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6권
27장
명황색 조복을 입고 봉황 비녀를 꽂아도 심묘는 추락하는 황후의 권위를 다시 세울 수 없었다. 심가의 죄 앞에서 문무백관은 격분했고 배랑은 냉담했다. 부수의는 분노해 상소를 그녀의 얼굴 위로 휘둘렀다.
“명제 68년, 심가 장병이 황명을 거역했다. 비밀리에 도적을 놔줬으니 군주를 속이고 윗사람을 업신여겨…….”
비밀리에 도적을 놔줘? 군주를 속이고 윗사람을 업신여겼다?
심묘는 사납게 눈을 떴다. 갑자기 떠올랐다. 명제 68년, 확실히 많은 일이 발생했다. 심신은 서쪽 변방 오랑캐인 서융과 싸웠고 서융을 참패시켰다. 성지인 삼좌를 탈취했고 문혜제는 성지의 사람을 모두 용서하지 말라 명했다. 성을 점령한 장군에게 성 주민을 학살하는 것은 가장 잔혹한 일이었다. 전쟁은 장병들이 하는 것이다. 성안의 사람들이야 대다수가 노약자였고, 그들은 명제의 백성처럼 평온하고 무해했다.
무의미한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심신은 몰래 몇몇 부녀자와 어린아이의 목숨을 남겨줬다. 이 일은 심가군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신은 심가군은 모두 자신이 데려왔으니 배반할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심원이 이미 밀정을 심가군에 심어놨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당시 심가를 멸문에 이르게 한 죄명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군주를 속이고 윗사람을 업신여겼다는 죄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신중하게 행동하던 부수의가 갑자기 이 시기에, 아직 시기상 빠른 이 시점에 이 문제를 단독으로 꺼내 들었다는 것은? 부수의가 현재의 정세를 위기라고 느꼈으며, 그게 이미 변수가 된 것이었다. 황실은 심가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이전과 다른 눈빛으로 주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심원이 부수의에게 건네준 증좌는 심신이 문혜제의 “성 주민을 학살하라.”라는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이 확실했다.
이 일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늘 심가의 병권을 회수할 적당한 시기를 보고 있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상황은 매우 곤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묘는 양 주먹에 힘을 꽉 주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황실은 심가를 처분하겠다는 마음을 품었으나 지금은 병권을 되찾으려 할 뿐이었다. 황실 사람은 교활했다. 정당한 명분 없이 심가를 건드리면 다른 고관세가의 불만과 불안도 덩달아 살 것이기에 쉽게 행동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찌해야 할까.
방 안의 여종들과 모경은 심묘의 안색이 계속 어두워지자 속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심묘가 갑자기 일어났다.
“외출해야겠어.”
“아가씨, 지금 외출하시면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심묘의 눈빛이 차가웠다.
“집안에 일이 생겨 마음이 답답할 때 친구를 찾는 게 뭐가 어때서? 가자.”
모경은 심묘의 결정에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심묘에게 탄복했다. 심묘가 계획을 행동으로 옮길 때는 합당한 규칙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오히려 그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제가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모경의 단호한 태도에 경칩과 곡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백로와 상강은 부에 남아 소식을 기다리기로 했다.
심묘의 외출은 심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으나 심묘는 풍부에 간다고 했다. 풍안녕과 심묘는 친구이니 심묘가 풍안녕을 찾아 하소연하는 일은 당연했다. 그래서 막는 사람은 없었다.
부를 출발한 모경은 마차를 풍부 방향으로 몰았다. 골목을 지나 따라오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 심묘가 말했다.
“소가로 가자.”
곡우는 당황했다.
“소가요? 어느 소가요?”
“평남백부 소가, 소욱의 댁.”
정경성 지리에 익숙한 모경은 어느 귀인의 관저가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길을 묻지 않고 말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질주했다. 경칩과 곡우는 묻고 싶어도 감히 묻지 못했다. 그녀들은 심묘를 따라나설 때 심묘에게 당연히 묘안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녀들도 사가가 심가의 정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임안후 사가와 평남백 소가는 한배를 탄 사이기에 자연히 소가와 심가도 물과 불같은 관계였다. 어째서 적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것일까. 경칩과 곡우는 불안하기만 했다.
* * *
평남백부 안.
소명풍의 방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휘황찬란한 자금색 장포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는 세상사에 아랑곳하지 않는 나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와 달리 소명풍은 초조한 얼굴이었다.
“어찌 된 일이야? 너 어째서 자청해서 출병하기로 한 거야?”
“정경성은 너무 답답해. 북부 변방으로 가서 놀려고.”
그 여유로운 대답에 온화한 소명풍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논다고? 넌 북부 변경이 어떤 곳인지 몰라? 지금 모두 흉노족과 전면전을 꺼릴 정도야. 그런데 넌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서서 거기에 부딪쳐보려는 거야?”
소명풍은 순간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사경행이 남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다독이는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가 사장조와 사장무를 벼슬에 올리려 해서 네 마음이 불편한 건 알아.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풀 필요는 없어. 이 일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야. 장난이 아니라고. 네 무공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너는 북부 변방에 가본 적이 없잖아……. 요즘 거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가지 마.”
사경행은 소명풍의 뒤늦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소명풍, 폐하께서 수령 인장을 주셨어. 그런데도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
소명풍의 얼굴에 낙담의 표정이 나타났다. 황제의 말은 바꿀 수 없으니 번복의 여지가 없었다. 수령 인장까지 얻었으니 절대 되돌릴 수 없었다. 이제는 사경행이 생각을 바꿔 가지 않겠다 해도 가야만 했다.
“너 나한테 큰일 생기라고 저주하는 거야?”
“나쁜 자식! 왜 나와 미리 상의하지 않은 거야?”
소명풍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너랑 상의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신경 쓰지 마.”
사경행은 소명풍의 욕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무심히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너!”
소명풍은 더더욱 얼굴을 붉혔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사경행은 하늘도 무시하는 남자니 이제 와 다른 사람이 조언한다 해서 결정한 일을 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소꿉친구임에도 사경행은 어떤 일도 자신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말한다 해도 ‘통지’에 불과했다. 지금도 수령 인장을 손에 넣었으니 곧 출발한다는 ‘통보’ 한마디뿐이지 않나. 그래도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소명풍이 방 안을 서성였다.
“도대체 왜 그 성가신 북부 변방으로 간다는 거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거기 상황을 알기는 해? 당연히 네가 이기길 바라지만, 혹 진다면……. 네 그 서출 동생들이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를 거라고! 넌 마음 편하게 그들만 정경성에 남겨둘 수 있어? 네 아버지가 무슨 말을……!”
소명풍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말고 갑자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이 일, 네 아버지는 아셔?”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봐! 너 이렇게 제멋대로 하다니. 사후야께서 아시면 반드시 크게 노하실 거야. 그때 서출 동생들이 다시 도발하면 어쩔 거야. 그리고 너희 부에는 몸을 숨긴 이낭이 있잖아……. 네가 북부 변경에서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그때 부가 이미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해 있으면 어쩌려고. 사경행, 너 정말 상관없어?”
소명풍은 사경행을 진정한 친구로 여겼고 그러기에 그를 위해 할 말은 해야 했다. 사경행은 훈계가 끝없이 이어지는 걸 끊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수도에서 떠나면 넌 나 대신 공주부를 잘 봐줘.”
사경행은 미소 지으며 소명풍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대외적으로 소씨 세가 외에 가장 많이 왕래하는 사람은 송신 공주였다. 북방 변경으로 가면 적어도 반년은 돌아오지 못할 테고, 심하면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남들 눈에는 사지로 보이는 북방으로 자신이 떠나는 걸 그녀가 알면 슬퍼할 것이었다.
소명풍은 사경행의 잘못을 열거하며 재차 꾸짖으려 했으나 사경행의 표정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경행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2년 동안 소씨 세가는 투쟁의 칼끝에서 잠시 피해 있는 게 좋아. 넌 그동안 병을 핑계로 벼슬에 오르지 말고 부에서 지내도록 해.”
“에? 나는 갑자기 왜? 벼슬에 올라도 병마 일에만 끼어들지 않으면 될 거라지 않았어?”
“시키는 대로 해. 그럼 난 간다.”
사경행이 의아한 얼굴의 소명풍을 한 번 흘겨보고 일어났다.
“이렇게 가려고? 오늘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고별하러.”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갑자기 문가에서 콰당 소리가 들렸다. 놀란 소명풍이 문을 여니 둥근 찹쌀경단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들어왔다. 경단은 둥글고 포동포동했다. 소명풍이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켜 옷 위 먼지를 털어주었다.
“소명랑, 무슨 일로 온 거야?”
흰 경단은 소가 둘째 공자 소명랑이었다. 그는 사경행을 보고 놀라 움츠러들어서는 소명풍의 몸 뒤로 숨으며 그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형님, 누나가 왔어요.”
“뭐라고?”
소명풍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남종이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공자님, 소저 한 분이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소명풍은 멍하니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소명풍이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했다.
“허튼소리! 날 찾아올 소저가 어디 있어?”
“진짭니다! 위무대장군부 적출 심묘 아가씨라며 공자님과 상의할 일이 있답니다.”
남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위무대장군부 적출 심묘…….”
소명풍이 천천히 읊조릴 때 소명랑이 먼저 뛰어 일어났다.
“심묘 누나예요! 형님, 심묘 누나가 형님을 찾아왔어요!”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가는 사가 때문에 소가와는 왕래가 없었다. 사적으로도 소명풍과 심묘 사이에는 우정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심묘가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니 소명풍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혹시 널 찾아온 거 아니야?”
소명랑만이 아랑곳하지 않고 기뻐 날뛰었다.
“심묘 누나는 날 찾아온 걸 거예요! 형님, 우리 심묘 누나를 보러 가요!”
소명풍이 망설였다.
“이게…….”
“가봐. 네 방으로 오라고 해.”
사경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깊은 뜻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 * *
심묘가 모경을 데리고 소명풍의 방으로 향하려 할 때, 소명풍의 남종이 소명랑을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눈처럼 흰 찹쌀경단이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 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모두 헛수고였다. 그때 소명랑은 심묘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흥분해 작은 손을 마구 휘둘렀다.
“심묘 누나!”
심묘는 걸음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니?”
소명랑은 울상을 지었다.
“형님이 못 들어가게 해요……. 누나, 날 보러 온 거죠?”
남종이 기침을 했다. 그는 심묘에게 죄송하단 듯 웃으며 설명했다.
“심가 아가씨, 죄송합니다. 공자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소명랑은 불만인 듯 양 볼을 크게 부풀리며 심묘를 올려다보았다. 심묘가 다시 한번 웃었다.
“오늘은 네 형님과 할 이야기가 있단다. 다음에는 꼭 널 보러 올게. 그때 같이 떡을 먹자꾸나.”
심묘의 약속을 받아들인 소명랑은 더 이상 발버둥 치지 않고 즐거운 얼굴로 돌아갔다. 모경은 낯선 사람에게 한없이 냉정한 심묘가 소명랑에게는 봄볕처럼 친절하게 대하는 게 의아했다. 모르고 보면 소명랑이 그녀의 아들인 줄 착각할 정도로 다정했다. 모경은 자신의 생각이 기이하다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심묘와 소명랑의 나이 차가 많지 않은 데다 애초에 젊은 아가씨인 심묘가 어머니의 마음을 갖고 있을 리 없었다.
심묘가 방문을 열자 소명풍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심묘가 모경을 데리고 들어오자 순간 당황했지만 심묘가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 심묘를 안내한 남종이 얼른 문을 닫았다. 모경은 입구에 자리를 잡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의외의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이려는 것이었다.
심묘는 소명풍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단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녀가 난생처음 온 평남백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초대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소명풍과는 사적으로 만난 적도 없었다. 생소한 사람과 마주했음에도 이렇게 여유롭다니. 소명풍은 곁눈질로 심묘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았다.
심묘 역시 소명풍을 관찰하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진중한 인상이었다. 단지 작열하는 태양의 친구로 지내다 보니 그 광채가 가려졌을 뿐. 심묘는 소명풍도 보통 관가의 자제가 아니며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전생의 소씨 세가는 병마를 사사로이 판매했다는 죄목하에 멸문을 당했다. 소명풍도 그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소씨 세가 부자의 시체는 사경행이 직접 거뒀다고 했다. 소가와 사가의 깊은 관계를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소명풍은 심묘의 탐문하는 시선이 불편해져 작게 기침을 했다.
“심 소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제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폐하의 부름에 입궁하셨습니다. 소 공자는 그 연유를 아십니까?”
소명풍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심가의 일은 온 정경성에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관가 동료들도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정 관리에게는 작은 변화나 사고도 금세 큰일이 될 위험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가의 사고가 소가와 무슨 관계란 것인지.
“모릅니다.”
소명풍은 심신이 궁중으로 불려간 명분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모두 문혜제가 심가를 혼내주려 한다고만 추측할 뿐 무슨 죄명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 아버지께서 서북 서융을 소멸시키고 성지를 회수할 때, 폐하께서 주민을 학살하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폐하의 명을 일부 준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군주를 속이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며 군령을 거역했다고 아버지를 징벌하려 하십니다.”
소명풍은 깜짝 놀랐다. 심묘가 말한 죄명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속사정을 먼저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군주를 속이는 일은 어떤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 약점이 되는 법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그녀 사이에는 아무 연고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솔직담백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다니. 어려서부터 총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소명풍도 이에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억지웃음만 지었다.
“아, 그렇습니까. 어쩌면 좋을지요.”
“그래서 전 소 공자에게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
소명풍은 더욱 멍해졌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심묘와 우정을 나눈 적이 있었는지, 심가와 소가에 교류가 있었는지 골똘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전무했다. 소가가 나서서 심가를 도와줄 이유가 있는지도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말문이 막힌 소명풍은 몰래 병풍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빠르게 시선을 거둔 소명풍은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
“심 소저, 농담을 잘하시네요. 제가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심 소저께서 저를 높게 보신 듯합니다……. 제 무례한 말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이 일은 여러 가지가 뒤엉켜 복잡하니 함부로 도왔다가 불길이 저까지 태울까 걱정이군요.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소저를 도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소명풍은 심묘의 요청을 정중하게, 그러나 여지없이 거절했다. 소명풍은 심묘가 직설적인 성격인 걸 알아챘기에 자신도 완곡하게 에둘러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직설적으로 한번 더 말했다.
“저는 도울 수 없습니다.”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깨끗하며 천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그 웃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소 공자, 지금 벼슬에 계시진 않으나 영존(令尊,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께서는 아직 군마를 맡아서 관리하시지요?”
소명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습니다만?”
“영존께서 공자와 군마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소명풍은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그는 심묘를 깊은 눈빛으로 주시했다.
“심 소저, 왜 그런 말을 하시지요?”
심묘는 다시 살짝 웃었다.
“근래 군마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더군요. 군마 몇 필이 병이 나서 약과 침도 소용없었다던데요?”
소명풍은 물잔을 꽉 쥐었다. 심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부친 소욱은 근래 이 일로 몹시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군마를 다루는 몇몇 직속 부하와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 일이 심묘에게까지 전해질 리가 만무했다. 일이 알려지면 관련된 모든 사람이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 함부로 소문을 낼 리도 없었다. 그런데 심묘는 어떻게 알았을까. 소명풍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 소저, 어디서 그런 잘못된 말을 들었나요?”
“잘못된 말일까요? 소 공자는 전염병이 아닐지 두렵지 않으신가요?”
심묘는 탄식하며 소명풍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가라앉았으나 그녀의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소명풍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전염병이라니!
“영존께서는 주의 깊고 신중한 성격이십니다. 평생 군마와 관련된 일을 하셨는데 전염병의 낌새가 있었다면 당연히 의심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소 공자에게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을까요?”
심묘는 짐짓 소명풍의 반응에 자신이 더 놀란 척하며 되물었다. 소명풍은 이를 악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이미 부친에게 들어 알고 있는 바였다. 약과 침으로 치료해도 낫지 않으니 이는 전염병의 전조였다. 군마는 수많은 은자로 키워낸다. 그러니 전염병이 돌면 손해가 막심한 게 당연했다. 은자의 문제를 떠나서 충분한 군마 없이는 아예 전쟁을 치를 수가 없었다. 위에서 질책한다면 머리 위 관모를 벗어야 함은 물론이고, 심할 경우 머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근래 말의 증상이 영 이상해서 여럿이 붙어 살펴보아도 속수무책이었다. 병에 걸린 말을 따로 격리하고 있으나 여전히 병사하는 말이 생겨났다. 질병을 통제하지 못해 전염병이 확산되면 큰 재해가 될 것이었다.
“심 소저, 무슨 견해가 있으십니까?”
소명풍은 떫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티 나지 않게 병풍 쪽을 다시 한번 보았다. 심묘는 천천히 일어나 빈 찻잔에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소명풍은 초조했으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제게 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요행히 제가 말을 잘 보는 한 분을 아는데 손재간이 출중하십니다. 듣자 하니 예전에 이런 병을 치료한 적이 있으시답니다. 이번 말 사태도 핵심 문제만 해결하면 다른 것은 잇따라 풀릴 겁니다.”
소명풍은 심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심묘는 소명풍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다시 마시고 담담히 말했다.
“망양보뢰(亡羊補牢, 양 잃고 우리를 고친다는 뜻)라는 말이 있지요? 병이 더 확대되어 감추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단순히 말만 재난을 입는 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심 소저. 오늘 그저 호의로 좋은 계책을 일러주러 오신 거라면 좋겠지만, 다른 말이 있을까 걱정이군요.”
소명풍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이 번쩍였다.
“우리 소가도 심가를 도울 좋은 계책이 있을 것 같네요.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심묘가 소명풍을 칭찬했다. 소명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시원한 게 아니라 심묘가 교활한 것이었다. 좀 전에 분명 소가가 일부러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어 심신을 도울 의무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심묘는 다른 거래를 제시했다. 소가의 약점을 잘 잡은 것이었다.
최근 소가가 가장 근심하는 일은 당연 군마와 관련된 일이었다. 일을 아직 비밀리에 부치고 있었는데, 심묘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심묘는 직설적으로 자신에게 비장의 패가 있음을 보였다. 소명풍에게는 이 거래를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거래는 거래이니 한쪽만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영존께서 조정에 아시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압니다. 제 부모님은 평소 서북에 계시니 영존의 세력이 더 넓으시겠죠. 전 영존의 도움을 바랍니다. 또 친분이 있는 관료를 모아 제 아버지를 대신해 상소를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소명풍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소? 심 장군을 위해 사정하라는 겁니까?”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전부 제 아버지를 탄핵해주시면 됩니다.”
소명풍은 멍해졌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아마 영존께서는 이 흙탕물을 함께 뒤집어쓰길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제 아버지에 대한 탄핵 권유는 소 공자에게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소 공자는 영존께 군마의 일과 저에 대해서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래는 없던 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소명풍은 심묘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심묘는 용모가 수려하고 온순해 보였다. 그러나 웃을 때는 천진하지만 웃지 않을 때는 차가운 눈이 압도적인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부친에게서도 이런 위압감을 느낀 적은 없던 소명풍은 놀랍고도 두려웠다.
“전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번거롭지만 소 공자는 결정하신 후에 서신을 저의 부로 보내주십시오. 일이 성사되면 전 아까 그 명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묘는 일어나 소명풍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소명풍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일어났다.
“반드시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심묘는 병풍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모경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심묘가 떠나자 소명풍은 한숨을 내쉬었다. 병풍 뒤에서 사경행이 걸어 나왔다.
“너도 다 들었지? 심 소저는 도대체가 속을 알 수 없네. 상상 그 이상이야.”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명풍은 소명풍대로 탁자 위 심묘가 마신 찻잔을 바라볼 뿐이었다. 잔의 가장자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이거, 네가 마시던 건데…….”
사경행이 발을 들어 거침없이 소명풍을 걷어찼다.
“아야, 왜 날 차는 건데. 심 소저가 그렇게 빨리 잔을 드니 나도 방법이 없었어. 어쨌든 너도 손해 본 건 없는데 뭘 언짢아하는 거야?”
소명풍의 변명을 무시하며 사경행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물었다.
“아까 말한 군마 일은 진짜야?”
사경행의 예리한 시선을 마주하자 소명풍은 조금 곤란해졌다.
“맞아.”
“나한테 왜 숨겼어?”
사경행이 소명풍에게 따지듯 물었다. 소명풍은 고개를 가로젓고 쓴웃음을 지었다.
“부친께서 사적으로 상의한 일이야. 난 너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어. 부친은 더더욱 아무에게도 말씀하시지 않았겠지. 자칫 관모를 벗을 일인데 어디 쉽게 말하겠어? 조금 더 지나면 너에게 말하려 했어……. 그런데 심 소저는 어떻게 이 일을 알았을까? 혹시 군마 쪽에 아는 사람이 있나? 하지만 이 일은 군마 쪽 사람도 절대 함부로 말할 리 없는데.”
사경행은 소명풍을 힐끗 보았다. 소명풍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소가의 빈틈없는 보호를 받고 자라 큰 시련을 겪은 적이 없었다.
심묘는 또 하나 비장의 패를 들고 나타났다. 이 또한 사경행의 예상을 넘는 일이었다. 심묘에게 물러나라는 전략을 알려준 사경행은 심묘가 그 전략을 택하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사경행과 소씨 세가가 다른 대신들과 연합해 심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달라는 정반대의 방법을 쓰려고 하다니.
어쩌면 그럼으로써 심신의 급박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의 생각을 미리 추측할 수가 없으니 이번 한 번은 황제가 심신을 놔줄 수 있어도 언젠가는 또 생길 일일 터였다. 잠시는 숨을 수 있어도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사경행은 심묘가 거기까지 이미 다 계산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기자 소명풍도 긴장했다. 사경행은 무관심해 보여도 조정의 국면을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기다려도 말이 없자 소명풍이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되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별거 아니라고 치부했던 병이 전염병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많아. 심지어 이번엔 그 증상이 가볍지도 않고. 부친은 군마를 맡아 관리하는 통령이시니 사고가 나면 소가가 제일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될 거야. 심 소저가 정말 날 속이지 않는다면 시도해볼 만한 일이야. 부친을 설득하는 건 조금 어렵겠지만…… 온 힘을 다해봐야지. 넌 이 거래를 어떻게 여겨?”
소명풍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도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명풍을 마주 보았다.
“이 거래로 제일 이득을 볼 사람은 절대 네가 아니야. 하지만 너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지.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해.”
소명풍이 고개를 숙여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연합해서 심신을 탄핵하라는데, 심 소저는 일이 잘못될까 두렵지 않은 걸까?”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모르는구나? 황제의 심리에 대해서는 그쪽이 너보다 훨씬 더 잘 알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소명풍을 두고 사경행이 일어났다. 소명풍은 얼른 붙잡았다.
“너 어디 가려고?”
사경행은 아까의 나른한 얼굴로 다시 돌아가 있었다.
“수령 인장 받았잖아. 아버지를 보러 가야지.”
* * *
평남백부 대문 밖.
“방금 소 공자의 방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느냐?”
멱리(冪罹, 여인들이 외출 때 썼던 쓰개)로 얼굴을 가린 심묘가 모경에게 물었다. 모경이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발견하셨습니까?”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예가 출중한 모경이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소명풍이 무엇 때문에 번번이 병풍 쪽을 바라보았을까 의아했다. 심묘는 무예는 전혀 익히지 못했어도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살펴 심중을 헤아리는 능력은 뛰어났다. 소명풍처럼 어린 소년의 심중을 파악하는 건 힘들일 일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니 탁자 위 찻잔이 하나가 아니었던 점도 이상했다.
심묘는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했다. 병풍 뒤에 사람이 있든 없든, 있어도 그가 누구든 소명풍에게 할 말은 다 했다. 그녀가 아는 소명풍이라면 이 일을 성사시킬 것이었다.
심묘가 마차에 앉자 곡우가 물었다.
“아가씨, 소가 큰공자님이 주인어른과 마님을 도와줄까요?”
바깥에 있던 경칩과 곡우는 심묘와 소명풍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심묘가 소명풍에게 도움을 청했다고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소가와 심가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불안하여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거야.”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소씨 세가는 사적으로 병마를 판매한 일로 멸문되었다. 황실에서 소씨 세가와 같은 명망 있고 오래된 세가를 없애기 위해서는 표면상으로 멸문의 이유를 완전히 갖춰야 했다. 병마를 판매한 죄 외에도 한 가지가 더 기록에 남아 있었다. 명제 69년 초, 소욱이 관리하는 군마에 질병이 생겼고 후에 규모가 크진 않지만 전염병이 돌았다. 당시 소욱은 시골에서 말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는 명의를 찾아 전염병을 통제했다. 이 일은 군마청의 심복만 아는 일이어서 외부로는 전해지지 않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이후 소욱의 가산이 몰수되고 나서야 그 일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심묘는 황후였을 적 소욱의 유죄 문서를 세밀히 보았기에 그 명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전염병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하면 소욱 스스로 그를 찾아갈 것이었다. 심묘가 소명풍에게 자신과의 거래를 소욱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 시차를 이용해 소욱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심묘의 안색은 곧 가라앉았다. 심원은 죽기 전, 심가가 군명을 거역한 증좌를 부수의에게 넘겼다. 문서가 완전하지 않을 텐데도 부수의는 지금 심가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심묘는 긴장했다. 지금의 그녀는 부수의와 맞설 수 없었다. 시기도 그렇지만 계기가 없어 물러나라는 사경행의 묘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물러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양보하고 물러날 것이냐, 일시적으로 굽혀 미래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냐도 따질 일이었으나, 어떻게 준비해서 안전하게 물러나야 하는 것인지가 지금 심묘가 가장 마음을 쓰는 문제였다.
외출이 너무 길면 의심을 불러올 테니 심묘는 서둘러 심부로 돌아갔다. 심부 사람들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풍안녕과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심신과 나설안은 여전히 궁에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귀와 심만은 서로 소식을 주고받은 듯 즐거워 보였다. 대방 사람을 원수로 대하는 모양에 익숙한 심묘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원으로 돌아갔다.
경칩과 곡우는 오늘밤 심묘의 마음이 번잡하고 무거워 어제처럼 탁자에서 밤을 새울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러나 심묘는 일찍 씻고 침상에 올라갔다. 평소처럼 침착한 모습에 오히려 여종들은 더욱 걱정되었다.
그러나 침상에 누운 심묘는 정말로 차분했다. 그녀는 조각문양 침상의 기둥에 걸린 사각 향낭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 했다.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 소씨 세가가 다른 대신들과 연합해 상소를 올리길, 그리고 문혜제의 의심이 발작하길 기다릴 수밖에.
* * *
궁중 숙방궁.
숙방궁은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했다. 장식이라 봐야 화초와 그림 조금뿐이었다. 동숙비는 부드러운 침상에 앉아 소곡 연주를 들었다. 연주하는 젊은 아가씨는 둥근 얼굴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나 연주에 생동감이 있었다.
동숙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았다. 동숙비는 특별히 아름다운 편은 아니어서 각양각색 미녀 중에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품성이 온화하며 곱다고 하지만 비빈 중 외양은 가장 볼품없었다. 동숙비 옆에는 젊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동숙비와는 달리 화려한 복장과 수려한 용모, 그리고 냉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 위 웃음기는 허물없어 보였다.
“듣기 좋네요.”
동숙비의 아들이자 아홉 번째 황자 정왕 부수의였다. 동숙비가 웃음을 머금고 부수의를 보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곡을 연주하던 사람이 연주를 멈췄다.
“좋은 연주구나. 상을 주마.”
소곡을 연주하던 아가씨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녀는 금을 받아들고 방을 나갔다. 명제의 궁중 사람들은 숙방궁의 하인이 가장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숙비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하인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모두 물러나라.”
궁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고, 자리에는 동숙비와 부수의만 남았다.
“어머님께서 하인을 길들이는 수완은 갈수록 고명해지십니다.”
부수의가 웃으며 말했다.
“은혜를 베푸는 게 원한을 맺는 것보다 좋지. 내가 너에게 몇 번을 말했느냐.”
동숙비도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랬지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제 위치에서는 원수를 맺는 게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부수의는 탄식했다. 동숙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요 며칠 부황께서 위무대장군 일로 마음을 쓰셨다. 너는 확신이 있느냐?”
동숙비는 부수의의 일에 웬만해서는 상관하지 않았다. 후궁은 정치에 간섭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게다가 나머지 여덟 황자 역시 하나하나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추태를 보이느니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게 나았다. 정세가 수상한 황궁에서 동숙비는 총애를 잃은 힘없는 비빈일 뿐이었다.
“부황께서 처음부터 이 일을 주시하고 계셨으니 가볍게 처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증좌를 올릴 때 부황도 바로 인정하셨던 거라서 일의 진행이 순조롭습니다.”
“네게 생각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지금 정세는 복잡하니 넌 좀더 조심하도록 해라. 공로가 있다고 나서지 말고 대신 그들이 서로 다투도록 만들어라. 그들이 경쟁으로 지쳤을 때 네가 손을 써도 늦지 않단다.”
동숙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히 말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신중히 듣겠습니다.”
부수의는 얼른 말했다. 웃던 동숙비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했다.
“지난번 심 부인이 심가 소저를 데리고 입궁했을 때 넌 내게 그 아이가 우리 대화를 못 듣게 하라고 했지. 어찌 된 일이냐?”
나설안과 심묘가 입궁했을 때, 부수의는 동숙비에게 심묘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래서 동숙비는 동요에게 시켜 심묘를 데리고 나가도록 한 것이었다.
“어머니, 심가 소저인 심묘는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예쁘게 생겼으니 장래 반드시 미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격이 순박하고 선량해서 쉽게 괴롭힘을 당할 거야. 이전에 심 소저가 너를 사모했다 들었는데 소문처럼 심하지는 않더구나. 민첩함이나 총명함은 부족해 보여도 머저리까지는 아니더구나.”
동숙비는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부수의가 살짝 웃었다.
“어머니는 까탈스러운 분이신데, 심 소저가 별로였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네요?”
동숙비는 관대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부수의도 혼인할 나이이고 자질과 신분이 좋으니 높은 가문에서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했다. 여식들은 모두 훌륭한 아가씨였으나 동숙비는 늘 트집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모두 자격 미달이었다. 그 정도로는 자기 아들의 부인으로 삼아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묘를 과찬하지는 않아도 경시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조금뿐이지만 심묘의 편을 든 느낌이었다. 동숙비가 젊은 관가 소저에게 처음으로 관대한 평을 내린 것이었다.
아들의 말을 곱씹으며 동숙비는 당황했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아가씬데 어째서 나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순박한 게 좀 흠이긴 했으나 그 외에는 단점을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나쁜 점도 없고 야심도 없는 평범한 여인으로 평가했음을 새삼 떠올린 동숙비는 그제야 놀랐다. 심묘가 교묘하게 위장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수의가 빙긋 웃었다.
“알아채셨군요. 심 소저는 깊이 숨어 있는 고수입니다.”
동숙비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뭘 감췄다는 것이냐? 나이가 어리니 다른 건 다 가장할 수 있어도 성격은 못 할 것이다.”
부수의의 눈빛에 묘한 기운이 스쳤다.
“어머니, 전 예전에 심 소저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모습도 보고, 염치도 없이 저에게 애정을 고백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 국화연회에서 채가 공자에게 살기등등하게 화살을 쏴 난처하게 만든 것도 보았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그녀의 어리석고 순박한 모습만 보셨지요. 어머니, 이런 여러 모습 중 어느 게 진정한 모습일까요?”
동숙비의 찻잔을 든 손이 멈칫했다. 한 사람이 천 가지 모습을 보였고 각각 생동감이 있었다. 게다가 각각의 모습에서 엿보이는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연기하다니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그녀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이었다.
부수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모친에게 말한 모습들도 그렇고, 회조연에서 만난 심묘의 눈에서 자신을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증오를 엿보았다. 그렇게 사무치게 깊은 증오는 사랑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증오가 아니었다. 그 증오는 영혼이 분노를 발산하듯, 그를 갈기갈기 찢지 못해 한이 맺힌 것 같았다.
“어머니, 심가를 남겨두면 장래 변수가 될 겁니다. 지금의 강산에서 더 변해서는 안 됩니다. 심가 소저는 우리 생각처럼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뿌리째 뽑아 들어내는 게 가장 좋습니다.”
부수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번 위무대장군은 재난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냐?”
동숙비는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지금 심가는 고관세가의 우두머리입니다. 심가를 지금 아예 제외하면 더 큰 변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심가의 권력만 회수하면 곧 가세가 쇠락할 테니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일망타진하면 됩니다.”
동숙비가 웃으며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중도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어떡하느냐? 심가에는 다른 패가 있을 건데 너무 안일하게 놓아주는 거면 어떡하느냐? 네가 상소를 올린 걸 알게 되면 네가 연루될까 걱정이구나.”
부수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근하게 웃는 얼굴이지만 눈빛은 흉악했다.
“황제를 속이고 위를 기만했다, 그 죄명은 이미 아주 큽니다. 아무리 큰 재간이 있어도 심가는 편안히 물러날 수 없어요. 하지만…… 이것은 심묘가 어찌 나오는지 보기 위한 하나의 계략입니다.”
“계략?”
동숙비는 의아해했다.
“맞습니다.”
부수의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심원이 이전에 심묘를 주의하라 경고했으나 그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친왕부의 멸문과 심원의 죽음을 포함한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심원의 말이 진짜일 가능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심묘는 규방 소녀로 이런 큰일은 저지를 수 없으니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 심묘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능력이 대단하다면 어쩔 수 없이 방비해야 했다.
이번 심가에 심묘만 남겨둔 것은 그가 문혜제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부수의의 목적은 그 심묘가 어떤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그녀를 돕는 건 또 누구일지도 기대됐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심신이 편안히 물러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수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 기회를 어떻게 얻었는데, 놓칠 순 없었다. 심가의 멸망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고 있는 중이리라.
* * *
그날 밤, 임안후부는 평안하지 않았다.
사경행이 겉옷을 벗었을 때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남종이 고개를 숙인 채 고했다. 혼이 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목소리였다.
“주인님,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정이 입구에서 분노하여 크게 소리쳤다.
“막아? 날 막을 시도를 하게 했느냐? 난 네 아비다! 이 임안후부의 주인이 언제 바뀐 게야! 사경행, 똑바로 말해라!”
사경행은 무심하게 사정을 바라보다가 나른한 동작으로 장포를 침상 위로 던졌다. 의자에 앉아 뒤로 기댄 그는 빈둥거리는 부잣집 망나니처럼 말했다.
“후야, 야밤에 와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말투가 생소한 사람을 대하듯 소원했다. 사정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 뒤에 서 있는 사장무와 사장조도 분개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장조가 말했다.
“큰형님, 아버지께서는 평소 형님에게 성의를 다하시는데 어떻게 이렇게 예의와 존경도 없이 행동할 수 있습니까?”
“너랑은 관계없는 일이야.”
여유 만만하고 우아한 사경행은 이 세 사람을 마주할 때는 늘 건달같이 굴었다.
“고얀 녀석! 어째서 수령 인장을 요청했느냐!”
오만한 사정도 사경행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종이를 사경행의 얼굴에 던졌다. 사경행은 종이를 천천히 주워 읽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후야, 불만스러우면 폐하께 한통 더 써달라고 하십시오. 밤에 잠도 주무시지 않고 이곳에 오신 게 이 일 때문입니까?”
“사경행, 너 도대체 뭘 하려는 게야! 북부 변방이 어떤 곳인지 모르느냐. 수령 인장 요청은 놀이가 아니다. 여태 너는 사가군을 지휘하지 않았고, 나도 널 가르치지 않았는데 네가 그들을 어찌 부리려 하느냐!”
사정은 노발대발했다. 사장조와 사장무의 눈에 음침한 빛이 가득했다. 사가군은 임안후부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다. 임안후의 부와 영광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사장무와 사장조도 무예를 배웠으나 사정은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 사가군을 맡길 뜻이 없었다. 지금 사정이 두 사람을 벼슬길에 올렸다 해도 사경행이 사가군을 부린다면 두 사람은 평생 사경행을 뛰어넘기가 어려워진다.
“그게 뭐 어때서요? 손 가는 대로 하면 됩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사정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된다! 내일 나와 조정에 가 폐하께 분명히 말씀드리자꾸나! 수령 인장은 받을 수 없다고.”
사경행의 표정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 비웃음이 가득했다.
“후야, 수령 인장은 제가 먼저 청한 겁니다. 폐하께 번복하겠다고 말씀드리자고 하는 것은……. 후야, 제 머리가 잘리는 것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그러시면 직접 말씀하세요. 구태여 그렇게 돌려 말씀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사경행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두 눈은 사장무와 사장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두 사람이 좋지 않은 생각을 품었다고 대신 말하고 있었다. 대번에 두 사람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장무가 입을 열었다.
“큰형님, 아버지도 염려하시는 겁니다. 북부 변경은 지세가 복잡해서 만일 사고가 생기면 형님의 안위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도 처벌받으실 거고, 온 사가군이 창피를 당할 겁니다. 앞서나가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사가의 미래도 염두에 두셔야죠.”
사장무는 사경행이 지금 출정하는 건 이상만 비현실적으로 높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으려 해도 세상 물정은커녕 자기 주제도 모르니 망신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장무의 과격한 말에 사정도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은 사장무의 맹비난에도 그를 향한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난 너희가 벼슬에 올라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아 영광이 끝없길 기다리마. 너희 덕분에 사가가 더 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고 후야도 기뻐하실 테지.”
사장무와 사장조는 막 벼슬에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대단한 공훈과 업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사경행은 그들의 능력은 보잘것없으나 사가의 공훈 덕분에 그나마 그들이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풍자한 것이었다. 사장조가 분노해 소리치려 할 때 사정이 크게 외쳤다.
“그만!”
그에 사장무와 사장조는 입을 꾹 다물었으나, 사경행은 오히려 귀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후야,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끝났다면 빨리 나가주십시오. 자야 합니다.”
사정이 지쳤다는 듯 낮게 말했다. 몹시 힘없는 목소리였다.
“경행아, 왜 이렇게 오래 날 미워하느냐? 내 곁에 있기 싫단 이유로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멀리 떠나야만 직성이 풀리겠느냐?”
사정은 불혹의 나이로 수염을 기른 멋진 중년이었다. 무장이지만 거칠고 호방한 심신과 달리 군자처럼 품위가 있었다. 사정을 가리켜 ‘선비의 풍모를 지닌 장수’라 칭했던 것처럼 생긴 것도 빼어났다. 그리고 사가 사람은 모두 사정의 용모를 이어받았다. 사경행과 비교하면 크게 떨어지는 외모지만, 사장무와 사장조도 준수한 편이었다.
옥청 공주는 온유하며 우아했고, 사정 역시 젊었을 때 옥 같은 군자였다. 그 둘의 미모를 그대로 받았되, 성격은 둘을 합친 것보다도 강한 사경행이 태어난 것이었다. 짓궂고 냉소적이지만 풍류를 즐길 줄 알아 하늘 아래와 땅 위로는 그를 어찌할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일을 봐도 마음에 두지 않았고, 오만해서 누구도 안중에 없었다. 이런 용모와 성정은 사실 역사에 비추어보면 걸출한 인물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사정의 양쪽 귀밑머리가 드문드문 희게 새었다.
“아직 날 미워하느냐?”
사정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평소 그는 사경행을 대하면서 화만 내곤 했는데, 지금은 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미워해? 무엇을? 방 씨처럼 심성이 바르지 않은 여인을 가문에 받아들여 그 여자가 기회를 틈타게 만든 걸 미워해? 아니면 옥청 공주가 원한을 품고 죽게 해서 자신이 이 기형적인 저택 안에서 살게 된 것을 미워할까?
사정은 먼저 죄를 지어놓고,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다시 혼인하지 않았고,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다면서 방 씨를 죽여 징벌하지는 않았다. 사경행을 총애한다고 해서 죄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잘못은 이미 발생했고, 옥청 공주도 이미 없는데, 죄악을 어떻게 깨끗이 속죄할 수 있지?
사경행은 사정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예리했다. 위세등등하던 장군이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도 사경행의 결연한 눈빛에서는 흔들림이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사정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저 경시할 뿐이었다.
“후야, 생각이 많으십니다. 어디 그럴 겨를이 있으려구요.”
사경행의 말은 비수처럼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 사정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속이 다 아파 명치를 손으로 눌렀다. 얼굴에 서린 비통함을 가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장무와 사장조는 속으로 환호를 외쳤다. 사경행이 사정을 깊게 상처 입히고, 사정이 사경행에 실망하면 언젠가 두 사람이 사경행의 위치를 대신할 수 있을 게 당연했다.
사정이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출정하거라. 사가군에게 잘 설명하마. 그들이 널 보좌할 것이다. 부에 있는 갑옷, 호심경, 모두 가져가거라.”
사정은 하룻밤 사이 10년은 더 늙은 듯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몸조심하거라.”
사장조와 사장무가 사정을 부축해 나갔다. 문을 나서기 전 사장조가 사경행에게 삐뚜름하게 웃었다.
“큰형님이 적군을 대패시키고 개선해 돌아오시길 축원하겠습니다.”
승리를 축원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사경행이 전쟁터에서 죽길 간절히 바라는 모습이었다.
문이 닫혔다.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등불 아래 언제인지 모르게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주인님, 사장무와 사장조…….”
“됐다. 지금 저들이 죽으면 임안후는 내가 떠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사가군은 임안후의 명령을 듣습니다. 그러니 주인님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겁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사경행은 참지 못하고 냉소를 터트렸다.
“그까짓 사가군, 누가 안중에 둔다고. 공주부는 어떠냐?”
“비밀리에 배치한 사람이 송신 공주마마를 보호할 겁니다. 주인님, 정말로 송신 공주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으실 겁니까?”
사경행이 손을 휘저었다.
“필요 없다. 이걸로 됐다.”
흑색 옷을 입은 남자가 공손히 대답하고 몸을 돌려 떠났다.
등불에 비친 수려한 얼굴이 사나움과 고집스러움을 벗고 온화함을 드러냈다. 옥처럼 하얀 중의 차림의 소년은 속눈썹이 길어 불빛이 그린 듯했다. 그는 눈꺼풀을 드리우며 담담히 웃었다.
* * *
정경성에는 새로운 일이 일어나면 바로 다음 날 여기저기 이야기가 퍼지곤 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이 연루된 일이 있으면 사흘 밤낮으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런저런 일을 재미난 웃음거리로 치부하며 당사자를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벌어진 재미난 일의 중심에는 온 명제에서 주목받던, 군 공로가 혁혁하고 국가를 지키는 장문 가문 심가가 있었다. 즉 위무대장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오랑캐를 평정하고 흉노와 싸웠다. 1년 내내 서북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공로가 있다고 자처하지 않고 거만하지도 않았다.
심 노장군을 시작으로 심가는 혁혁한 공로를 거듭 세워 백성의 명망을 얻었다. 세 아들 중 애석하게도 심신만 그를 계승해 무관의 길을 걸었다. 호랑이 아비에 강아지 자식은 없다고, 심신은 위무대장군의 명성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심신의 적자 심구도 전쟁터에서 용맹스러운 젊은 장수였다.
부자가 이어서 전쟁에 참여했고, 심신은 전쟁터에서 몸을 사리지 않으며 가장 앞에 나섰다. 거기에 용맹한 여장군 나설안과 부부가 되자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명제 백성은 모두 속으로 심신을 존경했다. 심신의 적녀가 부모의 명성을 조금도 이어받지 못하고 머저리라는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적녀가 머저리여도 백성들은 심신을 늘 지지하고 추종했다.
그런 그가 황제를 속이고 윗사람을 기만했다는 죄명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아연실색했다. 황제를 속이고 윗사람을 기만하다니. 이는 가산을 몰수당하는 중형을 선고받을 만한 죄였다.
아침 일찍부터 조정에서 나온 관리들과 관병들이 심부 입구를 에워쌌다. 그들은 증좌를 수집하러 왔다고 밝혔다. 백성들은 심신이 군주를 속이고 기만했다고 들었으나 정확히 무슨 죄명인지, 어떻게 황제를 속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심 장군이 어떻게 폐하를 속일 수 있어? 그렇게 좋은 사람인데.”
“맞아, 지난번 우리 집 아이가 장난치다가 심 부인의 말을 놀라게 했는데 심 부인은 탓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사과도 하셨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인데……. 폐하께서 혹시 무슨 실수를 하시는 건 아닐까?”
“무슨 실수? 듣자니 확실한 증좌도 있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정왕 전하께서 직접 심 장군을 탄핵하셨대.”
“그래, 정왕 전하가 증좌를 위조할 리 없어. 심묘가 예전에 정왕 전하를 사모했다가 치욕을 당한 일이 있지. 그래서 심 장군이 딸을 위해 나서다가 전하에게 그릇된 일을 한 걸 거야.”
“아, 그 말도 가능성 있겠다. 심 장군 일가가 애석하게도 적녀 때문에 큰 해를 입네.”
백성들의 말소리는 작지 않아 부 입구에 서 있는 심묘에게도 또렷이 들렸다. 부 사람들은 모두 입구에 서 있었다. 관병들은 부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뒤지며 수색했다.
심모는 두려워하며 진약추의 뒤에 숨어 심묘를 쳐다보았다.
“심묘, 저 사람들은 왜 백부의 일이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걸까? 너와 무슨 관계라고.”
심묘는 흉악스러운 관병들을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심모의 말을 들었다. 한 번 눈이 멀어 평생 ‘정왕을 사모한 머저리’라는 낙인이 찍혔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심묘가 말이 없는 것을 본 심모는 그녀에게 할 말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심모의 얼굴은 득의만만했다.
“첫째는 어떻게 폐하를 배신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 심가는 충신 집안이다. 이렇게 집안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사람은 필요 없다. 그야말로 심부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렸구나. 장군께서 아직 살아계시면 첫째가 이렇게 가풍에 먹칠을 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으실 게다.”
심 노부인은 심신의 일에 자기가 연루되지 않은 걸 확신한 후에야 안심했다. 그녀는 꼿꼿한 자세로 화를 내며 심신을 욕했다. 심묘가 노부인을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부친도 심부의 일원입니다. 심가와 부친은 한 몸인데 어떻게 부친이 이전에 한 건 모두 무시하고 상관치 않으십니까? 부친께서 폐하께 상을 받고 칭찬받을 때 조모께서는 부친을 심부의 남자다, 심부의 복이다, 하지 않으셨나요? 말은 쏟아진 물과 같은데 이번에도 또 잊으신 듯합니다.”
사람들이 노부인을 쏘아보았다. 위무대장군의 공로가 탁월해 황제가 상을 내릴 때는 노부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망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의 영웅이 되는 법이었다. 노부인은 부귀와 영광은 함께하지만 우환과 재난은 함께할 수 없는 소인배처럼 굴고 있었다. 재난이 있는 걸 보자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심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자르니, 참으로 대단했다.
노부인도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은 걸 의식했다. 순간 부끄럽고 분해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말을 어떻게 이을지 몰라 옆의 진약추를 바라보기만 했다. 심귀와 심만이 조정에 갔으니 이곳을 관리하는 건 진약추였다. 진약추는 미소 지으며 심묘를 달랬다.
“심묘야, 조모 말씀이 어디 네가 말한 그런 뜻이었겠느냐? 조모는 단지 화가 나신 거다.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우리 심부는 지금까지 모두 정직하게 행동했다. 그런데 폐하를 속이고 윗사람을 기만하다니. 만일 노장군께서 지하에서 아시면 네 아버지를 탓하실 거야. 네 아버지가 이런 일을 했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겠느냐?”
진약추가 도움을 주자 노부인은 마음에 든다는 듯 쳐다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렇다. 네 아버지가 잘못을 범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게다.”
심동릉과 만 이낭은 옆에 서 있었으나 끼어들 자격이 못 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조모께서는 제 아버지와 분명히 선을 긋고 저희 일가를 심가에서 쫓아내고 싶으신가요?”
진약추는 심묘의 함정임을 바로 깨달았다. 그러나 말리기도 전에 노부인이 냉큼 미끼를 물었다.
“이런 불초한 자식은 당연히 심부에서 축출해야지.”
“정말 무정하세요. 제 아버지는 지금 감옥 안에 있는데 돕지는 못하실망정 등을 돌리시나요?”
심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개를 숙이고 처량한 표정을 짓는 심묘를 보자 노부인은 한층 기세등등해졌다. 지난가을부터 대방과 관련해서 하는 일마다 순조롭지 않아 속이 답답했는데 오늘 묵혀둔 근심이 싹 사라지는 듯했다. 속이 후련해지자 말투는 더욱 당당해졌다.
“심부는 충신 가문이니 무정하다는 평판을 받더라도 나는 주인어른을 대신해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런 사람을 심가의 사당에 넣을 수는 없다. 오늘부터 심가 대방을 심부에서 축출하겠다.”
노부인은 속이 너무 후련해서 진약추의 안색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심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공공연히 발표하는 것은 아둔함을 드러내는 셈이었다. 이를 지켜보는 백성들은 바보가 아니니 모두들 심부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었다. 진약추는 웃는 낯으로 심묘에게 급히 말을 걸었다.
“심묘야, 조모께서는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단지 아주버니에게 화가 나신 거야. 며칠 후에 조모의 화가 풀리시면 이러시지 않을 게다.”
심모는 모친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묘를 내쫓는 게 아주 이치에 맞는 일인데, 왜 말리시는 거지? 심신은 군주를 속이고 기만했다는 죄명을 등에 졌다. 이전 공로가 커서 목숨은 구해도 반드시 곤경에 처해 고생할 터였다. 쓸모없어진 짐덩이는 부에서 축출당하면 의탁할 곳도 없을 텐데, 당연히 기쁜 일 아닌가?
“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조모께서 이렇게 심가 가풍을 중시하시면서 혈육 간의 정도 안중에 없으시다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갈라서니만 못합니다. 둘로 나뉘면 쌍방에 좋고 심가를 상하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이사는 조금 곤란하니, 병사의 수색이 끝나면 짐을 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떠나겠습니다. 다시는 심가를 모욕하지 않도록.”
거만한 소녀가 가문의 핍박을 받고 화가 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말하는 것 같았으나 공공연히 한 말을 주워 담을 여지가 없었다. 심신 부부는 딸을 아주 귀여워하니 자신들이 입궁한 사이 심묘가 내쫓길 만큼 핍박받은 것을 알면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짐을 쌀 터였다.
이곳에서 이렇게 재미난 일을 구경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대부분은 심 노부인의 태도가 지나치다고 비난했다. 게다가 머저리라고 불리던 심묘는 그 인물이 수려한 데다 남들 앞에서 가문에서 내쫓김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동정심을 샀다. 사람들은 한입으로 심묘를 두둔했다.
진약추는 속으로 놀랐다. 심묘가 더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지금 뭐라 덧붙여도 늦은 듯했다. 이리 많은 백성들 앞에서 큰소리를 냈으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온 정경성이 이 일을 알게 될 것이었다. 심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한 심부가 과연 이익을 얻을지, 진약추는 불안해졌다.
심묘는 요술을 부리듯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노부인으로 하여금 심신을 심가에서 축출하겠다고 제 입으로 말하게 했고, 사람들이 심묘를 동정하도록 몰고 갔다. 하지만 심묘가 도대체 왜 이렇게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심묘는 노부인을 교묘하게 조종해 심신이 심부를 떠나게 재촉하는 양 보였다.
진약추는 심신의 분가로 시끄러웠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노부인은 심신이 재물을 가지고 떠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머무르라고 여러 번 말렸지만, 심신 부부는 듣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다른 주택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일이 터졌으니 분가 문제는 흐지부지될 거라 여겼는데 예상치 못하게 이야기가 흘러갔다. 게다가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니 앞으로 번복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부인은 진약추가 심묘를 도와 인정에 호소하자 불만스러웠지만, 심묘가 심가에 남은 정분이 없다고 말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차갑게 흥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자신을 경시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여종을 데리고 들어갔다. 망설이던 진약추도 심모를 데리고 따라 들어갔다. 만 이낭도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심동릉이 그녀의 손을 놓고 심묘에게 다가갔다. 심동릉이 심묘를 불렀다.
“심묘야.”
심동릉은 뜰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심묘를 불렀다. 심묘가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담담히 대답했다. 심동릉은 연약하지만 온화한 얼굴로 웃었다.
“심묘야, 상심하지 마. 백부는 반드시 별일 없을 거야. 백부는 폐하를 속이고 기만하는 사람이 아닌걸. 결국 진상이 드러날 거야.”
심묘가 표정에 변화 없이 대답했다.
“고마워.”
심동릉은 그제야 좀 더 웃어 보였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모친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칩이 심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동릉 아가씨의 말은 무슨 의미인 건가요?”
심묘와 심 노부인의 한 치 양보도 없는 말다툼은 대방과 심부 사람들의 관계가 벌어진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그런데도 심동릉은 노부인의 책망을 겁내지 않고 다가와 호의를 보였다. 심묘는 말없이 심동릉과 만 이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만 이낭은 주위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고 작게 물었다.
“동릉아, 너 어째서 심묘 소저에게 호의를 보이는 말을 했느냐? 노부인이 아시면 네 아버지에게 말하실 게다.”
심귀는 심신을 증오하니 심동릉이 심묘에게 호의를 보인 걸 알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었다. 심동릉은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들은 심묘를 이길 수 없어요.”
“뭐라고?”
“묻지 마세요. 어서 가요.”
심동릉은 입술을 오므리며 모친을 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심가의 사건으로 백성뿐 아니라 조정도 열기를 띠고 있었다.
높이 용좌에 앉아 있는 문혜제의 안색은 침울했다. 그는 신하들을 보며 상소를 가장 가까운 대신의 얼굴 위로 던졌다. 상소를 얼굴에 맞은 대신은 감히 한마디도 못 하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심신 부부와 심구는 입궁 후 줄곧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터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심신 부부가 문혜제에게 구류당한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구류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없었다. 신하에게 문제가 있으면 황제가 손보는 게 당연했다. 아주 간단한 이치이니 침묵을 지키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오늘 문혜제의 표정은 조금 이상했다.
“평남백, 나와 말해보게!”
문혜제가 평남백 소욱을 지명했다. 신하들의 시선이 분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소욱은 잠시 놀랐지만, 어젯밤 아들 소명풍이 한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소매를 더듬어 상소를 꺼내었다. 앞으로 나아간 그는 상소를 황제 곁의 공공에게 공손히 건넸다. 공공이 즉시 문혜제 앞에 상소를 올렸다.
“폐하, 미신(微臣, 황제 앞에서 신하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은 위무대장군이 겁 없이 함부로 행동하고 황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여깁니다. 폐하께서는 심신을 무겁게 처벌하시어 그의 구족을 멸하소서!”
구족을 멸하라는 말에 소욱과 친교를 맺은 관리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욱과 교류가 적거나 없는 관리들은 몹시 놀란 시선을 보냈다. 소욱은 조정에서 온화하게 행동해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심신의 일에서는 구족의 목숨을 원하다니 너무 심한 처사였다.
상소를 받은 문혜제의 손이 떨렸다. 문혜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소욱을 주시했다.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임안후 사정도 입을 열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심신은 군사를 보유하여 지위를 강화했고, 외부에서 폐하의 명령에 감히 반항했습니다. 모반의 마음이 있지 않나 두렵습니다. 미신도 소 대인의 말에 찬성합니다. 심가의 구족을 멸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정과 소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모두 사가와 소가의 우정이 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심가와 두 가문의 관계는 지독했다. 심신에게 일이 생기자 소가와 사가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달려드는 모양새였다.
문혜제는 두 사람을 깊은 눈빛으로 주시했다. 얼마 전 부수의가 심신을 칠 수 있는 증좌를 올렸기에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전부터 심가를 호시탐탐 노렸지만, 줄곧 기회를 잡지 못해 답답하던 차에 뜻하지 않게 부수의가 공을 세운 셈이었다. 이 일로 적어도 심가의 병권을 몰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즐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조회에서 이를 밝히자 예상과는 달리 신하 모두 심신을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심신은 1년 내내 서북에서 지내기에 조정의 신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다. 문혜제도 심신과 친분이 없는 관리가 많을 거라 짐작은 했으나 이건 도가 지나쳤다. 심신을 너그러이 용서를 해달라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황제의 마음은 의심이 많아 심신을 용서하라고 사정하는 대신이 많으면 심신이 사적으로 신하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의심할 터였다. 그러나 심신을 탄핵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안심할 것이었다. 모반의 마음을 가진 신하가 이렇게 많은 적을 만들 리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신하들이 모두 심신을 탄핵하면 문혜제는 조금 머뭇거리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평남백과 임안후 두 사람이 구족을 멸하라 청하는 순간, 문혜제의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심가뿐 아니라 소가, 사가 역시 문혜제의 마음속 가시였다. 이들 명문세가가 명망과 함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문혜제는 잠잘 때도 불안했다. 문혜제는 황권을 압도하는 가문의 존재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소가와 사가는 한 끈에 묶였고, 다행히도 심가는 이 양가와 물과 불같은 관계였다. 그렇지 않으면 문혜제의 가장 큰 급소가 됐을 것이었다. 소가, 사가의 말에 따라 심가의 구족을 멸하면 명제의 국토에는 양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세가가 없게 된다. 그 참에 양가가 세력을 더욱 키운다면 자신의 용좌는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었다.
문혜제는 처음으로 계속할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는 그저 심신의 병권을 일부 회수하고 심가는 남겨두어서 세 가문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심신을 옹호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그는 머리가 아팠다. 그가 천천히 반문했다.
“구족을 멸하라?”
신하들은 문혜제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나 사정이 오늘 왜인지 몰라도 유난히 목이 더 뻣뻣했다.
“그렇사옵니다.”
문혜제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뜨고는 사정을 노려보았다. 황제의 시선은 사정의 몸을 통과할 정도여서 그의 탐스러운 야심을 꿰뚫어 볼 듯했다. 소욱도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얼굴에 걱정의 빛을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정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젊은 장수 하나가 대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심 장군이 이번에 제멋대로 행동했으나 죽을죄는 아닙니다. 이전에 조정을 위해 공을 세웠으니 속죄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마음이 자애로우시니, 심가군이 여러 해 전쟁터에서 국가를 방위한 걸 생각해서 살길을 열어 가볍게 처벌하시길 희망합니다.”
이 젊은 장수는 심신과 관계가 좋았다. 조정의 정세가 심신에게 불리한 것을 보고 심신을 위해 한마디 한 것이었다. 문혜제는 줄곧 이런 말을 할 사람을 기다렸다. 심신은 어째서 인맥이 그리도 없느냔 말이다. 젊은 장수의 말에 문혜제는 미간에 준 힘을 살짝 풀었다.
“소장군의 말이 옳다. 심 장군이 이번에 죄를 지었으나 지난날의 공로가 있다. 구족을 멸하면 짐이 옛정을 생각지 않는다고 백성들이 비난할 것이다.”
“폐하, 절대 안 됩니다! 심 장군은 폐하를 속이고 윗사람을 기만했으니 장래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릅니다.”
소욱은 무릎을 꿇었다. 사정도 질세라 합류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두 사람이 계속해서 강하게 나오자 문혜제의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지도 않고 젊은 장수와 문무백관에게 말했다.
“심 노장군이 세상에 있을 때 선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심가는 여러 대에 걸쳐 충신이었고 위무대장군 심신은 대단히 용맹했다. 작년 서융을 참패시켰고 공을 세웠으니 속죄한 셈이다. 짐은 폭군이 아니다. 구족을 멸하라니……. 심신 일가는 얼마나 무고한가!”
“폐하, 영명하신 판단이시옵니다.”
젊은 장수가 얼른 무릎을 꿇었다. 문혜제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짐은 심신을 징벌해야 한다. 명령을 전달하라, 심가군의 동호부(銅虎符, 동으로 만든 호부)를 회수하고 심신의 1년 녹봉을 삭감한다. 심가군의 정예군은 어림군(御林軍)에 합병하고 나머지는 이동 명령을 주어라!”
사람들은 숨을 들이마셨다.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문혜제는 심가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않았으니 잔인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호부를 빼앗았으니 온화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동호부는 삼군의 명령권을 의미했다. 장군에게 동호부를 잃는 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과 같았다. 심가군의 정예군이 어림군에 합병하고 나면 남는 건 취사병뿐이었다. 여러 해 병력을 배양한 심신은 황실에만 좋은 일을 한 셈이 되고 말았다.
대신들은 속으로 걱정했다. 문혜제가 이렇게 대범하게 말한 것은 사람의 목숨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신은 재난을 피했지만 위무대장군은 빈 껍질만 남게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큰일을 간단히 처리할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휘하에 싸울 수 있는 병사가 없는 종이 사령관으로 변했으니 심신은 분노로 이성을 잃을지도 몰랐다. 심가의 명성을 남긴 건 기타 명문세가와 서로 견제하여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원하는 바를 이룬 문혜제는 조금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이만 마치지!”
문혜제는 소매를 털고 떠났다. 곧 연금된 심신 부부와 심구는 구류에서 풀려날 것이었다. 그러나 심신 부부는 나오자마자 병권을 박탈당할 터이니 축하할 만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소욱은 무릎 위 흙을 털고 일어났다. 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사정의 곁으로 가 속삭였다.
“방금 어찌 된 일인가? 어째서 갑자기 말을 더했나?”
소욱은 소명풍의 말을 들었기에 심신을 탄핵했을 뿐, 친한 친우인 사정에게 흙탕물을 튀길 생각은 없었다. 사가가 직면한 정세는 자신들보다 더 복잡했기에 사가를 연루시켜 잘못되면 소욱은 자신을 죽일 듯 자책할 것이었다. 그래서 소욱은 자신과 교류가 있는 다른 동료에게는 이 일을 알려도 사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사정이 그의 말을 동조하면서 자칫 문혜제에게 분풀이를 당할 뻔했다.
사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심신을 도우려는 걸 알아서 나도 도운 걸세. 나는 자네를 위해 도운 거야.”
사정은 조정에서 여러 해 구른 교활한 사람이었다. 심신은 단지 우직하게 전쟁만 할 줄 알았지만, 사정은 조정의 이해관계를 탁월하게 활용할 줄 알았다. 그는 소욱이 상대방과 정반대 방법을 써서 심신을 도우려는 것을 보자 합세한 것이었다. 소욱은 유감스러웠다. 사경행의 기질이 영락없이 자기 부친을 닮은 듯했다.
“맞다. 명풍에게 들으니 경행이 스스로 수령 인장을 요청했다던데 정말인가?”
사정은 또 한번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명풍도 아는구먼. 그래, 맞네.”
소욱은 불가사의했다.
“경행이 혹시 미친 겐가? 북부 변방은 놀러 가는 곳이 아닌 것을……. 자네, 정말 안심하고 보낼 수 있겠는가?”
“내가 안심하면 어떻고 안 하면 어떤가? 경행이 결정한 일에 내가 어디 상관할 수나 있겠나? 지금 난 단지 그 아이의 평안만을 바라네. 이 모두 내 죄의 결과, 난 지금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일세.”
사정은 한탄만 할 뿐이었다.
“사실…… 자네의 잘못도 아니네.”
소욱은 마음이 아팠다. 한 걸음 잘못되면 연이어 잘못되는 법이었다. 당시의 일 때문에 사정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고 불안해했다. 아들과도 친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괴롭다고 여길 정도인데 본인은 더욱 힘들 것이었다. 소욱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화제를 바꿨다.
“듣자니 이번 심신의 탄핵 증좌를 상소한 건 정왕 전하라던데, 오늘 어째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군.”
“폐하께서 그에게 공부 시찰을 보낸 것 같네. 이 결과를 들으면 어떻게 여길는지.”
사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생각을 하겠나? 원하는 물건을 주머니에 넣었으니 사람의 머리를 남겨두든 말든 상관없겠지.”
소욱이 냉소했다. 이런 모습의 소욱을 처음 본 사정은 조금 의아했다.
“그런데 자네 아직 나에게 말하지 않았네. 왜 갑자기 심신을 도우려 했나? 자네, 언제 심가와 교류가 있었어?”
소욱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는 낮은 소리로 탄식했다.
“에효, 어디 내 본의로 그랬겠나? 어제 명풍이 그러더군. 지금 심가는 첫 번째 대상일 뿐, 심가가 사라지면 소가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 * *
조정의 일은 성안에 빠르게 퍼졌다. 백성들은 심신 일가의 생명을 남겨주고 직무만 거둬들인 문혜제의 인자함에 탄복했다. 문혜제가 심신에게 너그러운 처벌을 내렸으니 이전 소문만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 심신의 명성도 과히 낮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관리들은 이번 사건의 득실을 분명히 이해했다. 병권이 없는 심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빈껍데기로 전락했으니 이전의 위풍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심부. 퇴궐한 심귀와 심만이 소식을 전해줬다. 두 사람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그렇게 엄중한 처벌은 아니지만, 대방이 병권을 회수당했다는 결과에 충분히 만족스러워했다. 심신의 명성과 명망이 이미 자기들보다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다.
경칩이 이 소식을 심묘에게 전할 때, 심묘는 막 점심을 먹은 참이었다. 경칩은 헐레벌떡 달려왔으나 심묘의 한가한 모양을 보고 덩달아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병권이 없어도 바깥의 말처럼 그리 큰 문제는 아닌가 봐요?”
심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겁낼 것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