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9권
42장
관아와 의원은 돈을 많이 쓰는 곳이다. 소송은 더더욱 은자가 많이 들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은 소송을 잘 하지 않고, 하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곤 한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집안은 대다수 얼마간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오래 끌수록 승소했을 때 은자를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묘는 전생에 부수의가 이 수완을 이용해 조정 신하를 처리하는 걸 보았다. 그 신하는 주왕의 사람으로 부수의는 그를 소송에 말려들게 해 가산을 탕진시켰다. 심묘는 심만과 진약추, 그 두 사람이 전생에 전심전력으로 심가 대방을 모함한 걸 생각하면 둘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부수의의 방법을 써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은자를 써서 관아에서 이 사건을 끝까지 끌고 가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심부와 진부가 가산을 탕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양가는 세력이 크게 상해 추후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심만과 진약추 두 사람은 체면을 차리는 사람들이니 재결합할 가능성을 아예 뿌리째 뽑을 수 있을 터였다. 자신들의 품격이 우아하다고 자찬하길 서슴지 않던 부부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심묘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임신한 상재청이 떠올랐다. 전생에 그녀가 나설안의 죽음에 어떤 공을 세웠는지 알았으니 합당한 상을 줘야 할 차례였다. 심묘는 견딜 수 없어 냉소했다.
“모경에게 유주로 가서 사람을 찾게 하거라.”
유주에는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있었다. 전생에서는 그녀가 나설안을 해친 뒤 아무 걱정 없이 풍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내막이 밝혀졌으나, 지금은 자신이 나서서 내막을 밝힐 계획이었다. 삼방은 이 한 편의 희극으로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게 될 터였다.
심묘가 심가 삼방을 위한 계략을 꾸밀 때 심만은 정왕부 안에 있었다. 황위 쟁탈로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심만은 그 나름대로 영리하게 처세를 잘하며 자신의 소속을 정하지 않았다. 태자는 정통성이 있으나 허약했고, 주왕은 총애받는 모친을 등에 업었으나 일 처리가 건방졌다. 리왕은 인맥이 넓으나 문혜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왕은 유일하게 황위에 관심이 없는 듯, 전장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심만은 정왕, 부수의가 결코 황위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심신이 분가하기 전, 부수의는 자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물론 그때 자신은 부수의가 심신의 병권을 노리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선택지가 많았던 당시에는 머뭇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그 뒤 부수의는 그의 뜻을 이해한 듯 처음처럼 포섭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그때처럼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심신이 소춘성에서 돌아온 뒤 삼방은 연이어 불행한 일을 당했다. 높은 자리는 점점 요원해지니 하루하루 불안해졌다. 줄을 서려 해도 이젠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없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 순간 부수의가 생각났다.
지금 심부는 쇠퇴해 이전만 못하기에 자신이 관직과 영화로운 생활을 보존하려면 후원자의 힘이 필요했다. 게다가 상재청은 곧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줄 것이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구하는 법이며, 커다란 부귀에는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다. 중용을 지키던 심만은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다.
그래서 심만은 정왕부로 향했다. 결국 순종을 택한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결정했다면 심모가 심동릉과 바꿔 혼인할 필요도, 부에서 도망칠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 오히려 심모가 부수의의 마음을 농락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심모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자신과 진약추 역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상재청도 임신하지 않았을 테니 자신이 부수의에게 몸을 의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세상일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잘못되지 않는다. 운명은 사람을 가지고 놀길 좋아하니까.
* * *
부수의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심만에게 차를 올리도록 했다. 사양하는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부수의의 웃는 얼굴은 온화했다.
“심 대인, 집안일로 바쁘실 텐데 오늘 갑자기 방문한 건 무슨 일이신지?”
심만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지금 자신과 진약추의 일로 조정도 의견이 분분했다. 동료들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자신에게 쓰라린 상처였다.
“소신은 전하께 충성을 다하길 원합니다.”
심만의 말에 부수의는 웃기만 했다. 그가 심만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청에는 그들 두 사람과 남종만 있었다. 침묵은 점점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심만의 이마가 천천히 식은땀으로 젖었다. 그의 온몸이 땀에 젖었을 때 부수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위무대장군은 이미 부를 떠났는데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심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과연 부수의는 심신을 노렸다. 심만은 이방이 쇠락하기 전 심원이 부수의의 일을 처리했다고 추측했다. 부수의가 심원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도 알 만했다. 부수의는 심원이 어릴 때 거뒀으니 오직 재능이 꽃피기만을 기대했다고 볼 수 없었다. 심원은 아마 심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관찰한 바를 문서로 써 보냈을 것이다.
그 뒤 심원이 죽었으니 심원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나 마침 심신도 소춘성으로 가버려 감시가 필요 없어졌지만, 심신은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정경성으로 돌아왔다. 심신은 부수의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분명했다. 심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를 떠났으나 아무래도 형제의 정은 가를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분부하시면 소신은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좋소. 난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하오. 심 대인의 능력을 믿겠소. 근래 한 가지 일이 있는데 심 대인이 오늘 왔으니 다른 사람을 고생시킬 것 없지. 심 대인이 잘 처리할 거라 믿겠소.”
심만은 불안했다. 부수의는 분명 자신에게 곤란한 과제를 주려는 것이다. 일을 잘 처리하면 당연히 부수의의 사람이 될 테고,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즉시 버려질 것이다. 수족이 자신의 이용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주인에게 정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반드시 감당해야 했다. 이 거래에 응하기로 심만은 결심했다.
“전하, 분부 바랍니다!”
부수의의 시선에 만족이 어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네. 심 장군이 보물처럼 사랑하는 적출 딸 심 소저가 혼인할 나이라지.”
심만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해 부수의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을 때, 부수의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때때로 다른 황자와 조정 대신들이 심묘의 이야기를 꺼내면 성가셔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처럼 아둔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황자에게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심만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묘는 외모가 수려해진 것은 물론, 성격까지 더 진중해져 종전의 아둔한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정경성에서 가장 조건이 좋은, 높은 지위의 여인이라 칭할 수 있었다. 부수의가 그녀를 아내로 삼으면……. 지금 심가 대방과 앙숙이나 다름없으니 그녀가 득세하면 자신은 핍박당할 게 불 보듯 뻔했다.
심묘가 더 높은 데 오르면, 대방은 날개를 하나 더 다는 것과 같았다. 그럴수록 심만 자신의 입지는 더 위험했다. 부귀영화는커녕 자리 보전도 어렵게 될 터였다. 그러니 절대로 심묘가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먼지처럼 낮아지길 바랐다. 심만은 떫은 기색을 겨우 억누르고 물었다.
“전하, 심묘와 혼인하시려 하십니까?”
부수의는 크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아니라 나의 형님일세.”
심만은 멍해졌다. 부수의의 목소리가 천천히 그의 귓가에 닿았다.
“심 소저가 나의 넷째 형님 주왕에게 시집가도록 해주게.”
심만은 깜짝 놀랐다. 부수의의 말을 이해한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심묘는 심신의 적녀였다. 남에는 사가가 있고, 북에는 심가가 있다는 말처럼 심가는 명제에서 병권을 지닌 명문세가였다. 더욱이 지금 사가는 이미 쇠락했으니 심가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심묘와 혼인하는 상대는 설령 본인이 원치 않는다 해도 명제에서 가장 큰 병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권력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었다. 심묘는 운명적으로 권세 높은 사람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의심 많은 문혜제가 더욱 경계할 게 뻔했다. 그러니 심묘는 명검이지만 손잡이가 없어 잡는 이도 다치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양 가문이 재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심묘는 능력 없는 사람과 혼인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러나 또 그래서는 그녀를 억울하게 희생시키는 셈이니 심신은 지금까지 혼사를 결정하지 못했을 터였다.
지위 높은 사람일수록 잃을 게 많은 법. 황자들은 감히 심묘와 혼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태자는 정통성이 있으니 조금 나으나, 다른 황자들은 심묘와 혼인하면 용좌에 앉고픈 야심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무거운 저울추는 복처럼 보이지만 실은 화였다.
현재 황위 쟁탈 중 가장 우세한 쪽은 주왕 부수안 일파였다. 주왕 부수안의 친모 서현비는 문혜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부수안 자신도 능력이 있었다.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추종자도 점점 늘었다. 심묘와 관계되면 부수안은 더욱 강력한 위협이 될 테니 문혜제가 불만을 품고 두려워할 것이 명백했다. 다른 황자들도 힘을 합쳐 가장 먼저 쓰러트리려 할 터였다. 부수안은 아주 처참하게 탄압당할 것이다. 장군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진국과 대량 사람이 떠나자마자 장군부의 사람들은 아주 처참하게 몰살당할 것이다.
부수의의 생각이 너무 깊고 매서워 심만은 그가 두려웠다. 부수의는 심만의 표정을 보지 못한 듯 온화하게 웃었다.
“일은 전부 심 대인에게 맡기겠네.”
심만은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부수의는 어디까지 맡기겠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수안에게는 이미 주왕비가 있기에 심묘가 시집가게 된다면 측비일 뿐이다. 심만은 자신은 없었으나 부수의에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소신이 온 힘을 다 기울이겠나이다.”
두 사람이 몇 마디 인사치레를 더 나눈 후 심만이 일어섰다. 부수의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담하지도 열정적이지도 않았다. 이전이었다면 부수의는 심만을 환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부는 세력이 이전만 못했기에 그는 부수의의 중요한 바둑알이 되지 못했다.
심만이 정왕부를 떠난 뒤, 배랑이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심만이 입만 댄 찻잔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전하, 심만을 사용하시려 합니까?”
부수의는 배랑에게 되물었다.
“선생은 심만을 어떻게 여기시오?”
배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숨긴 수완은 있으나 단호함이 부족합니다. 집안일이 혼란스러우니 장래 말썽을 일으킬 겁니다. 작은 일을 맡기는 건 가능하나 큰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부수의는 미소 지었다. 배랑를 향한 시선에 칭찬이 가득했다.
“내 생각도 선생과 같소. 그러나 사가 형제가 죽은 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없어 번거롭던 차였소. 사가 형제는 중요한 패는 아니었지만 쓰기도 전에 스스로 망가졌으니 아쉽긴 하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심만을 중용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부수의의 웃음은 기이했다.
“기회주의자를? 오락가락하다가 갈 곳이 없어지자 내게 의탁하려 하다니, 이렇게 심지 없는 사람은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오. 선생의 말처럼 작은 일을 시키기에 편할 뿐이지.”
“심 대인이 주왕 전하와 심묘를 이어줄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성공할지 못 할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이 일은 심만의 유일한 기회요. 살아남고 싶다면 반드시 이뤄내야 할 테요. 장군부는 공이 높고, 주왕은 홀로 커져 있으니, 지금 손쓰지 않으면 늦소. 걱정거리를 더할 필요는 없지.”
배랑은 더 말하지 않았다. 부수의가 갑자기 말했다.
“내가 심묘와 혼인한다 하면,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배랑은 심장이 매섭게 뛰었으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한 모습이었다.
“좋지 않을 겁니다. 폐하께 경계심을 일으키고 다른 황자 전하께는 두려움을 가져오겠지요.”
부수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조금 안타까운 듯했다.
“애석하군.”
말속의 의미는 확실치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애석하다는 것인지 곰곰이 반추해도 아리송할 뿐이었다. 부수의는 심묘에게 다른 감정은 없는 듯했다. 다른 감정이 있었다면 애초 심묘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걸 온 정경성이 알았을 때 그렇게 냉담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심묘를 조금이라도 두둔했다면 유언비어가 그렇게 곳곳에 퍼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부수의가 떠난 뒤 배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하인들이 곁에 없을 때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
* * *
오늘밤 예왕부는 스산했다. 하인들의 표정도 전부 무거웠다. 그들은 크게 숨도 쉬지 못했다. 오늘 예왕이 돌아올 때 표정이 매우 냉담했기 때문이다. 그의 곁에 선 고양과 계우서도 평소와 달리 엄숙했다. 잠시 후, 철의와 남기가 호위 차림을 한 사람을 끌고 함께 예왕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재는 매우 넓었고 화려한 장식품이 가득해 궁전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은 사경행은 무료하기 짝이 없다는 듯 손안의 반지를 가지고 놀았다. 그는 어두운 자색에 금색 수가 놓인 화려한 장포를 의자에 넓게 늘어뜨렸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바닥에 꿇어앉은 사람은 엎드려 있어 장화만 보였다. 청흑색 사슴 가죽 장화였다. 아무나 구할 수 없는 고급품이니 그것만으로도 그의 부귀한 신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경행은 한 발을 부드러운 침상에 올리고 의자에 몸을 반쯤 기댄 채, 꿇어앉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미소를 지을 때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기색이 넘쳐 흘렀지만, 미소 짓지 않을 때는 한 번만 봐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 아름다운 눈이 봄날의 강물에서 순간 높은 협곡의 빙하처럼 변했다. 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널 보낸 사람이 누구냐, 말하라.”
꿇어앉은 사내는 이를 악물고 말하지 않았다. 고양과 계우서는 미간을 찡그렸지만, 사경행은 나른하게 웃으며 명했다.
“저자의 패를 챙겨라.”
사내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적잖은 고통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사경행이 살짝 웃었으나, 그의 눈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는 사내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힌 후 소리를 낮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좋다. 탑뢰에 가두거라. 어쨌든 나는 네가 누군지 아니까.”
계우서와 고양은 당황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도 당황했는지 그제야 발버둥 치려고 몸을 비틀었다. 사경행은 이미 그의 신분을 아는 것 같았다. 대량 예왕의 수단은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누구나 그 악랄한 수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탑뢰는 듣는 사람의 간담도 서늘해지는 곳이다. 사내의 마음도 떨렸다. 놀란 사내는 무릎을 꿇은 채 사경행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용서해주십시오!”
사경행은 그런 사내를 비웃었다.
“형님이 보낸 사람에게 이런 덕행이 있을 줄이야. 완강해 굽히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재미없네.”
그의 말투에 비웃음이 짙게 깔렸다. 계우서가 더 참지 못하고 사내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심 소저에게 무엇을 하라고 했느냐?”
이 사내는 장군부의 입구에서 잡혔다. 사경행은 장군부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걸 대비해 자신의 사람을 파견해 종일 지켜보게 했다. 이 사람은 무공이 아주 뛰어난 데다 기척을 매우 민감하게 알아챘다. 사경행의 사람도 며칠씩이나 걸려 겨우 잡았다. 그는 대량 황제 영락제의 밀정이었다.
밀정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다 사경행의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과 마주했다.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자신은 눈앞의 무심한 웃음이 보이는 것과 다름을, 준수한 예왕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2년 전에 예왕이 대량으로 돌아왔을 때, 조정의 모든 세력이 합심하여 그에게 맞섰다. 그러나 그와 정면으로 맞선 대신들은 뿌리가 뽑혀 지금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예왕은 수완이 매우 매섭고 계략이 깊으며 일을 처리할 때 약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정 다툼 외에도 그는 몇 가지 일을 멋지게 처리해 구습에 얽매인 늙은 신하들도 말문이 막히게 했다. 예왕은 그들이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좋아하게 만들었다.
지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 아래, 밀정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부 털어놓았다.
“폐하께서 심 소저의 일을 아셨습니다. 전하께서 명제에 머무는 이유가 정말 심 소저 때문인지, 이곳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저는 결코 심 소저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조사했을 뿐…….”
고양과 계우서는 약속이나 한 듯 안색이 나빠졌다. 영락제는 명제 정경성에 첩자를 여럿 두었다. 심묘와 사경행의 관계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할지 말하기 어려웠다. 영락제의 성격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예상 밖의 일이 발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심묘는 명제 사람으로 이는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계우서와 고양은 영락제가 사경행의 뜻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형제는 둘 다 완고해서 결정한 일은 절대 바꾸지 않았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영락제가 혼사를 막는대도 사경행이 순순히 복종할 리 없었다. 게다가 성격만 두고 따진다면 명제에서 무수한 암살 시도에 시달린 사경행이 더욱 맹렬했다. 두 사람이 싸운다면 과정도 결과도 모두 참혹할 터였다.
사경행은 밀정의 말을 듣고 웃었다.
“오? 소식을 조사하러 온 거면 감옥에 가둘 필요는 없지. 널 대량으로 돌려보내마.”
당황한 밀정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 사경행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겠느냐?”
밀정이 머뭇거렸다. 예왕과 영락제는 모두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탐색하듯 물었다.
“……‘전하와 심 소저는 아무 관련이 없다’입니까?”
사경행은 아름다운 눈에 흥미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의 의미를 남자는 알 수가 없었다.
“형님의 사람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느냐?”
고양이 손안의 부채를 세게 쥐었고, 계우서는 침을 삼켰다.
“돌아가 형님에게 보고하거라. 형님의 생각이 맞다고. 나는 바로 심묘 때문에 머무는 것이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간의 사나운 기색은 여전히 불손했다.
“그러나 무언가 바꿀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 내가 윤허하지 않을 테니까. 맞다, 형님에게 일깨워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와의 약속을 잊지 말라고.”
사경행이 마지막으로 당부하며 하품을 했다.
* * *
밤은 모든 것을 덮었다. 예왕부의 암류, 정왕부의 계략, 장군부의 비밀 역시 모두 덮였다.
추수원. 진약추는 분노하며 친정으로 돌아간 후 이혼 소송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물과 불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진약추가 다시는 이전 광명을 얻지 못할 걸 알았다. 반면, 새로 온 이낭은 온화하고 대범했으며 배 속에 아이까지 가졌으니 장래 높은 자리를 차지할 터였다. 하인들은 일심으로 새로운 주인에게 아첨하느라 바빴다.
상재청은 방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배를 어루만졌다. 얼굴에는 온화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배 속 아이가 아들이라고 믿는 심 노부인은 상재청을 보살피기 편리하게 그녀의 처소를 즉시 서원에서 추수원으로 옮겼다.
상재청은 흡사 추수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 같았다. 상재청은 이 상황이 매우 흡족했다. 진약추는 재주가 있으나 나이가 들어 아들을 낳지 못하니 이 싸움에서 애초부터 열세였다. 그때 심만이 방으로 들어와 자양제를 내려놓았다. 그는 상재청에게 다가가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정말 좋소.”
상재청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심만의 얼굴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가요?”
심만은 순간 당황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실토했다.
“조금 있소.”
상재청이 심만의 손을 토닥이며 미소 지었다.
“대인, 걱정거리가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도 무슨 도울 게 있을지도 모르지요.”
심만은 상재청의 배를 바라보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됐소, 당신은 부에서 몸을 잘 돌보시오. 이런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일은 구태여 알 필요 없다오. 게다가 모두 조정 안 일이요.”
상재청은 낙심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대인은 제가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는 절 친우로 여겨 걱정거리를 함께 이야기했지요. 후원의 자질구레한 일이든 조정 일이든 구별하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대인께서 말씀을 아끼시니 서운합니다. 가문에 들였는데 어째서 이전만 못한가요? 전 단지 후원에서 옷을 꿰매고 꽃을 돌보는 규방 여자가 아닙니다. 제가 아주 똑똑한 사람은 아니나, 두 사람이 함께 방법을 생각하면 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분명 나을 겁니다.”
상재청의 부드러운 말에 심만의 마음도 느슨해졌다. 상재청과 진약추는 달랐다. 진약추는 ‘아리따운 아내’였다. 그녀는 자신의 벼슬길이 순풍에 돛 단 듯할 때부터 철저히 아내의 본분을 지켰다. 온유하며 완곡했지만, 절대 자신의 벼슬 일을 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상재청은 달랐다. 상재청에게 남녀의 정을 갖기 전 자신은 그녀를 친구로 여겼다. 이것저것 끝없이 이야기해도 조금도 무료해지지 않았다. 상재청은 견문이 짧지 않아 때때로 조정 일도 나눌 수 있었다. 평범한 여자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장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통 여자가 아는 점을 모르지도 않았다. 심묘를 주왕에게 시집 보내기 위해선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한다. 심묘의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쉬웠을 테다. 그때는 심묘를 조금만 부추기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대방과 긴장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서 일을 착수하기 어려웠다. 이번 일은 상재청에게 물어야 수확이 있을 것 같았다. 심만은 상재청을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내가 심묘를 주왕 전하에게 시집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기오?”
당황한 상재청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주왕 전하요? 왜 심묘 아가씨를 주왕 전하께?”
심만이 하하 웃었다.
“그냥 한 말이요.”
그는 상재청을 자신의 여자로 여겼지만, 부수의를 대신해 일 처리를 하려면 반드시 입을 조심해야 했다. 감히 기밀을 마음대로 누설할 수 없었다. 심만이 더는 말하지 않자 상재청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심묘 아가씨는 심 장군의 사랑받는 딸입니다. 지금 주왕 전하는 이미 왕비마마가 있어 심묘 아가씨가 시집을 가면 측비에 불과하니 심 장군과 심 부인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주왕에게 시집가면 어찌 되었든 측비가 되니 심묘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상재청은 심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심만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를 본 상재청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수려한 눈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심묘의 투명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신은 그녀가 두려웠다. 심묘의 존재 자체가 자신에게 어떤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참에 심만을 도와 그녀를 처리할 수 있다면 자신에겐 좋은 일일 터였다. 결정한 상재청은 아직은 납작한 배를 바라보았다. 지금 배 속에 아이까지 있으니 장래 위협이 될 사람이나 일은 모두 제거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상재청이 아름답게 웃으며 말하자 심만의 눈이 밝아졌다.
“무슨 방법이 있소?”
“대인, 주왕 전하는 어떤 태도인가요? 주왕 전하께서 이 혼사를 바랍니까?”
주왕은 당연히 이 혼사를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심묘와 혼인해 표적이 되는 일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수의는 주왕과 심묘의 혼사를 매우 바라는 듯 보였다.
“주왕 전하는 원치 않을 거요. 하지만 주왕 전하가 동의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소.”
상재청은 잠시 생각했다.
“어렵네요. 그러나 여자는 명예를 소중히 여깁니다. 명예가 무너지면 기댈 곳이 없으니까요. 대인께서 그렇게 하려고 하시면 먼저 심묘 아가씨 쪽에 손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심만은 상재청의 담담한 표정에 더 물었다.
“말해보시오.”
“심 장군과 부인은 심묘가 측비가 되길 원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심묘 아가씨가 측비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심 장군과 심 부인은 분명 심묘 아가씨를 주왕 전하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결정할 겁니다.”
상재청이 이어서 말했다.
“측비보다 더 엉망인 일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산도적에게 납치되거나 불량배에게 순결을 잃거나. 간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은 더 엉망인 일이겠지요? 이런 압박 속에서 갑자기 간부가 어쩌면 주왕 전하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 겁니다. 정말로 간부가 주왕 전하인지 아닌지 상관없이 심 장군과 심 부인은 심묘 아가씨를 주왕 전하에게 시집 보내기를 선택할 겁니다. 심묘 아가씨의 명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이니까요.”
상재청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똑똑한 사람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지 않기도 했다. 심만은 순식간에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며 눈앞이 환해졌다.
상재청이 웃으며 배를 매만졌다.
“모두 음험한 방법입니다. 대인께서 수심에 잠긴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저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위급한 문제를 해결할 묘책을 얻었는데 심만이 상재청을 음험하다고 느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이 보물을 주웠다고 생각했다. 이 값진 보배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듣고 단번에 난제를 해결해줄 만큼 총명했다. 게다가 대까지 이어줄 터였다. 심만은 상재청의 볼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이런 미인을 앞에 두고 내가 어찌 감히 수심에 잠길까? 할 일을 좀 해놓고 저녁에 다시 그대를 보러 오겠소.”
그는 일각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만이 간 뒤 조 유모가 상재청의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인께서 심 소저를 처리하려는 걸까요?”
“아마도. 심가 대방과 삼방이 서로 으르렁대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걸.”
“아가씨는 주인어른이 심 소저를 처리하게 도울 생각인가요? 심 소저에겐 심 장군이 있는데, 아가씨께서 이렇게 나서셔도 괜찮을까요?”
조 유모의 걱정에도 상재청의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이 일은 내가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게 혐의를 씌우겠어? 대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약점을 잡히지 않을 거야. 또, 정말 일이 생기면 장군부는 서둘러 심묘의 유언비어를 막느라 바빠 다른 것을 돌볼 틈도 없겠지.”
하지만 조 유모는 안심하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아가씨, 어째서 주인어른이 심 소저를 처리하는 걸 도우려 하십니까?”
“부군을 위해 계책을 꾸미는 건 주모로서 해야 할 일이야. 나와 진약추가 다르다는 것을 항상 보여줘야 해. 진약추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고, 진약추가 못 하는 일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대인이 날 떠나지 못하지.”
상재청이 배를 어루만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심묘를 제거하지 않으면 큰 재난을 불러올 거란 예감이 들어.”
조 유모는 이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재청은 화제를 돌렸다.
“유주 쪽에는 무슨 소식이 있어?”
“사람을 보내뒀으니 며칠 지나면 돌아올 겁니다.”
“일 처리를 온당하게 하라고 해. 나의 과거를 누구도 알아선 안 돼.”
상재청의 눈에 한기가 스쳤다.
* * *
밤중 심묘는 배랑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부수의가 심만을 시켜 그녀를 주왕 부수안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고 적혀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여겨 물었다.
“아가씨, 무슨 나쁜 일이 생겼나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속으로는 경계심을 품었다. 전생과 현생, 부수의는 모두 계략에 능했다. 부수안과 혼례를 치른다면 장군부와 부수안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다. 문혜제는 장군부가 부수안을 지지해 줄을 섰다고 여기고 분노할 게 뻔했다. 부수안은 모든 사람들의 공격 대상이 될 테니, 부수의는 한 번에 두 개의 위험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정말 계산이 빨랐다.
거기다 심묘 자신의 ‘매우 착실한’ 셋째 숙부는 자신과 부수안을 한데 묶으려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것이다. 심묘는 냉소했다. 얼마나 떨어져 있든 심가 삼방 사람은 망설임 없이 대방 사람을 이용하고 상처를 주려 했다. 온 대방을 부귀영화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 수장하는 것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모경에게 들어오라 해.”
경칩이 밖으로 나가 모경을 불러왔다.
“유주에서 조사하란 사람은?”
모경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말했다.
“아가씨, 이미 찾은 것 같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를 찾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도 합니다. 그 사람은 부자의 생사를 불문한다고 말했답니다.”
심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상재청, 정말 흉악하구나.”
심묘가 모경에게 찾으라고 한 사람은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다. 그리고 지금 그 부자를 쫓아 죽이려는 사람은 바로 상재청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 남편과 아들을 모조리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하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 유주 쪽 사람에게 그들 부자를 서둘러 정경성으로 데려오라고 하거라.”
심묘는 갑자기 또 무언가 생각나 말했다.
“풍선전당포 계 주인에게 편지를 가져다주거라.”
* * *
심부와 진부의 소송은 정말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많은 사람이 이미 소송이 끝났을 거라 여겼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2개월쯤 지나서야 이 사건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심 노부인은 진약추가 아들을 낳지 못해 놓고 질투까지 심하다고 헐뜯었고, 말끝마다 진약추가 자신에게 불효한다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맹활약 덕에 심만과 진약추는 결국 이혼했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 칭찬했던 부부의 연이 이런 희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심만은 진약추와 이혼한 뒤 재빠르게 상재청을 귀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이 소송으로 심부와 진부는 모두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 심만은 벼슬길에 차질이 생겼고 부 안의 은자도 대량으로 소모했다. 진부는 심부보다 더 비참했다.
진부는 학자 가문이기에 명성은 있으나 은자는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소송은 예상보다도 더욱 시일을 잡아먹어 진부는 가산을 거의 탕진하고 말았다. 이에 원기가 크게 상한 진 대인은 모든 잘못을 진약추에게 돌렸다. 진 부인도 진약추에게 원망의 말을 늘어놨다.
진약추는 옛정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심만과 앞뒤가 전혀 다른 상재청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으며 밤을 지새웠다. 부모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원흉들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와중에 심모는 여전히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늠도 할 수 없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인생을 다시 일으킬 방법이 하나도 남지 않은 듯했다.
진국 태자부. 심모는 모친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짐작이야 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거울을 보며 단장하느라 여념 없었다. 그녀가 걸친 의복은 모두 고급이었다. 심부가 아무리 부귀한 관리 집안이라도 진국 황실과는 재화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착용한 머리 장신구도 매우 화려했다. 이전에 심모는 진약추의 분부를 따라 금은은 범속하다 여겼는데, 완전히 딴사람 같았다.
이는 당연했다. 심모는 황보호의 시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약추의 가르침 아래 온유하게 자랐으며 말을 잘 알아들었다. 더구나 황보호는 심묘에게 흥미를 느껴 그녀와 심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황보호는 그녀에게 자신의 시첩이 되길 바라는지 물었다. 경박한 질문이었으나 심모는 다음 날 그에게 따르겠노라 의사를 밝혔다.
심모에게 다른 퇴각로는 없었다. 의견이 분분한 심부와 진부의 소송은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신한 상재청이 이후 아들을 낳는다면 딸인 자신은 심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일 게 자명했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은 이미 심동릉에게 점거당한 상황이다. 이 판국에 원외랑 왕필이 아내를 매우 총애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무엇 하나 자신이 듣고픈 소식이 아니었다.
심모는 심만의 무정함과 진약추의 변변치 않음을 원망했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부수의의 여자가 되겠다는 오랜 꿈은 이미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심부로 돌아가면 가문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노부인과 심만이 자신을 이름 모를 집안에 시집 보낼지도 몰랐다.
심만은 진약추에게 앙심을 품었을 테니 그 딸인 자신을 복수의 희생양으로 대신 삼지 말란 법도 없었다. 심모는 뼛속 깊이 심부 사람으로, 특유의 박정한 면이 있었다. 심만과 심모는 부녀지간으로 정이 깊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가 자신에게 소원해졌음을 잘 파악했다.
심모는 하찮은 남자에게 시집가느니 황보호의 시첩으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황보호는 젊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진국의 태자였으니. 장래 그의 총애를 받으면 품계가 오를 수도 있다. 게다가 황보호의 권세를 빌리면 자신은 물론 모친도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심모는 황보호의 시첩이 되었다.
객관적으로도 황보호는 심모에게 잘했다. 이는 심모가 그의 비위를 잘 맞추었기 때문이다. 명제에서 황보호의 시첩 중 심모가 가장 총애받았다. 황보호는 관가 적녀가 스스로 시첩이 된 일이 처음이라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심모에게 뜨거운 차를 올렸다. 심모는 조금 귀찮은 표정을 짓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진부에 보낸 편지는 전달됐느냐?”
“가는 중이니, 곧 도착할 겁니다.”
심모는 불쾌한 듯 대답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 * *
진약추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누가 보낸 편지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잠시 나갔다 돌아오니 자신의 방에 놓여 있었다. 진 대인과 부인은 지금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했다. 진부는 원기가 상해 공동 자금으로 모아둔 은자에도 손을 댔다. 오라버니와 올케 역시 진약추가 온 집안을 시끄럽게 했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날이 갈수록 상황은 나빠졌다. 그래서 은거하다시피 온종일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
진약추는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호기심에 편지를 열어보곤,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이 편지의 필체는 바로 심모의 것이었다. 진약추는 심모에게 글 쓰는 법을 전수하기 위해 특별히 서법 대가 왕 부인의 탁본을 찾아 가르쳤다. 그래서 진약추는 한눈에 심모의 필체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대범하게 편지를 펼쳐 보았다. 편지에는 성 동쪽 여인숙에서 만나자고 적혀 있었다. 낙관(落款, 도장 서명)은 없지만 분명 심모였다. 진약추는 그녀가 몰래 자신과 만날 약속을 한 것을 눈치챘다.
진약추는 마음속의 돌덩이를 내려놓았다. 심모의 침착한 필체를 보니 지금 매우 평안한 게 분명했다. 이전의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평온해졌다. 진약추는 최근 연이은 타격에 허둥거렸고 제대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인생에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심모의 편지는 희망의 불꽃을 밝힌 듯했다.
진약추는 딸 심모 덕에 갑자기 투지가 충만했다. 자신은 적어도 혼자가 아니었다. 상재청은 뭘 믿고 자신의 뜰을 빼앗은 건지, 과연 심만의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끝까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마음속의 기둥을 붙잡자 진약추는 점점 냉정해졌다. 여종은 근래 매우 초조해하던 진약추의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을 느꼈다. 온유하며 완곡했던 원래 심 부인으로 돌아간 듯했다. 여종이 그녀와 부딪쳐도 진약추는 화를 내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라면 진약추의 눈 속에 새로이 이는 투지를 발견했으리라.
다음 날 아침 일찍 진약추는 외출을 했다. 진부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진 부인은 조금 걱정했으나, 진 대인이 곁에서 눈을 부라리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평소 시끄럽게 굴던 올케들조차도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진약추는 볼품없는 갈색의 짧은 옷을 입었다. 이 옷은 진 부인이 젊었을 때 입던 것으로, 많이 낡았다. 그녀는 심부를 나오며 울컥해 장신구만 챙기고 의복은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그 뒤에는 소송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는 진부에 은자가 부족해 의복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유행이 지난 옷을 입은 진약추는 속으로 굴욕을 억눌렀다. 그녀는 피풍의를 뒤집어쓰다시피 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누가 본다 한들 이렇게 초췌한 부인이 정경성 사람들이 갈채를 보내던 재녀 진약추라고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은자가 부족하니 진약추는 낡은 마차를 빌렸다. 마차가 성 동쪽에 도착하자 진약추는 마부에게 은자를 건네고 빠르게 편지 속의 약속 장소를 찾았다. 여인숙으로 들어간 그녀는 곳곳을 살폈다. 심모가 보이지 않자 의심스러웠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 그녀를 보며 물었다.
“부인, 혹시 젊은 아가씨를 찾아왔나요?”
당황한 진약추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만과 진약추의 소송은 온 정경성 사람이 다 알고 있기에 괜히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까 봐 위축되었다.
“절 따라오십시오.”
점원은 진약추를 2층으로 안내한 뒤 입구에서 웃으며 말했다.
“부인이 기다리시는 사람은 안에 계십니다.”
진약추가 문을 밀어 열자 탁자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진약추는 그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보았다. 바로 심모였다. 진약추는 문을 닫으며 소리쳤다.
“심모야!”
심모는 진약추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 진약추가 다가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자, 그제서야 얼굴을 제대로 보고서야 외쳤다.
“어머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에요?”
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모는 직접 보고도 이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초라한 여인이 자신의 우아하고 인자한 어머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진약추의 얼굴에 분노와 원망이 스쳤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상재청, 그 천한 것과 네 무정한 아버지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됐겠느냐! 심모야, 너 근래 어디 있었던 게냐? 어미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아느냐? 몸은 성한 게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
진약추는 하나 있는 딸을 진심으로 총애했으니 지금의 걱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모는 진약추의 말을 듣고 마음이 시렸으나 얼굴에는 웃음을 띠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 지금 잘 지내요. 후원자를 찾았어요. 원외랑보다 높은 사람이에요. 후원자가 있으니 장래 심부도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거예요.”
진약추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누굴 말하는 거니?”
심모는 머뭇거리다 목소리를 낮췄다.
“진국의 태자 전하예요.”
진약추는 놀라 비명과 같은 신음을 흘렸다. 심모가 서둘러 이어서 말했다.
“태자 전하는 제게 잘해주세요. 심부를 나와 나쁜 사람을 만났는데, 태자 전하께서 절 구해주셨어요. 그 뒤 절 돌려보내 주려 하셨지만 심부에 일이 생겨서 제가 태자부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부탁드렸고요. 태자 전하는 좋은 사람이니 어머니, 나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진심으로 그분을 따를 거예요. 왕가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집안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제가 심동릉이 동등한 자격으로 지낼 수는 없잖아요? 심부로 돌아가면 제게 불만을 품은 조모와 아버지가 절 가만두겠어요? 어머니, 이번에는 제발 제 뜻을 따라주세요.”
진약추는 본능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꼈으나, 황보호가 심모를 구해줬다는 말을 들은 뒤 안색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황보호는 명제 사람이 아니다. 진약추는 조정 일을 잘 모르지만, 심만에게 오랫동안 전해 들어 경계심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진국 사람이잖니, 게다가 태자…….”
진약추가 여전히 불만스러워하자 심모는 거짓말을 했다.
“태자 전하께서 장래 진국에 돌아가면 제게 새로운 신분을 하사하신댔어요. 절 측비로 삼을 거라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사실이냐?”
진약추는 어안이 벙벙했다. 심모가 명제를 떠나, 진국 태자의 측비가 되면 장래 부귀영화는 보장된 셈이었다. 심만의 일을 겪고 나서 진약추는 생각이 바뀌었다. 감정 따위 아무 소용 없다고. 행복하고 원만할 때만 좋다. 그렇지 않을 때는 손에 잡히지 않는 부스러기일 뿐이었다.
진약추는 이번 일을 계기로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은자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은자가 없으니 한 가족인 진부조차 자신에게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풍자를 퍼부었다. 그런데 이후 자신 덕에 그들 집안에서 태자의 측비가 나온다면……! 진약추의 마음이 천천히 뜨거워졌다.
“확실해요.”
진약추는 잠시 망설이다 낯빛을 바꾸었다.
“이 일은 장래 다시 상의하자. 지금은 할 일이 있다.”
“무슨?”
“상재청, 그 천한 것이 몰래 계략을 꾸며 날 뒤에서 칼로 찔렀다. 그 덕분에 지금 나는 많은 사람의 원성을 사고 있는 신세가 됐지. 하지만 내가 가장 원망하는 건 상재청이 아니라 네 아버지다. 네 아버지가 날 감쌌다면 내가 이렇게 됐을까? 수십 년 부부의 정분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니, 그들이 편히 사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원망스러워!”
진약추의 말에 깊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안 그래도 초췌한 그녀의 얼굴에 흉악한 악의가 일렁이자 심모는 크게 놀랐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예요?”
진약추는 이를 갈았다.
“이 일은 너도 알 게다. 네 부친은 본래 나와 의기투합해 오랫동안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다. 난 네 아버지를 한마음 한뜻으로 대했기에 그가 내게 치욕을 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진부는 이번에 심부와 소송을 치르느라 많은 은자를 탕진했다. 진부 사람들은 날 볼 때마다 비웃고 있어. 네 아버지와 상재청이 날 이런 궁지로 몰았다. 정경성 안에서 떠돌고 있는 알을 낳지 못하는 암탉이라느니, 질투심 많은 부인이라는 소문은 전부 네 아버지가 퍼뜨린 거야.”
말하면서 더욱 감정이 격해지는지 진약추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 늙은 심 노부인은 내가 심부에 시집온 뒤부터 틈만 나면 내 단점을 찾으려 했지. 그 노인네가 가녀 출신이라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두고 보지 못하는 거야. 상재청과 네 아버지의 일 역시 그 노인네가 배후에서 추진했을 거야. 심부 사람 중 제대로 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모는 모친이 시장 바닥의 몰상식한 여자같이 느껴지자 견딜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금 자신도 심부에 감정이 좋지 않았다.
“당초 네 아버지가 널 왕가로 보내려 할 때 난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아니 반대했다. 그러나 네 아버지가 왕가만이 널 보호해줄 수 있다고 날 살살 구슬렸다. 그런데 지금 원외랑부는 심동릉 때문에 널 인정하지 않는구나. 심지어 그것에게 네 신분을 주다니.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네 아버지가 조금의 정이라도 있으면 널 위해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너도 봤듯 네 아버지는 오히려 원외랑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수용하겠다고 했지. 무슨 이유로 너처럼 당당한 적출 소저와 서녀인 심동릉을 동등한 자격으로 대하겠다는 거지? 그야말로 웃긴 이야기야. 네 아버지가 널 정말 친딸이라고 생각하긴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구나.”
진약추의 말에는 심모와 심만 사이를 이간질하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지금 자신은 가진 것도, 자기 편에 서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까스로 딸을 찾았는데 심만의 구슬림에 다시 심부로 돌아갈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녀마저 떠난다면 자신은 정말 외톨이가 될 터였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해준다면 희망이 보일 터였다.
심모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오랜 세월 함께했으니 부녀의 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친의 말대로 부친은 자신의 혼사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고 결국은 자신을 해쳤다. 미울 수밖에 없었다. 말로는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 탓에 온갖 고통을 다 겪었다.
황보호가 지금은 잘해주지만 결국 자신은 시첩일 뿐이었다. 시첩은 가장 낮은 지위의 첩이니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게다가 진약추가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던 걸 안다’라고 하니 부수의의 출중한 풍채가 떠올라 한층 울적해졌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저와 정왕 전하는 이젠 불가능해요. 현생엔 전하와 인연이 없나 봐요. 그래도 진국 태자 전하는 제게 잘해주세요. 저도 그가 좋아요.”
진약추는 심모를 가장 잘 알았다. 그녀의 깊은 실의에 진약추는 분노했고 마음이 아팠다. 부수의까지 미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심모가 뭐가 모자라 그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건지, 진약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부가 우리 모녀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했으니 절대 그냥 둘 수 없다. 안심하거라. 어미가 반드시 갚아줄 것이야. 심부는 한 사람도 도망칠 수 없다. 난 이미 이혼해 친정에 있으니 심부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심부에 사고가 생겨도 절대 내게 혐의를 둘 수 없지. 더욱이 넌 신분을 쓰지 못하니 반드시 안전할 게다.”
“어머니, 어쩌시려구요?”
심모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진약추가 냉소했다.
“지켜보거라.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너와 이야기하기 위해서였어. 네게 별일이 없어 보이니 안심이구나.”
심모는 진약추에게서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 속에 스친 흉악한 빛 역시 놓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정경성은 작은 풍랑도 없는 잔잔한 바다 같았다. 별다른 일 없이 연말을 맞았다. 거리 위는 춘절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장군부 역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나담이 아주 좋아했다. 지난번 사고 이후, 심신은 심묘와 나담에게 외출을 금했고 꼭 나갈 일이 생기면 반드시 호위를 데리고 가도록 했다. 그 탓에 나담은 예전처럼 쏘다니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풍안녕은 지난번 일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는지 장군부에 방문해 사과한 뒤 다시는 두 사람과 외출을 하지 않았다.
나담은 장군부에서의 생활이 대단히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나릉과 심구를 따라 연병장에 방문했다. 병사 훈련이었지만 그녀는 남장한 데다 곁에 심구와 나릉이 있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날 부에 아무도 없어 심묘는 평온히 혼자 시간을 보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점포 구경에도 큰 흥미가 없고 이처럼 혼자 있는 것이 가장 편했다. 그때 모경이 바깥에서 들어와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을 정경성으로 데려왔다고 고했다.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성 동쪽 민가에 안배했다고 했다.
“아주 잘했다.”
심묘는 모경을 칭찬했다. 자신의 기억에 상재청의 남편은 노름꾼에다 무뢰한이었다. 평소 술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셔대는 거친 사람을 장군부에 둬서 좋을 리 없었다. 장래 다른 생각을 품어 악질적으로 행동한다면 정리하기도 힘들 터였다. 게다가 심부 사람이 장군부를 감시하다 그 부자를 발견하면 시비를 걸어올지도 몰랐다.
“아가씨, 언제 그들 부자를 보러 가실 생각입니까?”
심묘가 두 사람을 정경에 데려온 이유는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부자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모경에 물음에 답하려던 심묘는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
배랑은 부수의가 자신을 주왕에게 시집 보내라는 난제를 심만에게 줬다고 편지로 알렸다. 심만이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지저분한 수완일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군부의 문을 나서면 곳곳에 도사리는 위험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근래 평온한 건 자신이 외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출한다면 심만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구덩이가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제 발로 빠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황실과 관련되면 몇 마디 말로 벗어날 수도 없었다.
“부에 너 같은 고수는 몇 명이 있느냐?”
당황한 모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큰 공자님 수하에 몇몇, 주인어른 수하에도 몇몇, 다 더하면 서른 명이 좀 안 될 겁니다.”
모경은 확실히 최고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그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서른 명의 보호를 받으면 감히 납치하거나 해를 가하지 못할 테지만 너무 눈에 띌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둘째 치고 바보가 아닌 이상 심구와 심신 역시 의심을 품을 것이다. 심묘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다.”
“아가씨, 안전을 걱정하십니까? 호위를 한 무리 대동하시면 됩니다.”
심묘는 지금까지 담력이 작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괜찮아. 어찌할지 아니까 먼저 물러나거라.”
모경은 침묵한 채 물러났다. 심묘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반쯤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곡우에게 분부했다.
“창문을 더 열거라.”
“아가씨, 바깥에는 바람이 불어 문을 열면 춥습니다.”
곡우는 정말 의아했다. 심묘는 어릴 때부터 추위를 싫어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다. 대낮인 지금도 창문을 열라고 했다.
“춥지 않다. 가서 열거라.”
곡우는 심묘가 두툼한 피풍의를 걸친 것을 보았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분부대로 창문을 열었다. 이후 심묘는 수시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경칩과 곡우도 따라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무슨 꽃이라도 핀 줄 알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심묘는 책을 보다가 창문 앞으로 걸어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하늘이 어두워졌다. 저녁을 먹은 뒤 경칩과 곡우가 물러났다. 심묘는 등의 심지를 잘랐다. 몇 번 잘랐는지 모르지만, 바깥은 고요했다. 만물이 조용해 온 정경성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창문 쪽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심묘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별수 없이 무료함을 달래려고 바둑을 두었다. 등불의 불꽃이 점차 작아지자 노곤함이 밀려왔다. 심묘는 탁자 위에 엎드려 졸았다.
사경행은 방에 들어와 심묘가 탁자에 엎드려 달게 자는 모습을 보았다. 심묘는 특별히 자신을 위해 창문을 닫지 않은 것일 터. 자신이 들어오며 찬 바람에 등불이 흔들렸는데도 심묘는 여전히 자기 팔을 베고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사경행이 심묘에게 다가갔다. 그는 긴 속눈썹을 드리워 심묘를 바라보다가 피풍의를 벗어 심묘에게 덮어줬다. 민감한 심묘는 그의 동작에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뜨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소이자, 내 어깨를 주물러다오.”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옆에 있는 궤짝 위에 반쯤 기댔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며 우스운 듯 말했다.
“이봐, 너 또 꿈속에서 황후가 된 게냐?”
그때, 바깥에서 한바탕 차가운 바람이 불자 심묘가 재채기를 했다. 일순 졸음이 달아났다. 사경행이 창문을 닫자, 방 안은 매우 따뜻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창에 기댔다.
“어째서 여기서 자는 거지?”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다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온 거예요?”
사경행을 탓하는 기색이었다. 심묘는 막 잠에서 깨어나 머리가 아직 맑지 않았고 자신이 한 말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민감하게 느꼈다. 방 안은 일순 적막에 휩싸였다. 그는 한 걸음씩 다가가 심묘가 앉은 탁자에 두 손을 놓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날 기다린 거야?”
순간 심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뇨.”
사경행이 입가를 당겼다. 그의 말투는 조금 모호했다.
“오, 오늘 종일 창을 바라보며 날 기다린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그렇다면 난 그만 돌아가겠다.”
그는 곧 떠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잠시.”
심묘가 그를 불렀다.
“왜.”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알잖아요.”
심묘는 이를 갈았다. 사경행과 마주하면 냉정함이나 대범함은 사라졌다. 그가 매우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확실히 자신은 오늘 자주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장군부에도 사람을 심어놨기에 이런 자신의 동태를 뻔히 알고 있을 터였다. 뻔히 알면서도 묻다니, 일부러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고약한 취미였다.
“전 당신을 기다렸어요. 도움받을 일이 있어요.”
심묘가 심호흡을 했다.
“말해.”
사경행이 의자를 끌어 심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눈은 이전보다 더 반짝였다.
“당신의 수하 중 인재가 적지 않을 테고, 고수도 많을 거예요. 모경 정도의 수준을 가진 사람도 많겠지요?”
심묘가 탐색하듯 물었다.
“그 정도를 고수라 한다니, 내가 진정한 고수를 몇 명 데려다주마.”
사경행은 비웃었다.
“몇 명 빌려줘요. 은자로 보상할게요.”
사경행은 심묘를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뭘 하려는 건데?”
사경행이 이미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 일을 알고 있으니 굳이 그를 속일 필요는 없을 성싶었다. 심묘는 솔직히 털어놨다.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정경성 동쪽에 와 있어요. 제 호위가 모자랄 것 같아 걱정이에요.”
“내 사람을 사용하려고?”
“은자로 보상할게요.”
“내가 은자가 부족해 보여?”
심묘는 침묵했다. 사경행은 은자가 부족하기는커녕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죽을 정도로 많을 터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승낙해줄 거예요?”
사경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지금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야?”
“됐어요. 말하지 않은 거로 해요. 시간이 늦었으니 예왕 전하는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화가 난 심묘는 일어나며 사경행을 예왕 전하라 불렀다. 소원한 호칭이었다. 이에 사경행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빌려주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어. 뭐가 그리 급한 게지?”
심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경행의 아름다운 눈이 그녀를 주시했다. 그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넌 정말 멍청하구나. 가까운 곳에 있는 걸 멀리서 찾고 있으니.”
“무슨 말이에요?”
“오늘 기분이 좋다. 함께 가주마.”
달빛이 숨어 적막한 밤하늘에는 별 몇 개가 드문드문 걸려 있었다. 겨울 날씨는 매우 추웠다. 길 위에는 눈이 얕게 쌓여 밟으면 살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집마다 처마에 붉은 등롱을 걸어두었다. 붉고 하얀 모습이 아름다웠다.
처마 아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키 큰 청년이 허리를 굽혀 다른 사람에게 복면을 씌워줬다. 키 작은 아가씨는 언짢아하며 불만을 표했다.
“왜 이걸 써야 해요?”
“쉬! 네 절세 용모를 누가 보기라도 하면 조용할 거 같아? 더는 묻지 마.”
사경행이 소리를 낮춰 심묘의 귓가에 말했다. 심묘는 냉소했다.
“절세 용모라, 그럼 당신이 먼저 가려야지요.”
“난 필요 없어.”
준수한 용모의 사경행은 심묘의 의도를 알지 못한 듯 담담히 이어 말했다.
“난 권세가 아주 높아. 그러니 감히 내게 말썽을 부릴 사람은 없어.”
심묘는 사경행이 지금 바로, 직접 나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밤중이니 아마 그 부자는 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경행이 굳이 이 시간에 움직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밤에는 사람이 적어. 누가 널 보호한다고 해도 대낮에 들키면 어떻게 할 거야?”
이치에 맞는 얘기에 심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경행과 함께 밤거리를 걸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거리에 행인이 없다지만, 그 정도로는 불안을 면할 수 없었다.
“내 사람이 따르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
심묘의 주의력이 분산됐을 때, 사경행은 그녀에게 복면을 씌워 눈만 드러나게 했다. 그녀의 눈은 둥글고 생기가 있어 매우 맑았다. 게다가 등롱의 어두운 불빛 아래 더 귀여워 보였다. 사경행은 그녀에게 모자까지 씌워주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괜찮군.”
의외에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어 심묘는 남종의 의상을 입었다. 모자가 커서 심묘의 눈을 반은 가리다시피 했다. 피풍의를 놓고 온 심묘에게 사경행이 그의 피풍의를 씌워주었다.
“가자.”
“이렇게 가는 거예요?”
놀란 심묘가 물었다.
“성 동쪽은 멀지 않아. 걸어갈 만해. 너도 정경성의 밤 풍경을 본 적 없잖느냐?”
심묘는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전생 자신은 소녀였을 때는 부의 담 안에서, 혼례를 올린 후에는 궁벽 안에서 네모반듯한 밤 경치밖에 보지 못했다. 어떤 날은 큰 곤녕궁 안에서 궁중의 번잡한 일을 생각하느라 밤을 지새웠고, 어떤 날은 어화원을 산책하며 부수의가 다른 미인과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룻밤이 10년처럼 느껴졌다. 육궁의 주인이었으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만큼 고독하고 쓸쓸했다. 종종 궁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며 궁 밖의 근심 없는 생활을 흠모하기도 했다.
“널 볼 사람도, 알아볼 사람도 없으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도 돼.”
심묘는 사경행에게 느껴지는 호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임안후부 소후야뿐 아니라 대량 영락제 친동생, 예왕으로 살았다. 사람들은 표면상 영광만 바라보지만, 사실 그가 등에 진 부담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도도하고 굳센 성격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외적인 고통도 그의 뼛속 깊이 새겨진 강대함을 해칠 수 없었다. 해와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그는 조금도 동요치 않고 용맹한 태도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마음이 강대한 사람을 흠모했다. 심묘는 자신이 결코 사경행처럼 강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완유와 부명을 생각하면 매우 지쳐 무엇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사경행의 시선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는 심묘의 턱을 잡고 눈을 마주했다.
“왜 그러지?”
심묘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심묘는 사경행에게 자신의 기분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두 걸음 먼저 걸어갔다. 그러나 남자 장화가 익숙지 않은 데다 바닥이 미끄러워 자칫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사경행이 이쪽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조심해.”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은 후 심묘의 손을 잡았다. 가늘고 차가운 그의 손이 심묘의 손을 감쌌다. 심묘는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가 꽉 잡고 있어서 불가능했다. 그는 담담히 말했다.
“미끄러지지 않게 내가 잡아주마.”
“조심하면 미끄러지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내가 미끄러질까 걱정이니 네가 날 끌어다오.”
그는 미간도 찌푸리지 않고 받아쳤다.
눈이 거리를 덮어 온 세상이 새하얬다. 등롱의 빛을 받은 눈은 아름다웠다. 심묘는 수시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하늘은 네모반듯한 하늘에 비할 바 아니게 아름다웠다. 거리는 매우 조용했고 자신을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생의 소망 중 하나가 지금 이뤄졌다. 사경행이 잡은 손바닥이 조금 젖어갔고 심묘는 점점 웃음이 났다. 그녀는 아름다운 밤 경치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래서 불꽃놀이보다 더 매력적인 사경행의 눈 속에 웃음기가 스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 *
성 동쪽 민가.
시끄럽게 코 고는 소리가 울렸다. 방 안에 가득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어수선하게 술병들이 흩어져 있고 침상에는 남자가 달게 잠들어 있었다. 옆방에는 여덟, 아홉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이 방은 남자의 방보다 훨씬 비좁았다. 아이는 잠시 뒤척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옆방에서 코 고는 소리에 잠들 수 없었다. 아이는 이불을 걸치고 대나무 울타리가 둘러싼 작은 뜰 안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측간에서 볼일을 보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돌아보니 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아이가 놀라 소리치려 할 때 키가 큰 사람이 손안의 돌을 아이에게 튕겼다. 아이는 제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아이에게 접근했다.
바깥 등롱의 어두운 불빛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뚜렷이 보였다. 한 명은 여리고 키가 작았는데 남종 복장이었으나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피풍의도 걸치고 있었다. 복면을 써서 눈을 제외한 코 아랫부분은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두 눈이 맑고 투명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미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 곁에 있는 키가 큰 사람을 본 아이는 멍해졌다. 남자는 덩치가 컸고 자금색 구름무늬가 수놓인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장포는 품이 넓었다. 옷자락을 나부끼며 그가 밤 경치를 바라보자 겨울 눈 속에 봄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마치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신선 같았다. 그의 모든 것이 너무나 우아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부귀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아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감탄에 젖었다.
심묘가 사경행에게 눈을 흘기며 조용히 물었다.
“네 이름이 뭐니?”
아이는 헛기침을 하고 난 뒤 입을 뗐다. 작은 사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 아이는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긴장돼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괴생이라고 해요.”
“괴생, 네 어머니 이름이 상재청이니?”
괴생의 눈언저리가 붉어졌다. 그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제 어머니를 아세요? 제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전 오랫동안 어머니를 못 봤어요. 사람들이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거래요. 누군가 절 이곳으로 데려오며 어머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곳에도 어머니가 없어요.”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 아이는 소명랑과 비슷한 나이였다. 소명랑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는데 이 아이를 보니 가여웠다. 상재청은 남편과 아이를 버렸다. 물론 남편이 온종일 술을 마시고 노름에 빠져 사니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이런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맡겨두면 아이가 얼마나 고생할지 예측하지 못한 걸까? 이렇게 모진 어머니는 이미 ‘어머니’로 불릴 자격이 없으니 동정할 가치도 용서할 가치도 없었다.
“무서워 마라.”
심묘가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눈물을 닦아줬다. 괴생은 놀랐지만 기뻤다. 이 여자는 눈이 아주 예뻐서 얼굴도 예쁠 것 같았다. 남종 차림이지만 손은 희고 여렸다. 자신의 굳은살 많은 거친 손과 달랐다. 분명 부귀한 집안 출신이리라. 이런 귀인이 자신 같은 천민의 눈물을 닦아주다니……. 어머니도 이렇게 부드럽게 자신을 대해준 적은 없었다. 괴생은 조금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때, 가벼운 기침소리가 들렸다. 심묘 곁에 선 사경행이 낸 소리였다. 그는 괴생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들어가지.”
괴생은 그 차가운 눈빛을 보자 이 아름다운 남자가 무서웠다. 정신을 차린 괴생은 손수건을 정리하는 심묘의 시선이 매우 부드러운 것을 보았다. 심묘는 괴생을 보고 부명과 완유가 생각났다. 부명과 완유 역시 부수의 같은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다. 자신은 상재청처럼 도망치지는 않았으나 자식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녀와 마찬가지였다. 상재청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을지 몰랐다. 복잡한 기분을 누른 심묘가 말했다.
“괴생, 우리에게 네 아버지를 보여다오.”
괴생이 문을 열자, 농후한 술 냄새가 얼굴을 덮쳐왔다. 심묘는 복면을 쓰고 있는데도 견딜 수 없어 미간을 찡그렸다. 심묘가 미간을 찡그린 것을 본 괴생은 부끄러운 듯 달려가 등에 불을 붙였다.
등불이 흔들흔들 타오르자 방 안이 조금 환해졌다. 침상에는 중년 남자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남자는 여위고 허약해 보였다. 괴생이 불안하게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자 심묘가 말했다.
“깨우렴.”
괴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버지, 아버지, 누가 왔어요.”
그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귀찮은 듯 손바닥을 빼내며 욕을 내뱉었다.
“한밤중에 무슨 곡을 하느냐?
괴생은 아버지의 손짓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줄곧 개의치 않던 사경행이 어느새 그의 앞으로 다가가 긴 손으로 멱살을 잡았다.
“선, 선인!”
겁에 질린 괴생이 다급히 외쳤다.
“제 아버지가 고의로 무례하게 행동한 게 아닙니다!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부탁입니다!”
남자의 눈에 빛이 돌아온 걸 본 심묘가 평온히 말했다.
“놔줘요.”
사경행은 그제야 그를 놓아줬다. 괴생은 두려웠다. 그의 부친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떨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것 같았다.
“네가 전력이냐?”
심묘의 물음에 전력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묘는 전력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전력은 잘생기고 재능 있는 서생으로 상재청의 마음을 얻어 부부가 되었다고 했다. 여러 방면에 능통했으나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이후로 그는 자기 혐오에 빠져 도박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점차 술과 도박에 중독되었다. 상재청은 그 생활이 혐오스러워 집을 떠나 버렸다. 현재 전력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왜 떠났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전력에게 호방하고 품위 있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반 폐인이 된 눈앞의 남자에게서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재청이 네 아내지?”
전력은 몸을 떨며 고개를 들어 심묘를 보았다. 그 나름대로는 숨기려 한 듯했으나, 심묘는 그의 눈 속의 분노와 굴욕을 똑똑히 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난 상재청의 친구가 아니야. 그러니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다.”
전력이 진지한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의 말이 사실인지 명확히 하려는 것 같았다. 심묘는 거리낌 없이 그와 마주 보았다. 한참 뒤 전력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 비열한 여편네, 내 은자를 가지고 도망쳤소! 뻔뻔한 것!”
괴생은 몸을 움츠렸다. 애통한 눈빛이었다. 심묘의 시선이 괴생에게 닿았다.
“괴생, 넌 방으로 돌아가거라. 난 네 아버지와 할 말이 있단다.”
괴생이 심묘와 전력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을 들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심묘는 전력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하도록 했다. 전력이 말한 내용은 심묘가 보낸 사람이 알아 온 것과 비슷했다. 전력과 상재청이 부부의 연을 맺은 건 한때의 미담이었다. 상재청은 유주의 재녀, 전력은 재능 있는 서생이었다. 게다가 전력의 본가는 상점 몇 개를 운영하고 있어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점이 저당을 잡혔고 전가 부부는 그 타격을 견디지 못해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전력도 이 영향을 받아 당시 과거에 낙방했다. 그 뒤 해가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그때 상재청은 이미 괴생을 낳았다. 아이가 커가니 점점 더 많은 은자가 필요했지만, 빈천한 부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만 했다. 전력은 술과 도박을 좋아했다. 그런 생활에 진력이 난 상재청은 어느 날 하나 남은 토지 계약서를 팔아 은자를 가지고 도망쳤다.
전력은 사람을 사서 상재청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전력은 상호와 심 노장군의 관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상재청이 정경성으로 갔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전력은 지금도 상재청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악독한 독부! 그 토지 계약서는 장래 괴생이 자라 혼인할 때 주려고 남긴 건데 그걸 알면서도 팔았소. 그것의 마음속에는 괴생이 없는 거요. 천한 것!”
심묘가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사경행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력의 말에 조금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무심히 서 있기만 해도 서늘한 느낌이 드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누군가 우리 부자를 이곳으로 데려오며 그 여편네를 만날 수 있다고 했소. 우리를 정경성에 데려온 사람이 당신이오?”
전력은 눈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키가 큰 남자는 더욱 특별해 보였다. 보통 사람에게서 저런 기백이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한밤중에 사사로이 민가에 침입하고도 이렇게 기세등등하다니 보통 사람에게는 이런 담력이 없었다.
“맞다. 상재청이 어디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다.”
전력은 얼떨떨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떨렸다.
“대체 어디에 있소?”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력의 목소리 안에 분노와 함께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상재청은 오랫동안 부부였기 때문인지, 어쨌든 그녀가 괴생의 어머니이기 때문인지 전력은 상재청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상재청은 지금 정경성 심부 안, 삼방 주인어른 심만의 첩실로 임신 중이다. 심만의 총애를 온몸에 받고 있지. 오래지 않아 심만의 적자를 낳을 것 같구나. 심만은 아들이 없어서 만약 아들을 낳으면 상재청을 정부인으로 삼을 것이다. 정부인이 되지 않더라도 그 아이는 일생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 테지.”
전력의 온 얼굴이 찌그러졌다. 부인의 바람을 알게 된 남편의 분노였다. 굴욕과 함께 달갑지 않은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서 상재청에 대한 미련은 깨끗이 사라진 듯했다. 상재청이 심부에서 낳은 아이는 호화스럽고 부귀한 일생을 살 수 있는 데 반해 괴생은 유일한 토지 계약서도 어미가 팔아넘겨 아무것도 없다. 곧 상재청의 배 속에서 나올 아이와 괴생의 인생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것이다. 전력의 바람과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심부 삼방 주인어른은 상재청을 위해 자신의 본처와 이혼하려고 소송까지 했으니 정말 마음이 깊은 것이겠지. 지금 심 셋째 부인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안쓰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력은 냉소했다.
“그 심부 삼방 주인어른도 머리가 없구먼.”
전력은 심만에게 아내를 뺏긴 원한을 품었다. 게다가 빈곤한 사람은 늘 부유한 사람에게 적의를 품기 마련이다. 더욱이 상재청은 늘 전력 앞에서 부귀를 열망했다. 그래서 전력은 심만에게 더욱 분노하고 그를 원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셋째 부인의 부탁을 받았다. 셋째 부인은 심부 삼방 주인어른과 상재청의 핍박에 물러날 곳이 없다. 셋째 부인은 심부 삼방 주인어른과 상재청의 행복을 깨기 위해 당신을 찾은 거다.”
전력이 눈을 치켜뜨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나를? 귀인의 뜻은……?”
“적당한 시기에 삼방 주인어른에게 상재청이 당신의 아내라고 밝혀 둘의 행복을 끝장내라.”
“나는…….”
심묘는 전력이 머뭇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상재청이 다른 사람과 백년해로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거든 괜한 미련으로 살길을 남겨선 안 된다. 게다가 그쪽은 널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양심이 존재했다면 어린 자식을 떼놓고 떠날 수가 없거든. 심지어 괴생을 위해 남긴 토지 계약서까지 팔아버렸지. 상재청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다. 지금까지 당신들을 마음에 둔 적 없지. 은혜를 원한으로 갚았다. 전력, 당신네 전가는 자비로운 보살이라 시비를 가리지 않는 건가?”
심묘의 말은 조금도 예의를 차라지 않아 몹시 공격적이었다. 사경행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전력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는 심묘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괴생은 이리 힘들게 고생하는데 상재청과 심만의 아들은 왜 하늘 아래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거지? 어느 날 괴생이 그 이부동생을 만난다 해도 괴생은 남종이 되어 그를 시중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재청이 분명 모른 척할 텐데, 괴생이 어떤 마음이겠는가? 전력, 잘 생각해보거라. 정말 이것이 달가운지?”
심묘의 말은 유혹적이었다. 전력은 괴생에게 거칠게 대해도 상재청보다는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 노름꾼이 괴생의 미래를 위해 땅 하나를 남겨놓았던 것이 이를 증명했다.
“귀인, 알겠습니다. 달갑지 않으나 어쨌든 결국 괴생의 어미니 상재청을 데려가려 합니다. 어미가 맞아 죽으면 괴생도 상심할 겁니다.”
“괴생이 이 일을 모르게 하면 된다. 일이 성공하면 셋째 부인이 너희 부자에게 은자를 줄 것이다. 이 은자를 가지고 너희는 되도록 멀리 떠나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 될 것이다. 상재청이 없어도 괴생에겐 당신이 있다. 잘만 대해주면 괴생은 지금보다 잘 자랄 것이다. 이 세상에 잡아둘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흘러가는 물과 떠나간 사람이다. 상재청은 당신과 괴생을 떠나 호의호식을 만끽하며 아주 잘살고 있다. 어째서 상재청이 괴생과 모자의 정분을 위해 돌아올 거라 여기느냐? 너의 진심에 기대서? 정녕 그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가?”
전력은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심묘의 말은 토씨 하나하나 전부 맞았다. 상재청은 지금 잘살고 있으니 이전의 힘든 생활로 돌아가겠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가 정말 자신을 마음에 뒀다면, 어미로서 괴생을 마음에 뒀다면, 애초 토지 계약서를 가지고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를 멸망시킨다. 아니, 구태여 정의를 말할 필요 없이 지금 네 인생을 새로 바꿀 기회가 왔다. 한 번 실수는 해도 두 번은 하지 말아야 한다. 상재청이 죽더라도 네 행동은 옳다. 모두 너희 부자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니 자업자득인 셈.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심묘의 말을 따라 전력의 눈앞에 많은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상재청이 자신을 벌레처럼 바라보던 시선, 상재청이 집을 나간 뒤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 괴생이 너덜너덜한 의상을 입고 구석에 서 있던 일.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괴생을 부귀한 집안에서 키울 수 있다면……. 전력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결심한 듯했다.
“당신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충분한 은자를 주십시오. 우리 부자가 이곳을 떠나 먹고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심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력이 무뢰한에 불량배 같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올 줄 몰랐다. 생각보다도 상대하기 어렵지 않았다. 괴생 때문인 것 같았다. 이 남자는 능력도 없고 성격도 더러웠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은자는 당연히 줄 것이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경행이 말했다. 그는 문에 편하게 기대 있었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기백이 대단했다. 전력은 몸을 떨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인이 어찌.”
전력은 사경행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묘가 이야기를 거의 다 했으나 사경행의 기질은 작은 틈도 남기지 않고 온 방에 파고들었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위협할 때 아주 쓸 만했다. 그가 얼굴을 내밀기만 해도 상대방은 완전히 기가 죽어버리니까.
사경행과 심묘가 방을 떠날 때 괴생이 나왔다. 아이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제 어머니를 찾아주실 수 있나요?”
심묘는 괴생을 흘깃 바라보았다.
“일찍 자렴.”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은 급했다. 사경행은 그녀를 따라 성 동쪽 골목에 도착했다. 사경행이 심묘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에게 미안한 건가?”
“미안하지만 멈추지 않을 거예요. 난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잘한 거야. 넌 보살이 아닌걸.”
사경행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심묘가 전력에게 한 말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위로하려는 마음이 담긴 듯했다. 심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당신.”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한밤중에 날 데리고 나와, 함께 전력을 위협하고 후환을 없앤 건 당신이 보살이라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왜 이렇게 호의를 베푸나요?”
“감사히 여길 줄 모르네.”
사경행은 가볍게 웃었다. 심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사경행과의 관계는 점점 변했다. 그와 날카롭게 맞설 필요가 없었다. 더는 많은 일을 혼자 다 처리할 필요가 없으니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눈 내리는 조용한 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여유를 누릴 만큼.
“상재청의 일에 내 도움이 더 필요해? 네가 부탁하면 한번 고려해볼 수 있어.”
“예왕 전하, 염려 마세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심묘는 빙긋 웃었다.
“또 좋은 방법이 있는 거야? 언제 네가 해결 못 할 난제가 생겨 내게 부탁할지 궁금해지네.”
사경행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유감이네.”
애석해하는 말투에 심묘는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