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십몇 년 생활한 고향을 떠나 들어본 적도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소춘성은 화려한 정경성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변경이었다. 낯설고 힘들 테니 어떤 아가씨든 고향에 대한 미련을 드러낼 텐데, 심묘는 시종일관 아주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 조금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데 즐거워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의아해하는 나설안의 시선을 느낀 심묘는 잠깐 당황했지만, 바로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모두 곁에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겠어요? 정경성의 심부 사람들은 가족으로 칠 수도 없어요.”
마차 밖 스치는 경치를 바라보며 웃는 딸의 모습에 나설안은 한층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번에 그들은 심부 사람들의 추한 얼굴을 보았다. 오랫동안 심묘를 그들과 두며 잘 지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심묘는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가족으로 여겼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설안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맞다. 교교는 앞으로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와 함께할 테니, 누구도 감히 괴롭히지 못할 거다.”
심묘는 나설안의 품에 기댔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아 눈 속의 차가운 기색을 갈무리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길은 고독한 법이다. 전생의 그녀가 진국에 인질로 갈 때 이국의 풍경도 지금과 같았다. 애매하긴 하지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명제에서 진국, 진국에서 명제로 가는 두 번의 길은 매우 적막했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 그녀는 스스로 대의를 성사시켜 천하의 백성을 위했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우습고 하찮게 보는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니며, 돌아올 때도 반드시 혼자가 아닐 것이었다.
아득한 산길에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산길에는 식당과 여인숙이 없어 농가에 하룻밤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농부 일가는 친절한 성격으로 낯선 방문객들도 환영했다. 그들은 약간의 술을 내오며 안주도 준비해주었다.
심신 일행은 다음 날도 길을 재촉해야 해서 감히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술을 마셔 혹여나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심묘는 기분이 좋은 듯 농가에서 제조한 매화주를 마셨다. 매화주는 달콤해서 사람을 취하게 했다. 몇 잔 마시자 심묘의 뺨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교교, 어째서 이리 많이 마셨니?”
나설안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심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태연히, 아니 조금은 몽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설안이 얼른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아가씨가 이 술의 도수가 높은 것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담근 매화주는 처음에는 달지만 뒤늦게 취해요. 우리 집 아이도 매번 흠뻑 취한답니다. 자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다음 날 숙취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농가 여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설명을 듣고서야 나설안은 안심했다.
“교교도 취한 날이 올지 몰랐네. 정말 재밌네요.”
심구는 심묘의 취한 모습이 조금 웃겼다. 작년 말 정경성에 돌아가자 심묘는 갑자기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진중하며 온화한 면모를 보고 여러 번 놀라길 거듭했다. 예전의 심묘는 예의를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아가씨 같은 면모가 있었는데, 지금의 심묘는 노련하고 신중해서 어떨 때는 오히려 심묘가 누나 같다는 착각이 들곤 했다. 지금 술에 취한 그녀를 보자 예전의 어리숙했던 심묘가 떠오른 심구는 그녀가 더욱 친근해졌다.
“고얀 녀석. 네 동생이 취해서 이렇게 됐거늘, 넌 뭐가 좋다고 웃느냐!”
심신이 심구를 가볍게 걷어찼다. 심구는 얼른 혀를 내밀면서도 용서를 비는 척했다. 그들은 왁자지껄 유쾌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난 이들 특유의 실의나 유감은 찾을 수 없었다.
심묘는 두 손으로 턱을 받쳐 눈을 가늘게 뜬 채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매화주에 취하긴 했지만,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오늘은 아주 즐거운 날이었다. 계획이 딱딱 들어맞았다. 그렇잖아도 심신은 정경성 멀리, 소용돌이 밖으로 떠나야 했다. 1년 후에 정경성에 천연두가 퍼지기 때문이었다. 전생에도 천연두로 인한 탈은 없었으나, 그녀는 가족이 조금의 위험도 무릅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복수보다 가족이 먼저였다.
한바탕 즐거운 식사는 밤늦게야 끝이 났다. 친절한 농가 주인은 넉넉하게 방을 안배해줬다. 나설안은 심묘와 한방을 쓰려고 했으나 심묘는 농가 담 밖의 방에 혼자 자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자려 하는 딸의 모습에 심신은 마음이 불편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서둘러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취했기 때문인지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왜 그 방에서 자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심신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농가 여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담 밖의 꽃을 보고 싶은 것 같네요. 눈 덮인 땅에 핀 저 꽃은 아름다워서 소녀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답니다. 부인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지역에는 산적이나 강도가 없답니다. 안심이 되지 않으면 외부에 휘장을 걸고 호위 몇 명이 지키게 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 말대로였다. 심신 부부와 심구는 담 밖의 방 가까이에 하얀 꽃밭이 있음을 발견했다. 겨울에 핀 매화가 달빛 아래 흔들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심구는 화도 나고 우스워서 심묘의 코를 잡았다.
“응석꾸러기, 과연 교교라 불릴 만하구나. 취해서도 풍경이 좋은 곳을 찾다니.”
나설안은 심구의 손을 살짝 쳐냈다.
“함부로 교교를 괴롭히지 말거라. 나와 같이 자길 원치 않고 먼 곳에서 자려고 하니 됐다. 모경과 아지에게 휘장을 걸고 지키도록 해라. 경칩과 곡우는 시중을 끝내면 나가고.”
이 농가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아지와 모경 둘이 바깥에서 지키면 충분했다. 또한 구조가 정경성의 주택과 같지 않아 침실과 바깥 사이 방이 하나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그 방 작은 침상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나설안과 심신은 무지막지한 주인이 아니기에 경칩과 곡우에게 침실 바닥에서 자면서 심묘를 시중들라고 하지 않았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의 옷을 갈아입힌 후 세수까지 해준 다음에 방을 나왔다. 침실의 바깥에는 휘장을 걸었다. 모경과 아지 외에도 몇 사람을 더 불러 차례로 야간 경비를 설 준비를 하게 했다. 경칩과 곡우가 그들에게 아가씨를 잘 지켜달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풍경이 아름다운’ 작은 방에 심묘만 남았다. 침실에 누워 있던 심묘가 갑자기 일어났다. 매화주의 뒷심이 지금 솟아나려 하고 있었다. 심묘의 맑은 눈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비틀비틀 창문으로 걸어가다가 탁자에 부딪혀 사납게 넘어졌다.
그때 단단한 팔뚝이 그녀를 부축했다. 심묘는 그 팔에 안기며, 상대방의 담백한 향기를 희미하게 맡을 수 있었다. 익숙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쯧쯧, 이렇게 내 품에 뛰어들다니.”
심묘는 그의 허리를 안으며 간신히 몸을 세웠다. 그녀는 상대의 몸이 굳은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남자는 방 안의 등불을 켰다. 농가 창문은 목재로 만들어졌고 백지도 붙이지 않았기에 방에 등불을 켜도 밖에서 보이지 않았다. 호위들은 방에 수상한 남자가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희미한 등불 아래, 남자의 얼굴이 충분히 보였다. 눈처럼 하얀 여우 모피 피풍의, 진홍색 비단 옷차림. 붉은 입술, 흰 치아, 검은 눈동자. 금의야행(錦衣夜行,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다닌다는 뜻)에 걸맞은 수려하며 품위 있는 태도. 사경행이었다.
“사경행?”
멍한 심묘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사경행의 몸에 기댔다. 사경행의 몸을 거의 껴안은 자세였다. 그에 사경행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심묘를 얼굴을 관찰하며 놀랍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으, 얼마나 마신 거야? 일부러 배웅하러 왔는데 술꾼을 볼 줄은 몰랐는데.”
심묘가 바로 반박했다.
“당신이 취했겠지.”
“됐어. 나라는 걸 알자마자 말대답하는군. 안 취한 거 아니야?”
사경행은 심묘를 부축해 침상으로 옮겼다. 등불도 가까이 가져왔다. 심묘는 흰 중의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눈을 반쯤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평소 영리하며 평안한 모습과 전혀 달라 딴사람 같았다. 정말 섬세하고 유약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사경행은 그녀의 얼굴을 매섭게 꼬집었다. 잔뜩 화가 난 심묘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제 나이답게 구는 모습을 처음 본 사경행은 더욱 재미를 느꼈다. 불현듯 술에 취하면 진담을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는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묻기로 했다.
“난 누구지?”
“사경행.”
심묘가 빠르게 대답했다.
“사경행은 어떤 사람인데?”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릿느릿 눈살을 찌푸릴 뿐, 입은 열지 않았다. 사경행은 그녀의 시선이 기이했다. 이 여자애가 속으로 욕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심묘가 갑자기 웃었다.
“절색의 훌륭한 인물!”
사경행은 당황했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깊은 눈빛으로 심묘를 주시했다.
“너 술 취한 척하는 거 아니야?”
“사가 소후야, 소년 영웅, 천고의 인물, 한창때…….”
심묘의 뒷말은 점점 작아졌다. 사경행은 의심스럽긴 했지만, 심묘가 연기하는 것은 아닌 듯해 기묘하다고 여겼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네. 날 사모하는 거 아니야?”
사경행은 심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심묘가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옆으로 치웠다. 사경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심묘를 희롱하는 것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심묘가 취해 그에게 천고의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 심묘를 희롱하는 건 조금 재미가 없었다.
“널 한번 보려 온 건데, 이렇게 취했다니 됐다. 이렇게 인사하지.”
사경행이 떠나려고 했을 때, 심묘가 침상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심묘를 부축해 일으키려던 사경행은 순간 뻗던 손을 멈추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서두르지 않고 심묘가 바닥에서 발버둥 치는 걸 한참 감상했다.
“정말 네게 지금 모습이 어떤지 보여줘야 하는 건데.”
취해 눈앞이 핑핑 도는 듯 심묘는 몸도 가누지 못하니 스스로 일어설 리 없었다. 바닥에서 한참 발버둥 쳐도 일어나지 못했다. 사경행은 큰 자비를 베풀어 그녀를 부축해 침상에 앉혔다. 순간, 심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공공, 불꽃놀이가 보고 싶구나.”
고요한 밤에 심묘의 말소리는 유달리 또렷했다.
“이 공공, 불꽃놀이를 보고 싶구나.”
방 안에서 타오르던 등불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사경행의 입꼬리가 천천히 풀어졌다. 부드럽던 눈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몸을 구부려 침상에 앉은 심묘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벼운 동작이지만 눈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너 뭐라고 했어?”
심묘도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등불 아래 그녀의 눈은 맑고 투명했다. 취기에 젖은 두 눈은 풋풋한 아가씨를 성숙한 부인처럼 보이게 했다. 심묘는 부드럽고 도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눈앞의 환관에게 자신을 부축하라 명령했다.
“이 공공, 불꽃놀이가 보고 싶구나. 가서 태자와 공주를 불러오너라.”
태자와 공주라는 말에 사경행은 심묘를 팽팽히 주시했다. 그의 그림같이 수려한 용모는 웃을 때는 봄철의 꽃과 가을밤의 달처럼 매력적이지만, 웃지 않을 때는 적적한 깊은 물처럼 위험했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다가 결국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눈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사경행은 가볍게 심묘의 턱을 들어 올렸다. 호색가가 할 법한 동작도 그가 하자 우아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칠흑같이 어두운 눈은 그 속에 담은 사람을 익사시킬 듯 매서웠다.
“심묘, 황후가 되려는 게냐?”
심묘가 눈을 깜박이며 사경행을 보았다.
“그건 본래 내 거야.”
“네 거?”
“응, 내 것.”
사경행이 심묘의 턱을 잡은 양 손가락을 느리게 죄었다. 턱이 아파진 심묘는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어린데, 황후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구나. 야심 있는 여자가 가장 아름답지. 하지만 넌 아직 여자가 아니야.”
그의 말은 불명확했고 시선은 위험했다. 심묘도 사경행을 보았다. 맑은 달빛, 흔들리는 매화꽃, 두 사람의 그림자. 아름다운 풍경에 위험하고 모호한 분위기가 뒤덮였다.
그녀가 평범한 소녀라면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는 일에만 마음을 쓰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숨기고 한 걸음 한 걸음 천하로 나아갈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야심이 있음은 진작 예상했으나 취한 그녀에게 진심을 들으니 의외였다.
이 아가씨는 가시나무 같았다. 머저리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으로, 장군의 적녀에서 권세를 잃은 천금으로 변했다. 보기에는 온순해 보여도 맹수처럼 용맹한 시선, 온몸에 흐르는 고귀한 기운, 그리고 도도한 성격은 사경행의 눈을 피해 숨길 수 없었다. 여러 해 높은 자리에 앉은 듯한 존귀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불꽃놀이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방울 소리처럼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지금은 꿈에 불과할지라도, 그녀의 기세는 황후에 다다를 기세라고 칭할 수 있었다. 아직은 어린아이지만 몇 년이 지나 자색과 재능이 만발하게 되면 정말 천하를 아우를 기백과 도량이 넘쳐날 듯했다.
사경행이 심묘의 턱을 잡은 손을 느리게 풀었다. 그녀를 흘끗 본 사경행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다시 떠나려 할 때 심묘가 웅얼거렸다.
“소이자, 내 피풍의를 다오. 춥구나.”
사경행은 ‘이 공공’에서 ‘소이자’로 변했다. 생각이 좀 복잡했는데 심묘가 이렇게 끼어들자 그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 명령하는 거야?”
“추워.”
심묘가 억울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묘를 잡아서 깨울까 생각했다가 자신의 피풍의를 심묘에게 던졌다. 심묘는 그의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면 내가 네게 비단을 몇 필 하사하마.”
총애가 끝없는 모양이었다. 사경행은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마마의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미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때, 심묘가 사경행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늘밤 심묘는 아주 이상했다. 사경행은 심묘가 취하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술 취한 틈을 타 심묘를 괴롭히려고 했으나 도리어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천하 사람 앞에 당당한 사가 소후야를 태감처럼 다루다니…….
심묘는 사경행의 소매를 끌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결국 사경행이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 심묘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녀는 소매를 놓고 이번에는 사경행의 옷깃을 잡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행동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심묘가 웅얼거렸다.
“예전 전조에 과부살이 하는 공주가 있었는데 면수(面首, 여자처럼 곱게 생긴 남자)를 거뒀다지. 폐하께서 내게 잘해주시지 않으니 나도 남편이 죽었다 여기고 면수나 찾지 뭐.”
사경행은 ‘면수’란 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뒤 문장을 들으니 심묘의 말은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그는 심묘를 주시했다.
“넌 꿈에서 총애를 잃은 폐후인가 봐?”
“총애를 잃은 게 아니야! 남편이 죽은 거야!”
심묘가 그를 쏘아보았다. 사경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애를 잃었다고 남편을 죽으라고 저주하다니 넌 독한 황후구나.”
“너의 얼굴이 참 잘생겼구나. 새로운 면수인가?”
심묘는 사경행의 독한 말에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사경행이 심묘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 전조의 공주가 용모 아름다운 면수를 찾았다더구나. 내가 초상화를 본 적 있는데, 너보다는 못했어. 네가 나를 따르면 나는 네 남은 평생,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해주마.”
심묘에게 면수라고 불린 것만으로도 사경행은 놀라 몸을 떨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더욱 가관인지라 그는 기겁했다. 심묘가 자신을 총애받는 남총(男寵)으로 여기는 건가 싶었다. 그가 얼이 빠져 멍해 있을 때 옷깃을 잡은 심묘의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순간, 부드러운 것이 입술에 닿았다. 차가운 작은 입술이 사경행의 입술을 핥고 물어뜯었다. 입안에 감미로운 매화주 맛이 확 들어왔다. 심묘가 손을 풀고 다정하게 사경행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사람이니라.”
사경행이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당장에라도 심묘의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바로 그때 바깥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모경이 움직이고 있음을 사경행의 사람이 알려주는 신호였다. 사경행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심묘를 바라본 후 나는 듯 가볍게 밖으로 나갔다.
아지가 문을 열어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본 후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도 없는데.”
“착각했나 봐.”
모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으로 덮인 땅에서 흔들리는 매화 사이, 진홍색 비단옷을 입은 준수한 사경행이 서 있었다. 침착한 얼굴 위에는 거북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철의가 그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주인님,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신 듯한데……. 방금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심가 소저와 작별인사를 했을 텐데 어째서 이상해 보이는 건지 철의는 의아했다.
사경행이 웅얼거리며 물었다.
“철의, 네가 보기에…… 같은…….”
사경행의 뜻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철의가 다시 물었다.
“무엇과 같으시다는 건지?”
사경행은 이를 갈았다.
“됐다. 가자.”
* * *
다음 날 이른 아침, 하늘이 희끄무레할 때 경칩과 곡우가 심묘의 시중을 들러 침실에 들어왔다. 심묘는 침상에 잘 누워 있었지만, 이불은 온데간데없고 여우 털로 만든 피풍의를 덮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경실색했다. 없던 피풍의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경칩이 다급히 심묘를 깨웠다. 심묘는 정신을 차린 후 여우 털로 만든 피풍의를 보며 흐리멍덩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를 썼다.
매화주의 뒷심은 대단했지만, 농가 여주인의 말처럼 일어났을 때 숙취는 없었다. 그러나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닌데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홀로 자겠다고 고집한 것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곡우는 눈처럼 하얀 피풍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씨, 이 모피는 어디서 난 건가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가씨께서 어제 술에 취해 이곳에 둔 의상 상자에서 꺼내신 건가요? 그런데 저 피풍의는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경칩이 탐색하듯 말했다. 어젯밤 심묘는 이 안에서 나간 적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호위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니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이 여우 털로 만든 피풍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가져가 농가에 물어봐. 그들의 것인지.”
그녀들은 여우 털로 만든 피풍의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농가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좋은 피풍의는 우리 집에 없습니다. 아가씨께서 잘못 기억하시나 봐요.”
심구는 피풍의를 만졌다.
“이 피풍의는 보통 품질이 아닌 것 같은데. 교교야, 어디서 얻은 거야? 바느질도 화려한 게 비싸 보인다. 그런데 재단은 별로네. 네가 입기에는 큰 것 같아.”
심묘는 피풍의를 보자 답답했다. 그녀 자신도 대체 언제 이런 피풍의를 얻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심구의 말처럼 값이 꽤 나갈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 생각났어. 예전에 사두고 여태 잊고 있었네. 경칩, 네가 보관하거라.”
경칩은 심묘가 언제 산 피풍의인지 고심하다가 얼른 대답한 후 피풍의를 보관하러 갔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피풍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소춘성에서 은자를 사용할 곳은 많을 터였다. 지금 심신은 예전만 못하니 정말 어려울 때 피풍의를 은자로 바꾸면 되겠다고 여겼다.
시간은 늘 빠르게 흘러갔다. 다른 곳에서 다른 풍경을 보는 건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했다. 소춘성은 멀리 있어 가는 도중 높은 산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거쳐야 했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질퍽했으나 고생스러워도 사람들은 피곤하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심신에게 잔류한 심복들은 길에서 동고동락하며 더욱 친밀해졌다.
2월에 수도를 떠난 그들은 8월 초가 되고서야 마침내 소춘성에 도착했다. 소춘성은 명제의 변방에 있는 아주 작은 성이었다. 성안의 제일 높은 관리는 진수 무장 나수, 나 대장군이었다. 나수의 보호 아래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며 즐겁게 일했다. 그러나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나 대장군의 직무가 좋은 일이 아님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군인들마저 거의 흩어지고 없기에, 나씨 가문은 소춘성 내에서만 명성을 떨쳤다.
나설안이 품에서 나가의 요패를 꺼내자 성문 수비가 옷깃을 여미며 경의를 표했다. 그는 사람을 나씨 가문으로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심가에서 이렇게 사람들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오자 주위로 백성들이 몰려들어 이것저것 물었다. 그들은 나씨 가문의 출가한 딸이 일가를 데려온 것을 알고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경칩이 마차의 발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이곳이 바로 소춘성이에요.”
심묘도 몸을 기울여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춘성에서의 생활은 정경성 귀족 여인들의 말처럼 그리 감당하기 어려운 건 아닐 것이다. 변방의 작은 지역이지만 그 나름대로는 번화해 보였다. 그러나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많아서 그런지 여인들의 피부는 조금 짙은 색이었고, 정경성 아가씨처럼 부드럽고 매끄럽지 않았다. 풍습은 개방적인 듯했으며 사람들은 모두 활발하며 민첩했다. 장난스러운 모습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거리에 자리를 편 소상인과 점포를 보니 결코 물자가 결핍된 건 아니었다.
경칩은 생각보다 발달한 성안의 모습을 둘러보며 즐거워했다.
“아가씨, 소춘성과 정경성은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교교, 이곳이 괜찮은 것 같니?”
나설안이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녀는 심묘가 이곳에 익숙하지 않음을 걱정스러워했다. 나설안은 어려서부터 소춘성에서 자랐으니 문제가 없었다. 심구와 심신 역시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던 무장이니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곱게 자란 딸은 염려가 되었다.
심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좋네요.”
심묘의 웃음을 본 나설안은 그제야 안도했다. 나설안 역시 미소 지었다.
“네 외조부 댁으로 가자. 넌 아주 어릴 때 외가 사람들을 보고 이후로 본 적이 없으니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 네게는 외숙부 두 분과 오라비 세 명, 언니 한 명이 있단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널 보면 아주 반가워할 거야.”
나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대장군 나수는 오랫동안 독신이었다. 나설안은 나수의 막내딸이었다. 심묘가 태어났을 때 나씨 가문에서 정경성을 방문해서 심묘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춘성과 정경성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그들이 자주 소춘성을 비울 수 없어,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나씨 가문의 사람들이 어땠는지 기억이 거의 없어서, 심묘는 나설안의 말에 가만히 웃기만 했다.
나씨 일가 문 앞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구경 온 백성도 있고 나씨 가문 사람도 있었다. 가장 앞에는 나수가 있고 그 뒤로 중년 부부가 서 있었다. 부부의 뒤에는 소년 세 명과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소년들은 모두 용모가 단정하고 위풍당당해 보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용맹한 장수의 품위 있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소녀의 피부는 건강한 밀색으로 눈은 크고 둥글었다. 작은 입은 마름모꼴이라 한눈에 성격이 괄괄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가 옆에 있는 한 소년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말해봐. 사촌 여동생은 어떤 사람일까?”
팔이 잡힌 소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좋은 사람일 거야.”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분명히 말할 수 없어. 얼굴은 예쁘겠지. 소춘성에 온 정경성의 아가씨들은 얼굴이 예쁘지만, 성격이 지나치게 유약해서 싫증나게 만들잖아. 게다가 작년 소춘성에 손님으로 온 관가 소저가 사촌 여동생을 안다고 하지 않았어? 그 소저가 사촌 여동생은 정경성에서 명성이 좋지 않다고.”
나담은 소리를 낮췄으나 목소리가 낭랑했기에 그녀의 흉을 주변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나담.”
엄숙한 목소리가 소녀의 말을 끊었다. 나수가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나담은 똑바로 서서 혀를 내밀었다. 나이가 조금 어린, 성격이 활발한 소년이 나담의 손을 끌었다.
“조부가 편애하시네. 사촌 여동생은 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보호하시고. 사촌 여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봐야겠어.”
심신은 평소 서북에서 전쟁을 했기에 서북 국경지대로 갈 때마다 소춘성을 거쳤다. 매년 오기 때문에 심구도 나가를 잘 알았다. 그래서 나가 사람에게는 출생 이후 오랫동안 본 적 없는 심묘가 가장 흥미로웠다.
더욱이 천하는 크다면 크고 작으면 작아서 먼 변방의 소춘성에도 때때로 관가 가족이 거쳐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위무대장군의 머저리 적녀의 소문을 비롯해 정경성의 소문 몇 가지가 소춘성에서도 돌았다. 소문을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게 나았다. 마침내 오늘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나씨 일가를 둘러싼 많은 사람이 심묘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했다.
마차가 도착했다. 우두머리 말에 심신과 심구를 비롯한 몇 사람이 타고 있었고 뒤로 병사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심신이 말에서 내렸다.
“아버님.”
심구도 서둘러 따라 내려 나수에게 달려갔다.
“외조부.”
그러나 나수는 두 부자를 스쳐 마차를 바라보았다. 나수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외손녀 심묘였다. 약간 살집이 있는 여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시누이와 교교는 마차에 있겠지요. 이렇게 오래 길을 달려왔으니 피곤할 거예요.”
마차의 발이 들리고 경칩과 곡우가 나설안을 부축했다. 먼저 내린 나설안이 마차 안에 손을 내밀자 아가씨가 따라 내렸다. 허리를 굽힌 채 내린 아가씨가 고개를 들자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나설안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나왔다.
“교교,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구나.”
나담은 입을 벌렸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소춘성에는 날리는 모래가 많고 건조해서 아가씨들의 피부색이 짙었다. 그래서 하얀 피부는 보기 드물었다. 심묘의 용모는 수려했고 눈처럼 하얀 피부는 더욱 그림 같았다. 먹색 눈썹, 검은 눈동자, 작고 정교한 코, 입술은 불그스름했다.
그러나 그녀의 기백과 도량이 가장 의아했다. 나설안에 손에 끌려오는 그녀는 보기에 매우 애지중지 자란 아가씨 같았지만, 자태가 늠름하고 씩씩한 나설안의 옆에서도 위엄 있고 고귀해 보여 높은 지위의 사람처럼 보였다. 주위 백성과 나가 사람은 모두 멍해졌다. 물론 용모도 중요하지만 여인에겐 기질이 가장 중요했다. 심가 어린 아가씨의 자질은 용모보다 더욱 사람의 정신을 홀릴 만했다.
그녀는 한 걸음씩 나수에게 다가갔다. 나수는 큰 키에 높은 코와 깊은 눈을 가져 호방한 심신에 비해 엄숙하며 인정사정없는 인상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려 심묘를 주시했다. 그의 모습은 너무 냉혹해서 담이 작은 아가씨라면 두려워 울었을 것이다. 심묘는 정경성에서 온 응석받이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간담이 서늘할 거라고 여겼다. 나담과 곁에 있는 소년은 이를 즐겁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 나수와 마주 봤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몸동작 역시 부드러웠다. 나수의 반응에 긴장한 게 아님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은 평온했고 심지어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아 나수는 순간 당황했다.
나가는 소춘성의 성주 같은 존재이니 그에게 윗사람은 없었다. 멍해졌던 나수는 정신을 차리고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긴장했던 사람들이 놀랐다. 나수는 심묘의 머리를 토닥였다.
“손녀야, 무엇 때문에 날 부르지 않는 게냐?”
“외조부.”
심묘가 온순하게 대답했다.
나설안은 한시름 놓았다. 나수와 심신은 달랐다. 심신은 심묘에게 하늘의 별도 따주지 못해 안달인 아버지였지만, 나수는 나설안이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아버지였다. 나설안도 어릴 때 나수를 많이 두려워했다. 나이가 든 나수는 이전만큼의 위엄은 없으나 어린 아가씨를 놀라게 하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나설안은 딸이 놀랄까 걱정했는데 막상 심묘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크게 안도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설안을 안심시킨 심묘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정경성에서 온 아가씨는 곱게 자라 울며불며할 것 같은데 오히려 담대해 보였다. 그러나 나담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곁의 소년에게 귓속말했다.
“겁나지 않은 척한 걸 거야.”
나수의 손주 중 나이가 가장 많고, 성격도 가장 좋은 소년은 생각에 잠긴 듯 심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설안은 심묘에게 사람들을 소개했다. 나설안의 오라버니이자 심묘의 외숙부는 나연영과 나연태였다. 심묘의 첫째 외숙부 나연영의 아내 여 씨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성실한 인품의 여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둘 있는데, 나릉과 나십이었다.
심묘의 둘째 외숙부 나연태의 아내 마 씨는 장사를 하는 집안 출신답게 영리하고 괄괄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남매가 있는데, 딸은 나담, 아들은 나천이었다.
나릉은 심묘의 큰 사촌 오라버니로 올해 열여덟 살이었다. 온화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 여 씨와 비슷한 인품으로 예의 있게 인사하는 모습이 매우 자상해 보였다. 반면 둘째 사촌 오라버니 나십은 열일곱 살로 나릉의 친동생이지만 성격은 아주 달라 거친 면모가 있었다. 그는 심묘를 보며 차갑게 비꼬았다.
“정경성에서 온 소저가 소춘성의 모래바람을 견디겠어?”
나연영이 그러지 말라는 듯 그를 한 대 때렸다.
사촌 언니인 나담은 올해 열여섯 살로 심묘에게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태도는 친절하다고 할 수 없었으며, 호기심을 조금 보였다. 나담의 남동생 나천은 심묘와 같은 나이로, 심묘를 관찰하는 둥근 얼굴이 까탈스러워 보였다.
심묘와 나가 사람을 인사시킨 후 나수는 나설안을 데리고 부로 들어갔다. 심가 사람은 나설안이 출가 전 살던 뜰에서 지내기로 했다. 하인이 방 정리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부와 심부는 달랐다. 심귀와 심만은 문관의 길을 걸어 심신과 조정 일을 상의하지 않았다. 더구나 배다른 형제였기에 사적인 비밀은 더욱이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부는 모두 한 식구였다. 나가 일가족은 나부에서 화목하고 우애롭게 함께 지냈다. 나연영과 나연태는 물론, 여자 식구들도, 나릉을 비롯한 아이들도, 모두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고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심신 일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데 모여들었다.
“설안아, 이후는 어찌할 생각이냐?”
심신은 동호부를 빼앗겨 소춘성으로 물러나는 일을 이전에 편지로 알렸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멀리 있어 협의하기 어려웠으니 만난 지금 다시 물어본 것이었다.
나설안은 미소 지었다.
“아버지,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소춘성에 왔으니 당연히 이곳에서 평온하게 지내야지요.”
나설안과 심신은 나가군을 키우려는 일을 어떻게 나수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수가 고루한 성격이니 당연히 반대에 부딪힐 거라고 예상한 탓이었다.
나연영이 심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설안아, 심가군이 몰수당한 건 정말 되돌릴 여지가 없는 거야?”
그들은 무장이기에 무장에게 군대가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군사 일로 분주하게 지낸 심신에게 갑자기 한가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라고 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가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가도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었다.
심신이 나연영에게 두 손을 모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형님, 원망을 품기보단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소춘성도 좋습니다. 전 설안이 생활한 곳에서 지내보고 싶습니다.”
나수가 심신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엄숙한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자네, 성격이 변했군.”
그들은 심신이 당당하며 직설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알았다. 그런 심신이 평온한 말을 하니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은 셈이었다. 심묘는 제각기 다른 표정의 나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외조부, 듣자니 소춘성의 국경에 돌궐족이 있다더군요.”
심묘의 말에 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적막을 깬 마 씨는 시원하게 웃었다.
“교교, 겁낼 것 없단다. 돌궐족은 성 밖에 있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해. 들어와도 우리 나가 병사가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단다. 여러 해 평안하며 탈이 없었으니 겁낼 가치가 없단다.”
심묘가 두려워한다고 여긴 심구도 작은 소리로 위로했다.
“외숙모 말씀이 맞아. 교교, 겁낼 것 없어.”
심묘가 눈꺼풀을 드리웠다.
소춘성은 변경의 작은 지역이었다. 변경 지역에서는 유목 민족이 침범하여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동쪽 돌궐족은 신체가 건장하고 힘이 넘치며 군마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전쟁 시에 대단히 용맹했다. 그들과 전력으로 싸운다면 손해 보는 것은 명제일 것이었다. 소춘성은 수비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구조인 데다 나가의 명성이 있어 돌궐족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초원에서 생활하는 돌궐족에게 매년 8월에서 10월은 가뭄을 겪는 때였다. 그때가 오면 일부가 소춘성에 들어와 물건을 훔쳤다. 이 정도의 문제야 그때그때 내쫓으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백성들도 익숙하게 여겨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전생을 알고 있는 심묘의 기억에 따르면 올해 소춘성에 큰일이 일어날 것이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부러 슬쩍 말을 흘렸다.
“나가군은 아버지의 심가군처럼 용맹하니 돌궐족에게 공격당해도 저항할 수 있겠네요.”
나수의 얼굴이 굳었다. 나연영과 나연태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심지어 난처해 보일 정도였다. 소춘성에는 돌궐족을 제외하면 아예 적이라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 돌궐족조차 미미한 위협밖에 되지 않으니 나부가 그 많은 병사에게 줄 은자는 없었다. 게다가 문혜제는 소춘성을 방관해 나가군이 흩어지게 했다. 장졸들은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했다. 나가군과 심가군을 비교하는 건 그야말로 나가 가족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았다.
나십이 불쾌하단 듯 노기를 띤 채 심묘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이야?”
나릉이 얼른 그를 끌어당겼다. 나릉은 심묘를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십아, 말을 정중히 해. 사촌 여동생은 나십처럼 굴지 말아주고.”
나담은 입을 삐죽거렸다.
“정경성에서 온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우리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다툼 없이 평화롭게 살았어. 사촌 여동생은 두려운가 본데, 안심해. 돌궐족이 성에 들어올 리 없어. 이렇게 오래…….”
심묘는 살짝 웃었다.
“만약 성에 들어오면 어쩔 거야?”
심묘가 반박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나담은 당황했다.
나수는 말이 없었다. 나가 사람은 아이들을 교육할 때 토론을 통해 스스로 많이 깨우치도록 했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은 아이들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게다가 심묘의 말에 나수가 뭐라고 하지 않으니 그 아랫사람이 끼어들기도 적절치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담이 격분했다.
“어떻게 성에 들어오겠어? 돌궐족은 양식과 공구를 원할 뿐이야. 10월이 지나 가뭄이 사라지면 그들은 함부로 오지 않아. 성에 들어와서 전쟁하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겠어?”
심묘는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양식과 공구만 원한다니, 너무 쉽게 만족을 느낀다고는 여기지 않아?”
사람들이 멍해졌다. 심묘와 나이가 비슷한 나천은 호기심에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심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내가 돌궐족이면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을 거야. 용맹한 장병이 있고 강건한 말이 있고, 물러나 지킬 초원이 있지. 이 모두 소춘성의 흩어진 장병과 질 낮은 병기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데, 어째서 쟁탈하지 않겠어? 쟁탈하지 않는 건 소춘성까지 오는 길이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야. 그러나 십여 년을 탐색했어. 이 작은 성에 매년 왔으니 길을 지도로 그릴 수 있었을 거야. 양군이 대치할 때 상대가 모두 준비했지만, 손을 쓰지 않았지. 그것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규칙이니까. 그러나 그 규칙을 언제까지나 준수할까? 대체 누가 정한 규칙이기에?”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돌궐족은 소춘성에 야심이 없다고 여겼었다. 물자가 모자라는 철에만 매년 물건을 훔쳐간다고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심묘의 말은 나가 사람들이 생각한 적 없는 상황을 깨닫게 해줬다. 심묘의 말처럼 돌궐족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야심을 갖지 않을 리 없었다. 만일 돌궐족이 소춘성을 점령하려 들면 소춘성은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나십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말투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좀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졌다.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뭐야?”
“난 나가군이 심가군처럼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게 아쉬워.”
심묘가 예의 바르게, 그러나 정곡을 찌르자 나수의 얼굴에 쓰라린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나가군은 분산됐을 뿐 힘이 있었다. 심묘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외조부께서 젊을 때 늠름하게 나가군을 인솔하셨다고 들었어요. 외조부께서는 나가군의 영광을 회복시키는 것을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나가군의 영광을 회복시킨다는 심묘의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심신과 나설안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나천과 나담은 눈앞이 환해졌다. 그들은 늘 무한한 영광을 바랐다. 심묘가 묘사한 이야기는 소년, 소녀들의 허영심에 매우 부합했다. 나이가 있는 나릉과 나십은 티 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십의 눈에 순간 희망이 스쳤다.
나수는 심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너란 아이는 야심이 작지 않구나. 정경성 같은 곳에서 용케도 너같이 굳센 아이를 길러냈어.”
나수로서는 심묘를 꽤 칭찬한 셈이었다. 나설안과 심신은 딸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수가 바로 탄식했다.
“그러나 나가군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이 어디 네 말처럼 그리 간단하겠느냐? 병사와 군대, 양초 모두 은자가 있어야 할 수 있는데 나가가 부담할 수 있겠느냐? 또한, 병사를 길러도 발휘할 곳이 없어. 심묘, 넌 우리 나가의 돈을 모두 거덜 낼 작정이냐?”
천 일 동안 기른 병사가 하루아침에 다 죽을 수 있다. 병사는 모두 국고 안 은자로 길렀다. 나가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방심하고 있는 문혜제는 멀리 변경의 작은 지방에 있는 병사에게 은자를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가 스스로 병사를 기르고 군대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부담해야 했다. 누구를 상대할지, 언제 전쟁할지 모르는 건 확실히 슬프고 처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나가에게 은자를 주길 원치 않는 건 나가군이 출중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만약 나가군이 승전 소식을 정경성에 보내면 명성이 혁혁해질 거고, 그러면 폐하께서도 은자를 주실 거예요. 멀리에는 진국과 대량이 있고 가까이엔 돌궐족과 흉노가 있어요. 명제는 적수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군사력을 정진시키면 더 먼 전장으로 보낼 수 있어요. 외조부, 어떠세요?”
심묘가 살짝 웃었다. 그녀는 방 안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각 세력을 세세히 분석했다. 하늘이 놀랄 야심을 웃으면서 드러냈다. 호의호식하며 연약하게 자란 아가씨인데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위로 올라온 노련한 관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수는 갑자기 대로했다. 그는 소매를 휘두르며 차갑게 말했다.
“나가의 재편성은 더 말할 것 없다. 동의하지 않는다! 설안, 넌 가족들을 데리고 쉬거라. 이 일은 앞으로 다시 꺼내지 말고.”
그는 대청 안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나수의 갑작스러운 분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설안도 이해하지 못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심구만이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교교야, 잘했어.”
나십이 힐끗 심묘를 보며 나릉에게 속삭였다.
“저 사촌 여동생, 만만하지 않네.”
“아마도.”
나릉이 웃었다. 나담은 입을 삐죽였다.
“입만 잘 놀려선. 조부께서 화나셨잖아.”
나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심구와 대화하는 심묘를 주시했다.
“입을 잘 놀리는데, 얼굴도 아주 예뻐. 누나보다 예쁜걸!”
나담이 나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 * *
나가에서의 날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심신과 심구는 한가하게 있을 수 없어 매일 나부의 초라한 연무장에서 군인을 훈련시켰다. 그 군인들은 심가에 남은 군인이었다. 병사들은 취사병이었기에 매일 심신에게 시달리며 고통받았다.
나설안은 고향의 옛친구들을 방문하느라 바빴다. 소춘성은 그녀가 소녀였을 적 머물던 곳이기에 소꿉친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심묘를 데리고 외출했고, 덕분에 심묘는 그곳의 부인들을 잔뜩 알게 되었다.
부인들은 처음에는 모두 정경성에서 온 귀족 아가씨의 비위를 맞추느라 조심스러웠다. 정성 들인 음식을 내놓았고 간식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신경 써서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이전 정경성에서 온 관가 소녀들은 모두 까다롭게 굴었기에 심묘의 시중을 잘 들려고 애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심묘는 특별한 대우를 바라지 않았을뿐더러 소춘성에 아주 잘 융화되었다. 때때로 소춘성에 내리는 우박을 보고서도 호기심을 나타냈을 뿐 겁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춘성에서 심묘는 부수의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했다. 나가 사람은 그런 심묘에게 점점 경계를 풀었다. 나가의 네 명 자녀 중 나릉과 나십은 수비군에 부임해서 평소 많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부에는 나담과 나천이 주로 있었다. 나담은 심묘가 요지경을 주자 심묘와 악수하며 화해했다. 나천은 심묘보다 생일이 좀 빠르니 어쨌든 오라버니건만, 그는 나이가 좀 많은 소명랑 같이 친근하게 굴었다. 그는 온종일 심묘에게 정경성의 옛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심묘는 그런 나천을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어느 날, 나천과 나담이 함께 심묘의 뜰로 심묘를 찾아왔다. 소춘성은 정경성과 달랐다. 정경성이라면 길거리를 거닐며 크고 작은 점포를 몇 개월을 돌아다녀도 다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춘성은 작아서 며칠 둘러보고 나면 더 볼 곳이 없었다. 구경을 다 한 심묘가 외출하지 않고 부에서 지내자 나천과 나담이 그녀가 무료할까 걱정해 찾아온 것이었다.
나천은 주방에서 심묘가 한 간식을 먹으며 감탄했다.
“어제 연무장에 가서 심구 형님이 병사를 훈련시키는 걸 봤어. 병사들은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형님의 무공은 높더라. 난 심구 형님 곁의 모경이라는 호위에게도 몇 초식을 버티지 못했어. 심묘야, 심구 형님더러 내게 몇 초식 일러주게 할 수 없어?”
심묘가 미소 지었다.
“배우고 싶으면 직접 오라버니에게 말해봐. 흔쾌히 알려줄 거야.”
“정말?”
나천은 흥분했다.
정경성의 공자들은 대다수 오만방자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이미 많은 일을 겪어 나이에 맞지 않게 약은 면모가 있었다. 그러나 나가 사람은 달랐다. 나천은 성실하고 시원시원했다. 소년의 천진함이 있어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잘 느꼈다.
나천 역시 예쁘게 생기고 온순해 보이는 심묘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심묘를 자기 사람으로 여겼다.
“심구 형님의 무예는 정말 높아. 정경성에서 제일이지? 아니다, 명제에서 제일일 거야. 우리 큰형님과 둘째 형님의 무공도 뛰어난데 심구 형님에게 완전히 패배했지 뭐야.”
줄곧 곁에서 화첩을 뒤지던 나담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나천에게 눈을 흘겼다.
“너 바보야? 이렇게 견식이 좁아서야. 어디 가서 나가 사람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네 누나라고도 하지 마. 정말 창피하네.”
나담과 나천은 종일 말다툼을 했다. 심묘도 금세 이에 적응했다. 나천이 나담의 말에 승복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나가 뭘 알아? 내가 어디가 견문이 좁은데! 그럼 심구 형님이 제일이 아니라는 거야?”
나담이 천천히 말했다.
“남쪽의 사가, 북쪽의 심가.”
순간 심묘는 멍해졌다. 득의양양한 나담은 머리를 흔들었다.
“명제의 양대 무장세가야. 고모와 고모부의 위무대장군 심가, 임안후부의 사가지. 심구 오라버니는 심가의 영재지만, 임안후부의 사가 소후야의 재능도 뛰어나대. 조부께서 운이 좋아 사 소후야를 만난 적 있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하늘로 오를 용이라고 말씀하셨어.”
심묘가 망설이며 물었다.
“외조부께서 사 소후야를 만났다고?”
“어, 난 왜 몰랐지?”
나담은 뒷북치는 나천에게 눈을 흘겼다.
“너는 그저 먹는 거, 먹는 거밖에 모르잖아. 네가 어찌 알겠어? 당시 임안후와 군사를 함께할 일이 있어서 그때 사 소후야도 만나셨다고 해. 조부께서는 감탄하셨어. 난 사 소후야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조부께서는 내게 관심을 거두라고 하셨어. 사 소후야는 위험한 인물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심묘는 생각에 잠겼다. 외조부 나수가 사경행을 만난 적이 있다니.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그러나 당시 나수는 사경행이 쉽지 않은 사람임을 알아챘다. 심묘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나담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너도 정경성에서 자랐으니 사 소후야를 본 적 있지?”
심묘가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 나담이 심묘의 팔을 잡았다.
“어떻게 생겼어? 소문에 선인처럼 빼어나다던데. 오라버니보다 더 출중한 거야?”
나담이 말한 ‘오라버니’는 물론 나릉이었다. 나릉은 온화하고 관대하며 나십은 과격하고 나천은 활발했다. 그들 모두 준수하게 생겼다. 그러나 나릉이 온화해서 가장 ‘출중’해 보였다.
“나릉 오라버니보다 못해.”
나담이 심묘를 잡은 손을 풀었다. 눈에 실망한 흔적이 보였다.
“아, 나는 사 소후야가 아주 잘생겨서 그를 한번 보면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나릉 오라버니만 못하다고?”
나천은 즐거운 표정으로 나담에게 눈을 흘겼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능력이야. 용모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사 소후야가 아내감을 찾아도 누나같이 괴팍한 여자한테는 기회가 없을 테니 상관없잖아! 심묘처럼 생기 있고 온유한 아가씨를 찾을걸!”
나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심묘를 보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담과 나천이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다투는 것을 바라보았다. 유감스러웠다. 소춘성에까지 사경행의 명성이 퍼졌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름을 듣자 그가 북부 변경으로 출정한 일이 떠올랐다. 시일이 지났으니 이미 도착했을 것이다.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전쟁을 앞두고 벌이는 건 처음일 터였다. 능력은 알지만, 전생의 결과를 생각하니 심묘의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어 알 수 없는 기분을 쫓아냈다. 전생에서 그녀는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것이 사경행의 장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사경행과 다투어보니 그의 장기가 배후에 숨어 계략을 부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사경행은 차분하고 영리했다. 그러니 반드시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나담과 나천은 심묘의 뜰에서 저녁까지 있었다. 저녁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9월과 10월의 날씨는 8월의 연장선이라 여전히 초원은 건조했고 성안에는 큰비가 일상적으로 내렸다. 정성경의 비와 다른 소춘성의 비는 모래와 바람이 섞여 대단히 사나웠다. 한번 비바람이 몰아치면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 낮도 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큰일이야. 또 우박이 내리겠어.”
나담이 하늘을 보았다. 나천도 일어나 눈살을 찌푸렸다.
“고모부 일행은 왜 아직 안 돌아오는 걸까?”
나가군은 흩어졌지만 성을 수비하는 사람은 있었다. 평소 나연영과 나연태가 수비군에서 일했고 심신이 온 후에는 심구와 함께 수비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부로 와 함께 식사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간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바깥을 본 심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나담은 심묘의 안색을 보고 그녀가 무서워한다고 여겼다. 심묘는 우박을 처음 봤을 때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서워하니 의아하기도 했다. 나담이 심묘의 어깨를 토닥였다.
“심묘야, 전에 우박이 내렸을 때 겁내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겁을 내? 겁내지 마. 매년 이맘때 일상적으로 내리는 우박이니 겁낼 것 없어.”
그러나 심묘의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는지 안색이 더 나빠졌다. 느긋하던 나천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심묘를 쳐다보았다.
“심묘야, 무엇 때문에 그리 긴장하는 거야? 고모부는 걱정할 거 없어.”
그때, 바깥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공자님, 아가씨, 사촌 아가씨, 마님께서 급히 대청으로 오라십니다.”
나가의 남종이 급히 달려오다가 넘어졌다. 나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생겼어?”
“돌궐족이 또 물건을 훔치러 왔습니다. 어르신께서 주인어른 두 분과 심 장군님을 데리고 초원으로 가셨어요. 공자님들은 부에 계시고요. 곧 날씨가 변할 테니 얼른 대청으로 가시지요.”
남종은 넘어질 만큼 조급해했지만 허둥거리지는 않았다. 이런 일을 아주 많이 겪어봤음이 분명했다.
나담이 매섭게 발을 굴렀다.
“망할 돌궐족.”
나천은 심묘를 위로했다.
“심묘야, 우리 먼저 가자. 별일 없을 거야.”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여 씨, 마 씨 모두 대청에서 세 사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 씨는 심묘가 놀랄까 걱정한 듯 심묘의 손을 잡았다.
“교교, 이렇게 큰 우박을 본 적 없지? 괜찮아. 우리 대청에서 이야기하며 기다리자. 교교와 우리가 정경성의 이야기를 한 적 없구나.”
그녀는 일부러 돌궐족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게 분명해서 심묘는 여 씨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나가 사람은 늘 호의로 자신을 대했다.
여 씨도 웃으며 심묘를 맞이했다.
“그래, 우리 저녁에는 양고기탕을 먹자. 교교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소춘성은 초원과 인접했다. 그래서 가뭄을 겪지 않는 시기면 돌궐족은 찾아와 소와 양을 생활 물품으로 교환해갔다. 소춘성 사람들은 양고기를 아주 얇게 잘라 작은 솥에 끓이곤 했는데 익은 고기를 장에 찍어 먹으면 아주 맛있었다. 나담은 전부터 심묘와 이 양고기탕을 먹고 싶었으나 그녀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해 이전에는 제의하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어른이 제안해주니 내심 기뻤다. 돌궐족의 본거지는 초원 깊은 곳이었다. 추격할 때마다 나가군은 사람이 부족했다. 그래도 오늘은 나가 모든 장년 남자가 출동했고, 심신 부부와 심구도 있어서 나은 편이었다. 나릉과 나십도 돌궐족을 쫓으려고 했으나 심신이 있어서 나릉과 나십은 소춘성에 머물렀다. 성 수비를 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몹시 어두웠다. 나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숨이 막혔다. 늘 물건을 훔치러 오는 돌궐족을 생각하니 마음이 시원하지 않았다.
대청에는 여자 식구가 대다수였고, 종들은 식사 준비를 도왔다. 백로와 상강은 묵묵히 정오에 남은 음식을 날랐다. 주방에서는 솥을 걸고 양고기를 잘랐다. 솥 안 국물이 끓어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누구도 즐겁지 않았다. 배가 고파진 나천은 심묘 앞에 놓인 간식을 보고 그 곁에 앉아 손을 뻗었다. 심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천은 심묘의 시선을 알 수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심묘야, 날 왜 보는 거야? 혹시 무서워서 그래?”
두 사람이 앉은 곳은 사람들이 앉은 곳과 멀어 사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외조부께서 나가군의 재건을 원치 않으시는 건 무슨 이유야?”
심묘의 물음에 나천이 멍해졌다.
“그날 외조부는 내 말을 듣고 화내셨지. 나가군을 키울 은자가 없어서는 아닌 것 같아. 네가 그 이유를 이야기해줄 수 없을까?”
나천이 심묘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지만 심묘의 눈길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얼버무렸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 은자가 없어서야. 많은 생각하지 마. 은자가 없는데 나가군을 어떻게 재건해.”
심묘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고 맑고 투명해 매력적이었다. 나천은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솔직한 성격의 그는 이런 진실한 눈을 보고 거짓말을 하는 건 상대를 묘욕하는 파렴치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심묘를 좋게 생각하고 사이도 좋았기 때문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부 사람은 이 일을 감히 말하지 않아. 그러나 넌 한 식구니 말해줄게. 다른 사람에겐 절대 말하면 안 돼.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알면 곤장을 치실 거야.”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가군 재건은 네가 처음 제의한 게 아니야. 나가군이 쇠약해지기 시작한 건 고모가 태어나고 오래지 않아서야. 그때 이미 나가는 쇠락했고, 조부는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지 못해 울적하셨어. 그러자 조모께서 나가군을 재건하자고 건의하셨던 거야. 조부께서도 그럴 생각이셨는데 조모께서 지지해주시자 기뻐하시면서 바로 준비하셨지만……. 곧 은자가 떨어졌어. 조모께서도 네가 한 말처럼 승전해 명성을 떨치면 폐하께서 이 군대에 은자를 주실 테니 은자 일은 해결될 거라고 하셨어. 그래서 조부는 수령 인장을 자청해 국경지대로 나섰지.”
나천이 탄식했다.
“그다음은 너도 예상하겠지. 조부는 참패했어. 웃음거리가 되셨지. 쇠락한 나가군은 그때 심한 타격을 입어 아예 재기가 어려워졌고. 가장 중요한 건 조부께서 전쟁을 하러 가셨을 때 조모께서 중병이셨다는 거야. 하지만 조모는 조부를 안심시키려 이 소식을 조부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 조부가 패배하고 돌아오셨을 때 조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지.”
나천은 간식을 내려놓고 심묘를 보았다.
“조부는 조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여기셔. 장래 죽어도 조모를 볼 낯이 없다고 생각하시지. 이렇게 오랫동안 나가군을 재건하지 않은 건 과거의 패배와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심묘, 네가 나가군을 위풍당당하게 재건하려는 건 알아. 그러나 우리 나가 사람은 결코 그것을 원하지 않아. 내 어머니는 눈앞의 사람을 진귀하게 여겨 아끼라고 말씀하셨어. 만일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조부는 전쟁을 하러 가지 않고 조모의 곁에서 함께하길 선택했을 거야. 조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나가군이 이렇게 적막해도 괜찮아.”
심묘는 나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느긋한 성격의 나천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예상도 못 했다. 나가 사람은 언행이 바르고 위엄 있으며 성정이 온화하고 선량하다더니 거짓이 아니었다.
심묘는 나천에게 지난 일을 들으며 속으로 탄식했다. 위풍당당한 나 대장군이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그는 자신만만했지만 무엇도 얻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나수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나 부인을 잃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병의 아내 곁을 지키지 못하고 공로를 선택한 그는 잔인한 결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심묘는 나수의 안색이 변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가군이 이렇게 적막한 걸 외조모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나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묘가 웃었다.
“내가 영웅인 남자를 사모한다면, 그가 명마를 타며 보검을 들고 용맹한 병사를 인솔하길 바랄 거야. 자랑스럽고 가치 있는 공로를 얻길 원하지 억울함을 당하길 원치 테지. 그런데 외조부는 지금 억울함을 당하고 계시니 외조모께서 이를 아시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실까? 나라면 무척 슬플 거야.”
나천은 심묘의 말에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다른 것은 둘째 치더라도 남자인 자신 앞에서 당당히 사랑을 이야기하니 놀라웠다. 모친인 마 씨는 심묘가 곱고 가냘픈, 정경성에서 온 아가씨니 잘 돌보라고 했고 자신 역시 그녀를 수줍음 많은 소녀라고 여겼는데, 누나인 나담보다 더욱 거리낌 없는 태도를 보이다니.
그때 남종이 소리쳤다.
“큰공자님, 둘째 공자님, 돌아오셨군요!”
나릉과 나십이 대청 입구로 걸어오고 있었다. 큰비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듯 공기가 습했고, 두 사람의 옷은 이미 젖어 있었다. 막 수비군에서 돌아온 나릉과 나십은 고생한 모습이었다.
여 씨가 두 사람에게 차를 주라고 분부했다. 건네받은 나십은 단숨에 마셨다. 나담이 나릉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바깥은 어때?”
“우박이 내리려 해. 백성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어. 바깥도 준비가 다 됐고. 나도 다시 곧 나십과 돌아가 지켜야 할 거야. 우리 대청은 단단하니 겁낼 것 없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고모부, 조부는 어떠신데?”
나담이 끝까지 캐물었다. 나십은 미간을 찡그리고 대답했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담이 뭐라 더 말하려 할 때 나천과 심묘를 발견한 나릉이 얼른 말했다. 그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괜찮아. 오늘밤은 좀 바쁜가 봐. 내일은 돌아오실 거야. 냄새 좋다. 양고기탕을 준비하나 보네. 심묘, 너는 먹어보지 않았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다.”
심묘는 나릉에게 다가갔다. 나릉은 열여덟 살로 용모는 나연영을 닮아 출중했다. 성격은 여 씨처럼 온화하며 자상했다.
“나릉 오라버니, 성 수비군은 이동배치 됐어?”
나릉은 멍해졌다. 심묘가 이런 질문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안배했어.”
“성을 수비하는 사람은 몇 명이야?”
심묘의 물음에 나십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이들이 대화할 때 여 씨와 마 씨는 멀리 떨어져 있어 듣지 못했다. 나천이 경계하듯 물었다.
“그건 왜 물어? 오늘밤 우박이 내리니 성으로 들어올 사람은 없을 거야.”
“동쪽 삼십 명, 서쪽 삼십 명, 북쪽에 열 명. 총 칠십 명이야.”
나릉이 대신 인내심을 가지고 답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사람이 적어?”
심묘의 물음에 나릉은 머뭇거렸다.
“평소에는 더 많아. 오늘은 아버지가 그들을 데려가서 수비군이 많이 남지 않았어. 성에 일이 생길 리 없으니 칠십 명으로 충분해. 오늘은 하늘이 나쁘니 나천의 말대로 성에 들어올 사람은 없어.”
나가군이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돌궐족을 쫓으며 사람을 데려갔으니 수비군을 많이 남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소춘성은 여러 해 평안했기에 수비군은 도주범이나 좀도둑들을 체포할 뿐 쓰임새가 크지 않았다.
나십은 심묘를 주시했다.
“넌 돌궐족이 공격할까 봐 두려운 거야?”
나담은 입을 크게 벌렸다. 나천도 놀란 얼굴로 나십을 바라보았다.
“형님, 무슨 소리야? 돌궐족이 어떻게 공격해 들어온다는 거야?”
나십은 냉소했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심묘의 눈을 주시했다.
“사촌 여동생이 온 날,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돌궐족은 야심이 있고 실력이 있는데, 왜 공격하지 못하냐고. 네 걱정이 이거야?”
나십은 조금 기세등등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한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거야.”
“말도 안 돼. 오늘 아버지와 고모부가 초원으로 돌궐족을 추격하러 가셨는데 돌궐족이 어떻게 소춘성을 공격하러 와? 정말 야심이 있다면 다른 시기를 찾는 게 더 좋지 않아?”
“범을 산으로 유인하는 건 명제 사람만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돌궐족은 유목 민족이지만 바보는 아니지. 소춘성 백성과 오랫동안 공생했는데, 조금이라도 배우지 않았을 거라 여기는 거야? 강아지조차 사람에게 배우니 돌궐족은 일찍이 배웠겠지.”
심묘가 평소와 판이하게 차가운 태도를 보이니 주변은 조금 놀랐다. 잠시 침묵하던 나릉이 말했다.
“네 이런 생각은……. 어디서 무슨 소식을 들었어?”
심묘는 줄곧 돌궐족의 공격을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늘은 유독 이상했다. 주의를 기울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예사롭지 않은 기색을 알아차릴 것이었다. 단순히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만약 어디서 소식을 얻었다면 또 다른 일이었다.
“직감.”
나십은 화를 웃음으로 표현했다.
“직감? 사촌 여동생,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야.”
“설마 오라버니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성 수비를 하면서 환난을 미리 방지하는 이치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돌궐족이 정말 싸우려 한다면 지금 소춘성에 수비군이 얼마 없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뻐하겠어? 물론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소춘성은 재난을 모면했으니 좋은 일이겠지. 그렇지만 설마 눈앞에 나쁜 일이 발생해야만 뒤늦게 준비하려고? 이 이치를 모르니 나가가 나날이 쇠락하지.”
심묘의 눈에 단호함이 떠올랐다.
“너!”
나십이 분노했다. 나담과 나천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릉만은 표정의 변화 없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전처럼 온화했다.
“심묘의 말이 옳아. 우리는 우둔하고 성 수비군의 인원은 부족해. 그것이 핵심이야. 심묘는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아?”
그저 질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에게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서 그 능력을 시험하려는 계산일 터였다. 심묘는 속으로 미소를 삼켰다. 나릉은 생긴 것처럼 온후하지만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인원을 늘리는 건 불가능해. 돌궐족은 준비해서 왔으니 우리는 당연히 적수가 못 돼. 난 무공을 몰라. 그러니 스스로 지키는 게 모험하기보다 낫지. 나릉 오라버니, 나부 입구에 호위를 모아 지킨다면 문제가 생겨도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을 거야.”
매끄러운 심묘의 말에 사람들은 멍해졌다. 심묘의 말은 논리적이었고 위험이 닥친 소춘성이 속수무책이라는 모양을 드러냈다. 군사를 모르는 나담과 나천은 심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십과 나릉은 달랐다. 나십은 심묘에게 언짢음을 표하고 싶었으나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노기를 띤 채 옆에 있었다. 나릉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럼 심묘 말대로 하자.”
심묘 때문에 분위기는 굳어졌다. 나천과 나담도 긴장한 것 같았다. 멀리 있는 마 씨와 여 씨만 이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들은 요리사에게 지시하느라 바빴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바깥에서 나릉의 병사가 뵙기를 청했다. 나릉이 그를 들어오게 하자 병사는 애타는 표정으로 나릉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릉은 빤히 심묘를 바라보았다.
바람 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심묘는 대청 모서리에 앉아 경칩이 건네준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주방의 요리를 기다리는 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나릉의 안색이 조금 장중해졌다. 나십은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심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나릉은 나십을 바라보지 않았다. 병사에게도 뭐라 분부하지 않은 채 심묘에게 다가갔다.
“심묘야, 따로 이야기 좀 하자.”
“오라버니,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해.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숨길 수 없어.”
심묘가 찻잔을 두고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이를 본 나천과 나담이 다가왔다. 인기척이 커지자 마 씨와 여 씨도 주의했다. 그들은 심묘와 나릉이 서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거라고 여겼다. 여 씨는 나릉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릉아, 교교를 놀라게 하지 말거라.”
“큰형님,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나이가 어린 나천은 궁금증이 생기면 바로 물었기에 지금도 거리낌 없이 물었다.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살짝 웃고 있어서 그가 이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 같았다. 앞의 일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침착함에 나릉은 조금 멍해졌다.
나릉이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성 수비군이 전해왔어. 돌궐족이 성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대.”
“뭐?”
나담이 놀라 외쳤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고 의식한 듯 단숨에 입을 막았다. 다행히 멀리 떨어진 여종과 남종은 이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했다. 이럴 때 민심을 동요하게 하면 안 되었다. 우박을 피하려 성에 모여 있는 상황에서 돌궐족이 침입하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릉과 나십이 이곳에 있으니 혼란이 일어나진 않아도 분위기가 대번에 흉흉해질 터였다.
여 씨와 마 씨는 무장 가문 출신이 아니기에 이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나릉아, 나십아, 지금 먼저 교교를 비롯해 몇 명을 보호하자꾸나. 우리가 얼마나 막을 수 있겠느냐?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실까?”
마 씨는 총명하고 능력 있는 부인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 맞이하니 당연히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은 조금 두서없었다. 여 씨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피하는 게 낫겠다.”
나담과 나천의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소춘성에서 생활하며 전쟁터의 일을 나수에게 들었으나 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돌궐족이 대규모로 침공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후 어떤 처지에 놓일지 걱정됐지만, 경험이 없으니 기록도 없어 더욱 막막했다. 명제의 병사가 도시를 공격하고 점령할 경우 주민을 학살하는데, 돌궐족은 명제 사람보다 천성이 흉악하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심묘의 말이 맞았어.”
나천이 중얼거렸다. 마 씨와 여 씨도 멍해져 심묘를 보았다.
“교교의 말이 맞았구나.”
“심묘, 너는 이전에 돌궐족이 성을 공격해 들어올 가능성을 이야기했었지. 네게 대책이 있을 거야. 지금 말해줘. 생사가 달린 문제야.”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광채가 스쳤다. 나릉 정도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린 아가씨에게 이렇게 고분고분 가르침을 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나릉은 나가의 아이 중 가장 출중했다. 그럼에도 나릉이 자신을 낮추며 심묘에게 묻자, 심묘보다도 마 씨를 비롯한 주위가 더욱 놀랐다.
“나릉 오라버니,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주지 않았어.”
나릉이 손을 들어 소식을 알리러 온 병사를 불렀다. 병사는 나릉이 생소한 아가씨에게 묻는 게 조금 의아했으나 성실히 답했다.
“돌궐족이 성 입구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군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성 수비군은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는 창피한 듯 말을 더 잇지 않았다. 하지만 심묘에게는 그의 곤란함을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사람은 많던가요? 모여 있나요, 아니면 흩어져 있나요?”
나십은 밝은 눈빛으로 심묘를 주시했다.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흩어져 있으나 말발굽 소리가 들리니 원군이 더 있을 겁니다.”
주변은 다시금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나릉과 나십의 안색이 더욱 나쁘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 요행을 바랐다면 지금은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말이 있다는 건 군대라는 의미였다. 평소 돌궐족과 맞서던 군대는 초원으로 떠났는데, 병력이 거의 없는 틈을 타 소춘성에 돌궐의 군대가 나타난 것이었다.
심묘의 말이 전부 맞았다. 돌궐족은 교활하게 변해 성동격서(聲東擊西, 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의 방법을 활용했다. 심지어 비밀리에 또 다른 군대를 만들어놓았다. 이 군대가 나가군의 주력을 상대할 만큼 강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후방의 소춘성을 휩쓰는 건 쉬울 것이었다.
마 씨와 여 씨도 상황의 나쁨을 깨달았다. 마 씨가 말했다.
“차라리 사람을 모두 불러서 너희와 아이들을 지키도록 하자꾸나.”
나가는 오래전부터 큰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아이들부터 보호했다. 늙은 세대가 희생해 새로운 세대에 희망을 남기는 것이었다. 나담의 눈언저리가 붉어졌다. 그녀는 모친 마 씨의 소매를 잡았다.
“싫어요, 어머니.”
“싫어요. 함께할 거예요. 어쨌든 우리도 뼛속 깊이 무장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야만인의 검은 두렵지 않아요. 기껏해야 같이 죽는 거겠죠.”
나천의 말에 마 씨가 화를 냈다.
“나천,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지금 나가서 죽고 싶으냐?”
나십이 엄숙하게 말했다.
“나와 형님이 너희를 보호해 도주할 수 있게 해줄게. 부에 마차가 있으니 성 후문으로 도망친 후 산길에 숨으면 발각되지 않을 거야.”
“안 돼.”
심묘가 그들의 말을 끊었다. 나십은 그녀를 보았다.
“방법이 있는 거야?”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천과 나담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방금까지 심묘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걸 보고 그들은 그녀에게 아주 큰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보기엔 연약하고 곱고 부드럽지만,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약간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니. 나천과 나담은 조금 절망했다.
“그럼 나십의 말대로 하자. 너희를 마차에 태워 호위가 뒤를 따라가게 할게. 나부에는 나와 나십만 남으면 돼. 우리는 성 수비군 쪽으로 갈 거야.”
나릉은 자신과 나십을 희생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 여 씨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나릉의 손을 잡고 혼절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모습에 마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너희 둘만 남기느냐. 우리는 한 가족이다. 가려면 같이 가야지.”
서로 양보 없이 맞설 때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는 같은 말을 또 내뱉었다.
“안 됩니다.”
“도대체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나천이 짜증을 냈다. 심묘는 나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소춘성에서 병력이 가장 큰 것은 나가야. 성 수비군의 우두머리는 나릉, 나십 오라버니지. 돌궐족도 이를 알고 있을 테니 성을 공격한다면 사기를 북돋우려고 제일 처음으로 나가를 처리하려 할 거야. 나가가 무너지면 소춘성의 백성은 투지를 잃어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겠지. 적을 잡으려면 두목을 잡아야 해. 내가 돌궐족이라면 모든 힘과 수완을 들이더라도 먼저 나가를 처리할 거야. 나가가 탈 없이 물러나는 건 불가능해.”
심묘는 숨김없이 무서운 사실을 드러냈다. 나담은 두려워 몸을 떨며 나릉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심묘의 말이 사실이야?”
나릉은 심묘를 똑바로 응시했다.
“맞아.”
나십은 분노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면 차라리 목숨 걸고 싸워보자. 우리 나가도 용렬하잖아. 무서울 게 뭐야?”
“조급할 거 없어.”
심묘의 말에 대청은 조용해졌다. 나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무슨 묘책이 있는 거야?”
“묘책이라고 칠 수는 없어.”
심묘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심묘의 표정이 유일하게 담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묘는 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돌궐족이 갑자기 성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마주했음에도 정경성에서 근심 없이 산 젊은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돌궐족이 병사를 데리고 왔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건 머뭇거림이 남아 있는 거야. 다소 걱정이 있는 거지. 나가군은 이미 흩어졌지만 남은 위력이 아직 있으니 적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어. 돌궐의 총사령관이 확신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탐색하고 있으니, 그걸 이용할 수 있겠네.”
마 씨와 여 씨는 심묘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으나 심묘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십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용하자는 거야?”
“시간을 끄는 거야. 내 아버지와 어머니, 외조부와 외숙부들은 비범한 분들이시지. 반드시 이 일의 이상함을 느끼실 거야. 이상하다 느끼시면 서둘러 소춘성으로 돌아오시겠지. 그전까지 시간을 끌기만 하면 돼.”
나담은 급한 성격이라 심묘가 시간을 끄는 걸 참지 못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끌면 되는데? 네 말대로라면 돌궐족도 똑똑하니 그들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 거야. 곧 공격할 거라고.”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니 그 무언가를 보여주면 돼. 그들은 나가군의 여력이 남은 걸 두려워해. 그러니 나가군의 여력을 보여주는 거야.”
나천은 초조해하며 쏘아붙였다.
“우리에게 여력이 어디 있어?”
“모두에게 협력을 요청해야 해. 그런데 오라버니들은 날 믿을 수 있겠어?”
심묘가 나릉과 나십을 바라보았다. 나릉은 아주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나십은 은은히 거친 기운을 풍겼다. 나릉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널 믿어.”
* * *
소춘성의 성루는 낡았고 흙과 먼지가 많이 쌓여 있어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 세대, 또 한 세대,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영웅이 소춘성의 평안과 안녕을 지켜온 것이었다. 그러나 벽돌 담에 균열이 생겼듯 견고해 결코 부술 수 없을 것 같던 문 역시 점점 삭아버렸다.
성루에는 많은 수비군이 왔다 갔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을 경계하고 있었다. 점점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고 보이는 횃불도 가까워지니 식은땀이 그들의 뺨을 따라 흘렀다.
돌궐족은 천성이 흉악했기에 여러 해 게으름을 피운 성 수비군 정도로는 맞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열세인 듯하자 수비군은 겁을 잔뜩 먹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심지어 멀지 않은 곳에서 불순 세력이 난동을 부리려 할 때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저게 뭐야?”
큰 빗소리도 이 소리를 덮지 못했다. 소춘성 안에 크고 작은 횃불이 타올랐다. 횃불은 빽빽했고 이를 따라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말 울음소리도 있었다. 양군이 대치할 때 척후병은 높은 곳에서 성을 탐문하는 법이었다. 소춘성을 수비하는 사람이 성문에 서서 돌궐족을 볼 수 있다면 돌궐족의 척후병도 당연히 성안을 볼 수 있었다.
소춘성 안에서 갑자기 샘솟은 사람과 말은 비 내리는 밤에도 또렷이 보였다. 하늘을 뒤흔드는 외침에 따라 말들이 바닥을 질서 없이 밟는 소리가 비바람과 함께 들렸다. 천군만마의 세찬 기세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나가군이다! 나가군이다! 나가군이 영광을 재현했다!”
성 수비군 중 누군가 외쳤다. 하마터면 기쁨에 꿇어앉을 뻔했다. 백 년 장군 가문의 나가였으나 여러 해 동안 쇠락해 명성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나수가 군대를 인솔해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위엄 있는 모습을 회상했다. 새로운 희망이 솟은 듯 사기가 갑자기 불어나 적은 인원의 성 수비군은 모두 칼을 뽑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뼛속 피까지 끓어오르는 듯 모두 고함치며 위세를 부렸다.
아무리 용기백배하더라도 걱정이 있다면 그 용기는 쇠하고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병사와 말 때문에 사기가 불어난 ‘나가군’의 명성을 본 돌궐족은 단숨에 기세가 꺾여버렸다. 이에 성루 아래 돌궐족은 병마를 멈추고 감히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한 시진이나 그 상태로 대치하던 돌궐족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성루 밖에서 돌격하는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가군의 주력 부대가 돌아온 것이었다. 돌궐족 병사는 힘은 세지만, 전략이나 전술은 오랫동안 장수로 지낸 나수와 심신만 못했다. 그들은 열세에 빠져 빠르게 나락으로 떨어졌다.
소춘성 안. 나부 입구에서 나릉은 병사의 보고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두 손을 모으고 심묘에게 인사했다.
“다 심묘 네 덕분이야.”
나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심묘, 너 정말 똑똑하다!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심묘는 불러모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에게 두 개씩 횃불을 들게 했다. 대장장이에게 얼른 말발굽을 만들게 했다. 그런 다음 백성들에게 말발굽으로 바닥을 두드려 큰 소리를 내도록 했다. 소춘성의 백성도 당장 생사가 달린 문제임을 알았기에 병사로 가장해 고함쳤다. 이는 비바람과 더해져 돌궐족을 속이는 데 충분했다.
많은 횃불을 본 돌궐족은 말발굽 소리와 고함에 나가군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져 나가군 일부가 소춘성을 지키고 있다고 여긴 것이었다. 두려워진 돌궐족은 돌진하지 않고 오랜 시간 탐색만 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벌어 초원으로 향한 나가군이 돌아오기만 하면 이후는 그들에게 맡기면 되었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묘책을 생각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법. 나십도 심묘를 인정했다.
“그래, 네 덕분이다.”
나담은 이런 방법을 고안해낸 심묘에게 탄복했다. 그녀는 심묘의 팔을 잡은 채 끊임없이 물었다.
“심묘야, 사실대로 말해. 너, 몰래 병법서를 보았지? 조부 서재에 있는 병법서에 이런 방법이 적혀져 있던 걸 기억해.”
심묘는 미소 지었다.
“요행이었을 뿐이야.”
마 씨가 감동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교교, 겸손해하지 마. 오늘 네가 없었다면 우리는 큰일을 당했을 거야. 넌 우리 부 사람을 구했을 뿐 아니라 소춘성의 백성도 구했어. 고맙구나.”
심묘는 속으로 실소했다. 사실 그녀가 겸손한 게 아니라 정말로 요행이었을 뿐이었다. 전생 돌궐족이 소춘성을 침략한 일은 알았지만, 심묘는 날짜를 정확하게 몰라 우박과 비가 오는 날인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 돌궐족이 소춘성을 공격했을 때 나수가 서둘러 돌아와 점령은 모면했지만 결과는 아주 처참했다. 소춘성의 백성이 무수히 살해당하고 말았었다. 그 당시 심묘는 부수의의 환심을 사려 배랑에게서 병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배랑이 알려준 가르침이었다.
“돌궐족은 다소 걱정하고 있기에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강경하게 맞서는 건 무익합니다. 큰소리치고 허세를 부려서 사람의 이목을 교란하는 것만 못하지요. 시간을 끌어 원군이 서둘러 오게 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해결될 일입니다.”
당시 심묘는 배랑의 말을 기록해뒀었다. 지금도 매우 또렷하게 기억했다. 심묘는 병법은 잘 모르지만 배랑을 믿었다. 궁에서 부수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료들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이 지금 그녀에게 많은 패를 쥐고 있게 했다. 모두 그 부수의가 준 선물이었다.
바깥 병사가 승전보를 전해오는 것을 들은 나천은 불안이 사라졌는지 심묘를 타박했다.
“심묘, 너 너무 나빠.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서 빨리 말하지 않고! 우리를 그렇게 겁주다니! 정말 놀라 죽는 줄 알았어.”
나담은 나천에게 꿀밤을 먹였다.
“창피하게! 젊은 아가씨보다 못해!”
“누나도 나랑 똑같잖아!”
나천이 반격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핵심 문제를 해결하면 잇따른 문제도 풀릴 것을 알았다. 일부러 위급하게 한 것은 나가 사람들에게 지금의 나가군에 의존하면 소춘성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나가를 보호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충분한 힘이 없으면 보호하고 싶은 사람도 보호할 수 없었다. 돌궐족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 지금은 물러나도 곧 다음을 다짐할 것이었다. 그날이 온다면 나가 사람은 또 어찌할까.
진정으로 위기를 의식했으니 긴장할 것이었다. 이제 나연영, 나연태 심지어 마 씨와 여 씨마저 있는 힘을 다해 나수에게 나가군을 재건하자고 권할 것이다. 나수가 아무리 강건해도 눈과 귀가 있으니 마음속 저울은 결국 기울 터.
심묘 한 사람만의 권유만으로는 완고한 나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가 사람 전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을 달성하려면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완곡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전생의 심묘는 하고 싶은 것을 직접 말하고, 직접 행동하다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미 부인은 완곡한 수완을 사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미 부인을 증오했지만, 부수의의 선물을 풀어 자기 것으로 삼았듯 미 부인에게서도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려 했다.
* * *
다음 날, 아침 햇살이 희미할 때 소춘성은 완전히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돌궐족은 매우 크게 패배해 퇴각했다. 심묘의 허장성세로 놀라 전의를 잃은 돌궐족은 심신과 심구에게 심한 타격을 입어 초원의 깊숙한 곳으로 돌아갔다. 이를 갈긴 하겠으나 짧은 시일 내 다시 찾아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전투에서 이겼고, 소춘성에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으나 성안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이번 돌궐족의 침입은 심묘의 추측이 현실이라고 증명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공포스러운 이웃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안심하고 깊이 잠들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 묘책이 심묘의 생각이라는 것을 안 나수는 심묘를 높게 평가했다. 심신은 더더욱 심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딸이 보통의 남자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재라고 칭찬했다.
이틀 후, 나수는 나가군을 재건하겠다고 선포했다. 온 소춘성이 환호했다. 백성들은 바쁘게 뛰어다니며 소식을 알렸다. 나가 사람들은 흥분했다. 심묘만 평온한 표정이었다. 예상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돌궐족이 소춘성을 공격한 사건은 나수가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 난처하게 추격당하기보다 재기하는 게 나았다.
일단 부족한 은자는 나설안이 저축한 것을 써서 해결하기로 했다. 군인을 훈련하는 사람은 심구와 심신이 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신나서 승낙했다. 갑옷을 벗었던 용감한 병사들을 전부 끌어모아 훈련하고 진을 쳤다. 수월하지 않은 일이지만 나가군도 원래 용감한 장수와 병사들이었다. 하기로 했으니 전력을 다했다. 소춘성은 금세 북적거리며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시간은 평온히,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어느 날 심묘가 탁자에 앉아 책을 볼 때 나담이 급히 달려왔다. 나담은 자칫 입구에서 넘어질 뻔했다. 곡우는 그런 그녀를 보고 놀랐다. 심묘도 눈을 크게 뜨고 나담을 바라보았다. 나담은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며 자신의 명치를 쓰다듬었다.
“심묘야, 너 얘기 들었어?”
“뭘?”
나담이 두서없이 손짓했다.
“그 사가 소후야! 이전 너와 말했던, 심구 오라버니와 같이 유명한 사가 소후야. 이전에 수령 인장을 요청해 북부 변경의 적과 싸우러 갔다고 하지 않았어?”
심묘는 또 한번 놀랐지만 나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소식은 너도 들었을 거야. 사 소후야는 매번 승전보를 전했어. 흉노는 큰 사막으로 쫓겨났지. 그 공로가 임안후보다 높으니 모두 사 소후야가 수도로 돌아가면 폐하께서 반드시 그에게 큰 관직을 내려줄 거라고 그랬잖아.”
나담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묘가 소춘성에 도착하고 오래지 않아 사경행은 사가군을 거느리고 북부 변경에 도착했다. 다들 사경행이 사가군을 통제하지 못할 거라 여겼지만, 사가군은 사경행의 지휘 아래 여러 번 뛰어난 공로를 세웠다. 군사를 배치하고 진을 치는 전략도 뛰어났고, 사경행 그 자신도 용맹하게 앞에서 지휘하니 온 명제에 칭찬이 자자했다. 그는 흉노의 수령과 싸울 때 흉악하고 냉혹해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사경행에 대한 최후의 의심마저 거뒀다. 모두 사경행이 명제에서 가장 출중한 남자라고, 장래 임안후보다 높은 자리에 있을 거라고 떠들어댔다. 심신과 나수 역시 때때로 세간의 기재(奇才)인 사경행의 이야기를 하며 그를 칭찬했다.
나담의 눈언저리가 붉어진 것을 본 심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나담이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터트렸다.
“죽었어. 사 소후야가 죽었어!”
나담에게 사경행은 심구 같은 영웅이었다. 그를 깊이 숭배해온 나담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사 소후야가 어제 후방에서 적군에게 포위당해 화살을 가슴에 맞았대. 그 후에 적군이 사람들이 보도록 피부를 벗겨 성루에 걸었대. 심묘야, 사 소후야가 죽었어!”
사경행이 죽었다!
경칩이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찻잔은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경칩은 찻잔을 치울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사경행과 조금이긴 해도 분명 친분이 있었다. 경칩은 이 소식에 심묘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어 긴장했다.
심묘는 흐느껴 우는 나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심묘의 표정은 대단히 차분했다. 사경행의 죽음이 기이한 큰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오늘 날씨가 좋네.”, “꽃이 피어 예쁘네.”와 같은 평범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책장을 쥔 손에 점점 힘을 주었다.
사경행이 죽다니. 화살에 심장이 뚫리고, 피부가 벗겨져 성루에 걸리는 결말은 전생과 같았다.
그러나 심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사경행의 죽음이 농담인지 사실인지 분별하려 했다. 그때 불현듯 소명랑을 광문당 대나무 숲에서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숲에서 키가 큰, 옥 같은 소년이 걸어 나왔다. 그는 테두리를 은색으로 장식한 상아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참으로 출중하고 도도해 보였다. 그는 우아하게 다가와 입꼬리를 올려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는 듯 마는 듯한 도화 눈은 사람을 취하게 했다. 삼 할의 경박함, 육 할의 탐색하는 기색, 일 할의 헤아릴 수 없는 분위기의 소년은 풍류가 있었다. 그는 권태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었다.
“너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