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권-32장 (48/71)

폐후의 귀환

7권

32장

사람들은 조공연회에서 이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는 명안 공주가 스스로 사고를 친 것이었다. 명제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당당히 이긴 심묘 덕분에 막 수도로 돌아와 관직을 회복한 심신은 조공연회에서 매섭게 위용을 얻었다. 사람들은 심신의 높은 위치를 조금 두려워했다.

부수의는 명안 공주와 심묘의 시합을 차분히 관전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심묘 쪽을 자주 바라보았다. 시합이 끝난 후에도 그의 시선은 때때로 심신을 스쳐 조용히 앉아 있는 심묘에게 닿았다. 심묘를 주시하는 시선은 부수의의 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청년 준걸들은 심묘에게 주목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황보호의 불편한 시선도 있었다. 둔한 나담도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왜 다들 심묘를 보는 거야? 사람을 왜 불편하게 하는 거지?”

나릉이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야, 나랑 자리를 바꾸자.”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관심은 받고 싶지 않았기에, 나릉의 듬직한 체구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가려주니 많이 편안해졌다. 그 후, 조공연회가 끝날 때까지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황보호는 기절한 명안 공주를 살피러 가겠다고 중도에 떠났다. 당연히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명안 공주가 심묘를 원망할 것을 알았다. 심신이 보호하겠지만, 명안 공주에게는 큰 힘이 있어 심묘를 괴롭힐 구실을 아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심묘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동정의 기색을 띠었다.

심만 일행만 곤란에 처한 심묘를 보며 기뻐했다. 사실 심만은 이번 기회에 심신과 화해하려고 했다. 심신은 관직에 복귀했을 뿐 아니라 문혜제의 ‘요청’을 받고 돌아왔으니 사이가 나빠서는 불리할 터였다. 그러나 심신은 심만이 옆으로 와도 아는 체를 하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만을 깨끗이 정리하려 기선을 제압하는 것 같았다.

심신이 소춘성으로 향할 때, 온 정경성이 심가의 분가 소식을 들었다. 선행을 베풀기는 쉬워도 다른 사람이 위급할 때 돕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심만은 한 가족이었다. 그때나 이후에나 모르쇠로 일관했던 이가 무슨 염치로 재기한 심신과 다시 어울리려 하는지. 사람들은 모두 경시하는 눈빛으로 심만을 쳐다봤다. 심만도 그걸 느꼈는지 더는 심신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형제인 두 사람은 마치 모르는 사이 같았다.

심신의 동료가 심신에게 인사하러 오자 나설안은 심묘를 데리고 먼저 마차로 갔다. 풍안녕은 이미 풍 부인에게 돌아간 후였다. 나담이 가장 앞에 서서 성큼성큼 걸었고, 나릉은 심구와 제일 뒤에서 걸었다.

궁문 뒤에 심신이 준비한 마차가 있었다. 궁중 긴 복도 끝에서 가늘고 긴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심묘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이지 않으나 은 가면이 등롱의 빛을 받아 어둡게 빛났다. 장포 자락에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그림은 밤중임에도 또렷이 보였다.

심묘가 세심히 바라보자 그 남자는 심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밤의 궁중 복도는 고요했다. 그는 찬란한 달빛을 받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나무 그림자가 흔들려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었다. 그림 속 신선이나 요괴 같았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 기둥을 가볍게 세 번 두드렸다.

심묘가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심구와 나릉이 발견하곤 심구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심묘야, 뭘 보는 거야?”

“아, 아무것도.”

심묘는 정신을 차렸다.

“먼저 마차에 타.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나릉이 온화하게 말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를 기분에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긴 복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복도 위 강물 같은 달빛이 비쳤다. 바람이 불어 꽃가지가 흔들리자 그 그림자가 복도 바닥에 사람을 취하게 하는 그림을 그렸다. 텅 빈 복도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방금 본 모든 건 착각인 것 같았다. 그때 나담이 작게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묘는 복도에서 눈을 떼고 치맛자락을 들어 마차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심신과 나설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표정에서 엄숙함이 드러났다. 심구도 평소와 달랐다. 둔감한 성격인 나담조차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조용히 있었다.

오늘 심묘는 진국의 태자와 명안 공주의 미움을 샀다. 정경성으로 막 돌아오자마자 권력의 소용돌이로 끌려갔다. 심신이 전력으로 피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심가를 잡아당긴 셈이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난처한 상황이 닥쳐도 겁내지 않는 대담한 사람들이었지만, 오늘만은 걱정스러웠다. 명안 공주가 심묘를 원망해 배후에서 몰래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적군이 공격해 오면 장수가 막고, 물이 밀려오면 흙으로 막으면 되었다. 심묘를 더욱 세심히 보호하고 실수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주택으로 돌아온 심묘가 머리를 빗고 세수를 끝내니 늦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등불을 켰다. 그녀가 잘 뜻이 없는 걸 본 곡우가 말했다.

“아가씨, 오늘 저녁 일로 걱정이신가요? 괜찮아요.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계시니 제아무리 진국 공주마마라고 해도 마음대로 하지는 못할 거예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안 공주가 어떤 성격인지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그녀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승부욕이 강했다. 전생의 조공연회에서도 자신을 난처하게 했었다. 부수의같이 출중한 사람이 자신처럼 상스러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생과 달리 예왕이 대량의 사신으로 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출중한 사람이 부수의가 아니라 예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다. 사람 사이 원한은 하늘이 정한 탓에 생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흰 물러가거라. 난 잠이 오지 않으니 바둑을 좀 둬야겠다.”

곡우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으나, 경칩이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빨리 말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아가씨도 너무 많은 생각은 마시고 피곤해지시면 일찍 주무십시오. 밤에는 싸늘하니 몸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합니다.”

심묘가 알겠노라 대답하자 곡우와 경칩은 서둘러 물러갔다.

심묘는 텅 빈 바둑판을 보며 흰 돌과 검은 돌을 들었다. 진지하게 대국하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흑백이 뒤엉킨 바둑판은 매우 복잡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둘 수 있었으나 병사가 늘어나자 다음 수를 놓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뜰은 고요했다. 새소리나 벌레의 울음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온 정경성이 단꿈에 빠진 듯했다. 심묘는 바둑판을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쉬었다. 2년 동안 각 세력이 교대로 나타났다. 준비를 잘해둔 돌도 위치가 왔다 갔다 했다. 기선을 잡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수의와의 바둑을 너무 간단히 생각한 것 같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변하는 법이었다. 심묘 자신부터도 달라졌다. 자신이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닌 만큼 다른 사람들도 변했다. 이런 변화가 대국에 어떤 영향을 줄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심묘는 바둑판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밖에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나무 그림자가 흔들렸다. 조금 추위를 느낀 심묘는 몸을 살짝 떨면서도 자리에 서서 풍경을 감상했다.

잠시 후 심묘는 몸을 돌렸다. 거의 다 탄 등불이 흔들리다가 꺼졌다. 등이 꺼지자 달빛이 유수같이 흘러들어와 방을 밝게 비췄다. 시원하고 신선했다.

그때, 탁자 쪽에서 소리가 났다. 바둑판 앞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돌을 들어 바둑판에 마음대로 놓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자금색 장포가 달빛 아래 더욱 화려했다. 옷자락의 무늬는 어딘가 익숙했다. 아주 건방진 모습의 주인은 반쪽짜리 은 가면을 써서 장중함을 드러냈다.

야밤 초청하지 않았는데 손님이 왔다. 하지만 심묘는 의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창문을 닫았다. 방이 어두워지자 심묘는 등에 불을 붙였다. 따뜻한 노란 빛 아래 아름다운 자태가 일렁였다. 그녀는 불청객의 맞은편에 앉았다.

“날 기다린 거야?”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정인이 귓가에 속삭이듯 달았다.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가득해 만남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심묘는 불청객의 가면을 주시했다. 가면은 그의 좋은 용모를 덮지 못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아름다운 턱과 붉은 입술은 더욱 신비스러워 보는 이의 혼을 사로잡았다. 대량 황실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는 소문이 도는데, 눈앞의 풍채와 재화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하께서 기둥을 세 번 두드려서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삼경(三更, 밤 11시~새벽 1시)에 방문할 거라 하셨으니 소녀는 감히 항명할 수 없었나이다.”

예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똑똑하군.”

그의 태도는 가벼웠다. 심지어 풍류를 즐기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람은 뼛속 깊이 냉혹하며 잔인할 것 같았다. 심묘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십니까?”

예왕은 바둑통 안 검은 돌을 가지고 놀았다. 검은 돌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그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이 재미있구나. 천하의 급변하는 정세가 네 바둑판 안에 전부 들어 있다. 대량은 어디에 있지? 나는 어느 돌이냐?”

그는 심묘가 둔 바둑판이 명제의 모습을 반영했다는 것을 간파했다. 심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른한 듯 조금은 무심한 목소리로 다른 질문을 했다.

“오늘 보니 너는 명안 공주를 아는 것 같더구나. 명안 공주를 이전에 본 적이 있느냐?”

심묘의 마음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자신은 명안 공주를 알고 있지만, 오늘 태도로만 보면 의심을 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진국의 공주와 명제의 장군 소저가 이전에 만났을 리 없었다. 진국과 명제는 천리만리 떨어져 있고, 명안 공주는 이번에 처음 명제를 방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왕은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

심묘는 그가 조사해 알아낸 건지 그저 연회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 건지는 몰랐으나 불안했다. 만일 연회에서 눈치챈 거라면 예왕은 무서운 존재였다. 심묘는 눈썹과 눈을 움직이지 않았다. 소매 안의 손을 조금 꽉 쥔 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공교롭게도 소녀는 명안 공주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왕 전하와는 이전에 만났었지요.”

예왕은 심묘를 잠시 응시하더니 탁자를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가 심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오, 언제?”

심묘는 가까이 다가온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흡은 따뜻했으나 옷에 달린 금색 단추는 차가운 빛을 띠었다. 입가에는 웃음을 띠었지만, 시선은 조금 무심했다. 불인지 얼음인지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위험한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 분위기는 사람을 끌어당겼지만, 심묘는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예왕은 칠흑같이 어둡고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주시했다. 심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꽃무늬가 정교하고 세밀하게 수놓인 단추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별일 없었나요, 사경행.”

일순 공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등불 안 불꽃이 타오르며 미세한 소리를 냈다. 불똥이 튀어 칠흑 같은 밤을 성화처럼 밝혀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었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예왕은 담담히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 거꾸로 비췄다. 뒤엉킨 그림자는 그와 심묘가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왕은 느긋하게 손을 거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없었느냐? 심묘.”

예왕이 얼굴 위 은 가면을 벗었다. 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 별같이 빛나는 눈동자, 단정한 코, 연지를 바른 듯 붉은 입술. 과거 붉은 입술과 흰 치아를 가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미소년이 빼어난 미남자가 되어 있었다. 입가의 웃음기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조금 비꼬는 기색을 띠며 짓궂었다.

별빛 같은 아름다움은 간담을 서늘해지게 만들었다. 2년 동안 그의 고귀함과 우아함은 더욱 더해졌다. 귀인의 타고난 오만함이 일거수일투족에 묻어났다. 달처럼 차갑지만 작열하는 태양처럼 눈 부셨다.

신분에 속박받지 않는 사경행이 나타났다. 광채를 가리는 가면을 벗자 찬란한 모습이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2년 동안 누가 네게 내 이름을 부르라는 담력을 가르쳤지?”

“지금 당신은 임안후부의 소후야가 아니니까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싫으시면 예왕 전하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심묘의 말에는 조금의 비꼼이 있었다. 명제 임안후부의 소후야에서 대량 영락제의 친동생이라니, 이번 행보는 제아무리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경행이라도 좀 과했다. 심묘는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말투와는 달리 존중을 담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경행 역시 개의치 않는 듯 나른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런데 네가 내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면 한 가지 알려줘야겠구나. 사연이 나의 진짜 이름이다. 네가 날 사경행이라 부르는 것은 내 아명을 부르는 것이지. 자라더니 열정적으로 변했구나. 너와 내가 서로를 아명으로 부르는 사이더냐?”

그의 입꼬리에 걸린 웃음은 질이 나빴고 언행은 가벼웠다. 심묘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직계가족이나 부부, 또는 정인일 경우에만 아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러나 심묘는 사경행의 아명이 ‘경행’일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 억울했다. 심묘는 지금에서야 대량의 영락제가, 대량의 황실이 사씨인 것을 깨달았다. 정말 공교로웠다.

사경행은 제멋대로 차를 따라 마셨다. 2년이 지났지만 자기 집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지난날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심묘가 심부가 아닌 장군부에 있는 데도 전혀 상관치 않는 태도였다. 불청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심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오히려 심묘가 분개하고 있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예의는 오고 가는 것이지. 넌 내가 뭐라고 부르길 원하느냐, 교교?”

교교, 향기가 나는 듯한 아명과 사경행의 눈부신 미모가 합쳐져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심묘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현혹당해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심묘도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동시에 사경행이 남색가들이 찾는 청루에서 생활을 한다면 떼돈을 벌고 명성을 천하에 떨칠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사경행이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당신은 이렇게 잘생겼으니 남색 청루에 간판을 걸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연 가면으로 가릴 만해요.”

심묘는 일부러 그의 화를 돋웠다. 사경행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태연한 표정이 잠시 굳는 걸 보며 심묘는 속이 아주 시원했다.

“날 걱정하는 것이냐? 내게 온 마음을 다하는 모양이구나.”

“예왕 전하, 온 마음이라는 글자를 어떻게 쓰시는지는 아십니까?”

그의 ‘아명’을 부르기엔 구역질이 났고 사 소후야라고도 부르지 못하니 심묘는 ‘예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의미였다.

“네가 날 강제로 껴안고 입 맞출 때는 이렇게 무정하지 않았는데.”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을 뗐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심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슴처럼 검은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아주 아름다우며 가련했다.

“무슨 뜻인가요?”

사경행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그의 동작이 너무 빨라 심묘는 피하지 못했다. 사경행은 곧 손을 거뒀다.

“넌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수도를 떠난 밤, 나와 너는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심묘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술을 마셔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거로군.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을 못 하느냐?”

심묘가 고민했다. 그녀의 주량은 강한 편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날 밤엔 매화주에 취했다. 게다가 실언하거나 실수를 저질러 의심을 불러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홀로 자려고 했다. 그녀는 그날 사경행이 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당황해 평정심을 잃었다.

“농담하시는 거지요? 저와 예왕 전하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심묘는 마음속 피어오르는 불안을 눌렀다. 하지만 얼굴은 침착했다. 그녀는 남녀 사이 애정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다. 전생에는 그저 부수의에게 비위를 맞춘 것일 뿐, 사실 심묘는 남자의 생각과 연인들의 마음을 잘 몰랐다. 심묘는 이 방면에서만은 백치나 다름없었다. 속이 새까만 사경행에 비해 아주 풋풋했다.

사경행이 미소 지었다. 그는 급히 반박하는 대신 느긋하게 설명해줬다.

“넌 황후가 되고 싶은 듯했다. 술에 취하자 이 공공에게 불꽃놀이가 보고 싶다고 했지. 태자와 공주도 함께. 심 황후?”

사경행이 아주 흥미로운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숨기려고 차를 마시던 심묘가 자칫 차를 뿜을 뻔했다. 오랫동안 이 호칭을 듣지 못했던 심묘는 한순간 꿈을 꾼다고 여겼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지금이 아름다운 꿈이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냉궁에서 자신과 가족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심묘는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일부러 그녀를 떠보기 위해 장난을 친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심묘는 그날 밤 사경행이 와서 술 취한 그녀를 보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일을 아는 사경행은 신선인 셈이었다. 심묘는 자신이 어디까지 이야기했고, 사경행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불안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제가 뭘 했나요?”

“별거 아니야. 그저 나를 안아서 못 떠나게 했을 뿐이야. 내게 입을 맞추고 울면서 나보고 면수를 하라고 했지. 널 절대 냉대하지 말라고도 했구나.”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요.”

심묘는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자신이 그런 일을, 게다가 사경행에게 할 리 없다고 여겼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잡아떼려는 거야? 부끄러운 줄 모르네, 심교교.”

“은자를 줄게요. 얼마를 원하든 줄게요.”

사경행이 심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심묘는 그의 시선이 칼날 같았다고 느꼈다. 그가 자신에게 분노를 표출하고픈 욕망을 겨우겨우 억누르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가 이를 갈며 웃었다.

“너 지금 나를 남색 청루의 남창으로 여기는 거야? 은자라고? 내가 은자가 부족할 것 같나?”

심묘는 침묵했다. 사경행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떻게 안 거야?”

사경행이 화제를 바꿨다. 심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사경행이 탁자 위 가면을 들었다.

“어떻게 나인 줄 안 거야? 나는 2년 전에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었어. 그런데 처음 본 예왕을 보고 나라고 추측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당신을 만나기 전에 추측했어요. 당신을 대량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황실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조공연회에서 예왕 전하를 봤을 때 은은한 익숙함을 느껴서 맞혀본 거예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대량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와룡사에서의 밤, 소후야는 내 방에 와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었지요. 요행히 나도 그 과자를 조금 먹었구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뭐?”

“그 과자는 대량 황실의 요리사가 한 것이라 그런지 아주 맛있더라고요.”

사경행은 멍해졌다. 3년 전, 자신은 와룡사에서 심묘가 심청과 예친왕을 모해하는 것을 보았고, 그런 심묘에게 흥미가 생겨서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깊은 밤, 얘기를 나누면서 출출해졌기에 가져온 과자를 먹었다. 분명 그때 하나를 심묘의 입에 넣어주었다.

사경행은 명제에서 높은 지위의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대량 출신 요리사도 곁에 뒀는데,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바로 그 과자였다. 사경행은 심묘가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여러 방면으로 알아내려 했지만, 그때 그 과자 때문에 신분이 탄로 날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심묘를 보았다.

“대량 요리사가 만든 것을 어떻게 알았지?”

“전에 한 번 먹어봤거든요.”

이전, 심묘는 그 과자와 맛이 똑같은 과자를 먹어보았다. 명제의 조공연회 때마다 다른 나라에서 축하 선물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대량의 영락제는 과자를 좋아했기에 황실 요리사는 독창적인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심묘가 특이하다고 느낀 과자는 과일즙을 첨가해 과일 향이 나는 과자였다. 이후 특별히 부수의를 위해 그 과자를 몇 번 만들었으나 그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손수 만든 과자를 수하에게 보내 자신을 상심하게 했다.

그런데 사경행이 와룡사에서 자신에게 먹인 과자에서도 같은 과일 향이 났다. 조공연회가 열리기 전 그 과자가 명제에 있을 리 없으니 당시 심묘는 기이하다고 여겼다.

사경행은 심묘가 어디서 이 과자를 먹어보았는지 몰랐으나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고작 그거야?”

“요행으로 맞힌 것뿐이에요.”

심묘는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 물론 과자만으로 그의 신분을 확신한 건 아니었다. 진정한 의심은 궁중에서 본 고 태의, 고양을 만나고부터 생겨났다. 처음에는 고양이 그저 낯익다고 느꼈으나 이후 자신이 고양을 본 적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전생 조공연회, 대량에서 보낸 사람은 친왕의 중신이었다. 그 중신은 대량에서 이름난 인재로 부수의는 배랑에게 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분부했다. 그 사람이 바로 고양이었다. 당시 고양의 신분은 태의가 아니라 대량의 조정 신하였다. 현생에서 심묘는 명제 궁중에서 사경행과 고양 사이에 흔적 없는 친숙함을 보았다. 거기에 과자까지 더하니 자연히 사경행의 진짜 신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소춘성에 간 후 사경행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그때 심묘는 처음에만 깜짝 놀랐고, 이후에는 평온했다. 전생에서 이 시기는 사경행이 아직 출정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전생이나 지금이나 사경행은 같은 결말을 맞은 셈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운명이 그렇게 한 짝처럼 딱 떨어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 생에서는 사경행을 잘 알았다. 그렇게 계책이 뛰어난 사람이 허망하게 죽을 리 없었다.

오히려 심묘는 사경행이 무슨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전사 후,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래서 어떤 말썽을 줄일 수 있다면, 그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안후부의 소후야는 그의 야심을 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었다. 그의 야심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심묘의 시선이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쑥날쑥하게 놓인 바둑판에 닿았다. 그때, 그녀의 마음에서 놀라움이 피어올랐다.

사경행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심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 운은 줄곧 좋구나.”

심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궁금증을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예왕 전하가 된 건가요?”

그녀는 사경행이 가짜 신분을 만든 건지 궁금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담력은 굉장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량의 황실, 영락제의 친동생을 사칭한 것이 발각되면 만 번을 죽어도 부족할 것이었다. 그러나 친동생이 맞는다면, 그의 이전 신분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명제의 사정 아들로 지냈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난 원래 대량의 예왕이야. 제자리를 찾은 거지.”

심묘의 마음이 움직였다.

“임안후부 사후야는 당신의 부친이 아닌 거예요?”

사경행은 웃으며 경시의 빛을 띠었다.

“임안후? 그가 무슨 근거로 내 아버지라는 거지?”

사경행이 사정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심묘는 더욱 놀랐다. 사경행의 신분에는 많은 것들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전생 심묘는 지금까지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 심묘는 전생의 부수의가 사경행을 이상할 정도로 경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가 부자의 죽음에 명제 황실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추측도 함께 떠올랐다.

예전에는 단순히 황실이 사가의 높은 공로를 경계해 타격을 줬다고 여겼지만, 이제 와 보니 부수의가 사경행의 신분에 수상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수의가 화근을 철저히 없애려고 한 것인가 싶었다. 심묘의 표정이 밝았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사경행은 그런 심묘를 오래도록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심오했으나 씩 웃자 눈빛은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출중함과 화려함이 잘 융합된 얼굴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사악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가 탁자를 두드렸다.

“오늘은 옛 친구를 보러 온 건데, 넌 아주 많이 성숙해졌구나.”

정신을 차린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예왕 전하는 광채가 무한하십니다.”

임안후부 사 소후야였던 예왕. 사경행은 더욱 고귀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명제를 종횡무진했던 그는 예왕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을 오르려 할 것이었다.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주 만족스러우냐? 영광스러워?”

심묘가 단정하고 장중하게 말했다.

“저는 명제 사람이고 예왕 전하는 대량 사람입니다.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할 수 없는데 어떻게 영광스럽겠어요?”

사경행이 가면을 들어 다시 착용했다. 은빛 가면은 그의 이목구비에 딱 맞았다. 가면은 그를 달빛처럼 신비롭게 만들어 그가 불가사의한 매력으로 더욱 사람을 홀리게 도왔다.

“네가 내게 입 맞출 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네가 날 네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의 시선은 가을 달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홀렸다. 그의 시선이 심묘를 스쳤다.

“예왕 전하의 기억이 잘못되신 것 같습니다.”

심묘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부정했다.

“앞으로 네가 기억할 수 있도록 돕지. 다음에 다시 널 보러 오겠다. 심…… 교교.”

사경행이 일어나면서 자금색 장포가 탁자를 스쳐 바둑돌을 흐트러뜨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가볍게 창문 밖으로 나갔다.

심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일 심구에게 뜰 입구에 호위를 더 배치해달라고 말하리라 다짐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주택에는 부모님과 오라버니를 비롯해 많은 고수가 머물고 있는데 아무도 그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장군부를 자유롭게 오고 가는 불청객이 있다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장군부 담벼락 너머 사경행이 서 있었다. 삼경이 넘어가는 깊은 밤, 거리에는 그와 곁의 호위 한 명뿐이었다. 달빛이 그의 광채를 더했다. 은빛 가면이 밝게 빛났다.

“주인님,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사경행은 옛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장군부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시종일관 입꼬리를 올리고 있으니 어떤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기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 사경행이 호위를 힐끗 보았다. 소매 위 금실이 어렴풋이 빛났다. 늠름한 얼굴은 웃는 듯 마는 듯했으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띠고 있었다. 봄바람이 부는 듯 아주 매력적이었다.

“재미난 사람을 만났으니 당연히 좋지.”

* * *

다음 날 심묘는 늦게 일어났다. 하루 종일 궁중 연회에 참석한 터라 대단히 피곤했던 데다 사경행이 늦은 밤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한밤 꿈도 꾸지 않고 곤히 잤더니 깨어나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심묘가 드물게 게으름을 부리자 나설안은 그녀가 어제 조공연회로 피곤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설안은 심묘의 식사를 따로 준비하라고 분부하고 심신과 함께 아침 일찍 병부로 향했다. 관직을 막 회복했기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릉과 심구도 방에 있지 않았다. 나릉은 심구를 돕는 새로운 직무를 찾았다. 심신은 나릉에게 심구의 일을 돕게 해 정경성에 처음 왔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

이 새로운 ‘장군부’ 안에는 나담과 심묘만 남았다. 풍안녕이 오늘 함께 장신구를 고르러 가자며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나 심묘는 나담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다. 장군부 호위를 붙여주며 자신은 피곤하니 부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나담은 심묘에게 한바탕 당부하고서야 떠났다. 나담이 떠나길 기다렸던 심묘는 모경에게 편지를 건네며 광문당에 가라고 했다.

2년의 세월은 정경성에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보향루에 있던 류형 소저는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모 공자가 천 냥 황금을 지불하여 자유를 얻었다. 류형 소저가 사라지고 정경성에는 한 필에 은자 백 냥인 비단을 파는 자수 점포가 등장했다. 이곳 자수 아가씨는 양면 수를 놓을 만큼 손재주가 출중할 뿐 아니라 용모도 예뻐서 막대한 수입을 올린다고 했다.

사는 방법을 바꾼다고 반드시 더 삶의 방향이 나빠지는 건 아니었다. 걸음을 내디딜 뿐, 앞날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류형은 새로운 희망을 마주했다.

류형이 잘 살고 있으니 그녀를 걱정하던 사람, 배랑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조공연회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그가 부수의의 신임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고 여겼다. 부수의는 의심이 많았다. 전생에 황제가 된 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부수의에게는 한 명 한 명의 인재가 아주 귀했다. 그러니 부수의는 온갖 방법을 이용해 배랑 같은 인재를 곁에 남길 터였다.

부수의는 배랑의 재능과 충성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심묘는 배랑이 부수의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그를 무턱대고 보러 가지 않았다. 이 바둑돌은 아직 옮길 때가 아니었다.

“멱리를 가져오거라.”

“아가씨, 외출하시게요?”

방을 정리하던 백로와 상강이 의아해 물었다.

“할 일이 있다.”

경칩이 멱리를 찾으러 갔다. 백로와 상강은 연유를 묻지 않았고, 곡우도 묵묵히 심묘의 머리를 빗겼다. 심묘의 여종들은 그녀의 명령에 즉시 복종했다. 궁중에서 교육받은 여종들도 이렇게 신속하며 침착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그들을 보았다면 의아할 터였다.

부를 나온 심묘는 광문당으로 간 모경을 대신해 아지를 불렀다. 심묘는 심구의 수하들과 꽤 친해졌다. 정확히는 그들의 신임을 얻은 것이었다. 소춘성에 있을 때 심묘는 심구에게 많은 병법을 제시했다. 물론 그녀가 제시한 것들은 이전 부수의 막료에게서 들은 것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신묘한 지략과 교묘한 계책을 여럿 꺼내니 그녀에게 군대를 통솔하고 지휘하는 장군의 재능이 있다고 여겼다. 거친 병사들은 탄복하며 그녀를 깊이 존경했다.

“오늘 외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거라.”

평소 아지는 심구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오늘 심묘의 맑은 눈빛이 심구보다 더 형형해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놀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심묘의 명령에 따라 일반 마차를 찾았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는 심가 사람이 타고 있다는 티가 나지 않아야 했다. 연경 골목에 머무는 명안 공주와 마주친다면 어제 일로 말썽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명안 공주는 아주 오만방자한 데다 데려온 호위도 많으니 만에 하나 일이 발생할 경우, 심신 부부가 서둘러 돌아와도 늦을 것이었다.

아지는 속으로 의심스러웠다. 2년간 정경성을 떠나 있는 동안 심묘와 이곳에서 우정을 나눈 사람은 풍가의 풍안녕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묘는 오늘 풍안녕의 초대를 거절했으니 풍안녕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의심하던 아지는 허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추측처럼 심묘가 정말로 남자를 만나러 간다면 아지는 이 일을 반드시 심구에게 보고하겠다고 다짐했다. 재능과 용모를 갖춘 심가 아가씨를 어디서 온 지도 모를 무례한 놈이 채가게 할 수는 없었다.

아지는 심묘의 목적지가 풍선전당포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풍선전당포는 전처럼 썰렁했다. 이곳은 어떤 방법을 써도 저당물을 돌려주지 않는 전당포이니, 아주 절박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곳에 물건을 가져오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심묘가 마차에서 내리자 아지가 바짝 따랐다. 경칩과 곡우도 함께였다. 아지가 주변을 살펴보기도 전에 심묘는 이미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

수건으로 탁자를 닦던 점원이 네 사람을 보았다.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멱리를 내리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부귀한 어느 댁 아가씨가 틀림없으니 감히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그가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

“아가씨,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는 이전 심묘가 알던 점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소춘성으로 간 후 풍선전당포도 2년 동안 문을 닫았다고 했다. 다시 문을 연 지 며칠 되지 않은 이곳에 홍릉과 계우서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 홍릉을 찾아왔어요.”

점원이 세심하게 심묘를 한 차례 살폈다. 심묘의 평온한 눈빛에 점원이 순간 멈칫했다.

“잠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점원이 뒷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붉은 치마는 여전했지만, 2년 전보다 더욱 하늘거려 아름다운 맵시였다. 그녀가 심묘를 바라보았다. 마주하는 시선이 엉겨 붙었다. 홍릉이 웃었다.

“오랜만에 뵈었더니 아가씨의 용모가 더욱 아름다워지셔서 시선을 뗄 수가 없네요.”

조금 무례하고 방자한 인사였지만 상스러운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쾌활하게 들렸다. 심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릉은 옥 같은 손가락으로 아지를 가리키며 웃었다.

“전과 같이 아가씨는 절 따라오세요. 그러나…… 저 바보 같은 사람은 따라올 수 없답니다.”

아지는 아름다운 홍릉의 손짓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본분을 기억했다.

“저는 아가씨를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 때문에 경칩과 곡우만 따라와도 된다.”

심묘의 말투는 단호했다. 아지도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홍릉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어려 보이는 심묘가 매번 호위에게 명하면 누구든 고분고분해졌다. 그들은 모두 심묘를 존경했다. 능력 있는 부하는 아무래도 자만심이 있는 법인데, 심묘의 앞에서 이들은 조금도 허세나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심묘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홍릉은 심묘와 림강산으로 향했다. 그 뒤로 경첩과 곡우가 따랐다.

“듣자니 풍선전당포는 얼마 전에 다시 열었다구요. 2년 전에는…….”

“2년 전 주인의 가족분께 변고가 생겨 주인은 점포를 닫고 고향으로 가셨어요. 며칠 전에야 정경성으로 돌아오셨지요. 아가씨가 처음으로 다시 만난 단골입니다.”

심묘의 말에 홍릉이 웃으며 화제를 이었다. 마음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하며 심묘가 홍릉을 따라 미소 지었다. 누각에 도착한 홍릉은 심묘에게 방을 안내했다.

“주인을 불러드릴 테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시며 휴식을 취하십시오.”

탁자에 놓인 찻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 방도 이전과 같았다. 이렇게 큰 점포를 장사를 쉬는 2년 동안 그대로 두다니, 역시 금전에 여유가 있는 대단한 자산가의 모습이었다.

심묘가 차 한 잔을 다 마시기 전, 누군가 주렴 너머에서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찻잔을 놓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참새와 꽃을 금실로 수놓은 초록색 장포를 입고 금관을 쓴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이전보다 조금은 더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얼굴의 장난스러운 기색은 지난날과 다름없었다. 심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화려한 옷이 조금도 과해 보이지 않으니 계우서 역시 재화가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넘쳐난다고 생각했다.

계우서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빛내며 조금도 숨기지 않고 칭찬했다.

“이전 작약 소저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심 소저도 뒤처지지 않는군요. 2년간 보지 못했더니 분위기가 더욱 그윽해지셨습니다.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할 듯싶네요.”

경칩과 곡우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계우서가 세가의 소녀를 함부로 희롱하는 호색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허튼소리를 하니 그가 일부러 멍청한 척하는 건지 정말 생각 없이 한 말인지 시비를 가릴 수 없었다.

심묘는 다만 살짝 웃었다. 그녀는 계우서의 화려한 옷을 힐끗 보았다.

“계 주인도 이전보다 더욱 부유해 보입니다.”

심묘의 맞은편에 앉은 계우서는 차를 따랐다. 그는 심묘를 다시 만나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심 소저께서 이 옛 친구를 기억해주실 거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막 정경성으로 돌아오셨다고 들었는데, 다른 이들을 제치고 먼저 풍선전당포를 찾아주시다니. 저를 신임하시는 것 같아서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어젯밤에는 자신이 다정하다는 사람이 오더니, 눈앞에 사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심묘는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단정한 태도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서로 친근한 사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심묘는 가볍게 기침했다.

“오늘 온 것은 계 주인과 거래를 하기 위해섭니다. 막 정경성에 돌아와 많은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하니, 백효생에게 의지할 필요가 있답니다.”

멍해진 계우서가 말했다.

“거래를 하자고요? 좋습니다. 아가씨께서 무언가 알고 싶다면 백효생은 모든 힘을 다 기울일 겁니다. 저와 심 소저는 친구니 2할을 깎아 드리겠습니다.”

경칩과 곡우는 남몰래 계우서에게 눈을 흘겼다. 겉으로 보기에 전당포는 전혀 장사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심묘를 옛 친구라 말하면서도 고작 2할만 할인해주겠다니, 인색하고 간사했다.

“이번 정보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심 소저는 농담도 참. 소문을 ‘만드는’ 것도 해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못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계 주인은 2년간 명제에 없었습니다. 명제의 일을 물어보았다가 말썽이 생길까 걱정이군요.”

계우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의 미간 사이에 득의가 스쳤다.

“심묘 아가씨, 풍선전당포를 얕보지 마십시오. 2년간 제가 정경성에 없었고 풍선전당포도 닫았지만, 생계는 여전히 꾸려 나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은자를 구해 가족을 부양했겠습니까? 백효생은 언제든 영업해왔습니다. 2년의 수확을 그냥 날릴 수는 없는 일이지요. 말씀하지요. 무슨 소식이 알고 싶으신가요? 풍선전당포는 아가씨를 위해 사력을 다할 겁니다.”

심묘도 그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계 주인이 그리 말씀하시니 안심입니다. 오늘 온 것은 세 가지 소식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로 2년 전, 임안후부 사가 소후야의 전사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계우서가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 소저가 그것을 알아보셔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사가와 우리 심가는 모두 명제의 장군 세가입니다. 제 아버지는 비록 임안후와 정견은 맞지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서로 비슷한 처지라고 여기십니다. 저 역시 사 소후야 같은 훌륭한 인재가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어 애석했습니다. 그야말로 토사호비 아닙니까. 계 주인이 날 도와 사 소후야의 전사에 관한 실마리를 잘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목이 탄 계우서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남다른 것을 알아보려면 쉽지 않습니다. 죽어 불에 탄 지 오래 지났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남아 있을지 보장 못 합니다.”

“계 주인이 노력해도 못 찾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요.”

심묘가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한 잔 따랐다. 그녀는 구름처럼 담담하며 바람처럼 가볍게 말했다.

“두 번째로 명제 궁중에 있는 고양이라는 태의를 알고 싶습니다.”

“풉.”

계우서는 찻물을 뿜었다. 심묘가 경칩에게 눈짓하자 경칩이 얼른 손수건을 건네줬다. 계우서는 허둥지둥 물기를 닦았다.

“아주 놀라신 거 같습니다만?”

“켁, 확실히 조금 놀랐습니다. 심묘 아가씨는 어째서 궁중 태의에 대해 알려고 하십니까?”

“남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혹시 이 이름을 들은 적 없습니까?”

심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계우서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듣습니다. 의술이 그다지 고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성이 일찍이 천하에 퍼졌겠지요.”

계우서는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뗐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아가씨, 어찌해서 궁과 연루되고자 하십니까? 백효생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장사하지만, 궁중만은 예외입니다. 그 세력이 대단하니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심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평온했다. 그러자 계우서는 더 불안해졌다. 두어 번 기침한 계우서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은자를 배로 주셔야…….”

“은자는 계 주인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계 주인이 원하는 대로 드릴 겁니다.”

앞의 두 거래 내용만으로도 계우서는 이미 숨이 가빠왔다. 그는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세 번째로 사려는 소식은 무엇과 관련 있을는지요?”

“세 번째는 조금 곤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계 주인의 능력이면 알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심 소저의 신임에 감사합니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소저도 곤란하다고 느끼시는지?”

심묘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사람을 알아보고 싶네요. 대량의 예왕 전하.”

찻잔을 든 계우서의 손이 조금 떨렸다. 표정은 모호해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오? 심 소저는 왜 예왕 전하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신가요?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예왕 전하는 막 정경성에 오셨습니다. 아마 조공연회에서 그를 보셨겠지요. 혹시 심 소저도 다른 귀족 여인처럼 예왕 전하의 미모를 사모하여 특별히 알아보려 함입니까?”

계우서는 목소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경칩과 곡우는 계우서의 말에 분노했다. 계우서의 말은 모두 허튼소리였다. 외부 사람이 들었다면 심묘를 어찌 생각할지 뻔했다. 그러나 주인의 대화에 하인은 감히 참견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부득이 노기를 억누르며 계우서를 맹렬히 쏘아보았다.

심묘는 초조해했다가 난처해했다가 끝내 흥분하는 계우서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요. 저도 그 절세 미모를 사모한답니다.”

계우서는 멍하니 입을 크게 벌렸다. 감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심묘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그,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심묘가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계우서는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듯 완전히 들뜬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제가 반드시 잘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곁에 다른 아가씨가 있는지도요.”

심묘가 일어나 계우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계 주인. 무언가를 찾았을 때 부로 편지를 보내주세요. 이건 계약금입니다.”

심묘가 소매 안을 더듬어 은자를 꺼냈다.

“너무 예의를 차리시네요. 우리 사이에 무슨 계약금을 말씀하십니까?”

말과 달리 계우서는 은자를 소매에 넣었다. 경칩과 곡우는 또 그에게 눈을 흘겼다.

“돈을 지불해야 일이 잘 처리되는 건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이치죠. 단지 계 주인이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백효생과의 거래는 품질도 믿을 만하고 가격도 공정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저는 당연히 가짜 소식을 듣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쓸데없는 정보를 얻는다면 이 거래는 아주 엉망이 되겠지요.”

온화한 얼굴로 맹렬한 말을 쏟아낸 심묘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웃었다. 계우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심묘는 경칩, 곡우와 함께 방을 나섰다. 홍릉이 웃으며 심묘를 배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계우서는 찻주전자를 보다가 재채기를 했다. 그는 코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한쪽 벽에 걸린 산수화를 힘껏 당기자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막 들어가자마자 계우서는 누군가에게 걷어차였다. 자칫 넘어질 뻔했다. 계우서는 노기등등해 자신을 찬 사람에게 크게 소리쳤다.

“고양 형님!”

고양은 우아하게 부채를 흔들며 문 뒤에 앉아 있었다.

“계우서, 자네 머리에 문제 있나? 이렇게 가다가는 누가 자네를 팔아넘기는지조차 모르겠어.”

“형은 그렇게 똑똑해서 다 들킨 거야? 심묘가 고 태…… 의를 알고 싶다잖아!”

“입 다물어. 시끄러워.”

화려한 자줏빛 장포를 입은 사경행이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 계우서는 억울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난 3형과 함께 막 돌아왔어. 심묘가 뭔가 수상쩍다고 느꼈다면 이건 분명히 고양 형 잘못이야! 말해! 어디서 문제를 일으켜서 심묘한테 들킨 거야?”

계우서는 매섭게 고양을 추궁했다. 이곳은 심묘가 있던 방과 인접해 고양과 사경행도 계우서와 심묘의 거래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심묘가 알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으니 아주 공교로웠다.

“계우서, 자네 바본가? 심묘도 며칠 전에 정경으로 돌아왔네. 심묘에게 천리안이 있어야 내가 궁중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난 자네 쪽에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데.”

“내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면 심묘는 백효생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 거야.”

계우서가 무언가 생각한 듯 엉큼하게 웃었다.

“심묘도 3형을 사모한다니, 역시 심묘도 3형에게 반한 거야.”

고양은 차가운 눈으로 계우서를 보았다.

“그런 허튼소리도 자네 같은 바보만 믿을 거네. 자넨 모든 사람이 자네처럼 미색에 정신 못 차리는 줄 아는가?”

계우서가 가슴을 세게 쳤다.

“난 형한테 말한 거 아니야. 형이랑 말 안 해. 3형, 어떻게 해야 해? 심묘가 원하는 정보를 줘야 해? 아니면 마음대로 소식을 만들어서 속여?”

“심묘가 이 세 가지를 알아보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네. 속인다면 알아볼 가능성이 있어. 심묘가 어떤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군. 지금 심가의 입장도 분명하지 않고. 게다가 배랑이 이 2년 동안 부수의의 심복이 되었어. 젊은 아가씨의 생각을 파악하기가 이렇게나 힘들 줄은.”

한탄을 늘어놓던 고양은 사경행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찻주전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념에 잠겨 있었다. 고양은 그를 콕 집어 말했다.

“사…… 전하, 이번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신을 차린 사경행이 가볍게 대꾸했다.

“대응할 필요 없어.”

“어째서? 은자를 받지 마? 하지만 심묘는 똑똑하니 아예 거절하면 더욱 의심할 거야. 이러다가 풍선전당포에도 이상한 점이 있는 걸 발견하면 어떡해?”

고양이 말하기 전 계우서가 선수를 쳤다. 사경행은 담담히 웃었다.

“심묘가 똑똑하기 때문에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자네 뜻은…….”

고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묘는 탐색하러 온 거야. 네게 들으란 게 아니라 나더러 들으라고 한 거다.”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 절세 미모라는 말은?”

계우서의 중점은 다른 쪽이었다. 사경행은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힐끗 보았다.

“그것도 나 들으라고 한 거야.”

마차 안. 경칩과 곡우는 조심스레 심묘의 표정을 살폈다. 곡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그 계 주인이 무슨 잘못된 말을 했나요? 조금 언짢아 보이십니다.”

심묘는 확실히 못마땅한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곡우와 경칩은 심묘가 내뿜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써 참는 것 같았다. 심묘와 계우서의 대화를 곁에서 들은 둘은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계우서의 말은 분명 예의에 어긋났지만, 그때 심묘는 개의치 않아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장난스러운 말 때문에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심묘는 차가운 목소리로 담담히 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남몰래 소매 안쪽에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답답했다. 풍선전당포는 자신이 소춘성으로 간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자신이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개장했다. 세상에 어디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을까. 세상의 모든 우연에는 그 나름의 원인이 있는 법이었다.

심묘는 풍선전당포가 문을 닫았을 무렵의 기억을 더듬어 당시 또 다른 큰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사경행이 수령 인장을 요청해 출병한 것이었다. 풍선전당포의 개장 시기에 맞물려서도 심가 외 다른 큰일이 있었다. 명제의 조공을 위해 진국 태자와 대량 예왕이 정경성에 당도했다.

심가와 풍선전당포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황보호는 2년 전 정경성에 없었다. 그러나 풍선전당포와 사경행의 관계는? 오늘 자신이 풍선전당포로 간 것은 모두 탐색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계우서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계우서와 사경행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고양도 마찬가지다. 계우서와 고양은 모두 대량 사람으로 신분을 숨기고 정경성 안에 숨어 있었다.

이전 예친왕 일을 거래할 때, 자신은 있는 대로 털어놓았으니 사경행은 그때도 모두 알았을 것이었다. 기선제압을 해 계우서를 먹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사경행이 사람을 바보로 여겨 비웃고 있을 걸 생각하자 분해 죽을 것 같았다.

마음이 답답한 심묘의 얼굴이 빨갰다. 그녀가 더운 거라고 여긴 경칩이 공기를 통하게 하려고 발을 들었다. 그때, 심묘는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큰 소리를 내며 마차를 세운 후 발을 들어 내다보았다. 그러나 방금 그 얼굴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아가씨?”

경칩과 곡우는 오늘 심묘의 행동에 갈피를 못 잡고 어리둥절했다. 심묘는 세심히 밖을 바라보다가 발을 놓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계속 가자.”

그러나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전보다 표정이 더욱 가라앉았다.

* * *

심신 부부가 대단한 기세로 정경성에 다시 입성한 것만 해도 이야기꾼들의 입은 바쁘게 움직였는데, 이에 심묘가 조공연회에서 명안 공주를 상대로 당당히 승리한 것이 더해졌다. 온 사람들이 심부에 관심을 기울였다.

심신이 떠나자마자 심부는 편액도 바꾸었다. 심신이 병권을 빼앗기고 소춘성으로 도망치듯 떠났을 때, 심가 사람은 도움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분가를 언급하여 그와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이 다시 문혜제의 신임을 얻었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길로 심부를 지켜보았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심부는 뱃속이 답답해졌다.

송경당. 심 노부인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침상 위 모피는 심신이 서북에서 사냥해준 여우 털로,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평평했다. 심신은 매년 정경성으로 돌아올 때마다 노부인에게 직접 서북에서 사냥한 짐승의 모피를 선물했다. 정경성에서는 아무리 큰돈을 줘도 살 수 없는 좋은 물건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전의 낡은 것을 아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송경당도 예전처럼 부귀하지 않았다. 장식도 많이 적어졌다. 심신이 끊임없이 받아온 하사품은 온 집안을 부유하게 했지만, 모두 옛날 일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는 지금은 진약추가 살림을 관리하니 은자를 변통하기 어려웠다.

“삼방은 요즘 들어 지나치구나. 겨울이 눈앞이라 재봉사를 찾아 내 피풍의를 수선하라고 했는데 질질 끌고 있어. 집안일을 하면서 은자를 전부 가로채는 게 분명하다.”

노부인이 인상을 쓰며 인삼차를 마셨다. 여종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노부인의 어깨를 조심스레 주물렀다. 지금 노부인은 이전보다 더욱 변덕스러웠다. 1년 전 심원백이 천연두로 단명한 이래로 그녀는 늘 성질을 부리지 못해 안달인 사람처럼 굴었다.

심원백의 요절은 심부에서 말 못할 아픔이었다. 1년 전 정경성에는 천연두에 감염된 사람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황실은 재빠르게 대처해 더 큰 피해는 막았지만 이미 감염된 사람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심원백도 그중 하나였다.

심가 이방, 심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심원은 이미 망나니 칼날 아래 죽었기에 둘째 심원백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두 그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결국 그 역시 어린 나이에 죽었고, 임완운은 들보에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임완운이 죽고 나서 심귀는 미친 듯이 첩실을 들였으나 1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노부인은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심귀가 불임약을 먹어 남은 평생 자식을 낳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노부인은 바로 기절했고, 심귀는 넋이 나갔다. 심귀는 죽은 임완운에게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녀가 심원백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자신에게 불임약을 먹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얄궂어 심원백은 보다 큰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죽은 이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었다. 결국, 심귀에게 남은 자식은 심동릉 하나뿐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만 이낭과 심동릉의 생활은 그 기점을 이후로 크게 변했다.

심귀는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안 후 벼슬길에 관심을 끊었다. 대를 이을 사람도 없으니 조정 일에 일각을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일 먹고 즐기는 타락한 생활을 하며 흥청망청 은자를 낭비했다.

이방이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 후 노부인은 삼방, 심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일찍이 심만에게 두 명의 통방을 붙여줬으나 진약추가 심만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두 사람은 없느니만 못했다.

“집안일이 엉망진창일 뿐 아니라 질투도 많아. 학자 가문이 대갓집 규수를 길러냈다 했더니 어디서 배운 가난한 집안의 태도인지. 품격이 떨어지는구나. 남편을 위해 자손을 번창케 도울 생각은 않고 요염한 모습으로 사람을 홀릴 줄만 알지. 삼방에는 적자가 없는데 어쩔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장 유모가 웃으며 말했다.

“노부인 마님, 구태여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셋째 주인어른께서 다른 아가씨의 좋은 점을 모르실 뿐입니다. 셋째 주인어른은 정이 깊으시니, 며칠 뒤 새로운 아가씨들이 오면 마님께서 두 명을 주인어른께 보내세요. 꽃 같은 나이의 아가씨들이니 셋째 주인어른은 당연히 좋은 점을 알아보실 겁니다.”

노부인은 얼마 전 하인에게 양주의 수마(瘦馬, 가난한 집안에서 어린 딸을 팔아넘기면, 업주가 아이를 첩실 따위로 들이기 위해 교육함)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용모만으로는 심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진약추는 시의 정취와 그림 같은 분위기로 심만을 홀렸다. 양주의 수마는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아 시문, 서화에 정통하고 용모도 좋아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했다. 노부인은 심만도 남자고, 오랫동안 곁에 둔 진약추는 이미 익숙해진 데다가 나이도 적지 않으니 분명 흔들릴 거라고 믿었다.

“하나같이 내 화를 부르는구나. 심모는 어디서 배운 건지, 눈이 너무 높아. 말해준 여러 혼처는 모두 부유한 집안인데도 다 싫어하니. 혹시 황실에 시집이라도 가려는 겔까?”

장 유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부인의 생각 없이 말하는 습관은 조금도 나아질 줄을 몰랐다. 그래도 그녀는 표정을 잘 갈무리하고 미소를 지었다.

“심모 아가씨는 예쁘게 생겼으니, 셋째 주인어른이 좋은 혼처를 찾아주실 겁니다.”

“혼처를 찾다가 원수나 생기지 않길 바란다. 심모를 얼마나 좋은 집에 보내는지 볼 것이다.”

추수원. 진약추가 이마를 눌렀다. 그녀의 여종 시정이 말했다.

“마님, 송경당에 알아봤더니 노부인 마님은 주인어른을 위해 양주 수마를 몇 명 샀다고 합니다. 며칠 후면 올 거랍니다. 마님, 노부인 마님이 어떻게 마님에게 이러실 수 있을까요.”

진약추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납게 탁자 위에 있는 책을 전부 바닥으로 밀어냈다. 한바탕 소란에 방 안 여종들은 모두 깜짝 놀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진약추는 심만 앞에서는 이전처럼 사려 깊고 온화하게 행동했지만, 그의 앞에서일 뿐이었다. 하인들은 진약추의 성격이 점점 흉악하며 맹렬해지는 걸 진작에 눈치챘다. 진약추는 공동 자금을 관리하며 부족한 은자를 메꾸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사치 부리기를 좋아하는 노부인 때문에 도리어 따로 저축한 은자도 공동 자금으로 내놓아야 했다. 이전의 진약추는 속세를 신경 쓰지 않고 고고히 서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속세의 일에 발을 담그고 있어 하루하루가 지난했다. 게다가 여전히 아들이 없었다.

진약추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늙은이는 죽지도 않고 수마를 사서 아들에게 주다니. 정말 염치를 모르는구나.”

심만이 이 자리에 있다면 놀라 턱이 빠졌을 것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자라고 믿는 진약추가 듣기 거북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 모습에 기함했을 터였다. 화의가 말했다.

“마님은 성격이 너무 온화하십니다. 노부인 마님은 곧 대인 방에 사람을 채우실 겁니다.”

진약추가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시정과 화의, 두 여종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진약추가 고른 사람이었다. 계례의 나이, 잘 익은 과일처럼 둘은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진약추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님은 정말 노망이 들었어. 우리 뜰에 여인을 채우려고 구태여 바깥 천한 자들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내력도 분명치 않은 것들이 가풍을 해칠까 두렵지도 않은가 보구나. 차라리 곁의 깨끗하고 영리한 사람을 찾는 게 좋을 텐데.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시중도 잘 들 테니 말이야. 지금 보니 너희 두 사람이 괜찮아 보이는구나.”

진약추의 말은 부드러우나 시선은 매우 맹렬했다. 놀란 두 여종은 무릎을 꿇었다.

“저, 저희가 감히. 저희는 일심으로 마님을 시중들 뿐, 절대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진약추가 고개를 숙여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두 여종은 몸을 떨고 있었다.

“일어나거라. 너희들이 원하지 않으면 나도 강요할 수는 없지.”

“마님, 감사합니다.”

두 여종은 여전히 몸을 떨며 일어났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약추는 언뜻 보기엔 온화하고 선량한 것 같았지만, 곁에 있던 두 사람은 그녀의 수완을 다 보았다.

사실 이전에 용모가 괜찮은 여종 하나가 심만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심만은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이 여종은 구실을 찾은 진약추의 손에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그녀뿐 아니라 가족들도 그 끝을 함께했다. 시정과 화의는 진약추가 뼛속 깊이 질투가 심한 사람이며 수완이 아주 매섭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들이 심만과 관계를 맺는다면 죽을 때 뼛조각도 남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으니 결코 그의 첩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진약추는 탄식했다.

“내 능력이 없음을 탓해야지. 대인께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니 말이야. 내가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면 어디 이런 상황이 왔겠느냐?”

시정과 화의는 진약추의 말을 이어받지 못했다. 아들은 진약추의 약점이었다. 진약추가 더없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심부는 쇠퇴해 이 모양이구나. 게다가 아들이 하나도 없지. 이방에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죽었어. 나설안이 부럽구나. 아래로 아들과 딸이 있고, 위로는 시부모가 없으니. 심신은 그녀를 보물 대하듯 하고, 첩도 안 두니 정말 질투가 나는구나.”

그녀는 조공연회에서 심묘가 두각을 나타낸 것이 떠올랐다. 심모 역시 용모와 재치가 뛰어났지만, 심가의 명성은 하루하루 쇠락하니 전처럼 좋은 혼처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심모가 흠모하는 부수의는 말할 수조차 없었다. 승부욕이 강한 진약추로서는 당연히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눈에 차지도 않던 상스러운 장군의 딸, 심묘 발밑에 밟히기까지 하다니.

그때, 바깥에서 남종이 들어왔다.

“마님, 누군가 노부인 마님을 찾아왔는데, 부 입구에서 마님의 남종에게 저지당했습니다. 심부에 의탁하러 왔다고 합니다.”

진약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부인과 말이 좋아 혈육이지 실은 전혀 상관도 없는 친척이 또 돈을 갈취하러 왔을 터였다. 그러나 곧 형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온 것일까.

“돈을 조금 줘서 보내거라. 심부 사람을 먹이기도 힘든데 무슨 개나 소나 다 들어오려는지.”

남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마님. 갈취를 하러 온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은 노장군 어르신의 옛 친구 딸이라며 집안에 변고가 생겨 앞길이 막막해 도움을 청하러 온 거라고 했습니다.”

심 노장군. 진약추가 오랜 시간 생각한 후 일어났다.

“편방으로 데려가라. 내가 만나보마.”

* * *

심묘가 부로 돌아오니 시간은 아직 일렀다. 심묘는 방에 틀어박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조용했다.

하늘이 어두워질 때 나담이 돌아왔다. 나담은 장신구를 조금 사 왔는데, 개중 몇 개는 심묘의 몫으로 챙겨 온 것이었다.

“심묘, 오늘 풍안녕과 장신구 점포를 돌아다녔어. 정경성의 장신구 점포들은 역시 아주 크더라. 나랑 풍안녕이 널 위해 고른 건데, 네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네가 외출하고 싶으면 우리 같이 또 돌아다니자.”

나담은 외출이 아주 즐거웠는지 여운을 곱씹는 모습이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담이 떠나자마자 심묘는 장신구를 바라보며 이것들을 얼마의 은자로 바꿀 수 있을지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심신 일행도 돌아와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일이 매우 순조로운 듯, 심신과 나설안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심묘 혼자만 활기가 없었다. 나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조금 불편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심구의 젓가락이 멈췄다.

“교교야, 왜 그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주시하자 심묘는 당황했다.

“아무것도, 소춘성에서 수도로 돌아와서 조금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야. 며칠 지나면 괜찮을 거야.”

심구가 웃었다.

“무슨 익숙해지고 말고야. 교교, 네가 정 익숙하지 않으면 며칠 뒤에 날을 잡아 정경성 동쪽에서 서쪽까지, 남쪽에서 북쪽까지 돌아다니자. 몇 번 지나다니면 예전 기억이 다 날 거야.”

나담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심구 오라버니, 나도, 나도 데려가! 나도 심묘를 보호할 수 있어.”

“허튼소리, 교교가 너랑 정경성을 한 바퀴 돌면 지쳐 쓰러질 거야.”

나설안이 심신에게 맞장구치라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이들이 즐거우면 되니 괜찮소. 고얀 녀석. 네가 교교와 나담을 데리고 놀러 갈 거라면 호위들도 한 무리 데려가거라. 누가 감히 일을 만들려 하면 단호하게 처리해. 겁낼 필요 없다.”

분노한 나설안이 크게 웃는 심신의 손을 꼬집었다. 부부가 이렇게 남들 앞에서도 친근하게 장난을 주고받자 아주 보기 좋았다. 심신은 외부에서는 위풍당당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설안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심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웃음이 돌아오나 했는데 그 순간 무언가 생각났는지 심묘의 표정이 다시 우울해졌다. 심묘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람들이 자신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곁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나릉은 조금 멈칫했다. 그 역시 무슨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식사 후, 대청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심묘도 자기 뜰로 돌어갈 준비를 했다. 나담은 심묘의 뜰 옆에 머물고 있었기에 깡충거리며 방으로 함께 돌아갔다. 심묘가 자기 뜰에 들어갈 때 나릉이 그녀를 붙잡았다.

“심묘야, 잠시만.”

심묘가 나릉을 바라보았다.

“나릉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나릉이 주저하다가 소매 안에서 네모반듯하게 접힌 물건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그지없이 부드러웠다.

“오늘 심구 형님이랑 외출했다가 우연히 이걸 파는 점포를 봤어. 사람들이 많이 사길래 나도 하나 샀어. 요즘 밤에 꿈을 많이 꾼다며? 여기 들어간 향료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대. 괜찮다면 받아줬으면 해.”

당황한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임에도 나릉의 붉어진 얼굴이 선명했다.

분명 나릉의 용모는 괜찮았다. 사경행의 수려한 생김새에 비교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고, 심구처럼 용맹하거나 계우서처럼 귀여운 상도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온유해 보고 있기만 해도 절로 평온해지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나가의 사람 중 가장 출중했다. 그가 가장 신중할 뿐 아니라 중임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고 됨됨이가 진실하기 때문이었다.

“심묘야, 혹여 싫으면…….”

심묘는 가볍게 나릉의 손에서 물건을 가져왔다.

“오라버니의 마음인데,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오라버니, 고마워.”

“좋으면 됐어.”

나릉은 미소 지었다. 그의 표정은 자상했고, 말투에는 관심의 기색이 가득했다. 마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나릉의 태도를 보통의 여자가 경험한다면 스르르 녹아내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심묘는 한 걸음 물러났다.

“다른 일이 없다면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

나릉의 눈에 실망이 스쳤지만 아주 빠르게 사라졌다.

“그래, 푹 쉬어.”

심묘는 나릉이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조용히 보았다.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풋풋한 소녀가 아니었다. 부수의와는 남녀 사이의 감미로운 감정을 누리지 못했으나 궁중에서 오래 생활했다. 좋은 사람인 나릉을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한 자신의 일생에 끌어들인다는 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나가 사람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간 심묘가 머리를 빗고 세수를 끝내자 경칩과 곡우는 물러났다. 탁자에 앉은 심묘는 나릉이 준 물건을 펴보았다. 그가 준 선물은 정교한 양면 자수가 놓인 손수건이었다. 정경성에서 양면 수 손수건은 구하기 몹시 어려웠다. 나릉이 이 손수건에 많은 은자를 썼을 터였다. 윗면에 수놓인 흰 두루미는 그의 청렴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손수건은 그윽한 향기를 발산해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이 손수건은 류형의 손에서 나온 게 명백했다. 류형의 손재주는 정경성에서 최고를 다투었다. 게다가 명제에는 양면 수가 아주 적었다. 류형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 심묘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심묘는 겉옷을 벗으며 침상에 앉았다. 편히 휴식을 취하려 할 때,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옷을 벗으려던 심묘의 손이 멈칫했다. 불길같이 거센 분노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창밖에 있는,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방문한 무뢰한을 노려보았다.

“사. 경. 행.”

사경행은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닫았다. 그 태도가 어찌나 여유롭고 한가로운지 심묘의 후원이 사경행의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면도 쓰지 않은 채였다. 출중한 얼굴이 등불 아래 사람을 홀렸다. 그러나 심묘는 그를 당장에 끌고 나가 내쫓고 싶었다.

“하늘 아래 유일하게 너만이 내 아명을 부를 수 있다. 너에게만 있는 특별한 영예야.”

사경행은 의자를 끌고 와 심묘의 침상 근처에 앉았다. 그의 웃음은 구름처럼 담담하고 바람처럼 가벼웠다. 키가 큰 사경행은 앉아도 심묘보다 컸다. 심묘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예왕 전하는 아주 한가하신가 봐요. 연경 골목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익숙해지겠어요.”

사경행은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괜찮아. 연경 골목의 내 관저에서 여기까지 주택을 모두 구입했으니까. 지금 네가 머무는 주택의 이웃집도 나의 뜰이야. 가까운 이웃이 잘 지내는지 방문하러 온 것뿐이지.”

심묘는 숨을 들이마셨다. 연경 골목에서 이곳까지는 아무리 가까워도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모든 건물을 사경행이 구입했다면, 조금 과장을 보태 정경성 남쪽 대부분 땅이 그의 뜰인 셈이었다. 심신의 이웃집 뜰도 사경행이 구입했다니, 사경행은 재화를 물 쓰듯 썼다. 대량의 국고에서 얼마를 가져왔길래 금덩이를 흙덩이처럼 여기는 건지, 대량의 영락제는 이를 알고나 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제멋대로 웃는 사경행의 얼굴을 보자 심묘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자는 왜 이렇게까지 뻔뻔할까. 자기 입으로는 가까운 이웃집에 들린 것이라지만, 어느 누가 야심한 밤에 초청장도 없이 이웃집을 방문할까. 대량의 황실에서는 보통의 상식을 완전히 깨부수는 ‘새로운’ 예의라도 가르치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넌 그다지 즐겁지 않아 보이는군. 무슨 난처한 것이 있으면 오라비인 내게 말해도 돼. 예전에 알던 정을 봐서 예왕의 신분으로 널 도와주마.”

사경행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심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생각할수록 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풍선전당포에서 계우서와 말한 게 떠올랐다.

“사경행, 임안후부의 방 씨를 어떻게 보나요?”

임안후부의 방 씨는 사장무, 사장조 형제의 생모였다. 옥청 공주의 죽음은 방 씨와 많든 적든 관계가 있었다. 옥청 공주의 이야기는 사경행의 역린임에도 심묘는 거리낌 없이 물었다.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에게서 정보를 캐내려고?”

“말해 주시겠어요?”

“하기야 네게 말해도 무방하겠네. 내 눈에는 개미만도 못하지.”

“왜 방 씨를 죽여 복수하지 않나요?”

사경행이 실눈을 떴다. 그는 심묘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그의 웃음은 봄날에 묻었다가 겨울에 파낸 매화주처럼 사람을 취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겨울처럼 매섭게 추워 취한 사람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심묘, 넌 심신이 제2의 사정이 될까 염려하는 거야?”

“맞아요. 만일 내가 당신이라면 방법을 찾아 복수할 거예요. 방 씨를 죽이고 그 두 아들을 죽여 복수해야 헛되이 살지 않는 것일 테니까요.”

심묘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흉악하고 야박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사경행은 여전히 웃기만 했다.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으니 심묘의 천진함을 비웃는 것도 같았다.

“방 씨를 놔두는 건 신경 쓰기 귀찮아서야. 옥청 공주와 사정은 나와 조금의 관계도 없는데 내가 왜 복수를 하지?”

심묘는 멍해졌다. 사경행과 사정이 부자 사이가 아닌 건 이전에 들어서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옥청 공주도 사경행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건지 의아했다. 사경행의 피가 사정과 옥청 공주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가의 적자가 된 걸까?

“그럼 옥청 공주마마의 아들은?”

“죽었어. 태어나고 바로 죽었지.”

사경행이 담담히 말했다. 태어나고 바로 죽었다고? 그러나 이에 관한 풍문은 전혀 돌지 않았다. 사경행의 말대로라면 그는 그때 바꿔치기되었고, 발견한 사람은 없으니 옥청 공주도 몰랐던 건 아닌가 싶었다.

“사정의 아들이 살아 있었어도 세 살도 못 돼서 단명했을 거야. 나이기 때문에 방 씨가 감히 손을 못 쓴 거지. 방 씨가 보낸 사람이 모두 영문 모르게 자취를 감췄거든.”

사경행의 웃음에 사악한 기운이 서렸다. 심묘는 그제야 깨달았다. 방 씨는 옥청 공주를 난처하게 핍박하고 꽃처럼 말라 죽게 한 수완과 야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런 사람이 집에 틀어박혀 좀처럼 외출도 하지 않고, 사경행은 탈 없이 성장했다니 확실히 괴이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내막을 아는 이에게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보내는 사람마다 모두 이유 없이 사라지니 두려움을 느낀 방 씨가 물러나 다음을 기약한 것일 테니까. 사경행이 대량의 예왕이라면 곳곳에 능력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방 씨를 대처하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을 터였다. 이해 가지 않던 부분이 밝혀지자 비로소 수긍할 수 있었다.

사경행이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너도 걱정할 것 없어. 심신과 사정은 다르니까.”

“저와 당신도 다르죠.”

당황한 사경행은 심묘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전 아니에요. 방 씨처럼 제 집안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전심전력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방 씨처럼 심보가 나쁜 사람이 있다면 산 채로 조각조각 찢어서 아무 데나 매장할 겁니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기분이 용솟음쳤다. 그때, 머리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사경행이 한 손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가까운 이웃이니 내가 너 대신 그를 죽여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주마.”

심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사경행은 웃음을 머금은 채 심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말과 표정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농담하는 듯 가볍게 말한 것 같았으나 눈은 진지했다. 사경행에게 방 씨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확실히 쉬운 일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을 똑바로 마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복수는 내가 해야 해요.”

“막다른 길이 아닌데 스스로 손을 쓰는 건 좋은 수가 아니야. 미안하다면 내게 물건을 보내. 보수로 치면 될 일이야.”

“예왕 전하는 부귀하시니 전 합당한 은자를 지불하기 어렵겠네요.”

심묘가 비꼬았다. 사경행은 나른하게 웃었다.

“너에게는 2할 할인해주마.”

사경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방금 심묘가 펼친, 나릉이 준 손수건이 네모반듯하게 있었다. 사경행이 손수건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향기의 질이 떨어지지만, 집안에서 기르는 개에게 사용하기 적합하겠어. 개가 최근 잠을 못 잤거든. 이걸 보수로 치지.”

심묘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경행이 손수건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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