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장 (53/71)

38장

겨울이 깊어가는데도 햇살이 딱 알맞아 날씨는 따사로웠다.

심부 동원에서 진약추와 심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 며칠, 심모의 신랑감 때문에 심모와 진약추는 몇 번이나 말다툼했다. 심모에게 온유했던 진약추가 이번에는 아주 강경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심모는 차가운 얼굴로 진약추를 따라 각 부를 방문했다. 모녀가 거세게 대립하면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오늘처럼 평온히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근래 보기 힘들었다.

“심묘가 납치당해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면서요? 살아는 있는지 모르겠네요?”

심모가 접시의 과일을 들어 베어 물었다. 그녀는 심묘에게 닥친 불행에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진약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모가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온화하고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길 바랐다. 몇 번이고 타일렀지만 큰 소용이 없는 듯했다. 자신이 젊었을 때에 비해 심모는 진중함이 부족했다. 다행히 바깥에서는 그러지 않지만, 집안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도대체 누가 심묘를 납치했을까요? 정경성에 백부의 원수가 많은데, 이번에는 누가 손을 썼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위험을 무릅쓰며 손을 썼으니 원한이 깊을 게다. 심가군이 곳곳을 수색하는데도 며칠째 소식이 없으니 꽁꽁 잘 숨겨놓은 것이겠지. 심묘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힘들겠구나.”

심모는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무언가 생각난 듯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난 심묘가 살길 바라요.”

납치당한 지 오래됐으니 만일 살아 있다 해도 말도 못 할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유언비어가 가장 무서운 법. 심묘가 납치당해 죽었다면 상관없지만 살아 돌아오면 온갖 억측을 들을 게 뻔했다. 납치당했다가 구출된 아가씨 중 비난의 눈길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경우도 아주 많았다. 더구나 심묘는 위무대장군의 적녀이니 평생 수모를 겪게 될 터였다.

진약추는 심모를 보고 탄식했다.

“어쨌든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다. 심모야, 근래 네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던데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 거냐?”

심모는 내키지 않는 혼인을 강요하는 진약추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부친 심만을 더욱 원망했다. 심모는 하인에게 심만과 진약추가 급히 혼인을 강요하는 건 벼슬길에 도움을 줄 인척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 역시 그렇게 여기던 차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그래서 심모는 최근 심만과 가능하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종일 계시지 않는데, 제가 언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말하다가 성질이 난 심모는 고개를 돌렸다. 진약추는 당황스러웠다. 심모의 말이 맞았다. 근래 일이 바빠서인지 몰라도 진약추 역시 심만과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짧았다. 이전에는 시를 적어 나누는 일도 있었는데 근래 심만은 정신을 딴 데 파는 것 같았다.

진약추는 속으로 탄식했다. 심 노부인이 심만에게 첩을 얻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에서 부부 사이가 소원하면 큰 위기를 마주할 터였다. 진약추는 이때까지도 심만이 심부 서원에서 상재청과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오늘도 심만과 상재청은 정겨운 얼굴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상재청은 푸른색 상의와 노란색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땋아 늘어뜨려 상쾌해 보였다. 그녀가 끓인 차는 맛이 좋아 차를 좋아하는 심만은 상재청을 자주 찾았다. 그가 차를 부탁하면 상재청은 즐겁다는 듯 차를 끓였다. 그녀는 바둑 문제를 심만에게 묻기도 했다. 이런 관계는 계속되었다. 심만은 늘 상재청을 찾아와 바둑을 두고 차를 마셨다.

상재청이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심묘 아가씨가 납치를 당했다 들었는데 지금은 찾았나 모르겠네요.”

“아직 행방을 알 수 없소.”

심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재청이 탄식했다.

“멀쩡한 아가씨에게 어찌 이런 변고가……. 주인어른은 심묘 아가씨가 심 장군의 원수에게 해를 입은 거라고 보시나요?”

“말하기 어렵소. 심묘를 납치했으니……. 시일이 오래 지나면 설령 구해낸다고 해도…….”

상재청은 슬픈 기색을 드러냈지만, 속으로는 기뻐했다. 심묘는 나이는 어려도 속은 괴물 같은 수완가였다. 지난번 그녀가 한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단 한 번밖에 보지 않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았으니 두려웠다. 상재청은 이후로 늘 불안했으니 심만의 말에 기쁠 수밖에 없었다.

* * *

채운원.

심묘의 일은 이곳에서도 화제였다.

“난 종종 네가 부를 나서지 않아 답답했어. 그러나 지금 보니 그렇지만은 않구나. 거리에 납치범이 이리 많다니. 넌 생긴 것도 예쁘잖아. 네가 납치당하면 나는 남은 평생 울면서 지낼 거란다. 그나저나 심묘 소저는 지금 살았을까 죽었을까?”

심동릉이 모친 만 이낭의 말을 듣고 웃었다.

“어머니, 이 일은 평범한 납치범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만 이낭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떤 납치범이 거리에서 사람을 납치해요? 그런 납치범이 있다고 해도 관가 소저를 납치할 리 없어요. 신분이 높을수록 많은 말썽을 불러올 테니까요. 분명 대방의 원수일 거예요. 공교롭게도 심묘를 만난 거지요.”

심동릉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집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심묘 아가씨의 삶은 끝난 셈이네. 좋은 집안에 태어났어도 누리지 못할 운명이라니. 운을 헛되이 했네.”

만 이낭의 탄식에 심동릉은 부정했다.

“그건 확신할 수 없어요. 심묘는 귀인의 도움을 받아 늘 전화위복하곤 했죠. 이번에도 귀인이 심묘를 도와줄지도 모르죠.”

“아무리 귀한 사람이 돕더라도 이미 일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찌할 수 있겠느냐?”

만 이낭은 심동릉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때 심동릉의 여종 행화가 달려왔다. 전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마님, 아가씨, 심묘 아가씨가 송신 공주마마의 마차를 타고 장군부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무탈하시다니 잘됐어요.”

심동릉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보세요. 제가 귀인의 도움이 있을 거라고 말했지요.”

* * *

정경성은 송신 공주의 마차로 돌아온 심묘의 소식에 한층 시끄러웠다. 장군부의 수색이 삼엄해 납치범들이 심묘를 옮기는 도중 도망친 심묘가 낙상해 기절한 것을 우연히 공주부 호위가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며칠 동안 심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은 심묘가 깨어나지 않은 데다가 공주부에서 그녀의 신분을 몰랐던 탓이었다. 심묘는 여전히 순결한 아가씨였다.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 소문에 의혹을 품지 않았다. 소문의 출처가 명제에서 가장 공정하기로 유명한 송신 공주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위신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에도 심묘가 사람들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는 얘기가 뒤따라 퍼졌다. 어떤 이는 그녀가 사실 중상을 입어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장군부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예 외출을 금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심묘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직접 본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장군부. 심묘는 나릉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나담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심묘야, 네가 나릉 오라버니 좀 위로해줘. 오라버니가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무척 괴로울 거야. 그러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고 속마음을 도통 털어놓지 않아. 나는 말솜씨가 없어서 이럴 때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너는 책도 많이 읽고,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잖아. 오라버니가 네 말은 들을 거야. 소춘성에서도 오라버니는 다 네 말대로 했어. 네게 나가를 부탁할게.”

심묘는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나야, 오라버니.”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릉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심묘는 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들고 온 바구니를 탁자 위에 놓았다. 책장 구석에 청자 그릇이 보였다. 갈색 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나릉이 약을 먹은 것 같았다. 나릉은 탁자에 앉아 책을 보던 중인 듯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는 심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심묘 왔구나.”

나릉은 나가 장손으로 나가 자손 네 명 중 가장 온화하며 신중했다. 진정으로 겸손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박정하지 않아 타인에게 따뜻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심묘가 안전하게 돌아온 사실을 알고 나서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식사할 때도 여전히 너그럽고 온화해서 나쁜 일을 조금도 겪지 않은 듯했다.

이렇듯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주위 사람들은 감히 나릉의 상처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평온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했다. 그래서 나담이 나서서 심묘에게 그를 위로해주길 부탁한 것이다.

“과자를 가져왔어. 우유와 벌꿀을 넣었으니 상처에 좋을 거야.”

심묘가 웃으며 바구니에서 과자 그릇을 꺼냈다. 심묘는 장군부에서 처음으로 나릉에게 ‘상처’를 언급했다. 나릉은 멈칫했지만, 미소를 유지했다.

“약을 막 먹어서 지금은 먹을 수 없어. 여기다 두고 가면 나중에 맛볼게.”

“먹을 수 없는 거야? 아니면 먹고 싶지 않은 거야?”

나릉의 몸이 굳었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야? 내가 과자를 먹지 않아서 화내는 거야?”

심묘는 나릉의 맞은편에 앉았다. 심묘는 그를 보면 완유가 떠올랐다. 그는 온화하고 너그러워 손해를 봐도 따지지 않았다. 완유와 판박이였다. 그녀는 황실의 공주로 태어났으나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다. 또한 깊게 헤아릴 줄 알아 자신의 모친이 부황의 환심을 얻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궁중 생활이 보이는 바와는 달리 몹시 괴롭다는 것도 아는 듯했다.

완유는 미 부인의 수법에 휘말려 화친을 명목 삼아 흉노로 가야 했다. 부수의는 완유에게 천하 대의를 강요했다. 심묘는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고 분했다. 오히려 완유가 심묘를 위로할 정도였다.

“초원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평생 초원에 가본 적 없으니, 가서 신기하고 재미난 걸 보면 반드시 어마마마께 편지를 쓸게요. 그래서 어마마마도 초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할게요.”

완유는 자기의 아픔은 말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자기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사람이었다. 나릉도 마찬가지였다.

“오라버니는 즐겁지 않음을 인정하고, 억울하고 분해서 화가 나고 답답하다는 걸 표현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심묘의 말에 나릉은 당황했다.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원망하지 않고 자책만 하는 거지?”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묘, 너 이렇게 꼭 직설적으로 말해야 해?”

“오라버니가 너무 돌려 말하는 거야.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자책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도 평생 자책할 거야. 평생 안정을 찾을 수 없겠지.”

“심묘야…….”

“오라버니가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면 다들 홀가분해하고 오라버니의 부상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아? 오라버니가 숨길수록 다들 더 답답해한다고.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가끔은 제멋대로 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다른 사람을 위해 억울하게 살다 죽을 거야? 답답하면 크게 소리쳐도 돼. 화내고 미워하고 원망한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야.”

심묘의 말투는 온화했으나 아주 예리했다. 이런 말을 처음 들은 나릉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심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세심히 관찰했다. 그녀의 기백이 예사 사람 같지 않단 건 진작 알았지만, 지금 심묘는 나릉이 알던 심묘가 아닌 것 같았다. 선량하며 공적인 정의는 하찮은 것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굴 미워해야 하고, 누굴 원망해야 해?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지?”

“날 원망할 수 있잖아.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배후에서 부추긴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어. 그 사람이 오라버니에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오라버니의 상처를 고칠 의원이 없으니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친 돌팔이라고 의원들을 비난할 수도 있어. 오라버니가 유일하게 탓할 수 없는 건 오라버니 자신이야. 좋은 사람은 자신을 탓하고 나쁜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탓해. 하지만 보통 나쁜 사람이 훨씬 편하게 잘 살잖아.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게 무슨 큰 잘못이겠어?”

심묘의 예의 없는 말에 나릉이 살짝 웃었다.

“심묘야, 너 날 위로하는 거야?”

“그래, 모든 일을 오라버니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라는 거야.”

나릉은 탄식했다.

“그래, 인정할게. 다친 이후 난 답답했어. 즐겁지 않고 불편했지. 그렇지만 안 그래도 고모부와 고모가 자책하고 계시는데 나까지 그럴 순 없었어. 날 걱정하는 나담 앞에서 힘들다고 털어놓으면 동생을 종일 우울하게 할 거고. 그래서 나를 탓했지. 평소 훈련이 부족해서 진 거라고. 실력이 좋지 않아서 허점을 보인 거라고.”

“그럼 지금은?”

“네 위로는 흥미롭네. 네 말이 맞아. 나 때문이 아닌데 나를 원망하고 분노해선 안 되지.”

나릉이 조소했다.

“원한을 새기고 분노하라는 게 아니야. 오른손만 쓸 수 없는 거지 왼손까지 쓸 수 없는 건 아니잖아?”

나릉은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용맹하고 무예가 대단한 장군이 있었대. 그런데 전쟁터에서 오른손이 잘렸다고 하네. 사람들은 그가 의기소침해졌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는 왼손을 쓰기 시작했대. 결국 그는 세상에서 유일한 왼손 검법을 창시했다더라. 오라버니, 어떻게 생각해?”

심묘는 살짝 웃었다. 나릉의 눈에 기이한 빛이 솟아올랐다. 생기 없던 눈동자가 활력을 되찾았다. 그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네 위로는 정말 와닿는구나.”

“오라버니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릉이 크게 웃었다.

밖에서 동정을 살피던 나담은 깜짝 놀랐다. 나릉은 늘 온화한 잔웃음을 지었는데, 지금은 아주 유쾌하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문밖까지 들리는 후련함이 전해졌다.

“어떤 곤경에 처해도 다시 일어선 너의 비법이 바로 이거였구나. 네 위로 덕에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소녀 같은 네가 불패의 경지에 오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나릉의 말에 심묘가 미소 지었다.

“불패의 경지라 말하긴 너무 일러.”

“그렇게 보이는걸.”

나릉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단지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불패의 경지에 오를 수는 없다. 심묘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룻밤 사이 의지했던 모든 것, 자식들까지 잃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아집과 실수 때문이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살면서 이유 없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도. 언젠가 상처준 사람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묘 역시 나릉처럼 자책한 적도 있다. 전생에서 자신의 이기심으로 온 가족에게 멸문의 화를 입혔으니 자책할 만했다. 그러나 자책만으로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은 때로 돌아왔다. 이번 생에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전력을 다해 노력했다. 지금은 모두가 무사했다.

“오라버니, 오늘부터는 서재에서 책만 보지 마.”

심묘는 나릉을 바라보고 웃었다. 나릉은 사고 이후 늘 서재에서 책만 보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다들 그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이리 말하는데 내가 감히 책을 보겠어?”

나릉은 살짝 웃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안심이야.”

“아, 아직 안심하긴 일러. 이 과자를 계속 만들어줘야 해.”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당연하지. 오라버니가 먹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만들어줄게.”

나릉은 평온하게 웃는 심묘를 주시했다. 수려하게 생긴 심묘는 순진해 보이지만, 투명한 눈빛은 아주 깊어서 마주하면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오늘 자신을 타일러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온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여전히 마음을 숨긴 채 예의 그 미소로 응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묘는 솔직하게 차근차근 자신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녀가 권하는 일이 정의롭고 선량한 일이 아님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심묘는 마치 집안 어른 같았다. 나릉은 이런 자신의 생각이 우스웠다. 심묘는 이제 고작 열일곱 살로,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리다. 더욱이 나담은 열일곱 살 때 나천과 함께 나무에 올라타며 천진난만하게 놀았다. 아무리 노련해도 이렇게 어린 아가씨에게 ‘집안 어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나릉의 시선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는 심묘를 보며 놀리듯 말했다.

“장래 내가 왼손 검법에 숙달하지 못해도 실망하면 안 돼.”

나릉도 말을 마치고는 짐짓 당황했다. 자신이 듣기에도 방금의 말은 미묘한 내용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왔으니 나릉은 작은 희망을 품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답을 듣고 싶었다.

심묘는 얼떨떨했다. 나릉의 시선이 평소와 달라 곤란했다. 그의 신분은 둘째 치고 자신은 이번 생에서는 혼사에 관심이 없었다. 평생 자신을 존중해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굳이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더욱이 자신은 나릉을 완유처럼 여겼다.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나릉과 혼인하면 자식과 혼인하는 셈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묘는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오라버니, 농담도 참. 우리 가문에서 누가 오라버니에게 실망하겠어?”

심묘는 나릉이 원하는 답을 모른 척 외면했다. 나릉의 눈에 어렸던 빛이 점점 희미해졌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네 위로 고마워.”

“천만에. 한 가족인걸.”

심묘는 잠시 더 앉아 나릉과 담소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묘가 떠난 뒤 나릉은 멍하니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한참 멍하니 있던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은 나릉은 심묘가 가져온 간식을 집으려고 했다.

그때, 바깥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마치 간식을 노린 듯한 거센 바람이 불어 접시가 떨어지면서 깨졌다. 먹통도 뒤집혀 흩어진 과자에 먹물이 튀었다. 놀란 나릉은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람이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거지? 아깝다.”

그는 먹물이 튄 과자를 보며 애석해했다.

* * *

방으로 돌아온 심묘는 곡우와 경칩을 물러나게 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원성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심묘는 감정을 억누르고 대책을 강구했다. 나릉의 부상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명안 공주가 이렇게까지 악랄한 수완을 쓸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 하나로 만족하지 못하고 심구도 겨눴다. 나릉의 부상도 속상하지만, 심구가 나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명안 공주는 전생보다 더 거만하고 악랄해진 듯했다. 조공연회에서의 일로 앙심을 품었다고 결과 따위는 개의치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니 안심할 수 없었다. 일찍 제거해야 좋을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일에 사경행이 개입해 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자신을 공주부에 보내면서 당분간 외출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과연 어떤 수를 쓸지는 모르지만, 사장조가 죽었으니 사장무 역시 없앨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남의 손을 이용해도 좋을 테지만, 사경행은 대가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명안 공주와 사장무를 제거한 뒤 반드시 큰 대가를 바랄 터였다. 그러니 그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그때, 등불이 흔들리며 병풍 위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심묘는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사경행이었다. 심묘는 이곳이 자기 관저인 양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 그의 모습을 보니 답답했다.

그는 오늘 예전에 입던 자줏빛 장포 대신 검은색 비단옷을 입었다. 옷깃 테두리의 은실이 아니라면 어두운 밤 속으로 녹아들 법한 옷이었다. 그러나 한 줄기 빛이 없는 어둠도 그의 아름다운 용모를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도화 눈은 별처럼 반짝였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워 보였다.

“차도, 간식도 없어? 넌 이렇게 손님을 접대하느냐?”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 예왕 전하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네 사람이니 초청 없이도 올 수 있지. 그게 아니라도…….”

사경행이 고개를 들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생명의 은인이지.”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사경행은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조금 불만스러워 보였다. 심묘는 평소 그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놀랍도록 기이했다. 간덩이가 얼마나 부은 사람이기에 감히 그를 불편하게 했을까.

“명안 공주마마와 사장무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

사경행의 일에 관심을 갖지 말자고 다짐한 게 방금인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가 사장조의 시체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사장무를 죽일 생각이에요?”

“그럼, 그가 날 음해하길 기다려?”

사경행의 반문에 심묘는 눈을 흘겼다. 사장무가 사경행을 음해하려고 해도 기회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사경행이 귀한 대량의 예왕 신분인 건 둘째 치고 이전에 임안후부에서도 사가 형제는 그와의 교전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수완이 악랄한 방 씨도 사경행을 그저 지켜보았을 뿐이다.

“사실 당신은 그를 꼭 죽일 필요는 없어요. 사장조를 죽이지 않아도 됐구요. 당신의 아버…… 임안후도 연달아 자식을 잃으면 의심할 거예요. 다른 수완이 있을 테니 구태여 말썽을 불러올 필요는 없어요.”

“그들의 생사는 내가 결정해.”

사경행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나를 걱정하는 것이냐?”

가벼운 말투였다. 그러나 사경행의 아름다운 용모 탓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위험함을 알면서도 가까이하고 싶은 유혹이었다. 심묘는 침착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었다.

“전 예왕 전하께서 절 연루시킬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사경행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올랐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널 보호할 방법이 있고, 나도 보호할 수 있어. 폐 끼치지 않을 거야.”

심묘는 의아했다. 사경행은 무언가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공연한 생각일 터였다.

“예왕 전하의 능력은 뛰어나지요.”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지. 고육지책도 아니야.”

“무슨 뜻이에요?”

“됐다.”

사경행은 일어나 심묘에게 다가갔다. 사경행은 큰 키 덕에 누군가와 마주 볼 때마다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래서 평소 그는 심묘를 가볍게 대해서 그런 압박감을 희석하곤 했다. 그러나 심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오늘 사경행의 시선은 이전보다 많이 날카로웠다.

“넌 내가 명안 공주를 어떻게 처리할 거 같아?”

사경행이 심묘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심묘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자 사경행은 심묘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표정은 무언가 참는 듯 기이했다. 곧 어깨를 쥔 손을 뗀 사경행이 몸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왜 제게 묻는 건가요? 이미 생각이 있는 것 아닌가요?”

사경행이 사장조의 시체를 챙겨 갔으니 심묘는 그에게 이미 계획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묻고 있으니 의아했다.

“그건 네게 달렸어.”

“예왕 전하가 손을 쓰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명안 공주를 죽여도 약점을 잡히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나요?”

심묘는 빠르게 계산했다. 사경행은 몸을 돌려 심묘를 주시했다.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심가 여자, 너 정말 거래를 잘하는구나.”

심묘는 당황했다. 사경행은 오랫동안 자신을 ‘심가 여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심묘는 3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자신과 사경행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신은 그를 경계하며 친분을 맺지 않겠다 생각했다. 사람 일이 원래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라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함께 앉아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은 때때로 정말 기묘하게 흘러간다. 넋을 잃은 심묘를 보며 사경행이 물었다.

“넌 공주를 죽이고 싶은가?”

심묘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명안 공주는 사가 형제와 공모해 절 납치했어요. 기원에 팔아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려고 했죠. 제 오라버니까지 해치려 했구요. 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원한을 은덕으로 갚을 수 없어요. 공주의 목숨을 원합니다. 공주가 제게 하려 한 짓에 비하면 아주 인자한 일입니다.”

“독한 것.”

사경행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웃었다. 심묘가 진국 공주를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는 독하다고만 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지?”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사경행은 아주 심하게 변덕스러웠다. 원래도 그랬지만 정말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는 이쪽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서로를 같은 편으로 묶으며 한배에 탄 거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그리해야 하냐며 변덕을 부렸다. 거센 파도가 멈추지 않는 조정에서 오래 지낸 늙은 신하도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지 않을 텐데.

“당신은 저와 동맹을 맺은 거 아닌가요? 동료를 대신해 나서는 건 합당한 일이 아닌가요?”

사경행은 지금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전생의 배랑이 부수의에게 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을 가르쳤다. 성격이 괴상한 신하가 있다면 뻔뻔한 그보다 더 뻔뻔해져야 한다고 했다. 심묘는 그 수완을 쓰기로 했다. 말문이 막힌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지만 난 널 구했을 뿐 아니라 널 대신해 사람도 죽였다. 그런데 너는 지금 내게 일국의 공주를 암살하라는구나. 동맹은 서로 이익을 주는 법인데 넌 날 위해 무엇도 하지 않으니. 아무런 조건 없이 돕는 건 부부 사이에만 가능하다. 넌 나를 동료가 아니라 낭군으로 여기는 것 같구나.”

분노한 심묘가 냉소했다.

“예왕 전하는 고귀하신 분이니 원치 않으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억지로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명안 공주마마의 일은 제가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무슨 방법을 찾지? 네 사촌 오라비에게 구원을 청할 건가?”

“이게 나릉 오라버니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넌 뭐가 그리 조급하냐. 난 승낙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동료이고 난처하지 않은 일이니 내가 겸사겸사하면 될 일이다. 단 나에게 넌 무엇을 해줄 것이냐?”

심묘가 그를 노려보았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쯧, 좋은 게 생각나지 않는구나. 우선 과자 두 바구니를 만들어다오. 암살 후 배가 고플까 걱정되니까.”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심묘는 사경행이 나간 뒤에야 침상에 앉을 수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그가 어떤 방법으로 명안 공주를 암살할지는 몰랐으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수완이 아주 비상하니 결과는 이미 정해진 셈이었다. 신분까지 바꿔가며 문혜제의 눈 아래에서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런 그에게 명안 공주를 처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왜인지는 몰라도 오늘 그는 기분이 아주 안 좋아 보였다. 심묘는 탁자를 치우며 오늘 왜 그렇게 변덕을 부린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 * *

며칠 동안 비추던 해가 모습을 감추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연약한 귀족 부인과 소저들은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울까 외출을 꺼렸다. 부득이 외출해야 할 때는 빈틈없이 방한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난로를 들어 추위를 덜기도 했다.

만예호 호수가 얼자 남자들은 얼음에 구멍을 뚫어 낚싯대를 드리웠다. 하룻밤 사이 얼어붙은 낚싯대의 고드름이 반짝거렸다. 이렇게 추운 날 문지방이 얼면 부에서도 넘어질 수 있다. 예왕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난 계우서는 예왕부 입구에서 크게 넘어졌다. 그는 뜰 안 얼음을 깨끗이 제거하지 않았다고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사경행이 연경 골목 일대의 주택들을 대거 사들인 후로 계우서는 풍선전당포에 갈 때 빼고는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백호와 노는 데 썼다.

멀리 사경행이 보이자 계우서가 그를 불렀다.

“3형!”

사경행은 계우서를 상대하기 싫었다. 백호는 계우서의 손에서 벗어나 사경행의 곁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고양도 뜰로 나왔다. 그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왕부에서 묵고 있었다.

“장군부에 진찰하러 가는 거야?”

계우서의 물음에 고양은 머리가 아팠다. 그는 궁중 후궁은 물론 높은 관리의 부인, 소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을 치료했다. 그러나 나담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부상이 심각해 곧 죽을 듯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생명을 건졌다.

그녀는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살 만하다고 느끼자마자 계속 훈련에 매진했다. 심묘의 일로 무공을 열심히 쌓아야 자신의 사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여긴 듯했다. 훈련 자체도 문제였지만, 훈련량이 무지막지하단 게 더 큰 문제였다. 몸을 혹사하니 당연히 상처가 빨리 아물 리 없었다. 그러나 나담은 자신이 몸 상태를 전혀 살피지 않는 건 생각지 않고 회복이 느리다며 의심의 화살을 고양에게 돌렸다.

“당신 정말 궁중 의원이 맞아요? 왜 소춘성 의원의 제자만도 못한 것 같지? 그는 넘어져 머리가 다친 사람도 바로 산에 올라 장작을 팰 수 있게 하던데.”

한낱 의원의 제자를 태의인 자신과 비교하다니 고양은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나담은 타박상이 아니라 생명을 잃을 뻔한 부상을 입었다. 머리를 다친 정도가 아니었다. 고양은 나담 같은 환자를 자기 생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뻔뻔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예왕을 몰래 보러 간 일로 약점을 잡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았을 것이었다. 고양이 넋을 빼고 앉아 있자 계우서가 그를 툭 건드렸다.

“대낮에 무슨 꿈이라도 꿔? 왜 멍청하게 서 있어?”

정신을 차린 고양이 계우서를 흘겨봤다.

“자넨 다들 자네 같은 줄 알지?”

“나릉은 어때?”

그때 사경행이 끼어들었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다치진 않았어. 호전되지도 않았고 그냥 전과 똑같아.”

고양은 사경행이 나릉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달갑지 않아 냉담하게 대꾸했다.

“손은 어때?”

“손? 오른손은 사용 못 할 거야. 내 진단을 의심하지 마.”

사경행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양을 보았다.

“치료 못 해?”

“내 의술은 고명하지만 난 신의가 아니야. 나릉은 이미 근골 깊숙한 곳이 상했어. 옛 상처가 있는 부위라 나도 방법이 없어. 그리고 너는 나릉과 관계없잖아. 게다가 나릉은 사촌이야. 사촌도 함께 보살피려고? 아예 세상 모든 사람을 돕지 그래?”

믿을 수 없다는 투로 고양이 비아냥거렸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가 그런데?”

“그럼 대체 왜 그의 부상에 관심을 보이는 건데?”

고양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옆에서 무시당하던 계우서가 자신이 말할 기회가 생기자마자 잽싸게 끼어들었다.

“그건 내가 알아! 나 공자는 심묘 때문에 부상당했잖아. 나 공자가 다 낫지 못하면 심묘는 자책할 거야. 3형과 심묘의 우정은 얕지 않으니 형은 심묘가 상심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야. 3형, 내 말이 맞지?”

사경행이 차가운 눈초리로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계우서는 민망해 코를 문지르며 읊조렸다.

“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고양은 이해가 됐다는 듯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사실 나릉의 손 부상은 좋은 일이야. 손을 다쳤으니 네가 그보다 훨씬 뛰어나잖아.”

“웃기는 소리. 나릉이 손이 하나 더 많대도 나와 비교할 수 없어.”

사경행의 말에 계우서와 고양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틀린 얘기를 했다고. 어쨌든 사경행이 화가 난 것처럼 보이니 계우서는 그를 달래려 했다.

“당연히 3형의 압승이지. 대량의 예왕, 대량 황제 폐하의 친동생인데, 누가 감히 형을 얕보겠어. 나 공자는 명제 변방의 낮은 관리 출신이니 대량에서도 낮은 관직일 거야. 게다가 지금 오른손도 쓸 수 없는데 어디 감히 3형과 비교하겠어?”

계우서의 감언이설은 일류였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술술 내뱉었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다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사경행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계우서는 자신의 듣기 좋은 단말이 통하지 않자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의 낯빛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고양이 화제를 돌렸다.

“탑뢰 사람이 사장조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고 물었지? 심묘는 이미 장군부로 돌아왔어. 어떻게 할 거야?”

납치된 심묘가 탈 없이 송신 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장군부로 돌아온 일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일에 놀란 사람들도 많았다. 며칠 심묘의 납치 사건으로 정경성이 떠들썩했지만, 송신 공주가 얼굴을 내밀었으니 유언비어가 퍼지기 어려울 것이었다. 곧 이대로 유야무야 잊힐 터였다.

그러나 심묘의 납치범만은 이 일을 편히 잊을 수 없겠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일 것이고. 사장조는 사라졌고 심묘는 상처 하나 없이 장군부로 돌아갔으니 그가 어떤 기분일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사경행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당연히 결판을 내야지.”

고양은 사경행을 떠보았다.

“명안 공주와 함께 처리하려고?”

“그렇지 않으면? 진국이 키운 개가 미쳐서 사람을 물었으니 죽여도 탓할 수 없다.”

사경행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폐하께서 이전에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 폐하가 어떤 일을 하실지 모르는데 진국 사람을 건드리면 황보호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황보호가 조사하다가 우리 사람을 찾아내면 네게 방법이 있어도 적지 않은 말썽을 불러올 거야.”

고양은 사경행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경행이 가볍게 웃었다.

“누가 대량의 사람을 쓴다고 했지? 내 사람을 쓸 건데, 그래도 안 되나?”

당황한 고양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명안 공주를 꼭 죽이려 해? 한번 쓴맛만 보여줘도 되잖아. 구태여 목숨까지 받아내야 해?”

“그 미친개가 이미 내게 많은 말썽을 선물했어. 내가 원하면, 누구든 그 목숨을 바로 취할 거야. 너와 의논할 필요는 없지.”

사경행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그는 두 사람을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백호를 안은 채 떠났다. 계우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3형이 왜 저렇게 변덕스럽지? 형이 건드렸어?”

“그럴 리가. 난 오래 살고 싶어.”

“사장무와 명안 공주는 살아남기 어렵겠다. 사장조는 쉽게 갔으니 오히려 행운아였네.”

고양이 드물게 계우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경성 임안후부는 화려했던 2년 전에 비해 많이 한산해졌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잘 없었다. 사정을 방문하는 사람 역시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경행이 죽은 뒤 사정은 조정 일에 흥미를 잃었으니 이전처럼 그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선황 때부터 신경을 써온 고관세가였던 사씨 가문이 드디어 원기를 잃었다.

지금 사씨 세가에서 조정 일을 하는 사람은 사장무와 사장조였다. 두 사람은 사경행만큼 뛰어나진 않으나 능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서자 신분이 아니었다면 더 빨리 더 높은 관직에 오를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 관직 등급에 탄식하며 애석해했다.

방 씨는 새로 만든 의복을 사장무에게 건네줬다. 방 씨는 불혹에 가까우나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황실 출신인 옥청 공주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과 달리 방 씨는 가난한 집의 고운 딸처럼 보였다. 작고 느리게 이야기하며 부드러운 손동작으로 상대가 그녀를 어여삐 여기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옥청 공주가 있음에도 사정이 방 씨를 첩으로 들였었다.

“올해 새로 내온 옷감으로 두 사람의 겨울옷을 만들었단다. 정경성은 추운데, 너희는 온종일 돌아다니니 감기에 걸리지 말아야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건네받은 사장무는 감사를 표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네 동생 옷도 여기 있다. 친구와 사냥을 하러 갔다더니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느냐. 대인께서 어제 내게 말씀하셨다. 사장조가 한결같이 이부로 가려 해서 그 애를 데리고 이부시랑을 만나 이야기하시려 했다고. 그런데 당사자가 없으니 이 좋은 기회를 놓쳤구나. 장조는 늘 조정 일에 열중했는데 어째서 지금은 놀이에 푹 빠져 있을까.”

방 씨가 탄식하며 사장조를 탓했다.

“노는 데 정신이 팔린 건 아닐 겁니다. 최근 바람이 세고 눈이 내렸잖습니까. 산을 나오기가 어려워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돌아올 겁니다. 그때 다시 부친께 말씀드려 이부시랑을 만나면 될 거예요.”

사장무가 간신히 미소로 모친을 위로했다. 하나 방 씨는 사장무의 말에 더욱 걱정에 잠겼다.

“그래. 요새 바람이 강하고 눈이 내리니 입산을 금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장조는 사냥을 가도 하필 이런 날씨에……. 위험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요. 많은 사람과 함께 떠났고 그들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사장무가 안심하라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방 씨는 그제야 안심했다. 그녀는 사장무의 손을 잡았다.

“어미는 너희 두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다. 대인께서는 오랫동안 내게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으시는구나. 사경행이 너희 두 사람을 억압해 억울함을 당하는 걸 볼 때마다 이 어미는 대단히 괴로웠지. 여러 해 힘들었지만, 그가 죽었으니 지금 임안후부에서 너희 앞길을 막을 사람이 없다. 너희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가야 해. 지난날 우리 모자를 손가락질한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거라. 장래 대인께서 너희 공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이 어미를 위해서라도 높은 관직을 차지하거라. 그러면 서자 신분은 사라지고 온 임안후부는 너희 것이 될 것이다.”

방 씨는 느리고 작게 말했으나 분개하는 기색이었다. 여러 해 억압받은 생활을 떠올리며 속앓이하는 듯했다.

“안심하세요, 어머니. 사경행이 일찍 죽은 건 하늘도 우리 편이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임안후부는 우리 모자의 손에 들어올 거예요.”

방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배웅한 사장무는 초조해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모친을 안심시키기는 쉬웠다. 수완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결국 규방 여인이니까. 그러나 사정이 사장조의 종적을 묻기 시작했으니 큰일이었다.

사장무는 사정과 연회에 다녀온 뒤부터 사장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사장조가 긴급한 일로 잠시 떠나 있을 수는 있지만, 밀실 안에 있던 심묘도 보이지 않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긴 게 틀림없었다.

밀실은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비밀 공간이었다. 빈 공간을 우연히 발견했으나 누구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추후 쓸데가 있겠다 싶어 보수한 다음 작업자는 사장무 자신이 직접 죽였다. 그래서 자신과 동생 말고는 그 밀실의 입구와 출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사장조가 심묘를 데리고 나간 거라고 여겼다. 기원에 팔든 어쨌든 그녀를 처리할 방법을 찾았는데, 시간이 촉박해 자신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을 거라고. 그러나 심묘는 송신 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장군부로 돌아왔다. 자신에게는 몹시 불길한 소식이었다.

심묘는 구출된 것이다. 그럼 사장조는 어디로 간 걸까. 게다가 대체 누가 심묘를 구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밀실에는 싸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밀실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장조가 심묘를 데리고 나갔다가 들켜서 심묘가 누군가에게 구출된 걸까. 그렇다면 송신 공주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모든 일이 잘못된 것 같았다. 사장조가 죽었다면 시체가 있어야 하고, 살아 있다면 무슨 연락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써서 그를 찾아보았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사장조가 장시간 보이지 않자 명안 공주는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장무를 부로 불러들였다. 그녀 역시 심묘가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사장무는 일단 임시방편으로 그녀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면 모두 탄로 나고 결국 그녀는 폭발할 것이었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 탓에 사장무의 입안에는 물집까지 생겼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장조를 찾으려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탁자 위에 편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좀 전에는 없던 편지였다. 누가 두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 하인들이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경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편지를 뜯어보니 익숙한 필체였다. 바로 사장조의 필체였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심묘를 기원에 옮기려다가 도중에 관병을 만나 부득이하게 만예호 농가에 몸을 숨겼다. 심묘가 장군부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사실 심신과 송신 공주가 공모한 속임수이다. 심묘를 납치한 사람이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목적으로, 수색을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그러니 심묘를 데리고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명안 공주가 조급하게 몰아붙일 테니 더는 일을 미룰 수 없어 오늘밤 자시(子時, 밤 11시~오전 1시)에 심묘를 기원에 팔 것이다. 심묘가 치욕을 당하기만 하면 우리가 중도에 실수한 일도 공주가 눈감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묘가 치욕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 더욱 좋아할 테니 그녀를 데리고 올 수 있으면 데려오는 게 좋겠다.

사장무는 편지 내용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묘가 장군부로 돌아왔다고 했지만 이후 심묘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묘가 사실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그런 얘기가 이미 귀에 들어갔을 터인데도 심신은 심묘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사장무는 편지 내용처럼 사실은 심묘를 찾지 못한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필체를 보면 의심할 바 없이 사장조가 쓴 편지였다. 사장조의 필체는 특이해서 따라 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사장조는 문서를 작성하는 일도 드물었다. 고작 그가 쓴 몇 개의 문서로 그의 필체를 모방하기는 불가능했다. 누군가 그의 필체를 흉내 낸다면 사경행밖에 없을 터였다. 사장조가 어릴 때 글씨를 연습한 원고가 임안후부 내에 있기 때문이다. 사경행이 사장조의 필체를 모사할 생각이 있더라도 죽었으니 이 세상에서 사장조의 필체를 따라 할 사람은 없다.

사장무는 종이를 펼쳐 답변을 쓰기 시작했다.

* * *

진국의 부귀는 명제보다 나았지만, 만금을 호가하는 주택들이 가득한 구역을 통째로 산 대량의 부귀에는 미치지 못했다. 진국에서 연경 골목 입구 쪽의 주택을 구매해 거처가 예왕부와 거리가 있는 진짜 이유기도 했다.

진국 태자부. 명안 공주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녀는 간식과 화차를 맛볼 기분이 아니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화를 내고 있었다. 오늘 시종 몇몇이 명안 공주에게 이유 없이 욕을 먹었다. 그녀들은 명안 공주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불안해했다.

“사장무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명안 공주의 물음에 수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안 공주는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쓸모없는 놈!”

주위 사람들은 명안 공주의 자기 직성대로 모든 게 풀려야 하는 성격에 익숙했지만, 여전히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명안 공주는 답답한 듯 방을 나가 뜰을 걷기 시작했다.

사장무와 사장조가 일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심묘는 탈 없이 장군부로 돌아갔다. 명안 공주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가 형제의 일 처리가 분명치 못하다고 화풀이를 했다. 사장무는 그런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명안 공주는 당장 사가 형제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황보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했기에 부에서 그들의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소식이 오지 않았다. 명안 공주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분통이 터져서 사가 형제에게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겠다 이를 갈았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시킨 일을 성사하지 못하고도 편안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수하에게 사가 형제를 찾아가라 명하려 할 때, 남종이 달려왔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명안 공주에게 편지를 건넸다.

“마마, 사가 둘째 공자가 보낸 것입니다.”

명안 공주는 빠르게 편지를 뜯어 읽어내렸다. 얼굴의 분노한 기색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녀는 갈기갈기 편지를 찢어 편지의 흔적을 없앴다.

“산뜻하고 화려한 의상을 골라두거라. 상자를 전부 뒤져 장신구도 골라다오.”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명안 공주의 모습에 시녀들은 의아해했다. 명안 공주는 최근 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데 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단장까지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히 물을 수 없어 명령대로 그녀를 치장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유수같이 지나갔다. 겨울에는 날이 일찍 어두워지는데 유독 오늘은 더욱 빨리 밤이 찾아왔다. 밤이 되자 거위 털만 한 눈송이가 어지럽게 휘날렸다. 차가운 북풍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밤거리의 사람들은 급히 사라졌다. 온 정경성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자시의 만예호는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주점에는 온밤을 밝힐 듯 술을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심야의 바람은 칼날 같아서 살에 닿으면 에는 듯했다. 아가씨들은 매서운 바람을 두려워하고 따뜻한 미주도 얼어붙으니 모두 창문을 꼭꼭 닫았다. 천금 같은 술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긴 했지만 오가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만예호 위의 놀잇배들도 멈춰 있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어붙었으니 당연히 움직일 수 없었다. 호수 중앙에 있는 배는 유달리 적막해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배에 오른 사람은 사장무였다. 그는 불안한 듯 자꾸 손을 비볐다. 도둑이 제 발 저려서인지, 장군부가 아직 수색을 하고 있다는 말에 긴장해서인지 그는 주머니 난로도 깜박했다. 그러나 배의 난로를 켜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냈다. 두꺼운 옷을 여러 겹 입었으나 얼어버린 호수의 배는 여러 날 쓰지 않아 냉기로 가득했다. 찬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사장무는 밖을 내다보았다. 기다리는 이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 조급하고 초조해졌다. 사장조는 분명 편지에서 오늘 이 시각, 이 배에서 만나자고 전했다. 아직 정경성 곳곳에는 심신의 사람들이 있으니 인적이 드문 만예호에서 만나자며, 이곳이라면 절대 들킬 리 없다고 장담했다.

호수는 꽝꽝 얼었고, 가까운 주점들은 창문을 꽉 닫았으니 과연 그의 말마따나 안전해 보였다. 누구도 이런 날 배 위에 사람이 있으리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을 터였다. 이는 하늘이 내린 선물로 실수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런데도 사장무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장조가 모든 일을 준비해두었다 하니 괜한 기우일 터였다.

그래도 곧 자시인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바깥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사장무는 기쁜 마음에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과연 멀리 등에 누군가를 업은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사장조가 심묘를 업고 오는 모습으로 여긴 사장무는 한숨을 쉬며 뱃머리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다가올수록 사장무는 미심쩍었다. 그림자가 너무 길었다. 게다가 몸매도 사장조와 다른 것 같았다. 불안한 그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상대가 등불을 밝혔다.

“사장무, 무엇 하느냐!”

명안 공주가 호위 등에 업혀 온 것이다. 명안 공주는 매우 불만스러웠다. 사장무는 편지에서 자시에 만예호로 나오라고 했다. 진국의 계절은 늘 봄 같아 명안 공주는 혹독한 겨울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 추위를 무릅쓰고, 황보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까지 쓰며 나온 것이었다.

사장무는 아름답게 장식한 놀잇배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그녀는 호위 한 명의 등에 업혔고 나머지 호위들은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심묘의 치욕을 직접 보는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오는 동안 생긴 불만을 사장무에게 터트렸다.

“공주마마,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장조의 물음에 명안 공주는 욕을 퍼부었다.

“미쳤느냐? 네가 내게 심묘의 치욕을 감상하라고 부르지 않았더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사장무는 얼이 빠졌다. 사장조는 자신에게 명안 공주를 데려와 그녀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자고 제안했지만, 자신은 공주가 일을 망칠 수도 있고 중도에 다른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어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정말로 실수가 없어야 하는 날이니 신중을 기해도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명안 공주에게 오늘 일을 알리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왔는데 작은 실수로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더욱 큰 화를 감당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도 명안 공주는 이 자리에 나타났다. 심지어 자신이 그녀를 불렀다고 했다. 불안이 검은 손을 뻗어 목덜미를 잡아채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명안 공주는 의심이 가득한 사장무의 얼굴을 보자 불만스러웠다.

“나를 놀리는 게냐?”

“소신이 어찌 감히. 그러나 소신은 정말로 공주마마께 편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장무는 굵은 땀을 흘리며 고했다.

“편지를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넌 왜 이곳에 있느냐? 더군다나 오늘밤 심묘에게 치욕을 줄 거면서 왜 내게 알리지 않으려 했다는 거지?”

노한 명안 공주가 외쳤다. 사장무는 말문이 막혔다. 명안 공주는 자신이 하려는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자신과 사장조만 아는 일인데 의아했다. 사장조가 명안 공주에게도 편지를 보낸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중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소신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단지 사장조가 심묘를 데리고 있어 동생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장조? 너희는 같이 있지 않았느냐?”

명안 공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장조의 행방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으니 사장무는 대충 얼버무렸다.

“사람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따로 이동했나이다.”

의심을 거둔 명안 공주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 적힌 것처럼 심묘가 장군부에 돌아간 건 심신과 송신 공주가 합작한 속임수라는 게 정말이냐?”

“맞습니다.”

사장무는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사실 자신도 의심스러워한 부분이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모두 사장조의 일방적인 주장이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조가 보낸 편지가 가짜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세상에 사장조의 필체를 모방할 사람은 없다.

명안 공주는 추운 듯 손을 계속 비볐다.

“사장조는 도대체 언제 오는 게냐?”

“자시에 올 거라고 했습니다.”

“지금 몇 시진이지?”

명안 공주가 데려온 호위에게 물었다.

“곧 자시입니다.”

밖에는 눈바람이 불어 심장까지 오그라들 정도로 추웠다. 사장무는 이유를 몰랐지만 더욱 불안해졌다.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위험에 빠지기 전 본능적으로 도망치라는 신호 같았다. 그는 명안 공주의 눈치를 보았다.

“공주마마께서는 먼저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소신이 내일 다시 공주마마께 알리겠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냐? 내가 이미 와 있거늘 돌아가라니. 사장무, 나는 당장 네 목이 달아나게 할 수 있다!”

명안 공주가 벌컥 성을 내며 흉악하게 날뛰자 사장무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명안 공주는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왔구나!”

두 사람은 뱃머리로 향했다. 얼어붙은 호수 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있었다. 눈만 드러내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매우 은밀하구나.”

명안 공주가 흡족한 얼굴로 주도면밀함을 평했으나 곧 미간을 찡그렸다.

“심묘는?”

열 명 정도 되는 그들은 모두 남자처럼 보였다. 심묘처럼 보이는 이는 없었다. 명안 공주가 불만스럽게 사장무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장무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자 본능적으로 등이 서늘해졌다. 일이 단단히 잘못된 거 같았다. 더구나 그 무리에서 사장조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눈얼음으로 뒤덮인 만예호를 재빠르게 떠날 방법은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는 숨을 곳도 없으니 목숨을 건지기 어려워 보였다. 명안 공주의 불만에 답하지 않은 사장무는 무리를 향해 외쳤다. 쥐어짠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너희는 누구냐?”

그들은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계속 다가오기만 했다. 이상함을 느낀 명안 공주가 사장무에게 물었다.

“저들은 사장조의 사람이 아니냐?”

사장무는 명안 공주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사실대로 고했다.

“사장조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명안 공주가 다가오는 무리에게 소리쳤다.

“무엄하다! 나를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니!”

명안 공주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 양 그들은 여전히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명안 공주 곁에 서 있던 호위가 칼을 뽑았다. 그는 명안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돌격했다. 이들이 나쁜 의도를 품었다는 것을 깨달은 명안 공주가 호수 밖을 보며 외쳤다.

“호위들은? 나머지 호위들은 어디로 갔지?”

명안 공주는 호위 중 한 명만 놀잇배로 데려왔다. 나머지 호위들은 근처에 두고 왔으니 지금쯤 그들이 그녀를 보호하러 오고도 남아야 했다. 그런데 나머지 호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명안 공주처럼 사장무도 허둥거렸다. 그 역시 이곳에 혼자 오지 않았다. 몇 명의 수하를 근처 놀잇배에 두어 변고를 막으려 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어디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명안 공주의 호위는 칼을 내지름과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희미한 등불에 피가 용솟음치는 게 보였다. 한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만예호에 바람이 매섭고 독하게 불었다. 그러나 명안 공주와 사장무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흘렀다. 명안 공주는 두려움을 강하게 억눌렀다.

“나는 진국의 공주다. 너희가 지금 떠나면 잘못은 묻지 않고 개 같은 너희 목숨을 살려주마. 그러나 떠나지 않는다면 태자 오라버니가 너흴 처벌할 것이니, 그때 가서 원망하지 말거라!”

사장무는 그 위협에 겁을 내야 할지, 명안 공주가 미련하다고 크게 욕해야 할지 몰랐다. 명안 공주가 자신의 신분을 수상한 무리에게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러자 명안 공주가 받았다는 편지에 대한 의문도 한순간에 다 풀렸다.

그러나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살려달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외침이 들릴 리도 없고, 사람들이 도와주러 오면 더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명제의 신하인 사장무가 한밤중 만예호 놀잇배에서 진국 공주를 만난 게 드러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눈에 뻔했다. 진퇴양난 속에서 사장무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겁박했다.

“진국 공주를 모해한 죄명은 가볍지 않다. 죽는 게 두렵지 않으면 덤비거라. 하늘 끝까지 쫓기며 의지할 곳 없이 떠돌게 되면 두렵고 불안해 하루도 편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은 겐가?”

명안 공주는 사장무의 당당한 기세에 조금 안심했다. 사실 자신도 이 상황이 두려웠으나 진국 공주라는 신분을 밝혔으니 감히 해를 가하지 못하리라.

“그렇다. 나는 진국의 공주니 너희가 감히 건드릴 수 없다. 오늘 너희가 날 건드리면 진국 황실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무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미주처럼 달콤해서 매우 듣기 좋았다. 그 사람은 앞으로 한 발 나왔다. 다들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무언가 다른 사람과 달라 보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남자의 체격은 크고 더욱 굳세 보였다. 뼛속 깊이 부귀한 기운이 풍겼다. 한눈에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나는 진국의 공주다. 내 말 한마디면 너희의 목이 달아날 수 있단 말이다!”

노한 명안 공주의 말에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는 기쁜 기색이 명백했다. 사장무와 명안 공주는 남자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명안 공주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무시당한 적이 없었다. 당장 목을 치지 못해 분했지만, 그보다도 이 남자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의아했다.

“왜 웃는 거지?”

“네가 주제를 모르기에 웃었다.”

“너!”

노기등등한 명안 공주가 크게 외쳤다.

“한낱 진국 공주가 뭐라고? 죽으면 똑같을 뿐이다.”

목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예의 없는 말이었다. 명안 공주가 크게 소리쳤다.

“무엄하다!”

“나는 무엄하지 않다. 네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명안 공주의 경고에도 남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명안 공주는 멍해졌다. 이 매력적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드러난 눈은 도화주처럼 취기를 불렀고, 눈꼬리에는 정을 담은 듯했으나 차가웠다.

“예왕 전하!”

명안 공주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사장무가 사납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장무 역시 이 남자가 왠지 낯익었다.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듯했지만, 설마 대량의 예왕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남자는 명안 공주의 말을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묵인의 뜻이 스쳤다. 사장무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예왕 전하, 이곳에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사장무는 예왕이 이곳에 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예왕은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고 명안 공주와도 왕래를 하지 않은 듯 보이니 이곳에 나타날 리 없었다.

명안 공주는 그가 예왕이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바로 분노를 거둬들였다. 오히려 알랑거리며 말했다.

“예왕 전하, 야심한 밤에 이곳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장무는 명안 공주가 정말 아둔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명안 공주의 호위를 죽였으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 게 뻔하지 않나. 게다가 예왕이 풍기는 분위기는 매우 위험했다. 사장무는 속으로 진땀을 뺐다. 예왕은 명안 공주에게 대꾸하지 않고 사장무를 바라보았다.

“넌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구나.”

“전하, 감히 묻겠습니다. 제 동생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장무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편지의 필체는 사장조가 틀림없는데 이곳에 나타난 사람은 예왕이다. 사장무는 사장조가 예왕의 손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사장조와 예왕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보았지.”

예왕이 웃으며 답했다. 예왕의 답에 사장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내 손에 죽었다.”

명안 공주와 사장무는 몸서리쳤다. 겨우 정신을 차린 사장무가 물었다.

“예왕 전하, 어째서 제 동생을 죽이셨습니까?”

“그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사장무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했다. 현재 사장조가 건드린 사람은 심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왕은 심묘를 대신해 나섰다는 소리이다. 예왕이 그녀를 위해 나설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예왕과 장군부가 사적으로 관련이 있는 건가 싶었다. 사장무는 큰 비밀의 작은 부분을 엿본 듯했다. 그러나 전체 상황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아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예왕 전하,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명안 공주는 예왕이 사장조를 죽였다고 시인하고 나서야 위험을 깨달았다. 심장이 극렬히 뛰기 시작했다. 예왕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나 광활한 만예호에 떨어지는 눈처럼 아름다우나 차디찼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뼈를 묻는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없지.”

“전하는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저희는 전하와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저희를 놔주십시오.”

사장무는 예왕의 살의가 극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꼈다. 도망칠 곳이 없는 사장무는 공포를 억누르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예왕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원한이 없다? 넌 너무 잘 잊는구나. 사장무, 너는 네 어리석은 동생처럼 이리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성장하지 않았구나.”

사장무는 어딘지 모르게 예왕의 말이 익숙했다. 그는 예왕이 복면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희미한 불빛으로는 예왕의 광채를 덮을 수 없었다. 반듯한 코, 얇은 입술은 평소 냉소적인 웃음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두 눈은 매우 온화했지만 분명 눈앞의 이들을 비웃고 있었다. 사장무 일생의 악몽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사경행!”

명안 공주는 사경행의 아름다운 용모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 과연 소문처럼 가면 아래 예왕의 본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사경행의 용모에 넋을 잃은 명안 공주는 사장무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아직 날 기억하는구나.”

사경행이 살짝 웃었다. 웃음이 가득한 사경행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장무에게 무섭게 다가왔다. 사장무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위험을 만난 사냥감은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본능에 따라야 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완전히 공포에 지배당한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입도 열 수 없었다. 명안 공주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만예호 중앙인 데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 등불이 환한 주점에는 결코 이 미묘한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에 시체를 던져도 물보라조차 일지 않고 돌이 천천히 가라앉듯 아주 조용할 터였다.

사장무와 명안 공주는 눈을 크게 뜨고 이곳을 떠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얼음 위에서도 그는 여전히 품위 있게 걸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만예호에 가득히 내리는 눈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

“놀이를 끝내라!”

* * *

심묘는 잠에서 깨어났다. 초조한 기분이 들어 일어났다. 밖에는 털끝만큼의 인기척도 없으니 동도 트지 않은 시각인 듯했다. 그녀는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 더는 잘 수 없었다. 방의 난로가 후끈해 답답했다. 창가로 다가간 그녀는 창문을 열고 답답함을 해소하려 했다.

창문을 여니 아직 눈이 내렸다. 눈송이가 방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심묘가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자 눈송이는 녹아내렸다. 갑자기 외로워졌다.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홀로 눈을 바라보니 쓸쓸했다. 심묘는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있는 힘을 다해 덮어놓은, 완유와 부명의 얼굴과 옛 상처를 떠올리자 폐부가 은은히 아릿했다.

그때 작은 꽃송이가 심묘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심묘는 멍하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눈송이가 아닌 새빨간 해당화였다. 이 추운 겨울날 해당화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창문 앞에 있는 나무는 해당화가 아니었다.

심묘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나뭇가지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양손으로 머리를 받친 사람은 흡족해 보였다. 심묘가 자신을 보는 것을 안 그는 심묘를 내려다보았다. 수려한 용모를 가진 그는 웃고 있었다.

“왜 당황했어?”

“거기서 뭐 해요?”

심묘가 되물었다. 남의 뜰 나무에 올라가 있을 사람은 사경행밖에 없다. 대량 예왕의 취미는 참으로 놀라웠다.

“날 기다리느라 깨어 있던 거야? 나는 꽃을 네게 주려고 기다렸지.”

사경행이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심묘 앞에 섰다. 창을 사이에 두고 심묘는 방 안, 사경행은 방 밖에 있었다. 그는 심묘의 손바닥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또 허튼소리. 심묘는 치를 떨며 사경행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웃음기는 이전과 달랐다. 그 웃음 때문인지 몰라도 심묘는 들어오라고 먼저 권했다.

“들어와요. 방에 과자가 남아 있어요.”

겨울밤, 차와 간식은 식어 차가웠지만 사경행에게는 싫은 기색이 없었다. 그가 과자를 먹는 모습은 우아해서 그림처럼 매력적이었다.

“줄곧 여기 있었나요?”

그는 바깥의 찬기를 가득 뿜고 있었다. 그는 방금 이곳에서 기다렸다고 했다.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궁금했다.

“나더러 명안 공주를 죽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심묘는 멍해졌다. 그녀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떠보았다.

“공주를 죽였나요?”

“어디 그뿐일까?”

심묘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경행의 수완은 확실했다. 예전에 그가 임안후부의 소후야일 때 납치당한 자신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납치한 사람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처리했다. 얼마 전 임안후부의 밀실에서는 사장조도 깔끔하게 해치웠으니 그의 수완이 확실하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사실 때때로 심묘는 사경행이 황제가 갖춰야 할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사경행과 부수의는 달랐다. 부수의는 황위를 위해 오랫동안 참아냈지만, 사경행은 가장 직접적인 대항 방법을 사용했다. 대량 황실에는 뼛속 깊이 당당함이 흐르고 있어서일까. 잠시 생각하던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 곳의 대량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시 사경행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 그를 함께 고려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스스로 그를 정말 동료로 여기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명안 공주마마를 어떻게 했나요?”

심묘는 사경행이 명안 공주를 어떻게 처리했을지 조금 기대했다. 물론 이런 기대의 바탕에 악의가 없다면 거짓이었다. 심묘는 명제 황실에서 오래 황후로 지냈으니 피를 보지 않는 선량한 여인은 아니었다. 특히나 악독한 명안 공주에게 연민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기대되나 봐?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사경행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명안 공주의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방식이라는 얘기일까. 심묘는 한 가지 더 물었다.

“그럼 사장무는요?”

사경행이 명안 공주에게 손을 썼다면 사장무도 당연히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사경행은 심묘의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였어.”

“임안후가 알고 상심할까 걱정되지는 않나요?”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난로가 타올랐다. 사경행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그의 입술은 찻물에 젖어 더욱 붉었다. 사경행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웃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임안후부의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박정한 말이었다.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웃는 사경행의 얼굴에서 자조의 기색이 엿보였다.

사가 형제에게 손을 쓰고부터 사경행은 진정으로 임안후부와 모든 연을 끊어버렸다. 사정이 사가 형제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조사하게 되면 사경행에게 적의가 없더라도 결국 일이 편안히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친아들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오랫동안 부자 관계였던 두 사람이 원수가 되는 셈이다. 심묘는 사경행이 보이는 것처럼 정말로 무심한 건지, 아니면 모든 감정을 숨긴 건지 알 수 없어 생각에 잠겼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 사경행의 심정이 이와 같아 심묘는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눈보라가 치는 이 겨울밤, 사경행이 나무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건 정말 자신에게 꽃을 주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잠들 수 없어 고통스러운 생각을 바람에 쓸려 보내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런 면에서 비슷했다. 심묘가 사경행을 보는 시선이 불현듯 따뜻해졌다. 그녀의 시선을 언뜻 본 사경행이 당황해했다.

“그건 무슨 눈빛이야? 날 동정하는 건가?”

“저를 돌볼 겨를도 없는데, 무슨 자격으로 다른 사람을 동정하겠어요. 게다가 예왕 전하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사람인 것을요.”

심묘는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사경행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려고 화제를 바꾸었다는 자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했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머금고는 심묘에게 다가왔다.

“너를 낮출 필요는 없다. 너는 나와 동맹을 맺었으니 남보다 한 수 위다. 그러나 나의 여인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남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사경행의 목소리는 조금은 열에 들떠 있었다. 게다가 아주 부드러웠다.

사경행은 아주 아름다웠다. 전생의 심묘는 궁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무수히 만났다. 그러나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보지 못했다. 외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풍기는 기운은 영혼에도 새겨진 듯 우아하고 매력적이었다. 겨울에 피어날 수 있는 봄꽃처럼,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가 무심히 사람을 바라보면 그 사람은 사경행이 이 세상에서 자신만 진지하게 대해주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사경행의 눈빛이 심묘의 입술에 닿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등불 아래 남녀의 그림자가 뒤엉켜 전에 없던 고운 선을 그렸다.

사경행을 밀어내기 전까지 심묘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 탓에 적절한 반응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듯했다. 심묘는 다급히 눈앞에 있는 차가운 차를 한입 마셨다. 이 차는 방금까지 그가 마시던 것이었다. 심묘는 두 번 가볍게 기침한 후 사경행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천천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사경행은 심묘에게 밀려 자칫 넘어질 뻔했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심묘가 조급하게 차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심묘가 밀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다정하게 미소를 짓고는, 늘어지듯 의자에 편히 기댔다.

“이봐.”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의 그림자만 보았다. 사경행의 눈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부끄러워하는 게냐?”

심묘는 사납게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쏘아보는 모습이었지만 방 안의 따뜻한 빛 때문인지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작고 귀여운 그녀는 겉모습과 다르게 단정하고 장중해서 어린 소녀의 표정은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곤란하고 부끄러운 듯 희고 깨끗한 뺨에 술에 취한 듯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자 사경행은 2년 전, 취기에 올라 불꽃놀이를 보고 싶어 하던 심묘가 떠올랐다. 입가에 그때의 매화주의 향기가 맴도는 듯 신선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심묘.”

“왜요?”

심묘가 부끄러움과 언짢음을 눌러 앉히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가 강경하게 행동하거나 속임수를 쓴다면 담담히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지금 자신에게 어린 아가씨를 대하듯 장난스럽게 굴고 있었다.

심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황후였을 적에, 모든 사람은 자신 앞에서 아첨하고 순종하는 척하며 뒤에서는 헐뜯고 욕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은 시종일관 궁중 규칙과 예의를 철저히 지키는 고루한 사람이었다. 사경행 같은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매번 자신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패를 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 내가 마신 차를 마셨어.”

사경행의 말에 심묘가 고개를 숙여 찻잔을 바라보았다. 곤혹스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오늘밤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방에 들인 것부터가 큰 실수였다.

“부끄러워하는 게냐?”

사경행은 심묘의 부끄러운 모습을 꽤나 즐기는 듯싶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안 가시나요?”

심묘는 정색했다. 사경행은 아무 말 없이 심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날카롭고 깊어서 보통 사람은 마주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심묘는 침착하게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사경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부끄러워하니 나도 더는 곤란케 하지 않으마.”

그의 말 때문에 다시 방금의 그 일이 떠올랐다. 심묘의 얼굴이 순간 뻣뻣해졌으나 사경행은 보지 못한 듯싶었다. 사경행이 창문가로 걸어가자 심묘가 따라 일어났다. 창문을 열자 바깥에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 심묘는 찬 바람에 몸을 떨었다.

“추우니 배웅할 필요는 없다. 고맙구나. 차도 잘 마셨고, 간식도 좋았다.”

사경행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는 이미 창밖이었다. 심묘가 창문을 닫으려 창문가로 다가갔다. 눈바람이 부는 뜰에서 늠름한 사경행이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에게 온화하게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주 귀엽구나.”

심묘는 창문을 쾅 닫았다. 마음이 여려지는 걸 다잡아야 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리며 침상에 앉았다. 침상 머리의 등을 바라보니 희미한 것이, 곧 꺼질 것처럼 보였다. 등불과 달리 심묘의 눈빛은 너무 밝았다. 심지어 반짝거리기까지 해 좋은 보석처럼 광채를 내뿜었다.

심묘는 왜 자신이 곤란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사경행이 하극상을 일으켰다며 무엄하다고 소리친 후 참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생에는 방법이 없었다.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 사경행이 고개를 숙였을 때 그의 긴 속눈썹을 하나하나 다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달빛보다 사람을 취하게 했고 입술은 달의 조각처럼 조금 차가웠다.

심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이마를 문질렀다. 근래 피곤해서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는 것이리라. 사경행처럼 잘생긴 사람에게는 모두 매료될 테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녀는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침상에 누운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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