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장
왕가와 심가의 혼사에 장군부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 심만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군부에 청첩장을 보냈지만, 나설안은 청첩장을 보낸 심부 사람을 더욱 혐오했다. 장군부는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선물도 보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군부가 심부와의 관계를 되돌릴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든 혼삿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만 이낭이 일어났다. 심동릉은 어제 심모의 혼인을 돕느라 온종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혼사를 마친 뒤에는 여종이 그녀가 피곤한지 바로 잠든 것 같다고 전해 방해하지 않았다. 만 이낭은 오늘 특별히 심동릉의 체력을 보충해주려 시금치를 넣고 직접 국을 끓였다. 그녀는 심동릉의 규방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방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동릉, 어미 들어간다.”
심동릉의 침상에 한 사람이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인기척을 듣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만 이낭은 순간 멍해졌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심모 아가씨, 어째서 이곳에 계신가요?”
심동릉의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은 바로 심모였다. 심모는 어제 분명 원외랑부로 시집을 갔는데? 그러니 그녀는 지금 심부가 아닌 원외랑부에 있어야 한다. 어떻게 심동릉의 침상에 있는 건지, 만 이낭은 황망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심동릉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총명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지금은 희미하게나마 무언가 추측할 수 있었다.
만 이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동릉…… 동릉은? 동릉은 어디 갔나요?”
심모가 빠르게 고개를 숙인 뒤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눈에 물기가 가득했다. 만 이낭은 심모의 눈물을 보자마자 눈앞이 깜깜했다. 그녀는 심모가 울며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요, 나도 몰라요. 동릉과 술을 마셨는데, 그 뒤……. 난 아무것도 몰라요!”
심부에 큰 소동이 생겼다.
송경당. 모든 심부 사람이 서 있었다. 심 노부인은 분노로 입이 비뚤어졌다. 그녀는 만 이낭을 보며 소리질렀다.
“네가 딸을 아주 잘 가르쳤구나!”
심귀는 옆에 서서 무언가 말하려 했다. 만 이낭은 그에게 아직껏 살아 있는 유일한 자식을 낳아준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평소 부드럽고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해줘서, 자기 나름대로는 정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과 제수의 분노한 표정을 보자 입안에 맴도는 말은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심동릉이 심모를 모략하고 그녀 대신 출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심모는 심부에 남겨지고, 심동릉은 원외랑부에 있다는 것이다. 혼사가 바뀌어 모두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심귀는 평소 눈치는 빠른 편인데도 나약한 심동릉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설령 동릉이 자신의 유일한 혈육일지라도 딸자식 때문에 동생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다.
만 이낭이 울며 노부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노부인, 뛰어난 식견으로 봐주십시오. 노부인도 잘 아시다시피 동릉은 담력이 작은 아이입니다. 모든 사람을 속이고 심모의 자리를 탐낼 만한 담력이 없는 아이입니다. 노부인,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요? 동릉이 절대 감히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할 리 없습니다!”
“그 말은 심모가 동릉을 중상모략했다는 거예요? 만 이낭, 말조심해요!”
진약추의 안색이 푸르렀다. 노부인은 평소 진약추를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심모에게도 그다지 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심부 적출 손녀가 서출 손녀에게 혼사를 빼앗겼다고 하면 체면이 서지 않았다. 노부인은 즉시 진약추의 말을 받았다.
“어미가 저러니 딸이 그 모양이지! 정말 상류에 오를 수 없는 것이야!”
만 이낭이 울며 심모를 바라보았다.
“심모 아가씨, 동릉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동릉을 대신해 이야기해 주세요. 동릉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만 이낭은 심동릉이 이런 일을 했다고 믿지 않았다. 심동릉은 겉으로는 유약해 보여도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었고, 때때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파악해 설명해주었다. 심지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신분에 문제만 없다면 심부의 어떠한 적녀보다 뛰어난 딸이었다. 이전에 그녀가 심모의 혼사가 기회라 말하는 걸 들었으나, 설마 그 기회가 이런 국면이라곤 절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무모한 방법으로 혼인을 바꿔치기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이렇게 되면 그녀는 원외랑부와 심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만 이낭은 이미 심모가 얼굴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녀에게 애원했다. 만 이낭의 호소에 심모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만 이낭, 난 정말 어찌 된 일인지 몰라요. 동릉이 자매로서 헤어지기 전에 술을 올린다고 해서 같이 마셨어요. 내가 깨어났을 때는 아침이었구요. 나도 동릉이 고의가 아닐 거라 믿지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저도 정말 모르겠어요!”
심모는 심동릉을 믿는다고 했으나 말의 내용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심동릉에게 모해를 당했단 의미였다. 그녀의 말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진약추와 심만의 안색은 더욱 가라앉았다. 심귀도 미간을 찌푸렸다. 만 이낭은 사람들이 모두 심모 편에 선 것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당장 급히 처리할 일은 먼저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입니다.”
상재청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심부 사람이 아니라 참견하기 어려웠으나 용기를 내 사람들을 일깨웠다. 어쨌든 심동릉은 서녀였다. 신부는 이미 바뀌었으니 이 일을 원외랑부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심동릉을 심부로 데려올 것인지 아니면 촌락으로 보내 여생을 보내게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가 사람과의 관계였다. 그들의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는 선에서 원만히 마무리해야 했다.
노부인은 즉각 판단을 내렸다.
“먼저 원외랑부로 가서 이 일을 상의하고 동릉을 데려오너라. 만 이낭은 뭘 가르친 게냐? 만 이낭을 땔감 창고 안에 가둬라. 그런 것을 낳은 것이 잘못이니 어미로서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지!”
심모는 초조했다. 설마 심동릉을 다시 데려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심동릉이 돌아오면 자신은 원외랑부로 시집가야 했다. 그럼 갖은 방법을 동원한 게 모두 헛수고가 되는 셈이었다.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진약추와 심만은 노부인의 말에 만족했다. 진약추는 만 이낭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온 마음이 분노로 타는 듯했다. 장래 반드시 만 이낭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다짐했다. 팔아버리든 노비로 삼든,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만들리라 맹세했다.
만 이낭은 눈앞이 깜깜했다. 심동릉은 이제 서녀인 것도 모자라 이미 한 번 혼인한 몸이 된다. 심부 사람은 심모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심동릉을 희생시킬 테니 그녀의 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때, 바깥에서 남종이 원외랑부에서 사람이 왔다고 말했다. 원외랑부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만 이낭은 온몸을 떨며 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일을 심동릉이 벌인 게 아니라고 믿었으나 지금 모든 정황은 그녀가 주동자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원외랑부가 추궁하면 반드시 심동릉부터 손을 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신분이 낮아 의견을 내도 무시당하니 그녀를 구하고 싶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만 바라볼 때 노부인이 무겁게 입을 뗐다.
“원외랑부 사람을 안으로 들여라.”
원외랑부에서 온 사람들은 검은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여인과 지위 낮은 여종 몇몇이었다. 검은 얼굴의 여인은 심부에 들어와서도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엄하게 질책하러 온 것 같았다. 탄탄한 체격 탓에 분위기는 더욱 무서웠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만 이낭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인내심이 바닥난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하려 할 때, 그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심부 이방 만 이낭은 어디 계십니까?”
만 이낭은 놀라 폐부가 다 쪼그라드는 듯했다. 진약추는 안심했다. 원외랑부가 만 이낭에게 분노를 표해도 심부는 절대 그녀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진약추는 마음속으로 만 이낭 모녀가 고통 속에 죽었으면 바랐다. 천한 것들이 감히 귀한 심모에게 비뚤어진 마음을 품다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진약추가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어제 일을 듣고 우리도 매우 소름이 끼쳤습니다. 동릉이 이런 대역무도한 일을 저지를 거라곤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심모가 공연히 억울함을 당해 왕 공자도 몹시 놀라고 분노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 심부의 교육이 온당치 못해 이런 큰일이 생겼으니 사죄드립니다. 사돈어른과 부인은 부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심모에게 사람을 너무 믿었다고 꾸짖었습니다. 이 일은 확실히…….”
그러나 여인은 진약추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또다시 물었다.
“감히 묻사온데 만 이낭은 어디 계십니까?”
사람들은 멍해졌다. 진약추는 자신의 체면을 짓밟은 여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사람들 앞이었기에 꾹 참고 평소의 온순한 모습을 유지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제일 큰 피해를 본 곳은 원외랑부이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노부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게 바로 만씨요.”
만 이낭은 절망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심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손을 내밀어 만 이낭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는 만 이낭을 조금도 책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큰 며느님이 만 이낭을 그리워하십니다. 이에 큰 도련님이 저를 시켜 만 이낭을 원외랑부에 거주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심 노부인께 허락을 받으려고 특별히 왔습니다.”
심부 사람들은 멍해졌다. 여인이 한 말을 분명히 들었건만 이해할 수 없었다. 진약추는 여인이 만 이낭을 일으킬 때부터 조금씩 일이 좋지 않게 흘러감을 느꼈다. 그녀는 여인의 말을 듣고 기절할 뻔했다. 심만이 가라앉은 안색으로 물었다.
“사돈댁,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여인은 약삭빠르게 심만의 안색을 살폈다.
“심 셋째 어른의 말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혹시 더 하실 이야기가 있습니까?”
심만과 진약추는 답답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설마 자신들 입에서 신부가 바뀌었다고 말하길 바라는 건가 싶었다. 심만과 진약추가 말이 없자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노부인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목을 꼿꼿이 세웠다.
“어제 혼인 때, 심모가 심동릉으로 바뀌었다. 신부가 바뀌었으니 지금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상의할 때인데, 어디서 감히 모르는 척하느냐?”
진약추와 심만이 노부인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노부인은 늘 스스로 남보다 한 수 위라 여겼고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입이 줄어서 좋았을 뿐 따지면 원외랑부가 눈에 차지 않았다. 자신의 영예와 부귀를 더욱 드높이기 위해 심모가 더 높은 집안에 시집갔으면 했다.
그러나 조정 지위와 인맥으로 보자면 원외랑은 지금 심만이 보유한 것보다 한참 높았다. 검은 얼굴의 여인은 하인이었지만 명백히 원외랑의 의중을 알리러 온 사람인데, 노부인이 그녀를 꾸짖은 건 왕가를 욕한 셈이다. 원외랑부는 심부가 눈치 없이 세력만 믿고 남을 괴롭힌다 여길 터였다.
여인이 심 노부인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진약추와 심만의 귀에 유달리 거슬렸다. 여인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부인, 무슨 뜻입니까? 신부가 바뀌다니요? 어제 큰 도련님께서 아내를 맞으셨는데, 신부가 공손하고 자상하여 원외랑부 모두가 좋아하고 있습니다. 노부인은 어째서 그런 농담을 하시는지요?”
만 이낭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막다른 골목에서 또다시 활로를 찾은 듯 기뻐했다. 딸 동릉이 똑똑하고 성격과 외모가 좋으니 하룻밤 새 왕필을 사로잡았다고 여겼다. 왕필의 보호가 있으니, 혹여 심모가 원외랑부에 들어가 심동릉이 첩실이 된대도 비구니로 사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만 이낭은 심동릉이 언젠가 두각을 나타낼 거라 믿었다.
진약추는 분노로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노부인의 무례를 수습하기는커녕 여인에게 거세게 따졌다.
“원외랑부는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났으면 대놓고 말하십시오. 이런 괴상야릇한 태도라니. 혹시 정말 심동릉을 심모로 여기는 겁니까?”
심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진약추를 보았다. 진약추의 말은 노부인의 말보다 나은 게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심만은 원외랑에게 미움을 사면 손해였다. 더욱 이 일은 심부 측에서 먼저 그르친 일이었다.
여인이 진약추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어제 큰 도련님은 심부의 넷째 소저와 혼인했습니다. 왜 다른 소저를 언급하시는지요?”
진약추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인의 말은 어느 모로 보나 왕부에서 심동릉의 신분이 가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심동릉은? 심동릉이 심모의 신분으로 살아간다니 진약추는 심장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줄곧 말이 없던 심모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동릉이 원외랑부로 시집간 일에서 자신은 그녀에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깨끗이 빠져나가려 했다. 마지막까지 힐책받는 사람은 심동릉이며, 손해 보는 건 원외랑부였다. 자신은 자유를 얻고 동정까지 받을 수 있다. 지금 원외랑부가 이 일로 소란을 피우지 않으니 심동릉은 전혀 손해를 입지 않은 셈이지만, 덕분에 자신도 철저히 이 혼사에서 벗어났기에 심모는 그런대로 만족했다.
심만은 미간을 찡그렸다. 원외랑부에서 온 여인은 왕가의 태도를 전하는 게 명백했다. 왕가는 심동릉에게 심모의 신분을 지니고 살아가라고 하는 셈이다. 심모는 어찌해야 하는지, 평소 사리 분별 잘하던 왕필이 심동릉에게 어떤 말을 들은 것인지 심만은 머리가 아팠다.
진약추는 냉소했다.
“좋습니다. 당신 말처럼 그렇다고 칩시다. 내가 심모의 친어머니인데 어째서 만 이낭을 데려가는 거죠? 이낭을 데려가다니 우습지 않나요?”
만 이낭은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유유히 미소 지었다.
“큰 며느님은 만 이낭과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친근한 사이이니 익숙지 않은 부에 적응하기 위해 만 이낭을 데려와 함께 머물게 해달라 하셨습니다. 큰 도련님은 큰 며느님을 아껴, 허락하신 거랍니다.”
여인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술술 거짓 이유를 대니 삼방의 얼굴을 매섭게 때리는 것 같았다.
심모는 심동릉이 왕가에서 서녀라는 이유로 핍박당하고 무시당할 거라 생각했던 터라, 그녀가 이렇게 원외랑부에서 큰 수확을 얻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결과가 예측과 아주 달라진 것이었다.
이 일은 심모 자신에게 ‘너, 원외랑부에 시집오고 싶지 않았지? 그런데 우리도 네가 필요 없긴 마찬가지야. 네가 없어도 우린 이전처럼 평안해. 아, 맞다. 큰 며느님이 모두의 사랑을 받고 계신 건 아니?’라고 모욕을 주는 것 같았다. 심모는 이를 갈았다.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사람은 괴상한 심리가 있어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쉽게 얻는 꼴은 보지 못했다.
심부의 모든 사람이 황당했다. 왕가가 이 일을 알게 되면 노발대발해 신부를 바꿀 거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원외랑부는 심동릉을 미워하지 않는 듯했고, 오히려 심가 삼방에게 매우 불만인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제가 다시 원외랑부를 찾아 설명해 드리겠으니, 그동안 사돈은 마음을 푸셔서 판단이 흐트러지시지 않길 바랍니다.”
진약추가 입을 열려 했으나 심만에게 저지당했다. 여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심 셋째 주인어른, 대체 무슨 말이십니까? 지금 원외랑부는 즐겁고 화기애애합니다. 주인어른과 마님은 아주 좋아하시며 심부에서 딸을 아주 잘 키웠다 말씀하셨는데 왜 분노하시겠습니까? 어른께서 공연한 걱정을 하십니다.”
여인은 심만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녀는 만 이낭의 손을 토닥이며 웃은 후,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지금 만 이낭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니 노부인의 허가를 바랍니다. 큰 도련님께서 제가 돌아가 보고하길 기다리십니다.”
그녀는 굳이 왕필을 언급했다.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만과 심귀을 바라보았다. 노부인 역시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심만은 심모의 부친이고, 만 이낭은 또 이방의 사람이니 노부인은 두 아들의 생각을 살폈다. 심귀는 이번에도 아무 의견을 내지 못했고, 심만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등을 서늘하게 하는 모호한 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만 이낭은 따라가시게. 자식이 이렇게 생각해주기도 쉽지 않지.”
만 이낭의 마음에 기쁨과 두려움이 섞였다. 왕가 사람이 심동릉에게 잘못을 추궁하지 않는 듯해 기뻤으나, 지금 왕가가 의도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기에 두려웠다. 지금은 일부러 삼방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 심동릉이 희생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부는 두 눈을 빤히 뜨고 원외랑부 사람이 만 이낭을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송경당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잠시 뒤 노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왕가의 이 기괴한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정면충돌보다 더 걱정스러웠다. 상재청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으나 심만의 안색을 살핀 뒤 말을 삼켰다.
심귀는 곤란했다. 심동릉이 심모의 혼사를 뺏었으니 이 모녀를 원외랑부에 넘길 생각이었다. 이렇게라도 왕가와 삼방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지금 이런 국면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심귀가 두 번 헛기침을 했다.
“제가 동릉에게 편지를 보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에 심만은 실소하며 심모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날 따라 방으로 가자.”
심만은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원외랑부의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제가 직접 방문해 사죄의 뜻을 표한 뒤 주가 되는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것은 잇따라 풀릴 겁니다. 모든 일이 다 제 탓입니다.”
“내가 어디 널 탓할까? 모두 동릉이 만씨 그 천한 것에게 배워서 그래. 상류에 오르지 못할 것!”
노부인이 탄식하고 재빨리 불만스러운 말투로 심동릉 모녀를 욕한 후 진약추도 비난했다.
“네가 일 처리를 진지하게 했다면, 동릉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진약추는 심모의 일로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했다. 노부인까지 꾸짖자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님, 어떻게 절 탓하세요? 저도 동릉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이 일로 절 탓하시면 너무 어리석으신 거예요.”
“내가 어리석다고?”
진약추가 더 물고 늘어지려 하자 심만이 꾸짖었다.
“그만!”
진약추는 당황했다. 심만은 여태 자신에게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심모, 나와 방으로 돌아가자!”
거친 심만의 말에 심모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상재청의 입가에 남이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심모는 심만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심만은 심모를 등지고 말이 없었다. 심모는 그가 왕가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여겼다. 오늘 왕가의 태도도 그렇지만, 심동릉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왕가에 환심을 얻은 걸 생각하니 자신 역시 불만스러웠다.
“원외랑부 사람은 분명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중에도 없나 봐요. 장래 동릉이 제 신분으로 살아가면, 전 어떡해요? 동릉이 제 부부의 연을 빼앗고, 지금 제 신분도 빼앗으려 해요. 아버지, 절 도와주세요.”
심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 그녀 역시 정말로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이 일은 전부 심동릉이 계획했고, 그녀가 자신을 해쳤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심동릉이 네 부부의 연을 뺏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심만이 천천히 물었다. 심모는 심만의 말투 속에서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짝, 심모의 얼굴 위로 맑은 소리가 났다.
“심모야!”
진약추가 방에 들어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심모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심모를 껴안고 심만에게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냐고 했소? 당신의 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물어보시오.”
심만은 화를 참으며 간신히 웃음을 지었다. 심모는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떨었다. 얼얼한 뺨의 아픔보다, 들켰다는 마음속 두려움이 컸다.
“심모야, 네가 감히 이 일을 완전히 모른다 할 수 있느냐? 정말 심동릉이 네 혼사를 뺏었다고? 네 잔꾀가 정말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여기느냐? 정왕 전하에게 시집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심동릉을 네 대신 시집가게 하고, 원외랑에게 미움을 사게 될 네 아비는 어떻게 될지 생각도 안 한 게지? 넌 어떻게 시집갈 것이냐? 내게 이런 총명한 딸이 있으니 정말 전생의 복이로구나!”
심만은 평소 태도가 온화하고 교양 있는 문신이었다. 그는 평소 심모를 끔찍이 아꼈기에 이렇게 흉악한 모습은 오늘 처음이었다. 진약추는 몸을 떨며 품 안의 심모를 바라보았다.
“심모야, 네 아버지 말이 사실이냐?”
“전, 전 단지 자유를 원한 거예요.”
심모는 두려워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심동릉도 절 꾀었어요. 지금 왕가가 우리에게 이런 태도인 건, 분명 심동릉이 이간질한 거예요. 심동릉 그 천한 것이 한 짓이라고요!”
“입 다물어! 우둔하면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구나. 네가 책을 읽은 건 모두 헛짓이었어!”
심만은 심모의 변명을 들을수록 분노했다. 이렇게 흉악한 심만을 본 적 없던 심모는 억울해 눈 주위가 붉어졌다. 진약추는 이 사달이 심모가 벌인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 딸에게 감히 이런 일을 할 담력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딸이자 오랫동안 정성으로 키운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진약추는 심만이 딸을 탓하고 질책하는 소리를 듣자 견딜 수 없었다.
“심모가 물론 잘못했으나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심모의 말도 맞아요. 심동릉이 분명 나쁜 심보를 품고 심모를 꾄 거예요. 이 일은 심동릉이 계획했을 거예요.”
심만이 이마를 문질렀다. 진약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당신, 언제 이렇게 시비가 불분명해졌소?”
진약추는 당황스러웠다. 심만이 이어 말했다.
“됐소. 내일 내가 직접 원외랑부를 방문해 사죄의 뜻을 표하겠소. 그러나 나도 일이 성사될지 알 수 없소. 우리 심부가 먼저 잘못한 일이니, 안 되면…… 자업자득이지.”
그는 심모를 한 번 바라본 뒤 몸을 돌려 떠났다. 진약추는 심만의 실망한 표정에 혼비백산했다.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심만은 이미 방을 떠난 뒤였다. 품 안의 심모가 흑흑 흐느껴 울고 있었기에 진약추는 일단 딸을 위로했다.
심만이 방을 나오자 심만의 곁에 있던 남종이 그의 지친 모습을 보고 물었다.
“부를 나가실 건가요?”
“아니다.”
심만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곧 서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서원으로 가자.”
서원, 지금 상재청이 머무는 뜰이다. 남종은 말없이 묵묵히 심만을 모시고 서원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저 멀리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지켜보는 사람은 바로 송경당 안 노부인의 장 유모였다. 그녀는 의심스레 중얼거렸다.
“셋째 주인어른이 어째서 서원으로 가시는 거지…….”
* * *
장군부.
심부에서 벌어진 사건은 빠르게 심묘의 귀에도 전해졌다. 심묘는 진작 이방과 삼방, 심지어 송경당의 여종까지 매수해두었다. 진약추의 관리 능력은 임완운만 못했다. 임완운이 집안을 관리할 때는 각 뜰, 특히 채운원은 경계가 철통같아서 첩자를 집어넣기 어려웠다. 그런데 진약추가 심부를 관리하니 힘이 여기저기 분산되었다.
더불어 심부는 지금 노부인의 사치를 감당하지 못해 매일매일 지출을 줄이는 분위기니 하인들의 삶은 이전만 못했다. 그래서 은자 몇 푼이면 쉽게 매수할 수 있었다. 더구나 대단한 기밀이 아니라 심부 안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을 알리길 부탁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심가 이방의 몰락 후, 심가를 지탱하는 건 삼방이었다. 진약추는 평소 집안일을 도맡은 주모로서 허세를 부렸고, 심모는 더는 다툴 자매가 없어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편안하고 한가한 날이 너무 계속되자 머리가 녹슨 모양이었다. 이번 심모의 한 수는 확실히 악수 중에서도 악수였다.
심만은 원외랑부를 방문해 사과했다. 그가 어떤 구실을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완곡하게 모든 과실을 심동릉에게 밀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가는 매섭게 심만을 후려쳤고,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심모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동릉이 삼방의 적녀이며, 미안하지만 심모라는 사람은 모른다고 잡아뗐다.
심만은 매우 곤란했다. 그는 왕가가 고의로 트집 잡는 걸 알아보았다. 더욱이 왕가는 이 사달을 심모가 계획했다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그를 난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심만은 그와 왕가 사이의 우정을 믿었다. 그는 왕가가 한바탕 분풀이한 후에는 심모와 심동릉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추측은 틀렸다.
왕가는 두 가지 해결책을 꺼냈다. 하나는 심동릉이 심모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면 심모는 앞으로 다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당연히 심만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해결책이었다.
두 번째는 심모도 원외랑부로 시집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동릉과 심모 두 사람을 본처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심모로 가장한 심동릉과 왕필의 혼례식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었으니 이번 진짜 심모와의 혼례는 구태여 대규모로 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다른 사람은 서녀가 시집가는 것으로 여길 테니, 소규모로 하자는 의미였다. 심만은 자칫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적녀와 서녀가 한 명의 남편을 같이 모시는 일은 명제에서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녀가 본처, 서녀가 첩인 데 반해, 원외랑부는 두 사람 다 본처로 삼는다 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 심모에게 서녀 신분으로 혼인하라니, 서녀 출신 심동릉이 심모가 얻을 존귀와 영예를 가로챘는데. 이건 치욕이었다!
심만은 그 자리에서 제안을 모두 거절했으나 왕가의 태도 역시 매우 단호했다. 신부가 바뀐 것은 자기들의 잘못이 아니며 지금 심동릉과 왕필은 아주 잘 지내기 때문에 심모가 어떤 상황이든 알 바가 아니라는 식이었다. 왕가는 시간을 끌 수 있어도 심모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손해 보는 건 심모였다. 그래서 심만은 고심에 빠졌고 이 일로 진약추와 여러 번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 * *
백로는 심묘에게 심부의 일을 이야기했다. 백로는 심묘가 기뻐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평소 진중한 심묘가 지금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정말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우러나는 듯했다.
“아가씨, 즐거우신가 봐요. 심모 아가씨는 이번에 바위로 자기 발을 찧었네요. 이유 없이 이런 말썽을 불러왔으니 셋째 주인어른은 온종일 머리가 아프겠어요.”
백로의 말에 상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동릉 아가씨가 이익을 얻었네요. 심동릉 아가씨는 관리 집안 부인이 됐을 뿐 아니라 원외랑부의 관심을 받아 만 이낭도 데려가 머물게 했으니 정말 매우 그럴듯해요.”
백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어. 나중에 심모 아가씨가 원외랑부에 가게 되면, 아무래도 적서 유별이 있을 거야. 동릉 아가씨에게는 이낭만 있지만 심모 아가씨에게는 어쨌든 셋째 주인어른과 친정이 있어. 그러니 원외랑부는 심모 아가씨를 편애할 거야. 동릉 아가씨가 지금은 득의양양해도 앞으로 살날은 길어.”
심묘가 소리 내 웃었다. 백로와 상강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동릉 언니는 무서운 사람이야. 언젠가 심모 언니가 원외랑부에 시집가도 그녀는 동릉 언니만 못할 거야. 원외랑부가 이렇게 삼방을 냉대하는 이유는 이 사달의 범인이 심모 언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 거 같은데, 세상 어느 남자가 자신을 싫어하는 아내를 좋아할까?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언니들은 자식을 낳기 전까지 오직 왕필의 총애에만 의지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심모 언니는 이미 졌어. 심모 언니가 왕필의 총애를 얻지 못하면 자식도 쉽게 낳을 수 없지. 적서가 다르다지만 두 사람 다 본처니 자식을 먼저 낳는 사람이 바로 주인이 되는 거야.”
심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더구나 심모 언니의 머리로 어떻게 심동릉 언니와 싸울 수 있겠어? 동릉 언니는 현재 이 일에서 빠져나와 결백한데. 왕필은 언니를 책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만 이낭도 심부에서 데려왔지. 삼방이 언니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지만 그대로 돌려줬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심모 언니의 손에 패할까?”
백로와 상강은 얼떨떨했다. 잠시 후 상강이 말했다.
“보아하니 동릉 아가씨는 과연 무서운 사람이네요.”
“심부에서 장래가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이제 그만 떠들고 날 도와 먹을 갈아줘.”
백로가 묵을 가져와 갈자 심묘는 종이를 펼쳐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아가씨, 편지를 쓰시게요?”
백로의 물음에 심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심모가 이렇게 큰일을 만들어 사서 고생하니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자신은 전생에 대방이 멸망하는 데 삼방이 적잖은 힘을 보탠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 큰 선물에 언젠가 반드시 보답할 생각이었다. 삼방이 했던 일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었다.
아직 삼방에 손을 뻗지 않았는데도 삼방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빠르게 망하도록 도와줄 셈이었다. 심만과 진약추가 종일 말다툼하는 이때, 가장 필요한 건 절친의 위로였다. 상재청이 등장할 때였다.
* * *
심모가 꾸민 계략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왔다. 심만은 왕가의 요구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부득이 심모가 심동릉의 신분으로 시집가는 데 동의했다. 심동릉과 왕가 사람이 도대체 어떤 말을 나눴는지 몰라도 왕가는 심만의 해명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원외랑과 척을 질 수는 없기에 심만도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건 심모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심모와 바꿔 혼인할 사람이 없으니 심모는 온종일 소란을 부렸다. 원외랑부에 시집가길 원치 않는 데다가 심동릉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건 더욱 용인할 수 없었다.
심모가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진약추도 매우 분노했다. 진약추는 평소 대국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심모의 일생과 관련된 큰일이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한사코 심만이 원외랑부를 찾아가 올바른 답변을 받길 고집했다.
금실이 좋고 정이 깊던 삼방 부부는 근래 갈등이 빈번해 추수원 하인들은 감히 크게 숨도 쉬지 못했다. 오늘도 그랬다. 진약추가 방 안을 서성이다가 심만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애가 탔다.
“왕가는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요? 심모의 일은 이렇게 끝내서는 안 됩니다. 심동릉, 그 천한 것이 우리 심모의 명성을 차지하고 혹시 정당한 소부인이 되려는 걸까요? 대인, 다시 한번 원외랑부로 가서 시비를 따지세요.”
진약추가 심동릉을 ‘천한 것’이라 욕하니 심만은 평소 교양 있던 부인을 찾을 수 없어 불쾌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겨우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심모가 우선 본처 명분으로 시집을 가고 나중에 다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소. 당신이 이렇게 종일 소란을 부리면 심모도 편안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몇 번이나 얘기해 봤는데도 전혀 소용없지 않소!”
“대인!”
진약추가 소리쳤다.
“심모는 대인의 딸, 우리 삼방의 진정한 적녀예요. 금이야 옥이야 키웠고 자라는 걸 보셨습니다. 대인은 어떻게 그 아이에게 그런 억울한 혼인을 강요하실 수 있나요? 더구나 심동릉, 그 천것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라니요! 심모가 잘못하긴 했어도 심동릉이 꾀어낸 게 더 큽니다. 대인은 어째서 이리 무정한가요!”
진약추의 목소리는 귀를 찌르는 듯했다. 심만은 결국 더는 참지 못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시간을 허비할수록 손해 보는 건 심모요. 당신의 말처럼 찾아가 소란을 부리면 심동릉은 서녀라 영향이 없으나 심모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웃음거리가 되고 심부도 웃음거리가 될 텐데, 그때 당신은 어쩔 것이오?”
진약추는 심만의 격양된 목소리에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심모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심모가 손해 보게 하자구요? 안 돼요. 내가 직접 원외랑부에 가서 말하겠어요!”
“됐소! 당신은 부 안에서 움직이지 말고 심모를 잘 지키시오. 날 더는 성가시게 하지 마시오!”
심만이 분노해 외쳤다. 진약추는 얼떨떨했다. 심만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도 자신을 이렇게 거칠게 대한 적은 없었다. 심만에게 언짢고 성가신 기분이 가득해 보이자 진약추는 마음이 조여왔다.
“대인과 저는 어린 시절 부부가 되어 지금까지 금실이 좋고 화목했어요. 대인은 첩을 들이지 않았지요. 지금 대인은 제 용모가 이전과 같지 않다고 싫어진 건가요? 어머니가 종일 대인에게 첩을 얻으라 하셔서 마음이 움직인 건가요? 제가 싫어진…….”
진약추는 줄곧 대범하지 못했다. 학자 가문은 소극적인 태도를 선호했다. 심만도 비슷해서, 진약추가 더욱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이좋은 나날이 오래되면 재미없어지는 건 불가피했다. 이때 여인이 측은지심이 생기도록 꾸며내면 남자는 동하곤 했다. 하나 젊을 때 꾸며내는 건 흥미로우나 애석하게도 나이 들어 꾸며내면 좋은 효과를 낳기 어려웠다.
더욱이 이 며칠 진약추는 심모의 일로 이리저리 뛰어다녀 안색이 적잖게 초췌했다. 꾸미지 않은 모습은 둘째 치더라도 방금까지 무례한 말을 늘어놓으며 소리소리 질렀으니, 심만은 그녀가 가소로웠다. 그는 냉담히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시오.”
심만이 떠나자 당황한 진약추는 그 자리에 흔들흔들 서 있었다. 여종 시정과 화의가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진약추의 마음속에 한층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녀는 상황이 많이 변한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바뀌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추수원의 떠들썩한 사건은 빠르게 다른 뜰로 전해졌다. 서원 사람들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서원은 넓고 적막했는데, 상재청이 기거한 후로 늘 화초를 만지작거려 우아하며 독특하고 품위 있는 곳이 되었다.
상재청은 방에 앉아 탁자에 놓인 편지를 보고 있었다. 조 유모는 방이 답답하지 않게 창문을 열었다.
“심 대부인이 보낸 편지인가요?”
상재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설안이 보낸 편지였지만 사실 상재청도 나설안인지 심묘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심묘를 떠올리면 모든 걸 통찰한 듯 맑고 투명한 두 눈이 생각나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편지에는 상재청이 오랫동안 장군부에 오지 않았으니 틈이 나면 장군부에 와서 놀다 가라고 쓰여 있었다. 상재청을 위해 좋은 집안을 찾아줄 마음이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좋은 집안을 찾아준다? 상재청은 편지를 읽으며 다른 것을 생각했다. 자신은 심신에서 심만으로 목표를 바꿨다. 심만은 우아한 사람을 좋아했다. 자신은 심만의 이상형에 거의 들어맞기에 그를 꾀기는 생각보다 매우 수월했다. 또한 심모와 심동릉의 일이 생긴 후 심만과 진약추 사이 갈등은 점점 커져 심만은 서원을 더 자주 방문했다. 심만이 올 때마다 자신은 곱게 단장하고 그의 심중을 잘 헤아려주는 말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쇠는 뜨거울 때 두드려 사용하라는데 지금은 ‘뜨거울’ 때가 아닌가? 상재청이 상념에 잠겼을 때, 여종이 들어와 심만이 방문했다고 고했다. 조 유모는 얼른 물러났다. 심만은 방에 들어와 상재청이 편지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았다. 심만이 호기심에 물었다.
“누가 보낸 편지요? 넋을 잃고 보는데?”
상재청은 그제야 심만이 들어온 것을 본 것처럼 웃었다. 그녀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심 대부인이 보낸 편지에요.”
심만의 웃는 얼굴이 조금 멈칫했다. 그는 개의치 않는 척하며 물었다.
“큰형수가 무슨 일로 편지를 보냈소?”
상재청은 미소 지었다.
“심가 대부인은 좋은 분이시라 제 중매를 서주려 하시네요. 제가 지금 이렇게 많은 나이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걱정하시나 봐요.”
그녀는 쾌활하게 말하며 심만을 바라보았다.
“심 셋째 어른도 언젠가 시간 나시면 대부인이 말씀하신 ‘좋은 혼처’가 어디일지 알아봐 주세요.”
상재청이 웃자 수려함이 더욱 드러나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심만은 점점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송경당.
심 노부인은 낮은 침상에 앉아 있었고, 여종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장 유모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노부인 마님, 셋째 어른께서 또 서원에 가셨습니다.”
노부인이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가면 가는 거지. 신분이 낮지만, 결국 첩이니 크게 상관은 없다.”
장 유모가 웃었다.
“마님, 안심하십시오. 마님께서는 셋째 어른께 첩실을 주려 했는데 셋째 어른이 거절하셨지요. 그런데 지금 재청 소저를 받아들이면 앞으로 셋째 어른 곁에 사람이 있으니 이후 자손이 번창해 자식이 하나둘 생길 겁니다.”
노부인은 탄식했다.
“심부에 아들이 있다면 구태여 내가 심만의 집안일에 손댈 필요가 있겠느냐? 심만이 계속 진약추를 보호하며 이 어미의 말도 듣지 않았고, 진약추는 내 앞에서 건방을 떨었어. 그때 진약추에게 말했지. 지금은 총애받으나 아들을 낳지 못했고 또 남자는 새로운 여자를 좋아하니 언젠가 심만도 질려 할 거라고. 지금 내 말이 적중하지 않았더냐?”
장 유모가 얼른 노부인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마님이 드신 밥이 그들이 먹은 밥보다 많으니 멀리까지 내다보시는 거지요.”
노부인은 장 유모의 아첨을 누리며 얼굴 가득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셋째가 이런 여인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으면 학자 가문의 서녀를 많이 찾아왔어야 했어. 진약추는 늘 천하에 적이 없었다 여겼겠지. 친정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고. 상재청도 괜찮아. 영리하고 예의를 알고 건방지지 않지. 셋째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용서할 만하구나.”
“그러나 셋째 마님은 이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셋째 마님이 이 일을 알면 아마 소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소란? 어디서 감히!”
노부인은 분노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생각 후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소란을 피우면 귀찮아지지. 됐다. 두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면, 며칠 지나 너도 돕거라. 이미 돌이킬 수 없는데, 셋째 며느리가 감히 막을 수 있을지 보겠다. 막는다고 하면, 질투 많고 아들을 낳지 못한 주모를 심부는 감당하지 못한다 해야지. 심만에게 이혼을 종용해야겠구나.”
장 유모는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 삼방의 혼란스러운 일은 마침내 일의 또 다른 주인공인 심동릉의 귀에 전해졌다.
행화가 조심스레 심동릉에게 차를 달여주었다. 매우 좋은 군산 은침이었다. 원외랑부는 재산이 풍족했고 의식(衣食)을 중시했다. 심부 이방에 있을 때보다 좋은 대우였다. 심동릉은 잘 지내고 있었다. 심부 사람이 심동릉을 보았다면 이처럼 편안한 모습에 안색에 봄을 머금은 미인이 심부 이방에서 무조건 고개만 수그리던 서녀인가 하고 의아할 터였다.
심동릉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행화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 심부에서 사람이 또 왔는데 심모 아가씨가 시집올 거랍니다. 심모 아가씨가 들어오면 아가씨는 어찌해요? 삼방에서 몰래 아가씨를 해칠 겁니다.”
“걱정하지 마. 언니는 시집오지 않을 거야. 원외랑부 사람도 심모 언니가 들어오게 할 리 없어. 설령 언니가 들어온대도 좋을 수 없어. 늘 감시를 당할 거야. 이 얘기는 됐고, 어머니가 새로운 옷을 만드시게 아름다운 옷감을 몇 필 골라 보내.”
심동릉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집안일을 도맡는 주모의 기백이 보였다. 행화도 조금 생각한 후 미소 지었다.
“아가씨는 똑똑하시고,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니 관두렵니다. 아가씨께서 왕가 어르신께 무어라 말했길래 지금 삼방 사람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네요. 어쨌든 삼방 사람들도 자업자득이에요. 분명 심모 아가씨가 바꿔 혼인하자 말했는데 전부 아가씨 탓으로 돌리다니 너무 파렴치해요.”
심모는 신부를 바꿔 혼인하는 계획을 모두 심동릉이 생각한 거라고 말했다. 그 얘기가 원외랑부에 전해졌을 때 행화는 매우 분노했다. 당시 심모는 심동릉을 연루시키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으면서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심동릉을 바로 내팽개친 것이다. 행화는 그 두 얼굴에 코웃음이 나왔다.
평생 총명하더라도 어리석을 때가 한 번은 있다는 말처럼 심만도 그러했다. 왕가가 지금 삼방을 보지 않는 건 심동릉이 왕필에게 심모가 정왕 부수의를 사모하며 삼방은 부수의 쪽에 서려 한다고 고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따르면 심만은 심모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황위 쟁탈 중인 부수의 일파가 아닌 왕씨 가문을 고른 셈이었다.
심모가 부수의를 사모하고 심만이 부수의를 지지하는데 왕필과 심모가 혼인하면, 장래 왕씨 가문에 말썽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바보가 아닌 왕가 사람들이 심모를 가문에 들일 리 없었다. 더욱이 심동릉이 심모 대신 혼인한 건 왕가에게 행운이었다. 부수의와의 관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심모와 왕가의 연분은 끊어질 운명이었다. 그러니 심동릉은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어 결말이 있는 법이었다. 모두 심모가 부른 화니 당연히 그녀가 쓴 열매를 집어삼켜야 했다. 심모를 본처로 시집오게 하는 것은 왕필 쪽에서 일부러 괴롭히려 한 것이고, 심만이 동의한들 심모가 얌전히 따를 리 없었다.
심묘도 심동릉과 생각이 같았다. 경칩이 말했다.
“심부가 크게 시끄럽네요. 이번 웃음거리는 보고 있자니 정말 즐거워요.”
시일이 지나자 심묘는 이 일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쩌면. 시끄러울수록 결국 우리와의 관계는 분명히 하는 거니까.”
경칩은 심묘를 바라보며 곡우와 작게 속닥거렸다
“요 며칠 왜 아가씨는 그다지 즐겁지 않은 모습이시지?”
곡우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뜰 안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지만,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나른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네. 근래 며칠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
곡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정신이 없을 뿐이겠어? 이전이면 심부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것을 보고 아가씨는 기뻐하셨을 거야. 그런데 지금 아가씨는 심부가 엉망이라는데 손을 휘저으셨어. 흥미가 없으신 것 같아. 혹시 병이 나신 걸까?”
“먹고 마시고 걷고 뛰는데, 무슨 병이 그래? 상사병이라도 돼?”
곡우는 눈을 흘겼다.
“누가 상사병을 걱정하는데?”
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나릉이 걸어오고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서둘러 문안 인사를 했다. 나릉이 손을 흔들며 탁자 앞 심묘에게 걸어갔다. 그는 심묘가 멍하니 앉은 것을 보고 그녀를 불렀다.
“심묘야?”
심묘가 고개를 돌려 나릉을 보고 웃었다.
“오라버니.”
나릉은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낫지 않았으나 심구가 나릉을 위해 왼손 검법서를 찾아왔다. 근래 그는 진지하게 왼손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기분이 많이 나아졌으며 말투와 태도도 이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져 더욱 따뜻했다. 때때로 아가씨들이 수줍어하며 그를 훔쳐봤는데, 나담은 정경성의 몇몇 관가 소저들 사이에서 나릉이 비밀리에 인기가 있다고 농담했다.
“심묘야,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넋을 놓은 거야?”
심묘가 살짝 웃었다.
“아무것도,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거야.”
나릉은 방금 경칩과 곡우가 ‘상사병’을 말한 걸 떠올렸다. 마음이 약간 가라앉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심묘를 떠보았다.
“난 또 네가 출가할 나이가 되어 조금 노곤한가 했어.”
심묘는 나릉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담담히 말했다.
“나보다 나담 언니가 더 급할 거야.”
“그건 그렇지.”
심묘는 웃고 있는 나릉을 보았다.
“오라버니,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나릉의 수려한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자신은 심묘를 보러 온 것이었으나 솔직히 풀어헤칠 수는 없는 노릇.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모면했다.
“어, 네가 보낸 과자가 조금 너무 달아서 이야기하러 온 거야.”
두 사람을 지켜보는 곡우는 답답했다. 심묘는 요리사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과자를 만드는 사람도 아닌데 그녀의 과자를 탓하다니. 경칩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곡우같이 완고한 사람은 못 알아채도 자신은 나릉이 심묘와 친해지려 구실을 찾은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곧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심묘는 나릉에게 조금도 남녀 간의 정을 품지 않은 듯했다. 받아주길 바라는 마음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니 나릉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심묘는 과연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달다고? 난 당액은 많이 넣지 않았는데.”
더 곤란해진 나릉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나담이 네가 과일 향이 나는 과자를 만들 줄 안다던데, 혹시 다음번에 그걸 해줄 수 있을까?”
심묘는 당황했다. 과일즙이 들어간 과자는 대량 황실의 맛으로, 지난번 사경행이 명안 공주를 죽여줄 테니 이후 대가로 요기할 과자 두 바구니를 달라고 했을 때 만든 것이었다. 사경행은 약속대로 명안 공주를 해치웠고 그 사실을 직접 알려줬지만, 자신은 과자를 그에게 건네지 못했다. 이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담이 식도락을 즐길 수 있었다. 그녀는 그 과자가 맛있다며 앉은 자리에서 한 쟁반을 깨끗이 다 먹어치웠다.
심묘의 속눈썹이 천천히 드리워졌다. 사경행이 떠났으니 대량 예왕도 사라졌다. 떠도는 소문이 없어 사경행이 안전한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죽은 임안후부의 소후야 신분을 지니고 있기도 했기에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나릉은 심묘가 또 멍해진 것을 보고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심묘야?”
정신을 차린 심묘는 나릉을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었다.
“오라버니, 미안. 그 과자 만들 때 내 마음대로 한 거라. 그때 요행으로 한 바구니 만든 건데, 나담 언니가 먹어버렸어. 내가 다시 해도 그렇게 나올지 모르겠네.”
경칩은 심묘의 몸 뒤에서 눈을 크게 떴다. 심묘는 나릉에게 단정한 태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심묘는 당연히 그 과자를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때 심묘는 요리법을 외워 움직였고 아주 능숙해 보였다. 그런데 왜 나릉에게는 만들어주지 않는지 의아했다. 나릉이 심묘에게 미움을 산 건가 싶었지만, 짐작 가는 일도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릉은 심묘가 거절할 거라 예상 못 한 듯했다. 나릉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반면 심묘의 표정과 태도는 부드러웠고, 조금의 창피함도 없었다. 대량 황실의 과자는 만드는 과정이 복잡했기에 심묘는 종일 과자를 만들 인내심도 없었다. 나릉에게는 주방에서 과자를 만드는 요리사에게 다른 것을 해주라고 할 심산이었다.
나릉과 심묘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멀리 처마 아래 다른 사람에게 한눈에 다 보였다. 그 사람은 흰옷을 입은 채 부채를 가볍게 흔드는 군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었다. 사경행이 떠난 후 고양은 사경행의 분부에 따라 나릉의 손 부상을 돌본다며 장군부에 머물렀다. 시시각각 심묘의 움직임을 보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릉과 심묘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나릉을 보는 고양의 시선에 동정의 빛이 있었다. 그는 심묘를 한 번 바라본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깊게 탄식했다.
“웬 한숨이에요?”
머리 하나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놀란 고양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뻔했다. 장군부에서 이렇게 민첩하고 용맹한 사람은 나담밖에 없었다.
“고 의원, 여기서 뭐 해요?”
나담은 고양의 시선을 따라 심묘와 나릉이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고양을 보았다. 고양은 나담의 의아한 시선에 불안했다. 나담이 갑자기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알겠다. 고 의원은 심묘를 좋아하는군요!”
고양은 놀라 서둘러 손을 내밀어 나담의 입을 가렸다. 웃긴 이야기였다. 장군부에 사경행이 보낸 사람은 자신 한 명이 아니었다. 다른 비밀 호위들도 있었다. 그중 말 많은 어느 호위가 이 말을 사경행에게 전하면 자신은 더는 명제에 머물 수 없을 터였다. 고양은 자신의 손 아래 발버둥 치는 나담을 바라보았다. 무력감이 솟았다. 나담은 자신에게 늘 어려운 말썽을 안겨주니, 여러 번 함정에 빠졌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담은 어렵게 고양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큰 걸 의식해 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득의양양했다. 고양의 약점을 잡은 표정이었다.
“심묘를 좋아했군요. 질투하나 보네요.”
“스스로 총명하다 여기지 마시지요. 전 심묘 아가씨께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나담은 입을 삐죽였다.
“당신, 자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네요. 내 사촌 여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가씨는 온 성안을 뒤져도 찾기 어려워요. 당신 같은 의원은 망상을 말아야 해요. 거울을 잘 보지 않나 보죠?”
그녀의 말이 고양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 고양은 정말 나담의 말처럼 그렇게 상류에 오를 수 없는 얼굴인지 거울을 보고 싶었다. 그는 냉소하며 턱으로 나릉을 가리켰다.
“난 망상이고, 그는 자격이 있소?”
나담이 나릉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나릉 오라버니는 좋은 사람이지만 애석하게도 심묘의 남편감은 아니에요.”
나담의 말은 고양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나담이 사촌 오라버니를 보호할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오?”
“심묘는 철학이 있는 사람이에요. 나릉 오라버니는 너무 온화해서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없어요. 그래서 심묘도 그를 오라버니로만 여기는 것 같아요.”
나담이 애석해했다.
“당신은 무엇을 불꽃이라고 하는지 아시오? 그럼 말해보시오. 당신 사촌 여동생은 무슨 사람과 불꽃이 일어날 것 같소?”
고양은 나담의 답이 의외여서 바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나담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곧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예왕 전하 같은 사람이에요.”
고양은 당황했다.
“예왕 전하는 잘생겼고 또 신비하며 헤아릴 수 없어요. 더욱이 정과 의리가 깊은 사람이니 세상에서 제일가는 좋은 남자예요. 내 사촌 여동생에게는 이런 부군이 어울려요. 그러나…… 이는 내 생각일 뿐.”
나담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는 고양이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서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걸 깨달았다. 고양과는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 나담은 순간 표정을 바꾸며 그의 귓가에 말했다.
“이봐요, 지난번 내가 예왕부에 간 일로 당신이 내 약점을 잡은 셈이지요. 오늘 난 당신이 내 사촌 여동생을 사모하는 것을 알았으니, 당신의 약점을 잡은 셈이에요. 앞으로 예왕부의 일로 날 휘두를 생각은 말아요. 나도 당신의 잔꾀를 심묘에게 말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평생 심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거예요!”
고양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는 심묘보다 사경행이 두려웠다. 그러나 나담이 이렇게 총명한 척하며 얼굴 가득 간사한 표정을 지으니 흥미로웠다. 고양이 나담에게 다가갔다.
“좋소, 그럼 우리 서로 이용합시다. 어떻소?”
옥 같은 공자인 고양이 다가와서 이야기하자 준수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나담은 갑자기 무언가 켕겼다. 그녀는 고양의 따귀를 때리고 옆으로 밀었다. 무술을 익힌 그녀의 손바닥에 맞은 고양은 자칫 피를 토할 뻔했다. 나담이 몸을 돌려 떠나며 외쳤다.
“이 호색한!”
고양은 뺨을 매만지며 살짝 웃었다.
장군부에서 발생하는 이런 사소한 일은 결코 심묘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녀에게 이런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고 시시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심부에서 온 소식은 조금 달랐다. 심모가 달아났기 때문이다.
심부가 뒤집혔다. 심만이 심동릉과 동일한 자격으로 원외랑부에 시집가라고 밀어붙인 것이 결국 심모를 엇나가게 한 것 같았다.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심모는 대범하게 심부에서 도망쳤다. 떠나기 전 방 안의 값비싼 금은보화는 전부 챙겼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진약추에게 큰 짐을 떠넘긴 것이다.
심만은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어 진약추에게 소리쳤다.
“내가 당신에게 잘 지켜보랬는데 어떻게 도망친 거요?”
진약추는 두려웠다. 심만은 심모를 방에다 완전히 가두라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기를 아끼는 마음을 심모가 이렇게 이용할지 생각지도 못했다. 진약추 자신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심만에게 말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 찾고 있어요. 대인, 심모도 겁이 나서 그런 거지 고의는 아닐 거예요.”
진약추가 지금에 와서도 심모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싸고돌자 심만은 냉소했다.
“두려워한다고? 겁난다는 애가 사람을 바꿔 혼인하오? 겁난다고 집을 떠나오? 내게 이렇게 염치를 모르는 딸은 없소!”
“대인,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그 아이는 대인의 딸이에요!”
진약추는 눈을 크게 떴다. 심만이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심모를 책망하며 욕을 하니 진약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심만의 눈빛에는 혐오가 가득했다. 그는 큰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진약추는 심만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았지만, 녹초가 되어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녀는 여종인 시정의 팔뚝을 잡았다. 그녀의 손톱이 깊게 찔러, 시정은 아파서 안색이 창백해졌는데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추수원의 이런 소란은 빠르게 송경당에 전해졌다. 심 노부인은 유유자적 차를 마셨다.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일 났네, 일 났어. 진약추에게 일이 났구나. 정말 자신을 새로 시집온 신부로 여기나.”
잠시 후 노부인이 또 입을 열었다.
“어미가 교육을 그리하니 딸이 저렇지. 하나하나 내 근심을 덜어주지 않는구나.”
장 유모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심모 아가씨는 지금 찾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부인이 고함을 쳤다.
“걔는 뭐하러 상관해? 그 아이가 얼마나 능력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죽어 돌아오겠지. 아무 이유 없이 심부의 체면을 떨어뜨리다니, 셋째가 돌볼 테니 난 그런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을 쓰지 않을 게다.”
그녀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셋째는 지금 서원에 갔느냐?”
장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셋째 주인어른과 셋째 마님은 늘 말다툼을 합니다. 주인어른은 서원에 더 자주 가고 계시고, 한번 가면 한참 머무십니다.”
노부인의 시선에 광채가 스쳤다.
“곧 밝혀지겠지? 빨리 셋째에게 아들이 생겼으면 좋겠구나. 난 손자를 안아보고 싶어. 진약추 그 미련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봐야 해. 장 유모, 너 가서 일 하나만 하거라. 심부는 근래 일이 순조롭지 않으니 기쁜 일로 불운을 없애야 한다.”
노부인이 냉소했다. 장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심만이 늦게까지 방으로 돌아오지 않자, 진약추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예전에는 연회가 있어도 늘 남종을 보내 소식을 전달했는데 오늘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대낮에 심만과 한바탕한 소란을 생각하니 더욱 초조하고 불안했다. 지금 심만과 자신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으니 그가 새로운 여자를 데려오면 큰일이었다.
임완운은 심귀의 뜰에 여인을 거두며 그녀들을 억눌렀다. 집안을 관리하며 주모의 위치에 앉아 있을 수 있기만 하다면 임완운은 다른 건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진약추는 그녀와 달랐다. 진약추는 심만의 총애를 오랫동안 받았으며 노부인의 말처럼 질투가 많아서 심만에게 다른 여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약추는 앉으나 서나 불안했다. 그때, 화의가 바깥에서 들어왔다.
“마님, 노부인 마님께서 옷감 몇 필을 보내셨는데, 상재청 아가씨에게도 한 필 가져다주라고 하십니다.”
노부인은 상재청을 평소에는 없는 사람으로 여기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상재청을 생각한 걸까. 진약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님이 직접 사람을 시켜 보내면 될 것을 어째서 나보고 가라는 거지?”
“아마 마님과 상재청 아가씨가 사이좋은 것을 떠올리신 게 아닐까요?”
진약추는 잠시 언짢았으나, 달리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한 찰나에 노부인이 시킨 일을 하면 걱정을 분산시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겉옷을 걸치고, 시정, 화의와 함께 서원으로 향했다. 하늘은 이미 어두웠으나 침상에서 휴식할 시간은 아니었다. 진약추는 상재청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았을 거라 여겨 미리 알리지 않았다.
서원에 도착하니 예상 밖으로 불은 꺼져 있었다. 진약추는 의아했다. 조 유모가 진약추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셋째 마님, 어떻게 오셨나요?”
“어머니께서 내게 청 동생의 옷감을 건네주라 하셨네.”
진약추는 규방 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어떻게, 청 동생은 이미 잠들었나?”
“네, 네. 아가씨는 요 며칠 몸이 조금 좋지 않아 일찍 잠드셨습니다.”
진약추는 의아했다. 조 유모의 안색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다시 주위 몇 여종을 보니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언가 두려운 것 같았다. 그때, 방에서 은은히 인기척이 들렸으나 그리 또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조 유모의 안색은 더욱 하얗게 질렸다.
진약추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나 상재청에게서 적절하지 못한 부분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재청은 심가 대방을 처리하기 아주 좋은 칼이었다. 더불어 오늘 계속해서 일이 순조롭지 않았으니, 노기를 발산할 기운도 없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심가 대방이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진약추가 여종에게 옷감을 내려놓게 했다. 떠나려던 그녀는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었다. 조 유모가 진약추가 바라보는 곳을 보니 상재청 규방 창문에 작은 향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그 향주머니에는 붉은색 백로가 수놓여 매우 정교했다. 진약추가 걸어가 그 향주머니를 잡았다. 조 유모가 막으려 해도 이미 늦었다.
진약추의 여종인 시정과 화의는 그 향낭을 보자마자 입을 크게 벌렸다.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모의 혼롓날, 진약추는 상재청이 좋은 향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걸 보았다. 그 향주머니는 바느질이 정교해 진약추는 손에서 떼지 못했고, 결국 상재청은 그 향주머니를 진약추에게 주었다. 그 후 진약추는 심모 일로 골치 아파하는 심만이 기뻐할 수 있도록 그 정교한 향주머니를 건넸다. 그 향주머니는 백로가 수놓여 여인의 기운이 드러나지 않았고 연지와 백분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다만 건네기 전, 향주머니 안에 찻잎이 있어 맑은 향을 내는 걸 기억하고는 차향이 너무 썰렁하다 여겨 가을에 보존한 목서나무 꽃잎을 보탰다.
동일한 찻잎은 있을 수 있었다. 상재청은 영리한 데다 손재주가 있으니 같은 향낭을 여러 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주머니 안에 목서나무 꽃잎이 있진 않을 터였다. 진약추는 향낭을 들었다.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녀는 코 아래 향낭을 갖다 대었다. 목서나무 꽃의 시원하고 감미로운 향이 천천히 진약추의 코로 들어왔다. 진약추는 사납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녀의 시선은 얼마나 흉악한지 시정과 화의마저 두려울 정도였다.
진약추는 매섭게 고개를 돌려 조 유모를 바라보았다. 조 유모는 더욱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진약추가 냉소했다.
“모두 날 바보로 여기는 게냐?”
진약추는 빠른 걸음으로 상재청의 규방으로 걸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다.
“마님, 안 됩니다!”
당황한 조 유모가 얼른 막았다.
“어째서 안 되지?”
조 유모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약추의 심장은 쉬지 않고 뛰었고, 머리가 곧 터질 듯 괴로웠다. 그러나 괴롭고 마음이 아플수록 몸에서 내뿜어지는 한기는 점점 짙어졌다. 그녀는 시정과 화의를 향해 외쳤다.
“이 문을 열어라! 부숴버려! 난 간부(姦夫)와 음탕한 계집이 심부에서 염치를 모르고 정당하지 못한 짓을 하는 걸 볼 테다! 부숴!”
시정과 화의는 명령에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즉시 문을 부쉈다. 진약추는 조 유모가 막기 전에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난로는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의상과 신발이 어지러웠고 장신구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침상 위 포개진 두 사람은 방금까지의 일을 말하듯 요염한 모양새였다.
여자의 향기로운 뺨은 붉었고 부끄럽고 난처한 것 같았다. 남자는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침구로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심만이었다.
방 안 가득히 술 향기가 감도니 분명 술에 취해 함께 잔 것이었다. 그러나 실수한 태도가 아니었다. 한 명에게는 정이 있고 또 다른 한 명에게는 뜻이 있었다. 진약추와 심만은 여러 해 부부로 지냈다. 심만이 싫어했다면 상재청은 침상에 오를 수 없을 터였다. 더구나 이곳은 상재청의 뜰이었다. 심만이 온 것이 분명했다.
진약추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넘쳐 흘렀다. 그녀는 거칠게 눈물을 훔쳤다.
“개 같은 연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