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정경성에는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심부와 진부의 이혼 소송 건이 벌써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것처럼 새로운 사건은 또 다른 새로운 사건으로 빠르게 덮였다.
심부는 이전과 비슷했고, 추수원만 달라졌다. 추수원 뜰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인은 심만의 환심을 얻어 막 시집온 상재청으로, 전 주인인 진약추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인간관계만 놓고 봤을 때는 상재청이 더 나았다. 진약추와 달리 시원스러운 성격인 그녀는 사람들을 매우 편하게 해줬기에 주위와 훨씬 더 잘 지냈다. 까다로운 심 노부인도 그런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노부인이 특별히 찾은 고승은 상재청의 배 속 아이가 분명 아들일 거라 말했다. 이에 노부인은 상재청의 출신에 대한 트집도 잡지 않았다. 심부에서 가장 급한 일은 남자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 사람들이 심부의 자손이 끊어졌다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만은 매일 웃고 다녔다. 진약추와 이혼하길 잘했다고 여기며 상재청에게 아주 잘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계책을 생각해 낼뿐더러, 부의 일을 아주 능숙하게 잘 처리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처럼 내조를 잘하는 아내를 싫어할 남자는 없을 터였다.
상재청과 심만은 뜰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재청은 두꺼운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화로가, 손에는 난로가 있는데도 심만은 혹 그녀가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며 여종들에게 전심전력으로 상재청을 보살피라 분부했다.
“대인, 오늘은 조금 한가하신가 봐요.”
심만은 상재청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찌 오늘만일까? 요즘 조정에 일이 없어서 당신과 아이 곁에 많이 있어줄 수 있소.”
“정말 좋네요. 아이도 아버지와 많이 친해질 수 있구요.”
심만은 상재청을 품에 안았다.
“나는 당신이 아들을 낳아 내 일이 헛되지 않길 바라오.”
심만의 상황을 눈치챈 상재청은 그의 미간이 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았다.
“대인, 심 소저의 일로 걱정하시나요?”
심만은 심묘와 주왕 부수안을 혼인시키거나 두 사람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이야기도 돌지 않으니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게 분명했다. 상재청은 심만이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 몰랐지만, 이 일이 그의 벼슬길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큰형님이 심묘의 단속을 잘해 심묘가 부에서 나오질 않으니 기회를 찾지 못했소. 게다가 부의 보호가 철통같아 손쓰기 어렵다오. 계속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데.”
상재청은 망연자실한 심만을 보며 웃었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인가요? 심묘 아가씨가 외출하지 않으면, 외출하게 만들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심묘 아가씨가 외출하는 걸 심 장군이 알게 되면 호위를 데려가게 할 테지요. 심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있으니 호위는 모두 고수일 거예요. 한 번에 성공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심묘 아가씨를 심 장군 몰래 외출하게 만들면 일이 쉬워질 겁니다.”
심만이 눈을 반짝였지만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는 속이기가 쉽지 않소.”
심묘와 친한 아가씨는 나담을 제외하면 풍안녕뿐인데 그녀는 풍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풍안녕의 명의로 심묘를 불러내면 심묘는 반드시 반응할 터였다. 상재청이 미소 지었다.
“아무리 보호가 철통같아도 어린 아가씨이니 담력이 작고 마음속에 걱정이 있을 겝니다. 대인,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좋을 테지요. 심묘 아가씨의 부모님이나 오라버니를 수로 삼아 그들이 위험하다고 하는 겁니다. 심묘 아가씨가 아무리 침착하다 해도 핏줄과 관련되면 당황해 정신이 나갈 겁니다. 대인, 기회를 만들어 이용하십시오.”
심만은 곰곰이 생각한 뒤 상재청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 허점이 있으나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소. 세심하게 계획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당신은 늘 내게 놀람과 기쁨을 주오.”
심만은 흥분한 시선으로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칭찬의 빛이 드러났다. 상재청이 살짝 고개를 숙여 웃었다.
“대인은 정말 농담도. 대인을 따르게 되었으니 전심전력으로 대인을 위해 살아야지요. 이 일은 광명정대함이 부족하지만, 조정에서는 부자지간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저는 대인을 우선시할 겁니다.”
상재청 자신이 듣기에도 이 계략은 악랄했다. 지금 심만은 자신이 묘책을 생각해냈다고 대단히 좋아했지만 이후 돌이켜보면 자신을 잔혹하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정 일에서는 혈육의 정도 없다며 이 일은 심만을 제일 먼저 생각해서 떠올린 일이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심만이 자신을 나쁘다고 여기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욱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에 심만은 그대로 넘어갔다. 그녀가 도량이 넓고 또 자신을 위해 어려운 부분도 이겨낸다고 여기며, 분에 넘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심만은 깊은 정을 담아 상재청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인을 앞에 두고 내가 또 무슨 바람이 있을까?”
“대인을 만난 것은 제 복입니다. 대인께서 제게 극진히 잘해주시니 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상재청이 더 낮게 엎드릴수록 심만은 그녀를 더욱 사랑했다. 심만은 그녀의 눈 속에 스친 득의를 보지 못했다. 상재청 자신에게 남자나 감정은 눈앞에서 흩날리는 구름과 같았다. 궁핍한 생활을 겪고 난 후 부귀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심만을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심만이라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심만이 자신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진약추와 달랐다. 진약추는 심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변심에 냉정을 잃었다. 반면 자신은 심부의 부귀와 관리 부인이라는 신분을 사랑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심만은 그 자신의 취향을 완전히 파악하고 맞춰온 약아빠진 진약추 같은 사람에게도 좋지 않은 결말을 안겨주었다. 그녀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 노래, 춤 따위에만 기대면 부족하다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달랐다. 심만에게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임을 계속해서 드러냈다. 심만이 영원히 자신을 버리지 못하도록.
심만은 상재청과 함께 잠시 더 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는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있다며 상재청의 하인에게 그녀를 잘 돌보라고 분부한 뒤 떠났다.
심만이 서재로 돌아오자 남종이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주인어른, 문지기가 누가 보냈는지 몰라도 대인께 온 편지라며 줬습니다.”
심만이 편지를 받아보니 봉투는 깨끗했다. 낙관이 발견될까 걱정한 것이 분명했다. 조정 관리들은 때때로 기밀 편지를 보냈다. 이에 심만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빠르게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는 첫 줄을 보고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첫 줄에는 “심 셋째 어른, 당신이 총애하는 첩이 음탕한 여자인 것을 아시나요?”라고 쓰여 있었다. 심만은 충격으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그는 한 손으로 탁자를 짚으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는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는 아주 짧게 쓰여 있었으나 내용은 조금도 간단하지 않았다. 상재청이 유주에서 이미 시집을 갔으며 아들도 하나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재청은 지금 심부 심만의 총애를 받는 첩이다. 문제는 그녀가 아직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편지가 사실이라면 심만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관아에 고발당할 수 있었다.
심만은 편지 내용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는 경시하는 시선으로 편지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진약추가 이 편지를 보내 이간질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줄을 보고 난 뒤 그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상재청의 은밀한 곳에 작은 붉은 반점이 있다는 마지막 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일반 사람은 상재청의 은밀한 곳에 있는 붉은 반점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무런 증좌도 없이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다. 편지는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이미 정경성의 동쪽 민가에 와 있다고도 밝혔다. 심지어 구체적인 주소도. 심만은 편지를 빠르게 찢어버리고 남종에게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심만은 생소한 편지 내용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상재청을 절대적으로 신임할 수도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과거를 몰랐다. 일단 직접 가서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라는 자들을 만나 보기로 했다.
마차가 성 동쪽 주택에 도착했다. 심만은 내리지 않고 남종에게 문을 두드리게 했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여덟,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딱 봐도 몸이 아주 허약해 보였고, 어린아이의 천진함은 찾아볼 수 없는 조숙한 인상이었다. 심만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보고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순간 그는 편지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아이는 상재청을 닮아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상재청에 비해 아이의 얼굴에는 나약함과 자괴감이 비쳤으나, 어쨌든 생김새는 판박이였다. 상가에는 다른 자식이 없으니 아이가 상재청의 남동생일 가능성도 없다. 남종도 남자아이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는 심만의 분부에 따랐다.
“아이야, 상재청 부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남자아이가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어머니를 왜 찾나요?”
심만은 눈을 감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편지는 사실이었다. 유주에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다. 남종은 심만의 곁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남종이 조심스럽게 심만을 바라보았다. 심만은 심호흡을 했다.
“조사하거라! 유주로 사람을 보내 조사해! 상재청에게 도대체 무슨 내막이 있는지 아주 명확히 조사해!”
심만이 상재청을 좋아한 이유는 그녀가 온화하면서도 담대하고 재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정말 남편과 아들이 있다면 심부는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아내를 부양하며 의기양양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재청이 정말 남편과 아들을 버렸다면 그녀는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심만은 모종의 방면에서 매우 까탈스러웠다. 그는 아내가 일 처리를 정연하게 하길 바라는 한편,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선녀 기질은 유지하길 바랐다. 이에 심만은 오늘 일에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심만은 바빠 보였다. 그는 매일 심부로 돌아오면 서재로 달려갔다. 그래서 상재청은 그를 볼 수 없었다. 때때로 상재청이 그에게 간식을 보냈지만 심만의 태도는 이전 같지 않았다. 처음 겪는 그의 냉담한 태도에 상재청은 불안했으나, 심만이 며칠 공무 때문에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다는 남종의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러나 남종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심만은 유주에서 조사한 결과를 받았다. 이전에 받은 편지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상재청은 원래 남편이 있었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당시 일대 미담이었다고 했다. 심만은 편지를 다 읽고 분노해 탁자를 뒤엎을 뻔했다. 새로 들인 첩이 다른 사람의 아내라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정경성에 찾아왔으니 이 일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신은 온 정경성의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어사들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 것이었다.
상재청을 내치면 될 일이지만 자신은 상재청 때문에 진약추와 이혼하고 진부와 원한을 맺었다. 물고기의 눈알을 진주로 착각했으니 이제 와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상재청의 배 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있으나 자신은 상재청 때문에 벼슬길에서 내려오게 생겼다. 물려줄 가업이 사라질 텐데, 자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아내라 생각하니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사색했다.
그때 남종 하나가 급히 달려 들어와 크게 소리쳤다.
“주인어른, 일이 생겼습니다! 큰일입니다!”
심만은 미간을 찡그렸다.
“허둥대지 말고 제대로 말을 하거라!”
남종은 떨리는 손으로 심만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러면서 심만의 시선을 피했다. 심만은 의심스럽다는 듯 남종을 바라보았다. 이 남종은 그를 따르며 평소 그와 동료의 편지를 전달하곤 했다. 편지 속 두 줄을 읽은 심만의 안색은 한순간에 검푸르게 변했다. 공포의 기색도 어려 있었다.
어서방. 문혜제가 크게 분노했다. 그는 상소문을 매섭게 바닥으로 던지며 냉소했다. 태감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황제가 한 번 분노하면 시체가 수천수만 생기기 마련이니.
이 상소문에는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심만이 한 일이 나열돼 있었다. 보기에는 별것 아닌 내용을 나열한 것 같아도 문혜제는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파했다. 그는 형제간의 참혹한 살육 현장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니만큼 숨긴 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재주가 대단했다. 이 상소문은 아주 교묘하게 쓰여 있었으나, 심만과 정왕 부수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문혜제가 아홉 아들 중 가장 안심하고 곁을 내준 이들은 태자와 정왕 부수의였다. 태자에게는 정통성이 있었지만 몸이 약해서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왕 부수의는 뛰어나지만 조정 일을 묻지 않았다. 게다가 그 모친 동숙비도 다투지도 뺏지도 않는 성격이라 문혜제는 매우 편안했다.
사람은 누구나 권력에 한번 물들면 그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문혜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들이 성장해 용의 총명함과 호랑이의 용맹함을 갖춘 나이가 되니 자신도 조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황자들이 음과 양으로 다툴 때 소리 내 제지하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이렇게 서로 제약하여 균형을 이루는 국면이 가장 좋았다. 그는 자식들끼리 물고 물리는 장면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니 당연히 문혜제는 황자와 대신들이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아홉 아들에게는 각각 옹호자들이 있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평소 나서지 않고 고개를 숙이던 부수의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가 그동안 조정의 일을 묻지 않았던 게 전부 가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훈계해야겠구나. 하나하나 짐을 잘도 속이는구나. 이렇게 됐으니 짐이 그들의 바람을 들어줘야지.”
문혜제의 노기는 이전에 비할 바 아니게 강하게 일었다. 그의 안색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조정 일은 순식간에 변했다. 관리가 농부가 되는 일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잘못을 범해 시골로 유배를 가면 그나마 운이 좋은 셈이었다. 대부분은 감옥에 갇혀 목이 달아나고 구족이 연루되었다. 심만도 곧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심부는 진부와 이혼 소송을 마친 뒤 일이 점점 순탄해지리라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관아 관리가 들이닥쳐 심부 사람을 잡아갔다. 호기심이 동한 백성이 물어보니 심만이 조정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 심부가 연루되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명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백성들은 이 일이 그저 심만의 사소한 일 처리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은 이번 일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정말 심만이 일 처리를 잘못했다면 온 심부가 연루될 리 없다. 분명 구족이 연루되는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쨌든 백성들은 요란하게 설레발을 쳤다. 심부가 예전만 못하다 여기며 모두 심부에 대해 험담을 늘어놨다. 그들은 위무대장군 심신의 이야기도 꺼냈다. 심부 사람들은 심신이 실의에 빠졌을 때 심부 혈족 안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는데, 이 일이 복이 되어 심신이 재난을 피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백성들의 말이 장군부에 전해졌을 때 심묘는 웃었다. 그러나 나담은 도리어 양 주먹을 쥐고 성을 냈다.
“심부 사람들이 고모부와 고모를 힘들게 했는데 아직 아무것도 갚아주지 못했잖아. 그런데 손을 쓰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되다니.”
나릉이 잠시 사색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 셋째 어른은 아무래도 무언가 큰 죄를 범했나 봐. 이렇게 처벌 규모가 크다니.”
“폐하께서 이렇게 노발대발하시는 걸 보니 반드시 제멋대로 일을 저질렀을 거야. 그러나 이 일은 우리와 상관없어.”
심묘의 말에 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는 재미난 구경만 하면 될 일이지.”
근심 어린 표정의 심구가 심묘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시 다물었다. 나릉과 나담이 떠난 뒤 심구는 심묘를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문을 잠근 그가 심묘에게 물었다.
“교교야, 심부 일, 네가 한 거야?”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오라버니, 왜 모든 일을 내가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폐하께서 일 처리를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시는 거잖아. 내게 셋째 숙부의 공무에 손댈 능력이 있겠어?”
심구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교교야, 나는 네가 계획을 공유하길 꺼리는 걸 알아. 그러나 조정 일은 네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어떤 때 네가 이긴 듯 보이고, 혹은 무슨 변수가 생기지 않을 것 같지. 그러나 자칫하면 너도 연루될 수 있어.”
그의 말에 심묘는 유감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오라버니, 이 일은 절대 나와 관련 없어. 셋째 숙부가 하옥된 건 셋째 숙모가 배후에서 손을 써서겠지. 숙모와 숙부 사이가 그렇게 시끄러웠는데, 숙모가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거라 여긴 거야?”
이번에는 심구가 의아해 물었다.
“셋째 숙모?”
“숙모는 숙부와 오래 생활했으니 숙부의 일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마음만 먹으면 배후에서 찌르기 누구보다 쉽지 않겠어? 숙부가 곁의 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해 온 부가 연루된 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심구는 한참 생각하는 듯 보였으나 여전히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았다.
“이 일을 넌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야?”
“난 매일 그들이 좋지 않은 일을 당하길 기원하니까.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어.”
심묘는 사경행과 오래 지내서 그런지 말투에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는 기색이 드러났다. 평소 심묘의 단정하며 대범한 모습만 본 심구는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왠지 그녀가 낯설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튼 생각을 끊어냈다.
“감시했다 해도 이 일은 너무 공교로워. 교교야, 네가 배후에서 일이 더 커지게 조장한 것 아니고?”
심구는 일부러 눈을 크게 부라렸다. 겁을 주려는 속셈이었겠지만 오히려 웃음을 자아내는 표정이었다. 심묘는 웃음을 가볍게 흘렸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거지. 어쨌든 이 일은 내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야.”
그제야 심구는 표정을 풀었다.
“네 담력은 어찌 그리 큰 거야. 하늘을 뚫겠구나.”
심묘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잔소리를 끊었다.
“오라버니는 왜 이리 잔소리꾼이 된 거야? 별일 아니야. 게다가 심부가 이 지경이 된 건 자업자득인 셈이야. 셋째 숙부가 일 처리를 무디게 하지 않았다면 약점이 잡힐 리 없었어. 그리고 숙부와 숙모가 금실이 좋았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을 거야. 문제가 처음부터 어디서 시작했는지 생각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게 맞지 않겠어?”
직설적인 심묘의 말에 심구는 어안이 벙벙했다. 심묘 하인의 배웅을 받으며 뜰 밖으로 나온 심구는 그제야 사납게 머리를 치며 정신을 차렸다. 심묘는 터무니없는 말로 억지를 썼다.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황제가 조정에서 신하를 가지고 노는 대범한 궤변이었다. 심구는 동생이 언제 이렇게 당당하게 헛소리하는 법을 배운 것인지 의아했다. 게다가 이 태도는 아주 익숙해 이미 여러 번 본 것도 같았다.
심묘는 심구를 보내고 탁자 앞에 앉아 길게 숨을 쉬었다. 문혜제는 성격이 단호했고 일 처리도 신속했다. 그는 황자와 신하가 가까이 지내는 걸 조금도 용인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일은 몇 년 전부터 이어진 관계로 말미암았으니 더욱 엄히 처벌할 게 분명했다.
이번 생, 많은 일이 점점 희미해졌으나 심묘는 자신이 상대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잊지 않았다. 심부의 이방과 삼방은 죽을 길로 안내했더니 알아서 그 길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부수의는 달랐다.
부수의는 어두운 곳에 숨은 가장 잔인한 뱀이었다. 무해해 보이지만 미처 막아내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사람을 깨물 수 있었다. 심만에게 시켜 자신과 주왕 부수안을 엮으라고 한 일처럼 말이다. 자신이 부수의 앞에서 전력으로 숨기고 있어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주시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숨을 방법을 찾는 건 좋은 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감추던 것을 드러내고 세력을 엇비슷하게 만든 채 바둑을 두는 게 나았다.
부수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야심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만의 일로 문혜제가 의심을 품긴 했어도, 부수의의 수완을 보면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드시 만회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이번 한 번으로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그 껍질을 한 겹 벗겨야 했다.
심만 하나로는 부족했다. 이 바둑판에는 더욱 뛰어난 수를 둬야 했다. 심묘는 경칩에게 모경을 불러오라 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모경에게 몇 마디 분부했다.
* * *
심만은 하룻밤 사이에 화려한 관저에서 감옥으로 이동했다. 그는 최근 들어 도통 심부에 운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막힌 듯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았다. 미신을 믿는 자들을 경멸했지만, 그런 자신도 이젠 누가 저주를 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방은 이미 몰락했고 이번에는 삼방의 차례였다.
상재청을 들이면서 운이 다시 트일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지금 온 심부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서 감옥에 있었다. 대방만 제외하고 말이다. 대방은 이미 문혜제가 중용해 장래 상황이 어떻든 적어도 지금은 자신들과 비할 바 아닌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이전 위무대장군의 명성이 함께 하던 시절, 심부에는 매일 좋은 관계를 맺어두기 위해 찾아오는 방문자가 즐비했다. 심부는 은자가 부족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모두 자신들의 풍채에 대해 경탄했다. 심귀와 심만은 문관이지만 해마다 벼슬이 높아졌으며, 두 딸은 미녀라 좋은 혼사를 맺으면 벼슬길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심원백과 심원이 건재했고 영리한 임완운과 부드러운 진약추가 있었다. 만사 즐거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짧은 시간 안에 사람도 풍경도 달라졌다. 하늘에서 계속 땅으로 내려가길 거듭하더니 결국에는 감옥에 갇히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옆 감옥에는 심부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심 노부인과 상재청이었다. 심만은 노부인의 원망 어린 신음소리를 들으며 초조해졌다. 심귀가 무기력하게 물었다.
“셋째,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어째서 폐하께서 우리 온 부 사람을 잡아 오신 거지?”
심만은 냉소했다.
“저지른 일? 둘째 형님도 폐하께서 신하를 잡아들이는 데 필요한 이유를 마음대로 만드실 수 있다는 걸 알 거요. 폐하께서 날 곤경에 빠뜨리시려는 거지. 정말 직무상 잘못을 저질렀다면 온 부 사람을 잡아 오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는 분명 엄하게 질책하려는 의미지.”
옆 감옥에서 그 말을 들은 상재청은 놀라 애가 탔다.
“폐하께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 건가요? 혹시 대인께서 폐하의 노여움을 샀나요?”
평소라면 심만은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을 것이었다. 그러나 심만은 상재청에게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 더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함께 있으니 어디서 나온 마음인지 몰라도 심만은 조금 위안을 얻었다. 상재청은 부귀한 미래를 위해 자신을 속였으나 지금 그 부귀가 물거품이 되었으니 후회해도 늦었다.
“모르겠소.”
심만은 남종이 준 편지가 떠올랐다. 남종이 준 편지는 그와 개인적인 교제가 있는 관리가 보낸 것이었다. 그 관리는 어디서 들은 소식인지 몰라도 심만의 원수가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는 다름 아닌 지난 몇 년간 심만과 부수의 사이에 왕래한 증좌가 적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심만은 지난 몇 년간 부수의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마음을 정하지 못해 부수의라는 바둑돌을 집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자신과 부수의가 일찍이 동맹을 결성했다고 보일 만도 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증좌를 문혜제가 봤다면 그는 필시 크게 분노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 일을 무사히 넘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자신의 원수가 왜 갑자기 이런 증좌를 올렸을지 추측하던 심만의 마음에 희미하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진약추는 자신과 오래 부부로 지냈다. 게다가 그녀가 규방 사람이라 조정 일을 잘 몰랐기에 자신은 그 앞에서 조심하지 않았다. 기밀 사항도 흘리듯 말하기도 했다. 이혼으로 앙심을 품은 그녀가 배후에서 찔렀다고 가정한다면 이 일은 모두 말이 되었다.
부부일 적의 진약추는 자신에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칼을 들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답답해진 심만은 상재청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그녀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설령 자신과 진약추가 결국엔 마음이 멀어졌을지 몰라도 지금 이런 상황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재청의 배 속에 그 자신의 혈육이 있었으나 심만은 더 이상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심만 일가가 하옥된 이유는 직무를 잘 처리하지 못해서라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은 모두 문혜제가 심만이 사적으로 부수의와 가깝게 지낸 것에 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에 온 심부가 연루되었으니 부수의도 당연히 피할 수 없었다.
부수의에게는 궁중 첩자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심만과 진약추 부부간의 일에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그러니 절대 문혜제가 자신에게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매우 의심스러웠다. 문혜제의 건강은 이전만 못했다. 그래서 문혜제는 황자와 신하 사이의 관계에 예전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살얼음을 걷는 듯한 이때 자신과 심만이 가깝다는 소문이 나니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다. 매장당하는 것은 심만이지만, 자신도 결코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민 부수의가 냉랭히 말했다.
“일을 성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쳤군!”
배랑이 잠시 생각했다.
“전하, 지금 가장 좋은 것은 이 일에서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이 결백을 입증해야 합니다.”
“나도 당연히 아는 바요. 선생,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나?”
“증좌가 확실하니 부인하면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전하께서 인정하시되 전부 심만에게 밀어버리십시오. 전하께서 황자의 금기 사항을 어겼으나 심만이 주동적으로 의탁해왔고 전하는 번민했을 뿐이라고 해명하면 폐하께서 관대하게 넘어가실 겁니다.”
부수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와 같소. 이번에는 희생을 치러야 해. 그러나 쓸모없는 자를 남기면 더 많은 사고가 생길 테니, 일찍이 제거하는 게 좋겠구나.”
부수의의 말에는 심만을 희생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상소에는 부인할 수 없는 증좌가 있어서 조사하면 다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이 모두 심만 혼자의 생각에 불과하다면, 심만이 떠받들려 했지만 부수의가 이에 동요하지 않았다면 부수의는 용서받을 수 있었다. 부수의는 오히려 억울하게 연루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심만의 죄업은 더 무거워지는 셈이다. 문혜제의 진노 아래 심만이 받을 처벌은 더 가혹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부수의는 심만의 결말 따위는 당연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부수의는 자신에게 쓸모없는, 심지어 말썽을 가져온 사람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부수의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와 심부는 인연이 있어 심부 손에 몇 번이나 나쁜 일을 당했지. 이번에는 진약추가 앙갚음을 하겠다고 벌인 일이지만, 내 생각에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배후에서 누군가 조종한 것 같구나.”
배랑은 심장이 뛰었으나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급히 처리할 건 전하께서 먼저 증명하는 겁니다. 시간을 오래 끌면 폐하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아마 전하께서도 화를 입으실 겁니다.”
부수의가 웃었다.
“귀찮긴 하나 만회할 수 없는 지경은 아니니 다행이오. 그러나 선생, 심부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오?”
배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의 대업을 가로막는데, 남길 수 없지요.”
부수의가 크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였다. 그는 기쁜 눈빛으로 배랑을 바라보았다.
“선생의 뜻과 내 뜻이 같구려. 난 아직 일이 좀 남았으니 선생은 먼저 물러가시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다시 선생과 상의하겠네.”
배랑이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자신을 주시하는 부수의의 눈 속에 음산한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 * *
심부의 일은 소문이 돌아 모두가 알았다. 진국 태자부에도 당연히 전해졌다. 화원 안 돌 탁자 앞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심모는 대단히 놀랐다. 황보호가 보고하는 척후에게 눈짓했다.
“오, 정말 온 부가 하옥되었느냐?”
“확실합니다. 듣자니 황제가 매우 진노해, 이번에 사형으로 다스릴 거랍니다.”
황보호는 고개를 돌려 심모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놀라고 의아한 모습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얼굴에서 고통은 보이지 않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심모는 진약추가 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자신은 모친의 말에 다른 숨은 뜻이 있다고 여겼다. 혹시 오늘 심부의 결말은 그녀 때문인 게 아닐까 추측하던 심모는 황보호가 자신의 기분을 알아차릴까 봐 고개를 숙여 거짓으로 슬픈 척했다.
“어떻게 그런…….”
“단지 일 처리를 잘못했다고 집안을 몰수할까? 아마 다른 일이 있을 거야. 심모, 심부 사람이 보고 싶으냐?”
황보호가 심모를 보고 물었다. 놀란 그녀는 말을 더듬거렸다.
“지금 가면 부친을 상심케 할 테고, 전하께도 폐를 끼칠 겁니다. 피, 필요 없습니다.”
심부가 가산을 몰수당했지만, 자신, ‘심모’는 왕가에 시집간 여인이기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왕가가 아닌 이곳에 있는 것이 발견되면 자신 역시 잡혀갈지도 몰랐다. 큰 재난이 닥치면 각자 달아나기 바쁜 법이다. 심부는 심모에게 무정했고 심모도 심부에 도의가 남지 않았다.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 숨기도 바쁘니 일부러 찾아갈 리 없었다.
이에 황보호도 이 문제를 더는 생각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심모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황보호가 간 뒤 심모는 진약추에게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 물으려 편지를 썼다. 놀라고 두려웠으나 자신에게 매정했던 온 심부 사람이 감옥에 갇힌 것을 보니 살짝 기분이 좋기도 했다. 더욱이 자신의 어머니 자리를 빼앗은 여인인 상재청이 심만과 함께 고통받고 있다니 기뻤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황보호의 시첩도 그리 낮은 신분이 아니라고 여겼다. 심지어 득의양양해졌다. 자신이 심부에 남았다면 지금 쇠사슬에 묶여 하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모의 이런 즐거움도 이날까지였다. 다음 날 정경성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비밀은 물에 돌을 던진 듯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새로운 화제에 흥미진진하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심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 * *
정경성에 놀라운 비화가 폭로되었다. 하늘이 아직 밝지 않은 이른 아침, 중년 남자가 관아 입구에서 북을 치고 무릎을 꿇은 채 억울함을 호소했다. 심부의 셋째 어른 심만이 부인을 빼앗아 첩으로 삼았으니 세상이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차림새와 생김새는 보잘것없었으나 어디서 배운 건지 말솜씨 하나는 뛰어나 점차 구경하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반 시진에 불과한 시간에 온 정경성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부와 심부의 소송이 하도 시끌벅적하여 정경성 백성들은 이 소문 속의 첩인 상재청에 대해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심만은 상재청을 위해 여러 해 부부로 지낸 본처와 이혼했고 심지어 조금의 인정도 베풀지 않았다. 상재청은 심 노장군의 옛 친구 딸로, 교양이 있고 사리에 통달하며 온순하고 우아해 보였다. 진약추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처지진 않았다. 그런 여인이 심만의 아이도 가졌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상재청을 응원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이 중년 남자가 한 소년을 데리고 관아 입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재청의 좋은 인상을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는 심만이 아내를 빼앗았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유주와 정경성이 가깝지 않을뿐더러 상재청이 스스로 혼인하지 않은 아가씨라고 밝히며 심부에 의탁한 것을 알고 있었다. 심만이 민가 부인을 강압해 빼앗은 게 아니라 상재청이 그에게 먼저 다가간 것이었다. 심만은 상재청의 진면모를 보지 못한, 다른 사람의 아내를 부양한 헛똑똑이었다.
남자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관아의 낙인이 찍혀 있고 상재청의 이름이 쓰여 있는 혼인 증명서를 꺼내놓았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관아에 가짜 공문서를 가져오진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남자를 따라온 소년의 얼굴은 상재청을 쏙 빼닮았다. 아이는 남자의 옆에서 침묵했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몇십 년 만에 이런 큰 웃음거리를 본다며 신나서 떠들어댔다. 대부호 집안에 시비가 많다고 하지만, 대부호 주인어른이 이렇게 어리석을지는 예상치 못했다. 심부가 건재하던 이전이라면 이 일을 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 빨리 온 정경에 소문나지 않았을 터였지만, 심부 사람들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 절묘한 시기에 오늘 이 남자는 갑자기 나타났다. 게다가 아침 일찍부터 시끄럽게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기에 이를 덮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관아의 하급 관리는 더 이상 심부에 잘 보일 필요도 없었으므로 그저 사람들과 함께 구경할 뿐이었다.
진부. 외진 뜰에 있던 진약추는 시정이 바깥에서 알아 온 소식을 듣고 몸을 흔들며 웃었다. 요즘 그녀는 피곤하고 노곤해서 용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진약추가 이러면 이럴수록 진부는 더욱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진약추는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오로지 심부를 끌어내리기 위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목표를 완벽하게 이뤘다. 심만과 오래 부부로 지냈으니 심만의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심만의 수하 중 한 명을 매수해 증좌를 가져오게 했다. 이에 자잘한 것을 더해 심만의 원수에게 보냈고, 조마조마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터였다. 드디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심만을 깊이 사랑한 만큼 미움도 컸다. 먼저 자신에게 물러날 곳이 없게 만들었으니 그들도 밟고 서 있을 땅이 없게 해줄 계획이었다. 절대 상재청과 심만이 잘 살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온 심부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진약추는 오랜만에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날,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나타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남편과 자식을 버린 여인에게 패할 줄은 몰랐다. 진약추는 미친 듯 웃다가 종국에는 입꼬리가 조금 씁쓸해졌다. 당시 침착하게 사람을 보내 유주를 조사했다면 이런 결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심만은 까탈스러운 사람이니 상재청의 신분을 알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혐오감을 느껴 손을 뗐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이었다.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으니 누구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마님, 이제 어떡할까요?”
시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약추는 진부에서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심부 일은 일단락되었으니 자신도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그녀는 피곤한지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해보자. 심모는 지금 의지할 곳이 있으니 난 지금 뭐든 할 수 있다. 며칠 지나 정경성을 떠나 작은 곳을 찾아 조용히 여생을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지. 정경성 안에 있으면 사람들에게 비웃음이나 당할 테니.”
진약추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정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는 진약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어쨌거나 희망만 있다면 장래 더 나아질 수 있다.
“먼저 심모를 보러 가야겠다. 안심이 되질 않는구나.”
진약추는 명치를 문질렀다. 그때 바깥에서 화의가 급히 달려 들어오는 게 보였다. 화의의 온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마님, 큰일입니다. 사고가 생겼습니다!”
진약추는 급히 일어나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
“넷째 아가씨, 넷째 아가씨!”
심모 이야기를 하니 진약추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화의의 손을 잡고 다급히 물었다.
“심모가 왜?”
화의는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넷째 아가씨가 진국 태자부에 있다는 사실이 발각됐답니다.”
심모가 진국 태자부에서 잡혀갈 때 황보호는 이를 전혀 막지 않았다. 심모가 울며 그의 소매를 붙잡고 애원했으나 황보호는 위로의 말만 했다.
“별일 없을 테니 그들을 따라가거라.”
그의 말에는 조금도 심모를 보호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조정에서 온 관리는 대단히 영리해서 황보호의 태도를 보고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았다. 관리는 거칠게 심모를 잡아 데려갔다. 황보호는 한 무리의 사람이 심모를 데리고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호위에게 물었다.
“명제 궁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가서 알아보거라.”
아침 일찍 심가 삼방 적녀인 심모를 찾는다며 관리가 찾아왔다. 심모가 진국 태자부에 들어온 뒤 심모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관가 적녀가 진국 태자의 첩실이 됐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리는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진국 태자부로 달려와 심모를 찾았다.
문혜제는 황보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심모를 데려간 이유는 심모도 심부의 일원이니 관계를 벗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심모와 심동릉이 바꿔 혼인한 이야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았으니 일부러 이 문제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큰 풍파는 단순한 일이 아닐 터였다. 문혜제가 큰 기세로 움직이니 황보호는 그 안에 다른 일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명제 황실에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으니 황보호도 그들과 맞서지 않았다. 그 자신에게 심모는 심묘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자색도 있어 즐긴 것뿐, 딱히 그녀를 마음에 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추세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명제 궁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황보호는 아는 게 없었다. 잠시 생각한 황보호가 곁에 있던 시위를 불렀다.
“넌 정왕부로 가서 말을 전달하거라.”
심부의 일은 혼란스러웠다. 평평하던 비단에서 갑자기 한쪽 실이 빠진 것과 같았다. 급히 다른 쪽 실을 당기니 수놓인 무늬가 엉망진창이 되어 본래의 그림을 알아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심만이 일 처리를 그르쳤다며 감옥에 갇혔고 그 뒤 유주에서 상재청의 남편과 아들이 찾아와 관아 앞에서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게다가 적출 딸은 진국 태자부의 시첩이 되었고, 삼방 적녀와 이방 서녀가 바꿔 혼인한 일도 연루되었다. 심부 후원의 많은 혼란은 사람들을 탄식시키는 동시에 심부가 귀신에게 미움을 산 게 아닌지, 그게 아니면 어째서 계속 불운에 휩싸이는지 의심하게 했다.
오후에 심묘는 침상에서 잠시 쉬려 했다. 심부 일은 이미 생각한 순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혜제가 어찌 나올지도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심묘가 막 피풍의를 벗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사경행이 언제 들어온 건지 자신의 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무심하게 무슨 털 뭉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물건을 주시하니 이전에 본 그 흰색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털에서 윤기가 흘러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는 심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했다.
“누가 예왕 전하께 제 침상에 올라가라고 했나요?”
밤에 창문을 넘어 들어와도 뭐라 하지 않았더니 이제 그는 감히 대낮부터 남의 침상에 올랐다. 자신이 온 장군부 사람이 길가에 늘어서서 환영하는 귀인이라고 착각하는 걸까. 정말 건강이 심하게 상하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간덩이가 부은 것 같았다. 사경행은 코를 찡그렸다.
“축하해주러 특별히 왔더니 왜 그런 반응이야?”
“축하? 무슨 축하요?”
심묘가 당황했다.
“심부가 네 바람처럼 감옥에 들어갔잖아.”
사경행이 손을 풀자 백호가 “어흥” 하고 울더니 즐겁게 심묘의 침상을 뛰어다녔다. 백호는 심묘의 비단 이불을 발톱으로 뜯었다. 사경행이 턱을 매만졌다.
“상재청의 오욕(汚辱), 심만의 후회, 진약추의 연루, 심모의 하옥, 모두 기뻐할 가치가 있어. 그런데 즐겁지 않으냐?”
그는 눈꼬리를 굽혔다. 결과를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 심묘는 불편했다. 그녀는 사경행의 소매를 붙잡아 그를 침상에서 일으키려고 했다.
“축하할 만하지요. 은자를 선물로 보냈다면 예왕 전하께서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게 어떻게 나의 성의를 나타내겠느냐? 게다가 이 한판으로 너는 부수의를 매장할 테니 더 기쁘고 축하할 일이지.”
심묘는 사경행의 소매를 세게 잡아당겼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며 예의 그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자, 심묘는 저도 모르게 손의 힘이 풀렸다. 사경행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심묘의 손을 갑자기 잡아당겼다. 힘에 딸려간 몸이 사경행 품에 안겼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황보호도 휘감으면 황제는 쉽게 부수의를 놔주지 않을 테지. 네 몸에 불이 붙을까 두렵지 않으냐?”
사경행의 웃음 띤 시선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분명 정인에게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내용은 한기가 흘렀다. 심묘는 눈을 들어 사경행을 보았다. 이전 아름다운 용모의 소년은 가벼웠다. 일부러 경박함을 가장해서 행동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 지금, 그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냉소적이고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하다는 듯 미소 지으나 그 준수한 얼굴 아래 숨긴 야심은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심묘는 불현듯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기자고 의논한다.”라는 옛말이 떠올랐다. 나쁜 놈에게 그의 이익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뜻이었다.
사경행의 말이 맞았다. 진약추와 심만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상재청은 자신이 한 일에 걸맞은 징벌을 받는 것이었다. 이 모든 구실은 심묘 자신의 최후를 장식할 한 수를 위한 눈가림이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진정한 적을 잊지 않았다. 가장 두렵고 미운 적은 부수의였다. 이미 심만과 부수의와의 관계로 어지러운데 심모가 황보호의 사람임이 드러났다. 심모는 심만의 딸이니 사람들은 황보호와 부수의 사이에도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할 것이다.
의심 많은 문혜제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 조사할 것이다. 황보호와 부수의가 정말 어떤 관련이 없다면 당연히 무엇도 나오지 않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이 두 사람은 동맹할 마음이 있었다. 문혜제가 샅샅이 조사하면 재미난 것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수의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되는 길에서 문혜제의 의심을 방비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터였다.
자신은 이 한 수를 잘 숨겼다 여겼는데, 사경행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울긋불긋한 외각 아래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둔 진짜 수를 보았다. 심묘는 사경행의 몸 위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사경행이 그녀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받쳐 그녀가 거의 그의 몸 위로 엎드리게 했다. 애매한 거리에서 심묘는 극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지금 바깥에서 누가 들어온다면 심묘의 명예는 한순간에 없어질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자신의 행위에서 타당치 않은 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때 갑자기 심묘가 웃음을 터트린 후 천천히 말했다.
“일으킨 불이 나를 태운다?”
사경행은 여유롭게 그녀를 주시했다.
“불은 이미 절 찾았어요. 예왕 전하는 제게 아직 퇴로가 있다고 여기나요?”
심묘의 목소리는 박정하고 무거웠다. 말처럼 자신에게 퇴로는 없다. 자신은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되살아났다. 부친 심신은 공이 높아 황제를 가리고 있으니 어느 날 심가 대방은 결국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부수의는 적으로 삼아야 했다.
“당연히 퇴로는 있지.”
사경행의 소매를 잡은 심묘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출중했다. 검은 눈동자 속 잔잔하게 이는 물결에 마음이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아래로 드리워진 긴 속눈썹은 스며들어 온 햇볕같이 따뜻했다. 그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있으니 불은 네 몸을 태우지 않을 것이다. 두렵다면 내 뒤에 숨어도 된다.”
그의 목소리는 맑은 술처럼 부드럽게 사람을 취하게 했다. 취기는 심묘의 귓속을 간질거렸다.
“내가 네게 퇴로를 주마.”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든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며 세상을 하찮게 대하지만, 그의 말은 천근의 무게를 가진 듯 말하면 다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느끼게 했다. 무엇 때문인지 심묘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전생, 궁중 시절 누군가 자신에게 “내가 네게 퇴로를 주마.”라고 말했다면, 홀로 모든 걸 견뎌내지 않아도 됐을까? 자식이 죽고 가족마저 잃는 처참한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사람과 사람의 일은 정말 기이했다. 사경행의 말이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이 심묘의 마음이 가볍게 움직였다. 나비가 마음속에 날아 들어온 것 같았다.
사경행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진지하게 심묘를 바라보며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심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데 네 심장 소리는 왜 갑자기 이렇게 커진 거지?”
심묘가 매섭게 사경행을 밀었다. 그녀는 단숨에 일어나 앉았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리며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심묘가 깊게 심호흡했다.
“예왕 전하가 병난 거죠. 예왕 전하, 축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가셔도 됩니다. 이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저는 시집을 못 갈 겁니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 황후가 되고 싶다며? 게다가 평범한 사람이 어디 너랑 혼인하겠어?”
사경행은 심묘가 화내려는 모습을 보고 일어나 앉았다. 침상에서 노는 백호를 품에 안은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며 웃었다.
“좋은 일에 좋은 일을 더하면 어떻겠느냐?”
당황한 심묘는 사경행을 보며 물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예요?”
“부수의, 마음에 들지 않아. 전부 없앨 수는 없겠지만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하는 것도 좋지.”
그는 심묘에게 눈을 깜빡였다.
* * *
심묘의 예상대로 심모가 감옥에 갇힌 일은 곧 부수의의 귀에도 들어갔다. 눈앞에 태산이 무너져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 부수의도 이번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심모가 어떻게 갑자기 진국 태자부에 들어갔지?”
“듣자니 왕가 공자와 혼인하길 원치 않아 심가 서출 소저와 바꿔 혼인했답니다. 당시 추악한 일이라 떠벌리기 곤란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뒤 심모가 몰래 부에서 달아났다가 우연히 진국 태자 전하와 엮여서, 진국 태자 전하의 시첩이 된…….”
“그만!”
부수의가 태감의 말을 자르고 이마를 짚었다.
“심가 이 인간들!”
심가와 연루되고서부터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며칠 전 심만이 의탁하기에 그에게 성가신 문제를 주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심만은 일을 성공시키기도 전에 자신을 연루시켰다. 문혜제가 이미 자신에게 의심을 품고 있으니 이참에 모든 일을 심만에게 미루려고 했다. 이렇게 의심을 해소하려 했는데 황보호마저 휘말려 들다니.
사실 심모의 일은 명제와 진국이 관련된 일이었다. 진국과 명제가 동맹의 길을 걸으려는 것은 사람들 모두 암암리에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황보호와 가까운 황자일수록 문혜제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문혜제는 자신만이 유일한 명제의 황제이길 바랐다. 진국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심모가 진국 태자부에 있었으니 문혜제는 심모가 심만을 위해 진국 태자의 마음을 농락한 거라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 한 수는 심만이 부수의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닐까 의심할 것이 뻔했다. 부수의와 황보호는 한데 묶이게 된 셈이다.
부수의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줄곧 계책을 꾸며왔지만 이번에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심모와 심동릉이 바꿔 혼인한 것뿐만 아니라 황보호가 심모를 시첩으로 삼은 것도 전혀 몰랐다. 잠시 후 부수의의 냉혹한 얼굴 위로 음산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일은 너무 공교로워. 필시 날 겨누기 위해 계획한 것 같구나. 심만의 일은 가짜고 날 물에 빠뜨린 게 진짜다. 누가 배후에서 음모를 꾀하는지 알아봐야겠다.”
젊은 막료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하,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부황의 의심을 경솔하게 가라앉히려 한다면 도리어 일을 망칠 것이다. 추이를 지켜보자꾸나. 그러나 먼저 배후에서 날 모해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어쩌면 주왕 전하나 리왕 전하일까요?”
부수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 평소 수완과 다르다. 게다가 진국 태자도 연루되었다. 함부로 손을 썼다가 부황에게 발각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터. 그 정도도 모를 리는 없지.”
막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배랑은 막료 중앙에 서 있었다. 부수의가 자신의 견해를 묻지 않으니 먼저 나서서 입을 열지 않았다.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부수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부수의는 배랑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왠지 모르게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작고 정교하며 수려한 소녀의 얼굴. 눈은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거울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단정한 모습은 곤녕궁의 주인, 온 후궁의 주인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 황후보다 그녀에게서 더욱 부귀한 기운과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봉황인가? 아니면 사나운 짐승인가? 그러나 부수의는 곧 냉소했다. 여인에 불과하니 큰 능력이 있대도 이런 일이 그녀의 손에서 나올 리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부수의는 심묘가 대량에서 온 예왕과 관계가 적지 않을 거란 점은 잊지 않았다.
예왕이 명제 황실을 대하는 태도는 뜨뜻미지근했다. 때때로 그는 일부러 자신을 겨누기도 했다. 이는 심묘를 위해서일까? 정말 심묘를 위해 그가 손을 쓴 거라면 부수의는 예왕의 약점을 파악해야 했다. 상대방의 약점을 알아낸 뒤 인정사정없이 손을 쓰면 실패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의 방식이었다. 확실히 알아보되 신속하게 돌려줘야 상대방이 자신에게 준 이 큰 선물이 헛되지 않을 터였다.
부수의가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예왕부 앞으로 수하 몇을 보내 밤낮없이 주시하거라!”
그는 천천히 막료들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너희 각자 부에서도 호위를 데려와라. 파리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모기 한 마리도 날아나가지 못하게 하라!”
배랑은 부수의가 무언가 뜻을 품고 있다고 여겼다. 하나 그는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소매를 드리운 채 담담한 얼굴을 했다. 오히려 주위 막료들이 속닥거렸다. 어떤 징후를 포착한 것 같았다.
부수의는 분노의 기운을 없애고 평소처럼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미소가 반쯤 나타났을 때 호위가 바깥에서 들어와 보고했다.
“전하, 진국 태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해왔습니다.”
“들어오게 하라.”
부수의가 일어나려다가 갑자기 무언가 의식한 듯 안색이 크게 변했다.
“좋지 않구나!”
심모의 일을 안 문혜제는 부수의와 황보호 사이를 의심하고 있을 터였다. 현재 부수의와 황보호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 여력을 아끼지 않을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황보호의 사람이 방문했다. 황보호는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물으러 온 것일 터였다. 그러나 이는 칼날에 목을 바친 셈으로, 이 일을 문혜제 사람이 알게 되면 죄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죄명은 바로 지금, 명확해졌다. 부수의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명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적지 않았다. 심모와 진약추는 이런 상황에서 심만 일가족과 다시 만날 거라 예상치 못했다. 심만도 심모가 황보호의 시첩이 됐을 줄은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심만은 조정 일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이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나만으로도 달아나기 어려운 죄인데, 심모까지 황보호와 연관됐다니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문혜제는 황보호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황보호는 진국 태자이니까. 또한 부수의 역시 방법을 찾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 터였다. 확실치 않은 의심 때문에 부수의를 처리하기는 문혜제도 꺼리고 있었다. 부수의의 수하들 중 인재가 많아 천하 대란이 일어날까 겁내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희생되는 것은 심부 하나였다.
심모는 두렵고 화가 났다. 그녀는 심부의 여인들과 함께 갇히자 황급히 진약추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왜 우리가 잡혀 와야 하나요? 우리와 심부는 이미 관계가 없지 않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상재청은 마음이 상쾌했다. 처음엔 고심해서 심부를 골랐는데 부귀를 가질 수 없을뿐더러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으니 후회막심이었다. 심부가 이런 상황이니 집을 떠난 심모와 이혼한 진약추는 운이 좋은 셈이었다. 자신이 이 일에 연루될 이유가 없다는 걸 생각할수록 현재 처지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심모와 진약추가 잡혀 오자 기분이 한결 나았다. 사람은 재수 없는 일을 당할 때 늘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 함께 지옥에 떨어지려 하니까.
“넷째 아가씨가 어째서 심부 사람이 아닌가요? 주인어른의 딸이잖아요.”
심모가 냉소했다.
“이 창녀, 내게 말참견하지 마.”
상재청은 심모가 보이는 것처럼 우아하지 않은 것은 알았으나 이렇게 독설을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게 심만을 바라보았지만 심만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상재청은 또 한 번 적잖게 놀랐다. 심만은 심모의 말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심모는 상재청의 놀란 모습을 보고 조소했다.
“왜. 아직도 내 아버지가 당신 편을 들어줄 거라 여기나 보지? 당신이 유주에서 온 방탕한 여자라는 것을 온 정경성이 알고 있어. 창녀는 모두 무정하고 의리가 없다고 하지만 일은 주도면밀하게 처리한다지? 당신은 일 처리도 엉망이니 창녀만도 못해!”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놀란 상재청이 다급히 대꾸했다. 그녀는 계속 감옥 안에 있어 바깥일을 전혀 몰랐다. 유주에서 있었던 일이 퍼져 지금 온 성안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음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심모는 한층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는 거야? 네 남편과 아들이, 네가 아주 그리웠는지 특별히 정경성으로 찾아왔다고.”
심모는 불만을 품은 눈으로 심만을 바라보고는, 이어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덧붙였다.
“네 남편 전력이 아침 일찍부터 관아 입구에서 북을 쳐 댔지. 그다음 무릎을 꿇은 채 우리 심부가 자기 부인을 빼앗아 갔다고 하소연했어!”
상재청이 몸을 떨었다. 그녀는 더는 숨길 방법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심모의 말에 놀라지 않는 심만을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당신은 일찍이 알았나요?”
“뭐라고?”
눈을 크게 뜬 심 노부인이 되물었다. 그녀는 심모와 상재청이 사이가 나빠 단지 심모가 치욕을 주는 말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노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너 시집을 갔었느냐? 아들도 있어?”
상재청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냉담한 태도로 방관하던 진약추가 웃었다.
“어머님, 아직 모르세요? 어머님께서 아들을 위해 고르고 고른 저 며느리는 다른 집안 사람입니다. 심부는 여태 다른 남자의 아내를 부양한 것이지요. 상재청이 아들을 낳으면 당연히 심가가 아닐 겁니다. 바깥에서는 심부가 정말 대단하다고들 떠들어대던데, 그 얘기를 어머님도 한번 들어보셔야 할 텐데요.”
심귀도 갑자기 들은 소식에 놀라 얼이 빠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상재청이 진약추를 바라보며 냉소했다. 그녀는 오히려 온화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자포자기한 셈이었다.
“내가 시집을 갔으면 어떤가요? 아들을 낳았으면 또 어떻고? 심부는 뭐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깨끗한가요? 오십보백보일 뿐이에요. 난 심부에 시집오고 복을 얼마 누리지 못해 지금처럼 고생하고 있지만, 누가 더 나쁜 결과를 겪을지는 두고 봐야죠.”
노부인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감옥에 갇혀서 두렵고 초조해 쌓인 분노를 발설할 수 없던 차였는데, 분풀이할 대상이 생긴 셈이었다. 그녀는 상재청의 말을 듣고 두말하지 않고 돌진했다. 그녀는 상재청의 머리를 잡고 욕했다.
“천한 것! 네가 심부를 함정에 빠뜨려? 뻔뻔한 것!”
상재청이 이를 참고 견딜 리 없었다. 이전 심부에서야 다소 낮게 엎드렸지만, 지금은 위장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즉시 노부인과 맞붙어 싸웠다.
노부인은 나이가 많으나 아직 젊은 시절 괄괄함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시장 바닥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다. 상재청은 젊긴 해도 책을 읽던 사람이니 그리 체력이 좋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싸우면서 서로 욕설을 퍼부어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난장판이었다. 심귀가 두 사람을 떼어내려 했지만, 감옥이 분리되어 있어 애만 태웠다. 같이 갇힌 심모와 진약추는 두 사람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진약추는 냉랭히 바라보았고, 심모는 심지어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기괴한 상황은 상재청이 고통에 비명을 내지를 때 비로소 멈췄다.
노부인이 상재청을 밀었다. 노부인의 얼굴은 온통 손톱에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고 머리와 의복도 엉망이었으나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상재청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배를 껴안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음했다. 그녀의 몸 아래에서 점점 피가 흘러나왔다. 유산이 틀림없었다.
방금 노부인이 어느 곳을 건드렸는지 몰라도 배를 다친 것 같았다. 상재청은 이미 감옥 안 거친 환경과 부실한 식사 탓에 허약해진 몸이었으니 큰일이었다. 심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심만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만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상재청이 고통스러운 듯 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는데 그는 모르는 사람을 보듯 했다. 노부인 역시 개의치 않고 계속 욕을 내뱉었다.
“천한 것! 제기랄! 천한 것!”
심모는 피를 무서워했다. 상재청의 몸 아래에서 흐르는 피로 바닥이 붉게 물든 걸 보자 점점 두려워졌다. 그제야 그녀는 웃음기를 거두고 진약추에게 더욱 붙었다. 진약추는 심모를 바싹 끌어안고 상재청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상재청의 정신은 점차 흐릿해졌다. 그녀는 옥졸을 부르려 노력했다. 누군가 자신 몸의 이상을 발견해 의원을 데려오길 바랐다. 그러나 옥졸들은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며, 때때로 멸시와 조롱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도와줄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얼마나 신음했는지 모르지만 상재청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힘도 사그라지는 듯 호흡은 미약해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감옥 안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심부 사람이 상재청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혐오, 조롱, 공포, 경시가 있을 뿐, 동정은 조금도 없었다.
재난은 사람을 비틀고, 비틀린 사람은 대립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동정하지 않는 법이었다. 심모와 진약추는 상재청이 자업자득이라 여겼고 심만은 상재청이 거짓말을 했으니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노부인은 상재청을 조각내지 못해서 한스러웠고 심귀 또한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상재청의 전반생은 아주 순조로웠으나 후반생은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재주와 슬기에 의지해 봉황이 되어 날아오를 거라,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를 위해 빼앗고 싸웠으나, 결국 뼈를 묻을 구덩이에 빠졌다. 그녀가 상대한 사람은 상상 이상으로 흉악했다.
상재청은 하루 종일 술만 마시던 무능한 남편과 묵묵히 장작을 패고 닭의 모이를 주던 병약한 아들을 회상했다.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괴생…….”
심모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는 거람.”
진약추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심모는 그녀의 손을 팽팽히 잡았다.
“어머니, 왜 그렇게 원기가 없어 보여요? 이번 일…… 아주 위급한 거예요? 아니죠? 우리 언제 나갈 수 있나요?”
“아니야, 작은 일이야. 폐하께서 조사하신 후 우리를 풀어주실 거다. 걱정하지 마. 기운 없어질라. 넌 조금 쉬렴.”
진약추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심모는 진약추의 말에 안심했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밀려왔다. 그녀는 진약추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노부인도 진약추의 말을 듣고 내심 안도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셋째 며느리에게 만족하지 않았고 끝내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상재청의 실체를 알게 되자 진약추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노부인은 눈을 감고 휴식했다.
누워 있는 상재청의 생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진약추는 상재청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곧 절망으로 뒤덮였다. 방금의 말은 심모를 안심시키기 위한 임기응변이자 거짓말에 불과했다. 자신들은 아마 목숨을 잃어서 나갈 것이었다.
진약추보다 심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심만이 이런 반응일 리 없었다. 심만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든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다. 심부가 정경성의 웃음거리가 되든 말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노부인과 상재청의 다툼에서 상재청이 유산했음에도 심만은 무심했다. 이미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도 포기했는데 자신이라고 다른 살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말을 보았지만 진약추는 생각보다 그를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진부와 심부가 소송할 때 이미 인정이 후하고 박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심만에게 이혼당한 진약추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상재청이 이런 결말을 맞았어도 조금 후련할 뿐이지, 대단히 좋을 것도 없었다. 어쨌든 모두 함께 죽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죽어 지하에 묻힐 일만 남은 것이었다.
적막을 깨고 심귀가 물었다.
“셋째. 우리 심가는 근 몇 년 동안 막힌 것 같지 않으냐? 종전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심귀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게 된 후 매일 무지몽매하게 지냈다. 그런 그가 드물게 정신을 차린 듯 이 상황의 이상함을 물었다. 심만은 심귀를 바라보았다. 말투에서 그의 감정을 알아챌 수 없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 심신 형님이 있을 때.”
심귀는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심 노장군이 있던 때는 평안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심부의 내리막길은 대방이 분가한 후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관직 동료들이 심신의 체면을 봐서 자신들을 존중해줬었다. 그 후 심신이 분가했고, 아예 정경성을 떠나자 심부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확실한 사실이었다. 심신이 없는 심부는 평범한 관리 집안일 뿐, 조금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심만의 말은 그 의미가 아닌 것 같았다. 심귀가 망설이다 물었다.
“네 말은 누군가 배후에서 우리 심부를 모해했단 거냐? 이번에도 누군가의 계획에 말려든 거야?”
심만은 괴상하게 웃었다. 무엇 때문에 웃는지 몰라 심귀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갑자기 깨달은 듯 말했다.
“혹시…… 심신 형님이 배후에서 분란을 일으킨 걸까?”
조용히 앉아 있던 진약추가 말했다.
“나설안, 그 천한 것이 낳은 심묘는 아주 기이해요. 당신들은 심묘와 관련되면 영문을 모르게 나쁜 결말을 얻는 걸 알아채지 못했나요?”
심만과 심귀가 동시에 진약추를 바라보았다. 진약추는 두 사람의 변한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말을 이었다.
“먼저 이방의 심청, 심원. 지금은 삼방 차례에요. 언제부터 심부에 번번이 사고가 생겼는지 자세히 생각해보면 심묘의 성격이 크게 변한 후부터라 말할 수 있어요.”
사람이란 아주 간사해서 다른 사람의 말에 마음이 휙휙 변하곤 했다. 심만과 심귀에게 심묘는 그래 봤자 조금 똑똑한 조카였다. 그녀에게 그리 큰 능력이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상황과 진약추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명안 공주도 심묘와 원한을 맺은 후 이유를 모르게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아직도 범인을 찾지 못했다.
심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서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혹시 배후에서 지시를 받거나 후원자를 찾은 걸까?”
심귀가 잠시 사색한 후 말했다.
“심묘가 후원자를 찾은 게 아니라 심신 형님이 후원자를 찾은 거야.”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사납게 무릎을 쳤다.
“왜 형님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은 걸까! 여러 해 일이 순조롭지 않은 건 형님이 배후에서 몰래 해쳐서일 거야!”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심지어 몹시 억울해했다. 심부가 심신에게 얼마나 많은 계략을 꾸몄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진약추는 냉정했다. 그녀의 말은 점점 더 들어맞았다.
“어쨌든 이 일과 대방은 크게든 작게든 관련되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심부가 전부 연루되었는데 유독 그들 대방만 탈 없지 않을 거예요.”
사람들은 침묵했다. 잠시 후, 심귀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됐으니 그들도 진창에 빠뜨려야지! 우리가 좋지 못한데 대방도 좋게 둘 수는 없지. 셋째, 우리 방법을 생각해 대방도 연루시키자!”
그가 눈을 빛냈으나 심만은 평온히 대답했다.
“안 돼. 죄를 선고받은 이때 대방을 연루시키면 통찰력 있는 사람이 우리가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을 알아볼 거야. 그러면 폐하는 우리와 대방이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느낄 테지. 우리는 간신, 대방은 충신으로 여길 거야. 헛되이 대방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수 없어.”
심귀는 분노했다.
“그럼 그냥 둬?”
“아버지는 형님을 편애했어. 하지만 우리라고 이대로 질 순 없지. 그렇게 오래 싸웠는데. 형님을 끌어내릴 수 없어도 형님의 껍질은 한층 벗겨야지!”
심만은 냉소했다. 심귀는 심만의 말을 조금 이해하지 못해 물었다.
“네 뜻은…….”
심만이 소리를 낮췄다.
“이번 일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다른 사람이 있어. 추측해봐. 이번 일에 물론 우리도 죄를 지었으나 누가 우리보다 더 열 받을까?”
진약추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왕 전하?”
“맞소.”
심만이 평온히 진약추를 보았다. 지금 와서 그녀가 죄의 증좌를 보낸 것을 탓해도 소용없었다. 더구나 원인이 자신이 상재청을 위해 그녀와 이혼한 것이니 탓할 수도 없었다. 자신들 모두 다른 사람의 계획에 놀아난 것뿐이다. 이 판국에 상대방의 잘잘못을 따져봤자 피곤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감시당하고 있어. 그중 물론 정왕 전하의 사람도 있을 거야. ‘한가한’ 심가 대방도 결국 정왕 전하의 의심을 피할 수 없을 거야.”
독사는 죽음이 임박해도 물고 싶은 사람을 한입 깨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심부 사람은 모두 독사였다. 심만이 냉랭히 말했다. 자신은 부수의가 심묘와 주왕 부수안의 혼사를 성공시키라 명했을 때부터 이미 그가 심묘를 주의하고 있다고 느꼈다. 문혜제로부터 의심을 사게 만든 이가 심가 대방이라고 여기게 하면 부수의는 즉시 심가 대방을 멸망시킬 것이었다.
정왕 부수의는 아홉 황자 중 가장 깊이 숨어 있던 사람이었다. 리왕보다 온화하지만 속은 더욱 음흉한 사람이었다. 대방이 그런 부수의에게 주시당하는 순간 황천길이 열릴 터. 자신의 결말을 바꾸지는 못해도 심가 대방의 뿌리를 뽑을 씨앗을 뿌려줄 수는 있었다. 장래에 씨앗이 발아하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큰형, 저승길에서 기다릴게.”
* * *
정경성 심만 관련 사건은 대단히 빠르게 종결되었다. 심부는 가산을 몰수당했고 하인은 모두 귀양, 주인은 전부 사형에 처했다. 명제에는 오래도록 이렇게 큰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보기에는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관아가 전력으로 비밀을 지켜 심부의 죄명은 ‘일 처리를 잘못해 화를 초래했다’에 불과했으니. 백성들은 심부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군주가 신하에게 죽음을 원하면 신하는 별도리 없이 죽어야 했다. 어떤 때는 말할 가치도 없는 이유로 신하는 하나뿐인 목을 내놔야 했다. 더욱이 심부의 심만, 심귀의 벼슬길은 점점 쇠퇴했으니 두 사람을 위해 편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절벽으로 민 듯, 심부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빠른 결말에 이르렀다.
처형 날, 심묘는 처형식을 보러 가겠다고 나담에게 말했다. 나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심묘야, 왜 가려는 거야? 머리가 뎅강 잘리는 참혹한 장면을 보면 밤에 악몽을 꿀 거야. 가지 마.”
심신과 나설안은 보러 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있었다. 물론 일이 없어도 가지 않을 것이었다. 나설안과 마찬가지로 심신 역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한때 품고 있던 복잡한 감정은 여러 해 심부가 한 일로 깨끗이 소모되었다. 나서서 스스로 언짢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가서 볼래. 난 아직 처형식을 본 적 없어.”
심묘가 고집을 꺾지 않자 나담이 다시 한번 말렸다.
“처형식이 뭐 볼 게 있다고 그래.”
그녀는 심묘 때문에 초조했다. 심부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심묘는 어쨌든 그들과 오래 지냈다. 그들의 처형식을 보면 괴로움을 면할 수 없을 테니 구태여 괴로움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심묘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내가 교교랑 같이 가줄게.”
심구는 심묘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못 가게 하면 몰래 나갈 테니 차라리 함께하기로 했다. 따라나서면 적어도 걱정 없이 심묘를 보호할 수 있었다. 나릉도 미소 지었다.
“나도 같이 갈래. 나도 처형식을 본 적 없어.”
나담이 나릉을 흘겨보았다.
“나릉 오라버니, 무슨 헛소리야. 이전 서북에 있을 때, 군령을 어겨 처형당하는 것 보지 않았어? 무슨 처음이래.”
나담의 말을 예상하지 못한 나릉의 미소가 굳었다. 심구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나릉을 바라보았다. 나릉이 불안한 기색을 비치자 심구가 모른 척 입을 열었다.
“그럼 같이 가자.”
나담은 모두 가는 것을 보고 이를 악물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나도 갈래. 나 혼자 부에 남기 싫어. 심묘야, 이따가 내 눈을 잘 가려줘야 해.”
심묘 일행이 형장에 도착했을 때 형 집행대 주위는 백성들로 물 샐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일행을 수행하는 호위들을 보고 백성들은 선선히 그들에게 길을 터줬다. 주위 사람들은 심구를 알아본 후 작게 수군거렸다. 그들은 심구와 심묘 오누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백성들은 심가 대방과 이방과 삼방이 화목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알았으나, 이방과 삼방의 참수를 대방 오누이가 구경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어떤 사람은 대방의 화가 복이 되었다며 이방, 삼방의 핍박에 가문에서 쫓겨난 덕에 이 재난을 피한 거라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 사형되는 걸 잘도 보러왔다고 혀를 찼다.
형 집행대 위 심만 일행은 칼과 족쇄를 쓴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더러운 죄수복과 헝클어진 머리였다. 당초 부귀한 모습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심모와 심 노부인의 입은 천으로 막혀 있었다. 심모는 기를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눈 속 생생한 공포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형 직전이 되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심묘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의 시선이 형 집행대 위 사람들 하나하나를 스쳤다.
심만, 진약추, 심귀, 심모, 심 노부인. 상재청은 감옥에서 유산을 했고, 다음 날 옥졸이 그녀를 발견했을 땐 이미 몸이 굳어 있었다고 했다. 출혈로 죽은 것은 차라리 좋은 일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리지 않고 온전한 시체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목숨은 사라졌고, 온 정경성은 그녀가 남편과 자식을 버린 일을 알고 있었다.
“심묘야, 무슨 생각해?”
나담이 작게 물었다.
“예전의 일.”
심묘는 작게 대답했다. 자신이 궁중에서 미 부인과 권력 다툼을 할 때 이방과 삼방은 전력을 다해 대방을 뒤에서 칼로 찔렀다. 그들은 심구와 나설안을 모해했고, 심구와 심묘는 핍박받는 서자와 서녀처럼 비참하게 살았다. 완유와 부명도 해쳤다. 이 모두 눈앞의 사람들이 하사한 것이었다.
심묘를 발견한 심모가 더욱 기를 쓰고 발악했다. 입을 막은 천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소리쳤다.
“심묘야, 우리는 한 가족 아니야?”
심묘는 군중을 사이에 두고 심모에게 미소 지었다. 심모가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상관없었다. 턱을 들어 굽어보는 까탈스러운 시선으로 한 마리의 개를 보듯 그녀를 보았다. 한 가족이 아니라 원수였다. 그러나 이도 곧 과거가 될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부터 단 위의 사람들은, 아니 심부의 짐승들은 자신과 정말 일말의 관계도 없었다. 심모는 심묘의 시선에 분노해 더 소란을 피우다가, 하급 관리가 귀찮은 듯 그녀를 발로 차자 잠깐 조용해졌다. 이후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심모의 표정은 더욱 분노에 찼다.
심묘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그림자가 있었다. 묘령의 여자였다. 부귀하고 화려한 옷차림, 뾰족한 턱, 큰 눈. 심동릉이었다. 심동릉도 심묘를 발견했다. 그녀는 온화하게 웃으며 심묘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심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심묘야.”
그녀는 심구에게도 인사했다.
“오라버니.”
심구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묘가 심동릉을 자세히 관찰했다. 심동릉은 만 이낭의 용모를 닮아 아름다웠다. 이런 외모의 본처는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 소첩이 이런 용모였다. 본처는 현명한 사람으로, 첩은 화용(花容)을 뽐내는 사람으로 얻기 때문이었다. 이전 심동릉은 심부에서 늘 눈을 내리뜨고 참고 양보하며 순종적이었다. 용모와 자태도 헛되이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잘 보양한 듯 얼굴을 꼬집으면 물이 나올 듯했고 매력적인 눈빛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몸매가 잘 드러나는 화려한 의상을 입어 미인의 자태가 더욱 도드라졌다. 더욱이 곁을 따르는 하인들을 보니 왕필이 그녀에게 잘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시집간 여자가 이리 마음대로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동릉은 심부에서 자신의 뜰도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외출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백성들은 당연히 심동릉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담은 호기심을 가지고 심동릉을 주시했다. 심동릉은 심묘를 보며 아름답게 웃었다.
“동생을 여기서 만날지 몰랐네, 정말 인연이야.”
심묘도 살짝 웃었다. 심동릉의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표정에서도 일말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만 이낭은 왕가로 이사 갔으며 왕가는 그녀의 매매 계약서도 사주었으니 만사가 순조롭다고 느낄 법도 했다. 심동릉은 아버지인 심귀를 보면서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심묘와 대화를 나누며 꽃을 감상하듯 단 위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조금 기쁜 기색도 비쳤다.
심묘가 심동릉을 보며 운을 띄웠다.
“난 통쾌함을 느끼려고 온 거야. 언니는 왜 왔어?”
심동릉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전과 뚜렷이 달랐다. 지금 그녀는 매력적인 자태를 뽐냈다. 젊을 적 만 이낭 같았다. 이전 나약하고 겁 많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통쾌함을 찾으나 난 그런 게 아니야. 재미난 일이 있다고 들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러 온 것일 뿐이야.”
심동릉이 단 위를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그때, 단 위 감찰관이 팻말을 던지고 길게 외쳤다.
“시간이 되었다. 형을 집행하라.”
몇 줄기 핏빛이 동시에 솟아났다. 심동릉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가련해.”
심동릉의 말을 심묘가 한 번 더 반복했다.
“맞아. 정말 가련해.”
그러나 가련하다고 말하는 두 사람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심묘는 심부 이방과 삼방을 오래도록 미워했다. 게다가 전생에 피맺힌 원한이 있어 이렇게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심동릉은 심묘와 달랐다. 그녀는 만 이낭과 함께 임완운의 압박 아래에서 심부 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을 때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드러내니 더욱 사람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몇 개의 사람 머리가 단 위에서 데구루루 군중 속으로 굴러갔다. 사람들은 놀라 소리쳤고 담이 작은 여인은 눈이 풀려 소리를 질렀다. 심부 일가는 죄를 지었기에 시체를 친족이나 지인이 수습할 수 없었다. 그들 시체는 하급 관리가 처리할 것이었다. 말은 처리라고 했지만 깨끗이 태우는 것에 불과했다. 하급 관리가 시체를 옮기려 분주히 움직이자 심동릉은 흥이 식은 듯했다. 그녀는 심묘를 보며 웃었다.
“종전 부에 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 동생과 돌아다닌 적 없었지. 지금은 시집을 가서 더욱 불편하고. 그러나 난 늘 동생을 생각하고 있어. 장래 흥미가 있으면 왕부로 찾아와도 좋아. 우리 자매 두 사람이 심금을 털어놓아도 좋겠지.”
심구가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부터도 자신은 심동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 심만에게 사고가 생겨 심모와 진약추도 모면하지 못했는데 시집간 심동릉만 탈이 없었다. 물론 그녀는 서녀이니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따질 것 없을 테지만 왕가 쪽에서 보호해준 것 같았다.
시집간 지 오래되지 않은 남편 집안이 자신을 대역죄로부터 보호하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담력이 작고 겁이 많은 사람이. 심동릉이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드니 심묘가 그녀와 가까이하길 바라지 않는 마음이 더욱 솟았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자태가 아리땁고 언행이 애교스러우나 심정은 박정하니 더욱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웃어넘겼다.
“언니의 모습을 보니, 왕 공자가 아주 잘해주는 것 같아.”
심동릉이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왕가는 인심이 후해.”
심묘는 차갑게 웃었다. 왕가가 후하든 그렇지 않든 심동릉은 어떤 식으로든 진실하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심동릉이 임완운의 손아귀에 잡혀 있어 어찌하지 못했기에 심동릉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지금 보니 그녀는 부수의처럼 은닉이 특기였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후에는 투쟁에서 우세를 점했을지도 몰랐다.
“모두 언니의 복이지. 우리는 아직 일이 있어서, 언니의 고아한 흥취를 방해하지 않을게.”
심동릉이 얼른 인사를 했다.
“동생아, 잘 가.”
심묘는 대꾸하지 않고 먼저 떠났다. 심구는 담담한 안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담과 나릉도 뒤를 바짝 쫓았다.
심묘 일행이 떠나자 심동릉의 여종 행화가 투덜거렸다. 행화는 아둔한 성격이지만 심동릉을 따라 왕가로 들어가 일급 여종이 되었다. 주인이 왕부의 소부인이니 행화의 허리도 덩달아 꼿꼿했다. 그녀는 이전처럼 소심하고 신중하지 않았다. 심지어 건방졌다. 행화가 원망의 말을 늘어놨다.
“마님은 심 소저에게 잘 대해주는데, 심 소저는 감사히 여기지 않네요. 정말 사리에 맞지 않아요.”
“동생은 적출, 나는 서출. 당연히 무시하겠지.”
심동릉은 행화처럼 화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는 지금 왕부의 소부인이에요. 어쨌든 종전과 같을 수 없어요. 심 소저도 앞으로 시집갈 텐데 자매도 없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비웃을 거예요. 마님에게 잘 보이려고 애써야 할 상황에서 냉담하게 굴다니 어리석어요. 장래에는 자매의 정을 구하려 해도 구하지 못할걸요!”
심동릉은 여전히 담담히 웃었다.
“왕가 며느리는 사람들 안중에 언급할 가치 없는걸. 구태여 잘 보일 필요 있을까?”
행화는 더욱 언짢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마님은 정당한 관가 부인이세요. 심 소저는 장래 누구에게 시집갈까요? 혹시 황자에게 갈 생각일까요? 명성은 일찍이 무너졌잖아요. 과연 좋은 집안에서 심 소저와 혼인하려 할까요?”
“행화.”
여종의 말이 조금 지나치자 심동릉이 미간을 찡그렸다. 행화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은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심동릉이 작게 말했다.
“명성이 뭐라고. 심가군이라는 큰 나무에 기대고 나가군이라는 토양이 있다면 지금 황제에게 시집가려 해도 막을 사람은 없을 게다. 하지만 높은 곳으로 시집가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지.”
심동릉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