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나설안은 큰 선물을 준비해 심묘가 공주부로 가져가도록 했다. 송신 공주는 심묘를 여러 번 도왔기에 나설안은 송신 공주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심구는 의외의 일이 생기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심묘에게 많은 호위를 붙였다. 아지와 모경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나 심묘의 표정은 홀가분하지 않았다. 심묘가 안전 때문에 걱정한다고 여긴 경칩과 곡우는 그녀를 오랫동안 위로했다.
그러나 심묘는 그녀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송신 공주의 말에 어떻게 응답할지 내내 고민했다. 이번 방문으로 의심을 반드시 없애야 했다. 그러나 송신 공주는 신중한 사람이기에 속이기 어려울 것이었다. 심묘는 머리가 아팠다.
경칩이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웃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 진지하게 하세요? 아가씨의 이런 모습을 오래 보지 못했네요.”
순간 심묘는 당황했다. 자신은 전생에서 알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행동했기에 이번 생은 그 나름대로 순조롭게 흘러왔다. 나설안, 심신, 심구의 일을 처리하면서 그렇게 곤란한 적은 없었다. 류형과 배랑의 일도 자신의 이익에 초점을 두고 진행했다. 다른 사람의 일은 자신과 딱히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경행을 위해 온갖 구실을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그와 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그를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심묘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스로가 고집스러운 만큼, 이번 일 역시 모두 사경행이 만든 말썽이니 그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면에, 그 홀로 힘든 일을 처리하게 두는 건 안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경행이 대량 예왕의 신분으로 송신 공주의 앞에 나타나는 건 두 사람에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심묘가 아직 대책을 생각하지 못했으나 마차는 공주부 입구에 도착했다. 심묘를 알고 있던 공주부 하인들이 공손히 그녀를 맞이했다. 심묘는 모경들에게 송신 공주에게 줄 선물을 창고로 옮기는 걸 돕게 했다.
송신 공주는 평소 행동이 소극적이라 조정에서 영향력이 그리 없었다. 황친의 거처답게 넓고 웅장했으나 홀로 살고 있는 송신 공주는 부를 꾸미는 일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못해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있던 송신 공주는 심묘가 온 것을 보고 음료 한 잔을 건넸다. 송신 공주가 웃었다.
“새로 온 요리사가 간식을 잘하는데 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궁중에서 먹는 것보다 좋던데, 너도 먹어보렴.”
심묘는 송신 공주에게 감사를 표하고 한 모금 마셨다. 사실 심묘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심묘는 음료를 마시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송신 공주는 궁중에서 만났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 보였다. 혈색도 좋았고, 기분도 좋은 듯 웃고 있었다.
“공주마마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신 듯 보이네요.”
“근래 우연히 의원에서 진귀한 약재를 구입해서 매일 약을 달여 먹고 있단다. 매일 마시는데 몸이 나빠지면 이상하지. 정말 행운이야. 약재를 찾기 쉽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구했구나.”
심묘는 송신 공주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송신 공주는 자신의 일을 시시콜콜 모두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묘는 오늘 송신 공주가 사경행의 일을 물을 거라 여겼지만, 송신 공주는 그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송신 공주는 화제를 돌려 문혜제가 심묘의 혼사를 미룬 것을 이야기했다.
“폐하는 널 며느리로 삼고 싶으신 것 같았다. 타당치 않다고 여겨서 폐하께 그 생각을 거두어주시길 요청했으나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셨지. 하지만 예왕 전하 덕분에 숨을 좀 돌렸구나. 심 장군이 이미 알아보았을 테니 너도 알고 있겠지.”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예왕 얘기가 나오니 경계심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대량이 명제에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단다. 예왕 전하께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전하가 아니었다면 폐하는 생각을 바꾸시지 않았을 테고, 네 혼사도 이렇게 미뤄지지 않았을 테니.”
심묘는 조용히 있었다. 이럴 때 많은 말은 일을 망칠 가능성이 있었다. 송신 공주가 갑자기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난번 나는 너와 대량 예왕 전하의 관계가 깊지 않은가 싶었다. 나는 아무래도 너보다 나이가 많아 사람을 보는 눈이 좋단다. 예왕 전하의 신분은 특별하니 나는 네가 안 좋은 꾐에 빠지지 않았나 싶었다. 그런데 전하는 의리 있는 분인 듯하구나. 결정적인 시기에 그런 말을 해주셨으니. 내 생각이 잘못되었던 모양이야.”
송신 공주는 예왕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심묘는 당황을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소녀는 하찮은 사람이라 예왕 전하와 감히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예왕 전하께서 소녀를 위해 나서셨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심묘는 완곡하게 예왕과의 친밀한 관계를 부인했다.
“네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안다. 바깥에 말하지 않으마.”
송신 공주의 오늘 행동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심묘가 말하기도 전에 송신 공주는 화제를 돌려 다른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심묘에게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오래 했다. 분명 예왕의 이야기를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화제를 돌려 나설안이 심묘에게 적합한 공자를 찾았는지 물었다.
정오에 시작된 이야기는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공처럼 여기저기로 튀며 계속되었다. 송신 공주는 심묘를 부로 돌려보낼 뜻이 없는 것 같았다. 심묘는 그녀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어 당혹스러웠다.
시간이 지체되자 경칩과 곡우는 점차 초조해졌다. 길이 잘 보이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빨리 장군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공주부였다. 송신 공주가 심묘를 보내려 하지 않는데 하인들이 나서서 말할 수는 없었다.
차를 다 마시자 송신 공주가 일어났다. 이에 경칩과 곡우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장군부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송신 공주가 심묘의 손을 잡았다.
“나와 뜰을 돌자꾸나.”
경칩과 곡우가 입을 벌렸다. 송신 공주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했으니 매일 자신의 뜰을 걸을 터였다. 그런데 심묘를 손님으로 불러놓고 뜰을 걷자니 이상했다. 게다가 어둡고 추운데 뜰을 구경하자니 그녀들은 심묘가 감기에라도 걸릴까 걱정스러웠다.
심묘는 송신 공주가 이제 본심을 드러낼 작정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뜰로 나가자는 건 절대 자신과 소소한 이야기나 더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뜰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제안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송신 공주는 심묘를 데리고 ‘뜰’을 걸었다. 어두운 밤, 입구에는 등롱도 걸리지 않아 편액의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송신 공주가 한 손으로 심묘를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웃었다.
“이곳은 행정원이라고 한단다.”
심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는 송신 공주가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송신 공주는 안으로 들어가 작은 진열품들을 어루만졌다.
“이곳은 경행이 살던 곳이란다.”
뒤따라오던 경칩과 곡우가 이 말을 듣고 의아했다.
“경행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지. 나는 그가 어린 나이에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된 게 가여웠단다. 또 임안후가 후원 관리를 잘못한 것에 분노하기도 했지. 옥청 공주는 팔자가 사나워 질투가 심한 부인이라는 악명까지 얻었다. 당시 틈을 보여 옥청은 떳떳하게 방 씨와 맞설 수 없었단다. 그랬다면 옥청은 지하에서도 나쁜 평판을 얻었을 게다. 나는 방 씨가 악랄한 수단을 쓸까 걱정해서 경행을 공주부로 데려와 길렀다. 경행은 장난기가 심하긴 해도 나를 잘 따랐다. 나는 자식이 없어 경행을 계속 키워도 좋다고 여겼지. 그 후 경행을 위해 이곳 행정원을 만들었단다.”
송신 공주는 예전 기억을 더듬으며 탄식했다. 그녀의 말에 심묘는 뜰 안을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심묘 자신은 운이 좋아 양친이 모두 계시고 그들은 자신을 매우 아꼈다. 심가 이방과 삼방의 이간질로 소원해진 때도 있었지만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어머니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명제의 가짜 신분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순탄하지 않은 배역을 맡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경행을 잘 키웠다고 생각한다. 임안후가 경행을 돌려받기 위해 여러 번 오고 폐하께 부탁까지 했지만 나는 돌려보내지 않았지. 하지만 방 씨가 둘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엔 경행을 돌려보냈단다. 넌 내가 그리한 이유를 알겠느냐?”
송신 공주가 몸을 돌려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사 소후야는 임안후부의 적자니, 임안후는 소후야가 상속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후야가 계속 공주부에 머물렀다면 방 씨와 사가 두 서자 형제의 손에 임안후부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심묘의 말에 송신 공주는 빙긋 웃었다.
“나는 네가 이해할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네 나이 때라면 절대 생각 못 했을 게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어린 나이의 아가씨는 당연히 자식을 낳지 않으니 아이를 위한 계획이란 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 멀리 볼 일이 없다. 그러나 심묘는 두 아이를 낳은 여인이니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완유와 부명이 사경행과 같은 처지였다면 자신 역시 자식들을 돌려보낼 것이다. 자식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이익을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경행은 돌아갔으나, 우리 사이는 여전히 좋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나는 경행이 임안후와 잘 지내며 선동당해 나와 옥청을 원망할까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경행과 임안후의 감정은 줄곧 좋지 않았단다. 임안후가 어떻게 하든 경행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 때때로 부자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 어떻게 두 사람을 보고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겠느냐?”
심묘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송신 공주의 말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경행은 임안후와 부자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옥청과도 닮지 않았다. 임안후는 용맹한 장수라지만, 집안일에는 우유부단해서 일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한 방 씨의 계략에 당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나 옥청은 바보라 온 마음을 남자에게 주었지. 결국 옥청이 죽고 나서, 이유 없이 아이가 고통을 받게 되었구나.”
송신 공주는 작은 거울을 가져와 들여다보았다.
“경행과 그들 두 형제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경행은 장난이 심하지만 일 처리는 아주 과감하지. 경행이 가진 보검을 그의 친한 친구가 마음에 들어 하자 그는 친구의 거울이 마음에 든다며 보검과 교환했다는구나. 나는 경행에게 거울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거짓말을 한 건지 물었다. 경행은 그 보검이 싫어서라고 답했어. 그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원치 않는 게 무엇인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원치 않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은 단단히 손에 움켜쥐었지. 미남이라 아가씨들이 따랐지만, 경행은 어떤 아가씨에게도 특별한 표현을 한 적 없었다. 경행은 사실 누구보다 냉담하단다.”
긴말을 마친 송신 공주가 심묘를 주시했다. 순간 심묘는 송신 공주와 사경행이 비슷하다 느꼈다.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하면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사람을 제압하는 위엄이 나이든 공주의 온몸에서 풍겼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경행은 임안후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 같구나. 그래서 처음부터 임안후에게 아무런 정이 없던 것이다. 나는 줄곧 내가 경행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역시 틀렸다. 사실 나도 경행에게 불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송신 공주는 심묘에게 물어보았다. 경칩과 곡우는 양 고고에게 끌려나갔기에 방에는 심묘와 송신 공주밖에 없었다.
“소후야는 공주마마를 마음에 뒀습니다.”
“심묘, 나는 네가 총명하고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걸 안다. 그러니 나를 속일 필요 없다. 경행이 정말 나를 마음에 뒀다면 왜 가짜 죽음으로 나를 속였을까? 왜 내가 편안히 잠들지도 못할 만큼 고통스럽고 불안해하는 걸 지켜만 봤지? 분명 모든 것을 결정한 후 내 진심과 신뢰를 속였다. 눈앞에 두고도 모르는 척, 졸렬한 구실로 얼버무렸다. 말해 보거라. 이게 나를 마음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냐?”
송신 공주는 분노한 듯 캐물었다. 심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신 공주의 말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많은 일의 결과를 알지만 말할 수 없었다. 송신 공주가 어떤 증좌를 들이대도 마찬가지였다. 명제의 공주가 사경행이 대량의 예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국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에게 큰 말썽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러니 말할 수 없었다. 송신 공주가 이미 모두 다 확신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소녀는 공주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심묘의 대답에 송신 공주가 비웃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전까지의 온화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시선은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마주하는, 개미같이 작은 목숨을 굽어보는 표정이었다. 황실 사람이 가장 자주 보이는 표정이었다. 심묘는 순간 혐오감이 솟았다. 송신 공주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뼛속 깊이 흐르는 황실의 피를 혐오했다. 송신 공주가 아무리 다르게 행동해도 황실 사람이라는 본질은 같았다.
“넌 황실을 속이면 무슨 죄명인지 아느냐?”
“황제를 기만한 죄입니다.”
“그렇다. 너는 적과 내통하고 나라를 배반하고, 황제를 기만했다. 따라서 장군부의 재산을 몰수하고 구족을 멸할 수 있다. 심만의 일을 너도 보았을 게다.”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관을 보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구나.”
송신 공주의 말에서 뼈에 사무치는 냉기가 스쳤다.
“널 죽이는 건 쉬운 일이다. 오늘 네 대답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폐하께 고할 것이고, 너희 장군부에는 치명적 재난이 닥칠 것이다. 네 부모와 오라비가 목숨으로 배상할 테지.”
심묘는 여전히 침묵했다.
“기회를 줄 때 말하거라. 예왕은 전사한 사경행이지?”
“아뇨.”
심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송신 공주 자신의 위협은 모두 그녀에게 있어 무색무취의 연기인 듯싶었다. 흩날려 사라지니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 송신 공주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심묘, 나는 장군부에 죄를 물을 것이다.”
“어떤 일이든 증좌가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면 증좌 없이 처벌할 수도 있다.”
심묘는 하마터면 냉소할 뻔했다. 황실 사람은 이렇게 뻔뻔하고 강력했다. 가장 공정해 보이는 송신 공주도 자신이 알고 싶은 일에선 황권의 패권으로 사람을 괴롭혔고,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다시 물으마. 예왕은 사경행이지?”
“아뇨.”
송신 공주는 분개했다. 평소 자신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도 태연하며 침착한 심묘를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적이 되자 어찌해도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평범한 아가씨라면 까무러치게 놀랄 일인데도 심묘는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송신 공주의 안색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봐라. 심묘를 잡아라.”
그때, 그림자가 빠르게 들어왔다. 행정원은 입구 외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어 그는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뒤쪽 창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어두운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장포 가장자리에는 금실로 수가 놓여 있었는데 송신 공주에게 익숙한 도안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심묘의 앞으로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으며 걸어갔다. 이곳이 그의 관저인 듯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송신 공주 앞에 선 그가 말했다.
“심묘는 담이 작으니, 용 이모는 너무 다그치지 마십시오.”
송신 공주는 입을 다물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용 이모’라 불린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릴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넓다고 할 수 없는 방 안의 등불이 작게 흔들렸다. 반쪽짜리 은 가면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다. 웃음기를 드러낸 붉은 입술에서는 온화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심묘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정체를 밝힐 수 없으니 자신이 대신 그를 보호하고 있었건만, 그는 공주부에 출현해 송신 공주의 앞에 섰다. 북부 변방에서 죽은 사경행이 나타나면 명제에 큰 분란이 일어날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예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에게 척후니 첩자니, 각양각색의 죄명을 붙일 수 있었다.
송신 공주가 비틀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나를 뭐라고 불렀지?”
예왕이 느리게 손을 뻗어 가면을 어루만지더니 가면을 벗었다.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유일무이한 절색의 미모. 빛을 머금은 아름다운 눈은 멋스러웠고 입가에는 담담하게 냉소를 띠고 있었다. 드러내놓고 풍류를 자랑하던 눈부시게 준수한 소년과는 달랐다. 그러나 소년 시절의 도도하던 그림자를 은은하게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대단히 위험한 분위기가 더해졌다는 것도. 사경행은 다시 가면을 썼다. 그리고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잘 지내셨나요? 용 이모.”
오랫동안 멍하니 서 있던 송신 공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시선이 위아래로 그를 살폈다.
“내가 널 예왕이라 불러야 하니, 아니면 사경행이라고 해야 하니?”
방어의 기색이 여실히 드러난 송신 공주의 서먹한 말에 심묘는 놀랐다. 심묘도 송신 공주와 사경행의 만남을 상상하곤 했으나 지금과 같은 모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혈육의 정은 없는 것이 되었다 해도, 송신 공주가 이 순간 적의를 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모의 뜻대로 부르시죠.”
“약재는 네가 보낸 것이냐?”
사경행은 웃기만 했다. 송신 공주도 웃었다.
“대량 예왕 전하의 물건을 감히 공짜로 받을 수는 없지요. 약재의 가격이 상당할 터이니 사람을 통해 은자를 예왕부로 보내겠습니다. 고맙군요.”
“괜찮습니다.”
“예왕 전하가 이곳에 오신 건…….”
송신 공주는 예의 바른 태도였다. 경계심이 가득하여 결코 죽었다 살아난 ‘아들’을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생소한 사람을 마주한 듯했고, 두 사람이 원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경행이 심묘를 향해 눈빛을 보냈다.
“심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공주마마께서 의혹이 있다면 직접 내게 물어보십시오. 심묘를 난처하게 하지 말고.”
“제가 감히 심묘를 난처하게 할까 그러십니까?”
송신 공주는 냉소했다. 그러나 많은 감정이 섞인 것 같았다.
“난처하게 하지 않으면 됐습니다.”
사경행이 걸어와 심묘의 어깨를 껴안았다. 심묘의 난처한 표정은 고려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오늘 일은 다음에 제가 직접 방문해 설명하겠습니다. 공주마마께서 제게 불만이나 오해가 있대도 타인을 연루시키지 마십시오. 예왕부는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웃으며 말한 사경행은 송신 공주의 반응을 보지 않고 심묘를 데리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심묘는 사경행의 행동에 놀라 공주부를 나오면서도 멍한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경행이 이렇게 대놓고 나타난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송신 공주 앞에서 신분을 분명히 밝혔다. 사경행과 송신 공주는 모자 같은 정이 있었으나 이는 그의 신분을 모를 때였다. 사경행은 지금 대량 사람이었다. 나라와 신분이 달라짐으로써 많은 일이 변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미묘했다.
심묘는 사경행을 본 송신 공주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심묘는 송신 공주가 신경질적으로 분노하며 캐묻거나 울며 고통스러워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송신 공주가 처음 드러낸 것은 방어였다. 송신 공주는 차가운 조소로 신랄하게 풍자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탐색하기만 했다. 난처함을 숨기며 거리를 유지했다. 심묘는 송신 공주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원치 않는 게 무엇인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원치 않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원하는 것은 단단히 손에 움켜쥐었지. 미남이라 아가씨들이 따랐지만, 경행은 어떤 아가씨에게도 특별한 표현을 한 적 없었다. 경행은 사실 누구보다 냉담하단다.”
사경행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기에 어릴 적부터 혈육의 정을 ‘원치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실은 원치 않는 게 아니라 가질 수 없던 것이었다. 그가 원해도 언젠가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가족이 적으로 변하고, 자애는 경계로 변할 터였다. 그러니 처음부터 누구도 자신의 사람으로 여길 수 없던 것이었다.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심묘는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밤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사경행은 심묘를 데리고 공주부 밖으로 나왔다. 장군부 마차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묘가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사경행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경과 아지는 심묘가 갑자기 부 입구에 나타나자 놀라 물었다.
“아가씨, 어떻게 혼자 나오셨나요? 다른 사람은요?”
그때 경칩과 곡우가 숨 가쁘게 달려 나왔다. 그녀들은 심묘를 본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데 양 고고가 아가씨가 떠나셨다 해서 당황했습니다. 방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달려왔는데 정말 아가씨가 여기 계셨네요. 저희가 문밖을 지키고 있었는데 아가씨가 나온 것을 보지 못했어요. 기이합니다. 혹시 공주부에 비밀 통로라도 있는 걸까요?”
경칩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곡우가 가볍게 기침하며 그녀에게 허튼소리 하지 말라 일깨웠다. 진짜 비밀 통로가 있다면 그것은 공주부의 비밀이었으니 함부로 자신들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경칩이 혀를 내밀었다.
심묘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무겁자 경칩이 작게 물었다.
“공주마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는데…… 아가씨, 공주마마와 말다툼을 하셨나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심묘는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자.”
일단 돌아가 마저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 발생한 모든 일은 모두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심묘는 마차 발을 들어 고개를 내밀어 둘러보았다. 달빛도 없는 새까만 밤. 어둠에 모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가볍게 탄식했다.
공주부에서 멀지 않은 한쪽 구석, 사경행이 묵묵히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부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보기 드물게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언젠가 올 날이었어.”
고양의 물음에 사경행이 무심하게 답했다.
“섭섭하지 않아?”
사경행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가면이 그의 표정을 가렸으나 고양은 무정한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인연이 끝났을 뿐이야.”
고양은 한참 후 사경행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때 공주부의 대문이 열렸다. 광주리를 들고나온 시녀가 안에 든 물건을 쏟아냈다. 광주리도 같이 바닥에 던진 후 그녀가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약방에 가져다 팔면 값이 상당할 텐데. 이렇게 버리다니 너무 아깝다.”
다른 시녀가 그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 물건에 독이 있을지 누가 알아? 독이 있으면 말썽만 불러올 거야. 됐어, 보지 말고 가자.”
두 시녀가 공주부로 돌아가자 광주리 하나만 외롭게 남았다. 의원이 ‘대단히 우연하게 사들여’ 보내온 송신 공주의 약재였다. 그 귀중한 약재는 낡은 신발처럼 버려지고 ‘독’이 있을 수 있다는 혐의까지 덮어썼다.
고양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심혈을 기울인 것이 모욕당했으니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도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고양이 몇 마디 달래는 말을 하기도 전에 사경행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침착하게 걸어가는 사경행의 뒷모습은 어두운 밤도 모두 덮을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은 적막했다.
심묘가 장군부로 돌아오자 심신 부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운데도 심묘가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 거라 여겨 걱정하던 차였다. 그들은 그녀가 탈 없이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묘는 피곤해 일찍 쉬고 싶다 하자 그들은 그녀를 더 붙잡지 않고 얼른 보내주었다.
방으로 돌아온 심묘는 경칩과 곡우를 나가게 한 후, 탁자에 앉았다. 심묘는 불안했다. 사경행이 공주부에 나타나 송신 공주 앞에서 신분을 폭로한 일은 과한 결정이었다. 사경행은 과감했지만 정도가 지나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송신 공주가 장군부에 해코지하지 않도록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 외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곤란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말을 심하게 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었다.
심묘는 송신 공주와 사경행 사이 감정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경행의 신분을 알고 난 송신 공주가 보인 반응은 겨울 화원의 돌난간처럼 차가웠다. 사경행은 무심하게 대응했으나, 자신은 애정을 준 사람이 상처를 줄 때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
전생에 자신이 좋아한 부수의나 심가 이방, 삼방은 냉혹했다. 자신이 따뜻한 정을 보이려 할 때 도리어 비꼬기도 했다. 임안후 사정에 대해서는 사경행 역시 마음에 두지 않았을 테지만 송신 공주는 달랐다. 사경행은 처음 만든 호두환을 송신 공주에게 선물했다. 게다가 그녀가 심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는 사람을 시켜 약재를 찾게 했다. 이는 애정이 없으면 하지 못할 일이었다.
심묘는 초조한 듯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간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하늘은 먹물을 뿌린 듯 어두웠다. 겨울밤 정경성은 적막하며 쓸쓸했다. 잠시 생각한 심묘는 두툼한 짙은 홍색 비단 피풍의를 몸에 걸쳤다. 피풍의를 단단히 여미고 창가에 다가가 종양을 불렀다.
“종양.”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종양이 심묘의 앞에 공손히 서 있었다.
“소부인, 무슨 분부 있으십니까?”
심묘는 종양이 자신에게 어떤 호칭을 쓰는지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날 사경행에게 데려가 줘요.”
종양이 입을 크게 벌리고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종양은 엄숙하게 생긴 데다 평소 표정도 단정해서, 심묘는 지금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는 한편 왠지 창피함이 들어 괜스레 화를 냈다.
“방법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정신을 차린 종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소부인, 저는 지금 주인께서 어디 계시는지 모릅니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종양은 매일 장군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니 사경행의 행방을 모를 만도 했다. 공주부에서 나오자마자 사경행은 빠르게 가버려서 자신 또한 그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왠지 사경행이 예왕부에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기분을 가면 아래 숨기는 것에 익숙했다. 그러니 그는 실의에 빠지면 동굴에 들어가듯 혼자 있을 것 같았다.
“날 데리고 예왕부로 가요.”
종양이 난색을 드러내자,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도 못 하는 거예요?”
종양이 얼른 설명했다.
“저 혼자면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소부인을 데리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공을 할 줄 몰라요?”
종양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됐네요. 날 안고 예왕부로 가요.”
심묘는 사경행이 한 것처럼 종양도 하면 된다고 여겼다. 종양은 사경행의 사람이니 모경을 부르는 것보다 수월했다. 게다가 사경행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느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많은 사람이 알수록 위험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이어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종양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두려운 기색이었다.
“안 됩니다.”
“또 왜요?”
심묘는 인내심이 바닥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남녀가 가까울 수 없습니다.”
심묘는 어이가 없었다. 사경행이 어디서 찾은 호위길래 이렇게 규칙이 많은 것인지 황당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종양이 자신을 데리고 예왕부에 가줄 생각이 없어 보이니 몹시 곤란했다. 그의 경공을 사용하지 못하면 자신은 장군부 대문으로 나가야 했다. 대문은 심신의 병사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몰래 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한밤중에 외출하면 가족들이 전부 놀라 깨어날 터였다. 심묘는 머리가 아팠다.
뜰의 한쪽 벽을 바라보던 심묘에게 좋은 생각이 났다. 사경행은 예왕부와 장군부 사이 인접한 모든 주택을 사들였다. 그러니 좋게 말하면 예왕부는 장군부의 이웃집이었다. 사경행이 머무는 관저는 조금 먼 이웃일 뿐이었다. 심묘의 시선이 뜰 안 높은 담 위로 떨어졌다.
“담을 넘지요.”
종양이 당황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들은 바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심묘의 안전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아 장군부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그래서 심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심묘는 단정하며 진중했다. 게다가 규칙을 준수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인내심이 깊어 궁중에서 나온 귀인처럼 보였다.
아주 평범한 동작에도 교양이 드러나니 평소 그녀가 천성적으로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고귀한 소부인이 담을 넘으려 하다니 종양은 자신의 귀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그때 심묘가 눈을 부릅뜨며 위협했다.
“내 말 안 들려요?”
“네네네!”
놀란 종양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감히 소부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담을 넘으며 종양은 고통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에게 담을 넘으라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는 자신더러 계단을 만들라는 뜻이었다.
종양은 볏짚을 훔쳐 계단을 만들었다. 문제는 예왕부와 장군부 사이 주택이 열 몇 채나 족히 된다는 것이었다. 종양은 바삐 움직였다. 추운 날씨에도 온몸이 땀에 절었다. 심묘는 구중궁궐의 높은 층계를 오르듯 우아하게 볏짚 계단을 밟았다.
종양은 탄식하며 자신의 박복한 운명에 눈물지었다. 소부인의 몸을 더럽혔다고 사경행이 화를 낼까 두렵지 않았다면 구태여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처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은 일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자신의 경공은 뛰어났다. 지금처럼 땀 흘리며 계단을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경행에게 선택받은 날, 동료들은 일제히 이쪽의 행운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자신도 좋은 운수가 이렇게 고된 노동으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다. 남종만도 못한 일에 마음속에서는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심묘가 마지막 담을 넘었다. 예왕부에 도착한 것이다. 관저는 소문처럼 화려하고 웅장했다. 임시로 거주하는 곳을 이렇게 정교하게 보수하다니 대량의 황궁은 얼마나 풍채가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종양은 피곤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의문이 들어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정문이 아닌 후원 방향으로 들어온 까닭도 있었지만, 어쨌든 호위가 하나도 없다니 이상했다. 이전에는 이렇게 호위가 없지 않았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철의. 다른 사람들은?”
종양은 그를 철의라고 불렀다. 철의는 심묘를 보고 당황하다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심 소저, 어떤 급한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심묘는 철의가 자신을 아는 듯하고, 종양과도 친분이 있는 것 같자 사경행의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할 말이 있어 예왕 전하를 찾아왔어요.”
철의는 그녀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은 후원에 계십니다. 저랑 가시지요.”
찬 바람이 불었다. 추운 겨울날, 사람들은 바깥을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밤에는 더욱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고양이나 개도 따뜻한 곳을 찾아 그곳에 웅크리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은 이미 두껍게 얼었다. 여름날 비단잉어가 노니던 연못은 희뿌옜다. 좋은 시절은 지나간 듯했다. 봄날 피어났던 꽃도 말라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경행은 두 손으로 머리를 베고 나무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가면도 벗지 않은 채였다. 나무 위에 걸린 등롱이 희미하게 빛을 내뿜었다. 그의 표정은 풍경만큼 적막하지는 않았지만 즐겁다 할 수도 없었다.
예왕부의 후원은 고요했다. 나무 아래 백호가 엎드린 채 발톱으로 나무둥치를 긁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얼음을 깨물어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청년과 백호가 함께 있는 광경을 본 심묘는 전생이 떠올랐다. 한밤중에 부수의와 미 부인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궁중 화원을 거닐곤 했었다. 당시 자신은 고독함에 괴로워했었다.
누가 온 것을 본 백호는 경계 태세에 들어가 심묘를 노려보았다.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백호가 아직 다 크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백호가 어흥 소리를 내자 사경행이 백호를 얼렀다.
“쉬, 교교. 조용히 해.”
심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나무 아래로 걸어가 사경행을 올려다보았다.
“누굴 부르는 거예요?”
사경행이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사경행이 물었다.
“어떻게 온 거지?”
“공주부에서 있던 일 때문에 보러 온 거예요.”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날 걱정해서 온 거야?”
“왜 당신을 걱정해요?”
“설마 내가 상심할 거라 여긴 거야?”
사경행은 웃긴 이야기를 들은 듯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정말 순진하군.”
“아니면 됐구요.”
사경행의 비꼬는 말에도 심묘는 평온했다. 사경행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 난 괜찮아.”
그러나 심묘는 돌아가지 않았다. 백호는 심묘에게 악의가 없다고 느낀 듯했다. 게다가 사경행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자 경계심을 풀며 심묘 옆에 기대어 어흥! 연달아 울었다.
심묘가 조용히 나무 위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 명제를 멸망시킬 거예요?”
주변이 고요해졌다. 어두워서 사경행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보여도 가면 때문에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자줏빛 장포 소매에 금실로 수놓인 도안이 야수 혹은 용 같았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사경행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료해진 백호가 작게 울며 덤불 안으로 달려갔다. 나무에 기댄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명제를 멸망시킬 거라면 모든 사람을 버릴 수 있겠죠. 어차피 서로 다른 길을 가는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경행이 피식 웃었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위로하는 거냐?”
“아뇨, 전 저를 위로하는 거예요.”
심묘와 사경행은 아무래도 달랐다. 사경행은 남자며 과감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심묘는 오늘밤이 지나면 다시 자신에 찬 사경행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에게 어려움은 없으며 그의 걸음을 막을 것도 없었다. 그는 사자처럼 강력한 존재라 홀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었다. 조금 고독할 때 자신과 만났을 뿐이다.
“너도 상심하는 일이 있나?”
사경행이 귀찮다는 말투로 비웃었다. 그러나 심묘는 사경행의 눈빛에 웃음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자신의 기분을 전부 다 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경행은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가면도 벗지 않았다. 심묘는 미소 지었다.
“내가 상심하는 일도 당신의 일 못지않아요. 적어도 송신 공주마마는 아직 살아 계시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일은 오해를 풀 사람이 살아 있지 않는다는 거예요. 실수를 만회할 수 없을 때도 있지요.”
심묘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으나 완유와 부명, 이 둘은 구할 수 없었다. 영원히 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큰 원한을 갚든, 장군부가 번창하든 이 유감스러운 운명은 구원할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것조차 지나친 바람이었다.
“당신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았을 텐데 왜 그리 걱정하나요?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이미 인의를 다했으니 인연이 다한 것일 테죠. 평생 한길을 가는 사람은 없어요. 부수의도 태자도 저와 같은 길을 걷는 게 아니에요. 황보호도 아니고, 풍자현도 아니며, 나릉도 아니고, 배랑도 아닙니다.”
부수의와 태자는 황실 사람으로 심묘의 원수였다. 당연히 자신과 한길을 가는 건 불가능했다. 황보호는 꿍꿍이를 품고 있고, 풍자현은 온실 안에서 자란 화초와 같으니 자신과 뼛속부터 달랐다. 정직한 나릉이 자신의 음험한 계략을 이해해줄 리 없었다. 배랑은 복잡했다. 전생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을 망쳤으니 자신과의 사이에는 영원히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있는 셈이었다.
“네 말에 따르면 세상에 너와 한길을 가는 사람은 없구나.”
“사실 그래요.”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속으로 탄식했다.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귀신이었다. 복수의 길에서 홀로 쓸쓸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터였다. 사경행이 살짝 웃었다.
“네가 이렇게 날 위로하니 난 착각을 하게 되는구나. 너와 내가 한길을 걷는 것 같다는.”
바람이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말아 올렸다. 연못에도 바람이 불었지만, 바위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연못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희미하게 산들바람이 불어와 물보라가 사방으로 넘실거리는 풍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봄날, 물결이 아름답게 반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니까.
심묘의 가벼운 목소리가 밤바람보다 가볍게 공중으로 가득 흩어졌다.
“누가 아니랍니까?”
나무 그림자가 흔들렸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경행의 뒷모습은 굳세고 수려했다. 백호가 주인이 내려온 것을 보고 기뻐 달려와 사경행의 옷자락에 몸을 비볐다.
“넌 내가 대량 예왕 같으냐, 아니면 임안후부의 후예 같으냐?”
심묘는 나무에 기대 양손을 몸 뒤로 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게 중요한가요?”
호숫가에 선 사경행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무런 심경의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게 그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계속 깨우치는 사람이 있었다. 임안후는 연약하고 무능하며 우유부단하니 아버지의 자격이 없었다. 진정한 사 소후야는 단명하지 않았다면 방 씨 손에 죽었을 것이다. 용 이모는 내게 아주 잘 해주었다. 내 신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해도 그녀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세상 사람에게 이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요했다. 요행은 없었구나.”
사경행은 가족의 정이 신분의 속박을 부술 수 있고 어떤 것보다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가족에게서 매섭게 뺨을 맞았다. 별 내색은 안 해도 깊이 실망했을 것이다. 심묘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제게는 중요치 않아요.”
사경행이 가볍게 웃으며 심묘에게 다가왔다. 그는 심묘를 굽어보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당신은 사경행일 뿐이에요.”
그녀는 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세에 지고 싶지 않았다.
“단지?”
사경행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전 못 속여요.”
심묘는 그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우리의 동맹이 끝나고 나서도 당신은 사경행일 뿐이에요.”
사경행이 의미심장하게 ‘오’ 하고 감탄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심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나무에 기대고 있던 터라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사경행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넌 내가 잔인하다 느끼지 않느냐?”
“아뇨, 저도 같은걸요.”
“그럼 넌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걸 아느냐?”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심묘는 움츠렸다.
“알아요, 저도 같은걸요.”
사경행이 심묘의 허리를 받쳐 품에 가까이 끌어당겼다.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유혹적이고 신비로웠다.
“그럼 네 질문에 지금 대답하마. 너는 내가 명제를 멸망시킬 것인지 물었지.”
심묘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의 아름다운 눈에 밝은 빛이 스쳤다. 눈빛이 깊어서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데요?”
“내가 그럴 거라 하면 너는 날 밀고할 테냐?”
사경행이 사악하게 웃었다.
“아뇨. 저도 같은걸요.”
느리게 말하는 심묘의 말에 사경행의 눈빛이 변했다. 찬 얼음 속에 불꽃이 가득 피어나고 있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기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넌 네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아느냐?”
심묘는 침묵했다. 사경행이 이를 갈았다. 그는 심묘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은 것 같았다.
“심묘, 후회하지 말아라. 내 배를 타면 평생 내릴 수 없다.”
사경행이 심묘에게 입을 맞췄다. 심묘는 피하려 했으나 사경행에게 이미 허리가 붙잡혀 있었다. 차가운 가면이 얼굴에 부딪혔다. 사경행은 심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은 가면은 차가웠고, 그의 입술은 타는 듯 뜨거웠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뒤덮었다. 심묘가 피하려 할수록 사경행은 더욱 단단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사경행은 심묘를 품에 안은 채 맹세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겨울에 꽃이 활짝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봄날의 눈송이 같은 이 순간의 기이함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귀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사경행의 열정적인 입맞춤은 끝날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사경행이 입술을 떼자 심묘는 쓰러질 뻔했다. 숨이 막혔다. 전생의 자신은 부수의를 좋아했으나 그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혼롓날 신방에서도 부수의는 억지로 있는 것 같았다. 심묘는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닿아본 적이 없었다.
심묘는 부끄러워서 사경행을 쏘아보았다. 심묘는 자신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묘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고, 붉은 입술은 꽃잎 같아 더 귀여웠다. 사경행은 시선을 돌렸다.
심묘는 분하고 화가 났지만 이럴 땐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사경행과의 입맞춤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음에도 그를 막지 않았다. 왜 막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넌 어쩔 생각이지?”
사경행이 나른하게 물었다. 심묘는 영문을 몰라 그를 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사경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투가 다시 위협하는 투로 바뀌었다.
“태자, 나릉, 풍자현, 소명풍, 배랑. 넌 누구에게 시집갈 거지?”
심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생각해보려 했다. 사경행도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려는 것이냐?”
“제가 왜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 없나요?”
“입 맞추며 날 더듬어놓고 감히 다른 남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냐? 담력이 크구나.”
심묘가 살짝 웃었다.
“설마 제가 당신과 혼인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네가 이제야 겨우 총명해졌구나.”
사경행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끌어올려 웃었다. 느긋한 말투에 심묘는 당황했다. 자신 역시 사경행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전 자신들을 맹우라고 일컬었지만, 분명 맹우보다 모호한 관계였다. 이 관계가 묘하다는 것을, 심장이 뛰던 그 날 밤 알아차렸다.
그러나 사경행과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혼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경행은 대량의 예왕이고 자신은 명제의 장군 적녀였다. 설령 명제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영락제가 허락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사경행은 대량에서 높은 위치였다. 그가 장악한 권한은 영락제가 사경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황제가 중시하는 사람은 많은 일에서 맘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혼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사경행이 말했다.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라. 얌전히 혼수용 자수를 놓으며 날 기다리려무나.”
“제가 언제 당신과 혼인하겠다 승낙했나요?”
사경행은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오늘밤을 엎질러진 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
심묘가 경계하는 눈빛을 띠자 사경행이 웃었다.
“보아하니 아주 기대하는 거 같구나.”
심묘는 사경행과 더는 이야기를 못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경행은 사람을 골리는 것을 좋아하니 놔두었다간 희롱의 말을 멈추지 않을 터였다. 심묘는 화제를 돌렸다.
“태자의 일,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책이 있었군.”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심묘가 강조했다.
사경행이 살짝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부군이 널 돕지.”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묘가 예왕부에서 장군부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에 가까웠다. 사경행이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심묘가 담을 넘어서 온 것을 안 사경행은 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심묘는 분노를 터트릴 뻔했다.
심묘는 오늘밤이 지나면서 많은 일이 변했다고 느꼈다. 사경행과 예왕부에서 대책을 상의하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복수의 길을 혼자 걸었다. 그런데 지금 영문 모르게 대단한 동료가 생겨 안심이 되었다. 더욱이 이 동료는 머리도 비상해 자신이 낸 대책의 허점을 한 번에 찾아 대책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와는 분명 손발이 잘 맞았다.
심묘는 사경행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얌전히 혼수용 자수를 놓으라고 했다. 송신 공주의 말이 맞았다. 그는 처음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원치 않는지 분명하게 알았다. 심묘 자신도 사경행의 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짜인지 명백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혼사에 대해서는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뻔뻔함을 드러냈다.
심묘는 탄식했다. 앞길은 끝이 없고 명제의 흐린 물은 깨끗해지지 않았으니, 감정을 언급하는 건 너무 사치스러웠다. 사경행은 상대방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에 맞는 대응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경행이 감히 다른 나라의 장군 딸과 혼인하려 한다면 그녀도 자신처럼 그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사람이 앞으로 세상에 또 있을까. 심묘는 뛰는 심장 위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입술이 조금 아파왔다. 입안을 헤집던 뜨거움이 아직 남아 있는 듯해 심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다고 소리치고 싶지만, 자신의 마음을 부인할 방법이 없었다. 무섭게 뛰는 심장을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사경행은 출중했으며 과감했다. 뛰어났지만 침착했다. 그런 그를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 * *
정왕부.
등불이 환했다. 부수의는 심묘와 태자의 혼사가 예왕 때문에 미뤄진 걸 알게 되었다. 그날 밤 부수의는 모든 막료를 정왕부로 불러 일의 전말을 전하며 냉소했다.
“난 심묘와 예왕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의심했소. 태자를 가지고 시험했더니 과연 예왕이 반응했지. 심묘에게 일이 생기면 예왕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소.”
배랑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수의는 배랑을 신임해 기용해왔지만, 요즘 들어 많은 일에서 그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부수의의 태도 변화에 다른 막료들은 그가 부수의에게 밉보였다고 여겼다.
그러나 배랑은 총명한 부수의가 이유 없이 자신을 냉대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부수의가 자신과 심묘와의 관계를 알아낸 것일까.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했으나 조금도 드러낼 수 없었다. 부수의가 아직 자신을 벌하지 않은 건 확신은 못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연기를 중도에 관둘 수는 없으니 냉대받는 막료가 보일 만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배 선생은 어떻게 보는가?”
그런데 오늘 뜬금없이 부수의가 배랑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심장 고동 소리가 그의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반드시 장군부와 예왕 전하, 혹은 대량 사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탐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심묘의 신분은 특수합니다. 현재 명제의 가장 중요한 병권을 대표합니다. 장군부와 예왕 전하가 사적인 협의를 달성했다면 아마도…….”
배랑의 말에 막료들은 일제히 동조를 표했다. 배랑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그의 의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어린 아가씨인 데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경국지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예왕이 심묘 때문에 분노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가 장군부를 중시해서라고 말하는 게 사리에 맞았다.
“선생의 말이 맞네. 그러나 난 오늘 한 가지 일을 알아 왔소.”
사람들은 부수의의 뒷말을 기다렸다.
“심묘는 오늘 공주부에 종일 있었다고 하오. 공주는 계속 건강이 나빴는데, 심묘를 밤늦게까지 공주부에 남겼지. 게다가 심묘가 떠난 후 공주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고 하오. 공주도 무언가 아는 건 아닐까?”
침묵 속에서 한 막료가 말했다.
“어쩌면 송신 공주마마도 내막을 아는지 모릅니다. 전하께서 공주부를 조사해보시면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수의는 배랑을 바라보았다. 어떤 의도를 담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이었다.
“심묘의 배후에 큰 후원자가 있을 것이오. 나도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해왔소. 유독 예왕은 심묘의 일에 나서서 도와주니 반드시 무슨 속사정이 있는 것이지. 여기에 송신 공주도 끼어들었다면 일이 한층 재밌게 변할 터.”
부수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종이로 불을 쌀 수 없으니, 그들의 비밀을 반드시 밝힐 것이오. 그러니 여러분에게 의지하겠소.”
배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불안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그날 밤, 공주부. 송신 공주는 행정원에 앉아 있었다. 사경행이 죽지 않고 대량의 예왕이 되어 나타나다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동안 자신은 사경행을 다시 만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의 죽음은 꿈이라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가 자신을 ‘용 이모’라 불러줄 거라고.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된 순간, 조금도 감격에 젖을 수 없었다.
사경행은 존귀한 자금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장포 소매에는 금실로 하늘을 나는 용이 수놓여 있었다. 그는 차가운 가면을 쓰고 익숙한 호칭으로 자신을 불렀지만, 자신이 온종일 기다리던 그 사경행은 아니었다. 대량 예왕이었다. 이는 명제에 큰 위협이었다.
송신 공주는 사경행이 출신을 숨긴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의 출신을 의식하자 본능적으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송신 공주는 문혜제에게 편지를 쓰다가 붓을 멈췄다. 그녀는 종이를 구긴 후 찢어버렸다. 자신이 그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위는 정치와 밀접하니 모른 척할 수만도 없었다. 마음이 뒤엉키고 복잡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사경행을 다시 보기 원치 않았다.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이 죽지 않은 건 그렇다 하더라도 송신 공주는 그가 어떻게 대량 영락제의 친동생이 된 것인지 가장 의심스러웠다. 예왕의 이름은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처음부터 대량 사람인 건지, 우연히 대량 사람에게 매수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전자라면 용서할 만했지만, 후자라면 사경행은 나라를 배반한 셈이었다.
사정과 사경행은 친하지 않으니 사정에게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심묘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말해주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사경행이 심묘를 보호하고 있으니 이젠 그녀에게서 정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송신 공주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사경행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명제에서 사경행과 가장 친한 친구. 양가 관계도 깊었기에 늘 같이 있었던 그는 때때로 사경행의 이상한 점을 보았을 것이다. 평남백 소명풍. 송신 공주는 하인을 불러 소부에 서신을 보냈다.
* * *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성들은 여느 때처럼 춘절에 쓰이는 물품을 사고파느라 바빴고, 거리와 골목은 매일 떠들썩했다. 하루하루 순조로워 일반 백성들은 높은 자리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매를 참새와 같은 새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처럼.
문혜제는 예왕의 야심을 눈치채고 진국과 더욱 동맹을 맺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명안 공주의 죽음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문혜제는 황보호에게 더욱 성의 있는 태도를 보였다. 황보호의 요청으로 파견된 대리사는 자주 황보호의 질의를 받았고, 문혜제는 늘 황보호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명제가 지금까지 명안 공주의 범인을 밝히지 못하자 황보호는 명제가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여겨 직접 조사 기록을 살폈다. 그러나 실마리를 찾을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명안 공주가 대단한 거물의 미움을 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흔적이 없을 리 없었다.
그때쯤 예왕이 문혜제에게 한 말이 황보호에게도 전해졌다. 진국도 명제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은 협상에서 고지를 차지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왕의 소식을 들었으니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대량을 대표하는 예왕이 광산이 있는 명제의 도성을 원했으니, 문혜제의 염려처럼 대량은 차후 명제 전부를 원할 수도 있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처럼 진국 혼자서는 대량을 막아낼 수 없었다. 더구나 명제의 병력을 흡수한 대량은 더욱 기세등등해질 게 자명했다.
황보호는 이 소식을 진국에 전했다. 진국 황제는 명안 공주의 일을 듣고 분노했으나 공주보다 강산의 대업이 중요하다 판단했다. 진국 황제는 황보호에게 명안 공주 일은 잠시 내버려 두고 반드시 명제와 동맹을 결성하고 친교를 맺으라고 지시했다.
이후 황보호는 명제 황실로 더 자주 달려갔다. 문혜제와 황보호는 적지 않게 친해졌다. 둘의 목적이 같기 때문이었다. ‘대량 견제’. 공동의 적이 있으니 단시간에 친밀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혜제는 태자를 도우려 했으니 덕분에 태자도 황보호와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이 세상일은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동떨어져 보이는 관계도 엇갈리는 사이 연결되곤 한다. 똑똑한 사람은 이 관계 속에서 이용할 부분을 잘 찾는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각종 엇갈림 속에서 길을 잃곤 했다.
원외랑부. 차를 맛보는 심동릉은 아주 흡족해 보였다. 이 차는 남국(南國, 명제의 남쪽 지역) 험준한 산봉우리에서 자란 아주 좋은 차로 한 움큼에 은자 몇백 냥이었다. 채색무늬 비단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한 심동릉은 한눈에 봐도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아름다운 부인처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 심동릉은 심부에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서녀였다. 임완운이 주모로 후원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오래도록 밥과 반찬에서 기름기를 보지 못했었다. 심동릉은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드러내기는커녕 1년 내내 자기 뜰에서 나오지 않았다. 몇몇 하인들은 그녀가 심부의 아가씨인 것을 몰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 달랐다. 원외랑부는 세력이 대단히 크지는 않았지만, 재산은 아주 많았다. 조정에서 받는 적은 녹봉으로 생활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원외랑부의 넘치는 가산은 소금 밀수 상인과 왕래를 통해 쌓은 것이었다. 적은 노력으로 큰 이익을 거두는 밀수 덕분에 왕씨 가문은 정경성에서 은자를 펑펑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심동릉은 왕씨 가문의 사람이 되고 난 후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원외랑부에 시집오기 전 심동릉은 왕씨 가문이 주왕 부수안을 따른다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왕씨 가문의 진정한 주인이 태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외랑부의 은자는 계속해서 태자부로 흘러갔다.
두 가지 비밀을 알게 된 후에도 심동릉은 아주 흡족했다. 원외랑부의 은자가 심동릉에게 기쁨을 주는 것처럼 심동릉도 왕필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왕필은 온순해 보이나 영리했고, 태자의 수하 중 대장 격이었다. 심모가 왕필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건 부수의에 대한 감정이 크기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시야가 좁은 점도 한몫했다. 심동릉은 늘 왕필의 일에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지나친 간섭은 하지 않았다. 선을 넘지 않는 신중한 모습이었다. 왕필은 심동릉이 현명하다 여겼고 그녀에게 잘 대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심동릉이 원외랑부의 주모가 되었다. 하인들은 그녀를 존경했다. 임완운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대로할 일이었다. 내세울 것 없는 서녀 주제에 지금 예전의 자신보다 더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온 왕필이 과자를 여종에게 넘겼다.
“광복재를 지나다가 당신이 먹을 떡을 샀소.”
“세심하시네요. 오늘 부군께서 매우 즐거우신 것 같은데, 무슨 좋은 일이 생겼나요?”
심동릉이 웃으며 그에게 차를 따라줬다. 왕필은 심동릉에게 많은 일을 숨기지 않았다. 심동릉은 여기저기로 말을 퍼뜨리는 수다쟁이가 아니었기에 때때로 걱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왕필은 심동릉과 꿀에 기름을 바른 듯 화기애애했다.
“폐하께서 진국 태자와 태자 전하를 자주 만나게 하고 계시오. 진국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려는 게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태자 전하께 맡겼으니 폐하께서 태자 전하를 지지한다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오. 벼슬에 오르면 그 주변도 권세를 얻는다고, 우리는 태자 전하의 사람이니 전하께서 대통을 잇는 날 우리도 더욱 복을 누릴 것이오. 축하할 만하지 않소?”
그가 웃으며 심동릉을 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심동릉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숭배하는 시선으로 왕필을 바라보았다.
“부군,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부군을 따르게 되었으니 전생의 복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숭배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왕필은 남자의 허영심을 가득 충족할 수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부인은 이리 쉽게 만족하는 거요? 폐하께서 심 소저를 태자 전하와 혼인시켰다면 장군부의 병력과 지지가 있어 더욱 유리했을 것이오. 우리의 승산도 더 높았을 거고. 지금 진국과 우정을 다지고 있으나 병력, 이 부분은……. 힘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오.”
심동릉은 탄식하는 왕필의 품에 기댔다. 그녀가 손을 뻗어 왕필의 가슴 부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부군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십니다. 많은 것들을 보고 일하시니 부군은 이미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은 왕필이 웃었다.
“당신은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아는구려.”
“저는 훌륭한 부군을 모시니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심묘는 태자 전하와 혼인 못 하는 건가요?”
웃으며 말하는 심동릉의 말에 왕필이 당황했다.
“심 소저가 당신의 자매인 걸 자칫 잊을 뻔했소.”
왕필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심동릉은 유달리 거슬렸다. 자신은 서녀이고 심묘는 적녀이니 적서가 유별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탐욕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과거 심동릉은 심부에서 자신을 보호하느라 바빴다. 살길을 도모하느라 조소와 풍자를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외랑 부인이 되고 나니 이런 것들에 민감해졌다.
심동릉은 왕필의 품속에 더욱더 머리를 묻어 자신의 음산한 표정을 가렸다.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게 아니라 지금 대량의 야심이 걱정되는 상황이니 황실은 위무대장군의 명성이 필요하오. 그래서 일을 미룬 것이오. 심 소저는 나이가 적지 않으나 장군부는 심 소저가 태자부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들었소. 그러나 일은 빠를수록 좋소. 길게 끌면 변수가 생길 수 있소. 심 장군이 심 소저를 출가시킬 가능성도 있으니 그렇게 되면 태자 전하의 비책은 물거품이 돼버릴 게 분명하오.”
“혼사를 정해버릴 수는 없나요?”
“에그, 심 소저가 원치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수완을 사용해 심 장군이 불만을 품게 되면 안 된다는 얘기요.”
“그럼 백부가 권세에 기대 사람을 얕보는 것 아닌가요?”
심동릉이 입을 삐죽였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심동릉의 투정에 왕필이 웃었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얕보는데, 태자 전하께서는 권력을 이용해 그러실 수 없나요?”
“태자 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행위를 하실 수 없소.”
“태자 전하는 못 하셔도, 다른 사람은 할 수 있잖아요. 일반 백성들이 심묘와 태자 전하의 혼인을 요구하면 백성이 권력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는 걸까요?”
왕필은 심동릉이 울컥해서 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심동릉의 말을 다 듣고 난 왕필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는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심동릉은 그의 품에서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한 말에 어떠한 의도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왕필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의 속내를 분명히 물었다.
“당신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오? 말해보시오.”
“부군, 정말 교활하세요. 그럼 제게 어떤 이익이 있는데요?”
왕필은 생각하는 척했다.
“당신의 생각이 좋으면 당신이 봉호(封號)를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하겠소.”
심동릉이 심묘와 태자의 혼인 방법을 생각해내면 왕필은 큰 공을 세우는 셈이니 장래 그의 벼슬길은 순탄할 것이다. 그러니 심동릉의 봉호를 요청해도 과하지 않았다. 왕필의 말을 들은 심동릉의 눈에 만족의 기색이 스쳤다.
“전 봉호를 받은 부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군을 돕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내는 당연히 부군을 지지해야지요. 부군이 미래의 황제 폐하를 보좌하실 테니 제가 하찮은 재주를 보여드릴게요.”
그녀의 매력적인 말은 왕필을 더욱 기쁘게 했다.
“사실 아주 간단해요. 진국 태자 전하가 협력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요?”
왕필의 물음에 심동릉이 웃었다.
“지금 우리 명제와 진국은 동맹을 맺으려는 중이지요. 진국이 동맹을 승낙하는 조건으로 심묘와 혼인을 요청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안 되오. 폐하께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해도 심 장군은 심 소저가 멀리 시집가는 걸 원치 않을 거요.”
왕필의 말이 맞았다. 심신이 심묘를 아끼는 것을 정경성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경성 밖으로 시집 보내는 것도 불가능한데 여러 해 동안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진국으로 보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로 그래요. 그러나 이 소식을 명제 백성이 알게 되면 그들은 심 장군에게 심묘를 출가시키라 요청할 겁니다. 진국 태자 전하는 생긴 것도 멋지시니 심묘가 시집가도 나쁠 게 없지요. 백부가 승낙하지 않으면 진국과 명제가 동맹을 맺을 수 없으니 명제 강산은 매우 위험해질 겁니다. 심묘 한 명과 천하 백성의 안위를 바꾼다니, 백성들은 아주 타당한 얘기라고 여길 겁니다.”
왕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심동릉이 이어 말했다.
“백부는 사람 목숨보다 천하 대의를 우선시합니다. 조정에서 목숨을 내걸 수 있어도, 백부는 백성들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을 거예요. 폐하께서도 백성들의 뜻을 고려하시잖아요. 그러니 백부는 더하시겠지요. 백부는 대량에게 기회를 주는 걸 원치 않지만, 심묘를 먼 곳에 시집 보내는 것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러나 누가 진국 태자를 막을 수 있겠어요? 이때, 태자 전하께서 나서서 심묘는 전하의 사람이라고 하시면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건…….”
왕필이 망설이자 심동릉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되면 명제 태자 전하의 체면을 진국 태자가 고려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부는 심묘를 멀리 진국의 태자에게 시집 보내는 것보다 수시로 볼 수 있는 태자부로 시집 보내길 원할 겁니다. 백부는 결정적 시기에 나선 태자 전하의 은혜에도 감격하시겠지요.”
왕필이 눈을 반짝였다. 영리한 그는 심동릉의 방법이 쓸 만하다고 여겼다. 심동릉은 그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하지만 이 연극은 당연히 진국 태자와 태자 전하가 협력하셔야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진국 태자에게 이익을 주셔야 그가 함께할 겁니다. 남은 일은 순리에 맡기면 되구요.”
왕필이 심동릉을 바짝 껴안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똑똑한 아내를 얻었소.”
심동릉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부군, 놀리지 마세요. 저도 갑자기 생각난 것입니다. 빈틈이 많이 있을 테지만, 부군은 영명하시니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메우실 수 있을 겁니다.”
왕필은 심동릉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내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오. 당신이 날 크게 도왔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일이 성사되면 난 반드시 태자 전하께 당신의 공로를 이야기해 당신의 위엄을 높여줄 거요.”
심동릉은 속으로 비웃었다. 남자는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을 때 다른 사람과 공로를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구나 여인의 공로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말은 감언이설일 뿐이었다. 이를 분명히 알지만 심동릉은 왕필에게 다급히 말했다.
“부군, 부디 제 생각이라 알리지 마세요. 어느 누가 동생을 해치겠어요? 오늘 부군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함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소문이 나면 저는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거예요.”
왕필의 입에 발린 말에 심동릉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왕필은 그녀가 공로를 탐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허둥대며 공로를 거절했다. 왕필은 만족스러웠다. 심동릉이 한층 사랑스러워 보였다. 심동릉과 심모가 바뀐 것에 다시 한번 흡족해했다.
“알겠소, 알겠소. 말하지 않으리다. 하지만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오. 후에 태자 전하가 등극하시면, 심 소저도 그 곁에서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오. 이것은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좋은 일이요.”
심동릉도 미소 지었다.
“저도 그리 여깁니다.”
심동릉은 심묘가 권세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심신이 심묘를 애지중지하기 때문에 부귀는 심묘에게 중요하지 않은 요인이었다. 그러나 심묘와 심신은 완고하고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심묘가 보통 사람이라면 태자와의 혼인이 달갑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른 후에 달콤한 맛을 본다면 만족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일이 잘못하면 그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심동릉은 심묘에게 조금은 미안했다. 심묘는 심부에서 가장 적이 되지 않았으면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심신 부부의 조건 없는 지지가 있기에 그녀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 달랐다.
자신에게는 이제 심묘와 맞설 자격이 있었다. 사실 자신은 심묘를 질투했다. 심부 이방과 삼방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짓밟을 수 있었으나 심묘에게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싶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득세하면 조심스러움은 던져버리고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빈곤한 서생이 작은 관직을 얻은 후 비할 바 없이 건방져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유의 사람은 뼛속 깊이 새겨진 과거를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걱정하기도 한다.
“잘 모색해야겠소. 태자 전하와 잘 상의하리다.”
왕필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심동릉이 미소 지었다.
“저는 심묘와 약속을 잡아볼게요. 심묘에게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심묘가 오겠소?”
왕필은 심동릉과 심묘가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임을 아는 것 같았다. 심동릉은 그가 또 적서가 유별하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불만을 눌렀다.
“부군, 저를 믿지 못하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심묘는 반드시 올 겁니다.”
* * *
평남백부.
소명풍은 골치가 아팠다. 어제 송신 공주가 갑자기 평남백부로 찾아왔다. 송신 공주는 오랫동안 외출하지 않아서 그녀에게 주의하는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그녀는 변장까지 하고 있어서 자신 역시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송신 공주는 목소리를 낮춰 자신이 온 건 중요한 일이 있어서라고 밝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소욱을 거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지만 일단 그녀를 공손히 맞이했다. 자신에게 무언가 분부할 일이 있을 거라고 여겼으나 그녀는 소식을 알아보러 온 것이었다.
송신 공주가 원하는 소식은 놀라웠다. 그녀가 사경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물은 것이다. 정경성 사람들은 모두 사경행과 송신 공주의 사이가 친모자처럼 좋았던 것도, 사경행이 죽은 후 그녀가 큰 병을 앓은 것도 알았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그녀 앞에서 사경행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건만, 먼저 그의 얘기를 꺼내다니 실로 예상외였다.
송신 공주는 사경행에 관한 예전 일들을 언급하며 그에게 비밀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에둘러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경행의 시체에 대해서도. 사경행은 북부 변방에서 적군에게 가슴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 그의 머리는 성루에 걸리고 피부는 벗겨졌다. 많은 사가군이 본 것이니 거짓이 아니었다.
이후 시체를 회수했으나 생전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당시 사정이 사경행의 시체를 보고 기절했을 정도니. 그래서 송신 공주에게는 충격을 견디지 못할까 걱정해 보이지도 못했다. 어린 시절 친구인 자신만이 사경행의 최후를 송별했다.
송신 공주는 그 시체가 확실히 사경행이었는지 물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다고 했겠지만, 심묘에게서 호두환을 발견하고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이 싹튼 후였다. 이후 줄곧 장군부 안 심묘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송신 공주마저 사경행의 일을 묻자 그가 죽지 않고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사경행이 살아 있으면서 왜 나타나지 않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자신도 바보는 아니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송신 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배웅한 소명풍은 생각에 잠겼다. 송신 공주가 어떤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사경행이 빈틈을 드러냈을 것이다. 심묘의 팔찌와 송신 공주의 이상한 방문을 연결하자 사경행이 정경성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사경행이 왜 송신 공주에게까지 진상을 밝힐 수 없는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그녀가 왜 생뚱맞게 사경행의 어린 시절을 물어보았는지도. 그의 어린 시절과 지금 그의 행방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아했다. 이렇게 된 이상 사경행의 행방을 하루빨리 찾아야 했다. 그를 찾으면 문제의 답도 모두 알 수 있으리라.
정경성은 아주 크다고 할 수 없으나 아주 좁다고도 할 수 없는 규모였다. 많은 사람 틈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 더욱이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찾기 쉽지 않을 것이었다. 소명풍은 송신 공주 곁에 사람을 딸려 보냈다. 그녀가 이미 실마리를 발견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이 알 터였다. 그녀가 조사하는 것을 따라 얻으면 될 일이었다. 소명풍이 하인에게 손짓했다. 그는 하인의 귓가에 몇 마디 분부했다.
* * *
심묘가 심동릉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사경행도 함께 있었다. 그는 심묘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경행은 예왕부 일 이후 아주 당당하게 심묘의 일에 상관했다. 처음엔 심묘도 익숙하지 않았으나, 곧 적응하였다. 어쨌든 사경행은 수완이 비상하니, 그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 방법을 찾아 조사할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같았다.
“심동릉?”
“무슨 계획이 있나 봐요. 향을 평가하자고 초청했네요. 향을 평가한다니 원외랑부은 아주 부자인가 봐요.”
부유한 사람들은 종종 차나 술을 평가하곤 했으나 향을 평가하는 건 드물었다. 매우 좋은 향은 천금의 가치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향은 태우면 사라졌다. 심묘가 본 가장 귀중한 향은 옥리침향으로, 손가락 정도의 향이 만 냥에 달했다. 전생에 한 서역 상인이 궁에 공물로 바친, 어린아이의 주먹 크기 정도 되는 옥리침향은 매우 진귀해서 당시 궁중 모든 비빈이 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자신은 옥리침향이 국고에 두기에 매우 마땅한, 아주 진귀한 물건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부수의는 미 부인의 생일날 그 옥리침향을 주었다.
향을 평가하는 건 금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돈이 많이 들었다. 심동릉이 함께 평가하자고 한 봉취향도 진귀한 것이었다. 원외랑부의 녹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원외랑부가 부유하다고 해도 정경성 관리는 이렇게 돈을 헤프게 쓰지 않았다. 지하에 있는 심모가 안다면 분노해 살아 돌아올 수도 있을 듯했다.
“저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은자를 쓰다니 뭔가 있어요.”
“무슨 계략을 세웠을까?”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심동릉 언니는 심모 언니가 아니에요. 모해한다고 해도 저도 쉽게 당하지 않을 거구요. 언니는 바보가 아니니 저를 부른 자리에서 모해하지도 않을 테지만요. 초대에 응하면 언니 입장에서 다음 일이 순조로워지는 거겠지요. 저는 가지 않아도 큰 손해는 없어요. 그런데 원외랑에게 이렇게 많은 은자가 있군요.”
심부 사람이 사형을 받던 날, 심묘는 심동릉을 만났다. 당시 심동릉의 의상과 장신구는 매우 비싸 보였다. 왕필이 아무리 그녀를 총애한다고 해도 원외랑부가 그렇게 많은 은자를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대체 원외랑부는 얼마나 많은 은자를 가진 건지 의아한 심묘의 표정을 본 사경행이 말했다.
“원외랑은 태자의 사람이야. 태자는 사적으로 소금 밀매상과 관련이 있지. 왕필은 그 중개인이야.”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깨달았다. 소금 밀매는 이익이 크게 남는 장사였다. 원외랑부가 소금 밀매와 관련이 있다면 향을 평가할 만했다. 심묘는 심동릉의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심동릉이 일반 관리에게 시집갔다면 이렇게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필은 태자의 오른팔 격이었다.
심동릉은 문혜제가 태자를 지지하니 명제는 곧 태자의 손에 떨어질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환경 변화에 따라 주변 상황도 변하니 태자를 위해 일한 왕필에게도 은자가 많이 쥐어질 것이고, 심동릉은 왕필의 본처이니 영광이 무한할 터였다. 그 영롱한 빛에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담력이 커졌으리라.
근심을 떨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되었지만, 그 속에서도 죽음은 도사리고 있었다. 천하에는 변수가 많은 법이거늘, 심동릉은 현실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 태자가 반드시 대통을 이어받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태자가 황제가 되어도 왕필이 근심 걱정 없이 승승장구할 거라고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황실에서 토사구팽은 아주 숱하게 일어났다. 가장 무정한 곳이 황실이었다.
“왕필이 태자 전하의 사람이라니. 언니가 갑자기 이러는 것은 왕필과 관련된 일일 거예요. 태자 전하와 관련한 일이겠네요.”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라……. 언니가 혼사를 가지고 계책을 부리려나 보군요.”
사경행이 동의하는 시선으로 심묘를 보았다.
“똑똑하군.”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심동릉이 꺼낸 방법?”
심묘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사경행이 과자를 들어 한입에 먹었다.
“황보호와 태자가 합의를 달성해 함께 연극을 하는 거겠지. 너와의 혼인을 조건으로 황보호가 명제와의 동맹을 결정할 거고. 이 소식이 퍼지면 백성들은 두려워 심 장군에게 널 진국으로 보내라고 요구할 거야. 민심과 부녀의 정 사이에서 심 장군은 매우 고통받겠지. 그러나 심 장군도 감히 진국과 맞설 수 없을 테고. 이때 태자가 나서서 너와 태자가 혼약했다 하면 심 장군은 널 진국에 시집 보내지 않고 태자와 혼인시켜 명제에 남길 거야. 게다가 태자가 나섰으니 백성들은 태자의 당당한 기개에 감격할 것이고. 네 서출 자매는 생각보다 바보는 아니구나.”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했다. 심묘의 안색이 검푸르러졌다.
“언니가 날 위해 전심전력으로 준비했네요.”
심묘는 냉소했다. 백성을 이용해 부친 심신을 구석으로 몰 꿍꿍이라니, 화가 치밀었다. 심 노장군은 명제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을 살았다. 이를 계승한 심신이 지켜야 하는 백성과 애지중지하는 자신을 두고 갈등해야 하니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과 심동릉은 원수지간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도발해오다니. 교활한 꾀에 심묘는 혐오감을 느꼈다.
“태자 전하와 혼인은 안 돼요.”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왜? 내게 시집오려고?”
심묘가 화를 내기 전 그가 선수를 쳤다.
“걱정하지 마. 세상에 감히 내 사람을 뺏을 사람은 없어. 내 마음에 든 여인은 더더욱 불가능해.”
사경행은 늘 무엇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말했다. 심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심동릉이 음해하면 두 배로 갚아줄 거예요.”
“부인의 뜻이 바로 내 뜻이야.”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심묘는 간신히 또 다른 화제로 돌렸다.
“당신은 어쩔 생각이에요? 명제를 멸망시키고 대량으로 통일시킬 건가요?”
사경행은 기이한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다고 하면 넌 날 도와줄 수 있느냐?”
“이전에 말했듯, 전 당신과 같은 마음이에요.”
사경행의 얼굴에서 농담의 기색이 사라졌다. 마주하는 표정은 아주 진실했지만, 심묘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도 추측할 수 없었다. 양국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심묘가 자신을 지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진심이라면, 정말 의외였다.
사경행은 심묘가 왜 명제를 멸망시키려 하는 것인지 흥미가 일었다. 그녀는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사람은 아니니 대량의 이익을 따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사모해서 그를 위해 명제를 버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심묘는 황실 사람에게 적의를 품은 것 같았다. 물론 황실 사람이 장군부를 억누르려 하긴 했지만, 규방 여인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의아했다.
심묘는 심신과 심구보다 더 분명하게 상황을 파악했고 계속 장군부를 보호하려는 모습이었다. 장군부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듯했다. 심묘를 알면 알수록 신비한 곳이 많았다. 그러나 풍선전당포에서도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사경행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넌…… 명제를 싫어하느냐?”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천하가 오래도록 분열되어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분열되는 법이지요. 예로부터 이러했어요. 제가 원하고 말고, 좋아하고 말고와 상관없어요. 내가 원치 않고, 좋아하지 않아도 이런 일은 발생할 테니까요. 이는 운명입니다.”
심묘는 탁자 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이 강산이 당신들 손에 있길 바랍니다.”
사경행은 멍해졌다.
“양국 교전은 백성과 무관해요. 근래 명제는 운수가 다했어요. 과한 세금, 계속되는 천재지변에 백성들의 생활은 곤란하지요. 관리는 부패하고 썩었어요. 황제는 시비를 못 가려, 공적 있는 세가를 경계하고 모해하니 꼴사나울 정도구요. 반면, 대량은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각종 산업이 발전했지요. 영락제는 명군이라 소국 백성들이 먼저 성문을 열어 환영했다면서요?”
사경행은 심묘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여자들이 견문이 얕아 눈앞만 보고 대국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여자들만 만나본 것일 터였다. 사경행은 견문 높은 여인들을 많이 만났다. 영락제의 아내인 현덕 황후가 예였다. 현덕 황후는 문서 관리를 담당하는 세가 출신으로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은 황후였다.
하지만 심묘는 지금 갓 열일곱인 데다 소춘성밖에 가보지 못했다. 더구나 이전 그녀는 사람들에게 머저리라고 불렸다. 그런 심묘가 영락제의 막료보다 시국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고 흐름에 순응했다. 이렇게 세상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자신의 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사경행은 심묘 같은 여인을 발견했으니 자신을 행운아라고 여겼다.
심묘는 부수의가 영락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고 있었다. 부수의는 영락제를 두려워했다. 부명은 이를 알고 난 후 자신과 흥미진진하게 토론했었고, 그래서 그에 관해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락제는 품격 있는 인물이며 일대 명군이었다. 대량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광활한 영토를 보유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선황이 죽고 한바탕 분쟁이 일어나 다른 나라의 침략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락제가 등극하고 난 후 지금의 국토를 일군 것이었다. 영락제의 지도력에 민심이 순응했다. 소국의 백성들은 영락제가 자기 나라를 거둬들여 생활이 나아지길 바라기도 했다.
“영락제에 대해 자세히도 알고 있구나. 뭐 하려고?”
사경행의 퉁명스러운 말에 심묘는 당황스러웠다.
“전 위대한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애쓸 뿐이에요. 명제 황실 사람들은 조만간 이유를 찾아 장군부를 없애려 할 거예요. 인자하지 않은 황제에게 신하는 도의를 지킬 필요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넌 영락제가 문혜제처럼 장군부에 손을 쓰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보장하지?”
“영락제 곁에 이씨 성의 장군이 있는데 장군부와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이 장군은 영락제에게 예우를 받고 있지요.”
전생에서 자신이 죽기 전, 대량의 이 장군 일가는 아주 잘 살고 있었다. 심묘의 답변에 사경행이 당황했다.
“이 장군을 어떻게 알지?”
심묘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는 지금 장군부의 적녀이니 대량의 이 장군을 아는 건 불가능했다.
“이 장군은 아주 유명해서 명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유명하다고?”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나도 유명해?”
어이를 잃은 심묘는 그에게 말려들지 않기로 했다.
“명제와 맞서려면 진국과 명제가 동맹을 맺게 둘 수 없어요. 두 나라가 동맹을 맺으면 대량에도 말썽이 될 거예요. 당신이 아직 정경성에 체류하는 것은 그 동맹을 막으려는 게 아닌가요?”
사경행은 살짝 웃었다.
“출가하면 남편을 따른다더니, 날 위해 매우 세심하게 생각하는구나.”
심묘는 불필요한 부분에 심력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 동맹을 막기 위해 좋은 방법이 있어요. 당신이 해낼 수 있을까요?”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렸다.
“말해 보거라.”
“살인, 약탈. 거기에 죄를 뒤집어씌우고 비방하는 거지요.”
심묘의 웃음은 따뜻하며 단정했다.
“증좌 없는 죽음이 가장 좋아요.”
* * *
정경성은 유달리 평온한 듯했다. 수면 아래 어떤 계략이 세워지고 있는지 백성은 모르기에 평온을 가장할 수 있었다.
정왕부는 근래 긴장 분위기였다. 중책을 맡은 막료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며칠 전 부수의가 가장 신뢰하던 배랑을 감옥에 가뒀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정은 모르지만 내막을 아는 하인이 말하길, 그가 첩자라고 했다.
배랑의 재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부수의가 그를 아끼는 것을 질투했다. 그동안 배랑은 부수의를 위해 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부수의가 그를 진짜로 가뒀는지 미심쩍어했다. 배랑이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는 부수의와 함께 장기를 두고 차를 마시며 화목해 보였다.
부수의가 실마리를 잡았다면 진상을 먼저 조사했을 것이다. 공연히 심복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수의는 과감하게 바로 결정했다. 배랑을 의심하면서도 친밀하게 대한 것만 보아도 새삼 부수의가 쉬운 사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일벌백계의 지략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막료들은 부수의에게 더욱 공손해졌다.
부수의는 요 며칠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공주부를 지키던 사람이 송신 공주가 변장을 하고 평남백부 소명풍을 찾아갔다고 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소명풍을 찾았는지,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송신 공주는 거의 외출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문혜제와도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나마 친한 황실 사람은 옥청 공주였지만, 그녀는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이다. 그녀의 아들인 사경행도 송신 공주와 친했지만 그 역시 죽었다.
평남백부와 송신 공주 사이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부수의는 송신 공주와 평남백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온갖 생각을 짜냈으나 애석하게도 가치가 있는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게다가 부수의는 그녀가 왜 평남백 소욱이 아닌 소명풍을 찾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명풍은 벼슬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었기에 별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명풍과 송신 공주가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싶었다. 소명풍의 이름을 읊조리던 부수의는 순간 멍해졌다.
정경성에서 소명풍은 유명했다. 우수하며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전도유망한 그가 큰 병을 앓아 애석하게도 벼슬길에서 물러난 것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사경행과 붙어 다니며 함께 자라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소명풍처럼 정직하고 엄격한 소년이 어째서 사경행처럼 장난이 심한 소년과 함께 지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임안후부와 평남백부는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으니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은 게 당연하다’ 정도로 넘겼다.
부수의는 소명풍과 사경행의 관계를 떠올린 후 단숨에 이해했다. 소명풍은 사경행의 친구이며, 송신 공주는 사경행의 이모였다. 송신 공주가 사적으로 소명풍을 찾아갔다면 사경행의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송신 공주가 왜 갑자기 죽은 사경행의 일을 묻는 건지 의아했다. 송신 공주가 상심할까 누구도 그녀 앞에서 사경행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먼저 나서서 사경행의 이야기를 하다니, 혹시 사경행이 죽지 않은 건 아닐까……? 부수의는 얼토당토않은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부정했다. 사경행의 사망 관련 비밀 보고는 자신이 직접 보았으니 틀릴 리 없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아래 보고 내용을 조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송신 공주가 예왕의 일을 조사하다가 갑자기 소명풍을 만나러 간 것은 사실이었다. 분명 그냥 넘길 수 없는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죽은 사경행이 연관된다면, 일은 복잡할 테지만 명백히 밝힐 의미가 있었다.
부수의는 옆의 수하에게 분부했다.
“지하 감옥으로 가자.”
정왕부 지하 감옥은 사당 안에 있었다. 사당은 정왕부에서 복을 기원하기 위해 따로 만든 곳이었다. 사당 안에는 인자하고 선한 얼굴의 관음상이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을 들어 올리면 웃고 있는 작은 부처상이 있었다. 부처의 발 옆 나무로 된 물고기를 누르면 석문이 열렸다. 석문을 지나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정왕부의 지하 감옥이 나왔다.
지하 감옥 안에는 첩자나 부수의의 수하 중 평범한 죽음으로 징계가 부족한 사람들이 갇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가혹한 형벌을 계속 당했기에 감옥에는 사시사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석벽에는 사람들의 피부 껍질을 벗겨 말린 것들이 있었다. 죽기 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 두려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부수의는 복을 기원하는 사당 안에서 마귀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세음의 시야 아래에 있는 이곳은 지옥의 살풍경을 재현했지만, 지옥보다도 더 무서웠다. 부수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감옥을 둘러보았다. 석벽을 보는 시선에 감상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수하가 길을 안내하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걸음을 멈췄다.
들보에 수갑이 채워진 사람이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선홍색 옷을 입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떨어진 선혈이 한 방울씩 바닥에 흘러 작은 피 웅덩이를 만들었기에 그 생각이 틀렸음을 분명히 했다.
부수의가 조용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혼절한 것 같았다. 부수의가 수하에게 눈짓하자 그는 고춧물 한 통을 그 사람에게 뿌렸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린 사람은 온몸을 계속 떨었다. 참을 수 없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부수의는 그에게 다가가며 웃었다.
“선생, 곧 익숙해질 것이오.”
고춧물에 핏자국이 씻긴 죄수는 배랑이었다. 배랑이 미소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의 배려 덕분에 아직 괜찮나이다.”
“나는 선생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지.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이런 기개도 가지고 있다니 존경스럽군. 모두들 장군부의 병사가 영민하고 용맹스럽다 하더니 문인인 선생마저 이렇게 강단 있구나. 심 장군이 어찌 교육했는지 나도 알고 싶구려.”
탄식하는 부수의 말에 배랑이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소신과 심 장군은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선생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군. 기개는 높이 살 만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졌네. 선생에게 특별히 비범한 놀이법을 준비하겠소.”
배랑은 웃기만 했다. 부수의는 그를 바라보며 추억을 회상하듯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대를 만나 즐거웠네. 그대의 넘치는 재능을 아끼니, 마음이 여린 내가 그대에게 기회를 한 번 주겠소. 공을 세워 죄를 씻으면 일은 모두 발생하지 않은 거로 여기고, 나와 그대는 이전과 같은 사이가 될 것이오. 난 그대를 선생이라 부를 것이고, 그대는 나의 가장 유능한 두뇌가 되는 것이오. 그대는 장군부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만 말하면 되오. 그대를 내 곁에 보낸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오? 이는 나쁜 거래가 아닐 텐데, 어떻소?”
부수의는 배랑에게 다가와 그를 꾀듯 유혹했다. 그때 배랑이 피를 토했다. 붉은 피가 입가에 흘렀다.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전하의 보살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소신과 심 장군은 관련이 없어서 전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 소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듯하니, 애석합니다.”
부수의가 냉담한 표정으로 배랑을 바라보았다.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 지은 부수의가 손뼉을 쳤다. 그는 몸 위 핏자국을 털어냈다.
“선생의 강단에 매우 탄복했소. 선생이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하구려. 이런 것은 선생의 눈에 차지 않는 듯하니 더 좋은 거로 바꾸거라.”
부수의가 수하에게 손짓했다. 떠나려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배랑을 바라보았다.
“선생이 말하지 않아도 장군부의 비밀을 조사하고 있소. 장군부는 정과 의리를 중시한다고 했는데 선생이 이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애쓰고 있으니 심 장군이 선생을 구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부수의가 간 후 배랑은 선혈을 다시 토했다. 온화해 보이던 황자에게 이렇게 악랄하며 잔혹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의 걱정하는 기색이 깃든 듯한 말에 배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장군부 사람이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심묘를 위해 일했고, 심묘는 장군부 사람에게만 정과 의리를 보였다. 그녀에게 가족과 친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부수의는 장군부가 그를 구하러 오는 것은 아닌가 떠보듯 물었지만, 배랑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심묘가 정왕부의 가장 은밀한 감옥에서 자신을 빼낼 신묘한 방법이 있는지는 둘째 치고, 그녀는 애당초 이런 날을 예상했을 것이다. 발각된다면 자신이 어떤 참혹한 결말을 맞을지 알면서도 부수의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 아래에서 미미한 기대감이 피어나더니 곧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자신 역시 심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묘가 류형을 인질로 삼아 위협했을 때, 자신은 그녀를 혐오했다. 그러나 결국 심묘의 사람이 되었고 그녀를 위해 걱정하며 전심전력으로 대국을 했다. 배랑은 이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전생에 심묘에게 무언가 빚을 졌기에, 이번 생에 그녀를 이토록 따르는 것이라고, 그래서 인생도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형벌을 가하는 사람이 다가왔다. 배랑은 눈앞이 새까매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은 심묘에 대한 생각을 저 멀리 쫓아버렸다.
* * *
예왕부.
화롱과 야앵이 나무에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었다.
“계 주인과 고 공자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네. 탑뢰에 얼마나 더 있을까?”
야앵의 말에 화롱이 해바라기 씨를 뱉었다.
“주인님은 두 사람을 잊으신 것 같아. 근래 바깥을 뛰어다니시느라 바쁜데 어디 그들을 기억하시겠어? 대량 궁에서 편지가 왔다던데 아마 일찍 일을 끝내고 돌아가시겠지.”
“맞아. 그런데 계 주인이 계속 탑뢰에 있는데 풍선전당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시간 허비하는 것 아니야?”
화롱은 야앵에게 눈을 흘겼다.
“풍선전당포는 은자를 불리는 곳이니 묵우군 사람이 주인님에게 보고할 거야. 괜한 걱정이야!”
야앵은 화롱의 말이 일리 있다고 느꼈다.
“그러네. 많은 걱정 할 필요 없지.”
세상일은 우연한 원인으로 일을 그르칠 때가 있었다. 작은 변화가 큰일에 연루되어 전체 궤적이 변할 때가 있었다.
풍선전당포 서재 안 탁자에 편지가 높이 쌓여 있었다. 정리하는 사람이 없는 듯 먼지가 가득했다. 가장 아래에 있는 편지에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정왕부’.
* * *
정왕부에도 움직임이 있으니 태자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문혜제는 태자와 황보호가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밀어주었다. 그래서 황보호는 태자부를 자주 들락날락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발각될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보호가 태자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문혜제도 관여할 수 없었다.
“방금 제 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태자가 황보호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황보호가 웃었다.
“네 계산은 아주 좋구나. 나쁜 사람은 모두 나이고, 너는 좋은 명성과 미인을 얻으니 말이다.”
태자도 황보호를 따라서 웃었다.
“군자는 남의 좋은 일을 도와 성사시켜준다 했습니다. 가능만 하다면 저도 심 소저를 진국의 태자비로 만들 것이나 그 일이 불가능한 건 다들 알고 있습니다.”
진국 황제는 명제 신하의 딸과 태자를 당연히 혼인시키지 않을 것이다. 태자비라는 이름은 황실의 이름과 세력을 대표했다. 게다가 태자비는 태자를 도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심묘는 명제 사람이니 황보호를 돕지 못할 것이고, 심신부터도 호랑이 눈을 뜨고 그녀가 진국에 시집가지 못하게 할 터였다.
황보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급한가? 내가 사람을 뺏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좋은 일을 도와주기 싫은 게 아니네. 하지만 명성이 걸려 있고, 심 장군이 내게 원한을 품을 수도 있으니 난감하구나.”
사리에 밝은 황보호는 빠르게 이익을 계산했다. 명제에서의 명성 따위는 실상 불필요했다. 게다가 심묘와 혼인하는 게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아니니 명성이 나빠질 일도 없었다. 이 일로 문혜제와 태자의 약점을 쥐게 된다면 구태여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추후 둘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혜제는 이 일을 모르고 모두 태자의 생각일 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태자에게만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형님, 무엇이 곤란하십니까?”
웃으며 묻는 태자의 물음에 황보호가 탄식했다.
“큰일은 아니다. 네게 비웃음을 당할 것 같구나. 평민에게도 곤란한 일이 있는 법이니 진국 태자인 나는 더 많을 뿐. 부황은 내게 잘하시지만 내 형제들에겐 마음을 놓을 수 없구나. 어느 날 형제들과 내가 의견이 갈리면 그때 자네가 내게 조그마한 힘을 실어주길 바라네.”
황보호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 태자는 당황하면서 황보호가 교활하다고 속으로 욕했다. 황위 쟁탈은 모든 국가에 있는 일이다. 황자가 많은 국가는 더욱 그러한 법. 황보호는 진국 황실에 내란이 일어나면 자신더러 그에게 힘을 보태라는 것이었다. 명제 태자가 진국 태자가 황위에 오르게 돕는 일은 병력을 빌려주는 일밖에 없었다. 과연 그는 계산을 잘하는 남자였다.
“뭘 머뭇거리는가. 내가 지금 네 일을 돕는 것과 같은 것인데.”
황보호는 태자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웃었다. 그러나 태자는 이번에는 따라 웃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 일이 성공해 자신이 심묘와 혼인하게 되면 장군부는 태자부와 함께 묶일 것이었다. 장군부의 조력이라는 중요한 저울추를 손에 쥐기만 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세력이 강성해질 것이었다. 그러니 황보호의 말대로 그는 자신이 진정한 용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셈이었다. 이에 태자는 황보호가 꺼낸 조건이 못 받아들일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더 많았다.
“좋습니다. 형님이 이번에 도와주면 장래 저도 수수방관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황보호가 크게 웃었다. 그는 태자와 여러 번 잔을 주고받았다.
“정말 심묘와 혼인할 건가? 조공연회에서 보니 심묘는 부드러운 여인이 아닌 것 같은데. 강직한 여인을 길들일 자신이 있는 겐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황보호를 보고 태자가 개의치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강직하다고 해도 여인입니다. 혼인하면 수그러들 겁니다. 형님 앞이니 말하는 것이지만 태자비도 처음에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순종적이지요. 여인은 공들여서 달래면 고양이처럼 온순해집니다.”
황보호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명안 공주의 죽음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지만, 심묘가 그 일과 관련 있는 건 분명했다. 이를 눈치채게 해준 부수의는 현재 자신과의 관계가 밝혀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장군부는 보통이 아니며, 심묘 역시 배후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태자의 세력은 약하지 않으나 심묘를 얻는다고 그가 승리를 굳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남의 일이니 흔쾌히 구경하기로 했다. 황보호는 몇 잔 더 마시고 일어났다.
* * *
원외랑부.
심동릉은 심묘에게 향을 평가하러 오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이에 심묘는 사촌 언니인 나담과 함께 가겠다고 응해왔다. 왕필은 심묘가 초대를 수락한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다.
“심 소저와 왕래가 없었다고 하지 않았소? 심 소저가 수락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소.”
심동릉도 심묘의 수락이 의외였으나 입꼬리를 올렸다.
“오래 만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심가에서 자매는 우리 둘만 남았잖아요.”
그러나 솔직히 그녀 자신도 초대장을 보내면서 반신반의했다. 심묘가 신중한 성격임을 잘 알기에 그녀가 원외랑부를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초대한 것은 왕필에게 자신이 그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심묘가 정말로 초대에 응할 줄이야.
심묘는 나담이 무공을 할 줄 아니 만약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 데려올 터였다. 더구나 호위까지 다수 데려오며 만전을 기하겠지. 그러나 심동릉은 이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목적은 심묘를 그 자리에서 모해하는 게 아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부군, 심묘가 온다고 승낙했으니 장래 일이 잘 풀릴 것 같아요. 태자 전하와 진국 태자도 함께 부르세요. 진국 태자가 향을 평가하는 심묘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사모하게 되었다면 더욱 자연스럽지 않겠어요?”
왕필이 웃으며 심동릉의 어깨를 껴안았다.
“과연 여인들 생각은 세심하구려. 이런 아내가 있으니 내게 또 어떤 바람이 있겠소?”
심동릉이 웃으며 그의 농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묘는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장기였다. 자신은 심부에서 임완운과 심묘의 다툼을 보았다. 분명 무서운 술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이제 자신은 심묘와 대등했다. 둘 중 누가 더 대단한지 분명히 하고 싶었다. 심묘를 상대하기 위해 계략을 짜는 건 심모 때보다 훨씬 더 유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