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장
정오가 채 되지 않아 심묘 일행은 보타사에 당도했다. 마부가 마차를 서둘러 몰아서인지 길이 순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보통 때 세 시진이 좀 덜 걸리는 거리를 오늘은 두 시진 만에 도착했다.
일행은 마차에서 내렸다. 산등성이 중간, 무성한 수풀 속에 고찰이 자리했다. 첩첩 구름이 보여 선경인 듯했다. 불경 소리가 요원하게 들려 경외감이 들기까지 했다. 나담이 감탄했다.
“정말 유명 사원다운 품격이 있네.”
“심구야, 나릉아, 너희는 말을 묶고 오너라. 난 나담과 교교를 데리고 먼저 들어가마.”
나설안의 분부에 심구와 나릉이 떠나자 장군부 호위가 심묘 일행을 따랐다. 나담은 멀리 붉은 줄이 가득 걸린 나무를 보며 말했다.
“저게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예요? 고모, 빨리 와서 보세요. 엄청 커요.”
나설안이 웃었다.
“우리도 붉은 끈을 먼저 사자꾸나.”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심묘는 매우 유감스러웠다. 달리다시피 빠르게 걷는 나설안과 나담과 달리 심묘는 점점 뒤로 처졌다. 그러나 장군부의 호위와 숨어 있는 종양이 있어 심묘는 걱정스럽지 않았다. 나설안과 나담을 따라 불당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심묘의 옷자락을 누군가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문지방 옆에 도복 차림을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불교 사원인데 왜 도교 사람이 있는지 의아했다.
이 도사의 의복은 허름했다. 그는 눈앞에서 첨통(籤筒, 길흉의 점사를 적은 점대를 담은 통)을 흔들었는데, 통도 옷차림처럼 허술했다. 꼭 먼지떨이를 들고 있는 것 같아 심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마흔 살이 넘은 듯 수염이 휘어져 있는 그가 반짝이는 시선으로 심묘를 보았다.
“아가씨, 제가 아가씨의 양쪽 눈썹 사이에 검은 것을 보았소. 살해될 재액인 것 같소. 눈 밑이 푸른 것은 미인이 재난을 당함을 말합니다. 소저를 대신해 점을 쳐봐도 될는지요?”
“어디서 온 정신병자야! 말끝마다 허튼소리구나!”
도사의 말에 분노한 경칩이 외쳤다. 심묘는 도사가 쥔 치맛자락을 빼냈다. 그녀는 도사를 바라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봉황으로 태어났으나 일생 감옥에 갇혔으니, 애석하구나.”
심묘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려 그 도사를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도사가 득의양양 고개를 돌리며 흥얼거리자 경칩이 들으라는 듯 내뱉었다.
“아가씨, 마음에 두지 마세요. 분명 어디서 온 사기꾼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도교 사람이 왜 불교 사원에 있는지 몰라도 이 도사는 정식 도사도 아닌 것 같았다. 도인다운 풍채와 골격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저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떠돌이 사기꾼과 다를 바 없었다.
나설안과 나담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심묘 뒤에 장군부 호위가 몇 명 있었으나 그들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심묘는 조금 생각한 후 도사 앞의 작은 나무 걸상에 앉았다.
“점을 보겠어요.”
“제 점괘는 아주 비싸답니다.”
심묘는 주머니 안에서 금으로 만든 땅콩을 꺼냈다. 소 부인이 그녀에게 준 그 작은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이다. 소 부인은 실례를 범한 것을 용서받기 위해 주머니에 금 땅콩을 넣은 듯했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를 말리려고 했으나 한발 늦었다. 시장에서 점을 치면 비싸도 은자 몇 냥이었다. 그런데 무려 황금을 주다니! 심묘가 시세를 몰라서 된통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심묘의 표정을 보니 되돌릴 여지는 없었다.
“점괘를 봐주면 이 금 땅콩을 주겠어요. 하지만 정확하지 않으면 난 당신이 사기를 쳤다고 고발해 관아에 끌려가게 할 겁니다.”
도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금 땅콩을 받았다. 그는 첨통을 흔든 후 심묘 앞에 내밀며 웃었다.
“아가씨, 두 개를 꺼내십시오.”
곡우의 표정은 여전히 부루퉁했다. 하지만 궁금증은 별개의 문제였다.
“왜 두 개예요? 보통 한 개면 되는데, 혹시…… 한 개는 평안을 점치고, 한 개는 연분을 점치려는 건가요?”
나설안은 심묘의 혼인을 신경 쓰기 시작했고 이를 심묘의 여종들도 눈치챘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가 보타사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에 붉은 줄을 던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도사가 두 개의 점괘를 뽑으라니 자연스럽게 연분이 떠올랐다.
도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명을 보는 것이오.”
“운명을 보는데 왜 두 개를?”
도사는 경칩의 미심쩍은 얼굴을 보지 못한 척 심묘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신비롭게 웃었다.
“아가씨의 운명은 한 개로는 완전히 볼 수 없소이다.”
심묘는 마음이 움직였다. 도사의 모든 것이 준비된 듯한 모습을 보며 그녀는 첨통을 들어 흔들었다. 두 개의 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도사가 괘를 잡아 보았다.
경칩과 곡우는 긴장했다. 도사가 머리를 흔들며 수염을 천천히 쓸었다.
“지친 봉황이 감옥에 갇혔다. 애정이 상 재난이로다. 사형대 앞에 서니 눈앞 이익에 급급했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도다. 대흉이요.”
도사의 말에 경칩과 곡우의 안색이 변했다. 대흉이라니, 사형대라니 경칩이 분노했다.
“너 이 가짜 도사! 모두 허튼소리구나. 누굴 속이려고? 내가 보니 넌 사기꾼이야. 관아에 잡혀가야 해.”
“아아, 뭐가 그리 급한가? 어린 아가씨가 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아직 하나가 더 남지 않았더냐?”
심묘의 심장이 뛰었다. 지친 봉황이 감옥에 갇혔다는 도사의 점괘대로 자신은 발버둥 쳤지만, 끝끝내 냉궁에 갇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재난에 가족도 연루되어 장군부가 멸문되었으니 사형장에 선 것과 같았다. 자신은 부수의를 황위에 앉히려 심혈을 기울였으나 결국 모든 고생은 이익이 아닌 재난으로 돌아왔다. 도사의 점과 일치했다. 부수의는 자신 손에 스스로 목을 맬 흰 천을 쥐여주는 것으로 그간의 헌신에 보답했다. 심지어 완유와 부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그는 자신에게 무엇도 남겨주지 않았다.
“도사님, 다른 괘도 봐주십시오.”
경칩과 곡우는 답답했다. 심묘가 다른 괘도 봐주길 원하자 뜻밖이었다. 그들은 심묘가 왜 사기꾼의 헛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알 수 없었다. 도사는 만족스럽다는 듯 헤헤 웃었다. 그는 다른 괘를 줍고서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전처럼 수염을 만지며 천천히 말했다.
“불운이 극에 달하면 행운이 온다.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귀인이 서쪽에서 올 것이다. 길조요.”
경칩과 곡우는 도사가 또 불길한 말을 할까 봐 걱정했다. 새해가 가까운데 불길한 말을 들어 좋을 리 없었다. 길조라는 도사의 말에 그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경칩이 도사를 비꼬았다.
“이 사기꾼, 하나는 흉, 하나는 길. 도대체 어느 게 진짜예요?”
“두 개 모두 진짜다. 믿지 못하겠거든 너희 아가씨에게 물어보거라. 내가 거짓말하는지.”
“경칩, 곡우 너희는 먼저 호위 쪽으로 가거라. 난 이 도사와 따로 할 말이 있다.”
심묘의 말에 경칩은 이 떠돌이 사기꾼에 대한 경고를 몇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곡우가 경칩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경칩을 끌고 심묘가 도사와 대화하도록 자리를 피했다.
심묘가 눈살을 찌푸리며 도사를 보았다.
“도사는 무엇을 아는 건가요?”
도사가 첨통을 챙기며 심묘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가씨 관상을 보니 아가씨는 아주 부귀한 사람입니다. 아가씨의 팔자를 보니 봉황의 운명입니다. 일생 흥성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팔자가 바뀌었습니다.”
“팔자가 바뀌다니 무슨 말이에요?”
심묘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도사는 동작을 멈추고 심묘를 가만히 응시했다.
“아가씨의 팔자는 매우 이상합니다. 아가씨는 일생 한 번 큰 재난을 만나는데 이 재난이 지나면 일생은 순조로워집니다. 아가씨의 첫 번째 괘는 재난을 넘기지 못한 겁니다.”
“내 재난이 무엇인가요?”
“하나는 진짜 봉황, 하나는 가짜 봉황. 가짜 봉황이 진짜 봉황의 행운과 복을 빼앗았고, 진짜 봉황은 갇혀서 고생한다.”
심묘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자신이 진짜 봉황일 테니 가짜 봉황은 미 부인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미 부인은 부성을 낳았고, 부수의는 부성을 좋아했다. 전생에 부명이 죽고 자신도 죽었으니, 이후 부수의는 아마 미 부인을 황후로 세우고 황위도 총애하는 부성에게 물려줬을 것이었다. 그러니 팔자를 빼앗겼다고 할 수 있었다.
“도사가 말한 것은 첫 번째 괘. 그럼 두 번째 괘에서 내 재난은 넘길 수 있는 건가요?”
도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가씨 혼자의 능력에 기대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운수가 좋습니다. 귀인의 도움이 있습니다.”
“귀인? 누가 나의 귀인인가요?”
“귀인은 당신과 인연이 있습니다. 흉악한 용의 운명으로 하늘에 엎드려 있습니다. 봉황은 상자에 갇혔지만, 그가 당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의 악한 기운을 풀어줄 수 있구요. 이 사람을 만나면 그의 권력을 빌려 아가씨의 팔자가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다소 잃는 건 있으나 반드시 그걸 크게 상회하는 소득이 있을 겁니다.”
“그 귀인은 어디에 있나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심묘의 물음에 도사가 웃었다.
“멀다면 하늘에, 가깝다면 눈앞에.”
도사는 더는 말하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심묘가 시선을 반짝였다.
“하나만 더 질문할게요. 평범한 사람은 괘를 하나만 봅니다. 그런데 난 왜 두 개나 본 건가요? 이것은 하늘의 뜻일까요?”
심묘 자신은 이번 생을 살며 매번 생이 아득하거나 낯설게 느꼈다. 언젠가 깨어나면 여전히 적적한 냉궁 안이고 이 모든 것이 꿈일까 걱정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 이상한 도사는 무언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늘과 땅이 어질지 못해 이 세상 모든 물건을 풀로 만든 개처럼 내버립니다. 사람의 짧은 안목으로 보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하지요. 아가씨의 괘가 두 개인 것은 누군가 아가씨를 위해 요청한 겁니다.”
심묘는 도사의 말속의 핵심을 짚어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요?”
도사가 바닥에서 일어나 가사 위 먼지를 털었다.
“당신에게 많이 빚진 사람입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저는 아가씨에게 너무 많이 누설했습니다. 더 말했다간 복이 없어질 겁니다. 아가씨도 더 묻지 말고 기억하세요. 지난 일은 꿈과 같으니, 얽히는 것은 절대 삼가라. 불운이 극에 달하면 행운이 온다.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귀인이 서쪽에서 올 것이다.”
도사는 큰 걸음으로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며 떠났다. 심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경칩과 곡우가 도사가 떠난 걸 보고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경칩이 먼저 입을 뗐다.
“기괴하네요. 저 도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어요. 보타사는 사람 관리를 하지 않는 걸까요?”
심묘는 도사가 자신의 비밀을 엿본 듯해 지금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때, 나설안과 나담이 걸어 나왔다. 나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에는 붉은 끈을 이은 주머니가 가득했다. 나담이 실눈을 떴다.
“심묘야, 가자. 우리 붉은 끈을 걸자. 넌 왜 뒤로 처진 거야.”
“방금 선방 안에서 대사께서 경전 이야기를 하신대서 너도 와서 들으라고 하려 했더니 넌 뒤편에 쳐졌더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린 게야? 지금 가서 들을래?”
심묘는 도사의 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경전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없었다. 그녀는 나설안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우리 먼저 붉은 끈을 걸러 가자.”
흥분한 나담이 심묘를 끌고 앞으로 나갔다. 나설안이 선방을 지나갈 때 노승이 목탁을 두드렸다. 노승 곁의 젊은 중이 물었다.
“사부님, 이미 정오가 지났습니다. 사부님께서 그 사람이 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도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진관대사가 앉아 있던 부들방석에서 일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지 않을 것이다.”
“안 와요? 어째서요?”
당황한 진관대사의 제자가 물었다.
“이미 다른 사람과 만났다.”
제자는 진관대사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만난 게 무슨 상관인가요? 사부님께서 이곳에서 그 사람을 오래 기다리셨는데, 오지 않는다면 헛되이 기다린 게 아닙니까?”
진관대사는 합장했다.
“괜찮다. 이미 만난 사람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인과다.”
심묘와 나담은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는 거대한 계수나무였다. 그러나 붉은 실이 엮인 주머니가 빽빽하게 걸려 있어서 나뭇가지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릉과 심구는 이는 여인들이 하는 일이라며 이 나무에 다가오지 않았다. 나담이 붉은 끈을 심묘에게 넘겨주었다.
“심묘야, 주머니 위에 이름을 적고 나무 위로 던져. 걸리면 월하노인이 네 기도를 들어 네게 좋은 부부의 연을 안배해줄 거야.”
그녀는 심묘의 손이 가득 차도록 붉은 끈을 계속 올려주었다.
“많이 쥐어. 많이 쥐어서 던져야 걸릴 확률이 높아져.”
심묘는 나담이 진중한 얼굴로 주머니에 이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좋은 운수를 얻을 수만 있다면 손해 볼 건 없다. 나설안도 심묘를 다독였다.
“교교도 이름을 써서 던지거라. 걱정하지 말고.”
심묘는 뾰로통하게 붉은 끈을 바라보았다. 나담과 나설안 때문에 심묘도 부득이하게 주머니를 골라 이름을 썼다. 나담이 심묘가 하는 모양을 보며 말했다.
“심묘야, 너무 적다. 조금 더 가져가.”
“교교, 부족해.”
나설안도 덧붙였다. 사실 심묘는 하나도 던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도사의 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심묘는 주머니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한 번에 걸릴 리 없어. 한 번 더……. 어머, 어떻게 걸렸지?”
놀란 나담이 외쳤다. 나설안도 매우 의아했다. 아무리 높이 던진다 해도 나뭇가지에 안착시키긴 어려웠다. 당연히 끈을 많이 던질수록 나무에 걸릴 확률도 높아졌다. 그런데 심묘가 던진 붉은 끈은 한 번에 나무에 걸렸다. 그것도 높은 가지 위에 단단히. 아무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떨어지지 않을 위치였다.
흥분한 나담이 심묘의 팔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심묘야, 너 정말 운 좋다. 봐봐, 저 높은 데 걸렸어. 심묘 네가 반드시 걸출한 인물과 혼인한다는 뜻이야. 안정적으로 걸렸으니 남편과 한평생 화목하게 살 거라는 얘기기도 하고!”
운이 좋다는 말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나설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교교, 잘 던졌구나. 네가 걸지 못하면 방법을 찾아 도와주려 했단다.”
나담은 턱을 매만졌다.
“저 가지 주위에는 많은 잔가지가 있어. 잔가지의 방향이 네 주머니 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는 심묘 네게 좋은 인연이 계속 생길 거란 뜻이야. 고모, 좋은 일이네요. 미래 제부는 누가 될까요?”
나담이 하하하 호탕하게 소리 높여 웃었다.
“헛소리.”
심묘는 눈 밑이 푸르니 재난을 당할 거라던 도사의 괴상한 한마디를 떠올렸다. 마음속이 복잡했다. 그러면서도 도사의 말이 맞을 거라고 여기는 자신을 비웃었다. 나담의 헛소리를 믿는 거랑 다를 바가 없었다.
이날은 하루가 대단히 빠르게 지나갔다. 나담은 적지 않은 붉은 끈을 걸었다. 심묘 일행은 사당에 절을 하고 향을 올린 뒤 향불도 헌납했다. 사원 안에서 정진 요리까지 먹고 장군부로 돌아갔다.
장군부에 도착하니 하늘이 이미 어두워졌다. 온종일 피곤했던 사람들은 일찌감치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심묘는 대낮에 만난 도사의 말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운명 속 귀인이 도와준다 했는데, 그 귀인이 누구일지 신경 쓰였다. 그녀에게 두 개의 괘를 요청해 다시 살 기회를 준 사람은 또 누구일지 생각했다.
심묘의 전생에서 친인은 그녀가 죽기 전에 거의 다 사라졌다. 심묘는 자신이 죽은 뒤 시체를 거둬줄 사람도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수완이 비상한 사람을 친구로 둔 적도 없었다. 대체 자신이 누구와 어떤 우정을 나눴길래 다시 살 기회를 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심묘가 종양을 불렀다.
“종양.”
눈 깜짝할 사이에 종양이 나타나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사경행의 비밀 호위는 신출귀몰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도사와 나눴던 대화는 사경행에게 말하지 말아요. 만약 얘기하면, 당신이 날 괴롭혔다고 말할 거예요.”
심묘의 협박에 종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해요.”
심묘가 다시 한번 위협했다.
* * *
정경성의 사람들은 매일 마음이 분주했다. 아가씨들은 혼인 때문에 마음이 소란스러웠고, 남자들은 시험에 합격한 후의 지위와 명예에 마음을 쏟았다. 왁자지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두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어떤 사람은 극히 작은 이익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다른 이는 거액의 재산을 위해서 계획을 세웠다. 그런가 하면 또 누군가는 본인과 가족의 생명을 저당 잡힌 채 천하로 시야를 넓히기도 했다.
명제 황실 안 문혜제의 건강이 하루하루 나빠지자 황자들은 더욱 난동을 부렸다. 주왕 일파는 거만했고, 리왕 일파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성실하다 여긴 아홉째는 심부와 진국과 연관이 있었다. 이리저리 볼 때 태자의 세력이 가장 약했다.
이에 문혜제는 탄식했다. 그의 미간에는 한층 쇠락한 기운이 덮여 있었다. 태자는 오랫동안 병을 앓아 기력이 더욱 나빠진 것 같았고, 그 위치를 호시탐탐 노리는 이는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황제인 자신이 직접 나서면 조정은 대란이 일어날 터였다. 그는 그저 태자가 음흉한 사람에게 이용당할까 두려웠다.
문혜제가 젊었을 때는 황자들이 어려서 문제없었으나 지금 보니 장성한 이리떼였다. 먹음직한 살코기를 앞에 두고 침을 흘리고 있으나 이젠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최근 태자의 건강은 어떠한가?”
문혜제가 소 공공에게 묻자 소 공공이 얼른 대답했다.
“어제 황후마마께서 태자비를 만났는데 태자비께서 태자의 병이 호전되었다 하셨습니다. 태의도 며칠 몸조리하면 더 좋아질 거라 했습니다.”
문혜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자의 건강이 문제야.”
황위 계승 영순위인 태자는 몸이 허약했다. 지지자가 있지만 이전만 못했다. 주왕과 리왕 일파가 점점 성장하면서 태자의 세력은 억눌렸다. 근래는 정왕 부수의도 보태져서, 문혜제는 머리가 아팠다. 다행히 태자는 황태손을 낳았다. 자신이 언제까지 살든 태자가 허약하든 간에 황태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면 계승 문제가 그런대로 해결될 터였다.
소 공공은 문혜제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문혜제가 태자를 가장 정통성 있다고 여기는 줄 알았고, 그것이 이치에도 맞는 일이었다. 게다가 태자는 몸이 좋지 않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다른 아들들과는 달랐다. 거만한 주왕 일파는 거의 안하무인이었으며 리왕 일파는 얼핏 선량해 보이나 사적으로 많은 대신과 왕래했다. 가장 권세에 관심 없어 보이던 정왕 부수의도 주인을 무는 개와 같았다. 황자들이 하나하나 잔인하고 흉악하니 문혜제는 어쩔 수 없이 방비할 수밖에 없었다.
창밖에서 찬 바람이 불어와 탁자 위의 선지가 조금 말려 올라갔다. 소 공공이 이를 보고 얼른 창문을 닫았다.
“밤이 깊었으니 폐하, 일찍 쉬시지요.”
태자는 이날 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이 상황을 목격한다면 매우 놀랄 게 분명했다. 태자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왕 부수의였다. 그들은 탁자 양편에 앉아 작은 등불 아래 매실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아홉째야, 이 일은 마음에 두지 마. 부황께서 소인배의 헐뜯는 말을 듣고 널 오해하신 거야. 시간이 지나 오해가 풀리면 당연히 이전처럼 널 대해주실 테니 구태여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어.”
부수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자 전하, 전하는 제가 얼마나 의기소침해 있는 줄 모르십니다. 재난이 닥쳤는데 피할 수가 없네요. 저는 한가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권세와 부귀에 관심 없고 그저 자유로이 생활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태 받은 업무 외 다른 일에 손댄 적이 없는데, 심부의 일이 생기자 부황께서 절 의심하십니다. 부자의 정이 너무 박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란 태자가 얼른 부수의의 말을 저지했다.
“말을 신중히 하거라. 천하에 나쁜 부모는 없어. 넌 부황의 아들이다. 부황은 네게 그러시지 않을 테다. 탓하려면 그들 소인배를 탓하거라.”
태자와 부수의는 얼마 전 심부가 가산을 몰수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혜제가 철저히 감췄으나 각 황자는 궁중에 첩자를 두고 있었다. 게다가 심만이 입을 열었기에 황자들은 심부 사건의 진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자들이 부수의를 바라보는 시선도 전과 달랐다. 그들이 여태 황위 쟁탈을 하며 결사적으로 다툴 때, 부수의는 한가롭게 즐거이 산다고 믿어 아무도 그를 방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을 통해 부수의가 실은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는 오래전부터 대국을 관전하고 있었다. 어부지리를 노린 게 자명했다.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아군은 모든 것을 드러내고 적은 숨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천하와 관련된 싸움이었기에 가족 모두의 목숨이 걸렸다. 이전에는 다들 부수의를 정중히 대했으나, 지금 그는 공동의 적이 되어버렸다.
여러 형제의 갈퀴에 당한 부수의는 가장 먼저 태자를 찾아갔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태자는 마음이 여리고 후해서 속이기 가장 쉬웠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태자가 계속 부수의를 달래자 부수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는 듯 웃어 보였다.
“됐습니다. 제 이야기는 이쯤 하고, 태자 전하의 일을 이야기합시다.”
태자는 조금 의아했다.
“나? 내 무슨 일?”
“지금 다들 치열합니다. 태자 전하는 분명 정통성 있는 승계자인데 세력이 억눌리고 있습니다. 이는 좋은 징후가 아닙니다. 종전에 저는 이런 일에 참여는커녕 회피했는데도 결국 이렇게 됐네요. 이렇게 된 이상 나서서 움직이겠습니다. 전 태자 전하를 지지하려 합니다.”
태자는 부수의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선의에 고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너도 알겠지만 난 몸이 약하다. 내가 건강했다면 싸웠을 테지만, 내 몸이 얼마나 갈지가 문제다. 이러니 운명에 따를 수밖에.”
말 막바지에는 숨기지 못하는 절망이 내비쳤다.
“전하,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태자 전하는 황후마마의 소생이자 폐하의 장자이십니다. 이치와 도리에 맞는 미래의 명제 주인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낮추시는 게 전해진다면 명제 역시 비웃음당할 겁니다.”
태자는 여전히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난 확실히 능력이 없어. 대신들도 내 건강을 아니 날 따르길 원치 않지. 게다가 이전 지지자들도 많이 남지 않았다. 네가 날 지지하려 해도 내게는 이제 태자의 명분밖에 없구나.”
부수의는 자신과 태자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태자 전하께는 더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재덕이 겸비된 인재는 현명한 주인을 택한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어찌 날 선택할까?”
“태자 전하는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을 여럿 찾으려면 확실히 곤란할 겁니다. 그러나 한 명의 강력한 조력자를 찾는다면, 다른 지지자들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사람만 찾으면 다른 신하 무리는 알아서 태자 전하의 곁으로 따라올 겁니다.”
“네 말은…….”
태자는 의심스러웠다.
“위무대장군 심신.”
부수의의 대답에 태자가 멈칫했다.
“심신에게는 병권이 있습니다. 심가군은 적진 깊숙이 돌격해 성을 함락시켰지요. 뒤에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정도로 용맹한 나가군이 있습니다. 그는 정경성을 떠났었지만, 백성들 사이 위세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진국과 대량도 심 장군에게는 예의 바릅니다. 심신의 지지가 있는 한 사람들은 전하의 능력을 높이 살 겁니다. 사람은 높은 곳을 향해 달리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하니, 지지자들은 당연히 달려올 겁니다.”
태자는 부수의의 말을 듣고 웃었다.
“네 말이 맞구나. 그러나 너도 알 테지만 지금 심 장군은 명성이 혁혁하다. 모든 사람이 눈여겨볼 만하지. 다른 형제도 이렇게 생각할 텐데, 심 장군이 왜 날 선택하겠느냐?”
부수의는 평온하게 말을 받았다.
“태자 전하께서는 태자시니까요. 다른 형제는 심 장군에게 선택받아도 부황의 의심을 건드릴까 봐 행동에 나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전하는 다릅니다. 정당한 황위 계승자이며 부황께서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 아들이니까요. 심 장군이 전하의 손에 들어가면 부황은 기쁘게 여기실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재난이지만, 전하께는 행운입니다. 큰 병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태자는 웃지 않았다. 부수의의 말이 일리 있기 때문이다. 문혜제는 의심이 많았다. 주왕이나 리왕, 정왕 부수의가 심신의 지지를 얻으면 이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문혜제가 그들을 보는 시선이 더욱 예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자 자신은 달랐다. 문혜제는 이쪽의 세력이 너무 약해 다른 황자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언제나 못마땅해했다. 더구나 자신 역시 당연히 기회만 된다면 강력한 조력자를 구하길 바랐다.
그러나 태자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수의의 말에 찬성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심 장군이 무슨 이유로 날 선택하겠느냐? 이런 일에 끼어드는 것은 위험하다. 심 장군은 이런 흐린 물에 뛰어들 필요가 없어.”
“심 장군은 전하를 선택할 필요가 없으나, 심 소저는 가능합니다.”
멍한 태자를 보며 부수의가 웃으며 간단하게 말했다.
“심가 적출 소저, 심 장군의 보배, 심 소저는 지금 정혼할 나이입니다.”
“심 소저? 심묘?”
당황한 태자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부수의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태자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돼. 심 소저는 심 장군의 보배야. 지금 미혼인 건 그가 딸을 아주 귀하게 여겨서일 텐데, 그가 내게 딸을 시집보낼 리 없다. 게다가 심 소저가 너를 사모한 건 정경성 모두가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심 소저의 애틋한 마음을 빼앗을 수는 없지.”
태자가 부수의를 바라보며 웃었다. 부수의는 야비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 소저가 지금까지 절 사모할까요. 철없던 시절 장난이었죠. 그렇지 않다면 지금 절 그렇게 차갑게 대하겠습니까?”
태자가 세심히 생각해보니 부수의의 말이 맞았다. 최근 심묘는 부수의를 봐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네가 연정을 받아주지 않아서 심 소저가 네게 분노한 것 같구나.”
부수의가 한차례 웃었다.
“태자 전하, 절 놀리지 마십시오. 게다가 저는 장군부와 사돈이 될 수 없습니다. 전 신분이 평범한 아내를 맞아야 편안할 겁니다. 태자 전하는 왜 직접 심 장군과 심 소저 쪽에 손을 쓰려 하십니까? 혼담에는 부모와 중매인이 참여하지요. 그러니 이 일은 부황께 넘기는 게 가장 좋습니다.”
“부황?”
“네.”
부수의가 태자의 잔이 빈 것을 보고 술을 가득 따랐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부황은 전하를 가장 총애하시고 전하를 도울 마음이 있으시니, 반드시 전하께 조력할 가문을 찾아주려 하실 겁니다. 전하가 심 소저와 혼인을 원하면 부황께선 즐겁게 일을 성사시켜주실 겁니다. 성지가 내려지면 모두 쉽게 해결될 겁니다.”
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생각은 너무 간단하구나. 억지로 추진한 일에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어. 심 소저가 나와 혼인을 원치 않는데 성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궁에 들어온다면 장래 억울해할 것이다. 심 장군도 부황께 분노할 테니, 혼인으로 원한을 맺는다면 그 결과가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부수의가 놀란 얼굴로 태자를 바라보았다.
“전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자는 부귀와 안정을 원합니다. 전하께 시집오면 정비는 못 될 테지만 측비도 결코 신분이 낮지 않습니다. 장래 전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자연히 비의 등급이 오를 겁니다. 전하는 성격이 온후하시니 조금만 잘해주시면 심 소저도 마음을 고쳐먹을 겁니다. 태자비마마도 마찬가지이시잖습니까. 마마께서 전하께 시집온 건 부황께서 명하셨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한마음 한뜻으로 전하를 위해 방법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태자는 부수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태자비는 황제의 성지를 받아 자신과 혼인했다. 피차 몇 번 보지 않았기에 초반에는 맞지 않는 게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정이 깊어 그녀는 항상 자신만을 생각했다.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릅니다. 그러니 심 소저에게 잘해주시면 마음을 정하고 전하를 따를 겁니다. 태자 전하는 인재인데, 어떻게 여자 하나 길들이지 못할까요?”
태자는 부수의의 말에 계면쩍은 듯 손을 내저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잔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깊은 밤, 부수의가 동궁을 떠난 뒤, 태자의 얼굴에 취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그는 맑은 정신이었다. 막료가 뒤에서 걸어 나와 탐색하듯 태자를 보며 물었다
“전하, 방금 정왕 전하의 말은…….”
“아홉째가 복숭아를 훔쳐 자두로 바꾸려는구나.”
태자는 술잔을 들고 웃었다.
“담력과 기백이 있어. 부황이 의혹을 품으니 아홉째가 내 비위를 맞추는구나. 과연 우리가 그를 얕잡아 보았다.”
“그럼 정왕 전하의 제안을 전하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막료의 물음에 태자가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옳지 않은 마음을 품었으나 그 책략은 유용하다. 난 확실히 장군부의 힘이 필요해. 심묘는 좋은 바둑알이니 아내로 맞이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자가 웃자 막료도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기로 하신 겁니까?”
태자는 탁자 위의 술주전자를 보았다.
“며칠 지나면 부황께 직접 이 일을 말할 것이다. 일이 성사된 뒤 아홉째의 정을 잊지 말아야지.”
부수의의 예상대로, 며칠 뒤 태자는 문혜제에게 이 일을 꺼냈다. 문혜제는 동의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태자를 보고 웃었다.
“좋다. 네가 사리를 잘 아는구나. 짐이 고려해보마.”
태자가 떠난 뒤, 문혜제는 소 공공에게 말했다.
“태자가 심묘와 혼인하려 하다니, 짐은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소 공공이 웃었다.
“심 소저는 재학과 용모가 모두 상등이니, 태자 전하의 안목이 좋으십니다.”
문혜제가 소 공공에게 경시의 눈빛을 보냈다.
“짐은 바보가 아니다. 아홉째가 태자에게 지시한 거야. 무슨 의미일까?”
그는 태자의 혼인이 부수의의 생각인 것을 알고 있었다. 소 공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황실의 집안일이다. 노비는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나 짐은 태자를 지지하려 했다. 주왕과 리왕은 점점 짐이 안중에 없고, 정왕은 속내를 짐작할 수 없게 행동하지. 태자에게 장군부라는 배후가 있다면 주왕, 리왕과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게야. 장군부 병권도 손에서 통제할 수 있으니 짐의 고민을 덜어줄 거야. 그러나…….”
문혜제가 탁자 위의 책더미를 보고 웃더니 상소를 들고 일어났다.
“가마를 준비하라. 곤녕궁으로 가자.”
* * *
나설안은 궁중 사람에게 내일 심묘를 데리고 입궁하라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그녀는 심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거라고 여겨 물었으나 심신도 그들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황실과 관련되면 두 사람은 유달리 신중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심묘가 혹여나 마음을 쓸까 봐 이를 내색하지 않았다.
심신과 나설안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지만 심묘의 마음이 태평할 리 없었다. 황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나설안에게 자신을 데리고 입궁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떤 단서도 없었다.
배랑은 이미 오래전부터 편지를 쓰지 않았다. 편지가 오면 부수의의 이번 수를 미리 대비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건지 심묘는 불안해졌다. 이전에는 큰일이 없어도 배랑은 늘 알아서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 심묘는 점차 심란해졌다.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인 걸까? 부수의에게 발각되어서? 아니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속이 혼란스러웠다. 보타사에서 영문 모를 미친 도사를 만난 뒤 심묘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어려웠다. ‘하늘에 엎드린 흉악한 용’의 운명을 타고난 귀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고 싶었다. 전생에서 자신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준 사람의 정체도 궁금했으나 이리저리 생각해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초조할 따름이었다.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경행은 창문을 열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 며칠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심묘는 피풍의를 걸치고 창문을 열었다가 차가운 밤바람에 옷섶을 여몄다. 그때, 사람 그림자가 스쳤다. 종양이 담장 밑에 서 있었다.
“소부인, 주인님을 찾으십니까?”
불시의 등장에 놀란 심묘가 심장 부근을 짚고 언짢다는 듯 말했다.
“아니에요.”
종양은 심묘의 말을 듣지 않은 듯 이어 말했다.
“주인님은 최근 정경성에 계시지 않으니 소부인께서도 이곳에서 기다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난 사경행을 기다린 게 아니에요. 바람을 쐬는 거예요.”
심묘가 강조했다. 종양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심묘는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종양, 내가 입궁하면 당신도 함께 들어갈 수 있나요?”
종양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궁중 사람이 아닙니다. 궁중 지형에 익숙하지 못해서 소부인을 따라 들어가도 숨을 곳이 없으니 발각될 수 있습니다.”
심묘가 생각에 잠겼다. 종양도 발각될 수 있다고 말하니, 비밀리에 호위를 대동하는 건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황실이 어떤 광대놀음을 하려는지 몰라도 궁중에서 공개적으로 손쓸 리는 없다. 나설안도 함께이니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놓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소부인께서 무슨 할 말이 있다면 제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편지를 보낼 때 주인님께 전달하겠습니다.”
종양이 심묘를 보며 얘기했으나, 어느새 창문을 닫아버린 심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 * *
예왕부에서 고양과 계우서가 지도를 연구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빽빽이 많은 지방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심한 병방도(兵房圖)가 분명했다. 그때, 바깥 호위가 보고했다.
“고 대인, 계 공자님. 심 소저가 내일 입궁한다는데, 전하께 편지를 쓸까요?”
“입궁? 무슨 일로?”
계우서가 물었다. 호위가 고개를 가로젓자 계우서는 탄식했다.
“며칠 지도를 만드느라 바빠서 3형 대신 심 소저를 돌보지 못했네. 3형이 돌아오면 큰일이야. 형과 나 모두 한소리 들을 테니 절대로 모른 체해. 형은 궁중 사람이잖아. 최근 무슨 일 있어?”
계우서가 고양을 바라보았다. 최근 일을 더듬어본 고양이 말했다.
“없어. 편지에는 쓰지 마. 바쁠 텐데 마음 쓰게 하면 좋지 않아. 종양도 소식이 없으니 그리 중요하진 않을 거야. 정말 일이 생기면, 우리가 감당하면 돼.”
명령을 받은 호위가 떠났다. 계우서는 고양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켕기고 불편하지?”
“뭐가 켕겨? 지도나 봐.”
귀찮은 듯 대꾸하는 고양에 계우서가 중얼거렸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서, 3형이 왜 즉시 통보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 난 모르는 일이야…….”
* * *
다음 날, 심묘는 나설안과 입궁했다. 매번 입궁하면 일이 발생하곤 했다. 나설안은 경계의 빛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는 이전부터 황실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궁녀가 직접 그녀들을 곤녕궁으로 데리고 갔다.
곤녕궁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주인 위치에 앉은 황후가 보였다. 황후 곁에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후궁이 있었다. 소박한 청색 의상을 입고 있는 그녀는 동숙비였다. 황후와 동숙비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심묘의 심장 박동이 단시간에 솟구쳤다.
황후는 태자의 생모로, 문혜제와는 규율을 준수하는 부부지간이다. 황후는 부귀한 집안 출신으로 하는 일마다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온 마음을 태자에게 쏟았고, 후궁 안 권력 다툼에는 무심했다. 그러니 다루기 힘든 건 오히려 동숙비였다.
동숙비 역시 줄곧 후궁 안 다툼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그 점은 황후와 같았다. 권력에 욕심을 내지 않으니 꼭 부수의와 닮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귀신도 모르게 힘을 발휘해 일을 처리했다.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동숙비보다 더 잘 해낼 사람은 없었다.
미 부인이 공공연하게 거만하다면, 동숙비는 온유하면서도 맑은 웃음 아래 칼날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듯 닮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의기투합했다. 전생에 동숙비는 심묘를 깔봤고 미 부인을 매우 좋아했다. 심묘는 황후가 동숙비의 칼이 된 것이라 짐작했다. 동숙비는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몰래 움직였기에 모르긴 몰라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황후가 웃으며 나설안에게 앉으라 전하곤 심묘에게는 앞으로 나오라 손짓했다. 이에 심묘는 앞으로 나갔다. 황후는 심묘를 위아래로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동숙비에게 말했다.
“참 반듯합니다.”
나설안은 불안했다. 그녀는 심묘를 데리고 궁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신하의 처지가 매우 한스러웠다. 황후가 어떤 생각인지는 몰랐으나 딸을 가진 어머니로서 황후가 딸에게 특정한 의도를 품었음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올해 몇 살이지?”
황후의 물음에 심묘가 대답했다.
“소녀의 나이는 열일곱입니다.”
황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심묘의 손을 잡은 채 웃었다.
“심 장군의 딸이 재학과 용모를 두루 갖췄다고 들어왔을뿐더러, 이전 궁중연회에서 보고 매우 호감을 느꼈다. 요 며칠 한가한 터라 심 부인에게 심 소저를 데리고 입궁하라고 한 것이다. 열일곱에 이렇게 생기 있고 슬기롭다니, 어느 댁 공자에게 복이 있어 심 소저를 아내로 맞을지 모르겠구나.”
황후가 가볍게 탄식하자 나설안은 심장이 쿵쿵 뛰어 자신의 두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심묘 또한 황후가 오늘 입궁하라고 한 목적을 깨닫고 속으로 놀랐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동숙비가 따라 웃었다.
“그렇지 않나요? 예쁜 얼굴에 고귀한 자태인데, 교만한 기운은 조금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요즘 이런 아가씨는 참으로 드물지요.”
“심 부인, 심 소저는 정혼했는가?”
황후가 웃으며 물었다. 마음이 뒤엉킨 나설안이 빠르게 대답했다.
“마마, 비웃으실 테지만 최근 적합한 공자를 알아보는 중입니다.”
심묘는 황실의 생각을 눈치챘으나 감히 속이지는 못했다. 황실을 우롱한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
“내가 심 소저를 위해 중매를 서면 어떨까?”
“안 됩니다.”
나설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황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서둘러 해명했다.
“제 딸은 아직 어려, 시집 보내기 아쉽습니다. 몇 년 더 데리고 있을 생각입니다.”
황후가 나설안의 말을 듣고 웃었다.
“심 부인의 말은 옳지 않다. 고운 딸을 집안에 남기다니,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며 심 소저를 시집 보내지 않으면 심 소저가 장래 심 부인을 탓할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 심 소저?”
심묘는 황후를 보고 미소 지었다.
“소녀도 어머니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황후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는 말이었다. 황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가 머리가 없어서 대담한 것인지, 일부러 자신을 모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여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굳은 것을 본 동숙비가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심 부인과 심 소저는 모녀의 정이 깊구나. 매우 부러운 일일세. 그러나 딸은 결국 시집을 가야 해. 시집을 간 뒤에도 모녀의 정은 얕아지지 않으니 문제없다네.”
분위기를 원만히 수습하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설안과 심묘는 그녀의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동숙비는 의아했다. 이전에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할 때, 동숙비는 심묘를 머저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후 그녀를 다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심묘가 똑똑하며 일의 경중을 안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또 오늘 심묘는 나설안과 함께 사납고 고집스럽게 행동했다. 강압도 회유도 통하지 않았다.
황후는 이렇게 반항적인 태도에 익숙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그녀는 앞당겨 협의하고 장군부에게 심묘의 혼사를 준비하라고 할 참이었다. 예상과 다른 태도에 조금 당혹스럽긴 했으나 애당초 황후에게 장군부의 의중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심신의 담력이 크다고 해도, 딸을 아무리 아낀다고 해도 성지를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황권 아래, 누구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은 몇 마디 잡담을 나눈 뒤 나설안과 심묘를 돌아가게 했다.
돌아가는 길에 나설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심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칩과 곡우는 둘 다 놀라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고 눈치를 살폈다. 장군부로 돌아오니 마침 심구와 나릉도 막 병부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들은 황후가 그녀들을 입궁시킨 이유를 물었다. 나설안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심신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설안은 오늘 궁중에서 황후가 한 말을 심신에게 전했다.
“황후마마께서 교교에게 혼사를 지시하려는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아요?”
심신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혼사를 지시한다고? 우리 딸인데 무슨 이유로 그들이 혼사를 지시한단 말이오? 교교는 우리가 키웠는데, 무슨 이유로 다른 사람이 교교의 혼인 대사를 좌지우지할 권한을 갖소?”
“내 생각에 황후마마께서는 교교를 태자 전하와 혼인시키려는 것 같아요. 오늘 태자 전하의 건강이 호전됐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시더군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태자 전하께는 이미 태자비마마가 계시니, 교교가 시집가도 측비에 불과하잖아요. 측비는 지위가 높을 뿐, 어쨌든 첩이에요. 교교가 다른 여인에게 무릎을 꿇고 차를 올리며 생활하길 원치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생활하는 건 불행한 일이에요. 생각만 해도 벌써 마음이 꽉 막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태자 전하께서 아무리 지위가 높으시고 인품이 좋으신들, 난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교교를 줄 수 없어요.”
“어느 황자든 교교와 혼인할 수 없소.”
심신은 단호하게 한 번 더 반복했지만, 자신도 탁한 기운을 풀 방법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탁자를 치자 잔이 흔들거렸다.
“당신은 교교가 황실에 시집가서 장군부가 황위 다툼의 풍파에 휘말리는 것을 걱정하는 거예요? 맞아요. 지금 그들의 본심은 다른 곳에 있어요. 일단 황실과 엮이면 장군부는 장래 도망칠 수 없어요.”
심신이 길게 탄식했다.
“그것 때문이 아니오. 황실 사람은 무정하고 비빈이 무리를 이루니 교교가 시집가도 행복할 리 없을 거요. 태자 전하께서 장래 황제가 되신들 무슨 상관이오? 건강이 좋아지신다 해도 여러 여인이 전하의 마음을 고르게 나눠야 하는 건 마찬가지요. 난 교교가 그런 생활을 하는 걸 바라지 않소. 게다가 당신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진심으로 교교의 혼사를 바라는 게 아니오. 비단 모자와 담비 모피를 두를 필요도 없소. 그저 한마음으로 교교를 대해야 하오. 그렇지 않다면 천제(天帝)라도 안 될 말이오.”
문밖에서 그들의 말을 엿듣던 심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부모는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지지했다. 권력자에게 미움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자신이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때 나설안의 말이 들렸다.
“맞아요. 이러하니 교교를 절대 황실로 시집 보낼 수 없어요. 성지가 내려오면 일은 엉망이 될 텐데, 지금 어찌할까요? 어쨌든 오늘밤에도 서둘러 청년 준재를 좀 더 물색해 봐야겠어요. 인품이 좋고, 교교가 반대하지 않으면 먼저 정합시다.”
“어쨌든 교교를 황실에 시집 보낼 순 없소.”
편안해졌던 심묘의 마음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방 안 부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필시 어느 댁 도령이 좋은 신랑감일지 상의하고 있을 것이다. 심묘가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을 때, 고개를 돌리니 심구와 나릉이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는지,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심구가 심묘를 끌고 밖으로 걸어갔다. 심묘의 뜰에 도착하자 심구와 나릉은 여종을 내보낸 뒤 문을 닫았다.
“심묘야, 황후마마께서 널 태자 전하께 시집 보내려는 거야?”
두 사람이 이미 다 들은 것 같아 심묘는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심구가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이를 갈았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그의 반응을 보고 심묘는 미소 지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궁의 높은 가지에 기어오르려는데, 어째서 오라버니는 사람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는 거야? 오라버니의 눈이 너무 높네. 온 정경성 사람 중 오라버니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없겠어.”
심구는 언짢았다.
“교교, 왜 그렇게 마음이 넓은 거야? 그리고 난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잖아.”
나릉이 심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심묘야, 넌 이 일을 어떻게 보고 있어?”
심묘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명을 기다려야지.”
“너는 반대하지 않아?”
나릉의 말투에는 의아함뿐 아니라 복잡한 감정도 함께 묻어 있었다.
“부모님은 날 위해 퇴각로를 찾아주려 하고 계셔.”
심묘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대꾸했다. 마치 자신과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청년 준재를 찾아 내 마음에 들면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정혼하면 될 일이야. 걱정하지 마. 내 눈은 오라버니처럼 그리 높지 않아.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어느 집안 녀석을…….”
이에 심구가 중얼거렸다. 심묘는 이를 못 들은 척했다. 나릉이 한 걸음 다가와 다시 물었다.
“적당한 사람을 찾기 전에 성지가 내려오면 너는 어떡할 거야?”
“나릉아,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나릉은 심구의 타박에도 여전히 심묘를 팽팽히 주시하며 답변을 촉구했다. 심묘가 웃었다.
“그럼 시집가야지.”
“교교야!”
심구가 소리쳤다.
“그렇지 않으면 어떡해? 성지에 거역했다는 죄명을 등에 지고 온 가족이 멸문이라도 당해? 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가족을 연루시키라고? 항명하면 온 가족이 나와 함께 재난을 당할 거야. 오라버니는 그걸 보고 싶어? 오라버니가 나라면, 황후마마께서 오라버니에게 혼인을 지시한다면, 어떡할 거야? 죽어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버틸 거야?”
심구는 침묵했다. 심구 역시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심묘와 부모님을 위해 혼인할 것이다. 한 사람이 희생해 온 관저가 평온할 수 있다면 심구는 못 할 것이 없다고 느꼈다. 심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도 나와 같을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어. 노력을 다한 후 천명을 기다린다고, 난 이 결과를 피하고자 온 힘을 다할 거야. 그러나 피하지 못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야. 시집가면 될 일이지. 좋은 남편이 내게 가족보다 중요한 가치를 가지지는 못해.”
“네 일생의 행복이 달려 있어.”
심구의 눈이 시큰해졌다. 심묘가 좋은 부부의 인연을 말할 때 왜 그리 박정한 말투인지, 심지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묘에게 그 나이에 응당 있을 만한 혼인에 관한 기대와 환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자신이 여동생을 잘 돌보지 못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행복은 스스로 쟁취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 얻는 게 아니야.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면 내 일생이 행복할 거라 보증할 수 있어? 태자 전하든 다른 사람이든, 그 사람이 몇십 년 동안 첩을 만들지 않고 줏대 없이 빌붙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심묘야, 그렇게 생각해선 안 돼. 넌 아직 혼인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무서운 생각은 하지 마.”
심묘는 온갖 풍파를 다 겪은 부인 같았다. 나릉은 생각에 잠긴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몇 번 움찔거렸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심묘가 속눈썹을 드리웠다. 전생에 매섭게 곤두박질친 자신에게 부군이나 인연은 뼛속에 새겨진 아픔일 뿐이었다. 한 번 넘어졌으니 두 번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대가 없으면 상처도 없는 법이다.
“내 생각이 나쁜 게 아니라 오라버니의 생각이 너무 복잡한 거야. 시집가는 것뿐이야. 잘 혼인하면 일생이 평온할 거야. 그리고 나도 내 사람을 상처 입히는 사람은 잘 지내게 두지 않아.”
심묘는 차갑게 웃었다.
* * *
황후가 갑자기 혼인에 대한 의사를 표하자 장군부 사람들은 애가 탔다. 심신 부부는 심묘와 황실의 혼인을 원치 않았다. 많은 정치적 요인을 제외하고서라도 황실은 무정하고 후원이 복잡하기 때문이다. 심묘가 이런 곳에 시집을 가면 수면 아래의 암투와 모함이 끊이지 않을 테니 단 하루도 진정으로 홀가분한 날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부귀영화, 존귀와 영예는 겉치레일 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터였다.
심신은 성지가 오기 전에 심묘를 시집 보내려 했다. 입궁 전 소 부인의 일로, 심신과 나설안은 심묘의 혼인 대사를 상의하기 시작했다. 이에 나설안은 하인에게 책 한 권을 만들라고 분부했다. 책에는 정경성의 청년 준재의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책자에는 그 사람의 용모와 성격뿐 아니라 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집안에 몇 사람이 있는지 등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설안은 빙빙 돌려 심묘에게 의사를 물었고, 그녀가 이 방법에 개의치 않는 듯하자 안심하고 신랑감을 물색했다.
정경성에서 장군부는 병권을 손에 쥐었기에 문혜제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신랑감을 아무나 고를 수 없었다. 문혜제가 세력끼리 연합한다고 의심할 수 있으니 심신은 권세가 극에 달하는 세가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신과 나설안은 집안 형편은 중상에, 어떠한 야심도 없으며 품성이 정직하고 고결한 세가로 추렸다. 그들은 호방하고 솔직한 성격의 심구에게 병부에서 친교를 맺은 형제들의 품성이 어떤지 사적으로 알아보게도 했다.
그러나 심신과 나설안의 계획은 생각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심신이 조금만 의사를 드러내도 상대방이 즉시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들이 이미 정혼했다거나 며느리가 급하지 않다고 말했다. 모두 웃는 얼굴이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심신은 심묘를 눈에 차지 않아 하다니 눈뜬장님들이라며 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