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정경성은 급격히 추워졌다. 어젯밤의 큰비로 하룻밤 사이에 한겨울이 된 듯했다.
“뜰 안의 화초를 들여놓는 걸 깜빡했어요. 하룻밤 새 전부 시들었네요. 정성 들여 키웠는데, 애석하네요.”
진약추가 심만의 옷을 정리하며 밤새 내린 큰비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시하는 진약추가 키우던 화초들은 유달리 희귀한 품종이었다. 심만은 정신을 딴 곳에 팔며 진약추를 바라보지 않았다. 진약추는 그런 그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대인,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정신을 차린 심만이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심모가 혼인해야 하는 나이임을 생각했소.”
“저도 압니다. 심모에게 적당한 인물을 물색 중인데, 아직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흐리멍덩한 집안에 심모를 보낸다면 대인도 마음이 아프실 겁니다.”
진약추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만이 처음으로 그녀의 얼버무림에 넘어가지 않고 정색했다.
“이미 오래 물색했잖소. 심모가 열여섯이 된 후로 2년이나 지났다오. 다른 집안 아가씨는 출가하지 않으면 정혼이라도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기만 하면 후에 적합한 상대를 찾기 더 어려울 거요. 며칠 전 내가 당신에게 일러준 집안들도 모두 좋은 집안이오. 지위는 물론이고 집안의 형편도 좋고 걱정거리도 그다지 없으니 심모가 시집가도 손해 보지 않을게요.”
“그렇긴 하지만, 심모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약추는 간신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심만이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2년 동안 그 아이는 제안을 모두 거절했소. 당신도 어미로서 방임했고. 심모와 당신의 눈이 너무 높아. 이렇게 가다간 우리 일가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거요.”
심만의 시선이 의미심장해서 진약추의 마음이 일렁였다. 심모가 매번 혼처를 거절하니 심만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의혹이 생길 터였다. 그의 의혹이 커져 심모가 부수의를 사모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집안들은 우리가 인척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곳들이오. 심모가 다른 생각하지 않도록 하시오. 착실하게 시집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말이오.”
심만은 단호했다. 진약추는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심모가 부수의를 흠모하는 사실을 이미 심만이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모가 그리 간단히 마음을 접을 리 없었다. 심모의 성격은 모친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했을 때 심모 역시 부수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심묘를 미워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심묘가 그를 좋아하지 않으니 심모는 더욱 사심을 버리지 못할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다른 사람과 혼인하라 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걱정스러운 진약추는 심모를 위해 호소했다.
“하지만 대인, 심모는 아직 어려서 혼인은 급하지 않습니다. 대인도 심모를 아끼시니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심만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진약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실망스러움이 가득했다.
“부인은 항상 문제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소. 그런데 어째서 이번 일은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심모의 마음만 생각하는 게요? 정왕 전하는 보이는 것처럼 쉬운 상대가 아니오. 대방이 심부에 있을 때는 병권이 있어 정왕 전하가 조금은 두려워하셨을 수도 있소. 그러나 지금 심부에는 대방이 없소. 나와 둘째 형님은 모두 문신이란 말이오. 내 벼슬길은 순탄하지만 정왕 전하는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는 자리지. 정왕 전하는 반드시 그에게 이득을 주는 처가와 혼인하실 거요. 그러니 어떻게 심모를 정처로 삼겠소? 잘해야 이낭에 불과할 거요. 심모가 그의 환심을 얻어도, 이낭이 어떻게 정실과 투쟁하겠소? 그때는 심모가 손해를 볼게요.”
진약추는 식은땀을 흘렸다. 여태 황위 쟁탈에서 부수의가 우세하지 않기 때문에 심만이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만은 부수의가 보통 남자가 아니며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심만의 말대로라면 이런 남자의 마음을 얻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설령 그가 진심이라고 해도 눈을 빤히 뜨고 하나뿐인 딸 심모가 다른 여인의 아래로 들어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랬군요. 소첩의 생각이 세심하지 못했습니다. 대인은 늘 심모를 생각하셨는데, 전 대인을 탓했네요……. 소첩이 잘못했습니다.”
심만은 탄식했다.
“당신을 탓할 수 없소. 심모는 이전보다 교만해졌으니 잘 단속해서 앞으로 일어날 말썽을 줄이시오. 정경성 내 좋은 집안 자제는 내가 먼저 정리해 그대에게 주리다. 당신이 골라 후일 심모에게 상대를 보러 가게 합시다. 정말로 더는 지체할 수 없소.”
진약추는 심만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에 간 심만은 진약추에게 책자를 보냈다. 진약추는 세세히 들여다본 뒤 적당해 보이는 사람의 이름에 표시했다. 조만간 심모와 함께 이 사람들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책자에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추수원 뜰을 청소하는 여종이 몰래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 * *
붓을 들은 심모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림 위로 먹물이 길게 그어졌다. 멋진 푸른 하늘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에 신경 쓰지 않고 격분하며 여종에게 캐물었다.
“뭐라고? 어머니가 내 혼처를 정하신다고?”
“아가씨, 마님께서 이미 몇 사람을 고르셨습니다. 곧 서신을 보내 며칠 후 아가씨를 데리고 함께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여종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길!”
격분한 심모가 붓을 집어던졌다. 부드럽고 우아한 가면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심모의 분노에 주위 여종 모두 크게 숨을 쉬지 못했다. 심모는 연약해 보였지만 하인들을 무시했고, 그들을 대할 때 조금도 자비롭지 않았다.
심모는 초조한 표정을 드러냈다. 자신은 이미 열여덟 살이었다. 정경성에서 열여덟 살은 충분히 출가할 수 있는 나이며, 출가하지 않아도 정혼 정도는 하는 나이였다. 더욱이 자신은 매우 재치있는 재녀였고, 용모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총명하고 어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광문당에서도 최선을 다한 게 그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는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지금까지 정혼조차 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부수의만을 원하고 원하기 때문이었다.
정왕 부수의, 그는 아홉 황자 중 가장 어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비를 책봉하지 않은 황자였다. 부수의에게 첫눈에 반한 심묘처럼 심모 역시 그에게 미혹되었다. 부수의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존재였다. 그는 다른 황자들과 비하지 못할 만큼 출중했다. 황제를 제외하면 명제에서 가장 존귀한 남자였다. 심모는 오직 자신만이 부수의와 어울린다고 여겼다. 그래서 심묘가 염치도 없이 부수의를 사모한다고 밝혔을 때, 심모 스스로가 모욕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수의는 심묘에게 매우 냉담했다. 더욱이 심묘와 부수의 사이에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사실 부수의가 심신의 병권을 얻기 위해 심묘와 혼인할 수도 있다는 심만과 심귀의 대화를 몰래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자신은 오랫동안 불안해했다. 심묘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랄 정도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진작 부수의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왜 부모가 자신을 핍박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겠어. 난 시집 안 가! 시집 안 간다고!”
심모가 붓과 먹, 종이가 있는 탁자 위를 거칠게 쓸어버렸다.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여종들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그녀를 설득하려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운원. 누군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채운원은 번화했던 2년 전보다 많이 적막했다. 임완운이 죽은 데다 심귀가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자 대로한 심 노부인은 심귀에게 다른 여인을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귀는 자포자기했다.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 부에 있으면 답답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청루를 전전했다. 이에 채운원의 여인은 여종들을 제외하고 만 이낭과 심동릉 두 사람뿐이었다.
심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니 삼방처럼 대를 이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혈육이라곤 서녀 심동릉만 남은 상태이니, 하인들은 더는 적서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만 이낭, 심동릉,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대했다.
“바깥이 요란한데, 무슨 일이냐?”
바느질을 하던 만 이낭이 고개를 들었다. 2년 동안 고생 없이 지낸 만 이낭은 당당해 보였다.
“이낭, 셋째 마님이 혼처를 고르는 것을 알게 된 심모 아가씨가 성질을 부리는 겁니다. 아가씨께서 급히 추수원으로 가고 있습니다.”
“심모 소저가 그 일로 화를 낸다고? 복에 겨워 행복함을 모르는구나.”
입가에 실소를 머금고 있던 만 이낭의 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심동릉은 서녀지만 어쨌든 심모와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노부인은 서녀인 심동릉을 챙기지 않았고, 심귀 역시 채운원의 일을 상관하지 않았다. 심동릉의 신분 때문에 혼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혼담을 꺼낸 이들은 평범한 집안도 못 됐다. 심모도 불만이겠지만, 만 이낭도 심동릉의 혼사 문제로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병풍 뒤에서 심동릉이 일어났다. 키가 크고 날씬한 심동릉은 극단에서 노래하던 만 이낭의 예전 모습과 비슷했다.
“어디 가려고?”
“어머니는 줄곧 제 혼사를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만 이낭은 심동릉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전 2년을 기다렸어요. 이제야 기회가 왔네요.”
* * *
심모는 소란을 피웠으나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진약추를 이기지는 못했다. 진약추는 심모의 간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화를 내며 그녀가 계속 소란을 피우면 방에 가둘 거라고까지 했다. 진약추가 자신의 투정을 조금도 받아주지 않자 심모는 당황스러웠다. 진약추는 아예 그녀를 더는 상대해주지도 않았다. 추수원을 나온 심모는 초조해하며 온몸을 떨었다.
그때, 채운원에서 몇 사람이 나왔다. 제일 앞에 있는 남색 옷을 입은 소녀가 심모를 바라보며 불렀다.
“심모 언니.”
“응.”
심모는 조금 냉담한 태도로 소녀를 힐끗 보았다. 소녀는 이방의 서녀 심동릉이었다. 심동릉은 임완운이 단단히 통제했던 기억 때문인지 채운원을 나서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심부 안에 그녀를 모르는 하인이 있을 정도였다. 심동릉은 심귀의 유일한 혈육이지만 심모는 서녀 출신인 심동릉을 무시했다. 물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겉으로는 상냥하게 행동했다. 심모는 심묘를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심동릉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심동릉은 심모의 차가운 눈초리를 보지 못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손수건을 좀 만들었어. 며칠 전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다가 어떤 무늬에 흥미가 생겼거든. 몇 개 만들어봤는데, 혹시 언니도 필요할까?”
심동릉은 심모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했다.
“필요 없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언니에게 몇 개 주려고 했는데.”
심동릉은 냉대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말을 붙였다. 심모는 귀찮았다. 지금 그녀의 온 신경은 모친이 골라놨다는 혼처에 쏠려 있었다.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심모는 고개 숙인 심동릉의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 조금 멈칫했다. 그녀는 세심히 심동릉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심동릉과 심모의 나이는 반년 정도의 차이가 났다. 심가 딸 중 심청은 대범하고 심모는 우아한 편에 속했다. 심묘는 머저리였었지만 지금은 수려하게 컸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세 적녀는 각각 독특한 기질이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 심동릉은 서녀 특유의 유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만 이낭은 극단에서 노래를 하는 배우였는데, 심동릉은 그런 만 이낭을 많이 닮았다. 심동릉의 큰 눈과 뾰족한 턱은 얼핏 만 이낭의 젊을 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동릉은 늘 순종하는 표정으로 시끄럽게 굴지 않았고, 세심하게 살펴보면 곱게 성장한 여인의 풍취가 가득했다.
꿍꿍이가 생긴 심모는 심동릉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네가 만들지 않았으면 해. 네가 피곤할까 봐 걱정되거든. 넌 수놓는 아가씨가 아니라 부의 소저인데 온종일 바느질이라니, 경우에 맞지 않잖아?”
심동릉은 당황해했다. 심모가 친밀하게 구는 게 의아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심동릉은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언니, 과분한 말이야. 평소 할 일이 없으니 어머니랑 둘이 종일 바느질만 하는걸.”
임완운의 관리 아래 조용히 바느질만 했던 만 이낭은 지금도 바느질을 잘했다. 심동릉 역시 만 이낭의 성격을 닮았으니 그럴 것이었다. 심동릉도 시집갈 나이라는 것을 깨달은 심모의 눈빛에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네 이런 성격도 바꿔야 해. 고지식하잖아. 바느질을 좋아하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느 아가씨가 종일 바느질만 하겠어? 내일 장신구 점포에 구경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네 맘에 드는 게 있으면 내가 사 줄게.”
심동릉이 허둥거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안 돼.”
“너와 나 사이에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 가장 친한 자매인데 네가 이렇게 소원하게 굴면 속상하잖아.”
심모가 화난 척 대꾸했다. 심동릉은 심모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심모는 살짝 웃으며 심동릉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너는 다 좋은데 담력이 작아서 그게 안타까워. 됐어. 지금 일이 좀 있어서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자. 내일 여종을 추수원으로 보내서 날 찾아. 장신구 점포에 같이 가는 거야.”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심동릉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수락했다. 심모 일행이 점점 멀어지자 심동릉의 곁에 있던 여종 오매가 말했다.
“심모 아가씨는 무슨 뜻일까요? 잘 대해주셨다가 아니셨다가. 어째서 갑자기 아가씨와 장신구를 사러 가자는 걸까요?”
줄곧 심동릉에게 냉담했던 심모가 적극적으로 같이 가자고 하니 의심이 들었다. 심동릉은 점점 작아지는 심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내 비위를 맞춰서 매수하려는 거야. 자신을 의지하고 믿게 만든 다음 도와 달라고 할 속셈이겠지.”
“그럼 어쩌지요? 심모 아가씨는 분명 나쁜 심보를 품고 아가씨를 이용하려 할 거예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오매는 크게 놀라며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동릉은 오히려 기뻐 보였다.
“나는 기꺼이 도와줄 거야. 내게 장신구를 사 주겠다고 하잖아. 더한 것도 줄 수 있겠지. 나야 좋은 물건을 준다는데 왜 싫어하겠어. 저쪽이 좀 멀리 보지를 못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지.”
추수원으로 향하는 심모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심동릉의 유약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요조숙녀이자 좋은 나이였다. 게다가 심부의 딸이다. 심모는 그녀를 잘 이용해 자신의 위기를 넘기고자 마음먹었다.
* * *
심부 서원의 다른 쪽 뜰 입구가 어수선했다. 누군가 바깥에서 꽃을 옮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그때 심만이 서원 입구를 지나고 있었는데, 한 하인이 놀라 크게 외쳤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심만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젊은 여자가 무거워 보이는 화분을 옮기고 있었다. 화분이 너무 무거운지 하마터면 발을 찧을 뻔했다. 여자의 곁에 있던 유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여자가 고개를 돌려 유모를 바라보며 웃었다. 꽃 같은 보조개가 드러났다. 심만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여자는 청록색의 얇은 상의와 꽃무늬 치마를 입고, 머리는 마노 비녀를 꽂아 정리했다. 그녀의 용모는 경국지색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수려해 보였다. 햇빛에 그녀 이마에 맺힌 땀이 진주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얼굴 위 홍조는 더욱 생기를 띠게 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심만은 여색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미인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그의 후원에는 진약추 말고는 여인이 없었다. 그녀를 깊이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여자라고는 그녀뿐이었으니 조금 무미건조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 이런 미인을 보자 산뜻하고 향기로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심만은 아름다운 시나 그림 같은 예술품을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남녀 사이의 일에 큰 열정을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멀찍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심만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심만에게 다가와 곤란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대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셋째 주인어른.”
심만이 그녀를 흘끗 보았다.
“청 동생.”
상재청은 심만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막 심부에 도착한 날, 진약추가 송경당에서 노부인에게 심재청을 인사시켰던 것이다. 당시 저녁이라 어두웠고, 신경 쓰는 일로 바빠 심만은 상재청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예상보다 미인이었다. 심만은 그녀가 진약추와 사이가 좋은 것이 떠올라 좀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청 동생, 무엇을 하는 거요?”
“어젯밤 비가 내려 꽃가지가 물에 젖고 바람에 망가졌지 뭐예요. 그래서 그것들을 싸매고 있었어요.”
상재청이 서원의 입구 화단을 바라보며 웃었다. 상재청의 말에 호기심이 든 심만이 물었다.
“꽃을 어떻게 싸매는 거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웃는 상재청을 보며 심만은 화단에 함께 다가갔다. 이리저리 흩어진 꽃가지 중 어느 것은 헝겊에 싸여 있고 어느 것은 약물 같은 게 발라져 있었다. 솜씨가 조심스럽고 정연해 보였다. 주위에는 가위와 헝겊이 놓여 있었다.
“사려 깊으시구려. 하나하나 하기에는 어려울 텐데.”
심만은 탄식했다. 어제의 뇌우는 화초에 치명적이었다. 진약추처럼 꽃을 아끼는 사람도 애석해만 한 후 버릴 터였다. 꺾인 화초는 아름다움을 회복하지 못하니 더 길러도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상재청은 이렇게 ‘싸매고’ 있었다. 이렇듯 화초에 관심을 두고 애를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화초도 생명이 있는 걸요.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처음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물에는 영혼이 있으니 행동과 마음을 달리하면 안 돼요. 화초를 사랑하면서 이런 일도 해내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더욱이 돌보면서 즐거운데 기꺼이 하지 않을 리 없지요.”
상재청이 웃으며 쾌활한 빛을 띠었다.
“참 유쾌하오. 청 동생은 진정으로 풍아한 사람이구려. 거기에 비하면 본인은 평범하고 속되다고 할 수 있겠군.”
상재청을 향한 심만의 시선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과찬이십니다. 저도 보통 사람인 걸요. 다만 화초를 돌보는 작은 재주로 심부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상재청의 답변에 심만이 기분 좋게 웃었다.
“걱정이 지나치시오. 청 동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떠나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상재청은 심만을 따라 웃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그와 눈을 마주했다.
“제가 어제 바둑을 뒀는데 어찌해도 풀리지 않습니다. 셋째 부인께 도움을 청할까 했는데, 오늘 부인이 조금 바쁘신 것 같네요. 주인어른도 바둑 고수시라던데, 혹시 제게 조언을 주실 수 있을는지요? 그리해 주시면 주인어른을 위해 차를 끓이겠습니다. 셋째 부인께서 말씀드렸을 테지만 제가 끓인 차는 아주 맛있답니다.”
상재청의 태도는 솔직하고 대범해서 심만이 거절한다면 실례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차를 가지고 조건을 거니 매우 세련된 솜씨였다. 심만은 잠시 생각한 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화원 안에 있는 돌 탁자에서 대국을 시작했다. 틈틈이 잡담도 나눠 정겨운 풍경이었다. 심만은 상재청의 바둑 솜씨가 출중하단 점을 알았고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대국에 집중하는 영리한 모습도 발견했다. 게다가 견문도 넓어 조정의 일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심만은 이런 사람을 좋아했다. 외모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진약추가 홀로 총애를 받을 수 있던 건 그녀가 금기서화에 정통한 재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약추는 학자 가문 출신을 내세워 그녀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겼다. 한두 번이라면 괜찮지만 진약추는 매번 그랬다. 그 때문에 대범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따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상재청은 진약추와 달랐다. 재능 있는 여자지만 대갓집 출신 특유의 거만함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스러웠다. 섬세함도 모자라지 않아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해주는 듯했다. 그녀와 대화할 땐 미묘한 운치가 넘쳐 매우 평온했다. 심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 짙어졌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자리를 떠나기 싫을 정도였다.
멀리서 이를 바라보는 조 유모의 눈 속에 기쁨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여종에게 다른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분부했다.
* * *
명제의 황궁은 오늘따라 유달리 화려했다. 태자가 진국과 대량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동궁전에서 연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진국의 태자와 명안 공주, 대량의 예왕 역시 초대를 받았고 명제의 황자들도 연회에 참석했다.
태자의 병세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갈수록 위급해졌다. 그래서 태자를 지지하던 초왕과 헌왕은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태자를 뒷받침하던 세력은 2년 동안 알게 모르게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빠져나갔다. 태자의 위치가 오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태자도 앞날을 알고 있는 듯 2년 동안 조정 일에 참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진정으로 참여하기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함부로 나섰다가 오히려 체면이 깎일까 봐 걱정한 것이긴 했지만.
반면 주왕 부수안, 정왕(静王) 부수현 두 형제와 리왕 일파는 세력을 점차 드러냈다. 부수안 형제는 모친인 서현비를 등에 업고 야심을 드러냈다. 추종자가 많은 리왕은 온화한 사람으로 일 처리가 원만하고 주위 관계가 매끄러웠다. 그러나 실체는 속이 새까만 음흉한 사람이었다. 이 두 세력은 물과 불처럼 팽팽히 대립했다.
가장 안정적인 모습은 정왕 부수의였다. 부수의는 2년간 조정 일에 참여했으나 아주 약삭빠르게 행동해 야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황위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작은 일들만 도맡았다. 부수의가 이처럼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자 태자, 주왕, 리왕 일파는 이전처럼 그의 행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장 안전한 사람은 역시 부수의라는 생각만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황자의 입장과 황제의 입장은 아주 달라 문혜제는 남몰래 부수의를 더욱 마음에 두게 되었다.
대청. 태자가 웃으며 잔을 들기를 청했다.
“먼 곳에서 오셨으니 경축할 일입니다.”
황보호가 잔을 들어 태자의 잔과 부딪치는 자세를 취했다.
“태자 전하의 열렬한 환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황보호 곁에는 명안 공주가 앉아 있었다. 황보호가 내린 며칠간의 외출 금지에서 마침내 풀려난 명안 공주는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맞은편의 예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왕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면에 가려진 그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명제 태자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술잔만 주시하고 말이 없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자가 웃으며 물었다.
“예왕 전하, 왜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몸이 불편해 술을 마시기는 어렵습니다.”
예왕이 웃으며 답했다. 태자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은 대답이었다. 예왕은 명제에 온 후 줄곧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명제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었으나 예의는 그런대로 갖추었었는데, 오늘은 조금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 부수의가 곤란해하는 태자 대신 나섰다.
“그렇다면 예왕 전하는 차로 대신하시지요. 여봐라, 예왕 전하께 차를 올려라.”
부수의 덕분에 태자의 안색이 밝아졌다. 태자는 부수의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황자들 모두 부수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량의 기세가 대단하다지만 진국 앞에서 명제가 그에게 엎드리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부수의는 당당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은 자세로 명제의 체면을 세운 것이다.
황보호는 탐구하듯 예왕을 바라보았다. 명안 공주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 예왕에게 시선을 보냈다.
“예왕 전하, 괜찮으세요? 불편하시면 태의를 부르시지요.”
황보호의 안색이 굳어지면서 매섭게 명안 공주를 바라보았다. 평소 거만한 명안 공주가 명제 여러 황자들 앞에서 예왕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또 반복할 셈이었다. 남자이기에 남자의 심리를 잘 아는 황보호가 봤을 때 예왕은 명안 공주를 귀찮아하는 게 분명했다. 예왕이 너그러이 넘기면 다행이지만, 자기를 번거롭게 한다고 불쾌하게 여기면 손해 보는 건 황보호였다.
예왕은 명안 공주의 말에 대꾸도 없이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왕 부수의였다. 예왕이 유독 부수의만 바라보자 황자 몇 명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부수의는 예왕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예왕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예왕은 미소 지었다.
“명제에 오기 전, 정왕 전하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보니 명성이 헛되지 않았군요. 혼인은 하셨습니까?”
사람들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부수의 역시 당황했다.
“아직 안 했습니다.”
부수안이 크게 웃었다. 부수의의 곁에 앉은 그는 부수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정왕은 아직까지 유일하게 비가 없습니다. 예왕 전하께서도 부수의의 혼사에 흥미를 갖고 계십니까?”
예왕이 가면 아래 입꼬리를 올렸다.
“대량 궁중에 적령기 공주가 많은데 정왕 전하를 보니 마음에 듭니다. 두 황실이 인친(姻親)을 맺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예왕의 말은 대량과 명제가 사돈을 맺자는 의미였다. 예왕의 말대로 대량의 공주와 혼인하면 배후에 대량의 조력이 있다는 의미였다. 부수의가 황위에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여태 온화한 태도로 그를 대했던 황자들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이전 같은 태도로 부수의를 대할 리가 없었다. 부수의가 대량 공주와 혼인하면 자연히 황위 쟁탈에서 가장 힘 있는 경쟁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부수의는 술잔을 꽉 쥐고는 침착하게 예왕을 바라보았다. 몹시 난감했다. 예왕이 정말 대량 공주와 자신이 혼인하길 바라는 게 아닐 것이라 여겼다. 예왕은 자신을 돕는 게 아니라 해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부수의는 지금까지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비장의 무기를 내보이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예왕의 조건은 분명 마음을 흔들리게 했지만, 진정 호의에서 나온 말이라면 많은 황자들 앞에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예왕의 말 한마디에 형제들의 눈빛에 경계가 가득해진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으니, 그는 자신을 바람이 가장 거센 절벽 앞으로 떠민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왕의 말에 마음이 동했어도 이 상황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부수의는 이를 악물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아무 관련이 없는 예왕이 늘 자신에게 적의를 내보였다. 이번 일도 그랬다. 적의가 없다면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부수의는 예왕에게 더욱 경계심을 품었지만,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예왕 전하의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왕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 정왕 전하가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고 한다면 더는 권하지 않을 겁니다.”
“전하, 농담이시겠지요. 지금은 확실히 생각이 없습니다.”
부수의가 예왕에게 예의 바르게 사양했다. 부수의가 예왕의 제안을 시원하게 거절하는 것을 본 황자들의 안색이 그제야 풀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처럼 안심할 수는 없게 되었다. 오늘은 부수의가 거절했지만 장래 그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제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유혹이라 그들 역시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부수의를 큰 위협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황실 안에 욕심이 아예 없는 성인이 있을 리 없다고 믿었다.
“아주 기이하군요. 정왕 전하는 혼인 전이며 사모하는 사람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 제안을 고려도 하지 않으시는지요? 혹시 평소 정왕 전하를 사모하는 아가씨라도 있습니까?”
예왕은 유독 부수의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부수의가 제의를 거절했음에도 그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성정이 거친 성왕이 하하 웃었다.
“예왕 전하는 모르실 테지만 명제에 부수의를 사모하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두가 다 알았죠.”
“심묘 아닌가요?”
성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안 공주가 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심묘의 소문을 알고 있던 명안 공주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공주마마도 아시는군요.”
성왕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심 소저가 정왕 전하를 맹목적으로 좋아한 일은 진국에서도 유명합니다.”
원수의 흉을 볼 수 있게 된 명안 공주는 기뻤다. 심묘의 체면을 깎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니 그녀는 아주 크게 비웃었다.
“예왕 전하는 모르실 수 있는데, 심 소저는 위무대장군의 적녀로 조공연회에서 공주마마와 시합을 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 온종일 어떻게 하면 부수의를 만날 수 있을지만 고민했습니다. 염치를 몰라 부수의에게 직접 사모한다고도 말했지요. 부수의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간식을 만들고 금을 타고 시를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쯧쯧.”
성왕은 웃으며 말했지만, 악의와 모욕의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크게 혀까지 차니 심묘를 조롱하는 게 분명했다.
“조공연회에서 그녀는 품위 있어 보였습니다.”
황보호였다. 심묘를 직접 보니 소문과 달랐다. 그가 본 심묘는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며 보전을 꾀하는 사람 같지 않아 의아했다. 그런 그녀가 바느질을 하고 간식을 만들다니. 명안 공주에게 차갑게 눈썹을 추켜세우는 심묘의 모습을 떠올리니 매우 기이했다. 황보호는 농담하듯 말했다.
“정왕 전하는 정말 냉정하시네요.”
“당시 심 소저는 어렸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워질 줄 몰랐죠. 이전에는 아둔하고 나약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명제 정경성 소저 중 그녀보다 빼어난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이를 일찍부터 알았다면 부수의가 그렇게 무정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미인의 마음을 헛되이 해버렸지만, 지금은 후회해도 늦었습니다.”
성왕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에 명안 공주는 냉소했다.
“달라졌다니 묘한 일이네요. 그렇지만 정말 바뀌었겠어요? 아가씨가 염치도 없이 남자의 뒤를 쫓아다니다니요. 그런 뻔뻔한 기질은 고칠 수 없습니다. 정왕 전하가 수고하셨네요. 번거로우셨을 텐데 싫은 소리를 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한 것 같아요. 정말 자상하십니다.”
조공연회에서 명안 공주가 심묘에게 망신당해 언짢아한 것을 알고 있는 황자들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부수의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 소저는 좋은 사람이니 너무 흉보지 마십시오. 심 소저의 명예를 망가뜨리면 그 책임을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부수의, 넌 너무 진지해. 너야 이미 싫다고 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입에 올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냐? 내게 비가 있지 않으면 난 심 소저와 혼인하고 싶구나. 난 성왕의 말에 동의해.”
초왕의 말에 다른 황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가 정왕 전하였다면 반드시 그녀와 혼인했을 겁니다.”
황보호도 웃으며 말했다.
명안 공주는 이야기의 흐름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예왕은 별말이 없으니 안도했다. 기쁜 마음에 그녀는 예왕에게 물었다.
“예왕 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예왕이 멈칫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술잔을 가지고 놀며 담담히 말했다.
“남자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간식을 만들어준다라. 게다가 금과 시를 배우고…….”
“맞아요. 그야말로 우스운 일이죠!”
예왕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좋은 아가씨, 저도 원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웃으며 대화를 했지만, 이번에는 웃을 수 없었다. 황보호는 예왕을 주시했다. 부수의도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 명안 공주는 얼굴이 굳으면서 순간 비틀거렸다. 태자가 어색하게 웃고는 이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배필입니다. 심 소저는 재능과 용모를 갖췄으니 당연히 여러 영웅의 관심을 끌겠지요.”
사람들은 태자의 말에 분분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예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예왕이 단순히 농담한 것으로 다른 뜻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대량의 예왕이 명제의 장군 딸과 혼인할 리 없었으니까. 두 사람의 신분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이렇게 민감한 정세에 명제의 아가씨와 혼인하면 대량이 함정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묘가 명제의 밀정이 되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예왕이 담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런 모험을 할 리 없었다.
사람들은 웃으며 술을 마시고 잔치를 즐겼다. 명안 공주만 증오의 시선을 품고 있었다. 황보호는 그런 그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명제 태자가 마련한 연회는 순조로웠다. 명제 황자들은 진국과 대량이 명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명히 파악하려고 했다. 진국은 명제에 호의적이었고 적의가 없었다. 오히려 대량의 예왕이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호적이라고 하기도 적대적이라고 하기도 모호했다. 흥이 무르익었음에도 예왕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술에 입도 대지 않았으니 당연했으나 명제 황자들은 낙담했다.
예왕은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고, 명안 공주의 표정은 더욱 나빠졌다. 분노한 명안 공주는 머무르고 있는 주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종 몇몇에게 괜한 분풀이를 했다. 부수의의 편지를 가져온 부수의 사람도 그녀에게 이유 없이 한바탕 욕을 먹어야 했다. 수모를 당한 사람은 바로 사장무와 사장조였다. 명안 공주에게 욕을 먹기 전에 이미 부수의에게도 꾸짖음을 받은 그들이었다.
정왕부로 돌아온 부수의는 오늘 일을 막료에게 전했다.
“대량 예왕은 내게 적의를 가진 듯하네. 연회에서 날 몰더구나.”
부수의는 야심을 숨긴 채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그 스스로의 궁리와 계략은 아주 교묘하다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재를 모으는 방식과 그들에게 변함없이 대하는 태도는 아홉 황자 중 능가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엄동설한에 상대방의 사립문 앞에서 하룻밤을 기다릴 수 있었고, 상대방의 가족이 평생 풍족하고 안정된 생활을 살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이에 그를 따르는 막료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나같이 재주가 출중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부수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막료들과 상의해 대안을 마련했다.
사람을 부리는 기술은 황제가 반드시 익혀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수의는 확실히 가장 우수한 황제감이었다. 막료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을 때 부수의가 남색 도포를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배 선생, 무슨 견해가 있으시오?”
이곳에 있는 막료 중 배랑은 부수의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다. 배랑은 2년 전 부수의의 사람이 되었다. 당시 부수의는 배랑의 재능이 마음에 들었지만, 배랑은 권세를 탐하지 않기에 그의 사람이 되는 걸 거부했다. 이에 부수의는 온갖 수완을 사용했고, 천하 대의를 도리라며 설득한 끝에 결국 배랑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한바탕 우여곡절을 다해 포섭한 배랑은 부수의의 기대를 헛되게 하지 않았다. 배랑은 그동안 부수의를 대신해 많은 난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래서 부수의는 난제를 만날 때마다 그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혹시 다른 곳에서 예왕 전하와 접촉한 적이 있었습니까?”
부수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이상합니다. 예왕 전하는 대량을 대표해서 온 사람이니 예왕 전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 교류가 없었다면 전하를 곤란하게 만든 이유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전하는 그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으니까요. 게다가 만약 대량이 명제를 힐책하려 한다면 전하가 아니라 폐하나 태자 전하가 대상이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내 생각에는 심묘 때문인 것 같소.”
부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망설임 끝에 심묘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다른 막료가 물었다.
“전하, 그 말씀은 무슨 의미이신지요?”
“예왕의 말 중 나와 관련된 건 심묘밖에 없소. 당시 난 그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하지 못했소. 심묘와 그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니 조금 기이하오.”
“혹시, 예왕 전하와 심 소저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관계인 건 아닐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느 막료의 말을 배랑이 단호하게 끊어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배랑을 향했다. 그의 논리에는 늘 설득력이 있었고, 그가 부수의 앞에서 말하는 것은 늘 사실로 판명되었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자연히 그의 의견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예왕 전하는 명제에 처음 방문했습니다. 심 소저도 심 장군을 따라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전하께서는 예왕 전하가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을 아십니다. 대량이 그를 명제의 외교사절로 보냈으니 예왕 전하는 반드시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심묘라는 여인을 위해 전하와 적대할 리 없습니다.”
“일리는 있구려. 그렇지만 배 선생은 어찌해야 한다고 보오?”
배랑의 말을 들은 부수의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오늘 전하께서는 크게 문제 될 사항을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경거망동하시면 괜히 황자들의 의심을 사게 될 터이니 예왕 전하가 어떤 생각인지 보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조공연회 후 예왕 전하는 대량으로 떠나겠다 말하지 않았으니 필히 정경성에 머물며 다른 일을 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진국도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부수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짚었다.
“배 선생의 말대로 하겠소. 술을 많이 마신 데다 내일은 조정에 나가야 하니 난 먼저 쉬겠소. 여러분도 물러나시오.”
부수의가 떠난 뒤 대청에 남은 막료들도 한둘씩 흩어졌다. 배랑과 함께 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정왕부 내 그와 친교를 맺는 막료는 없었다. 막료들은 그의 의견에 동조했으나, 질투는 별개의 문제였다. 짧은 시일 내에 부수의의 두터운 신임을 샀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은 배랑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넋을 잃었다. 2년, 2년이 지났다. 배랑은 심묘와의 약속에 따라 부수의의 심복이 되었다. 나날은 편안하게 흐르고 부수의의 신임을 얻었다. 배랑은 가끔 이런 삶이 진짜 자신의 인생이라 느껴졌다. 그러나 자신의 말대로 다시 나타난 심묘가 그 꿈을 산산이 깨부쉈다.
심묘와의 거래는 마귀와의 거래와 마찬가지였다. 언젠가는 스스로가 자신이 업신여기는 첩자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바로 오늘부터였다. 자신은 처음부터 부수의를 배반하기 위해 수하로 들어왔으니 결단코 그의 신뢰에 충성으로 보답할 수 없었다.
배랑은 깊게 심호흡했다. 편안한 날들은 이미 끝났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했다. 오늘처럼 간담이 떨리는, 잘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져 만회할 여지가 없는 그 길을 말이다. 그러자 불현듯 심묘의 수려한 얼굴이 떠올랐다. 어른인 자신도 이렇게 곤란한데 배후에서 계략을 꾸미는 그 소녀는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을까.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 * *
등불 아래, 심묘는 세심하게 글을 쓰고 있었다. 곡우는 곁에서 먹을 갈고 경칩은 등불의 심지를 조심스럽게 자르며 등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심묘는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글을 썼다. 수시로 붓을 멈춰 생각한 후 다시 이어 쓰곤 했다. 네모반듯한 종이 한 장을 채웠을 때 만물이 조용했다. 심묘는 붓을 내려놓고 종이 위에 바람을 불었다. 먹물이 마른 것을 확인한 뒤 봉투에 넣어 경칩에게 건넸다.
“내일 일찍 바깥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이 편지를 청 이모에게 보내. 절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면 안 돼. 반드시 청 이모에게 보내야 해.”
경칩은 대답하며 편지를 잘 챙겼다. 심묘가 상재청에게 편지를 쓴 까닭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곡우는 탁자를 치우며 웃었다.
“아가씨도 일찍 쉬세요. 밤이 깊어서 더 늦게 주무시면 몸에 안 좋아요.”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곡우와 경칩이 나간 뒤 심묘는 등불을 침상 앞 탁자에 두었다.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어젯밤 꿈 때문에 잘 수 없었다. 온종일 꿈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어 고통스러웠으나 드디어 상재청이 어떻게 나설안을 망령으로 만들었는지 알았다. 전생의 자신은 상재청의 계략에 빠져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상재청이 주범이었고 자신은 이용당한 하수인이었다. 증오와 후회가 산과 바다를 뒤엎을 기세로 밀려들었다. 상재청을 통째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기지 못해서 한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상재청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상재청은 평생 무궁무진한 부귀를 누리기 위해 신분 상승을 꿈꿔왔다. 그런 상재청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을 때,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면 더욱 통쾌할 것이다. 그녀가 모두에게 비웃음을 사도록 만들 예정이었다. 게다가 상재청과 진약추를 맞붙여두면 힘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된다.
물건은 잘 쓰기만 하면 저마다 제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는 법이다. 심묘가 뼛속 깊이 새긴 교훈이었다. 이번에는 상재청과 진약추가 서로에게 칼날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심묘는 종일 고민한 끝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즉시 편지에 심만이 좋아하는 것들을 꼼꼼히 적었다. 심만과 오랜 세월을 보낸 자신은 어려서 진심으로 심만을 존경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조사해두었다. 그의 실체를 알고 난 뒤 다 버리긴 했지만, 야심에 사로잡힌 여인이 쓰기에는 아주 유용한 정보일 터였다. 상재청의 수완이라면 군자의 가면을 뒤집어쓴 심만을 유혹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겉으로 보기엔 하늘이 맺어준 인연 같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래에 그들이 찢겨 갈라진다면 볼 만할 터였다. 심묘의 눈에 냉소가 스쳤다. 개가 개를 무는 꼴이리라.
겉옷을 벗고 침상에 오른 심묘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창문을 한 번 보았다. 창문은 꽉 닫혀 있었다. 창밖으로 바람 소리가 났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묘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다. 마치 사경행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묘한 속마음을 눌렀다. 등불을 끈 심묘는 잠을 청했다.
예왕부. 누군가 뜰에서 백호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백호는 재롱을 부리며 청년의 발에 달라붙었다. 백호는 수시로 머리를 흔들며 청년의 손에 들린 음식을 먹어치웠다. 통통하고 윤기가 흐르는 털 덕분에 백호는 아름다운 덩치 큰 고양이처럼 보였다.
“그만 먹이게. 더 먹였다간 진짜 고양이가 되겠네. 지금 쟤를 보고 누가 호랑이라고 하겠는가?”
고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흥을 깨는 말을 했다. 사경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백호에게 계속 먹이를 주었다.
“내가 총애한다는데, 불만 있어?”
말문이 막힌 고양은 손을 휘저었다.
“됐다 됐어. 자네가 고양이를 키우든, 호랑이를 키우든 상관 안 할 거야. 오늘 연회에서는 왜 그랬어? 부수의 같은 사람을 건드리다니. 앞으로 자네를 더 주시할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야?”
연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고양은 믿을 수 없었다. 사경행은 늘 적절한 때에 적절한 수단을 발휘해 일을 처리했다. 지금은 부수의와 적대하기 좋은 시기가 아니다. 부수의가 부리는 작은 수완 정도로 사경행을 다치게 할 수는 없으나 말썽은 반드시 불러올 것이다. 지금은 작은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경행이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고양은 사경행에게 눈을 흘겼다.
“심묘를 위해 그런 건 아니겠지?”
“너 한가해?”
“뭐?”
“소가 일은 잘 처리했어?”
고양은 당황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준비하고 있어. 네가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소명풍은 네 친한 친구지만 그가 네 신분을 알게 되면 너와 적이 될 거야. 네가 베푼 모든 호의가 그자의 눈에는 계략으로 보일 테지. 하지 않은 것만 못할 텐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어?”
문혜제는 소씨 세가를 경계했다. 소가가 전력을 다해 자신들의 세력을 줄였다고 해도 약점은 남아 있었다. 그 약점은 소가를 사지로 몰고 갈 가능성이 컸다. 이에 사경행은 고양에게 소씨 세가의 약점을 숨겨 장래에 변고가 없도록 분부했다.
고양은 사경행의 지시에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면 때문에 예왕이 사경행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밝혀지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형제가 자신을 기만했으니 소명풍의 반응은 뻔했다. 게다가 대량과 명제는 언젠가 적대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사경행은 소가를 도와줄 수 있으나 소명풍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그의 생각을 고려해야 하지?”
“정말 그런 거야? 너는 잊었는지 몰라도 지금과 과거는 달라. 네가 가면을 벗으면 모든 사람이 경계의 빛을 띨 거야. 소신은 부하의 신분으로 전하를 숨길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사경행의 대답에 고양이 드물게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밤바람이 솔솔 불었다. 배불리 먹은 백호가 트림했다. 배가 차 기분이 좋은지 날뛰며 사경행의 소매를 입에 물었다. 뜰에 소리 없는 바람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경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모든 사람은 아니야. 한 사람은 달라. 대량 예왕의 신분으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은 있어.”
“심묘를 말하는 거야? 지금 심묘와 교류하는 건 그녀가 부수의를 적으로 여기기 때문임을 잊지 마. 지금은 그녀를 도울 수 있지만 언젠가는 그녀와도 대립하게 될 거야.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을 각오로 시작하지 않았어? 일장춘몽이라고 잠깐의 즐거움에 연연하면 슬픔만 가득할 거야.”
“그게 어때서?”
고양은 당황했다.
“그러면 또 어때서?”
사경행은 백호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길고 굳세 보이는 그림자가 짙푸른 소나무처럼 길게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일은 대가를 치러야 해. 권세도 사람도 마찬가지야. 정말 그때가 되면 나는 빼앗을 거야. 강산도, 황위도, 여인도, 마음도 빼앗을 거야. 이 길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일이야. 천하 사람이 버리면 뭐 어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겠으면 대량으로 돌아가. 나는 지금까지 가야 할 길을 잊지 않았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분명히 알지. 그래서 내 결정을 의심하지 않아. 모두 허황된 일장춘몽이어도 상관없어. 현실로 바꾸면 그만이니까. 내가 자신 있는데, 왜 너는 의심하는 거지?”
사경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이가 든 고양은 이때의 일을 회상할 때면 뼛속의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고양은 사경행의 도도함, 완강함과 함께 자부심과 오만함을 보았다. 진정한 황족의 타고난 위엄을 보는 것 같았다.
“모두 허황된 일장춘몽이라면 현실로 바꾸면 되는 거야.”라는 말을 세상에서 몇이나 할 수 있을까? 사경행은 이 무거운 말을 아주 담담하게 내뱉었다. 고양은 몸을 굽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사경행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군신의 예를 올렸다.
“소신, 전하를 따르겠다 맹세 드립니다.”
“일어나.”
사경행이 품속의 백호를 얼렀다. 고양은 일어나 무릎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그럼 자네는 심 소저를 빼앗을 생각인 건가?”
“꺼져.”
* * *
올 초겨울은 유달리 빨리 지나갔다. 늘 온갖 소식으로 시끄러운 정경성에도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신선한 일은 심부의 일이었다.
진약추는 심만과 이야기한 뒤 심모를 시집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심모를 데리고 각 가문의 부인들이 여는 연회에 참석했다. 심모는 원치 않았으나 사당에 한 번 갇힌 뒤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진약추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진약추는 심모가 원치 않는 시집을 보내려 했지만, 자신 역시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셈이었다. 그러니 딸을 아끼는 마음에 미안함까지 더해져 더더욱 세심하게 사람을 골랐다. 똑똑한 심만은 심귀보다 인성이 좋았고 심모는 그의 보배였다. 그러니 고르고 골라 상대는 심부와 지위, 형편이 걸맞을 뿐 아니라 심모가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기 충분한 재력도 갖추어야 했다. 게다가 남자도 매우 재능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후원도 깨끗해야 했다. 재녀라고 명성이 드높은 심모는 그 집안의 호감을 쉽게 얻으리라.
심모의 일에 온 마음을 쓰느라 진약추는 심만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상재청과 심만은 상당히 가까워졌다. 이전에 심만은 조정에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진약추에게 털어놓곤 했다. 그러나 지금 진약추는 그의 마음을 풀어줄 여유가 없었기에 상재청이 말동무가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심만의 골치 아픈 문제를 풀어주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상재청의 흥미와 습관도 여러모로 심만과 비슷했다. 심만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상재청이 만드는 간식도 그리 달지 않았다. 게다가 심만은 화차를 좋아하는데 상재청은 심만을 볼 때마다 화차를 끓였다. 가장 좋아하는 서화가도 약속이나 한 듯 일치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친근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심만 역시 상재청과 마음이 맞는다고 여겼다. 온유하고 청렴해 보이는 진약추에게 익숙했던 심만에게 시원하고 슬기로워 보이는 상재청의 모습은 신선한 바람처럼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진약추는 알지 못했다.
상재청은 심만을 찾아가지 않고 늘 심만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예의를 갖추며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인들도 두 사람을 보며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진약추가 알 턱이 없었다.
이것 말고도 진약추가 모르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심동릉이 어느새 심모와 친밀해져 있었다. 심부에 남은 소저가 둘뿐이라지만, 둘이 친해진 것은 이상했다. 심모는 진약추처럼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무시했다. 심동릉은 이낭이 낳은 서녀이니 더욱 그러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친밀한 자매가 되다니,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채운원. 심동릉은 간식을 심모에게 건넸다.
“주방에서 새로 만든 간식인데 우유와 계화(桂花, 계수나무의 꽃)를 넣었어. 언니도 먹어봐.”
“내가 지금 이걸 먹고 싶겠어? 화가 나 죽겠는데!”
심모는 초조해하며 간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몇 번이고 탄식만 하니 심동릉이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혼사 때문에 그러는 거야?”
심모가 언짢다는 듯 대꾸했다.
“넌 몰라. 어제 원외랑부에 갔는데, 어머니가 왕 공자에게 아주 만족하셨어. 내 감이 맞는다면 날 왕 공자와 혼인시킬 생각이야. 그래서 지금 식욕이 없네. 머리까지 아파.”
“원외랑? 왕필 공자?”
“너도 아는구나.”
심모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부친께 들었어.”
심동릉은 수줍게 웃었다. 심귀도 조정의 관리이니 왕가의 일을 알 터였다.
“맞아, 그 사람이야.”
“왕 공자는 학식이 깊고 넓은 데다가 벼슬길에 올랐다던데. 당장은 관직이 빠르게 올라가진 않더라도 곧 두각을 나타낼 거라던데? 언니, 좋은 일인데 무엇 때문에 원치 않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싫어. 나는 타고난 용모와 품격이 대단한 사람과 혼인할 거야. 왕 공자가 뭐라고.”
심모는 도리어 더욱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심동릉이 심모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심모는 멍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니. 너 무슨 허튼소리야?”
심동릉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난 왕 공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언니가 왕 공자를 싫다고 하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은 눈에 차지 않는 건가 싶었어. 내가 오해한 거구나. 화내지 마.”
심모는 손을 휘둘렀지만 심동릉의 말에 부수의가 떠올랐다. 마음이 아팠다. 진약추는 부수의가 반드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과 혼인할 거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그가 힘없는 문관의 딸인 심모 자신과 혼인할 리 없다고 딱 잘랐다.
심모는 부수의가 자신을 사랑하게만 되면 다른 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잘 대해줄 거라고 여겼다. 아름답고 똑똑한, 재녀의 명성이 널리 퍼진 자신은 용모와 품격이 높은 남자와 혼인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부수의가 유일한 짝으로 보였다. 그만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시집가지 않고 버텼는데, 다른 사람과 혼인해야 한다니 너무나 괴로웠다.
그때, 심동릉이 조용히 말했다.
“언니, 왜 시도해보지도 않는 거야? 왕 공자도 언니 생각처럼 그리 형편없지는 않을 거야. 왕가와 심가는 집안도 걸맞고 왕 공자도 좋은 사람이잖아. 시집가면 평생 편하게 살 텐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심동릉의 말을 들을수록 심모는 더욱 짜증이 났다. 자신이 원하는 건 오직 부수의뿐이었다.
“언니, 너무 많은 생각하지 마. 어떤 사람은 이런 행복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어. 나 같은 사람 말이야. 만일 내가 언니라면 이 혼사를 거절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아주 기뻐할 거야. 편안한 삶을 기대하는 건 당연하잖아.”
심모는 심동릉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뒷부분에서 멈칫했다. 기이한 충동이 치밀었다. 심모는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턱은 뾰족해서 유달리 유약해 보이는 상이었다. 얼굴 가득 신임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자신을 진심으로 자매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조종할 수 있는 때가 무르익은 듯했고, 그녀는 결코 반항하지 못할 터였다. 심모의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천천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