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장 (49/71)

33장

조공연회 후 정경성은 여전히 번화했다. 대량과 진국에서 온 귀인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는 이전보다 더욱 화려했다. 명제 황실은 언제든 다른 나라 앞에서 태평성세의 모습을 보이길 바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심부. 추수원 하인들이 새로운 화젯거리를 이야기했다.

“새로 오신 아가씨는 도대체 어떤 신분이길래 마님이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시는 걸까?”

“오늘 들여온 찻잎도 그 아가씨에게 먼저 끓여주셨어. 아마 귀인인가 봐.”

“그 아가씨의 아버지가 노장군 어르신께 특별하게 잘했대. 노장군 어르신 대신 칼을 맞아 자칫 죽을 뻔했다더라.”

푸른색 천 저고리를 입은 남종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린 여종이 얼른 입을 가렸다.

“어쩐지. 노장군 어르신께 은혜가 있으면 심부에도 은혜가 있는 거지요. 귀빈이네요.”

“몸을 의탁하러 왔다는데,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겼나 봐. 마님의 모습을 보니 우리도 아가씨를 잘 보살펴야겠어.”

“뭘 잘 보살펴? 지금 부 사람들도 지내기 힘든데 공짜 밥을 먹으러 왔다니 일찌감치 내쫓아야지.”

그때 한 여종이 찬물을 끼얹자 주위 모두 입을 다물었다. 동조의 침묵이었다. 지금 심부는 겉으로 좋아 보일 뿐, 심신이 분가한 후부터 은자가 아주 빠듯한 걸 부 안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현재 하인들의 월은도 많이 줄었는데, 아무리 귀인이라도 공짜 밥을 먹으러 왔다면 환영하지 않을 만했다.

“마님은 평소 우리를 대할 때 가혹하신데, 그 아가씨에게는 어찌 이리 대범하게 대하시는지 알 수가 없네.”

누군가 의심스럽게 말했다.

진약추는 방에서 찻잔을 맞은편 여인에게 넘겨주며 미소 지었다.

“새로 산 찻잎인데, 맛 좀 봐요.”

여인은 청록색 치마를 입었는데 자수도 놓이지 않은 매우 단출한 차림새였다. 이런 옷은 잘 소화하지 못하면 시골 아가씨 같은데, 그녀가 입으니 차분해 보였다. 여인은 방년을 갓 넘은 듯했다. 몸에 걸친 장신구는 매우 소박하며 생김새는 부드러웠다. 한 번만 봐도 학자 집안 출신의 교양 있는 아가씨임을 알 수 있는 풍모였다.

진약추는 줄곧 군인이 우아한 물건을 좋아하는 것을 멸시했다. 사람도 같았다. 진약추는 눈앞 여인을 보니 총명한 사람이 총명한 사람을 아끼는 기분이 들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진약추의 권유에 여인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찻물이 아주 엷은데도 향기롭네요. 부인의 차 달이는 솜씨가 특출하시네요.”

“소저도 다도를 아는군요. 젊은 아가씨가 좋은 차를 한눈에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던데.”

진약추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선이 논다는 봉래산은 어디에 있는가? 이 시처럼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도는 익혀두면 정말 큰 기쁨이 되지요. 그러나 부인께서는 절 놀리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스물여섯인데 어떻게 젊은 아가씨입니까?”

“스물여섯? 아가씨의 모습에 계례나 넘은 줄 알았답니다. 괜찮아요. 그렇게 젊은 용모에 이렇게 평탄하고 침착한 모습은 정말 보기 어려워요.”

진약추 맞은편에 있는 여자는 어제 ‘갈취하려’ 심부로 찾아온 상재청이었다. 그녀의 부친인 상호는 심 노장군의 부하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노장군을 대신해 칼을 맞아 다친 후 전장에 다시는 나가지 못했다. 상씨 일가는 상호 한 사람에게 기대 살았기에 이에 가책을 느낀 노장군은 줄곧 사적으로 은자를 보내 그들 일가를 도와주었다. 당시 상재청은 나이가 어렸다. 노장군은 종종 상재청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농담하기도 했으나 심신의 혼인 전 노장군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심가는 그가 상호 일가를 도와온 사실을 몰랐기에 이후 상가와 왕래는 끊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 상가가 찾아온 것이었다.

상재청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이번에 주제넘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심가에 말썽을 끼치는 게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저도 갑작스러운 방문임을 알기에, 부인께서 불편하시면 바로 떠나겠습니다. 절대 심부에 폐를 끼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은 심부를 위한 듯했다. 그러나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진약추가 친절하게 상재청의 손을 끌었다.

“무슨 말이에요. 소저의 아버지가 저희 아버님의 목숨을 구했으니 상가는 우리 심부의 은인입니다. 아버님께서 상가와 우정을 맺으셨으니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소저가 곤란에 처했다면 우리가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지요. 얼마든지 우리 심부에 머물러요. 내일 내가 노부인을 뵙게 데려갈게요. 어머니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그다지 환대하지 않으셔도 양해 바랄게요.”

진약추는 상재청의 손을 토닥였다. 상재청이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그녀의 태도는 예의 바르면서도 시원시원하니 사람의 호감을 사기 좋았다. 진약추처럼 까다롭고 조심스러운 사람도 진심으로 그녀를 평온하게 대할 정도였다.

상재청은 유주에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심부에 찾아온 이유는 집안에 말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호는 몇 년 전 죽어 상가에는 상재청과 그녀의 모친만 남았다. 상 부인은 평소 중병을 앓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며칠 전 끝내 눈을 감았다. 상 부인이 죽자 유주의 관리 집안 공자가 상재청을 첩으로 맞으려 했다. 그의 핍박에 앞길이 막막해진 상재청은 들보에 목을 매 죽으려고 했지만, 그런 그녀를 유모가 구해내었다. 유모는 울면서 상재청에게 심 노장군이 그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상재청도 아주 어릴 때 노장군을 본 적 있었다. 시일이 지나 기억은 흐려졌지만, 그는 분명 매우 호탕하고 솔직하며 너그러운 장군이었다. 심가 외에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자 상재청은 돈을 모아 정경성으로 향했다. 막 심부에 도착해서 진약추를 처음 만난 사람이 진약추였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진약추는 웃으며 상재청을 보았다.

“소저는 유주 수향 마을에서 살았지요? 유주와 달라서 음식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서원에서 지내는 건 익숙해졌나요?”

“부인께서 매우 세심히 보살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원은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뜰이 평소 비어 있는 건……. 아, 이렇게 질문하면 조금 실례지요. 부인, 탓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의아해하던 상재청이 스스로 조금 당돌하다고 느꼈는지 웃음으로 무마했다.

“난 소저를 우리 사람으로 여기는데, 탓하고 말고가 있겠어요? 소저를 속이지 않을게요. 우리 부에는 사실 세 식구가 있었어요. 위무대장군은 들어보셨지요? 바로 우리 심가 대방입니다. 2년 전 조금 오해가 생겨서 나가 살고 있답니다. 해명하고 싶지만, 오해가 너무 깊네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군요.”

진약추의 얼굴에 깊은 유감이 떠올랐다. 상재청이 멍해졌다.

“부인의 말씀에 따르면 서원은…….”

“서원은 본래 대방 식구가 머물던 곳이에요.”

“부인,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 추후 오해를 풀 수 있을 겁니다. 더구나 한 가족인걸요. 시일이 지나면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위무대장군께서도 이전에 괜한 일로 갈등했다며 웃게 되실 겁니다.”

상재청이 상심한 듯한 진약추를 위로했다.

“그렇겠지요. 나도 알지만 걱정스러웠답니다. 소저의 말을 들으니 많은 위로가 됩니다. 심부 모두가 소저처럼 너그러이 이해해주면 좋을 텐데요. 장래 일이 없다면 심모를 가르쳐도 좋을 것 같아요. 심모가 평소 애지중지 자라 나쁜 버릇이 들어 걱정입니다. 소저처럼 똑똑한 사람이 가르쳐주면 좋을 거예요.”

“부인의 말씀은 과분해요. 심모 소저는 교양 있고 사리에 밝으며 똑똑한 아가씨입니다. 제가 유주에 있을 때 심모 소저처럼 총명하고 슬기로운 아가씨는 보지 못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풍채는 분명 박식함에서 나올 테지요. 재녀가 많은 정경성에서도 1등을 다투는 특출난 사람일 거 같아요.”

악의 없는 아첨에 진약추는 아주 흡족했다. 상재청과 얘기할수록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는 정오가 될 때까지 상재청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상재청이 떠난 후 시정이 탁자를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님, 무엇 때문에 재청 소저를 여기서 지내게 하시는지요? 지금 부 안의 지출이 갈수록 커져서 노부인 마님께서 아시면 노하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요즘 들어 노부인은 더욱 인색해졌다. 상재청이 심부에서 지내며 심부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은자를 쓰는 것을 알면 불만을 나타낼 것이다. 그래서 진약추는 상재청에게 노부인의 성격이 최근 좋지 않으니 양해 바란다고 말한 것이었다.

“어머님이 알면 뭐? 오히려 일을 망치는 꼴이지. 그렇게나 식견이 좁으니 어디 이후의 일이 보이겠어?”

진약추는 차갑게 비웃었다.

“마님, 혹시 재청 소저가 어떤 쓸모가 있나요?”

화의는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진약추의 성격을 잘 알았다. 2년 전이라면 진약추는 선행과 기부를 좋아하는 호인이라고 불리길 바랐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자가 부족하여 부도 돌볼 겨를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니 의아한 일이었다.

“말과 행동이 그윽하니 보통 여인처럼 가볍지 않으며 자색도 고와. 성격도 우아하고 머리도 똑똑하니 집안에 두면 첫째를 다투는 인물이 될 거야. 야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어. 야심이 있다면 5년 안에 반드시 성과를 보이겠지.”

진약추는 웃었다. 자기 집안의 후원은 서책 냄새나 고아하게 풍기는 곳이 아니었다. 여인들 사이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략과 술수가 난무했다. 그러나 자신의 모친은 개중에서도 특출났다. 그런데 지금 상재청에게서 자기 모친의 그림자를 보았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젊으니 이후 더 출중해질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설마 마님, 좋은 인연을 맺어주시려고요? 소저가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올라 마님께 보답해줄 수도 있으니까요?”

화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야기해보니 표면은 온순하지만 실은 자기가 한 수 위라고 자만이 넘치더구나. 분명히 다른 사람을 깔보고 있어. 그래서야 어떻게 남 아래에서 달가워하겠느냐. 돌아와 보답하기는 기대하지 않아.”

“그럼 마님…….”

“저런 출중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 아쉽구나. 좋은 일은 남에게 줄 수 없고, 좋은 칼은 좋은 데 써야지. 한데…… 이런 무서운 여인을 당해낼 수 없을 텐데. 누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진약추는 창밖을 내다보며 미소 지었다.

* * *

심신 일가가 살던 서원은 황량했다. 이전 서원은 하인도 많았고 심신이 호위들도 불러 병사들과 함께 훈련하기도 했기 때문에 매일 떠들썩했다. 심신이 떠나자 진약추는 지출을 줄이겠다며 서원의 하인들을 모두 관두게 했다. 하인도 병사도 없으니 텅 빈 서원은 쓸쓸했다.

상채정의 유모, 조 유모는 상재청이 돌아온 것을 보고 서둘러 맞이했다. 상재청의 피풍의를 받아들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 셋째 마님과 어떤 대화를 하셨나요?”

심가를 찾아 도움을 청하라는 건 조 유모의 생각이었다. 만일 심가에서도 도움받지 못하면 상재청은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심가와 상가는 이미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쉬웠다. 심 노장군이 상가를 돌봐줬다고는 하나 그가 없는 지금 심가에서 상재청을 어떻게 대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상재청이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침상에 앉았다.

“셋째 부인은 아주 관대하게 행동하네. 우리가 한동안 머무는 것에 동의했으니 유주에서 사람들이 와도 감히 심부에 있는 날 건드릴 수는 없을 거야.”

“나무아미타불. 주인어른께서 심가 사람은 모두 자비롭다고 말씀하셨지요. 심가가 아가씨를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안심해도 될 듯합니다.”

“유모, 공연한 생각은 할 필요 없어. 천하에 그냥 주는 건 없어. 노장군이 상가를 돌봐준 건 아버지께서 그를 대신해 칼을 맞았기 때문이야. 또한, 세상에 이유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없지. 셋째 부인도 내게 잘해주는 건 내게서 이용 가치를 보았기 때문일 테다.”

상재청의 냉소를 띤 얼굴에 경시의 기색이 어렸다.

“아가씨 말씀은 셋째 마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요?”

놀란 조 유모가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셋째 부인이 내게 요구할 게 있다면 내가 필요하지 않겠어?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상재청이 조 유모를 위로했다. 그러나 상재청의 시선에 얼핏 살기가 스쳤다.

“하지만…….”

조 유모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유모, 안심해. 우리도 산전수전 다 겪었잖아. 살길을 찾았는데 뭐가 두려워? 심가를 발판으로 잘 이용해야지. 셋째 부인이 날 이용한다면 나도 이용하면 돼.”

조 유모는 상재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가씨가 잘되면 그만입니다. 아가씨가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 * *

정경성은 명제의 수도라서 작은 땅도 천금이었다. 개중에서도 연경 골목은 만금을 불렀는데, 황궁을 제외하면 정경성에서 가장 부귀한 지역이었다. 연경 골목은 남쪽에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번화한 식당가와 상점가가 자리했다. 게다가 강물이 앞에 흘러 풍경도 좋았다. 그래서 전조의 귀인들이 머무른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땅값이 만금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유명한 선인들과 도사들이 그 땅에 용의 기운이 깃들었다고 입을 모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명제 황실은 남쪽에 자리하지 않았다. 용의 기운이 깃든 곳이니 마땅히 황실이 있어야겠으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궁을 새로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쏟아질 테고, 국고에서 많은 은자를 꺼내기도 어려웠다.

살기 좋은 지역이지만, 평범한 백성들 역시 감히 그곳에서 지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은자가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황실의 후손 말고는 용의 기운을 억누를 수 없는 법인데, 감히 그곳에 거주했다가는 황제에게 불경하다고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담력이 크며 많은 은자를 가진 사람은 소수라 지금도 황실의 친인척 중 몇몇이 거주할 뿐이었다. 연경 골목은 항상 텅 비어 고귀한 장식품 같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진국과 대량에서 온 손님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진국에서 온 태자와 공주, 대량에서 온 예왕은 정당한 손님인 데다 황실의 핏줄이니 연경 골목에서 머무를 자격이 충분했다. 은자 문제야 당연히 없었을뿐더러 궁중에 타국 사람이 머문다면 문혜제가 안심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가장 적절한 입지였다.

연경 골목 가장 안쪽에 있는 관저는 주택이지만 작은 궁처럼 화려했다. 장식이 사치스러웠고, 면적도 컸다. 고위 관리의 관저를 몇 개나 합쳐야 나올 크기였다. 바로 예왕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연경 골목에는 몇 채의 관저가 있는데, 진국 태자는 바깥과 가장 가까운 관저를 선택했다. 예왕부의 위치는 약간 떨어져 있어 진국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예왕의 관저는 연경 골목 안에서 가장 부귀했다. 진국 태자의 관저보다 배는 컸으나 예왕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정했다. 대량의 국고에 은자가 가득하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했다. 또한 대량의 예왕은 아주 거만했다. 처음 이곳에 머무르는 날 그는 입구의 편액을 뽑았다. 그리곤 예왕부, 세 글자가 쓰인 금빛 찬란한 편액으로 바꾸었다. 명제 황실 입장에서는 분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대량의 예왕이 명제에서 관저를 산 후 편액까지 걸었다는 건 이곳에 계속 머무르겠다는 건지 의문을 낳았다.

예왕부. 뜰에 눈처럼 하얀 물체가 바닥에서 팔딱거렸다.

“오밀조밀하게 생겨서는 너무 흉악하구나. 아직 새끼인데도 이렇게 사납고 흉악한데 주인님은 어떻게 키우시려는 거지?”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나무 몽둥이로 눈처럼 하얀 공과 놀아주고 있었다. 전신이 털로 뒤덮인 공이었다. 눈은 맑고 투명하며 새까매 매우 영리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 공은 어린 호랑이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주 작았다. 호랑이의 털은 보기 드문 연한 색으로 무늬도 그다지 분명하지 않아서 멀리서 보면 눈처럼 하얬다. 백호였다. 백호는 앞발로 여인의 손을 긁더니 곧 이로도 깨물려고 했다. 같이 놀아주던 여인이 나무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 녀석! 보기에는 온순하면서 사람을 공격하다니. 날 물면 혼내줄 거야!”

그때, 사랑스러운 담홍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둬. 주인님이 직접 데려와 키우는 애야. 야앵, 네가 그 녀석을 혼내기 전에 네가 먼저 주인님에게 혼날 거야.”

야앵이라고 불린 여인이 일어나자 어린 백호는 명랑하게 달려들어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치맛자락을 앙, 깨물고는 뒤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백호를 살짝 걷어찼다.

“화롱, 주인님이 미치신 걸까? 어떻게 호랑이를 키우신다는 거야? 호랑이는 보기에 귀여워도 성질이 흉악한데, 사람을 다치게 하면 어쩌려고?”

화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게, 갑자기 성질을 부리네. 백호는 눈 뜬 이후로 줄곧 먹고 잤어. 사람을 깨물기 시작한 건 며칠 안 됐는걸.”

“주인님이 다 큰 백호를 데리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폐하께서 아시면 또 머리 아프실 거야.”

야앵은 쓴 표정을 지었다.

“너희 둘, 왜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남자가 매섭게 소리쳤다. 두 사람이 소리 난 쪽을 바라보니 중년 남자가 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구니에 담긴 그릇을 들여다본 후 야앵과 화롱을 혼냈다.

“백호 밥을 먹이라고 시켰을 때, 농땡이 부릴 줄 알았다!”

야앵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철의! 우리는 탑뢰를 나와 주인님 곁에서 제대로 된 임무를 맡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백호에게 먹이를 먹이는 일이라니요! 우리 묵우군이 젖 먹이는 유모도 아닌데, 온종일 일도 못 하고 백호와 놀아주어야 하나요?”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이니 잘하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철의는 쪼그리고 앉아 백호에게 먹이를 주었다. 잘 삶은 고기를 잘게 썬 것으로 달걀도 섞여 있었다. 냄새를 맡은 백호는 잘 먹었다. 그는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호는 그를 잘 따라서 분위기가 무척 화기애애했다. 크고 건장한 대한이 귀여운 백호와 함께 놀아주는 온화한 장면은 보기 드문 기이한 장면이었다. 백호가 먹는 데 더 관심을 보이지 않자 철의가 그릇을 치웠다. 그때 화롱과 야앵이 갑자기 예를 차려 인사했다.

“주인님.”

사경행이 손을 가볍게 휘둘러 인사를 받았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계우서와 고양이었다. 백호를 본 계우서의 눈이 커졌다.

“저게 뭐야? 개야?”

철의는 웃음을 참느라 몸을 떨었다. 고양이 말했다.

“자네 바본가? 홀씨구먼.”

“계 공자님, 고 공자. 이것은 백호입니다.”

철의는 백호를 위해 무지한 그들에게 정답을 알려줬다. 애석하게도 어린 호랑이는 사람의 말을 몰라 철의가 자신을 위해 애써주는 것도 모르고 자기 꼬리를 잡으며 놀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백호는 태양 아래에서 장난을 치는 큰 새끼 고양이 같았다.

“호랑이? 3형 괜찮아? 지금 호랑이를 키워도 돼?”

계우서는 놀라 사경행을 보았다. 야앵이 낭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계 공자님, 이전 정경성 저잣거리에서 사냥꾼이 거금에 이 호랑이의 가죽을 벗겨 팔려는 걸 주인님께서 보고 구해내신 겁니다.”

고양은 사경행을 곁눈질했다.

“언제 이렇게 착해졌는가? 자네답지 않은데.”

사경행은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자줏빛 장포에 대단히 화려한 차림새였다. 그러나 어떤 찬란한 장식도 그의 용모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그가 느리게 백호 곁으로 걸어갔다. 시야에 사람이 보이자 두말하지 않고 달려온 호랑이는 그를 깨물었다. 그러나 깨물기 무섭게 백호는 목덜미가 잡혔다.

사경행은 백호를 들어 올렸다. 백호는 자세가 불편한 듯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사경행은 그 모습을 오래 관찰했다.

“차리리 지금 저 백호를…….”

야앵이 화롱에게 목을 긋는 자세를 취했다. 화롱은 몸을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 호랑이를 바라보던 사경행이 백호의 양다리 사이를 보며 웃었다.

“암컷이네.”

사경행의 말에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암컷이면 어떻고, 수컷이면 어떤가. 설마 백호를 데려가 예왕비로 삼으려고 하는 걸까?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며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옹.”

백호가 울음소리를 냈다. 너무 어려서 울부짖는 소리도 부드러웠다. 사경행은 백호를 품에 안았다. 백호는 그의 가슴에 엎드려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울었다. 애교를 부리는 듯 아주 귀여웠다. 사경행이 손가락을 내밀어 백호의 수염을 가지고 놀자 야앵이 놀라 외쳤다.

“주인님, 안 됩니다! 백호는 사람이 수염을 만지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깨물 겁니다!”

야앵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백호가 사경행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화롱과 철의도 놀랐다. 계우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들과 달리 고양은 사경행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평온하게 백호와 마주 보았다. 백호는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켕긴 듯 슬쩍 깨문 손가락을 놓았다. 백호는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사경행의 손가락 위 얕은 잇자국이 또렷했다.

“눈도 닮았고, 성격도 닮았어. 사람 깨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같네.”

사경행이 품 안 백호를 가만히 바라볼 뿐,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내밀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백호는 조금 피곤해진 듯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사경행이 머리를 만져주는 게 좋은지 발버둥 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백호는 손길을 느끼며 그의 가슴에 엎드렸다.

태양이 금빛 광채를 뿌렸다. 용모가 화려하고 출중한 사경행이 백호를 바라볼 때 긴 속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매우 총애하는 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백호의 털은 윤기가 돌았다. 사경행의 품에 엎드린 백호는 귀여웠고, 둘의 모습은 그린 듯 아름다웠다. 방금 철의가 백호에게 먹이를 먹일 때의 기이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곧 잠들 듯한 백호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없으니 앞을 널 교교라 부르겠다.”

백호의 이름을 들은 계우서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이름이 그래? 호랑이에게 그렇게 여린 이름이라니? 너무 이상해! 이름 바꿔! 호패, 망치, 표가, 아무튼 많잖아!”

더는 참고 지켜볼 수 없다는 듯 고양이 부채로 눈을 가렸다. 사경행은 계우서에게 눈을 흘겼다. 그는 백호의 턱을 계속 긁어주며 담담히 말했다.

“입 다물어. 백호는 나의 ‘교교’야.”

* * *

다음 날, 심묘는 초대장 한 통을 받았다. 진국 명안 공주가 보낸 것으로 연경 골목의 자신의 부로 심묘를 초대한 것이었다. 문지기가 초대장을 받아 곡우에게 건넸고, 그녀는 즉시 심묘에게 전달했다. 초대장을 받은 심묘는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보낸 이가 풍안녕이 아니라 명안 공주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경칩이 걱정스러운 낯빛을 띠었다.

“아가씨, 이 초대장은 가짜가 아닐까요? 명안 공주마마가 아가씨께 초대장을 보낼 리 없잖아요. 사칭 아닐까요?”

곡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경칩의 말을 부인했다.

“공주의 인감이 있으니 가짜는 아니야.”

곡우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명안 공주마마는 조공연회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기회를 잡아 보복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 거절하시지요. 명안 공주마마가 나쁜 생각을 품었다면 큰일 납니다.”

경칩도 곡우의 말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일은 주인어른과 마님께 알리시지요.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결정하시도록요.”

심묘는 초대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곧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부모님은 강경한 수완을 쓰실 거야. 지금 진국과 명제의 관계는 민감해. 이 일에 부모님이 연루되면 조정 일도 같이 연루되니 국가 간의 문제로 번질 수 있어.”

“주인어른과 마님께 말씀드리지 않는다구요? 아가씨, 이 초대에 응하시게요?”

심묘가 정말 가겠다면 경칩은 어떻게든 말릴 생각이었다. 나쁜 마음을 품은 공주를, 그것도 그녀의 구역에서 만난다니 심묘가 불리할 게 확실했다.

“괜찮아. 명안 공주마마가 초대장을 보냈잖아. 날 초대했는데 내게 사고가 생기면 명안 공주마마가 의심을 받게 돼. 그렇게 되기 전 진국 태자 전하가 알아서 막을 거야.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주라 해도 감히 내게 손을 못 써. 작은 잔꾀라면 겁나지 않아.”

“하지만…….”

경칩은 여전히 몹시 걱정스러웠다.

“괜찮아. 초대한 날은 이틀 후야. 내가 이곳에 가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 모경이 따르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초대장은 부에 두마. 만일, 정말 만일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이 초대장을 오라버니에게 전달하라고 백로와 상강에게 전해둬.”

곡우와 경칩은 이 상황이 못마땅했으나 심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들은 그저 심묘의 말에 따르겠노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면 초대를 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연경 골목 가장 밖에 있는 관저 안, 명안 공주가 남종이 건넨 심묘의 답장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을 세심히 살펴본 명안 공주가 노기를 띠었다. 그녀는 심묘의 답장을 탁자에 던졌다.

“과연 대담하네!”

“넌 또 왜 화를 내느냐?”

황보호가 방에 들어와 명안 공주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명안 공주는 그에게 심묘의 답변을 건네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태자 오라버니, 심묘를 좀 봐봐. 내가 초대장을 보냈는데, 겁먹기는커녕 날 만나겠다고 답장을 했어. 정말 죽음이 무섭지 않나 봐요!”

“네가 초대장을 보냈는데 받지 않으면 그것 역시 대담한 거지. 받았다고 화를 내다니, 사리 분별 없이 굴지 말거라.”

명안 공주의 성격을 아는 황보호는 그녀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찬물을 끼얹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내 편이야, 심묘 편이야? 조공연회에서 심묘가 날 망신시켰다고! 감히 이 나에게 사과를 물도록 했어. 일부러 날 난감하게 해서 진국의 체면을 떨어뜨린 거라고. 지금 진국의 체면을 세우려고 하는 날 도와주지 않을망정 탓하다니. 무슨 이치야? 진국에 돌아가면 부황께 다 말씀드릴 거야!”

명안 공주가 분해 발을 굴렀다. 황보호는 냉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공연회의 일이 떠오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 중 사실은 별로 없었다. 심묘와 활쏘기 시합은 애초에 그녀가 제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심묘가 명안 공주에게 사과를 물라고 한 것은 공격적이긴 했다. 심지어 그녀가 한 몇 마디는 비꼬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일이 진국에 전해지면 진국 황제는 반드시 그녀를 나무랄 것이었다.

그러나 황보호는 심묘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그녀가 매우 특별한 것 같았다. 명안 공주의 활은 무예를 익힌 남자도 며칠을 익혀야 쓸 수 있는데, 처음 만진 게 분명한 심묘는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백번 천번 쏘아본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명안 공주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희미한 적의가 있는 것 같았다.

명제와 진국은 적대적이지 않은데 심묘가 왜 자신과 명안 공주에게 적의를 갖는 건지 의아했다. 단지 명안 공주가 그녀를 난처하게 했기 때문이라면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이었다.

황보호가 말없이 생각에 골몰하자 명안 공주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오라버니! 심묘에게 현혹당한 거 아니지? 그 천한 것이 뭐가 좋다고. 잊지 마.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한 일은 모두가 알아. 실체는 얼빠진 머저리라고. 연회에서 그렇게 평탄하고 침착한 모습을 보일 수 있던 건 다 뒤에서 누군가 지시해줬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빼앗기면 안 돼!”

황보호는 어이없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무슨 소리야. 너나 부황께서 시키신 일을 잊지 마. 네가 심묘를 어찌하든 상관없지만, 이 관저에서 손을 쓰면 안 돼. 다른 곳에서 하든지. 약점은 잡히지 마. 심묘 하나는 관계없지만, 지금 명제 황제는 심신에게 의지하고 있다. 심묘를 건드린 것을 들키면 심신은 우리에게 적의를 품을 거야. 그렇다면 명제와의 맹약도 파괴되겠지. 대국이 가장 중요해.”

황보호의 사나운 경고를 받은 명안 공주는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눈 속 불길은 더욱 크게 일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에게 말썽이 생기지 않게 잘할 거야. 이번 초대에서는 심묘가 어떤 사람인지 보기만 할 거야. 손을 쓰려면 우리 진국의 명의로 하지 않지. 어릴 때 우리가 어떤 일을 가장 좋아했는지 잊었어? 개가 개를 무는 것을 보는 거였잖아. 명제에 개가 이렇게 많은데 하나 골라 일을 처리하도록 하는 건 어렵지 않아.”

“네게 그 정도로 분별이 있다면 좋을 대로 해.”

황보호도 명안 공주를 마주 보며 드디어 웃었다.

* * *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심부 서원에서 진약추와 상재청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시문이 수놓인 손수건은 정말 예쁘네요. 청 동생의 시는 학자 가문 아가씨들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답군요. 영리한 데다 손재주도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청 동생을 보니 내가 틀렸음을 깨닫게 되네요.”

작은 등불 아래 상재청이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부인, 과찬이십니다. 이곳에서 무엇도 돕지 못하고 온종일 무상으로 먹고 지내니 죄송스러운 마음에 수라도 놓는 것입니다. 어떤 가치도 없어요. 부인께서 싫어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싫기는요. 이런 좋은 물건은 숨겨놔야지요. 심모가 본다면 바로 가져가려 할 거예요. 심모는 내 물건 중 무언가 마음에 들면 무조건 달라고 귀찮게 군답니다. 이 손수건은 너무 정교해서 심모에게도 주기 아까울 정도예요.”

진약추는 손수건을 소매 깊숙이 넣었다.

“심모 소저가 좋아한다면 제가 수를 하나 더 놓으면 될 일이지요.”

“그럼 좋지요. 심모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아, 이전 권했던 것은 고려해 보았나요?”

웃으며 말하던 진약추가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이전 진약추는 상재청과 담소를 나눌 때 심신의 일을 꺼냈다. 진약추는 상호는 심 노장군의 생명의 은인이니 심신이 은인의 딸인 상재청을 배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심신은 심 노장군의 장자니 상재청이 한 번쯤 방문할 만하다고도 덧붙였다.

상재청은 잠시 망설이다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지금 부인께 폐를 끼치는 것만으로도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심 장군님께도 그럴 수는 없지요. 제가 정경성에 온 이유는 관가 공자를 피하려는 겁니다. 시일이 지나 제 신변에 위험이 없어지면 떠날 몸이니 굳이 이곳에 왔다고 알릴 필요도 없을 듯하고요.”

“저번에도 말했지요. 청 동생은 다 좋은데 너무 예의가 발라요. 동생과 우리는 가족이에요. 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듣자니 큰아주버니도 예전에 청 동생을 보신 적 있다던데, 가족인 청 동생을 아주버니가 난처해하시겠어요? 오히려 청 동생이 정경성에 왔는데도 아주버니를 보지 않고 떠난 것을 나중에 알면 분명 화내실 거예요.”

상재청이 여전히 난처해하자 진약추가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유주 사람을 피하려면 큰아주버니가 있는 곳이 더욱 좋아요. 장군부이니 많은 병사들과 호위들이 곳곳을 빈틈없이 지키고 있거든요. 그리고 유주 사람도 아주버니의 명성에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할 거예요. 안전을 따진다면 여기보다 훨씬 낫지요. 난 청 동생을 식구로 여겨요. 아주버니도 반드시 그러실 거라고 장담해요.”

유주 사람을 언급하자 상재청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얼굴에 결정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청 동생, 큰아주버니의 손님으로 지내면 걱정 없어요.”

“부인은 모르세요. 시일이 너무 오래 지났기에 심 장군님께서도 저를 기억하실까 싶어요. 게다가 제가 부에서 머물면 심구 공자나 심묘 소저에게도 많은 폐를 끼칠까 걱정이에요.”

상재청이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약추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요. 큰형님은 성격이 좋아요. 장군가 출신 여장부라 됨됨이가 솔직하고 선량하니 청 동생의 사정을 알면 안쓰러워하실 거예요. 게다가 아주버니 집안에는 여인이 별로 없어 큰형님이 평소 말을 나눌 사람도 적은데, 청 동생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이들도 철이 들었으니 이유 없이 청 동생과 싸우지 않을 겁니다.”

상재청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진약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좀 더 꾀기로 했다.

“이렇게 해요. 내가 청 동생의 이름을 적은 서신을 보낼게요. 우리 심부를 언급하지 않고 청 동생의 명의만이라면 오해를 불러오지 않을 거예요. 청 동생이 먼저 큰아주버니 부를 방문해서 가족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봐요. 좋지 않다고 느껴지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될 일이랍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상재청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약추에게 감격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저를 위해 세심히 신경 써주시니 정말 감사를 다 표할 방법이 없네요.”

“청 동생은 갈수록 예의가 더 발라지네요. 벌써 날이 어두워졌으니 이제 쉬도록 해요. 내일 서신을 잘 보낼 테니 청 동생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청 동생은 똑똑하니 다들 좋아할 거예요. 큰아주버니와 큰형님도요.”

상재청이 웃으며 겸손하게 진약추를 배웅했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오자 조 유모가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진약추와 상재청의 이야기를 들은 조 유모가 진약추를 배웅하고 들어온 상재청에게 물었다.

“셋째 마님은 왜 아가씨께 심 장군님께 가라 했을까요? 혹시 아가씨를 부에서 쫓아내려는 건가요?”

상재청은 진약추를 비웃으며 말했다.

“이전에는 셋째 부인이 뭘 원하는지 몰랐는데 이젠 알겠구나. 계산을 아주 잘하네. 날 이용해서 대방을 대처하려는 거야.”

“아가씨, 셋째 마님은 아가씨가 뭘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놀란 조 유모가 물었다. 상재청의 표정이 변화무쌍했다. 그녀는 진약추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심신만 그녀 자신의 안위를 보호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즉 장군부에서 평생 지낼 수만 있다면 유주 사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나설안을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결국 그녀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심신의 집안에 여인이 부족하다는 말은 그 의도를 더욱 뚜렷이 드러냈다. 심신의 부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설안 하나만 상대하면 되고, 그 외에는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이 확실했다.

“일단은 가서 어찌 된 일인지 확인해 봐야겠지.”

“장군부로 가시려구요? 셋째 마님의 나쁜 심보를 아는데도요?”

“뭐든 잘 이용하면 되는 거지. 심부에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 없으니 내 미래를 위해 계산할 필요도 있고. 아무튼 한번 가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상한 점이 있다면 셋째 부인 말대로 바로 돌아오면 될 일이야.”

조 유모는 손을 휘두르는 상재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상재청은 낮게 중얼거렸다.

“셋째 부인의 제안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구나.”

* * *

집마다 등불이 환해 정경성의 밤 경치를 아름답게 만들었다. 황궁을 제외하고 가장 번화한 곳인 남쪽. 곳곳에서 공후(箜篌,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와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가희(歌姬)들은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남녀가 장난치며 웃는 소리, 술 마시는 흥겨운 소리 등이 한데 섞여 울려 퍼지니 매우 즐거운 분위기였다.

예왕부에는 등롱 가장자리를 금실로 수놓은 귀한 등불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곳이 예왕의 관저인지 모르고 그저 금실이 탐이 나 몰래 훔치려고 힐긋힐긋 쳐다봤으나, 곧 사납고 강인해 보이는 문지기를 발견하고 말없이 웃었다. 그들은 도둑질하려던 심보를 누른 채 의기소침하게 떠나곤 했다. 알고서도 감히 훔칠 만한 담력을 가진 이는 없기 때문이었다.

부는 아주 고요해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넓은 뜰 안에는 정교한 정자가 있고 그 주위에 맑고 투명한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물이 비취색으로 빛나며 달빛을 유혹했다. 여름이 되면 술의 향내처럼 색다른 풍취가 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초겨울이었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한기에 몸을 떨 정도였다.

그 정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금빛 강물이 흐르는 자줏빛 옷이 긴 의자를 덮었다. 온화한 달빛 아래 출중한 청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영민하고 용맹한 모습의 그는 품 안 백호와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눌린 백호는 불편한지 고개를 비틀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깨물려고 시도했다. 애석하게도 짧은 목 때문인지, 백호를 누르고 있는 매서운 힘 때문인지 아무 보람 없이 입만 뻥긋거리는 모양새이긴 했다. 하지만 백호는 낙심하지 않고 사경행의 소매를 물었다.

사경행은 백호의 입에서 소매를 꺼내며 침에 젖은 소매를 보고는 백호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백호가 ‘아오’ 하고 가늘게 울었다. 몸을 비트는 것에 성공한 백호는 이번에는 사경행의 손가락을 발로 붙잡으며 놀았다.

멀리 있는 덤불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야앵이 멍하니 사경행과 백호를 바라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시선이었다. 사경행은 심한 결벽증이 있어서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친한 사람조차 그의 물건을 건드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백호의 침이 범벅인 옷을 입고도 평온하다고?

“주인님, 혹시 미치신 거 아니야? 온종일 백호를 껴안고 계시잖아! 식사하실 때도, 주무실 때도! 심지어 오늘 목욕하실 때도 껴안고 계셨대. 진짜 백호를 데려가 예왕비마마로 삼으시려는 건 아니겠지? 화롱, 너도 말 좀 해봐.”

야앵은 아무 말이 없는 화롱을 바라보았다. 화롱은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사경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야앵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주인님이 저 백호를 정말 귀여워하시는구나. 봐봐. 백호를 보는 시선이 너무 부드러워. 나도 호랑이가 돼서 주인님이랑 함께 자고 목욕하고 싶다. 아이고, 사람이 호랑이만 못하네.”

화롱은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제 바람을 드러냈다.

“내가 보니 너도 비정상이다.”

야앵은 화롱을 흘겨보며 질색했다. 그때 사경행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끌어안자 백호가 기를 쓰며 발버둥을 쳤다. 발버둥 치던 백호가 얼떨결에 사경행의 목을 치고 사경행의 얼굴을 핥았다.

“너 또 내게 입 맞췄구나.”

사경행이 낮게 웃었다. 백호의 목덜미를 잡아 들어 올린 사경행은 백호가 허공에서 발버둥 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악취미였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람과 호랑이가 닮았어.”

백호가 어금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백호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착하지.”

야앵은 황급히 덤불 아래로 엎드렸다.

“주인님이 미치셨어.”

“나, 저 호랑이를 죽여야겠어.”

노기등등한 화롱이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 정자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경행은 백호를 다시 품에 안았다.

“무슨 일이냐?”

“주인님, 오늘 명안 공주가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현재 머물고 있는 부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답니다. 심묘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틀 후입니다.”

백호의 머리를 긁어주던 사경행의 손가락이 조금 멈칫했다.

“알겠다.”

사경행이 손을 휘둘렀다. 철의는 사경행의 품속 백호를 보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곧 어두운 밤으로 사라졌다.

“담력이 정말 크군.”

사경행이 손가락을 백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줄곧 사경행과 함께 밥 먹고 목욕하고 자던 백호는 익숙해진 듯 그의 손가락을 살짝 물기만 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깨물며 놀 줄 알게 된 것이었다.

“갈까 말까?”

백호가 ‘아웅’ 울며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가고 싶다고? 어쩔 수 없네. 그럼 네 말을 들을게.”

* * *

눈 깜작할 사이 이틀이 흘렀다. 심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명제의 겨울은 늘 일찍 왔다. 게다가 추웠다. 연거푸 비까지 내려 공기 중에 습기가 가득하니 심묘가 입은 두꺼운 옷도 덩달아 차가워졌다. 곡우가 피풍의를 꺼냈다.

“이건 잘 말랐네요. 조금 두껍지만, 오늘은 유난히 추우니 입으시기 적당할 거예요.”

심묘는 곡우가 들고 있는 피풍의를 보았다. 눈처럼 하얀 피풍의였다. 다른 털은 섞지 않고 흰여우 털로만 만든 것으로,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새것처럼 윤이 나고 깨끗했다. 품질이 대단히 좋은 게 분명했다.

이 피풍의는 2년 반쯤 전 소춘성으로 가던 심신 일행이 농가에 잠시 묵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것이었다. 농가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했으니, 아마 자신이 가져온 물건인 건 같았다. 그러나 자신도 어디서 난 물건인지 알 수 없어서 언젠가 은자로 바꿀 생각으로 챙겨두었던 피풍의였다. 그때 심구는 흰 여우 털은 천금으로도 구하지 못하니 팔지 않고 갖고 있는 게 좋다며 은자로 바꾸는 일을 반대했었다.

그래서 결국 팔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입기에도 너무 컸다. 그래서 줄곧 상자에 넣어두고 지금까지 꺼내 입지 않았다. 오늘 곡우가 상자를 뒤지지 않았다면 이 피풍의가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까먹을 뻔했다.

피풍의를 바라보던 심묘는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사경행이 심묘에게 그 농가에서 자신을 봤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날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금 보니 이 피풍의는 사경행이 남긴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경행의 허튼소리를 들은 후라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경칩과 곡우는 서로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묘가 왜인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가씨?”

경칩의 소리에 정신을 차린 심묘는 다시 피풍의를 바라보았다.

“그거, 기회 있을 때 전당포에 가져가 맡겨.”

“큰 공자님께서 좋은 가죽이라고,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곡우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아무리 좋은 가죽이라도 싫어. 언제 전당포로 보내버려. 계 주인이 반드시 아주 ‘좋아’할 거야.”

강경한 심묘의 모습에 곡우와 경칩은 감히 더 무슨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그들은 심묘에게 다른 피풍의를 가져다주었다. 주홍빛 토끼털 피풍의를 입고 머리를 다 빗은 심묘는 그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오늘은 명안 공주를 만나는 날이었다. 나담은 나돌아다니길 즐겼고, 심신은 평소 병부에서 공무를 보고 저녁에야 돌아오니 심묘는 이전처럼 남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자유롭게 외출했다.

모경은 마부 일도 겸했다. 그는 심구의 사람이지만 매번 심묘의 일을 맡아서 처리하곤 했다. 덕분에 그는 심구보다도 심묘의 심복처럼 보이니 조금은 이상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런 일에 익숙해진 듯 심묘가 외출할 때마다 알아서 먼저 준비를 하곤 했다.

그러나 모경도 진국 태자가 머무는 관저가 오늘 목적지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조공연회 때 심묘의 행동이 온 정경성에 퍼졌기에 그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명안 공주가 호의를 품고 초청했을 리가 없었다. 모경은 심묘가 걱정스러웠지만, 이미 그녀가 모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여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진국 사람들이 머무는 부에 도착하자 호위가 심묘를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들은 심묘를 잠시 기다리게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보고하러 간 호위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곧 반 시진인데, 아직도 보고하지 못한 걸까요? 분명 진국 공주마마가 일부러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시는 거예요. 마차에는 화로가 있지만, 바깥은 춥잖아요. 아가씨가 추위로 병을 얻길 바라시는 걸까요?”

경칩은 심묘를 걱정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곡우도 경칩의 말에 맞장구쳤다.

“정말 너무해요. 초대해놓고 계속 문밖에 세워두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지요?”

일반적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경우 상대가 도착하면 환영 인사를 하고 안에서 기다리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황실에는 특별한 규칙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시간은 좀 더 걸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반 시진이나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구나 그동안 안부 한 번 묻지 않는다니. 있을 수 없는 경우였다.

“아가씨, 차라리 돌아가시지요.”

참고 참던 모경이 한마디 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왕 왔으니 기다리자꾸나. 상대방의 무례를 널리 알릴 수 있으니 이 역시 나쁘지 않아.”

전생 심묘가 진국에 있을 때도 명안 공주는 자신을 이렇게 대접했다. 추운 섣달,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차가운 화원에서 기다리게 했다. 몇 시진, 어떤 때는 온종일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노라면 늘 일이 있으니 더 기다리라고 시녀를 보내 전하곤 했다. 명안 공주의 수완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전생에 하루도 참았는데 지금 고작해야 반 시진을 참지 못할 리 없었다.

명안 공주는 방에 있었다. 시녀가 화로에 석탄을 더해 방은 아주 따뜻했다. 명안 공주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후련해 보였다.

“그 천한 것은 갔느냐?”

“마마, 심 소저의 마차는 아직 부 입구에 있습니다.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인내심은 있네.”

명안 공주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이 심묘를 상대하지 않으면 자만심 넘치는 장군 집안 딸이 분노하며 부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심묘가 그렇게 돌아가면 자신은 그녀가 불경을 저질렀다는 구실을 들어 죄를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침착하게 나오니 준비한 패는 못 쓰게 된 셈이었다.

“이리 오래 기다렸으니 인내심도 거의 바닥났을 것이다. 방법을 바꾸는 것도 좋지. 여봐라, 심묘를 안으로 들여라.”

진국 사람이 머무는 관저는 새로이 보수한 듯 명제의 주택과 구조가 달랐다. 연경 골목의 주택을 궁전처럼 꾸며놓은 것이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진국 황실은 전생의 심묘 자신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금은이 진국의 부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듯, 벽돌 몇 개는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기까지 했다. 전생의 자신은 화려한 진국 궁전에 흠뻑 빠져서 흠모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면, 돈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속된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시녀가 심묘를 화원으로 데려갔다. 심묘는 마침내 명안 공주를 만날 수 있었다. 명안 공주는 작은 돌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돌 탁자에는 나비가 수놓인 손수건과 맛있어 보이는 간식, 정교한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곁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이 추운 날씨에도 얼지 않았다. 붉은색 잉어들은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떼를 지어 돌아다녔고 시녀 몇이 밥을 주고 있었다.

심묘는 명안 공주 앞에 똑바로 서서 인사했다. 명안 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명제, 대량, 진국 세 국가 중 대량의 국력이 가장 강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다. 진국과 명제는 그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그나마 진국이 명제보다 낫긴 했다. 더 강한 병력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명제 황실이 병권을 황실로 회수했으니 이대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명제에서 출중한 장군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었다. 당장만 해도 심신과 사정을 대신할 무장 세가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혜제가 심신을 이렇게 급히 소환하지 않았을 터였다. 대신할 무장 세가가 없기에 문혜제는 심신을 도로 불러들여 다른 나라 앞에서 명제가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진국은 대량보다 못하지만 명제보다는 낫다고 여기면서 늘 명제를 압박하려 했다. 진국 사람은 늘 명제 사람보다 한 수 위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전생 심묘가 진국으로 갔을 때 진국 황궁의 하찮은 궁녀도 그녀를 무시하는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진국 황실은 더욱 꼴사나웠다. 그들은 심묘의 존엄을 밟는 것이 명제의 위엄을 밟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명안 공주를 바라보고 있자니 심묘는 전생의 몇몇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 널 초대했지만 네가 감히 못 올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너 혼자 왔구나. 담력이 작지 않나 봐.”

심묘를 바라보는 명안 공주의 시선이 음산하게 변했다. 오늘 명안 공주는 금홍색 치마에 화려한 옥비녀를 꽂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의 주홍빛 피풍의와 연지를 바르지 않은 얼굴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명안 공주는 아름다운 편이었다. 명안 공주는 진국의 전형적인 황실 여자로서 모두 애지중지 돌봤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기질은 다 다른 법이었다. 심묘는 수려하며 온화했고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장중하고 위엄 있는 모습에서는 오랫동안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여인처럼 고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공주마마께서 재미난 말씀을 하시네요. 공주마마는 명제의 손님입니다. 운이 좋아 초대를 받았는데 어떻게 오지 않겠습니까?”

심묘는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경칩과 곡우는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모경은 입구 호위에게 막혀 들어올 수 없었다. 모경이 항의했지만,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명안 공주의 성격을 잘 알았다. 오늘 명안 공주가 자신에게 정말 위험한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 쓴맛을 보여주려고 부른 것일 터였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놔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든 일에 열 배로 보복해줄 요량이었다.

“말솜씨가 아주 좋구나. 나도 물론 네 담력이 큰 것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조공연회에서 감히 나를 망신시키지 않았을 테지.”

명안 공주의 눈에 노여움이 스쳤다. 자신은 진국에서 가장 총애받는 공주였다. 진국 황실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자신을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이 진국보다 못한 명제의 조공연회에서 그것도 신하의 딸 때문에 놀라 기절하다니. 체면을 지키지 못했으니 심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억울할 따름이었다. 지금 이 땅이 명제의 땅이 아니라면, 황보호의 경고가 없었다면, 지금 바로 심묘를 죽여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명안 공주는 심묘를 바라보며 웃었다.

“진국 궁에는 너처럼 활 솜씨가 출중한 자매가 거의 없지. 문혜제에게 청할 테니 나를 따라 진국에 한 번 가는 것은 어떠하냐?”

심묘는 자칫 실소할 뻔했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명안 공주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말만 듣고 있으니 지금이 전생 같기도 했다. 전생에 심묘가 진국의 인질로 자원했을 때 명안 공주가 부수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황제 폐하, 안심하십시오. 명제의 황후마마를 진국에서는 당연히 정중하게 대할 것입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저의 좋은 자매가 되어주실 테지요.”

부드럽게 대한다는 명안 공주의 말과 달리 심묘는 진국에서 명제 시절보다 적지 않은 치욕을 겪었다. 이후 심묘는 진국에서 5년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미 부인과 오랫동안 싸우며 버틸 수 있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린 심묘가 개의치 않다는 듯 웃었다.

“공주마마께서 원하시면 폐하께 말씀드려 보십시오. 폐하께서 동의하시면 소녀는 공주마마와 함께 진국으로 가겠습니다.”

명안 공주는 심묘를 조롱하고 싶었다. 그래서 진국에 가자는 말로 위협한 것이었다. 심묘는 심신의 보물이었다. 그러니 문혜제는 심신의 환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심묘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었다. 실제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벌벌 떠는 꼴을 보면 그나마 속이 좀 시원할 성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받아칠 줄은. 명안 공주가 심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심묘는 옅은 미소로 응수했다.

“안심하거라. 그렇게 진국으로 가면 네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 태자 오라버니의 시첩이 되는 건 어떠냐? 명제의 폐하께서도 이에는 동의하실 것이다.”

명안 공주가 냉랭히 웃었다. 눈빛은 악랄했다.

심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진국과 친교를 맺기 위해 인척 관계를 맺는 일은 명제에게 확실히 유리했다. 명안 공주의 말대로 황보호가 심묘를 비로 삼겠다고 제안을 하면 문혜제도 승낙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심신이 원하지 않아도 맞설 방법이 없을 터였다.

심묘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본 명안 공주의 입꼬리가 냉소로 한쪽만 올라갔다. 그녀는 심묘의 곁에 있는 자기 시녀에게 눈짓했다. 시녀는 사납게 손을 뻗어 심묘를 연못으로 밀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연못가에 서 있던 심묘는 그대로 물에 빠졌다. 놀란 경칩과 곡우가 비명을 지르며 심묘를 잡아채려 했지만, 심묘는 이미 빠진 뒤였다. 차디찬 연못물 때문에 심묘의 입가가 새파래졌다. 명안 공주의 방법은 늘 이랬다. 결정적으로 해칠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갉아 피해를 입히는 방식이었다. 연못에 빠뜨리는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심묘는 명안 공주가 어떻게든 타격을 줄 거라는 것은 예견하고 있던 터였다.

심묘는 연못을 헤엄쳤다. 초겨울의 연못은 차가웠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심묘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못에 금색 의복이 이리저리 용솟음쳤다. 명안 공주도 물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는 수영을 못하는 듯 연거푸 비명을 질렀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꿰뚫었다.

“여봐라! 여봐라!”

명안 공주의 시녀들이 물에 빠진 주인을 보고 허둥거렸다. 공주를 구하려 긴 나뭇가지를 구해 왔으나 그녀가 빠진 곳은 뭍에서 멀어 닿지 않았다. 사색이 된 그들은 서둘러 달려가 수영할 수 있는 호위를 불러왔으나 막상 호위는 공주를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명안 공주의 몸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머리가 잘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연못가에서 떠밀려 뭍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명안 공주는 연못 중앙에 빠져 나뭇가지로는 닿지 않았다. 공주가 연못에 빠진 웃음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심묘는 가소로웠다. 심묘는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자적 헤엄쳐 연못가로 다가갔다.

경칩과 곡우는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심묘를 끌어올렸다. 심묘가 반 정도 올라왔을 때, 노한 외침이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화원 밖에 남자 둘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금색이 화려한 옷과 옥관을 쓰고 있었으나 표정이 어두워 출중한 모습이 일부 가려진 듯했다. 다른 사람은 금실이 장식된 자줏빛 장포에 검은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반쪽 은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뛰어난 모습은 가릴 수 없었다.

“전하, 공주마마께서 물에 빠지셨습니다!”

진국 시녀들이 서둘러 황보호에게 보고했다. 그녀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본 황보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도 모르게 곁에 있는 예왕의 표정을 살폈다. 가면 아래 예왕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뒤를 따르는 호위에게 황보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구하러 가지 않고 뭐 하느냐!”

호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항명할 수는 없으니 달갑잖은 표정으로 몸을 날려 연못 중앙으로 헤엄쳤다. 수영 실력이 뛰어난 그는 즉시 물에 빠진 명안 공주를 건져냈다. 명안 공주는 기슭에 당도하자 물을 많이 게워냈다. 그 후에 심묘를 가리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저 천한 것이 날 밀었어. 태자 오라버니. 죽여줘요!”

격분해 제정신이 아닌 명안 공주는 사람들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험한 말을 뱉었다. 놀란 황보호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막았다.

“명안!”

명안 공주는 그제야 황보호 곁에 있는 예왕을 보았다. 명안 공주의 안색이 분노로 더욱 붉어졌다. 예왕 같은 수려한 남자 앞에서 이렇게 난처한 모습을 보였으니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이 망신 역시 모두 심묘가 준 것이라 생각하자 더욱 화가 났다.

경칩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공주마마의 말씀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먼저 물에 빠졌는데 어떻게 손을 뻗어 공주마마를 밀었겠습니까? 신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재주가 있겠습니까?”

“넌 뭔데 감히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그 말은 내가 심묘를 모욕하려 했다는 거야? 여봐라! 이 허튼소리를 하는 천한 것을 잡아들여라!”

심묘는 경칩을 몸 뒤로 가려 숨겼다.

“경칩은 제 사람입니다. 공주마마는 진국 사람이시고요. 명제인 이곳에서 진국 사람이 마음대로 행패 부리실 수는 없습니다.”

심묘는 ‘행패’라는 두 글자를 사용했다. 예의를 조금도 차리지 않는 심묘의 태도에 황보호도 눈을 가늘게 뜨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무엄하다!”

명안 공주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소녀는 무엄하다 느끼지 않나이다.”

명안 공주의 외침에도 심묘의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현생에서 자신은 진국에서 울분을 억누를 뿐 감히 아무 말도 못 하던 심 황후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진정으로 충성하는 경칩을 보호하지도 못한다면 또 한번 헛되이 살 뿐이었다. 신분에 기대어 멋대로 구는 명안 공주를 대하는 것은 머리를 써서 계략을 짤 필요도 없었다.

이 와중에 시녀들은 얼른 피풍의를 가져와 흠뻑 젖은 명안 공주를 덮어주었다. 그러나 심묘는 피풍의가 없었다. 걸치고 온 피풍의는 이미 젖었고 의복도 완전히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경칩과 곡우가 드러난 심묘의 몸을 가리려 해도 역부족이었다. 황보호가 심묘를 훑어보는 시선은 무례할 정도였다.

예왕이 가볍게 웃으며 검은 피풍의를 벗어 심묘에게 던졌다. 피풍의는 젖은 심묘의 몸을 빈틈없이 가렸다. 예왕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했다. 예왕은 정경성에 온 후 혼자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뿐 명제에서 우정을 나눈 사람이 없었다. 진국과의 친교에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데 그런 그가 나서서 심묘를 도와준 것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황보호가 깊은 시선으로 심묘를 주시했고, 명안 공주는 질투로 입술을 깨물었다. 경칩과 곡우가 심묘를 부축할 때, 명안 공주는 질투에 눈이 멀어 외쳤다.

“분명 네가 나를 밀어 떨어뜨린 거야! 네가 아니면 내가 연못에 빠질 리 없어! 네 여종이 나를 민 게 아니더냐!”

심묘가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음에도 아주 침착하고 평온한 태도였다. 격분해 제정신이 아닌 명안 공주와 대조적일 정도였다.

“소녀의 여종이 이미 소녀를 대신해 설명했습니다. 소녀가 먼저 물에 빠졌는데 어떻게 공주마마를 밀 수 있겠습니까? 공주마마께서 실수로 미끄러지신 게 아닐는지요?”

“내가 스스로 미끄러졌다면 어떻게 연못 중앙으로 미끄러졌을까!”

분노한 명안 공주의 말에 심묘가 무심하게 답했다.

“공교롭습니다. 소녀도 무궁한 힘을 가진 장사가 아니니, 공주마마를 먼 곳까지 밀 수 없습니다.”

그때,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왕은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그가 웃음소리를 낸 게 분명했지만, 가면 아래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그의 기분을 추측할 수 없었다. 명안 공주는 이를 악물고 예왕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명제 사람도, 진국 사람도 아니시지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책임지고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저와 심묘, 도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겠습니까?”

황보호는 명안 공주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그는 분노가 치솟았다. 명안 공주는 성정이 거만한 데다 상황을 고려할 줄도 몰랐지만, 오늘처럼 이렇게까지 멍청한 방법을 쓸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앙갚음하기 위해 심묘가 고육지책(苦肉之策,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쓰는 계책)을 쓴다면 명안 공주에게도 좋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방문한 예왕이 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니 더욱 공교로워졌다. 황보호는 제멋대로 날뛰는 명안 공주를 지금 당장이라도 본국으로 돌려보내 버리고 싶었다.

심묘는 눈을 살짝 내리감았다. 심묘와 달리 명안 공주는 희망을 품고 예왕을 바라보았다. 황보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서렸다. 예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상관해야 하는가?”

예왕의 차가운 반응에 명안 공주는 당황했다. 심묘 역시 예왕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진국도 참 떠들썩하군.”

예왕의 의도를 알 수 없으나 비꼬는 듯한 담담한 말투에 황보호는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예왕의 피풍의를 걸친 심묘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오늘은 오해에 불과하오. 심 소저가 이로 인해 고생할지 예상하지 못했소. 내가 이 자리에서 여동생을 대신해 사과할 터이니 심 소저는 개의치 마시길 바라오.”

“오라버니!”

황보호가 심묘에게 사과하리라 생각지 못한 명안 공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황보호의 냉랭한 눈짓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심묘를 보는 눈빛에 질투와 원망이 가득했다. 심묘는 황보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태자 전하의 말씀에 소녀는 따르지 않을 수 없네요.”

부드러운 말투이긴 하나 내키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명안 공주는 또다시 분노했다. 황보호도 당황해하며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눈을 내리깐 채 눈빛에 서린 감정을 숨겼다. 황보호는 관대하고 예의 발라 보이지만 사실 가장 흉악한 사람이었다. 그의 잔인함은 부수의의 잔인함과는 달랐다. 혐오스러운 수준이었다. 전생의 심묘가 진국에 있을 때 술에 취한 황보호가 그녀를 모욕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곡우가 목숨을 걸고 심묘의 순결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심묘는 그때 바로 명제에서 폐후가 됐을 것이었다. 명제 황실이 부정을 저지른 여인을 황후로 인정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황보호는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막은 곡우를 죽였고, 이미 죽은 곡우를 여러 번 찔렀다. 그리고는 곡우의 시체를 이리 떼에게 던져버렸다. 심묘는 이 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었다. 진국에서 가장 친한 사람을 잃었거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시체도 거두지 못했다. 심묘가 명안 공주를 혐오한다면, 황보호에겐 피맺힌 원한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황보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방법이 없었다.

황보호의 시선이 좀 더 의심스러워졌다. 심묘가 눈빛을 거두는 순간, 기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기분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탐구하고 싶어졌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예왕이 몸을 틀었다. 키가 크고 몸이 굳센 예왕에게 여린 심묘가 가려져 황보호의 시선에 닿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군. 날을 바꿔 다시 오겠네.”

예왕은 황보호와 명안 공주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은 예왕의 시선에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정세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진국은 대량과 적대시하고 싶지 않았다. 대량을 대표하는 예왕이 진국에 친근한 뜻을 밝힌다면 진국에겐 이득이었다. 그래서 황보호는 오늘 예왕과 조금 친해질 기회가 될 거라고 여겼는데, 이를 명안 공주가 완전히 망친 것이다. 그는 매섭게 명안 공주를 노려보다가 금세 눈빛을 갈무리하곤, 유감스럽다는 듯 예왕에게 말했다.

“접대가 주도면밀치 못했소. 전하께서 날을 바꿔 오시면 두터운 정으로 반드시 환대하겠소.”

예왕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 소저, 온몸이 젖었으니 부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만. 나와 같이 가는 게 어떻소?”

심묘는 깊게 심호흡하고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예왕 전하.”

황보호와 명안 공주는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명안 공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라버니! 저 천한 것이 예왕 전하를 유혹했어! 게다가 날 물속으로 밀었다고! 놔둬서는 안 돼!”

“닥쳐라. 이 멍청한 것! 오늘 일은 내가 그냥 넘어가마. 다시 또 이렇게 일을 망치면 부황께서 널 책망하실 때 도와주지 않을 테다!”

황보호는 맹렬히 분노를 쏟아낸 후 즉시 등을 돌려 떠났다. 명안 공주는 황보호에게 훈계를 들었으나 감히 대들 수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수모를 안겨준 심묘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게다가 그녀와 함께 떠나는 예왕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몹시 괴로웠다. 지금까지 마음에 담은 남자가 없었으나, 예왕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심묘를 보살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명안 공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묘,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지게 만들고 말겠어!”

진국 태자부 밖. 심묘의 마차가 입구에 멈추어 섰다. 심묘가 생소한 남자 피풍의를 걸치고 홀딱 젖은 채 나오자 모경이 긴장해 몸을 굳혔다.

“아가씨…….”

“괜찮네. 부로 가지.”

심묘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내가 심 소저를 도왔거늘,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듣지 못했네. 심 소저가 너무 무정하다 하지 않을 수 없군.”

예왕은 팔짱을 끼며 토라진 것처럼 말했다. 심묘를 제외한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예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심묘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예왕 전하, 오늘 즐겁게 노셨나요?”

“그건 네가 즐거우냐 마느냐에 달린 거지.”

심묘는 가면에 가려진 예왕의 표정을 어쩐지 상상할 수 있었다.

“명안 공주를 물에 빠뜨린 건 당신이죠? 왜 그런 거예요?”

심묘가 사경행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사경행이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키 차이 때문에 심묘에게 속삭이려면 허리를 굽혀야 했다. 눈높이가 같아지자 친근하면서도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듣기 좋았지만 냉소가 담긴 목소리였다.

“명안 공주가 뭐라고 널 괴롭힌단 말이냐?”

사경행은 말을 멈추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난 네 사람이 아니더냐? 널 돕는 건 당연하다.”

심묘는 한 걸음 물러나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럼 인사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한마디 고맙다는 말로 끝낼 일은 아니지. 내가 잘 생각해보마.”

사경행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와 많은 말을 나누기 싫은 심묘는 두말없이 마차에 올랐다. 모경은 심묘가 감기에 걸릴까 염려해 빠르게 달렸다. 그녀의 마차는 골목에서 자취를 감췄다.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사경행의 뒤에서 키 큰 남자가 몸을 드러냈다. 사경행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황보호가 이전에 정경성에 온 적 있는지 조사해봐.”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진국 관저 대문을 바라보는 사경행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얼굴 가득 섬뜩한 빛이 떠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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