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장 (58/71)

44장

길을 걸으면서 나담이 심묘에게 말을 건넸다.

“심묘야. 네 그 서출 언니, 내가 볼 때는 사람들의 말처럼 존재감 없지 않은 것 같아.”

나담은 정경성에 오기 전 심부 사람을 모를까 걱정해 특별히 하인들에게 각자 주인이 어떤 성격인지 물어보았다. 심동릉에 관한 정보가 가장 적었는데, 다들 그녀가 종일 뜰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매우 소극적이라고 했다. 그때 자신은 마음속으로 탄식했었다. 나가 손아랫사람들은 장난이 심하고 활발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동생 나천은 망아지처럼 날뛴다고 혼나기 일쑤였기에 심동릉 같은 인생은 상상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보니 인상이 하인들의 언질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았다. 심동릉은 그녀의 상상과 완전히 달랐다.

심묘가 담담히 웃었다.

“사람은 늘 변하니까.”

나담은 심묘의 말이 정답이라고 여겼다.

“맞아. 지금은 시집도 갔고, 시댁의 귀염을 받아 성격이 변한 것 같네. 지난날과 다름없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심묘는 그녀의 태도에 웃고 싶었다.

“심묘야, 다 보았으니 바로 부로 돌아가자.”

심구는 이전 심묘가 납치당한 일로 여전히 두려웠다. 아직도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 누나.”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른 사람은 열한두 살 먹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나이는 어려 보여도 살결이 희고 용모가 준수했다. 초록색 비단 의상을 입었는데 옷자락에 전부 소나무 잎이 수놓여 매우 독특했다. 소년은 그럴듯한 작은 옥관을 쓰고 명주 끈을 귀 옆에 늘어뜨렸다. 허리에 옥으로 만든 호리병을 차고 있었다. 소년은 하얗고 부드러워 정말 그림에서 나온 듯 귀여웠다.

나담이 소공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소춘성의 아이들은 털북숭이인데 어디서 이렇게 귀엽고 예쁜 소년이 나타났는지 눈이 부셨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담도 이 소년에게 매료되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디서 툭 튀어나온 소공자가 심묘에게 아는 체를 하는지 나릉과 심구는 의아했다. 심묘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 소년의 미간 사이가 익숙하다 느꼈으나 도대체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소년은 심묘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거라 여겼지, 이렇게 심묘가 멍하니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가 심묘의 곁에 다가갔다. 그는 키가 심묘보다 작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심묘를 마주 보았다. 심묘가 이 침묵을 끊으려 이야기하려 할 때 곁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심 소저, 심 공자.”

청년은 파란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다. 의상이나 이목구비는 소년과 비슷했으나 소년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웃는 얼굴이 우아했다. 이 청년은 심묘와 심구도 알고 있는, 평남백 소욱의 소명풍이었다.

“둘째가 장난이 심하고 철이 없으니 심 소저는 화내지 않길 바랍니다.”

소명풍이 웃었다. 심묘는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소공자가 분노하며 소명풍을 흘겨볼 때 심묘가 물었다.

“소명랑?”

소명랑이 투덜거렸다.

“그간 못 봤다고 날 못 알아본 거예요? 누나, 돌아오면 내게 선물을 줄 거라 하지 않았나요?”

심묘는 불가사의했다. 이전 소명랑은 통통한 찹쌀경단 같았고 준수하다 할 수도 예쁘다 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하얗고 부드럽다고야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준수한 소년이 소명랑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이 마른 건지. 여자도 날이 차면 변한다더니 남자도 그런 건가 싶었다.

소명랑은 아직 답답했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나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명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담은 소명랑처럼 예쁜 소공자가 있다는 사실이 희한했다. 그녀는 소명풍을 보고는 거침없이 말했다.

“형제답네. 똑같이 예쁘게 생겼어.”

소명랑은 심묘가 그를 못 알아본 일을 마음에 둔 데다가, 나담처럼 솔직한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예쁘다고 칭찬하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얼굴이 되었다.

심구와 나릉이 얼른 형제 두 사람에게 안부를 물었다. 심묘는 소명랑을 보며 웃었다.

“선물은 우리 부에 있으니 돌아가면 보내줄게.”

심신을 따라 정경성으로 돌아온 후 다양한 일을 처리하느라 심묘는 정말 소명랑을 잊고 있었다. 소명랑이 환골탈태한 것을 보고 속으로 감개했다. 성장기 어린아이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완유와 부명 역시 그랬다. 진국으로 떠날 때와 돌아왔을 때 너무 달라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던 기억이 자연히 떠올랐다. 꽁하지 않는 성격의 소명랑은 금방 불만을 잊었다.

“심묘 누나, 거리 구경을 나온 거예요?”

소명랑의 물음에 소명풍이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는 오늘이 심부의 처형일이며 심가 대방과 이방, 삼방이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았다. 이곳은 처형장과 멀지 않으니 심묘가 그를 참관하러 온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 말을 동생에게 할 수는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지금 부로 돌아가려고 해.”

소명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그란 머리통이 위아래로 움직이니 꽤 귀여웠다.

“그럼 내게 선물을 보내는 거 기억해요.”

소명풍이 소명랑의 뒤통수를 탁 쳤다. 소명랑은 머리를 짚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소명랑은 고개를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던 그의 시선이 멈췄다. 그는 심묘의 팔찌를 가리켰다.

“심묘 누나의 이 옥팔찌, 사가 형이 한 호두환(虎頭環) 같아 보이는데.”

몇 사람이 당황했다. 심구와 나릉은 호두환을 몰랐고 나담은 호기심을 느꼈다. 심묘는 마음이 켕겼다. 소명랑은 천진하게 말했지만 소명풍은 미간을 찡그렸다.

눈처럼 하얀 심묘의 팔목에 과연 옥으로 만든 팔찌가 있었다. 고리 두 개가 짝을 이루는 옥팔찌. 비취색 옥은 깊은 산속에서 자라는 식물처럼 생기를 품고 있으니 대단히 상등품일 터였다. 조각은 자연스러웠고, 조금 튀어나온 부분에는 작은 호랑이 머리가 새겨져 있었다. 심묘는 고양이 같다고 느꼈지만.

이 팔찌는 사경행이 보낸 장신구 가득한 갑에 든 것 중 하나였다. 심묘는 그 장신구들이 각자 장점이 있으니 되도록 전부 몸에 착용하는 게 좋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곡우가 그녀를 막았다.

“아가씨, 모두 걸칠 순 없어요. 이 장신구는 모두 너무 귀중품인지라 여러 개 함께 착용하려면 화려한 의복을 입으셔야 해요. 옷이 평범하다면 이도 저도 아닌 모양새가 될 거예요.”

심묘는 그 말에 동의하며 낙심했다. 사경행은 비싼 장신구를 많이 보내주었다. 그렇다고 장신구 때문에 일부러 화려한 의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물건은 보낸 사람을 성격을 닮아 조금도 소극적이지 않았다. 모두 걸치면 오히려 잡다하다고 느낄 터였다.

이리저리 대본 후 심묘는 이 팔찌가 가장 소박하다 느꼈다. 안에는 침이 숨겨져 있지만 보기에 비교적 ‘소박’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워 심묘는 나설안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다. 심묘가 당황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소명풍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는 심묘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실례합니다.”

심묘가 잡힌 손을 빼려고 했으나, 소명풍은 아주 강하게 힘을 주었다. 게다가 그는 심묘의 팔뚝을 직접 잡은 게 아니라 옷을 잡고 있어서 매우 이상했다. 심구와 나릉의 눈빛이 동시에 차가워졌다. 심구가 외쳤다.

“소 공자, 너무 경망스럽소!”

소명랑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큰형에게 경망스럽다고 말하는 것을 처음 듣는다는 얼빠진 얼굴이었다. 소명풍이 빠르게 손을 풀었다. 그는 심묘에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방금 실례를 저질렀으니 사과드립니다.”

심묘는 소명풍이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몰랐다. 그때, 소명풍이 물었다.

“감히 묻건대, 그 호두환은 어디서 구하셨나요?”

심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담을 비롯한 일행도 당황했다. 소명풍이 왜 여인의 장신구에 관심을 갖는 것인지 의아했다. 소명랑의 시선도 의문을 담고 있었다. 소명풍은 진지하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반드시 듣겠다고 고집부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심묘가 미소 지었다.

“원양에서 온 상인의 손에서 샀습니다. 수입품이라 들었는데 소 공자가 알 줄 몰랐네요. 이 팔찌를 호두환이라고 부르나요?”

소명풍은 순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맞습니다. 호두환이라 부릅니다. 심 소저, 그 호두환을 내게 팔 수 없을까요?”

나담은 사레가 들렸다. 정경성 사람은 괴상하다더니 준수하게 생긴 청년이 여인의 장신구를 사려 했다. 그러고 보니 대부호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 할 괴상한 취미가 있다고 들었다. 여인의 가슴가리개를 수집하는 사람, 여인의 연지를 바르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소 공자는 여인의 장신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형님, 호두환을 사서 사모하는 아가씨에게 주려는 거야?”

소명랑의 말에 심구와 나릉이 순간 멍해졌다. 나담도 당황했다. 그 자신이 쓰려는 게 아니라 연모하는 여인에게 주려 한 것인가 싶었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이건 제가 착용했던 것이니 남자가 갖는 건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소 공자께서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주기 위해 제가 사용한 걸 주는 건 안 될 일입니다. 소 공자께서 갖고 싶다면 제가 아는 장신구 점포에 좋은 장신구가 있으니 그리 가보세요. 제가 착용한 것보다 나을 겁니다.”

규방 처녀는 모두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자신의 장신구를 남자에게 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심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동생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 그는 장신구 하나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소명풍이 부득이 동의했다. 말속에 언뜻 조소가 담겼다.

“그렇다면 유감이네요.”

소명풍은 소명랑을 데리고 심묘 일행과 이별하려 했다. 막 떠나려 할 때 소명풍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심묘를 보며 망설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심 소저, 혹 임안후부 사가 소후야와 만난 적 있습니까?”

심묘가 당황했다. 주변 사람도 당황했다. 사경행이 죽은 것을 모두 아는데 소명풍이 미친 건가 싶었다. 심묘가 실소했다.

“사가 소후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소 공자, 혹시 제게 무슨 선입견이 있어서 절 저주하는 건가요?”

소명풍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소명랑을 데리고 떠났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멈춰 있었다. 나담이 어깨를 매만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심묘야, 그 사람은 왜 네게 죽은 사람을 봤냐고 물은 걸까?”

“정상이 아닌가 봐.”

“내가 봐도 그래.”

심묘의 말에 나담은 아주 그렇게 여겼다.

“장래 소가와 왕래를 적게 하거라.”

심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묘에게 죽은 사람을 봤냐고 묻다니 재수 없었다.

“근데 왜 너에게 물은 거지? 심묘야, 너 그 사 소후야와 친했어?”

나담의 물음에 심묘는 부인했다.

“절대 관련 없어. 서로 왕래한 적도 없었어.”

의아한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 * *

평남백부.

심묘는 몰랐지만, 호두환을 본 소명풍은 온종일 불안해했다. 소욱도 소명풍이 평소와 다른 모습인 걸 알아채고 왜 그러냐 물을 정도였다. 소부는 아주 적극적으로 재능을 감추고 있었다. 조정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으니 흐린 물에 섞이지 말아야 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소부는 자유로운 나날에 익숙했고 소명풍은 여전히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저런 얼굴을 할 이유가 없었다.

소명풍은 식사 때 모호하게 몇 마디만 하고 허둥지둥 식사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소욱과 소 부인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소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소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 부인은 둘째 아들 소명랑에게 물었다.

“명랑아, 오늘 너와 네 형이 외출했을 때, 누굴 만났느냐?”

소명랑은 반찬을 집으며 생각 없이 말했다.

“심가 누나를 만났는데 형님이 심가 누나의 장신구를 원했어요. 심가 누나는 주지 않았고, 예의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형님은 언짢아했어요.”

소 부인과 소욱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두 사람은 소명랑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귀에는 소명풍이 심가 아가씨와 친해지려 했는데 심가 아가씨가 예의에 어긋난다고 지적해 소명풍이 화를 냈다고 들렸다. 소 부인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말한 심가 누나는 심가 대방의 적녀더냐?”

지금 심가 이방과 삼방은 처형되었으니 당연히 심모는 아닐 것이었다. 심청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심동릉은 왕가에 시집갔으니, 혼인하지 않은 심가 소저는 심묘밖에 없었다. 소명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욱은 순간 휘청거리며 소명랑에게 물었다.

“네 형이 심 소저의 장신구를 원했다고?”

소명랑이 닭이 쌀을 쪼아먹는 것처럼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서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 속에서 믿을 수 없는 기색을 보았다. 소명풍은 머지않아 스물을 훌쩍 넘길 나이였다. 이미 혼인해 아이 한 명쯤은 품에 안고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소명풍은 무엇 때문인지 계속 혼인하길 거부해왔다.

일찍이 임안후부 사경행이 소명풍과 친하게 지낼 때 소욱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사경행이 여자를 좋아하는 걸 알았기에 소명풍이 지나치게 여색을 즐기게 될까 걱정은 했어도 반대 상황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경행이 죽자, 아들은 갑자기 중이 된 것 같았다. 여자에 대해 어떠한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높은지 아닌지를 떠나서 소가 부부는 아들이 혹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할 지경이었다.

소명랑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조금 안심했으나 소명풍이 좋아하는 아가씨가 하필 위무대장군 심신의 딸이라니 난처했다. 심신은 병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 심신과 인척을 맺으면 문혜제가 심부를 거두려 할 때, 소부도 함께 거둘 수 있었다. 이는 곤란했다. 재간을 숨겨 간신히 불구덩이에서 나왔는데 또 다른 불구덩이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소욱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소 부인이 자상하게 달랬다.

“급할 거 없어요. 명랑의 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명풍이 정말 심 소저를 좋아하면 반드시 표현이 있을 겁니다. 금봉, 너는 명풍의 뜰 안 남종을 불러오너라. 물을 게 있다.”

소명풍은 자신의 방에서도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분명 잘못 보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어도 충분히 보았고 만져도 보았다. 분명 호두환이었다. 호두환은 송신 공주의 손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심묘도 가지고 있었다. 송신 공주가 사경행의 유품이나 다름없는 팔찌를 심묘에게 주었을 리는 없었다. 소명풍은 줄곧 두 번째 것을 볼 수 없으리라 여겼다. 사경행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호두환은 사경행이 직접 만든 장신구였다.

당시 소명풍과 사경행은 온종일 홍등가를 드나들던 소년들이었다. 하루는 사경행이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소명풍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사실 내심 호기심이 동했다. 소명풍은 친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름답게 생긴 사경행은 사실 화려한 장신구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여자의 물건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그가 팔찌를 만지고 있자 호기심이 생긴 소명풍이 캐물었다. 사경행은 그에게 눈을 흘기며 팔찌가 암살 무기라고 했다.

그 후 계속 소명풍이 귀찮게 굴자 사경행은 그에게 팔찌를 보여줬다. 팔찌는 두 개의 고리를 팔에 거는 모양이었는데, 안에 독침을 숨겨서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소명풍은 재밌다고 느껴 이를 차려고 했다. 그때 사경행이 그를 제지했다.

“이건 여자용이야, 네가 착용해서 누구를 보여주게?”

그 후 사경행은 팔찌를 송신 공주에게 줬다. 옥청 공주가 죽은 후 송신 공주는 더욱 사경행을 아꼈고 둘 사이는 언제나 좋았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팔찌를 호두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경행이 직접 팔찌 위 호랑이 머리를 조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조각 솜씨는 빈말로도 칭찬할 수 없어서 호랑이는 사실 개나 고양이 같았다. 소명풍은 비웃었으나 송신 공주는 아주 좋아했다. 그 후 사경행은 이 팔찌를 한 개 더 만들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 비취옥은 매우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줄곧 찾을 수 없었다. 이전에 소명풍이 바깥 부유한 상인에게 한 덩이를 구해줬으나 옥은 이전만큼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긁힌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출정 전 이 옥을 받은 사경행은 가는 길 위 무료할 때 호두환을 만들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떠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소명풍은 심묘의 호두환 비취옥을 살펴보다가, 햇빛 아래 얕은 흰 흔적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전 호두환과 같은 장치가 되어 있었다. 대단히 허술한 조각도 사경행의 솜씨와 아주 비슷했다.

사경행은 2년 전 정경성을 떠났고 심신은 서북으로 갔다. 심신이 먼저 가고 사경행이 그 후에 떠났다. 사경행은 갈 때 이 옥 재료를 가져갔는데, 설마 이후에 심묘와 사경행이 만난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때 사경행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팔찌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만든 지 오래되지 않은 듯, 매끄러움이 부족했다. 소명풍은 심장이 뛰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남종을 불렀다.

“몇 사람을 불러 장군부 입구를 지키며 심 소저의 동태를 관찰하도록 해라. 장군부 안 하인을 매수해도 좋아. 심 소저의 일거수일투족, 일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말고 내게 모두 알려다오.”

소명풍은 이 말이 부모의 귀에 들어가 얼마나 그들을 놀라게 했는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이를 들은 소욱이 말했다.

“세상에. 명풍이 정말로 심 소저에게 정이 깊구나!”

“전 명풍이 장신구를 달라는 예의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어요. 명랑이 헛소리를 한 거라 여겼는데, 정말이네요.”

소 부인은 머리가 아픈 듯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종전에는 그렇게 자중하더니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아가씨 집안에 첩자를 만들다니, 아무리 반했어도 이런 방법으로 사모하는 건 아니에요. 바깥 하류 남자들과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소욱도 조금 탄식했다.

“아마 마음고생이 많나 보오. 이 아이가 날 닮아서 정이 깊구려.”

소 부인은 그에게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심 소저와 혼인을 못 하면 죽겠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먼저 장군부를 방문해야겠어요.”

소욱은 부인의 뜻을 알 수 없어 물었다.

“방문이오?”

“뭘 더 어쩌겠어요? 당신 아들의 며느릿감을 직접 봐야겠어요.”

* * *

예왕부.

밤바람이 불어 유달리 추웠다. 고양이 편지 한 통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장군부에는 병사가 많았다. 그들은 약하지 않으나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에 사경행은 묵우군의 비밀 호위에게 심묘의 곁을 지키라고 분부했다. 종양이라는 비밀 호위는 솜씨가 일류였다. 특히나 정보 염탐 부분에서 특출났는데 결점이 하나 있었다.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심묘가 무엇을 했는지 사경행에게 보고했다. 이 편지에는 심묘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나고 무슨 말을 했는지 쓰여 있었다. 볼일을 보고 목욕하는 것만 빼고는 일의 대소를 논하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적었다.

고양은 종양이 일은 잘하지만, 조금은 변태 같다고 느끼면서 읽어 내려갔다. 정오, 심묘 일행이 거리에서 소명풍을 만났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 고양의 표정은 변했다. 소명풍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몰라도 그의 행동은 괴상했다고 쓰여 있었다. 소명풍과 사경행은 여러 해 우정을 쌓았기에 이는 고양이 봐도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계우서가 사과를 깨물며 들어왔다. 그는 편지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을 보고 자신도 편지를 들여다봤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반짝였다.

“아, 심가 그 사촌 소저가 소명풍을 좋아하는구나.”

고양은 놀라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짜증을 냈다.

“사람 놀라게 무슨 짓이야?”

계우서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형의 담력이 너무 작은 거야. 나 소저와 소 공자는 아주 잘 어울려. 3형은 양쪽 다 우정이 있으니 이후 중매를 서줄 수도 있겠네.”

고양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넨 남녀가 어울리는 것만 중요해? 그리고 누가 나담이 소명풍을 좋아한다고 말했어?”

계우서가 고양의 손에 들린 편지의 한 줄을 가리켰다.

“내 눈에는 아주 잘 어울리니까 그렇지. 봐, 나 소저가 소명풍에게 형제가 똑같이 예쁘게 생겼다고 말했다잖아. 소명랑은 나 소저 앞에서 갖은 방법으로 소명풍을 잘 보이게 했어. 그렇지 않으면 나 소저가 ‘예쁘게 생겼다’라고까지 칭찬할 리 없어.”

종양은 심묘뿐 아니라 나담의 이야기도 썼다. 여러모로 인재인 계우서는 그중 이 한 줄을 한눈에 보았다. 고양은 마음속 불만을 억눌렀다.

“시시해.”

계우서가 고양의 부채를 뺏었다. 계우서는 고양이 부채를 부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며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형이 모르는 거야. 단지 나만, 이런 미남 수완가만이 여인의 진심을 분명히 볼 수 있어. 형이 뭘 알아? 내 비위를 맞춰주면, 내 비법을 형에게 전수해줄지 고려해볼…… 에취!”

추운 겨울이었다. 계우서는 부채질에 재채기했다. 계우서에게 부채를 뺏은 고양은 그를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그때 사경행이 들어왔다. 그의 뒤를 철의와 남기가 따르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조금 고생한 모양이었다.

“3형!”

계우서가 사경행에게 열정적으로 인사했다. 사경행은 계우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방을 향했다. 남기와 철의의 표정도 엄숙했다. 그러나 계우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3형, 심묘에게 사고가 났어.”

사경행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계우서를 보았다. 고양도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계우서가 목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막 종양이 보낸 소식을 봤는데 오늘 심묘가 외출했을 때 호색가를 만났대. 그 호색가가 심묘의 손을 매만졌대. 3형, 이 간덩이 부은 호색가가 누군지 알아?”

고양은 이마를 짚었다. 당연히 계우서의 말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철의와 남기에게 심묘는 주인이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어떤 사람이 곰같이 미련한 담력으로 심묘의 손을 만졌을지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소명풍! 3형의 의형제, 소명풍이야! 형제면서 그는 3형을 궁지에 몰아넣었어. 아주 의리 없고 인정이 없어! 뻔뻔해!”

계우서의 외침에 남기와 철의가 당황했다. 사경행의 시선은 차가웠다. 고양은 아예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계우서의 이런 한심한 꼬락서니를 정말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 * *

장군부.

작은 등불 아래 심묘는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지만 수시로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추운 날임에도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장군부에 사람을 안배했을 거라 추측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평소 부에서 집무를 보지 않았고, 심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장군부에는 기밀이 없으니 사경행의 사람이 있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호위가 한 사람 늘었으나 은자는 나가지 않으니 어쩌면 좋은 일이었다. 사경행의 사람이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으니 창문을 열어두면 그는 반드시 심묘가 주인을 기다린다고 보고할 것이었다.

심묘는 오늘 거리에서 소명풍을 만난 건 확실히 좋은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소명풍과 사경행의 사이는 좋았다. 게다가 전생에서 소명풍이 죽고 난 후 사경행만이 그를 위해 시체를 거뒀다. 사경행은 명제 황실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진정한 친구임을 다시금 공표한 셈이었다. 친한 친구이니 분명 서로를 잘 알 것이었다. 오늘 소명풍은 그녀가 찬 팔찌를 보며 ‘호두환’이라고 불렀다. 이는 필시 사경행과 어떤 관련이 있을 터였다.

심묘는 사경행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명제에 얼마나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오늘 소명풍의 태도를 보니 적어도 그는 모르는 것 같았다. 사경행이 살아 있는 것을 소명풍이 알아채면 말썽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때, 창문에서 기척이 들렸다. 사경행이 익숙한 몸짓으로 창문을 닫은 후 큰 걸음으로 탁자를 향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차를 따랐다.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그의 방 같았다. 심묘는 새삼스럽게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 제가 당신을 찾은 건 일이 있어서예요.”

“무슨 일?”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심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 공자가 당신이 살아 있는 걸 알 수도 있어요.”

사경행이 잠시 침묵했다. 심묘가 손목을 내밀었다. 매끄럽고 투명한 비취색 옥팔찌가 팔을 더욱 가늘고 하얗게 보이게 했다.

“오늘 소 공자가 길에서 이 팔찌를 보고 호두환이라며, 내게 당신을 만났냐고 물었어요. 어떤 연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당신이 살아 있다고 추측할 거예요.”

사경행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긴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사람을 취하게 했지만 이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기도 했다.

사경행은 지금 대량 예왕이고 신분이 발각되지 않도록 은 가면도 쓰는데 심묘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그의 신분이 들통날 것 같았다. 소명풍은 절친한 친구였지만, 사경행은 그에게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춰왔다. 이 일로 그에게 말썽이 생긴다면……. 사경행은 자신을 여러 번 도와줬는데 자신은 도리어 폐를 끼쳤다 생각하니 창피해졌다.

“아니면…… 방법을 생각해서 바로잡아요.”

사경행이 심묘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불가능해. 소명풍은 나와 여러 해 교제했어. 똑똑해서 속일 수 없을 거야.”

심묘는 머리가 아팠다. 이렇게 되니 이 호두환을 선물한 사경행이 원망스러웠다.

“그럼 어찌할 건가요?”

심묘도 이번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분을 숨기는 일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이었다. 사경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발견되면 발견되는 거지. 상대할 필요 없어.”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에게 말썽을 불러오지 않을까요? 소가는 어쨌든 명제의 관리 가문이에요. 당신은 대량 사람이니 당신을 적국에서 보낸 첩자로 여길 거라구요……. 후환이 끝없을 거예요.”

심묘가 소명풍을 나쁜 사람으로 여기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란 원래 이러한 존재이다. 이익을 위해 궁중의 친자매도 서로 해치는데, 양국 간 이익이 관련되어 있으니 더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 사이의 우정은, 진귀하지만 연약한 것이다.

사경행이 천천히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날 걱정하는 건가?”

당황한 심묘가 바로 받아쳤다.

“전 저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전 지금 당신과 한배에 탔어요. 당신이 발견되면 저도 말려들고 장군부도 함께 진창에 빠질 테니,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거예요.”

사경행은 심묘의 말이 우스웠다.

“걱정하지 마. 나와 넌 맹우인데 절대 손해 보게 하지 않아.”

사경행의 잘난 척에 적응한 심묘는 그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궁금한 바를 물었다.

“정말 소명풍을 저지하지 않을 건가요?”

“넌 내 위장이 얼마나 오래갈 거 같아?”

갑작스러운 사경행의 물음에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경행이 담담히 말했다.

“내 신분은 어차피 조만간 알려질 거야. 소명풍이 아니라도 말이야.”

심묘는 놀랐다. 사경행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럼 신분이 밝혀지면……, 당신의 친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해봤어요? 임안후, 송신 공주마마, 소명풍,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사경행의 신분이 밝혀진다 해도 그저 놀라고 말 일이다. 그러나 사경행의 친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사경행이 과연 그들과 어떻게 마주할지, 심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은 전생에 배신당하고 상해를 입었으나 어쨌든 장군부와 함께했다. 그러나 사경행의 신분이 드러나면 그는 대량의 예왕이니 일은 훨씬 더 복잡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또 한 번 웃었다.

“알면 또 어때? 세상 모두가 날 미워해도 괜찮다.”

그는 심묘와 눈을 마주하며 순간 잔혹한 웃음기를 띠었다.

“난 겁나지 않아.”

심묘는 그의 웃음에 마음이 시큰해졌다. 출중하고 아름다운 청년은 그의 웃음만큼 무정해 보이지 않았다. 사경행이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찌는 그냥 착용해. 내가 네게 준 것이니 걱정하지 마.”

사실 심묘는 전생에서 누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싫어했다. 누가 황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소문이 나면 위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구가 만지는 것도 기분 나빠했던 자신이었기에 현생에서도 거부감이 들었지만, 지금 사경행의 행동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너무 많은 것을 따지지 말자고 생각했다.

사경행이 일어났다.

“네가 급한 일로 부른 거라 여겼는데, 별일 아니니 난 이만 갈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종양을 불러. 그는 지금 네 비밀 호위이니 너도 굳이 창문을 열고 날 기다릴 필요 없어. 내가 도착하면 널 깨울 테니.”

사경행의 말은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심묘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 심묘는 비로소 그의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심묘가 작게 ‘종양’이라 속삭이자, 눈 깜박할 사이 눈앞에 검은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사경행이 규방 안에 이 사람을 넣은 건가 싶었다. 잠잘 때도 지켜보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당신 온종일 방 안에 있나요?”

“저는 입구의 나무 위에 있습니다. 소부인이 제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 저는 무공을 익힌 사람이라 조그맣게 불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심묘가 놀라 그를 보았다.

“날 뭐라고 부른 거죠?”

종양이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소부인.”

“날 소부인이라 부르지 말아요.”

“네, 소부인.”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심묘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요, 사경행은 무엇을 하러 갔나요?”

사경행은 다른 날에 비해 급히 떠났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묘는 낮의 일로 불안했기에 사경행이 소명풍을 죽이러 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저는 모릅니다.”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보니 사경행의 비밀 호위는 모른 척하고 있었다. 사경행은 비밀 호위를 보낸 게 아니라 감시자를 보냈다. 그녀는 종양을 관찰했다. 젊고 기력이 왕성해 보이니 심묘는 내일 그에게 주방에서 장작을 패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장군부에서 나온 사경행이 철의에게 분부했다.

“이후 계우서가 종양의 편지를 보지 못하도록 해라.”

계우서가 이렇게 중요한 때 말썽을 일으키면 사경행은 그를 대량으로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알겠노라 대답한 철의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물었다.

“주인님, 주유(周遊, 천하를 두루 돌아다님)하는 관진대사가 보타사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전에 가보라고 하셨는데, 마침 명제에 있으니 언제 움직이시겠습니까?”

사경행이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내일.”

* * *

다음 날, 날씨가 아주 좋았다.

나담은 최근 창문 장식으로 사용하는 종이 자르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경사스러운 날, 이를 꽃송이처럼 잘라 창문에 붙이면 예쁘리라고 생각한 그녀는, 심묘를 불러서 함께 한 무더기의 붉은 종이를 껴안고 가위로 열심히 잘랐다.

심묘는 가위질을 하다가 이전 일이 생각났다. 전생에 진국에 있을 때 공주와 태자는 심묘에게 일부러 가위질과 바느질을 시켰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위질을 하며 수를 놓으니 눈이 아주 나빠졌다. 눈은 침침해졌고 손은 매우 거칠어졌다. 그 뒤 명제로 돌아온 심묘는 상강이 구해온 마찰석으로 굳은살을 없애려 했지만, 피부결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수의의 생일날, 궁중 미인들은 생일 선물을 건네며 그를 즐겁게 했다. 미 부인은 공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가늘고 기다란 옥 같은 손가락이 공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심묘는 국토를 수놓은 자수를 부수의에게 선물로 주었다. 황후인 자신이 노래하고 춤추는 건 지위에 걸맞은 단정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안은 매우 대범해서 부수의가 좋아했고 군신들도 모두 칭찬했다. 이에 미 부인은 심묘도 공후를 연주해야 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자신은 원치 않았기에 부수의가 이를 거절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이번에도 한편이 아니었다.

“황후는 짐을 위해 한 곡 연주해주시오. 짐도 여러 해 당신의 연주를 듣지 못했소.”

결국, 심묘는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공후를 연주할 줄은 알았다. 부수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닥치는 대로 배웠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다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미 부인의 연주만큼 매력적이지 못해도 들을 만은 했다. 그러나 군신들과 여인들은 한목소리로 비웃었다.

공후를 연주하는 그녀의 손이 아름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된 바느질로 관절은 굵어졌고 손가락 사이사이에는 두툼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둔중하고 변변치 않은 손은 한 나라의 황후의 손이 아니라 시골 아낙의 손과 같았다. 여리고 하얀, 아름다운 옥 같은 미 부인의 손과 비교되었다.

심묘는 자신이 망신당하는 것보다 자신 때문에 완유와 부명도 손가락질당할까 봐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공후를 연주할 때 심묘는 미 부인이 아름답게 웃는 것을 보았다. 부수의의 얼굴이 차가워진 것도 보았다. 비참함에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순 없었다. 완유와 부명을 위해, 자신은 그 어떤 모욕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황후여야 했다. 이후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은 모습으로 곤녕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상강에게 이전에 쓰던 거보다 더 조밀한 마찰석을 가져와 손의 굳은살을 벗겨내게 했다.

넋을 잃은 심묘를 보고 나담이 그녀를 불렀다.

“심묘야?”

정신을 차린 심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봄에 떠드는 까치 그림은 이미 잘못 잘려져 있었다. 심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생에 자신의 손은 여리고 가늘었다. 그러나 전생의 굳은살들이 아직 존재하는 것 같았다. 마음에 남은 굳은살이 시시각각 그때의 난처함을 일깨우는 것 같았다. 심묘는 가위를 내던졌다.

“안 오릴래.”

“어째서?”

“굳은살 생길 거야.”

줄곧 심묘를 우러러본 나담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밤낮없이 가위질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 굳은살이 생겨? 이래서 네 아명이 ‘교교’구나.”

심묘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실 때 곡우가 들어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정당으로 오시랍니다.”

오늘 나설안은 공무가 없어 장군부에 있었다.

“어머니께서 무슨 일로 날 부르는 거야?”

곡우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소가 마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정당 안에서 마님과 이야기 중입니다.”

심묘의 손동작이 멈췄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남백 소가?”

* * *

정당 안 나설안은 소 부인과 이야기 중이었다. 소 부인은 오늘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집안 어른에게서 새 두 마리를 얻었는데 이 새는 북부 지역에서만 산다고 들었다며, 서북 사람인 나설안에게 이 새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물으러 왔다고 했다.

나설안은 처음에 소 부인이 자신의 출신을 비웃으러 온 거라고 여겼으나, 소 부인의 태도는 진실했다. 조금의 풍자도 조소도 없었다. 소 부인은 시골에서 공수한 신선한 과일도 한 상자 가져왔다.

이전에 심가와 소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소가와 친한 사가가 심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신이 군령을 거역해 황제를 모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소욱은 제일 앞장서서 심가를 벌하길 청했다. 이에 문혜제가 도리어 심가에게 경계를 늦췄으나 나설안은 그 일을 기억했다.

그러나 나설안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소 부인의 웃는 얼굴을 밀어낼 수 없었다. 소 부인은 새를 어떻게 키우는지 물어보러 왔다더니 정작 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소춘성의 견문에 신기해하고 나설안이 아들딸을 잘 길렀다며 칭찬했다. 이에 나설안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칭찬이 오래 이어지자 나설안은 심묘를 불러 소 부인에게 인사시키려 했다. 막상 딸을 부르고 나자 나설안은 임안후부가 힘을 잃자 소가가 장군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아첨하려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 의도로 왔다면 소가와는 교제할 수 없다. 이에 심묘를 괜히 부른 건 아닌지 후회가 됐다. 기대하는 눈빛으로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소 부인을 보자 그녀는 더욱 울적해졌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종이 들어와 심묘의 도착을 알렸다. 소 부인은 몸을 세우고 앉아 흥분한 채 입구를 바라보았다. 연노란색 옷을 입은 키 큰 아가씨가 들어왔다. 미간 사이 용맹한 기개가 보였고, 용모도 아름다웠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녀는 뛰듯이 걸었고 몸에 장신구라고는 진주 귀걸이뿐이었으며, 허리에는 붉은색 비수를 착용하고 있었다.

소 부인은 소명풍이 이런 여인을 좋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인은 활발해 보였지만 단정하지는 않았다. 여인이 나설안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모.”

여인의 말에 당황한 소 부인은, 그제야 그 여인 뒤에 서 있는 다른 여인을 보았다. 연한 풀색의 매화 테두리를 두른 하얀색 옷과 주름치마를 입은 아가씨는 흰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뽀얀 달걀처럼 하얬다. 눈은 둥글고 컸으며 코와 입은 작아, 수려하면서 귀여운 생김새였다. 고귀한 자태로 단정하게 걸어오기까지 하니 마치 궁중 미인 같았다.

소 부인은 소욱에게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태후를 알현하러 갔다가 황후를 본 적이 있었다. 지금 눈앞의 작은 아가씨의 자태는 마치 그때 본 황후 같았다. 아니, 황후보다 더 고아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그녀가 나설안에게 어머니라고 부른 후 소 부인을 바라보자 나설안이 얼른 소개했다.

“이분은 평남백 소가의 부인이시다. 이쪽은 내 딸 심묘와 질녀인 나담입니다.”

심묘와 나담이 소 부인을 향해 인사했다. 소 부인은 이전 궁중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묘가 궁중연회에서 명안 공주와 맞선 일을 듣고, 심묘가 온순하지 않다 여겼기 때문에 소명풍이 심묘를 좋아한다 했을 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뻔뻔하다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장군부를 방문한 것이다. 아들의 혼인은 큰일이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심묘가 오만불손한 여걸이라고 여겼기에 무의식중에 나담을 심묘라고 여겼다. 그런데 직접 심묘를 만나 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소 부인은 웃으며 작은 주머니 두 개를 꺼내 심묘와 나담에게 건넸다.

“심 부인, 정말 따님을 잘 키우셨네요. 두 사람 모두 아름다워요. 어디서 선녀가 걸어오나 했네요. 심 부인은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나담과 심묘는 작은 주머니를 보며 당황했다. 새해에나 주고받는 선물이었기 때문에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두 가문이 서로 잘 알고 있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심묘는 소가와 심가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명풍의 일이 들킨 건가 싶었다. 나설안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려 했으나 소 부인이 한발 빨리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거절하시면 제 속이 상할 겁니다. 두 아가씨가 예쁘고 예의 바르니 마음에 들어요. 첫인사 겸 건네는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심 부인, 부디 기꺼이 받아주세요. 저도 딸이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나설안은 소 부인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적당한 말로 대꾸했다.

“부인 댁의 두 아드님도 아주 우수하지요.”

소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가 뛰어난가요? 명랑은 온종일 장난만 치며 앞날을 걱정하지 않아요. 그저 자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제멋대로 굴기만 하지요. 심구 공자는 어릴 때부터 철이 들었다던데 아주 부럽답니다.”

나설안이 웃었다.

“명풍 공자가 있으시잖아요. 소부의 큰 공자는 청년 준걸이지요.”

소 부인은 기뻐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심묘와 나담을 바라보았다.

“두 아가씨는 우리의 잡담이 조금 무료할 텐데, 나가 놀렴. 우리는 마음속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소 부인은 완곡하게 두 사람을 배제하려는 모습이었다. 이에 심묘는 더욱 경계했다. 소명풍이 소 부인에게 자신을 따돌리라고 했다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소 부인은 정말 어제 일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심묘는 일단 따지지 않고 나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종양, 정당으로 가서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요.”

심묘는 작게 말해도 종양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를 본 나담이 물었다.

“심묘야,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정당 안, 소 부인은 명치에 손을 얹고 낙담하는 기색으로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부인을 속이지 않을게요. 명풍은 확실히 괜찮은 아이예요. 오랫동안 저는 물론이고 자기 부친도 마음 쓰게 한 적이 없지요. 언행이 훌륭하고 학식도 높아요. 효를 알고 예를 안답니다. 제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명풍 같은 아이는 정말 정경성에서 등롱불을 들고 찾아도 찾기 힘들 거예요.”

나설안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심구가 훌륭하다고 추어올리던 소 부인이 지금은 또 자기 아들이 정경성에서 제일이라고 말하니, 소 부인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그때 소 부인이 과장되게 탄식했다.

“조금 나쁜 점이 있다면 완고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면 다른 건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탓에 지금까지 혼인하지 않았으니, 정말 안타깝죠.”

나설안은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소명풍은 재능과 용모가 모두 뛰어나니 혼인 문제로 걱정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설안은 소 부인이 괴로워하자 어쨌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부인 너무 근심할 것 없습니다. 우리 심구도 아직 혼인하지 않은 걸요. 며느리는 잘 골라야 합니다. 마음이 급하면 뜨거운 두부를 먹을 수 없다는 옛말도 있잖아요. 서두르지 말아요. 너무 급히 골라버려서, 맞지 않는 부분을 장래에 발견하면 큰일 아닙니까?”

소 부인이 나설안의 손을 잡고 웃었다.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후대는 자연히 후대의 복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명풍은 어찌나 과묵한지 좀처럼 입을 열질 않아요. 전 그 아이의 생각을 조금도 모른답니다.”

나설안은 소명풍을 본 적 있었다. 그는 말재주가 있고 변론할 때 격렬했다. 그가 과묵하다는 말은 소 부인만 할 터였다. 나설안은 그녀와 더는 집안 이야기를 나누길 원치 않아 화제를 돌렸다.

“소 부인, 새를 어떻게 기르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소 부인은 상자 안에 있는 참새 두 마리를 보고 못 들은 척 이어 말했다.

“아뇨, 좀 미뤄도 돼요. 전 그 쓸모없는 아들 이야기를 더 하고 싶네요.”

나설안은 할 말을 잃었다.

“명풍은 어릴 때 아버지가 찾은 서화를 좋아했고, 그 뒤 다른 서화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명풍에게 보낸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답니다. 그러나 사정이 생겨 좋아하던 서화는 다른 곳에 보내야 했어요. 그때 명풍은 한동안 힘들어했답니다.”

소 부인은 또다시 탄식했다.

“명풍은 정이 깊은 사람입니다. 마음에 든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무언가를 마음에 두면 다른 것은 원치 않아요.”

나설안이 대체 말하고 싶은 게 무어냐고 묻고 싶어졌을 때, 소 부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아가씨도 이러합니다. 어느 아가씨를 좋아하면 다른 아가씨는 쳐다보지도 않지요.”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나설안이 웃었다.

“소 공자에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군요. 어느 댁 아가씨에게 그런 복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설안은 예의상 한 말이었지만, 소 부인은 나설안의 말에 손뼉을 쳤다.

“바로 귀댁의 아가씨랍니다.”

나설안의 안색이 즉시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흰색에서 푸른색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소 부인이 빙빙 돌려 하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설안은 그녀가 새장을 가지고 와서 새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끝마다 자기 아들이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고 과시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혼담 때문이었다.

소 부인은 나설안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근심했다. 그녀는 장군부의 가업이 이미 커서 그들이 소가 가산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정경성에서 장군부와 혼사를 바라는 가문은 많았다. 오늘 직접 심묘를 보니 예전 소문 속 나약한 면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단정한 기질을 가진 아가씨는 집안의 주모 역할을 잘할 것이다. 소 부인은 심묘의 외모와 내면이 대단히 만족스러웠으나 장군부의 태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나설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소 부인, 오늘 오신 건 이 때문입니까?”

소 부인은 난감했다. 다른 명분으로 며느릿감을 보러 온 것은 사실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

“심 부인, 먼저 화내지 마십시오. 오늘 제 행동이 실례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도 어머니니 응당 제 마음을 이해할 겁니다.”

나설안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사실 오늘 소 부인의 태도는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나설안은 차분히 말했다.

“소 부인은 어째서 저와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설안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묘가 자기 몰래 소명풍과 사적으로 교제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제의 민풍이 개방적이지만, 집안이 모르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사적으로 약속을 했다면 좋은 일은 아니었다.

“명풍이 심 소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명랑에게 들었습니다. 사실 믿지 않았지요. 아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지금까지 어떤 아가씨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거든요. 저도 심 소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오늘 보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심 소저를 보니 명풍이 왜 심 소저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쁘고 성격이 좋으며 태도도 좋으니 온 명제에서 장군부만이 이런 아가씨를 키울 수 있다고 추측됩니다. 심 부인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명풍뿐 아니라 저도 심 소저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고, 부인과 이야기하고 싶어졌습니다. 부인이 호쾌해서 직설적인 대화를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많이 돌리지 않고 말하는 겁니다.”

소 부인은 매우 진지했다. 그녀는 심묘를 치켜세웠다. 어머니로서 딸을 칭찬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나설안의 안색도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심묘의 혼사를 홀로 결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현재 장군부의 위치는 특수했다. 사돈의 세력이 너무 높아도 너무 낮아도 안 되니, 심묘의 혼사를 결정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소명풍의 평판은 좋은 편이나 몇 년 전 병 때문에 벼슬길을 그르쳤다. 심묘를 약골에게 시집 보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나설안은 소명풍과 개인적으로 말을 나눠본 적은 없어 그의 품성이 어떤지는 잘 몰랐다.

마지막으로 심묘가 소명풍을 좋아하느냐는 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소명풍이 심묘를 좋아한다고 해도 심묘의 마음은 아직 몰랐다. 아이는 부모의 명을 듣고 중매인을 따른다고 하지만 나설안은 무엇보다도 딸의 행복을 바랐다. 딸의 부군은 반드시 그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렇게 허둥지둥 결정할 수는 없었다.

나설안이 침착하게 미소 지었다.

“심묘의 혼사를 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제가 우리 집안 어른을 대신해 부인과 공자의 특별한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정혼은 단시간 안에 결정할 수 없고, 지금은 부인께 답을 드릴 방법이 없으니 조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부인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 어머니잖습니까. 어머니로서 자식을 아끼니 부인의 양해를 바랍니다.”

나설안은 단칼에 혼담을 거절하지 않고 조금의 여지를 남겼다.

목적을 일부 달성해 그런대로 만족한 소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당에 혼자 남은 나설안의 눈빛이 가라앉아 무거워졌다. 자신과 심신은 여태 심묘의 혼사는 급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혼담을 꺼내기 위해 방문한 소 부인은 심묘가 정혼할 나이임을 깨닫게 했다. 나설안은 정경성에 어떤 청년 준걸이 있는지 떠올려봤다. 심신이 돌아오면 이 일을 이야기하고, 적당한 상대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소 부인은 소부로 돌아왔다. 소욱은 그 즐기는 낚시도 가지 않은 채 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 부인이 의자에 앉자 소욱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며 여종에게 차를 가져오라 분부했다.

“어찌 됐소? 심 부인이 뭐라고 했소?”

“승낙하지 않았으나 거절하지도 않았어요. 생각해 보겠다네요. 장군부는 보통 집안이 아니니 조금 생각해본다고 나쁜 일은 아닙니다. 오늘 무턱대고 갔으니 실례를 저지른 거기도 하고요.”

“생각한다고? 무슨 생각을 하오?”

소욱이 불쾌한 티를 냈다. 소 부인은 이런 소욱이 우스웠다.

“오늘 당신이 갔다면 승낙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허락을 안 한다는 거요? 명풍이 뭐가 나쁘다고? 정경성에서 명풍 같은 청년 준걸을 어디서 또 찾으려고? 어느 댁 아가씨든 명풍에게 시집오면 전생에 쌓은 복이 많은 것일 텐데, 안 그렇소?”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잠깐, 그 심 소저는 어땠소?”

소욱은 궁중연회에서 심묘를 보았다. 그는 심묘가 아주 괜찮으나 성격이 너무 드세다고 느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보는 건 정확하지 않으니 여인이 봐야 했다. 그래서 소 부인이 장군부를 찾은 것이기도 했다. 까다로운 시선으로 며느릿감을 관찰한 소 부인이 심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다. 소 부인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명풍의 안목이 좋아요. 심 소저는 정경성 어느 규수들보다 괜찮았어요. 성격, 얼굴 말할 것 없어요. 하기야 장군부가 키운 아가씨인데 품성이 어디 떨어질라구요. 게다가 그런 기질은 보기 드물어요. 궁중의 귀인 같았어요. 명풍이 이러한 아가씨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그 아이는 성격이 온순하니 강한 부인이 주모로 있으면 부가 든든하고 좋을 거예요.”

소욱은 소 부인이 드물게 남을 칭찬하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대단히 트집을 잡기 마련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부인은 반대로 너무 온유한 건가 싶었다.

바깥에서 돌아온 소명풍이 대청으로 들어서려 하자, 소명랑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소명랑이 진중한 얼굴로 소명풍을 바라보았다.

“형님, 지금 들어가서 귀찮게 굴지 마. 형의 혼인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고.”

“내 혼인? 무슨 혼인?”

소명풍은 소명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 오늘 어머니께서 형을 대신해 며느릿감을 보러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소명풍이 놀라 되물었다.

“무슨 며느릿감을 보러 가? 누구?”

“심묘 누나 아니야?”

“어머니가 내 아냇감을 보러 장군부에 다녀오셨다고?”

소명풍이 목소리를 높였다. 소명랑은 놀란 형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장래 심묘 누나가 내 형수가 되면 누나가 형의 이런 모습은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정말 형이 부러워.”

소명랑은 소명풍의 팔을 토닥였다.

* * *

소가가 장군부로 가서 소명풍의 아내감을 보고 온 일은 벌써 적지 않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진지한 태도로, 심묘를 대신해 정경성의 청년 준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묘를 어느 꽃구경 연회에 보내야 할지 따져보았다. 심지어 심신은 심구에게 그와 또래인 청년들을 주의해서 보도록 했다.

장군부의 이런 기척을 예왕부가 모를 리 없었다. 예왕부로 돌아온 사경행은 계우서와 마주했다. 종양이 보낸 소식을 중간에 가로챘는지 계우서는 이리저리 날뛰었다.

“3형, 소가 사람이 방문해 혼담을 꺼냈대. 형은 뭘 더 기다리는 거야? 소명풍을 찾아가 따지지 않을 거야?”

고양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 부인은 정경성에서 많은 부인과 친교를 맺었어. 게다가 소가는 명성도 좋지. 심신이 소명풍을 좋다 느끼면 이 혼담을 승낙할 거야.”

사경행은 종양의 편지를 보고 머리가 아팠다. 소명풍은 일 처리를 절차대로 온당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장군부를 바로 방문해 혼담을 꺼냈다. 계우서는 옆에서 사경행을 꼬드겼다. 계우서는 분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명풍은 3형과 함께 호형호제했어.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음에도 3형이 신분을 바꿨다고 함정을 팠구나.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시간이 오래 지나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소명풍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3형은 그와 절교해야 해.”

고양은 계우서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소가의 일도 그렇고, 장군부는 심묘를 위해 남편감을 물색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명제에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서둘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고양의 말에 사경행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계우서는 눈치채지 못했다.

“내게 방법이 있어.”

계우서의 말에 몇 사람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3형은 지금 어쨌든 그들에게 이미 죽은 사람이야. 밤에 귀신 분장을 해 소명풍의 꿈에 나타난 듯 가장하는 거야. 심묘는 3형이 좋아하는 사람이니, 영혼 혼인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지. 소명풍은 놀라서 당연히 심묘와 혼인하지 못할……. 아, 3형, 가지 마. 내 말을 끝까지 들어봐.”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보냐?”

서재로 돌아온 사경행은 탁자에 앉았다.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철의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주인님, 오늘 보타사에 진관대사…….”

진관대사는 떠돌이 중으로, 어떤 사람은 그가 대량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진국 사람이라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명제 사람이라고 했다. 어쨌든 진관대사가 사원에 방문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귀빈석으로 모셨다. 진관대사는 부처가 직접 가르친 제자로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과장된 부분이 있을 테지만 진관대사의 예언은 잘 맞았다. 진관대사는 일찍이 대량의 수해(水害)를 예언했기 때문이다.

대량의 영락제가 진관대사에게 국사 지위를 주겠다고 붙잡은 적도 있으나 진관대사는 이를 거절했다. 2년 전 사경행이 대량으로 돌아오자, 영락제는 진관대사가 사경행의 관상을 봐주길 바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 진관대사는 이미 대량을 떠난 뒤였다. 그는 신출귀몰하게 훌쩍 나타나 훌쩍 떠나니 종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명제에서 우연히 그를 만난 것이었다.

오늘 낮 보타사에 갔을 때,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관대사는 이미 그의 신분을 파악했다. 그는 사경행에게 예언했다.

“파군자미, 흉악한 용이 하늘을 정복하고 전체 국면을 관통한다.”

파군자미는 천기를 점칠 때 사용하는 말로 은혜와 위엄이 있다는 뜻이었다. 즉 사경행은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그가 전체 국면의 변화와 관련 있다는 의미였다. 사경행은 명제에 있을 때 임안후부의 적자였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 뒤, 그는 대량 예왕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흉악한 용이 하늘을 정복한다는데, 용은 만물의 주인이다. 하나 그 용이 하필 흉악한 용이라니 매우 애석할 뿐이었다.

사경행은 운명과 재난에 관해 물었다. 진관대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흉한 용에게 재난은 없으며,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이 도울 것이라 말했다. 사경행이 다시 그 뜻을 묻자 진관대사는 천기를 더 누설할 수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어렵게 진관대사를 만났는데 그가 이리도 모호하게 말하니 철의는 낙담했다. 사경행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그가 타인을 도와준다니. 예언에 따르면 자신의 주인이 보살이 된 것 같았다. 주인을 방패로 삼다니 그 사람의 의견은 차치하고 과연 사경행이 이에 동의할지 의아했다.

“상관하지 말고, 먼저 편지를 대량으로 보내.”

사경행의 표정은 엄숙했다.

* * *

심묘는 잠들지 못했다. 오후에 종양이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소 부인이 장군부에 온 까닭이 소명풍의 혼담을 꺼내기 위해서일 줄이야. 종양은 딱딱한 얼굴로 나설안과 소 부인의 대화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심묘에게 전했다. 건장한 대한이 여인의 말투로 “우리 모두 어머니잖습니까.”라고 말하니 심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보석 같은 비밀 호위를 찾다니, 사경행은 확실히 인재였다.

그러나 심묘는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소 부인이 어째서 소명풍의 혼담을 꺼내러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종양은 소명풍이 심묘 자신에게 정이 깊다고 했는데 이를 눈곱만큼도 믿을 수 없었다. 그와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다. 더욱이 그날 거리에서 소명풍의 시선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

심묘는 혹시 소명풍의 음모인가 싶었다. 호두환의 비밀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혼사를 결정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되면 다 털어놓으리라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명풍에게 손해였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건다면 사건을 조사하는 대리사 같은 관아는 백성들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다.

곡우가 들어왔다. 그녀는 산더미 같은 옷들을 껴안고 있었다.

“아가씨, 마님께서 내일 보타사로 갈 때 담백한 의상으로 입으라십니다. 제가 짙은 색 의상으로 가져왔으니, 몇 개 골라주세요.”

곡우는 등불의 심지를 잘랐다.

“오늘은 이만 쉬세요. 이른 시간에 일어나셔야 합니다.”

심묘는 유감스러웠다. 저녁에 나설안의 여종이 찾아와 나담과 심묘에게 내일 세 사람이 함께 보타사로 가서 향을 올리자는 말을 전했다. 나담은 보타사에 가보지 않아 매우 흥미로워했다. 그러나 심묘는 아니었다.

보타사는 정경성에서 이름난 사원으로 북쪽 산허리에 위치했다. 그곳의 보살 부처가 매우 영험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 덕에 아주 유명했다. 정경성의 부인과 아가씨는 모두 그 나무를 잘 알고 있었다. 혼인 전의 아가씨는 먼저 사당 안에서 붉은 줄을 사야 했다. 그다음 그 줄을 주머니에 묶고 던졌을 때 나뭇가지에 걸리면, 월하노인이 그 여인에게 좋은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것이었다.

심묘도 전생에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에 소원을 빌러 간 있었다. 부수의와 맺어지게 해주십사 기도하며 100여 개의 붉은 줄을 사서 나무에 걸었다. 그 뒤, 심청과 심모의 입으로 이 일이 전해져 자신은 정경성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더는 그 나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자신도 별생각 없이 연말이 가까워져 나설안이 향을 올리러 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종양에게서 나설안이 소 부인과 나눈 이야기를 들은 후니 모친의 목적이 공불(供佛)에 있지 않음은 알고도 남았다. 나설안은 분명 자신을 위해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에 붉은 줄을 던지러 가려는 것일 터였다.

이를 원치 않으니 아픈 척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나담의 흥미가 원체 높은 데다 자신도 이유 없이 나설안의 뜻을 어기기 힘들었다. 부득이 허락하고 말았으나 마음속은 불편했다.

그날 밤, 심묘는 꿈을 꾸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다. 꿈속에서 자신은 나무 아래에서 붉은 줄을 던졌다. 나설안이 한 통 가득 붉은 줄을 사도록 해 자신은 팔이 아플 정도로 던지고 또 던졌다. 이윽고 붉은 줄은 바닥났다. 한숨 돌렸지만, 바닥에 떨어진 게 하나도 없어 의아했다. 그때 나무 위에 자줏빛 장포를 입은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품에는 자신이 던진 붉은 줄이 가득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입꼬리를 올려 물었다.

“넌 누구에게 시집가려는 거지?”

날카롭게 올라간 눈썹, 높은 코, 얇고 불그스름한 입술, 도화 눈은 화려한 보검같이 날카로웠다. 바로 사경행의 얼굴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심묘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았다. 경칩이 심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가씨, 어젯밤 잠을 설치셨나요? 눈 밑이 푸른색이에요.”

심묘가 손을 내저었다. 간밤에 자신이 꾼 꿈은 기괴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건만 분함과 부끄러움이 들어서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후 심묘는 머리를 빗고 문을 열었다. 정당 안에는 나설안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곁에 심구와 나릉도 함께였다.

“모두 향을 올리러 가서 부처님께 보우를 구하자꾸나.”

“그럼 나도 함께 갑시다.”

나설안은 심신의 눈치 없음을 비난했다.

“당신이 가서 뭐 하게요? 당신은 가지 마세요.”

심구는 왜 심신이 따라가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대번에 눈치챘다. 나설안은 자신과 나담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혼인할 나이가 된 심구와 나릉에게도 붉은 줄을 던지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잘 몰라서 그렇지, 여인만 붉은 줄을 던질 수 있었다. 심구와 나릉이 붉은 줄을 걸면 두 사람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심묘는 순간 몸을 떨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사람들은 빠르게 길에 올랐다. 보타사는 장군부와 거리가 있어 오전인 지금 출발해도 정오 즈음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가는 길 내내 나담은 매우 들떠 있었다. 그녀는 나설안에게 보타사에 어떤 신기한 것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나설안이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를 언급하자 나담은 아주 재미있어했다.

“우리 소춘성의 풍속과 조금 닮았네요. 보타사는 이름난 절이니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도 아주 영험할 거예요. 심묘야, 우리도 붉은 줄을 던지는 게 어때?”

나담이 심묘의 팔을 흔들었다. 이에 심묘가 나담을 가볍게 흘겨보았다.

“혼인이 급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나담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했다.

“말은 그렇지만 그 지방에 가면 그곳 풍속에 따라야지.”

“그래. 교교야, 나담아, 보타사에 가면 붉은 끈을 던지거라. 시집가고 말고 상관없이 행운이 올 거야.”

나설안의 말에 흥분한 나담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심묘는 나설안의 생각을 알고 있기에 유감스러웠으나 일단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길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명제의 수백 년 된 고찰 선방 안에서는 향불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곳에는 칠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대사가 한 명 앉아 있었다. 이 대사는 인자하고 선하게 생겨 마치 불조의 제자 같았다. 진분홍색 가사를 걸친 그는 손에 쥔 염주를 하나씩 굴렸다. 그의 곁에 있던 젊은 중이 물었다.

“사부님, 이미 이곳에서 여러 날을 기다렸습니다. 인연의 그 사람이 정말 올까요?”

“우리가 이곳에서 여러 날 기다린 건 모두 그를 위해서다.”

십 대의 제자는 젊고 호기심이 넘쳐 입이 가벼웠다. 그는 담담히 말한 대사에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기다렸잖습니까. 대체 언제 올까요?”

말없이 염주만 굴리던 대사가 어느 순간 동작을 멈췄다. 그는 손가락으로 둥근 염주 알을 거듭 어루만졌다. 대사가 살짝 웃었다.

“이제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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