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6장 (43/71)

25장

다음 날 아침, 심묘가 막 식사를 끝냈을 때 상강이 바깥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왔다.

“아가씨, 일이 생겼어요!”

“천천히 말해봐. 왜 이리 호들갑이야?”

곡우가 질책했다. 상강은 혀를 쏙 내밀며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형가 사람이 소주로 돌아갔잖아요. 오늘 그쪽 관아에서 말하길 형가 사람이 소주로 돌아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전부 죽임을 당했대요. 형가와 노부인 마님의 관계를 알고 관아에서 방문해 알려줬답니다.”

상강은 자기 명치를 토닥이며 두려워했다.

“도적이 갈수록 사납게 날뛰네요. 태평성세 아래 감히 살인이라니! 게다가 생존자도 하나 남기지 않았어요. 형가 사람은 정경성을 떠난 것을 필시 후회하면서 죽었을 거예요.”

형가 사람은 복수에 당한 것이지 결코 떠돌이 도적에게 당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심묘는 알았다. 손천정의 수완은 단호하고 신속했다. 형초초 때문에 손재남이 목숨을 잃었으니 손천정이 그 일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심가 사람 역시 죽이지 못해 한이 맺혔을 테니 그 분을 형가에 모조리 쏟아냈을 것이다.

형가는 형초초의 탐욕으로 인해 전생과 같은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원흉인 형초초는 아직 손천정의 손에 살아 있었다. 손천정은 절대로 형초초를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었다. 형초초는 죽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절망 속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 그러나 이는 심묘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곡우에게 물었다.

“물건은 준비했느냐?”

“상자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정말로…….”

곡우가 조금 머뭇거렸다. 심묘는 단호히 분부했다.

“가져오거라.”

반 시진 후, 서원 옆문에서 네 사람이 걸어 나왔다. 네 사람 중 맨 앞에 선 이는 월백색 의상을 입고 모자를 썼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것처럼 보이는 용모가 수려한 젊은 공자였다. 키는 좀 작았지만, 살결이 희고 예쁘게 생겼다. 눈은 맑고 투명해 남자들이 웃음을 파는 청루에서 추종받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의 뒤를 바싹 따른 수행원 두 명은 우물쭈물하며 행동이 굼떴다. 두 사람 뒤에는 덩치가 매우 큰 호위가 한 명 서 있었다.

“겁내지 마라. 담력을 크게 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마.”

심묘가 말했다. 이 네 사람은 다름 아닌 심묘, 경칩, 곡우, 모경이었다. 경칩과 곡우는 남장에 익숙하지 않아 울상을 지었다. 무섭기도 했다. 모경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심묘를 살폈다. 그들은 몰랐지만, 전생에서 심묘는 진국에 인질로 갔을 때 희롱을 피하기 위해 몇 개월간 꼬박 남장을 하면서 변장에 도가 텄다. 그러니 그들 눈에만 어색할 뿐, 지금 심묘의 모습은 진짜 풍류 공자 같았다.

세 사람이 마차에 타자 모경이 직접 마차를 몰았다. 곡우는 심묘에게 물었다.

“아가씨, 저희 정말로 보, 보향루로 가나요?”

“물론.”

“그러나…… 저희가 바깥에서 말을 해도 될까요? 만일 아가씨가 청루에 간 것을 들키면…….”

곡우는 더 말하지 못했다. 그녀도 여자가 청루에 가면 어찌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보향루는 장사하는 곳이다. 그러니 은자만 주면 돼. 청루에서는 예의와 덕행을 따지지 않아. 외형에 구애받지 않는 장소니 간다고 주의할 사람은 없다.”

경칩과 곡우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대방의 눈 속에서 유감을 읽었다. 그러나 심묘는 의지가 강해서 한번 결정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게다가 늘 번지르르한 이유를 꺼내 설득을 잘하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이미 시작했으니 따를 수밖에.

* * *

쾌활루.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계우서는 그를 반겼다.

“3형, 잘 왔어. 형과 할 이야기가 있어. 부수의…….”

그때 고양이 술잔을 들고 중얼거렸다.

“어, 이번에는 좀 다르군?”

“뭐가 달라?”

사경행은 창문가에 앉아 차를 따르며 되물었다. 그는 고양의 시선을 따라 밖을 보았다. 보향루 건물 아래 마차 한 대가 멈췄고 안에서 몇 명이 내렸다. 제일 앞서가는 사람은 모경이었다. 모경 뒤로 세 명의 소년이 따랐다.

“늘 모경이 혼자 와서 혼자 갔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이 온 거지? 이것도 심묘의 분부인가?”

고양이 턱을 괴고 말했다. 그 말에 계우서는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았다. 그의 눈 속 이상한 빛이 돌았다.

“혹시 심묘는 일 잘하는 하인들을 저런 식으로 칭찬하는 게 아닐까? 하인이 잘하면 상으로 보향루에 하룻밤 보내주는 거야. 아, 나도 심묘의 하인이 되고 싶네.”

고양이 계우서의 머리를 밀어젖혔다.

“비켜 보게. 눈에 익은 사람이 있는 거 같은데.”

순간, 사경행은 마시던 차를 내뿜었다. 뜨거운 찻물 세례를 받은 계우서가 비명을 지르며 멀리 도망쳤다. 그는 옷을 정리하며 소리를 질렀다.

“형! 뭐 하는 거야!”

사경행은 계우서를 상대하지 않고 아주 의외라는 시선으로 모경 일행을 주시했다.

“스스로 올 줄이야.”

“스스로?”

고양은 사경행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아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역시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는 하얀 피부의 젊은 공자가 심묘라는 것을 알아챘다. 여자가 남장한 후 청루에 가다니. 원래 같으면 코웃음 치며 책에서나 일어날 일이라고 여길,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믿지 못할 장면이었다.

심묘는 모경을 따라 보향루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아가씨가 모경을 보고 익숙하게 맞이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모 대인, 여전히 류형 아가씨로?”

모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그제야 모경의 뒤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듯 망설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분은……?”

“나와 함께 갈 거요.”

아가씨는 멍해졌다가 무언가 생각한 듯 놀리는 표정으로 모경을 보았다.

“모 대인이 이러실 줄은……. 괜찮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놀면 더 즐겁지요.”

경칩과 곡우는 얼굴을 붉혔다. 모경도 불편했다. 침착한 사람은 심묘뿐이었다.

아가씨는 그들을 데리고 류형의 방으로 향했다. 모경은 보향루의 단골손님이기에 이곳 아가씨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 곡우, 경칩은 보향루에 처음 방문한 수려한 공자님들이었으니 관심을 끌었다. 특히 심묘는 살결이 하얗고 고와서 아가씨들이 수시로 깔깔 웃으며 바라보았다. 류형의 방에 도착하자 길 안내를 한 아가씨가 문을 두드렸다.

“류형, 모 대인께서 널 보러 오셨어.”

모경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류형이 거울 앞에서 치장하고 있었다. 의상은 느슨했고 검은 머리는 폭포처럼 치렁치렁했다. 인기척을 들은 류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일찍 오셨군요.”

경칩과 곡우는 모경을 바라보았다. 모경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했다.

“나뿐이 아니오. 난…….”

모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묘 일행을 본 류형이 냉소했다.

“이렇게 즐기고 싶으셨나 보군요. 가능합니다. 그러나 은자는 두 배를 내셔야 합니다!”

곡우, 경칩뿐 아니라 심묘도 모경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모경은 조금 난처했다. 며칠 전만 해도 류형의 기분이 좀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크게 노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 탓인지 얼음같이 소원한 태도였다.

“류형 소저, 제가 모경의 주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즐기러’ 온 게 아닙니다.”

심묘가 입을 열어 교착된 국면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경칩과 곡우는 눈을 가리고 싶었다.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게 참으로 애석했다.

‘주인’이라는 소리에 류형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심묘를 훑어보았다. 심묘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곡우와 경칩은 심묘에게 얼른 의자를 갖다 주었다.

“당신이 모 공자에게 내 밤을 사도록 시켰나요?”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형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묘했다.

“공자가 이러시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혹시 절 진심으로 좋아하시나요?”

모경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류형은 환락가의 여인이기에 유혹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반면, 경칩과 곡우의 얼굴에는 멸시가 드러났다.

“류형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심묘는 류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류형 역시 심묘를 세심히 관찰한 후 웃었다.

“아가씨는 소설 속 남장여자를 실제로 하셨군요?”

류형은 한눈에 심묘의 성별을 간파했다. 가까이서 보면 티가 나긴 했다. 심묘는 수려하게 생긴 데다 피부는 백옥처럼 하얗고 걸음은 지나치게 고상하니 여자임을 숨기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난 당신의 자유를 찾아줄 겁니다.”

류형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보향루로 팔려온 지 오래되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큰돈을 들여 자유를 얻어주려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가씨의 뜻을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다가 양면으로 수가 놓인 손수건을 얻었어요. 명제에서 양면에 수를 놓는 사람은 수십 명밖에 되지 않지요. 수소문해보니 그 손수건이 류형 소저가 만든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류형은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가씨! 어떻게 내가 만든 것을 아신 거죠?”

심묘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내가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내 자수 점포에 수놓는 아가씨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흥미가 있다면 류형 소저가 나 대신 점포를 관리해주지 않겠어요?”

류형은 불가사의한 기분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저를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구요?”

경칩과 곡우는 류형의 태도와 표정이 불만스러웠다. 모경도 눈살을 찌푸렸다. 많은 기녀들이 그 생활을 청산하길 갈망했다. 류형은 아직 젊으니 청루를 벗어나면 좋은 미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류형은 마치 그를 바라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난 이곳에 팔려왔어요. 방중술을 배워 남자에게 시중드는 법만 압니다. 아가씨는 내게 자수 점포를 맡으라고 하시지만 그렇게 힘든 생활, 전 못 해요. 아가씨는 제가 점포를 망하게 할까 걱정되시지 않나요?”

심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망하고 말고는 내 일이지만, 할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합니다. 내게는 별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요.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고 각자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청루 여자를 하찮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세상 사람의 시선은 다르지요. 나의 모경을 보세요.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요.”

심묘는 경칩과 곡우를 가리켰다.

“이 두 사람은 또 어떻고요. 어떤 사람은 이들을 선망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사람을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고, 사람은 누구도 밑바닥 계층이길 바라지 않아요. 누가 매일 손가락질당하길 원할까요?”

“아가씨!”

청루 출신에 대한 선입견을 극도로 싫어하는 류형은 분노했다.

“한번 고려해봐도 괜찮아요.”

“기녀를 싫어하는 아가씨가 구태여 저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류형은 화를 참으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내가 경시하는 건 달가워서 제 발로 기녀가 된 사람입니다. 며칠 후 모경이 다시 한번 방문할 테니 지금 대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락가에서 좋은 결말은 없을 거예요.”

심묘가 모경에게 눈짓했다. 모경은 은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류형은 그를 흘끗 보았다. 류형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스쳤다. 모경은 곤란했다.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는 심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보향루의 문을 나오자마자 경칩이 화를 냈다.

“공자님은 선의로 자유를 얻어주려는데, 감사히 받지도 않다니요.”

모경이 뭐라 말을 하려고 잠시 입을 뻐끔거렸으나 새어 나오는 것은 공기뿐이었다.

“공자님, 지금 돌아가시나요?”

곡우의 물음에 심묘는 대답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주의 깊게 보고 있는 듯했다. 곡우가 의아해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거리 맞은편 구석에 남색 장포를 입은 사람이 서서 보향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처마 아래 남색 장포를 입은 남자는 똑바로 서서 류형의 방 창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넋을 잃고 보느라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남자는 가벼운 기침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네 사람이 곁에 와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젊은 공자는 월백색 옷이 아주 잘 어울렸는데, 피부가 눈같이 희고 이목구비가 수려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자를 보며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배랑은 이 젊은 공자를 어디선가 본 듯해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그때 그가 먼저 배랑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선생님.”

배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심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준 후 다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 왜…… 그렇게 입은 겁니까?”

남자들은 잘 몰랐지만, 아가씨들이 남장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명제의 많은 아가씨가 외출 시 일 처리를 편하게 하려고 종종 남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랑은 남장여자를 처음 보았다. 그는 남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눈앞의 소년을 보며 말을 잃었다.

“전 방금 보향루에서 나왔어요.”

배랑이 기침했다.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남장여자에 대해 들은 적은 많았지만, 그 사람이 청루에 간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거리낌 없이 말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심묘는 배랑에게 한 걸음 다가가 부채를 펼쳤다. 그녀는 부채로 두 사람의 얼굴을 가리고 부채 뒤에서 속삭였다.

“다들 보향루의 아가씨가 절색이라고 해서 특별히 보러 온 거예요. 최근 새로 온 파서국 무희들이 대단히 요염하다고 하더군요.”

배랑은 조용하고 침착해서 평소 바깥에서 고급 관리나 귀인과 마주할 때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심묘의 애매한 동작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심묘의 말은 아가씨가 입에 담을 만한 게 결코 아니었다. 배랑은 정말 화류계에 빠져 홍등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공자를 만난 듯했다. 그와 어느 무희가 가장 예쁜지 농을 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터무니없는!”

겨우 선생의 신분을 자각한 배랑은 잇새로 탄식을 내뱉었다. 심묘가 살짝 웃으니 그 눈꼬리는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러나 저는 류형 소저의 패를 샀답니다.”

배랑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심묘는 부채를 접고 웃으며 그를 보았다.

“선생님은 이곳에서 류형의 방을 올려다보신 지 오래인 듯한데, 류형 소저에게 열망이 가득하신가 봐요?”

배랑은 심묘를 노려보듯 주시했다. 그의 평범하던 표정이 갑자기 맹렬해졌다. 하지만 심묘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활짝 웃으며 쾌활루를 가리켰다.

“선생님, 류형 소저에게 흥미가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술을 마시며 미인 이야기를 하시죠.”

심묘의 행동거지는 경박해 보여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부채를 가슴에 가로로 둔 채 망설임 없이 쾌활루의 계단을 밟았다.

“미주를 마시며 미인을 논하다니, 그야말로 쾌재를 부를 일이지요.”

경칩, 곡우, 모경 세 사람은 심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녀의 결정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심묘의 뒤를 바짝 따랐다. 혼자 남겨진 배랑도 결심한 듯 따라 들어갔다.

쾌활루 안. 밖을 내다보던 계우서가 창가에서 단숨에 일어났다.

“봐! 내가 심묘가 배랑을 사모한다고 했잖아! 류형을 찾은 건 다 배랑과 이야기하기 위해서야!”

고양은 계우서를 상대하지 않고 상황을 추측했다.

“심묘가 부채로 얼굴을 가렸을 때 배랑과 무슨 말을 했을까? 부채로 가리다니. 혹시 자네가 입 모양을 읽는 걸 심묘가 아나?”

고양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했다.

“심묘가 부채를 펼치는 모습은 나보다 출중했어. 순간 정말 풍류를 즐기는 공자 같았어. 재능 있는 사람이 왜 빈곤한 서생을 좋아하는 걸까? 청루에 들어가지 못해 침이나 흘리는 선생보단 내가 백배는 나을 텐데.”

탄식하는 계우서를 무시한 채 사경행이 일어났다. 계우서가 물었다.

“어디 가려고?”

“얘기 들으러. 배랑이 어떤 바둑돌인지 보고 싶은걸.”

사경행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쾌활루의 다른 쪽 방. 모경은 문을 지키고 경칩과 곡우는 그 양쪽에 서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여 자리에 없는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심묘는 술을 따랐다. 호박색의 술에서는 맑은 향기가 났다. 이 노주(老酒, 찹쌀·좁쌀·수수 따위로 빚는 술)는 도수가 약해서 주량이 대단치 못해도 별 탈이 없었다. 심묘는 두 잔을 따랐다. 그녀의 술 따르는 자세는 아주 우아했다. 맑고 투명한 술이 작은 옥잔으로 흘러 들어가니 소리도 듣기 좋았다. 심묘는 배랑에게 술을 내밀며 웃었다.

“선생님, 드시지요.”

방에 들어왔어도 배랑의 안색은 풀어지지 않았다.

“심묘, 도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마음이 급하시네요. 미주를 마시면서 미녀 이야기를 하지 않다니. 좋은 것을 얘기할 시간을 낭비하는 것 아닌가요?”

심묘는 여유로운 눈빛으로 농을 던졌다. 배랑은 그녀의 짓궂은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여러 해 광문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에게 공손했고, 제아무리 장난이 심한 학생이라도 이렇게 가벼운 어투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마주하는 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배랑은 진작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터였다. 그러나 배랑은 심묘가 경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심묘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배랑이 오래도록 말이 없자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그저 농담한 것인데, 선생님은 어째서 그리 긴장하십니까?”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으나 시선은 교활했다.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일순 배랑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유혹적이었다. 남장을 한 심묘는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이 술은 노주예요. 제노 지역에서 양조한 호박색 술로, 쾌활루의 노주는 제노에서 가져오죠.”

심묘가 술잔을 들어 올려 배랑을 향해 권했다. 배랑의 안색이 바뀌었다. 심묘는 그의 표정 변화에 개의치 않고 말을 마저 이었다. 배랑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심묘는 온화하게 웃었다.

“이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을 술꾼으로 여기겠네요. 노지 사람은 술을 많이 마신다는데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조금 노지 사람 같네요.”

심묘의 말투는 섬세했으나 배랑의 손바닥을 조금 젖게 했다. 배랑은 입술을 오므린 채 말이 없었다. 배랑의 온화한 용모가 조금 뒤틀린 것을 감상하며 심묘는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는 취하지 않았으나 술을 마셔서 얼굴이 붉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십여 년 전, 노지의 지주가 있었죠. 배가였던가요? 어쩌면 선생님이 그 사람과 일가족인지도 모르지요.”

배랑은 단숨에 술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모경은 눈을 매섭게 뜨며 오른손을 허리 위 패검에 두었다.

“애석하게도 그 배 지주는 당시 전 왕조의 과거사에 말려들어 참수됐고, 일족의 남자는 모두 사형당했다고 하더군요. 여자는 귀양지에서 관기가 되었구요. 배 지주에게 출중한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그 풍파 속에서 죽었다던가요.”

“넌 도대체 누구지?”

배랑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쉿!”

심묘가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고는 또 한 잔을 마셨다. 하얀 뺨 위 홍조가 가득했다.

“난 어쩌다가 이 비밀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랍니다. 선생님도 배가이니 괜찮을 거라 여겨 말씀드리는 거구요.”

심묘는 탄식했다.

“배 지주는 자녀를 도피시킬 능력이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관리가 바짝 추적해 한 사람만 구할 수 있었죠. 그래서…… 딸은 관아에 잡혀갔어요. 관리는 잔인하고 흉악해서 죄를 지은 가솔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지요. 나이가 창창한 아가씨에게 어찌 좋은 결말이 있을까요? 배 지주는 딸이 어떤 신세로 전락할지 알면서도 구하지 않았으니, 조금 무정하다 싶네요.”

심묘는 애석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랑은 그 모습을 차마 더 볼 수 없단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의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드러났다.

“선생님은 자기 일처럼 느끼시네요. 그러나 이 일은 선생님과 관계없어요. 선생님은 노지 사람이 아니시고 정경성 상인 집안 출신이니까요. 노주에 취하셨나 보네요.”

심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웃으며 말했다. 배랑의 얼굴에 더 이상 온화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짙은 경계와 방비의 빛을 띠었다.

“이건 심 장군의 뜻인가?”

심묘는 고개를 저었다.

“부친은 절 아끼셔서 제게 자수 점포를 주셨어요. 그런데 수놓는 아가씨가 부족하지 뭐예요. 사람을 구하려던 차에 최근 배 지주의 딸이 어려서부터 양면 수를 놓을 줄 알았다고 들었어요. 공교롭게도 보향루의 류형 소저도 양면 수를 놓을 줄 알더군요. 류형 소저가 배 지주의 딸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측은지심이 들었죠. 그래서 그녀를 기루에서 빼주려고 해요. 선생님, 학생이 이러면 잘한 건가요, 못한 건가요?”

심묘는 배랑을 맑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스스로 ‘학생’이라고 칭했다.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은 옥 같은 소년의 풍채가 있었다. 그러나 맑고 투명한 두 눈동자에 깊은 내막과 생각을 숨기고 있어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노련한 관료들의 칼을 품은 듯한 웃음과 흡사했다. 심묘와의 대화는 벼랑 위를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해 배랑은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넌 어떻게 생각하지?”

심묘는 재차 웃었다. 이번의 얼굴은 좋은 일을 해서 기쁜 순수한 아이처럼 보였다.

“난 잘했다고 여겨요. 누이의 소식을 알게 된 배 지주의 아들이 누이를 자유롭게 해주려 하지만, 배 소저는 배 지주에게 원망과 울분을 품어 원치 않을 테니까. 오히려 일생을 두고 모욕하겠지요.”

배랑은 말이 없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옥인데도 돌 언덕에 섞여 돌이 되기도 해요. 어떤 사람은 울분을 뼛속 깊이 품어 빻아 부서지고 부스러기가 되어도 자존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배 지주는 죄를 범했으나 오만한 사람이었을 테고 자식들도 열등하지 않을 거예요. 자, 말해봐요.”

심묘가 배랑을 바라보았다.

“그 소저는 기녀로 전락한 귀족 소녀의 신분으로 살길 원할까요? 청루 생활을 벗어나 살길 원할까요?”

배랑은 냉소했다.

“넌 내가 뭘 했으면 하는 거지?”

“선생님은 똑똑하니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조그만 조짐을 놓치지 않고 전체 흐름을 꿰뚫어 보시지요. 악기 연주를 듣고도 상대의 마음을 아시는걸요. 뛰어난 재주를 가졌고 계책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벼슬에 오르지 않나요?”

심묘는 배랑을 치켜세웠다.

“심묘! 네 생각은 망상에 불과해!”

배랑이 크게 소리쳤다. 심묘의 말이 아픈 곳을 찔렀는지 흥분한 것 같았다. 경칩과 곡우는 긴장한 낯빛으로 배랑을 곁눈질했다.

“선생님, 조급해하지 마세요. 마음을 평온히 하시고 제 말을 먼저 들어보세요. 선생님께서 제가 말한 옛일에 놀라셨군요. 관리는 자칫하면 온 집안이 연루될 수 있어 위험하고 불길하지요. 지금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서생으로 지내시는데 말이에요.”

배랑은 겨우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청렴하고 온화한 선생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지금 혈혈단신이에요. 그러니 그 무엇과도 연루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이 세상은 높이 서야 멀리 볼 수 있고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보호하고 싶은 사람도 보호할 수 있고요. 스스로에게만 기대기에는 부족합니다. 물론 선생님은 문하생을 온 천하에 가득히 키우실 수 있을 테지만…….”

심묘는 침착하게 잔을 들었다. 그녀는 웃고 있지만 차갑고 박정해 보였다.

“진정으로 사고가 났을 때, 지위 높은 귀족도 화는 피할 수 없는데 어찌 힘을 다해 마음을 쓸 수 있을까요? 강해야 옳은 겁니다.”

심묘의 목소리는 고혹적이어서 보향루의 연가보다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누가 널 가르친 거지? 목적은 또 무엇이고? 내가 벼슬에 오르면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지?”

심묘는 살짝 웃었다. 배랑은 온화하고 담담해서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일심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매번 일의 관건을 꼬집었다. 그래서 전생 부수의는 배랑을 끌어들여 막료로 삼았다. 황제가 되고 나서는 국사에 앉혔으니 모두 우연에 따른 게 아니었다.

“선생님, 왜 다른 사람의 이익만 묻고 선생님의 이익은 묻지 않아요? 벼슬이 높아지고 부자가 되며 아내를 얻는다. 마지막에 이익을 얻는 건 선생님이에요. 장사할 때 다른 사람이 몇 문을 얻는지 물어보나요? 자기가 몇 냥을 얻냐고 묻지.”

심묘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

“내게 어디 이윤이 있으려고?”

배랑은 담담히 되물었다.

“선생님에게 이윤이 없어도 류형 소저에게는 이윤이 있겠지요. 여자는 혼인하면 온당한 지지자가 생기는 거예요.”

심묘는 배랑을 바라보았다. 눈이 조금 반짝거렸다. 배랑은 그런 심묘를 단단히 주시했다. 배랑은 바보가 아니니 심묘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무엇을 하면 되지?”

배랑이 물었다. 심묘는 그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가장 짧은 시간에 이해득실을 따지고 가장 유리한 쪽을 선택했다. 배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그때 심묘는 전생에 배랑에게 무릎을 꿇고 부탁한 일이 떠올랐다. 배랑의 말투는 지금처럼 냉정하고 무정했다. 그러나 지금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이 남자가 수중에 있으니 심묘는 마음이 편안하면서 동시에 기뻤다. 그 감정은 그대로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사실 별거 없답니다. 선생님은 재능이 넘치시니 1년 후 귀인에게 발탁당하실 거예요. 그때 선생님은 거절하지 않고 동의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만 그의 사람일 뿐, 사실은 제게 속한 게 되겠죠.”

“너의 내통자가 되라는 건가?”

배랑은 이해가 되지 않아 심묘를 보았다.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통자라니요, 선생님의 벼슬이 높아지고 부자가 되는 건 가능합니다. 보증하건대 저는 선생님의 신분을 폭로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가끔 제게 조금의 소식을 알려주시면 됩니다.”

배랑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심묘를 보았다.

“네가 말하는 귀인은 누구지?”

심묘는 살짝 웃었다.

“정왕 부수의.”

배랑은 놀라 소름이 돋았다. 그는 방금과는 다른 눈빛으로 다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했던 일을 알고 있었다. 부수의는 평소 생각을 깊이 숨겨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심묘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심묘는 변했다. 배랑은 줄곧 누군가가 심묘에게 지시를 하는 거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니 부수의를 증오해 스스로 계략을 꾸미는 듯싶었다. 사랑에 보답받지 못했다고 이런 악의를 품다니.

배랑은 시비를 가리지 못했다. 심묘의 고운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꽃다운 나이에 희고 보드라운 피부, 막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눈을 가지고 경박하게 굴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불편했다. 선생과 나이 어린 학생이 대화할 때는 인생을 논하는 선배와 후배 같아야 하지, 이렇듯 친근한 오누이 같아서는 도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열세에 처했다. 코를 꿰어 끌어가도 반항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야?”

배랑은 이미 여러 번 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아직 일을 꾸미는 사람이 배후의 다른 사람인지 면전의 심묘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약점을 이미 심묘에게 들켰지만, 그는 심묘의 목적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완전히 심묘의 손바닥 위였다.

“무엇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저와 선생님을 돕는 거랍니다. 선생님, 승낙하실 건가요, 말 건가요?”

심묘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바로 대답해야 하나?”

배랑이 물었다. 심묘는 술주전자를 가리켰다.

“두 시진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신 후, 대답해주세요.”

배랑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필요 없다. 약속대로 한다면, 동의하지.”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심묘가 웃으며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녀는 잔을 들고 배랑과 건배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배랑은 머뭇거리다 잔을 들었다. 괴상한 기분이었다. 학생과 술집에서 마주 앉아 술을 마시다니 그의 마음은 조금 뜨거워졌다.

“선생님, 이후로 전도양양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심묘는 웃으며 술을 단숨에 마셨다. 술 한 방울이 입술에서 흘러내려 조금 날카로운 턱을 스치고 새하얀 옷깃에 배어들었다. 배랑은 눈을 뗄 수 없었다. 풋풋하게 예쁜 꽃다운 소녀였다. 심묘는 수려한 미인인 데다 단정하고 자중했다. 배랑은 미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조금 마음이 동했다. 배랑은 이런 상황에서 학생에게 동요한 스스로를 질책했다.

심묘의 시선에 상쾌함이 스쳤다. 술을 마셨기에 마음속에 숨겨둔 기분이 간질거렸다. 자신은 배랑이 단정하고 엄숙한 얼굴로 이치를 가장 중요시하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전생에서는 배랑의 앞에서 모의천하를 드러냈고 마지막까지 이해득실을 따지는 그를 포섭하는 데에 실패했다.

심 황후였을 때 완유의 화친혼도 배랑 앞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그때는 황후의 지위 때문에 완유를 위해 크게 울지도 못했다. 배랑은 전생 부명의 생사도 결정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국사는 지금 자신에게 약점이 잡힌 몸이었다. 지금의 자신은 황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도 부덕(婦德)을 엄수할 필요도 없었다. 남장을 하고 청루에 들어가고 술을 마셔도 된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니 배랑이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후련함은 짧은 시간 느끼면 족했다. 배랑이 승낙하자 심묘는 계속 같이 있을 필요가 없는 걸 알았다. 취기로 눈 속에 가득했던 풍류의 기색은 사라졌다. 정신은 맑아졌다. 그녀는 일어나 턱을 들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인사했다.

“류형 소저를 적절히 안배한 후 자수 점포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술은 이미 계산했으니 선생님은 천천히 드십시오. 노지의 술은 평소 마실 수 있는 게 아니까요.”

심묘의 마지막 말은 비웃는 건지 예의를 차린 건지 알 수 없어 배랑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심묘는 사람을 데리고 떠났다. 그는 술을 한 잔 마셨다. 깔끔하고 진한 좋은 술이 놀랄 만큼 떫었다.

문밖으로 나온 경칩과 곡우는 감히 입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심묘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어 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배랑과 한 이야기는 안개가 낀 듯해 오히려 이만저만한 일이 아닌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둘은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

그때 찬바람이 불어 홍조가 흩어졌다. 심묘가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그 얼굴은 완전히 냉기를 품고 있었다. 전생의 배랑이 수수방관할 때 생긴 증오는 숨긴다 해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목적은 달성했다.

“부로 돌아가자.”

심묘는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심묘가 있던 쾌활루 방과 가까운 곳에 있던 몇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 방금 한 편의 좋은 연극을 보았다. 처음에는 미묘한 운치가 넘친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이 내리자 소름이 돋았다. 계우서는 침을 삼켜 음울한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듯 말했다.

“이 루를 쓸 수 있으니 정말 좋아. 적어도 엿들을 때 아주 편리하잖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볼 수도 있지. 하하, 아주 좋다니까.”

조각문양 기둥 뒤에는 큰 유리가 있는데 난간과 잘 어울렸다. 서양에서 온 유리라고 했다.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저쪽을 볼 수 있으니 특별했다. 게다가 기둥 역시 보통의 것과는 달랐다. 작은 구멍이 가득해 다른 방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계우서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답하지 않았다. 고양은 턱을 부채로 받쳤다. 그가 생각할 때마다 하는 습관이었다. 사경행은 찻잔을 가지고 놀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는 계우서가 외쳤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자! 배랑이 바로 노지 배 지주의 아들이야!”

심묘는 이 과거사를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간단히 말했다. 배랑이 알아들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이해했다. 배 지주에게 아들딸이 있었는데, 바로 그 딸이 류형, 아들이 배랑이라는 소리였다. 그는 도피 중 배랑을 구하기 위해 류형을 포기했고, 류형은 기녀로 전락했다. 배랑은 이후 정경성 사람이 되어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했다. 상인 출신의 부모는 몇년 전 죽고 지금은 그 혼자서 지내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모습에 여러 해 그가 배 지주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렸다.

“백효생도 조사하지 못한 속사정을 심묘가 어떻게 안 거지?”

사경행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눈 속에 살기가 자욱했다.

“왜 그렇게 말해?”

계우서가 물었다. 고양은 턱을 매만졌다.

“부수의와 대적하는 건 부수의와 같은 편이 아니란 얘기일세. 태자, 주왕, 리왕. 심묘는 어느 쪽 사람일까?”

“어느 쪽도 아니야.”

사경행의 대답에 계우서는 의아해했다.

“어째서 또 어디 편도 아니야?”

사경행의 눈빛이 조금 느슨해졌다.

“배랑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서 지금은 여리게 대응했지만. 너희도 방금 들었지. 심신도 그녀처럼 예리하고 재빠르지 못할 거야.”

여러 해 관료로 지내 흥망을 겪은 사람도 심묘처럼 자유자재로 사람을 다루지 못했다. 무르지 않고 단단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고, 거절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심신과 나설안은 무장이건만, 심묘는 이런 것을 누구에게 배운 걸까.

이전에는 심가 배후에 지시를 내리는 자가 있나 의심했지만, 사경행은 오늘 일로 심묘가 스스로 일을 벌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가 태자나 다른 황자의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한 걸음씩 계획하는 방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각 황자 배후에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멍청한 방법을 쓰지 않아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심묘는 목표를 차례로 달성했다. 그녀에게 충분한 배경과 권세를 주면 더 큰 풍파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사경행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천하는 바둑판과 같았다. 명제에는 바둑판이 크긴 해도 단 하나인데 너무 많은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경행은 지금까지 심묘를 그 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연약한 여자이며 어떠한 동기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에 패가 없는 그녀이기에 천천히 바둑돌을 배양하느라 여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경행은 영웅을 휘하에 두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야심을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여전히 심묘가 어떻게 배랑의 속사정을 안 건지 몰라. 풍선전당포도 조사하지 못한 일인데.”

계우서가 작게 말했다. 배 지주는 온 힘을 다해 아들에게 새 신분을 주어 보호했다. 배랑도 아버지의 기대를 헛되게 하지 않았다. 원수를 찾아가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이름을 숨기고 선생이 되었다.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으나 심묘는 달랐다. 심묘는 류형을 조건으로 배랑을 거두었다. 그녀가 이 소식을 어디서 알게 된 것인지 그 출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전 진가 형제 때도 그러했다.

“이번 일은 상관하지 마. 그보다 수령 요청 상소는 썼어?”

사경행이 화제를 돌렸다. 고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썼네. 그런데 자네 정말로 확실한 건가? 일단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네. 게다가 자네 계획은 그쪽에서 소식을 받지 못했잖는가. 만약 동의하지 않으면…….”

“내 말대로 해.”

26장

심부로 돌아온 심묘는 의상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막 풀었을 때 백로가 급히 들어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방으로 오시랍니다. 중요하게 상의할 것이 있으시답니다.”

빠르게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신은 문혜제에게 정경에 반년 머무르겠다 요청했고 나설안도 오랜만에 전장을 떠나 가벼운 차림으로 지냈다. 심묘에게 의복과 장신구를 사주고, 내키지 않는다고 하면 심구에게 심묘를 데리고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게 했다. 심묘는 부모님이 자신을 빈둥거리는 부잣집 자식으로 기르시고픈 게 아닌가 싶었다.

심묘는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방을 나섰다.

나설안의 방에는 심신과 심구도 있었다. 나설안은 심묘를 얼른 끌어다 앉히고 말했다.

“교교, 오늘 외출해서 뭘 했니?”

심묘는 오늘 백로와 상강을 뜰에 두고 나갔다. 누가 물어보면 산책갔다고 말하라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냥 돌아다녔어요. 쾌활루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드릴 독한 술도 몇 단지 사 왔어요.”

“복덩이답구나! 정경성의 술은 너무 달아 술이라고 할 수 없다. 열주가 그나마 통쾌하지!”

“교교, 생각이 세심하구나!”

심신은 기뻐했고 심구는 해맑게 웃었다. 나설안은 그런 부자에게 눈을 흘겼다.

“그저 술 마실 줄만 알지! 그런 일은 하인에게 시키면 될 것을. 교교, 아버지와 오라비에게 괜히 신경 쓰지 말려무나.”

“부인! 교교의 마음인 것을. 하인이 사온 게 교교가 사 온 것과 같소? 시야가 좁구려!”

심신은 심묘가 자신을 친근하고 온화하게 대하니 아주 기뻤다. 오늘은 심지어 심묘가 열주를 사서 돌아왔다니 즐거워 하늘로 날아갈 듯했다.

“시야가 좁다구요?”

“부인, 화를 가라앉히시오. 나는 이 녀석의 시야가 좁다고 한 거요.”

심신이 심구의 머리를 한 대 쳤다. 나설안은 부자의 재롱이 보기 싫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교교, 오늘 오라고 한 건 너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야.”

“말씀하세요.”

“분가의 일 너도 들었을 거야. 며칠 지나면 갈라설 수 있을 게다. 나와 네 아버지는 새로 주택을 사기로 했어. 성 동쪽에 정원이 딸린 주택이 좋아 보이더라. 청소는 시켜야겠지만. 그런데…….”

나설안은 심묘를 보며 난처해했다.

“예전에는 나와 네 아버지가 서북에 가 있을 동안 넌 심가 사람과 함께 살았지. 그런데 분가한 후 나와 네 아버지, 오라비가 다시 떠나면 아가씨 혼자 주택에 살 텐데, 그건 너무 위험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교교야, 너 이 어미랑 서북에 같이 가지 않을래?”

심묘는 당황스러웠다.

“교교야, 서북도 좋아. 사람들의 말처럼 그리 나쁘지 않단다. 소춘성에서 지내는데, 산을 등지고 강을 낀 곳이라 진기한 동물도 많아. 그때 사냥 가면 백호 가죽으로 너에게 피풍의를 만들어줄 수 있을 거야.”

“아이고, 네 누이는 아가씨인데 백호 가죽으로 뭘 하라고?”

심구의 말에 나설안이 면박을 주면서도 자애로운 미소 지었다. 심구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럼 거기 광산도 있어. 보석이 아주 크니 장신구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심묘는 살짝 웃었으나 바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정경성에 남아서 해야 할 다른 일의 순서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구의 말을 들으니 서북 소춘성 생활에 흥미가 생겼다. 누구나 근심 없는 날을 꿈꾸는 법이었다. 심묘 역시 매일 아침 어떤 사람도 모략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나날을 원했다. 심묘는 속으로 탄식하며 이번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돌아온 후 나머지 계획을 진행해도 될 터였다.

“좋아요. 저도 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네요.”

모두의 기대하는 시선 속에서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설안이 한숨 놓은 듯 미소 짓자 심신이 크게 웃었다.

“교교가 반드시 동의할 거라 했잖소! 교교는 우리 군을 싫어하지 않는다오!”

“교교야, 교교야, 내 형제들을 만나러 가자! 내 누이가 어떤 사람인지 다들 궁금해해. 그리고 외조부 일가도! 그분들 얼굴은 기억 안 날 테지만 어색할 것 하나도 없어. 다들 좋은 분들이셔.”

심구도 흥분했다. 나설안의 친정은 서북 진관 무장이었다. 심구의 말마따나 심묘는 외가 사람들의 얼굴도 몰랐다. 나씨 일가는 정경성에서 워낙 먼 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심묘가 아기 때 한 번 보러 온 게 전부였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전생에서는 나설안이 죽은 후 나가와 심가의 왕래는 끊어졌다. 심묘는 외가에 대한 감정이 깊지 않아서 나가가 어떤 결말에 처했는지도 잘 몰랐다. 그러나 미 부인은 악독한 수완을 잘 썼으니 부수의가 나가를 놔주지 않게 했을 것이다.

시간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야 나설안은 심묘가 방으로 돌아가 휴식하게 했다. 심묘는 머리를 빗고 세수를 했다. 탁자에 앉자 머릿속에 불꽃이 뛰어다니는 듯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을 따라 서북으로 간다면 시간이 반년도 남지 않은 셈이니 그동안 모든 일을 정돈해야 했다. 그나마 배랑의 일은 정리했으니 큰일은 해치운 셈이었다.

심묘는 나무가 크면 바람을 세게 맞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심가는 조정 일에 말려들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심묘는 규방 소녀로 평소 깊은 것에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많은 일이 변해 배랑이 자기편이 되어줘야 했다. 부수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니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부수의가 배랑을 발탁하게 된다면, 그때 배랑이 자신의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었다.

배랑을 쉽게 굴복시킨 건 조금은 운이었다. 전생에서 부수의가 배랑을 굴복시킬 수 있던 건 배 지주와 우정이 있던 막료 한 명 덕분이었다. 수하는 실마리를 쫓아 배랑의 과거를 수소문했고, 끝내 부수의는 류형을 조건으로 배랑을 끌어들였다.

배가의 오누이는 모두 심지가 굳어 얼러도 때려도 듣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만큼 소신이 강했다. 류형은 기녀로 전락한 후 관리 집안 딸이었던 과거는 철저히 숨기고 기녀 생활을 했다. 정말 모두 잊은 양 마음 편하게 지내는 듯도 했다. 어쩌면 신분을 상기하는 게 고통스러웠는지도 몰랐다. 배랑 역시 원수를 찾지 않고 선생 일에 충실했다.

류형은 신분을 인정하기 꺼렸고, 부친이 남동생만 보호한 데 원망을 품고 있었다. 배랑이 얼굴을 드러내면 류형은 더 격렬히 거부할 것이었다. 그래서 심묘는 류형에게 다른 식으로 살길을 줬다. 류형을 자신 손에 쥠으로써 그녀에게 가책을 느끼는 배랑도 쥐었다.

몇 년 후면 배랑은 조정에서 힘들게 경험을 쌓아 더욱 성숙해질 터였다. 그때가 되면 그는 지금 심묘의 말이 허점투성이라고 느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배랑은 아직 어렸으며, 총명했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아가씨, 일찍 쉬십시오. 내일 마님을 따라 동쪽 주택에 가보셔야지요.”

경칩이 웃으며 말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앞으로 몇 달 동안은 심부 사람들과 떨어져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획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심묘가 식사할 때 나설안의 여종이 찾아왔다. 그녀는 나설안이 심묘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장래에 살 곳이 편한지 안전한지 직접 보고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쪽 주택에 갈 수 없었다.

궁에서 나온 사람이 갑자기 나설안에게 입궁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심묘를 데려와도 된다고 전했다. 데려와도 된다고 했지만, 실은 데려오라는 명령이었다.

심신과 심구의 안색은 깊게 가라앉았다. 나설안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정경성의 귀부인이지만 평소 정경성에 없는 데다가 부른 사람 역시 왕래해 본 적도 없는 궁중 마마였다. 이리저리 궁리해봐도 나설안과 궁중 마마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심신과 심구는 더 멀리 생각했다. 갑자기 심묘를 데려오라고 요구하니 궁중 마마의 본심은 나설안을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심묘와 관련이 있는 건가 의아했다. 그들은 애지중지하는 심묘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꽤 긴장했다.

“차라리 나도 부인과 함께 입궁하겠소.”

“당신이 가서 뭐 하게요. 초청하지 않은 당신이 가면 폐를 끼치는 거예요. 내가 교교를 데리고 갈게요. 궁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으니 관례에 벗어난 일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는 힘 없는 여자가 아니니 만일……”

나설안은 자신이 무력을 쓸 수 있으니 이상한 점이 있어도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심신이 그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긴장할 건 아닌 듯하오. 안심하고 가시오.”

나설안은 심묘의 손을 끌어 궁중에서 준비한 마차에 탔다. 오늘은 일찍 주택을 보러 가려고 했는데 그걸 미루고 입궁하게 되었으니, 이 일이 복인지 화인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심구는 심신과 부 입구에서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부친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심묘에게 무슨 일은 없겠지요?”

“난 병부로 가보마. 무슨 일이 있으면 대처할 수 있도록 넌 부에 남아라.”

심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심묘의 작은 얼굴이 긴장했다. 그녀는 속으로 끊임없이 온갖 추측을 했다. 궁중 여인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계략을 꾸밀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들의 속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정말 무슨 계략이 있다면 공공연하게 부르지 않을 것이다. 황실은 체면을 중시했기에, 만일 오늘 그녀가 궁 안에서 사고를 당하면 황실은 혐의를 벗을 수 없었다. 궁중 여인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설안을 입궁시키니 필히 나설안에게 무언가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본심은 다른 곳에 있을 텐데, 그 대상이 심가인지 심신인지 궁리하는 심묘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왜 갑자기 심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건지 의아했다. 근래 심신은 수도에서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더욱이 부수의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었다. 황실이 심가를 억누르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다. 설마 이미 출병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걸까.

심묘는 혼란스러워 시비를 조금도 가리지 못했다. 자신을 데리고 입궁하라는 명은 반드시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소중한 딸도 보호하지 못할 거라는……. 심묘는 긴장했다. 지금은 많은 것이 전생과 달랐다. 명제의 큰 판세에서 그녀는 심가의 비극을 늦추려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예상치 못한 여러 이유로 일이 잘못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대체 무엇일까.

심묘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진 것을 본 나설안은 심묘가 겁낸다고 생각해 마음이 아팠다.

“교교야, 두려워 말아라. 입궁해서 마마들과 이야기할 뿐이야. 금세 끝날 테니 이따 우리 계획대로 주택을 보러 가자꾸나.”

심묘는 수긍하듯 살짝 웃었으나 여전히 정신은 조금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궁 입구에 도착하니 맞이하는 궁녀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나설안은 궁녀에게 어느 마마가 초청했냐고 물었지만, 궁녀는 웃기만 하고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곧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궁중 요광전 안 대청, 화려한 옷차림의 두 마마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좌측에 있는 사람은 선자계 머리를 하고 분홍색에 금색 수를 놓은 궁장 차림으로 그 외모가 대단히 화려하고 예뻤다. 하나 대화를 주도하면서도 막상 집중하지 않는 게 분명했고 상대방에게도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태도에도 곁의 여성은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예의 바르게 대답했는데, 살구색 매화무늬 치마를 입고 좌측에 앉은 사람보다는 미모가 부족하지만 온화하고 청아한 인상이었다. 이 두 사람이 나설안 모녀를 초청한 장본인들이었다. 좌측에 앉은 여성은 서현비였고 우아하게 생긴 여성은 동숙비였다.

“폐하께서 심 부인을 초청하라는 건 괜찮지만 왜 심가 소저도 데려오라고 한 걸까요? 궁인을 보낸 지 오래인데 오지 않다니, 정말 너무하는군요!”

서현비는 참을성을 잃고 불평했다. 동숙비가 미소 지었다.

“마마, 장군부에서 궁에 오는 시간은 좀 걸립니다. 다급해하지 마세요.”

서현비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

“마마는 늘 좋은 사람인 척하는군요. 그러고 보니 심가 소저가 일찍이 부수의를 사모했다던데, 그래서 마마께서는 그녀의 편을 드는 겁니까?”

동숙비의 표정이 일순 조금 흐려졌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마는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러나 폐하께서 마마와 제게 분부하셨으니 일은 해야겠지요. 심가 소저도 어머니를 따라온 것에 불과하니 궁녀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면 될 일입니다.”

동숙비가 문혜제의 명이라는 합당한 사유를 대자 제멋대로인 서현비도 더는 뭐라 하기 어려웠다. 그때 궁녀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왔느냐?”

궁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래지 않아 나설안과 심묘가 들어왔다. 나설안과 심묘는 서현비와 동숙비에게 인사했다. 심묘는 나설안의 곁에서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 부인, 이쪽이 자네 여식인가? 고개를 들어 본궁을 보라.”

심묘는 멈칫했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과 마주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닫자마자 가슴이 터질 듯하고 전신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좌측에 있는 서현비는 주왕 부수안과 정왕(静王) 부수현의 생모였다. 우측 동숙비는 정왕(定王) 부수의의 친모였다.

동숙비는 미소를 머금고 서현비에게 말했다.

“정말 반듯한 아이군요. 깨끗하니 복스럽게 생긴 얼굴입니다.”

그녀의 칭찬에 심묘는 당황했다. 동숙비는 온화한 얼굴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묘의 경계심을 모르고 있었다. 동숙비는 총애받지 않았다. 문혜제의 곁에는 여인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여인들은 배경이 있거나 재치가 있거나 미모가 있거나 개성이 있었다. 그러나 동숙비는 미지근한 사람이라 무엇도 쟁탈하지 않고 무엇도 뺏지 않았다. 그녀는 ‘안정’이라는 글자에 기대어 비의 자리에 올랐다. 표면상 네 명의 비 중 가장 지위가 낮기도 했다. 그러나 심묘는 동숙비가 겉보기처럼 무해한 여인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심묘가 부수의와 혼인할 때도 동숙비는 ‘남편을 출세시킬 복스러운 얼굴’이라며 심묘를 크게 칭찬했다. 그 후 부수의의 날개가 풍성해지자 동숙비는 그녀에게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그녀가 진국에서 돌아온 후 태후가 된 동숙비는 미 부인 편에 섰다.

동숙비에게 심묘는 심가를 끌어들이는 바둑돌이자 저질스러워 상류에 올리지 못할 바둑돌에 불과했다. 이후 부수의가 부명을 태자에서 폐위시키자마자 동숙비는 미 부인의 아들인 부성을 태자로 삼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심묘는 다시 고개를 숙여 눈 속 가득한 증오를 가렸다.

심묘가 부끄러워한다 여긴 듯 서현비가 물었다.

“올해 몇 살이지?”

“마마, 열다섯 살입니다.”

서현비가 낮게 읊조리며 웃었다.

“열다섯……. 오래지 않아 출가하겠구나.”

이유 모를 서현비의 말에 나설안은 긴장했다. 나설안은 지금 몹시 걱정스러웠다. 혼사는 여자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만일 심묘의 혼사에 궁중 사람이 간섭한다면……. 나설안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나설안의 모습을 본 서현비가 웃으며 말했다.

“심 부인,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심 소저를 중매할까 그런가? 안심하시게. 내가 중매를 하려고 해도 원앙을 방해할 생각이 없으니 소저의 뜻을 물어볼걸세. 심 소저는 지금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느냐?”

서현비는 심묘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필 동숙비 앞에서 심묘에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한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기 때문에 동숙비를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서현비는 이처럼 문혜제의 총애에 기대어 오만방자했다. 게다가 네 명의 비 중 가장 지위가 없는 동숙비를 종종 골탕 먹이며 즐거워했다.

“마마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소녀는 지금 마음에 둔 사람이 없나이다.”

심묘가 고개를 숙여 담담히 대답했다. 서현비는 심묘의 덤덤한 반응이 재미없었다. 소문 속 머저리를 기대했건만 순박한 아가씨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됐다, 없으면 없는 거지.”

나설안은 신중히 이 상황을 살폈다. 그때 동숙비가 웃으며 말했다.

“부인, 그리 긴장할 필요 없네. 오늘 우리 두 사람이 입궁하라고 한 건 부인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뿐이네. 우리 두 사람은 서북쪽에 간 적이 없어. 부인이 장군으로 출정한 미담을 듣고 서쪽 지역에 호기심이 들어 부인을 청해 이야기를 나누려는 걸세.”

동숙비의 목소리는 온화하며 친근했다. 봄바람처럼 사람의 마음을 위로했다. 하지만 나설안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심묘 역시 그 부드러운 태도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분명 오늘 입궁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문혜제가 무언가 물어보려는 심산 같았다. 그러니 거만하고 횡포한 서현비와 완곡하고 온화한 동숙비가 함께 그녀를 불렀을 터였다.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들어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털어놓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심묘는 긴장했다.

“마마의 보살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서북쪽 지방은 무미건조해서 이야기해 드려도 마마께서는 즐겁지 않을 겁니다.”

나설안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우리가 그대를 초청했으니 시시할까 걱정하지 마시게.”

동숙비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녀의 표정을 분명히 보지 못했다. 부수의는 이번에 부황이 그녀들을 통해 나설안을 탐색하려 함을 알았다. 심묘를 이용해 경고하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동숙비에게 심묘가 이 자리에 온다면 심묘를 따돌리고 이야기를 나누라고 했다. 부수의는 동숙비의 아들이기에 동숙비는 부수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박하고 겁많은 아가씨에게 조심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러워졌다.

“우리에게는 재미난 이야기여도 젊은 아가씨에게는 지루하겠지. 동요, 심 소저를 데리고 화원을 산책하거라. 이후 피곤해지면 심 소저를 방으로 데려가 간식을 내놓거라. 잘 보살피고.”

서현비는 심묘를 이곳에 두려고 하지 않는 동숙비가 의아했지만 문혜제의 생각이라 여겨 반박하지 않았다.

나설안은 불안했다. 딸을 눈앞에 두는 게 가장 좋았다. 게다가 두 마마의 말처럼 진정 잡담을 나누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대낮에 이유도 없이 딸을 해치진 않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나설안은 웃으며 말했다.

“교교, 궁녀를 따라 화원을 산책하거라. 마마들과 이야기가 끝나면 어미가 널 찾아가마.”

심묘는 왜 자신을 따돌리려 하는지 미심쩍었다. 산책을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면 동숙비와 서현비가 수상하게 여길 수 있었다. 왜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할까. 혹시 이미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산 건 아닐까. 그러나 동숙비와 심묘는 이 생에서 오늘 처음 대면했다. 그때 심묘는 부수의가 떠올랐다. 부수의가 동숙비를 미리 일깨운 건 아닐지 걱정이 됐다.

심묘는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손히 일어났다. 그녀는 인사한 후 동요를 따라 밖으로 향했다. 동요는 심묘를 데리고 화원을 걸었다. 황궁에는 곳곳에 화원이 있었다. 비빈들을 위해 보수해서 하나같이 아름답고 절묘했다. 그러나 심묘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은 어떤 화원에 어떤 꽃이 자라는지까지 다 알고 있기에 하나도 흥미롭지 않았다. 동요는 심묘가 즐거워하지 않는 것을 알아채고 넌지시 물었다.

“심 소저, 피곤하시면 안으로 들어갈까요? 간식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보일 때 소태감이 급히 달려왔다. 그는 동요의 귓가에 몇 마디를 했다. 그러자 동요는 심묘에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맞은편 방입니다. 심 소저, 먼저 들어가 계시면 제가 물건을 보낸 후 돌아오겠습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동요에게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다. 쉴 수 있는 방은 바로 눈앞에 있었고 궁중에는 시위가 있어 사고가 날 리 없었다. 그녀도 와 본 적이 있어 익숙한 방이었다. 심묘는 방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며 삐걱대는 소리를 내 조금 놀랄 때 한 쌍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심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막은 손을 깨물었다. 그리고 팔꿈치로 매섭게 뒤를 쳤다. 괴한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팔꿈치는 붙잡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기를 억누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 이 무지막지한 여자 같으니.”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심묘는 멍해졌다. 사경행은 손을 풀었다. 그는 손을 문지르며 노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사경행의 모습에 놀랐다. 이전 짓궂고 냉소적이던, 풍류를 즐기던 모습과 달리 오늘 그는 진홍색 관복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 모자를 쓰고 짙은 푸른색 장화를 신은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심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난 사경행 때문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사경행은 문을 닫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회를 노려 보복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뭐 하는 거예요?”

“궁에서 보고 너일 거 같았다 느꼈는데 정말이네. 폐하가 네 아버지에게 입궁하라고 했어?”

사경행은 대답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했다.

“무슨 뜻인가요?”

심묘는 놀라 물었다. 사경행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할 리 없었다. 다른 뜻이 있을 것이었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원은 부수의의 사람이야.”

심묘는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심원은 죽기 전 부수의와 밀담을 했지. 심가는 지금 물과 불처럼 섞일 수 없는 상태야. 네 아버지를 처리하는 것 외 무슨 일이 있었겠어?”

“말도 안 돼요!”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버럭 소리쳤다. 사경행이 탐색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완전히 꿰뚫어 보는 듯 깊은 눈빛이었다.

“왜?”

심묘의 손바닥은 조금 축축해졌다. 그녀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심가에게 일이 생기기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결코 이때가 아니었다. 황실이 심가를 처리하려고 착수하는 건 후일의 일이었다. 황실의 움직임에는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심원은 부수의를 위해 일했고, 두 사람은 모두 일 처리를 온당하게 해 가망 없는 일에는 손을 쓰지 않을 터였다. 전생 그녀가 죽기 직전에야 이방과 삼방이 비밀리에 부수의를 도운 일을 알았던 것이 이를 증명했다. 심원은 반드시 최후가 되어서야 모반의 증좌를 꺼냈을 터였다.

그런데 지금 황실이 심신을 처리하러 나섰다니, 너무 일렀다. 심원이 어째서 벌써 손을 쓴 건지 알 수 없었다. 부수의 역시 아직 증좌가 완전하지 않을 텐데 시작했다니 이상했다. 그답지 않았다. 왜 이렇게 변한 걸까. 심묘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생각에 잠긴 사경행의 시선과 마주해 놀랐다. 민첩한 사경행이 자신의 표정에서 무언가 추측해낼까 걱정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숨기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심원은 제 둘째 오라버니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 아버지를 해치겠어요?”

사경행은 아주 깊은 뜻을 품은 듯 웃으며 말했다.

“심묘, 넌 날 바보로 아는 거야?”

“사 소후야, 제게 이런 것들을 말해줬으니 하나만 더 말해줘요. 정왕 전하는 제 아버지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요?”

심묘가 정색하고 물었다.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는 역시나 하고 기대를 버렸다. 물어보면서도 사경행이 답을 알려줄 거라는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사가 역시 명제 판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심가를 함부로 돕다가 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사경행이었어도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심묘는 대신 사경행의 관복을 보고 의심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입궁한 거예요?”

심묘는 그 물음에 사경행이 잠시 멈춘 것을 몰랐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 눈치채기 어려웠다. 사경행은 다시 평소의 자신을 찾고 나른하게 말했다.

“수령 인장을 청하러 입궁했어.”

당황한 심묘가 다시 한번 물었다.

“수령 인장? 어느 수령 인장을 청하는 거예요?”

사경행은 웃기만 했다.

심묘는 그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당신…… 수령으로 자원한 거예요? 북부 변방의 흉노?”

“어떻게 아는 거지?”

이번엔 사경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북부 변방의 흉노, 이 일은 기밀이었다. 문혜제가 명령을 내리기 전이니 심신도 모를 터인데 심묘가 알고 있다니. 사경행은 심묘가 이를 어디서 들었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그녀가 궁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심묘는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눈빛으로 사경행을 바라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흉노는 북부 변방 지역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북부 변방은 지세가 복잡한 데다 사람들은 용맹하면서도 흉악하기로 유명했다. 문혜제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기에 소규모로만 대응하다가 흉노 문제가 심각해지자 결국 사정을 출전시켰다.

하지만 용맹한 사가군도 그곳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사정 역시 전쟁터에서 사망하자 전국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이듬해 봄, 사경행은 아버지를 대신해 출병했지만 그 또한 패배했다. 그는 가슴에 화살을 맞고 피부 가죽이 벗겨진 채 성루에 걸리는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전생의 사경행,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제 막 열아홉이 된 상태였다.

심묘는 질식할 것 같았다. 문혜제가 흉노족 문제를 처리하기로 한 것은 지금 시점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경행은 자청해 수령이 되었고 군령(軍令)을 얻은 것 같았다. 사정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또 변했다! 몇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앞당겨 나타난 것이다. 사경행이 지금 출정하면 혹시 또 전생과 같은 결말을 맞을까. 심묘는 앞으로 사가와 함께 황권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바꾸고 싶어도 어떤 사람의 운명은 여전히 예전의 궤적을 따라가는 건가 싶었다. 이 출중한 소년의 앞길에는 가장 나쁜 결말밖에 없는 것일까.

사경행은 심묘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눈을 반짝였다.

“날 아주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는 비웃었지만 심묘는 그 비웃음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경행을 보았다.

“당신, 사가군을 따라가나요? 그렇다면 군에서 조심하시고 또 곁의 사람을 주의하세요.”

심묘는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 걱정하는 말이었으나 말투에서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녀의 표정도 점점 엄숙해졌다.

“북쪽 변방은 사막이 넓어요. 장병의 갑옷은 무겁구요. 어떤 상황에서든 호심경(護心鏡, 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은 떼지 마세요.”

전생의 사경행은 심장에 화살을 맞았다. 그러니 갑옷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구리 조각을 붙이면 조금이라도 방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었다. 전술과 투지 모두 탁월한 사경행이 그렇게 참혹하게 패배할 리 없었다. 의심이 고개를 듦과 동시에 그녀는 곧 모든 것을 이해했다. 황실은 줄곧 고관세가에 타격을 주고 싶어 했으니 사가군에 황실 사람을 심어 둔 게 분명했다. 사가 부자의 비극에는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다.

심묘와 사경행 사이에 우정이 그리 깊지 않았으니 당연히 대국을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걱정 어린 말은 어색하기만 했다. 사경행도 의외라 느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심묘에게 다가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는 눈을 마주하고 웃음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물었다.

“내게 관심 있는 거야?”

심묘는 깊이 생각에 빠져 그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두 눈은 맑고 깨끗해서 매번 놀랄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가엽게 느껴졌다. 사경행은 멈칫했다.

유감스러웠다. 사경행 자신은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했다. 심가 역시 바둑판 안 바둑돌이었으나, 심묘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진한 규방 여자가 아니라 생각이 깊고 수완을 부릴 줄 아는 이였다. 그러나 가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 같아서, 자신이 이런 아가씨를 괴롭히는 불량배가 된 듯한 부끄러움이 몰려오곤 했다. 하지만 사경행은 그 부끄러움을 뒤로 던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 말했다.

“심가군은 세력이 너무 커. 좋은 일이 아니야.”

“오늘 입궁을 명받은 건 내 어머니예요. 입궁을 청한 건 서현비 마마와 동숙비 마마구요.”

심묘는 동문서답했다. 서현비와 동숙비를 언급한 심묘의 표정은 전혀 공손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말하는 듯했다. 그때 사경행이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물러나.”

“물러나요?”

사경행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나름 심묘에게 암시를 준 셈이었다. 심묘가 총명하다면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후 사경행의 말속 뜻하는 바를 알아챈 심묘는 감사 인사를 표했다. 사경행은 나른하게 손을 휘둘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 출발하나요?”

“열흘 후.”

“그렇게 빨리 가나요?”

“왜? 아쉬워?”

사경행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웃는 듯했지만 웃지 않고 있었다. 심묘는 얼굴 위 표정을 황급히 지웠다.

“아, 아뇨. 그럼…… 소후야, 승리하여 개선하시길 먼 곳에서 빌겠습니다.”

“돌아오면 하사품을 받을 거야. 그때 네게 작은 물건을 보낼게. 상인 셈이지.”

사경행은 무심히 말했다. 심묘가 무언가 답하려 할 때 사경행이 말을 끊었다.

“누군가 온다. 다음에 보자고. 심…… 교교.”

그는 심묘에게 웃은 뒤 몸을 돌려 늘 그랬듯이 창문을 통해 나갔다. 심묘가 당황을 가라앉히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동요가 들어왔다. 심묘가 방 중앙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동요가 물었다.

“심 소저, 왜 앉지 않으시고?”

정신을 차린 심묘는 황급히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사경행과 했던 말들을 계속 생각했다. 사경행이 출정하는 열흘 후는 전생의 3년 후와 같을까. 전생에서는 3년 후 사경행의 출정을 마지막으로 명제 역사서는 사정과 사경행, 두 부자를 영원히 기록하지 않았다.

사가는 전생과 같은 결말을 피할 길이 없는 듯했다. 사경행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일러줬으나 그녀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물러나면 목숨은 보전하겠지만 단순히 목숨만 보전할 뿐이었다. 권세의 보호가 없다면 평안한 날들도 사치리라. 전생의 길을 심묘는 또렷이 이해했다. 지금 적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야 운명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경행의 방법으로는 지키는 건 문제없어도 공격하기에는 부족했다. 무슨 방법을 이용해야 해결할 수 있을지 심묘는 고심에 빠졌다. 그녀는 간식을 한 개도 건드리지 않았고 차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동요는 여러 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젊은 아가씨가 무엇 때문에 오후까지 그 자리 그대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궁 안의 태평한 비빈들에게서도 이런 인내심은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소태감이 찾아왔다. 그제야 동요는 심묘를 데리고 나왔다. 나설안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심묘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심묘를 데리고 궁을 나서는 나설안은 안간힘을 써서 아무런 일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전생 궁에서 늘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살폈던 심묘는 충분히 그녀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나설안에게 걱정이 가득함을 알아챈 심묘가 물었다.

“어머니, 마마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나설안이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소춘성에서의 생활을 얘기했어. 머나먼 서북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셨나 봐.”

“정말이에요? 어머니를 입궁시켜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는데 서북 얘기만 하다니. 너무 이상하네요.”

나설안은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게 뭐 이상해. 궁 안 마마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못하니 답답하실 거야. 어미와 먼 곳의 일을 이야기해 답답함을 푸시면서 조금은 즐거우셨을 테지.”

나설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정 일에 참여하지 않으나 그 일의 배후가 음험한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오늘도 조심스럽게 대응하긴 했으나 비빈들과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궁 안 사람은 바보가 아니며 모두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군중 복무나 심가군에 관련된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소춘성 백성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눴다. 나설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의 사람으로서 위험에 대한 직감이 뛰어났다. 하지만 어디서 칼을 겨누고 있는지 몰랐기에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설안은 심묘가 놀랄까 싶어서 그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묘도 다시 묻지 않았다.

부로 돌아가자 거의 저녁시간이었다. 심신은 외출 후 돌아와 심구와 함께 줄곧 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두 모녀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야 한숨을 놓았다. 식사 후 나설안은 심묘에게 일찍 쉬라고 하고, 심구와 심신에게 오늘 입궁 일을 상의하자 했다. 심묘는 따라가지 않았다. 이미 나설안에게서 많은 일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심원이 부수의에게 무엇을 준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심묘는 탁자에 앉아 생각했다. 등불이 흔들거렸다. 경칩과 곡우는 감히 심묘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창밖에는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새해 들어 눈은 내렸어도 비는 처음이었다. 빗방울은 곧 다가올 봄의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새로운 희망의 철. 그러나 겹겹이 쌓인 눈 속에서도 꽃이 만개하게 만들 방법이 있을까. 심묘는 눈을 감았다.

* * *

칠흑같이 어두운 밤, 한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뜰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경행이었다. 그는 뜰에서 사장무, 사장조 두 사람을 만났다. 두 사람은 그를 보고 걸음을 멈추며 공손히 인사했다.

“큰형님.”

사경행은 두 사람을 봐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오늘 역시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으나 사장조가 물고 늘어졌다.

“큰형님, 오래 뵙지 못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신지 모르겠네요. 며칠 전 부친께서 큰형님과 사냥을 함께 가려 하셨는데, 형님을 찾을 수 없어 저희를 데리고 류 대인의 관연에 가셨답니다. 같이 못 가서 유감스럽습니다.”

사정은 사장무와 사장조를 데리고 여러 동료의 술자리에 연일 참석했다. 사람들은 사정이 두 아들을 벼슬길에 올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사장무와 사장조는 서자인 것과 별개로 자질도 사경행만 못했다. 그러니 사경행이 짓궂고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었거나 성격은 그렇대도 벼슬을 원했다면 당연히 누구도 사장무, 사장조와 교류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옥청 공주의 일로 사정과 여러 해 의견이 맞지 않았고, 부자 관계는 두꺼운 얼음 같아서 그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사장무는 사장조보다 조금은 겸손한 편이나 그렇다고 득의만만한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다.

“큰형님도 언제 함께 갑시다. 형님은 문무를 모두 갖추셨으니 반드시 여러 대인의 마음에 들 겁니다. 그 후 벼슬에 오르려 하면 아주 쉬울 겁니다.”

사장조와 사장무는 사경행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수록 사경행이 벼슬에 오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지금 그들에게는 사정의 총애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경행만 못한 운명이었다. 적서를 떠나 군대를 부리는 책략을 비롯해 외모도 사경행보다 떨어져 늘 비교를 당하고는 했는데, 절호의 기회를 잡아 사경행을 누를 수 있게 됐으니 하늘을 나는 기분일 터였다.

사경행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잘 지내나 봐?”

사장조와 사장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경행은 이미 떠난 후였다. 사경행의 눈빛에 자신들을 향한 경멸을 두 사람은 분명히 보았다. 사장조는 사경행의 멀어지는 뒷모습에 분통을 터트렸다.

“자기를 뭐라 여기는 거야!”

사장무의 표정은 더욱 흉악했다.

“언젠가 밟아버리고 말 테다!”

* * *

사경행이 방으로 돌아오자 방 안에서는 두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중년 남자로 얼굴 전체에 수염이 덥수룩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젊고 단정한 용모의 청년이었다.

수염 난 중년이 말했다.

“주인, 정말로 하시려는…….”

사경행이 탁자 앞에 앉아 손을 휘둘렀다. 젊은 사람이 살기를 드러냈다.

“사장무와 사장조를 차라리…….”

사경행은 그의 말을 끊었다.

“필요 없다. 지금 손을 쓰면 다른 문제가 생길 거야. 내가 없으면 사장무와 사장조도 사정에게 무언가 할 리 없다. 방씨는…… 냅둬라.”

사경행의 냉소에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사경행은 소매를 더듬어 상소를 꺼냈다. 오늘 병권 상소를 본뜬 것이었다. 이제 바둑돌을 놓을 차례였다.

* * *

심부 서원.

한 줄기 햇살이 창문을 통해 탁자 위를 비추었다.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은 대야를 들고 온 경칩이 깨어 있는 심묘를 보고 놀랐다.

“아가씨,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경칩은 탁자의 등불이 이미 꺼져 있고, 심묘의 희고 깨끗한 눈가가 조금 거뭇한 걸 알아채고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밤을 새운 건 아니시지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조금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심묘는 어젯밤 내내 앉아 있었다. 사경행의 암시는 그녀의 의혹을 더욱 부풀렸다. 심원이 부수의에게 무엇을 줬는지 몰라도 심가에게 불리한 소식임은 확실했다. 그가 “물러나.”라고 말한 건 심가가 가길 바라지 않는 길일 터였다. 심묘는 어떻게 해야 곤란한 국면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밤새 고민했다.

“아가씨,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렇게 몸을 혹사하진 마세요.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보시면 몹시 마음 아파하실 거예요. 식사하신 후에 좀 쉬세요. 안색이 몹시 안 좋으세요. 이러다 쓰러지시면 어찌해요?”

때마침 심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오랫동안 앉아서 생각하느라 머리도 어지러웠다.

“죽을 좀 가져와. 먹고 좀 잘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경칩은 몸을 돌려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심묘의 식사를 준비할 동안 심묘는 뜨거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세수를 끝마쳐갈 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경칩이 달려 들어왔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심묘는 조금 의아했다. 주방에서 이곳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경칩이 허둥거렸다.

“아가씨, 큰일이에요.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주인어른과 마님, 그리고 큰공자님께 바로 입궁하래요!”

순간 수건을 대야에 떨어뜨린 심묘는 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서 봐야겠다.”

* * *

뜰 안. 심신이 궁에서 온 태감 앞에 무릎을 꿇고 문혜제의 명을 받고 있었다. 태감은 평소 위무대장군인 심신에게 예의를 갖추어 행동했는데 오늘 태도에서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태감이 명을 전하는 태도로 황제의 의중을 알아볼 수 있으니 이번 입궁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심묘가 뜰에 도착했을 때, 심부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심 노부인도 심원백을 데리고 나왔다. 노부인의 눈초리는 관심이 있어서 나온 게 아니라 혹여나 자신이 피해를 볼까 두려워서 나온 모습이었다.

심만이 태감에게 물었다.

“감히 묻건대 폐하께서 큰형님을 입궁하라 부르는 건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태감이 하늘을 바라보며 문혜제의 말을 전했다.

“전 단지 폐하의 분부를 받았을 뿐, 폐하의 뜻은 저도 모릅니다. 대인, 빨리 저를 따라 입궁하시지요.”

심구는 심묘를 보고 긴장해서는 얼른 심묘의 손을 끌었다.

“교교야, 어떻게 온 거야? 안심해. 폐하께서 단지 군사 일을 의논하시자는 거니 금세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같이 탕후루를 먹으러 가자.”

심구는 심묘가 놀랄까 싶어 얼른 달랬다. 그런 심구의 모습에 심묘는 더욱 의혹이 짙어졌다.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다 함께 입궁한다니. 심가군의 주요 인물 세 사람이 다 가는 것이었다. 반드시 심가군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가의 병권은 원래 뜨거운 감자였다. 병권과 관련되면 만사에 조심해야 했다. 그렇다고 지금 자신이 두려움을 드러내는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들의 마음만 더욱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난치듯 웃었다.

“오라버니. 그 말, 책임져야 해.”

심구는 한숨을 놓았다. 그는 똑똑한 심묘가 조정의 일에 연루되길 바라지 않았다. 조정의 일은 한 사람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걸핏하면 무수한 사람이 연루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곤 했다. 나설안과 심신도 얼른 심묘를 위로했다.

“교교, 어디도 가지 말고 우리가 오길 기다리거라. 이따 함께 네가 봄에 입을 새 옷을 사러 가자꾸나.”

심묘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감이 심신 일행을 데리고 부를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약추가 심만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어째서 갑자기 아주버니와 형님에게 입궁하라고 할까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심만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형님은 중요한 일을 맡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일이 생겨도 말해줄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야.”

심귀의 말은 심신에게 정말 사고가 생겨도 두 형제가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백부에게 일이 생기면 아주 큰 일일 거예요. 혹시 우리까지 연루되는 건 아닐까요?”

심모는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너를 연루시킬까. 널 연루시키기 전에 심묘를 먼저 데리고 가겠지.”

심귀는 표독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은 악랄했다. 연거푸 자식을 잃은 후 그의 벼슬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벼슬이 높고 인망이 높은 심신을 질투해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서 심신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할 듯 보이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심신 일가가 이번 기회에 전부 망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 다시는 자신의 앞날을 막는 존재가 없을 텐데.

심모의 얼굴에도 기뻐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동정하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 너무 불쌍하다.”

심묘는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궁중 하인조차 폐하의 뜻을 모르는데 숙부들은 이미 폐하의 생각을 잘 아시는 것 같네요. 둘째 숙부가 귀신같이 알아맞히다니, 아마 이 일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폐하도 둘째 숙부가 다른 사람을 잘 헤아린다고 칭찬하실 거예요. 마음이 통하는 신하가 있는 건 흔하지 않으니까, 그야말로 전조의 위 대인과 필적할 만하네요.”

심귀와 심만의 안색이 당장 변했다. 황제가 가장 금기시하는 것은 신하가 함부로 위의 뜻을 추측하는 일이었다. 심묘의 말은 심귀와 심만이 바로 문혜제의 금기를 깨고자 한다는 얘기였다. 심지어 심묘는 그 둘을 전조의 위 대인에 빗대어 말했다.

전조의 위 대인은 황제의 심복으로 황제의 눈짓만으로도 황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고 한다. 황제는 정세가 안정적이지 않을 때 위 대인과 연합해 많은 대신을 제압했다. 하지만 황제가 대권을 손에 넣자마자 위 대인에게 하사한 것은 사형이었다. 자기 생각을 분명히 아는 신하를 좋아할 황제는 없었다. 신하가 황제의 생각을 너무 정확히 안다면 경외하지 않는 것이고, 경외심이 없다면 그들의 목은 칼날에 걸릴 것이었다. 황실은 의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마디 말로도 사람의 생사를 정할 수 있었다.

심귀와 심만은 감히 반박의 말을 하지 못했다. 심묘의 말이 소문이 나서 문혜제가 들으면 큰 말썽이 일어날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심 놀랐다. 심묘가 어디서 배운 실력인지 몰라도 단번에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것이었다. 이런 방법은 미 부인이 쓰기 좋아하는 수완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심귀의 입을 막느라 급해서 사용했을 뿐, 정말 그들과 언쟁할 생각은 없었다. 당장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생각해야 했다.

노부인은 대방이 열세에 처한 것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심부에 말썽을 불러왔어!”

그녀는 이런 일이 생겼으니 대방이 분가를 뒤로 미룰 수도 있겠다고 계산했다. 심지어 심신 일가에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면 그 재산이 전부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갈 수도 있단 생각마저 하며 온 얼굴 가득히 탐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심묘는 혐오스러웠다. 심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지 못해 안달 난 자들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을 꼽을 때 심부는 반드시 높은 순위에 오를 것이었다.

만 이낭은 심동릉의 손을 끌고 몸을 뒤로 피했다. 임완운은 정신을 차렸으나 채운원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리에서 감히 무언가 말할 자격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심동릉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백부에게 무슨 일이 있으려구요? 백부는 평소 정경성에 없었는걸요. 이번 승전(承傳, 황제의 뜻을 알려옴)은 따로 상을 하사하시겠다는 게 아닐까요?”

심동릉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한 것이겠지만, 심모는 그녀의 말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노부인도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묘는 순간 멍해졌다.

심동릉의 말처럼 심신 부부는 평소 정경성에 없었다. 그들은 심구와 1년 내내 서북의 거친 곳에서 전쟁을 하고 막 수도로 돌아왔으니 정경성에서의 죄명을 구실로 삼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제 서현비와 동숙비도 나설안과 소춘성의 생활을 이야기했다 했다. 까닭 없이 소춘성의 생활을 물어볼 리 없었다. 심묘는 궁중 여자들이 정경성에서 먼 서북에 흥미를 가진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일은 반드시 서북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죄명일까? 심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녀는 심부 사람과 얽히지 않기 위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심귀 일행도 하나둘 흩어졌다. 진약추의 뒤를 따르는 심모의 얼굴에 기쁨이 드러났다. 동숙비가 심묘와 나설안을 불렀다는 말에 불안했었다. 심묘가 부수의의 친모인 동숙비의 눈에 들면 어쩌나 온종일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늘 보니 대방이 불행한 일을 당할 것 같았다. 심모의 발걸음은 저절로 가벼워졌다. 그러나 만 이낭의 손에 끌려가는 심동릉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돌려 한동안 뜰을 바라보았다.

넓은 서원의 뜰이 눈 깜짝할 사이 텅 비었다. 문혜제가 심신에게 갑작스러운 입궁 명령을 내렸으니 심가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감금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만다행으로 모경은 심가군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모경은 고개를 숙인 채 문가에 서 있었다. 모경의 얼굴은 엄숙했다. 심동릉은 문혜제가 심신에게 상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으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심묘는 탁자에 앉아 미간을 팽팽히 죄었다. 모경은 속으로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심묘가 이 소식을 들으면 당황해 분별을 잃고 소란을 피울까 걱정했던 것이다. 다행히 심묘의 안색은 어둡긴 했으나, 걱정했던 바처럼 당황하지는 않은 듯했다.

전생의 심가가 부수의에게 멸문당할 때 심묘는 나서서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수의는 조정의 문무백관 앞에서 심가의 죄명을 낱낱이 열거하며 꾸짖음으로써 말문을 막히게 했다. 모두 거짓인 것을 알지만 거짓임에도 그 나름의 증좌가 있고 하나하나 믿을 만했다. 반박을 하면 할수록 심묘는 무력해졌다.

그때 금란전에서의 일은 아직도 심장을 아프게 했다. 심가의 죄를 알리는 글인 심격문은 매일 올라왔다. 지금은 명제 69년으로, 자신이 다시 돌아온 것은 명제 68년이었다. 그러니 심원이 부수의에게 전달한 심가의 죄는 반드시 명제 68년이나 그 이전의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었다.

명제 68년 이전에 심가에 무슨 죄명이 있을까. 심묘는 눈을 감았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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