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8권
37장
심묘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눈은 가려져 있지 않았다. 납치범이 눈을 가리는 것을 잊었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넓은 공간에 책상과 궤짝, 침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 어떤 관저 안의 밀실 같았다. 손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심묘는 조용히 방을 둘러보았다.
바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기절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담은 도망을 쳤는지, 사경행에게 이 상황을 잘 전달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지금 심신은 정경성 안에서 가장 두려운 인물이다. 병권도 가지고 있으니 평범한 사람은 심신을 건드릴 수 없다. 문혜제가 심신에게 의지하려 하니 심신의 위치는 점점 올라갈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아직 진국과 대량의 사절이 떠나지 않은 상황이다. 심묘는 이렇게 대담하게 앞뒤 가리지 않고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구인지 금세 추측할 수 있었다. 명안 공주 말고는 이렇게 무모하고 거친 수완을 쓸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명안 공주가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몰랐다. 그녀가 정경성 안에서 부릴 수하를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을 터. 황보호 역시 이런 위험한 수완에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심묘를 납치한 사람은 풍가 호위에 섞여 들어왔으니 필시 풍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심묘와 풍안녕이 갈 곳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마차를 빼앗아 인적이 드문 좁은 골목을 이용한 사실은 한 가지 단서를 더 주었다. 명안 공주가 부리는 사람은 명제의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정경성에서 성장한 사람이 분명했다.
명안 공주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수하로 부렸을 리 없다. 그렇다고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도박에 인생을 걸 리도 없다. 모든 일이 드러나면 심신이 순순히 놓아줄 리 없기 때문이다. 명제 관리들은 유리한 것만 좇고 해로운 것은 피하기에 이렇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위로 높이 오르려는 갈망, 목숨까지 건 사람만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다. 심묘는 명제 관료 중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명안 공주와 연루되면 심신에게 많은 말썽이 생길 터였다. 심묘는 사경행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 사람이라면 자신을 가장 빨리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사경행에게는 정보통인 풍선전당포가 있다. 풍선전당포는 곳곳에서 정보를 얻으니 납치범이 아무리 정경성에 익숙하다 한들 풍선전당포를 이길 수 없다. 심묘는 사경행이 빨리 자신을 찾아주길 바랐다.
심묘는 있는 힘을 다해 손을 소매 안으로 움츠려 넣었다. 손을 묶은 끈은 아주 팽팽해 소매 안에 든 비녀를 잡자 피부가 벗겨질 정도였다. 이 비녀는 위기 상황을 대비해 직접 만든 비녀였다. 비녀의 끝이 휘어져 있어 상대방의 눈을 찌르면 실명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 역시 전생의 궁중에서 배운 수완이었다. 심묘는 이 비녀로 손발을 결박한 끈을 풀려고 했다.
비녀를 끈에 막 댔을 때,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심묘는 재빠르게 비녀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 눈을 감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장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심묘를 옮길 수 있겠어?”
“당황할 거 없어. 지금은 우리가 유리해. 한동안 숨겨놨다가 옮겨도 늦지 않아.”
두 사람이었다. 심묘는 눈앞의 사람이 몇인지 확신했다. 명안 공주가 어디로 옮기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곳은 아닐 터였다. 그래도 대화를 들어보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심신이 자신이 납치되자마자 즉시 성안을 수색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많은 눈이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납치범이 자신을 옮기는 건 곤란할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상황이 더 나빠질 리 없었다.
다만 납치범들의 목소리가 조금 귀에 익어 의아했다. 그러나 심묘는 자는 척하느라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심묘는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망설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아직도 안 깨어나지?”
“형님, 지금이 어느 때인데 심묘한테 관심을 가져? 그럴 여유가 있어? 걱정하지 마. 심묘가 깨어나지 못해도 공주마마는 좋아할 거야. 공주마마를 봤잖아. 심묘가 처참할수록 좋아할 테니 생사는 상관없어.”
“난 걱정이야. 이 일이 아버지께 발각되면…….”
형이라고 불린 남자는 조금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아시면 뭐 어때서? 잊지 마. 형과 나는 아버지의 친아들이야. 아버지는 앞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고. 게다가 심가와 사가는 사이가 좋지 않아. 형은 아버지가 심가를 위해 친아들을 신고할 사람이라고 여겨?”
사가? 심묘의 속눈썹이 떨렸다.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납치범이 사가 사람이라니,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개였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두 사람은 사장무와 사장조이다!
그럼에도 심묘는 이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명안 공주가 사가 형제와 동맹을 맺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사장무와 사장조는 줄곧 사경행에게 불만을 품었으나, 전생에서 그들은 부수의를 주인으로 모시며 참고 견뎠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납치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임안후부는 명제의 명문대가라 서자여도 보통 관가의 적자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 사장무와 사장조가 범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임안후부는 그대로 망할 텐데, 두 사람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쳇, 이곳은 안전한 거야?”
“당연히 안전하지. 심 소저가 우리 부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게다가 우리 부에 이 밀실을 아는 사람은 나랑 형 두 사람뿐이야. 심신이 폐하의 구두 명령을 얻어 우리 부를 수색한다 해도 여긴 찾지 못해. 맹세할 수 있어.”
사장조가 웃으며 사장무를 안심시켰다. 득의양양한 말을 듣고서야 사장무는 안도했다.
“그럼 됐어. 이 일은 성공과 실패가 한순간에 결정돼. 조그만 실수도 하면 안 돼.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빠르게 옮기자.”
사장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조는 바구니에서 물과 밥을 꺼내 심묘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개의 그릇을 심묘 앞에 놓았다.
“깨워서 지금 먹일까? 굶겨 죽일 수는 없잖아.”
“괜찮아. 심 소저가 입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금지옥엽으로 자란 심 소저가 개처럼 엎드려 식사했다는 걸 공주마마가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기쁜 마음에 우리 칭찬을 더 할 수도 있다고.”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그래, 일단 의심 사지 않게 나가 있자.”
두 사람이 떠나는 소리에 심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바닥에는 물과 밥이 한 그릇씩 놓여 있었다. 다행히 사장무와 사장조가 먹지 못할 음식을 주지는 않았다.
심묘는 탄식했다. 전생에 냉궁에서 먹다 남은 찌꺼기와 쉰 밥, 반찬을 먹은 적이 있다. 살기 위해서라면 존엄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 언젠가 기회가 있을 때 보복하면 될 일이다. 심묘는 사장무와 사장조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임안후부의 밀실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가가 이곳을 찾기는 힘들 터였다. 문혜제의 구두 명령 없이 관료의 관저를 수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황제의 구두 명령을 받으려면 확실한 증좌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 형제는 평소 심묘와 조금의 접점도 없다. 그러니 그들이 납치범이라고 의심할 이유도 없다. 설령 구두 명령을 받는다 해도 사가 형제의 말처럼 이 밀실이 아무도 모르게 잘 숨겨져 있다면…….
사가 형제도 목숨을 건 도박을 한 셈이니 그만큼 안전한 장소를 찾았을 게 분명했다. 이는 자신에게는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심묘는 그릇에 담긴 맑은 물을 바라보며 지금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속으로 불렀다. 사경행.
* * *
장군부.
궁중 태의가 도착했다. 온화한 인상의 태의는 흰옷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었다. 의술 도구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어느 귀족 가문의 자손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사람을 치료하러 온 것이 아니라 꽃을 감상하러 온 사람 같았다. 궁중에서 온 젊은 태의는 고양이었다.
나설안과 심신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고양을 바라보았다. 궁중에서는 고양의 의술을 칭찬했지만, 그가 진찰한 궁중 사람들은 모두 후궁이었다. 여자들은 늘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니 수려하게 생긴 고양의 외모를 보고 의술도 고명하다고 칭찬한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대개 의원의 나이가 많을수록 의술도 탁월하다는 편견을 가졌는데, 심신 부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 고양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담은 몹시 위중한 상태였다. 궁중에서 다른 태의를 데려오는 동안 그녀가 더 버티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양은 나담의 맥을 짚었다. 사람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숨결이 미약하고 맥의 상태가 무질서합니다.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폐까지 찌른 데다 많은 피를 흘렸으니 어렵겠습니다.”
“또 돌팔이구나! 심구야, 다시 네 아버지의 서신을 가지고 의원을 모셔오너라.”
“잠깐.”
고양이 나설안을 막아섰다.
“어렵다 했지 치료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왕진을 요청하고서 또 다른 의원을 찾는다니, 심 장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말 나담을 구할 수 있겠나?”
심구는 한 걸음 다가와 고양에게 물었다.
“시간을 더 허비하면 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좋다. 사람을 쓸 때 의심하지 말라 했으니 당신을 믿겠네. 나담이 나으면 고 태의에게 거금을 주리다.”
심신은 고양에게 나담을 부탁했다.
“어디 감히 그럽니까. 의원은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치료할 뿐이니 은자는 필요 없습니다. 나 소저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시간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나 소저에게 침을 놔야 하니 바깥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나설안은 웃으며 말하는 고양이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심신은 이미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심구와 나릉도 심신의 뒤를 따랐다. 모두 고양이 굳이 가족들을 내보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탐탁지 않았으나 능력 있는 사람들은 괴상한 버릇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 속으로 자신을 달랬다. 특히나 의술은 보고 따라 할 수도 있으니 그들은 고양이 이를 걱정한다고 여겼다. 하나둘 밖으로 나가자 나설안 역시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방에는 고양과 의식 없는 나담만 남았다. 고양은 왕진 가방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심묘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가족한테까지 잘 보여야 해?”
그가 천 가방을 펼치자 십여 개의 크고 작은, 각자 다른 형태의 금침이 나타났다. 고개를 가로저은 고양이 나담의 옷을 풀며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실례하오. 나도 하고 싶지 않소만, 이후 책임을 묻고 싶다면 예왕부에 가서 가면을 쓴 사람을 찾으시오.”
* * *
시일은 쏜살같이 지나 이틀이 흘렀다. 이틀 동안 고양은 탁월한 의술을 가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침을 두 번 놓고 약을 두 그릇 처방했다. 그사이 나담을 보러 온 여러 의원은 여전히 가망이 없다고 고개만 흔들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나담의 숨결은 점점 평온해졌고 맥도 이전보다 힘이 있었다. 그제야 의원들은 적어도 나담이 목숨은 부지했다고 했다.
고양을 의심했던 나설안은 그를 귀빈으로 모셨다. 나설안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그를 장군부에 머무르게 했다. 나담의 병세는 다행히 안정되었으나, 심묘의 행방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납치 사건을 알게 된 문혜제는 발칵 성을 냈다. 눈엣가시로 여기는 심신의 일이었지만,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한 일이었으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황제의 발밑에서 관가의 적녀를 납치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진국과 대량의 사절이 명제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정경성의 백성이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떠벌리는 셈이다. 그래서 문혜제는 심신이 심묘를 찾아 정경성을 수색하는 일을 묵인했다.
그러나 심묘의 행방을 찾을 만한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백성의 집과 상점, 거리는 이미 다 조사했으니 남은 것은 관료의 관저뿐이었다. 관저의 수색은 자칫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관리 가문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뒤얽혀 있기에 자칫 벌집을 건드리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문혜제도 거기까지는 원치 않았다.
이에 심묘의 수색은 교착 국면에 빠졌다. 병사들이 종일 순찰하면서 정경성의 치안은 좋아졌지만, 장군부 사람들은 가슴이 불에 타는 것 같은 괴로움에 휩싸였다.
* * *
임안후부 서재.
사장무와 사장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군부가 바짝 주시하고 있어서 심묘를 옮길 방법이 없어. 이렇게 가다간 명안 공주가 책망할 거야.”
사장무의 말처럼 명안 공주는 이미 분노에 찬 상태였다. 사가 형제가 심묘를 납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기원으로 보낼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명안 공주는 하루라도 빨리 심묘가 기녀가 되길, 그래서 그녀가 차라리 빨리 죽어 편해지길 바라는 걸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심신이 많은 인원을 동원해 심묘를 찾고 있으니 사가 형제는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심묘를 계속 밀실에 가두어뒀다. 성격 급한 명안 공주가 이를 참고 볼 리 없었다. 그녀는 오늘 일찍 사람을 보내, 심묘를 당장 옮기지 않으면 이 거래는 무효라고 경고했다.
심신이 수하를 시켜 심묘를 찾아다니고, 명안 공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조여오니 진퇴양난이었다. 사가 형제가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머리가 아픈 상황이었다.
“형님, 조급해하지 마. 심 장군의 수색이 지독하니 우선 들키지 않는 게 최우선이야.”
“난 급하지 않아. 하지만 이럴 상황이 아닌데 공주가 재촉이 심하네. 들킨다면 그녀도 안전하지 못할 텐데.”
사장무는 답답해하며 명안 공주를 탓했다.
“공주는 심묘가 치욕을 당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것뿐이야. 기원에 심묘를 팔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들일 수는 있어. 임안후부로 막일하는 사람을 부르자. 유모가 사람을 사면 의심받지 않을 거야.”
사장무는 멍해졌다. 명안 공주는 사장조의 말처럼 누군가 심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을 바랄 뿐이다. 바깥의 감시 때문에 심묘를 옮길 수 없으나 외부 사람을 끌어들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어차피 심묘는 독 안에 든 쥐였다. 굳이 기원에 팔아넘기지 않아도 명안 공주의 마음을 만족시킬 다른 방법이 있었다.
“너, 이미 생각해둔 게 있구나.”
“아버지는 오늘 호부랑중 연회에 가실 거야.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없으면 의심을 살 거야. 그러니 형님이 먼저 가. 난 유모에게 막일하는 하인을 몇 사 오라고 할게. 일이 성사된 뒤 공주에게 소식을 알리면 될 거야.”
요 며칠 사장무와 사장조는 심묘의 일을 주시하느라 사정이 준비한 자리에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또 거절한다면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알았어. 너도 조심해. 실수하면 안 돼.”
사장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무가 떠나자 그는 소매 안의 밀실 열쇠를 꺼냈다.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심묘는 이틀간 밀실에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나 밥과 반찬을 가져온 횟수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미 이틀이 지났다. 두 사람은 자신을 옮기지 못했으니 그만큼 심신의 수색이 치밀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렇게 치밀해도 이곳을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사가 형제의 패는 견고하다 할 만했다.
그때 신발 소리가 들리면서 문이 열렸다. 열린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사장조는 심묘와 눈이 마주친 뒤 멈칫했지만 바로 웃었다.
“매번 자는 척하더니 오늘은 왜 그러지 않지?”
사장조의 생김새는 사장무와 비슷했지만, 그는 사장무처럼 참고 견디는 유형이 못 됐다. 오히려 경솔함을 드러내는 유형이었다. 그는 심묘가 반 정도 먹은 밥과 물을 보고 혀를 찼다.
“사실 나도 금지옥엽으로 자란 네가 개처럼 밥을 먹는 모습이 어떨지 몹시 보고 싶었는데. 어째서 날 기다리지 않은 거야?”
심묘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경행이 사가 형제를 왜 경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심청, 심모보다 못했다. 심청과 심모는 악의를 잘 숨기는 능력이라도 있었는데, 사장무와 사장조는 소인배인 데다 악의를 숨기지도 않았다.
무시하는 듯한 심묘의 시선에 격노한 사장조가 사납게 심묘의 턱을 잡았다. 심묘와 눈을 마주한 그는 흉악하게 웃었다.
“심 소저, 잘 모르겠지만 심 장군과 심 부인이 온 정경성을 뒤지며 널 찾고 있어. 황금 만 냥의 포상을 걸었는데도 받아간 사람이 없지. 내가 널 데리고 가면 만 냥을 받을 수 있을까?”
심묘는 아무 말 없이 사장조를 노려보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대신 일 처리를 하는 거라 널 놔줄 수는 없어. 안심해. 오늘이 지나면 네 인생은 조금 나아질 거야. 명안 공주는 널 구등 기원에 팔아버리라고 했지만 심 장군이 사나운 기세로 수색하니 우리는 이곳에다 기원을 차릴 수밖에 없거든.”
심묘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아주 만족한 듯 사장조가 그녀의 귓가에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모에게 사람을 불러오라 했다. 농사짓는 신체 건강한 이들 몇몇을 말이야. 오늘밤 젊은 남자들와의 밀애 후에도 여전히 날 노려볼 힘이 남아 있을까?”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녀는 소매 안으로 손을 몰래 집어넣어 비녀를 잡았다. 자신은 이틀 동안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다. 매일 굳센 의지로 손발을 묶은 밧줄을 끊으려 했다. 그 결과 지금 손발을 묶은 끈은 힘을 주면 가볍게 풀릴 정도로 느슨해졌다. 이 줄만 풀리면 비녀로 사장조의 눈을 실명시킬 수 있다.
이 세상의 길은 모두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막다른 골목은 용기가 없을 때만 존재했다.
“근데 너처럼 생기 있는 미인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아. 피부가 곱고 부드러운 관가 ‘적녀’란 말이지. 내가 먼저 누리는 게 좋겠지?”
그는 ‘적녀’를 강조하며 살짝 웃었다.
“사경행 그 잡종도 네게는 조금 남달랐지. 그 인간은 나와 근 20년간 형제였으니 아주 잘 아는 사이야. 너와 그는 보통 관계가 아닐 거야. 그럼 너는 정부(情夫) 비슷한 건가?”
사장조가 저질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심묘는 듣기 거북한 말에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 분노는 오히려 그에게 기쁨을 준 듯했다. 그가 아예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그의 정부인지 아닌지 상관없어. 오랫동안 그 잡종은 우리 형제를 억눌렀지. 오늘 내가 그의 여인을 품는다니 속이 다 시원한걸. 심 소저, 내게 감사하도록 해. 나 같은 관가 공자가 처음이라니. 이후 진흙에서 구른 남자들을 상대하고 나면 무엇이 진정으로 거칠고 우악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그리울걸.”
사장조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기가 걸렸다. 그는 심묘의 머리를 잡아당겨 엄지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심묘의 시선은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언제 사장조의 눈을 찔러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시력을 잃은 그가 어떤 식으로 바닥을 뒹굴지 두고 볼 것이다. 사장조는 정신이 조금 나간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넌 왜 겁을 내지 않지?”
사장조의 안색은 그새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심묘의 무심한 반응이 불만인 듯했다.
“넌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아직도 누가 널 구해줄 거라고 믿는 거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지?”
심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조가 갑자기 덮쳤다. 심묘가 피하기에는 늦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사장조에 밀려 단숨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급한 상황에 심묘는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고 손발을 결박한 끈을 풀었다. 그러나 사장조는 심묘의 몸을 미친 듯이 더듬느라 그녀가 결박에서 풀려났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넌 아직도 누가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나? 혹시 죽은 사경행을 기다리나?”
심묘는 가까스로 소매 안을 더듬어 비녀를 꺼냈다. 사장조는 심묘의 목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옷을 풀어 헤치려고 했다. 심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의 등을 비녀로 찌르려 했다.
“사경행이 널 구하러 올 거 같아? 그 잡종은 이미 목이 잘리고 피부가 벗겨졌어. 죽어서 뼈 부스러기도 남지 않았다고.”
그때, 광활한 밀실에 노기 어린 목소리가 담담히 울려 퍼졌다.
“그래?”
밀실에 울린 나지막한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고 심지어 듣기도 좋았다. 그러나 오금을 저리게 하는 힘이 있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당황한 사장조는 번개처럼 심묘에게서 떨어져 주위를 둘러보았다.
밀실 벽에는 횃불이 든 쇠뿔 호각이 걸려 있었다. 횃불이 있어도 밀실은 어두웠는데 그 빛으로 밀실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둠 속에 있었다. 어두운 불빛 아래 그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였다.
키가 크고 위엄 넘치는 청년이었다. 흑서(黑鼠) 피풍의 사이로 금색 비단 장포가 드러났다. 사슴 가죽 장화와 어두운 금색 허리띠. 얼굴에는 반쪽짜리 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은 가면은 차가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사장조는 멍한 얼굴로 그 사내를 바라보았다.
“예왕 전하.”
사장조는 명제 조공연회에서 예왕을 본 적 있었다. 태자의 동궁 연회석에서도 예왕의 얼굴을 보았다. 반쪽짜리 은 가면을 쓴 사람은 대량의 예왕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사장조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이곳을 아셨습니까?”
이곳은 임안후부의 밀실이다. 예왕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이 밀실은 절대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은 부의 주인인 사정도 모르는 공간이다. 오직 자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 장소. 외부 사람인 대량의 예왕이 어떻게 이곳을 발견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심묘는 사장조와 끝장을 볼 생각이었지만, 일이 잘못된다면 뒤에 위험이 따를 터였다. 그녀는 사경행의 등장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임안후부의 밀실을 아시는 겁니까?”
사장조의 마음속에서 불안이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맞은편 사람이 대량 예왕인 데서 생긴 두려움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깊은 곳에서 솟아난 두려움이었다. 단둘만 아는 이 밀실에, 자신 혼자만 있었다. 탈출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임안후부에 내가 모르는 곳은 없다.”
예왕은 밝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환한 횃불 아래 다다르자 은 가면이 반짝거렸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비꼬는 건지 진심으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지난날과 다름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가면을 벗었다.
심묘는 당황스러웠다. 사장조는 침을 삼키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예왕을 주시했다.
횃불이 예왕의 민얼굴을 비추었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작열하는 태양도 그 영광을 잃을 것 같은 눈빛. 소년 시절의 가벼움이 갈무리된 듯 더는 치기를 찾아볼 수 없는 성숙한 눈빛이었다. 냉정하고 묵직해서 어두운 밤 은하수를 건너는 작은 배의 불빛처럼 환해 보였다.
2년 전보다 더 수려하고 진중해진,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경행이었다.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가슴이 뚫리고 피부가 벗겨진, 명제 역사에 길이 남은 사경행이었다.
사장조는 믿을 수 없어 크게 소리쳤다.
“사, 사경행!”
“내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군.”
사경행이 웃음을 머금고 사장조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눈은 냉혹했다.
“별일 없었느냐, 사장조.”
“죽지 않았어? 전쟁터에서 이미 죽었잖아. 유골도 없었다고. 사람이야, 귀신이야? 다가오지 마!”
공포에 질린 사장조는 빠르고 다급하게 외쳤다. 이렇게라도 해야 두려움을 숨길 수 있다는 듯이.
“네가 말해봐. 내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사장조는 순간 멍해졌다. 사경행의 의복은 귀해 보였고, 그는 뼛속까지 우아한 모습이었다. 2년 전 사경행이 단순히 화려하고 귀한 보검이었다면 지금은 검집에서 나와 예리한 칼날을 뽐내고 있었다. 사장조의 시선이 사경행이 들고 있는 은 가면에 닿았다.
사경행이 귀신이라면 예왕의 신분으로 나타날 리 없다. 가면을 쓴 사경행이 대량의 예왕이라면, 예왕에 대해 아는 바가 왜 그리들 적은지도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2년 전 사경행의 전사 소식은 모두 알았지만, 현재 예왕이 2년 전 죽은 사경행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성을 되찾은 사장조는 냉소했다.
“그렇군. 너는 죽지 않고 대량에 의탁한 거야. 무슨 수완으로 예왕이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넌 가짜로 죽은 척하며 명제를 배반했으니 사가의 아들이 아니야. 부친도 이 일을 아시면 널 수치로 여기겠지. 큰형님, 이 동생은 정말 탄복했습니다.”
이미 구석으로 물러나 있던 심묘는 의아했다. 사장조가 사경행이 명제를 배신하고 대량에 의탁한 거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대량이 아무리 손님을 후하게 대접한다고 해도 황제인 영락제의 친동생 신분을 손님에게 줄 리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다니.
사경행은 가볍게 웃었으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네 더러운 혈통을 나와 한데 섞지 말거라. 나와 피를 나눴다고 말하기엔 네 자격이 부족하구나.”
사장조는 무시하듯 말했다.
“예왕의 신분을 얻어 정말 대량 황제의 친동생이 됐다고 여기는 거야? 남보다 한 수 위라고 여긴 네가 백일몽을 꾸는구나.”
사경행은 사장조가 틀렸다고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사장조의 안색이 천천히 변했다.
“너……. 너 설마 진짜로 대량의 예왕인 거냐?”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내 물건은 건드리지 말라고.”
사장조는 멍해졌다. 그와 사장무는 어릴 때부터 사경행을 싫어했다. 임안후부의 하인들은 모두 옥청 공주를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모여 방 씨가 옥청 공주를 핍박해 죽였다고 흉을 보았다. 사장조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옥청 공주 때문에 자신들이 핍박당한다고 여겨 사경행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모친을 모욕할 뿐 아니라, 부친 사정이 그를 편애하니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도 빼앗겼기 때문이다.
사경행은 항상 임안후부의 가장 좋은 물건을 차지했다. 사경행이 무언가 원하면 그를 감히 막는 사람은 없었다. 황자나 관료 관저 공자를 때리는 큰 잘못을 범해도 사정은 그를 엄하게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정이 그를 대신해 그들에게 사과하곤 했다. 한 번은 사정이 해상에서 보낸 호피를 사경행에게 주었다. 대단히 진귀한 호피였다. 어린 사장무와 사장조는 몰래 사경행의 방에 들어가 그 호피를 가지고 놀다 그에게 들켰었다.
사장조는 사경행이 두 사람을 보던 표정을 지금까지 잊을 수 없었다. 사경행은 사가 형제가 가지고 논 모피를 가져가 태우라고 했다. 그때 그는 지금처럼 말했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마. 더러워.”
사정은 사가 형제를 매섭게 혼냈다. 그러나 비싼 호피를 태운 사경행은 혼내지 않았다. 사장조는 그때부터 사경행의 물건에 집착했다. 심묘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조는 구석에 있는 심묘를 보며 악의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네 여인을 건드렸으니 이전처럼 그녀를 태울 건가? 어때? 넌 더러운 걸 싫어하지 않아?”
심묘의 눈빛이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대계를 위해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사장조를 끌고 나가 베어버리지 못해 한이 맺혔다.
“그 호피와 달라. 호피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태우라고 한 거야. 지금은…….”
사경행의 눈빛은 차가웠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매서운 한기가 가득 담겼다.
“네가 너무 더럽다 느껴지는구나. 널 태워야겠다.”
사장조는 비웃었다. 한참 비웃던 그는 변함이 없는 사경행의 표정을 보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사장조는 한 걸음 물러나며 두려움을 억눌렀다.
“뭘 하려는 거지?”
“사장조,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아둔하구나. 네가 내 얼굴을 봤는데, 내가 널 살려둘 것 같으냐?”
사경행은 사장조의 반응에 더더욱 실망한 듯 탄식했다. 심묘는 그 모습이 우스웠다. 사장조는 사경행 앞에서 여전히 떼를 쓰는 아이처럼 행동했다. 자신은 사경행이 가면을 벗을 때부터 사장조가 이 밀실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늘, 막상 당사자는 자기의 운명을 읽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사장조의 눈빛에 깊은 공포가 드러났다.
“난 임안후부 사정의 아들이야. 이곳은 임안후부고. 네가 날 죽이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해!”
“안심해. 오늘 임안후와 사장무는 연회에 참석했어. 그들은 밤에야 돌아올 거야. 그러니 네 종적을 발견할 사람은 없어. 네가 오랫동안 날 큰형이라 불렀으니 나도 널 배려해주마. 너 혼자 저승으로 보내지 않을 거야. 사장무도 네 뒤를 따를 테니. 고맙다는 말은 할 필요 없다.”
사경행의 미소에 사장조는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제야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는 3년 전에도 사경행의 적수가 못 되었고, 지금도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경행은 순식간에 사장조의 무릎을 찬 뒤 전광석화처럼 목을 졸랐다.
순간 심묘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만져보니 사경행의 피풍의였다.
“보지 마.”
그의 말투는 온화했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차 없이 사장조의 목을 졸랐다. 밀실 안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심묘는 저도 모르게 피풍의를 잡아당겼다. 사경행은 이미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었다. 바닥에는 사장조가 쓰러져 있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살인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살인을 한 사경행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의 결단력에 탄식한 심묘는 피풍의를 사경행에게 건넸다. 그는 힐끗 바라보았을 뿐 물건은 받지 않았다.
“네가 써.”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자신의 옷이 찢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사장조에게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찢어져서 하얀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당황한 심묘는 사장조를 욕하며 피풍의를 황급히 몸에 둘렀다.
사경행의 피풍의는 너무 커서 한참 용을 써도 단추를 다 잠그지 못했다. 그런 심묘를 본 사경행은 그녀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피풍의의 여미는 부분에서 끈을 빼 묶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늘고 긴 손이 끈을 묶는 모습은 민첩하며 부드러웠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내리뜰 때마다 긴 속눈썹 때문에 예리한 시선은 부드럽게 변했고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잠자코 끈만 묶었다.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알 수 없었다. 나비 모양의 매듭을 만든 사경행이 일어나기 전에 심묘가 말했다.
“사실 그를 죽일 필요는 없었어요.”
사실 사경행은 사장조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사장조의 말처럼 그는 서자이긴 해도 분명 사정의 아들이다. 사경행이 명제에 남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일은 그에게 말썽을 초래할 것이 뻔했다.
“내 얼굴을 보았으니 살려둘 수 없어.”
사경행의 대답에 심묘는 슬쩍 눈을 흘겼다. 가면을 쓰고 등장했으니 그의 얼굴이 처음부터 보이지는 않았다. 그 스스로 가면을 벗었다. 사장조를 죽이고 싶었던 사경행이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인 것이다.
“앞으로 외출은 삼가도록.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오늘 넌 사고를 당했을 거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은 차가웠지만, 말투는 심묘를 타이르는 듯했다. 심묘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어때요?”
“심가군을 전부 출동시켜 성안을 몇 번이나 수색했지.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네가 임안후부에 있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어. 나담은 부상이 위중해 고양이 장군부에 치료하러 갔다고 들었다. 지금은 괜찮다는구나.”
“언니가 다쳤어요? 지금까지 위중한 거예요?”
나담의 부상 소식에 심묘는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칼에 찔렸다더군. 몰랐나?”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기절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잠시 침묵하던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나담 언니가 혼수 상태인데 어떻게 이곳에 찾아온 거예요?”
“무슨 의미지?”
사경행은 심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되물었다. 심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담이 크게 다쳤다니 사경행에게 이 상황을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알아서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다. 심묘는 순간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담에게 날 찾아가 도움을 청하려고 했느냐?”
사경행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심묘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을 것처럼 팔을 벌렸다. 심묘는 그의 팔을 쳐냈다. 사경행은 영악하니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예왕 전하의 능력과 신분이면 절 구해줄 수 있을 거라 여겼어요. 그래서 언니에게 당신이 날 구해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줄 거라는 서신을 보내라고 했어요.”
“대가라. 장군부는 황금 만 냥을 걸었으나 난 필요 없어. 대량의 국고는 가득하니까. 넌 무엇을 줄 수 있지?”
“몸을 허락하는 것만 아니면 모두 가능해요.”
심묘는 이를 갈았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워 심묘를 바라보았다.
“이럴 생각이었군. 사실은 네가 나와 혼인하고 싶다고 알려주는 것인가?”
심묘는 냉소할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됐다. 사람을 구하는 건 별일 아니야. 널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다. 대가는 간단해. 시를 써 주고, 금을 타고, 간식을 만들어주고, 바느질을 해주려무나. 이 정도면 된다.”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다른 거는요?”
“나는 그걸 원해.”
사경행은 단호하게 답했다.
“당장은 널 장군부로 돌려보내지 못해. 넌 사흘간 실종되었으니 유언비어가 가득하거든. 지금 돌아가면 의심을 면할 수 없어. 내 사람들이 널 공주부에 보내면 용 이모가 널 도울 게다.”
“송신 공주마마도 예왕 전하의 신분을 알아요?”
당황한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명제 사람 중에서는 네가 유일하게 내 진짜 신분을 알지.”
심묘가 아무 말이 없자 사경행은 고개를 돌려 사장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혐오가 스쳤다.
“오늘 난 널 구하러 왔다가 살인을 했으니 말썽을 면하기 어렵겠지. 이 일은 너 때문이니 우리는 오늘부터 한배를 탄 거야. 너와 난 같은 편이야. 알겠지?”
“거절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너만 동의하면 돼.”
분노하는 심묘를 보며 사경행이 손가락을 튕겼다. 밖에서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대기하고 있던 철의와 남기였다. 사경행이 사장조의 시체를 발로 찼다.
“옮겨라.”
“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
심묘가 의아해했지만, 사경행은 눈썹 끝을 살짝 올리며 적당히 대답할 뿐이었다.
“잘 이용할 거야.”
두 사람이 사장조의 시체를 옮겼다. 사가 형제만 알고 있던 밀실은 사실 그들이 만든 공간이었다. 굴을 뚫어 밀실에서 다른 곳을 통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향할 수 있게 해둔 덕분에 일이 수월했다.
* * *
2년 전, 사경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송신 공주는 큰 병을 앓았다. 이후에도 건강을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듯 그녀는 황실 행사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공주부에서 외출하는 일도 점점 줄었다. 심지어 공주부를 방문하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돌려보냈다.
모두 사경행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식이 없던 송신 공주는 조카인 사경행을 아들처럼 여겼다. 사경행이 살아 있을 땐 늘 공주부를 방문하곤 했다. 송신 공주가 방문객을 피하기도 했으나, 가장 자주 오던 사경행이 죽었으니 공주부를 찾는 발길도 전보다 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공주부에 기별도 없이 손님 한 명이 찾아왔다.
청소를 담당하던 시종은 공주부에서 오래 생활한 터라 공주부를 방문한 아가씨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3년 전에도 방문했는데, 당시 송신 공주가 그녀에게 정성껏 대접했던 게 떠올랐다. 심가 사람이라는 건 기억했는데, 이름을 정확하게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녀가 방문을 전하고 오래지 않아 송신 공주의 측근 시종이 급히 나왔다. 그 곁에는 호위도 함께 있었다.
시종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도대체 어느 댁 아가씨일까? 공주마마께서 2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으셨는데 오늘은 만나시려나 봐.”
“공주부와 교류가 있었나 봐. 희한한 일이네.”
“저 아가씨는 2년 전에 왔었어. 공주마마께서 석 고고(姑姑, 손윗부인의 존칭)에게 배웅을 맡기셨잖아. 기억들 안 나? 심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시종이 손뼉을 쳤다.
“생각났어! 위무대장군 적녀 심묘 소저!”
시종들의 눈빛이 생기로 반짝였다. 그녀들은 심묘를 알았다. 최근 정경성에서는 사흘간 종적을 감춘 심묘가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심지어 심신은 그녀를 찾아주는 이에게 황금 만 냥을 사례하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서는 이가 없자 다들 심묘가 이미 비명횡사했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그녀가 공주부에 나타난 것이다.
심묘는 대청 안에 앉아 송신 공주를 기다렸다. 그동안 시종들은 다과를 내어주었다. 그녀들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살펴보는 걸 심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그녀들의 시선을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누군지 알아봤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서 공주부에 왔는지 당연히 의아할 터였다.
그러나 사경행의 말대로 자신이 홀로 장군부에 돌아가면 유언비어가 온 거리에 가득할 터였다. 높은 지위를 가진,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무탈함을 증명해줘야 했다. 지난번 옥토절에서 송신 공주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송신 공주의 됨됨이는 정직했고,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송신 공주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심묘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송신 공주는 가을빛을 담은 얇은 장포를 입고 피풍의를 걸쳤다. 얼굴에 지분을 발랐지만 노쇠하고 초췌해 보였다. 2년 전에 본 모습과 전혀 달랐다. 생기 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어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듯했다. 심묘는 마음이 쓰렸다.
심묘는 전생에서 송신 공주가 지금처럼 초췌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이런 모습이 된 까닭은 뻔했다. 사경행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심묘는 겨우 표정을 갈무리하고 송신 공주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녀는 심묘를 보며 무언가 떠올렸는지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2년 동안 보지 못했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심 장군이 급히 떠나 너와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었지.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조공연회를 앞두고 감기에 걸려 오래 앓았단다. 줄곧 널 만날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이리 보게 되었으니 반갑구나.”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심묘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심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공주마마를 찾아뵈어야지요.”
“이전에도 예쁘더니 지금은 더욱 출중해졌구나. 조카가 살아 있었다면…….”
송신 공주의 목소리가 천천히 낮아졌다.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심묘도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송신 공주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늘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말을 하는구나. 매번 생각하지 말자고 타이르는데도 정신을 차리면 또 생각하고 있더구나. 자꾸만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짚고 있으니, 이건 내 탓이야.”
뼛속까지 강경한 사람인 송신 공주가 미안함을 표현했다. 심묘는 내심 놀랐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다. 오랫동안 아들처럼 여긴 조카가 처참하게 죽었으니 송신 공주의 마음이 얼마나 침통할지 미루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경행의 실제 신분을 자신이 그녀에게 말해줄 수도 없었다.
“네 일은 들었다. 안심하거라. 2년 전처럼 이번에도 당연히 도울 것이다.”
심묘는 송신 공주에게 자신이 나쁜 사람에게 납치되어 임안후부 근처에 잡혀 있다가 사경행의 비밀 호위가 구해줬다고 전했다. 그 호위는 자신을 이전에 본 적이 있어 구해주었으나, 자신이 홀로 장군부에 돌아가면 유언비어가 퍼질 수 있으니 송신 공주에게 부탁한 것이라 설명했다.
사경행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송신 공주는 늘 너그러워졌다. 게다가 심묘와 헤어지기 전 사경행이 직접 패를 건네주었다. 공주에게 사경행 소속임을 밝히는 패까지 보여주니 그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전부터 심묘에게 호감이 있던 송신 공주는 시원스럽게 승낙했다.
“공주마마, 감사합니다. 매번 공주마마를 귀찮게 해드리니 소녀 부끄럽습니다.”
“뭐가 귀찮다고. 경행도 잘못을 범하면 공주부에 오길 좋아했다. 너와는 달리 어떤 큰 말썽을 불러온들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지만. 그때도 나는 곤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번에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게 아니더냐. 만약 내가 늙으면 널 귀찮게 할 수도 있단다.”
쓴웃음을 짓던 송신 공주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경행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길 바라지만, 더는 그럴 일이 없구나.”
* * *
장군부.
어두운 밤, 드디어 나담이 깨어났다. 심신 일행은 심묘의 행방을 찾느라 정경성 곳곳을 돌아다녀 장군부에는 나담, 나릉, 고양밖에 없었다. 그때 수하가 성 서쪽에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있다고 보고했다. 나릉은 나담을 고양에게 부탁하고 성 서쪽으로 서둘러 갔다. 결국 장군부에는 나담과 고양 두 사람뿐이었다.
나담이 깨어났을 땐 백로와 상강이 그녀를 보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나담 아가씨,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나담은 몸이 무겁다고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불을 걷으니 몸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백로는 나담이 흉터를 걱정하는 줄 알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가씨, 큰일을 당하면 반드시 훗날에 복을 얻는다고 했어요. 아가씨가 쓰러지셨을 때 주인어른과 마님이 몹시 놀라셨어요. 여러 의원을 모셔와도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의술이 고명한 궁중 고 태의가 아가씨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가씨께 바르는 약을 남겼는데, 잘만 바르면 흉터가 거의 보이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나담은 다시 누워 이마를 짚었다. 이전의 일을 기억하려는 듯했다.
“내가 며칠 동안 누워 있었어?”
“사흘째입니다.”
상강의 말에 놀란 나담이 심묘의 안부를 물었다.
“심묘는? 심묘는 찾았어?”
백로와 상강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담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어떠셔?”
“지금 정경성을 봉쇄하고 두 분께서 아가씨의 행방을 찾고 있으나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 아가씨는 지금 어디 계실까요?”
“사흘이나 지났어. 사흘 동안 어떻게 아무런 소식도 없어? 정경성을 봉쇄했다며. 납치범들이 요괴도 아닌데, 살아 있는 사람이 없어질 수 없잖아.”
나담이 흥분해 외쳤다. 백로와 상강은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나담은 초조해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납치범들이 심묘를 기절시켜 말에 태운 게 기억났다. 심묘와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당부한 말도 연달아 떠올랐다.
“기억해. 언니가 도망에 성공하면 예왕부에 편지를 보내. 거래할 것이 있으니 대가는 후에 치를 거라고.”
심묘는 자신에게 예왕을 찾아가라고 했다. 심묘와 예왕 사이에 우정이 있는지 몰랐으나 긴박한 상황에서 심묘가 의미 없는 말을 했을 리 없다고 믿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예왕부를 찾아가야 했다. 나담이 일어서자 백로와 상강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무얼 하시려구요?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가씨는 아직 몸이 낫지 않으셨어요.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안 됩니다.”
그녀들의 말대로 나담은 기운이 없었다. 침상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는지 팔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술을 익혀 언제나 몸에 힘이 넘치던 자신이었는데, 화가 치밀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상관하지 마.”
그때, 바깥에서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가려는 겁니까?”
나담은 방으로 들어오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흰옷을 입은 남자는 풍류를 즐기는 부류처럼 보였다. 생긴 것도 준수했다. 그는 손에 든 것을 탁자에 놓고 허리 쪽을 더듬어 부채를 꺼냈다. 가볍게 부채질을 하며 남자가 나담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려는 겁니까?”
나담은 인상을 찡그렸다.
“당신은 누구죠?”
“이분이 고 태의십니다. 아가씨를 치료해주셨다는 분이요. 아가씨의 치료를 위해 장군부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나담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담은 예쁜 것을 좋아했다. 소춘성에서도 준수한 남자가 있으면 심묘를 데리고 보러 가곤 했다. 그것만 봐도 나담이 남자 용모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준수한 고양을 보고 부드러운 말투와 태도를 보였겠지만, 지금 그녀는 심묘를 생각하느라 그런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고 의원, 난 할 일이 있습니다.”
고양은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을 고 대인, 고 태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있어도 고 의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순간 정말로 자기가 가방을 챙겨 급히 왕진에 나서는 저잣거리의 의원이 된 듯했다. 자기애가 넘치고 예민한 성정의 고양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고양은 나담을 주시했다. 그녀의 피부는 정경성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겨우 병상에서 일어나 허약한 모습인데도 생기를 품은 식물처럼 시원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고운 이목구비는 더욱 입체적이었다.
고양은 놀라 감탄했다. 칼에 깊이 찔려 사경을 헤맨 게 바로 며칠 전인데, 이토록 정기가 넘실대다니. 그 정도 부상은 신체 건강한 남자도 버티기 어려운데 어린 아가씨의 의지와 강단이 대단했다.
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호감은 가지 않았다. 고양은 여인을 아끼는 사람이지만, 심묘처럼 궁리와 수완이 대단하다 못해 위협적인 호랑이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와 어울리는 나담도 실제로 보니 더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심 장군과 심 부인이 소저의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상처가 벌어지면 전 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누명을 쓸 겁니다. 그러니 소저가 가만히 계시길 청합니다.”
나담은 초조했으나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난 할 일이 있어요. 돌아와서 반드시 고모와 고모부께 이 일은 당신과 무관하다 설명할게요. 됐나요?”
“안 됩니다. 저는 ‘태의’로서 환자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고양은 ‘태의’를 강조했다. 그는 나담이 자신은 시장 같은 곳에서 영업하는 의원과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채길 바랐다. 그러나 나담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격분했다.
“당신은 상처를 치료하는 의원일 뿐인데, 무슨 이유로 내 일에 이리 관여하나요?”
“저는 태의입니다. 나릉 공자가 소저의 안위를 제게 부탁했으니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나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묘는 이 일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그렇듯 그녀 역시 자신을 깊이 신뢰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예왕의 신분은 민감하니 고양은커녕 심묘의 측근 여종이라도 알면 안 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나담은 매섭게 고양을 노려보았다.
“소저가 생각을 바꿨다면 약을 먼저 드세요. 약을 드시면 곧 소저의 몸이 좋아질 테니 그땐 볼일을 보러 가셔도 됩니다.”
고양이 미소 지었다. 나담은 백로에게 약그릇을 가져오게 했다. 그녀는 단숨에 벌컥벌컥 약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다 비운 약그릇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뒤 고양을 바라보았다.
“됐지요!”
“탄복했습니다.”
고양은 나담에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나담은 중상을 입었으니 약재는 하나하나 이루 말할 수 없이 써서 냄새를 맡기도 곤욕스러웠다. 그러나 나담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으니 굳센 의지에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쉬어야겠어요. 번거롭지만 고 의원은 나가주세요. 상강, 백로 너희도 물러나거라. 누가 방에 있으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고양은 미소를 띤 채 두 여종과 함께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나담은 밖을 바라보았다. 백로와 상강은 다른 쪽 뜰을 청소하고 있었다. 나담은 빠르게 겉옷과 피풍의를 걸쳤다. 잠깐 멈칫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환부에 바르는 약 몇 개를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장군부에서 나가지 말라는 고양의 말을 자신이 들을 리 없었다. 당장 예왕부에 예왕을 찾으러 가야 했다. 심묘의 말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예왕을 찾아가면 반드시 그녀를 구해낼 수 있으리라!
몰래 부를 빠져나가는 일은 자신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소춘성에서 나천과 함께 최고의 경지까지 수련했기에 몰래 나가기라면 따라올 자가 없었다. 부친 나연태가 방 안에 가둬도 자신들은 쉽게 문을 비틀어 열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살짝만 움직여도 몹시 아팠다. 나담은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상처를 누른 채 창을 뛰어넘었다. 뜰 구석에 개구멍이 있단 건 진작 알아둔 터였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잡초 사이의 개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모든 일을 수월하게 진행한 나담은 고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양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나가가 장군 세가이고, 소춘성의 기질이 용맹스럽다고 해도 관리의 딸인 나담이 개구멍을 이용하다니,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고양은 명제에서 심묘가 제일 신비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녀의 사촌인 나담 역시 남달랐다.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묘 못지않은 여인의 뒤를 밟았다.
나담은 결연한 의지로 장군부에서 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오래 걸을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몰래 나왔기에 당연히 장군부의 마차를 쓸 수는 없었다. 거리에 나와서도 마차를 얻어 타기가 어려워 걸어가야만 했다. 예왕부와 장군부는 거리가 멀지 않으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막 돌아온 나담에게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담은 의지가 강했다. 평소 농담하고 가벼워 보여도 엄숙할 때는 엄숙했다. 나가의 가훈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이를 나수가 직접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나담은 눈앞이 어지럽고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음에도 중도에 포기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다른 사람은 나담이 겨우겨우 걸음을 떼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도 그녀를 수상히 여기지 않았고 나담은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었고, 두 걸음 걸으면 멈춰서 벽을 짚고 쉬었다 다시 걸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쉬지 않고 맺혀 얼굴을 타고 흘렀다.
고양은 나담의 부상이 위중한 것을 잘 알았다. 장군부에서는 놀리듯 가볍게 말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상처는 약간의 충격에도 아주 쉽게 벌어질 수 있었다. 고양은 멀리서 나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구경거리를 보는 듯 가볍게 부채를 부쳤지만, 점점 부채질하는 손짓이 느려졌다.
그러나 나담은 단념하지 않았다. 고양이 그녀가 더는 가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때,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양은 그녀가 자기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어딜 가려는 건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힘든 길을 가는 건지 궁금했다.
‘예왕부’ 세 글자가 보이자 나담은 끝내 두 다리가 풀렸다. 누군가 그녀를 부축하지 않았다면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날 따라온 거예요?”
나담은 고양의 손을 뿌리쳤다. 고양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생 끝에 예왕부가 있네요? 무엇 때문에 예왕 전하를 찾습니까?”
사경행이 나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심묘밖에 없다. 고양은 나담이 심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예왕부에 왔음을 추측했다. 나담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고양을 바라보았다. 초조했다. 이곳에서 고양을 또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에 낙담과 분노가 뒤섞였다.
다쳤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몸이 엉망이라니. 평소였다면 고양이 뒤따라 오는 것을 발견하고도 남았을 거라며 나담은 속으로 분개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고양의 능력을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의 몸이 건강했어도 고양을 발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담은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심묘와 예왕의 사이를 다른 사람이 알면 절대 안 된다. 게다가 고양은 궁에서 나온 사람이니 문혜제에게 보고해 말썽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다. 평소 신경이 무딘 나담이지만, 심묘의 생사가 걸린 일이니 꽤나 멀리까지 내다봤다.
“예왕 전하를 압니까?”
“내가 어떻게 예왕 전하를 알아요! 예왕 전하는 귀한 신분이고 난 신하의 딸인데, 어떻게 그를 알겠어요!”
“그럼 그를 왜 찾아가려고 합니까?”
고양은 끝까지 귀찮게 굴었다.
“왜냐면, 왜냐면…….”
나담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는 고양의 얼굴을 보더니 좋은 생각이 나 크게 외쳤다.
“대량의 예왕 전하가 절세 미남이라고 해서 그의 아름다운 용모를 보려고 왔습니다!”
고양은 나담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담은 그를 흘겨보았다.
“왜 웃어요?”
“몸이 낫지도 않았는데, 아름다운 용모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겁니까?”
나담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당신이 뭘 알아요?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런 사람 보기가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도 꽤 보기 좋은데, 소저는 왜 날 보지 않습니까?”
“고 의원.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해요. 난 당신과 말하지 않겠어요. 난 예왕 전하를 만나야 해요.”
나담은 계단을 올라 예왕부 문 앞에 서 있는 호위들에게 말했다.
“중요한 일로 예왕 전하를 만나야 합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고양은 나담의 뒤를 따르며 두 명의 호위에게 눈짓했다. 고양을 알고 있는 호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두 분, 들어가시지요.”
나담이 고양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뭐 하려구요?”
“나도 아름다운 용모를 한번 보려 합니다. 소저가 날 데려가지 않으면 별수 없이 장군부에 돌아가야겠지요. 심 부인과 심 장군이 돌아와 물으시면…….”
“나랑 같이 들어가요.”
나담이 매섭게 그를 노려보며 동행을 허락했다. 호위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고양이 아가씨를 데리고 온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하는 말로 봐서는 아가씨가 고양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 * *
고양과 나담은 정당에서 예왕을 기다렸다. 향이 반쯤 타자, 가면을 쓴 예왕이 나타났다. 나담은 마음이 초조했다. 평소라면 예왕이 어떤 사람인지 눈을 크게 뜨고 가까이 다가가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묘가 더 위험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차를 마시는 고양을 힐긋 바라보고 예왕에게 고했다.
“예왕 전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담은 불안한 표정으로 예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예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담은 예왕이 소문처럼 가까이 가기 어려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왕 전하, 제 사촌 여동생을 구해주세요!”
옆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담은 무릎을 꿇고 심묘의 말을 전했다.
“사촌 여동생이 예왕 전하를 신뢰하오니 소녀도 예왕 전하가 반드시 사촌 여동생을 구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소녀는 지금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나 사촌 여동생을 찾으면 장군부는 반드시 예왕 전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할 겁니다. 부디 동생의 목숨을 구해주시길 청합니다!”
나담은 바닥에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나담은 강직했지만, 필요할 때 무릎을 꿇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왕이 대량의 황손이니 머리를 조아려도 손해는 아닐뿐더러 그의 기분이 좋아져 심묘를 구해준다면 무릎 따위는 몇 번이고 꿇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시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그녀는 예왕이 놀라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알겠다.”
나담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왕 전하, 소녀의 사촌 여동생을 구해주시기로 약조해주시는 건가요?”
예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나담이 다시 그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일어서자마자 그녀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기절한 것이다. 예왕이 황급히 나담을 잡았다.
“여봐라! 고양!”
깜짝 놀란 고양이 잽싸게 다가왔다. 나담의 맥을 짚은 그는 탄식했다.
“몸이 너무 허약해. 인삼탕을 먹어야겠어. 깨어나면 장군부로 돌아가지.”
시종 둘이 혼절한 나담을 침상에 눕혔다.
고양과 예왕은 방 밖으로 나왔다. 예왕이 사납게 은 가면을 벗었다.
“쳇,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왜 나더러 3형인 척하라고 한 거야.”
나담이 만난 예왕은 사경행이 아니라 계우서였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냥 두면 장군부에서 사람이 올 거야. 그때는 말할 수 없잖아. 어쨌든 사경행은 심묘의 행방을 알아보러 갔으니 대충 승낙한 척하고 그녀를 보내면 돼.”
계우서는 손을 휘휘 휘둘렀다.
“또 찾아오면 난 감당 못 해. 이렇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오히려 압박감을 주는 사람은 처음이야. 내가 부처도 아닌데, 이런 식이면 내 수명을 깎아 먹을 거야. 이 소저는 너무 활력이 넘쳐. 심장이 다 쿵쿵거리더라니까. 허둥거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3형이 내가 자기 위신을 망쳤다고 뭐라 했을 거야.”
“괜찮아. 자네가 바보라는 건 사경행도 잘 알고 있으니까.”
“형 말은 내 연기가 이상했다는 소리지? 내 연기를 보고 머리를 조아렸어. 어디가 문제라는 거야?”
계우서는 분노했다. 고양이 손을 휘둘렀다.
“됐다. 이만하자.”
“그런데 저 소저는 왜 형을 고 의원이라고 불러? 형, 궁에서 나와서 의원 차렸어?”
고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나담은 깊은 밤에야 겨우 다시 깨어났다. 나담이 깨어나자마자 고양이 약을 건넸고, 그녀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건장한 대한에게도 뒤지지 않는 기백에 고양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약을 다 마시고 난 뒤, 나담이 턱을 훔쳤다. 창밖을 내다보니 바깥은 이미 새까맣게 어두워진 후였다.
“돌아가야 해요. 예왕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요.”
고양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괜찮습니다. 예왕 전하는 이미 외출하셨으니 다음에 하세요.”
나담은 멍해졌지만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예왕이 이렇게 빠르게 외출한 까닭은 심묘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약속을 바로 실행하는 걸 보니 예왕은 선량하며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나담은 미모만큼이나 성정도 아름다운 그에게 더욱 호감을 느꼈다.
고양은 갑자기 즐거워하는 나담을 보며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장군부로 돌아갑시다.”
나담이 즐거운 듯 경쾌하게 침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좋아요. 당신도 나와 함께 돌아가나요?”
“그렇습니다. 만일 장군과 부인이 강력하게 부탁하신 게 아니라면 저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궁에 계신 많은 귀인과 마마께서 제 치료를 기다리시고 있거든요.”
고양은 궁의 사람들이 자신의 귀환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담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 의원, 종일 너무 고생이시네요. 그렇다면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세요. 시간을 허비해 은자를 벌지 못하면 안 되지요.”
고양은 어이가 없었다. 나담은 ‘태의’인 그를 아무런 지위도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심지어 누구나 ‘태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태의’의 일을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일처럼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괜찮습니다. 전 이미 태의원에 휴가를 냈습니다.”
나담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고양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고양이 매우 출중하게 생겼다 해도 일이 없다고 여인의 뒤나 쫓아다니고 예왕의 아름다운 용모나 궁금해하니, 아무리 의술이 좋아도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고양과 나담은 장군부로 향했다. 장군부에 도착하니 심신 일행도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담, 어딜 갔던 거야? 고 태의는 또 어딜 가셨습니까?”
사람들은 나담이 또 납치된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심구는 고양이 첩자라 나담을 납치한 게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의심마저 하던 차였다.
“그래. 나담아, 심구 말처럼 네 몸은 아직 낫지 않았는데 어딜 갔었니?”
나담의 안색이 굳었다. 심묘와 예왕의 일은 말할 수 없으니 구실을 찾아 변명해야 했다. 그녀가 얼버무렸다.
“저…… 저는…….”
“제가 잠시 나 소저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종일 방에 있으면 답답하고 우울해 도리어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소저의 회복이 빨라질 수 있도록 제가 바람을 좀 쐬게 도와드렸습니다.”
고양은 두 손을 맞잡고 대신 대답했다.
“고 태의는 선의로 그랬겠지만, 다음에는 하인들에게 꼭 알려주세요. 하인 중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서 또다시 사고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나설안의 얼굴에서 의심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그러나 조금은 탓하는 말투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고양이 난감해하자 나설안은 사과할 필요까진 없다며 손을 휘둘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나담은 안도했다. 고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나아진 모습이었다. 자신을 대신해 싫은 소리를 들어줬으니 나담은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나가 사람은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차후 고양에게 많은 은을 하사하고 이전 일은 따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릉 오라버니는 왜 보이지 않나요?”
나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신, 나설안, 심구, 모두 이곳에 있으나 나릉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가지 않았느냐?”
눈살을 찌푸린 심신의 물음에 나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설안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이상하구나. 외출 전 나릉에게 널 돌보라고 했는데, 너희가 장군부에 없길래 함께 나갔다고 여겼다. 외출은 너와 고 태의만 했느냐?”
나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건을 사러 간 걸까요? 한참 전에 날이 어두워졌으니 심묘를 찾으러 갔대도 돌아왔을 때인데.”
심가는 뿔뿔이 흩어져 하루 종일 심묘를 찾아다녔지만, 소식을 교환하기 위해 저녁 때쯤이면 장군부로 돌아왔다. 한자리에 모여서 그날의 수색 결과를 나누었다. 나릉이 심묘를 찾으러 갔다면 지금쯤 돌아오고 남았어야 했다.
“혹시 심묘를 찾았나? 나릉 오라버니가 심묘를 찾아서 늦게 돌아오는 걸까요?”
나담의 추측에 심구와 나설안이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일이지!”
그때, 바깥에서 허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큰일이에요. 큰일 났어요!”
나릉의 수하였다.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큰일입니다. 나릉 도련님께 사고가 생겼어요.”
사람들은 급히 밖으로 나갔다. 나릉은 수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왔다. 그의 오른손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나릉 오라버니!”
나담이 놀라 외쳤다. 부축받으며 들어오는 나릉은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엄동설한인데도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나설안이 다급하게 고양을 바라보았다.
“고 태의, 번거롭겠지만 나릉을 좀 봐주시게나.”
고양의 얼굴에 유감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나담이 깨어나 거동할 수 있도록 치료했으니 자신의 임무를 이미 완료한 셈이었다. 그런데 또 어려운 치료를 하라고 하니 그는 정말 의원을 차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된 판국에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법. 고양은 표정을 빠르게 숨겼다.
“방으로 옮겨주십시오.”
나릉과 고양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심신은 나릉을 부축하며 돌아온 수하에게 상황을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나릉이 어째서 심한 부상을 입었느냐?”
그 수하는 울먹거렸다.
“심묘 아가씨의 소식을 듣고 나릉 도련님과 함께 아가씨를 찾으러 나갔습니다. 심구 도련님 혼자 나오라는 서신을 받았지만 그게 함정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자는 심구 도련님을 음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나릉 도련님이 기습을 받아 다치셨습니다.”
수하는 걱정의 기색을 드러냈다.
“나릉 도련님은 오래전 오른손을 다치셨습니다. 같은 곳을 또 다치셨는데 괜찮을까요?”
이 사실은 나설안과 심신도 모르던 일이었다. 그들은 눈을 치켜뜨고 나담을 바라보았다.
“나릉이 다쳤었느냐?”
나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어릴 때, 백부와 사냥을 갔다가 맹수에 쫓겨 산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날카로운 돌에 손을 다쳤습니다. 상처가 매우 위중해 모든 의원이 나릉 오라버니의 손이 낫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나 오라버니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고 치료에 전념했죠. 시일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나았고요.”
사람들은 부상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나릉이 이전에 입은 상처가 그렇게 위중했다면 지금 상황은 더욱 좋지 않을 것이었다. 심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누가 배후에서 음해한 거냐? 너희는 그자를 보았느냐?”
수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자는 무공이 나릉 도련님보다 높았습니다.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구나. 교교 다음엔 심구를 노리다니. 분명 우리 심가를 겨눈 것일 테다. 그자를 찾아 가죽을 벗기지 않으면 내 성이 심가가 아닐 것이다.”
심신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분노를 삭였다.
“나릉 오라버니의 부상은 어느 정도일까요. 상처가 심하지 않아야 할 텐데.”
나담의 말에 긴장이 더욱 고조되며 다들 말을 아꼈다. 침묵 가운데 향 하나가 다 탈 무렵 고양이 방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담이 다급히 고양을 불렀다.
“고 의원, 오라버니는 어떤가요?”
“그에게 약을 처방했습니다. 칼에 깊이 베었는데 칼날에 독이 발라져 있던 것 같습니다.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 해독할 수는 있지만…….”
“있지만?”
애가 탄 심구가 독촉했다.
“그러나 나릉 공자는 오래전 부상을 입은 적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번에 옛 상처를 건드렸습니다.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나아도 오른손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 수는 없을 겁니다.”
나담은 두 걸음 물러나 고양을 사납게 바라보았다.
“무거운 걸 들 수 없다니. 그럼 무기는요?”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설안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고, 심구와 심신은 숨을 들이켰다. 나릉은 장군가의 장자였다. 나수가 나릉에게 정경성행을 명한 것은 넓은 곳에서 경험을 쌓아 장래 소춘성의 나가군을 인수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라는 뜻이었다. 나릉은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혔지만, 앞으로 오른손으로 무기를 다룰 수 없게 된다면…….
“아니야! 아니야!”
나담이 고양의 소매를 붙잡아 흔들었다.
“예전에 오라버니가 다쳤을 때도 의원들은 오라버니가 오른손을 쓰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나릉 오라버니는 좋아졌어요. 게다가 당신은 솜씨 좋은 의원 아닌가요? 다른 의원들이 나를 살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면서요. 그런데도 당신은 날 살려냈잖아요. 그러니 오라버니의 오른손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나담과 나릉은 사이가 좋았다. 함께 성장했던 나담은 그의 비극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양은 담담히 그녀에게 잡힌 소매를 빼냈다.
“제가 하기 싫다는 게 아닙니다. 지금 공자의 부상은 심각합니다. 송구하지만 저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고양의 말은 마지막 희망마저 꺾어버렸다. 나릉이 다시는 오른손으로 검을 들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설안은 연거푸 이어지는 비극에 기절할 것 같았다.
“어떡하지. 이 일을 오라버니와 올케에게 어떻게 전하지.”
“나릉도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나요?”
심구의 물음에 고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의 회복은 이후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려 있을 겁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했으니 마음의 상처도 입었을 겁니다. 더욱이 나릉 공자는 긍지가 높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먼저 마음을 안정시켜야 회복도 따라올 것입니다.”
고양은 왕진 가방을 챙겼다.
“전 궁에 돌아가 약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돌아와 공자에게 침을 놓겠습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가보겠습니다.”
요 며칠 고양은 장군부에 머물렀으니 태의원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나설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태의, 폐를 끼치겠네. 심구야, 네가 고 태의를 배웅해 드리거라.”
“제가 갈게요!”
나담이 선수 치며 고양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고양은 그녀가 끌어당긴 소매를 바라보았다.
부 입구에 도착해서야 나담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고양을 바라보며 조금 망설였다.
“고 의원, 나릉 오라버니의 오른손은 정말 가망이 없나요?”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유감스러워하는 고양의 말에 나담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오늘 예왕부의 일을 덮어줘서 고마워요.”
의아한 고양이 나담을 바라보았다.
“제가 언제 소저 대신 덮어준다고 했습니까?”
나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모와 고모부 앞에서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해준 게 아닌가요?”
“추세에 따라 행동한 겁니다. 장래 거래 조건을 생각한 뒤 소저와 세심히 의논할 테니 기다리세요.”
고양은 나담의 표정을 보지 않고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너무 어둡네요. 전 지금 가봐야 하니 다시 봅시다.”
고양은 나담에게 인사한 뒤 떠났다. 그는 계속 ‘고 의원’이라고 부르는 나담에게 쓴맛을 보여줄 터였다. 그때,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잘 가요. 고 의원.”
고양은 자칫 넘어질 뻔했다.
장군부로 들어가려고 고개를 돌린 나담은 부 쪽으로 오는 마차를 보았다. 마차는 아주 화려해 보였으나 하늘이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마차는 장군부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나담은 눈을 비비며 먼저 내린 사람을 바라보았다.
“심묘야!”
심묘는 송신 공주의 고고인 노석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왔고,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나담이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사경행에게 나담의 부상이 위중하다고 들은 심묘는 그녀의 건강한 목소리에 한시름을 놨다.
나담의 외침에 부 안의 심신 일행도 놀라서 서둘러 뛰쳐나왔다. 그들은 심묘를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하던 것도 잠시.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던 나설안은 달려와 심묘를 껴안았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교교!”
심구도 그제야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교교야, 돌아왔구나!”
심신도 심묘에게 다가왔다. 심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심한 시각이라 오가는 행인을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근래 심신의 수색으로 분위기가 흉흉해 백성들은 밤에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심묘가 장군부로 돌아온 것을 바깥 사람들은 알지 못할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요. 이 일은 먼저 퍼트리지 말아 주세요.”
심신은 의아했으나 일단 심구에게 눈짓했다. 심구는 얼른 나가 바깥 하인에게 이것저것 분부했다. 그들은 곧 부로 들어갔다. 정당에 도착한 나담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묘 옆의 노석도 흘끗 보았다.
“심묘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분은 또…….”
노석은 장군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송신 공주의 고고라 그런지 그녀의 행동은 아주 예의 발랐다.
“저는 송신 공주마마의 사람입니다. 어제 마마의 호위가 심 소저를 구출했습니다. 마마는 혹시 모를 유언비어를 걱정하셔서 제게 심 소저를 배웅하도록 하셨습니다. 심 소저를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으니 이제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3년 전, 심묘는 옥토절 날 송신 공주의 도움을 받았다. 오늘 또 그녀의 도움을 받았으니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기이했다. 심신과 나설안이 의심스러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심묘가 웃으며 노석에게 예를 표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소녀를 대신해 공주마마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십시오. 공주마마의 은혜, 뼛속 깊이 기억하겠습니다. 장래 반드시 방문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노석은 몸을 기울이며 심묘에게 웃음 지었다.
“저는 소저의 감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소저께서는 공주마마와 아는 사이시니 예의에 얽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먼저 돌아갈 테니 소저는 잘 요양하십시오. 내일 공주마마께서 경조윤에 설명하실 겁니다.”
노석을 배웅한 뒤 장군부 사람들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구가 먼저 질문을 쏟아냈다.
“교교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심묘와 노석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심묘에게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생각이 깊은 심묘에게 반드시 계획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심묘는 미소 지었다.
“별일 아니에요. 절 납치한 사람은 사람을 잘못 납치한 거였어요. 확인하고 절 보내주려고 할 때, 공주부 사람을 만나게 됐어요. 공주부 호위는 이전에 절 본 적이 있어서 구해준 거랍니다. 그 후 송신 공주마마에게 말씀드리자 안타깝게 여기시고 절 도와주신 거예요.”
심묘는 이 일을 부친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진국과 명제는 세력이 뒤엉켜 복잡한데, 이 일의 배후가 명안 공주라는 사실을 알면 부친은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터였다.
이 역시 이미 사경행과 상의한 터였다. 사경행의 다음 수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아는 그라면 반드시 명안 공주와 사가 형제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텐데, 그거면 충분했다. 굳이 부친의 신경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심신은 쉬이 넘어가지 않고 미간을 찡그렸다.
“교교, 사실대로 말하거라. 이 일이 명안 공주마마와 관련 있느냐?”
심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이 정경성에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심묘를 납치할 사람은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장군부에 원한을 가졌다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거만하고 횡포한 진국 공주라면 모를까. 진국 사람이니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묘는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버지, 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 명제 땅인데, 명안 공주마마가 어떻게 절 납치하시겠어요? 제게 원한을 품었다 하더라도 진국 태자 전하가 허락하시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도 심신과 나설안이 믿지 않는 듯하자 심묘는 팔을 들어 올리며 애교를 부렸다.
“마차에서 굴러떨어져서 그런지 손이 너무 아파요. 배도 고프고요. 어머니, 저 배고파요.”
나설안은 마음이 아파 주방에 음식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녀는 심묘에게 뜰로 가 쉬도록 했다. 그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을 바꿔 직접 요리를 하려는 듯 주방으로 갔다. 심신도 더는 말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린 채 심구를 끌고 떠났다.
나담과 심묘는 함께 방으로 향했다. 나담이 침상에 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야, 너 거짓말한 거지? 사실은 명안 공주마마가 꾸민 일 맞지?”
심묘는 나담의 예리한 지적에 놀랐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나담은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네가 애교부리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어. 고모랑 고모부에게 얼버무린 거지? 두 분은 널 아끼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주신 거야.”
심묘는 실소했다. 그녀는 나담을 한참 바라보았다.
“언니 크게 다쳤다며? 어째서 나랑 같이 온 거야? 좀 더 쉬지 않고?”
나담이 손을 휘둘렀다.
“궁중 고 의원은 의술이 고명해서 백골이 된 사람도 살려낸대. 게다가 내 목숨이 길잖아. 오늘 오후에 예왕 전하께 널 구해 달라고 요청했어. 요청하자마자 네가 돌아오다니, 예왕 전하의 재주가 대단한가 봐! 난 며칠은 기다려야 될 줄 알았는데. 석 고고도 거짓말한 거지? 예왕 전하의 계획은 아주 면밀하구나.”
나담의 반짝거리는 눈빛에 심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사경행은 나담이 예왕부에 가기 전에 심묘를 구했다. 나담이 예왕부를 방문했을 때 심묘는 이미 공주부에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나담은 사경행에게 큰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사경행이 신선도 아닌데 그 잠깐 사이에 사람을 구출하다니, 심묘는 속으로 나담의 천진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틀린 점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나릉 오라버니는 왜 안 보여? 오라버니는 이 시각까지 외출 중이야?”
나담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심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왜 표정이 어두워?”
나담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오라버니에게 사고가 생겼어. 고 의원이 평생 오른손을 쓰지 못할 거래……. 너도 가서 봐.”
* * *
임안후부.
사장무는 애가 탔다. 사정과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는데 사장조의 행방이 묘연했다. 밀실에는 사장조뿐만 아니라 심묘도 없었다. 두 사람이 그대로 증발하기라도 한 듯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사장조가 자주 가는 곳에 하인을 보내도 찾을 수 없었다.
빈틈없는 심신의 수색 때문에 심묘를 기원에 팔지 못했는데, 그녀가 사라졌으니 팔려고 해도 팔 수가 없었다. 명안 공주가 보낸 사람은 심묘를 언제 기원에 보내냐고 강하게 압박했다. 사장무는 얼버무렸으나 마음은 불에 타듯 초조했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에 휩싸인 사장무는 장군부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장군부 역시 심묘의 행방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장군부에서 그녀를 데려간 것은 아니니 적어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시일이 길어지자 사정도 사장조를 찾았다. 사장무는 급한 대로 사장조가 친구와 정경성 밖으로 사냥을 갔다고 꾸며 고했다. 모친 방 씨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명안 공주가 보낸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으니 심묘를 넘기라고 재촉했다.
사장무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묘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장조마저 보이지 않으니 명안 공주가 이 사실을 알면 격노할 게 뻔했다. 부수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기는커녕 벌을 내릴 터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사장무는 이 거래를 받아들인 것을 깊이 후회하며 사람을 써서 사장조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이전에는 장군부에서 그들이 납치한 심묘를 찾았는데, 이제는 자신이 형제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역설적이었다.
* * *
사장무는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는 사장조가 사경행의 손에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철의가 사경행을 뒤따랐다.
“사장조의 시체는 감옥 안 냉관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제 사용하실 겁니까?”
“그냥 두거라. 급하지 않다. 이렇게 좋은 패를 함부로 쓰면 안 되지.”
사경행은 천천히 관저로 들어갔다. 뜰 안에 들어서자 계우서가 자줏빛 장포를 입고 은 가면을 쓴 채 백호를 쫓고 있었다.
“토끼 녀석,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잘 봐. 얌전히 나한테 오라고!”
철의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계우서는 정말 물건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는 아이처럼 구는 천진한 매력을 뽐냈다. 은 가면을 쓰고 사경행으로 분장해 백호에게 다가가려 하는 일은 한가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계우서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백호는 계우서의 ‘안락’한 포옹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백호는 사경행과 철의를 보더니 맹렬히 사경행에게 돌진했다. 백호는 사경행의 장포 자락을 입에 물고 유쾌하게 고개를 휘둘렀다. 사경행이 백호를 안았다. 그는 뜰에 홀로 있는 또 다른 ‘사경행’을 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없어서 아주 즐거운가 봐?”
“3형!”
계우서가 은 가면을 벗으니 땀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손을 휘둘렀다.
“일부러 형으로 분장한 거 아니야. 오늘 어떤 소저가 형에게 도와달라고 찾아왔어. 그래서 고양 형이 나더러 분장하라고 한 거야. 아주 똑같이 연기했다고 보장할 수 있어. 그 소저는 날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고.”
계우서는 질책을 들은 것도 아닌데 억울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걱정이 가득한 말투였다.
“날 죽일 건 아니지……? 난 잘못한 거 없어.”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자 철의가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오후에 심 소저의 사촌, 나 소저와 고 공자가 예왕부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계 도련님이 주인님의 모습으로 가장해 나 소저의 요청을 승낙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바로 떠났습니다.”
“고양 형이 나더라 하라고 한 거야!”
계우서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고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철의가 고양의 방문을 고했다. 흰옷을 나부끼며 들어오는 사람은 고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흰옷은 이전처럼 단정해 보이지 않았다. 옷의 색상도 어두워 보였다. 계우서는 아까도 고양을 보았지만, 그때는 나담 때문에 놀라 고양에게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이제야 그를 자세히 본 계우서가 놀라 외쳤다.
“고양 형, 왜 갑자기 10년은 늙은 것 같아?”
고양은 사경행과 붙어 있으니 출중함이 빛을 바랐을 뿐, 혼자 있을 땐 그 나름대로 수려한 공자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많이 초췌해 보였다.
“말도 마. 요 며칠 장군부에서 그 나가 소저를 치료했는데 그들은 날 의원으로 여기는 거 같아. 난 일반 의원이 아니라 태의라고!”
늘 침착하던 고양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의원이나 태의나 의술을 사용하는 사람이잖아.”
무심하게 대꾸한 계우서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찾았어?”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우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놀라 죽는 줄 알았어. 심묘같이 좋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면 난 잠도 못 잤을 거야.”
사경행이 차가운 눈초리로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오, 심묘와 아주 친한가 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계우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3형이 심묘와 친하잖아. 난 심묘를 걱정한 게 아니라 형을 걱정한 거야. 형이 심묘를 무탈하게 구출했으니 됐어. 심묘도 형에게 감격할 거야.”
“아부꾼.”
고양이 계우서를 경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형이랑은 관계없잖아.”
계우서는 고양의 비판을 딱 잘라냈다. 고양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사경행에게 물었다.
“명안 공주의 짓이야?”
사실 정경성 안에서 심묘에게 이 정도로 대담한 짓을 할 사람은 명안 공주 말고는 없었다. 심묘를 건드린다는 것은 장군부를 건드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심신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다 아는데 심묘를 건드리면 호랑이의 털을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따라서 후환이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그러니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 이는 명안 공주뿐이었다. 이렇게 대담하게 수완을 발휘하다니 놀랍긴 했다.
“사장무와 사장조도 동참했어.”
사경행의 담담한 말에 고양이 기함했다.
“미쳤나? 명안 공주가 이익을 약속했다고 해도 어떻게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지?”
사람들은 이익이 있어야 움직인다. 사장무와 사장조도 이익이 있으니 행했겠지만, 결코 수지가 맞지 않는 거래인데. 고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가 형제는 높은 관직을 위해 장군부와 적이 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당장의 이익만 보며 뒷일은 생각하지 않다니 매우 어리석었다.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냈으니 세상 물정을 몰랐겠지. 아주 미련해.”
고양과 계우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경행이 뿜은 한기를 느끼며 속으로 사가 형제를 위해 묵념했다.
“명안 공주가 심묘만 건드린 게 아니야.”
고양의 말에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야?”
“심구에게도 계략을 부렸어. 오늘 장군부에 누군가 심묘의 행방을 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함정이었어. 심구에게 홀로 오라고 해 기습하려 했겠지. 습격자들의 무공이 강하다 했으니 궁궐에서 훈련한 고수일 거야. 명안 공주의 솜씨 같아.”
명안 공주는 심묘뿐 아니라 심구도 망치려 했다. 두 사람이 다치면 장군부는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게 자명했다. 게다가 심묘와 심구는 사이가 좋으니 심묘가 돌아오더라도 자기 때문에 오라비가 곤경에 빠졌다고 평생 자책할 터였다.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했다. 명안 공주의 수완은 확실히 악랄했다.
“그래서?”
“심구는 속지 않았어.”
사경행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묻기 전, 고양이 덧붙였다.
“나가 공자가 대신 화를 입었거든. 심구를 불러내려 했는데 그 자리에 나릉이 나타난 거야. 나릉의 무공은 심구만큼 뛰어나지 않으니 그들 손에 당할 수밖에 없었어.”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금은 어떤데?”
“아주 좋지 않아. 내 의술로도 속수무책이니 평생 오른손으로 검을 들지 못할 거야.”
사경행은 입을 다물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