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장 (42/71)

24장

심원이 손재남을 죽인 사건은 손천정이 원하는 방식으로 막을 내렸다. 손천정은 외동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성의 정문에서 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소문냈다. 대단히 전도유망했던 인재가 어떻게 이런 결말을 맞았는지 보러 가려고 다들 안달이었다. 심원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고 형초초가 미인인 것이 화근이라며 욕하는 사람도 있어 저잣거리는 무척 시끄러웠다.

이부상서 사람이라고 추정되는 많은 사람이 심원에게 썩은 달걀을 던졌다. 온몸에서 악취가 풍겼다. 심원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었다. 그는 자만심이 넘쳤고 전심전력으로 위로 올라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공적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삶을 꿈꿨는데, 지금은 ‘천민’들에게조차 비난받는 신세가 되었다. 모멸감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얼른 죽기를 원할 터였다.

심원은 사형 집행대에 무릎을 꿇었다. 옆에 망나니가 서 있었다. 원래 사형수의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배웅을 하게 하며 식사와 술을 제공하는 법인데, 심부 사람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심신은 이미 심가 양방과 완전히 틀어졌으니 올 리 없었다. 심귀는 유리한 것만 좇고 해로운 것은 피하는 사람이었다. 임완운은 미쳤고 노부인은 다리가 불편했다. 다리가 멀쩡해도 찾아오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곧 온유한 모습을 보이고 대의를 표방하던 심만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손가 사람에게 미움을 사느니 대의를 지키지 않기로 택한 것이었다. 이 같은 심가의 무정한 모습에 사람들은 탄식만 내뱉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정경성을 내리쬐었다.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겨울이었으나 찬란한 금빛 햇살은 여름같이 눈부셨다. 시간이 되자 망나니가 술을 뿜고 대도를 들어 내리쳤다.

군중 속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여인들은 놀라 눈을 가렸다. 피가 흘러내렸다. 집형대 위에서 굴러떨어진 심원의 머리는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심원의 최후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조용히 몸을 돌려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 * *

심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심원의 죽음은 심부의 기세를 크게 상하게 했다. 심부는 아들이 많다고 할 수 없었다. 그중 심원은 특출났다. 이렇게 얻기 드문, 장래 심부를 지탱할 수 있을 만한 아들이 이렇게 망나니 칼날 아래 죽었으니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심만이 방에 있을 때 남종이 달려와 말했다.

“형장 사람이 형 집행이 완료가 되었다고 둘째 공자님을 데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부상서부 사람은 심원의 시체를 심가에 돌려주는 데 동의했다. 아주 크게 양보한 것이었다. 심가는 손천정의 뜻에 따라 심원이 죽게 놔두었지만, 심가와 손가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생긴 셈이었다. 다들 이 원한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영구를 안치하지 말고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매장하거라.”

심만은 탄식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대인, 아직도 이 일을 걱정하십니까? 심원의 일은 저희도 어차피 나서봐야 힘을 쓰지 못했을 겁니다. 손가는 보통 집안이 아닌걸요.”

진약추가 들어와 부드럽게 말했다. 심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단지……. 당신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소? 최근 심가는 무슨 악운이 낀 듯 연거푸 사고가 생겼소.”

“무슨 불결한 물건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진약추는 놀라 말했다.

“무슨 허튼소리요?”

“제가 허튼소리를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진약추가 얼른 말했다. 심만은 불가사의한 힘을 믿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녀는 심만이 방금 자신이 무심하게 한 말에 불쾌할까 걱정하며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계속 이방 일가에 사고가 나네요. 심청, 둘째 형님, 심원…….”

진약추는 불안해졌다. 임완운을 싫어하고 질투했지만, 막상 임완운이 미치자 자신을 도와줄 집안 세력이 없다는 사실이 염려스러웠다. 나설안은 처음부터 자신과 같은 편일 수 없었다. 서북에서 지내는 건 둘째 치고, 심신과 심만은 같은 어머니에게 태어나지 않았으니 진심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만이 말했다.

“그렇소. 둘째 형님은 도대체 누구와 원한 맺은 건지. 줄줄이 사건이 이어지니, 마치 일찍부터 계획된 것 같소.”

“둘째 아주버니가 관직에서 미움을 사는 일은 불가피하지만, 왜 올해 사고가 난 걸까요? 심묘가 물에 빠지고 깨어난 후부터 일이 연이어…….”

심만은 우스웠다.

“심묘? 심묘에게 그런 큰 능력이 있다면 천하에 대혼란이 일어날 거요. 요즘 당신도 고생한 것을 알지만 허튼 생각은 마시오. 심묘는 어린 아가씨일 뿐인데 어디 이런 능력이 있겠소? 형님과 형수가 가르쳤대도 형님은 이런 수완을 쓰지 않소. 그들은 본래 시원스럽게…….”

심만은 진약추의 손을 토닥이며 위로하다 말을 멈췄다.

“아무튼, 이 일에 나도 주의를 기울일 테니 당신은 많은 생각 말고 심모의 혼사를 잘 준비하시오. 혼사를 상의할 나이가 되었지 않소.”

심만이 심모의 혼사를 꺼내자 진약추는 심묘를 향한 의심을 억눌렀다. 심만은 자식을 중시해 심모가 딸이라고 경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꼈다. 진약추는 웃으며 답했다.

“대인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 * *

경칩이 심묘의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둘째 공자님의 영구가 돌아왔답니다. 서둘러 매장하고 장례도 소규모로 한대요.”

대방을 제외한 심가 사람은 체면 세우길 좋아했다. 심 노부인이 생일을 크게 지내 모든 사람이 알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원은 이방의 장자임에도 장례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니 너무 박정했다. 물론 수치를 감추려는 이유도 있지만, 손천정에게 미움을 덜 사기 위한 이유가 컸다. 하기야 손천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니 장례를 크게 치른대도 조문객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둘째 주인어른은 낮에는 부에 안 계시고, 오신다고 하더라도 만 이낭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친혈육인데도 이리 무정하시다니.”

곡우가 말했다.

“대낮에는 소원한 대신들을 구슬리느라 바쁠 테고, 밤이 되면 설마 둘째 숙모와 함께 눕겠느냐? 만 이낭의 방에서 묵겠지.”

곡우는 기회를 틈타 심귀의 무정함을 질책하려 했는데, 심묘가 ‘부부 동침’을 꺼내자 조금 곤란했다. 심묘는 갈수록 대범해졌다. 조금은 수줍은 척 가장해도 좋을 텐데 남녀 사이의 일을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곡우는 이렇게 대범한 심묘를 좋아할 남자가 있을지 걱정했다. 심묘는 곡우의 표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부상서부 탐문은 어찌 돼 가느냐?”

“이부상서부 사람이 빈틈없이 숨겨서 저희도 아는 것이 매우 적습니다. 단지 초초 아가씨의 생활이 나쁜 건 확실합니다. 첫날, 첫날…….”

경칩이 얼른 답했지만, 그녀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첫날 뭐?”

심묘는 고개를 돌려 경칩을 보았다. 경칩이 얼버무리며 말했다.

“첫날부터 육촌 소저를 마구간에 넣었고, 말에게 약을 먹여……. 손 대인께서 모든 하인에게 마구간 밖에서 구경하도록 했답니다.”

경칩의 얼굴이 붉어졌다. 형초초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몸이 아픈 것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그런 장면을 보였으니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할 것이었다. 곡우는 자칫 사레들릴 뻔했다.

“사람과 말? 손가 사람은 모두 변태인가 봐!”

곡우가 목소리를 높이자 경칩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렇게 불결한 일로 아가씨의 귀를 더럽히지 않게 되도록 돌려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심묘의 안색은 변함없이 침착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이 쩍 벌어질 말을 했다.

“손 대인은 너무 인자하구나. 소를 이용해도 되는 것을.”

“아, 아가씨……”

놀란 경칩이 입을 크게 벌렸다. 심묘는 그녀를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별거 아닌 일에 크게 놀라긴.”

심묘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곡우와 경칩이 놀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천정이 형초초에게 준 벌은 궁에서 말을 듣지 않는 여인을 처리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심묘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심묘는 사약을 내리는 것을 애용했는데 이는 뜻하지 않은 일의 발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 부인이 태감과 놀아난 궁녀를 징벌할 때 이 방법을 쓰는 걸 보았다. 수소에게 약을 먹이고 궁녀를 소 우리에 던져 고통스럽게 죽게 한 것도 보았으니, 손천정의 수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묘가 일어나자 경칩은 겨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가씨 지금 어디로 가시려구요?”

“채운원.”

“그곳에 가서 무얼 하시게요? 지금 둘째 주인어른은 안 계신데, 만 이낭을 찾으러 가시나요?”

곡우는 의아했다.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째 숙모를 찾아가는 거야.”

* * *

고작해야 몇 달 사이에 심부 이방에서는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여러 번 잇달아 발생했다. 가장 득의양양하던 임완운은 미쳤고, 대범하고 총명하던 심청은 사통했던 방탕한 여자이자 옥중 형벌이 두려워 자살한 죄인이었고, 군계일학인 심원 역시 죄를 짓고 망나니 손에 죽었다.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지만 채운원의 연극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건 임완운에게 심원백이 있다는 것이었다. 심 노부인이 심원백을 자기 곁에서 키우고 있더라도, 임완운이 미치지 않았다면 심원백에게 기대어 본처 자리는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 호색가인 심귀가 또 첩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거기서 아들을 볼 가능성도 있었다.

임완운에게 악운이 연달아 찾아왔다면, 여러 해 냉대받던 만 이낭에게는 봄날이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딸을 데리고 낮게 엎드려 태양을 보지 못하며 살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 것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심귀는 혈육의 정에는 냉담하지만 자기 여인에게는 잘하기에, 만 이낭이 심귀의 마음을 견고히 잡기만 한다면 총애를 받아 심동릉의 위치도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동릉, 며칠만 지나면 대인께서 집을 바꿔주실 게다.”

만 이낭은 바느질하며 웃었다. 심원은 이제 죽은 사람이고 심원백은 아직 어리니 임완운은 그녀를 위협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에 만 이낭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고 말에도 즐거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집을 바꿔요?”

병풍 뒤에서 책을 보던 심동릉이 고개를 들었다.

“줄곧 나와 같은 뜰에 있었잖아. 다른 소저는 네 나이에 자기 뜰을 가졌어. 너도 그래야지. 이곳은 비좁잖니?”

“그들은 적녀고 저는 서녀인걸요.”

심동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에 만 이낭은 오히려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출신은 그녀가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늘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딸이 결코 심청, 심모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여겼지만, 지난 십여 년간 숨어 지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렵게 고생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심동릉을 당당하게 내놓을 생각이었다.

“심청 소저가 머물던 뜰이 비어 있어. 그녀가 살던 방에 지내기 싫다면 다른 방에서 자도 된단다. 방향이 좋고 풍경도 아름다우니, 그런 뜰을 비워두면 섭섭하지. 지금 주인어른은 우리에게 잘해주시니 이 요구를 아마 들어주실 게다.”

심동릉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지금은 두각을 드러낼 때가 아니에요. 이미 십여 년을 참았으니 급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지금 우리에게 잘하지만, 그가 뼛속 깊이 어떤 성격인지 어머니도 잘 아실 거예요. 조금 더 안정되길 기다렸다가 다시 얘기해요.”

만 이낭이 다시 권유하려 할 때 여종 호화가 달려와 말했다.

“마님, 심묘 아가씨가 뜰에 왔습니다.”

“심묘 소저? 그녀가 뭘 하러 날 찾아온 거지?”

만 이낭이 단숨에 일어났다. 심동릉도 호화를 바라보았다. 호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마님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둘째 마님께서 요양 중인 방으로 가는 것을 봤습니다.”

“심묘 소저가 둘째 부인을 보러 갔다고! 뭘 하려는 거지? 둘째 부인은 이미 미쳤는데!”

만 이낭의 목소리가 단시간에 높아졌다.

“제가 몰래 들으려 했으나 아가씨가 데려온 여종이 단단히 막아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어찌할까요?”

만 이낭은 놀라고 의아해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중얼거렸다.

“어찌 된 일이지? 심묘 소저는 둘째 부인에게 안부를 전하러 왔나? 둘째 부인과 사이가 나쁜데 어떻게 그런 선의가 있으려고? 동릉아,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몰래 들을 수도 없으니 가만히 있도록 해요. 심묘는 쉽지 않은 사람이라 만전을 기해 준비했을 테니 어떻게 해도 엿듣기는 불가능할 거예요.”

만 이낭은 딸의 대답이 달갑지 않았다.

“그냥 놔두자고? 심묘 소저와 둘째 부인이 공모하면 어찌해?”

“둘째 부인과 심묘는 모두 원한을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우리는 지금까지 심묘와 대립하지 않았으니 그녀가 누굴 모함해도 우리가 손해를 입지는 않을 거예요. 그저 기다리며 구경하면 될 일입니다.”

심동릉은 담담한 눈빛으로 모친을 진정시켰다.

* * *

곡우와 백로, 상강 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방문을 막기 위해 채운원 밖에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경칩은 심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임완운의 뜰 여종들은 심묘를 막지 않고 자기 일만 했다. 임완운이 미쳐서 그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기보다 낮으면 밟고 높으면 아첨하는 법이었다. 게다가 임완운은 하인에게 가혹하게 대했었기에 그들은 이참에 부드러운 만 이낭에게 아첨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임완운에게는 향란과 채국이라는 심복이 있었다. 방에 있는 향란과 채국은 호시탐탐 심묘를 주시했다. 두 사람의 흉악한 시선과 마주한 심묘는 두 사람이 나가길 원치 않으니 그녀들이 들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임완운은 침상 구석에 이불을 휘감고 앉아 있었다. 눈이 풀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잘 빗겨져 있으나 스스로 헝클어뜨린 듯했고 옷에는 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임완운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

“심묘 아가씨, 보시다시피 주인마님의 몸이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이러시면 마님의 병을 더 위중하게 만들 겁니다.”

향란이 말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숙모께 할 이야기가 있어서야. 숙모도 아실 거예요. 병중이지만 소식은 전달됐겠죠. 심원 오라버니는 오늘 오시에 처형당했어요. 영구는 빠르게 매장할 거예요.”

“아가씨! 마님은 못 알아들으십니다!”

채국이 사납게 외쳤다. 향란과 채국이 사나운 얼굴은 할 수 있어도 심묘를 강제로 쫓아낼 담력은 없었다. 그들도 심묘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며 이방의 상황이 심묘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묘는 이방의 원수라고 할 수 있으나, 지금 심묘는 심계가 깊을 뿐 아니라 심신 부부의 지지를 업고 있었다. 사람이 점점 줄어가는 판국에 심묘에게 대항할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심묘는 두 여종을 상대하지 않고 임완운을 보며 살짝 웃었다.

“숙모도 아실 테지만, 오늘 오라버니가 처형당할 때 부에서 보러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숙부와 셋째 숙부, 셋째 숙모, 조모 단 한 분도 안 가셨어요. 숙모가 병이 나지 않았다면 오라버니의 최후를 배웅했을 텐데. 지금 오라버니는 혼자 외롭게 저승길을 걷고 있겠네요. 불쌍해요.”

“아가씨!”

향란은 참지 못하고 재차 외쳤다.

“뭐가 그리 무섭지? 숙모는 지금 병이 나셔서 내 말을 못 알아들으실 텐데. 혹시 내가 숙모를 자극할까 두려운 건가?”

“아닙니다.”

향란이 급히 부인했다.

“그럼 넌 입을 다무는 게 좋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숙모를 시중들지 못하게 할 수 있단다.”

심묘는 눈썹을 매섭게 치켜들었다. 향란과 채국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심묘의 침착함이 두려웠다.

“심원 오라버니가 떠나기 전부터 숙모가 병이 나셔서 오라버니를 한 번도 보시지 못했으니, 오라버니는 상심했을 거예요.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떠나다니 너무 비참하네요.”

임완운은 여전히 천장만 바라보았으나 손가락이 조금 굽어졌다.

심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만 이낭이 절 찾아왔어요. 저와 관계를 좋게 만들어두고 싶은 것 같아요. 장래 제가 노부인에게 만 이낭을 좋게 말하면 둘째 숙부가 그녀를 본처로 올릴 가능성이 커지겠죠.”

향란과 채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두 만 이낭이 심귀의 총애를 얻은 걸 알고 있었다. 이전 만 이낭은 임완운의 핍박으로 숨어 지냈다. 그런 만 이낭이 득세하고 본처가 된다면 보복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미 임완운은 심귀와 멀어지고 노부인의 미움을 받고 있는 처지이기에, 만 이낭이 본처가 되면 얼마나 더 비참해질지 몰랐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물론 전 원치 않아요. 전 숙모 편이랍니다. 지금 심원백은 조모의 곁에 있지만, 만 이낭이 본처가 되고 숙모가 병중이라면 아이는 만 이낭의 곁에서 자라지 않겠어요? 만 이낭이 나와 관계를 좋게 하려는 건 이 방면을 고려한 거 같아요.”

“네가 감히 원백이를 음해하면 난 반드시 널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것이다!”

임완운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어서 듣기 나빴다. 천장을 바라보던 눈은 언제부터인지 심묘를 보고 있었다. 눈 속 흉악한 빛이 드러나 흉악한 이리 같았다.

“제가 어째서 동생을 음해하겠어요? 숙모가 믿지 않으시면 맹세할 수 있어요. 제가 원백이를 음해하면 벼락에 맞아 곱게 죽지 못할 거예요.”

심묘의 말에 방 안 여종들의 시선이 의아해졌다. 줄곧 말이 없었던 경칩은 조금 초조해졌다. 맹세를 매우 중시하는 심묘가 어째서 이런 무섭고 악랄한 맹세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막을 기회도 없이 심묘의 입에서 이미 말이 나온 후였다. 임완운은 심묘를 경계하는 눈빛을 그대로 유지하며 냉소했다.

“네가 날 자극하는 말을 한 건 내가 정말로 미쳤는지 보려는 거지, 이런 맹세를 하려 한 건 아닐 게다. 심묘, 난 널 이기지 못했다. 확실히 널 얕봤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난 네가 자라기도 전에 죽일 것이야. 절대 무른 방법을 쓰지 않을 것이다!”

“숙모는 농담도 참. 숙모가 언제 제게 손길이 무른 적 있었나요?”

“넌 이미 날 여기까지 핍박했어. 심청, 심원의 사고는 너와 관계가 있다. 만약 원백이를 노린다면 죽더라도 너와 함께 죽을 것이다.”

임완운은 이를 악물었다.

“숙모는 원백이를 아끼시니 전 알고 있었답니다. 좋은 방법이 나쁜 방법과 함께 없어지는 일을 하시지 못할걸요. 그래서 숙모의 병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았어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또 무슨 수작을 꾸미려는 게야?”

임완운은 심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심묘가 친근하게 웃었다.

“숙모, 그리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숙모에게 길을 터드리는 거예요.”

임완운은 마음이 쓰라렸다.

“길? 이런 나한테 무슨 살길이 있다고?”

“지금 여기서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 숙모는 총명하셨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어지신 거예요?”

심묘는 놀라는 척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임완운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심묘는 또 한번 웃었다.

“지금 만 이낭과 숙부는 화기애애하죠. 숙모, 만일 만 이낭이 아들을 낳으면…… 심원백은 어찌 될까요?”

임완운의 몸이 굳어졌다.

“숙부가 만 이낭과 숙모 중 누굴 중시하는지 아실 거예요. 숙부가 만 이낭이 낳은 아들을 중시할지, 심원백을 중시할지 알 수 있지요. 만일 언젠가 만 이낭이 본처의 자격을 얻으면 이방에 어머니가 다른 두 명의 적자가 있게 되죠. 그럼 그다음을 추측해보세요.”

심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골육상잔이 벌어지지 않겠어요?”

임완운은 혼비백산했다.

“한 명은 만 이낭이 보호하고, 심원백은 숙모가 보호하겠지요. 그러나 그때가 되면 숙모가 이전처럼 이방 안에서 힘이 있을까요?”

심묘의 말은 임완운의 심장을 찔렀다. 임완운은 견딜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

"그 천한 것은 아들을 낳지 못했어! 이후에 아들을 낳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

심묘는 과장되게 탄식했다.

“과연 똑똑하시네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숙모는 숙부께서 장래에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심묘가 집안 어른의 관계를 침착하고 냉정하게 거론하자 임완운은 멍해졌다. 심귀가 어떤 사람인지 임완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심귀가 한 명의 여인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임완운이 심귀가 데려온 첩들에게 강제로 불임약을 먹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방은 아이들로 가득 찼을 것이었다.

“잠시는 막아도 일생을 막을 수는 없지요. 만 이낭 하나는 막아도 다른 아가씨가 있다구요. 세상에 아이를 낳을 여인은 셀 수 없이 많고, 이방에 들어오려는 여인도 수없이 많아요. 이전에는 숙모가 여인들에게 불임약을 먹였지만 지금 어디 그런 능력이 있나요? 게다가 그 상황에서조차 만 이낭은 심동릉 언니를 낳았어요. 장래 또 다른 만 이낭이 있지 않을까요?”

임완운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심묘의 말은 그녀의 약점을 찔렀다. 그녀는 이제 심원백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있는데 그마저 사라지면 장래는 어찌할까.

“숙모, 설마 고생스레 관리한 집안과 은자를 다른 여인의 아들에게 주실 건가요? 심원 오라버니는 출중했으니 이방은 그의 것이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 헛되이 남 좋은 일을 하게 됐네요. 숙모는 이게 달가우신가요?”

임완운은 이를 갈았다.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난 숙모에게 살길을 드리려는 거예요. 남자용 불임약이에요.”

속삭인 심묘가 살짝 웃고 소매 안에서 물건을 꺼내 임완운의 손에 올려놓았다. 임완운은 심묘가 건넨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여인에게 불임약을 먹이는 게 무슨 좋은 방법이겠어요? 하나가 아들을 못 낳으면 또 하나가, 또 또 하나가, 끝내 막지 못할 거예요.”

심묘의 말은 유혹하는 것처럼 듣기 좋았다.

“내가 널 어찌 믿지? 이 안에 비상이 숨겨져 있는지 누가 알겠어?”

임완운이 경멸하듯 비꼬았다.

“절 믿지 않으시면 의원을 찾아 물어보셔도 돼요. 아니면 동물에게 먹여봐도 좋구요. 아예 싫으면 같은 걸 사도 되죠. 저는 단지 길을 알려드릴 뿐 나머지는 숙모가 알아서 하세요.”

“넌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 거지?”

임완운은 심묘를 주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심묘는 조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숙부가 불임이 된다면 심원백의 적자 자리가 안전해질 테니까요. 게다가 숙부의 유일한 상속자니, 동생은 반드시 숙부의 총애를 얻겠지요. 물건은 적을수록 귀한 법이니까요.”

임완운이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무슨 속셈일지 모를 줄 아느냐? 내가 널 과소평가했다. 넌 아예 이방의 대를 끊을 셈이구나!”

심묘가 의아한 척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이방이 어찌 대가 끊어지는 건가요? 동생이 있잖아요? 혹시 장래에 숙부와 다시 아들 하나를 낳을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거예요? 숙모에게 그런 능력이 있대도 숙부가 과연 원할까요?”

“무엄합니다!”

향란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임완운도 얼굴을 붉혔다. 심묘는 그녀가 늙고 쓸모없다고 비꼬는 게 분명했다. 심귀는 미녀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임완운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임완운은 심귀에게 여자로서 매력을 잃은지 오래니 다시 아들을 낳는 건 힘들다는 걸 자신도 잘 알았다.

심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도 좋고, 무엄한 것도 좋습니다. 숙모를 위한 일이에요. 난 이미 숙모에게 살길을 드렸으니, 이제 숙모의 선택에 달렸어요. 숙모가 어떤 선택을 하실지 지켜볼게요.”

심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나가다 마치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틀어 임완운을 한 번 바라보았다.

“물론 이 일을 숙부께 말씀드려도 돼요. 한 가족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아셔야 할 게 지금 제 부모님과 조모는 이미 교착 상태라서 전 두려운 게 없답니다.”

임완운은 자리에 앉아 말이 없었고, 향란과 채국은 경계하며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심묘가 떠난 후, 향란이 임완운을 보며 물었다.

“마님, 정말 심묘 아가씨의 말을 들으실 건가요?”

채국이 이어 말했다.

“심묘 아가씨는 분명 선의로 말한 게 아닙니다. 주인어른을 무너뜨리려는 겁니다.”

임완운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주인어른을 무너뜨리려 한다라……. 그러나 지금 주인어른과 나도 이미 같은 편이 아니지.”

“마님의 뜻은…….”

향란은 눈을 크게 떴다. 임완운은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말했다.

“생각해보마.”

* * *

채운원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묘와 경칩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낯선 여종이 웃으며 다가왔다.

“심묘 아가씨, 만 이낭께서 아가씨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답니다.”

“할 일이 있으니 다음에 하지.”

심묘는 조금도 만 이낭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종은 조금 곤란했지만 어찌할지 몰라 눈을 뻔히 뜨고 심묘가 떠나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심묘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여종은 별수 없이 만 이낭에게 돌아갔다.

“우리와 관계를 분명히 하자는 건가? 심묘 소저가 둘째 부인과 한패가 되어 우리와 맞서는 건 아닐까?”

만 이낭은 심묘의 태도가 언짢았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심동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요. 심청 언니의 일 때문에 그들은 절대 함께할 수 없어요.”

불안한 만 이낭은 방 안을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 심묘 소저는 왜 늘 우리를 보는 척도 안 하는 거지? 혹시 우리 출신을 무시해서……. 심묘 소저는 적출이니까…….”

만 이낭은 울적해졌다. 심동릉은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결국 책을 내려놓고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다섯째가 왕래하지 않는 건 적출이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녀는 온 심부에게 친절하지 않아요. 그녀는 이방 사람과 조금도 이어지길 바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거구요. 이러니 아첨도 소용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 이낭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다. 심동릉은 재빨리 그녀의 말을 잘랐다.

“괜찮아요. 우리가 규칙을 지키고 무슨 실수를 하지 않으면 말썽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 * *

경칩이 방에 돌아온 심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둘째 마님은 정말 둘째 주인어른께 약을 먹일까요?”

심묘가 자신의 손톱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대꾸했다.

“물론이지. 숙모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식이야. 지금 연이어 자식을 잃고 심원백만 홀로 남았다. 숙부는 선량하지 않은 사람이니 숙부에게 약을 먹어야 심원백의 위치를 보전할 수 있지.”

“둘째 마님이 이 일을 둘째 주인어른께 말하면 어찌하나요?”

곡우가 줄곧 걱정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자신에게 약을 쓰려는 것을 숙부가 알면 숙모에게 뼛속까지 원한을 품을 거다. 심원백에게 그 분풀이를 하겠지. 숙모는 심원백을 위해 이 일을 단단히 감출 거다. 어쩌면 숙부는 평생 불임인지도 모르고 살 수도 있겠지. 불임임을 알아도 숙모가 약을 먹인 사실은 절대 모를 거야.”

경칩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머뭇거렸지만 결심한 듯 입을 뗐다.

“그럼……. 설령 그렇게 되어 둘째 주인어른이 정말 아들을 낳지 못해도 심원백 공자님이 있잖아요. 공자님이 자라서 사리를 알게 되면 심원 공자님과 심청 아가씨를 위해 아가씨께 복수할까 걱정입니다. 원수를 그냥 두고 아가씨가 그런 맹세를 하셨으니…….”

심묘는 임완운에게 심원백을 모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지 않으면 벼락을 맞을 거라는 독한 맹세였다. 경칩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맹세했으니 난 심원백을 모해하지 않을 거야.”

곡우는 걱정스러웠다.

“그렇지만 원백 공자님은 반드시 아가씨를 원수로 여길 겁니다. 원수가 되어 온종일 기회를 엿볼 겁니다.”

“그건 그가 자란 후 다시 이야기하자.”

심묘는 생긋 웃었다. 애석하게도 심원백은 원수를 갚을 기회가 없을 터였다. 1년 후 정경성에 급성 전염병인 천연두가 돌 것이었고, 심원백은 천연두에 걸려 죽을 운명이었다. 당시 온 정경성은 인심이 흉흉했다. 다행히 심신 일행은 서북에서 전쟁 중이라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빈곤한 백성은 많이 죽었지만, 성안 귀족은 그럭저럭 재앙을 피해갔다. 하지만 심원백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심묘는 인과응보를 믿었다. 전생 심귀 부부가 저지른 화가 심원백에게 돌아간 것뿐이었다. 그때 이방에는 심원과 심청이 있었지만 지금은 심원과 심청이 없다.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지금 모조리 없애는 것보다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생활하게 하는 게 나았다. 심귀는 아들이 하나 더 있다 여겼고, 임완운은 심원백이 심원을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이방은 대가 끊어질 운명이건만, 그들은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액운이 그들에게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심원백은 하늘의 액운에서 도망칠 수 없을 터. 장래 운명의 낫이 휘둘러지면 그들의 생기는 철저히 거둬질 것이었고, 이방 안에서 싹튼 절망이 그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 것이었다.

수는 모두 준비되었고 바둑돌은 지정된 길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주 좋았다.

“아가씨, 모경이 왔었습니다. 이전에 주신 금권을 이미 다 썼는데 보향루에 계속 가야 할지 물었습니다.”

백로가 들어와 모경의 말을 전했다. 백로는 조금 곤란했다. 그녀 역시 심묘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느 주인이 부하에게 은자를 주며 아가씨를 찾아가라고 하는가. 게다가 돈은 한두 푼이 아니었다. 분명 부하가 누릴 수 있도록 돈을 쓰는 모양이지만, 모경은 도리어 매우 슬프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에게 오백 냥을 더 주거라. 주는 김에 모경더러 류형에게 몇 마디 해도 좋다고 해라.”

백로는 쓰라린 기색을 드러냈으나 순종했다. 방 안 여종들은 모두 멍해졌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말한 ‘몇 마디’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백로가 나가려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췄다.

“아, 아가씨, 이전 송경당의 장 유모가 찾아왔습니다. 분가 일을 물어보는 듯했습니다.”

형관생이 진상을 실토한 날, 나설안은 심신에게 사실을 전했다. 노여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심신도 노부인과 논쟁했다. 나설안은 진심으로 분가하려고 했고 심신 역시 이 일에 찬성했다. 그들은 노장군이 남긴 재산도 원치 않으니 무조건 분가하겠다고 전했다. 노부인은 자신이 심신의 은자와 위세 때문에 이렇게 편하 게 지내는 걸 알기에 중풍으로 쓰러진 척 가장했다. 장 유모가 이렇게 소식을 알아보려는 건 심신 부부가 홧김에 말한 거라고 넘기려는 수작이었다.

“만일 다시 와 묻거든 분가는 이미 정해졌다고 말하거라. 장 유모더러 조모를 잘 보살피라고 하고. 만일 조모께서 계속 낫지 않으면 가문 안 장로를 청해 이야기해도 좋다고 전해라.”

가문 안 장로는 심 노부인의 출신을 깔보았으며, 그렇기에 심신을 편애했다. 가문 장로를 불러 분가를 의논하면 노부인에게 더욱 불리했다.

“알겠습니다.”

백로가 웃으며 나갔다.

심묘는 탁자에 앉았다. 이번 생의 길은 막 열렸다. 많은 계략을 꾸며야 했다. 원수에게 복수하며 동시에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으니, 한 걸음씩 가야 했다.

* * *

정경성에서 심부의 풍파는 얘기를 나눌 화젯거리에 불과했다. 잠시 담소를 나눌 뿐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며칠 후면 새로운 소식으로 바뀔 것이었다. 박정한 세상에서 사람의 죽음은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보향루는 여전히 떠들썩했다. 최근 파서국 무희가 새로 들어왔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언행이 대담해 귀족 공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원래도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예 미어터질 것 같았다.

남자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옛것을 싫어했다. 새로운 무희들은 환영받았고 이전 여왕들은 잊혀갔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가 입구로 들어오자 손님을 맞이하는 아가씨가 손수건을 휘두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모 대인, 오늘은 류형을 찾지 않으실 건가요?”

모경이 은자를 아가씨에게 건넸다.

“전과 같이.”

아가씨는 류형을 질투하면서 모경을 사모하는 양 말했다.

“대인는 정이 기시네요. 류형은 정말 복을 타고났나 봐요.”

모든 남자가 새로운 아가씨를 부를 때 모경은 꿋꿋이 류형만을 찾았다. 보향루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류형에게 정이 깊다고 믿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와 류형 두 사람만 알았다.

* * *

보향루의 맞은편에 있는 쾌활루.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계우서는 모경이 보향루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가리켰다.

“봐봐. 또 간다!”

고양이 계우서에게 눈을 흘겼다.

“뭐 볼게 있다고. 사흘 걸러 한 번, 한 번에 하룻밤. 다음날 일찍 해가 뜨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떠나잖는가. 익숙한 일에 또 놀랄 필요가 있나?”

계우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양에게 눈을 부라렸다.

“형, 바보야? 우리 둘은 그걸 알지만, 막 돌아온 3형이 어떻게 알겠어? 난 형한테 한 말이 아니라고.”

사경행은 의자에 편히 기댄 채 보향루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가 좁은 검은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냉혹하면서도 고상한 기색이 돋보이는 옷이었다.

“사경행, 이번 일 처리는 어떤가? 그들은 어떻게 됐나?”

고양이 물었다.

“모두 죽음을 각오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전부 죽였어. 일이 급박해졌으니 이쪽도 서둘러야 해.”

사경행의 말에 계우서는 안타까운 기색을 띠었다.

“동작이 빠르든 느리든 무슨 소용이야. 물건을 찾지 못했는데.”

“심원은 부수의의 사람이니 조금은 단서가 있을 걸세. 비록 심원은 죽었지만……. 부수의는 반드시 심원에게서 물건을 찾아내겠지.”

고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심부로 가봐야겠어. 찾을 수 없을 리가 없어.”

사경행이 미간을 찌푸렸다.

계우서는 그들의 말을 끊었다.

“됐어. 그 얘긴 하지 말자. 대체 심묘의 생각이 뭘까. 모가가 계속 보향루에 가는데 이건 무슨 뜻일까? 심묘가 그저 수하를 후하게 대하는 건가? 아가씨를 만나라고 수하에게 은자도 주다니. 씀씀이가 풍선전당포 가주보다 대범해.”

“자넨 아가씨를 찾아간 사람이 매일 날이 밝자마자 길을 떠나는 걸 본 적 있는가?”

고양이 바라보자 계우서가 당연하다는 듯 부정했다.

“당연히 없지. 난 작약 소저를 찾아가면 어떻게든 더 함께 있으려고 애써. 매일 곁에 있지 못해 한스러운걸. 봄밤은 지독하게 짧은데 어떻게 날이 밝자마자 바로 헤어질 수 있어!”

“너희는 눈이 안 보여? 다른 사람이 있는 건 보이지 않아?”

두 사람을 힐끗 본 사경행은 아래로 다시 눈을 돌렸다. 계우서와 고양은 멍한 얼굴로 사경행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보았다. 보향루가 보이는 골목에서 남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넋을 잃은 채 류형의 방을 보고 있었다.

계우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라보는 건 다들 하잖아. 아가씨를 찾아가고 싶지만, 은자가 없으니 별수 있나. 훔쳐보는 걸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거지. 근데 뭐가 잘못됐어?”

고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폈다.

“저 사람……. 조금 눈에 익은데, 어디서 본 거 같네.”

“배랑.”

사경행이 말했다.

“배랑이 누구야?”

계우서가 물었다.

“광문당 선생.”

고양이 드디어 기억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생각났다. 이전 궁중 연회에서 본 적 있어. 그런데 이곳에 와서 뭘 하는 거지?”

계우서는 흥분해서 침을 삼켰다.

“선생? 선생이 청루를 찾아와? 광문당은 정경성 귀족 자제가 공부하는 곳 아니야? 선생이 저렇게 품행이 나쁘다니!”

“그럼 매일 청루에 가는 자네는 품행이 대체 얼마나 나쁜 겐가?”

고양은 계우서를 타박했다.

“나는 학생을 가르치지 않으니까!”

사경행은 두 사람을 나무랐다.

“조용히 해. 너희들은 여태 배랑을 발견하지 못한 거야?”

계우서는 억울했다.

“난 저 사람 몰라.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상한 점만 주의하기도 힘들었어. 저 선생은 보기에 별반 이상하지 않고. 게다가 내가 어찌 그가 선생인 걸 알겠어?”

“배랑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그는 단지 가난한 서생일세.”

“심묘는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부하에게 류형을 찾으라고 시킨 데에도 분명 의도가 있을 텐데, 여태 짐작할 수 없어 답답했지. 이제 그 의도를 알겠네.”

사경행의 시선이 멀리 있는 배랑에게 떨어졌다. 고양은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심묘가 수하를 보향루에 보낸 이유가 배랑 때문이라는 건가?”

사경행은 웃었다. 시선은 깊은 뜻이 있는 듯 움직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심묘는 늘 배랑을 주시했어. 배랑은 가난한 지식인이지만 무언가 있어.”

계우서는 크게 웃었다.

“나, 이유를 알 것 같아!”

고양과 사경행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계우서가 몇 번 헛기침하더니 자신 있게 입을 뗐다.

“아주 간단해! 저 사람은 풍채도 괜찮은 데다 선생이니만큼 학식도 깊고 넓을 거야. 아무래도 꽃다운 나이인 심묘는 재능과 용모 둘 다 갖춘 선생을 만나 막 사랑에 눈을 떴을 거야. 선생이 청루에나 기웃거리는 속이 보잘것없는 남자란 건 몰랐겠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심묘는 분노해 수하에게 그 아가씨를 사도록 한 거야…….”

“잠시만. 무엇 때문에 배랑을 좋아하는 심묘가 류형을 사야 하는가?”

고양이 날카롭게 지적하자 계우서가 열심히 생각한 후 대답했다.

“배랑은 은자가 없으니 류형의 밤을 사지 못해. 그래서 심묘는 하인에게 류형의 밤을 사도록 한 거지. 배랑이 하인보다 못한 자신의 현실에 분개하라고!”

계우서는 말할수록 흥분했다. 입에서 튄 침이 탁자에 날아들었다.

“봐! 배랑이 받는 상처, 심묘가 받은 상처 둘 다 심하잖아! 젊은 아가씨는 의외의 곳에 천금을 아끼지 않는다고.”

머리가 아파진 고양은 이마를 문질렀다.

“계우서, 자네 또 기원에서 영문 모를 이야기를 들었나?”

자리에서 일어난 사경행이 무표정한 눈빛으로 계우서를 힐끗 보았다.

“너희끼리 잘 놀아. 난 먼저 가야겠다. 계우서 너 무료하면 탑뢰에 가. 사람이 부족하니 철의와 함께 정리 좀 해.”

계우서는 서리를 맞아 시든 가지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 * *

보향루.

류형은 완전히 단념해 단장조차 하지 않은 채로 모경을 맞았다. 이전에는 이 남자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오기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화도 나지 않았다. 모경은 오늘도 탁자에 앉아 차만 마시고 있었다. 류형은 천천히 탁자에 다가가 모경이 올려둔 은자를 상자에 넣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가 차를 홀짝이면서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 공자, 지난날과 다름없이 저를 보러 와주셔서 제가 지금 같은 불경기에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드립니다.”

다른 아가씨들은 파서국 무희에게 단골을 빼앗겼지만, 류형에게는 여전히 그녀만 찾는 모경이 있었다. 그러니 모두들 류형을 부러워했다. 그녀들은 모경이 은자를 주고 멍하니 앉아만 있다 떠나는 손님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니 류형이 모경을 괴상망측한 사람이라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녀도 모경과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여러 번 와도 모경은 그녀와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손님을 맞는 아가씨와 말을 섞지 않았다면 류형은 모경을 벙어리로 여길 뻔했다.

“내가 아닙니다.”

처음 듣는 모경의 목소리에 류형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은자를 주는 건 내가 아닙니다.”

류형은 모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요?”

“내 주인이 내게 사흘에 한 번 당신을 찾아가 은자를 주고 무엇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모경은 보향루에서 처음으로 길게 말했다.

류형은 모경의 말을 듣고 경계의 기색을 띠었다. 류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모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

분노한 류형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께서 며칠 후 당신을 보러 올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다른 손님은 받지 마십시오.”

류형은 기가 찬 듯 피식 웃었다.

“난 당신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고 그가 뭘 하려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저 보향루의 아가씨입니다. 이런 불경기에 다른 손님을 받지 않으면 난 뭘 먹고 사나요! 날 먹여 살려줄 건가요?”

모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이 없는 모경을 보고 류형은 더욱 분노했다. 다른 남자는 이럴 때 진심이든 아니든 먹여 살려주겠다고 위로할 것이었다. 달래려고 한 빈말임을 알아도 듣기는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경은 완고하고 진지했다. 남을 속이는 말은 하지 않았다. 류형은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밀어 입을 달싹였지만, 바로 다음 순간 힘이 빠졌다. 모경은 이미 자신의 방문이 주인의 명령에 따른 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화를 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모경은 류형의 안색이 나빠진 것을 보고 머뭇거리다가 심묘가 분부하지 않은 말을 덧붙였다.

“내 주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세요.”

류형은 모경을 바라보았다. 모경은 다시 고개를 숙여 차를 마시기 시작했지만, 류형은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모경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나요?”

하지만 이미 모경이 다시 입을 다문 후였다.

* * *

별도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다. 심묘는 나설안의 방에서 잠시 나설안과 이야기를 나눈 후 자기 뜰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경칩이 낮에 들었던 소식을 심묘에게 전했다.

“아가씨, 형가 사람은 오늘 오후 소주로 출발했답니다. 가면서 머물던 방에서 값어치 있는 물건을 조금 챙겨갔대요. 정말 날강도나 다름없지요. 노부인 마님은 분노로 또 중풍이 오실 뻔했답니다.”

경칩이 말하는 ‘중풍’은 비꼬는 의미가 컸다. 노부인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격분할 때마다 ‘중풍’이 오는 척했다. 그러나 형가 사람이 그녀보다도 한 수 위인 듯했다. 송경당 물건을 겁도 없이 가지고 가다니 감탄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뻔뻔한 사람이 더 뻔뻔한 사람을 만났으니 제대로 적수를 만난 셈이었다.

“그 사람들 육촌 소저를 구하겠다고 방방 뛰길래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소주로 돌아갈지는 몰랐어요. 육촌 소저가 이부상서부에 있으면 좋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구할 방법을 생각하지도 않았네요. 그저 은자를 더 받아내려 한 것일 뿐이었군요.”

경칩이 형가 사람을 비난하자 심묘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백성은 관리와 싸울 수 없어. 형가 사람은 자신들이 큰일을 저지른 걸 안 거지.”

“모두 나쁜 사람들이네요.”

경칩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손천정은 어질고 여린 사람이 아닐뿐더러 손이 무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형초초 외에는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다. 소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이 도망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뜰로 돌아온 심묘가 문을 여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목욕을 하고 싶으니 물을 끓이러 가거라. 조금 뜨거우면 된다.”

경칩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졌다.

심묘는 병풍을 지나 규방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탁자에 한 사람이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어두운 금색이 흐르는 장포가 어두운 방 안에서 반짝거렸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심묘의 서적을 무료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붉은 입술, 하얀 치아가 준수했다.

“어째서 이렇게 늦게 돌아온 거지?”

사경행은 불만스러웠다.

“전 당신을 초청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사 소후야.”

심묘는 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널 아주 오래 기다렸어.”

사경행은 자기 할 말만 하며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배고파.”

심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가요.”

사경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오래 못 봤더니 성격이 급해졌구나.”

심묘가 탁자에 앉아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지난날과 다름없네요.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는 걸 좋아하시는 걸 보면.”

사경행이 그녀의 방에 온 걸 다른 사람이 알면 얼마나 많은 말썽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일을 벌이길 좋아하니 뼛속 깊이 위험을 품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심묘는 이미 사경행을 멀리하기로 결정했다. 사경행의 비밀은 너무 많고 하나하나 그 깊이를 들여다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경행이 제 발로 찾아왔다.

“이곳에 온 김에 널 보러 온 거야. 네게 한 가지 물을 게 있어.”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하고 편안한 자세로 바꿨다. 추운 계절이지만 그의 출중한 용모에는 봄기운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말해요.”

심묘는 그와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환대하지 않는 태도에 개의치 않는 듯 태연했다.

“부에 심원이 신임하는 사람이 있나?”

심묘는 사경행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경행의 질문이 심원에 관한 것일지는 예상치 못했다. 사경행의 목적을 모르지만 답했다.

“없어요. 오라버니는 정경성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 사람과 친근하지 않았어요. 왜 묻는 건가요?”

“막 그의 뜰 안을 한 바퀴 돌고 왔어. 물건을 찾지 못해 물어보러 온 거야.”

사경행이 나른하게 말했다.

“찾는 게 도대체 뭐예요? 예친왕부 밀실, 그 물건과 같은 거예요?”

심묘가 물었다.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사경행이 대단한 한기를 내뿜은 탓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이 웃자 바로 그 위험한 분위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옥같이 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 속의 예리한 칼날은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심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심가 이방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던데.”

“심부의 일을 잘 아시니 심부 사람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심묘는 비꼬았다.

“심부의 호위가 장식품 수준이라 알 수밖에 없어. 일어나는 일도 재미있어서 모르려 해도 어렵지. 네 흉악함을 과소평가했어.”

사경행은 실눈을 뜨고 심묘를 관찰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도 한번 시도해봐도 돼요.”

“난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

“아주 바쁜가 봐요. 이렇게 남의 관저를 돌아다닐 담력은 어디서 난 건가요?”

심묘는 분노를 조금 드러냈다. 사경행은 늘 쉽게 그녀의 감정을 끌어냈다. 이 자리에 곡우와 경칩이 있다면 그녀의 모습에 놀랄 것이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솔직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경행은 그런 심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젊은 사람은 늘 혈기가 강하지.”

심묘는 화를 겨우 참으며 말했다.

“질문 다 했는데 아직 안 가나요?”

사경행은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는 뒤쪽 창문을 열고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물었다.

“묻는 걸 잊을 뻔했네. 심묘, 너 배랑 좋아해?”

황당한 질문에 심묘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경행은 다시 한번 까탈스럽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괜히 물었나 보네.”

사람 그림자는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췄다.

“저 망할…….”

심묘는 이를 갈 뻔했다. 그때, 경칩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물은 이미 끓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향로를 넣겠습니다. 아가씨, 창문 앞에 서서 뭐 하세요? 감기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심묘가 창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무것도 아니다. 막 도둑고양이를 쫓아냈을 뿐.”

경칩이 살짝 미소 지었다.

“도둑고양이요? 이 계절에는 도둑고양이가 자주 출몰하죠. 아가씨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내일 사람을 불러 쫓게 하겠습니다.”

“비상을 두는 게 좋겠어. 깨끗이 죽여버려.”

심묘는 일부러 험한 말을 했다. 경칩은 심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예?”

* * *

만 이낭은 심동릉에게 자신의 걱정거리를 말했다. 조금 원망하는 투였다.

“그날 심묘 소저가 둘째 부인에게 뭐라 말했는지는 몰라도, 근래 부인의 병세는 하루하루 좋아지고 있다는구나. 사람도 알아보고 성질을 부리지도 않고. 심지어 여종에게 죽을 끓이라고 시켜 대인께 건넨다니, 다시 대인의 총애를 얻을까 걱정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할 거야. 심묘 소저가 부인의 병을 낫게 한 게 분명해.”

심동릉은 탁자에 앉아 머리카락을 빗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창백한 얼굴은 등불을 쬐니 병약해 보이기보다는 뾰족한 얼굴형에 큰 눈을 가진 미인처럼 보였다.

“어머니,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아무리 심묘가 능력이 있어도 사경에 빠진 환자를 살릴 수 없어요. 부인은 일부러 미친 척했던 것 같아요. 심묘와 대화한 후 연기를 그만둔 것 같고요.”

만 이낭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네 말은 부인이 일부러 미친 척했던 거란 말이냐? 대인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이 기회를 잡으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어머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심청 언니와 심원 오라버니 일 때문에 아버지는 이미 부인을 싫어하세요. 부인이 정말 정신을 차렸다면 아버지는 겉으로는 너그럽게 대하겠지만 속으로는 아주 혐오하실 거예요. 부인이 이전의 위치를 얻으려 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부인도 알 테니, 어머니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심동릉이 위로했지만, 만 이낭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대인이 용서하지 않을 걸 아는데 왜 계속 미친 척하지 않는 거지? 심묘 소저는 무슨 말을 해서 부인의 행동을 바꾸게 한 걸까?”

“부인에게는 지금 심원백밖에 없으니 심묘는 아마 동생의 일을 가지고 의논했을 거예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안겨주도록 노력하세요. 아들이라면 적자든 서자든 상관없이 장래 입지를 굳힐 수 있어요. 그러면 누구도 어머니를 감히 밟지 못할 거예요.”

만 이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들을 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는 임완운 손안에서 철저히 관리당했다. 만약 심동릉을 낳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임완운이 수완을 쓰지 않아도 심귀는 박정해서 마음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심귀의 마음을 잡아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자 만 이낭은 화제를 돌렸다.

“동릉아, 심묘 소저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부인을 도와 우리와 맞서려는 걸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에요. 심묘는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도 이방 안에서 지위가 높지 않은 게 좋아요.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칫 화를 초래할 수도 있어요.”

만 이낭은 혼비백산했다.

“그래서…….”

“보지 말고 묻지 말고 말하지도 말아요. 그러면 언젠가 우리도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심동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 * *

추수원.

채운원에서만이 아니라 추수원에서도 임완운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진약추는 새하얀 잠옷을 입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둘째 형님의 몸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인, 둘째 아주버니는 무슨 말씀이 없으셨나요?”

심만은 이마를 문질렀다. 심원의 일로 조정 동료들은 심가를 멀리하고 있었다. 그 차가운 시선은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근래 그다지 일이 수월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은 그 일을 꺼내지도 않았소.”

“둘째 형님과 둘째 아주버니에게는 심원백 하나 남은 셈이에요. 아주버니는 또 장래 첩을 데려올 테지요. 단지…….”

진약추는 임완운이 조금 안쓰러웠다. 임완운과 달리 자신은 남편의 마음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삼방은 줄곧 아들이 없었다. 심원이 죽었으니 심 노부인은 서둘러 두 아들에게 후손을 만들어주려고 할 것이었다. 심귀는 품성이 좋지 않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 치지만, 심만이 재촉당하게 된다면 자신도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남자의 총애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은 이미 임신하기 어려운 몸이었다.

심만은 진약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왜 그러오? 몸이 불편한 게요?”

진약추는 간신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아주버니와 큰형님이 생각나서요. 큰아주버니는 분가하기로 결정했고 가문의 장로를 초청할 거라 위협도 서슴지 않으시네요. 불효를 무릅쓰시려나 봐요.”

“이 일은 어머니가 온당하게 처리하시지 못했소.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형님을 건드렸다가 어머니가 심구를 모해한 일이 알려지게 되면 온 정경성이 우리를 비방할 것이오.”

진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때문에 큰아주버니도 침착한 걸 거예요. 오랫동안 다툼 없이 살았는데 어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분가로 떠들썩한지.”

진약추는 심묘가 떠올랐다. 심묘의 성격이 크게 변한 후 심부의 많은 일이 조금씩 변했다. 이전에는 심신 부부와 심묘가 심가 다른 사람에게도 잘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가 혐오와 불만을 드러내자 심신 부부의 태도도 따라서 변했다.

심만이 탄식하자 진약추가 물었다.

“대인, 이 일은 되돌릴 여지가 없을까요?”

심만은 고개를 저었다.

“심모에게 그랬다면 우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거요. 더욱이 형님 일가는 모두 이런 일을 그냥 넘길 성격들이 아닌 데다 심묘를 끔찍이 아끼니……. 형가 사람과 어머니가 합심해 심구와 심묘에게 계략을 꾸민 것 자체가 형님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오. 분가만 하겠다니 이미 그들 입장에서는 이쪽 사정을 많이 봐준 것이오. 형님 성격대로만 하자면 심부를 부수고도 남았을 터인데.”

“하지만…… 지금 분가하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다.”

심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방은 심한 타격을 입었소. 둘째 형님은 말할 것도 없이 내 벼슬길도 그렇지. 이전에는 큰형님의 권력에 기댈 수 있었으나 분가하고 나면 사람들은 모두 심부가 화목하지 않은 걸 알 것이오. 이후에는 큰형님에게 잘 보이려 우리와 왕래를 끊겠지. 그러니 우리 입장도 더욱 곤란해질 것이오.”

“그뿐 아니라 공동 자금도…….”

이전에는 심신의 무수한 하사품을 전부 공동 자금으로 이용했다. 심 노부인이 돈을 물 쓰듯 쓸 수 있던 건 사실상 모두 심신 덕이었다. 그러니 심신이 노장군이 남긴 재산을 원치 않아도 심부의 생활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었다.

“단지 그것만이면 괜찮소. 분가 후가 권력 비교의 시작점이 되겠지. 그건 우리를 곤란케 할게요.”

심만의 시선에 침울함이 가득했다.

진약추는 놀랐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심부가 겉으로는 화목해 보여도 각자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 심신 부부는 부에 없어 몰라도 그녀와 임완운은 잘 알고 있었다. 심신과 심귀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심신이 잘할수록 오히려 형제에게는 좋지 않았다. 언젠가 모두 대립할 줄은 알았지만 그 국면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인, 심모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그냥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어찌 대적해야 한단 말입니까?”

진약추는 심만의 어깨를 주물렀다.

“지금 형님은 우리를 경계하고 있어 손을 쓰기가 쉽지 않소. 또한, 그의 군대는 허점을 찾기 어려우니 이 일은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오. 당장 급한 일은 심모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주는 것이오. 당신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시오.”

진약추는 탐색하듯 물었다.

“대인, 정왕 전하는…….”

“정왕 전하에 대해서는 생각지 마시오. 심원의 일을 겪어 조정 사람은 심가와 관련될까 두려워하오. 황자는 더 주의할 필요가 있소. 이때 정왕 전하께 시집가려 하면 정왕 전하도 좋아하지 않을게요.”

심만이 사납게 말했다. 진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인도 일찍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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