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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47장 (11/71)

폐후의 귀환

10권

47장

심묘는 사경행에게 잡힌 팔목이 아팠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는 듯 빠르게 걸었다. 그녀는 사경행의 걸음을 따라가려 노력했으나 그 와중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심묘는 결국 분노를 터트렸다.

“놔줘요!”

사경행은 사람이 없는 복도에 도착해서야 사납게 손을 놓았다. 끌려오다시피 하던 심묘는 그가 손을 놓자 넘어질 뻔했다. 바르게 선 심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이 화원은 배랑과 있었던 곳보다 바깥이었다. 심묘는 누가 볼까 봐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팔을 당겨 그녀를 담 쪽으로 밀었다. 그녀의 두 손을 잡은 사경행은 차갑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은 가면을 써도 사경행의 아름다운 선이 드러났다. 우아한 턱 위에 자리한 얇은 입술을 팽팽히 오므리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불같은 분노가 스쳤다.

“심묘, 너 능력 있구나?”

심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사경행이 손을 내밀어 심묘의 턱을 잡았다. 그녀의 고개를 들어 자신과 마주 보게 했지만, 키 차이 때문에 여전히 심묘를 내려다보는 자세였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심묘는 그 시선이 싫어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암만 발버둥 쳐도 사경행과 힘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 저항해봤자 사경행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는 정도이리라. 사경행은 심묘를 수월하게 제지했다. 그는 무릎으로 심묘의 다리를 눌러 그녀가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자세는 더욱 애매해졌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나릉, 소명풍, 풍자현, 지금 배랑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미인을 구하려 하는구나. 내가 널 얕보았다.”

사경행의 감정을 종잡지 못한 심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경행은 갑자기 손에 힘을 더했다. 심묘는 턱이 아파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이 이를 갈았다.

“누구에게 시집갈지 마음에 두지 않고, 혼인을 압박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구나. 태자부에 시집가려는 게냐?”

방금 배랑과 나눈 말을 사경행이 전부 다 들은 것이다. 사경행은 어두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이 없을 테지만 지금 심묘는 화가 났다.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만천하에 들킨 듯했다. 게다가 엉망진창인 상태도 알려진 듯해 부끄럽고 언짢았다. 그녀는 냉소했다.

“태자 전하에게 시집간대도 예왕 전하가 무슨 상관인가요? 당신도 알고 있지만 전 황후가 되고 싶어요. 태자 전하가 황위에 오르면 제가 명제의 심 황후가 될 수 있는 건데 뭐가 나빠요?”

심묘의 말은 지나치게 악랄했다. 사경행의 안색은 더욱 검푸르게 변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갑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태자는 황위에 앉지 못해.”

심묘는 사경행이 왜 분노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이런 난감한 자세로 혼이 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고 억울했다. 사람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통제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지금 자신이 딱 그랬다. 자기조차 왜 억울한지 몰랐다. 그러나 근래 즐겁지 않았던 기분을 모두 발산하고 싶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턱을 잡고 그녀의 손을 억세게 쥐었다. 분노한 그에게서 사악한 기운이 맴돌았다.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는 사경행은 단지 그의 일부일 뿐이다. 다른 면의 그는 융통성이 없으며 분노할 때면 상대방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이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태자 전하가 황위에 못 앉아도 당신과 무관해요. 예왕 전하는 왜 제게 캐묻나요? 당신과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할 사이가 아니에요. 제가 누구에게 시집가든지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요?”

사경행이 천천히 웃었다. 그는 심묘의 턱을 당겨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내게 시시콜콜 따질 때, 나와 값을 흥정하며 거래할 때, 내 손을 빌려 살인할 때, 넌 아주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왜 이토록 무능해 보이느냐? 응?”

심묘는 눈이 시렸다. 지금 사경행의 행동이 정말 싫었지만,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녀의 눈앞이 흐려졌다.

사경행이 미간을 찡그렸다.

“우는 건 허락하지 않아.”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지만, 심묘는 부끄러웠다. 생을 두 번이나 살면서 남의 몇 마디 말에 울고 싶어지다니 창피했다. 그러나 억울함을 풀 방법이 없었다. 체면을 잃고 싶진 않지만,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다급해진 심묘는 사경행을 노려보았다.

“사경행, 너무 지나치게 굴지 말아요.”

“사경행?”

수풀 쪽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묘와 사경행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수풀 안에서 한 사람이 휘청거리며 나오는 게 보였다. 다가오고 있는 사람을 알아본 심묘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도 모르게 사경행을 쳐다봤으나, 그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다가온 사람은 송신 공주였다. 송신 공주는 지름길로 들어가다가 심묘가 낯선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심묘와 낯선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유언비어가 생길까 걱정스러워, 궁녀들에게 기다리라 명하고 홀로 그녀를 따라온 것이었다.

송신 공주는 심묘의 품행을 믿었다. 다만 심묘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게 아닌가 싶어 구해주려 한 것이다. 다만 자신 역시 오해를 살 수 있기에 경솔하게 나서지 않고 일단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듣지 못했다. 그러다 심묘가 울듯 하자 황망히 앞으로 향했다. 그때, 심묘가 ‘사경행’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송신 공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키 큰 남자는 생소한 젊은 남자로, 반쪽짜리 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송신 공주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자를 자세히 보니 예왕이었다. 송신 공주는 예왕이 막 명제에 입궁했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조정 일에 별 관심이 없어 그에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를 보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게다가 심묘가 방금 그에게 ‘사경행’이라 말했으니까. 그녀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심 소저, 방금 예왕 전하를 사경행이라 부른 건가?”

송신 공주는 캐묻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말하기 전에 예왕이 나섰다.

“제 이름은 사연, 아명은 경행입니다. 방금 심 소저는 제 아명을 부른 겁니다.”

심묘는 사경행의 빠른 대응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무성의했고, 송신 공주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묘는 속으로 사경행을 나무랐다. 가족 이외에는 아내나 애인만이 남자의 아명을 부른다. 그런데 자신이 예왕의 아명을 불렀다고 송신 공주에게 말하다니, 고의가 아니고서야.

송신 공주는 예왕과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은 예왕에게 닿았다. 자줏빛 의복을 입은 예왕은 풍채가 사경행과 비슷했다. 자줏빛 의복을 입고 고귀하면서 만사에 초탈해 보이던 사람은 홍등가를 드나들던 사경행뿐이었다. 그러나 예왕의 생소하고 냉담한 분위기는 기억 속 소년과 분명히 달랐다.

사경행은 북부 변방의 전장에서 화살에 심장이 뚫려 죽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송신 공주는 가슴이 못내 아팠다. 그녀는 가슴 부근을 짚으며 허리를 굽혔다. 자신은 사경행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곱씹어왔다. 백발의 자신이 흑발의 자식을 먼저 보냈으니 이 슬픔은 사정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심묘가 얼른 송신 공주를 부축했다. 예왕은 뒷짐을 지고 서서 냉담하게 송신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송신 공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예왕이 사경행일 리 없었다. 그가 사경행이라면 이렇게 냉담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워하는 자신을 멀뚱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송신 공주가 손을 내저었다.

“넌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

“황후마마께서 절 입궁하라 하셨습니다.”

심묘의 답변에 송신 공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사경행을 보며 물었다.

“예왕 전하는 어째서 이곳에 계신 건가요?”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제가 궁에서 나왔을 때, 길을 안내하던 소태감이 도중 일이 있다며 떠났습니다. 오래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알아서 가려다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왕 전하를 뵀구요. 예왕 전하께서는 제게 길을 안내해주시던 참이었습니다.”

심묘는 대놓고 송신 공주를 속이고 있었다. 송신 공주는 예왕이 심묘를 끌고 이곳으로 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게다가 심묘도 예왕의 아명을 불렀으니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보통이 아닐 게 분명했다.

송신 공주는 화가 났다. 사경행이 심묘를 데리고 공주부로 왔을 때 자신은 사경행이 심묘를 특별히 대한다 여겼고, 심묘를 직접 대하면서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심묘와 사경행을 맺어주고 싶었다. 사경행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심묘는 다른 남자와 깊은 관계인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이 남자의 아명도 ‘경행’이라니. 자신의 보물을 다른 사람에게 뺏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심묘가 시집을 갈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왕은 명제 사람도 아니지 않나.

게다가 송신 공주는 자신이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했다. 예왕의 일 처리는 기이하기도 하고 그에겐 위험한 기운이 가득하니 평범한 남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니 심묘가 이 남자를 따르면 일이 매우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가 심 소저를 대신해 예왕 전하에게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송신 공주는 심묘와 예왕의 관계를 정리해줘야겠다 생각했다. 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안내해줄 태감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널 데려다주마. 더는 예왕 전하께 폐를 끼치지 말거라.”

송신 공주는 예왕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분명했다. 예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예왕이 떠난 후 송신 공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너와 예왕은 어떻게 아는 것이냐?”

심묘는 오늘 이곳에서 송신 공주와 만날 거라고는, 거기다 그녀가 자신과 사경행의 대화를 들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경행의 비밀 호위는 귀와 눈이 밝아 쥐가 기어 나와도 잡을 수 있다더니, 오늘은 왜 송신 공주가 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예왕 전하와 몇 번 우연히 만나 알고 있었습니다.”

송신 공주가 깊은 눈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기 원치 않으니 나도 더는 묻지 않으마. 그러나 그 사람은 명제 사람이 아니다. 네게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넌 똑똑한 아가씨니 굳이 힘든 길로 돌아가지 말거라. 부모와 오라비를 생각하렴.”

송신 공주는 심묘가 남자에게 속을까 걱정했다.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말을 마친 송신 공주가 명치를 문지르며 몇 번 숨을 헐떡였다. 심묘는 걱정스러웠다.

“공주마마,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송신 공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전부터 종종 가슴앓이를 한단다. 근래 더 심해졌구나.”

심묘는 송신 공주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전생에 그녀가 심장병을 앓은 것을 떠올렸다. 태의는 그녀에게 걱정을 줄여야 한다고 했었다.

“공주마마, 반드시 태의를 찾아 보이시거나 혹은 심장병을 잘 보는 의원을 찾으십시오.”

송신 공주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나는 지금까지 살며 누릴 것을 모두 누렸고, 누리지 말 것도 누렸구나. 오래 살지 못할 테지만 상관없다. 나도 잠자리에서 계속 뒤척이는 건 원치 않아. 걱정할 가치가 없단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가라앉았다. 반드시 사경행을, 그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심묘 자신은 이럴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심묘는 힘겹게 한마디를 꺼냈다.

“소후야께서 지금 공주마마의 모습을 보면 분명 속상해하실 겁니다.”

송신 공주는 얼굴에서 상심을 조금 거두고 심묘의 손을 토닥였다.

“경행이 정말 나를 생각했다면 그리 모진 마음을 먹고 북쪽으로 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황제 폐하께서 너에게 혼인을 지시하려 한다고 들었다. 내가 오늘 입궁한 건 폐하께 그 결정을 재고해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해서다. 심묘, 너도 태자에게 시집가길 원치 않지?”

심묘는 송신 공주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에 순간 놀랐다. 전생의 자신은 송신 공주에게 잘 보이려 했으나 그럴수록 오히려 경시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경행과의 관계 덕분에 그녀는 자신에게 잘 대해주었다. 송신 공주가 나선다고 일이 해결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진정으로 고마웠다.

“네, 공주마마의 말씀대로 전 태자 전하께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일은 하늘의 법칙에 따르니 내버려 두면 하늘이 안배해줄 겁니다.”

송신 공주는 웃었다.

“너는 이미 세상일을 꿰뚫어 보고 있구나. 시간이 늦었으니 난 먼저 가보마. 궁녀에게 널 배웅하라고 하겠다.”

심묘는 송신 공주 덕분에 무사히 궁을 나왔다. 밖에서 심묘를 맞이한 경칩과 곡우는 그녀가 무탈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라 죽을 뻔했습니다. 이리 오래 있으셔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답니다. 아가씨께서 계속 나오지 않으시면 저희는 방법을 생각해 찾아가려 했습니다.”

심묘는 실소했다.

“궁이 위험한 곳도 아닌데, 어디 그리 무서울까?”

심묘는 오늘 나타난 두 살수의 배후가 누구일지 고민했다. 자신이 죽으면 태자에게 해가 가니, 배후는 태자의 세력이 더 이상 커지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지 않을까. 이에 주왕이나 리왕의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현재 심만과 진국 태자의 일이 불거진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부수의가 이렇게 대범하게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인내하는 성격이니 잠시 동안 다시 잠복할 터였다.

심묘는 냉소했다. 어떻게 황실 사람 중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 있을까. 장군부와 황실은 운명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서 이렇게 매서운 한 수를 보냈으니 자신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심묘 일행은 장군부로 출발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거리, 번화한 주점 구석에서 누군가 그들의 동정을 지켜 보고 있었다. 심묘가 궁 입구에서 안전하게 나오는 것을 본 그의 시선에 의외라는 기색이 스쳤다. 그는 검을 챙겨들고 소리 없이 떠났다.

심묘가 장군부로 돌아오자 심신 부부는 심묘를 둘러싸고 황후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심묘는 사경행과의 일은 빼고 이야기했다. 황실이 심묘를 위협하니 장군부 사람들은 걱정스러웠다. 하루하루 조여오는 듯하니 빨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설안은 혼담을 꺼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중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지 심묘에게 물어보았다. 심신도 그들에 대해 알아본바, 모든 방면에서 완전무결하진 않아도 품행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심묘는 사경행 때문에 혼란스러워 혼담 얘기를 논할 기분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드러낸 불편한 표정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심묘가 황후와의 대면으로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고 여기며 그녀에게 일찍 돌아가 쉬라고 했다.

심묘가 방으로 돌아오니 하늘은 이미 어두웠다. 곡우가 그녀를 대신해 등불을 켰다. 심묘의 낯빛이 어두우니 경칩은 심묘를 방해하지 않으려 곡우를 끌고 나갔다. 방에는 심묘 혼자 남았다. 그녀는 거칠게 머리를 빗었다. 가슴속에 까닭 없는 분노가 일어 지금껏 꺼질 줄 몰랐다. 모두 사경행 탓이었다. 궁에서의 일을 돌이킬수록 억울하고 분했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가 이렇게까지 남의 인생에 손을 대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자신의 혼사에는 여러 세력이 끼어들고 있었다. 그 위에 사경행까지 얹히다니,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배랑의 말을 떠올리니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 웃음은 씁쓸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시집가 백년해로하길 원치 않는 여자가 있을까. 그러나 전생에서 자신의 혼인 생활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부수의와의 사이에서 사랑은 자신의 일방적인 소망에 불과했다.

세상 흥망성쇠를 몸소 모두 겪었건만,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만은 알지 못했다. 그저 또다시 사랑을 하면 이번에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준 마음을 거두는 것보다 처음부터 마음을 내주지 않기가 더 쉬웠다. 그러나 왜인지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심묘는 등불 아래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곧 등불을 끄고 잠들었다.

예왕부.

오늘은 눈바람이 유난히 강했다. 예왕부 호위가 바람 속에 떨며 서 있었다. 튼튼하게 자란 백호도 침실 밖에 서 있는 벌을 받고 있었다. 오늘 예왕은 누굴 봐도 마땅찮았다. 예왕부 사람들은 돌아가며 예왕으로부터 욕을 먹었다. 계우서와 고양 두 사람은 탑뢰에 갇혀 벽을 보고 있었다.

탑뢰는 가혹한 형벌이 필요한 흉악범을 가두는 곳이었다. 이곳은 묵우군에게 가장 잔혹한 곳으로 10,000여 종에 가까운 형벌을 다룰 수 있었다. 의연한 성격의 남자도 탑뢰에 갇히면 며칠 안 가 처량하게 울부짖곤 했다. 철의도 처음 탑뢰에 들어갔다 나온 후 오랜 시간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 무얼 먹어도 토하곤 했다. 부귀한 공자인 계우서와 고양이 그런 탑뢰에 들어가 벌을 받고 있다니. 예왕부 호위들은 두 사람을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렸다.

야앵이 남기의 팔을 잡고 물었다.

“주인님, 왜 저러셔? 누가 주인님을 건드린 거야?”

남기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침실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낮은 소리로 말했다.

“태자가 심 소저와 혼인하려는 걸, 고 공자와 계 공자가 보고하지 않아 분노하셨어.”

야앵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 공자와 계 공자가 정말 간도 크지. 심 소저의 소식을 전하지 않다니. 과연 탑뢰에 갇힐 만하네.”

그녀는 눈바람 속에서 떨고 있는 백호에게도 동정의 눈빛을 보냈다.

“불쌍하기도 하지. 주인님이 예뻐하며 키우셨지만, 결국 너도 우리가 같은 처지가 되었구나.”

방 안, 사경행이 다 쓴 편지를 철의에게 건넸다. 철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계획을 변경하신 걸 폐하께서 아시면…….”

사경행이 철의를 바라보자 철의는 입을 다물었다. 주인이 기분 나쁠 때 그의 결정을 반대하는 건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사경행은 남은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챙기면서 말했다.

“배랑 쪽은 무슨 일인지 알아봐. 그리고 풍자현과 소명풍도.”

사경행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약재는 어떻게 됐지?”

“이미 사람을 보내 찾고 있습니다. 찾은 후 바로 의원으로 보낼 겁니다.”

근래 송신 공주는 자주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평소 복용하던 약재 중 봄에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재료가 있었다. 정경성 의원에 남아 있던 건 공주부가 모두 사들였는데도 부족했다. 송신 공주는 며칠 동안 약 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사경행은 이 약재를 거금을 들여 몰래 바깥에서 사 온 후 의원에 되팔려고 하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하거라.”

사경행이 지시하고는, 갑자기 일어나 피풍의를 걸치고 밖을 향해 걸어갔다.

“주인님, 나가시게요?”

당황한 철의의 말에 사경행이 차갑게 말했다.

“빚 청산이 끝나지 않았다.”

* * *

장군부는 이미 조용했고 심묘의 방 역시 어두웠다. 종양 역시 잠들었으니 심묘가 잠든 지 오래된 게 명백했다. 나무에서 선잠을 자던 종양은 사경행이 온 것을 보고 놀라 떨어질 뻔했다. 그는 얼른 아래로 내려가 사경행에게 인사했다. 사경행이 창문을 바라보자, 종양이 얼른 말했다.

“소부인은 이미 주무십니다.”

사경행이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턱에는 옥 고리 같은 물건이 놓여 있는데, 고리 아래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사경행이 종양을 바라보자 그가 설명했다.

“소부인이 휴식하고 있을 때 나릉이 몰래 놓고 간 장신구입니다. 소부인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사경행은 소매 안 비수에 장신구를 끼워서는 종양의 품에 던졌다.

“챙겨둬.”

당황한 종양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교교에게 줄 목걸이가 부족하거든.”

종양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사경행은 익숙하게 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상에서 심묘가 자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사경행은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세웠다.

“편안하게 잠을 자다니. 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 같네. 참 대담도 하지.”

그는 침상 앞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심묘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는 얼굴에서는, 평소의 단정하며 진중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에 드러난 수려하고 여린 모습은 그녀가 열일곱의 어린 아가씨임을 깨닫게 했다. 턱이 잡혀 눈물을 참던 모습이 덩달아 떠오르자 사경행은 부끄러워졌다.

사경행은 손을 뻗어 헝클어진 심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는 심묘의 속눈썹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손을 멈추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이 눈에 띄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심묘가 자는 척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양손을 심묘 옆에 대고 몸을 구부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여러 번 도와줬으니, 내게 몸을 허락하는 게 어때?”

그는 심묘의 눈을 주시하며 천천히 좀 더 다가갔다. 심묘의 몸이 뻣뻣해졌다. 그가 다가오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자 심묘는 매섭게 사경행을 밀고 일어나려 했다.

“뭘 하려는 거예요?”

허둥거리는 목소리였다. 사경행은 심묘를 눌러 침상에 눕혔다. 불안한 심묘는 발버둥 쳤지만, 사경행은 힘 한번 안 들이고 그녀의 움직임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가 웃었다.

“넌 내가 네게 뭘 할 것 같으냐? 우쭐하기는.”

심묘는 모경을 불러 사경행을 두들겨 패라고 하고 싶었다.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흘러내린 중의 때문에 눈처럼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사경행이 멍하니 있자 심묘는 그가 바라보는 곳을 확인하고는 부끄러워 얼른 손으로 어깨를 가렸다.

그때 갑자기 사경행이 그녀에게 이불을 던졌다. 심묘는 이불 밖으로 머리만 드러낸 채 작게 소리쳤다.

“미쳤어요?”

사경행은 누에 번데기처럼 그녀를 이불로 빠르게 감쌌다. 심묘는 옴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다. 사경행은 한 손으로 심묘의 머리를 받친 채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보았다. 발버둥 치던 심묘가 답답해하며 물었다.

“뭐하러 온 거예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묘, 너 좀 성실히 생활하거라.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네게 혼인을 하라 하겠느냐?”

심묘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당신이 명제에 천년만년 있을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언젠가 혼인해야 해요. 당신이 지금은 날 보호할 수 있어도, 내일은 보호하지 못할 수 있어요. 내일 보호한다 해도 언젠가는 보호하지 못할 날이 올 거라구요.”

“계속 보호할 수 있다면?”

당황한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너, 부군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서 시집은 가려고?”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 예왕 전하는 질문이 너무 많네요.”

심묘는 사경행의 거친 행동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와 사이좋게 담소를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황후답지 않았다. 오히려 머뭇거리며 부끄러워하는 어린 아가씨 같다고 할까. 사경행은 변덕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옆을 지탱하며 다시 물었다.

“넌 누구에게 시집갈 생각이지? 나릉, 소명풍, 풍자현, 아니면 배랑?”

그가 다가올수록 수려한 이목구비가 달빛 아래 빛났다. 사경행의 몸에서 풍기는 대나뭇잎 향도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은 사람을 빠져들게 했다. 그의 눈앞에 서면 자신의 마음속 은밀한 생각을 감출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심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쿵쿵 북을 치는 듯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소리가 자신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심묘는 이렇게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이 싫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 했다. 침상 들보에 부딪힐 뻔한 그녀의 머리를 사경행이 손으로 감쌌다. 그제야 심묘가 쏘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랑 상관없어요. 당신과는 맹우(盟友) 사이일 뿐이에요. 맹우는 서로 협력하는 거지 혼인 대사에 상관하는 게 아니죠. 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를 낳든 이혼을 하든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사경행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났지만,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넌 아주 폐후가 되고 싶나 보구나.”

사경행이 보기에, 심묘는 이미 반쯤은 자기가 처참한 결말을 얻을 거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평소 자존감이 낮지 않은 여인인데 이해할 수 없었다. 분노한 심묘는 더는 말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당신과 상관없어요. 무슨 이유로 제 일에 상관하나요?”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도발에 분노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미움을 받는 자신이 답답했다.

“맹우라고?”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맹우는 네 일에 상관할 수 없다?”

심묘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원스럽게 말한 사경행은 빠르게 몸을 구부려 심묘의 입술 위에 입을 맞췄다. 순간 심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가 웃으며 말하는 것이 들렸다.

“지금은 맹우가 아니다.”

“당신…….”

심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잠자리가 수면을 스치듯 입술 위에 가볍게 닿은 부드러운 촉감만이 생생했다.

“이제 난 네 일에 관여할 수 있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심묘를 굽어보았다.

“기억해. 앞으로 네가 시집가고 아이를 낳고 이혼하는 모든 것들은 내가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야.”

사경행은 차갑게 창문을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무 위 구석에서 듣고 있던 종양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멋대로 떠날 수는 없어서 다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경행이 나오자 그는 즉시 몸이 굳었다.

“누구라도 물건을 보내면 즉시 버려라.”

사경행은 종양이 가지고 있던 장신구를 받으며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 밤, 계획이 수포가 되어 노발대발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 저녁, 누군가 주왕 부수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수안은 하인이라 여겨 들어오라 했으나 오래도록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하게 여긴 부수안이 일어나 문을 열자 차가운 시체 두 구가 놓여 있었다. 시체 두 구가 어떻게 주왕부로 들어온 건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크게 노한 부수안은 야간 경비를 서는 모든 호위에게 중벌을 내렸다. 그는 의심스러운 내부 첩자를 찾았으나 성과는 없었다. 시체 두 구를 조사하니 오늘 심묘 암살을 위해 보낸 자객임이 밝혀졌다. 불안한 부수안은 부수현을 불렀고 형제 두 사람은 어떻게 할지 논의했다.

그 시각 리왕 역시 부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자객이 돌아온 방법은 리왕 쪽이 더욱 거칠었다. 누군가 시체 두 구를 직접 관저 안으로 던졌기 때문이다. 놀란 리왕부 호위들이 범인을 쫓으려 했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리왕부에 던져진 시체 두 구 역시 리왕이 심묘를 암살하라고 보낸 자객이었다. 리왕은 불안했다. 자객들이 살해당했으니 자신의 원수가 한 일이 분명했다. 더욱이 그 원수놈은 수하도 이렇게 훌륭해서 자신의 호위들이 뒤도 밟지 못했다는 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웠다.

주왕부.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넌 누가 한 것 같으냐?”

부수안의 물음에 부수현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리왕이겠지.”

부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쩌면 리왕도 이 기회를 빌려 나와 같은 생각을 했겠지.”

부수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리왕은 인자한 가면 뒤 진짜 얼굴이 들킬까 봐 이렇게 대범한 짓은 하지 않아. 혹시 태자의 솜씨가 아닐까?”

부수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하긴 오랫동안 태자가 병을 구실로 삼았지만, 그게 눈가림일지 누가 알겠어? 우리 중 아무도 태자의 솜씨를 보지 못했어. 그가 나와 리왕 사이에 내분을 일으킨다면 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겠지.”

“맞아. 하지만 한 사람을 잊지 마. 아홉째도 있어.”

부수안은 배후가 아홉째일 가능성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홉째는 됐어. 아홉째는 마음이 있어도 실천할 수 없어. 조정에서 활동한 게 없는데 인맥이 어디 있으려고? 감히 왕부(王府)에 시체를 운반하고도 들키지 않으려면 상당한 고수를 수하로 둬야 해.”

“왜인지 모르지만 난 늘 아홉째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아. 형님도 그 애를 얕보지 마.”

부수안은 탄식했다.

“이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리왕이든 태자든 상관없이 안 좋은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이야. 세심히 조사해서 누가 배후에서 음모를 꾸몄는지 알아봐야겠어.”

주왕과 리왕은 자객을 처치하고 자신들에게 되돌려준 사람이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히 몰랐다. 황자 간의 다툼은 암암리에 더욱 격렬해졌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장군부 사람들이 심묘의 신랑감으로 적합한 상대를 물색하는 동안 명제 황실의 성지는 늦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문혜제가 다른 일로 골머리를 썩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문혜제는 태자에게 물었다.

“대량은 대체 무슨 뜻을 품은 것이겠느냐? 명제와 뭘 하자는 거지? 짐은 여태껏 이렇게 건방진 사람은 본 적이 없구나!”

태자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대량의 예왕이 입궁 후 문혜제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예왕이 간 후 문혜제는 찻잔을 던질 정도로 크게 노했다. 태자는 예왕이 버릇없는 말을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혜제가 이렇게 분노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문혜제는 노발대발했다. 그는 현재 명제의 국력이 어느 정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명제는 선황의 제위 시절만큼 강성하지 못했다. 좀 더 우세한 진국과 강성하고 풍요로운 대량 앞에서 자랑할 만한 부분이 무엇도 없었다. 이번 조공연회에서 대국의 위엄을 보이려 애쓴 것은 그만큼 명제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대량과 진국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얕은 수였으나 진국 태자 황보호는 표면상이나마 존중해줬다. 현재 황보호는 명안 공주의 죽음 때문에 대리사(大理寺) 관료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명제 관아의 관원이 진국 공주 때문에 설욕당하고 있으니 웃음거리였다. 그러나 문혜제는 이를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진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대량을 함께 상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대량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황보호는 문혜제를 존중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예왕은 제멋대로 행동하며 문혜제를 존중하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문혜제는 예왕의 성격이 원래 이러하다고 합리화한 차였다.

그런데 어제 예상치 못하게 예왕이 입궁했다. 그래서 문혜제는 예왕과 이야기를 나누며 대량과 친교를 맺으려 했으나 예왕에게 거절당했다. 예왕은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태도였다.

어쨌든 문혜제도 일국의 황제인데 체면을 잃어 안색이 좋지 않게 가라앉았다. 예왕은 문혜제의 기분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무심하게 명제와 대량의 국토 경계 부분에 있는 몇몇 도성을 거론했다. 문혜제의 안색이 변했다. 그 도성들은 크지 않으나 그곳에는 광산이 있었고, 그곳에서 채굴한 광물로 대형 병기를 만들 수 있었다. 대량이 여태 그 도성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은 명제의 백성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예왕이 그 도성들을 언급한다는 것은 대량이 점령하고 싶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다른 대외 문제에는 아둔하다 해도 문혜제는 땅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대량이 지금에야 변방의 도성 몇 개를 가져가고 싶다지만, 나중에는 얼마나 더 달라고 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에 정경성도 마음에 둘지 몰랐다. 아니면 아예 군대를 인솔해 명제를 평정할 수도 있었다.

예왕은 대량에서 보낸 사절이므로, 대량 영락제의 뜻을 대표했다. 예왕은 몇 마디의 말로 대량의 검은 야심을 드러냈다. 이에 문혜제는 앓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야심을 분명히 알지만, 감히 예왕을 대역무도하다며 잡아들일 수도 없었다. 영락제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제의 병력만으로는 대량에 맞설 방법이 없었다. 진국과 연맹을 결성한 후라면 그나마 힘이 있을 테지만 명제 혼자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위엄을 보일 방법이 없기에 문혜제는 울화가 치밀었다.

“대량이 이런 야심을 가지고 다음으로 뭘 할지 누가 알겠느냐? 너와 심묘의 혼사는 잠시 미루자꾸나. 지금 심신을 건드릴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때 심신이 짐에게 불만을 품으면, 대량에 약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태자는 실망했으나 반대할 수 없었다. 그는 문혜제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지금은 그의 뜻에 따라야 했다.

“저는 급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대국을 우선으로 하소서. 대량이 못된 생각을 숨기고 있던 게 분명해졌으니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태자의 조언에 문혜제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짐도 안다. 그러나 안심하거라. 짐은 결코 자리에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내일 진국 태자와 연맹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진국도 대량의 야심을 알면 반드시 긴장할 게다. 진국과 연맹을 맺으면 대량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때 짐이 직접 성지를 내릴 테니 장군부의 병권과 심가 계집아이는 모두 네 것이 될 것이다.”

문혜제는 심묘를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태자는 미소만 지었다. 그는 문혜제의 심기를 건드린 대량의 예왕을 탓했다. 아주 공교로웠다. 부수의가 좋은 계략을 짜주었는데 예왕의 몇 마디 말로 모든 게 수포가 되었다. 태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 * *

심묘와 태자의 혼사를 잠시 미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송신 공주는 안도했다.

궁중에서 심묘를 만난 날, 송신 공주는 문혜제를 만났다. 심묘를 좋아하는 송신 공주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심묘와 태자를 혼인시키려는 결정을 바꾸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문혜제는 여태 송신 공주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이번에는 “여인은 정무를 이야기할 수 없다.”라고 대로했다. 그러나 곧은 성격의 송신 공주 역시 물러나지 않고 반박했다.

“심묘의 혼사가 왜 조정과 연루됩니까?”

송신 공주는 문혜제와 말다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분노한 문혜제는 그녀에게 출궁하라 ‘명’했다. 그날 밤 송신 공주는 또 한 번 발작한 심장병 때문에 고생을 해야 했다.

다행히 문혜제는 송신 공주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심묘를 여러 번 구해주었으니, 인연이 있다고만 여겼다. 사경행이 심묘를 보호했기 때문에 송신 공주도 그리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송신 공주가 양 고고에게 말했다.

“잘되었다. 나는 이번에는 심묘를 돕지 못했다고 여겨 창피했는데, 지금 잠시 미뤄졌으니 되돌릴 여지가 있다고 알려줄 수 있겠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경행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양 고고는 얼른 공주의 말에 맞장구쳤다.

“소후야께서 공주마마의 고심을 알면 반드시 기뻐하실 겁니다.”

그때 바깥에서 누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시녀가 작은 소리로 고했다.

“마마, 의원의 사람이 약을 보내왔습니다.”

당황한 송신 공주가 물었다.

“이미 약재가 모두 동났다고 하지 않았더냐?”

송신 공주의 약은 찾기 드물고 진귀했다. 그래서 정경성 의원에 있는 약은 공주부에서 거의 다 사들였다. 예전에 사경행이 있을 때는 매년 바깥에서 약을 구해와 송신 공주는 약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경행이 죽자 약이 부족했다. 겨울이 되어 약을 찾기 더 어려웠다. 약을 먹은 지 오래였으니 오늘 약이 준비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녀가 흥분해서 말했다.

“어제 멀리에서 온 상인이 의원에 약재를 팔았다고 합니다. 마침 공주마마의 약재가 있어 의원이 전부 사들였답니다. 의원 말이 내년까지 사용하기 충분하답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양 고고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운이 좋군요.”

그러나 송신 공주는 이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주방으로 보내거라.”

시녀가 주방으로 향하자 송신 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경행이 살아 있을 때 이렇게 약재를 바구니째 보내줬지. 지금은 왜 이게 어려운 일이 됐을까?”

양 고고는 송신 공주가 사경행을 떠올리며 상심하는 것을 보고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한발 늦고 말았다.

“행정원에 가야겠다. 부축해다오.”

송신 공주의 말에 양 고고는 당황했다. 행정원은 공주부의 정원이었다. 옥청 공주가 죽은 이후 송신 공주는 사정에게 분노해서는, 사경행을 한동안 공주부에서 지내게 했다. 송신 공주는 사랑스러운 사경행을 위해 특별히 그가 머물 곳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행정원이었다. 사정이 사경행을 데려간 후에도 송신 공주는 행정원을 없애지 않았다. 사경행이 때때로 공주부에서 지낼 때면 행정원에서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사경행이 죽은 후 송신 공주는 행정원을 봉했다. 매일 청소하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사경행의 물품을 보면 그를 생각할까 걱정해 행정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오랜만에 행정원에 가보려는 것이었다. 양 고고는 걱정스러웠지만, 감히 송신 공주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송신 공주를 부축했다.

“근래 며칠간 무엇 때문인지 늘 꿈에 경행이…….”

송신 공주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양 고고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 말을 아꼈다. 송신 공주는 불안했다. 요 며칠 매일 밤 꿈을 꿨다. 그 꿈에는 자줏빛 의복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그는 얼굴에 반쪽짜리 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자신은 그의 가면을 벗겼다. 그러면 드러난 얼굴이 사경행과 같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송신 공주’라 불렀다. 대량 예왕의 목소리였다.

송신 공주는 매일 등이 땀으로 젖었다. 그녀는 심묘와 예왕의 다툼을 보고 예왕의 아명이 사경행인 것을 알았다. 그런데 밤마다 예왕을 꿈에서 보다니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그녀는 사경행이 유독 많이 떠올라 오늘 행정원에 가보려 한 것이다.

행정원에 도착했다. 행정원 호위는 송신 공주를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송신 공주는 이곳에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었다. 호위가 길을 열자 송신 공주와 양 고고가 들어갔다.

뜰 안은 이전과 같았다. 매일 청소해서 먼지 한 톨도 없이 단정하고 깨끗했다. 행정원에는 사경행이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가지고 놀기 좋아한 물건들이 있었다. 의자에는 사경행의 옛 의복이 걸려 있었다. 송신 공주는 손을 내밀어 의복의 윗면 무늬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겼다. 준수한 소년이 침상에 걸터앉아 무심하게 사과를 먹는 모습을 당장에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과 다름없구나.”

양 고고는 송신 공주가 또다시 상심할까 걱정스러웠다. 적당한 말을 찾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으니 답답했다.

“옷의 금색 수가 참신하네요.”

양 고고가 가까스로 내뱉은 한마디에 송신 공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경행은 어릴 적부터 알록달록한 의상을 입지 않았어. 자주색을 좋아했는데 나는 자주색이 나이 들어 보인다고 싫어했지. 아이가 입기 적합지 않다며 그의 옷에 꽃을 수놓게 했는데, 그 아이는 매우 싫어하더구나. 그래서 나는 금실로 장포 가장자리에 어두운 꽃무늬 수를 놓게 했다. 경행은 그제야 입었지. 화려하지만 반짝이지 않는 것. 못된 생각이 많은 것 같지.”

양 고고도 따라 웃었다.

“소후야는 고귀한 기질이 있고 자색도 고귀한 색이니까요. 마마께서 소후야를 데리고 입궁하면 다들 소후야를 황자로 여기곤 했지요.”

“경행은 황실 사람인 것 같았지. 옥청에게도 그런 기질은 없었어.”

송신 공주도 웃으며 금실로 수놓은 어두운 무늬를 매만졌다. 그러나 곧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무거워졌다.

사경행은 의복에 매우 까탈스러웠다. 게다가 자줏빛 의상을 좋아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나 과한 것은 싫어했다. 그래서 소매 테두리에 어두운색으로 꽃 따위의 화려한 도안을 수놓았다. 아주 가는 비단실로 무늬를 수놓아 유달리 특별해 보였다.

심묘를 끌고 가던 예왕도 자줏빛 장포를 입고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소매는 사경행의 것과 같았다. 송신 공주는 건강은 나쁘지만 시력은 좋았다. 그날 자신은 심묘가 예왕을 사경행이라고 부른 것을 듣고 순간 예왕을 사경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예왕의 태도와 기질은 매우 낯설었다. 게다가 예왕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사경행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이상했다. 공주부로 돌아온 후 사경행과 예왕 두 사람을 자주 생각했다.

계속 예왕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가 그와 사경행의 아명이 같아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전광석화처럼 깨달았다. 아명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예왕의 소매 가장자리였다. 어머니는 자식의 일에 온 마음을 쓴다. 작은 일이라도 그렇다. 사경행을 친아들처럼 여긴 자기 역시 그랬다. 사경행의 소매 무늬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간 그 무늬를 보지 못해 바로 떠올릴 수 없었지만, 오늘 사경행이 입던 옛 의복을 보니 예왕의 자수는 이것과 똑같았다.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일들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곤 한다. 하지만 일단 서막이 오르면 구슬이 꿰어지듯 보이게 되는 법이다. 예왕과 사경행은 똑같은 점들이 많았다. 자줏빛 의상을 좋아하고, 소매에 동일한 무늬가 있었다. 게다가 아명도 ‘경행’이고, 심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

송신 공주는 순간 약재 바구니가 떠올랐다. 줄곧 없던 약재가 어떻게 오늘 나타난 건지 의아했다. 송신 공주는 예왕 앞에서 심장 부근을 짚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상인이 약재를 팔러 왔다.

우연이 너무 많으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의심의 씨앗이 발아하면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의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해 견고한 거목이 된 다음에는 쉬이 베어낼 수 없다. 기질이 변하고 모습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것은 있다. 사소한 습관이나 가족들에게 대하는 반응 같은 것 말이다.

송신 공주는 쪼그리고 앉아 명치 부근을 눌렀다. 이에 양 고고가 놀랐다. 송신 공주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 위로 큰 땀방울이 배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양 고고가 서둘러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빨리 의원을 불러와라! 공주마마의 심장병이 또 도지셨다!”

송신 공주가 급작스럽게 양 고고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이나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서재로 가자.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사실관계를 밝혀야 했다.

* * *

나설안은 심묘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 이후 아주 기뻐하며 궁중에서 태자의 혼사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고 전했다. 심신이 알아보니 예왕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예왕이 문혜제에게 변방의 도성 몇 개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문혜제는 대량의 불순한 의도를 걱정했다. 이렇게 중요한 때 심신이라는 강한 장군을 반드시 자기편에 잡아둬야 하니 심묘와의 혼사로 장군부를 들쑤시지 않을 터였다.

“공교롭게도 대량 예왕 전하가 교교를 한숨 돌리게 해주셨구나. 교교에게 적합한 인재를 천천히 고를 수 있겠다.”

나설안의 말에 심묘는 문혜제가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예왕이 명제를 위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시에 심묘는 사경행의 수완에 놀랐다. 그의 수완은 고명하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쓸모가 대단하다고 칭찬할 만은 했다. 몇 마디 말로 황제가 감히 손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태자는 혼사가 깨지고, 부수의의 계산은 물거품이 되었으니 돌 하나로 새를 몇 마리나 잡은 셈이었다. 심묘는 오랜만에 마음이 후련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심묘는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곤란한 일을 사경행이 손쉽게 풀었으니 그의 말대로 자신의 무능함이 드러난 것과 같았다. 그때, 사경행의 경망스러운 행동이 떠올랐다. 사경행을 때리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심묘야, 너 책은 왜 그렇게 꽉 잡아? 찢어지겠다.”

나담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심묘는 손을 풀었다. 난감했다. 최근 사경행만 생각하면 통제력을 잃었다. 그날 사경행의 행동은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나담이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에, 너 나릉 오라버니, 소 공자, 풍 공자, 세 사람 중 누가 나은지 생각해봤어? 누가 나은지 선택한 거야?”

“언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나담이 뭐라고 하려 할 때, 나릉이 들어 왔다. 나담이 혀를 내밀며 그를 반겼다.

“오라버니.”

나릉이 웃었다.

“너희 여기서 무슨 이야기해?”

“심묘의 혼사. 심묘가 누구에게 시집갈지 정하지 않아서 알아보러 온 거야.”

심묘는 당혹스러웠다. 나담은 나릉이 앞에 있는데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심묘가 보통 여자아이였다면 부끄러워 죽으려 했을 것이다. 심묘가 반응이 없자 나릉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두어 번 헛기침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심묘에게 물었다.

“심묘야, 장신구는 마음에 들었어?”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장신구?”

“내가 어제…….”

당황한 나릉이 말을 끝내기 전에 바깥 하인이 심묘를 불렀다. 하인은 심묘에게 전당으로 오라는 나설안의 말을 전했다. 나릉은 하던 말을 삼키고 미소 지으며 심묘를 보냈다. 심묘는 그에게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

“좀 이따 내가 오라버니를 보러 갈게.”

전당에 도착하니 공주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신 공주가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그녀는 심묘에게 공주부를 방문하길 청했다. 송신 공주는 몇 번이나 심묘를 도와주었기에 심신 부부는 그녀의 초대를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에 심묘도 웃으며 초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무거웠다.

예전 같았다면 송신 공주의 초대장을 주저 없이 받았을 것이다. 사경행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어쨌든 송신 공주는 자신을 잘 돌봐주었으니까. 자신이 태자와 혼인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문혜제까지 만났다는 얘기에는 제아무리 냉정한 자신이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송신 공주는 초대장을 보냈다. 태자의 일이라면 편지나 말을 전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일이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심묘는 어떤 중요한 일이기에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송신 공주가 자신을 초청했을지 불안했다. 송신 공주가 궁중에서 자신과 사경행을 본 일이 심장을 엇박자로 뛰게 했다. 그때 급한 대로 변명을 하긴 했지만, 잘 넘겼다는 자신은 없었다. 그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깊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겉모습이 좀 변했다 해도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직감은 줄곧 정확했다. 그러나 도피는 방법이 아니었다. 도피해도 말썽은 끝내 찾아오기 마련이니까. 심묘는 송신 공주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초대장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거절도 그녀의 의심을 인정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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