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장 (9/71)

41장

밤바람이 불었다. 정경성 몇백 리 떨어진 여관. 사경행이 중앙 탁자에 앉아 편지를 읽은 후, 그 편지를 옆의 화로 안에 던졌다. 편지는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주인님, 대량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폐하께서 서둘러 오라고 재촉하십니다.”

비밀 호위 남기가 말했다. 대량에서 온 편지인데도 사경행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상관 마. 일이 끝나면 당연히 돌아갈 것을.”

“폐하께서는 주인님이 시간을 허비할까 걱정하십니다. 그곳 사람도 명제의 동정에 주의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폐하께서 주인님의 비부터 먼저 정하라 말씀하셨지요. 주인님께서 일찍 못 돌아오시면 일을 그르칠까 걱정하십니다.”

사경행은 남기를 보았다. 남기는 바로 입을 다물었으나 마음속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영락제는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사경행 역시 법도 무시하고 하늘도 꺼리지 않으니 중간에 낀 호위들이 가장 괴로웠다. 더구나 사경행 곁을 따르는 비밀 호위들은 사경행이 심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영락제가 이를 어찌 생각할지는 둘째 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심묘는 명제 사람이니 장군부가 딸을 대량에 시집 보낼 리 없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절대 감히 사경행 앞에서 할 수 없었다. 사경행이 즐겁지 않으면 고한 이는 즉시 탑뢰에 유배당할 테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형님은 종일 한가해서 견딜 수 없나 봐. 진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돌아가 전해. 마음 쓰지 않을 일을 괜히 걱정하지 않도록.”

사경행의 말에 남기가 얼굴 위 땀을 닦았다. 두 명에게 미움을 살 수 없으니 그는 아까부터 덥지도 않은데 땀을 흘렸다. 그때, 철의가 바깥에서 걸어왔다. 그는 방에 들어와서 상자를 탁자 위에 놓았다.

“주인님께서 분부한 장신구는 준비되었고 은표도 보냈습니다.”

철의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장신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남기는 슬쩍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대단히 세밀하고 작은 상자였다. 위에는 꽃무늬가 새겨졌고 자세히 보면 호랑이 머리처럼 보였다.

사경행이 상자를 열어보자, 과연 각양각색 장신구가 가득했다. 묘안석, 진주 머리장식, 벽옥 비녀, 모두 순도가 극히 좋은 것들이었다. 이 상자 하나가 천금의 가치인 셈이었다. 남기는 사경행이 이를 모두 심묘에게 주려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심묘는 보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경행은 이 물건을 보내기로 정한 것 같았다. 남기는 여러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경행이 상자를 닫았다.

“잘했다. 부수의는 최근 동정이 있느냐?”

“별다른 동정은 없고 태자와 더 가까이 지냅니다.”

사경행은 눈을 찌푸렸다.

“잘 지켜봐. 부수의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철의가 대답하고 물러나려 했다. 그때, 사경행이 그를 불렀다.

“심모도 주의해.”

* * *

심부는 요 근래 운수가 사나운지 종일 어수선했다. 심동릉과 심모가 바꾸어 혼인했지만, 왕가는 심동릉을 돌려보내지도 심모를 맞이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심모는 아예 짐을 싸 들고 달아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약추는 상재청과 심만의 간통 현장을 잡았다.

상재청은 심부의 손님이었다. 심 노장군의 은인의 딸이기에 심 노부인만 그녀를 재물을 낭비하는 군식구라고 여기지 그 외 심부 사람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대했다. 게다가 지금 집안을 관리하는 진약추가 그녀를 좋아하니 잘 보여 나쁠 게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의 바르던 상재청이 심만의 침상에 올랐다. 진약추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었다. 진약추는 즉시 소란을 피웠고 송경당으로 가는 내내 입을 다물지 않았다.

송경당. 심 노부인은 높은 중앙 위치에 앉아 있었다. 상재청과 심만은 옆에 서 있었다. 심만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심귀는 이 웃음거리를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상재청은 속눈썹을 드리우며 말없이 조용히 있었다. 매우 부끄러운 것 같았다. 진약추는 눈물을 삼켰다. 절대로 순순히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진약추의 모습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됐다. 울기는. 부군이 아가씨를 거둔 게 뭐라고, 이렇게 울부짖느냐?”

진약추는 소리쳤다.

“어머님! 대인이 이낭을 데려왔다면 저도 예의를 차렸을 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부군을 위해 준비했을 겁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뜰 안, 제 앞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저 혼자 몰랐으니 분명 제 체면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입니다. 어머님, 저는 당신 며느리기에 앞서 여자입니다. 어머님도 같은 여자이니 아시잖습니까. 부군이 첩을 얻겠다면,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게 굴욕을 주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까?”

상재청이 견딜 수 없는 듯 입을 뗐다.

“셋째 부인, 오늘 일은 전부 오해입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거지, 셋째 어른은 조금도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첩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 이 일은 발생하지 않은 거로 하고 저는 내일 짐을 챙겨 심부를 떠날 테니, 부인은 이 일로 셋째 어른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기세등등한 진약추와 달리 상재청은 심만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 그녀 탓이라고 했다. 날뛰는 진약추 곁에 서 있으니 더욱 고아해 보였다. 심만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떠난단 말을 하오? 내가 한 일이니 당연히 설명하면 되오.”

진약추는 상재청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런데 심만이 상채청을 만류하니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했다.

“설명? 대인은 어떤 설명을 할 건가요? 절 쫓아내고 저 여자를 본처로 삼을 건가요?”

진약추는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재청의 코앞에서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너, 이 은혜도 모르는 것! 네가 심부에 온 후 나는 네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했다. 그런데 네가 이런 나쁜 마음을 품고 대인의 침상에 기어오르다니, 정말 뻔뻔하구나! 심신을 유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부군을 건드려? 어쩐지 이런 나이까지 시집을 못 갔다 했어. 이런 사회 기강을 해치는 탕부 같으니! 어느 집안의 정당한 아들이 너를 원할까?”

진약추의 말은 심만을 멍해지게 했을 뿐 아니라 노부인도 얼빠지게 했다. 학자 가문 출신이라고 뽐내던 진약추가 시장 바닥의 몰상식한 여자처럼 욕하니 꼴사나웠다. 분노한 심만은 말을 하지 않았다. 상재청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즐거이 구경하던 심귀가 입을 열었다.

“제수씨, 그 말은 틀리오. 부군이 첩을 얻는 일은 부인이 당연히 도와줘야 하오. 셋째의 뜰 안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도리에 어긋난 일이오. 가까스로 제수씨와 걱정을 함께할 자매가 생겼는데, 어째서 막으려는 거요?”

심귀는 호색가여서 자신 역시 상재청 같은 미인을 총애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동생 심만의 여자이니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심귀는 진약추가 몰상식하게 행동한다며 매우 깔보았다. 임완운도 자신이 첩을 얻는 걸 막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귀가 민감한 부분을 꼬집자 진약추는 다짜고짜 심귀에게도 욕을 했다. 심귀의 말은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둘째 아주버니, 이렇게까지 남 일에 신경 쓰시다니 아주 느긋하신가 보네요! 지금 아주버니 일도 돌보지 못한 것 같은데요. 지금 자손이 끊어졌는데 첩이 열 명, 스무 명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요?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데!”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건 심귀의 약점이었다. 진약추가 심귀의 아픈 곳을 찌르자 심귀는 분노로 얼굴이 검푸르게 변했다. 노부인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노한 그녀가 외쳤다.

“그럼 넌 도대체 무얼 원하느냐?”

“심부에 시집온 지 여러 해가 지났고, 저도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상재청을 쫓아내면 이 일은 발생하지 않은 거로 여기겠어요.”

“그럴 수 없소. 내가 건드렸으니,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 하오.”

심만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른 사람은 다 가능하지만, 저 여자는 안 돼요!”

진약추가 상재청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상재청이 자신을 배반하고 심만의 침상에 기어올랐으니, 결코 참고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치욕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상재청을 잘 알고 있었다. 상재청의 재치는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 미치지 않았다. 됨됨이와 생김새가 모두 좋으니 자신도 이 일만 없었다면 상재청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또한 지금 심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재청을 보호하고 있으니 더욱 위기감을 느꼈다. 여인으로서, 자신은 다른 누구보다 심만의 마음을 잘 알았다. 아마 상재청이 집안에 들어오면 총애가 나뉘는 것뿐 아니라 상재청 홀로 총애받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절대로 이런 강적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왜 안 되오?”

심만이었다. 심만은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온유하고 완곡한 모습을 보이던 진약추가 오늘처럼 몰상식하고 예의 없이 굴자 심만은 감당할 수 없었다. 진약추는 끝내 격정을 폭발시켰다.

“그럼 이혼해요! 저 여자를 받아들이려면 먼저 저와 헤어져요!”

심만은 분노를 수습하기 어려웠다. 진약추는 그 모습에 힘이 생긴 듯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이혼서를 얻으면 전 당연히 두말없이 떠날 거예요. 당신이 누굴 받아들이든 마음대로 해요. 정처로 삼아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각자 행복할 테니까요!”

말과 달리 진약추의 두 눈에서 눈물이 끝없이 샘솟았다.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화가 나 생각 없이 그냥 뱉은 말이었다. 자신과 심만은 어린 시절 부부가 돼서 여러 갈등이 있었어도 오랫동안 화목했다. 자신은 심만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정이 깊으니 지금 상재청에게 일시적으로 매료되었어도 상재청 때문에 자신과 이혼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심만에게 조금의 정이 남았을지도 모를지언정 노부인은 그러지 않았다. 진약추는 노부인을 생각하지 못했다. 노부인은 냉소했다. 그녀는 어릿광대를 보는 것처럼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연을 끊어? 넌 머리를 잘못 쓴 것 같구나. 셋째가 네게 절연서는 못 써줘도 이혼서는 써줄 것이다!”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상재청은 말을 삼켰다. 진약추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부인에게 따졌다.

“무슨 이유로 제게 이혼서를 준다는 말인가요?”

노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무엇 때문이냐고? 셋째가 널 아내로 맞았으나 삼방에 다른 여자는 없었다. 첩실은 말할 것 없었지. 넌 주모로서 남편을 위하지 않고 질투만 했지. 그러나 셋째는 마음씨가 너그러웠다. 그래서 나도 셋째 집안일에 손대지 않았지. 그러나 너는 심부에서 근 20년을 있으며 아들을 낳아주지 못했다. 내가 물어보마. 정경성 안 어느 집안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도 모자라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하게까지 하는 부인을 그냥 두더냐? 넌 우리 심가의 대를 끊고 싶은 거냐? 넌 질투하고 아들이 없으니, 칠거지악 중 두 가지를 어겼다. 그러니 네게 이혼서를 주기 충분하다!”

노부인은 이렇다 할 예의를 차릴 줄 몰랐다. 달리 말하면 논쟁할 때 웬만해서는 손해 보는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욱이 그녀는 진작부터 진약추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 최후에는 진약추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진약추와 심만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모든 과실은 전부 진약추의 것이 되었고, 여러 사람이 모인 앞에서 그녀는 성토당했다. 진약추는 무력감이 솟았다. 줄곧 심만의 마음을 꽉 잡았다 여겼다. 한평생 그와 금실 좋은 부부로 지내리라고도. 그러나 지금 심만이 상재청을 보호하는 태도는 매섭게 따귀를 때리는 듯했다. 진약추는 완전히 자신을 잃었다.

심만도 다른 남자와 다르지 않는구나. 그 역시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진약추는 자신도 다른 여인과 다르지 않아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젊은 아가씨에게 양보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이 먹고 용모가 처져도 아들이 있다면 집안을 돌보는 주모 위치에 앉아 있을 수 있으나 자신은 아들이 없어 이 위치를 지키기도 아슬아슬했다.

노부인이 상재청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셋째가 너를 건드렸으니 심부는 당연히 책임을 질 것이다. 상재청 소저의 집안에는 어른이 없으니 자네가 동의하면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를 허한다. 귀한 첩이 되어, 부 안의 불운을 기쁜 일로 없애다오.”

노부인은 일부러 상재청을 귀한 첩이라 불러 진약추의 체면을 떨어뜨렸다. 진약추는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쪼글쪼글한 얼굴 위로 아주 빠르게 비웃음이 스쳤다. 진약추는 그 웃음기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자신은 노부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다. 그녀가 그동안 신경 쓰지도 않던 상재청을 챙긴 것에는 역시 다 꿍꿍이가 있었다. 근래 자신은 심모에게 마음을 쓰느라 다른 것은 돌볼 틈이 없어, 상재청과 심만의 내막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노부인도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전부터 심만에게 첩을 얻어주려 했고, 상재청과 심만의 왕래를 발견해 매우 기뻐하며 일이 반드시 성사되도록 조장했을 터였다. 아마도 오늘 이 국면을 위해서일 것이다. 노부인은 상재청을 부 안에 들이겠다고 선포해, 자신을 더욱 절망적인 처지로 몰아갔다. 진약추는 노부인에게 끝없는 원한이 샘솟았다. 진약추는 이를 갈았다.

“이렇게 치욕을 주시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부는 나날이 쇠락해갔지만, 명성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만큼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좋은 일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나쁜 일이 생기면 천리만리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심부는 요 며칠 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심부 삼방이 이혼한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심귀는 원만한 성격이나 너무 여색을 밝혔고 일 처리가 불분명했다. 그렇지만 심만은 심귀와 달리 명예를 중시해 세속에 물들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어울려도 흥청망청 놀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가 처세술이 풍부하고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했다. 여러 해 경험을 쌓으면 더욱더 지위가 높아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더구나 관가 부인들 사이에서 심만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심만이 아내와 딸을 매우 총애하고 후원에 다른 여인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원 때문에 속앓이하는 관가 부인들이 많기 때문에 진약추는 그동안 그들의 질투와 흠모를 함께 받았다. 매일 부군을 만날 수 있는 관가 부인은 드물었다.

그런데 심모가 출가하자마자 진약추와 심만이 이혼하려 했다.

“셋째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서래. 지금 심부에 손자가 하나도 없는데, 대가 끊어지게 둘 순 없잖아. 이방은 첩도 많이 두긴 했지만, 어쨌든 아들을 두 명이나 얻었잖아. 그런데 삼방은 지금까지 아들이 하나도 없으니 조급할 거야. 삼방을 탓할 수만도 없어.”

“삼방도 지위가 있는데 이런 큰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다면 애석하지.”

“셋째 부인은 제구실을 못 한 거야. 아들을 낳지 못하고선 첩도 받지 못하게 하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 평범한 백성도 절대 그러지 못할 거야. 삼방이 오래 참은 거야.”

“첩도 못 얻게 하다니. 쯧, 이렇게 덕이 없고 질투 많은 부인을 둔 데다 아들도 없다니 삼방이 정말 불쌍하군.”

온 정경성이 모두 심만의 편이었다. 평소 진약추는 정경성에서 이름난 재녀이자 학자 가문 출신으로 귀족 부인 사회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부인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이번에는 그녀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했다. 심만과 진약추 사이를 샘내던 사람들도 그들의 행복이 깨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즐거워했다.

심부 추수원. 진약추는 백자 꽃병을 던졌다. 꽃병이 부서져 바닥에 조각이 가득했다. 진약추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탁자 위에 있던 찻잔도 바닥으로 내던졌다. 시정과 화의는 숨을 죽이고 진약추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진약추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염치없어, 염치없어! 간부와 음탕한 것이 날 핍박하더니, 내가 잘못했다고? 우습구나! 어리석어!”

소문은 진약추에게 불리했다. 게다가 늘 체면을 차리며 학자 가문 출신의 규수라고 유세를 부렸기에 아들을 낳지 못했으면서도 질투만 많은 몰상식한 여자라는 사람들의 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 천한 것이 함부로 떠들고 다닌 거야.”

진약추는 이를 갈았다. 울컥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 삽시간에 퍼졌다. 진약추는 자신이 세게 나가면 심만도 놀라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소문이 돌면서 자신과 심만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진약추는 무엇보다 심만이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일 믿기지 않았다.

“분명 그 천한 것이 대인을 부추긴 거야!”

진약추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깊게 찔렀다. 심 노부인은 일부러 상재청을 밀어주면서 진약추와 맞서게 했다. 심모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고 심만은 상재청에게 빠졌다. 심부 안에 자신 옆에 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약추는 분노로 온몸이 떨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온 정경성이 자신을 도리에 어긋난 사람으로 여기자 두려워졌다. 자신이 철저히 혼자임을 깨닫자 짙은 무력감이 엄습했다.

“마님, 지금 노부인 마님께서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화의가 눈치를 봤지만 더는 미룰 수 없어 진약추에게 물었다. 진약추는 상재청을 첩으로 들이는 것도, 심만과 이혼을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심부에서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심만에 대한 사랑은 점점 증오로 변했다. 진약추는 사납게 일어나 냉소했다.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쉬울까? 심부가 날 모욕했는데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물건을 챙겨라, 진부로 돌아가겠다!”

* * *

진약추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진가의 주인은 전군리(典軍吏)로 명제 궁중의 크고 작은 문서들을 보수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평소 책을 많이 읽었다. 게다가 진 대인은 장원으로 조정에 들어간 사람으로 능력이 뛰어났다. 이에 진약추는 본인 스스로 학자 가문 출신임을 으스댔다.

진약추와 심만의 혼인은 진가와 심가가 인척 관계를 맺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정치적인 선택이 아니라 심만이 진약추를 택한 결과였다. 진 대인은 잘못을 두둔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족의 명성을 매우 중시했고 더욱이 스스로 고결하다 여겼다. 진약추와 아주 비슷했다. 그래서 ‘진약추가 이혼을 당할 것이다’, ‘진약추가 질투가 많다’라는 소문을 들은 진 대인은 몹시 불쾌했다. 진가와 심가의 불분명한 쟁론이 시작되었다.

장군부. 경칩은 심묘에게 진약추가 친정에 갔다고 전했다. 심묘는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며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지금 셋째 마님은 이미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셋째 마님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기세입니다. 소문의 출처가 아가씨인 게 밝혀지면……. 어떡하지요?”

시장 안에 소문을 낸 사람은 상재청도, 심만도, 심 노부인도 아니었다. 바로 심묘였다. 심묘는 삼방과 함께 지냈기에 진약추가 스스로 고결하다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약추는 심만을 깊이 사랑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이번 일은 심만과 상재청의 간통 사건을 알고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조금만 생각해보면 해결법은 간단했다. 그녀가 심만 앞에서 억울한 기색을 보이면 심만이 옛정을 생각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상재청이 시집을 온다 해도 진약추에게 힘이 실리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진약추의 화를 돋워 심만과의 관계에 기름을 끼얹는 게 좋았다. 무서운 복수심은 사고를 만들고도 남는다. 심묘의 예상대로 진약추는 소문이 퍼지자 그 즉시 친정으로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쌍방의 마음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깨졌던 거울을 다시 붙이는 건 이야기책 속에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손안에서 가지고 노는 건 아무리 그 사람이 원수라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불현듯 미 부인이 자신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이 지금 자신이 진약추에게 품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걱정하지 마. 그리 쉽게 찾아내지 못할 거야.”

심묘는 이 일을 풍선전당포에 맡겼다. 은자를 넉넉히 줬으니 계우서는 잘 처리했을 것이다. 풍선전당포는 정경성에서 장사한 지도 오래되었고, 일 처리만큼은 완벽했다.

경칩이 바깥 창문이 닫히지 않은 것을 보며 일어나 닫으려 했다.

“곡우는 어째서 창문 닫는 걸 잊은 걸까요. 이 추운 날씨에 찬 바람이 들어와 아가씨가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려고.”

“잠깐.”

심묘가 경칩을 불렀다.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방 안이 너무 답답하니 바람이 통하게 두거라. 이따가 내가 닫으마.”

경칩은 심묘의 단호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은 탁 트여 전혀 답답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등불의 심지를 자르고 물러났다.

“아가씨도 일찍 쉬세요.”

심묘는 작게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등불을 들고 일어나 침상으로 걸어가려 했다. 반쯤 다가갔을 때, 불꽃이 튕기듯 사납게 흔들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우스갯소리와 함께.

“날 위해 특별히 창문을 열어둔 거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바로 자려는 거지?”

나른한 목소리에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창문가에서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사경행이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도 사경행의 매력적인 광채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듯한 심묘를 살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심묘의 등불을 거두고 탁자 앞에 앉았다. 마치 이곳이 그의 방인 듯, 물 흐르듯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돌아온 거예요?”

“쯧.”

사경행이 그녀를 주시하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왜? 내가 보고 싶었느냐?”

그의 가볍고 모호한 말에 익숙해진 심묘는 아예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에 앉았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약추의 일, 잘했다.”

심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이번 일도 벌써 알았군요.”

사경행의 첩자는 정경성에 두루 퍼져 있었다. 더구나 풍선전당포의 계우서는 사경행의 사람이다. 심묘가 계우서에게 소문을 퍼뜨려달라 했으니 계우서가 사경행에게 바로 보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상재청이 정경성에 왔을 때 보인 네 행동이 이제야 이해되는군. 정말 수단이 악랄해.”

사경행이 중얼거리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감상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말투에 참과 거짓이 절반씩 섞인 말이었다. 심묘는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무언가 생각난 듯 상자를 꺼내 그녀의 품으로 슬쩍 던졌다.

심묘는 자칫 그 상자에 맞을 뻔했다. 상자는 크지 않았지만 꽤나 무거웠다. 상자 바깥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은, 큰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 천진난만해 보이나 어금니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는 모양은 매우 사납고 흉악했다. 사경행이 기르는 그 ‘교교’라는 백호가 생각났다. 심묘는 마음속의 분노를 누르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자 색채가 아름다운 다양한 물건에 눈이 어지러웠다. 상자 안은 정교하고 화려한 장신구로 가득했다. 어느 것 하나 저렴해 보이는 물건은 없었다. 이 장신구를 자신에게 왜 주는지 이해하지 못한 심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난 장신구가 필요 없어요.”

“이것들 모두 힘들게 구한 거야. 너는 왜 장신구를 차지 않는 거야?”

“풍선전당포에 맡길 수 있겠네요.”

심묘의 말에 말문이 막힌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은자가 부족해?”

“은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일 처리에는 은자가 필요하니 지금 많다 해도 나중에 궁핍해지기 십상이에요.”

심묘는 사경행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자 마음히 편해져 사실대로 말했다. 사경행은 수완이 비상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었다. 사경행이 소매 안을 더듬어 옥패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이것은 금옥전장(金玉錢莊)의 행령(行令)이야. 이것을 가져가면 얼마든 은자로 바꿀 수 있어. 그런데 참 안목도 없구나.”

사경행은 그 옥패를 심묘에게 던져주고 조금 불만인 듯 한 소리 했다. 전생에 황후였던 심묘는 적잖은 금은보화를 보았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견문도 많이 쌓았다. 그런 자신에게 안목이 없다니, 심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심묘는 옥패를 잡았다. 어떤 옥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매우 윤기가 나고 투명했다. 만지면 뼛속까지 차가워질 정도였다. 사경행은 쓸데없이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 옥패는 정말 금옥전장의 은표였다. 금옥전장은 명제에서 가장 큰 금융기관으로 황실 사람들도 왕래할 정도였다. 심묘는 옥패를 사경행에게 다시 건넸다.

“공로 없이 녹을 받을 수는 없어요.”

사경행이 흥미로운 듯 심묘를 주시했다. 그가 심묘에게 상자를 가리켰다.

“정말 기개 있군. 하지만 보통 장신구가 아니야. 다시 봐봐.”

심묘는 의심스럽다는 듯 반지 하나를 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반지의 고리 부분에 조금 기이한 것이 끼워져 있었다. 그 안쪽에 단추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경행을 보았다.

“이게 뭐예요?”

사경행이 웃었다.

“암살 무기.”

“암기?”

심묘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확인차 누르려 했다. 그러자 사경행이 잽싸게 막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등 뒤로 가 어깨를 둘러싸며 반지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이 안에 침이 있어. 독침이 있으니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 평범한 사람이 침에 맞으면 잠시 기절할 테니 세 치 정도 떨어져 있을 때 쓰면 유용해. 함부로 쏘지는 마. 그리고 비녀 안에는 독 가루가 있어 상대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어. 강도를 만났을 때 사용해. 팔찌 안에는 칼날이 숨겨져 있어. 힘껏 당겨 열면 작은 칼이 나와. 끈에 묶인다면 이걸로 밧줄을 잘라. 팔보 귀걸이 안에는 호루라기가 있으니 정말 긴급할 때만 불어. 정경성 곳곳에 내 사람이 있으니 이 소리를 들으면 널 구하러 갈 거야.”

그는 하나하나 세심히 심묘에게 설명했다. 평소의 가벼움은 보이지 않고 매우 진지했다. 그가 긴 속눈썹을 드리우면 왜인지 자신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가 아름다운 눈을 절반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면 가슴이 봄철에 흐르는 물처럼 출렁거렸다.

심묘는 조금 더웠다. 창문은 분명 열려 있는데 방 안이 갑갑했다. 사경행이 몸을 구부려 고개를 숙일 때마다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심묘는 등 뒤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고개를 틀어 보니 사경행의 입꼬리가 아름답게 올라가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시선을 돌렸다.

넋이 나간 심묘를 발견한 사경행은 불만스러웠다. 그는 심묘의 머리를 살짝 만졌다.

“집중해.”

심묘는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평온한 척 말했다.

“모두 보았고 기억해요. 앞으로 연습하면 됩니다.”

사경행은 또 한번 입가를 올렸다.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어?”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고개를 숙이고 심묘를 보고 있어서 하마터면 그와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당황한 심묘의 뺨이 붉어졌다. 사경행의 외모는 출중했다. 선인지 악인지 판단할 수 없는, 짓궂고 냉소적인 사경행의 도화 눈과 마주칠 때마다 환각이 보이는 듯했다. 봄비가 내려 하루아침에 붉은 꽃이 곳곳에 피어나는 장면이 선명했다.

사경행이 소리를 낮춰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한 미주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심묘의 머리카락을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의심스러움과 천진함을 섞은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얼굴을 붉히는 거지?”

심묘가 일어나 두 걸음 걸었다. 그녀는 사경행을 등지고 섰다.

“방이 너무 답답해서요.”

심묘는 사경행의 눈 속에 스친 웃음기를 보지 못했다.

“아무 공로 없이 녹을 받아 부끄러워서? 그럼, 과자를 만들어줘. 난 이렇게 많이 주고도 보답을 못 받았는데, 누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다니 정말 불공평하구나.”

“뭐라구요?”

심묘는 사경행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사경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오늘 네게 암기를 주러 온 거야. 어때. 이런 물건은 네 마음에 들 거 같은데?”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삶은 칼날 위를 걷듯 위태로웠다. 지금은 장군부가 보호해주고 있지만, 어느 날 장군부마저 힘을 잃으면 스스로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상자 안에 가득한 장신구 모양의 암기는 보물과도 같았다. 사경행은 확실히 자신을 잘 알았다. 전생에 배랑이 진정한 적수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 했는데 과연 맞는 말이었다.

사경행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넌 심모의 행방을 아느냐?”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심부가 심모의 종적을 찾지 못하는 것은 심부에 첩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약추의 사람도 지금까지 심모를 찾지 못했다. 자신도 일찍이 사람을 보내 심모의 행방을 찾았으나 성과가 없었다. 정경성이 크다지만 누가 납치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못 찾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심모는 바깥에서 며칠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게 눈에 훤하니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당신은 심모 언니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심모는 진국 태자부에 있어.”

사경행이 간 뒤 심묘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녀는 다시 침상에 앉았다. 작은 탁자 앞에 있는 등불이 곧 꺼지려 했다.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심모가 진국 태자부에 있다니. 그녀와 황보호가 만났다는 것이다. 근래에 너무 많은 변수가 생겼다. 심모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진국 태자부로 들어간 심모에게 또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상자 안에 있던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껴보았다. 비취색 쌍가락지가 손가락을 그림처럼 가늘고 희게 보이게 했다. 심묘는 차가운 옥 장식이 조금 뜨거운 것 같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듯 느껴졌다.

심묘는 초조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뒤 상자를 닫았다. 상자 옆에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옥패가 놓여 있었다. 금옥전당의 행령. 분명 도로 건네줬는데 사경행이 몰래 다시 이곳에 넣어둔 것이었다.

은자를 이렇게 대범하게 남에게 주는 사람을 본 적 없는 심묘로서는 대량 영락제가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옥패를 잘 거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경행을 만나면 이 물건을 다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야심한 무렵, 진국 태자부에서 한 여자가 거울 앞에 앉아 단장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앉은 여자는 꽃다운 나이였다. 그녀는 매우 예쁘게 생겼고 학자 같은 분위기를 발산했다. 특별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하얀색 중의를 입고 거울과 마주했는데, 미인의 표정은 음산했다. 심부에서 실종된 심모였다.

심모도 자신이 진국 태자부에 머무르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원래는 서둘러 정왕부로 가려고 했다. 심모는 부수의가 온화한 군자이고, 자신의 심가 삼방 적출이니 그가 자신을 외면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자신의 미모가 출중하고 금기서화는 물론 재치까지 뛰어나니 돌 같은 사람도 마음이 흔들릴 거라고도. 부수의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면 그의 연민과 사랑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혼자서 부를 나온 적 없는 그녀가 정왕부의 위치를 알 리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위치를 물으려고 해도 심부의 추적이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정경성에는 언제나 심모 같은 여인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여인들은 대부분 혼인을 피해서 혹은 잘못을 저질러 도망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자가 혼자 다니면 눈에 띄기 쉬웠다.

결국 심모는 불량배의 눈에 띄고 말았다. 그는 외진 골목에서 그녀의 짐을 빼앗고, 그녀의 순결도 뺏으려 했다. 위급한 상황에 닥치자 그녀는 부득이하게 자신이 위무대장군의 질녀라 말했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 불량배가 더 이상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친인 심만보다 심신의 명성이 더 높기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쨌든 심신의 이름을 외쳤다. 게다가 지금 심신은 정경성에 돌아와 문혜제의 신임까지 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때, 심모의 외침을 들은 지나가던 사람이 그녀를 구해주었다. 심모는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진국 태자부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 뒤, 심모는 황보호를 만났다.

심모는 조공연회에서 황보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신분이 고귀해 심모는 감히 관례에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황보호가 도와준 거라 여긴 심모는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황보호는 그녀에게 매우 흥미 있는 듯, 정확히 말해 심묘에게 아주 흥미로운 듯 심묘와 관련된 일만 캐물었다.

심모는 황보호가 심묘를 마음에 둔 것 같아 질투가 났다. 어쨌든 황보호는 진국 태자니 언젠가 진국 황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심묘에게 흥미를 보이니 만약 둘이 이어진다면 언젠가 그녀가 진국의 황후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단 측비가 되면 귀비가 될 수도 있으니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심모는 심묘의 단점만 늘어놓았다. 심묘가 재는 걸 좋아하며 덕이 없는 여자라 깎아내렸다. 심모가 말을 마치자 황보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덕분에 심모는 크게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황보호가 심모를 돌려보내려 할 때, 심모는 심만이 진약추와 이혼하려 해 진약추가 분노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모는 노여움을 참을 수 없어 당장 심부로 돌아가 어머니를 대신해 정의를 찾아주려 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면 심만이 왕필에게 시집 보낼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심만과 심 노부인은 자신의 일로 대단히 분노했기 때문에 돌아가 봤자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모는 어떻게 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약추가 당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도 없었다. 만약 진약추가 이혼하면 장래 심부에서 자신이 설 곳이 없어질 것이다.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황보호는 진국 태자로 권세가 높으니 그가 손을 쓰면 이 모든 일은 깨끗이 해결될 터였다. 심모는 황보호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자신은 반드시 진국 태자부에 남으리라고, 심부의 뜻대로 시집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 * *

며칠 동안 눈이 내린 뒤 하늘이 활짝 갰다. 심묘는 심구가 보내준 병서에 곰팡이가 필까 봐 뜰 안에서 햇볕에 깨끗이 말렸다. 경칩과 곡우는 곁에서 이불을 말렸는데 경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진부와 심부의 소송 때문에 매우 떠들썩하네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 이렇게 오래 끌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어요.”

“어떤 결과가 있겠어? 양쪽 모두 죽도록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 못 들을 거야. 집안 분쟁으로 소송이라니, 정말 웃긴 일이야.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일찍 분가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분명 연루됐을 거야.”

곡우는 경시의 빛을 숨기지 않았다.

진약추의 친정과 심부가 소송에 들어갔다. 진 대인은 완고한 성격의 늙은이로 대단히 체면을 차리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았다. 진약추는 이미 출가했으나 진 대인은 그녀의 명예를 유지하고 보호하려 했다. 딸자식을 아껴서가 아니라 심부가 진부를 경시하는 것을 참고 넘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진약추의 모친도 대단한 기여를 했다. 그녀는 말 몇 마디로 진 대인의 마음을 움직여 심부에 소송을 걸게 했다.

진부는 진약추가 심부에 시집간 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심만을 위해 가업을 처리했고 심만에게 첩을 주려 했으나 심만이 거절했다고 했다. 진약추가 심부에 시집간 지 오래되었으니 그녀가 교양 있고 온화한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내력 불명의 여자를 위해 심만이 이혼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심부는 진약추가 주모로서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흠이 크다고 비난했다. 그런 데다 자손 번창을 위해 첩을 들일 생각은커녕 남편이 여인을 들이려는 것마저 막으려 하니 질투가 심하다고 강조했다.

한쪽은 시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하다고 말하고, 한쪽은 며느리가 불효한다고 말하니 정말 웃긴 일이었다. 정경성 사람들은 이 일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이런 소송은 매우 드물기에 관아에서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는 사실 핑계였고 진 대인은 전군리이고 심만의 직위도 낮지 않으니, 양측 모두에게 미움을 살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시간을 질질 끈 것이었다.

소송 중 진약추와 심만의 연은 정말 되돌릴 수 없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조정 대신인 심만이 집안일로 소송을 벌였으니 종일 빈둥거리는 어사에게 일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에 심만의 벼슬길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 와중에 상재청이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재청의 임신은 공교로웠다. 그녀는 이 중요한 때 임신을 해 진약추를 회생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심만은 오랫동안 진약추를 총애했으나, 그가 정말 아들을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상재청이 아들을 낳는다면 그는 대를 이을 수 있다. 그래서 심만은 볼수록 상재청이 더 마음에 들었고, 진약추에게는 정이 떨어져 아예 본체만체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관아 대인에게 은자를 뇌물로 주는 것을 잊지 말거라.”

곡우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물었다.

“아가씨, 셋째 주인어른을 도우시려는 건가요, 아니면 셋째 마님을? 은자는 어느 쪽을 위한 뇌물인가요?”

심묘가 곡우에게 관아 대인에게 뇌물을 주라고 했는데 그들은 심묘의 편지를 볼 수 없으니 심묘가 도대체 누굴 도우려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일에 끼어들지 않을수록 좋은데. 그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닌걸.”

곡우가 작게 중얼거렸으나 심묘의 귀에 들렸다. 심묘는 입을 열었다.

“누구도 아니다.”

<9권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