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장 (8/71)

36장

며칠이 흘렀지만 정경성은 여전히 매우 조용했다. 명안 공주 역시 드물게 얌전히 지냈다. 정경성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진국 태자부. 명안 공주는 금홍색 비단 치마를 입고 설탕으로 절인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꿇어앉은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은 명안 공주가 어떤 치욕을 줘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은 임안후부의 서자, 사장무와 사장조였다.

사경행이 죽고 정치에 관심이 없어진 사정은 자신의 권력을 두 사람에게 나눠주며 그들이 조정에서 경험을 쌓도록 했다. 그들은 수완이 좋아 금세 부수의의 사람이 되었다. 부수의는 두 사람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장차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둘을 부리는 중이었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사경행이 죽었음에도 사정이 자신들의 모친인 방 씨를 본처로 삼지 않자 원망을 품었다. 방 씨가 사정의 본처가 되지 않으면 두 사람도 영원히 서자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사장조와 사장무는 조정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더 열심이었다. 공로가 높아지면 사정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적자로 바꿀 터였다. 임안후 가문을 위해서라도 사정은 그렇게 해야 했다.

그들이 오늘 진국 태자 관저에 나타난 이유는 부수의의 분부 때문이었다. 부수의는 진국 태자와 친교를 나눠 모종의 협정을 맺었다. 부수의는 황보호의 동생인 명안 공주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나 고민했다. 그는 명안 공주가 정경성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고려해 사장무, 사장조 두 사람을 보낸 것이다. 사장조와 사장무는 부수의의 사람이지만 비밀리에 다른 거물들과도 어울렸다. 그래서 두 사람이 명안 공주를 방문해도 다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성격이 흉포한 명안 공주 밑에서 사장무와 사장조는 며칠 동안 적지 않게 쓴맛을 보았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명안 공주는 두 사람을 보며 비웃었다.

“너희가 종일 나를 따라다니니 답답하구나. 명제 관원이 타국 공주의 뒤를 따라다니기나 한다니, 명제는 너무 쉽군.”

“소신은 공주마마를 보필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공주마마가 만족하시면 소신도 안심입니다.”

“하지만 너희는 내 신하가 아니지. 나는 이렇게 한가한 사람을 수하로 거두지 않아. 너희 임안후부에도 정기가 뛰어난 적자가 있었다 들었다. 애석하게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지. 그였다면 내가 수하로 삼는 것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인데.”

바닥에 엎드린 두 사람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영향력을 잃지 않는다. 2년 전 사경행이 죽자 사장무와 사장조는 다시는 그의 그늘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고 며칠을 기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임안후부를 언급할 때면 사경행을 먼저 떠올렸다.

“사 소후야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재능을 발휘했을지 몰라. 임안후도 매우 자랑스러워했겠지.”

사람들은 두 사람도 임안후부의 공자임을 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은 사경행의 늠름한 자태를 넘을 수 없었다. 사장조가 눈빛을 반짝였다.

“큰형님은 확실히 뛰어났습니다. 위무대장군 적녀 심 소저와도 인연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예상치 못한 데서 심묘의 이야기를 들은 명안 공주는 당황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름다운 눈썹을 치켜세웠으나, 말투는 저절로 무거워졌다.

“어찌 된 일이냐? 빨리 말해 보거라.”

사장조는 명안 공주의 반응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공주마마, 이전 명제 시험장에서 심 소저가 활쏘기 부문에서 1등 한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명안 공주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조공연회에서 심묘에게 망신당한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 평생의 한이 될 듯했다.

“그때, 채임이 퇴장한 뒤 저와 둘째 형님은 심 소저에게 도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별안간 큰형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형님은 심 소저를 보호하기 위해 시험장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은 채임을 대신해 심묘에게 분풀이한 뒤 채 대인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사경행이 나선 것이다. 두 사람은 이를 영원히 잊지 못할 터였다. 사경행은 모든 풍류를 다 즐긴 것처럼 보였으나 나서서 아가씨를 도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때, 사경행이 심묘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심묘를 도울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사경행의 등장으로 두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 일은 두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수치였다.

“그랬군. 사경행도 좋은 사람은 아니구나. 그 천한 것과 결탁하다니. 죽어 마땅해. 아주 잘 죽었구나!”

두 사람의 눈빛이 즐거운 듯 반짝였다. 사경행의 명예를 떨어뜨리거나 누군가가 사경행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면 두 사람은 심장이 쿵쾅댈 정도로 기뻤다.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불만을 그렇게라도 토로하는 셈이었다.

“나도 심묘가 매우 거슬리지만, 오라버니가 막고 있으니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를 이미 여러 번 죽였을 게야.”

명안 공주는 조금 초조했다. 명제 태자가 연 연회에서 예왕이 한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좋은 아가씨, 저도 원합니다.”라니.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옛 원한에 새 원한이 겹쳐졌다. 심묘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직성이 풀릴 텐데, 자신이 외출할 때마다 황보호의 시위가 감시역으로 따라다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의 이야기를 들으니 악랄한 마음이 다시 살아났다.

명안 공주는 태생이 거만했고,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그녀에게 심묘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였으므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목숨이었다. 그녀는 사장무와 사장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일어날 수 없었다. 또한 어떤 명령이든 순종적으로 실행할 것처럼 보였다.

명안 공주는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간식을 들어 가운데 문양을 바라보았다.

“사장무, 사장조. 너희는 부수의를 따른 지 오래되었는데 왜 아직도 심부름이나 다니느냐?”

명안 공주는 두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른 셈이다. 그들은 2년 전부터 비밀리에 부수의를 위해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일은 맡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궁중 하인과 다를 바 없이 명안 공주의 시중이나 들러 온 신세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부수의의 신임을 얻지 못한 것이 자신들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군대를 부리는 책략이 뛰어남에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건 모두 자신들이 서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명안 공주의 야유에 두 사람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은연중에 드러났다.

“너희는 빨리 높은 관직에 오르고 싶지 않아? 부수의의 신임을 얻으면 관직에 빠르게 오르고, 서자 신분이라며 모욕을 당할 필요도 없는데.”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게 너희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몸을 구부렸다.

“공주마마,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명안 공주가 아름답게 웃었다.

“바로 나다. 나는 진국의 공주야. 지금 부수의는 내 오라버니에게 요구할 게 있거든. 너희 두 사람이 날 기쁘게 하면 내가 오라버니에게 너희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해주마. 오라버니와 부수의의 일이 이루어지면 부수의는 너희 두 사람의 공로를 기억할 것 아니겠느냐. 지금 너희가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며 내 비위를 맞추는 것은 이를 위한 게 아니더냐?”

명안 공주는 붉게 칠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처지는 명안 공주의 말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명안 공주가 쉽사리 그들을 위해 좋은 말을 해줄 리 없었다. 명안 공주는 성정이 원체 거만하고 횡포해 사람들은 그녀에게 분풀이를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녀에게 감히 호의를 바랄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떤 조건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대꾸가 없자 명안 공주는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 한마디는 많은 사람이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야. 너희 두 사람은 나와 친족도, 친구도 아니니 내가 너희를 위해 말을 한다면 당연히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사장무가 먼저 답했다.

“공주마마, 분부하십시오.”

“너희도 알 것이다.”

명안 공주가 손톱을 치켜들었다.

“나는 줄곧 아주 자비로웠고 명제에서도 선을 행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 천한 것이 나를 건드리는구나. 나는 지금 심가 그 천한 것이 싫다!”

명안 공주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심묘와 그녀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사가 형제 역시 알고 있었다. 명안 공주는 하찮은 것까지도 꼼꼼히 따져 보복하는 성격이니 심묘에게 쉽게 손을 뗄 리 없었다. 그러나 명제에서 심묘는 평민 집안의 보통 아가씨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사고가 생기면 명안 공주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자명했다.

“난 너희 두 사람이 명제에서 1등을 다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담력과 식견이 뛰어나지.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명안 공주는 처음으로 두 사람에게 온화한 시선을 보냈다. 당황한 사장조가 탐색하듯 물었다.

“공주마마,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안심하거라. 나는 마음이 선량해서 심묘의 목숨까지 원하지는 않는다. 심묘를 명제에서 가장 낮은 기원에 팔아라. 심묘가 그곳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쯤 관아에 알려 구해내게 하고.”

사장무와 사장조는 숨을 들이켰다. 구등 기원의 손님은 고된 노동력으로 먹고사는 하급 무사와 같은 이들이라 여자를 아낄 줄 모르며 매우 거칠게 대했다. 그러니 그곳의 여자들은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처지였다. 주인에게 잘못을 저질러 팔린 여종의 대다수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명안 공주는 심묘를 죽이지 말고 바로 그곳에 팔라고 분부했다. 가장 존귀한 소저가 가장 변변찮은 야만적인 남자에게 당하는 일은 죽느니만 못한 일이다. 그다음 살아 있는 송장이 된 심묘를 관아에서 구출한 것처럼 꾸미라니 그야말로 심묘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따로 없었다. 심묘가 누구나 지아비로 삼을 수 있는 기녀가 된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구출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며칠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찧어 죽을 터였다.

사장무는 간신히 웃었다.

“심가의 호위는 무공이 뛰어납니다. 심 소저를 어떻게 그런…… 곳에 팔 수 있나요?”

명안 공주는 다시 거드름을 피웠다.

“그건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지. 내가 오라버니께 너희들이 담력과 식견이 있다고 말해야 하니 심묘를 어떻게 납치할지 실력을 보자꾸나. 내가 다 구상한다면 무엇 때문에 너희를 쓰겠느냐?”

이 엄청난 일에 두 사람은 머뭇거렸다. 이에 명안 공주가 가벼운 투로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일이 성공하면 나는 부수의 앞에서 너희에게 좋은 말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부수의는 너희 두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겠지. 지금처럼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눈에 차지 않는 낮은 일을 하는 상황은 아닐 테다. 이 수지맞는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속마음을 살폈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줄곧 높은 관직에 들지 못했다. 그저 관직이 빠르게 상승하길 갈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명안 공주는 지름길을 제시했다. 짧은 시간 안에 원하던 곳까지 갈 수 있을 길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심묘를 납치하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사가 형제에게도 부리는 사람이 조금 있으나, 심가는 장군부로 병사들은 물론 부리는 호위들도 비범했다. 심묘의 호위 중에서 아무나 한 명 골라봐도 무공이 출중할 터였다. 게다가 심묘가 실종되면 심신은 정경성을 봉쇄하고 곳곳을 뒤질 것이다. 그 수색을 피해 심묘를 기원에 팔려면 수차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터였다.

성공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테지만 실패하면 그대로 망하는 길이다. 두 사람은 일의 성공 여부를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다. 명안 공주는 냉소했다.

“머뭇거리니 이 일은 없던 일로 하자꾸나.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두 번은 없지. 나가거라. 명제에 담력과 식견이 있는 사람은 너희 둘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너희 말고도 부귀에 도박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여긴다.”

“소신, 하겠습니다!”

사장조가 외치며 사장무를 잡아끌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장무도 사장조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사장조처럼 몸을 굽혀 명안 공주의 명을 받들었다.

“소신, 공주마마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거래는 성사됐다. 명안 공주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일어나거라. 너희가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주니, 나도 너희를 푸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오길 기다리겠다.”

진국 태자부 관저에서 나와 임안후부로 돌아온 사가 형제는 이 일을 의논했다. 사장무가 사장조를 탓했다.

“너, 너무 성급했어. 공주마마의 앞이라 약속했으나 이건 아니야. 자칫 잘못하면 큰일이 날 거야.”

사장조는 그의 말에 찬성하지 않았다.

“형님, 우리가 하지 않아도 공주마마는 다른 사람을 찾고도 남을 사람이야. 지금 형님과 나는 능력이 모자란 게 아니라 기회가 없는 거야. 성공하면 높은 관직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가 바라던 게 그거 아니야?”

“하지만 심묘는 보통 집안의 딸이 아니잖아. 납치에 성공한다 해도 다음엔 어쩔 거야? 심 장군이 곳곳을 수색하면 심묘를 숨길 곳이 없어. 어디도 안전하지 않아.”

사장무의 걱정에 사장조가 악질적인 미소를 지었다.

“우리 관저가 있잖아.”

“네 말은…….”

“심 장군이 온 정경성을 수색해도 우리 집을 수색할 수는 없어. 우리가 심묘를 납치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거야. 원한이 없으니 심묘를 납치할 이유도 없잖아. 아주 결백하지!”

사장무의 얼굴에도 걱정하던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흉악하게 웃으며 사장조의 말에 동조했다. 사장조가 즐거운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납치하느냐는 신중히 상의하고 결정하자고.”

* * *

정경성의 겨울은 어둠이 일찍 찾아왔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오래지 않아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조정 일은 매우 바빠서 심신을 비롯한 몇 사람은 힘들었지만 심묘는 편안했다. 그녀가 사가 형제와 명안 공주 사이에 모종의 협정이 맺어졌음을 알 리 없었다.

오늘 심묘는 초대장을 받았다. 풍안녕은 이전부터 계속 초대장을 보냈으나 심묘는 상재청의 일을 생각하느라 한 번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모든 초대에 나담이 대신 갔다. 마침내 풍안녕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오늘 풍안녕이 보낸 초대장에는 반드시 이틀 후 함께 상점 구경을 해야 하며, 만약 나오지 않으면 더 이상 친구 사이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심묘는 풍안녕이 친구임을 인정하고, 그녀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답변을 잘 적은 후 곡우에게 전하도록 했다. 경칩과 곡우가 나가자 심묘는 방문을 잠그고는 하품을 하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때, 이불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심묘는 매우 놀랐다. 방금까지 경칩과 곡우도 함께 있었는데 이 물체가 언제 들어왔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불가사의한 일에 소름이 돋았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자 이내 머리가 냉정해졌다. 자신은 한번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니 귀신을 봐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들어 올렸다.

이불 아래 큰 고양이처럼 생긴 동물이 있었다. 털은 보기 드문 흰색이었다. 이불 속에 웅크려 있던 동물은 이불이 걷히자 당황해 머리를 들었다. 심묘와 흰 동물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심묘는 순간 멍해졌다.

동물은 껑충, 심묘에게 달려들어 심묘의 소매를 입에 물며 놀았다. 백호였다. 심묘는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했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 아닌지 눈앞의 현실을 부정도 했지만, 그렇다고 백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서 온 백호인지 알 수 없어 혼비백산할 때, 어둠 속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교교.”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심묘의 소매를 물고 놓지 않던 백호도 일어나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불빛 아래 자줏빛 장포가 밝은 빛을 내며 드러났다. 용무늬를 수놓은 금실이 반짝였다. 노르스름한 등불에 한층 더 반짝여 인간 세상의 것 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사경행은 자신의 소매 끝을 무는 백호를 들어 올려 품에 안고 귀여워했다.

“장난도 심하지.”

심묘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사경행의 품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백호를 보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뭐라고 부른 거예요?”

“교교.”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그는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고 방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한마디 덧붙였다.

“아주 잘 어울리지 않아?”

심묘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의 아명을 동물의 이름으로 쓰다니, 사경행이 사리를 구별하는 사람이 맞는 건지 싶었다. 사경행은 익숙하게 작은 탁자에 앉아서는 자연스럽게 차를 따랐다.

“차가 아직 뜨거운 걸 보니 날 위해 준비해둔 모양이구나.”

“이 뻔뻔한!”

심묘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경행은 탁자 위를 보고 말했다.

“간식도 준비했구나. 그런데 난 배고프지 않은데, 괜한 수고를 했구나.”

사경행이 말한 간식은 경칩이 혹 심묘가 밤에 배고플까 봐 준비한 간식이었다. 그런데 사경행은 자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심묘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런 뻔뻔한 태도에 심묘는 번번이 할 말을 잃었다.

“요 며칠, 아주 피곤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다행히 이곳에서 잠시 쉴 수 있겠어. 고마워.”

심묘는 멈칫했다. 사경행이 여러 날 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밤에 불쑥 찾아오는 일에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뭐 하고 다닌 거예요?”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또 내 정보를 캐내려고?”

심묘는 부정하지 않았다.

“늘 이러면 불공평해. 너는 내 비밀을 적지 않게 아는데, 난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없잖아. 너도 네 이야기를 좀 해봐.”

심묘는 사경행에게 눈을 흘기고 싶었다. 사경행에게는 풍선전당포라는 정보통이 있으니 그는 명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모르는 척, 심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심묘는 사경행이 더욱 위험하게 느껴졌다.

“예왕 전하,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계 주인을 찾아가세요. 계 주인은 아주 기꺼이 예왕 전하께 알려줄 겁니다.”

심묘는 차갑게 답했다.

“계 주인에게 낭만적인 일은 묻지 않아. 내가 알고 싶은 것을 계 주인은 답하지 못해. 오직 너만이 답해줄 수 있지.”

“알고 싶은 게 뭐예요?”

사경행은 턱을 어루만지며 심묘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넌 부수의를 왜 좋아한 거지?”

심묘는 잠시 멍해졌다. 심묘는 사경행이 자신을 꿰뚫는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사경행과 말을 나누다 보면 전생의 그를 과연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나 싶었다. 그는 절대로 단명한 소년 영웅이 아니었다. 사경행은 총명하고 위험한 사냥꾼이었다. 사냥꾼은 조금만 틈을 보여도 치명적인 약점을 포착해낸다.

심묘는 스스로 적지 않은 정보를 드러냈기에 사경행에게 의심의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러니 그가 미래의 많은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자신에게 캐물으면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가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할 거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이 부수의를 좋아했던 이유는 천하 대계와 전혀 상관이 없지 않냔 말이다.

“그걸 왜 묻나요?”

사경행은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사경행의 시선과 마주했다. 등불 아래, 그는 자신을 주시했다. 수려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등불 아래에서 별처럼 빛났다. 온 하늘을 수놓은 별빛도 그의 눈빛에 미치지 못했다. 반짝임에 눈이 부셨지만, 단단히 사로잡힌 듯 시선을 뗄 수도 없었다.

들여다볼수록 그의 눈빛은 조금 다른 감정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뭔가를 캐묻는 듯했다. 불처럼 뜨거운 그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질문에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였다. 그때 심장이 갑자기 격렬히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두근거림에 허둥댔지만, 밖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차가운 겨울, 어두운 촛불 아래 사경행은 모든 것을 통찰한 듯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그때, 백호가 재채기를 했다. 먼지가 코에 붙은 탓인지 적막을 깨면서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저 호랑이가 아픈가 봐요.”

정신을 차린 심묘는 백호를 가리키며 묘한 분위기를 피하려 했다. 사경행도 백호를 들어 바라보았다.

“교교, 약하기도 하지!”

백호를 바라보며 한 말이지만 정말 백호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심호흡을 했다. 사경행이 백호에게 자신의 아명을 붙였으니 군자답지 못한, 악질적인 장난을 친 셈이었다. 장래 누가 백호를 욕한다면 자신을 비난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심묘는 백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연이어 사경행을 바라보는 시선도 사나웠다.

“약한 것 같으면 고 태의에게 봐 달라고 하세요. 고 태의는 의술이 출중하니 동물도 잘 치료하겠지요.”

사경행은 심묘의 비꼼에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교교는 고 태의를 좋아하지 않아. 내게 달라붙어 있길 좋아하지.”

심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자신을 난감하게 하는 게 확실했다.

“예왕, 아직 안 가세요? 제가 좀 쉬어야 해서요.”

“풍안녕과는 놀러 갈 거면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내쫓다니 정말 무정하네.”

사경행은 불만을 품은 듯 말했지만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간 후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의 답은 나중에 해줘.”

사경행의 그림자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심묘는 창문을 닫고 등불을 껐다. 침상에 올라 이불을 덮으니 방은 아주 고요했다. 사경행이 다녀간 것이 마치 꿈 같았다. 그러나 탁자 위에 남은 찻잔이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모두 현실이었다. 심묘는 심장 부근을 쓰다듬었다. 격렬하기 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평온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다.

* * *

며칠 동안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풍안녕과 외출하기로 한 날이 되자 하늘이 도왔는지 오랜만에 해가 보였다. 햇볕이 사방을 비춰 따뜻했다. 그러나 심묘는 토끼털 피풍의를 걸쳤다. 집에는 화로가 있으나 바깥은 바람이 부니 방심했다가는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을 터였다.

아침 일찍, 풍안녕의 마차가 나담과 심묘를 데리러 심부 입구로 왔다. 풍가는 풍안녕을 아주 귀여워하는 데다 풍안녕은 아주 활발했다. 그녀는 부에 가만히 있지 못해 광문당 공부를 마치면 매일같이 외출을 했다. 그래서 이미 정경성을 둘러보고 싶어 하는 나담의 단짝 친구가 된 후였다. 그녀는 나담을 위해 길 안내를 하며 신선한 장소와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풍안녕은 나담과의 외출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나씨 가문 출신답게 나담은 장신구나 의상 점포보다 무기 점포를 좋아했다. 무기 점포에 가 무기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무기 점포를 풍안녕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줄곧 죽는소리를 하던 풍안녕은 나담을 설득하길 포기하고, 심묘와 함께 고통을 나누기로 마음을 먹었다.

풍안녕은 앵두색 꽃장식이 달린 치마에 채색 무늬 피풍의를 걸쳤다.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 굳이 흠을 찾자면 이 고운 모습에 도도함이 남아 있다는 점 정도일까. 그녀는 마차의 발을 들어 올렸다.

“기다리다 죽겠어. 얼른 타.”

풍안녕은 그곳에 심구도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심구는 심묘와 나담을 배웅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는 심묘의 정경성 친구가 풍안녕 한 명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2년 전에 날뛰던 아가씨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차의 발 너머 윤기 흐르고 생기가 도는 아가씨가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풍안녕은 심구를 보고 움츠러들었다. 괄괄한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심 소장군님.”

심구는 영문을 몰라 풍안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심묘와 나담이 마차에 오르자 그는 안전에 주의하라고 분부한 뒤 자리를 떠났다. 풍부의 호위도 적지 않아 심묘와 나담은 따로 호위를 데려가지 않았다. 돌아올 때도 풍안녕의 마차를 타고 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심구가 사라지자 풍안녕은 명치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풍안녕은 반사적으로 심구를 두려워했다. 심구가 풍안녕에게 험한 표정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장군의 위엄이 배어 있었다. 지난 2년 사이, 소춘성의 경험이 심구를 더욱 성숙하고 의연하게 만든 걸 그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여전히 심묘에게 따뜻한 오라버니지만 풍기는 위엄은 더 짙어진 듯했다.

“어, 너 왜 얼굴이 빨개?”

나담의 물음에 풍안녕은 자기 뺨을 어루만졌다. 유달리 볼이 뜨거웠다. 그녀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마차 안이 너무 갑갑해서 조금 열이 났나 봐.”

“너무 두껍게 입었나 보네.”

풍안녕의 옷차림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담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너 왜 심구 오라버니를 무서워해?”

“내가 언제 무서워했다고?”

풍안녕은 급히 반박했다. 그녀의 반응에 나담이 오히려 놀랐다.

“너 방금 아주 무서워했어. 뭐가 부끄러운 거야? 심구 오라버니는 아주 좋은 사람이야. 겉만 보면 흉악해 보이지만. 심구 오라버니가 무서우면 나십 오라버니를 봐야 하는데. 심구 오라버니가 보살 같을 거야.”

나담은 애먼 나십의 흉을 봤다. 풍안녕이 아무렇지 않은 척 강조했다.

“무서워하지 않는다니까.”

“그래그래, 네가 무서워하지 않으면 돼.”

묵묵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심묘는 발그레한 풍안녕의 양 볼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전생에 광록훈가는 줄을 잘못 섰다. 이에 풍 대인도 연루되었고, 풍가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풍안녕을 먼 친척 사촌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그 사촌은 겉으로는 훌륭하나 속은 보잘것없는 남자였다. 풍안녕과 혼례를 올린 지 1년도 되지 않아 첩을 들이고 그 사이에서 아들도 보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녀를 풍가가 떠넘긴 짐이라고 공공연히 욕하기 일쑤였다. 억울함을 당하고 참을 성격이 아닌 풍안녕은 첩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현생에서는 심묘 자신 때문에 여러 가지가 어지럽게 뒤섞였다. 명제 황실의 세력은 모두 엇비슷했고, 풍 대인도 아직 누군가에게 줄을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생 같은 결말이 나지 않을 거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자신은 풍가의 흥망성쇠에 어떤 감정도 없었지만, 풍안녕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이라 여길 수만도 없었다. 풍안녕을 볼 때마다 완유가 떠올랐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연루되어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다니 가련한 운명들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풍안녕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심묘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심묘가 나담의 말에 동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도 내가 네 오라버니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

나담이 몰래 웃었다. 정신을 차린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네 치마가 예뻐서.”

풍안녕은 자신의 치마를 칭찬하는 심묘의 말에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맞아.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찾아주신 치마야.”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우고 속으로 조용히 탄식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연분이 있다. 마음이 급하면 될 일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런 일은 시간을 충분히 두고 생각해야 했다.

오늘 외출은 풍안녕, 나담 두 사람끼리 돌아다닐 때보다 더욱 가혹한 일정이었다. 풍안녕은 장신구, 재봉 점포에 가고 싶어 했고, 나담은 무기류를 보러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 동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북쪽까지 가로지르기를 수차례. 게다가 나담과 풍안녕이 계속 말다툼을 해서 심묘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한바탕 말다툼을 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심묘가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고 누구 편도 들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나이 든 노인이라도 되냐며 불만을 터트렸다. 그래도 심묘는 끝끝내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래도 세 아가씨는 구석구석 잘 돌아다녔다. 마차에 물건을 실을 곳이 없을 정도였다. 풍안녕은 나담과 심묘가 무언가 마음에 들어 하면 바로 구매했다. 심묘가 막지 않았다면 풍안녕은 장신구 점포를 그대로 부에 가지고 가려고 했을 것이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자 태양도 빠르게 서쪽으로 기울었다. 세 사람도 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막 마지막 점포에서 나와 마차에 앉았을 때, 풍안녕이 주머니를 뒤지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방금 산 묘안석(猫眼石, 고양이 눈 모양의 가느다란 빛을 내는 보석) 비녀가 보이지 않아.”

오늘 풍안녕이 산 것 중에 가장 흡족해하던 것이었다. 묘안석은 황록색 계열이 많은데, 그건 보기 드문 투명한 청색이었다. 풍안녕은 식사를 하면서도 그 비녀를 또 한번 꺼내 심묘와 나담에게도 자랑했다.

“다시 찾아봐. 여태 손에 들고 있던 게 왜 안 보여?”

심묘의 말에 풍안녕이 다시 한번 주머니를 뒤졌다. 여종들에게도 물었으나 모두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식당에서 떨어뜨렸나?”

나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몰라.”

“그럼 돌아가 보자. 막 나왔으니 떨어뜨렸다면 식당 사람이 주웠을 거야. 내가 함께 가줄게.”

심묘의 말에 풍안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만 갈게. 못 찾으면 말지 뭐.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는데. 에이, 은자가 아깝다.”

나담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풍가는 이렇게 돈을 헤프게 쓸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풍가는 풍안녕을 애지중지해서 은자를 모자라지 않게 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아까운 줄 모르고 씀씀이가 헤펐다.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다고 하기엔 나담 자신과 외출했을 때마다 산 게 한 보따리였는데. 게다가 막 구매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다니 나담은 혀를 찼다.

“호위들을 데리고 가볼게. 나담 언니는 심묘랑 여기서 기다려. 바로 올게.”

풍안녕의 말에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호위 대부분을 데리고 갔다. 위세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하기야 식당 점원이 비녀를 주워놓고도 감추려 한다면, 호위들을 보고 두려워서 내놓을 터였다.

풍안녕이 식당으로 향하자 나담과 심묘만 마차에 남았고, 마차는 네 명의 호위가 지키고 있었다. 나담은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에 도착하면 어둡겠다. 오늘은 정말 피곤해. 난 내일 게으름 부릴 거야. 누구도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미리 말해둬야지.”

나담은 기지개를 켜고,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호위의 말소리가 들렸다.

“심 소저, 나 소저. 방금 풍 소저의 비녀를 주웠습니다.”

“뭐?”

놀란 나담이 마차의 발을 들었다. 호위 한 명이 반짝이는 비녀를 들고 서 있었다. 풍안녕이 떨어뜨린 묘안석 비녀였다.

“풍안녕, 이 무슨 우둔한 짓이야. 물건을 떨어뜨린 곳도 모르다니.”

나담이 눈살을 찌푸렸고 호위는 마차로 다가왔다. 나담이 손을 내밀어 그 비녀를 받으려 할 때, 갑자기 호위가 나담을 밖으로 확 잡아당겼다. 다른 호위 한 명이 마부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린 뒤 채찍으로 말을 맹렬히 내리쳤다. 놀란 말은 거리 위를 미친 듯이 달렸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남은 두 명의 호위가 사태를 수습하려 했을 때, 심묘를 태운 마차는 이미 멀리 달려가 버렸다. 그나마 다행히도 나담이 마차에 남아 있었다. 민첩한 나담은 호위가 그녀를 잡아당길 때 마차 가장자리를 단단히 붙잡고 몸을 뒤로 젖혀 버텼다.

거리를 다니는 많은 백성이 흉포하게 움직이는 마차에 놀라 몸을 숨겼다. 미처 마차를 피하지 못한 소상인은 점포와 함께 뒤집혔다. 마차는 매우 빠르게 달렸다. 심묘와 나담도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나담은 심묘의 손을 꼭 잡았다.

“심묘야, 두려워하지 마.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뛰어내려서 도움을 청하는 거야. 바깥에는 사람이 많으니 저들도 두려워할 거야.”

심묘는 나담의 마음 씀씀이에 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늦었어. 바깥을 봐.”

밖을 바라본 나담은 놀라 얼이 빠졌다. 익숙한 거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나담은 절망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마차에서 뛰어내리자고 다시 한번 설득했다. 적어도 목숨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량하고 인적 없는 곳에 있으니 마차에서 뛰어내려도 도마 위 물고기였다.

“걱정하지 마. 저들은 날 노리고 온 것일 테니 때가 되면 언니는 기절한 척해서 도망쳐. 저들이 언니에게 어찌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널 버리고 혼자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나? 넌 소춘성에서 나가를 구했어. 설령 내가 널 구하지 못한대도 널 버릴 수는 없어. 죽어도 같이 죽자.”

심묘의 말에 나담이 심묘의 손을 잡았다.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영웅의 면모를 보일 때가 아니었다. 심묘는 흔들리는 마차에서 몸을 세우고 그녀에게 귓속말했다.

“기억해. 언니가 도망에 성공하면 예왕부에 편지를 보내. 거래할 것이 있으니 대가는 후에 치를 거라고.”

나담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왕 전하와 무슨 관계가 있어? 심묘, 너…….”

“많은 건 묻지 마. 이 일은 중요해. 예왕 전하의 일은 다른 누구에게도 꺼내지 마. 난 언니를 믿고 말해준 거야.”

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난 너 혼자 둘 수 없어.”

심묘가 나담을 재차 설득하려 할 때 마차가 거칠게 멈춰 섰다. 심묘와 나담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고 마차 안 물건들도 마구 흐트러졌다. 마차 발이 사납게 들어 올려졌다. 한 사람이 심묘를 바깥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나담이 심묘의 허벅지를 껴안았다.

“심묘야!”

나담은 젖먹던 힘까지 썼지만, 심묘를 끌고 가려던 사람은 그녀를 발로 세게 찼다. 나담이 나가에서 무술을 훈련했더라도 아직 어린 아가씨였다. 걷어차인 나담은 마차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담이 마차에 부딪히는 소리에 심묘가 놀라 뒤를 쳐다봤다. 다른 호위가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움직여. 발각되면 안 돼!”

그들은 마차를 부쉈다. 한 사람은 천으로 심묘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었다. 심묘를 기절시킨 남자는 말 등에 심묘를 던졌다. 이를 본 나담의 눈에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나담은 마차에서 떨어진 단도를 힐끗 보았다. 오늘 외출에서 산 것이었다. 나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도를 들고 남자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남자는 무술이 뛰어나 몇 번의 합만으로 나담을 쓰러뜨렸다.

보통 호위가 아니었다. 병가 특유의 동작이 몸에 배어 있으니 이 두 사람은 군대에 속하거나 속했던 자들인 게 틀림없었다. 나담의 중얼거림을 들은 남자는 흉악한 눈빛으로 단도를 빼앗아 나담을 찔렀다. 그녀는 허리를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남자가 마무리를 지으려 할 때 다른 남자가 재촉했다.

“꾸물대지 마! 빨리 가자!”

남자는 칼을 버리고 말 위에 올랐다. 두 사람은 심묘를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음산한 골목, 부서진 마차, 바닥에 쓰러진 아가씨. 나담의 살구색 의복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 * *

풍안녕이 호위 두 사람의 뺨을 때렸다. 호위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두 소저를 보호하지 못했으니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처벌? 내가 너희를 어떻게 처벌할까? 곤장을 칠까? 아니면 팔아버릴까? 너희를 처벌하면 나담 언니와 심묘가 돌아올 수 있어?”

풍안녕은 분노에 찬 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도 마차를 쫓으려 했지만, 마차가 너무 빨리 달렸다. 이미 한참 멀어진 채였다. 납치범들은 미리 짠 것처럼 좁은 골목으로만 가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풍안녕은 미칠 것 같았다. 식당에서 묘안석 비녀에 대해 묻고 돌아오니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수군거리기에 여종을 보내 물어보니 누군가 자신의 마차를 빼앗아갔다고 했다. 오래지 않아 남은 두 호위가 돌아와 마차의 행방을 쫓지 못했다고 했다. 풍안녕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비녀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평소 계략을 잘 모르는 자신도 이 일은 누가 교활하게 계획한 일임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 풍가 호위에 섞여 심묘와 나담을 납치한 것이었다.

심묘와 나담의 신분은 고귀했다. 심묘는 심신의 적녀이며 나담은 나설안의 조카딸이었다. 납치범들이 이렇게 큰 위험을 무릅쓴 것을 보면 심묘와 나담이 위태로운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풍안녕은 온몸이 떨렸다.

심묘와 나담은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외출했다. 게다가 도중에 자신이 호위들을 거의 다 끌고 식당에 갔다. 점원들을 겁주면 자신을 속이지 않으리라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깟 비녀가 뭐라고. 호위들을 많이 남겨놨더라면 납치범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장군부 호위를 불편해하지 않았다면 심묘가 장군부 호위를 데려왔을 것이고, 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풍안녕은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같았다. 그녀가 비틀대자 여종이 놀라 얼른 부축했다.

“아가씨, 자책하지 마세요. 몸이라도 상하시면 주인어른과 마님이 마음 아프실 겁니다.”

풍안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쓴웃음이 얼굴에 피어났다.

“부모님의 마음이 아플 거라고? 심묘와 나담의 일을 알게 되면 심 부인과 심 장군님은 어떠시겠어? 목숨으로도 잘못을 보상하지 못할 거야.”

말을 마친 풍안녕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했다.

“무슨 일이지? 교교는? 나담은 어디 있어?”

엄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풍안녕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심구였다. 그의 뒤로 한 무리 병사가 따라왔다. 그들의 용감한 기세에 주변 사람들은 움츠러들었다.

심구는 오늘 일을 일찍 끝내고 장군부로 돌아가 심묘와 나담에게 후일 사냥에 함께 갈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부하가 심묘와 나담에게 사고가 났다고 보고했다. 심신과 나설안은 이 일을 아직 몰랐기에 심구만 서둘러 사고가 난 장소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 도착하니 암담한 분위기가 흘렀다. 게다가 괄괄하다고 여겼던 아가씨가 길가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으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풍안녕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생겼소?”

풍안녕은 멍해졌다. 그녀의 앞에 선, 체격이 큰 심구의 눈빛이 초조했다. 풍안녕은 심구에게 방금의 일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심구와 심묘의 사이는 좋았다.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었다. 심구는 심묘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심묘가 납치당한 것을 알면…….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풍안녕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가게를 다 돌아본 후 심묘와 나담 언니는 마차에 남았어요. 전 식당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갔는데……. 풍부 호위 중 첩자가 있었어요. 그들이 마차를 훔쳐 나담과 심묘를 납치했어요. 이미 아버지께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했지만……. 죄송해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풍안녕이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다. 심구는 주먹을 팽팽히 쥐었다. 뼈마디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큰 소리가 났다.

심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매우 평온한 목소리로 모경에게 지시했다.

“관아에 보고해서 성을 봉쇄하고 두 사람을 찾아라. 그리고 심가군을 즉시 출동시켜라. 성안 곳곳을 수색하고 두 사람을 찾으면 황금 만 냥을 보상금으로 주겠다고 해라. 내 패를 줄 테니 명령을 하달하라!”

황금 만 냥! 주위 사람들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풍안녕도 잠시 놀랐지만, 더욱 자책하기 시작했다. 심구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황금 만 냥을 선뜻 내놓았다. 아무리 장군부라고는 하지만 매우 큰 돈이었다. 이로써 심묘가 심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심묘의 생사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다. 모경은 엄숙한 표정으로 명을 받들고 떠났다.

“관아에 보고하면 성을 봉쇄할 수 있지만, 반드시 유언비어가 돌 거예요. 심묘와 나담 언니의 명성에 누가 될 겁니다.”

풍안녕은 여자의 명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았다. 심묘와 나담이 납치당했으니 이 일이 소문나면 반드시 악의적인 추측도 떠돌 것이었다. 심가는 정경성에 적이 많으니 이용당할 가능성도 높았다.

“명예가 생명보다 중요할 순 없습니다. 설령 아이들의 명예가 무너진다면 심가가 평생 데리고 살면 되오.”

심구는 몸을 돌려 풍안녕과 멀어졌다.

“죄송해요. 오늘 일은 전부 제 탓이에요. ……후일 사과드리러 가겠습니다.”

“이 일은 당신과 무관합니다. 납치범들은 작정하고 계획한 거요. 동생들의 신분을 알고도 이런 일을 벌였으니 당신이 아니더라도 기회를 찾아 납치했을 겁니다.”

심구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풍안녕은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 심구가 담담히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신을 보면 분풀이를 할 수 있으니 풍 소저는 잠시 동안 장군부를 방문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심구는 풍안녕을 돌아보지 않고 큰 걸음으로 사라졌다. 풍안녕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지가 심구에게 물었다.

“공자님, 마님과 주인어른께 알리지 않고 직접 심가군을 동원하실 겁니까?”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어! 교교와 나담이 몹시 위험해. 장군부를 겨누다니, 놈들을 잡으면 가만 안 두겠다! 경조윤으로 간다. 정경성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야!”

좀 전까지 평상심을 유지하던 소장군은 극도로 격양돼 있었다. 그는 말에 올라탔다.

심묘와 나담이 납치된 일은 정경성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녀들이 납치되는 현장을 직접 본 백성들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풍가 호위와 심가군은 물론이고 경조윤, 성 수비군 같은 아문(衙門, 관공서)까지 전부 출동했으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심신이 딸을 아끼는 마음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정경성을 쥐 잡듯이 수색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나설안과 심신은 조회를 마치고 난 뒤에야 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즉시 식사까지 거르며 깊은 밤까지 두 사람을 찾아다녔다.

* * *

막 예왕부에 도착한 사경행은 계우서와 고양이 안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고양의 신분이 민감하기 때문에 사경행은 이 두 사람과는 주로 풍선전당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함께 예왕부에서 사경행을 기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경행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든 물건을 철의에게 건넸다. 백호는 사경행을 보고 달려들더니 그의 바짓단을 물어뜯었다. 사경행이 백호를 안아 올렸다.

“무슨 일이야?”

고양이 계우서를 한 번 바라보았다. 계우서는 백호를 한참 주시하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형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

“뭔데?”

사경행은 오늘 정경성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 터라 성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계우서는 초조해 보였으나 입을 떼기는 망설여지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소식을 돌려 전했다.

“근래 정경성은 치안이 그다지 좋지 않아. 오늘 어느 아가씨들이 성에서 안 좋은 일을 당했어. 호위에 납치범들이 섞여 있어서 마차째로 납치당했다고 하더라고. 그 마차에 관가 소저 두 명이 있었다는데, 아직 그들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네.”

사경행은 계우서를 주시했다. 그의 시선에 간담이 서늘해진 계우서가 머뭇거렸다.

“나랑 고양 형은 형한테 부탁하는 거야. 형의 미모는 그 소저들보다 못하지 않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해.”

“계우서.”

사경행은 평온하게 계우서의 이름을 불렀다.

“말할게! 형도 아는 소저야. 심묘!”

계우서는 빠르게 외친 뒤,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나 고양의 몸 뒤로 숨었다.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3형은?”

계우서가 텅 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백호만 바닥에서 울고 있었다. 고양이 차가운 눈초리로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자네 바본가?”

“형보다 똑똑하니까 됐잖아.”

그때, 성안 곳곳에서 심묘의 행방을 찾던 심구는 나담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전해온 모경이 말했다.

“나 소저가 곧 죽을 것 같습니다.”

나담은 정경성 서쪽, 후미진 골목에서 발견되었다. 복잡한 골목길이라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아지와 성 수비군은 정경성 구석구석에 익숙했기에 나담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나담을 찾았지만, 그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나담의 허리와 배 부근에 칼에 깊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그녀를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탓에 장군부에 도착했을 때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의원 몇몇이 왔으나 나담의 상처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분노한 심신은 자칫 칼을 뽑을 뻔했다.

“모두 돌팔이 의원뿐이구나. 서신을 들고 가서 궁중 태의를 모셔오너라! 태의원의 사람은 의술이 뛰어나 사경에 빠진 환자도 살려내지 않더냐? 누구든 나담을 살려내면 큰 상을 내리겠다!”

나설안의 말에 심구는 수하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나담이 누워 있는 침상을 둘러쌌다. 나설안의 눈언저리는 매우 붉었다.

“누가 감히 이런 거지? 어찌 이리 독하고 악랄한 짓을!”

나릉의 눈빛 역시 무거웠다. 사촌 여동생인 나담이 생사불명의 상태에 빠졌는데도 도울 수 없으니 진정으로 괴로웠다. 게다가 심묘의 행방은 아직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나담의 상처만 보아도 납치범이 얼마나 흉악무도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심묘가 어떤 처지일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심가군은 백성들의 집은 물론 거리와 골목도 싹 다 뒤졌다. 그러나 샅샅이 수색했음에도 심묘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남은 것은 관가 관저뿐인데, 들어가 보고 싶어도 그럴 권한은 없었다. 장군부는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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