 사람의 재능을 잘 알아보고 알맞게 쓰는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을 존중했다. 평범한 황자는 보통 막료에게 은자와 토지를 줘도 존중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게 보통이었으나, 부수의는 막료를 자신과 동등한 자격으로 대하는 아주 공손한 사람이었다. 지혜로운 사람을 많이 끌어모을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부수의의 큰 계획을 아는 이는 없었다.

남색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독 나이가 어려서 이런 중요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부수의가 물었다.

“심원, 무슨 생각이 있으면 말해보게.”

심원은 부수의에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그는 이전 비밀리에 부수의의 사람이 되었다. 야심만만한 심원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한지 부임의 외로움을 견디는 동안 부수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 비밀리에 군사력을 쟁탈 중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한 사람에게는 패가 많은 법입니다. 명제의 병권은 남쪽의 사가와 북쪽의 심가입니다. 사가의 병력은 강하지만, 폐하께서 봄 이후에 임안후를 출정시키실 테니 계획에서 제외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가를 움직일 수는 없지만 심가는 다릅니다.”

심원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심신을 끌어들이려는 사람은 적지 않을 테지만, 심가군은 변수가 많기에 얻지 못하면 파괴하느니만 못합니다. 심신은 자발적으로 수도에 반년 머물겠다 했습니다. 이것은 폐하 마음과 일치하는 일이며 전하가 다른 야심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심부 사람이면서 ‘심가’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니, 심원은 자신과 심신을 한 편이라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그의 말은 심신을 겨누고 있었다. 부수의는 웃음을 머금은 채 그를 보았다. 심원의 말은 부수의에게 이익만 있을 뿐 해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대 말이 맞다. 그러나 지금 심가는 허점을 찾을 수 없다. 설령 잘못한 곳을 찾아도 근거가 없다.”

심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수의의 시선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대는 심부에 있으니 분명 바깥 사람이 모르는 일들을 알 테지. 만약 심가를 저지할 수 있다면 그대의 공로가 가장 클 터다.”

심원은 듣고 싶었던 약조를 받은 셈이니 만족스러웠다. 그는 더욱 공손히 말했다.

“전하, 제 사람이 심가군에 있습니다. 심가군은 이전 서북에서 전투할 때 규정에 맞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증좌를 수집 중이오니 일단 증좌가 완전히 갖춰지는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심가군을 완벽하게 쓰러뜨릴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위세가 크게 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부수의는 담담히 웃었다.

“그럼 그대가 수고해주게.”

심원은 고개를 숙이며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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