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장 (45/71)

28장

심부 사람들은 문혜제의 처벌이 불만스러웠다. 특히 심 노부인은 심신이 크게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거라 여겼기에 심신의 목숨이 붙어 있단 소식에 몹시 속상해했다. 심귀가 병권 회수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주고서야 그녀는 기분이 좀 나아진 듯했다.

병권이 없는 심신은 세력 측면에서 심귀와 심만보다 못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심가를 볼 때는 여전히 심신의 명성을 가장 우선시했다. 심신의 명성이 사라지니 심가가 예전처럼 위풍당당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노부인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심귀와 심만이 심신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인재였다. 그뿐 아니라 애초에 심신이 지금까지의 업적을 쌓은 것도 다 노장군이 첫째를 편애한 덕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 심신이 곤궁에 처한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을 축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갈라서느냐 하는 문제는 교묘했다.

심묘야 원래도 분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심묘도 더 이상 심부에 조금도 미련이 없었다. 그녀는 홀가분하게 떠나기로 결심했다. 황제가 병권을 회수했고 병권 없는 심가는 확실히 겁을 낼 상대가 아니었다. 만일 계속 이곳에 있으면 심가에는 원수가 적지 않으니 오히려 심신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 그러니 물러나야 했다.

불현듯 사경행이 그녀에게 한 경고가 떠올랐다.

“물러나.”

확실히 지금은 후퇴만이 심가의 유일한 살길이었다. 사경행은 이미 그를 파악하고 있었다.

심신이 부로 돌아오는 날, 심묘는 직접 궁문으로 마중을 나갔다. 궁벽 구석에 세워둔 마차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심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심신과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은 동료 관료들은 어느 정도는 즐거운 마음으로 심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심신이 곤란할 때를 틈타 해를 가하려고 궁 입구를 지키는 셈이었다. 황궁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심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넓은 아량을 베푸는 척하면서 기어코 상대방이 손해를 보게 했다. 혁혁한 명성의 심신이 동호부를 빼앗기고 맥빠진 모양으로 나오니 많은 사람이 기쁜 마음일 것이었다.

심묘는 전생에 적지 않은 손해를 봤으며 그 탓에 더는 명제에서 지켜야 할 체면이랄 게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치욕은 이겨낼 수 있으나 가족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멈춰라.”

그때 밖에서 모경이 낮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거친 바람이 불어 들어 심묘의 눈이 침침해졌을 때, 마차의 발이 갑자기 들렸다. 넓은 마차 안에 한 사람이 더 늘어나 있었다. 놀라 소리치려던 곡우의 입을 경칩이 틀어막았다.

“아가씨!”

모경의 허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는 개의치 않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진홍색 관복을 입은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엄숙하면서도 반듯한 조복이 한층 그 고귀한 미모를 돋보이게 하니 눈을 떼기 어려웠다.

“모경, 물러나라.”

“하지만…….”

모경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경행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과 심묘를 한 마차에 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묘가 조용히 바깥을 향해 말하며 경칩과 곡우를 바라보았다.

“모경,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할 필요가 없다. 너희도 나가 마차 밖을 지키거라.”

경칩과 곡우는 사경행을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사경행과 심묘가 아는 사이임은 맞지만, 친분이 어느 정도인지 말하기는 애매했다. 친밀하다고 하기엔 두 사람은 종종 날카롭게 맞섰고, 적대한다고 하기엔 심묘가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사경행을 몇 번 겪은 경칩과 곡우는 그가 심묘를 해치지 않을 거라 추측했다. 게다가 심묘가 사경행을 그대로 마차 안에 두는 건 무언가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에 경칩과 곡우는 말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마차 안에는 사경행과 심묘 두 사람만 남았다.

“듣자니 어제 조정에서 임안후께서 도움을 주셨다구요. 소후야, 감사합니다.”

심묘의 말처럼 사정은 소욱을 도와 함께 심신을 탄핵했다. 표면상 탄핵이지만 실은 심신에게 살길을 터준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지 몰라도 심묘는 생각 깊고 꾀가 많은 사경행이 모를 리 없다고 믿었다.

심묘가 진실과 거짓이 절반씩 섞인 말을 하자 사경행은 더욱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는 나른한 듯 몸을 뒤로 기대며 양어깨를 살짝 풀었다.

“임안후 생각이지, 나와는 관련 없어.”

심묘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제 마차로 오신 사 소후야는 제게 고맙단 말을 들으러 오신 게 아닌가요?”

그녀는 일부러 ‘제 마차’ 세 글자를 강조했다. 늘 이렇게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찾아오는 사경행의 행동에 짜증이 났다는 의미였다. 그에 사경행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되물었다.

“넌 심 장군을 서북쪽으로 물러나게 해서 나씨 일가를 지키게 할 작정이냐?”

심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일러준 ‘퇴각’의 길을 소극적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명제의 바둑판에서 아직 마지막까지 수를 두지 않았는데, 지금 기선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복수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억압당하는 건 말도 안 되었다.

병권 몰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실 사람들에게야 동호부가 중요하겠지만, 심묘에게는 심신이 가장 중요했다. 심신에게서 군대를 인솔해 전쟁을 벌이는 장군의 기량은 누구도 앗을 수 없다. 심가군을 일으켰던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는 또 다른 군대를 키울 수 있음을 뜻했다.

지금 심가는 병권을 몰수당했지만, 이미 그 심가군 안에는 심원의 사람이자 부수의의 사람이 잠입해 있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언제라도 누군가 뒤에서 불의의 화살을 날리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매번 제대로 방비하자니 피곤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다시 시작하는 게 나았다. 이번에는 깨끗한 군대를 인솔하는 것이다. 더 이상 심가에는 병권이 없지만, 나설안의 친정인 나씨 일가에는 있었다. 나가군의 전투력은 심가군만 못한 데다 국경 수비만 고수하니 전술이 뛰어나지 않아 그동안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지 않았던 것뿐이다.

심묘의 야심은 나가군을 또 다른 심가군처럼 만들어 누구도 모를 비장의 패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황실 사람들은 심신이 다시 병사를 이끌어 반란을 일으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었다. 심묘는 황실 사람이 두 눈으로 똑똑히 이를 보게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밀스러운 생각을 사경행의 예리한 시선에서 숨길 수 없었다. 대국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를 들킨 심묘는 당황했다. 그녀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생각을 알게 된 사경행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전생 명제 역사서에 짙은 먹물로 한 획을 그은 이 비련의 영웅은 자신을 협박할까, 신고할까. 혹은…… 살해할까?

하지만 아마 그럴 기회도 없을 것이었다. 전생에서도 아무리 어려운 때가 오더라도 심묘는 잠깐 놀랄 뿐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곧 북부 변방으로 출정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번 생이 전생의 궤적을 따른다면 사경행은 북부 변방에서 죽을 터였다. 만 개의 화살이 그의 가슴을 뚫을 것이었다. 제아무리 수완이 비상하고 심계가 깊은 사경행도 이 결말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 사경행은 늠름한 외모에도 소년미를 잃지 않았지만, 오늘 입은 진홍색 조복은 그에게 성숙함을 더하고 있었다. 연모의 정을 진작 버린 그녀의 눈에도 사경행은 정말 멋졌다. 전생의 심묘는 궁에서 청년 준걸을 많이 보았으나 사경행에 비견할 만한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그토록 연연했던 부수의의 풍채도 사경행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빼어나게 긴 눈썹, 높고 오뚝한 코. 두 입술은 얇고 갸름한 데다 항상 불그스름해 유혹적이었다. 그의 웃음에서는 사색의 기운이 드러났고 영준하면서도 조금은 냉혹하고 짓궂기도 했다. 오늘따라 검게 빛나는 눈은 다정한 듯하면서도 무정한 듯 빛나 온유한 사람 같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그러나 냉소적이고 장난기 많은 겉모습 아래 어떤 검은 심성이 있는지 오직 그만이 알 것이었다.

심묘가 사경행을 제대로 알았을 때는 이미 황후로 봉해진 뒤였다. 그래서 기껏해야 연회 때 멀리서 본 게 다였다. 당시 젊고 아름다운 남자인 그를 대하는 부수의의 태도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고 애매모호했다. 그러나 그때는 황실이 그를 사지로 내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조금 이상했을 뿐이었다. 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아름다운 소년이 곧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심묘의 시선에 연민이 스쳤다. 자신은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명과 완유가 모두 칭찬한 사경행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다. 전생에 그녀의 아이들은 역사서에서 사씨 세가에 관한 단락을 읽으며 탄식했었다. 소년 영웅이 한창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온 명제가 애도했으니 사경행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고 감탄했었다.

기억을 더듬는 심묘의 표정은 변덕스러웠다. 때때로 경계했다가 때때로 동정을 드러내니 사경행은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광문당 입구에서 심묘를 처음 보았을 때 심묘가 이런 연민의 표정으로 그를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너, 날 동정하는 거야?”

사경행은 심묘보다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보고 심중을 잘 헤아렸다. 심묘는 급히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디 다른 사람을 동정할 자격이 있겠어요?”

사경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손을 내밀어 마차의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궁벽이 심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는 이 깊은 궁전에서 여러 해를 살았고, 지금도 그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오직 복수를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세심하고 진지하게, 마치 벽돌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궁벽을 바라보았다. 그런 심묘를 본 사경행이 입꼬리를 당겼다.

“들어가서 살고 싶어?”

심묘는 당황스러웠다.

“저기서 살고 싶으면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그때, 넌 어떻게 내게 감사를 표할 거지?”

사경행의 말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알쏭달쏭했다. 웃는 얼굴에 더 깊은 감정을 숨긴 듯했다.

“소후야, 만일 이 궁을 불태우실 수 있다면 전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할 겁니다.”

심묘의 대답에 사경행의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난 네가 귀인이 되려고 한다고 여겼는데.”

“전 귀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그런 귀인이 아닙니다. 난 귀인보다 더 존귀한 귀인이 되고 싶어요.”

“황후가 되고 싶은 거야?”

심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조소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얼떨떨했다. 전생에 그녀는 조복을 입고 머리에 봉황 비녀를 꽂은 채 제관 의식을 치렀다. 신하들이 무릎을 꿇고 절했으며 백성들은 모의천하라 환호했다. 그때,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니 높이 기어오를수록 떨어질 때 더 크게 다칠 뿐이었다. 황후는 허명에 불과했다.

“황후가 되는 건 간단해. 황제가 어렵지.”

사경행은 한마디 덧붙였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 지금의 명제는 야심을 펼칠 좋은 시기였다. 아홉 황자는 제각각 장점이 있으며 태자의 위치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옥새가 그중 한 명의 손에 떨어질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관대작은 딸을 황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미래에 거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구하는 법이고, 탐욕은 인간의 본능인 법이다. 한 장군의 공훈을 들여다보면 그 그늘에는 수많은 병졸의 비참한 죽음이 있었다. 이기면 왕, 지면 도적. 여인이 사람을 잘못 선택하면 그 업보도 자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잠시 후 사경행이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넌 누굴 선택할 거지?”

심묘에게 그녀가 보기에 가장 괜찮은 황자가 누구인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지, 누구를 도울 건지 묻는 말이었다.

“소후야가 보기에는 누가 비교적 장래가 밝은가요?”

심묘가 도리어 반문했다.

“그들 면상을 볼 때 아무도 장래성이 없어. 넌 어찌할 거야?”

사경행의 말은 소름 끼쳤다.

“그럼 장래성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요.”

“난 어떤 거 같은데?”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들고 물었다. 그는 심묘를 비웃듯 장난스러웠다.

“소후야도 장래성이 없어요.”

심묘가 진지하게 그를 보았다. 사경행은 순간 목이 메었다. 화가 나진 않아도 불만스러웠다. 사경행이 만난 여자는 모두 그를 좋아했고, 남자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오직 심묘만 그를 좋아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사경행은 자신이 심묘를 너무 부드럽게 대해서 그녀가 자신을 성격 좋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건 아닌지 의아했다.

“소후야,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빨리 끝내고 떠나주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심묘는 예의 바르지 않은 축객령을 내렸다.

“오해? 무슨 오해?”

사경행의 눈에 웃음기가 흘렀다. 그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호색가가 민가 소녀를 희롱하다.”

심묘가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은 채 명쾌하게 대답했다. 사경행의 뻔뻔함을 되돌려준 셈이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두어 번 기침하고는 허리를 곧게 펴서 자리를 잡았다.

“서북으로 물러나는 건 빠를수록 좋아. 시간을 끌수록 심 장군에게 불리할 거야.”

심묘는 사경행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조언 같은 것을 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 역시 그와 맞서고 싶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적의가 없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출발하기 전에 정경성을 떠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거야.”

심묘는 유감스러웠다. 모든 사람에게 사경행처럼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의지하는 배경이 임안후부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안후부를 압도하는 세력 같은데, 명제에서 임안후부보다 더 높은 세력은 황실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황실과 사경행은 대립 중이었다. 심묘는 무엇이 진실인지 꿰뚫어 보기가 힘들어 혼란스러워졌다.

사경행이 갑자기 마차의 발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오는 것도 빠르고 가는 것도 빨랐다. 심묘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사람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주인어른, 주인마님, 큰공자님!”

심묘는 얼른 마차의 발을 들고 내다보았다. 심신 부부와 심구가 성문 모퉁이로 걸어오다가 곡우, 경칩을 보고 멈춘 게 보였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사경행의 종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경행이 민감하고 솜씨가 좋으니 장래 신출귀몰한 도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나설안이 빠르게 걸어오자 심묘는 마차에서 내렸다. 며칠 못 본 사이 심신 부부와 심구는 많이 초췌해졌다. 심묘는 황실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 처벌을 선고받지도 않은 사람을 연금해 사람의 의지를 꺾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심신 집안은 모두 장군이라 그런 수작질에 의지가 흔들릴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만 심묘 혼자 부에 남겨 놓았으니 그녀를 걱정하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설안이 심묘의 손을 잡아끌며 얼굴을 살폈다.

“교교, 요 며칠 널 난처하게 만든 사람은 없었니?”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설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구가 끼어들었다.

“교교야, 어째서 부에 있지 않고 이곳에 와 있는 거야?”

“부모님께서 오늘 부로 돌아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마차가 없을까 걱정해서 마중 나온 거야.”

심묘가 살짝 웃었다. 심신이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쪽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눈치챘다. 조금이나마 굴욕을 줄이기 위해 심묘가 잘 판단한 것이었다. 딸이 대견했지만, 동시에 처와 자식을 잘 보호해야 하는데 자신은 동호부를 빼앗긴 무력한 처지라는 게 더 크게 와닿았다.

심신은 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나설안은 심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며 심묘를 끌고 마차로 들어갔다. 경칩과 곡우는 뒤쪽의 마차에 타 앞 마차에는 심묘 일가만 있었다.

“어머니,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심묘가 물었다. 나설안이 머뭇거리다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해였어.”

“동호부를 빼앗겼는데, 어떻게 오해예요?”

심묘의 말에 심구는 자기도 모르게 심신을 바라보았다. 동호부를 빼앗겨 가장 분노한 사람은 심신이었다. 그도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몰랐다. 유일한 가능성은 심가군 안에서 문제가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심신이 성의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을 어긴 일을 문혜제가 알 리가 없었다.

“동호부를 뺏긴 건 별거 아니야. 동호부가 없어도 전쟁을 할 수 있어. 네 아버지는 여전히 장군이야. 우리는 이전처럼 지낼 수 있단다.”

나설안이 심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딸이 불안을 느낄까 걱정이었다.

심묘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심신과 심구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위무대장군의 적녀라 여태 도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 배경이 없어졌다는데 대갓집 소녀가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전쟁을 할 수 있다구요? 심부 사람을 데리고 전쟁하실 건가요? 취사병을 데리고 전쟁을 하실 건가요?”

나설안과 심신은 당황했다. 온화하고 착하던 심묘에게 신랄한 말을 듣자 조금 믿기지 않았다. 심신의 안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장군의 긍지는 어떠한 모욕도 허용하지 않았다. 문혜제가 그에게 생명은 남겼으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었으니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물론 동호부 없이 전쟁을 할 수 있으나 폐하께서 부장, 종장, 군사, 감수를 파견하실 겁니다. 명령을 내려 실행할 때 그들의 안색을 살펴야 하고 군의 이동 명령도 다른 사람의 호부를 빌려야 하니, 장군의 이름이 이젠 빈 껍질에 불과하지 않나요?”

심묘의 눈은 더없이 맑고 투명해서 자신과 일절 상관없는 다른 집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조정의 일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기세등등한 심묘를 심구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심신이 주먹을 꽉 쥐고 심묘를 위로했다.

“교교, 나는 무죄를 증명할 것이니 심가군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거라. 네 신분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게다.”

심신은 평생 군에 세운 공로에 어느 정도 기대어 말했다. 그는 명제 안에서 사정 외에는 그와 용맹을 비교할 사람이 없다고 믿었다. 칼을 깊숙이 넣어둬야 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결국 다시 칼집에서 뽑을 날이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가 되면 어림군과 합병된 심가군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충성심을 보일까요? 지금 아버지의 지휘 아래에도 첩자가 생겼는데, 후에…… 더 많지 않을 거라 누가 보증하겠어요?”

나설안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교교, 누가 네게 이런 걸 일러주었니?”

심신이 동호부를 뺏긴 것과 심가군이 어림군으로 흡수된 일 같은 건 심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두 다 아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가군 안 첩자의 일은 절대 바깥에서 들을 수 없는 종류였다. 심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은 적어도 조정 일을 꽤 연구했을 것이었다. 나설안은 심묘가 위험한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심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 바보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제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제가 반드시 모르는 건 아니죠.”

“맞아요, 어머니. 교교는 아주 똑똑해요.”

심구는 이전 예친왕의 일로 심묘의 능력을 확실히 파악했다. 심묘는 평범한 규방 소녀가 아니며,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책략가였다. 심구마저 심묘를 두둔하자 심신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교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심가군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에요. 필요가 없어졌으니 심가군은 그냥 버리면 어떨까요?”

“교교!”

나설안이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그러나 말투가 너무 호되다 느꼈는지 얼른 부드럽게 말했다.

“심가군은 네 아버지가 직접 키웠단다. 그 안의 심복과 수족이 셀 수 없이 많아. 버리는 게 어떻게 쉽겠느냐? 전쟁터에서 모두 생사를 함께한 전우인데, 그건…… 불가능하겠구나.”

“그럼 아버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렇게 참으실 건가요?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시기를 기다리자고요? 하지만 승세를 잡은 사람들에게 계속 억압당하면 최후에는 무엇도 남지 않을 거예요.”

심신이 심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사람처럼 주시했다. 그의 얼굴에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교교,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기느냐?”

“동쪽이 밝지 않을 때는 서쪽이 밝을 거예요. 아버지는 심가군을 잘 인솔하셨으니 다른 부대 역시 훌륭하게 인솔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심묘의 눈빛이 놀랄 만큼 밝게 빛났다. 심신은 바로 크게 웃으며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에 한결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과연 다 자라지 않은 젊은 아가씨로구나. 그러나 천하에 어디 그리 많은 군대가 남아 있겠느냐?”

심신의 말끝에는 은은한 슬픔이 묻어 있었다. 심가군은 심신에게 강보에 싸였을 때부터 손수 키운 아이와 같았다. 지금 그 자식을 빼앗긴 것과 같으니 그 아픔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그럼 나가군은요?”

심묘는 담담히 웃었다. 심신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설안과 심구는 무언가 생각한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외조부께 정식으로 편입되지 않은 임시병이 있지요. 이전 심가군만 못하지만 사람 수는 적지 않아요. 심가군보다는 못하겠지만 천천히 키워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나설안의 친정 나씨 일가도 장군 가문이었다. 그러나 쇠락해가고 있었다. 서북쪽에서 심가군이 주둔해 지키자 할 일이 없어진 소춘성 나가군의 장졸들은 분분히 갑옷을 벗고 농사를 지으러 돌아갔다. 군인이라 칭하긴 하지만 군량과 급료도 없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니 그들은 보통 백성과 다르지 않았다.

심가는 오랫동안 황실에 충정하고 애국했다. 황제를 위해 전력으로 복무하는 건 거의 본능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심묘의 말은 대역무도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가 모르는 곳에서 병사를 기른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교교, 이건 장난이 아니란다.”

나설안은 황실에서 남몰래 병사를 키우는 일을 얼마나 금기시하는지 설명해주기 위해 진땀을 뺐다. 막상 입에 담으려니 젊은 아가씨인 심묘가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그 모습에 한동안 말이 없던 심구가 입을 뗐다.

“교교야, 나가군으로 심가군을 대체할 생각이야?”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대체라고는 할 수는 없지. 어쨌든 아버지는 장군이니 곁에 아무도 없을 수는 없어. 병사들이 당연히 있어야지. 심가군든 나가군이든 큰 차이가 있을까. 나가군은 스스로를 지킬 패가 되어줄 테니 좋지 않겠어?”

반역의 말임에도 스스로를 지킨다고 말하니 듣기에 그렇게 섬뜩하지 않았다. 나설안은 오늘 심묘의 말이 상식적으로 짧은 시간 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다. 미간을 찡그린 심신이 진지하게 심묘의 말을 생각하는 것을 보자 더욱 머리가 아팠다. 잠시 후 심신은 심묘를 바라보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교교, 말은 듣기 좋으나 나가군은 멀리 소춘성에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려고?”

심묘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보았다.

“그건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해요. 시도할 수 있을 거예요. 폐하께 서북으로 물러가 소춘성에 가서 주둔해 지키겠다고 자원하는 거예요. 가까운 시일 내에 즉시 출발하겠다구요.”

세 사람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소춘성은 서북 국경지대 작은 성으로 정경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신이 이 요구를 꺼내면 다들 동호부를 빼앗긴 위무대장군이 절망하여 변경의 작은 지역으로 물러나는 것이라고 여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위무대장군의 명성은 역사 속에 천천히 파묻힐 것이었다.

심신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범의 기운을 담아 맹렬하게 소리쳤다.

“이렇게 물러나는 건 안 된다!”

때를 기다리며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도 물론 한 가지 방법이지만, 문제는 자신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자신은 이미 마흔 살이 넘었다. 그러니 함부로 변방으로 물러나는 건 위험했다. 영웅의 말년은 대부분 세상 가장 비극적인 법이다. 자신 역시 만약 적당한 기회에 정경성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씨 일가 사람을 훈련하는 국경 수비에만 머물러야 했다. 원대한 포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심묘 역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부모와 형제를 마주했다.

“잠시 굽힘으로써 미래를 도모한다. 병법에도 나오는 건데 아버지는 무엇이 두려우세요? 한 번 넘어져 다시는 못 일어날까 두려우신가요? 한 번 물러났는데 또 물러날까 두려우신가요?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는데 고난을 떨쳐낼 수 없을까 두려운 거세요?”

심묘의 말은 심신의 마음을 바싹 조였다. 심신뿐 아니라 나설안과 심구도 멍해졌다. 심신은 심묘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는 연약한 모습의 딸에게서 자신이 물려준 뼛속 깊이 새겨진 강인함과 거만함을 보았다. 심묘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가볍게 웃었다.

“2년 안에 폐하는 반드시 아버지를 수도로 다시 부를 거예요. 정경성으로 돌아오는 날이 출세의 때입니다.”

* * *

심부 서원에 등을 밝혔다. 심귀와 심만이 무슨 일인지 살짝 알아보려 했으나 심신이 심복에게 서원 입구를 지키게 해서 모기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도 엿들을 수 없었다.

심구가 심묘에게 차를 한 잔 내주었다.

“교교야, 천천히 말해봐.”

심신과 나설안, 심구는 전쟁터의 사람이었지만, 심묘는 지금까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아가씨였다. 정경성 여느 세가의 소저들처럼 북방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에서 응석받이로 자랐을 뿐이었다. 전쟁은 변화무쌍해서 배후에 연루된 세력은 보기보다도 더욱 복잡해 파악하기 어려웠다. 노련한 장수도 분명히 보지 못하는 것을 어린 심묘가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심묘의 말은 논리 정연했다. 심신 부부는 그녀에게 두려운 눈길을 보냈다.

“심가군을 버리고 나가군을 키운다니. 심가군은 정예군이야. 그러나 나가군은…… 어떻게 심가군보다 좋을 수 있겠느냐?”

나설안은 부친이 키워온 병사들의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말하자니 조금 슬펐다.

“나가군은 산병(散兵)이긴 하지만 내부 관리가 잘되어 깨끗하다 할 수 있어요. 반면 심가군에는 이미 내부 첩자가 있지요. 그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다가는 누가 등 뒤에 칼을 꽂을 수 있다구요.”

세 사람은 침묵했다. 줄곧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기리라 여기며 고생스럽게 키운 병사 안에 첩자가 있다니 정말로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교교의 말은 나도 생각했던 바다.”

심구와 나설안이 동시에 심신을 바라보았다. 심신은 이제 의심하는 기색을 완전히 떨치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칭찬의 빛이 은은히 떠 있었다.

“우물쭈물하면 환난을 입는 법이다. 교교, 네가 마차에서 2년 안에 반드시 폐하께서 나를 정경성으로 부를 거라 말했는데, 무슨 의미냐?”

심구는 고개를 돌려 심묘를 보았다.

“맞아. 교교야, 어떻게 폐하께서 2년 안에 아버지를 다시 수도로 부를 거라는 걸 알아?”

심묘의 말을 보면 누군가 황제의 심리를 추측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설안은 긴장했다. 황제의 마음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문혜제의 사람일 것이었다. 혹시 부수의인가 싶어 나설안은 불안했다. 나설안은 심묘가 황위 쟁탈이라는 흙탕물에 발을 담갔다가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저울추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심묘는 눈꺼풀을 드리웠다. 문혜제는 2년 안에 심신을 수도로 부를 것이었다. 명제의 조공 때문이었다. 북에는 진국, 서에는 대량이 있어 중간에 낀 명제는 매우 위험했다. 2년 후, 문혜제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고, 태자는 병 때문에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며, 주왕과 리왕은 크게 다투게 된다. 게다가 부수의는 숨기고 있던 큰 그물을 점점 풀 것이었다.

심신은 충성스러운 무장이니 문혜제는 반드시 적국을 위협하기 위한 용도로 그를 이용할 것이었다. 황실은 심가군을 억압했어도 여전히 여지는 남겨두었다. 전생에서처럼 황실은 심신을 마지막까지 쥐어짤 속셈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심묘는 이런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의아한 시선과 마주한 심묘는 살짝 미소 지었다.

“현실 같은 생생한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2년 안에 아버지는 재기해요. 위무대장군의 명성은 더럽혀지지 않아요.”

억지스럽긴 했으나 심묘는 온화하게 말했다. 눈은 맑고 투명해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순 있어도 마음은 절로 편안해졌다.

2년 안에 정경성으로 다시 불릴지 말지는 누구라도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2년도 좋고, 3, 4년도 괜찮았다. 일단 서북으로 물러나는 건 확실히 좋은 방법이었다. 재기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황위 다툼이 격렬할 때 병권 없이 심가가 수도에 남아 있다간 힘도 없는데 괜히 그 다툼에 연루되지 않을 거라 보장할 수 없었다. 신속히 물러나는 게 이치에 맞았다.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족을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심신은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교교, 네가 꿈을 꿨다는 말을 믿는다. 그 꿈은 반드시 진짜가 될 거야. 난 널 믿는다.”

그는 이유를 따지는 대신 한번 더 반복해 말했다.

“난 널 믿는다.”

이 말에 심묘는 자칫 눈물을 흘릴 뻔했다. 전생에서 자신은 한사코 부수의와 혼인하려 했고 심신은 온 힘을 다해 막았다. 하지만 자신이 혼인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고 협박하자 심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불호령을 내리던 오만한 장군이 맥 빠진, 무척 유감스러운 표정을 무의식중에 드러내던 순간이었다.

“네가 선택했으니 널 믿으마.”

그리하여 심가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그 처참한 지난날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버지, 내일 폐하께 소춘성으로 물러나서 지키겠다고 말씀드리세요.”

나설안은 놀라 되물었다.

“내일? 그렇게 빨리?”

“그래야 폐하께서 아버지가 동호부를 빼앗긴 불만에 울컥했다고 여길 뿐, 더 많은 생각을 하시지 않을 거예요.”

심묘의 설명에 심구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심신이 한마디 했다.

“그렇게 하마.”

“당신!”

나설안은 다급했다. 심묘의 말이 이치에 맞아도 이렇게 큰 일을 급히 결정하는 건 너무 경솔했다. 그러나 심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과 나는 그리 오래 전쟁터를 종횡무진했으나 막상 교교보다 사태를 분명히 보지 못한 것 같소. 교교가 남자라면 천하에 비교할 사람이 있겠소?”

심신은 심묘를 보았다. 시선은 복잡했지만, 그는 손을 내밀어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묘도 조용히 부친을 응시했다. 평범한 규방 소녀라면 오늘 심묘가 한 말을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심신은 거친 무장이어도 똑똑했다. 그는 이미 딸에게 여러 의문이 생겼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도 심묘는 회귀의 비밀을 말할 수 없을 테지만, 이건 묻고 답하는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가족 간에 아무 조건 없는 신뢰로 딸을 믿는 것일 터였다. 전생의 심신이 줄곧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듯 이번 생도 마찬가지였다.

“심가는 잘될 거예요.”

심묘가 보증하듯 말했다.

“아비가 내일 상소를 올리마. 부인도 일찍 쉽시다.”

심신이 웃으며 나설안을 끌고 일어났다. 뭐라 더 말하려던 나설안은 심신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심신은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무거운 표정을 지은 것은 여러 해 동안 보지 못했다. 만민에게 존경받던 영웅이 병권을 박탈당하고 변경의 작은 지역을 고수하게 되었으니 심신보다 더 울적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나설안은 혼인 후 거의 처음으로 유순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부축했다.

“그래요.”

심구가 심묘를 보며 입을 여러 번 뻐끔거렸다. 결국 결심한 듯 그가 심묘를 불렀다.

“교교야, 아버지께 모반을 일으키시라고 권하는 거야?”

심가에서 심구가 가장 분명하게 심묘의 뼛속 깊이 숨어 있는 거센 기운을 보았다. 예친왕이 심묘를 탐내자 그녀는 예친왕부에서 단 한 명도 살려주지 않는 식으로 돌려주었다. 형가 사람이 그녀의 사람을 모해하자 그들은 시체도 찾지 못하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황제가 심가의 동호부를 빼앗았으니……. 물러나는 이 모습은 정말 단순히 심가를 보호하려는 걸까 싶었다.

심묘는 담담히 웃었다.

“나라의 녹을 받으니 황제에게 충성해야지. 심가는 지금까지 군주에 충성하고 애국했는데 그런 일을 어떻게 꾸미겠어? 오라버니가 생각이 많은 거야. 벽에 귀가 있어 새어 나가면 나와 오라버니에게 말썽이 생길 거야.”

“알겠어. 교교야…… 바보짓은 하지 마라.”

심구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심묘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반란, 지금 당장에라도 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악명이 남지 않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일단 급한 일은 재난을 피하는 것. 하지만 곧 황실에 큰 선물을 보낼 계획이었다. 황실이 그 선물을 먹어치울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 * *

심신이 병권을 뺏긴 일로 정경성은 하루를 떠들썩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 일은 다음 날 새로운 소식으로 덮이고 말았다. 명제에는 새로운 일이 끝없이 발생했으니 이런 경우가 빈번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시장에 전해져 골목마다 떠들썩하게 한 것은 또다시 심신의 이야기였다.

위무대장군 심신은 동호부를 뺏기고 바로 다음 날, 문혜제에게 심가 호위를 데리고 소춘성으로 가도록 윤허해주십사 상소를 올렸다. 혁혁한 명성의 대장군이 자발적으로 작은 변경 지역으로 가려고 하자 백성들도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의 자발적 상소는 분명 문혜제의 징벌에 울컥해 불만을 품고 결정한 것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이야기꾼들이 정연하게 읊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문혜제는 안색이 변해 상소를 심신의 얼굴로 던졌다. 그렇지만 심신은 어리석고 둔하게도 소춘성에 물러가 지키겠다고 고집스레 요청했다. 문혜제는 마지못해 허락했는데, 심신이 자신을 큰 공로도 헛일로 치부하는 군주라고 여긴다고 느끼는지 노한 기색을 지우지 않았다.

이야기꾼들의 활약으로 위무대장군이 내일 수도를 떠나 소춘성으로 간다는 소식을 온 정경성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모두 삼삼오오 모여 심신의 이야기를 떠들었다. 어떤 사람은 심신이 병사를 잃어 수도에 남아도 답답할 테니 차라리 멀리 가서 지겨움을 더는 게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심신이 너무 오랫동안 높은 곳에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비아냥거렸다. 황제를 속이고 윗사람을 기만해놓고도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동조하며 문혜제가 자비롭지 않았다면 더욱 무거운 처벌을 했을 거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 * *

쾌활루. 계우서가 턱을 받치고 고양을 바라보았다.

“심신은 무슨 의도인 거지? 정경성을 벗어나 심가군도 상관하지 않겠다니?”

“정말 그렇다면 판단이 빠른 셈이군. 무모한 행동을 하는 군인은 아닌걸. 신속하게 물러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자넨 왜 말이 없는가?”

고양은 차를 마시며 침묵하는 사경행에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사경행이 두 사람을 보았다.

“심가의 행동이 너무 빨라.”

계우서는 사경행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빨라?”

사경행은 찻잔을 가지고 놀며 담담히 웃음 지었다. 그가 심묘에게 가르쳐준 길은 심가의 퇴각로였다. 하지만 심가의 행동이 이렇게 빠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심신은 여태 안정을 좇는 사람이었다. 그런 심신이 이렇게 짧은 시간 내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면 심묘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게 분명했다.

문혜제는 심신에게 짐을 꾸려 내일 떠나라 명했다. 표면적으로는 황제가 심신을 난감하게 만든 셈이지만, 황제는 심가의 어린 여자아이가 자신의 다음 행동을 이미 완전히 예측해 벌인 일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를 것이었다.

사경행은 명제라는 큰 바둑판에서 심묘가 세운 수가 좋은 위치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수도를 떠나는 자신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계우서는 나와 함께 떠나자. 고양, 나머지는 너에게 맡길게.”

계우서는 코를 문지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좋지. 이곳 요리사가 만든 간식은 도저히 입에 안 맞았거든. 3형네 요리가 좋지. 오랜만에 포식하겠어.”

고양은 그런 계우서에게 눈을 흘겼다.

“정경성에서 늘 먹느라 바빴던 자네가 언제 배를 곯았다고?”

그 말을 끝으로 고양은 사경행을 정중하게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게. 이곳은 내게 맡기고.”

사경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 소식은 일파만파 전해졌다. 심가는 정경성의 대가족으로 심가와 왕래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심신의 명성에 기대어 아첨하는 관리도 많았다. 사람이 곤란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려들어 공격하기 마련이다.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따르던 자도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고. 차가 식으면 사람이 떠나는 것처럼 심신이 병권을 잃고 수도를 떠나게 되자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심신 곁에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몇몇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심묘는 광문당으로 향했다. 정경성을 떠날 예정이니 광문당에는 앞으로 다닐 수 없을 것이었다. 심묘의 성격이 변한 후 광문당 학생들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했으나, 심가의 병권이 회수된 일을 알게 되자 다시 태도를 바꾸어 크게 수군거렸다. 심묘는 들리지 않는 척 담담히 있었다. 그 탓에 놀리는 재미가 없자 그들의 관심도 자연히 수그러들었다.

풍안녕만이 심묘를 보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녀는 울며 심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떡해, 심묘야. 너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까?”

심묘는 풍안녕의 눈물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생에는 아둔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심묘와 진심으로 친구가 되길 원하는 귀족 소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현생에서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관심을 두어 누구에게나 냉랭하니 호감을 살 일이 아예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안녕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좀 거만하기는 해도 나쁜 마음은 없는 풍안녕을 보며 심묘는 종종 완유를 떠올렸다.

심묘는 침착함을 되찾고 풍안녕을 위로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올 거야.”

“거짓말! 아버지께 들었어. 심 장군이 이번에 폐하를 노하시게 했다며. 폐하께서 분노하셨는데 어디 그리 빨리 돌아올 수 있으려고……. 심묘, 도착하면 꼭 내게 편지를 써야 해. 네가 돌아온다 해도 그때 나는 이미 시집을 갔겠지?”

풍안녕은 흐느끼며 울었다. 심묘는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다행히 우느라 붉어진 풍안녕의 눈을 본 덕분에 웃음을 참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전생의 풍안녕과 풍씨 세가의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2년 후, 풍가는 와해될 터였다.

심묘는 풍안녕의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마. 난 네가 시집가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 거야.”

풍안녕이 뭐라 말을 하려고 할 때 책을 든 배랑이 가까이 다가왔다. 남색 도포를 입은 그는 심묘에게 말을 걸었다.

“심묘, 따라오십시오.”

심묘가 광문당을 떠나니 선생인 배랑과 작별인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풍안녕은 마지못해 심묘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심묘는 배랑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배랑은 심묘를 데리고 광문당 뜰, 정확히는 자신의 집으로 갔다. 광문당 선생들은 모두 학당 안에 주택이 있었다. 배랑은 가장 가까운 서재로 향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떠나는 건가?”

배랑은 평소처럼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랑의 표정이 변했다.

“류형 소저의 일은…….”

심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류형 소저는 이미 적당히 안배했으니 걱정 말아요. 그녀는 자수 점포의 주인 노릇을 잘하고 있어요. 그녀의 양면 수는 출중하니 앞으로는 그 손재간에 기대 남의 눈총을 사지 않고 살아갈 테죠. 어쩌면 제자도 몇 거둘 수 있을 거예요.”

배랑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그는 심신 일가가 수도를 떠나니 류형의 일이 처리되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가 마음을 놓자 이번에는 심묘가 그의 표정을 주시했다.

“선생님이 고려하고 있는 일은 어떤가요?”

배랑은 당황했다. 심묘가 말한 ‘고려하고 있는 일’이란 당연히 그가 부수의 곁에서 심묘의 밀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쾌활루에서 배랑은 어떻게 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보겠다며 결정을 보류했었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2년. 2년 안에 전 반드시 수도로 돌아올 겁니다. 그때 선생님은 꼭 정왕 전하가 가장 의지하는 막료가 되어 계셔야 합니다.”

배랑은 웃었지만 웃는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심묘, 너 날 너무 높게 보는구나. 난 일개 서생으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요행히 정왕 전하의 곁에 잠입해도 어떻게 가장 의지하는 막료가 되라는 거지?”

“지나치게 자신을 낮출 필요 있나요? 선생님은 뛰어난 인재이시니 당연히 높게 평가받을 겁니다. 설령 재주가 부족하대도 대단한 재주를 가진 이로 보이면 될 일입니다.”

심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의 시선은 도전적이었다.

”선생님께서 못 하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지요. 그 배 지주의 옛일을 류형 소저에게 알려주는 건 어떨지, 또…… 제가 한 모든 일의 배후가 선생님이라 말하는 건 어떨지 궁금하네요. 선생님, 류형 소저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까요?"

“너!”

배랑은 분노했고 그보다 초조해졌다. 심묘의 말은 분명 협박이었다. 부수의의 오른팔이 되지 못하면 류형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겠다는 뜻이었다. 류형은 그때의 일로 불만을 품고 있으니 배랑이 배후에 있다고 알려주면 그녀는 분노해서 다시 보향루로 돌아갈 것이었다.

“난 지금까지 너처럼 독하고 교활한 여인을 본 적 없구나.”

심묘는 스승을 존경하거나 도리를 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배랑은 심묘가 매번 그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단 기분마저 들곤 했다. 그녀의 도발과 위협은 배랑을 난처하게 했다. 보기에 온순하며 수려한 젊은 아가씨의 피부 아래에 차갑고 단단한 마음씨가 있다는 걸 누가 알까? 심지어 그녀는 깊은 저택 내에서 음흉한 짓을 서슴지 않는 부인보다 더 비정한 기질을 갖고 태어난 듯했다.

“선생님, 농담을 잘 하시는군요. 제 상황이 곤란하여 어쩔 수 없이 발버둥 치고 있을 뿐입니다. 활로를 모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누가 구해주겠어요.”

심묘는 겸손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보기에는 선생의 훈계를 받아들이는 제자 같았다. 그러나 그 직후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소매 안 물건을 꺼내 배랑의 소매 안으로 넘겼다. 부드러운 손가락 끝이 그의 팔목 위를 더듬었다.

배랑은 당황했다. 잠시 후 날아오르는 나비의 날갯짓 같은 감각이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제야 배랑은 뭐 하는 짓이냐며 팔을 빼려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소매 안에는 편지 비슷한 게 들어 있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묘를 쳐다보았다.

“류형 소저의 자수 점포 위치에요. 선생님께서 시간이 나신다면 당연히 가서 보셔도 됩니다. 그 외 다른 간단한 일도 몇 가지 적혀 있으니 2년 안에 선생님께서 잘 따라 해주시길 바랍니다.”

배랑의 몸이 굳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자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심묘, 넌 내가 네 꼭두각시가 될 거라 여기는 거냐?”

“선생님께서는 학자답게 지식이 풍부하고 성정이 강직하시죠. 그러니 저는 선생님께 탄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에게는 이런 수단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심묘가 고개를 들었다. 배랑의 분노한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그러나 선생님, 선택의 여지가 있으십니까? 선생님께서 원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류형 소저에게 옛일을 말할 방법이야 차고 넘치니까요.”

그녀의 웃음은 온화했지만 말투는 날카로웠다. 이쯤 되니 배랑은 화는 둘째치고 가슴이 다 답답했다. 늘 심묘 앞에서는 선생으로서의 존엄을 갖추지 못했다. 매번 화를 내려 하다가도 득의만만한 심묘의 표정을 보고는 화도 내지 못했었다. 전생에 대체 심묘에게 무슨 빚을 졌길래 지금 이렇게 독촉을 당하는지. 그는 굴욕감을 겨우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적힌 것에 따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는 거냐?”

“전 선생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심묘는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 편지에는 부수의가 추후 몇 년 동안 할 일이 적혀 있었다. 부수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야심이 없어 보이지만, 비밀리에 식견이 탁월한 사람을 끌어모았다. 어떤 수완으로 끌어모으는지, 어떻게 총명한 사람을 고르는지 심묘보다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배랑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재능을 드러내면 분명 부수의의 마음에 들 것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부수의의 신뢰를 얻으려면 한 걸음씩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심묘는 편지에 배랑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부수의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부수의의 신임을 얻는 건 배랑 스스로 방법을 찾아봐야 할 일이었다.

이것도 심묘가 배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믿음이었다.

전생에 부수의와 배랑은 한배를 탔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뛰어난 배랑을 먼저 발견해 등용하고 낙인을 찍어뒀다. 이번 생에서 부수의는 가까운 사람에게 배반당할 때 느끼게 되는 고통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었다.

심묘는 배랑을 힐끗 바라보았다. 갑자기 힘이 다 빠지며 지쳐버렸다. 이야기할 것은 다 했으니 이제 떠나야 했다. 그때 배랑이 그녀를 잡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한마디 뱉었다.

“심묘, 건강하거라.”

“고마워요.”

심묘는 조금 의외라고 느꼈으나 담담히 대답했다. 홀로 남은 배랑은 복잡한 시선으로 심묘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배랑의 집을 나온 심묘가 화원을 지날 때 그곳에 하얀 찹쌀경단이 서 있었다. 그는 심묘를 보고 눈이 환해져 달려왔다.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심묘 누나!”

소명랑이 경단처럼 굴러 왔다. 사실 그는 올해 열 살이었다. 늦둥이로 태어나 가족들이 너무 오냐 오냐 한 탓인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형 소명풍과 달리 소명랑은 대여섯 살 아이처럼 어려 보였다. 그는 몇 걸음 뛰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심묘가 그의 앞으로 가서 그의 통통한 팔을 붙들었다.

“왜 그래?”

“심묘 누나, 떠날 거예요? 저 얌전히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리면 되지요?”

심묘는 어리둥절했다. 모든 사람이 심신의 소식을 접한 후 가장 먼저 건넨 말은 언제 오느냐는 것이었다. 모두들 심신이 이렇게 가면 소춘성에서 쉽게 돌아오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소명랑은 심묘가 돌아오길 기다릴 거라고 말했다. 그는 심묘가 반드시 정경성에 돌아온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흥미를 느낀 심묘는 그의 이마를 누르며 일부러 못되게 말했다.

“누가 내가 돌아올 거라 말한 거야? 어쩌면 나 영원히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소명랑이 고개를 들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누나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심묘는 소명랑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명랑의 눈빛은 확고했다. 조금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사가 형님이 누나는 반드시 2년 안에 돌아올 거랬어요!”

소명랑은 폴짝폴짝 뛰었다. 사가 형님이란 소리에 심묘는 머리를 굴렸다. 사경행.

“아버지와 형님은 누나 일가가 떠난 후 언제 올지 모른다 말했어요. 아버지는 심 장군님이 이번에 폐하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폐하께서 평생 심 장군님을 불러들이시지 않을 거랬는데.”

어린아이인 소명랑은 자신이 한 말이 심묘에게 상처를 주는지 마는지 알지 못하고 거리낌 없이 떠들었다.

“그런데 사가 형님이 소명풍 형님을 보러 왔을 때 심 장군님이 2년 안에 반드시 정경성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했어요!”

사경행이 자신의 심중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심묘는 소름이 돋았다.

“사가 형님은 마음이 나쁘고, 날 괴롭히고, 우리 형도 괴롭히고, 우리 아버지도……. 하지만 형님의 말은 정말이니까! 형님이 누나가 돌아올 거라 말했으니 반드시 돌아올 거지요? 심묘 누나, 돌아오는 것이 맞지요?”

소명풍은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부명이 생각난 심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네 말이 다 맞아. 난 돌아올 거야.”

“잘됐다! 그럼 난 이곳에서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누나가 오면 같이 탕후루랑, 찹쌀가루를 묻힌 경단이랑, 떡을 먹어야지.”

소명랑이 뛰어오르며 짧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심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소명랑과 함께 하면 안 좋은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런 근심 없는 때로 변하는 듯했다.

“네 아버지 말씀을 잘 듣고 있어. 그리고 내가 돌아오는 일과 오늘 너에게 한 말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듣고 소문을 내 문혜제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실마리를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이 계획을 아는 사람 한두 명은 내버려 둘 수 있어도 그 수가 많아지면 위험했다.

“알겠어요. 누나랑 한 말,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소명랑은 심묘의 엄숙한 표정 보고 바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심묘 누나, 누나도 이 말을 사가 형님에게 하면 안 돼요. 몰래 들은 거라서. 사가 형님이 내가 몰래 들은 것을 알면 날 또 때릴 거예요.”

소가의 둘째 공자님 눈에는 우아한 공자 사경행이 영 심보가 못된 도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말 안 할게.”

* * *

심신 일가는 그날 밤 내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부로 돌아오자마자 심 노부인에게 분가하겠다고 통보했으니 더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심신 부부가 궁에 불려 갔을 때, 부 입구에서 심묘와 노부인이 한바탕 논쟁했던 일이 심신의 귀에 들어갔다.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 해를 가했다는 사실에 심신은 노여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설안은 과거 자신의 눈이 얼마나 삐었기에 이런 이들을 진심으로 아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심신은 병권을 빼앗겼어도 기백은 남아 있었다. 그가 고집을 부리면 되돌릴 여지가 없었다. 가문의 장로는 미처 오지 못했으나 족인(族人, 성은 같으나 유복친 안에 들지 않는 일가)은 심신 일가의 분가 회의에 참석했다. 심 노장군은 임종 전 일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지내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결국은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심 노부인은 가녀일 때 주로 써먹던, 울며 억지를 부리는 재주를 꺼내서 막무가내로 노장군의 주택과 토지 대부분을 차지했다. 심묘는 이를 굳이 막지 않았다. 오랫동안 심부에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상점과 토지는 이전처럼 수확이 좋지 않을 터였다. 멀리 떨어진 소춘성으로 떠나면서 이처럼 까다로운 것을 남기면 오히려 번거로울 뿐이었다.

심신에게는 은자가 모자라지 않았다. 황제가 매년 적지 않은 하사품을 내렸기 때문이다. 심 노부인은 공동 자금 장부에서 심신과 관련된 은자의 행방을 깨끗이 처리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심묘가 다른 장부를 찾아왔다. 그 장부에는 여러 해 동안 공동 자금에 심신이 보탠 은자가 오롯이 적혀 있었다.

과연 노부인의 행적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족인들 앞이라 계속 발뺌을 할 수 없던 심 노부인은 결국 은자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얼마를 돌려받든 상관없었다. 심신과 나설안을 깔본 노부인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임완운이 손을 떼고 진약추가 집안을 관리하기 때문에, 진약추 역시 분통이 터졌다. 안 그래도 은자가 부족한데 심신에게 일부분을 돌려줘야 한다니, 앞으로 조금이라도 은자 순환이 순조롭지 않다면 노부인은 반드시 자신에게 분풀이할 게 뻔했다.

심모도 화가 났다. 근래 모친이 은자를 구하느라 몹시 애쓰는 모습을 봐서인지 심모의 가치관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그녀는 고고하고 자신만만해 은자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지금은 은자에 아주 목을 맸다. 그러나 족인 앞에서 뭐라 하기 어려워 심묘를 보며 걱정하는 척했다.

“심묘야, 이렇게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듣자니 소춘성은 물자가 모자란다더라. 먹고 쓰는 것이 안 좋으면 장래에 건강이며 외모며 다 엉망이 될 거야. 은자를 많이 챙겨가도록 해.”

심모의 말은 심묘가 빈곤한 지역으로 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나설안이 발끈해 한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 심묘가 가볍게 웃었다.

“맞아. 그런데 정경성은 물가가 아주 높지. 앞으로는 폐하의 하사금도 없으니 심모 언니는 이전처럼 돈을 헤프게 쓰면 안 될 거야. 우리 아버지도 언니에게 팔찌를 주지 않을 거니까.”

심묘가 심모의 팔목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심모는 멍하니 자신의 팔찌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팔찌는 심신의 하사품 중 하나였다.

심심이 작년 노부인의 생일 연회 때 심묘의 처지를 직접 보고 눈을 뜨기 전까지, 그는 매년 하사품을 공동 창고에 채웠다. 심모는 그중 예쁜 장신구를 서슴없이 고르곤 했다. 심묘는 자신을 비웃은 심모에게 그녀가 착용한 팔찌가 심신의 물건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준 것이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심모의 뺨을 때리는 격이었다. 하지만 심모는 자신의 체면보다도 값비싼 팔찌가 더 중요했기에, 수모를 당해도 결코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심묘는 심모의 마음을 알아챈 듯 미소 지었다.

“언니에게 팔찌를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 선물한 물건을 돌려받을 수는 없지. 게다가 언제 다시 이렇게 좋은 팔찌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잖아?”

심만의 안색이 안 좋게 변했다. 심묘의 말은 심만의 능력으로는 이렇게 좋은 하사품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앞으로도 심만은 벼슬길에서 평생 심신이 도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심묘를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돌아가자.”

심만은 진약추와 심모를 데리고 심묘에게 작별인사도 고하지 않은 채 떠났다. 심신은 병권도 없는 데다 이제 수도를 떠나니 형제의 정 따위를 더는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심만은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더는 눈길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심신에게 인사했다.

“형님, 동생은 먼저 물러갑니다.”

그는 소매를 털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만 이낭은 심동릉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납작 엎드린 모습은 지난 십수 년간 다를 바가 없었다.

심귀라는 사람은 감정을 억누를 줄 모르며 재능은 그의 아들 심원만 못한 이였다. 아첨만이 재주라면 재주였다. 정도 없고 의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심만처럼 단단하고 질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쓴맛을 당하고도 곧잘 잊으니 무서워할 가치가 없었다.

심구가 골을 냈다.

“이게 무슨 가족이야.”

심묘는 살짝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악인에게는 당연히 악인의 고통이 있는 법이다. 2년 안에 심원백은 천연두로 죽을 것이었다. 이미 임완운이 심귀에게 불임약을 먹였을 테니 남은 평생 이방에게 다시 아들이 생길 리 없었다. 돈과 권력, 미인만 있으면 뭘 할까. 가업을 이을 아들이 없을 텐데.

세상의 세 가지 불효 중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였다. 그러니 노부인은 앞으로 두 아들에게 자손을 이으라고 더더욱 재촉할 터였다. 진약추의 근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었다. 문제 많은 심부에 남은 그들이 과연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 * *

심신이 소춘성으로 물러나는 일이 부수의의 귀에 전해졌을 때는 이미 문혜제가 허락을 한 뒤였다. 이제 와 뭐라고 말하기엔 너무 늦었으나 그렇다고 흘러가는 상황을 보이는 대로 믿을 수도 없었다. 부수의는 심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수상쩍은 부분이 많았다. 안정을 추구하던 심신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부터 낯설었다. 게다가 늘 황제의 명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는데 고작 동호부를 빼앗겨 분이 가라앉지 않는 게 다음 날 바로 급히 정경성을 떠나겠다는 상소를 올린 이유라고? 불가능했다.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부수의는 예전에 심원이 한 말을 떠올렸다.

“심부의 심묘를 얕보지 마소서.”

당시 부수의는 심원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다시 한번 이 말이 떠올랐다. 심신의 결정에 심묘가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었다. 수도에서 응석받이로 자란 아가씨가 어째서 나서서 서북의 빈곤한 지역으로 가려는 걸까.

부수의는 민감하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러나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일이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의 안색이 변하자 곁에 있던 막료가 물었다.

“전하, 위무대장군의 일로 걱정하십니까? 일이 예상과 달라지긴 했으나, 심가군은 이미 흩어졌고 동호부도 회수해서 위무대장군의 효용은 크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행동하셔도 될 듯합니다.”

부수의는 막료의 말을 받아들여 의심을 접었다. 심신이 자신의 계획에 작은 오류를 만들었으나 그는 더는 중요한 바둑돌이 아니었다. 심묘가 자신을 사모한다고 난리를 칠 때는 심신이 중요한 바둑돌이 될 수 있었겠지만, 심묘가 마음을 비웠으니 심가를 한배에 태울 기회도 사라졌다.

그러나 부수의는 오히려 한시름 놨다고 안도했다. 만약 심묘와 혼인했다면 심가의 병력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을 것이었다. 뼛속 깊이 거만한 그가 이런 오점을 용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그가 생각한 가설도 심신 일가가 정경성을 떠남으로써 자연히 버려졌다.

“자네는 사람들을 모으러 가게나.”

막료는 두 손을 맞잡고 부수의에게 인사했다. 부수의는 시선을 옮겼다. 대국이 이미 시작됐으니 천하 쟁탈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었다. 짧은 시일 안에 많은 인재를 끌어모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 * *

심신은 다음 날 일찍 정경성을 떠났다. 그들은 해도 밝지 않은 이른 아침에 몰래 출발했다. 교류가 있던 동료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신을 배웅하는 건 문혜제와 대립하는 것과 같았다. 황제의 마음은 변덕스러우니 심신을 배웅했다고 분풀이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춘성과 정경성은 멀리 떨어져 있어 길을 재촉해야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빨리 달리는 말을 채찍질해도 반년의 시일이 지나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심신은 심가군을 뺏겼으나 따르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사적인 심복들도 있었다. 심구의 수하가 있었고, 모경이 있으며, 아지도 있으니 가는 길에 위험을 만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심묘가 이런 장거리의 고된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불편해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심묘는 피곤해도 절대로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심신은 줄곧 심묘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역시 내 딸답구나. 아주 심지가 굳어. 정경성 어느 집안의 여식도 우리 교교 같지는 못할 거야.”

나설안은 심신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심묘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유약한 아가씨에게 고된 여정은 힘들 것이었다.

경칩이 마차의 발을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멀리 여행을 가게 된 그녀는 늘 주변을 둘러보길 좋아했다. 그녀는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켰다가 숲속 산토끼를 가리키며 몇 번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러나 심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놀랄 일이었다.

“아가씨는 어째서 이런 것들을 신선하다 느끼지 않으세요? 성에서 못 보던 것인데.”

경칩의 질문에 곡우도 의아해하며 심묘의 안색을 살폈다.

“아가씨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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