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장 (50/71)

34장

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경칩과 곡우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늘 외출에서 심묘가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공주의 담력이 크다 한들 감히 명제 땅에서 명제 사람을 연못으로 밀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경칩의 눈가가 붉어졌다. 명안 공주는 고귀한 진국의 공주이나 경칩 자신은 일개 노비였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잡아 벌을 주려 했다면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두려움에 휩싸여 온몸을 떨었다.

하나 심묘는 아무렇지 않았다. 명안 공주가 무엇이든 일을 꾸미리라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다. 다만 명안 공주도 대국을 중시하니 심묘 자신의 목숨까지 원했을 리는 없었다. 이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자가 나타나 명안 공주도 물에 빠진 것이다.

심묘는 당연히 이 일을 사경행이 꾸몄음을 눈치챘다. 사경행은 무서울 것이 없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황보호 앞에서 명안 공주를 음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황보호는 연못 중앙에 사람을 빠뜨리는 일은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알아챌 터, 곧 이 일의 이상함을 눈치챌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무공이 있는 이는 사경행, 즉 예왕밖에 없었다. 목적까지 알 수는 없겠지만 황보호가 예왕을 의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심묘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경행이 명안 공주를 난처하게 만든 행동은 정말 통쾌했다. 명안 공주 때문에 쓴맛을 보긴 했으나 사경행 덕분에 그 쓴맛도 맛볼 만했다. 그 명안 공주가 곤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라니.

경칩과 곡우는 심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심묘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고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물에 빠졌던 심묘가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부에 도착한 심묘는 온몸이 젖었기에 후문으로 몰래 들어갔다. 경칩이 서둘러 수건으로 심묘의 머리를 말려주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주방으로 갔던 곡우는 생강차를 끓여왔다.

“백로와 상강은 왜 보이지 않느냐?”

심묘는 명안 공주를 만나러 가기 전 백로와 상강에게 부에 남아 소식을 기다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보이지 않으니 의아한 일이었다. 그때 백로가 돌아왔다.

“아가씨, 돌아오셨네요! 방금 마님께서 제게 아가씨가 어디 갔는지, 왜 안 돌아오는지 여쭈셨어요.”

“어머니가? 무슨 일로?”

“노장군 어르신 은인의 딸이 찾아오셨답니다. 마님이 그 소저와 이야기 중인데 아가씨도 오셨으면 좋겠다네요.”

수건을 든 심묘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곧 차가운 시선으로 심묘가 물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더냐?”

백로는 심묘의 시선에 살짝 떨며 착실하게 답했다.

“상씨 일가랍니다.”

* * *

심신 일가가 정경성으로 돌아온 후 처음 온 방문객이었다.

나설안은 본채의 중앙 방에서 젊은 여인과 대화하고 있었다. 심묘가 방에 들어올 때쯤, 나설안은 그 여인과 차를 마시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나머지 심묘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옆에 앉아 간식을 먹던 나담이 먼저 심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심묘야, 오늘 만든 간식이야. 우유를 넣은 거래. 너도 먹어봐.”

심묘가 나담에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설안의 곁으로 다가간 심묘의 시선이 젊은 여인에게 닿았다.

“어머니, 이분은?”

젊은 여인이 얼른 일어났다. 여인은 녹두색 의상에 머리에 나무 비녀 하나와 점잖은 은팔찌 하나만 하고 있었다. 초라한 단장이지만 담담한 학자풍 기운을 풍겼다. 용모 역시 수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매력이 있었다.

“네 조부 은인의 딸 상재청이라고 한단다. 교교는 본 적 없을 거야. 청 동생, 이쪽은 내 딸 교교야.”

“청 이모.”

심묘는 살짝 웃으며 인사했다. 나설안이 상재청을 앉힌 후 심묘도 앉히며 웃으며 말했다.

“청 이모라니, 이렇게 젊은데 이모라고 부르니 나이가 많은 것 같잖니? 청 동생이 나이를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볼 때 교교보다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구나. 교교가 언니라고 불러도 이상하다 느끼는 사람이 없을 거야.”

“부인, 절 부끄럽게 하지 마세요.”

상재청은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나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 청 이모가 앞으로 부에 손님으로 오실 거래. 장기를 두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신다는데, 난 그런 걸 잘 모르니까 네가 앞으로 동무가 되어 드리는 게 어떻겠니?”

심묘는 웃었다. 나담이 솔직한 사람인 것처럼, 나설안 역시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심묘는 맞은편 상재청과 마주하고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나설안이 열정적으로 사람을 대한다 해도 그녀의 환심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나씨 세가 사람들은 모두 무장이어서 문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나설안과 나담은 호탕하고 솔직한 만큼 글이나 말로 장난을 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인내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짧은 시간에 나설안이 상재청을 자매로 칭하면서까지 환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심묘의 시선이 점차 차가워졌다.

심묘가 말이 없자 나설안이 심묘의 손을 끌었다.

“교교, 손이 어찌 이렇게 차가운 거니? 이제 바깥 날씨가 추우니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렴.”

경칩과 곡우는 죄송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부로 돌아온 심묘는 손님이 왔다는 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거의 바로 넘어온 것이었다. 나설안이 오늘 심묘와 명안 공주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곧 겨울이니 아주 춥지요. 제 고향에는 약주머니라는 게 있는데 추위를 쫓는 향료를 넣어 침상 맡에 걸어두고 자면 다음 날 일어날 때 훈훈하답니다. 심묘 소저가 괜찮으시다면 제가 몇 개 만들어 보내드릴게요.”

상재청이 웃으며 말했다.

“청 동생, 그런 것도 할 줄 아는가? 유주의 아가씨는 영리한 데다 손재주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군. 우리 부 아가씨들은 향주머니는커녕 손수건에 수를 놓는 것도 못 하는데.”

나설안은 나담과 심묘를 힐끗 바라보며 유감스럽다는 듯 탄식했다. 심묘는 바느질을 좋아하기는커녕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담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담이 입을 삐죽였다.

“고모, 저랑 심묘만 그렇다고 말씀하시면 안 돼요. 고모도 그러시잖아요.”

뜨끔한 지적에 나설안이 나무라듯 눈을 가볍게 흘겼다.

“청 이모는 유주 사람인가요? 유주는 정경성과는 가깝지 않은데 어떻게 오게 되셨나요?”

심묘는 상재청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었다. 상재청의 얼굴에 곤란한 표정이 드러나자, 이를 눈치챈 나설안이 화제를 바꾸려 했다.

“무슨 일이긴. 정경성에 며칠 놀러 온 거란다.”

“그럼 청 이모는 지금 어디에서 머물고 계신가요?”

“지금 심부에서 머무르고 있어.”

상재청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했다.

“오, 조모와 지내시는군요. 청 이모의 아버지는 조부의 은인이시니 조모께서 청 이모를 아주 잘 돌봐주실 테죠. 그럼 안심이에요.”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나설안은 심 노부인의 성격에 상재청을 자상히 돌볼 리 없다고 여겼지만, 심묘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겠구나.”

“청 이모는 유주에서 지냈군요. 유주도 아주 놀기 좋다고 들었는데, 가본 적이 없어요. 이전 광문당에 다닐 때 유주가 고향인 친구가 있는데 서로 알 수도 있겠네요.”

상재청의 웃는 얼굴이 조금 굳는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작은 가문이에요. 아마 심묘 소저의 동문생은 저희 상씨 일가를 잘 모를 거예요.”

“상가가 작은 가문이라도 청 이모 같은 인재가 있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어요. 청 이모, 수도로 올 때 남편과 같이 오지 않았나요?”

“교교, 허튼소리는. 청 동생은 아직 시집을 안 갔단다.”

상재청의 안색이 더욱 곤란해졌다. 심묘는 놀란 듯 상재청을 힐끗 보았다.

“청 이모, 올해 몇 살이신가요?”

시집가지 않은 여자에게, 더구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에게 나이를 묻다니 당돌함이 지나치다 할 정도였다. 둔한 나담도 간식을 먹던 것을 멈추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가장 예의가 바르고 규범에 따르던 심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상재청이 곤란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올해 스물여섯이에요.”

심묘가 놀라 크게 뜬 눈을 숨기듯 빠르게 미소 지었다.

“청 이모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저는 제 또래로 알았을 거예요. 정말 부러워요.”

상재청을 살피는 심묘의 시선이 의미심장했다. 악의는 없으나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상재청이 웃기만 하자 나설안이 나섰다.

“청 동생이 이렇게 좋은 사람이니 곧 좋은 남편감을 만날 수 있을 걸세. 나는 유주 남자를 모르지만 정경성에는 우수한 남자가 많지. 청 동생이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동생에게 진심인 사람을 만나기 어렵지 않을 걸세.”

상재청이 놀리지 말라고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니 시간이 지나 하늘이 어두워졌다. 심신과 심구, 나릉이 병부에서 돌아오기 전, 상재청이 그만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나설안이 그녀를 만류했다.

“다들 곧 돌아올 텐데 함께 저녁 먹고 가게나. 그이가 청 동생을 보면 반드시 기뻐할 걸세.”

“괜찮아요. 더 있다가 어두워지면 길 찾기 어려울 거예요. 부인의 호의에 감사드리지만, 다시 방문할 테니 오늘은 이만 갈게요. 시간이 늦었답니다.”

바깥은 확실히 어두웠다. 나설안이 상재청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더 권할 수 없겠지. 오늘 처음 봤는데도 옛 친구를 본 듯 아주 좋군. 꼭 다시 오게. 오랫동안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

“부인의 두터운 정을 감히 거절하지 못하니 공손히 따르겠습니다.”

나설안이 상재청의 마차를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들의 뒤를 나담과 심묘가 따랐다. 나담이 가만히 속삭였다.

“청 이모는 유주의 작은 가문 출신이지만 궁중 사람보다 예의가 뛰어나네. 됨됨이가 부드럽고 선량해서 아직 혼인하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 청 이모와 혼인할 사람은 어떤 운 좋은 사람일까?”

심묘는 상재청의 뒷모습을 보며 말이 없었다. 나담이 다시 심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심묘야, 너는 청 이모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나담이 자신의 감정을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심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와 청 이모 사이에 아무 원한이 없는데 내가 왜 청 이모를 싫어해?”

“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아. 넌 누구에게나 잘하지만 담담하거든. 그런데 오늘 네가 청 이모에게 했던 여러 질문 중에 실례인 질문도 있었단 말이야. 어디 네가 그런 실수를 하겠어? 이건 분명 고의야. 게다가 네가 이모를 보는 눈빛은 좀 이상했어.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과 달랐거든.”

심묘는 나담의 추측에 실소했다.

“언니가 너무 생각이 많은 거야.”

“내가 허튼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분명 그렇다니까. 물론 나는 청 이모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초면에 고모와 이렇게 친해지다니 조금 이상하긴 해.”

“어디가 이상한데?”

“생각해봐. 청 이모의 부친은 심 노장군님의 부하이자 은인이니 아마 유능할 거야. 호랑이 아버지 밑에 강아지 자식은 없다고 하잖아. 너도 평소에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뼛속 깊이 고모부를 닮았잖아. 어찌나 용맹한지 돌궐족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청 이모는 너무 온화해. 활발하고 주저함이 없지만 그뿐이야. 왜 장군 가문의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심묘는 나담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자신에게 ‘용맹’하다고 한 그녀의 평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말에는 속으로 냉소했다. 장군 가문의 분위기가 없다는 나담의 말은 틀렸다. 상재청은 누구보다 장군 가문 출신의 아가씨다웠다. 그녀의 병법 탐구는 이미 최고 경지에 이른 수준일 것이다. 상재청에게서 괴팍한 언행을 찾아볼 수 없었던 건 그녀의 연기력이 특출나기 때문이었다.

“장군 가문 출신이면 반드시 용맹해야 해? 청 이모는 유주에서 성장했어. 어쩌면 상 부인이 학자 가문 출신이라 청 이모는 모친의 성격을 닮았는지도 모르지.”

나담은 입을 삐죽였다.

“사실 난 청 이모가 좋아. 그런데 네가 청 이모를 싫어하면 나도 이모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너와 나는 함께하니까.”

“고마워.”

“그런데 왜 청 이모를 싫어해? 설마 너보다 똑똑해서 질투하는 거야?”

호기심 어린 말투였다. 심묘는 나설안에게 배웅을 받고 있는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냉기가 스쳤다.

“청 이모처럼 총명한 사람은 나도 좋아해.”

상재청이 떠난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심신 일행이 돌아왔다. 나설안은 심신에게 상재청이 방문했었음을 이야기했다. 심 노장군이 살아 있을 적에 말하기를, 상씨 일가의 상호는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군인이라고 했었다며 심신은 탄식했다. 노장군이 죽고 난 후 상씨 일가가 유주로 떠나 여러 해 소식을 알 수 없었다가 지금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심신은 어린 상재청을 만난 적 있단 것도 기억했다. 그러면서 심가는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니, 상재청에게 난처한 일이 있으면 돕자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상재청에게는 난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설안은 차마 아이들 앞에서 말을 꺼낼 수 없어 얼른 식사를 마치고는 급히 심신을 끌고 방으로 사라졌다. 심구와 나릉도 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근래 심구는 수도 일을 맡아 바빴다. 막 병부에 들어간 나릉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시간 날 때마다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바깥에서 온종일 노느라 피곤한 나담도 일찍 방으로 돌아갔다.

깊은 밤, 심묘는 홀로 방에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가 늦도록 침상에 누우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자 오늘 명안 공주의 일로 걱정한다고 여겼다. 심묘는 괜한 걱정을 하는 경칩과 곡우를 빨리 자라고 쫓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보낸 후에도 정작 자신은 잠을 청하지 않았다.

심묘는 명안 공주의 일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사경행 앞에서 체면을 잃은 황보호가 명안 공주에게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그 경고 때문에라도 한동안 명안 공주는 당분간 행동을 취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고민하느라 이마를 문지르게 만드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바로 오늘 방문한 상재청이었다.

예전에 풍선전당포로 계우서를 탐색하러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낯익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놀라 다시 찾아보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군중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그때는 자신이 사람을 착각했다고 여겼으나 그녀가 장군부에 나타났으니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현생에서 많은 일이 변했으나 몇 명의 사람은 운명처럼 정해진 대로 나타났다. 심신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며, 전쟁터에서 용맹한 장수였던 것처럼 어려운 문제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심신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부수의의 압박 때문만이 아니었다. 심구가 형초초 때문에 죽고, 나설안이 상재청 때문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상재청이 유주 사람인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이쯤에 심가에 상재청이 나타났다. 당시 심가는 분가하지 않았기에 심부 모든 사람이 됨됨이가 온순하면서도 대범하며 말투와 태도에 매력이 넘치는 상재청을 좋아했다. 개중에서도 나설안이 가장 그녀에게 호감을 많이 표했다.

무장인 나설안에 비해 임완운은 너무 사리에 밝았고 진약추는 고상했다. 세 사람은 표면적으로 화기애애했지만 나설안은 성격 차이로 그들과 진정으로는 친해질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상재청과는 급속도로 자매의 정을 맺은 것이었다.

부수의와 혼인 후 몇 번 심부를 방문한 심묘는 상재청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상재청과 대화할 때 늘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약삭빠른 상재청은 진약추와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나설안과는 병법을 이야기해 호감을 샀다. 심묘와는 부군의 환심을 사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렇듯 사람에 맞춰 낯을 바꾸었으니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상재청에게 호감을 느낀 심부 사람은 그녀가 스물여섯 살까지 혼인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상재청을 첩으로 삼겠다고 떠벌린 유주의 관가 집안이 있었는데, 그 가문은 가업이 커서 보통의 백성이 맞설 수 있는 집안이 아니었다. 아무리 상재청이 뛰어나다고 해도 관가 집안과 원수가 되는 것을 무릅쓰려는 사람은 없었다. 관가 집안이 점점 지나치게 행동하자 살길이 없던 상재청이 부득이하게 장군부에 와 보호를 요청한 것이었다.

고결한 품격의 여인이 부모가 없는 데다 남편도 찾지 못해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심묘는 상재청을 가엾게 여겼다. 심묘 외에도 모든 심가 사람이 그녀를 애처롭게 여겼기에 상재청은 손님의 명분으로 심부에서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때, 진약추가 혼서 한 통을 꺼냈다. 심신과 상재청 사이의 혼서로 심 노장군이 상씨 일가의 상호와 합의해 쓴 것처럼 보였다. 이 혼서를 본 심가 사람들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저 농담이 지나치다 하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 한 통의 혼서는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언젠가부터 상재청이 여러 해 혼인하지 않은 건 단순히 관가 공자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 심신을 향한 절개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혼서와 더불어 이런 소문이 돌자 화목하던 심신과 나설안은 곤란해졌다.

당시 상재청은 나설안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자신은 심신에게 절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혼서 역시 어른들의 농담이니 조금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했었다. 게다가 그녀는 무엇도 원하지 않고 단지 남은 인생을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혼인 생각은 일찍 접었다고도 말했었다. 만약 자기 때문에 심부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을 맞이한다면 그 길로 사원에 가 비구니가 되겠다고 절절히 호소했다.

심신과 나설안은 보호받을 곳을 찾아온 아가씨이자 은인의 딸을 비구니로 만들 수는 없었다. 심가 사람들은 나설안과 심신에게 아량을 베풀라고 했고, 더욱이 진약추와 임완운은 그들을 강경하게 설득했다.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몰랐지만 노부인은 심신에게 상재청을 첩으로 삼으라고까지 제안했었다.

당연히 심신은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후원에 많은 여자를 둘 필요 없다고 했으며, 상재청 역시 원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나설안이 이에 동의한 것이다. 불같은 성격인 나설안은 심신과 혼인할 때, 심신의 후원에는 오직 자신만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이에 동의한 심신은 그때까지 첩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나설안이 나서서 심신에게 상재청을 받아들이라 요구한 것이다.

어쩔 도리가 없어진 상재청은 심신의 이낭이 되기로 했지만, 명분만 있을 뿐 이낭의 의무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의 곤란과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의할 뿐이니,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맹세까지 했다.

당시 심묘는 이낭으로서 총애를 받는 대신 명분만 갖는다는 상재청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여겼고, 세상에 이런 선량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대신들이 부수의에게 보낸 첩들로 늘 초조했던 자신이었으니 상재청은 아주 온당한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상재청은 심신의 첩이 되었으나 심신과 남녀의 정을 나누지 않았기에 정다운 오누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나설안과의 사이는 더욱 좋아졌다. 이에 심묘는 걱정하던 마음을 덜어냈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나설안이 임신했다. 기쁜 소식이었다. 매일 함께 지내던 상재청은 온종일 그녀를 살뜰히 보살폈지만, 나설안은 유산했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의문스러운 유산 후 나설안은 극도로 우울해하다 곧 병사했다.

심신은 고통스러워했다. 하룻밤 사이 머리카락도 새하얗게 세고 말았다. 나설안의 죽음으로 심신은 생기를 잃고 빠르게 늙었다. 전쟁을 생각할 기운도 없었고, 부수의의 계략을 되받아칠 힘도 없었다. 이방과 삼방에게 허점을 보일 정도로 힘들어했다.

지금 심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상재청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상재청을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었다. 나설안이 유산한 이유는 둘째 치고, 여장군인 나설안이 하룻밤 사이 초췌해져 죽은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상재청은 나설안 곁에 종일 붙어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은 상재청과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 심묘 자신도 사람을 보내 조사했지만, 증좌를 찾지 못했다. 상재청은 결백했다. 나설안이 죽고 난 후 심신은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군부 대방에는 여인이 처리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하인들은 이낭인 상재청을 대방의 주인마님처럼 여겼다. 그들은 상재청의 온순하며 진중한 태도에 끌려 모두 그녀를 진정으로 따랐다.

현생의 심묘는 이런 상재청의 수완에 이가 갈렸다. 상재청은 아주 총명했다. 심신이 나설안이 아닌 다른 여인을 품지 못할 것을 안 상재청은 심신의 마음을 잡을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나설안의 신임을 얻는 것에 모든 힘을 기울였고, 원하는 대로 나설안의 사람이 되었다.

이후 겉으로는 잘 포장한 몇 마디를 ‘무심코’ 던져 나설안을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말이야말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칼이고 그녀는 그 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수였다. 특히 마음이 약해져 병상에 누운 나설안에게 상재청의 ‘위로의 말’은 사지로 모는 말이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나설안의 뒤통수를 치는 셈이었다.

당시 심신은 상재청과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나설안이 죽은 후 상재청은 심신의 유일한 여자였다. 이 상황은 그녀가 평생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현실적인 성격의 상재청은 손에 잡을 수 없는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상재청을 잠시 의심했던 심묘도 그녀를 가련한 여인이라고 여길 정도로 상재청은 온화하고 욕심 없는 모습의 얼굴로 살았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어서 이후 상재청의 정체도 드러났다. 나설안이 죽고 2년 후 유주에서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상재청에게 노름꾼인 남편과 병을 앓는 아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일찍 시집간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꽤 오래 지냈다. 혼례를 막 올렸을 때는 분명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부부에게 백 가지 애달픈 일이 있다는 옛말처럼 두 사람에게도 고난이 닥쳐왔다. 자만심이 넘치는 상재청이 평생 가난과 막막한 생활을 견딜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야심을 택했다.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정경성으로 떠나온 것이었다.

상재청의 남편은 곳곳으로 상재청의 행방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상재청이 정경성에서 심신의 첩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아들과 함께 심부에 온 것이었다. 이에 온 정경성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병든 아들을 버린 여자가 보이는 것처럼 선량한 사람일 수 있겠냐고 떠들어댔다. 상재청이 한 꼬리를 문 거짓말들 역시 수군거림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상재청을 데리고 떠났다. 결국 정경성에 남은 심신만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지난 일이 흩날리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현생에서 심묘는 줄곧 이 일이 언제 되풀이될까 대비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늦고 말았다. 상재청은 이미 장군부에 나타났으며, 전생처럼 등장과 거의 동시에 나설안을 현혹해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대단한 연기를 펼치는 여인을 두 명 보았다. 한 명은 미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이 상재청이었다. 미 부인은 대범하며 거만한 본성을 드러내기라도 했지만, 상재청은 늘 고아한 척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단지 조그만 약점도 잡을 수 없었을 뿐이지, 미 부인에게 품은 분노와 원망이 그녀에게라고 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생이 아니었다. 절대로 상재청이 원하는 대로 두지 않을 것이었다. 심묘는 이 바둑돌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때, 등불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책장 앞에 서 있는 심묘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생각 하는 거지?”

소름이 돋은 심묘는 자칫 넘어질 뻔했다. 사경행이 한 손으로 그녀의 팔뚝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을 부축했다. 심묘의 자세가 안정되자 사경행이 손을 떼었다. 등불 아래 얼굴이 드러난 사경행은 심묘가 넘어질 뻔한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무언가 떠올린 듯 그는 익숙한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어떻게 보답할지 생각하느라 넋이 나간 거야?”

“뭐하러 온 거예요?”

심묘는 사경행의 가치 없는 말에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물론 내심 놀라기는 했다. 자신의 분부로 호위들이 늘어났음에도 여전히 사경행의 기척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친동생조차 이렇게 대단한데 조그마한 조짐을 보고 전체를 꿰뚫어 본다는 대량 황제의 수완은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섬뜩했다.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 옷을 가지러 왔다.”

오늘 오후 진국의 관저에서 사경행은 검은 피풍의로 곤경에 빠진 심묘를 구해주었다. 이를 떠올린 심묘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닥을 쳐다보는 사경행을 따라 바닥을 보았다. 그의 옷이 쪼글쪼글 구겨져 바닥에 비참한 모양새로 널브러져 있었다. 상재청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빠르게 옷을 갈아입느라 의자에 걸어놓기만 한 그의 옷이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사경행은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초리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너 정말 무례하구나.”

대량 예왕의 의복은 금처럼 귀할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내동댕이치다니 탁자를 닦는 천조각만도 못한 게 아닌가. 천하에 이렇게 할 사람은 심묘밖에 없을 것이다.

“예왕 전하의 피풍의는 바닥에 있습니다. 가져가시면 됩니다. 오늘 일은 감사드립니다.”

심묘는 예의 따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며 감사 인사도 대충대충 했다. 대량 황실에는 은자가 많기에 피풍의 한 벌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을 힐끗 바라보았다. 대량이 매일 새로운 의상을 입어 재산을 탕진해대는 사경행을 어떻게 키웠는지 의아했다. 국고를 모두 의복 만드는 데 쓰는 건가 싶었다. 강한 대량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건 사실 사경행의 사치 때문에 군인에게 보급품과 급여를 지급하지 못해서는 아닌지 허무맹랑한 추측도 했다.

사경행이 심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늘 좀 이상한데. 이렇게 성질을 부리고 크게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혹시 그 상재청이라는 여인 때문이냐?”

당황한 심묘가 사경행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긍했다. 그는 예전에 살던 집에 돌아온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사경행은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정경성에서 자랐으니 무엇에든 익숙했고, 배후에 풍선전당포라는 소식을 사고파는 정보통도 있었다. 정보력에서는 부수의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데요? 예왕 전하는 다른 사람의 집안일에 마음을 쓸 여유가 있나 봅니다.”

심묘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집안일’이라는 표현에 사경행이 다시 한번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넌 상가 여인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구나.”

심묘의 눈에 냉기가 서렸다.

“의탁하러 온 사람을 누가 두려워합니까?”

사경행은 턱을 매만지며 심묘를 힐끗 보았다. 그는 몸을 굽혀 심묘와 눈을 마주하고는 세심히 심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와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지만, 전처럼 이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경행이 낮게 읊조렸다.

“이상해. 유주에서 온 여인을, 어째서 유주에 가본 적도 없는 네가 잘 아는 것 같을까?”

심묘는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재빠르게 놀란 기색을 숨겼다. 사경행의 수려한 얼굴이 심묘의 혼을 홀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리한 칼날을 숨기고 있었다.

“명안 공주도 마찬가지야. 넌 진국에 가본 적도 없는데 그녀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지.”

심묘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사경행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그를 밀쳐내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눈빛만 점점 차가워졌다.

“넌 어려서부터 정경성에서 살았지. 가장 멀리 떠나본 곳이 소춘성이야. 그곳에서 지내는 2년간은 다른 곳을 간 적 없으니 유주를 방문했을 리는 없고. 진국은 더욱 그렇지.”

사경행의 목소리는 초겨울의 한기를 그대로 품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넌 심묘인가?”

우아하고 깔끔한 목소리가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심묘는 잘게 몸이 떨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가늘지만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사람의 온기를 빼앗은 것 같았다. 자신은 모든 일에 전생의 황후의 경험을 살려 대처했다. 사람들이란 결국 단지 한 가지의 색을 띨 뿐이었다. 흰색, 붉은색, 검은색 등 가지각색 색 중에 오직 한 가지 색을. 그러나 사경행만은 달랐다. 그의 색을 알 수 없을뿐더러, 어떤 색들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전생의 심묘에게 사경행은 단지 어린 나이에 죽은 출중한 소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그는 갈수록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녀가 한 모든 일에 의심을 품은 사경행은 심묘의 정체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경행은 그녀가 심묘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함으로써 어찌 보면 사실에 접근했다. 중요한 비밀을 들킬 뻔한 심묘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심묘는 사경행의 얼굴을 응시하며 작게 웃었다.

평소 심묘는 늘 단정함과 온화함을 품은 미소를 보였다. 사경행을 만났을 땐 좀 달라져 탐탁하지 않다는 듯 인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금 심묘의 웃음은 밤 속 피어난 백목련처럼 맑은 향기를 뿜었다. 곧 그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얼굴에는 차가움만 남았다.

“모든 사람이 예왕 전하와 같은 건 아닙니다.”

아름답게 웃고 있던 사경행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묘가 사경행이 사경행이 아님을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임안후부 사 소후야는 예왕의 가짜 신분이니 사람들은 사경행이 예왕이라는 사실이 기이하다고 느낄 것이었다. 사경행과 대량은 아무런 연관이 없기에 더욱 그러할 터였다.

“넌 조금도 손해 보길 원치 않는군.”

사경행이 몸을 곧추세웠다. 얼굴에 의심의 빛을 지운 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심묘겠지. 이렇게 비밀이 많아서야. 물어보기 정말 힘들군.”

“예왕 전하, 왜 절 잡고 놔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비밀이 있든 없든 예왕 전하와는 상관없잖아요.”

“불행히도 난 네 비밀에 흥미가 있다. 게다가 명제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고.”

유유히 말하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심묘는 화를 억눌렀다. 그녀는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잊으신 것 같은데, 소 공자와 송신 공주마마가 있지 않습니까?”

“네게 과거 일을 꺼내면 안 된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느냐?”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아한 그의 웃음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이는 아주 찰나였다. 사경행이 화제를 바꾸었다.

“넌 상가 소저를 어떻게 처리할 테냐? 내게 부탁하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다만.”

“저는 이 일에 손대지 말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심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미 어떻게 할지 다 생각한 모양이구나. 정말 대단해.”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울 뿐이었다.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진국 명안 공주는 곱게 물러서지 않을 거야.”

심묘는 매섭게 사경행을 쏘아보았다.

“알려주시지 않아도 알아요. 오늘 나서서 도와주신 건 감사드립니다.”

사경행 때문에 연못에 빠진 것이 명백한 명안 공주는 예왕이 심묘를 두둔한 것을 보았다. 질투가 심한 명안 공주는 불같은 분노를 심묘에게 반드시 표출할 것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너의 적수가 되지 못하겠지.”

사경행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사경행은 아주 섭섭하단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정말로 명안 공주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자 황보호가 더 신경 쓰였다. 황보호와 명안 공주가 명제로 온 것은 조공연회에 참석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은 명제와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명제와 진국이 서둘러 친교를 맺으려는 것은 대량이 언젠가부터 태도를 바꿔 호시탐탐 엿보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부수의와 황보호가 함께 하도록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협정은 암묵적으로 진행되니 이를 방해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그녀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천하 쟁탈을 위한 바둑판에서 대량이 어떤 수를 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자신은 이 대국이 끝나기 전에 죽었기에, 사경행의 마지막 모습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예상컨대 사경행은 매미가 허물을 벗듯 대량으로 돌아가 예왕으로 생활했을 것 같았다.

심묘의 시선을 눈치챈 사경행이 웃었다.

“무슨 추측을 하고 있는 거지?”

“예왕 전하는 언제 대량으로 돌아가시나요?”

심묘는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의 계획을 물었다. 사경행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곧 창밖으로 향했다.

“아쉬우냐?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황보호와 부수의 사이 광대놀음의 최후를 보고 싶구나. 넌 보고 싶지 않으냐?”

“예왕 전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사경행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지만 심묘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사경행은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피풍의를 집어 들었다. 연못물이 마르지 않아 축축했다. 사경행이 미간을 찌푸리며 피풍의를 털어냈다.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이다.”

“예왕 전하는 귀하신 자손입니다. 소녀는 먼지와 같아 감히 한데 논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는군. 너와 나는 같다. 천성적으로 높지.”

웃으며 말한 사경행의 그림자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방을 밝히는 등불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심묘만 홀로 탁자에 앉아 있었다. 사경행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나와 같다. 천성적으로 높지.”

심묘는 사경행이 자신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얻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사경행과의 교집합을 세심히 생각해봤지만, 역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한 것에 기력을 쏟았다고 여기자 언짢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경행은 늘 그녀의 생각과 생활을 어지럽히는 이였다.

* * *

사경행은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방은 궁전같이 화려했다. 그는 검은 피풍의를 아무 데나 던지고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구석에서 백호가 맹렬히 돌진하더니 검은 피풍의를 물고 휘두르며 즐거워했다. 사경행은 백호가 피풍의를 가지고 노는 것을 한참 보고 난 후 차가운 눈초리로 백호를 들어 올렸다. 사경행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무슨 짓이야?”

백호가 하품을 하며 사경행의 옷을 발로 붙잡았다. 사경행은 무표정하게 백호를 침상 옆자리에 내려두었다.

“철의!”

“주인님, 무슨 일이십니까?”

사경행의 부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사경행이 넝마처럼 변한 피풍의를 가리키자, 언짢은 표정의 철의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 피풍의는 검은 사자 털로 만든 귀한 것이었다. 천금으로도 구하기 어렵고 대량에서도 단 하나뿐인 피풍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귀한 피풍의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철의는 영락제를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가져다 버려.”

사경행은 아무렇지 않게 겉옷을 벗었다. 철의는 아까운 표정으로 바닥에 있는 피풍의를 들어 올렸다. 사경행이 깔끔한 것을 좋아하니 이렇게까지 더러워진 피풍의를 앞으로는 찾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경행이 입거나 사용한 물건을 감히 몰래 숨기지도 못하는 철의는 은자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

철의가 막 방을 나설 때 사경행이 그를 불렀다. 철의가 고개를 돌려 사경행을 바라보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깨끗이 빨아서 놔둬.”

철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풍의를 가지고 빠르게 문을 나섰다.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드디어 사경행이 이렇듯 사치스러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깨달은 것 같았다. 철의는 대량의 미래를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다.

* * *

정경성에 첫눈이 내리면서 사랑스러운 눈송이가 사방을 하얗게 물들였다. 여인들은 각종 꽃이 수놓인 솜옷을 꺼내 입었고 온갖 피풍의와 멱리에서는 풍취가 만개했다. 이렇게 눈 오는 날, 아름다운 사람이 우산을 들고 홀로 걷는다면 더욱 고아해 보일 것이었다.

심부 서원. 상재청이 흩날리는 눈을 감상하고 있었다.

“청 동생, 밖에서 이렇게 있으면 감기 걸려. 정경성은 겨울바람이 아주 차가워.”

담황색 큰 소매 저고리에 흰 새가 수놓인 담홍색 치마를 입은 진약추가 상재청에게 부드럽게 조언했다. 날씬한 자태가 멀리서 보면 열여섯 소녀로 여길 모습이었다. 연자줏빛의 장옷을 입어 한층 청아해 보이는 상재청이 그녀를 향해 생긋 웃었다.

“유주에는 눈 내리는 일이 별로 없어요. 겨울에 드물게 몇 번만 볼 수 있답니다. 정경성의 눈은 정말 아름다워서 계속 보고 싶네요.”

“역시 청 동생이야. 하지만 청 동생이 앞으로도 정경성에서 지내면서 눈이 오는 걸 몇번 더 보게 되면 지금처럼 그렇게 대단한 풍취를 느끼진 못하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매년 눈이 오니 춥다고 불평하게 될지도 모르지.”

상재청은 진약추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학자 집안 규수의 분위기를 풍겼고 친자매처럼 닮은 면도 많았다. 진약추가 상재청의 손을 끌었다.

“청 동생, 눈을 좋아해도 밖에 오래 있지 마. 감기 걸릴 거야. 방에 화로가 있으니 들어가자.”

상재청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진약추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여종이 두 사람에게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었다. 진약추가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다시 미소를 띠었다.

“우리 심부에서 제대로 다도를 나눌 만한 자매를 줄곧 찾지 못했었는데, 자네가 있어서 아주 기쁘다네.”

“셋째 부인의 배려가 깊으십니다.”

“청 동생은 사랑스러워서 누구나 좋아할 거야. 난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어. 자네가 슬기롭고 우아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지. 동생은 나와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데 큰형님과는 어땠는지 모르겠네.”

슬쩍 운을 띄운 듯했으나 무언가 알아내려는 탐색의 기색이 짙게 깔려 있었다.

“큰형님은 장군 가문 출신이라 다도 같은 것을 몰라. 물론 마음씨는 좋지만. 큰형님이 자넬 놀라게 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네.”

상재청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첫째 부인은 좋은 분이시더군요. 제가 들은 적 없는 재미난 이야기도 해주셨고요. 저를 아주 환대해주셔서 감격했습니다.”

진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큰형님은 솔직하고 시원시원하신 데다 자네같이 사리에 밝고 성숙한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청 동생, 큰아주버님은 만나봤어?”

상재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 장군님은 아직 뵙지 못했어요. 다른 날 방문해 뵈어도 늦지 않을 거예요.”

“그래, 다른 날 방문하는 것도 좋지. 모두 한 식구니까.”

진약추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바깥에서 여종이 초대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진약추에게 먼저 인사한 여종은 초대장을 상재청에게 건넸다.

“아가씨, 문지기가 받은 초대장입니다.”

진약추의 눈빛이 반짝였다.

“청 동생이 정경성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친해진 친구가 있구나!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누굴까?”

상재청은 초대장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아니에요. 정경성에서 제가 아는 사람은 심부 사람밖에 없습니다. 어디 친구가 있겠어요? 이 초대장은 첫째 부인께서 보내신 거예요.”

“큰형님? 큰형님이 청 동생을 아주 좋아하시는구나. 큰형님이 초대장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거든. 큰형님과도 옛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잘 맞았구나! 조금 질투가 나는걸.”

진약추는 꽤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보다는 아주 기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상재청이 웃었다.

“부인, 또 절 놀리시는군요.”

진약추는 상재청이 들고 있는 초대장을 흘끗 보았다.

“어머, 초대한 날이 바로 오늘이구나! 청 동생, 지금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상재청이 조금 망설이자 진약추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모두 한 가족이니 자네 집에 가는 것처럼 하면 돼. 자네가 머뭇거리면 큰형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고.”

상재청이 망설이며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진약추는 그런 상재청을 은근히 부추겼다.

“청 동생을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말할게. 사실 나는 자네가 도움을 주었으면 해. 자네와 큰형님이 친해지면 대방과 우리 사이의 오해를 풀 수 있을 테니까. 이건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셋째 부인, 그런 말씀 마세요. 심부는 저를 받아주셨어요. 첫째 부인도 속이 넓은 분이니 곧 그런 오해는 풀리겠죠. 부인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설명하고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예요.”

상재청은 감사를 표하며 얼른 말했다. 진약추는 안심하며 자신의 팔찌를 빼 상재청의 팔에 끼워주었다. 상재청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진약추는 상재청의 손을 잡으며 은근히 말했다.

“난 청 동생의 언행이 합리적이란 걸 알아. 이 팔찌는 작고 정교해서 보기 좋지만 아주 비싼 건 아니야. 자네가 금품 따위는 탐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니 너무 귀중한 것을 주어서 부담을 주지는 않을게. 오늘 큰아주버니가 계실지 모르지만, 어쨌든 알맞은 단장으로 실수 없이 뵈어야지. 상씨 일가가 얕잡아 보여서는 안 되잖아? 가문을 먼저 생각하렴.”

겉으로만 보면 진약추는 상재청을 정말 친동생처럼 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잘해주시니 이 은혜를 꼭 기억하겠습니다.”

“모두 한 가족인데 은혜는 무슨. 청 동생, 어서 준비하도록 해. 난 이만 갈게. 지금 눈이 좀 그쳤으니 얼른 이 틈에 외출하고 저녁에 일찍 돌아오도록 해.”

진약추는 상재청의 여종 두 사람에게 세심히 시중들라 분부하고서 떠났다. 진약추가 떠나자 조 유모가 상재청의 초대장을 받아들며 물었다.

“아가씨, 첫째 마님을 보러 가실 건가요?”

“가야지.”

상재청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졌다. 온화하고 우아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진약추를 대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인가 싶게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첫째 마님은…….”

“좋은 사람이야.”

상재청은 작은 연지함을 열어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 연지의 색상은 아주 옅어 입술에 희미한 생기만을 부여했다. 살짝 분홍색이 도는 입술은 아주 단아하고 우아해 보였다.

“좋은 분이라면 안심입니다.”

조 유모가 한시름 놓았다.

“그래, 나도 안심이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상재청의 말은 조 유모에게 말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 *

추수원.

서원에서 돌아온 진약추가 난로를 쬐며 심모를 맞이했다.

“어머니, 요 며칠 어째서 상재청을 자주 만나세요? 어머니를 찾을 때마다 상재청과 만나고 계시던데요.”

“날 왜 찾았느냐?”

진약추가 심모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딸은 아름다웠지만 눈이 너무 높아 그냥 이렇게 두다간 노처녀가 될 터였다. 심모가 여전히 부수의를 사모하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부수의에게 시집 보낼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부수의의 첩실 자리는 가능하겠으나, 심모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 역시 딸을 아끼니 그런 식으로 혼인시키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 심만이 심모의 혼사 문제로 몇 번이나 화를 냈으니 고민이 깊어지고 있긴 했다. 심만이 찾아온 혼처는 높은 지위의 자제이긴 했으나,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아 매번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수방에서 새로운 의상이 나왔어요. 어머니께 어느 것이 나은지 물어보려구요.”

꽃 같은 심모를 보면서 진약추는 골치가 아파졌다.

“꽃다운 의복이 무슨 소용이냐? 넌 이미 아주 예쁘니 꾸미는 것보다 서원 상재청에게 배우는 것이 나을 거다.”

“서원? 청 이모요? 작은 가문 출신이라면서요. 어머니, 그쪽한테 뭘 배울 게 있어요?”

의아스럽다는 심모의 물음에 진약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울 게 아주 많지. 네가 그녀의 능력의 3할이라도 배운다면 난 아주 안심할 게다.”

상재청은 아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진약추 자신은 그 능력을 높이 샀다. 나설안은 사람을 대하는 데는 열정적이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설안과 오랫동안 동서로 지냈지만, 그녀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나설안마저 이렇게 만들다니 상재청의 능력은 자신의 이전 평가를 넘어설 정도였다. 이는 예상보다도 더 좋은 일이었다. 진약추는 심모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며 안타까운 듯 한소리 했다.

“어쨌든 앞으로 그녀에게 많이 배우거라. 좋은 의복을 찾을 시간에. 그게 훨씬 도움 될 거야.”

* * *

장군부.

곡우가 심묘의 머리를 빗겨주며 물었다.

“아가씨, 주인마님의 이름으로 상재청 아가씨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을 마님이 아시면 큰일 나지 않을까요?”

“어머니의 이름으로 초대하는 것과 내 이름으로 초대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어? 모두 한 가족인걸.”

“하지만 아가씨, 왜 아가씨의 이름으로 초대하지 않으신 거예요?”

탁자를 닦던 경칩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심묘가 나설안의 인장을 훔쳐 상재청에게 초대장을 보냈던 것이다. 심묘의 행동에 여종들은 놀라 턱이 빠질 뻔했다. 게다가 나설안을 사칭해 다른 일을 한다면 그래도 걱정이 덜 되겠지만, 몇 번 보지도 않은 상재청을 초청한 건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내가 그녀와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오라고 해서 뭘 하겠어.”

경칩과 곡우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심묘의 말처럼 그녀와 상재청 사이에는 어떤 감정도 없는데 나설안의 인장을 몰래 가져와 초대장을 보냈으니,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재청이 방문했던 날 심묘는 즐거운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더욱이 오늘 심부에는 나설안이 없었고, 따라서 심묘는 상재청을 홀로 접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담은 일찍 쫓아내서 심부에 주인이라고 할 사람은 심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남종이 상재청이 왔다고 전했다.

“이렇게 빨리?”

경칩은 조금 당황해했고 심묘는 살짝 웃었다. 상재청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야심을 전부 숨길 수는 없었다. 전생의 심묘는 황실에 있었기에 심가의 모든 일에 신경을 쓸 수 없어서 상재청의 수법을 미리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심묘는 그녀의 재주가 얼마나 고명한지 찬찬히 뜯어볼 계획이었다.

상재청은 장군부 정당에서 심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종이 가져온 뜨거운 차를 마시며 상재청은 침착하게 장군부를 관찰했다. 장군부는 심부와 달랐다. 심부는 노장군 때부터 풍수를 중요시한 데다 심 노부인의 취향을 반영해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신과 나설안은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 그런지 장군부는 뜰이 넓고 정당도 반듯반듯해 전체적으로 바른 기운과 위엄이 풍겼다. 진열된 장신구도 소박하지만 장엄했다. 처음 왔을 때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나 지금 보니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식은땀이 났다. 상재청은 괜히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자세를 바로 했다.

하인들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고 청소를 했다. 예의가 바른 상재청은 하인들을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차가 거의 식을 때까지도 나설안이 올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상재청은 한 여종을 붙잡고 나설안이 왜 아직 오지 않는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었다.

공손하게 대답한 후 상황을 알아보러 가겠다고 떠났던 여종까지 나타나질 않자, 상재청은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종에게도 몇 번 물었지만 모두 그런 식이었다. 상재청은 나설안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성격을 이미 파악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고 사람을 대할 때 열정적인 성격의 나설안이 어째서 이렇게 자신을 난감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고 가는 여종들은 차츰 상재청이 그 자리에 없는 양 행동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던 상재청이 자리를 일어서려 할 때 심묘가 나타났다.

“청 이모,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옷이 젖어서 말린다고 시간이 지체되었어요.”

당황한 상재청이 얼른 일어났다.

여종을 따라 심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심묘는 비취색 무늬의 우단(羽緞, 벨벳) 피풍의를 입고 손에는 난로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따뜻하다고 느낀 듯 피풍의를 벗었다. 어두운 자주색 옷에는 꽃무늬 자수를 비롯해 화려한 도안이 한가득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짙은 색은 도리어 온몸에서 부귀한 기운을 뿜어내게 했고, 또한 백옥 같은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하늘 위 궁전에서 미소 지으며 걷고 있는 듯 그녀의 표정은 밝고 환했다.

상재청은 현기증이 일었다. 상재청은 진약추와 심모뿐만 아니라 절색이라고 할 만한 여인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심묘만큼 감탄이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설안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오히려 홀로 있을 때 사람을 압도했다.

“심묘?”

상재청은 심묘의 뒤편을 보며 나설안을 찾았다.

“찾으실 필요 없어요. 제가 초대장을 보냈거든요.”

심묘는 살짝 웃었다. 당황한 상재청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묘 소저, 이게…….”

“지난번 청 이모가 너무 급히 떠나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잖아요. 청 이모가 다시 올 거라 했으니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요. 그래서 먼저 초대장을 보낸 거예요. 제 인장을 쓰면 알맞지 않은 것 같아서 어머니의 인장을 썼어요. 절 책망하지 않으실 거죠?”

상재청은 심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온하게 웃고 있는 심묘는 도량이 넓고 대범해 보일 뿐,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상재청이 그녀를 책망한다면 오히려 불리할 것이었다. 상재청은 가까스로 웃음을 띠었다.

“그럴 리가요. 심묘 소저가 예상치 못하게 초대해줘서 기쁘네요.”

상재청은 꼼꼼하게 심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봤을 때 심묘는 냉담하지는 않았지만 다정하다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실례되는 질문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먼저 초대한다? 그녀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상재청은 경계의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정당은 추우니 제 방에 가요. 멀지 않아요. 찬 바람을 견딜 수가 없네요.”

상재청은 심묘와 함께 심묘의 방으로 갔고, 심묘는 여종에게 차와 간식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화로는 세차게 타올랐다. 살짝 열려 있던 창문마저 닫자 방은 아주 훈훈해졌다. 심묘는 차를 상재청에게 건넸다. 상재청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곧바로 표정이 괴이해졌다.

“주단차라고 하는 건데 맛이 아주 쓰고 떫어요. 향도 없죠. 처음이면 잘 마시지 못할 거예요.”

심묘가 웃으며 설명했다. 상재청은 멈칫했다. 상재청은 심묘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손님을 대접할 때 가장 좋은 찻잎을 꺼내는 게 예의였다. 이렇게 쓰고 떫은 차로 대접해 치욕을 주려는 건가 싶었지만, 심묘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맛은 씁쓸하고 떫지만, 건강에는 좋아요. 겨울에 마시면 추위를 쫓고 몸을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모두 무술을 익힌 사람이라 겨울에는 이 주단차를 마시세요. 이후 장군부 사람은 모두 이 차를 마시게 되었구요. 우리 장군 가문에서는 그리 많은 것을 따지거나 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렇지만 청 이모는 학자 가문 출신이니 이런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심묘는 상재청을 바라보며 웃었다. 상재청도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심묘 소저가 농담을 잘하시네요. 상씨 일가는 보통 가문입니다. 주단차는 씁쓸하지만, 확실히 사람에게는 좋아요. 오래 마시면 떫다고 느껴지지도 않고요.”

“억지로 잠시 참는 건 쉬워도 평생 억지로 참는 건 어렵지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재청은 무슨 말인지 몰라 심묘를 다시 쳐다보았다. 심묘의 말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있다고 느껴지니 자기도 모르게 심묘를 노려보았다. 그를 못 본 척하며 심묘가 미소 지었다.

“심부 사람이 청 이모에게 잘해준다면서요?”

“모두 잘해주세요. 아주 친절하셔서 지내기 좋답니다.”

상재청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심묘 역시 상재청을 보며 웃었다.

“추측하건대 청 이모와 셋째 숙모가 마음이 아주 잘 맞을 것 같네요. 셋째 숙모는 글재주가 좋으시죠. 셋째 숙부가 숙모를 깊이 아끼시는 이유도 바로 그거고요. 이모도 알겠지만 셋째 숙부가 숙모에게 잘하시니 심부의 대부분 일을 숙모가 하고 계셔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셋째 숙모에게 아들이 없네요. 아들이 있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상재청은 심부에 여러 날 머물렀기에 삼방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 때문에 심 노부인과 진약추가 매번 다투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나 심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는 예상을 못하고 있었다. 혼인하지 않은 아가씨인 심묘와 이런 일을 이야기하기란 조금 곤란했다. 심묘의 표정은 무척 자연스러워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싶었다. 상재청은 심묘가 총명한 것인지 천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셋째 부인은 어질고 착한 분이시니 후에 반드시 자손이 가득할 거예요.”

상재청이 적당한 말을 찾아 대꾸했다.

“사람들은 우리 대방과 삼방을 자주 비교해요. 아버지는 무관, 숙부는 문관이지만 두 분 다 주모만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부에는 다행히 오라버니가 있어요. 오라버니도 혼인할 나이이니 정경성의 좋은 집안과 혼인하면 형수가 생기고 아이도 생겨 화기애애해질 거예요. 하지만 삼방은 우리 대방과 같은 상황이 아니죠.”

심묘가 찻잔을 들어 수면에 떠오른 찻잎을 살며시 불었다. 상재청은 심묘의 표정이 득의만만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가족의 위세를 자랑하며 삼방을 괄시하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곧 상재청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장군부에서 나설안은 계략을 쓰지 않는 사람이니 심신의 첩 자리를 꿰차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장군부에는 심구가 있었다. 심구는 심신과 나설안의 장자로 나이도 어리고 전도유망했다. 그는 조만간 힘 있는 처가를 얻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결국 이 가문에 들어온 자신은 무언가 쟁탈하지 않으려 해도 억압을 받을 터였다.

상재청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본 심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전생에 자신이 부수의에게 시집을 가고 심구가 죽은 상황에서 상재청은 심신의 첩이 되었다. 그러니 심부에서 상재청을 위협할 것이 전혀 없었다. 순풍에 돛단 듯한 상황인데 상재청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구가 멀쩡했다. 장자가 멀쩡히 살아 있으니 상재청이 대방의 실질적인 주모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상재청은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이니 득실을 따져 어떤 길이 좋을지 선택할 것이었다.

심묘는 간식을 하나 집으며 웃었다.

“셋째 숙부는 정말 안타까워요.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 셋째 숙부가 가장 영리하다고 칭찬을 자주 하셨대요. 풍채가 당당하고 사경(四經, 시경·서경·역경·춘추)의 수준이 대단히 높다고요. 숙부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숙부를 닮아 총명했을 거예요. 애석하게도 삼방에는 심모 언니만 있죠. 심모 언니는 곧 시집을 갈 테니 언니가 출가하면 삼방이 너무 쓸쓸해질 거 같아요.”

상재청은 심묘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심신과 심만의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본부인 한 명만 둔 것도 그렇고 둘 다 애처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모는 심묘보다 나이가 많았다. 심모는 곧 출가할 테고, 아들도 없으니 삼방은 대방보다 좋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청 이모와 셋째 숙모는 성격이 비슷해요. 표정과 태도도 거의 비슷하니까요. 온유하고 시문을 많이 아니 누가 보면 자매라고 여길 거예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청 이모가 숙모보다 더 출중한 것 같아요. 청 이모가 훨씬 더 젊잖아요.”

심묘는 상재청을 탐색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재청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올라가 있었다. 이미 심부에서 진약추와 자신을 비교하는 소리가 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상재청을 진약추처럼 수려한 재녀라고 했다.

그러나 심묘의 말처럼 재능 있는 미인도 나이가 들면 용모가 시들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진약추보다 상재청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진약추는 높은 학자 가문의 적녀였던 터라 하인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했다. 이와 달리 어려서부터 평민 집에서 성장한 상재청은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딜 수 있기에 하인들에게 잘 대했다. 고개를 숙일 때를 아는 데다 사람의 안색을 살피기도 하니 다들 상재청을 칭찬했다. 물론 상재청 자신도 진약추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묘는 씁쓸한 주단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벌꿀을 맛본 듯 달콤한 미소를 드러냈다. 상재청은 스물여섯이었다. 정경성에서 이 나이의 여인들은 거의 대부분 후처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배에서 나오지 않은 아이를 키우며 계모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더 좋은 생활을 찾아온 상재청이 그런 후처 생활에 만족할 리 없었다.

게다가 상씨 일가는 작은 가문이었다. 심가의 명성에 기댄다 해도 높은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재청에게 심묘는 심만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주었다. 심신에게 적자인 심구가 있음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었으니, 상재청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장기를 살려 스스로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할 것이었다.

심묘가 슬쩍 살펴보니 상념에 빠진 듯한 상재청의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음이 어지럽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말에 여러 생각들이 샘솟는 중일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재청은 자만심이 넘치는 여자이니 진약추를 좋아하는 심만이 진약추보다 뛰어난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다고 결론을 낼 터였다.

심묘의 예상대로 상재청은 심묘의 보이지 않는 제안에 그대로 넘어갔다. 자신이 심묘의 말을 듣고 속으로 따져보니 거친 무장인 심신보다 겸손하며 품위 있는 문신인 심만이 훨씬 나았다.

한참 생각하던 상재청은 어째서 자신이 진약추와 다투는 계략을 세우게 됐을까, 의문이 들었다. 사실 상재청은 처음에는 심신이 마음에 들었고, 진약추에게 심신을 탐색하라는 말도 들은 차였다. 처음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심묘가 그녀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상재청은 심묘를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이 그치고 나타난 태양이 심묘의 옥 같은 옆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심묘의 목덜미는 섬세했다. 심묘는 찻잔을 들고 차를 천천히 홀짝였다. 일상의 모습에서도 위엄이 가득했다.

상재청은 얼른 다시 눈을 내리떴다. 심묘가 우둔하거나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괴물이라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지난번 심묘가 자신에게 몇 번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이미 심묘가 자신의 야심을 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이번 초대 역시 다 알고 한 거라면…….

심묘가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청 이모, 왜 땀을 흘리세요? 방이 더운가요?”

겨우 정신을 차린 상재청은 간신히 심묘를 보며 웃었다.

“네. 그런가 봐요.”

“창문을 닫아서 답답한가 봐요. 청 이모, 제 말이 맞지요?”

심묘는 경칩에게 창문을 열도록 분부하며 상재청을 보고 웃었다.

“심묘 소저의 말이 맞네요.”

가까스로 대답한 상재청은 심묘의 웃는 얼굴을 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욕망을 깊숙이 숨겼는데도 심묘는 단 한 번에 모든 계략을 알아차렸다. 괴물의 본색을 일찍 알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장래 심구의 부인보다 더 큰 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심신의 첩이 된 후에야 눈치챘다면 생활은 몹시 고달파졌을 것이다.

심묘는 활짝 웃었다. 상재청에게 심신의 첩이 되어 들어오고 싶다면 자신을 먼저 상대하라고 일러준 셈이었다. 이에 겁을 먹은 상재청은 가장 유리하고 온당한 방법을 찾을 것이었다. 계산에 밝은데 굳이 모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으리라.

이후 상재청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일어섰다. 심묘 역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상재청이 떠나자 곡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상가 아가씨는 어째서 괴상하게 행동하실까요? 무언가 놀라 자리를 피하려는 것 같은데 누가 실례라도 저질렀을까요?”

“하인들에게 오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거라. 청 이모는 장군부에 온 적 없는 것이다. 기억해라.”

심묘의 엄한 분부에 곡우와 경칩은 바로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심묘가 상재청을 왜 마음에 두는지는 몰랐으나 심묘가 하는 일은 늘 온당하니 그들은 토를 달지 않았다.

방에 홀로 남은 심묘는 거울을 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상재청으로 하여금 계획을 변경하여 진약추가 화를 입도록 만들었다. 진약추가 너무 미웠기 때문이다. 전생의 진약추는 상재청과 심신의 혼서를 ‘우연히’ 발견한 다음부터 말끝마다 상재청이 가엽게 되었다며 그녀를 위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니 자신은 상재청이 심신을 노린 것은 진약추의 탓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상재청과 정말 똑 닮아 자매 같은 사람은 모친 나설안이 아니라 진약추였다. 사이 좋은 자매라면 서로 아름다움을 겨뤄도 되지 않을까.

심묘는 심만이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 볼 예정이었다. 심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만약 진약추가 가만히 당하지 않고 상재청에게 손을 쓴다 해도 심묘와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할 것이었다. 그러나 상재청도 쉽게 호락호락 당할 여인은 아니었으니 적어도 깊은 상흔은 남기리라.

하지만 모든 게 흡족하지는 않았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에 상재청이 어떻게 나설안을 죽음으로 몰았는지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심묘는 온종일 상재청과 관련된 일을 계산하고 비교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 일을 생각하느라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걱정해 조금 피곤하다고 둘러대야 할 정도였다. 나설안은 그녀에게 달콤하고 뜨거운 우유를 마시라고 하며 일찍 들어가 휴식할 수 있도록 했다.

심묘가 침상에 눕자 경칩과 곡우가 이불을 여며줬다. 심묘의 호흡이 점점 안정되었다. 깊은 밤, 어둠이 온 정경성을 덮었다.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뜨거운 햇살에 심묘는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공기도 습해 한층 더웠다. 겨울이 아니라 갑자기 여름이 된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심묘는 머리가 유달리 아팠다. 잠에서 어느 정도 깨자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쓴 약 냄새도 났는데, 익숙한 냄새였다.

방에는 여종이 한 명도 없었고, 한 여인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심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넓은 방에 있는 모든 창문은 꽉 닫혀 있었다. 더운데 창문마저 꽉 닫혀 있으니 숨을 쉴 수 없었다. 쓴 약 냄새 때문에 가슴이 더욱 답답했다. 심묘가 창문을 열려고 할 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열어줘. 가슴이 아주 답답해.”

익숙한 목소리에 놀란 심묘는 침상에 누운 여인을 쳐다보았다. 초췌한 얼굴을 한 여인은 짙은 살구색 면포로 만든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더운 탓인지 머리와 가슴 부위가 땀에 젖어 있었다. 안색은 매우 어두웠고 눈빛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었다. 나설안이었다. 그러나 그녀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낯선 모습이었다. 심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모친이 이렇게 초췌해 보였던 적은 없었다.

“언니, 누워 있어요. 이런 날씨에 감기 들면 좋지 않아요.”

침상 곁에 앉은 상재청이 나설안을 위로했다. 상재청은 수수한 연청색 옷차림이었지만 옷감은 귀해 보였다. 학자풍으로 단장한 젊은 여인은 생기 없는 나설안과 선명히 대비되었다. 상재청이 나설안의 손을 잡았다.

“언니, 곧 좋아질 거예요.”

“난 틀렸어. 유산 후부터 진작 가망이 없었어. 약초만 낭비했으니 유감이구나.”

“언니, 절대 그런 말 말아요. 정왕비마마께서 언니의 이런 생각을 아시면 얼마나 괴로우시겠어요.”

“교교.”

나설안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심묘는 나설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듯, 뻗은 손이 그대로 나설안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교교가 날 미워해. 하지만 내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 심가는 정왕 전하와 함께할 수 없어. 정왕 전하가 교교는 속일 수 있어도 나는 못 속여. 교교는 지금 나와 그이를 미워해 만나기도 싫어하지. 교교의 장래를 어찌하면 좋을까? 길이 보이지 않아, 난.”

나설안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몹시 상심한 듯 침묵했다가 갑자기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고개를 드니 손수건에 검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상재청이 나설안을 위로했다.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왕비마마는 지금 잠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정왕 전하가 잘해주시면 마마도 곧 깨닫게 되실 거예요. 게다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원한이 어디 있겠어요. 이 미움도 곧 지나갈 거예요.”

심묘는 분노하며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자신은 심가가 적극적으로 부수의를 돕길 바랐지만, 심신이 내키지 않는 눈치라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심신과 나설안을 미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상재청의 말은 위로 같았지만 실은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숨이 간당간당한 나설안이 하나 남은 딸조차 자신을 미워한다는 말을 들으면 상심할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때, 심묘의 눈앞이 환해졌다. 눈을 깜빡이며 상재청의 맞은편을 보니 금사를 아낌없이 쓴 연한 녹색 의복을 입은 여자가 보였다. 그녀는 만사가 귀찮고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젊고 수려한 생김새였지만, 너무 화려한 치장이 과해 보였다. 그 여자는 심묘, 바로 자신이었다.

상재청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정왕비마마, 언니를 화나게 하지 마세요. 병권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잖아요. 심 장군님과 언니는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걸 거예요.”

“모두 한 가족이에요. 내가 정왕부에 시집을 갔어도 반은 심가 사람인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전하를 외간 사람처럼 보는 건가요? 난 알아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 좋아하지 않아서 나만 정경성에 버려두고 상관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이젠 전하까지 그렇게 대하는 거라구요.”

“무슨 말이에요? 아니에요. 심구 공자처럼 대하시지는 않는대도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나이 어린 심묘가 거만하게 말했다.

“난 모르겠어요. 모두 상 이낭이 가장 똑똑하다더군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력을 전하께 빌려주도록 나 대신 방법을 찾아줘요.”

상재청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언니는 마마를 아주 아낀답니다. 만일 마마께서 힘들다고 호소하시면 언니는 무조건 승낙할 겁니다. 어린애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건 제 허튼소리일 뿐, 마마께서 잘 생각해보셔야지요.”

심묘의 안색이 분노로 검푸른 것을 봐놓고는, 말린다고 하는 말이 어린애처럼 소란을 피우라니. 충동질이 분명했다.

전생에 나설안은 임신 사실을 알자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노산이니만큼 태아가 안정된 후 알리려 했다. 그런데 중도에 변고가 생긴 것이다. 부수의는 심신에게 병력을 빌리려 했지만, 심신은 당연히 이를 원치 않았다. 심묘는 상재청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상재청은 중간에 술수를 부려 심묘가 나설안에게 분노를 표출하도록 만들었다.

심묘는 나설안이 언제 유산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자신이 생각 없이 한 말이 실의에 빠져 있던 나설안에게는 목숨이 끊어질 만큼의 고통을 주었을 터였다. 자식이 자신을 미워하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심묘는 나설안에게 상처를 입혔고, 부수의가 자신을 냉대한다며 그녀의 걱정을 키웠다. 심신이 정경성에 없으니 상심과 걱정을 풀 곳도 마땅치 않았으리라. 그런 데다 연거푸 자식을 잃으면 아무리 씩씩한 사람이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심묘는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을 쓴 상재청의 얼굴을 할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풍경이 흔들렸다. 이번엔 뜰 안이었다. 뜰은 아주 풍아해 보였다. 상재청은 초록색 긴 치마를 입었고 여종이 옆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더운 여름이었지만, 부채를 찬물에 적신 듯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마님은 더 견디지 못할 거랍니다. 의원이 며칠 안 남았다고 했습니다.”

상재청의 유모가 곁에서 말했다.

“시중 잘 들어. 구실 주지 말고.”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드디어 고생에서 벗어나시는군요.”

“맞아, 몇 년 동안의 고생에서 이제야 벗어나는 거야.”

상재청이 그릇에 담긴 포도를 달게 맛보았다.

“그러나 주인어른의 속은 알 수 없네요.”

“장군님은 언니를 깊게 사랑하니 당연히 상심할 거야.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나는 대방의 유일한 주모가 될 텐데. 나머지는 상관없어. 장군님이 날 인정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면 됐어.”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마님이 오래 버틸 줄 알았기에 기쁩니다. 좋은 날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상재청의 웃음에 유모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재청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식들을 연거푸 잃어 마음이 상했으니 당연하지. 거기에 심묘를 종일 걱정한 걸 생각하면 지금까지 견딘 것만 해도 명이 긴 셈이야. 사실 나설안은 좋은 운명을 타고났어. 이런 좋은 집안에 시집왔고 후원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심묘 같은 딸을 낳아서 그 운도 다 끝나버렸지.”

심묘는 가슴이 저며지는 듯 고통스러웠으나 상재청이 말하는 것을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부수의도 대단해. 심묘에게 뭐라고 말만 하면 그대로 믿으니, 수완이 정말 대단해. 심묘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 보게 했잖아. 부모도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야. 심묘가 아둔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행운을 얻을 리 없었겠지.”

뜨거운 여름 날씨임에도 심묘의 마음은 얼음 굴에 들어간 것처럼 차디찼다.

“심묘는 정왕부에서 보낸 연말연시 음식에 누가 농간을 부린 줄도 모르겠지. 나설안은 아둔한 딸을 너무 아껴서 정왕부에서 보낸 자양 음식을 전부 먹었어. 딸이 보낸 것이 독약인 줄도 모르고. 그날 너도 봤을 거야. 심묘가 나설안에게 한 숟가락씩 약을 먹인 거. 나설안은 기뻐하며 독약을 다 먹었지.”

심묘는 몸을 떨었다. 자칫 쓰러질 뻔했다. 당시 심묘는 부수의가 심신을 설득하는 것을 돕기 위해 나설안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그래서 한약재로 자양 음식을 만들라 시키고 나설안을 보러 간 것이었다. 나설안은 그간 소원하던 딸이 직접 권하니 감격하며 한 숟갈도 남기지 않고 그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런데 그 음식에 누군가 농간을 부렸다니.

나설안은 딸이 자기를 해칠 거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고 심묘 자신 역시 음식이 잘못된 것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갑자기 너무 추웠다. 머릿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괴로웠다. 그때의 자신은 악랄하고 어리석었다. 용서받을 자격도 없었다. 어머니를 저승길로 밀었으니 불효 중의 불효였다.

“나설안은 평생 강인했지만 결국 딸의 손에 숨을 다했지. 난 심묘에게 고마울 뿐이야. 자기가 나서서 모친의 목숨을 내게 바친 거나 다름없거든. 덕분에 앞으로 심부 후원은 모두 내 말에 따를 거야. 나설안은 평생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심묘 같은 딸을 낳았는데.”

멀리서 여종 둘이 급하게 달려왔다. 여름 태양 아래 그림자가 아주 길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고, 축축한 땀방울이 얼굴에 가득했다.

“상 이낭, 주인마님이 방금 숨을 거두셨어요.”

“마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마님께서 돌아가셨어요!”

* * *

콰르릉, 천둥소리가 천지 사이에 울렸다. 번개는 정경성을 환하게 비췄다.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심부의 울음소리는 드러나지 않고 전부 묻혔다.

온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심묘가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내 잘못이에요! 내 잘못이에요! 정왕 전하를 좋아하지 말았어야 해요! 더는 좋아하지 않아요! 내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날카로운 번개가 침상에 누워 있는 심묘의 창백한 얼굴을 불현듯 비추었다. 그녀의 얼굴은 처절한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침상 곁에는 청색 장포를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심묘가 악몽 속에서 발버둥 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탄식하며 심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심묘는 무서운 악몽 속에서 처참한 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버둥 쳤다. 팔다리라도 휘저어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뻔히 뜨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만회할 수 없는 뻔한 결과.

자신이 바로 살인자였다.

콰르릉, 천둥이 낮고 무겁게 울렸다. 초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천둥과 번개가 사방을 에워쌌다.

꿈속의 심묘는 조용히 앉아 크게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를 잡았다. 누군가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그 손은 안심하라는 듯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상대방의 품에 기대었다. 온몸에서 땀이 났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 사람은 멈칫했지만 심묘를 품에 부드럽게 안았다. 심묘는 몸을 떨다가 견딜 수 없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순간 그의 몸이 경직되었으나 그는 계속해서 심묘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천둥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만 들렸다. 심묘의 마음도 점점 평온해졌다. 그녀는 깨물고 있던 입에 힘을 풀었다. 코끝에 차가운 물건이 닿았는데, 단추인 것 같았다. 심묘는 천천히 품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사람은 일어나 등불을 밝혔다. 수려한 얼굴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우아하고 오만한 사경행이었다. 등불 아래 그는 심묘를 은은하게 바라보았다.

심묘의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두려운 악몽에 깊이 빠져 깨어날 방법이 없었다. 단순히 꿈이 아니라 정말 일어난 일 같았다. 자신은 밝혀진 진상에 놀라고 의아해 잠시 정신을 잃었고, 따뜻한 손이 느껴지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은 것처럼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줄곧 숨겨둔 비밀에 금이 간 것 같았다. 사경행은 영리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통찰력이 대단하니 작은 단서에서도 무언가 추측하고 결론을 내릴 것이었다.

“너 무슨 꿈을 꾼 거야?”

사경행이 등불 안 심지를 잘랐다. 간단한 동작임에도 그가 하니 등불 아래 아름다운 윤곽이 사람의 마음과 눈을 즐겁게 했다.

“악몽을 꿨을 뿐이에요.”

심묘가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불편한 것 같았다. 사경행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두려울 때가 있군.”

심묘는 순간 분노가 일어 사납게 대꾸했다.

“전 예왕 전하가 아닙니다. 생존은 고생스러운 일이니 당연히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경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름다웠다. 아주 좋은 모양의 눈은 가벼운 듯 진지해서 그가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게 했다. 여인들은 이 매력적인 눈에서 익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가을 연못처럼, 검은 옥같이 깊었고, 그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게 했다.

“두려울 것 없어. 단지 꿈일 뿐이야.”

심묘는 코끝이 시큰했다. 괴로움이 다시 솟구쳤다. 생을 반복하면서 감정을 잘 억제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애정과 증오를 덮어 숨길 방법이 없으면 짧게 폭발시킨 후 아주 깨끗이 정리했다. 하지만 오늘밤은 꿈 때문인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빗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사경행의 눈빛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마음이 약해졌다. 심묘는 큰 소리로 울고 싶었다.

눈앞에 불꽃이 일렁이자 무언가 얼굴에 닿았다. 사경행이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심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참한 울음을 토해냈다. 사경행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손짓은 가볍고 부드러웠고, 눈빛은 진지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니 무심함이 사라지고 온화함만 남았다. 형제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했다. 심묘는 그의 눈빛에 넋을 잃었다. 눈물을 다 닦은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울지 마.”

“고마워요.”

시선을 옮긴 심묘가 던진 감사의 말에서는 이전처럼 비꼬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온화한 말투였다.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의아해진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그 손길을 쳐내는 손이 없었다.

“꿈에서 뭘 봤기에 말끝마다 심 부인을 외쳐? 뭘 잘못했지?”

놀란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잠꼬대를 했나요?”

“네가 심 부인께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했어. 꿈속에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꿈일 뿐입니다.”

심묘는 사경행의 말을 듣고 안도해 적당히 둘러댔다. 심묘가 긴장을 푸는 것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손가락을 조금 구부렸다. 심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뭘 하러 온 거예요?”

심묘의 말에는 노기가 없었다. 심묘 자신도 느끼지 못했지만, 사경행이 야밤에 규방으로 찾아오는 일이 습관이 된 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경행은 소매 안을 더듬어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네게 선물을 하나 주려 했지.”

심묘는 영문을 모르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편지를 열어보고는 놀라고 말았다. 편지에 빽빽하게 적힌 것은 상재청과 관련된 유주의 일이었다.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그녀에게 버림받았다는 내용도 들어가 있었고, 그녀의 비밀을 낱낱이 밝히고 있었다. 심묘는 편지 내용이 아니라 사경행이 이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었다.

“놀란 것 같지 않네. 알고 있었구나.”

심묘는 편지를 치웠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일에 예왕 전하는 절대 손대지 마십시오. 제가 할 겁니다.”

사경행은 잠시 심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내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했구나.”

심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방이 조금 좁은 것 같았다.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사경행의 옷자락에 닿았다. 그의 옷감은 아주 화려했고 금실로 수놓은 무늬는 섬세했다. 사경행은 무언가 탐색하는 듯한 심묘의 시선을 알아챘다. 심묘는 고개를 들어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세요.”

사경행이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악몽 속에서 꺼내주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경행은 조그만 조짐을 보고도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오래 있게 되면 그에게 전부 먹혀 찌꺼기도 남지 않을 터였다. 심묘는 자신의 비밀을 다른 사람이 알길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경행의 신분도 민감했다. 지금은 사경행이 적의를 드러내지 않지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법.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넌 내게 이 비를 뚫고 돌아가라는 것이냐?”

빗소리는 여전히 천둥소리를 동반해 시끄러웠다. 한밤 내내 그치지 않을 성싶은 요란함이었다. 그의 말에 화가 난 심묘는 자칫 조금 전의 애통함을 거의 잊을 뻔했다.

“혹시 예왕 전하는 이곳에서 묵으려고 하십니까?”

“좋은 생각이군.”

“사경행!”

심묘가 낮게 외쳤다.

“넌 내 아명을 내키는 대로 부르는구나. 자거라. 난 비가 그치면 가마.”

사경행은 심묘의 눈물을 닦아준 손수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심묘는 초조했다. 다정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모두 사라지고 공기는 날카로워졌다. 다 큰 아가씨가 잠자는 모습을 낯선 남자가 바라보는 일은 없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기가 찼다.

“예왕 전하가 이곳에 계시면 전 잠을 못 잡니다.”

심묘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상재청의 등장으로 생긴 우울함은 사경행 덕분에 많이 흩어져 심묘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사경행이 손을 내밀어 심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심묘의 눈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천천히 말했다.

“분명히 보거라. 나는 황족의 혈통이니 용의 기운을 누를 수 있다. 내가 네 방에 있으면 요괴는 감히 오지 못하니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심묘는 화를 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사경행의 손에서 힘껏 벗어났다.

“그러면 예왕 전하께 감사해야겠네요.”

“그렇지.”

심묘는 다시금 사경행을 쏘아보았지만, 기분은 점점 나아졌다. 사경행은 다른 일은 묻지 않았다. 그가 정말 추측하지 못한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다행이었다. 지금은 그까지 상대할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경행은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 발을 끌어 빗물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그리고는 침상과 멀지 않은 탁자에 앉았다. 손이 가는 대로 책을 들고 앉는 모양을 보니 책을 보려는 듯했다. 사경행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내가 여기 있으니 넌 안심하고 자도 된다.”

심묘는 입을 오물거리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 찬 바람과 천둥소리가 거셌다. 심묘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얼굴만 드러냈다.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사경행에게 향했다.

사경행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길쭉하고 다부진 몸매가 돋보였다. 그는 탁자 위의 아무 책이나 집어 읽는데도 매우 진지해 보였다. 노르스름한 등불 아래 출중한 그의 옆얼굴은 평안하며 온화해 보였다. 그의 그림자는 모든 비바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그와 자신이 서로 신뢰하는,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사이 같기도 했다.

사경행은 사고가 깊고 술수가 냉정하며 잔혹했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남자였다. 임안후부의 소후야일 때는 결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해 천하를 자기 발아래 뒀으며, 이제는 예왕이 되어 명제의 황실을 우롱하기도 했다. 가볍고 짓궂기도 했지만 손바닥으로 구름과 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다. 그러나 심묘 자신의 생각만큼 그렇게 무정하지는 않은지도 몰랐다. 심묘는 창밖의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온갖 걱정, 근심, 고뇌, 아픔을 부드러운 불빛 아래 내려놓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소리는 한참 뒤에야 멈췄다. 등불의 기름이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촛불이 곧 꺼질 것처럼 흔들렸다. 사경행은 읽던 책을 덮고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심묘는 평안히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평소의 단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 나이다운 치기를 벗지 못한 어린 모습이었다. 심묘는 아직 열일곱 살, 어린 아가씨였다. 평범한 열일곱 아가씨라면 어느 댁 공자가 잘생겼는지, 어느 댁 향낭이 좋은지 따위에 관심이 많을 터였다.

사경행의 시선은 조금 복잡한 빛을 띠었다. 처음 심묘를 봤을 때, 그녀의 모습은 나이와 다르게 노련했다. 심가가 직면한 처지는 매우 복잡하지만 노련하고 진중한 심묘는 지금까지 허둥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줄 알았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던 사람처럼.

심교교. 그녀의 아명처럼 애지중지 자랐을 텐데, 보이는 태도며 행보가 온갖 핍박 속에서 성장한 수완가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방금 그녀가 악몽에서 깨어나 드러낸 절망은 사람을 전율시키기 충분했다.

심묘는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온몸을 떨었다. 아주 두려운 일을 겪은 듯했지만 이내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고통에 울부짖은 게 없던 일인 양 시시각각 자신의 굳건함을 드러내려 했다. 적에게 상처를 보이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경행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은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심묘를 만날 때마다 늘 조금의 여지를 남겼다. 떠올려보면 처음 심묘를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 모든 것을 양보했다. 그녀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강한 척하니,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보기 위해 비가 그치지 않아서 못 간다고 핑계를 댄 것도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이불을 꼼꼼하게 살펴준 뒤 방을 떠났다. 심묘는 속눈썹을 조금 움직였으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 * *

장군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주택은 예왕의 소유였다. 사경행이 장군부에서 나오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철의와 남기가 서둘러 뒤를 쫓았다.

“궁중 초대장을 새로 받아.”

“주인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사경행은 당황한 철의를 보았다.

“생각이 바뀌었다.”

철의는 사경행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의심스러웠다. 그 초대장은 명제의 황자가 보낸 것인데, 그동안 명제의 황자나 진국의 태자와 엮이기 싫다며 이런 초대를 줄곧 거절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간다고 하니, 철의는 주인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사경행의 미간 사이에 차가운 기운이 보이니 속이 더욱 답답했다.

사경행의 눈빛은 차가웠다. 심묘는 악몽을 꾸며 나설안뿐 아니라 정왕 부수의도 언급했다. 더는 부수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 사경행의 한쪽 입꼬리가 비꼬듯 올라갔다. 좋아한다거나 좋아했다는 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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