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장 (41/71)

23장

심부 사람들은 심 노부인을 따라 정당으로 갔다. 어쨌든 이 일을 처리할 방법을 결정해야 했다. 여러 사람이 보았으니 심가의 명성도 달려있어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심묘는 제일 뒤에서 걸었다.

그때, 형관생이 그녀를 붙잡았다. 작은 심묘 앞에 통통하고 키가 큰 형관생이 서자 압박감이 있었다. 평소의 우아하고 온화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은 침울하고 흉악했다. 양가죽을 벗은 이리처럼 진면목을 드러낸 듯했다.

“심묘, 이 일…… 네가 한 거야?”

“그래요.”

심묘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고백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형관생은 당황했다. 잠시 후 그는 분노해 주먹을 휘두르려 했으나 다행히 경칩과 곡우가 그를 막았다. 심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내가 한 거예요. 관생 오라버니는 날 어찌하려구요?”

“염치도 없구나!”

형관생이 으르렁거렸다.

“염치없는 게 나라고요? 관생 오라버니, 오늘 일을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 있나요?”

형관생은 심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초초의 오라버니인 형관생이 노부인의 계략을 모를 리 없었다. 형초초가 심구와 혼인한다면 그에게는 이익만 있고 해는 없을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 심구가 심원으로 바뀌어 있는 상황이라니.

“누이를 패로 삼아놓고 내게 염치가 없다니, 너무 역겹지 않나요?”

“너!”

심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은 이미 이렇게 됐어요. 관생 오라버니는 방법을 바꿔 생각해도 될 거예요. 초초 언니는 이미 많은 사람 앞에서 순결을 잃었으니 장래에 좋은 곳에 시집갈 일은 없을 거예요. 누가 음탕한 여자와 혼인하길 바랄까요?”

심묘는 여유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악랄한 심묘의 말에 형관생은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나 심묘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으니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초초가 이런 처지가 되었으니 장래에 좋은 집안의 남자와 혼인할 리 없었다. 고귀한 가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육촌 사이인 걸 봐서 알려줄게요. 사실 심가와의 혼인은 형가에게 아주 좋은 일인 셈이에요. 큰오라버니와 혼인하든 둘째 오라버니와 혼인하든 별 차이 있을까요?”

심묘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둘째 오라버니는 어린 나이에 벼슬에 올라 장래가 창창하고 큰오라버니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한 점이 없죠. 육촌 언니가 큰 올케가 아니라 둘째 올케가 된 것일 뿐. 누이를 이용해 장래를 편하게 하려고 한 당신에게 손해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댔다.

“사람은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 * *

심부의 가족 연회 중 발생한 추악한 일은 소문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들만 모를 뿐 명문대가 부인들 사이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심 노부인이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며 한 말은 오히려 자신을 옥죄는 밧줄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두 남녀가 혼인한다면 가장 뛰어난 손자가 손해를 볼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체면이 깎여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게다가 노부인은 이 일 때문에 대방과 철저히 교착 상태에 빠졌다. 사실 지금까지는 대방이 양방에게는 냉정해도 노부인에게는 그런대로 도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회 때 보인 노부인의 앞뒤가 다른 태도에 심신과 나설안은 격노했다. 그들은 이제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즐겁게 구경하기로 했다.

심원과 형초초가 깨어난 후, 형초초는 한바탕 눈물을 보였다. 그녀는 심원에게 끌려 들어갔다고 말했고, 심원은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깨어나 보니 형초초와 함께 누워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심원은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형초초도 반드시 순결을 잃었다고 말할 순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순결한 몸인지 아닌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의 동침을 보았으니 형초초의 인생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일에 자극을 받은 건지, 다른 원인이 있는 건지 형가 오누이는 이전의 온화하고 유순한 태도를 바꿔 기세등등하게 심원에게 타당한 답을 요구했다. 그들은 노부인이 이전에 형초초가 심부의 큰 손자며느리가 될 거라 말했으니 둘째 손자며느리로 삼아줘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치밀하게 계획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심원은 노부인의 가장 출중한 손자였다. 그녀는 그런 귀한 손자를 가난한 집안 출신과 혼인시킬 수 없었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형관생은 형초초를 데리고 관아으로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점잖아 보였지만 뼛속까지 영악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소주에 이를 알렸으니 편지를 받은 소주 사람들이 노부인의 모순된 언행을 따지러 정경성에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맹은 옛일이 되었다. 노부인은 온종일 형가 오누이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크게 욕했다. 형가 오누이도 노부인이 나이만 많지 존경할 점이 없다며 비꼬기 일쑤였다. 여기에 당사자인 심원 역시 끼어들었다. 그는 분노가 극에 달아 직접 형초초를 죽이려 했지만 이미 일이 너무 커져서 그럴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목격했으니 형초초에게 일이 생기면 누구든 그를 의심할 게 뻔했다. 게다가 형가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동원은 엉망진창이었다.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는 동원과는 달리 서원은 화기애애했다. 그날 심구는 취하지 않았다. 심묘는 가족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지 않았으나, 심구에게는 취한 척 연기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심구는 그 당시 심원과 형초초가 왜 같이 있었는지조차 그 연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를 추측한 듯 송경당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심묘는 탁자에 앉아 주방에 줄 요리법을 적고 있었다. 형초초가 대방에 와서 아첨할 수 없게 되자 심묘도 매일 연습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심신과 병사들은 심묘가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요리법을 써서 주방에 전달했다. 병사들은 그녀의 요리를 칭찬하며 심구보다 심묘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나설안이 심묘에게 물었다.

“교교, 언제 이렇게 많은 요리법을 배웠니? 혹시 요리에 흥미가 생긴 거야?”

심묘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기꺼이 음식을 만들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는 여자가 아니었다. 단지 전생에서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배워놓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동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다르기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고맙게 여겼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원수로 갚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에는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든 감동하고 고마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백로는 심묘가 쓴 요리법을 주방에 전달하러 나갔다. 현재 서원은 동원과 함께 식사하지 않고 서원의 음식은 작은 주방에서 직접 준비했다. 동원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경칩이 심묘를 대신해 탁자 위의 종이와 먹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노부인 마님과 형가 공자가 또 싸웠답니다. 형가 사람들도 이미 오고 있는 듯한데, 노부인 마님께서 시간을 끄시니 초조한가 봐요.”

심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할 말은 이미 모두 했어. 형관생 오라버니는 똑똑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을 헛되이 이롭게 해줄 리 없어.”

“형가 공자도 정말 흉악해요. 지금 온종일 관아에 보고할 거라고 협박하고 있어요. 자꾸 이러면 이제 막 수도로 부임한 둘째 공자님한테 좋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러네요. 제가 볼 때 둘째 공자님이 형가 소저와 혼인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노부인 마님께서 노주인 어르신의 가훈을 저버릴 수는 없지요.”

곡우는 기쁨을 강하게 억눌렀으나 목소리가 높이 나부끼는 건 숨기지 못했다. 노부인의 계략이 얼마나 지독한지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는데, 지금 제 발등을 찍었으니 후련할 수밖에.

“형가 소저가 이렇게 온갖 수를 다 짜내 둘째 공자님과 혼인하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텐데요. 노부인 마님과 이미 감정이 틀어졌고, 둘째 공자님도 반기지 않으시니 시집와도 금실이 좋지 않을 겁니다. 형가 소저 스스로 고난에 빠지는 것 아닌가요?”

경칩의 질문에 심묘는 살짝 냉소했다.

“형초초 언니는 사람에게 시집가는 게 아니라 은자에 가는 거야. 금실이 좋든 말든 상관없을 테야.”

전생에 심구는 형초초에게 진심을 다해 잘해줬지만, 그녀는 심구를 절망으로 끌고 간 인물이었다. 형초초는 위로 오를 수만 있다면 상대방이 누군지 중요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곡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형가 소저는 큰공자님을 해치려 했는데 이렇게 멀쩡히 시집간다니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어쨌든 이 일에 큰 책임이 있잖아요. 어째서 악인은 벌을 받지 않는 걸까요?”

그러자 심묘가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넌 이렇게 끝날 거라고 여기는 거야?”

곡우의 눈빛이 밝아졌다.

“아가씨는 한 수를 남겨두신 건가요?”

심묘의 수완에 견문이 넓어진 곡우는 태연하게 대응했다. 이전이라면 심묘의 박정하고 악랄함에 놀랐을 테지만 많은 일을 겪으며 심부 양방 사람에게 갖고 있던 일말의 호감도 없어진 지 오래였다. 동정과 연민은 일찍이 날아가 버렸다.

“그들이 지금 가슴앓이하는 건 시작에 불과해. 형초초 언니가 먼저 오라버니를 음해했으니 쉽게 놔줄 순 없지.”

경칩과 곡우가 반짝이는 시선으로 심묘를 쳐다보았다. 심묘는 손을 휘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복아에게 은자를 주거라.”

노부인은 형초초와 형관생을 상대하느라 심원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진상을 알아낼 시간이 없었다. 복아는 조만간 집사 외눈박이 아들에게 시집을 갈 터였다. 은자는 그녀가 심부를 도망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곡우는 은자를 받고 미소 지었다.

“저 알 것 같아요. 형가 소저 곁의 여종에게도 은자를 주면 될까요?”

심묘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아프게 물리는 것은 곁에서 기른 개가 무는 것이었다. 전생의 자신에게 소이자가 그랬듯. 그러나 이전에 손해를 본 것은 이전의 일. 이제는 그때 얻은 교훈을 돌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 * *

심원과 형초초의 정혼 사실이 온 정경성에 퍼졌다.

심원은 심부에서 출중한, 전도유망한 공자였다. 밖에서 몇 년 경험을 쌓고 정경성으로 돌아와 부임한 그에게는 창창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경성 안에서도 가세와 용모가 모자라지 않으니 그를 도울 수 있는 아내를 맞이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주에서 온 가난한 집 딸을 선택했다. 아무리 심 노부인의 친정이라고 해도 다른 높은 가문은 절대 이렇게 가난한 집안의 딸을 소부인으로 삼지 않았다.

이 일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암암리에 의견이 분분했다. 심원이 형초초를 아내로 삼는 이유는 술에 취했을 때 그녀와 함께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심원 역시 형가가 관아에 보고하게 놔두느니 가난한 집안 딸과 혼인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거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 일은 귀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심귀는 조회에 참석할 때마다 동료들의 조롱 섞인 시선을 받았다. 심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원과 심귀는 이 일로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으나 형초초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 안에서 간식을 맛보며 무료한 나날을 즐길 뿐이었다. 노부인과 갈라선 후 그녀는 더는 온순한 양을 연기하지 않고 본성을 남김없이 전부 드러냈다. 그녀는 심원의 약점을 잡아 심부의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아주 흡족했다. 그녀의 곁에는 소주에서 데려온 여종 도원이 있었다. 형초초는 심부 사람을 믿지 않아 모든 일을 도원에게만 맡겼다.

“대인와 마님은 머지않아 도착하실 겁니다. 아가씨의 혼례가 얼마나 화려하게 치러졌는지 온 소주 사람이 다 알게 될 거예요.”

도원의 말에 형초초가 웃었다.

“내 고생이 헛되지 않았네.”

갑자기 도원이 조금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심원 공자님과 노부인 마님은 아가씨를 싫어하는데, 장래 아가씨가 시집갔을 때 그들이 아가씨를 괴롭히면 어쩌지요?”

형초초가 눈앞의 연지를 세심히 살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겁날 게 뭐야. 심청은 죽고 당숙모는 지금 미쳐서 집안일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낭은 적자의 집안일에 손댈 수 없을뿐더러, 심원 오라버니도 매일 부에 있지 않아. 나 혼자 이방 안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어. 대방에 시집가는 것보다 편할 거야.”

그래도 도원은 염려가 가시지 않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은 그렇지만 만약 둘째 공자님이 첩을 데려오면 아가씨의 번민은 가중될…….”

형초초는 도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게 은덕을 베풀겠다는 눈빛이었다.

“그건 너에게 달렸어. 넌 내 곁에 몇 년 있었지. 충성스럽고 생긴 것도 예뻐. 어느 날 내가 심원 오라버니에게 널 거두라 한다면 넌 나 대신 그를 농락할 수 있을 거야. 너의 충심에 대한 나의 보답도 될 수 있고. 모든 여종이 대갓집 이낭이 되는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건 너도 알지?”

형초초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도원은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아가씨의 말씀에 따를 겁니다.”

형초초는 연지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탁자 위 옥팔찌로 향했다. 그녀는 팔찌를 들어서 보다가 넋을 잃었다.

“그건 손 공자님이 아가씨께 주신 팔찌 아닌가요?”

“손 공자…….”

형초초가 중얼거리며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원은 웃으며 말했다.

“손 공자님은 아가씨께 아주아주 잘해주셨지요. 혹시 아가씨의 정혼 소식을 듣고 상심하시는 건 아닐까요?”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형초초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도원의 말을 끊었다. 도원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손 공자님과 아가씨는 많이 만나시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마음이 맞으셨지요. 공자님께서 진심으로 아가씨를 아끼신 게 아니면 뭐하러 많은 선물을 보내셨겠습니까. 둘째 공자님의 일이 아니라면 손 공자님은 반드시 아가씨를 아내로 삼으셨을 거예요!”

잠시 멍하던 형초초의 얼굴이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부상서부는 고귀한 가문이다. 어떻게 나 같은 가난한 집안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느냐?”

“하지만 손 공자님은 진심으로 아가씨를 좋아하셔요. 공자님이 형가의 사위가 되면 좋았을 텐데. 손 공자님은 아가씨를 보물처럼 아끼시잖아요. 시집가시면 손 공자님은 아가씨의 손아귀에 있을 거예요.”

도원의 말은 거침없었다. 형초초는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도원의 말을 끊었다.

“그만하거라. 내가 심부를 선택했으니 이제 와 손 공자를 이야기하는 건 의미 없다.”

심원과 형초초는 원래 소원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 일로 몹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도원의 말을 잘랐지만 형초초도 비교할수록 손재남이 좋다고 느껴졌다. 손재남은 인물이 훌륭하고 씀씀이가 크며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하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사람은 얻을 수 없는 물건을 마음에 두고 잊지 않는 법이다. 도원의 말은 개미가 심장 위를 기어가듯 가렵고 짜릿했다.

잠시 후 도원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손 공자님과 한번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공자님이 내부 사정을 모르시니 이 일을 뒤늦게 아시면 아가씨를 나쁘게 오해할 수 있어요. 아가씨가 직접 사정을 설명하면 오히려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평생 손 공자님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워요. 게다가 지난번 만나셨을 때 손 공자님이 다음에 아가씨께 잠자리 보석 비녀를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형초초의 눈빛은 흔들렸다. 그녀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것은 손재남이 끊임없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가 주는 선물은 하나같이 형초초에게 과분했다. 심원과 혼인해도 허영심을 계속해서 채워준 손재남을 잊는 것은 쉽지 않을 터였다. 잠시 생각하던 형초초가 결심한 듯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그에게 직접 설명해 줘야겠어.”

“그러나 아가씨는 지금 둘째 공자님과 혼약하셨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여선 안 됩니다. 제게 맡기세요. 제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아가씨와 공자님께서 단둘이 이야기하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형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심원은 큰 걸음으로 뜰을 걸었다. 그의 이마에는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매일 사람들의 조롱 가득한 시선을 무릅써야 했다. 사실 사람들도 심원이 음해당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가 술에 취해 어느 댁 딸과 잔 일은 정경성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의든 아니든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사람들은 인재인 심원이 여인의 조잡한 수완에 넘어간 원인을 마음에 두었다. 더구나 그 원인이 심부 머저리와 얽힌 듯하니 한층 흥미로운 일이었다.

부수의는 따로 지적하지 않았으나 그를 대하는 태도는 냉담해졌다. 지금 심원은 부수의가 비밀리에 배양한 심복으로 언젠가는 밝은 곳에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점이 있으니 부수의의 체면도 깎아 먹을 터였다. 능력은 출중하나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인 부수의에게 심원의 이번 실수는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

심원도 아주 답답했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아무 기반도 없는 형초초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니. 형초초가 재물만 보며 사람은 모르는 상스럽고 가난한 집안 딸인 것을 모두 아는 판국에 그런 여인을 아내로 삼아야 한다니. 미래에 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아가씨가 있다 해도, 비웃음을 당할까 걱정해 시집오지 않을 터였다.

심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을 맹렬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심묘와 두 여종이 화원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심묘는 서원에서 외출하지 않아 이방의 고난에 무관심했다. 오히려 더없이 밝아 보였다. 심원을 본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심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형초초와의 일 이후로 둘은 만난 적이 없었다. 심원은 심부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심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난처한 처지에 떨어진 게 전부 심묘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이대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

심원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을 마주하며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오라버니와 초초 언니의 정혼을 축하한다고 전하지 못했네. 둘째 오라버니, 축하해요. 미인의 사랑을 얻게 되었네.”

말속의 비웃음은 그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심원이 차갑게 말했다.

“고마워. 심묘, 너는 능력이 좋구나.”

심묘와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기쁨에 찬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분노했다.

“나무가 홀로 유별나게 크면 바람은 반드시 그 나무를 부러뜨린다고 하지. 이 말, 반드시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러자 심묘가 과장되게 탄식했다.

“오라버니, 나는 스스로를 키 큰 나무라 여기지 않아. 모두 날 머저리로 아는걸. 우수한 건 오히려 둘째 오라버니잖아. 바람이 부러뜨리는 건 내가 아닐 거야.”

심원이 천천히 반문했다.

“그래? 너는 지금 만족스러운가 봐? 내가 형초초와 혼인해서 내가 진 거라고 여기는 거야?”

심묘는 매우 겸손했다.

“어떻게 그래? 난 둘째 오라버니가 완강하고 질긴 걸 알아. 의지가 강하니 이런 작은 일은 오라버니의 안중에 없겠지. 아직 결론 내기는 일러.”

“결론이 네 생각만큼 그리 늦게 나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모든 일이 곧 끝날 수도 있지.”

심원은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몹시 음산한 웃음에 곡우와 경칩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묘 역시 눈썹을 치켜세우고 되물었다.

“또 날 음해하려고?”

“왜? 무서워?”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맑고 투명해 어린 동물처럼 천진했다.

“계략에 당하는 것은 두렵지 않아. 다만 다른 사람이 날 음해하지 않을까 걱정이야. 날 음해하지 않으면 내게 기회가 없을 테니까.”

“좋아. 그날이 됐을 때 네가 계속 이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을지 기대할게.”

심원은 냉소하며 성큼성큼 그곳을 떠났다. 동시에 심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경칩과 곡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살짝 놀란 듯했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께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요?”

곡우가 물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원은 가망이 없는데도 오기로 허세를 부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끝이 날 수도 있다는 말에 그녀는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 말은 그녀가 심원에게 해주고픈 말이었다.

“결정 내리기는 아직 이르지만, 결말은 곧 나겠지.”

* * *

정경성 보향루는 노래와 춤, 음악, 여인의 향기로운 웃음으로 행인을 이끌었다. 남자들의 시선은 열망과 흠모로 뜨거웠다. 미녀에게 돈을 물 쓰듯 쓸 수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작은 방. 탁자에 놓인 찻잔은 하룻밤이 지나 차갑게 식었다. 남자가 선잠을 자다가 찻주전자에 이마를 부딪쳤다. 그의 졸음은 깨끗이 날아갔다. 부딪힌 찻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남자는 잽싸게 잡아채 다시 탁자에 올려놓았다.

모경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보향루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잔도 솜씨 좋은 공예가의 작품이라 깨뜨리면 무조건 은자로 배상해야 했다. 심묘가 많은 금권을 주었으나 이 금권은 류형을 볼 때만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헛되이 쓸 수는 없었다.

그때, 손뼉 소리가 났다. 침상 위 미녀는 차가운 눈으로 모경을 바라보며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아첨했다.

“좋은 무예입니다. 정말 사람의 견문을 넓혀주시네요.”

모경은 여자가 드러낸 아름다운 어깨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오른 해를 보며 기뻐했다. 태양이 나왔으니 하루는 이미 지나간 셈이다. 앞으로 이틀은 편안히 지낼 수 있을 터였다. 그의 얼굴에 홀가분한 기색이 드러났다.

하지만, 류형의 얼굴에는 서리가 끼었다. 그녀는 그가 일어나기 전에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모 공자.”

모경이 무표정하게 류형을 바라보았다. 류형은 그런 모경을 천천히 관찰했다. 모경이 보향루에서 류형을 찾은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사흘에 한 번 와서 은자를 주면서도 그녀에게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가 의자에 하룻밤 앉았다가 갈 뿐이었다. 처음엔 그녀도 모경이 무슨 놀이를 한다고 여겼다. 그녀는 여러 해 기녀 생활을 했고 어려서부터 마마에게 철저히 훈련받아 괴벽 있는 손님도 여럿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단지 모경을 그런 손님 중 하나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날이 계속되자 류형도 심히 혼란스러웠다.

류형은 일찍부터 모경을 건드렸으나 그는 한 번도 넘어오지 않았다. 늘 단정한 태도로 담담한 척하면서도 그녀의 유혹에 귀밑까지 빨개지니 총각이 분명했다. 게다가 모경은 무공이 높으니 류형은 그의 몸에 원하는 만큼 접근하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남자에게 아첨을 받아만 왔지 이렇게 자신이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의미 없는 쟁탈은 위신을 떨어뜨릴 뿐이란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아침이 되어 모경이 홀가분하게 떠날 때면 사그라들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다. 모경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피하니 난생처음 겪는 치욕이었다.

“모 공자, 만일 제 몸이 깨끗하지 않아 싫으신 거라면 보향루의 다른 아가씨를 찾으셔도 됩니다. 매일 새로운 아가씨가 들어오지요. 그들은 눈처럼 깨끗하니 모 공자는 저에게 은자를 낭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 오해를 사실 필요도 없고요.”

류형이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했지만 울컥한 듯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모경은 곤란했지만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심묘가 그에게 준 임무는 정말 가시방석이었다. 그는 차라리 심부 입구에서 며칠 연속으로 야간 경비를 서는 게 나을 거라고 속으로 눈물 흘렸다.

모경이 말이 없자 류형은 더욱 분노했다.

“모 공자, 다음에는 오지 마세요. 저는 모 공자의 은자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일하지 않고 은자만 갖다니요. 공자 눈에는 천해 보일지 몰라도 저는 고생해서 지금의 자리에 올라온 것입니다. 제 명예를 망가뜨리지 마세요!”

목소리를 높인 류형은 고개를 홱 돌렸다. 모경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코를 어루만졌다. 무슨 말을 해도 도움이 안 될 터였다. 자기 자신부터도 이해하지 못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류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보향루는 점잖게 차만 마시는 곳이 아니니 그녀가 모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경은 은자를 놓고 떠났다.

류형의 여종이 들어와 류형의 불만 어린 시선을 보고 위로했다.

“아가씨, 화내지 마세요. 모 공자는 매번 은자를 가지고 오시네요.”

은자를 본 류형은 더욱 분노했다. 그 은자는 별도로 류형에게 주는 것으로 마마와 나눌 필요가 없었다. 류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분노했다.

“흥! 이딴 것! 누가 소중히 여긴다고!”

그녀는 성을 내면서도 창 너머로 사람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모경은 입구에서 그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아가씨들을 밀어내고 걸어가고 있었다.

“모 공자는 좋은 사람이에요.”

여종이 중얼거렸다.

“그 속을 누가 알겠어?”

류형이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잠시 멍해졌다. 누군가 거리 구석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똑똑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남색 장포를 입고 있다는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희미한 형상임에도 기개가 느껴졌다.

류형은 둥글게 생긴 부채를 가볍게 부쳤다.

“내가 예쁘게 변했나. 어떤 사람이 날 쳐다보네?”

“아가씨는 예쁘게 생기셨으니 아가씨를 보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여종이 달게 말했다. 류형은 입을 삐죽이며 창문을 닫았다.

“전부 괴상한 사람이야.”

거리를 걷던 모경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남색 장포를 입은 남자를 주시했다. 그 사람은 류형의 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낯익었다. 모경은 심묘를 호위하던 중 이 사람과 만났던 걸 떠올렸다. 경칩이 심묘의 광문당 선생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아마 이름이…… 배랑.

* * *

며칠 후. 형초초 남매의 부모, 형가 부부가 정경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형초초의 모친은 딸이 팔자가 사납다며 통곡하는 걸 잊지 않았다. 심지어 관아에 보고해 반드시 심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며 정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형가 부부가 이득을 봤다고 속으로 기뻐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혼인에서 우위에 서서 하나라도 더 챙기길 원할 따름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친정 사람이 세력을 믿고 날뛰는 모습이 부에서 사리를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해왔던 심 노부인과 아주 비슷했다. 몇 번 힘겨루기가 오갔지만, 결국 열세에 처한 쪽은 역시나 심부였다. 심부는 여덟 명이 드는 호화스러운 가마로 형초초를 데려오고 대단한 예물로 보상하기로 했다.

노부인은 한동안 매일 형가 부부의 이익을 탐하는 얼굴과 마주했다. 가슴앓이가 계속되니 자칫 중풍에 걸려 눈과 입이 삐뚤어질 뻔했다. 그 이후 그녀는 송경당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형가 사람은 작은 일을 크게 과장해서 말하길 즐겼다. 그들은 전력으로 형초초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포장하면서 그녀의 혼례에 대해 떠들어댔다. 불과 며칠 사이 정경성 백성들도 모두 심원이 소주에서 온 형초초와 혼인하는 것을 알게 됐다. 백성들은 심부의 비밀은 몰랐고 그저 심원이 형초초의 온유한 아름다움을 사모해 진심으로 대한다고 여겼다. 심원은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 * *

상서부에 있는 손재남은 초대장을 보고 두세 번 구겨 던졌다.

“심원, 이 망할 자식!”

그는 심원이 원망스러웠다. 가까스로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다. 정경성에서 많은 여자를 보았지만 형초초는 소주에서 왔기 때문에 남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마음에 둔 여인을 놓친 적 없었다. 게다가 형초초에게 들인 시간과 재물은 특히나 많았다. 그런데 심원이 중도에 방해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남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가 아가씨와 심가 둘째 공자님도 오해로 어쩔 수 없습니다.”

세가 명문대가는 이 일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심부 가족 연회에서 발생한 일을 손재남 역시 일찍이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형초초 그 천한 것. 내 물건을 받아놓고 날 가지고 놀아?”

손재남은 아주 불만스러웠다. 그는 형초초 같은 여인을 많이 보았다. 그런 여인은 은자와 이익을 준다면 쉽게 농락할 수 있었다. 연회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은 형초초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였다. 물건은 자신에게서 받아놓고 시집은 심가에 간다니. 여인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만큼 손재남에게 치욕적인 일은 또 없었다.

“공자님은 어찌하실 건가요? 아가씨의 초대에 응하실 건가요?”

남종의 물음에 손재남은 구겨진 초대장을 힐긋 쳐다보았다. 초대장은 여인의 향기같이 향기로웠다. 형초초처럼 온순하고 무해한 겉모습에 본분을 지키지 않는 마음이 적힌 내용. 그녀는 다른 사람과 혼인하면서도 여전히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재남은 차갑게 웃었다.

“물론. 그 많은 은자를 쓰고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있지. 심원이 먼저 목적을 달성했다니 불만스럽지만 나도 이루지 않으면 안 되겠어. 가겠다고 답장해라.”

* * *

심원은 부에 거의 없었고 형초초가 어떻게 말썽을 부리든 얼굴을 내미는 일은 드물었다. 심부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진약추였다. 심 노부인의 분노를 감수해야 하는 한편 형가 사람의 끝없는 욕심도 만족시켜야 했다. 안 그래도 부족했던 공동 자금은 점점 더 줄었다.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지를 않으니 걱정이었다.

“부인, 요 며칠 어째서 계속 수심에 싸여 있소?”

조정에서 돌아온 심만이 진약추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걱정했다. 진약추는 간신히 웃었다. 그녀는 심만에게 은자의 일을 털어놓기 싫어 다른 핑계를 댔다.

“형가 사람이 온종일 부에서 소란을 일으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심만도 탄식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이득을 탐하시다 되려 손해를 봤지. 심원도 발목을 잡혔고.”

심원과 형초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심부 사람은 모두 알았다. 당시 삼방은 방관하며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고자 하면서도 대방을 두려워했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이방을 도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방은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건 이방이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졌으니 삼방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약추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도 고생하셨지요. 조정에서 손가락질당하셨을 거예요.”

부가 이렇게 어지러우니 명문대가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거친 무신인 심신은 손가락질이 두렵지 않으나 심만은 명성을 중시해 홀가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심만은 진약추의 손을 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뭐라고. 다만 심원이 혼인하면 이후 관직에서 도움받기는 어려울 같소. 심원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는데.”

심만이 탄식했다. 진약추는 덩달아 조급해졌다. 심만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심원만이 그를 도울 수 있었다. 관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가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파벌이었다. 심원이 관가 소저와 혼인한다면 심만의 조정 내 입지도 한결 튼튼해질 터였는데, 형초초와 혼인하니 미래의 날개가 생기기도 전에 꺾인 셈이었다.

진약추는 고개를 숙였다.

“누가 알겠어요. 지금 심묘가 이렇게 대단하게 변해서 아주버니 일가는 정말 상대하기 어렵게 됐어요.”

진약추의 걱정에 심만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할 필요 없소. 심원은 보통 사내가 아니오. 심묘가 심원을 음해했으니 심원은 반드시 보복할 것이오. 형님과 형수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 때가 있을게요.”

“대인의 뜻은…….”

진약추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심만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최근 심원이 조금 기이한 행보를 보이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소.”

* * *

서원.

심묘가 편지를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심원 오라버니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모경이 소리 낮춰 말했다.

“아가씨, 제게 보향루를 지키라 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계속하거라.”

심묘가 모경의 말을 끊었다. 모경의 안색은 한순간에 나빠졌다.

“하지만 광문당의 그 배 선생이 근처에 있었습니다. 무슨 다른 분부라도?”

모경은 심묘가 무엇 때문에 보향루의 류형을 만나게 하는지 몰랐다. 지난날 배랑을 만났을 때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모경은 심묘가 배랑의 출현을 미리 알고 자신을 보향루에 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묘가 시키는 일은 모두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배랑의 이야기를 듣고도 심묘는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없다. 그냥 그 일을 계속하면 된다.”

곡우는 눈을 깜빡거렸다.

“정인군자같이 보이는 배 선생이 보향루 같은 곳에 갈 거라고 예상 못 했네요. 정말 그런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아, 모경도 그렇게 안 보여요.”

모경의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모경, 보향루로 가는 것 외에도 때때로 심원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여다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심원의 그 마지막 말이 심묘를 계속 불안하게 했다.

모경이 대답하고 떠나자 경칩이 물었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이 무슨 나쁜 궁리를 하는 걸까요?”

“아주 이상한 일이다.”

심묘의 말대로 이상했다. 심원은 형가의 일이 일어난 후 그날 어떻게 변고가 발생했는지도 조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혼례를 저지할 방법도 찾지 않았다. 형초초는 심원과 혼인하려 눈이 뒤집혔지만, 심원이 방법을 쓴다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심원은 그러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심묘는 그 일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심원은 종일 부를 떠나 있으니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정탐하기도 불가능했다.

“아가씨,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맞아요. 도원이 형초초 아가씨가 초대장을 보냈고 화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일 약속한 장소로 간답니다.”

경칩이 별안간 생각난 듯 고했다.

“아주 잘되었구나.”

심묘의 눈이 빛났다. 심원의 동태가 수상하니 일은 일찍 일어날수록 좋았다.

* * *

풍선전당포 림강산 누각에서도 심원의 이야기가 오갔다.

“심원은 이미 심신의 증좌를 모두 수집해 부수의에게 올렸어. 사흘 후 부수의가 황제에게 상소를 올릴 거야. 그때 심가는 재난을 피할 수 없겠지.”

계우서의 말에 고양이 맞장구쳤다.

“군주의 명령을 거역했다. 겉으로 복종하나 속으로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겠군. 큰일은 아니지만 갑옷을 벗기기에는 충분할 터. 심원도 능력 있네. 이런 것을 찾아내다니.”

계우서는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했잖아. 심원은 오랫동안 심신을 처리하려고 했어. 줄곧 방법을 찾았고 그를 이용해서 벼슬을 높일 수 있길 기다렸을 테지. 이번이 아니라 한참 후에 터트렸으면 심신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했을 거야.”

잠시 사색하던 고양이 입을 열었다.

“그래, 부수의는 확실히 안목이 있지. 권세가 큰 심신을 처치하려는 사람은 많아. 명제 황실은 그걸 보고 즐거워하고. 심신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면 황실은 그걸 밟고 올라갈 걸세.”

계우서는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지금 어떻게 해? 심원은 부수의처럼 숨기는 데 도가 텄어. 심가 대방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면 심묘도 고통받을 거야.”

고양은 눈을 흘겼다.

“자네는 아직도 심묘를 생각하나? 심묘가 심원의 사통을 꾸미지 않았다면 심원도 이렇게 빨리 치지 않았겠지. 기다렸다가 심가 대방을 일망타진했을 걸세. 지금 이렇게 손을 쓰는 건 심묘에게 복수하려는 거고. 심원은 심묘를 몹시 증오하니 쉽게 놔주지 않을 거야. 심가 대방의 모두가 목숨은 건질지 몰라도 심묘만은 몹시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걸세.”

고양은 턱을 매만졌다.

“그럼 어떡해? 심원, 이 망할 자식. 심묘에게 상스러운 수완을 쓰진 않겠지? 백부를 음해하려 하는 놈이니 마음이 아주 새까말 거야.”

계우서는 초조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에 고양이 천천히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아무리 심원의 속이 까매도 심묘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니. 심묘가 무슨 수완으로 다 기울어져 가는 정세를 끌어올릴지 아주 궁금하군. 심묘는 예친왕부가 멸문되도록 손을 쓰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지. 이번에도 그냥 당하지는 않을 거야.”

“3형이 떠나기 전 우리보고 심가에 손을 쓰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나서서 도울 순 없겠지만, 심묘는 꾀가 대단하니 심원이 적수는 못 될 거야.”

계우서는 고양을 바라보았다. 고양이 다시 부채를 펼쳐 부쳤다.

“자넨 심묘를 믿나 보네. 나는 그저 심묘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보고 싶어.”

계우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고양은 가차 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네. 사경행이 계획을 앞당기고부터 정경성의 정세는 많이 변했어. 변하지 않은 건 부수의의 야심뿐일세. 심가는 높은 가문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데 부수의가 이용하지 않을 리 없겠지. 더욱이 부수의는 예친왕처럼 어리석지 않아. 어쨌든 심묘는 규방 여인이니 혼자 힘으로 맞서기 어려울 거네. 부수의는 이번에 심신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할 걸세. 그건 심가 대방에게 치명적인 재난이 될 거고, 심신은 그 누구도 보호하지 못할 걸세.”

계우서의 안색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경행은 일찍부터 말했어. 어찌 되었든 간에 심가 대방은 멸망을 피할 수 없어. 사가처럼.”

고양의 시선이 조금 흔들리면서 부채를 흔들던 손이 멈췄다.

* * *

송경당.

형가 부부가 오고 난 후부터 심 노부인이 형가 오누이에게 지내도록 한 뜰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노부인이 기거하는 곳 다음으로 가장 큰 뜰을 점거했다. 게다가 송경당의 하인들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니 송경당의 주인이 형가 부부로 바뀐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침 해가 밝았다. 쾌청한 날씨였다. 형초초는 도원이 가져온 옷을 찬찬히 살펴본 후 하나를 골랐다. 형초초는 거울을 보며 세심하게 눈썹을 그렸다. 입술에는 희미한 연지를 발랐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했다. 아주 정성을 들여 단장했다.

“월백색으로.”

형초초가 말했다. 월백색 의상은 수수해서 그녀의 애처롭고 가여운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오늘은 손재남과 만나는 날이었다. 손재남이 앞으로도 그녀를 마음에 두고 한시도 잊지 않을지 오늘 결정될 터였다. 여인의 허영심 때문인지 손재남에게 정이 동해서인지 지금 손재남과 만나면 자칫 재앙을 불러올 줄 알면서도 형초초는 만남을 꺼리지 않았다.

도원이 의복을 치울 때 형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공들인 딸의 치장이 의아했다.

“초초야, 외출하려고?”

“장신구를 사러 가게요. 심가 이방의 소부인이 될 텐데, 이전 장신구를 착용할 수는 없어요. 경시당할 거예요.”

“아, 그래야지. 그런데 너 혼자 어찌 가니? 나와 함께 가자.”

형초초가 장신구를 사는 은자는 모두 공동 자금에서 나오고 있었다. 형 부인은 딸의 것을 고르는 김에 자신의 것도 고를 심산이었다. 근래 많은 이익을 봤음에도 욕심은 끝이 없었다.

“아니요!”

그러나 형초초가 얼른 거절했다.

“왜?”

형 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형초초는 모친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역 소저와 만나기로 했어요. 장래 정경성에서 잘 지내려면 미리미리 이런 소저들과 교류를 잘해놔야 해요. 그러니 어머니는 오지 마세요. 역 소저는 낯선 사람을 보기 싫어해요. 귀족 소저의 성격이 조금 이상한 거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형 부인은 약간 불만스러웠으나 마지못해 수긍했다.

“귀족 소저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너는 곧 관가 부인이 될 거 아니냐? 됐다. 교류를 잘해야 한다니 따라가지 않으마. 갈 때 호위를 몇 데리고 가거라.”

“괜찮아요. 역가의 호위도 많은데 나도 데려가면 무슨 모양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어머니가 쓰실 장신구를 사 올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형초초는 마저 치장을 끝낸 후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긴장한 낯빛으로 도원에게 물었다.

“네가 찾은 술집은 믿을 수 있는 곳이야?”

“안심하세요. 그 술집은 아주 멀고 외진 곳에 있어서 오는 사람도 적어요. 쓰개를 써서 얼굴을 가리면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형초초는 그제야 안심했다.

마차는 성 남쪽으로 향해 외진 골목 앞에서 멈췄다. 심원과 정혼하기 전에는 손재남을 만나 함께 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명제의 민풍이 개방적이라고 해도 정혼자가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큰 죄였다. 형초초는 쓰개를 바르게 썼다. 거기에 면사를 더해 얼굴을 잘 가린 후 도원의 부축을 받으며 술집에 들어갔다.

술집은 2층 건물이었다. 도원의 말처럼 외진 곳에 자리해 적막했다. 손님이라 봐야 둘씩 셋씩 드문드문 앉아 있는 게 다였다. 사람들은 형초초가 들어오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도원은 주인에게 은자를 주며 웃었다.

“주인장, 어제 예약한 손님방은 어디인가요?”

주인장이 얼른 점원에게 안내하라고 분부했다. 2층 제일 안쪽의 손님방이었다. 도원은 점원에게 인사하고 형초초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형초초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쓰개와 면사를 벗었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아가씨, 먼저 차 드시고 계세요. 공자님도 금세 도착하실 거예요.”

도원이 말했다. 형초초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졌다.

“머리를 좀 정리해줘. 쓰개 때문에 머리카락이 모두 헝클어졌어.”

도원은 웃는 낯으로 아첨했다.

“아가씨는 늘 아름다우시니 걱정 마세요. 오늘은 더욱 아름다우신걸요.”

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초초, 정말 당신이군요.”

손재남이 입구에서 진심 어린 시선으로 형초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초초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나무라듯 도원을 쳐다보았다.

“넌 물러가거라.”

도원이 웃으며 말했다.

“네, 공자님과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없게 지킬게요.”

도원의 말은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형초초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이 나가자 손재남이 형초초에게 다가갔다.

“초초.”

망설이던 형초초는 손재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깊은 호수 같았다. 실의와 미련의 기색이 가득했다. 심묘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형초초의 진실한 연기에 탄복했을 것이다.

손재남은 형초초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초초, 심원과 정혼했다는 게 사실이오?”

형초초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손재남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뒷걸음질 쳤다. 형초초의 눈언저리가 붉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났나요?”

손재남은 멈칫했다. 그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형초초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뇨. 일은 나도 모두 들었습니다. 심원, 그 자식이 강요한 거라구요. 당신도 어쩔 수 없이 그와 혼인하는 거니 나는 당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구요. 그저…….”

형초초는 고개를 숙여 득의의 기색을 숨겼다. 그녀는 손재남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모한다 여겼다. 심원과 혼인해도 자신을 책망하지 못하리라 여기고 나온 자리였다. 그녀는 표정을 가라앉힌 후 고개를 들어 손재남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날 둘째 육촌 오라버니는 날 건드리지 않았어요. 당시 많은 사람이 보고 있어서 설명하기 어려웠을 뿐이에요. 손 공자, 난…… 여전히 순결한 몸이에요.”

형초초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날 둘 사이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사실을 말할 방법이 없을 뿐이었다. 형초초는 여전히 순결한 몸이었다. 하지만 심원과 심 노부인은 이를 몰랐다. 그녀는 일부러 오해를 바로잡지 않았다. 노부인과 심원이 사실을 안다면 크게 떠들어댈 게 뻔했고, 그것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손재남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남자는 늘 자기 여인이 순결하길 원했다. 형초초와 심원에게 무슨 일이 정말 있었다면 손재남은 속으로 근심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손재남은 형초초를 더욱 동정할 터였다.

“뭐라고?”

형초초의 말을 들은 손재남은 멍해졌다. 형초초는 고개를 들어 눈물 고인 눈으로 말했다.

“여자는 당연히 사모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해요. 나와 손 공자가 좀 더 빨리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둘째 육촌 오라버니와 나는 이미 오해를 샀으니 다른 길은 없어요. 손 공자는 이제 이런 나를 싫어하시나요?”

손재남이 형초초를 품에 껴안고 위로했다.

“내가 어찌 당신을 싫어하겠소? 내 심장은 늘 당신을 향해 뛰고 있는데!”

손재남의 얼굴이 한없이 기쁜 기색이 스쳤다. 그는 형초초의 순결을 심원이 취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제 와 형초초와 잔다고 해도 투자를 제대로 회수하지 못하는 셈이니 분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형초초는 순결을 잃지 않았다.

형초초는 손재남의 품에서 몇 번 발버둥을 쳤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가만히 안겼다. 손재남이 천천히 그녀의 치마끈을 풀었다.

그때, 말을 타고 온 누군가가 술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말을 점원에게 맡기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주인에게 은자를 내밀었다. 익숙한 듯 안내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에게 점원이 외쳤다.

“공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심원이었다. 심원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점원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달렸다. 그와 스치는 순간 심원은 순간 그의 혼잣말을 들었다.

“온 천하 사람이 부인의 간통을 알다니, 정말 불쌍하군.”

심원은 아래층을 바라보았다. 손님들은 그를 흘끗흘끗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무언가 일러주는 듯했다. 심원의 표정이 점점 음산해졌다.

이 술집은 그가 평소에 종종 오는 곳이었다. 때때로 부수의의 사람과 소식을 나눌 때 이곳에서 했다. 아홉 황자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수의는 야심을 가장 깊이 숨겨 그의 수하도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심원은 이곳에 올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등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했다. 이곳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지금 상황은 조금 기이했다.

심원은 찝찝함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계단을 밟았다. 그가 부수의의 사람과 비밀리에 접하는 곳은 2층에 있었다. 가장 안쪽, 손님 방으로 갔을 때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도원은 심원을 보고 몹시 놀랐다. 심원은 형초초의 여종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의아해하며, 의심을 품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도원이 그를 막을 새도 없이 심원이 방문을 발로 찼다.

침상에는 두 사람이 겹쳐 있었다. 바닥에는 옷가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도원이 문가에서 외쳤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 오셨어요!”

침상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어나 앉았다. 눈같이 하얀 몸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형초초였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심원을 바라보았다. 심원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손재남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외동으로 오냐오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그는 형초초와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분노한 듯했다.

“넌 누구냐?”

정신을 차린 형초초가 손재남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이 사람이 강요한 거예요. 나, 나는 원치 않았어요!”

손재남이 발뺌하는 형초초의 뺨을 내리쳤다.

“천한 것! 네가 초청해놓고 모르는 척하느냐!”

분노한 도원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공자님! 어째서 아가씨를 이렇게 대하는 거예요? 아가씨에게 왜 이러세요? 설마 우리 둘째 공자님을 간통 피해자로 만드시는 건가요? 둘째 공자님과 맞서려는 건 아니죠?”

도원의 말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으나 그를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손재남이 냉소했다. 그는 심원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관찰하다가 거만하게 웃었다.

“둘째 공자? 그래, 내가 너희 둘째 공자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다, 왜? 심원, 넌 아직 네 정혼자의 맛을 보지 못했지? 아주 좋거든.”

“허, 허튼소리 말아요! 우리 아가씨는…….”

손재남이 과장하며 심원을 보았다.

“너희 아직 몰라? 여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구먼. 조정에서 능력 있으면 뭐 해. 네 여자는 나와 잤어. 그런데도 넌 이 여자와 혼인을 해야 하지. 헌 신을 줍는 느낌이 어때?”

심원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그는 달려들어 손재남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

“네가 감히 날 때려?”

응석받이로 자란 손재남이 기어 일어나 심원에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무장 출신이 아니기에 무작정 서로에게 주먹을 날렸는데, 심원은 손재남보다 키가 작아서 점점 열세에 처했다. 결국 그는 손재남에게 짓눌렸다.

“나쁜 놈!”

도원이 심원을 도우려 뒤에서 달려들었다. 도원이 손재남을 껴안자 빈틈을 발견한 심원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에 차가운 물건이 닿자 깊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 물건을 잡아 손재남을 향해 휘둘렀다.

푹, 무언가 찌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함께 주변이 멈춘 듯했다. 잠시 후 도원은 비명을 질렀고 형초초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은으로 된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손에는 칼자루만 있었다. 남은 칼날은 손재남의 배에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피의 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풀썩. 손재남은 그대로 쓰러졌다.

* * *

심부 서원.

돌 탁자에 마주 앉은 심묘는 심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오늘은 심구가 검술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드문 날이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바둑 솜씨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심묘에게 한 판을 따내고 말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승부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심묘가 세력을 믿고 날뛰던 심구의 흰 돌을 검은 돌로 포위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심구는 멍하니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심묘야, 이건 첫판에 내가 사용했던 수 아니야?”

심구는 바둑판을 들여다볼수록 검은 돌의 위치가 익숙함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심묘는 그의 수를 이용해 전세를 회복했다. 심지어 더 잘 사용했다. 그녀는 자유자재로 살기등등하게 적의 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썼던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린다. 오라버니, 오라버니의 수에 대책을 찾을 수 있겠어?”

심묘가 미소 지었다. 심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이 방법으로 적을 막다른 길로 몰았어. 이제 와 내게 대책을 찾으라고 해도 찾지 못해.”

심묘는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을 보며 담담히 웃었다. 전생에서 심구는 손재남을 죽여 수감됐다. 심묘는 그 배후에 비중이 작든 크든 심원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번 생애에 같은 수완으로 돌려줬으니 심원도 익숙하다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전에 그 자신이 심구를 밀어 넣은 막다른 길에서 심원은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심구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음 수를 놓으려 할 때,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하는 이급 여종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큰일입니다. 공자님, 아가씨, 둘째 공자님이 사람을 죽였답니다!”

“뭐라고?”

심구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쥔 바둑돌이 떨어져 빙그르르 돌다가 멈췄다. 심묘는 허리를 굽혀 바둑돌을 주웠다. 그녀는 여종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둘째 오라버니가 누굴 죽였느냐?”

* * *

경조윤의 감옥. 가장 안쪽에 심원이 갇혀 있었다. 손과 의복은 피로 붉게 물들어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심원의 얼굴도 조금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렇게 난처한 처지에 떨어진 건 처음이었다.

형초초의 간통을 목격했을 때 그는 순간 머리에 피가 몰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손재남은 이미 칼에 찔려 죽어 있었다. 술집은 조용하니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모두가 들었다. 게다가 도원과 형초초가 비명을 질러 사건은 금세 발각되었다.

심원의 마음은 점점 냉정해졌다. 오늘 일은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자신이기에, 누군가가 자신의 존엄을 능욕하는 것을 가장 증오했다. 심부 가족 연회의 일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 굴욕이었으나, 그때는 소생할 기회가 있기에 참아 넘겼다. 그러나 지금 온 정경성 사람이 자신과 형초초가 혼인할 것을 알고 있는 판국에 형초초는 간통을 했다. 술집 사람들이 수근대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자 더 이상 분노를 통제할 수 없었다. 형초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이 일은 그녀가 초래한 것이니 그녀도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하리라.

심원은 여전히 술집 사람들이 어떻게 그와 형초초를 알아보았는지 의아했다. 형초초는 왜 그 시간에 그곳에서 내연남을 만났을까. 은은하게 피어나는 의혹이 있었으나 그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심원이 부수의의 사람과 연락하는 곳으로 부수의의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만나기로 했던 부수의의 사람도 술집에 도착해서 이 일을 알게 됐을 것이었다. 심원은 깊이 생각했다. 완전히 냉정해지자 당혹도 깨끗이 사라졌다. 감옥의 음산한 분위기는 그를 동요시키지 못했다. 그때, 옥졸이 그의 감옥 앞에서 멈췄다. 심원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놀라고 기뻐 외쳤다.

“동호!”

동호는 바로 그와 연락하려던 부수의의 사람이었다. 심원과 대화하려고 옥졸 분장을 한 뒤 섞여 들어온 것이었다. 심원이 얼른 해명했다.

“내 말을 들어보시오. 이 일은 모두 오해입니다. 이번에 전하께서 도와주시면 장래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심원은 심귀가 그를 구하러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심귀는 벼슬길에 해가 될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를 도울 사람은 부수의뿐이었다. 그러나 황실 사람은 인정을 모르기에 자신의 이용 가치를 호소해야 했다.

“전하께 드린 증좌는 조금 완전하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곧 폐하께 상소를 올리실 테지요. 전하께서 방법을 생각해 절 구해주시면, 전하를 위해 제가 완벽하게 보충하겠습니다.”

동호의 시선이 흔들렸다. 심원의 말은 부수의에게 건넨 심신에게 불리한 증좌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했다. 심원은 부수의가 토사구팽할 것을 대비해 한 수를 남긴 것이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로 앞당겨 쓸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그걸 아까워할 때가 아니었다. 동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심원은 조급해졌다.

“이 일은 오해이니 처리하기 힘들지 않습니다. 은자는 제가 낼 테니 전하께 전해주십시오. 이런 일은 이전에도 발생했었습니다.”

심원이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 원인은 이 때문이었다. 이 일은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었다. 심부 가족 연회 때보다 간단하니 결코 수렁에 빠진 게 아니었다. 연회 일은 많은 부인이 그와 형초초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데다 그가 아가씨의 순결을 더럽힌 가해자가 되었기 때문에 심각했다. 게다가 형가 사람은 이치를 따질 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심원이 사람을 죽인 것은 오직 형초초와 도원만 보았다. 두 사람만 증인으로 서주면 그는 빠져나갈 수 있었다. 유족을 은자로 위로한 후 부수의 사람이 희생자에게 죄명을 마음대로 붙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심원을 암살하려 해 심원과 대치하던 중 일이 생겼다는 둥 다양한 이유를 덧붙이는 게 가능했다. 죽은 사람이 귀족 대부호만 아니면 충분히 덮어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저 사람이 죽은 것만 알았지, 누가 죽었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그러나 동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원, 자네는 이번에 큰 말썽을 불러왔네.”

이에 심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동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불안해졌다.

“자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심원은 초조한 눈빛으로 어둠 속 동호의 입을 좇았다.

“이부상서의 유일한 적자. 손천정의 아들 손재남일세.”

* * *

많은 사람이 심부 입구를 둘러쌌다. 모두 막대기를 들고 흉악한 표정이었다. 입구를 지키는 호위들은 그 흉흉한 기세에 밀려 어쩔 줄 몰라 했다. 별수 없이 심귀와 심만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막았다. 심신의 심가군이 체류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무리는 진작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 터였다.

심모는 진약추의 품에 안겨 덜덜 떨었다.

“어머니, 정말 둘째 오라버니가 사람을 죽인 거예요?”

진약추는 딸을 달래고는 있었지만, 자신도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심부를 둘러싼 이들은 이부상서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심원이 이부상서의 적자 손재남을 죽였다며 떠들썩하게 몰려왔다.

만 이낭은 작은 방 안, 병풍 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해 심동릉의 손을 끌어당겼다.

“정말 둘째 공자가 사람을 죽인 걸까? 저 사람들이 우리를 어찌하진 않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은 둘째 오라버니만 처리하려고 할 거예요.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어요.”

심동릉은 침착하게 모친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 앞에 놓인 책은 한 장도 넘어가질 않았다.

* * *

경칩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외부 사람이 흉악하게 떠들어대서 노부인 마님이 놀라셨답니다.”

심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오? 조모는 어떠시대?”

“둘째 공자님이 사람을 죽였단 말을 듣고 바로 혼절하셨어요.”

경칩은 노부인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아가씨, 이 일에 우리가 연루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곡우는 걱정스러웠다. 그들은 심원이 왜 사람을 죽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모두 심묘가 뒤에서 계획한 일이었으니까.

“괜찮다. 누군가 우리 대신 막아줄 거야. 손부의 지위가 높은 건 사실이나 우리 심부도 높아. 게다가 그들의 목적은 심원 오라버니지. 오라버니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면 그들도 할 말 없을 거다.”

“하지만 둘째 공자님이 정말 목숨으로 대가를 치를까요? 둘째 주인어른께서 그리 쉽게 놔두지 않으실 거예요.”

곡우는 물었다.

“심원이 외아들이라면 둘째 숙부는 모든 힘을 기울여 오라버니를 구하겠지. 하지만 심원백이 있어. 둘째 숙부는 퇴로가 있는 셈이야. 아들 하나를 잃어서 손가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둘째 숙부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테지.”

심귀는 혈육의 정 따위는 모르는 냉담한 아버지였다. 심만은 심모를 진심으로 아꼈지만, 심귀는 적출이든 서출이든 간에 자식을 보살피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자식은 벼슬길에 도움을 주거나 대를 잇거나 둘 중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다. 자식들 역시 심귀에게 조금의 정도 없는 것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심원백이 없었다면 심귀는 유일한 아들인 심원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할 것이었다. 그러나 심원백이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손가 사람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생에 손천정 일가는 손재남을 죽인 심구를 막무가내로 감옥에 가뒀다. 심신이 온 재산을 털고 나서야 심구를 빼낼 수 있었다. 손재남은 손천정의 유일한 아들이니 그 아들을 죽인 원수를 쉽게 놔줄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하지만 둘째 공자님만 재수 없는 일을 당할까요? 초초 아가씨는 이렇게 놔주는 거예요? 지금 그 아가씨는 부에 숨어서 나오질 않아요.”

경칩은 흥분했지만, 최대한 적절한 단어를 고르려고 애썼다. 그녀의 말대로 형초초는 일이 일어난 후 형가 사람과 함께 심부에 숨어 있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럴 리가. 그녀가 이 재난의 주요 인물인걸.”

* * *

심부 입구.

심만은 기를 쓰고 부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부상서 사람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여러분,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 일은 아직 상황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돌아가 기다시리면 제가 곧 타당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개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부인이 심만의 얼굴에 침을 퉤 뱉었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 소리를 질렀다.

“빚을 지면 돈으로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법이오! 우리 공자님을 심원이 죽였으니, 목숨으로 보상하시오! 우리는 끝을 보고 갈 겁니다!”

태도가 어찌나 단호한지 심귀는 조금 움츠러들며 속으로 심원을 욕했다. 그때 구경하던 백성 중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질투로 다퉈 사람을 죽였다지 않았나? 미인을 쟁탈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다니. 나도 눈요기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어떻소? 그 미인이 얼마나 예쁜지 봅시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이부상서부 사람들은 더더욱 맹렬히 반응했다.

이부상서부는 난장판이었다. 멀쩡히 외출한 손재남이 차가운 시체로 돌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를 죽인 심원이 목숨으로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정신이 팔려 지금까지는 두 사람을 다투게 한 원흉 형초초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한 백성의 말을 듣고서야 형초초의 미모가 이 사달을 냈음을 깨달았다.

이부상서부 사람이 외쳤다.

“그렇다! 그 천한 년을 내놓으시오! 그것이 우리 공자님을 꾀어냈소. 뻔뻔한 창부! 빨리 내놔!”

이부상서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귀 역시 형초초를 죽이지 못해 한이 맺혔다. 형초초가 심부에 온 이후로 심가 이방은 연이어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 가족 연회 일로 이방의 명예가 바닥으로 추락했음은 물론이고, 지금은 심원이 그녀 때문에 감옥에 갇힌 신세였다.

심귀가 형초초를 데려오라고 하인에게 분부했다. 오래지 않아 형초초가 결박당해 끌려왔다.

심귀가 심만에게 눈짓하자 심만이 말했다.

“여러분, 화내지 마십시오. 우리 이치대로 합시다. 이 일은 형초초 때문에 일어났으니 그녀를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형초초가 사색이 되어 저항했으나 이부상서부 사람은 형초초를 끌고 가 사납게 따귀를 때렸다. 형초초는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다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당신들,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시오!”

형관생과 형가 부부가 쫓아와 기절한 형초초를 보고 대로했다. 그러자 이부상서부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오히려 윽박질렀다.

“그 작은 소주에서 온 사람이니 시야가 얕은 건 그렇다 치지만, 이렇게 덕행을 훼손해도 됩니까? 정혼한 사람이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 당신들도 끝이 좋지 않을 거요!”

형가 사람은 이부상서부 사람이 이처럼 건방진 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정경성에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심부밖에 없다는 현실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런 심부와도 매우 다퉜기 때문에 그들을 쉽게 도와주지 않을 터였다.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것을 보고 해를 가하지만 않아도 감사한 일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져서야 손가 사람은 형초초를 데리고 떠났다. 떠나기 전 우두머리가 냉소하며 다시 한번 경고했다.

“오늘은 시작에 불과해요. 심부 사람은 단단히 각오하시오! 주인어른께서 이미 폐하께 상소를 올렸으니. 이 세상에서 사람 목숨을 뺏고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치는 없소! 목숨은 목숨으로 보상하는 법. 누구도 좋게 넘어가지 못할 것이오!”

이부상서부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귀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손천정이 황제에게 상소를 썼다는 말에 몸서리가 쳐졌다. 손천정은 심원이 목숨을 내놓는다 해도 심부를 가만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심구가 서원으로 돌아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부상서부 사람은 너무 무례해. 대문이 거의 부서질 뻔했어. 병사들도 막기 어려웠다고.”

심묘가 그를 위로했다.

“자식을 잃었잖아. 당연히 원망스럽겠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번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셔. 심원은 이렇게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 적이 없는데, 형초초가 사적으로 손재남을 만났다 해도 도대체 왜 그랬을까?”

심묘는 무심하게 말했다.

“누가 알겠어? 손재남이 죽을 운명이라 누구 손에 죽든 죽는 건 매한가지인지도 모르지.”

* * *

이부상서부 대청.

어느 방에 첩실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대청 중앙에 흰 베로 쌓인 시체가 있었다. 베 위로 물든 핏자국이 조금씩 굳어가고 있었다.

손 부인은 손재남의 죽음을 듣고 혼절했다. 지금은 깨어나 앉아 있었지만, 정신이 나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손천정은 이미 수명을 거의 다한 듯 늙어 보였으나 두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양 뺨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 한 유랑도사가 그에게 평생 아들이 없을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손천정은 무수한 첩을 들였으나 아들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손 부인이 손재남을 어렵게 임신했고, 늙어서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그를 응석받이로 애지중지 키웠었다.

성장한 손재남은 여색을 밝히고 놀기 좋아했다. 지위가 높은 손천정은 어사가 보고서를 쓸까 손재남에게 이부상서의 아들임을 자랑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여자와 놀고 싶으면 소첩으로 삼아 부에서 놀도록 했다. 손재남은 벼슬에 오르지도 않고 화류계에 빠져 거의 부에만 있으니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조정 벼슬에 오른 사람과는 교류하는 것이 더욱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심원의 손에 죽을 줄이야. 정말 도사의 말처럼 손천정은 아들이 없을 팔자였다. 손천정은 이를 갈았다.

“심원……. 목숨으로 보상해라!”

손천정의 애첩이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주인어른. 하인들이 그 여자도 데려왔답니다. 그 여자가 공자님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주인어른은 어찌하실…….”

손천정은 냉소했다.

“숨만 붙여서 부인에게 넘겨라.”

애첩은 몸서리쳤다. 모든 첩은 손 부인의 무서운 수완을 직접 겪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식까지 잃었으니……. 손 부인이 어떤 방식으로 형초초를 다룰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손천정은 손에 힘을 줘 찻잔을 부쉈다. 그의 손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원망을 쏟아냈다.

“심가는 심원만 손댈 수 있다 쳐도 형가는 어림도 없지! 난 형가 모든 사람을 원한다! 모두 순장시킬 테다!”

* * *

온 정경성이 심원이 이부상서의 외동아들을 죽인 일로 떠들썩할 때 동호는 정왕부에 있었다. 그는 부수의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수의는 찻잔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사색하고 있었다.

“내일 부황께 심가에 대한 상소를 올리려 했는데, 심원에게 일이 생겼구나.”

“심원이 올린 증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전하, 그를 구할 방법을 찾을까요?”

부수의는 손을 휘둘렀다.

“필요 없다. 심원이 준 물건은 이미 충분하다. 설령 완전하지 않아도 난 그 일에 손댈 수 없다.”

“심원을 내버려 두라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손천정이다. 손천정은 주왕 부수안의 사람이야. 부수안이 손을 댈 터인데, 내가 손을 쓰면 그에게 선전포고하는 셈이다. 심원은 너무 큰 걸 건드렸다.”

부수의가 고개를 가로젓자 동호는 잠시 침묵했다.

“심원이 전하를 고발하면 어찌합니까?”

“심원은 여지를 남기는 버릇이 있지. 네 말대로 당연히 방비해야 한다. 그러니 심원을 돕지 말고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옥중 심원을 죽이면 의심을 면하기 어려우니 방법을 생각해 그에게 주어라.”

“예, 알겠습니다. 전하, 내일 상소를 올리실 겁니까?”

“올리지 않는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시기를 좀 늦춰야겠다.”

이마를 문지르던 부수의는 눈을 크게 떴다.

“최근 심원이 누구에게 원한을 산 것인지 조사해보거라.”

“전하께서는 누군가 배후에서 음모를 꾀한 거라 보십니까?”

동호는 놀란 듯이 되물었다.

“심원은 진중한 사내다. 그런 그가 이번에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피해자가 손천정의 외동아들이라니 너무 공교롭지 않으냐? 게다가 형초초의 간통을 목격했다. 아주 기이해.”

“심원은 계략에 쉬이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 모든 걸 꾸몄다면 반드시 심원을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부수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원을 이런 경지로 핍박할 수 있는 사람이지. 그자를 남겨선 안 돼. 사람에게 이용당해 쓸모없는 돌이 되라고 바둑돌을 키운 게 아니다.”

부수의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이 사건을 결코 담담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심원을 여러 해 공들여 키웠다. 심원의 머리가 좋기도 했지만 심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심복으로 삼아 장래에 많은 일을 꾀할 계획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 그를 다시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 버려야 했다.

“반드시 조사해 밝히겠습니다. 일이 터지기 전 물건을 받아서 다행입니다.”

부수의가 말했다.

“애석하게도 더 기다려야겠지만.”

* * *

풍선전당포의 계우서는 손뼉을 치며 웃느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묘해. 심묘는 자주 손쓰지 않지만 한번 손을 쓰면 사람을 놀라게 한다니까. 내일 심신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할 참이었는데 오늘 심원이 수감되다니. 정말 좋을 때 일을 벌였어.”

고양은 계우서를 흘겨보았다.

“우연히 시기가 맞은 걸세. 심묘는 아직 그 일을 모를 거야.”

“알든 말든 상관없어. 어쨌든 내가 이겼어. 금권은 홍릉에게 주면 돼.”

계우서는 득의양양했다. 고양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심원은 자기가 이런 저질스러운 수완에 당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네.”

아내가 남몰래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을 알고 싸웠는데 결국 내연남을 죽이게 됐다. 참으로 영광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간통한 두 사람은 둘째 치고 간통 피해자인 심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걸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심원은 재능이 있고 이를 숨길 줄도 알았다. 게다가 부수의가 그를 중시했으니 곧 사람들이 얕잡아볼 수 없는 중요 인물이 됐을 것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줄은.

“손천정은 내일 상소를 올릴 거야. 심원이 이번에 목숨으로 보상할까?”

계우서가 물었다.

“자넨 심묘가 어쩔 것 같은가?”

고양은 계우서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이게 심묘와 무슨 상관이야?”

계우서는 고양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묘가 만든 함정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간 사람을 본 적 있는가? 그 예친왕조차 반격 한번 못했잖나. 심묘의 함정은 심원만 겨누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아.”

“또 뭐가 있다는 거야? 심원이 목숨으로 보상하는 것 말고 또 뭐를 노리는 거지?”

계우서는 혼란스러웠다. 고양이 엄숙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심원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고 느끼네. 심묘가 손을 쓰면 늘 여럿이 목숨을 잃지.”

계우서는 잠시 침묵했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심묘는 심가 양방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이 있길래 이러는 거지? 솜털이 일어서고 등골이 오싹하지만, 이유가 있을 거야. 심가 사람이 그녀에게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나?”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 잔인한 수완을 쓰고 있으니 분명 속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백효생도 이를 조사하지 못했다. 그저 심가 양방이 장래를 망치기 위해 그녀를 머저리로 키운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한다면 조금 설득력이 떨어졌다.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네. 하지만 심묘는 일을 크게 벌이고 있어. 심원은 부수의의 사람일세. 손해를 봤으니 부수의는 앞으로 심묘를 주시할 거야. 이전에 보낸 사람도 부수의의 수하가 지금 이 일을 조사 중이라고 했네.”

“심묘가 부수의와 맞서면 안 되는데. 부수의는 심계가 깊고 수완이 교활해서 심묘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지 몰라.”

계우서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걱정할 필요 없네. 심묘는 부수의를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하니. 그렇지 않고서야 심묘가 하는 일이 모두 부수의와 연관될 리가 없잖나. 그보다 자네는 자네 걱정이나 먼저 하게.”

고양은 짓궂은 눈빛으로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찾으라는 사람은 찾았는가?”

이에 계우서는 헛기침을 하며 코를 매만졌다.

“쿨럭. 나 사람 좀 보낼게.”

* * *

“심부가 이렇게 혼란스러울지 예상하지 못했네. 초봄부터 이렇게 큰 난리인데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귀족 공자 둘이 평민 아가씨를 좋아해서 하나는 죽고 하나는 다쳤구나. 연극에나 나올 얘긴데?”

“그 평민 아가씨가 그렇게 미인도 아니라서 신기하네. 두 귀족 공자가 눈이 삐었나. 질투로 다투다니.”

“화롱, 너 무슨 기이한 책을 본 거야?”

흑색 옷을 입은 여자가 긴 머리를 쓸어올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 말이 틀렸단 거야? 남자를 무자비하게 싸우게 하려면 적어도 나처럼 아름다워야지.”

“흥미롭네.”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떠들고 놀던, 흑색 옷을 입은 암부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한명 한명 일어나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밤 경치 속에서 차갑고 자신만만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왜 계속 말하지 않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들과 거리가 벌어지자 멈추어 섰다.

“어린 여자애가 수완이 있네.”

별 하나 뜨지 않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던 사경행이 낮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없어.”

* * *

심원의 과실치사 사건 심판은 전례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손천정은 가장 먼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심원이 목숨으로 배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문혜제가 이 사건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이 연로하니 낙향하겠다는 식의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이부상서는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다. 손천정은 오랫동안 이부상서로 지내면서 여러 사람과 연줄을 쌓아두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그만두면 큰 혼란을 불러올 게 뻔했다. 그래서 문혜제는 그를 위로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들은 손천정 편에 섰다. 문혜제는 황자들에게 견해를 물었다. 아홉 황자도 약속이나 한 듯 손천정 편을 들었다. 몇몇은 태도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 사건의 결론은 이미 난 셈이었다. 평소 조정 대신들을 감시하는 어사들 역시 이번 과실치사 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어사들의 탄핵은 부친 심귀를 향했다. 하지만 심귀의 태도가 의외였다. 심귀는 문혜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자신이 아들을 잘못 가르쳐 벌어진 일이라며 정의를 위해 자식도 봐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심원이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에 동의했다. 조정 문무백관은 모두 놀라 얼이 빠졌다.

심귀의 말은 인정에 구애받지 않아 공평무사하게 들렸다. 그러나 아들을 구하려 노력해보지도 않고 바로 목숨으로 갚겠다 하니, 인간미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심귀는 평소 어느 쪽으로부터도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배고픈 호랑이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거늘, 심귀의 이런 행동은 평소 그와 친하던 동료들과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문혜제는 심원을 사흘 후 처형하기로 했다. 명제 개국 이래 가장 빠른 처형 판결이었다. 판결을 뒤집을 수 없어 보였다. 물론 손가가 조장하기도 했으나 심가가 움직이지 않은 게 큰 원인이었다.

* * *

어두운 감옥 가장 안쪽, 심원이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미 헝클어졌고 며칠 씻지 못해 냄새도 났다. 심원의 시선은 고요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얼핏 절망도 드러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젯밤 누군가가 그에게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감옥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큰 힘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부수의는 심원을 구하지 않았다. 심원은 조금 희망을 품었지만, 잘 생각해 보니 자신을 구하는 것은 부수의에게 손해일 뿐이었다. 부수의는 유리한 것만 좇고 해로운 것은 피하는 게 가장 장기인 인물이었다. 근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할 리 없는 남자였다. 심원은 이미 필요하지 않은 바둑돌이니 가차 없이 버림받았다.

게다가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였다고 그를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부수의는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심원이 감옥에서 죽으면 자신이 의심을 받을까 봐 살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심원의 입가에 쓰고 떫은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이기면 왕이고 지면 도적이라 했다. 심원은 처음부터 부수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부수의의 수하로 지내면서 언젠간 이런 결과를 얻으리라곤 예상했다.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지만.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옥졸의 다급한 발소리와는 다르게 느긋하고 가벼운 걸음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어두운 등불 아래 자줏빛 치마가 보였다. 수려한 얼굴의 심묘가 그를 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심묘의 얼굴을 본 찰나, 심원은 강렬한 증오심이 솟아났다. 그는 드디어 이 일이 심묘와 관계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이 맺혔다.

심묘는 쪼그리고 앉아 심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 감옥에서 고생했을 거야. 둘째 숙모는 미쳤고, 둘째 숙부는 오라버니를 만나길 원치 않으니까. 조모는 오라버니를 가장 아꼈지만, 어제 부에서 절대 오라버니의 이름을 꺼내지 말라고 명령하셨어. 오라버니는 완전히 버려진 것 같네. 그래도 우리는 오누이니 오라버니의 최후를 배웅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심원은 이를 악물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신념을 때려 부술 수도 있었다. 심묘는 서슴없이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말은 박정했으나 그녀가 유일하게 심원을 찾아온 사람이었으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심 노부인이 그에게 잘한 것은 그의 타고난 자질이 영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금된 죄수다. 노부인은 서둘러 관계를 정리해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둘째 오라버니와 심청 언니는 과연 친오누이야. 두 사람 다 감옥에 수감되다니. 그래도 심청 언니의 수감 때는 둘째 숙모가 뛰어다니기라도 했지. 지금 오라버니를 위해 뛰어다닐 사람은 없어.”

심원이 말을 하지 않자, 심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왜 말이 없어? 나랑 말하기 싫은 거야 아니면…….”

무언가 깨달은 듯, 심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거야?”

심원의 놀란 얼굴에 심묘는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부수의의 수완은 여전하네.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심묘가 읊조렸다. 심원은 심묘가 부수의 이름을 언급하자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심원은 심묘가 어떻게 자신이 부수의의 사람인 것을 아는지 의아했다. 더구나 심묘는 부수의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심원은 경악했으나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심부에서 아무리 심묘의 수완이 고명해도 심원은 그녀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규방 소녀가 대단하다고 해봤자 후원에서나 그런 것이고, 넓은 세상에서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묘가 부수의의 이름을 거론하자 심원은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심묘가 친절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의아해할 필요 없어. 난 부수의를 잘 알고, 그의 계략도 잘 알아. 지금 부수의에게 나를 일러바쳐 속죄하려고 해도 늦었어. 정왕 전하의 성격은 신중하지. 오라버니에게 이미 약도 먹였겠다, 이젠 사람을 이곳에 보낼 필요도 없겠지. 오라버니가 죽을 때까지 절대 왕래하지 않을걸. 오라버니가 쓸모가 없어진 그때부터 그와 오라버니는 어떤 관계도 아니야. 어떤 수완을 부려도 어떤 공을 세워도, 그의 관심을 끌 수 없어.”

심원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부수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좌절해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부수의를 밀고할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더 잔인하게 죽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결코 군자가 아니었다.

심원은 손가락을 내밀어 물을 찍어 먼지 가득한 바닥에 글자를 썼다.

-네 목적은 뭐지?

심묘는 활짝 웃었다. 그녀의 눈과 입꼬리가 굽어져 일 년 전 우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같은 표정임에도 소름이 다 끼쳤다. 심묘는 투명한 눈으로 심원을 바라보았다.

“내 목적이 뭔지 추측하지 못한 거야?”

-이방을 처리하려고?

“어디 이방뿐이겠어? 삼방, 노부인 그리고…… 부수의.”

심묘는 흉악한 눈빛을 띠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심원은 눈에 힘을 주고 그녀를 주시했다.

“왜냐고 묻고 싶은 거야? 난 그저 당신들이 한 일을 다 당신들에게 돌려주는 거야. 이번처럼. 오라버니는 익숙하지 않아? 이번 일은 오라버니의 수완이야. 오라버니의 수로 오라버니를 처리하니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어.”

심원은 심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방, 삼방을 증오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저 표면상으로만 화목한 척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부수의를 증오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의아했다. 고작 사모하는 마음에 회답을 얻지 못한 게 그 이유일 리는 없었다.

이에 심묘는 괴상한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내게 고마워해야 해. 오라버니의 저승길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이 오라버니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 거야. 오라버니는 유일한 이방의 장자니까.”

심원은 심묘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심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가볍게 입을 뗐다. 그녀의 말은 심원의 귀에 무겁게 떨어졌다.

“이방은 대가 끊어질 거야.”

심묘가 밖으로 나오자 대가를 얻은 옥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사했다. 그는 심묘가 당부하기도 전에 알아서 외부 사람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경칩과 곡우가 심묘를 부축해 마차에 태웠다. 마차 안에서 곡우가 물었다.

“아가씨, 정말 사흘 후에 둘째 공자님이 처형될까요?”

심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말 꿈 같네요. 둘째 공자님은 목이 뻣뻣해 고개를 숙일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목숨을 잃는데도 손을 쓰지 못하다니.”

곡우가 중얼거리자 심묘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운명이 다 그런 거지.”

곡우와 경칩은 심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말을 삼갔다.

심부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정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형가 사람이었다. 형가 부인은 바닥에서 울고불고 억지를 부렸다.

“너희가 우리 초초를 해쳤어! 너희가 우리 초초를 해쳤다고!”

심 노부인은 분노로 안색이 검푸르렀다. 그녀가 하인을 불렀다.

“저 인간을 밖으로 끌어내지 않고 뭐 해!”

우아한 태도를 유지했던 형관생이 태도를 바꿔 흉악하게 말했다.

“노부인, 우리 초초는 멀쩡히 심부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이부상서부에 잡혀가서 생사도 모릅니다. 관아에 이 일을 고하면 당신들도 손해를 볼 겁니다.”

심 노부인은 분노해 크게 욕했다.

“뻔뻔하게도 말하는구나! 우리 집안이 그 천한 것을 해쳤다고? 그녀가 재수 없는 사람이라 심가가 소송에 말려든 것이야!”

형관생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노부인, 신중히 말씀하십시오.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 일은 누군가 음모를 꾀한 겁니다. 초초의 여종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누군가 여종을 매수한 겁니다!”

진약추는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심모는 형가 사람을 혐오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설안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만 이낭은 이 자리에서 말할 자격이 없었기에 심동릉의 손을 잡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육촌 오라버니, 너무 멀리 가셨네요. 모든 책임을 여종에게 묻다니. 그것만 해결되면 나머지도 해결될 것 같나요? 여종이 주인에게 사통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심묘의 평온한 목소리가 울려 펴졌다. 비꼬는 말에 형관생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하얗게 질리길 반복했다. 심묘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노부인은 지금까지 오늘처럼 심묘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귀찮게 구는 형가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 심묘 덕에 마음이 다 후련했다.

나설안은 반가운 표정으로 심묘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교교, 이렇게 오래 나가 있어서 피곤하지 않니?”

형가 부인은 여전히 울며 떠들었다.

“초초도 버젓이 당신의 혈육인데 어찌 이렇게 모지십니까? 하느님, 노부인이 우릴 핍박해 죽이려 합니다!”

“누가 너희와 육친인가? 돈을 갈취하러 내게 들러붙으려고 한 주제에. 정말 그 자태만 가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긴 건가? 가난한 집 출신답구나. 젊은 나이에 남자를 꼬드길 줄만 알고…….”

노부인은 더욱 기세등등해져 가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험한 욕을 해댔다. 사람들은 듣기 거북한 말에 모두 안색을 찌푸렸다. 잠시 후 형관생이 적막을 깨고 웃기 시작했다.

“노부인, 이렇게 무정하게 나오실 겁니까? 초초의 일을 정말 수수방관하실 셈인가요?”

“형초초가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가소롭다!”

노부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좋습니다. 노부인께서 이렇듯 토사구팽하시니 저에게 의리 없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노부인은 초초에게 심구의 침상에 오르라고 했고, 내게 방법을 찾아 심묘의 환심을 사라고 하셨지요. 그때는 이렇게 무정하지 않으셨잖습니까.”

형관생이 냉소하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심묘는 내막을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형관생이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개중 가장 놀란 나설안이 형관생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형관생은 노부인의 격노한 안색에 굴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듯 말했다.

“당숙모는 모르실 겁니다. 나와 초초가 심부에 도착하자마자 노부인은 우리에게 열정적이었습니다. 우리 오누이에게 형가와 사돈을 맺고 싶다고 했지요. 그러나 심구 형님이 어떻게 작고 가난한 집안 출신인 초초를 좋아하겠습니까? 노부인은 약을 써서 부부의 연을 강제로 맺게 하려 했지요. 예상치 못하게 심원 형님이 걸렸지만.”

분노한 나설안이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리에서 연검을 사납게 뽑아 형관생의 목에 댔다. 형관생은 안색이 변했으나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숙모, 사람을 잘못 고르신 듯합니다. 우리 오누이는 주제를 알아 노부인의 지시가 없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약을 타는 일은 노부인이 했는데, 당숙모는 저를 탓하실 겁니까?”

나설안이 고개를 돌려 노부인을 노려봤다. 살기가 가득한 눈빛에 노부인은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첫째 며느리야, 날 죽이려는 게냐?”

형관생은 경박하게 웃었다.

“노부인은 남녀 사이 엎질러진 물이 되면 체념할 거라고…….”

나설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검을 바닥에 휘둘렀다.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바닥이 벌어졌다. 형가 부인은 놀라 비명을 질렀고, 노부인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심모와 진약추는 서로를 껴안고 몸을 움츠렸다. 만 이낭 역시 놀라 말을 잃었다. 노부인이 그렇게까지 저열한 방법을 썼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평범한 부인이나 첩도 아니고 일가의 주인인 노부인이 그런 수완까지 썼다니. 그 염치 없는 얼굴을 보고 있기 힘들었다.

나설안은 심묘를 끌고 노부인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든 채였다. 나설안의 흉악한 인상은 당장에라도 심 노부인의 머리를 쪼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님, 저는 심신과 당신의 정이 두텁다고 봤습니다. 비록 생모는 아니라지만, 우리 부부 두 사람은 당신을 늘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고 있군요. 이런 심부에 더는 머물 수 없습니다.”

노부인은 이 지경이 돼서도 반성할 줄 몰랐다.

“첫째 며늘아, 어찌 형관생의 헛소리를 믿는 게냐! 불효를 저지르는 게다!”

“허튼소리인지 아닌지는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내 평생 불효자란 불명예를 짊어지고 말지, 내 자식을 이런 마굴에 두지는 않을 겁니다! 가자!”

나설안은 냉소하며 심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노부인이 노발대발하든, 형가 사람이 막무가내로 귀찮게 하든, 진약추가 중재하든 모두 중요하지 않았다. 심묘는 나설안에게 끌려가면서도 통쾌한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것이 진짜 그녀가 달성하려던 목적이었다.

분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이익이 엉켜 있는 데다 나쁜 평판을 짊어지게 하니 심신이 분가를 결심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일이 분가를 수월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심신과 나설안은 심 노부인에게 일말의 연민도 느끼지 못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마련이었다.

나설안은 심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문을 닫고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냉소했다.

“네 아버지와 오라비는 오늘 입궁했다. 그들이 어떤 추악한 짓을 했는지 두 사람이 직접 봤어야 했는데!”

순간, 나설안은 무언가 떠오른 듯 심묘를 보며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교교, 놀랐지? 방금은 이 어미가 너무 화가 났어.”

심묘는 고개를 가로젓고 모친을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어찌하지요? 조모가 오늘 일로 어머니를 질책할까 걱정이에요.”

이에 나설안은 탁자를 때리며 대답했다.

“겁날 게 뭐가 있니. 네 아버지가 돌아오면 분가하자고 말씀드리자. 심부 사람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렇게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니? 네가 우리더러 정경성에 반년 머물라고 하더니. 혹시…… 일찍이 알고 있었니?”

나설안이 심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심묘는 웃기만 했다. 나설안은 점점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가졌다.

“안 되겠다. 이 일을 조사하러 가야겠구나. 호위에게 뜰 입구를 지키게 할 터이니 나가지 말거라.”

나설안은 심부를 호랑이굴로 여기는 듯 말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설안이 떠난 후 경칩이 물었다.

“아가씨, 정말 분가할 수 있을까요?”

심묘는 담담하게 답했다.

“물론, 어머니는 저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시니. 당연히 갈라서겠지.”

“정말 잘됐네요. 분가하면 아가씨께서 뭘 하시든 자유로울 거예요. 종일 이것저것 방비할 필요도 없구요.”

그때 백로가 들어와 심묘에게 말했다.

“아가씨, 도원은 마을로 보냈습니다. 은자도 줬습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을 매수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형초초는 심원과 혼인하고 도원을 첩으로 삼아 심원을 농락하려고 했다. 하지만 심원은 자신에게 계략을 쓰는 것을 아주 혐오했으니, 그런 식으로 첩이 된 도원에게 잘해줄 리 없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형초초는 자신이 도원에게 큰 은혜를 베푼다고 여겼다. 게다가 그녀는 도원이 이미 심묘에게 매수된 것을 몰랐다.

도원은 첩이 되고 싶지 않았으며 첩이 되라고 말하는 주인을 따르고 싶지도 않았다. 도원은 필사적이었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심묘는 그녀에게 은자로 보상했고 목숨을 보장했다. 아랫사람을 잘 이용하려면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는 엄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였다. 오늘 이후, 모든 일은 심묘의 생각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곡우는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님이 처형되면 부는 평온해지겠죠. 그때 분가하면 아주 적당하겠어요.”

심묘가 살짝 웃었다. 바로 평온해질 리 없었다. 형가 사람이 손천정을 대처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방 사람 역시 아직 막다른 곳에 다다르지 않았다.

“둘째 숙모는 둘째 오라버니의 처형 소식을 듣고 상심하셨겠어.”

심묘가 작게 말하자 곡우가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둘째 마님은 미치신 게 아닌가요? 미쳐서 사물을 분간도 못 한다고 채운원 사람에게 들었어요. 사람도 못 알아보는데 그 일을 아시겠어요?”

“미쳤다고? 그건 아니야.”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은 고통으로 절망하면 ‘미쳐서’ 고통을 마주하는 현실에서 도피한다. 임완운의 고통은 와룡사의 밤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로서 의무를 다하긴커녕 오히려 심청이 죽음으로 걸어가게 등 떠민 그날 밤. 이후 임완운은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눈을 뻔히 뜬 채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끝내 심청이 죽자 그녀는 심청의 사망을 스스로 마주할 방법이 없어서 ‘미쳤다’. 이번에도 심원의 죽음을 보고만 있어야 하니 그녀는 더욱 미칠 것이었다.

사실 임완운이 미친 지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미쳐갈지, 점점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했다. 오래지 않아 임완운은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 차려야만 한다. 그녀에게는 아직 심원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심원백이 만 이낭의 독수에 당할까 걱정해 깨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심묘는 임완운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먼저 그녀의 정신을 돌아오게 해야 했다. 한 사람이 아닌 온 가족의 명맥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이방의 끝을 보지 않았는데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그녀는 심귀의 삼대를 끊어놓으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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