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이런 일이 계속되었다. 가까스로 마음에 드는 청년 준재를 찾아도 그쪽에서 구실을 찾아 혼인을 거절했다. 한두 명은 우연이라도 모두 거절하는 건 이상했다. 이에 의문을 품은 심신이 친한 무장에게 이유를 물어보자, 그는 조정 신하들이 이미 황실에서 심묘와 태자 전하를 혼인시키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심신이 심묘의 신랑감을 물색한다지만 조정 신하들은 감히 황실의 여인을 빼앗을 수 없었다. 심묘가 동궁에 시집가는 운명을 피하려 혼인하는 것이니 그녀의 시댁도 덩달아 황실 눈 밖에 날 게 당연했다. 장군부는 큰 가업을 가졌고 심묘도 총명하며 진중하지만, 감히 그녀와 혼인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심신은 크게 분노했다. 고결하며 세속과 관련 없어 보이던 세가도, 너나 할것 없이 목을 움츠린 거북이처럼 심묘와 혼인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담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장래 심묘를 위해 하늘을 떠받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심묘는 백로와 상강이 알아보고 온 소식을 듣고 담담히 웃었다. 오히려 경칩이 안절부절못했다.
“아가씨, 초조하지 않으세요? 지금 마님과 주인어른은 아주 조급하십니다.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할 수도 있어요.”
심묘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황실 사람도 바보가 아니야. 어디 부모님의 생각을 모를까?”
심묘는 처음부터 심신과 나설안의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 자신이 태자에게 시집갈 거란 소문이 퍼진 건 황실의 솜씨였다. 황실이 심묘에게 마음을 두었다고 명백히 알렸으니 공개적으로 황실과 맞서 사람을 뺏을 신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모님이 자신을 빨리 시집 보내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게 뻔했다.
곡우는 뒤통수가 시큰거렸다.
“아가씨, 정말 태자 전하께 시집가는 건 아니겠지요?”
경칩과 곡우는 심묘의 머릿속을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은 심묘가 황실을 좋아하지 않으며 황실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녀가 동궁에 시집가면 반평생 불행할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잠시 지켜보자.”
심묘는 절대 명제 황실에 시집가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성지는 엄격하니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황실 사람은 계속해서 장군부의 병권을 원할 테지만, 심묘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도 태자가 그녀와의 혼인을 고집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터였다.
순결을 잃은 부인과 병권 중 그들은 무엇을 더 중요시할까? 황실 사람을 잘 아는 심묘는 그들이 병권을 더 중요시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떨어진 심묘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그녀와 혼인하면, 민간에서는 황실 사람의 정이 깊다고 여기긴커녕 황실의 후궁이 난장판이라고 느낄 게 뻔했다. 황실 사람이 민심을 살피지 않는다고 해도 유언비어로 여론이 분분하게 두진 못할 것이다.
심묘는 찻잔 속에 가라앉은 찻잎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명예도 함께 사라지는 일이니 달갑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에게 자매가 없으니 함께 연루되어 비웃음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불행히도 장군부 사람들은 반드시 손가락질당할 터였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심묘의 생각을 모르기에 포기하지 않고 좋은 남편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황실의 말이 이미 곳곳에 퍼져 중매인도 감히 장군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혼담을 들고 장군부를 방문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심신, 나설안, 심구 세 사람은 방에 앉아 심묘의 혼사를 이야기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황실은 너무 비열해요. 그리 많은 사람이 혼담을 꺼내더니 지금은 전부 거절하고 있네요. 이게 무슨 일일까요?”
“모두 내 탓이오. 교교의 혼사를 빨리 정했어야 했는데. 나이가 어리니 몇 년은 지장 없을 거라 여겼지. 결국 이렇게 될 줄이야.”
심구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교교를 태자부로 시집 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장군부의 아가씨가 무슨 이유로 측비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요? 정비를 하라고 해도 생각해볼 텐데 어디 측비로 들어오라는 도리가 있답니까?”
나설안은 초조한 표정으로 탐색하듯 말했다.
“지금 우리 집안과 혼인하려는 사람이 없는데 어떡해요? 정경성 밖에서라도 적합한 사람이 없나 찾아볼까요?”
“어머니, 교교를 멀리 시집 보내시게요?”
심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도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 거야. 정경성 안 대신들은 이 일을 알아. 정경성 밖에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테니 이 일을 모를 것이다.”
나설안도 당연히 내키지 않지만 답답한 마음에 차선책이라도 꺼낸 것이었다. 그러나 심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되오. 그건 교교를 억울하게 만드는 거요. 먼 곳에 시집가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시댁이 이후 교교를 얕잡아 본다면 멀리 있는 우리가 도와줄 수도 없으니 어찌하겠소?”
나설안이 결국 분통을 터트렸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럼 어떡해요?”
심구가 탄식했다.
“정경성 사람들은 모두 황실과 연루될까 걱정만 하고 있어요. 자신의 목숨보다 교교를 총애할 남자는 없는 걸까요? 저와 아버지를 제외하구요.”
나설안이 평정심을 잃은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심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때, 나릉이 들어왔다. 나설안이 그를 불러 앉히고, 황급히 물었다.
“나릉아, 적합한 집안은 찾았니?”
나릉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신과 심구는 모두 실망했다. 나설안도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나릉이 작게 말했다.
“고모, 고모부, 형님.”
세 사람이 고개를 드니 나릉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나릉을 보며 심구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으면 편히 하렴.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잖니.”
나릉이 깊게 심호흡했다.
“심묘에게 적합한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한 건가요?”
나설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경성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가져올까 걱정하고 있어. 그들은 장군부와 멀리 떨어지길 원하고 있단다. 이런 시기에 기꺼이 교교와 혼인하겠다는 사람을 찾기는 너무 어렵구나.”
나릉은 조금 멈칫하다가, 숨을 깊게 들이켠 후 용기를 냈다.
“제가 심묘와 혼인하길 원합니다.”
방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시중드는 여종들은 감히 발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묵묵히 물러갔다. 심구와 심신이 팽팽히 나릉을 주시했다. 나릉은 이어서 말했다.
“제 오른손이 여전히 안 좋은 것은 압니다. 가세와 용모를 보면 정경성의 사람이 저보다 나을 테지요. 그래도 전, 심묘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정말 심묘에게 잘하겠습니다. 평생 첩을 만들지 않고 후원에는 심묘 한 명만 둘 겁니다. 게다가 고모, 고모부께서 황실에서 불똥이 튈까 걱정되시면 제가 데리고 소춘성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부모님과 조부님이 그곳에 계시니 모두 심묘를 잘 보살펴 주실 거고, 심묘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겠지요. 고모와 고모부께서 출정하실 때 소춘성에 들려 심묘를 보아도 될 테구요.”
“나릉, 너…….”
심구는 나릉의 고백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심구뿐 아니라 나설안과 심신도 멍해졌다. 나릉의 말은 소박하고 수수해 화려한 약속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매우 진실했다. 나설안은 이전에 이 두 아이를 이어주려 했었지만, 심묘가 나릉에게 오누이 간의 정만 있는 듯해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릉은 태자보다 훨씬 좋은 의지처였다.
심신 부부는 나릉의 성장을 지켜본 셈이다. 그의 성격은 정직하고 온화하며 사람을 잘 포용하니 심묘도 당연히 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나설안 오라버니의 아들이니 한 가족이었다. 심묘가 시집가도 시부모의 괴롭힘을 당할 리 없었다. 나연영과 여씨는 심묘를 좋아하니 심묘를 두둔할 것이다. 더구나 나릉이 심묘를 소춘성으로 데려가면 황실과는 멀리 떨어지니 황실이 불만을 품어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공격을 피하기 아주 적합했다.
황자들 간 황위 쟁탈이 치열해짐에 따라 명제의 국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정경성도 위험했다. 심신은 병권을 쥐고 있으니 정경성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 딸이 위험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 심구는 남자고 이미 벼슬에 올라 도피할 수 없으니 심묘라도 평안하길 바랐다. 그녀가 나가로 시집을 가면 분명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심신이 정신을 차린 후 나릉을 주시했다. 그의 말은 날카로웠다.
“지금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려 교교와 혼인했는데, 장래 좋아하는 아가씨를 만나면 그때는 어찌할 건가?”
탐색의 의미를 품은 말에 나릉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으나 여전히 단호했다.
“사모하는 아가씨를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사모하는 건 심묘뿐입니다.”
심구가 손바닥으로 나릉의 어깨를 퍽 쳤다.
“너 교교를 좋아했어?”
나설안은 조금 의아했다. 나릉은 온화하며 자제심 있는 청년으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 그는 심묘에게 잘했으나 나설안은 이를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돌보는 것에 불과하다 여겼다. 그런데 나릉이 심묘를 좋아할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심구가 불만스러운 척하며 거짓으로 씩씩거렸다.
“심구야, 조용히 좀 하렴.”
나설안이 심구에게 눈을 부라렸다. 나릉을 보면 볼수록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심신과 심구는 마음이 복잡했다. 심묘를 데려가려는 사람이 없을 때도 기분이 나빴으나 데려가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도 즐겁지만은 않았다. 더욱이 심신은 평소 나릉을 높게 평가했음에도 꽃 같고 옥 같은 딸을 혼인시키려고 하니, 꼭 나릉에게만 좋은 일을 시키는 것 같았다. 입안이 떫었다.
“내가 또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우리 교교는 이 일이 아니면 정경성의 아무나 고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일이 생겨……. 나릉은 그간 무슨 복을 쌓았는지 모르겠네.”
심구의 말에 나설안이 분노했다.
“이 녀석, 너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테냐?”
나릉이 웃으며 말했다.
“심구 형의 말이 맞습니다. 심묘와 혼인할 수 있다면 그건 저의 복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심묘의 의견을 물어야 합니다. 심묘가 원치 않으면 이 일은 더 꺼내지 말아야지요.”
나설안과 심신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눈빛으로 상대의 뜻을 알아챘다. 시집에 관해서는 심묘의 생각을 들어봐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 그녀도 머뭇거리지 않고 나릉에게 시집가는 것을 선택할 거라고 예상했다. 동궁으로 가 측비가 되는 건 심묘도 원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릉은 용모가 출중하고 성격도 온화하니 태자보다 더욱 좋은 사람이라고 평할 수 있었다.
“너무 네 자신을 낮추지 말거라. 어쨌든 나와 네 고모부, 그리고 심구는 네 편이란다.”
심신과 심구는 나설안이 자신들의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대표하듯 말해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이 일을 상의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남종이 들어왔다.
“주인어른, 마님, 누가 찾아왔습니다.”
요 며칠 태자와 심묘의 일 때문에 감히 장군부에 방문하는 사람은 없던 차였다. 심구가 물었다.
“누군데?”
“평남백 부인입니다.”
방에 들어온 소 부인은 심구와 심신이 있을지 예상치 못한 듯 당황스러워했다. 사실 소 부인은 심신을 두려워했다. 심신과 소욱은 정견이 맞지 않아 심신이 온화한 낯빛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욱도 심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소 부인 자신도 그러했다. 소명풍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은 평생 장군부의 대문을 넘지 않았으리라.
나설안은 소 부인에게 앉으라 청했다. 그녀는 심신과 인사한 뒤 웃으며 심구를 바라보았다.
“이분이 바로 부의 큰 공자신가 봐요. 과연 소년 영재시네요. 재지가 뛰어나고 비범해서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네요.”
심구가 천만의 말씀이라 답했다. 소 부인이 나릉을 보며 물었다.
“이분은…….”
“제 친정 오라버니의 아들, 나릉입니다.”
나설안의 설명에 소 부인이 나릉을 보는 시선은 조금 괴상해졌다.
“사촌 공자, 지금 정혼했나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나릉이 예의 바르게 대답하면서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소 부인을 바라보았다. 처음 본 부인이 어째서 자신의 혼사를 묻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나릉은 예의를 지켰으나 소 부인의 시선은 집요해졌다. 심지어 적의를 띠고 있었다.
소 부인 자신도 물론 실례를 범하고 있단 건 알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장군부에 정혼할 시기의 사촌 공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눈앞의 공자는 인물이 훌륭하며 예를 잘 아는 사람으로 보였다. 사촌 간의 혼사는 흔한 일이었고, 심묘는 나이가 어리니 사촌 오라버니의 꼬드김에 넘어가기 쉬울 것이었다. 하나 일이 그렇게 되면 소명풍의 기회는 사라진다. 소 부인은 아들을 위해 심묘를 쟁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심신을 비롯한 남자들은 여인들의 이야기에 끼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떠났다. 그래서 정당에는 나설안과 소 부인, 두 사람만 남았다. 나설안이 먼저 웃으며 운을 뗐다.
“소 부인, 오늘은 무슨 일로?”
소 부인은 방문하겠다는 서신도 보내지 않고 무작정 찾아왔다. 나설안은 그녀가 방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여겼다. 소 부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얼마 전 부인과 한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부인은 생각해 보셨나요?”
소 부인의 말에 오히려 나설안이 당황했다. 좀 전의 생각은 조금도 과한 게 아니었다. 소 부인의 말은 소명풍과 심묘의 혼사를 뜻했다.
“소 부인,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요?”
나설안이야 심묘와 혼인을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았으나 상대방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소 부인에게 장군부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무슨 소문 말씀인지?”
“태자 전하께서 심묘와 혼인하고 싶어 하신다는 소문 말입니다.”
소 부인이 가벼이 웃었다.
“아, 그 일 말인가요? 저도 들었습니다. 심가 아가씨가 인품과 용모가 탁월해 황실에서도 마음에 뒀다구요.”
소 부인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나설안보다 더 거리낌 없는 것이, 꽤나 호탕해 보였다. 황실이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녕 모르는 건지, 아니면 개의치 않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을 듣고도 소가 공자와 우리 집안의 혼사를 아직 고려하시는 건가요?”
소 부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사람은 나쁜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소씨 집안이 심 소저를 마음에 둔다고 다른 집안에서 심 소저를 마음에 두지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소가는 인정이 두텁고 후합니다.”
나설안은 소 부인에게 상황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태자 전하께서 심묘를 황실에 들이려 합니다. 심묘의 어미로서 부인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심묘를 측비로 만들기 원치 않아서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이미 소문이 퍼져서 물색한 인물들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지금 우리 집안과 혼인하겠습니까? 부인도 아시겠지만, 우리 집안과 혼인하는 건 황제 폐하와 맞서는 일입니다. 황실은 분노할 테고, 그 뒤 일은 굳이 말씀 안 드려도……. 소 부인, 지금 제 말을 이해하시나요? 아직도 이 혼사를 원하십니까?”
나설안은 조금도 감추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나 소 부인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다.
“부인, 날 바보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셨군요?”
나설안은 화를 당할 수도 있는 혼인을 끝까지 추진하려는 소가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부인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지금 정경성은 국세가 너무 복잡합니다, 저희 부군은 평소 화를 피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속세 일은 피하려는 것이지요. 평남백 가문은 조정 일에서 물러났습니다. 관리 집안과 이미 그런대로 선을 그은 셈입니다. 그래서 그리 많은 고려가 필요 없는 겁니다. 또한 위험을 알면서도 제가 이 혼인을 추진하는 건 명풍이 심 소저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해서요?”
나설안은 눈을 크게 뜨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는 그날 소 부인이 한 말이 예의상 한 말이거나 부연 설명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소 부인의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이지요. 명풍이 심 소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제가 부인에게 왜 이렇게 치근덕거리겠습니까? 전 여태 명풍이 어느 댁 아가씨를 좋아하는 걸 보지 못했고 제 아들이 고루하다 여겼습니다. 게다가 무언가를 한 번 좋아하면 절대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지요. 아들이 심 소저를 좋아하는데 다른 아가씨에게로 마음을 돌리라는 건 그 애를 막다른 길로 모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이뤄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 부인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소가의 입장 때문에 명풍은 견해를 감추고 벼슬길에서 큰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애를 볼 면목이 없습니다. 혼사마저 자기의 뜻대로 되지 못하면 저는 늘 빚을 졌다 느낄 터이고 평생 보상하지 못할 겁니다.”
나설안은 소 부인에게 친밀감이 들었다. 어머니로서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우리 소가가 관리 집안은 아니지만, 은자는 충분합니다. 상점도 많이 가지고 있어,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심 소저가 며느리가 되면 저는 소저를 친딸처럼 여길 겁니다. 명풍의 성격은 고루하고 후덕하니 후원에 다른 여인은 두지 않을 겁니다. 식구가 많지 않으니 심 소저가 태자부에서처럼 호의호식하지는 못해도 자유롭고 만족스러울 겁니다.”
소 부인의 말은 나설안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다. 그녀는 많은 부귀는 원치 않았다. 그저 사위가 정직하고 품성이 곧으며, 심묘에게 잘하면 된다고 여겼다. 식구가 단출하면 더욱 좋았다. 소명풍도 따져보면 좋은 신랑감이었다. 그러나 나릉을 생각하니 나설안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릉도 흠잡을 데가 없지만 심묘가 소춘성으로 가야 했다. 반면 소명풍과 혼인한다면 심묘는 정경성에 남을 수 있다.
나설안은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소 부인에게 거절하지 않고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소 부인이 떠난 뒤 나설안은 심신을 찾아 이 일을 상의했다. 물론 심묘의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나릉과 소명풍은 모두 청년 준재이니, 그들은 소명풍에게 어떤 하자가 없는지 분명히 알아보고 심묘 스스로 부군을 정하도록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 일이 어떻게 나담의 귀에 들어갔는지 몰라도 그녀가 심묘를 찾아왔다. 그녀는 기쁜 기색을 띠고 있었다.
“평소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것 같더니. 술맛이 좋으면 아무리 외진 곳에 있더라도 손님이 찾아온다더니, 봐봐. 나릉 오라버니와 소가 공자가 동시에 혼담을 꺼냈잖아. 태자 전하도 있고. 애정을 품은 세 송이 도화라니.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 죽을 거야.”
그러나 심묘는 매우 유감이었다. 나릉이 혼사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런 때에 소 부인이 또 한 번 혼담을 꺼낼 줄도 전혀 몰랐다. 이전에 그녀가 새를 들고 찾아왔을 때는 의아하기만 했다. 소명풍이 사경행의 생사를 조사하기 위한 계책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지금 소가는 황실과 적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혼담을 꺼내니 소명풍이 더욱 위험했다. 소명풍 일은 사경행이 해결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심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경행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매번 제집처럼 드나들더니 막상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조금 불만스러웠다.
“보타사에서 그 인연을 맺어주는 나무에 붉은 끈을 매달 때, 네가 던진 건 좋은 자리에 걸렸잖아. 그 붉은 끈이 걸린 가지에 잔가지도 아주 많았다구. 지금 보니 세 송이 도화로는 부족해. 여섯 송이나 일곱 송이, 여덟 송이는 될 거야.”
나담의 말에 심묘는 찻잔을 들었다.
“언니는 창화(窓花)를 자를 때, 몇 송이 나오겠다 생각하면 그대로 나와?”
나릉은 선량하고, 소명풍은 좋은 가문의 자제였다. 황실과 척을 지겠다는 사람을 둘이나 찾았는데 또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심묘는 애정 문제로 곤란할 것이라는 도사의 말이 떠올라 가슴이 뛰었다. 나담이 중얼거렸다.
“네 붉은 끈은 높은 가지 위에 걸렸으니 그 높은 가지가 반드시 너의 부군이 될 거야. 내 제부는 과연 누구일까?”
심묘는 나담의 헛소리를 들으며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나담이 손뼉을 쳤다.
“제부가 예왕 전하면 좋을 텐데. 물이 불어나면 배가 올라가는 것처럼 내가 자연히 예왕 전하의 처형이 되니 얼마나 좋아.”
심묘가 차를 뿜었다. 자칫 사레가 들릴 뻔했다. 나담의 예언 비스무리한 말처럼 심묘의 도화는 세 송이가 아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장군부에 특별한 손님이 왔다. 풍안녕이었다. 풍안녕은 지난번에 심묘와 나담이 납치된 이후 장군부에 방문해 사과했다. 호쾌한 심신 부부는 그 일로 풍안녕을 탓하지 않았고 수법이 악랄한 납치범들을 탓했다.
심신 부부가 문제 삼지 않고 심묘와 나담도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풍안녕은 달랐다. 그녀는 사람을 통해 물건을 보내기만 하고 그동안 장군부를 방문하지 않았다. 나담과 심묘를 볼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나담이 초대해도 풍안녕은 완곡한 말로 거절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나서서 장군부를 찾아왔다.
나담은 풍안녕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심묘를 끌고 전당으로 달려갔다. 정경성에서 심묘를 제외하면 풍안녕이 나담의 유일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잘 맞았다. 한 명은 솔직하고, 한 명은 호방했다. 나담은 이전 일로 풍안녕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빨리 보고 싶었다.
중앙 대청에 도착하자 나설안과 풍안녕이 한참 이야기 중이었다. 풍안녕은 월백색 짧은 비단 상의를 입고 진주 귀걸이와 유리 비녀를 착용해 이전보다 얌전해 보였다. 나담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풍안녕!”
심묘는 풍안녕 곁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수려하게 생겼고 검붉은색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표정에 매우 점잖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심묘가 바라보자 그는 심묘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는 풍안녕과 비슷했다. 나담도 그를 보고 물었다.
“이분은…….”
나설안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아가씨와 외간남자가 이유 없이 만나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풍안녕이 장군부를 방문한 이유를 짐작하고 난처해했다.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풍안녕이 나서서 소개했다.
“내 오라버니야.”
심묘는 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풍가 자손으로는 풍안녕과 그녀의 오라버니 풍자현이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풍자현일 터였다. 풍자현이 일어나 심묘와 나담에게 인사했다. 심묘와 나담도 얼른 인사했다. 나담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풍자현을 바라보다가 다시 풍안녕을 바라보았다.
“풍안녕, 오늘 우리와 놀려고 온 거 아니야?”
풍안녕이 심묘와 나담을 찾아온 거라면 풍자현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담은 풍안녕이 왜 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풍안녕이 말없이 풍자현을 바라보았다. 풍자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서서 말했다.
“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병부의 심구 형제에게서 근래 귀부에서 사위를 구한다고 들어……. 제, 제가 대담하게 지원하고자 합니다. 실례를 무릅썼으니 부인과 소저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담은 의외의 이유로 풍가 남매가 장군부를 방문한 것이라고 생각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나담의 시선을 피했다. 나설안은 입장이 곤란했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심묘는 당황했다.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풍자현의 말은 매우 대담했다. 보통 혼담을 꺼낼 때는 중매인을 통해 부모가 찾아와 상의했다. 당사자가 직접 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소문이 나도 심묘에 대해 멋대로 지껄이지 않을 테니, 어떻게 보면 또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심묘는 말을 잇지 않았다. 심묘를 바라보는 풍안녕에게서는 예전의 의기양양하고 도도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전 일이 아직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하지만 오라버니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고 용기를 낸 것일 터였다.
“지금 정경성 관리 가문들이 너와의 혼인을 두려워한다는 소문은 우리도 들었어. 그러나 황실로 시집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차라리 내 오라버니와 혼인하는 게 나아. 내 오라버니는 문무를 두루 갖췄고, 성격도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아. 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면, 나도 널 도울 거고 잘 보살펴줄 거야.”
풍안녕은 돌려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의 말은 진실했고 진심으로 심묘를 위하는 게 분명했다. 나설안의 안색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심묘가 물었다.
“이 일을 풍 부인과 풍 대인도 아셔?”
풍안녕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버지는 원치 않으셨으나 우리가 설득했어. 우리 뜻에 따르실 거야. 말투가 날카로워도 마음은 부드러우셔. 말로는 고집 피우시지만 이 일을 막지 않으실 거야.”
풍안녕의 말을 심묘는 의심하지 않았다. 풍 대인도 풍안녕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심묘가 풍자현을 바라보았다.
“풍 공자, 제가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혼인하려는 건가요?”
이에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나설안은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어린 아가씨가 혼인과 관련된 일임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평온하게 말을 꺼내다니 미묘했다. 풍자현 역시 심묘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해 당황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풍자현이 말했다.
“여동생이 소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소저의 재능과 성정을 흠모합니다. 우연히 이번 일과 맞아떨어진 것일 뿐 도우려 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풍자현의 안색이 더 붉어졌다. 나담은 이를 듣고 웃음을 참았다. 심묘는 당혹스러웠다. 풍안녕이 풍자현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그가 ‘재능과 성정’을 거론하는지 알 수 없었다. 풍안녕이 진중한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내 오라버니가 태자 전하보다 나아.”
풍안녕의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풍안녕이 너무 불경하다고 흉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심묘는 풍안녕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심묘는 풍안녕과 닮은 풍자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온하니 정직한 사람 같았다. 심묘가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표정을 풀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내 혼사를 결정할 수는 없어. 이러면 내게 불공평하고, 풍 공자에게도 공평하지 않아.”
나설안은 심묘가 혼사에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묘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황실로 시집가길 원치 않으면서, 물색한 청년 준재에게도 마음을 두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나설안은 더 조급해졌다.
황실에 맞서 장군부과 혼인할 사람이 없다고 여겼는데, 예상치 못하게 여기저기서 청년 준재들이 등장했다. 나릉, 소명풍, 풍자현, 누구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심묘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 급하지 않아? 시간이 없어, 이젠.”
풍안녕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성지가 언제 내려올지 아무도 몰랐다. 이전이라면 심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테지만 지금은 성지가 내려오면 되돌릴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심묘가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하려 할 때, 바깥에서 경칩이 달려 들어왔다.
“아가씨,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나설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풍가 오누이가 이곳에 있는 걸 들키면 큰일이었다.
나설안은 얼른 심묘를 데리고 나가 궁중 사람들을 맞이했다. 태감은 황후마마가 심묘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내일 혼자 궁에 들어오라고 전했다. 태감이 떠난 뒤 나설안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다행히도 성지는 아니지만, 심묘 혼자 입궁하라니 이 역시 마음에 크게 걸렸다. 내일 심묘가 입궁했을 때 성지를 꺼내면 거절하기 어려울 터였다. 설령 성지가 아니더라도 황후가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심묘 홀로 황후와 마주하라니, 참으로 심보 고약한 일이었다.
풍안녕과 풍자현도 걱정했으나 오히려 심묘는 마음에 두지 말라고 그들을 달랬다. 풍가 오누이가 간 뒤 나담이 물었다.
“심묘야, 이제 어떡해? 며칠 안에 혼사를 정할 수 있을까?”
“혼사는 하룻밤 사이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주단자를 교환하고 중매인이 오고 가고, 일이 아주 많아. 불가능해.”
“혼사에도 일이 많구나. 너는 어찌 잘 알고 있네.”
나담의 말에 심묘는 멈칫했다. 당연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자신은 부수의와의 혼사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하나하나 밟는 단계가 얼른 모두 끝나길 바랐다. 좋아하는 사람의 관저에 하루 빨리 들어가지 못하니 애가 다 탔다.
나설안이 진지하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교교, 어미에게 말해보렴. 넌 누가 좋으냐?”
심묘는 미소 지었다.
“좋아한다기보다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골라야지요. 어머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내일 궁에서 돌아와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요. 더 적합한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요.”
나설안은 심묘의 대답에 그녀가 혼사에 관심 없고 부군에 대한 기대가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심묘가 방으로 돌아가자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정왕 전하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
나설안의 생각을 심묘는 조금도 몰랐다. 심묘는 황실과 함께 재앙을 맞겠다는 결심을 내린 뒤였다.
가장 나쁜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심묘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초조해져서 곡우에게 분부했다.
“창문을 꽉 닫거라. 이만 쉬어야겠다.”
* * *
태자가 심묘를 측비로 삼을 거라는 소문 때문에 관리들은 감히 장군부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이 소문은 관리들의 귀에 들어갔으니 당연히 황자들도 알고 있었다.
주왕부.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 두 형제가 탁자 앞에 앉아 이 일을 상의했다.
“리왕과 오래 다퉜는데 결국 태자에게 허점을 보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구나. 태자가 평소 온순해 보이더니 아주 영리해.”
부수안이 씩씩거리며 술을 마셨다. 그러나 부수현은 부수안에 비해 평온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부황의 의도도 있는 것 같아. 부황은 우리와 리왕 일파에 불만이 있었지. 아무래도 태자는 정통성이 있으니 부황은 태자를 도우려는 거야. 장군부 병권을 태자에게 줘서 조력하려는 거라고.”
부수안은 냉소했다.
“부황도 노망이 들었어. 유능한 사람일수록 많은 일을 하지 않아. 태자는 몸이 허약한데 장군부 병권이 손에 들어간들 몇 년이나 사용할까? 곧 황천길 갈 사람인데, 헛되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 시키는 거야.”
매우 악랄한 말이었다. 태자에게 일찍 죽으라고 저주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태자에게 장군부 병권이 있으면 세력이 커져 대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자는 이미 정통성이라는 우월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장군부 병권까지 더해지면 승산이 커질 터였다. 부수안이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가 그 아가씨는 아홉째에게 시집가는 게 나았어. 태자만 좋게 만들어줬잖아.”
부수안이 낮게 불만을 토로했지만 부수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홉째? 형님, 아홉째는 나와 형 생각처럼 그리 만만하지 않아.”
부수안은 부수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만과 진국 태자의 일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 일은 배후가 있었어. 그 일이 정말이라고 해도 아홉째에게 야심이 있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솔직히 우리 아홉 형제 중 누가 야심이 없겠어? 다만 아홉째는 홀로 크려는 생각이지. 야심이 있어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조정 일에 참여한 게 얼마 없는데, 어느 신하가 그를 따를까?”
부수의는 심만과 사적으로 왕래한 데다 진국 태자와의 사이도 분명하지 않았다. 이 일은 모든 황자가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수의를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그렇다고 부수의가 갑자기 제일 경계할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부수의는 오랜 세월 조정 일에 참여하지 않아서 야심이 있어도 그럴 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늘보다 높지만 팔자는 종잇장보다 얇은 셈이다. 야심을 실현할 실력이 따르지 않아 보이니 황자들은 부수의를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적수들이 더 중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부수현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홉째를 얕보지 마. 난 늘 그 애가 아주 깊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 같았어.”
부수안이 귀찮은 듯 손을 흔들었다.
“쓸데없이 아홉째 얘기는 왜 꺼내. 오늘 내가 널 부른 건 상의할 일이 있어서야. 눈을 뻔히 뜨고 장군부의 병권이 태자 손에 떨어지는 걸 볼 수 없어. 태자가 병권을 얻으면 나와 너의 기회는 더욱 줄어드는 셈이야. 황태손도 있고 부황도 도울 마음이 있으니까. 리왕과 이리 오래 다퉜는데 태자가 이익을 보게 둘 순 없지.”
“형님의 뜻은?”
부수안이 잔혹하게 웃었다.
“이 혼사가 이뤄질 수 없게 만드는 거지. 가장 좋은 것은 원한을 맺게 하는 거야.”
“그건 여러 방법이 있지. 형님은 어느 걸 원하는데?”
부수안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피맺힌 원한이지. 심묘는 아홉째를 좋아했으니 태자에게 시집가는 걸 원할 리 없지. 우리 황실이 혼사를 강요할 수는 없으니 심묘를 도와줘야 이치에 맞지 않겠어?”
“심묘에게 손을 쓰긴 어려워. 지난번 심묘가 납치된 후 심신은 호위를 늘렸어. 대체 어떻게 손쓰려고?”
부수현의 물음에 부수안이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바깥에서는 안 돼도 궁 안은 가능하지. 궁으로 들어오면 심묘의 호위는 바깥에서 기다려야 해. 궁에 들어오면 우리 세상이지. 듣자니 내일 혼자 입궁할 거라더군. 황후를 만난 뒤 떠나길 기다렸다가 기회를 틈타 손을 쓰면 돼.”
“궁중은 손쓰기 쉬우나 의심을 사기도 쉬워.”
“그래서 일석이조라는 거야. 이 일을 리왕의 솜씨로 만들면 어떨 것 같으냐?”
부수현의 눈앞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리왕 일파와 오랫동안 다투었지만, 우위를 점거하지는 못했다. 이번에 심묘가 궁중에서 사고를 당하면 그녀를 아끼는 심신은 반드시 태자를 원망할 것이었다. 태자와 심묘의 혼인이 아니라면 심묘가 사고를 당할 리 없었으니, 태자와 심가가 원한을 맺는 셈이다. 게다가 범인이 리왕이라면 리왕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큰 힘을 쓰지 않고 두 적을 처리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수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형님은 수도 좋아. 세심히 계획해서 문제를 덜어야겠어.”
* * *
주왕부가 심묘에게 해를 끼칠 계략을 구상할 때 리왕부도 이 일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담력이 작고 신중한 양왕은 눈을 가늘게 뜬 리왕을 보며 몸서리쳤다. 리왕은 온화하지만 속은 음흉한 사람이었다. 상냥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잔인한 수완을 쓴 사람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뭐가 위험해? 태자가 심 소저와 혼인해서 공연히 장군부의 병권을 얻게 둘 수는 없어. 형님과 부수안이 오랫동안 다툼을 끝내지 못한 건 그 허약하면서도 명만 긴 태자 때문이야.”
양왕의 염려를 성왕이 거칠게 받아쳤다. 성왕은 줄곧 거리낌 없이 말했다. 지금 그가 한 말도 매우 오만불손했으나 리왕의 마음에는 아주 쏙 들었다.
“성왕의 말이 맞다. 태자가 장군부의 병권을 얻는 것은 내 바람과 다른 일이다. 이 혼사가 성사되면 나뿐 아니라 너희도 연루될 것이니 안 될 일이다. 후환을 끊기 위해 심 소저를 암살하는 것이 어떠냐? 심 소저는 무고하지만, 태자 때문에 연루되는 거지.”
리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암살을 이야기했다. 심묘가 무고하단 걸 알아도 조금의 동정이나 연민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부수안의 책임으로 떠넘기지?”
“부수안은 평소 거만하게 일을 처리하니 충동적으로 했다고 몰아가면 될 거야. 부황이 태자를 지지하려 하는데 부수안 때문에 장군부의 병권을 잃으면 그 책임을 강하게 물을 테지.”
성왕의 물음에 리왕이 답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난 형님을 지지해.”
성왕과 달리 양왕은 말이 없었으나 어차피 자신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음을 잘 알았다. 자신과 성왕은 모두 리왕을 지지했기에 리왕의 결정은 두 사람의 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일이 성공하면 당연히 하늘에 오를 테지만 실패하면 함께 멸문할 것이다. 함께한 첫날부터 복도 화도 함께 누리게 된 사이였다. 양왕은 속으로 탄식했다. 내일 심묘의 암살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칠흑 같은 검은 밤하늘, 겨울바람이 얼굴을 깎아내리듯 매서웠다. 한낮에 흐르던 물은 밤이 되자 얼어붙었다. 건물 밖에 둔 나무통은 땅에 달라붙어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여인숙 위층. 창문 앞에서 사경행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 눈처럼 하얀 비둘기가 날아왔다. 몸에는 작은 얼음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깥을 날아다녔으니 대단히 고생했을 터였다.
사경행은 비둘기 다리에 묶인 은색 작은 관을 풀었다. 따뜻한 방에서 몸이 녹은 비둘기는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그릇 안의 옥수수 알갱이를 쪼아 먹었다. 사경행은 은색 관 안에 작게 말린 종이를 꺼내 펴서 읽어보았다. 다 읽은 그는 종이를 숯불 화로 안으로 던져 재로 만들었다. 때맞춰 철의가 들어왔다.
“주인님, 마차는 준비되었으니 내일 일찍 수도로 출발하시지요.”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철의는 물러가지 않았다. 그는 사경행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이에 사경행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주인님, 정경성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이 며칠 심신이 심 소저를 위해 혼인에 적합한 청년 준재를 물색하고 있답니다.”
사경행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철의는 사경행의 수려한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두피가 저렸다. 과연 다음 말까지 전하는 게 맞는지 고심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정경성에서 계우서와 고양이 보낸 편지에도 이 이야기는 없었는데. 철의는 앞으로 사경행이 두 사람을 탓하는 원인이 자신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하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경행이 정경성에 돌아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이미 큰일이 벌어진 뒤일 것이다. 자신은 그의 비밀 호위이니,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의리와 목숨 사이, 철의는 매우 단호하게 후자를 택했다.
“소가 소명풍, 나가 나릉, 풍가 장자 풍자현이 장군부를 방문했습니다.”
사경행이 몸을 돌려 철의의 눈을 주시했다.
“풍자현? 풍자현은 왜 방문했지?”
철의는 식은땀을 흘렸다.
“심신이 급히 심 소저를 시집 보내려 하기 때문입니다. 태자가 심 소저를 측비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장군부는 심 소저를 황실에 시집 보내길 원치 않아 성지가 내려오기 전에 심 소저를 시집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풍가 소저와 심 소저는 친한 벗이라 오라버니를 데려와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언제 소문이 퍼진 거지?”
사경행이 천천히 물었다. 그의 말투는 얼음장 같았다. 철의는 감히 사경행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바닥으로 숙인 채 대답했다.
“5일 전입니다.”
사경행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도화 눈에 분노가 스쳤다.
“5일 전 소식이 지금 도착해? 내가 언제 폐물들을 키웠는지 모르겠구나.”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져 바깥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탁자 위에 있던 비둘기가 고개를 깃털에 파묻으며 가볍게 울었다. 철의 역시 속으로 울며 말을 이었다.
“궁중 소식도 있습니다. 황후가 심 소저에게 할 말이 있으니 내일 입궁하라고 했답니다.”
순간 사경행의 몸이 철의를 스쳤다. 사경행은 입구에 서 있었다. 그가 여우 모피를 걸치고 차갑게 말했다.
“말을 준비하라.”
“주인, 내일 일찍 가신다고…….”
사경행이 냉담한 표정으로 철의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철의는 몸을 떨었다. 그는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까만 밤, 눈보라가 불어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어떤 사람은 따뜻한 침상에서 엎치락뒤치락 잠들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화려한 관저에서 살인 음모를 꾸몄다. 또 어떤 사람은 구중궁궐 안에서 강산을 논했으며,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천릿길을 재촉했다.
어떤 사람은 즐거웠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아팠다. 어떤 사람은 불안해하며 마음을 졸였고, 어떤 사람은 득의양양했다. 그러나 그림 같은 명제의 강산에서 정경성은 늘 태평성세였다. 즐거운 웃음소리로 덮인 잔잔한 수면 아래 거센 바람이 불고 불길이 피어오르는 걸 아는 백성은 없었다.
정왕부. 한 남자가 홀로 대국하고 있었다. 남자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바둑판은 흰 돌과 검은 돌이 이리저리 엇갈려 아주 복잡했다. 수를 둘 때마다 그는 아주 오래 생각했다. 잠시 후 힘든 상황에 봉착한 듯 손안의 검은 돌은 어찌해도 내려놓지 못했다.
등불이 조금 흔들려, 곧 꺼질 것 같자 남자가 등불의 기름을 채웠다. 방 안이 환해졌다. 남자는 담백하게 자세에 겸손하며 자신에게 엄격한 품격을 지닌 인상이었다. 강직하게 보였으나 미간 사이는 기쁘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슬픔을 벗지 못한 것 같았다. 배랑이었다.
배랑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 경치를 보며 깊게 탄식했다. 부수의의 이번 수는 확실히 좋았다. 화근을 저 멀리 옮기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부수의가 손해 볼 일은 조금도 없었다. 태자가 운이 없든, 그의 형제들이 운이 없든, 장군부가 운이 없든 부수의에게는 어떻게든 좋은 일이었다.
이런 대국 속에서 심묘는 다른 길이 없었다. 다른 길이 있다 해도 모두 좋지 않은 방법이니 이번 대국은 그녀가 밑지는 장사였다. 배랑은 심묘를 걱정했다. 그러나 대체 왜 자신이 그녀를 걱정하는지는 어떠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죽으면 자신은 정당하게 부수의를 따를 수 있었다. 부수의가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부수의는 황제의 역량이 있으니 덩달아 자신도 부귀영화를 다 누릴 터였다. 류형도 아무도 몰래 더 좋은 상황에서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은 심묘의 패배를 원치 않았다.
근래 부수의는 부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해 호위를 배로 늘렸다. 파리도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라 소식을 전할 수도 없었다. 심묘에게 편지할 방법이 없자 그는 초조했다. 그는 심묘가 내일 혼자 입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수의의 막료이면서 동시에 하급 관리인 자신도 마침 공무를 보기 위해 내일 입궁하려 했다.
심묘에게는 막다른 길만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살길이 있을까?
배랑은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이미 더는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탁자를 가볍게 쳤다. 바둑판 가득한 바둑돌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바닥에 바둑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순식간에 바닥이 어질러졌다. 바둑판에 놓였던 바둑의 형세는 모래처럼 흩어져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 심묘는 입궁했다. 나설안과 심신은 안심할 수 없어 그녀에게 많은 호위를 데려가게 했다. 그러나 장군부 호위는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어차피 궁 바깥에서 기다려야 하니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심묘는 출발 전 사경행이 준 크고 작은 장신구를 거의 다 착용했다. 혹 의외의 일이 발생할까 걱정해 만전을 기해 준비했다. 궁문 입구에 도착하자 곡우를 비롯한 여종들은 호위들과 함께 바깥에서 기다렸다. 심묘는 궁녀를 따라 곤녕궁으로 걸어갔다. 곤녕궁까지 가는 길은 가깝지 않았다. 긴 복도를 몇 개 돌고 화원도 지나야 했다. 심묘는 익숙한 듯 계단을 쉽게 올랐다. 궁녀는 심묘에게 자신의 길 안내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닌지, 그녀가 곤녕궁에 두 번째로 가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궁녀는 모르겠지만 곤녕궁은 전생에 심묘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심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다 알고 있었다. 웅장하고 정교한 궁의 모습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심묘의 눈 속에 혐오감이 스칠 정도였다.
곤녕궁에 도착하니 황후가 머리를 빗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한참 후에야 황후가 그녀에게 들어오라 했다. 오늘 동숙비는 곁에 없었고, 황후 홀로 있었다. 그녀는 정식 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봉황을 본뜬 비녀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매우 귀해 보였다. 황후에게서는 위압감이 뿜어 나왔다.
심묘는 황후의 속내를 알아챘다. 그녀는 자신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가씨로 여겨 황실의 위엄으로 위협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열일곱의 어린 아가씨였다면 위압감 넘치는 황후를 홀로 대하기 어려워 당황하며 고집을 버리고 그녀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어린 아가씨가 아니다. 앞의 여인은 현생 황후지만 자신은 전생 황후였다. 더욱이 그녀보다 더 많은 고생을 겪어 견문도 훨씬 넓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우며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심묘의 반응은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황후는 심묘가 일부러 어리석은 척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 아둔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황후는 시선을 돌려 심묘의 팔찌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팔찌는 참 좋아 보이는구나. 앞으로 나와 내게 보여주렴.”
심묘가 다가오자 황후가 심묘의 팔을 들었다. 팔찌는 보기 드문 옥으로 만들어져 대단히 매끄러워 보였다. 황후가 몇 마디 칭찬을 건네자 심묘는 미소 지었다.
“마마, 소녀의 비녀와 목걸이, 귀걸이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황후의 입가가 움찔했다. 고양이 눈 모양의 비녀와 진주 귀걸이가 잘 어울렸다. 진주 귀걸이는 호박 목걸이와도 어울렸다. 반지와 자잘한 머리 장신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장신구들이라고 해도 조합을 생각지 않고 모두 함께 착용하면 오히려 보기에 나쁜 법이었다. 황후는 팔찌에도 흥미를 잃고 속으로 비웃었다.
심묘가 금은만 아는 머저리였지만, 요즘에는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이런 저급한 취향을 가진 아가씨를 태자의 짝으로 맺어줘야 한다니 영 달갑지 않았다. 장군부가 병권으로 태자를 보조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저질스러운 여자를 황실에 들이고 싶지조차 않았다. 황후는 심묘의 손을 놓았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그날 네 어머니와 함께 말한 대로 넌 아직 정혼하지 않았지. 마침 혼인할 나이고 나도 널 좋아하니 중매를 서주려 한다. 당연히 나도 네게 어려운 일을 강요하지 않을 거야. 이 중매는 네가 원해야 성립된단다.”
심묘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가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넌 내가 어찌 지내는 것 같으냐? 영광스러워 보이느냐?”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으나 미소 지었다.
“황후마마는 잘 지내시며 아주 영광스러우십니다.”
“황실에 시집오면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총애하고 보호해주니 여인들은 즐겁고 영광스럽게 지낼 수 있다. 나는 참 운이 좋지. 지금 네게도 이런 행운이 있단다. 너 역시 높은 데서 살고 싶지 않으냐?”
황후의 말에는 유혹이 가득했다. 심묘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겸손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듯도 했다. 심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녀는 이미 아주 좋습니다. 절대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이에 마마와 함께 논할 수 없으니 마마께서 소녀의 목숨을 살려주시길 바랍니다.”
황후는 당황했다. 심묘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높은 가지로 오르려는 사람이 쌔고 쌨다. 더구나 여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허영심이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심묘를 유혹하면 쉽게 넘어올 거라고 여겼다. 그녀가 고집을 버리고 자신의 말에 따르면 황실은 이 혼사를 정당하게 치를 수 있었다. 황실은 도둑질도 숨길 수 있으니 이쯤이야 손쉬웠다.
하지만 심묘는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게 아니라 두려워했다. 황실과 혼인하는 일이 겁나는 일인가 싶어 불쾌할 정도였다. 장군부 적출 소저가 쥐처럼 간이 콩알만 하고 소처럼 우둔해서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황후가 완곡하게 말해도 호되게 말해도 온화하게 말해도 심묘는 계속 두려워 떨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매우 무거워 따르겠다는 말은 절대 꺼내지 않았다. 황후는 끝내 불만에 가득 차 심묘에게 돌아가라고 명했다. 심묘 쪽은 통하지 않으니, 문혜제와 세세히 상의해 새로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곤녕궁 궁녀도 주인의 비위를 거스른 심묘를 퉁명스럽게 대했다. 궁녀는 바깥 길을 지나던 소태감에게 심묘를 궁 밖으로 데려가도록 했다. 소태감은 심묘를 궁 밖으로 데려가면서 모퉁이를 몇 번 돌았다. 그러더니 아주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돌아 관리가 되지 않는 허름한 화원에 다다르자 심묘는 걸음을 멈췄다.
“출궁하는 방향이 아닌데,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요?”
그녀는 소리 없이 팔찌 위를 눌렀다. 자신보다 황궁의 지리에 익숙한 사람은 없다. 그녀는 어느 곳이 도주에 유리한지 알고 있었다. 심묘의 대응에 소태감이 당황하다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배 선생께서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심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배랑이 부른다는 소리에 심묘는 순순히 소태감을 따라갔다. 배랑은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편지를 부치지 않았는데 지금 갑자기 찾으니 아주 중요한 일일 터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가 부수의에게 들킨 것은 아닌지 의심도 했었다. 그러나 모경을 통해 알아보니 배랑은 정왕부에서 평안히 지내는 듯했다. 부수의가 배랑을 의심한다면 그럴 리 없었다.
세상에는 많은 우연이 있다. 심묘는 황실과의 혼인 때문에 자신의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연루된 것을 몰랐다. 심신, 나설안과 심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심묘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 계속 뛰어다녔다. 다른 사람들도 희생을 무릅쓰고 용감히 앞으로 나섰다. 나릉은 진심을 드러냈고, 풍자현은 정의를 알아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물론 소명풍은 일이 잘못되어 구혼하는 모양새지만.
인간 세상은 복합하게 얽혀 있다. 관계는 각자 위치에 있다가 촘촘한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교차하여 우연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늘 송신 공주도 입궁했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갈수록 여위었다. 1년 중 입궁하는 날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은 매우 황망해 보였다. 궁녀가 통지하려 하자 송신 공주가 손을 내저었다.
“황제 폐하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통지할 필요 없다.”
궁문 입구를 지키는 호위는 당연히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송신 공주는 얼굴을 자주 드러내지는 않으나 선황이 총애하던 딸로 성격이 강했다. 그녀를 화나게 하면 장래에 좋을 것 없으니 그들은 즉시 통과를 허가했다. 궁녀는 송신 공주가 가마를 부를 거라 여겼다. 그러나 송신 공주는 이도 거절했다.
“좁은 길이니 가마를 타면 오히려 불편하다. 너희는 나를 부축하거라. 지름길로 걸어가겠다.”
송신 공주는 마음이 조급했다. 자신은 오랫동안 조정 일을 신경 쓰지 않으며 공주부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우연히 시종에게서 태자가 심묘와 혼인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경행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의 친구인 심묘라도 보호하고 싶었다. 황실 사람으로서 여인이 황실에 시집오면 평생 어떤 풍랑을 겪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심묘는 부귀영화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는 아닌 듯하니, 궁중에서 지내면 필시 웃음을 잃을 터였다. 이에 송신 공주는 서둘러 문혜제를 찾았다. 그녀는 자신이 오라버니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길 바랐다.
심묘는 외진 정자에 도착했다. 수풀 속에 자리한 정자는 긴 복도와 잘 어울렸다. 복도에는 공간이 있어 숨기에도 좋았다. 배랑이 그 공간에서 걸어 나왔다. 소태감에게 바깥에서 망을 보라고 시키긴 했지만. 이 황량한 화원은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평소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배랑은 사람이 올 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심묘는 배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 선생, 무슨 긴급한 일이 있는 건가요?”
“정왕 전하가 관저 호위를 늘려서 편지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태자 전하와 당신의 혼인은 정왕 전하가 제의한 거야.”
심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배랑은 놀라지 않는 심묘를 보고 물었다.
“알았던 거야?”
“부수의의 솜씨일 거라 추측했어요. 태자 전하가 이유 없이 날 원할 리 없지요.”
심묘의 담담한 말투는 태자와 부수의에게 아주 익숙한 듯했다. 심묘는 규방의 여자로 평소 황자들과 교제할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황자의 성격을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심신도 심묘만큼 황자들 성격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혼례는 어찌할 거지?”
심묘는 의외라고 여겼다. 배랑은 줄곧 득실을 따져 감정에 연연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혼사를 묻다니. 자신의 혼사는 이 대국에서 중요치 않은데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떻게든 되겠지요.”
“태자 전하에게 시집가면 안 돼.”
“시집가고 말고는 중요치 않아요.”
심묘는 이미 답을 내린 듯한 배랑의 모습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의 노력은 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여겼다. 그녀는 냉랭히 말했다.
“시집가도 반드시 나쁜 건 아니에요. 내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까요. 길은 혼자 가는 것이지요. 걷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고요. 선생님, 세상에 한 가지 길만 있다고 여기지 말아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황실에 시집와서도 길을 갈 수 있지만, 네 혼인이 대가라니 너무 잔인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거야.”
심묘는 배랑을 빤히 응시했다. 그가 자신에게 잔인한 정치에 휘말려 희생양이 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었다. 전생에 완유가 흉노로 시집갈 때의 배랑의 태도와 너무 달랐다. 당시 자신은 그에게 부수의를 한 번 더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었다. 배랑은 부수의의 심복이기에 부수의가 그의 말은 잘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랑은 심묘의 기대를 저버렸다.
“마마, 공주마마의 혼사로 명제의 평안을 얻고 만민의 행복을 구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요?”
그때 조금의 연민도 찾아볼 수 없던 배랑이 대국을 두 번째로 여긴다고? 배랑은 심묘의 표정에 주의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황실 소문이 퍼졌으니 장군부와 감히 혼인할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또 어떤가요?”
“안 되면, 내게 시집와.”
갑자기 분위기가 뻣뻣해졌다. 그러나 배랑의 예상을 진작에 뛰어넘은 심묘는 이번에도 놀라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심묘는 그저 냉담한 시선으로 배랑을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배랑은 정면으로 냉수를 맞은 듯 추웠다. 이 일은 분명 득실을 따져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심묘의 맑고 투명한 시선 아래 그는 자신의 마음속 은밀한 바람을 들킨 듯했다. 일순 난처해져서 심묘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이어서 말했다.
“황실로 시집갈 수는 없으니 다른 사람과 혼인하는 게 살길이야. 내게 시집오면 아마 막을 수 있을 거야.”
심묘는 작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졌다.
“왜 이렇게까지 날 도우려 하나요? 우리 사이는 류형 때문에 계약을 맺은 관계에 불과합니다. 굳이 밝히자면 내가 주인이고 당신은 하인이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강요했으니 내가 갇히면 당신은 이익 아닌가요? 정왕 전하를 따르는 게 나보다 천배 만배 나으니까요. 배 선생이 날 도우려고 하다니, 순간 당신이 진심이라 여길 뻔했습니다.”
심묘의 말은 비꼬는 의미였다. 배랑은 심묘가 어떤 때 자신에게 정중하고, 어떤 때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모두 이렇게 변덕스러운 건가 싶었다. 심묘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하니까. 그 얼굴에 심묘가 살짝 웃었다.
“배 선생과 혼인한다 해도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겁니까? 배 선생은 무슨 신분으로 나와 혼인할 것이며, 정왕 전하에게 뭐라고 설명할 건가요? 당신은 나 때문에 신분을 폭로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는 배 선생이라는 바둑알을 이렇게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그녀는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게다가 혼사와 부군은 내게 그렇게 중요치 않아요. 부군은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일 뿐,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어요. 누구와 혼인하든지 난 상관없어요. 혼인을 강요당하고 말고는 마음에 둘 부분도 아닙니다. 나의 행복이나 즐거움은 누구에게 기대서 생기지 않으니까요.”
배랑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는 아직 어려 잘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혼례는 일생일대의 대사이며, 특히 여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울컥해서 아무렇게나 정한 뒤 장래에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후회하기는 너무 늦는다. 그러나 심묘의 표정을 보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심묘의 표정은 진지했고 박정하며 냉담했다. 모든 일에 권태를 느끼는 듯했다. 정말로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았으며 심지어 지금의 대화에 혐오를 내비치는 듯싶었다. 여인이 어째서 일생의 동반자를 마음에 두지 않는지 배랑은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서로 양보 없이 맞서는 가운데, 갑자기 악의 섞인 비웃음이 들려왔다.
“이런 염문 장면을 볼 거라곤 생각 못 했네.”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 앞에 복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장검을 들고 심묘에게 돌진했다. 배랑이 얼른 심묘를 끌어당겼다. 심묘가 매섭게 외쳤다.
“너희들은 누구냐?”
“심 소저, 우리를 원망하지 말아라. 네가 다른 사람의 길을 막은 것을 탓하거라.”
두 사람이 흉악하게 웃었다. 한 사람은 배랑에게, 한 사람은 심묘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칼부림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배랑이 찾은 장소에 암살자들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묘는 팔찌를 눌렀다. 팔찌는 근거리에서 사용하기 좋았다.
그때, 두 개의 돌이 날아와 복면을 쓴 두 사람의 무릎을 맞췄다. 두 사람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 번의 검광이 스쳤다. 그들이 들고 있던 장검은 스스로의 가슴을 찔렀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암살자들을 죽인 두 사람은 궁중 호위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묘에게 인사했다.
배랑이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 할 때, 옥상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건장한 체구에 자금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의 은 가면 아래에서 도화 눈이 칼날같이 예리한 빛을 뿜었다. 대량의 예왕이었다.
“예왕 전하…….”
배랑이 중얼거렸다. 배랑은 심묘와 자신을 살려준 두 호위가 예왕의 수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심묘와 자신을 해치려 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심묘와 예왕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였다. 경계심이 들었으나 일단 예의 바른 웃음기를 띤 채 예왕에게 인사했다.
“예왕 전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왕은 말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배랑을 바라보았다. 은 가면 때문에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나 배랑은 한기를 느꼈다. 등까지 오싹해졌다. 심묘가 눈살을 찌푸릴 때, 예왕이 심묘를 끌어당겨 떠났다. 배랑이 놀라 외쳤다.
“예왕 전하, 안 됩니다.”
그러나 두 호위가 사납게 그를 막아섰다.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살기를 뿜었다. 선비인 배랑은 무공을 하지 못해 심묘를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심묘가 휘청거리며 끌려가다가 뒤를 돌아 배랑에게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배 선생, 먼저 돌아가세요. 나와 예왕 전하는 할 말이 있어요.”
예왕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배랑은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호위는 그를 한 번 보고 떠났다. 바닥에 아직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배랑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심묘와 예왕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순간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공허해진 것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10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