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장
정경성의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어젯밤 많은 눈이 내려 더욱 쌀쌀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올 무렵 눈은 이미 그쳤으니 사람들은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거리 위의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다.
만예호는 단단하게 얼어 평범한 낚시꾼들은 이곳에 감히 오지 않았다. 이렇게 단단한 얼음에는 구멍을 뚫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날씨가 풀리면 다시 올 터였다. 낚시꾼들이 없는 만예호는 개구쟁이들이 주인으로 군림하다시피 했다. 두꺼운 장화를 신고 나무판을 옆구리에 끼고 호수를 찾아온 아이들은 매일 반짝이는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이렇게 노는 아이들의 대다수는 상인 자녀로, 부모들은 새 겹저고리를 더럽히지 말라고 꾸중하는 한편 얼음이 갑자기 깨져서 다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노는 게 제일 즐거울 아이들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아이들은 부모 몰래 나무판을 가지고 만예호로 달려갔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대여섯 살 모습의 아이들이 나무판을 껴안고 만예호 중앙으로 걸어갔다. 빙판은 아주 미끄러워 너나 할것 없이 다들 조심스럽게 걸었다. 넘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옷이 젖고 더러워지는 건 문제였다. 부모에게 혼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가까스로 만예호 중앙에 다다른 아이들은 나무판을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았다. 아이들은 서로를 밀어주며 정신없이 놀았다. 솜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어린 꼬마가 더 멀리 가려는 듯 나무판을 들고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아춘, 너 거기 서서 뭐해?”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아춘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저 얼음 조각 이상해.”
아춘이 앞쪽을 가리켰다.
* * *
성 남쪽에는 식당과 상점들이 많았다. 상점가는 번화했고 자릿세도 상당했다. 큰 식당은 보통 사람이 임대할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상점의 주인들은 꽤 부유하다고 볼 수 있었다. 평소 상점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빴지만, 아무리 장사가 잘되는 가게도 한가할 때는 있는 법이었다. 주인들은 바쁘지 않을 때는 앉아 잡담하거나 차를 마시곤 했다. 지금은 아침 시간이라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주인들은 여느 때처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눴다. 날씨가 날이 갈수록 추워진다고 말할 때, 아이들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달려왔다. 아이 중 몇은 이곳 상인들의 자녀였다. 연지를 파는 여주인이 아이를 보고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동자, 너 또 아춘을 데리고 만예호에 갔었니? 아춘의 새 솜저고리가 다 젖었잖아. 엉덩이를 맞고 싶은 거니?”
다른 상점 주인들도 자녀를 보며 훈계했다. 아이들은 모두 엉망진창이었다. 다들 옷이 젖어 있었다. 심지어 한쪽 장화를 잃어버린 아이도 있었다.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부모들이 목소리를 더 높이려 할 때, 동자라 불린 남자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만예호, 만예호에 사람이…….”
당황한 사람들 사이에서 무명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말했다.
“큰일이군. 어느 집 아이가 물에 빠진 것 아닌가?”
만예호의 빙판에서 아이들이 놀다 물에 빠지는 일은 늘 있었다. 아이가 빙판이 깨진 틈에 빠져 죽은 일도 있었다.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연지를 파는 여주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가서 봅시다! 어느 댁 아이든 일단 가서 아이를 구합시다! 급해요! 가요!”
사람들은 여주인을 따라 만예호로 달려갔다.
만예호에 도착한 사람들은 놀라 얼이 빠졌다. 요즘 같이 추울 때면 아이들밖에 찾아볼 수 없는 만예호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그들은 호수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물에 빠진 게 아닌가?”
여주인이 중얼거렸다. 아이에게 사고가 났다면 다들 도우려고 했겠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호수 중앙으로 걸어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호수 중앙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림새가 화려해 부유한 계층으로 보였다. 명제에서 부귀한 자제들은 평범한 백성 일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만예호 중심으로 걸어가던 채임은 추위로 몸을 덜덜 떨었다. 두껍게 입고 털 피풍의도 걸쳤으나 빙판은 길보다 훨씬 추웠다. 발아래 얼음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채임 같은 응석받이 공자는 견뎌낼 수 없었다.
“이 호수에 대체 뭐가 있는데? 이 이른 아침부터 뭘 보러 가는 거야?”
채임이 평소 자신과 의기투합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이른 아침, 채임은 평소 그와 같이 노는 친구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오늘 도박장에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이 만예호에 큰일이 있다고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사실 나도 몰라. 내 하인에게 무언가 있다고 들었을 뿐이야. 헤헤.”
그는 채임에게 다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가 책에서만 보던 미인 시체를 볼 수 있대. 거짓말 아니야.”
“시체? 난 안 갈래.”
놀란 채임이 서둘러 말했다. 그는 기이한 물건을 찾길 좋아한다고 떠들어댔지만, 실은 말만 그러했다. 그는 사실 담력이 작았다. 이전에는 소패왕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국화연회에서 심묘에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전처럼 나서지도 않았다.
“이곳까지 왔는데 가서 보자. 한 번이면 돼. 뭐가 무서운 거야?”
친구는 채임을 잡아끌었다. 자극을 받은 채임이 허세를 부렸다.
“무서워하기는! 누가? 보러 가! 네가 이리 고집부리는 가치가 있는지 봐야겠다.”
두 사람은 호수 중앙에서 멀지 않았다. 중앙에 다다르니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친구가 채임을 끌고 가장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중앙을 가리켰다.
“빨리 봐, 빨리 봐. 저거야!”
채임은 앞을 바라보았다. 정경성의 겨울은 늘 춥지만 근래 들어 더욱 추웠다. 밖에 둔 물통이 다음 날 얼어붙어 있을 정도였다. 나뭇가지나 처마처럼 물이 묻거나 고인 곳에는 고드름이 얼었다. 만예호 중앙에 세 개의 ‘고드름’이 있었다.
얼음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 얼음 조각은 투명해 안쪽 사람이 또렷하게 보였다. 솜씨 좋은 공예가가 정성 들여 조각한 게 아니라 사람이 얼음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가장 기이한 것은 세 사람의 자세였다.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여인이 분명했다. 옷이 조금 풀어져 흰 나신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여인 옆의 남자는 그녀의 옷을 벗기려는 듯 손을 뻗고 있었고, 뒤에 있는 남자는 양손으로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머리를 젖혀 남자의 몸에 기대고 있었다. 생생한 춘화처럼 사람들에게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도 여자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는 것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얼음 조각 주위에는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일반 백성도 있었고, 부귀한 공자도 있었다. 기이한 사물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온 사람도 있었다. 시체지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게다가 살아 있는 듯하니 조금도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향기로운 숨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있는지, 그 진상은 구경꾼들에게 알 바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늘 가장 흥미로운 것에 시선을 두기 마련이었다. 남자들은 이 실물 춘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 여인이 어느 댁의 방탕한 여인인지 궁금해했다. 세 사람이 아주 무서운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채임은 세 구의 시신을 주시했다. 그는 시체를 두려워했지만, 이 얼음 조각은 두렵지 않았다. 저속한 즐길 거리 같았다. 그의 친구가 말했다.
“여인의 용모가 아름다워. 너도 봐. 어느 집안에서 이런 미인을 길러냈을까? 저 매혹적인 자태를 봐.”
그는 어느 기원에 새로 온 아가씨를 평가하는 것 같았다. 채임은 친구의 말에 여인을 다시 주시했다. 자세히 바라보니 희미하게 여자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어딘가 낯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 아가씨 조금 낯익은 것 같아. 어느 청루의 아가씨인지 생각해봐. 우리가 가본 청루의 아가씨인가?”
친구는 세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정경성 청루의 기녀, 관기 다 봤지만 저런 사람은 본 적 없어. 저 사람은 속옷에도 금테를 둘렀네. 어느 대갓집 귀인이나 궁중 출신일지도 몰라.”
아무 생각 없이 뱉은 그의 말에 채임이 멍해졌다. 채임은 얼음 조각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어느 궁중 연회가 떠올랐다. 얇은 사금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의 교만한 얼굴과 눈앞 얼음 조각의 뻣뻣한 얼굴이 겹쳐졌다.
“명안 공주마마!”
채임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뭐라고?”
채임의 친구는 부유한 상인 출신 자제로 평소 궁중 귀인과 접촉할 기회가 없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채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얼굴이었으나 채임의 안색은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저 여인이 왜 낯익었는지 깨달았다. 명제 조공연회에서 심묘를 주시했던 그는 심묘와 함께 활쏘기 시합을 한 명안 공주를 알고 있었다. 당시 채임은 명안 공주에게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했다. 두 남자 사이에서 요염한 자세를 취한 여인은 명안 공주임이 틀림없었다.
채임의 친구는 채임의 외침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리한 사람들은 분주히 떠들어댔다.
“명안 공주마마라면 진국에서 온 그 명안 공주마마를 말하는 거요?”
“정말입니까? 저 안의 여자가 명안 공주마마입니까?”
“진국의 공주가 왜 이렇게……. 거짓말이겠지.”
“듣고 보니 저 여인의 옷차림이 공주 같아 보이는데.”
* * *
만예호에서 일어난 풍파는 정경성을 휩쓸었다. 백성들은 하나같이 명안 공주와 두 남자의 선정적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으니 궁에도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당연히 장군부에도 전해졌다.
어젯밤 사경행과 만난 심묘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이 조금 틀 때가 되서야 간신히 잠들어 늦게 일어났다. 경칩과 곡우는 달게 자는 심묘를 보고 감히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심묘가 식사했을 때는 매우 늦은 시각이었다.
심묘가 죽을 먹으며 어젯밤 사경행과의 대화를 생각할 때, 나담이 경악한 얼굴로 달려 들어왔다. 나담의 몸은 근래 고양의 치료로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고양은 그녀에게 잘 요양하라고 강조했으나, 그녀가 조용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때때로 그녀가 죽을 뻔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심묘야! 심묘야!”
뛰어들어온 나담이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심묘는 나담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죽을 먹었다. 심신은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날까 걱정해 심묘와 나담에게 외출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나담은 어쩔 수 없이 부에 남았다. 활동적인 사람이 매일 갇혀 있으니 답답할 터였다. 그래서 심묘는 나담을 여동생 대하듯 너그럽게 대했다.
“심묘야, 그만 먹어. 큰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심묘가 숟가락을 놓았다.
“명안 공주가 죽었어! 오늘 만예호에서 시체가 발견됐어! 남자 두 명과 함께…… 어쨌든 그랬대. 왜 얼어붙었는지는 몰라. 지금 모든 사람이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어!”
명안 공주가 죽었다? 심묘는 멍해졌다. 흥분한 나담이 여러 차례 되풀이한 말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심묘는 대부분 알아들었다. 명안 공주의 죽음은 사경행의 솜씨였다. 함께 있다는 두 남자는 사가 형제일 터였다. 심묘는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사경행의 수완은 악랄했다. 명안 공주가 홀로 살해당했다면 다들 그녀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사가 형제를 이렇게 함께 두어 백성들의 초점을 살인이 아닌 세 사람의 사적인 관계에 맞췄다.
물론 잘 생각하면 세 사람의 모습도 살인범이 취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렇게 화려하고 저속한 사건은 백성들의 흥미를 돋우기 쉬웠다. 황보호나 문혜제가 무력으로 진압하거나 직접 얼굴을 내밀어도 백성들의 흥미와 관심은 당분간 사그라들기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명안 공주는 한 나라의 공주인데 청루의 여인처럼 구경거리가 되었으니 이 일은 조만간 진국에서도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사경행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사가 형제를 생각하자 심묘는 사경행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호는 격노할 테지만 사가 형제와 명안 공주가 어떤 사이인지 누가 알까. 당사자들이 모두 죽었는데. 그러니 황보호는 연거푸 두 아들을 잃어 매우 비참한 임안후에게 화를 낼 수도 없겠지.
심묘가 생각에 잠긴 것 같자 나담이 물었다.
“심묘야, 뭔가 추측한 거야? 배후 사람은 누구일 거 같아? 이렇게 대담한 사람이 있다니.”
“사건 조사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일이 궁금하면 대리사(大理寺, 추포·재판·형벌 등을 담당하는 기관) 쪽에서 어떻게 조사하는지 보면 돼.”
심묘는 살짝 웃었다.
“아무튼 난 조금도 명안 공주마마를 동정하지 않아. 그 공주마마는 거만하고 횡포했어. 원한도 잘 산다던데 살아 있었으면 언젠가 네 과실을 찾으려 했을 테니 오히려 잘된 거야. 어떤 사람인지 몰라도 백성을 위해 화근을 없애줬네.”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의 나담이 주먹을 문지르며 손을 비볐다. 그녀는 명안 공주를 처리한 사람과 만나고 싶은 것 같았다.
“살인한 사람을 좋게 평가하다니. 언니의 마음이 아주 넓은걸.”
심묘의 말에 나담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우리 나씨 가문 사람은 은혜와 원한, 애증을 분명히 해. 이전에 네가 납치당했을 때 내가 대량 예왕 전하에게 도움을 요청했잖아. 전하는 너를 바로 구해냈지. 그러니 우리 후에 꼭 전하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러 가자.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나담의 말에 심묘는 한참 뒤 대답했다.
“언니의 말 새겨둘게.”
나담이 심묘의 어깨를 토닥일 때 경칩이 바깥에서 웃으면서 들어왔다.
“나담 아가씨, 고 태의께서 진맥하러 오셨습니다.”
순간 나담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그럼 심묘야, 난 이만 갈게. 오늘 명안 공주마마의 일, 생각하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추측하면 나한테도 알려줘. 난 그 형씨를 찾고 싶어!”
말을 끝낸 나담은 고양이를 본 쥐처럼 치마를 들고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탄식하던 심묘의 시선이 점점 가라앉았다. 사경행의 확실한 일 처리는 자신의 노기를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그러나 상대가 진국 공주이니 많은 사람이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적어도 무사평온하게 넘어갈 리는 없었다.
* * *
황실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만예호 주위에 모여든 백성들을 쫓아냈다. 황보호는 명안 공주의 시체를 보고 크게 분노했다. 문혜제도 진정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황보호는 어두운 얼굴로 냉소했다.
“폐하, 명제에서 진국 공주가 이런 모욕을 당하며 죽었습니다. 저는 명제가 어떤 속셈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이 일을 부황께 보고해 가부를 판단할 것입니다.”
문혜제는 이마를 문질렀다. 황보호의 말속에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문혜제는 황보호의 과격한 언행에 매우 불만스러웠지만, 자신 역시 이 일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 난감했다. 이때 임안후 사정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폐하,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해주시길 청합니다! 소신의 자식에게 정의를 찾아주소서!”
금란전의 문무백관 모두가 탄식했다. 그들은 임안후부가 얼마나 화려한지, 임안후가 얼마나 원기 왕성하고 기개 늠름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정은 황명에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 구실을 찾아 명제의 존귀한 옥청 공주와도 혼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옥청 공주의 죽음 이후로 임안후부는 정기를 잃은 듯 점점 쇠락했다. 옥청 공주의 혈육인 사경행은 보기 드문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그 역시 죽고 말았다. 사실 문혜제는 이전에 임안후부를 처리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경행이 죽고 사정이 고통 속에 살자 조심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해 그를 그냥 두었다.
사정에게 남아 있던 두 서자도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니 임안후부에는 이제 후계자가 남지 않았다. 임안후부는 곧 명제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었다. 흥성하던 임안후부를 회상하며 사람들은 마음이 아팠다.
황보호가 사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음험한 기색이 스쳤다. 사가 형제가 명안 공주를 죽였든, 누가 죽인 후 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든 명안 공주의 순결과 존엄이 사가 형제 때문에 훼손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황보호는 배후 사람도 미웠지만 사가 사람 역시 그대로 놔줄 수 없었다. 진국 황실에 이런 치욕을 주었으니 사씨 가문도 편안히 지내지는 못하게 하리라 결심했다.
골치가 아픈 문혜제는 손을 휘두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매우 악질적이구려. 명제에서 이런 대죄를 범하다니. 명제의 율령을 지키지 않은, 죄악이 극도에 달한 일이니 짐은 이미 대리사 사람을 파견해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했소이다. 반드시 배후 사람을 찾아 인계하겠소.”
그러나 황보호는 그다지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문혜제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다시 말했다.
“진국의 공주가 재난을 당했으니 폐하께서는 진국의 사람도 이 일을 조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장래 부황께서 물을 때 대답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의 말은 명제에서 진정으로 이 일을 철저히 수사하리라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문혜제는 마음속 노기를 강하게 억눌렀다.
“그렇게 하시지요.”
문혜제가 떠난 후 조정 백관 대다수는 황보호와 교류가 없으니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임안후부는 명제의 명문세가인 데다 재난을 당했으니 사람들은 사정을 위로했다. 그때, 한 사람이 황보호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태자 전하,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정왕 부수의였다.
황보호는 부수의를 보고 인사만 하고 떠나려 했다. 그때, 부수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주마마께서 살해당하신 일, 제게 배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태자 전하께서는 들어보실는지요.”
황보호는 멍해졌다. 다른 관리들은 사정을 위로하느라 바쁜 데다가 황보호와 부수의는 구석에 있었기에 두 사람에게 주의를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황보호는 곧 냉소했다.
“혹시 정왕 전하에게 무슨 고견이 있소이까?”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원하시면 자세히 이야기해드릴 수 있습니다.”
황보호가 고개를 돌리자 부수의는 웃으며 몸을 돌려 떠났다. 황보호는 잠시 서 있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정을 보고 다시 한번 냉소한 후 큰 걸음으로 떠났다.
* * *
명안 공주 사건에 대한 조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희생자가 진국 공주이기에 대리사 사람들은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꼼꼼히 살펴본 결과 명안 공주와 사가 형제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를 문혜제에게 그대로 알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혜제보다 진국 태자가 노발대발할 것이 문제였다.
장군부. 심구가 심묘의 서재에 들어왔다. 그는 심묘가 책을 읽는 것을 보곤 맞은편에 앉았다. 분명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심묘가 먼저 물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어?”
심구는 말하기 곤란한 듯 보였다. 심묘는 계속 망설이는 심구가 의아했다.
“오라버니, 얘기해도 돼. 걱정할 필요 없어.”
심구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명안 공주마마의 일, 교교 네가 한 거야?”
심묘는 당황스러웠다. 심구가 자신을 배후로 생각할지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명안 공주마마와 사가 형제의 일을 나 혼자 어떻게 하겠어?”
심묘를 바라보는 심구의 시선이 조금 복잡했다. 그는 탄식했다.
“교교야, 부모님과 내가 널 보호하지 못해 너를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심부 사람들과 함께하게 뒀어. 그간 네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몰랐으나 이제 알게 되었어. 나는 네가 스스로 보호할 줄 알고, 네게 수완이 있다는 건 알아. 그러나 우리는 네 가족이야. 모든 일을 너 혼자 해결할 필요는 없어. 나와 부모님은 한 손으로 해를 가릴 순 없어도 널 보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할 수 있어.”
심구는 맹세하듯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심묘가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녀는 마음속 수많은 기분을 거두고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의 말이 맞아. 우리는 한 가족이지. 그러나 명안 공주마마의 일은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그런 큰 능력이 없어. 그렇게 큰 담력도 없고. 게다가 명안 공주마마는 그렇다 치지만 사가 형제는 나와 아무 관련도 없는걸?”
심구는 다시 한번 탄식했다.
“넌 아직도 내게 사실을 말하기 원치 않는구나.”
심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약간의 정보를 심구에게 넌지시 드러내려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설 경우 그가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결코 단번에 이룰 수 없으니, 지금 비책을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됐다. 너와 이 일의 관계를 나도 추측할 정도니 부모님도 아무것도 모르시진 않을 거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 왔어. 명안 공주는 명제와 아무 관련이 없어. 있다면 오직 너 하나야.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진국 태자 전하도 당연히 그리 여길 거야. 사실, 너와 이 일이 관계가 있든 없든 사람들의 시선은 너에게로 향했어. 교교야, 너 지금 대단히 위험해.”
심구의 안색은 엄숙했다.
“하지만 나와 이 일은 정말 관련이 없어. 그러니 조사 결과가 나를 가리키지 않을 거야.”
심구가 생각한 일을 심묘가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사경행은 정경성의 모든 입을 막거나, 이 사건을 조사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보호의 마음을 사경행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너 정말 관련 없어?”
“걱정하지 마, 오라버니. 이 일은 정말 나와 아무 관련이 없어.”
심묘의 말에 심구는 그제야 짐을 내려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당분간 부를 나가지 마. 요즘 정경성은 평안하지 않아.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도 곳곳에 숨어 있을 테지. 부는 호위를 늘렸으니 안전할 거야.”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묘 걱정은 일단락되었으니 쌓인 병부 일을 처리하러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문을 나서던 심구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야, 혹시 사귀는 사람 중 권세 있는 사람이 있니?”
심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얼굴에 평온을 유지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심구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야심한 밤, 정왕부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이 귀한 손님은 대단히 격노한 진국 태자 황보호였다.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황보호는 부수의가 건넨 말 때문에 이곳에 왔다. 부수의는 황보호를 들이기 전 배랑을 옆방에 숨겼다. 그는 옆방과 연결된, 보이지 않는 창을 열어 배랑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황보호는 찻잔을 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명안 공주의 일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던데, 이야기해 보시오.”
“태자 전하, 급할 것 없습니다. 명안 공주마마께서 살해당하셔서 저도 매우 유감입니다. 그러나 지금 범인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부수의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황보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냉소했다.
“혹시 정왕 전하도 내가 참아야 한다고 여기시오? 명제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 몰라도 진국에서 한 나라의 공주가 살해당한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오. 장래 부황께서 이 일을 알면 반드시 명제 폐하에게 정의를 찾아달라 요구하실 거요. 단지 사절로 온 것뿐인데 우리 진국 공주가 목숨을 잃었소. 전하는 이게 온당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소?”
황보호의 한마디 한마디에 위협의 칼날이 번뜩였다. 부수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조급해하시니 저도 어려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살인에는 당연히 원인이 있지요. 명안 공주마마는 사가 형제와 함께 살해당했고 범인은 세 사람을 모욕적인 자세로 두었으니 분명 고의로 명안 공주마마의 명예를 훼손한 것입니다. 범인은 분명 명안 공주마마를 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도 아는 바요. 감히 이런 일을 하다니 범인의 담력이 작지 않소.”
“태자 전하가 보시기에 명제 안에서 누가 명안 공주에게 이런 원한을 품을 것 같습니까?”
황보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명안 공주는 오만불손한 성격으로 평소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때리고 욕하길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명제에 오기 전 문혜제와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된다는 부황의 간곡한 타이름이 있었다. 명안 공주도 부황의 명은 거역할 수 없으니 여기서는 제 성격을 다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도 그녀가 명제 관료가 원한을 품을 법한 일을 저질렀다고 보고받은 적은 없었다.
황보호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눈빛을 밝게 빛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심묘를 말하는 거요?”
부수의는 웃기만 했다.
“그럴 리 없소! 그녀와 명안 공주 사이에 일이 있고, 명안이 그녀를 희롱했더라도 심묘는 단지 아녀자요. 명안 곁에는 호위도 있는데 심묘가 어떻게 맞섰겠소?”
부수의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가 심신의 딸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심신은 딸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조공연회에서 태자 전하도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황보호는 명안 공주와 심묘가 활쏘기 시합을 할 때 심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심신은 시종일관 심묘의 편을 들었다. 문혜제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강건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딸을 위해 수하에게 손을 쓰게 한다면…….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럼 사가 서자는 어찌 된 일이요? 심신이 심묘를 위해 나섰다 하더라도 사가 사람을 보탤 이유는 없소. 사정은 명제의 관리인데, 심신이 말썽을 불러올 리 없소이다.”
황보호의 말에 부수의는 탄식했다.
“태자 전하, 아직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근래 저는 사가 형제에게 명안 공주마마를 접대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명안 공주마마와 사가 형제는 함께 지냈지요. 태자 전하는 명안 공주마마와 오누이이시니 마마의 성격을 아실 겁니다. 심묘와 명안 공주마마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명안 공주마마는 심묘를 처리하려고 하셨겠지요. 그러나 공주마마는 진국 사람이니 심묘에게 직접 손대시기 불편했을 겁니다. 그러니 사가 형제를 쓰시려 했겠지요.”
“설마…….”
황보호가 멍해졌다가 분노했다.
“태자 전하, 화내지 마십시오. 사가 형제는 제가 장래 수하로 키우려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과 전 연이 없는 듯합니다. 그 후의 일은 태자 전하도 알 겁니다. 사가 형제가 손을 쓰려 할 때, 착오가 생겨 두 사람이 목숨을 잃고 공주마마도 연루된 것일 겁니다.”
황보호는 여전히 믿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부수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심묘가 이유 없이 납치당했을 때, 황보호는 명안 공주를 의심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부를 나서지 않고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명제에는 그녀를 도와 목숨을 걸 수족도 없었기에 의심을 거뒀다. 그 후 심묘는 영문 모르게 송신 공주의 배웅을 받으며 장군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안 공주와 사가 형제에게 사고가 난 것이었다.
부수의 말대로 명안 공주는 원한을 반드시 갚아주는 성격이니 심묘 때문에 체면을 잃은 일을 쉽게 끝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으리라. 근래 사가 형제는 늘 태자부에서 보였으니 말이 되긴 했다. 그러나 심묘에게 그런 큰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심신이 나섰다면 모를까.
하나 심신이 명장이었다. 아무리 딸을 귀여워한다고 해도 일국 공주와 맞설 만큼 무모한 사람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수도로 막 돌아왔으니 안정적인 상황이 아닐 것이다. 장군부 사람 전체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딸을 위해 냉정함을 잃었대도 그렇게 아둔할 리는 없었다.
부수의가 뭐라고 말해도 황보호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수의의 말이 일부는 맞는다고 느꼈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황보호를 보고 부수의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황보호가 떠난 후 배랑이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전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엇 때문에 화두를 장군부로 옮기십니까?”
부수의가 배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은 모르실 테지만, 난 심묘가 어쩌면 대량 예왕과 관계가 있다고 여기오.”
배랑은 놀랐지만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태자 전하 관저 안의 문제를 염려하십니까? 예왕 전하는 대량 사람이며, 심 소저는 2년 전 수도를 떠났으니 두 사람은 모를 가능성이 큽니다. 짧은 사이 알아 우정이 생겼다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난 선생이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아오. 그러나 나에게도 직감이 있소. 심묘와 예왕 사이는 조금 이상하오. 지금 연이어 많은 우연한 일이 발생했소. 만일 심묘와 예왕이 짧은 사이에 잘 알게 됐다면 더욱 곰곰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소. 예왕은 자기가 남보다 한 수 위라 생각하는 자만심이 넘치는 사람이라 부황께서도 접근하기 어려워하시는데, 심묘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 건지 알고 싶구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진국 태자 전하의 일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부수의는 웃으며 배랑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심묘 혼자서 이 일을 못 한다 여길 테지. 심신도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니, 단지 장군부 하나에 기대 경솔하게 살인을 하지는 않을 걸세.”
배랑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
“혹시 전하께서는…….”
“맞네. 난 이 일을 예왕이 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배랑이 침묵하자 부수의가 입을 열었다.
“예왕의 행동은 건방져. 게다가 대량에는 인재가 많지. 예왕의 능력이면 일국 공주를 죽이는 일은 쉬운 일일 걸세. 그러나 선생과 나 두 사람 모두 알듯 예왕과 명안 공주는 원한이 없지. 국가적으로는 더욱 관련 없고. 그러니 이유 없이 일을 벌일 리 없소. 그러나 심묘 때문이라면 말이 통하지. 미인 때문에 원수지간이 된다는 말도 있으니. 난 예왕과 심묘가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전하께서는 진국 태자 전하를 이용해 뱀을 굴로 유인하려 하십니까?”
부수의가 웃었다.
“그렇다네. 황보호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아. 내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아도 곧 탐색해볼 것이오. 예왕과 심묘가 정말로 연루되어 있다면 반드시 나설 테지. 그때 그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면 다시 방법을 찾는 걸세.”
“만일 예왕 전하가 손을 쓰지 않으면 어찌하실 겁니까?”
“상관없소. 예왕이 손쓰지 않아도 장군부는 근래 이미 너무 지나쳤소. 황보호가 장군부를 처리해 세력을 줄여준다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
“전하, 이미 장군부를 억누를 결심을 하셨습니까?”
배랑이 부수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사용할 수 없으니, 당연히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지.”
부수의의 웃음은 온화했지만, 말투는 매우 차가웠다. 그는 인자한 눈빛으로 배랑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선생께서 더 많은 계책을 고민해주시길 바라오.”
감히 그럴 수 없다고 배랑은 황송해하며 답했다.
부수의가 떠나고, 배랑은 방으로 돌아와 등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2년 전, 심묘가 자신에게 부수의 곁에 잠복하며 첩자가 되어달라 했다. 당시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요행히 부수의의 눈에 들었고 지금은 그의 심복 중 하나가 되었다. 부수의는 황보호와의 은밀한 대화를 몰래 듣게 할 정도로 자신을 신임했다. 자신에게만은 정말 일말의 대비도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만약 이미 심묘의 사람이 된 후가 아니었다면 자신을 무조건 믿어주는 주인을 보며 목숨을 바쳐 충성했을 수도 있었다.
부수의가 자신을 신임할수록 배랑은 더욱 놀라며 감탄했다. 부수의는 확실히 마음이 단단했다. 대장부의 악랄함도 있어 웃음 속 칼을 품는 데 매우 익숙하기도 했다. 확실히 황제가 가지고 있어야 할 수완과 방법도 지니고 있었다. 배랑은 곧 천하 강산이 결국 부수의의 손에 떨어지고 부수의가 만민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명제 아홉 황자 중, 부수의보다 더 그 위치에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심묘가 부수의와 맞선다고 하면 그녀의 앞날도 순탄치 못하리라. 심묘의 전망이 어두우니 한배를 탄 자신의 전망도 어두웠다. 칼의 방향을 바꿔 심묘를 공격하는 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류형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그래서 달갑지 않은 마음과 바라지 않는 마음은 부득이 바람에 흘려보냈다.
배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본 후 종이를 가져왔다. 먹을 갈아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갔다. 부수의가 자신을 신임해 홀로 쓸 수 있는 집을 주었기에 첩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먹물 같은 밤. 예왕부. 사경행은 백호와 놀고 있었다. 백호는 근래 너무 많이 먹었다. 계우서가 귀엽다며 하루 다섯 끼를 먹이자 털로 된 공처럼 보일 정도였다. 백호의 몸놀림도 이전과 달리 조금 굼떴다. 그때, 철의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호위 한 명이 들어왔다. 남기였다. 그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정왕부에서 나온 편지입니다. 정왕의 막료, 배랑에게서 나와 장군부 심묘 아가씨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봉투 안 편지를 꺼내 빠르게 읽었다. 마지막 한 줄을 읽었을 때 입꼬리를 올렸다. 밤 경치 속 그의 용모는 선경처럼 출중했다. 그러나 무심하게 웃는 사경행의 모습에 남기는 조금 몸서리를 쳤다. 주변 공기가 무거워져 주인이 즐겁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배랑의 서신 속 마지막 줄은 “반드시 예왕과 멀어지라.”였다.
* * *
명안 공주의 일은 정경성 백성들 사이에 큰 파도가 솟구치게 했다. 그러나 대리사에서 늦도록 결과를 가져오지 못해 문혜제는 계속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많은 관원을 동원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기미가 보였다. 진국 태자 황보호는 당연히 불만스러웠으나 자신이 보낸 사람들도 사건을 해결할 만한 소식을 들고 오지 못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 이 사건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도 점차 식었다. 사람들은 마냥 한가하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에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정경성에 퍼졌다. 이번에는 심부의 일이었다.
심모가 약혼했다. 게다가 그녀는 이른 시일 내에 시집갈 터였다. 심모의 혼처는 심만과 진약추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한 원외랑 왕가였다. 왕가에는 아들이 둘 있었다. 작은아들은 지금 나이가 열 살이 안 되었다. 큰아들 왕필이 심모와 약혼한 사람으로 그는 지금 스물네 살이었다. 이미 벼슬길에 오른 그는 학사부에서 직무를 보고 있었고, 학식이 깊고 넓어 전도양양한 인물이었다. 원외랑은 조정에서 1등을 다투는 중신은 아니나, 동료들은 평소 원외랑과 많은 왕래를 해야 했다. 왕가와 관계를 맺어둔다면 장래 벼슬길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였다.
벼슬에 도움을 준다는 점은 심만을 흡족하게 했다. 진약추가 볼 때도 왕필은 왕가의 큰아들이자 후원에 다른 첩실이 없으니 딱 맞았다. 심모가 왕필의 마음을 붙잡아 장래 왕가에서 입지를 굳힌 후 한두 명 자식을 낳으면 평생 근심 없이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심 노부인도 이 일을 아주 기쁘게 여겼다. 심부의 생활이 어려운데 심모가 출가하니 먹는 입 하나가 줄기 때문이었다.
혼사는 진약추가 직접 왕가와 정했고 사주단자도 교환했다. 심모는 이 일을 안 후 당연히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평소 심모에게 부드러운 진약추도 이번에는 심모를 혼인시키겠노라 굳게 결심했고, 심모를 귀여워하던 심만도 이번만은 그녀의 간청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심만은 한술 더 떠 평소와는 달리 심모를 사당에 가두고 반성하라고 했다. 그날 밤, 심모는 꽉 닫힌 사당 대문을 바라보며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갇힌 것도 벌써 두 번째니 서럽기 짝이 없었다.
사당 안에는 크게 불이 난 흔적이 있었다. 지난번 심묘가 이 사당 안에 갇혔을 때 난 불이었다. 당시 임완운은 심묘와 심청의 혼인을 바꾸려고 했었다. 그런데 큰불이 났고 공교롭게 그때 심신이 돌아와 심묘는 재난을 피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즈음부터 심묘의 생활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워진 것 같았다. 심신 부부와 심구가 뒤에 든든히 서 있어주자 심묘는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굴었다.
게다가 언젠가 심묘가 다시 마음을 바꿔 부수의에게 시집가려 하면 심신 부부는 절대로 막지 않을 터였다. 심묘는 이전에 확실히 부수의를 사모했다. 만약에 나중에라도 다시 옛사랑에 타오르면……. 지금 심신은 다시 일어서서 손에 병권을 쥐고 있으니 부수의가 거절할 리 없었다. 더구나 심묘는 이제 정경성 모두가 비웃던 그 머저리가 아니었다.
심묘가 어쩌면 부수의와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모의 마음은 유달리 괴로웠다. 그때 사당에서 일어난 큰불이 어째서 심묘를 태워 죽이지 않았는지 억울했다. 그때, 바깥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심모는 진약추가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먹을 것을 보냈다 여겨 성질을 냈다.
“난 전부 싫으니까, 나가.”
그러나 소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심모가 분노해 외쳤다.
“꺼지랬잖아!”
문이 열리고 입구에서 머리가 하나 솟아났다. 심동릉이었다. 그녀를 본 찰나 심모는 멍해졌다. 바깥을 살핀 심동릉이 문을 닫은 후 심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바구니를 심모에게 건네주며 속삭였다.
“바깥에 문을 지키는 남종은 술을 마시러 갔어. 난 몰래 들어온 거야. 오늘 종일 먹지 못한 것 같아 배고플까 봐 먹을 걸 조금 가져왔어. 언니, 들키지 않게 작게 말하자.”
심동릉이 바구니를 여니 안에는 층층이 간식이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심모는 평소 심동릉과의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조금 감동했다. 종일 먹은 게 없는데, 진약추와 심만은 상관하기는커녕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평소 우정이 깊지 않은 서출 자매가 생각해주다니 심모는 심동릉에게 안색을 풀었다. 그러나 이 간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시간 낭비하지 마. 난 안 먹을 거야.”
심동릉이 심모를 바라보았다.
“언니, 왜 왕 공자에게 시집가려고 하지 않아? 왕 공자는 좋은 사람이고 듣자니 집안 형편도 좋아. 언니가 시집가면 원외랑부의 주모가 될 운명인데, 심부를 떠나기 싫어서야?”
심모는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심동릉은 온종일 부에서 외출하지 않아 심모와 비슷한 나이지만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 있었다. 심모는 이를 경시하는 한편 흠모했다. 심동릉은 견문이 좁아 사람 위 사람, 하늘 위 또 하늘이 있는걸 몰랐다. 또 심동릉은 마음이 단순해 수월하고 즐거운 생활을 흠모했다. 그러니 왕필이 이쪽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심모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 공자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 결국 내 마음속 사람이 아닌데.”
심동릉은 잠시 생각 후 무언가 깨달았다.
“혹시…… 언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그럼 어떻고, 아님 또 어때? 누가 날 심부에서 태어나게 해 남편을 선택할 권리도 없게 했을까? 부모님은 오직 벼슬길만 생각하고 내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죽는 것만 못하단 생각이 들어.”
심모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동릉이 놀라 얼른 손을 내저었다.
“언니 그런 생각하지 마. 죽는 건 제일 간단하지만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 언니, 생각을 바꿔도 좋을 거야. 왕가도 좋은 사람이잖아. 셋째 숙부와 숙모도 언니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어쩌면 그 왕 공자도 많은 소저가 좋아하는 사람일 수 있고, 어쩌면 많은 소저가 언니의 행운을 흠모할 수도 있는걸. 당장 나만 해도 내가 왕가에 시집가면 내 어머니는 매일 사원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드리실 거야. 내게 이런 좋은 부부의 연을 맺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심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심동릉은 어리석었고, 그래서 자신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왕 공자 정도를 흠모하는 걸 보니 이 아이는 평생 가도 상류 사회에 오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서출 출신으로 본처가 되면 좋은 일이긴 했다. 더욱이 원외랑부 집안의 본처였다.
심동릉은 심모가 여전히 울적해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일정 단계까지 노력하면 결국은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어. 언니, 구태여 지금 이 때문에 상심하고 괴로워하며 건강을 해칠 가치는 없어. 심묘처럼 말이야. 심묘의 혼인 때도 심묘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지. 그렇다고 되돌릴 수 있었겠어? 때마침 백부가 돌아와 심묘가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뿐이지.”
심동릉의 말에 심모의 마음이 움직였다. 심동릉의 말대로였다. 심묘도 강제로 시집을 가야 했을 때, 때맞춰 심신 부부가 수도로 돌아와 그 재난을 피했다. 그때 자신은 진약추와 하인의 이야기를 몰래 들어 임완운이 심청과 심묘를 바꿔 혼인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청과 심묘를 바꿔 혼인하는 일? 자신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심모는 흥분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시선이 심동릉에게 떨어졌다. 바꿀 사람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었다. 심동릉은 서출이며, 왕가 공자를 분에 겨운 사람이라고 느끼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녀는 성격이 유약하니 속이기 쉬웠다. 그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동릉, 넌 내가 널 어떻게 대하는 것 같아?”
심모는 심동릉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심동릉은 멍해졌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운 듯했다.
“언니는 내 출생을 무시하지 않고 내게 아주 잘 대해줘. 자매 중 언니만 나를 상대해줬어.”
심모 역시 심동릉이 눈에 차지 않았으나 이를 그녀 앞에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먼저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바깥에서 볼 때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심모는 생긋 웃었다.
“그럼 동릉, 지금 내가 난처한데, 네가 날 도와줄 수 있을까?”
심동릉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해맑게 웃었다.
“문제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꼭 온 힘을 다할게.”
“네 말을 들으니 안심이다.”
미소 지은 심모는 심동릉의 손을 더 꽉 쥐었다.
“너, 날 도와 왕 공자와 혼인해줄 수 없을까?”
심동릉은 바로 놀라 얼이 빠졌다. 그녀는 심모의 손에서 손을 빼고 허둥댔다.
“그건 안 돼. 언니, 다른 일이면 도와줄 수 있지만……. 이 일은 나도 도울 수 없어.”
“할 수 있어! 왕 공자가 좋은 남편감이라며? 만일 너라면 좋은 부부의 연을 얻는 걸 테니, 만 이낭도 아주 기뻐할 거라며? 동릉, 제발 부탁이야!”
심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심동릉은 계속 뒤로 물러났다.
“말은 그래도. 너무 위험해. 발각되면 난 맞아 죽을 거야. 언니도 처벌받을 거고. 너무 위험해! 게다가 언니는 이런 큰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어. 왜 왕 공자와 혼인 못 하는 건데!”
심모는 심동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가녀린 상의 아가씨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안쓰러워 보였다. 심모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동릉, 너에게 왕 공자는 좋은 인연이지만 내게는 아니야. 난 이미 사모하는 사람이 있어. 일생 그분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어. 만일 다른 사람과 혼인하면 난 막다른 길에 들어서는 거야. 왕가와 혼인한다면 바로 그날에 자결할 거야. 만일 네가 허락 안 하면 난 목숨을 끊을 거야. 동릉, 우리 자매의 정을 봐서, 내가 너에게 잘한 걸 봐서, 내 목숨을 좀 구해줘!”
심모가 심동릉을 바라보며 심동릉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심동릉은 심모의 말에 더욱 당황해서는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언니, 이러지 마. 깜짝 놀랐잖아!”
심모는 심동릉의 손을 세게 잡아끌었다.
“너에게 이번 한 번만 부탁할게. 설마 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심동릉은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모는 머리까지 풀어 헤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처절한 모습이었다. 심동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약속할게. 언니, 일단 일어나.”
심모는 심동릉을 껴안으며 수차례 고맙다고 했다. 뼛속까지 감격한 듯 보였지만, 심동릉의 얼굴을 등지자마자 살짝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언니, 이 일은 신중해야 해. 혼사를 바꾸는 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야. 들통나면 당장 언니랑 나한테 제일 먼저 불똥이 튈 거야. 게다가 셋째 숙모와 숙부가 보고 있을 테니, 계획을 잘 세워야 해.”
심모가 심동릉을 놔주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건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네가 날 위해 어려운 결심을 해줬는데 당연히 너한테 해가 가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널 핍박해 벌어진 일이라고 분명히 설명할게. 부모님이 널 원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심모가 심동릉의 손을 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동릉이 맑게 웃었다.
“응, 언니를 믿을게.”
심동릉이 채운원 방에 돌아왔을 때, 만 이낭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사실 심동릉은 만 이낭 몰래 심모를 찾아간 거라서, 만 이낭은 딸이 일찍 쉬러 들어간 줄 알았다. 심동릉의 하녀 행화가 물었다.
“아가씨, 정말 심모 아가씨 대신 혼인하실 건가요?”
“할 거야. 왜 안 하겠어?”
심동릉은 행화가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침상에 앉았다. 그녀는 눈앞의 찻잔을 들어 유유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방금과 전혀 다른, 깊은 물 속 같은 웃음을 지으며 행화에게 말했다.
“왕가는 관리 집안이야. 왕필은 장래 전도가 양양하고 후원도 깨끗해. 내 출신에 왕가에 어떻게 들어가겠어.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지.”
“넷째 아가씨가 좋은 일을 한 셈이네요.”
“좋은 일? 심부 안에 정말 선량하고 선녀 같은 사람이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심동릉이 조금 비꼬듯 웃었다. 하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의 말씀은……”
“난 최선을 다해 돕겠지만, 이 일이 들통나면 언니는 제일 먼저 내 탓을 할 거야. 내가 자신의 혼사를 빼앗았다며 대단히 억울해하겠지. 설령 삼방이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 해도 왕가의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전부 내가 벌인 짓이라고 뒤집어씌울 테지. 노부인에게야 당연히 나보다 적녀가 중요할 테고. 어찌 되었든 간에 난 희생되는 거야.”
심동릉은 냉소했다. 행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심모 아가씨는 부모님께 잘 설명해서, 아가씨가 공연히 처벌받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언니 마음씨가 그렇게 좋을 거 같아? 이 부 안 사람들은 전부 다 이기적이야. 언니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거라 믿는 거야? 만일 언니한테 사심이 없었다면 날 자기 대신 시집 보낼 거 같아?”
“그럼 어찌 될지 다 알면서도 아가씨는 이 일을 정말 하실 거예요? 만일 그들이 아가씨 탓을 하면 그땐 어찌하시려고요?”
심동릉은 그런 일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언니 대신 혼인을 한다면 반드시 철저한 준비를 할 거야. 행화야, 심부 사람들은 짐승이야. 이쪽이 무언가 부탁했을 때 호의를 베풀어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는 게 좋아. 심묘처럼 해야 한다는 걸 꼭 기억해. 일단 심부를 떠날 기회가 있으면 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행화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 일을 마님에게 말할까요?”
“괜찮아. 어머니는 담력이 작아서, 내가 언니 대신 혼인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일이 성사된 뒤에 설명하면 돼.”
심동릉은 단호했다. 행화는 그제야 물러 나갔다.
추수원 안에서도 누군가 심모의 혼사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심모는 오늘 음식을 먹지 않아 몸이 견디지 못할 거요.”
심만은 심모를 몹시 아꼈다. 심모가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할 사람을 품지 않았다면 절대 이렇게 엄히 처벌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내가 사람을 시켜 보낸 건 먹지 않을 것 같아 심동릉에게 가져가라고 했어요. 아마 지금쯤이면 다 먹었을 거예요.”
진약추가 탄식했다. 심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동릉? 심모가 언제부터 심동릉과 그리 잘 지내오?”
심만에게 심동릉은 서녀일 뿐이었다. 서녀와 친교를 맺으면 품위를 잃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진약추의 말을 듣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진약추는 웃었다.
“근래 사이가 좋아졌어요. 그동안 심모는 심청과 대화를 나눴는데 심청이 없으니 혼자 외로웠을 거예요. 내가 보니 심동릉은 성실한 아이이고, 심모도 같이 잘 어울리길래 막지 않았어요. 그보다 심모가 혼롓날에도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이에요.”
“며칠 가두면 될 일이오. 당신이 어미로서 심모에게 알아듣게끔 잘 말해보시오. 혼롓날 소란을 피우면 결코 안 되오. 방법을 생각해야겠소.”
진약추는 심만의 말투에 놀랐다. 그는 진약추 앞에서 늘 부드러웠고,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날은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투에서 귀찮은 기색을 느꼈다. 노부인이 심만에게 첩실을 들이라고 여러 날 권하는 게 떠오른 진약추는 불안해졌다. 그녀는 심만의 몸 뒤에서 부드럽게 허리를 껴안았다.
“심모가 출가하고 나면 대인과 소첩은 홀가분한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근래 대인은 관직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시는 데다 소첩과 이야기도 잘 나누지 않으시니 소첩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진약추는 나이가 적지 않으나 관리를 잘했고,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았다. 그녀의 애교는 평소 심만에게 잘 통했다. 그런데 오늘 심만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웃기만 했다.
“심모의 혼사를 끝내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말속에 조금의 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약추는 마음이 점점 가라앉아 심만의 허리를 껴안은 손을 천천히 풀었다.
* * *
장군부.
심묘는 등불 아래에서 배랑의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부수의가 심묘와 예왕의 관계를 탐색하려 한다고 적혀 있었다. 장래 황보호가 손을 쓰면 예왕의 행동을 보고 실마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심묘는 부수의가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금세 차분함을 되찾았다. 부수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실마리에서 증좌를 잘 찾아냈다. 그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전생의 황위 쟁탈 속에서 최후에 서지 못 했을 것이다.
잠시 놀랐을 뿐 걱정은 들지 않았다. 황보호 역시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게다가 장군부가 관련되어 있으니 그도 쉽게 움직이지 않고 조사부터 할 것이다. 다만,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는 심묘가 정말 대량 예왕과 우정이 있다면 어떤 말썽이 생겼을 때 대량 예왕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그의 수하에 인재가 많으니 많은 수고를 덜어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심묘는 마지막 단락이 좀 미심쩍었다. 배랑과 사경행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중한 배랑이 예왕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니 더더욱 이상했다. 그러나 필체며 내용이며 배랑이 보냈음이 확실한 편지였다. 심묘는 좀 이상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난로의 불꽃에 편지를 던지자 편지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탁자 위에 진홍색 목간(木簡, 글을 적은 나뭇조각)이 놓여 있었다. 심부에서 보낸 심모와 원외랑부 공자 왕필의 혼사 청첩장이었다. 심부에서 어떤 생각인지 몰라도 청첩장을 장군부에 보냈다. 심신과 나설안은 물론 심묘 자신 역시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심모가 왕필과 혼인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심모는 부수의에게 매우 집착해 오랫동안 혼인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도 다른 사람과의 혼인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초청하지 않은 밤손님, 사경행이었다. 그는 심묘가 들고 있는 목간을 나른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말했다.
“가려고?”
사경행도 심모와 왕필의 혼인 소식을 알 터였다. 진약추와 심만은 딸의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해 혼례식을 성대하게 열고 온 명제를 손님으로 초대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외랑 역시 조정 대신과 친교가 두터우니 이 붉은 목간은 관가 대부분이 받았을 것이다.
“안 가요.”
심묘가 목간을 책상 위로 던졌다. 사경행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거라 예상한 듯했다. 그림자가 흔들리고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았고, 사경행은 팔짱을 끼고 곁에 서 있었다.
“심모는 사당 안에 갇혔고, 막 심동릉이 들어갔어.”
심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경행을 바라보다 머뭇거리며 물었다.
“심부에도 간 거예요?”
사경행은 대량 예왕이면서 어째서 체통을 지키지 않고 초청하지도 않은 곳에 불쑥불쑥 찾아다니는 걸까? 장군부를 돌아다니는 건 그렇다 치고 심부 사람들의 동정까지 몰래 훔쳐보다니.
사경행은 심묘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 박자 넘겨 천천히 대꾸했다.
“내가 간 건 아니야.”
심묘는 사경행이 부하를 보냈다고 깨달았다. 그러나 여전히 기이했다. 심부 사람과 사경행은 조금도 관계가 없는데 그가 심부의 동정을 살피는 이유는 혹시 자기 때문인가 싶었다.
“심모의 혼인, 넌 즐겁지 않은 게야?”
“심부 사람과 전 관계가 없어요. 제가 그녀를 위해 기뻐해야 하나요? 더욱이 이 혼사는 성사될지조차 알 수 없는데, 기뻐할 가치가 있을까요?”
사경행이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입술을 당기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너, 알고 있었어?”
“예왕 전하가 특별히 제게 두 사람이 함께 있다고 알려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 심모 언니 대신 심동릉 언니가 혼인을 하게 될 거예요. 심모 언니가 심동릉 언니를 설득했겠죠. 심동릉 언니 덕에 이번 혼인은 아무런 실수 없이 잘 진행될 거예요.”
심묘는 심동릉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전생에 서출 자매에 대해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적지 않은 것을 분명히 보았다. 심동릉은 부수의의 장기인, 인내하는 능력을 지녔다.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서녀이지만, 오랜 세월 참았다가 누구든 마음대로 곤경에 빠트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임완운이 힘을 잃은 후로는 걱정거리 없이 평안히 살아왔으니 이방에서 심동릉과 만 이낭만 승자 같았다. 심묘는 감히 이런 사람을 얕보지 않았다.
사경행이 빙긋 웃었다.
“넌 어떻게 그 일을 아는 거지?”
“심모 언니가 원치 않으니까요. 언니는 왕 공자와 혼사를 원치 않는데, 애석하게도 숙모와 숙부가 사주단자를 이미 교환하고 혼사도 정했어요. 심모 언니에게 혼례를 강요하는 거예요. 자만심이 넘치는 언니가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이겠어요? 심동릉 언니가 이때 출현한 건 우연이 아니에요. 하나는 도망치고 싶고, 하나는 혼인하고 싶은데, 마침 아주 좋은 거래가 이뤄진 셈이지요.”
사경행은 심묘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단정한 모습으로 상대를 분석하는 모양이 아주 보기 좋으면서 매우 재미나기까지 했다.
“원치 않는다고? 왕 공자는 심모의 상대로 차고 넘치는 사람이야.”
“애석하게도 심모 언니가 사모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심모 언니처럼 고지식한 사람은 소망을 바꾸지 않아요.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으려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해야죠.”
“그럼 너는?”
사경행이 갑자기 물었다. 심묘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어느 날 너도 혼사를 강요받으면, 넌 어찌할 거지?”
혼인을 강요당하다니, 심묘는 순간 멍해졌다. 전생에 자신은 가족을 협박하면서까지 부수의에게 시집을 갔다. 자신이 강요한 적은 있어도 강요를 당하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장군부가 다시 정경성으로 돌아오면서 문혜제는 심가군 병권을 심신에게 돌려준 건 둘째 치고서라도 소춘성 나가군도 더는 곤궁한 군대가 아니었다. 심가 대방은 사람들의 예측과 달리 정경성을 떠났어도 쇠락하지 않고 도리어 그 힘이 더욱 세졌다. 황자 중 누가 장군부와 인척 관계를 맺어 한데 묶이면 그 황자가 용좌에 앉을 가능성이 훨씬 커질 게 자명했다.
심구와 심묘의 혼사는 사람들이 장군부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심구는 남자이기에 더 기다릴 수 있지만, 심묘는 여자라서 오랜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수군덕거릴 터였다. 언젠가 그녀가 황위 쟁탈의 패로 변해 혼인을 강요받으면 어찌할까? 사경행은 그녀를 주시했다.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런 날은 오지 않아요.”
“온다면 넌 어찌할 거지?”
사경행은 심묘의 대답을 끝까지 추궁했다. 심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싸울 거예요.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상대가 물러나게 할 거예요. 이기지 못하면 혼인해도 무방해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방?”
“어쨌든 살아 있잖아요. 혼인한 뒤 방법을 찾고 기회를 엿봐 보복하면 돼요. 세상에는 유감스러운 일이 많은데 전 이런 일에 미련하게 목을 매지 않을 거예요. 일단 살아남아야 역전의 기회도 찾아오죠.”
심묘는 전생에 궁중 생활을 겪고 죽음이야말로 가장 절망적인 일임을 깨달았다. 죽으면 모든 일이 끝이다. 다시 되돌릴 여지가 없다. 전생의 자신이 죽지 않고 미 부인과 몇십 년 동안 싸웠다면 최후의 승자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이 졌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겨 심가 대방과 완유, 부명의 복수를 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생은 그리 헛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경행은 심묘를 주시했다. 그녀는 추운 겨울에도 성장하는 야생 식물처럼 생기를 잃지 않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원히 희망을 잃지 않았다. 바닥에서도 조금씩 원하는 위치까지 기어올랐다. 그녀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사람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했다. 결코 규방 소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경행이 담담히 웃었다.
“넌 장군부 사람답구나. 난 며칠 성을 나가 있어야 하니 조심하거라. 어려운 일이 생기면 풍선전당포 계우서를 찾아가. 고양도 내 사람이니 넌 그를 믿어도 된다.”
심묘는 당황했다. 전생의 경험으로 고양이 사경행의 사람이자 사경행의 심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지금까지 이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나담이 사경행의 분부로 고양에게 치료를 받은 것도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사경행이 지금 자신에게 적의가 없다 해도 서로 내부 상황까지 알려줄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자신에게 고양이 그의 사람이라고 알렸다. 진정 자신을 그의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동료라서 솔직하게 대하는 걸까. 그러나 무엇을 믿고 자신이 그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지 심묘는 의아했다. 사경행은 그녀의 의문 가득한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아마 황보호가 널 찾아 말썽을 부릴 거야. 네가 해결하지 못할 거 같으면 고양에게 맡기면 돼.”
심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사경행의 모습은 남편이 떠나기 전 아내에게 무언가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묘는 자기 생각에 놀라 허둥거렸다.
“알겠어요.”
사경행은 심묘가 왜 허둥거리는지 영문을 몰랐으나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마저 일러준 뒤 떠났다. 심묘의 뺨이 이유 없이 뜨거워졌다. 요 며칠 매번 사경행과 대화할 때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내일 곡우를 시켜 청심차를 끓이게 해 허튼 생각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경행은 예왕부로 돌아왔다. 이곳에는 고양과 계우서가 있었다. 계우서는 백호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었다. 사경행은 불만스러웠다.
“먹이지 마.”
“교교는 먹는 거 좋아해.”
계우서의 말에 사경행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이름 부르지 마.”
계우서는 억울했지만 일어나 묵묵히 옆으로 물러났다. 이런 일에 익숙한 고양은 아무렇지 않았다. 사경행이 백호를 총애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우서는 간덩이가 부어 종일 백호와 놀았다. 아름답고 당당한 백호는 지금 경단같이 살이 쪄서 누가 봐도 귀여웠다.
고양이 사경행에게 다가갔다.
“준비는 다 된 거야?”
“내일 출발할 거야. 그동안 정경성에서 네가 수고 좀 해줘.”
사경행이 고양을 바라보자 고양도 그를 마주 보았다.
“걱정하지 마. 반드시 심묘에게 ‘주의’할게.”
“너무 주의할 건 없고.”
사경행의 담담한 말에 고양은 몇 번이나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사경행은 요새 한층 변덕스러웠다. 어제 배랑은 심묘에게 편지로 황보호와 부수의 두 사람을 조심하라며, 마지막으로 사경행과 멀어지라 했다. 이에 사경행은 고양에게 편지를 모사하라고 시켰다. 서화의 대가인 고양은 처음으로 ‘위조 편지’를 만들었다. 게다가 사경행은 마지막 말을 지우고 말썽이 생기면 예왕을 찾아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날조하게 했다. 고양은 자신이 보좌하는 사람의 마음이 검은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 흑색을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심묘가 사고를 치면 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심묘가 살인을 하려 하면 내가 칼을 넘겨주라는 거지?”
고양이 부채를 부쳤다.
“그렇게 귀찮지 않을 거야. 심부 혼사 때문에 바빠서 일을 벌일 틈이 없을 테니까.”
사경행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 * *
과연 사경행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심묘는 대량 예왕이 정경성에 머물며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황보호야 명제와 동맹을 체결하고 명안 공주의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 명제에 머문다고 해도, 예왕이 명제에 오래 머물 만한 이유는 딱히 없었다. 반드시 다른 생각과 계획이 있을 터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12월이 되었다. 8일은 길일인 납팔절(臘八節)이자 원외랑부 큰아들 왕필이 심부 적출 넷째 소저 심모와 혼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심가 대방이 분가한 뒤 심원과 심원백이 죽어 지금 심부는 이전만 못했다. 그러나 원외랑은 조정 대신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심모 역시 정경성에 재녀로서 명성을 널리 퍼뜨렸기에 이 혼사는 떠들썩했다. 왕필은 박학다식한 준재이니 겉으로 봤을 때 심모와 왕필은 서로 잘 어울렸다.
심부. 심모는 이미 단장을 마친 상태였다. 모든 사람이 서둘러 나가고 심동릉만 남았다. 자세히 보면 심동릉도 정성 들여 단장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심동릉은 만 이낭을 닮아 미모가 출중했으나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늘 신부 단장을 하니 아름다움이 더 드러났다. 그러나 지금 심모는 심동릉의 외모를 감상하거나 질투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빨리 나와 의상을 바꿔.”
심모는 심동릉을 재촉했다. 신부를 도와주는 희낭과 이야기를 하던 진약추는 나가 있었다. 근래 심모는 이 혼사를 받아들이는 척하며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심동릉과 몰래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계획했다. 심모는 심동릉을 쉽게 속여 넘겼으니 그녀가 예전 심묘보다 더 아둔하다고 생각했다. 심동릉은 허겁지겁 의상을 바꿔입으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너무 무서워.”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일 부모님께 이 일은 전부 내가 꾸민 일이라고 설명할 테니 넌 조금도 혼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오늘만 지나면 넌 원외랑부의 정당한 소부인이니 누구도 널 얕보지 못할 거야.”
심모는 심동릉이 중대한 고비에 들어서 후회하며 일을 그르칠까 봐 그녀를 안심시켰다. 심모가 신분을 들먹이며 심동릉을 꾀자, 그녀에게 두려운 기색은 사라졌다. 그녀 얼굴에 드러난 홍조를 보며 심모는 속으로 비웃었다. 자신이 그녀가 잘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지 않은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부인의 명분을 베풀었을 뿐이지.
막 의상을 바꿔 입었을 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심모는 얼른 병풍 뒤로 숨었다. 심동릉은 서둘러 붉은 천을 머리 위에 썼다. 심모의 여종이었다. 지금 심부에는 다른 자매가 없어 여종이 그녀를 부축해 나갔다. 심동릉은 주방을 돕는다는 구실로 일찍이 모습을 감췄고 사람들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진약추는 심모가 가마에 오르기 전 그녀와 몇 마디 나누려 했으나 심모는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냉큼 가마에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진약추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진약추는 그런 심모의 모습에 괴로웠다. 심모가 여전히 혼사 일로 자신을 원망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희낭의 지시에 따라 물러났다.
가마가 길을 떠났다. 가마는 정경성을 한 바퀴 돌고 원외랑부에 도착할 것이었다. 진약추가 심부를 정리하고 원외랑부로 따라가려 할 때 상재청이 다가왔다. 혼롓날 분위기에 맞춰 그녀도 분홍색 면포와 수놓인 옷을 차려입었다. 수수하고 단정한 색만 입다가 화려하게 차려입으니 특별한 품위가 느껴졌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심모 아가씨가 출가했으니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을 겁니다.”
진약추는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상재청을 오랫동안 보지 않은 게 떠올랐다. 상재청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근래 바빠 보였다. 게다가 자신도 심모 혼사로 정신이 없어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전보다 용모가 맑고 더 생동감 있는 걸 보고 진약추가 물었다.
“청 동생, 근래 늘 장군부에 가나 봐?”
상재청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늘은 아니에요. 부인과 심 장군님이 바쁘셔서 잡담할 시간이 많지 않답니다.”
진약추는 상재청이 부끄러워 거짓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진약추는 상재청의 팔을 토닥였다.
“청 동생이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동생과 이야기할 시간을 빼지 않겠어?”
진약추는 심모의 일이 지나가면 상재청이 어디까지 일을 진행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모는 어쩔 수 없이 원외랑부에 시집갔다. 왕가는 좋으나 사모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못 간 딸이 안쓰러워 딸에게 신경 쓰느라 놓친 부분이 있었다.
심묘는 정경성에서 인기가 있었다. 진약추 자신은 심묘가 납치를 당했을 때 참혹한 결말이 있을 거라 좋아했건만, 그녀는 멀쩡히 돌아왔고 그걸로도 모자라 송신 공주가 나서서 유언비어를 잠재웠다. 심묘는 여전히 황자와 혼인할 가능성이 있었다. 딸이 한평생 염원하던 것을 남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니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나설안, 거친 장군 세가 여인의 자녀들이 성공할 걸 생각하니 진작 적극적으로 나서 그들을 망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진약추는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나설안의 눈에 들었고, 지금 보니 심신과도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장군부에 들어가기만 하면 나설안과 심묘의 미래는 달라질 게 당연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한다. 자기 상황이 좋지 않은 때는 더욱 그렇다. 진약추는 나설안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몹시 슬퍼하길 고대했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쉽긴 하겠으나, 어쨌든 아주 통쾌할 터였다. 그래서 상재청을 더욱 친근하게 바라보며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가자. 동생도 나랑 같이 원외랑 댁에 가자. 평소 심모에게 자네 기질을 배우라 말했는데, 배우기도 전에 시집을 가서 참 애석하구나.”
상재청이 따라서 미소 지었다.
“부군이 잘해줄 테니 심모 아가씨는 행운이에요.”
“자네 말대로 되면 좋겠어. 청 동생은 참 말을 참 예쁘게 해.”
그때, 그녀는 상재청의 허리에 달린 오색 향낭을 바라보았다.
“이 향낭은 아주 색다르네.”
상재청이 향낭을 가져다 진약추에게 건넸다.
“마음에 드신다면 부인께 드릴게요.”
정교한 물건을 좋아하는 진약추는 향낭의 바느질이 정교한 것을 보고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향을 맡은 뒤, 놀라면서 기뻐했다.
“냄새가 아주 좋은데, 무슨 향이야?”
상재청이 살짝 웃었다.
“향은 잘 모르고 차는 조금 압니다. 평소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풀 수 있게 찻잎을 넣었어요. 재주랄 것도 없는데 조금 부끄럽네요.”
“동생은 총명하고 손재주도 있어. 뭐가 부끄러워. 아주 좋지.”
진약추가 향낭을 받으며 웃었다. 두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심모와 왕필의 혼사는 고요한 정경성에서는 큰 행사였다. 꽃가마는 이 혼사의 중대함을 드러내려는 듯 온 정경성을 한 바퀴 돌았다. 꽃가마는 풍선전당포도 지나갔다. 계우서가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했다.
“정말 떠들썩하네.”
그의 맞은편에 있던 고양이 가볍게 부채를 흔들며 아래를 보았다. 경축하기 위해 터트린 폭죽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자 그는 시끄럽다는 듯 창을 닫아버렸다.
“신랑 모르게 신부가 바뀌었는데, 떠들썩하면 무슨 소용이야. 희극에 불과해.”
“그래서 더 재밌잖아. 사흘은 시끄러울 거야.”
고양은 계우서를 흘깃 쳐다봤다. 계우서는 종일 세상이 어지럽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 같았다. 무슨 일만 생기면 제일 신이 나서 구경했다.
“심묘에게 다른 동정은 없어?”
계우서는 사경행이 떠나기 전에 고양에게 심묘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서라고 당부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계우서는 그간 심묘의 성격을 거의 다 파악했다. 그녀는 온화해 보여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더욱이 심부는 장군부에 정과 의리가 없었으니 이런 희극에서 심묘가 그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면 도리어 이치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다.
고양은 냉소했다.
“지금은 없어. 하지만 곧 반드시 있을 거야.”
계우서는 턱을 매만졌다.
“형도 심묘에게 선입견을 품어서는 안 돼. 심묘는 괜찮은 사람이야. 손을 쓸 때 대범하고 얼굴도 예쁘지. 형이 너무 많이 따지는 거 아냐? 설마 장군부가 또 형에게 무슨 말썽을 주겠…….”
“말썽을 안 준다고?”
계우서의 말에 고양은 가슴속이 답답했다. 심묘 문제를 더하기 전에도 사경행은 그 변덕스러운 성정만으로도 매일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다. 이젠 심묘뿐 아니라 그녀의 사촌 언니도 더해진 차였다.
나담은 만만치 않았다. 고양은 이렇게 힘든 환자는 처음이었다. 얼러도 보고 때려도 보았지만 전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늘 자신을 시장통의 의원보다 낮은 사람으로 보았다. 자신은 대량에서 젊고 유망한 신하인 데다 명제에서는 태의인데, 나담은 자신을 발에 채는 흔한 의원쯤으로 여기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계우서는 고양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내일이면 재미난 구경 하겠네. 시끄러울수록 좋아. 그래야 3형이 돌아와 무료하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