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늦은 봄, 풀이 자라고 꾀꼬리가 날아다녔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붉은색 꽃송이는 활짝 피었다. 온 소춘성 안에 봄날 특유의 향기가 가득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도 조금 적은 것 같았다. 빗물이 처마를 따라 똑똑 떨어져, 청석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맑고 투명한 물방울이 튀어 가련해 보이면서도 귀여웠다. 들보에 걸린 새장에서 꾀꼬리가 재잘재잘 울었다. 맑은 새소리는 빗소리와 섞여 솜씨 좋은 악사의 금 연주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복도 끝에서 묘령의 소녀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 소녀는 자신과 잘 어울리는 밝은 분홍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급히 달려오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웃음을 유발했다.
“심묘야, 심묘야!”
그녀 뒤를 따르는 소년이 큰 소리로 외쳤다.
“누나, 좀 천천히 가!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니까 조심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서 달리던 소녀가 비틀거리다 자칫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무예를 익힌 그녀는 얼른 자세를 다잡았다. 노기등등한 소녀는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원망스럽게 말했다.
“나천! 네 방정맞은 입 닫아!”
나천이 혀를 내밀었다. 나천의 뒤로 두 개의 가늘고 긴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담, 너 그런 성격으로는 시집 못 가니 알아둬라.”
나담은 발을 동동 굴렀다.
“나십 오라버니! 시집 못 가면 심구 오라버니에게 시집가지 뭐!”
“심구 형님은 누나 같은 드센 여자는 안 좋아할걸.”
나담의 말에 나천은 비웃었다.
“나천!”
나담이 그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제일 뒤에서 걷던 온화한 상의 청년이 웃으며 중재했다.
“됐다, 그만 떠들어. 심묘랑 이야기하러 온 거 아니야? 들어가자.”
시끌벅적한 그들이 가장 안쪽 뜰로 들어가니 화초를 돌보던 백로와 상강이 그들에게 인사했다.
“아가씨는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담이 방의 발을 들어 올렸다.
“심묘야!”
방에서는 평소와 달리 훈향이 나지 않았다. 여종이 어디서 찾아왔는지 말리화(茉莉花, 재스민)를 장식해두어 방에는 맑고 달콤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심묘는 창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구름과 기러기가 수놓인 짙은 청색 비단옷과 물총새가 수놓인 자주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주 짙은 색채임에도 조금도 노숙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옥같이 투명한 피부가 돋보였다.
심묘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수려하고 뛰어난 얼굴이 보였다. 수려한 눈썹, 둥근 눈, 붉은 입술, 하얀 치아는 초승달처럼 사람을 취하게 했다. 연약해 보이지만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녀의 기백과 도량은 용모와 다른 단단함이 있었다. 그 덕에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굳세게도 보였다.
심묘는 방문객의 정체를 알아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 서재가 궁전으로 변하고 그녀는 높은 자리에 있는 귀인처럼 보였다. 담담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처럼. 나가 사람들은 홀린 듯 멍해졌다. 여러 번 보아도 심묘의 풍채와 재화(才華, 뛰어난 재능)는 놀라웠다. 그녀에게서 늘 기묘한 기운이 감도는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나담이 제일 먼저 손을 휘두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심묘야, 네가 입은 치마 너무 예쁘다!”
평소 괄괄해도 나담 역시 아가씨인지라 예쁜 옷을 좋아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언니가 원한다면 하나 더 만들라고 하면 돼.”
나담은 입을 삐죽거렸다.
“이 색은 나랑 맞지 않아. 그저 탐이 났을 뿐이야. 소춘성 공자들이 온종일 나릉 오라버니에게 너에 대해 물어본다더니 과연. 너 갈수록 예뻐진다.”
그녀가 심묘를 살펴보며 탄식했다. 지금은 명제 71년이었다. 2년 가까이 흘러 심묘도 천천히 성장했다. 조금 치기 어렸던 얼굴은 점점 수려한 윤곽을 드러냈고, 귀여운 이목구비도 섬세해졌다. 그러나 온화한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성장하여 충만한 기백과 도량은 더 깊어졌다. 심묘가 밖으로 외출하면 사람들은 수시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으며, 나릉과 나십에게 평소 심묘에게 정혼자가 없는지 몰래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다. 소춘성에도 미인은 있으나 이렇듯 기질이 독특하고 출중한 미인은 심묘가 유일했다.
나천이 득의양양해 탁자에 한 손을 올렸다.
“그래, 누가 심묘를 좋아하지 않겠어? 심묘야, 너 폐하께서 또 은자를 보내신 거 알아?”
“하사품을 받은 거야?”
심묘가 대답하며 책을 거둬들였다. 나천은 예리한 눈으로 책 제목을 훑어보았다.
“<진국지>? 심묘야 너 왜 진국의 물건을 보는 거야?”
“그냥 본 것뿐이야.”
나십의 시선이 조금 빛났다. 나릉도 심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1년 내 하사품을 많이 내리셨어. 최근 하사가 너무 잦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릉은 아주 당연하단 듯이 심묘의 견해를 물었다. 자신보다 젊은 아가씨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 부끄럽거나 난감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함께 있는 나십, 나담, 나천도 그런 나릉을 비웃지 않았다. 심묘에게 능력이 있으니 물어볼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심묘의 신비함을 나가 어른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했다. 그들은 심묘가 비밀을 가지고 있어도 나가를 해칠 리 없다고 믿었다.
“일이 이상한 것 같으면 반드시 나쁜 의도를 품고 있는 법이지. 폐하는 의심이 많으셔. 나가군이 급부상하니 신중하게 억압하려 드실 거야. 그러나 잦은 하사를 하시는 걸 보니 한편으로는 나가군이 더욱 명성을 떨치기 바라시는 것 같아. 곧 명령하실 게 있다는 얘기지. 명제의 조공이 곧 시작될 거야.”
심묘가 낮게 읊조렸다. 나담은 턱을 어루만졌다.
“그럴듯한데.”
“진국과 대량에서 모두 사람을 보냈을 거야. 진국과 명제는 세력이 비슷하지만, 대량은 명제보다 훨씬 강하지. 폐하께서도 두려우실 거야. 심가군은 없고 사가군은 크게 상했으니 지금 명제에는 나라를 지킬 만한 무장이 없어. 폐하가 어떻게 하실 것 같아?”
“그래서 폐하께서 나가를 끌어올려 진국과 대량을 견제하시려는구나.”
나담이 민첩하게 대답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천은 숭배하는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같은 나이지만 나천은 매번 심묘가 자기보다 훨씬 더 어른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나릉보다 더 성숙하고 신중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조정 세력을 분석할 때는 회피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완곡하고 뒤엉킨 말에 비해 심묘의 말은 매우 신랄하고 직접적이었다. 어른들은 절대로 황제가 의심이 많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러니 나가 자녀들은 심묘와 놀기 좋아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심묘를 받아들였다. 심묘는 똑똑할뿐더러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경성 사람은 소춘성 사람보다 보고 들은 것이 많고 식견도 넓으니 심묘는 늘 그들이 모르는 일을 알고 있었다.
나십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 더 아플 거야.”
“맞아, 그러나 기회이기도 해.”
“심묘야, 무슨 기회라고 여기는 거야?”
나릉은 재차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나가군은 이 2년간 나아지는 기미를 보였어. 폐하께서는 일부러 밀어주고 계시지. 공로가 클수록 위험하겠지만, 나가군은 이미 얕보이지 않을 실력이야. 나가군은 모두 나가를 주인으로 여기지 천자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아. 나가의 병력이지 명제의 것은 아니란 거야. 폐하께서 나가 사람을 밀어주시면 단호하게 지키면 될 일이야.”
황제 아래 다른 자의 영토는 없고, 온 나라의 백성은 모두 황제의 신하였다. 그러나 심묘는 나가와 명제를 분명하게 두 개체로 구분했다. 나수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분노로 기절했을 것이다. 대역무도한 심묘의 말은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가 자녀들은 듣고 놀랐을 뿐 분노하진 않았다. 어른들과 다르게 아이들은 쇠락한 나가에서 태어났다. 그때 황실은 나가에게 은자를 주지 않았다. 작은 변경의 지역에서 잊힌 나가군의 아이들은 원망을 품고 자랐다. 원망이 있는 한 군주에게 충성하는 마음은 완전하지 못한 법이었다.
“심묘의 말이 맞아.”
나십의 시선에 열정이 스쳤다. 그는 온화하고 진중한 나릉과는 완전히 달리 거칠고 충동적이었다. 평소 칭찬하는 일이 적은 그가 심묘를 칭찬하니 심묘의 말에 아주 찬성한다는 뜻이었다. 나릉은 말을 아꼈으나 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활발한 성격인 나천과 나담은 심묘의 말이면 이유를 몰라도 믿고 따랐기 때문에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문혜제의 하사품은 어찌 봐도 이득이니 받지 않도록 말릴 필요가 없다고 합의했다.
나담은 탁자에 엎드려 심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심묘 지금 넌 열일곱이지? 어제 내 친구가 네가 정혼자가 없으면 자기 오라버니는 어떤지 보러 오라고 했어. 가서 볼래?”
소춘성의 민풍은 개방적이고 순박해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서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천이 나서서 반대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소춘성에서 열일곱은 급하지 않아. 누나는 열여덟이잖아. 자기 일이 더 급하지 않아?”
나담은 고개를 격렬하게 휘저었다.
“내가 뭐 급하다고! 나같이 예쁘고 똑똑하면 내가 여든이라도 혼담을 꺼낼 사람이 있을 거야. 난 심묘를 위해 마음을 쓰는 거잖아. 심묘는 연약해서 모두 걱정하니 일찍 낭군을 찾아 보호받게 하는 게 나아. 나천, 너야말로 이렇게 거칠면 앞으로 너에게 시집올 아가씨가 없을걸!”
나천은 승복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시집오지 않는다고? 정 안 되면 심묘가 있잖아? 심묘는 마음씨가 착해. 정말 아무도 시집오지 않으면 나와 혼인해서 날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야! 그렇지?”
나천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담이 손바닥으로 그 얼굴을 밀었다.
“거울 좀 봐봐. 심묘가 정말 혼인하려면 우리 부에는 나릉 오라버니와 나십 오라버니도 있어. 누구든 너보다 낫지 않아? 믿지 못하겠으면 오라버니들에게 물어봐. 심묘와 혼인을 원하는지 아닌지!”
나담은 나릉과 나십에게 화살을 돌렸다. 나릉은 얼굴을 조금 붉혔고, 나십은 가벼운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졌다. 나담은 이를 느끼지 못한 채 실눈을 뜨고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심묘야, 너는 어떤 남자를 좋아해? 잘생긴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무공이 뛰어난 사람? 시를 잘 짓는 사람?”
심묘는 나담을 바라보았다. 세 명의 남자는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귀는 쫑긋 세우고 있었다.
“내 큰오라버니를 이길 수 있는 사람.”
그 소리에 나천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가 억울한 듯 외쳤다.
“안 돼, 안 돼! 심구 형님의 무공은 엄청나다고! 누가 형님을 이길 수 있겠어!”
* * *
아이들이 심묘가 좋아하는 유형에 대해 말할 때 어른들은 심묘의 혼사를 이야기했다. 작은 방에서 마 씨, 여 씨, 나설안이 이야기 중이었다. 정경성 심부와 다르게 나가 여인들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여 씨는 온화했고 마 씨는 괄괄했으며 나설안은 아주 시원했다. 세 명의 여인은 성격은 서로 달랐지만 2년을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아주 잘했다.
여 씨가 초대장을 꺼내 나설안에게 줬다.
“이거 장 부인이 준 초대장인데, 언제 장부로 놀러 오라고 하네. 심묘도 데려오라고 했어.”
그녀는 주저하다가 심묘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 씨는 웃음을 터트렸다.
“장 부인은 평소 자신의 부에 장원이 있다고 무장을 무시하던데.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린 사람이 왜 우리에게 초대장을 보냈나 했더니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네. 심묘가 보고 싶으니 데려오라는 거구먼. 심묘가 참 인기가 많아.”
심묘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심묘의 혼사를 물어보는 소춘성의 사람도 적지 않았다. 소춘성 사람들은 처음에는 정경성에서 온 심묘의 성격을 잘 몰랐고 소문처럼 억지를 부리는 아가씨는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2년 동안 심묘는 평온하며 온순하게 지냈다. 부인들은 젊은 아가씨들에게서 잘 볼 수 없는 그 모습을 높이 샀다. 게다가 온화한 기백과 도량을 갖춘 심묘를 자신의 집에 들이면 복을 불러올 거라고 생각했다. 심묘는 용모도 훌륭하고 나가는 소춘성에서 명성이 높았다. 재건된 나가는 더욱 전도유망한 집안이 되었으니 중매하려는 사람들로 나가의 문지방이 빠르게 닳을 지경이었다.
마 씨가 질투 반 흠모 반을 담아 말했다.
“딸 하나에 많은 집안이 청혼을 하다니 참 좋은 일이야. 우리 나담은 다 컸는데도 종일 제멋대로 굴기만 하고. 청혼은 둘째 치고 중매하려는 사람도 없으니 이렇게 가다간 노처녀가 되는 게 아닐까?”
마 씨는 농담을 하려고 했으나 말을 할수록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나설안이 그녀를 위로했다.
“나담은 성격이 활발하잖아. 정말 좋은 자질이야. 적당한 신랑감이 있을 텐데 올케는 뭐가 급해. 교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어째서 육십 먹은 부인보다 더 묵직한 건지. 심신도 나도 그러지 않은데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어.”
마 씨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무슨 걱정이야. 심묘 같은 아가씨는 별로 없어. 전신에서 고귀한 기운을 풍기잖아. 궁중 마마도 그런 위엄은 없을 것 같아. 심묘의 기백과 도량은 정말 타고난 거야.”
여 씨도 따라 칭찬했다.
“맞아. 나와 동서는 소춘성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심묘 정도의 기백과 도량은 본 적이 없어.”
나설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물론 철든 것은 좋으나 나이에 비해 성격이 너무 가라앉았으니 걱정이 되었다. 나설안은 차라리 심묘가 나담처럼 좀 말썽을 부려도 좋으니 희희낙락하며 활발하길 바랐다.
여 씨가 갑자기 정색했다.
“아무튼, 심묘가 지금 열일곱이니 정경성에 돌아가지 않으면 조만간 혼인해야 해. 맘속에 적당한 혼처가 있어? 심묘는 응당 혼사를 말할 나이야. 소춘성 집안들은 심묘랑 혼인하려 안달인데, 시누이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나설안은 적극적인 성격이라 심신과의 혼인도 어른의 결정이 아닌 그녀 자신이 대담하게 나서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설안은 여 씨의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그건 교교의 뜻을 봐야지.”
“시누이는 정말 심묘를 시집보내기 아깝겠어. 심묘처럼 슬기롭고 차분한 딸이 있으면 나라도 시집을 보내지 않고 평생 곁에 둘 거야.”
정경성과 달리 소춘성 사람들은 딸을 일찍 시집보낼수록 좋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딸을 부에 오래 둘수록 애지중지한다고 느꼈다.
“나릉과 나십도 혼인할 나이니 차라리 심묘와 우리 집안이 정혼하는 건 어때?”
마 씨가 탐색하듯 물었다. 돌발적인 마 씨의 생각을 들은 여 씨의 눈도 환해졌다.
“나도 봤어. 나릉과 나십은 심묘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특히 나십. 다들 나십이 평소 아가씨들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거 알 거야. 그런 애가 2년간 적지 않게 심묘의 방으로 달려갔어. 감정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 난 조카를 잘 알아. 나십은 심묘를 좋아해.”
마 씨는 당장 행동에 나섰다. 나설안이 입을 달싹거릴 때 여 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십은 충동적이어서 사람을 아낄 줄 몰라. 심묘가 혼인하면 억울할 수도 있을 거야. 그 녀석은 머리도 나쁘다구. 반면에 나릉은 온후하고 나이도 적당하니 나릉이 나아. 나릉과 심묘는 지난번에 산책도 함께 갔어. 요새 나릉에게 혼담을 꺼낸 사람은 많지만, 나릉이 눈에 차지 않은 것 같아 나도 말하기 어려웠는데. 보니까 심묘를 좋아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군에서 돌아오자마자 늘 바로 심묘에게 갈 리 없지.”
여 씨의 말에 마 씨는 찬성하지 않았다. 마 씨도 강경했다.
“형님,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형님 말에 따르면 우리 나천도 심묘와 나이가 비슷한걸. 나천은 장난이 심하지만 심묘와 마음이 잘 맞고. 두 사람이 평소 잘 놀고 잘 어울리잖아. 그게 제일 좋은 거야. 그리고 우리 나담. 나담도 심구와 한 쌍을 이루면 어때? 친척끼리 겹사돈을 맺는 거네. 어떻게 생각해?”
말을 마친 마 씨가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나설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선에 어색하게 답했다.
“아이들의 뜻을 봐야지.”
나설안은 여 씨와 마 씨가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나설안도 이 제안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모두 나가 사람인 데다 나가의 아이들의 인품은 말할 것도 없고 용모도 좋았다. 그녀가 원하는 ‘관직이 너무 높지 않으며, 은자도 너무 많지 않고, 대신 심묘에게 마음으로 잘해 심묘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에 부합했다.
나설안도 한때는 연정을 품은 소녀였다. 심구는 둘째 치고 심묘의 상대부터 생각해보았다. 온화한 나릉, 용맹한 나십, 성격이 활달한 나천. 게다가 세 사람은 모두 선량했다. 심묘와 그중 어떤 사람이 맺어지든 혼인 후에 달콤한 가정생활을 만끽할 터였다.
그러나 나설안은 여전히 심묘의 생각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딸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이전에는 부수의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요 2년간 심묘는 단 한 번도 부수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이에 나설안은 안심하면서도 최근에는 심묘의 명랑하지 않은 성격이 걱정스러웠다.
마 씨가 서둘러 말했다.
“심묘에게 물어봐. 심묘가 정말 우리 애들 가운데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우리는 복이라 여기고 축하의 향을 피울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총명하고 딸이 태어나면 예쁠 거야.”
나설안은 계면쩍어했다.
“어디 막내가 먼저 혼사를 정해.”
마 씨는 손을 휘둘렀다.
“난 심묘를 행동이 재빠른 사람에게 뺏길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때, 남종이 다가왔다.
“마님,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장군께서 서둘러 바깥 대청으로 오시랍니다.”
“궁중 사람은 막 떠나지 않았나? 어째서 하사품을 또 보내온 거지?”
마 씨가 일어나면서 물었다.
“심 장군님께서 곧 수도로 돌아가셔야 할 듯합니다.”
남종의 대답을 들은 나설안이 일어나다가 굳었다.
나가의 바깥 대청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의 마음 역시 혼란스러웠다. 문혜제가 성지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문혜제는 심신에게 수도로 돌아와 위무대장군의 명칭을 다시 사용하라고 분부했다. 동호부와 심가군도 돌려주겠다고 했다. 2년 전, 문혜제는 심신을 버렸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세 드높게 추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심신이 이를 받아들이길 원하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일이었다.
나수는 2년 동안 나가군을 재건하는 일에 마음을 많이 써서 흰머리가 더 늘었다. 그러나 기세는 한창때 못지않아 아주 용맹해 보였다.
“명제가 조공을 시작할 것 같네. 조공 전에 폐하는 서둘러 자네를 수도로 소환하셨네.”
한 왕조는 백 년에 한 번 조공을 바쳤다. 명제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전, 첫 조공을 했는데 자칫 진국에게 허점을 보일 뻔했다. 당시 나라는 사가와 심가에 기대어 간신히 진국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진국 외에도 외교적 교섭을 목적으로 대량까지 명제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명제가 진국을 두려워하기에 진국 이상의 수준인 대량은 충분히 명제에 명령할 수 있었다. 대량은 서쪽에 위치해 국력이 부강하고 군대는 강했다. 더욱이 대량의 황제인 영락제는 일대의 명군이었다. 뒤죽박죽인 명제 조정과 달리 대량의 조정은 조건 없이 인재를 임용해 충성과 정의가 넘치는 사람이 많았다. 대량이 야심을 품는다면 명제를 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대량의 황제인 영락제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랫동안 그럴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영락제가 천하 통일에 관심이 없다는 한 가지 가능성도 있었다.
천하는 분열하면 반드시 한데 모이고 통일되면 반드시 흩어지는 법이었다. 진, 량, 제가 있는 한 언젠가 합쳐질 것이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문혜제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그날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사경행의 죽음 후 사정은 조정 일에 마음이 없었다. 남은 심신은 동호부를 뺏겨 소춘성에 있었다.
심신에게 동호부를 빼앗은 일을 문혜제가 후회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문혜제는 심신을 불러 모양을 갖출 수 있길 바랐다. 게다가 심신은 나가군의 재건을 도왔으니 그의 군사적 능력이 녹슬지 않았음은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문혜제는 명제에 심신이 필요하다고 뜻을 표명했다.
이전에 심신은 필요할 때 나타나고 불필요할 때 묵묵히 물러나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황실의 무정한 대우를 겪고 난 후에 심신은 사심을 알게 되었다. 장수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데 명제의 황제는 심신을 알아준다고 할 수 없었다.
“자네는 반드시 돌아가야 하네. 심신, 자네가 잃은 물건을 전부 찾아오게나. 나가의 사위, 심가의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게.”
나수의 말에 심신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묘는 문혜제가 심신을 수도로 소환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정경성의 정세가 크게 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루한 나 대장군이 이런 대역무도한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심묘는 눈을 조금 부릅떴다. 그 표정을 보고 나수는 살짝 웃었다.
“심묘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내 말이 맞지?”
사람들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나연영과 나연태의 표정이 변했으나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녀의 작은 재주로는 백전의 노장인 나수를 속일 수 없었다. 세상일을 두루 겪은 나수의 눈은 처음부터 심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심묘는 나수의 신임과 지지가 고마웠다. 가족이 뒤에 있다는 느낌이 참 좋았다. 심묘는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습니다. 외조부.”
나수가 한차례 크게 웃었다.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미소가 떠다녔다. 나십도 빙그레 웃었다. 나담과 나천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나설안과 심구의 시선은 복잡했다. 2년 전 떠난 정경성에 돌아가야 했다. 잃은 물건을 되가져와야 했다. 병력, 성세, 명성 그리고 존엄까지. 모두에게 진정한 심가가 어떤지 보여줄 것이었다. 늙은 범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외지를 떠돈다고 개가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숨어 있던 용은 마침내 구천을 빙빙 돌며 날 터였다.
심신이 나수에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장군의 가르침을 공손히 듣겠습니다.”
* * *
소춘성에서 정경성까지는 반년이 걸리는 거리였다.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천릿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고된 여정이었다.
심신은 성지를 받은 다음 날 바로 출발했다. 나릉과 나담이 동행했다. 나수는 나릉이 심신 일행을 따라가도록 명했다. 나릉은 나가의 장손으로 나가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수는 그가 정경성에서 경험을 쌓고 명제의 정세를 자세히 알아보길 바랐다. 나십은 소춘성에 남아서 어른들과 함께 나가군을 훈련하기로 했다.
나담의 동행은 의외였다. 나담은 같이 가기로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몰래 상자에 숨어 있다가 한참이 지났을 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소춘성에 다시 보내려 해도 너무 멀리 와 그럴 수 없었다. 난감해하는 심신에게 나담은 사고를 치지 않을 거라 거듭 맹세했다. 결국 심신은 소춘성에 편지를 보내고 나담을 정경성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는 정경성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가득 안고 심묘와 동행하게 되었다.
심신은 심가군 전체와 나가군 일부를 데려갔다. 이들은 심신과 심구에게 훈련받은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기에 어떤 군대에 데려다 놓아도 훌륭할 것이었다. 심신은 자신이 키운 그들에게 호위의 명분을 줘 곁을 따르게 했다.
봄에 출발한 그들은 늦가을에야 도착했다. 길가의 푸르르던 녹음은 단풍으로 변해 바람에 떨어져 거름이 되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일행은 성 밖 여관에서 휴식했다.
“내일 일찍 성으로 들어가서 주택 하나를 찾자.”
심구가 말했다. 그들은 심가 사람들과 갈라섰으니 심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가에 있을 때 나설안은 나수에게 분가의 일을 말했기 때문에 나릉과 나담도 놀라지 않았다.
나담은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고모, 고모부, 우리 번화한 곳을 찾아 머무는 건 어때요? 전 정경성에 가보지 않았어요. 머무는 주택의 문을 나서자마자 번화가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설안은 미소 지었다.
“이전에는 성 동쪽이 가장 번화했는데 그간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겠구나.”
“간단해요. 여기, 정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어딘지 아나요?”
나담이 요리를 내오는 점원에게 물었다. 그 점원은 그들 일행의 신분을 알지 못했으나 인원이 많고 모두 차림새가 좋으니 귀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정중앙에 앉은 아가씨는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기백과 도량이 깊어 보였다. 점원은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아가씨, 정경성에는 번화한 곳이 아주 많습니다. 성 동쪽과 남쪽 모두 번화가입니다. 성 동쪽에는 상점이 많아서 아가씨들이 물건을 사기 편리합니다. 성 남쪽에는 식당이 많습니다.”
나담은 이 답변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지 코를 찡그렸다.
“그냥 그게 다예요?”
“아가씨께서 정말 번화한 모습을 보고 싶으시면 성 남쪽으로 가세요. 최근 진국과 대량에서 사람이 왔는데 폐하께서 그들을 성 남쪽 연경 골목 관저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연경 골목이 뭐야?”
“연경 골목은 정경성에서 땅값이 가장 높은 곳이야. 폐하의 친척도 살지 못할 곳이지. 황자 전하가 출궁해 부를 만들 때도 살지 못해. 황후마마의 형제인 국구야가 연경 골목에서 짧은 시간 동안 지냈었지.”
나담의 물음에 심구가 설명했다. 놀란 나담은 낙담했다.
“연경 골목이 그렇게 비싸다고요? 그렇게 비싸면 그곳 주택을 사진 못하겠네요.”
나담의 말을 들은 점원이 세심히 그녀를 관찰했다. 연경 골목 주택은 사기는커녕 며칠 빌려 지내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사다니, 점원은 이 일행이 성에 처음 들어오는 시골뜨기인데 자신이 처음에 잘못 보았나 의심했다.
“괜찮아. 연경 골목 근처로 가면 돼. 식당과 인접해 있지. 연경 골목 밖은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 않아서 살 수 있어. 연경 골목과 멀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기도 쉬울 거야.”
심묘의 말에 점원이 얼른 맞장구쳤다.
“아가씨 말씀이 맞습니다. 분명 그러합니다.”
“교교도 번화한 곳을 보고 싶으냐?”
심묘가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걸 잘 아는 심신은 그녀의 말이 흥미로웠다.
“약간은 신선할 것 같네요.”
심묘가 웃었다. 나담은 두 눈을 빛내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해주었다고 여기곤 감격했다.
“좋아, 좋아. 심묘가 최고야!”
“진국과 대량의 사람은 이미 왔나요?”
심묘가 점원을 바라보았다. 점원은 나이가 가장 어려 보이는 심묘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이곳에 앉아 있으니 의자도 금빛으로 찬란히 빛난다고 느꼈다.
“네. 진국과 대량에서 모두 외교 교섭을 위해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지금 그들은 배정받은 연경 골목 안 관저에서 머물고 있어요.”
“진국과 대량은 누굴 보냈나요?”
점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진국은 태자 전하와 명안 공주마마가 있으시고, 대량은 영락제의 친동생인 예왕 전하입니다.”
“고마워요.”
점원이 떠나자 나릉이 물었다.
“심묘, 진국과 대량에서 온 사람에 대해 무슨 궁금한 게 있는 거야?”
“아무것도. 조금 호기심이 들었을 뿐이야.”
심묘가 웃었다. 나담은 실눈을 뜨며 기대감에 부풀었다.
“어쨌든 내일 우리가 정경성에 도착하면 번화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 * *
문혜제의 침전.
짙은 약 냄새가 가득했다. 향로 안 훈향은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우울하게 했다. 문혜제는 눈을 반 정도 감은 채 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온화한 분위기의 여인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한 숟가락씩 그에게 약을 먹였다. 동숙비였다.
그녀는 아주 참을성 있게 조심조심 약을 먹이고 있었다. 문혜제는 약을 한 번에 다 마시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동숙비는 약이 뜨겁지 않도록 입으로 불어 식힌 후 문혜제의 입안에 넣었다. 그녀는 문혜제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그의 호흡이 순탄하도록 했다.
가까스로 약을 다 먹인 동숙비는 설탕에 절인 과일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문혜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삼켰다. 쓴맛이 사라졌다.
“그대는 이것을 잊지 않는군.”
“폐하께서는 쓴맛이 두렵지 않으실 테지만, 신첩은 폐하께서 쓰실까 걱정이랍니다. 폐하, 신첩의 얼굴을 봐서 과일을 조금 드십시오.”
동숙비가 부드럽게 웃었다. 문혜제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당신이 이 궁에서 짐의 마음을 가장 잘 아오.”
2년의 세월 동안 변할 수 있는 건 아주 많았다. 문혜제가 얼마나 정정하든 결국 세월에 침식당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그보다 젊고 건강하며 야심이 대단한 아들들이 있었다. 위급한 내외 정세를 겪으며 그는 많이 늙었고 병도 점점 자주 앓았다.
태자의 병세도 위급해서 태자를 지지하는 일파는 점점 흩어졌다. 주왕 부수안의 기세가 강했으며 헌왕과 리왕도 호시탐탐 황위를 노렸다. 이에 싫증이 난 문혜제는 세속과 싸우지 않고 남과도 싸우지 않는 동숙비와 부수의가 눈에 들었다.
황제는 야심 없는 아들과 여인에게 가장 안심하는 법이었다. 병이 난 문혜제는 동숙비를 불러 자신을 시중들게 했다. 그러나 총애를 받아도 동숙비는 평소처럼 신중하고 소심했다. 문혜제 앞에서 결코 부수의의 일을 꺼내지 않아 문혜제는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그는 때때로 동숙비와 조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이야기했다.
문혜제가 탄식했다.
“조공이 곧 시작될게요. 심신은 며칠 후 돌아온다더군. 2년 전 짐이 그를 쫓아냈으니 그가 아직도 노기를 품고 있을지 걱정이구려. 정세가 긴급하지 않았다면 짐은 절대 늑대를 끌어들이지 않을 거요.”
동숙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폐하, 심 장군은 폐하의 신하니 당연히 폐하를 위해 일할 겁니다. 폐하는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십니까?”
문혜제는 냉소했다.
“신하? 그 신하가 짐보다 위세가 높은데 짐이 어떻게 그를 신하라고 믿을까? 임안후도 이와 같았지. 그러나 아들을 잃어 사가는 아주 약해졌어. 짐은 그런 사가를 모조리 없애기는 싫소. 조공이 끝나고 나면 심가는……. 짐은 늘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느낀다오.”
동숙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첨언한다면 자신이 정치에 간섭한다는 오해를 살 터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그릇만 만지작거렸다.
동숙비의 숙방궁. 화려한 복장에 높은 관을 쓴 부수의가 서 있었다. 2년 전보다 더욱 신중하고 성숙해 보이는 인상에 말로 하기 어려운 훌륭한 용모와 품행을 갖추었지만, 순간순간 냉혹한 풍채가 엿보였다.
호위가 그에게 다가와 몸을 굽혔다.
“심 장군은 오늘 성 밖에서 묵고 내일 일찍 수도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부수의는 그 순간 술잔을 꽉 쥐었다. 곧 그가 표정을 풀고 웃었다.
“배 선생의 신묘한 지략과 교묘한 계책이 과연 맞았구나. 내일 정경성에 도착한다라……. 성문 호위는 모두 들으라, 심 장군이 수도로 돌아올 때 온 성이 영접하도록 하라.”
호위가 인사 후 서둘러 물러갔다.
부수의는 뒷짐을 지고 섰다.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2년 전 심가는 그의 계획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 심가가 다시 정경성으로 돌아오니, 부수의는 그들이 진작 계략을 꾸몄다고 여겼다. 일찍부터 정경성으로 돌아올 줄 알았으니 떠날 때 심가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부수의는 심가를 다시 표적으로 삼는 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혜제, 주왕 일파, 리왕 일파, 거기에 진국과 대량이 심신을 주시하도록 말이다. 부수의는 원한을 가슴 깊이 새겨두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그에게 계략을 부렸으니 심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심신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길을 재촉해 정오 전에 정경성에 도착했다. 주택을 찾아야 하니 일찍 도착할수록 좋았다.
“심 장군이시군요!”
성문을 지키는 수비군이 심신의 요패를 보자 경건한 태도로 옷깃을 여몄다. 그는 성문을 열도록 한 후 심신 일행을 맞이했다.
“고모부, 다들 고모부를 아주 존경하는 것 같네요. 고모부의 명성이 아주 대단한가 봐요.”
나담의 말에 심구와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경성을 떠날 때 수비군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니 수상했다. 단순히 심신이 진국과 대량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나담은 마차의 발을 들어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바로 정경성인가? 정말 크고 번화하다! 소춘성보다 사람이 아주 많네. 심묘야, 이곳 아가씨들은 생긴 게 너무 예쁘다. 어떻게 저리 생기가 있지? 세상에, 공자들도 모두 말쑥하네.”
사람들은 요란스러운 나담을 쳐다보다가 나담 뒤 일행을 보고 놀라 외쳤다.
“심 장군, 심 장군이 돌아왔다!”
심 장군이 돌아왔다!
명제 백성 사이에서 심신의 명성은 혁혁했다. 이 2년간 사가에는 사고가 생기고 심가도 없었으니 사람들은 영웅의 말로가 처량하다 느꼈다. 심지어 진국과 대량에서 사절단이 오자 그들과 대등한 사람이 없다는 열등감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이때 심신이 나타나니 백성들은 믿을 사람이 생긴 것이었다. 곳곳에서 탄성이 들렸다.
“심 장군이 돌아왔다!”
군중이 모여들어 환호했다. 마차가 앞으로 나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심신을 외쳤고 얼굴에 성원의 기색이 보였다.
나담은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고모부, 성망이 높으신가 봐요.”
마차 밖에 있는 나릉 일행의 안색은 난감했다. 환영 인파가 늘어선 것은 좋고, 성원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매년 심신이 개선해 돌아올 때 이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은 공로 없이 돌아왔다. 게다가 잘못을 저질러 소춘성으로 나가 있다가 황제의 소환을 받아 돌아온 것이었다. 백성들의 환호는 문혜제에게 치욕을 주는 셈이었다.
마차 안 나설안과 심묘의 안색도 가라앉았다. 심묘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나담만 일의 이면을 몰라 심신의 명망 있음을 기뻐했다.
도로가 막혀 오도 가도 못 하자 심신은 호위 몇 명을 시켜 백성들에게 비켜달라 부탁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여전히 심신 일행 곁에서 떠날 줄 몰랐지만 길은 터주었다. 모경과 아지가 말을 타고 먼저 주택을 찾으러 갔다. 심묘가 말한 성 남쪽 연경 골목 근처 거리 주택이 물색 대상이었다. 지금 심신은 나가군을 재건할 때 은자를 많이 써 이전처럼 부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가 성 남쪽 주택에 머물고 싶다니 심신은 두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마차는 성 남쪽으로 달려갔다. 연경 골목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연경 골목에 사는 사람은 대다수가 고관 귀인이거나 부자가 아니어도 고귀한 인물이었다. 보통 백성은 이 부지에 머물 수 없었다. 환영하던 백성도 이곳에 도착하니 많이 흩어져 이동이 순조로웠다.
모경과 아지가 빠르게 돌아와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은 주택 하나를 찾았고 그곳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전했다. 주택 주인이 심신의 명성을 존중해 값을 저렴하게 내놓았기 때문이다.
연경 골목에서 담 하나 떨어진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심묘가 앉은 마차 발이 바람에 날아올랐다가 떨어졌다. 심묘의 시선이 살짝 엉겨 붙었다.
“왜 그래?”
마차 발을 힐끗 바라본 심묘가 나담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그 찰나, 누군가 엿보는 것 같았다. 주시당하는 느낌은 그녀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다.
* * *
좀 거리가 있는 루의 꼭대기, 옥 피리를 손에 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여자는 꽃 같은 외모에 금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큰 눈과 작은 입은 물론 온몸이 옥 같아서 속된 장신구를 하고 있어도 보기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귀여워 보이게 했다. 그녀가 먼 곳에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저게 위무대장군 심가인가? 큰 명성도 이 정도밖에 안 되네.”
곁에 있는 남자는 대략 이십여 세로 보이고 용모는 그녀와 비슷했다. 준수하게 생겼으나 코가 조금 구부러졌고 괴팍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그는 웃었다.
“명제 황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있으니 간단하지도 하찮지도 않아.”
소녀는 거만한 모습으로 말했다.
“태자 오라버니, 또 농담하는구나. 임안후 사가도 법을 무시하고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상갓집 개 같은 처지 아니야? 사경행은 시체도 남지 않았어. 심가는 제2의 사가가 될 거야.”
남자는 웃었지만 여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남녀가 있던 곳과 다른 어느 누각. 무성한 상록수가 한 사람의 그림자를 절반쯤 덮어 그가 입은 황금 장포만 드러났다. 그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하얀 고리가 달려 있으니 상등품이었다. 그가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자 아름다운 턱이 드러났다. 얇은 입술은 조금 붉었다. 찻물로 축축해진 붉은 입술은 사람의 혼을 끌어들였다.
그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모경이 찾은 주택은 연경 골목과 한 구역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다. 게다가 한 골목을 돌면 바로 성 남쪽의 가장 번화한 식당과 상점이 끊임없이 있어서 위치가 아주 좋았다.
시원스러운 성격인 심신과 나설안은 주인이 제안한 가격을 바로 지불했고, 주택은 주인이 바뀌었다. 막 짐을 풀고 있을 때, 태감이 성지를 전했다. 심신에게 다음 날 입궁하라고 한 것이었다. 문혜제가 일각도 지체하지 않으니 정말 정세가 위급한 게 명백했다. 성지를 받고 서둘러 물건을 마저 옮기자 어두워졌다. 긴 여정의 끝에 사람들은 각자 휴식을 취했다.
심묘와 나담은 서로 인접한 뜰에 묵었다. 이곳 주택은 심부처럼 넓지 않았으나 단정하고 깔끔하며 조형이 독특했다. 이 뜰에서는 병사 훈련을 할 수 없기에 심신과 심구는 애석해했으나 나설안과 나담은 아주 만족했다. 심묘는 장소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이의가 없었다.
깊은 밤, 나담은 또 심묘의 방으로 들어왔다. 나담이 피풍의로 몸을 감싸며 심묘의 침상에 앉았다.
“심묘야, 잠이 안 와. 나랑 이야기하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심묘는 경칩을 물러가게 하고 등불을 밝혔다. 그녀는 잠 잘 생각이 없어 책을 가져와 보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경성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난 소춘성에서 성장해서 바깥도 소춘성 같을 거라고 여겼어. 정경성이 훨씬 크고 번화할 거라고 말은 들었지만……. 심묘야, 나 조금 겁이 나.”
나담의 말투는 그녀가 실망했는지 기뻐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대범하던 나가의 큰 소저가 겁이 난다고 고백하니 심묘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게 뭐가 겁이 나?”
“혼자 나와 있으니 무섭지. 나릉 오라버니가 있지만, 익숙한 소춘성이 아니잖아. 심묘야, 너도 이렇게 겁날 때가 있어? 고모부와 고모가 서북으로 가고 너 혼자 정경성에 남아 있었을 때, 겁나지 않았어?”
“뭐가 겁나.”
심묘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녀는 심부에 남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 당시 그녀는 심부 사람을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담처럼 혼자 바깥에 있으며 두려움을 느낀 때는 진국에 있을 적이었다. 진국을 생각하자 심묘의 시선이 반짝였다. 어제 식당 점원의 말이 떠올랐다. 진국과 대량에서 사람이 왔다.
전생에서 심묘는 진국 태자와 대량의 사람을 보았다. 당시 명제 황실은 야심이 용솟음치는 대량을 두려워했다. 대량과 상호제약하여 균형을 이루기 위해 명제와 진국은 서로 탐색했다. 부수의가 등극하고 난 후 명제는 진국과 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황후인 심묘가 진국에 인질로 간 것이었다. 진국 태자 황보호는 매우 악질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일부러 심묘가 원하는 바와 반대로 행동해 그녀를 난처하게 하길 즐겼다. 명안 공주는 거만하여 사람을 두렵게 했다. 진국에서 겪은 곤란하고 굴욕적인 일들은 모두 이 두 사람이 꾸민 일이었다.
대량의 예왕을 생각하자 심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 대량에서 파견한 사신은 예왕이 아니었다. 황실의 다른 친척이었다. 예왕은 영락제의 친동생인데 조정에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전생 명제 황후인 심묘도 예왕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고 부수의도 이 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일이 조금 변한 것 같았다.
나담은 심묘가 넋을 잃은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나는 정경성에 한번 와서 사 소후야를 보려고 했어. 지금 정경성에 있는데도 그를 볼 수가 없네. 어떻게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할 걸까?”
나담은 슬퍼했다. 심묘는 멍해졌다. 2년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점점 뚜렷해졌다. 정경성에 돌아오자 이전 심부의 하인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해줬다. 그중에서도 임안후부가 가장 큰일을 겪었다. 사경행이 죽은 후 사가군의 원기는 크게 상했고 사정은 하룻밤 사이 열 살은 더 늙은 것 같다고 했다. 사정은 문혜제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청했으나 문혜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정은 관직에 억지로 있을 뿐 아무 의욕이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보냈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모두 벼슬에 올랐다. 관직이 높진 않으나 평은 꽤 좋았다. 몇 년이 지나면 젊은 세대 중 걸출한 사람이 될 정도였다.
정경성에 사경행의 부고가 들렸을 때 송신 공주는 임안후부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녀는 사정이 무정하다고 비난하며 옥청 공주도 죽고 사경행도 죽었으니 임안후부가 사람을 잡아먹는 마굴이라고 욕했다. 송신 공주는 울면서 임안후부의 집기를 마구잡이로 파괴했다. 그 후 송신 공주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는 일이 없다고 했다.임안후와 깊은 친교를 맺은 소가 역시 지난 2년 동안 쇠락했다. 소욱의 전도양양하던 아들도 점점 조용해졌다. 사가와 소가는 사경행의 죽음을 따라 기울어졌고 이에 백성들도 애석해했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소년은 고집스러웠으며 용감했다. 전쟁터에서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지냈으나 끝은 처참한 죽음이었다. 사경행의 부고를 들은 명제 소녀들은 모두 한바탕 울었다.
심묘는 타오르는 등불을 바라보며 눈길을 거뒀다. 그사이 나담은 이미 침상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 * *
나설안이 긴 머리를 빗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지만 머리카락은 변함없이 검고 빛났으며 흰머리도 없어서 이팔청춘에 견줄 수 있었다. 심신은 옆에서 두꺼운 갑옷을 벗었다.
“내일 입궁하는 것, 걱정이에요.”
“뭐가 두렵소? 우리가 처음 입궁하는 것도 아닌데. 겁내지 마시오. 내가 있잖소.”
심신은 나설안의 어깨를 잡고 위로했다. 나설안이 그에게 눈을 흘겼다.
“내가 어디 그걸 겁내요? 당신도 알 거예요. 궁중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요. 아버지는 폐하께서 우리 심가를 통제하기 위한 무언가를 손에 넣으실까 걱정이라고 하셨어요.”
심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부인, 그 뜻은?”
“교교와 심구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어요. 소춘성에 있을 동안 두 사람이 혼약을 했다면 좋았을 거예요. 한 가지 일을 끝낸 거니까요. 그런데 폐하의 성지가 이렇게 빠를지 예상하지 못했어요. 지금 심가가 다시 우세를 점유한 것 같으니 정경성의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있죠. 폐하께서 심가를 옭아매려 심구와 교교의 혼사를 가지고 일을 만들면 어떡하죠?”
“어떻게 그럴 수가? 허튼소리하지 마시오!”
심신이 놀라 외쳤다. 그는 심구와 심묘의 혼사를 정치적인 사심에 얽히게 할 생각이 없었고 더욱이 그들 혼사를 이용해 심가를 다른 세력 안에 두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심구는 둬도 교교를 더 둘 수 없을 거 같아요. 교교는 지금 열일곱이에요. 소춘성에서는 아니지만, 정경성에서 이 나이는 혼사를 논할 나이에요. 궁에서 소식이 없을 때 교교의 혼사를 결정해야 해요.”
“이렇게 급히? 주위에 어떤 집안이 있소? 상대의 인품을 자세히 알아야 하오.”
나설안이 심신을 바라보았다.
“나릉은 어때요?”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심신과 나설안은 심구를 데리고 입궁했다. 그들은 오후에야 돌아왔다. 문혜제는 약조한 대로 심신을 다시 위무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동호부도 돌려주었다. 어림군에 보충했던 심가군도 돌려줬으나 심신은 그 사실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고통은 사람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었다. 간고한 환경인 소춘성에서 심신은 나가군을 뛰어난 경지로 키워냈다. 심신은 2년 전에 비해 총애나 모욕에 무덤덤했다. 문혜제가 그를 내치고도 다시 불렀음에도 심신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심신과 나설안이 입궁을 하고 오래지 않아 심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심부는 심묘를 부로 초청했다. 그러나 심묘는 그들을 상대하기 싫어 여종에게 자신이 없다고 전하라 했다. 그러자 심부에서 온 사람은 입구에서 이전 일은 모두 오해라고 변명하다가, 나중에는 심신 부부가 정이 없고 의리가 없는 불효자라고 욕했다.
이를 들은 나릉은 눈살을 찌푸렸다. 격정적인 나담은 문을 열고 심부 사람에게 큰 소리로 한바탕 욕을 했다. 나담은 어려서부터 소춘성 아가씨들과 말다툼을 자주 해 논리정연하게 비꼬는 데 소질이 있었다. 심부 사람은 당시 어려움을 틈타 한 가족에게 해를 가하더니 지금은 또 얼굴을 바꾸냐고 비아냥대자 주위 백성들도 동조하며 함께 손가락질했다. 심부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빨개져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심신이 돌아온 후 심묘가 이 일을 알렸다. 잠시 침묵하던 심신은 모경에게 입구 호위를 더 늘리라 분부했다. 그는 정말로 조금의 인정도 남기지 않은 모양으로 나담의 입담에도 통쾌해했다.
나설안이 탁자에 앉아 말했다.
“우리는 사흘 후에 있을 조공연회 때 입궁해야 한단다. 재봉사를 불러 새 옷을 재단하자꾸나. 그동안 정경성에 없었기 때문에 어떤 옷이 유행인지는 잘 모르지만, 티 낼 수는 없지.”
그녀는 심묘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이전 사람들이 심묘에게 머저리라고 했다면 지금의 심묘는 환골탈태를 거쳐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온몸에 기백과 도량이 흘러넘쳐 공주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나담은 흥분했다.
“입궁! 궁중 사람을 볼 수 있겠네요! 진국과 대량의 사람도 볼 수 있을까요? 진국 사람은 덩치가 아주 크고 대량의 사람은 용모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몇 명이나 볼 수 있을까요?”
나설안은 미소 지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어. 만일 나담 네가 조공연회에서 사모하는 공자를 발견하면 고모와 고모부가 알아봐 주마.”
나담은 혼인 얘기를 듣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난감해하지 않고 오히려 심묘를 보며 웃었다.
“전 급하지 않아요. 심묘부터 진지하게 고려해보세요. 소춘성에 있는 사람들은 심묘의 눈에 차지 않으나 정경성에는 공훈 공자들이 많잖아요. 심묘의 마음에 들면 고려해봐도 좋죠.”
심묘는 나담을 힐끗 보았지만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릉은 젓가락을 든 손을 멈칫했다. 시선은 망설이는 듯했다.
오후에 재봉사가 옷을 만들러 왔다. 문혜제는 심신을 다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하사품을 내렸는데, 나설안은 그중 품질 좋은 옷감으로 의복을 만들기로 했다. 그녀는 겨울에도 입을 수 있도록 여러 벌 만들라고 분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질이 좋은 머리 장신구까지 고르자 두 아가씨의 단장은 산뜻하며 매력적이었다.
나설안이 두 사람을 잘 꾸며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공은 큰일이었다. 명제는 반드시 진국과 대량에게 부강한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이에 문무백관은 가족을 데려오며 각종 화려하고 귀중한 옷과 장신구로 단장을 해야 했다. 명제의 체면을 떨어뜨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볼품없이 오는 사람은 천하의 죄인이 될 정도였다.
나릉도 함께 입궁할 준비를 했다. 나릉의 능력을 키우는 셈이었다. 그가 정경성에서 친구를 사귀면 장래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후 사흘 동안 심묘는 매일 경칩과 곡우에게 그동안에 발생한 일을 탐문하도록 시켰다. 풍선전당포는 심신이 소춘성을 떠나고 오래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하여 그녀를 의아하게 했다. 그러나 근래 다시 개장했다고 한다. 주인이 멀리 나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심묘가 돌아온 것을 안 풍안녕은 편지를 보냈다. 심묘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조공연회에서 만날 테니 그곳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소명랑도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남종을 통해 보낸 편지의 삐뚤삐뚤한 글자를 본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나담과 쉴 새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자 눈 깜짝할 사이 조공연회 날이 되었다. 명제 조공은 온 왕조의 큰일이기에 아침 일찍부터 남산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거리 위 상인들도 이에 대해 떠들썩하게 얘기했으나 황실 연회에 백성들이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그들은 궁 밖에서 안의 소리와 인기척을 들으며 관가를 흠모했다. 관가의 식구는 입궁이 가능했고, 관직이 높으면 조공연회에도 함께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산이 태평성세라고 착각하게 할 만큼 연회는 화려했다. 늘 소박하게 생활하는 백성들은 부귀한 연회를 보며 명제 강산이 대대손손 길게 이어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드물게 똑똑한 사람은 명제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들은 명제가 외적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고 내부의 우환도 격화된 것을 알았다. 불안한 형세에서 체면을 세운들 편안하게 잠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신의 마차가 궁문 앞에서 멈췄다. 궁인이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담은 모든 게 신기해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구는 그런 나담을 이끌어 그녀가 귀인과 부딪치지 않게 했다. 나릉은 매우 신중해 처음 하는 입궁이지만 예의를 완벽하게 지켰다.
문무백관도 거의 다 참석했다. 연회장에서는 북은 물론 온갖 악기가 연주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많은 의식용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불꽃은 성대하게 하늘을 메웠다.
심묘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용포를 입은 문혜제는 신중한 표정으로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이전 회조연 때와 같았으나 한 가지는 달랐다. 그의 걸음은 이전처럼 힘 있지 못해 곁에서 공공이 부축했다.
부수의는 황자들과 한쪽에 서 있었다. 그의 풍채와 재화는 아홉 황자 중 가장 출중했다. 가장 어렸지만 준수한 모습에 권문세가 여식들이 몰래 훔쳐보았다. 이제는 광채를 숨기지 못할 정도이니 다른 황자들은 전처럼 그에게 안심하지 않을 것이었다.
심묘는 부수의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부수의 뒤에 있는 신하 중 남색 도포를 입은 남자를 보았다. 청렴한 모습은 조정 대신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감이 있어 학자 같은 느낌을 주었다. 배랑이었다.
배랑이 있는 곳은 부수의와 멀지 않았다. 이런 날 부수의의 곁에 있으니 배랑은 매우 큰 신임을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심묘의 시선을 느낀 듯 부수의가 고개를 돌렸다. 심묘는 시선을 돌렸다. 부수의 역시 군중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높은 손님 자리에 남녀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젊었다. 여자는 얇은 금색의 복잡한 꽃무늬가 수놓인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런 치마는 적어도 반년은 수를 놓아야 완성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부귀함을 짐작게 했다. 소녀의 생김새는 정교하고 고왔지만, 행동거지는 그다지 곱지 못했다. 경전(慶典, 경사를 축하하는 장엄한 의식) 관리가 제문을 읽을 때 그녀는 경시의 빛을 띠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소녀는 명안 공주였다. 그녀의 곁에는 진국 태자 황보호가 있었다. 황보호는 명안 공주보다는 나아, 적어도 그녀처럼 버릇없는 태도를 티 내지 않았다. 진심으로 명제의 외교적 행사를 축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웃는 얼굴 뒤 그의 속마음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처음으로 이런 장관을 보는 나담은 신기하다고 느꼈다. 당연히 그녀는 귀빈석 자리의 사람을 주의하기도 했다. 그녀는 관가 여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진국의 태자 전하와 공주마마만 있으신가요? 대량의 예왕 전하는요?”
불시에 나담에게 소매가 당겨진 아가씨는 놀라 자칫 일어날 뻔했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교양 있는 태도로 답했다.
“대량 예왕 전하는 몸이 불편하셔서 오늘 오시지 않는대요.”
나담은 문득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나담의 곁에 있었기에 아가씨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예왕 전하는 정말 대단하시다. 이건 일부러 폐하를 난감하시게 하는 거 아니야?”
명제의 공식적인 외교 행사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예왕이 명제 황실에게 모욕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명제 황실은 감히 화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대량에게 공물을 바치는 처지였다. 세상은 모두 강자를 존경하니 명제는 감히 대량과 경쟁할 수 없었다.
조공의 경전이 끝나기까지 세 시진이 걸렸다. 해가 가장 뜨거울 때인 정오에 시작해서 하늘이 어두워질 때 끝났다. 문무백관과 가족들은 떠날 수 없어 장시간 동안 시달렸다. 문혜제 역시 고통스러웠으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담은 장군 가문 아가씨답게 평소 무예를 익힌 몸이었음에도 조금씩 지쳐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똑바로 서서 두 손을 교차해 얼굴에 가져다 댔다. 단정하고 장중해 보였다.
“심묘야,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지 않아.”
나담은 감탄했다. 주위 여자들은 몰래 넓은 소매를 만지거나 치맛자락을 흔들거렸다. 심묘처럼 심지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나담은 심묘에게 조금 힘을 풀라고 권하려고 했으나 심묘를 보니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나담은 심묘 같은 기질은 얻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소춘성의 아가씨들과 비교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황후의 태도도 심묘의 온화하고 점잖은 태도에 비교할 수 없었다. 열일곱의 소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공훈귀족 공자들 역시 나담처럼 심묘의 출중함을 알아챘다. 활기 없는 귀족 소녀 사이 심묘는 눈에 띄었다. 나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침착하게 자리를 살짝 이동해 심묘를 가렸다. 심묘를 버릇없이 바라보는 공훈 공자들의 시선을 막아준 것이었다.
이를 본 나설안은 내심 기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담은 나릉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릉의 뺨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경전이 끝나고 드디어 연회가 열렸다. 밤의 연회에는 당연히 노래와 춤이 있었다. 이는 진국과 대량에게 명제가 얼마나 부유하고 강대한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심묘와 나담이 무리를 따라 궁 연회 대청으로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심묘의 어깨를 쳤다. 심묘가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까 널 봤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지 못했어. 심묘, 오랜만이야!”
풍안녕이 심묘를 껴안았다. 불같이 열정적이었다. 2년 전보다 아름다워졌지만, 소녀의 풋풋함은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심묘를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날 봤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야? 됐다, 넌 원래 이런 성격이니 내가 용서해줄게. 2년 못 만났더니 엄청 예뻐졌잖아? 소춘성의 물이 좋았나? 왜 딴사람 같지?”
풍안녕은 심묘를 위아래로 살폈다. 심묘는 나설안의 분부대로 잘 단장했다. 초승달과 봉황 꼬리가 수놓인 검붉은색 비단 치마와 큰 정향나무가 수놓인 저고리를 입었다. 비스듬히 옥매화 비녀를 꽂았고 아주 작은 진주 귀걸이를 했다. 귀엽고 수려한 오관과 사람의 기세를 꺾는 기질을 뽐내며 서 있었다. 자연스러운 온화하고 단정한 기색을 드러내며 눈은 막 태어난 어린 사슴처럼 맑고 투명하면서도 칠흑같이 어두워 많은 남자가 돌아보게 했다. 용모가 좋은 여인이 금상첨화로 기질마저 비범하다면 사람들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할 터였다.
나담은 줄곧 심묘 옆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풍안녕을 관찰했다. 풍안녕은 그제야 나담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은 누구야?”
“외사촌 언니야. 나담 언니라고 해. 이쪽은 풍안녕이야. 풍 소저.”
심묘의 소개에 나담과 풍안녕이 인사했다. 기세등등한 풍안녕과 활발하고 솔직한 나담은 금세 친해졌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도 옛친구처럼 계속 떠들어서 심묘는 귀가 조금 아플 지경이었다. 풍안녕은 풍 부인에게 말해 심묘와 이야기하기 쉽도록 심묘의 자리 근처에 앉았다.
이전 경전 예식에서는 관직에 따라 자리를 잡았지만, 저녁 연회에서는 마음대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막 정경성에 돌아온 심신은 친한 동료가 없어 아무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문혜제의 ‘요청’으로 돌아왔기에 주위 관리들은 감히 그를 냉대할 수 없어 공손히 말을 걸었다.
풍안녕이 심묘에게 귓속말했다.
“저런 기회주의자들. 심 장군께서 성을 나갈 때 배웅도 하지 않더니, 지금은 저렇게 친한 척하네.”
심묘는 살짝 웃을 뿐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봐, 네 사촌 언니도 왔네.”
심묘는 풍안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심모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는 2년 만에 심모를 보았다.
심귀는 심원이 죽은 후 조정에서 위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사실 그의 관직은 주위 관계를 잘 맺어놨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심원이 참수당한 후 조정 대신은 그를 전염병 환자 보듯 피했다. 능력이 없는 심귀는 하루하루 지위를 잃었기에 저녁 연회에 올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서 심만 일가만 보이는 것이었다.
심만은 벼슬길이 순조로운 듯 온 얼굴에 웃음기를 띤 채 사람들과 잔을 나눴다. 그의 곁에 있는 진약추 역시 미소 지으며 부인들과 이야기했다. 2년 전처럼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전처럼 생기 있지 않았다. 이방이 늦도록 자식이 없자 심 노부인은 삼방에 많은 압박을 가했다. 진약추는 매시매초 노부인의 자손을 번창시키라는 압력을 머리에 이고 있어 그다지 홀가분하지 않았다.
심모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모는 역패란, 백미, 강효훤과 같이 앉아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나 심묘는 심모의 눈빛에서 증오심을 읽을 수 있었다. 심모는 연분홍색 주름치마에 화관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열여덟 살로 유약하고 고상해 보이는 자색이 있었다. 심묘는 그녀가 하고 있는 팔찌와 마노(瑪瑙, 석영질 보석)가 달려 있는 은비녀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나서길 좋아하는 심모는 스스로 드러낼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했다. 그런데 아직도 2년 전의 장신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삼방의 은자가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노부인이 돈을 헤프게 쓰고 심신도 분가했으니 진약추는 집안을 관리하기가 곤란할 것이었다. 게다가 심만의 벼슬길에 쓸 뇌물도 마련해야 했으니 심모를 위해 쓸 은자는 당연히 부족할 터였다.
제아무리 청렴한 학자 가문이라도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은자가 부족하면 당당하지 못한 법이었다. 심모의 자색이면 지위와 형편이 맞는 관리 집안 공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혼인하면 많든 적든 심만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혼인하길 거부했다. 전생에서 심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도 그녀에게 좋은 청년 준걸을 찾아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깨닫게 되었다. 야심이 큰 심모에게 보통의 청년 준걸은 눈에 차지 않다는 것을.
심모는 심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끝없는 질투가 샘솟았다. 심모는 심묘가 입은 옷이 궁에서만 쓸 수 있는 상등의 비단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전 심만도 요행히 비단을 한 필 얻어 심모는 의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심만이 그 비단을 뇌물로 보내버렸다. 2년 동안 심만의 관직은 점점 높아졌으나 심모의 은자 사정은 이전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심모는 이 모든 것이 심신이 분가하며 은자의 대부분을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심묘가 황량한 소춘성에 가면 다시 정경성에 돌아올 리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심묘는 영광스럽게 돌아와 공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불만과 질투의 감정이 뒤섞여, 심모는 심묘를 죽이지 못해 한이 맺혔다. 칼 같은 심모의 시선에 심묘는 담담히 웃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나담, 풍안녕과 대화하며 다시는 심모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문혜제가 착석하자 소란스러운 소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문혜제는 웃으며 모두 즐기라고 했다. 이어 귀빈석에 진국 태자 황보호와 명안 공주도 착석했다. 명안 공주는 궁중 규칙을 무시하며 문혜제와 인사도 하지 않았다. 문혜제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나담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자 풍안녕이 물었다.
“뭘 보는 거야?”
“대량의 예왕 전하가 왜 안 오시는지 보는 거야. 대량 황실 사람은 모두 용모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어? 영락제 폐하도 출중하잖아. 예왕 전하는 영락제 폐하의 친동생이시니 당연히 풍채가 상당할 거야. 나도 하늘이 내린 미모를 보고 싶어.”
풍안녕은 입을 삐죽거렸다.
“포기하는 게 좋을걸. 예왕 전하는 폐하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 앞에는 나타나지 않으셔. 게다가 설령 전하가 오늘 이곳에 오셨어도 언니는 그 미모를 보지 못했을 거야.”
나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아주 추하게 생겼어?”
그때, 태감이 길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량, 예왕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입구를 바라보았다. 늘씬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호위가 뒤를 따라왔다. 키가 크고 굳센 몸매였다. 금실로 수를 놓은 자줏빛 장포를 입은 그의 걸음에 금실이 구불구불 흘렀다. 허리에 무소뿔 띠를 하고 경옥으로 만든 패를 단 채 사슴가죽 장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아주 단촐했지만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우아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얼굴에 은 재질의 반쪽짜리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이마에서 시작해서 코까지 이어졌다. 이목구비에 딱 맞은 가면은 유창한 선을 자랑했다. 코는 오뚝하며 눈은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입술은 얇고, 붉은색이었다. 입술은 꾹 닫은 채였지만, 마치 소리 없는 초청을 하는 듯 매혹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가면을 써서 젊은 남자의 외모를 분명히 볼 수 없으나 보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홀리게 했다. 사람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색 가면의 차가운 빛은 사람들에게 한기를 주었다. 그러나 검고 빛나는 눈은 아름다운 웃음기를 머금었다. 조금 가벼워 보이고 조금 무심해서 그가 온화한지 냉담한지 분명히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작열하는 태양같이 밝은 눈의 청년이었다. 그는 귀빈석에 앉았다. 일거수일투족이 우아해서 그나마 예의 바른 황보호마저 거칠고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다. 명안 공주는 그를 바라보느라 넋을 잃었다.
문혜제가 크게 웃으며 예왕을 바라보았다.
“오늘 몸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소? 어찌 연회에 오셨소? 짐과 대신들은 매우 놀랐다오.”
예왕은 문혜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나른한 태도로 말했다.
“갑자기 흥미가 생겨서 왔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듣기 좋았다. 나지막하고 조금 자성을 띠어서 여인들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주 무례하고 방자했다. 명제 조공연회는 큰일인데 예왕은 보통 집안의 가족 연회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켜서 왔다니 안하무인이었다.
명제 신하들은 모두 분노했으나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했다. 문혜제도 감히 뭐라 말하지 못하는데, 신하들에게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대량의 예왕은 영락제와 같은 풍격(風格, 풍채와 품격)을 지녀, 일 처리를 매우 방자하게 하면서도 사람을 압박하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문혜제는 그를 추궁하지 않고 신하들은 계속 술만 마셨다. 이 일을 이렇게 넘기려는 게 명백했다.
나담은 간식을 먹으며 심묘에게 말했다.
“예왕 전하는 정말 대담하시네. 폐하 앞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폐하께서 벌하실까 두렵지 않은 걸까?”
풍안녕은 입을 삐죽였다.
“처벌은 무슨 처벌? 대량의 예왕 전하야. 예왕 전하는 명제 손님이시라구. 손님은 뭘 하든 모두 옳은 법이지.”
풍안녕은 소리를 낮췄지만 모호하게 돌려 말했다. 이곳은 궁중이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