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장
심묘는 턱을 괴고 사경행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경행은 차근차근 바둑을 뒀다. 걸음걸음 방법을 모색하는 심묘와 달랐다. 사경행은 그녀가 어느 곳에 돌을 둘지,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 알아챈 것 같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수를 잘 방비했다. 반 시진 동안 사경행은 심묘를 몇 번이나 이겼다.
심묘는 전생에 부수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열심히 바둑을 연습했다. 그래서 세상 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적수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경행은 어찌해도 이기기 어려우니 천적 같았다. 심묘는 바둑을 배우고 난 후 처음으로 수를 무르고 싶었다. 사경행이 또 자신의 수를 막자 심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피곤해요. 더 안 할래요.”
“하기 싫은 거야, 할 수 없는 거야? 부탁하면 가르쳐줄 수도 있는데.”
심묘는 사경행의 놀림조에 분노했다. 깊은 밤에 찾아와 바둑을 두자고 하자니.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를 바로 내보냈을 것이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심묘는 사경행의 바둑 솜씨가 의외였다. 사경행은 무술로 유명했지만, 그의 다른 장기는 들은 적 없었다. 그러나 따져보면 사경행은 천하를 손바닥에 두고 가지고 노는 사람이니 바둑을 잘 둔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틀 후 준비는 잘됐나요?”
이틀 후는 심묘가 원외랑부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심묘와 사경행이 처음으로 연합해 꾸민 계략을 펼치는 날이기도 했다. 그들은 두 명의 태자를 해칠 것이었다. 이는 간담이 서늘해질 이야기였지만 심묘에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은 전생에 태자를 낳았기에 태자의 지위가 무섭지 않았다. 사경행은 형이 황제이고 그의 조카가 태자이니 더욱 아무렇지 않겠지.
“걱정하지 마. 실수는 없어. 네 마차도 잘 준비되었지만, 정말 갈 테냐? 넌 가지 않아도 된다.”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안 가요? 전 그들이 더 승승장구하길 바란다구요.”
심묘는 도리어 살짝 웃었다.
“제가 가면 연극은 더욱 진짜 같을 거예요. 그래야 나중에 그들이 잘못된 걸 발견했을 때 더 재밌지 않겠어요?”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흉악하네?”
“흉악한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경행의 눈빛에는 정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난 좋아.”
사경행은 말만 짓궂었지, 대하는 행동은 여전히 정중했다. 심묘는 갑자기 사경행이 끼어들어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일이 수월해진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오래 고민하는 일을 사경행은 쉽게 해결했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의지해나가는 것도 불안했다. 전생에서 한 남자를 온 마음으로 신임하면 어떻게 되는지 처절하리만큼 잘 배웠다. 그때의 교훈을 뼛속에 새긴 채 다시 살고 있으니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자신은 달라졌다. 일 처리에 용감했으며 담력과 지혜를 모두 겸비했다. 그러나 남녀 사이의 정에 관한 일에서는 예외였다. 극심한 상처만 받았기에 조금도 나아지지도 못했다.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누군가 붙잡고 곁에서 부드럽게 가르친다 해도 잘 알지 못할 터였다.
사경행은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의 눈빛은 무거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둑알을 들고 있는 심묘는 등불 아래 단정히 앉아 있었다. 활짝 핀 부드러운 푸른 연꽃 같았다. 사경행의 두 눈이 밤처럼 검고 깊어졌다. 생각에 잠긴 듯 심묘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이 일이 끝나면 난 너와 혼인할 것이다. 심교교.”
* * *
이틀 후. 심묘는 일찍 일어났다. 나담도 일찍부터 몸치장을 했다. 활발한 성격인 나담은 장군부에서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런데 납치 사건 이후 심구와 나릉은 두 아가씨의 외출 횟수를 줄였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긴 무리의 호위가 따르게 했다. 그러나 심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조용한 것을 좋아하니 부에서만 생활해도 문제없었다. 그러나 바깥을 쏘다니길 즐기는 나담은 시일이 지나도 도통 변화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를 나가서 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에 겨워했다.
심구와 나릉은 몇 마디를 당부했고 심묘에게 아지와 모경을 데려가게 했다. 아지와 모경은 장군부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호위면서 심묘의 호위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억울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면 직접 손쓰면 되는 거야. 두려워할 필요 없어.”
사실 심구는 심동릉의 초대에 응하는 것을 반대했다. 자신은 그녀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다. 심동릉은 심청과 심모와는 달리 심묘를 미워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데다 심부에서 대방과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늘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래 심가 이방에 큰일이 생겼는데 유독 심동릉과 그 모친 만 이낭만 탈이 없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게다가 심모의 혼인이 엉망진창으로 엉킨 것 역시 심동릉이 관여했다는 심증이 있었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유리한 것은 좇고 해로운 것은 피하게 된다. 심구 자신은 심묘가 심동릉과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래서 심묘가 원외랑부에 방문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심동릉이 나쁜 생각을 품고 심묘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달성한다면…….
심묘는 걱정하는 심구를 미소로 달랬다.
“나도 알아. 나담 언니도 함께 가니, 무슨 일은 없을 거야.”
나담도 웃었다.
“맞아, 맞아. 오라버니, 그렇게 안심 안 되면 같이 가도 돼.”
심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부에 일이 있어. 게다가 향을 품평하다니, 코가 막힐 거야.”
문관이 무장의 거친 면을 좋아하지 않은 듯 무장도 유약해 보이는 문관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구는 향을 왜 품평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몇백 냥이 나가는 향을 태우다니 자신은 다시 태어나도 즐길 수 없을 듯했다.
“오라버니, 안심해. 내가 심묘를 잘 지킬게.”
심구가 호랑이 같은 얼굴로 그녀를 훈계했다.
“네 어설픈 재주에 기대려고? 지난번 죽을 뻔해서 한 달여간 고 태의를 고생시킨 사람은 누구더라?”
그때 일을 이야기하길 꺼리는 나담은 혀를 내밀고 도움을 청하는 시선으로 나릉을 바라보았다. 나릉은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띠웠다.
“늘 조심해. 원외랑부에서 일찍 돌아오고. 날이 어두워지면 안전하지 않아.”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심묘와 혼인하려 들자 나설안은 심묘의 혼사를 서둘렀다. 그때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이 나릉 자신이었다. 나설안은 한 가족인 자신의 인품과 가세를 잘 알았기에 아주 좋게 평가하는 듯했다. 그러나 예왕 덕분에 혼사가 미뤄졌기에 나설안은 더는 심묘의 신랑감을 찾는 일을 급하게 진행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나릉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밝혔기에 이전과 달리 각별하게 행동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러나 나릉의 조금도 숨기지 않는 애정에 심묘는 무관심한 척, 회피로 줄곧 응대했다. 이때 나담이 떠나자고 재촉했다.
“빨리 출발하자. 늦으면 안 돼.”
그제야 두 사람은 인사하며 마차를 타러 갔다. 마차 안에서 나담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심묘가 나담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혼례 말이야. 급하진 않지만 언젠가 시집을 가야 해. 고모는 올해 안에 네 혼사를 정하신다고 하셨어. 너는 조건도 좋으니까.”
심묘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담은 자신의 혼사에 마음을 쓰는 모양이었다. 장군부의 지위는 미묘했다. 잘 이용하면 이익이지만 잘못 이용하면 재난을 불러올 위치였다. 명제 황실이 장군부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심신이 병권을 이용해 언젠가 황실을 넘볼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장군부의 유일한 적녀와 혼인하는 것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일이었다. 심묘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순간 심묘는 사경행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 일이 끝나면 난 너와 혼인할 것이다. 심교교.”
사경행은 평온하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뿐,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의문을 품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곧 혼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루어질 리 없는 허튼소리였다. 자신은 명제 장군의 적녀이고 사경행은 대량의 예왕이다. 대량은 강성하니 예왕과 명제 공주가 혼인해도 사람들은 명제 공주가 신분 높은 사람에게 시집간다고 말할 터였다. 사경행과의 혼인은 장군부의 지위 때문에 몹시 곤란한 일이었다.
무거운 시선으로 고민하던 심묘를 나담이 건드렸다. 심묘가 정신을 차린 것 같자 나담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정신이 없어? 내 물음에 대답도 안 하고.”
“뭐라고 물었는데?”
나담은 유감스럽다는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네가 어떤 사람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물었어.”
당황한 심묘를 보며 나담은 손가락을 꼽았다.
“나릉 오라버니는 온화하고 사려가 깊어. 게다가 남의 속내를 잘 알지. 소 공자는 너에게 정이 깊고, 소 부인도 널 좋아해. 풍 공자는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아 보여. 그리고 풍안녕이 보호해 줄 테니, 네 생활도 좋을 거야. 이 세 사람은 모두 청년 준재야.”
나담이 심묘의 안색을 세심히 살폈다.
“넌 이들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심묘가 실소하며 대답했다.
“응.”
“심묘야, 너 이러면 안 돼. 완벽한 걸 요구하는 건 좋지만 눈이 너무 높으면 나빠. 세 사람은 좋은 인재야. 정경성의 아가씨들은 그들의 시첩이라도 하려고 다툴 거야.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첩도 만들지 않겠다 약속했잖아.”
나담이 심묘를 바라보더니 결국 고개를 가로저어 탄식했다.
“정말로 세 사람 다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구나. 내가 본 책에서 마음이 이끌린 아가씨의 얼굴은 노을처럼 붉고, 새끼 사슴처럼 마구 돌아다닌다고 했어. 네 마음속 사슴은 나오지 않았네.”
심묘는 웃음이 났다.
“언니, 그게 무슨 엉터리 같은 말이야? 내 일에 왜 그리 많이 생각해? 설마 어디 아픈 거야?”
나담이 황급히 목을 가렸다.
“그런 말 하지 말아. 며칠 전부터 목구멍이 가려워서 감기일까 걱정이야. 고 태의에게 진찰해달라 하려 했는데, 요 며칠 그림자도 안 보여. 정말 갖춰야 할 도리를 찾아볼 수 없는 의원이야.”
나담은 조금 불만스러웠다. 심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고양은 명제에서 태의 신분이지만 대량의 신하였다. 그런 그의 머리를 온종일 아프게 만드는 것은 나담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원외랑부. 심동릉은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분도 바르지 않고 머리에는 수수한 옥비녀를 꽂아 담백하게 단장했다. 다만 밝은 노란색의 긴 치마는 고급 옷감이었다. 행화가 이리저리 보고 말했다.
“마님, 왜 오늘은 이렇게 간단히 꾸미세요? 마님의 미모는 타고났지만,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셔도 될 텐데요.”
“네가 뭘 아느냐?”
심동릉은 거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젊은 만 이낭처럼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간소한 단장이었어도 그녀가 하니 아름다웠다. 혼인 후 마님이 돼서 그런지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때때로 부의 하인들은 심동릉이 첩의 얼굴이라고 귓속말하기도 했다. 대부호 집안의 주모들은 대다수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대범했다. 둥글고 복스러우며 충직하고 성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심동릉은 눈이 크고 턱이 뾰족해 여우처럼 보였다. 전형적인 첩의 얼굴이었다. 이에 왕 부인과 왕 대인은 조금 불만스러웠으나 왕필이 좋아하니 넘어갔다.
심동릉은 거울을 잠시 바라보다가 옥비녀를 은비녀로 바꿨다. 이를 본 행화가 멈칫했다.
“그리 많은 생각할 필요 없어. 오늘은 아름다움을 뽐낼 날이 아니야. 내가 주연이 아니니까.”
“아니에요, 마님의 미모는 꾸미지 않으셔도 빛나는걸요.”
행화의 말을 들은 심동릉은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행화의 아첨이 아니었다. 오늘은 진국 태자가 심묘에게 ‘첫눈에 반하는’ 날이었다. 조연인 자신이 자태를 드러내지 않을수록 심묘의 품위 있고 출중한 모습이 돋보일 테니 ‘부부 인연’은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었다. 좋은 인연임을 증명하는 일에 사람이 많을수록 좋으니 왕필도 함께하기로 했다. 이쪽의 공로가 큼을 태자에게 다시금 기억시키는 게 물론 더 큰 목적이었다.
심동릉은 일어나 심묘에게 보낸 초대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그녀를 초대한 시간은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로 아직 조금 남았다.
“먼저 부군과 함께 식사해야겠다. 식사 후 이봉각에 가면 적당하겠어.”
심동릉이 왕필과 아침을 먹으려는 사이 황보호는 이미 길에 올라 있었다.
향 품평을 하는 곳은 이봉각이었다. 이봉각은 정경성 교외에 위치한 정자로 선황제가 선황후를 위해 만든 곳이었다. 부귀한 집안의 사람들은 종종 이봉각에서 향을 품평하길 좋아했다. 향이 바람에 날려 푸른 하늘과 맞닿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광활한 자연과 하나가 된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춥긴 해도 아랫부분 협곡이 얼음으로 단장했으니 그를 바라보며 향을 논하는 것은 특별한 운치가 있었다. 황보호는 정교한 초대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명제 신하의 딸에게 ‘첫눈에 반하는’ 일은 듣기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자신은 짜인 각본대로 연극을 할 뿐이었다.
호위가 황보호에게 다 준비되었으니 출발할 수 있다고 전했다. 황보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 입구로 향했다. 초대장에는 진시(辰時, 오전 7시~9시)까지 이봉각으로 오라고 쓰여 있었다. 이봉각은 교외에 있기에 정경성과 거리가 있었다. 시간에 맞추려면 하늘이 막 밝아올 때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연극은 완벽을 기해야 했기에 불만스러워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외곽의 산길을 지났다. 다행히 마차 통행 차로가 있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봉각에 도착하기 전, 황보호는 호위들을 산허리에 남기고 혼자 걸어갔다. 초대장에 그에게 호위를 데려오지 말라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호위를 끌고 가면 확실히 ‘부부 인연’을 만드는 데 거추장스러우리라. 게다가 태자는 황보호와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일찍 오라고 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데 많은 사람이 있으면 확실히 불편했다.
황보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래쪽에 호위가 있을뿐더러, 명제 태자는 자신에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진국 태자부 사람들은 자신이 오늘 명제 태자와의 약속 때문에 외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명제 태자가 유력한 용의자일 터였다. 그래서 마음 편히 호위를 남기고 홀로 이봉각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후회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 편히 내린 결정은 때때로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하는 법이었다.
황보호가 산허리에서 홀로 이봉각으로 향할 때 명제 태자는 호위를 이끌며 이봉각으로 가는 다른 길 위에 있었다. 황보호는 앞서고 있었고 태자는 뒤에 있었지만 같은 길이 아니었기에 마주칠 리 없었다.
향이 두 개 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황보호가 이봉각에 도착했다. 정자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황보호를 보자마자 일어났다. 명제 태자였다.
황보호는 태자를 보고 놀랐다. 그는 태자가 자신보다 먼저 와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태자가 먼저 와 있으니 진시까지 오라는 요구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황보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 다른 사람은 오지 않았나?”
‘첫눈에 반하는’ 연극을 하기로 한 건데, 다른 사람이 없으니 연극을 시작할 수 없었다. 태자는 황보호에게 미소 지었다.
“급할 거 없습니다. 형님을 일찍 모신 건 둘이서 나눌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황보호는 잠시 수상쩍다 느꼈으나 곧 의심을 거두었다. 어차피 자신의 호위는 산허리에 있으니 부르면 서둘러 올 수 있다고 여겼다. 게다가 명제 태자 곁에도 호위가 있으니 변고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말해보게나.”
태자가 황보호에게 다가갔다.
“형님, 이상하지 않나요? 오늘 제가 왜 이렇게 일찍 부른 걸까요? 왜 형님의 호위를 산허리에 두게 한 걸까요?”
“아마 아주 중요한 일을 상의하려는 게지.”
황보호는 태자의 실없는 질문이 귀찮아 성의 없이 대답했다.
“형님을 암살하려는 것 같지 않나요?”
황보호는 크게 웃었다.
“농담인가. 자네 같지 않은데?”
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든 황보호는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그의 평온에 황보호는 불안해졌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태자가 자신을 암살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암살에 성공하려면 태자는 자신이 대동한 호위와 하인은 물론, 진국 태자부에 남아 있는 인원들까지 다 죽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용의선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황보호가 아직 태자의 답변을 듣지 못했을 때 태자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놀란 황보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덕분에 황보호는 뒤에서 가슴을 찌르려는 빛나는 검을 피할 수 있었다. 태자의 호위가 휘두른 칼이었다. 황보호는 지금이 심각한 상황임을 깨달았다. 태자는 호위를 데려왔지만, 자신은 호위를 산허리에 두고 온 상태였다. 분노한 황보호가 외쳤다.
“뭘 하려는 거지!”
태자가 무심하게 황보호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네요.”
호위 몇 명이 황보호에게 돌진했다. 황보호는 절망에 빠져 크게 소리쳤다.
“부수연! 네가 나를 해치면 진국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부수연!”
부수연은 태자의 이름이었다. 황보호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의 가슴에서 느리게 떨어지는 선혈에 바닥의 살얼음이 끈적였다.
이봉각은 큰 협곡을 등지고 있어 황보호의 마지막 외침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잔잔한 호수에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이는 것 같았다. 이봉각으로 서둘러 가던 태자 일행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있는 곳에선 메아리가 그다지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내 이름을 외치지 않았느냐?”
호위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듣지 못하였다고 고했다. 하기야 이 하늘 아래 부황과 친모를 제외하고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각 이봉각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초대장에 적힌 약속 시각은 사시였다. 자신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것이 습관인지라 진시에 산을 올랐다. 그러니 자신이 제일 먼저 도착할 터였다. 방금 분명 잘못 들은 것일 텐데도 무엇 때문인지 마음에 불안이 샘솟았다.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봉각에 도착하니 정자에 등을 지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황보호였다. 태자는 황보호가 이렇게 일찍 오다니 의외라고 생각했다. 태자가 웃으며 황보호에게 다가갔다.
“형님, 어째서 이렇게…….”
‘일찍’이라는 말을 꺼내기 전 태자가 황보호의 어깨를 쳤다. 황보호가 쿵 쓰러졌다. 놀란 태자는 바로 황보호를 잡았다. 황보호의 얼굴을 본 태자는 놀라 소리치기 무섭게 그를 잡은 손을 놓았다.
황보호는 눈을 부라리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매우 분노하고 경악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복은 습하고 차가웠다. 은색 장포 가슴 부근은 이미 선혈로 젖어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태자는 놀라 머리가 흐리멍덩했다. 황보호가 죽었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기 전 갑자기 한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호위 복장을 한 사람들은 황보호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보자마자 태자에게 달려들었다.
“무엄하다! 태자 전하를 해치다니! 목숨을 거둬주마!”
태자를 지키는 호위들 역시 칼을 뽑았고, 두 무리는 격돌했다. 태자는 그제야 자신에게 칼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황보호의 호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보호의 호위들은 어디 갔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건지 의아했지만 태자는 그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크게 외쳤다.
“나도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 진국 태자 전하는 이미 해를 당한 후였다! 절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호위가 태자의 말에 분노했다.
“허튼소리! 우리는 태자 전하의 명령대로 산허리에서 기다렸다. 그곳에서 네가 태자 전하를 해친다는 전하의 외침을 들었다!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황보호의 호위들은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태자는 호위의 보호를 받으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황보호가 자신이 그를 해쳤다고 외쳤다니 웃긴 이야기였다. 자신은 방금 이곳에 도착해서 죽은 그를 발견했거늘. 그 순간 태자는 이봉각에 도착하기 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던 일이 떠올랐다. 뚜렷이 듣지 못한 메아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보호가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외친 것인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태자는 혼란스러웠다.
“난 이제 이곳에 왔는데 어떻게 그를 해친단 말인가!”
“이 악랄한! 태자 전하를 속여 불러냈고, 또 전하께 우리 호위들을 산허리에 남기라고 했으면서! 독수를 쓴 원수에게 원한을 갚지 못하면 오늘부터 우리는 진국 사람이 아니다!”
태자는 벼락을 맞은 듯했다. 황보호에게 보낸 초대장은 분명 그 자신이 직접 쓴 것이었다. 태자는 ‘첫눈에 반하는’ 연극에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황보호에게 향을 품평하러 오라 초청했다. 이 향 품평은 왕필이 제의한 것이었다. 왕필의 부인이 ‘철없게도’ 심묘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우연히 한 곳에서 만났으니 그 후의 일은 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초대장에 호위를 산허리에 두고 오라는 이야기는 적지 않았다. 태자를 보호하던 호위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전하, 버티기 어렵습니다. 먼저 떠나시지요.”
태자는 황보호의 호위들을 바라보았다. 황보호는 이미 죽은 게 명백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방법은 없었다. 황보호의 호위들은 주인이 죽었으니 진국에 돌아가면 태자를 보호하지 못한 죄명으로 처형당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을 벌겋게 뜬 그들은 몹시 흉포하게 날뛰었다. 태자 역시 자신의 호위들이 점차 수세에 몰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일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대로 떠나면 자신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터였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나 저쪽 호위들의 기세를 보아하니 목숨을 보전하려면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할 듯했다. 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죽은 황보호를 한 번 바라본 그는 모질게 말했다.
“가자!”
이봉각에서 발생한 일을 외부 사람은 아직 몰랐다. 심동릉과 왕필은 마차 안에 있었다. 마차는 아직 이봉각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자신들은 오늘 증인이었으니 너무 일찍 가도 좋지 않았다. 심묘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자기들이 먼저 태자와 황보호를 만나고 있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왕필은 일부러 마차를 느리게 몰라고 분부했다.
심동릉은 왕필의 품에 기대 미소 지었다.
“부군,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셔요.”
왕필은 그녀를 껴안았다.
“당신과 혼인했으니 당연히 매일매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오늘이 지나면 지위가 더욱 높아질 테니 왕필은 아주 기뻤다. 원외랑부는 소금 밀매로 부유했지만 모두 비밀스럽게 은닉한 재산이었다. 누군가 고발하면 온 부가 말려들 수 있으니 때때로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자가 부족하지 않았기에 왕필에게 권세는 아주 중요했다. 그는 한 번에 권세가 치솟길 바랐다.
태자는 정통성을 가졌으나 다른 황자들보다 재능이 적었다. 그러나 문혜제가 태자를 중시하고 있으니 왕필은 태자를 더 잘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래 문혜제가 태자를 도와주자 태자는 점점 당당해졌고 태자의 사람들도 점점 야심을 부풀려갔다.
왕필은 심동릉을 바라보았다. 심동릉과 혼인한 후에야 이대로는 두각은 나타내기 어렵다고 깨달았다. 몇십 년이 지난 후에야 남다름을 선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늙었을 터이니 의미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심동릉은 꽤 잘 맞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는 감히 못 한 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달게 속삭여주었다.
그때, 마차가 갑자기 멈췄다. 왕필이 마차의 발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냐?”
호위 하나가 달려왔다. 그 호위는 태자의 사람이었다. 태자는 늘 이 호위를 파견해 왕필에게 말을 전했으니 왕필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호위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머리며 의상이 헝클어져 있었다.
“왕 대인, 사고가 생겼습니다.”
마차 안에 있던 심동릉은 멈칫했다. 일은 자신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변한 것 같았다. 순풍에 돛단 듯 무한한 영광을 상상했으나 말썽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하나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태자의 호위들은 황보호의 호위에게 태자는 결코 황보호에게 손을 쓰지 않았으며, 태자가 이봉각에 도착했을 때 황보호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온 힘을 다해 강조했다. 그러나 황보호의 호위들은 태자가 자기 주인을 죽였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 같았다. 오해는 이미 풀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더구나 피가 묻은 오해가 잇달아 찾아오니 하늘도 놀랄 죄명이었다.
“반드시 무슨 오해가 있을 겁니다. 오해는 풀면 되어요.”
심동릉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쓰며 왕필을 위로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깊은 위험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다른 사람은 왕필이 이 일의 원흉이라고 볼 터였다. 왕필이 좋은 향을 찾았다고 태자에게 말해서 태자가 황보호를 초청했는데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살인은 왕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어쨌든 황실이 격노할 테고 많은 사람이 연루되었으니 왕필 역시 화를 피해 무사할 리 없었다.
태자가 요행히 결백을 증명해도 향 품평은 왕필의 책략이었다. 왕필의 계책으로 황보호가 죽었으니 진국은 반드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태자의 맹우가 죽었으니 태자도 왕필에게 화풀이할 터였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왕필은 죄를 물어야 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왕필은 자신의 결말을 예상한 듯 안색이 매우 나빴다.
“먼저 부로 돌아갑시다, 태자부를 방문해, 도대체 무슨 일인지 확실히 물어야겠소.”
황보호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인 것인지, 왜 죽인 것인지, 대체 왜 태자의 명의로 일을 벌였는지 상황이 복잡해서 도통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어쨌든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일의 전말을 알아야 대책도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는 방향을 돌려 정경성 쪽으로 달렸다. 순간 심동릉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라 물었다.
“어째서 심묘는 보이지 않지?”
왕필은 바로 멍해졌다. 이 계책은 태자와 심묘의 혼인을 위해 꾸민 것이었다. 심동릉은 심묘와 거의 동시에 도착할 수 있게 출발 시각을 계산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한참을 멈춰 있었는데도 심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앞뒤로 트여 훤한 교외 산길에서 다른 마차는 보이지 않았다.
왕필은 심묘를 심동릉의 사촌 여동생으로만 알고 있었고 심묘의 성격을 몰랐다. 그저 심신의 병권 때문에 이용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심동릉은 심묘가 이방과 삼방을 다룬 수완을 보았기에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심묘가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이상했다. 심묘가 오늘 일어날 사고를 미리 알고 있던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세상에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없다. 설마 이 일이 심묘와 관련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그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진국 태자를 죽일 수는 없었다.
“심 소저가 있다면 일은 더욱 순조로울 거요.”
왕필은 심동릉의 말뜻을 오해했다. 그는 처벌받을 사람이 많아지면 자신이 받을 처벌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묘가 있다면 문혜제는 심신 때문에 난처할 터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독으로 왕필만 처벌하기엔 편파적이니 심묘만 있다면 어쨌든 많은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우리 먼저 부로 돌아갑시다. 심 소저도 돌아갔을지도 모르오. 먼저 태자 전하 쪽을 확인하고 이야기합시다.”
심동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왜인지 몰라도 심묘가 절대 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느꼈다. 심묘는 처음부터 이봉각에 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수완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무서웠다.
* * *
마차에 앉은 나담이 이마 위 흐른 땀을 닦았다.
“어떡해? 이렇게 오래 지체됐으니 서둘러 이봉각에 가도 늦을 거야.”
번화한 거리에서 그들이 탄 마차는 노부인과 부딪쳤다. 당연히 노부인은 많이 다쳤다. 심묘와 나담은 다친 노부인을 두고 떠날 수 없어서 호위들에게 노부인을 가까운 의원으로 옮기게 했다. 그녀들은 노부인이 괜찮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노부인이 깨어난 뒤에 다시 출발했다.
그녀들의 행동을 많은 백성이 보았다. 그들은 장군부 아가씨들이 백성을 자상하게 돌보니 품행이 올바르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나담과 심묘는 어쨌든 시간을 적지 않게 썼다. 서둘러 이봉각에 가도 정오에나 도착할 터였다.
“안 갈래.”
심묘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나담은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어? 왜 안가? 너는 신용 없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잖아.”
심묘는 깃털처럼 가볍게 웃었다.
“향 품평은 시간이 중요해. 가장 좋을 때는 아침이지. 공기가 깨끗할 때 향을 맡아야 상쾌해. 정오 이후에 향을 맡으면 다른 냄새들이 섞여 향을 맡기 어려워. 그렇다고 우리 때문에 계속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심묘는 모경을 불러 일이 있어 가지 못한다고 이봉각에 서신을 보내게 했다. 모경은 즉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나담은 좀 유감스러웠으나 사실 그녀도 외출이 목적이었지 시시한 향 품평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심묘에게 어렵게 외출한 만큼 대신 바람이나 쐬며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 심묘도 아직 이른 시간이고 호위가 있으니 흔쾌히 승낙했다.
신이 난 나담의 손에 이끌려 심묘는 한참을 돌아다녔다. 두 아가씨가 장군부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마차가 막 부 입구에 도착하자 남종이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돌아오셨네요. 주인어른도 마님도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네.”
나담은 웃으며 심묘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중앙 대청으로 들어가자 이야기하고 있던 나설안과 심신이 심묘와 나설안을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교교, 나담. 너희 어디 갔던 게냐?”
“오늘 원외랑부 왕 부인이 향 품평하러 오라고 이봉각으로 초청했어요. 가는 길에 노부인과 부딪쳤는데, 나와 언니는 그 부인을 돌보느라 약속 시각을 지킬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실례지만 아예 못 간다고 했어요. 그 후 정경성을 구경했구요. 왜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심묘는 심동릉을 ‘원외랑부 왕 부인’이라 말하면서 관계를 뚜렷이 구분했다. 마치 심동릉과 친척 관계임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나설안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난 놀라 죽을 뻔했단다. 진국 태자가 오늘 이봉각에서 암살당했어. 관련된 사람들은 검거되어 심문을 받을 거야. 왕필이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으나 널 본 사람은 없더구나. 나와 네 아버지는 급히 돌아왔는데 부에 너희가 없어서 사고가 났다고 여겼단다.”
나담은 깜짝 놀라 두서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누가 그렇게 무모한 짓을? 태평성세에 감히 진국 태자를 죽이다니요? 진국 태자의 호위는 무공이 높을 텐데, 어째서 자기 주인도 보호하지 못한 거예요?”
의아해하는 나담과 달리 심묘는 매우 평온했다. 그녀는 나설안을 다독였다.
“안심하세요. 나와 언니는 이봉각에 가지 않았어요. 오늘 노부인과 부딪친 일을 많은 백성이 보았어요. 말썽이 생기지 않게 우리는 우리 이름도 말했어요. 천하가 우리의 증인이에요. 우리는 당시 노부인을 돌보느라 바빴는데, 어디 이봉각에 갈 시간이 있었겠어요?”
많은 사람이 보았으니 거짓은 없었다. 분신술이라도 쓰면 모를까. 거리에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동시에 이봉각에 나타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심한 심신은 얼굴에 노기를 드러냈다.
“왕필은 담력도 크구나. 감히 우리 장군부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화를 입히려 하다니.”
나설안도 원망을 쏟아냈다.
“원외랑부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다니. 심동릉은 우리와 친척인데 이런 악랄한 생각을 하다니 어떻게 가족에게 계략을 꾸밀 수가 있지?”
“심부 이방과 삼방은 우리를 진심으로 대했나요?”
심묘의 냉소에 나설안과 심신은 침묵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나담이 웃으며 참견했다.
“에, 오늘 저와 심묘는 운이 좋았네요.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이봉각에 갔을 거예요. 황보호가 암살당했으니 그 자객의 무공은 아주 높을 거예요. 저와 심묘가 갔다면 아마 그 일에 연루되었을 테지요. 그 노부인에게 감사드려야겠네요.”
실소한 심묘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나담이 웅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초대장에는 진국 태자가 온다는 말이 없었어요. 진국 태자는 무엇 때문에 이봉각에 간 걸까요? 그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을까요? 설마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또 죽은 건 아닐까요?”
나담의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무척 지친 기색의 심구와 나릉이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을 본 나담이 놀라 외쳤다.
“심구 오라버니, 나릉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심구와 나릉의 의복은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핏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놀란 나설안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얼른 살폈다.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심구가 얼른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에요.”
나설안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러나 막 마음을 놓은 찰나 나담의 묻는 말이 들렸다.
“오라버니들은 오늘 진국 태자를 암살한 자객을 잡으러 간 거야? 자객의 무공이 대단했나 보다. 오라버니들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여.”
나담의 말에 동의하듯 심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하냐?”
심구와 나릉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상했다. 심구는 주변 하인을 모두 물리고,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담과 심묘를 바라보았다. 이를 눈치챈 심묘가 미소 지었다.
“나와 언니도 비밀을 지킬 테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
나담이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은 절대 누설하지 않을 거라 맹세했다. 진지한 심구의 모습에 심신과 나설안은 불안해했다. 나릉이 심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심구가 탄식하며 운을 뗐다.
“오늘 군부가 막으러 간 건 진국 태자를 죽인 자객이 아니라 진국 태자의 호위입니다.”
나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호위라니, 설마 그들이 명제에 해명을 원한 게냐?”
나설안은 진국 사람에게 호감이 없었다. 진국은 삼국 중 역사가 제일 짧았고, 황실부터 백성까지 하나같이 거만했다. 진국의 국력이 명제보다 좀 낫다고 매번 앞에서 건방을 떠니 눈에 거슬렸다. 심구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진국 태자의 호위는 진국 태자를 죽인 사람은 태자 전하며, 지금 태자 전하를 죽여 진국 태자의 복수를 하겠답니다.”
심신이 단숨에 일어났다.
“태자 전하가 진국 태자를 죽여? 불가능한 일이야.”
허약한 태자가 그런 일에 성공했다는 진위는 둘째 치고 지금 명제는 진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망치는 일을 저지를 리 없었다. 황보호를 죽이면 진국은 노발대발할 테니 동맹은 말할 것도 없고 원수가 되는 셈이었다. 태자는 바보가 아니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일에 힘을 들일 리 없었다.
심구는 곤혹스러워하며 눈썹 끝을 떨궜다.
“저도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어요. 그러나 호위들은 당시 산 위에서 진국 태자가 태자 전하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걸 들었답니다. 진국 태자가 태자 전하가 살인범이라 했다고요. 그들은 진국 태자의 호위이니 진범을 놓아줄 이유가 없어요.”
“진국 태자의 호위는 그와 같이 가지 않았느냐? 왜 들었다고 말하는 거지?”
나설안의 물음에 나릉이 이어서 말했다.
“그것이 바로 의문점입니다. 진국 태자 호위의 말에 의하면 태자 전하가 진국 태자에게 이봉각으로 오라는 초대장을 전하셨답니다. 거기에는 상의할 일이 있으니 호위를 두고 진국 태자 혼자 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자 전하는 진국 태자에게 보낸 초대장에 결코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십니다. 관아에서 태자 전하의 초대장을 찾고 있으나, 그 초대장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진국 태자가 죽었으니 확인할 수 없고, 서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니 아주 초조한 상황입니다.”
“태자 전하와 진국 태자가 향을 품평하러 온다는 말을 왜 왕 부인은 나와 심묘에게 하지 않은 거지?”
나담의 웅얼거림에 방 안 사람은 일제히 멍해졌다. 그들은 태자와 황보호 사이만 관심을 가지고 심묘 쪽은 소홀히 여겼다. 나담의 말대로 태자와 황보호가 이봉각에 오는데 왜 심묘와 나담을 초대한 것일까 의아했다. 나담은 정경성 사람들과 관계가 없으나 심묘는 달랐다. 심묘는 심신의 딸이니까.
심동릉은 아마 태자와 황보호도 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왜 심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인지 이상했다. 깜빡 잊은 것일 수도 있지만 고의로 말하지 않은 것이라면……. 사람들의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 되겠다. 심동릉에게 분명히 물어봐야겠어.”
심구가 나설안을 막았다.
“어머니, 심동릉은 왕필과 감옥 안에 있으니 만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칫 우리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질 테고요. 가셔서는 안 됩니다.”
두 명의 태자가 함께 이봉각에 갔는데 하나는 죽고 하나는 영문을 모르게 살인범이 되었다. 문혜제는 이 일을 알고 충격에 쓰러질 뻔했다. 그는 진국 사람을 달래기 위해 명제가 ‘공정하게 일 처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티 내기 위해 몇 사람을 잡아들였다. 문혜제는 풀 곳이 없는 화를 향 품평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왕필에게 모두 쏟아냈다. 왕필의 위세와 영화를 누리겠다는 아름다운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생사 여부를 묻는 것조차 망언이었다.
장군부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으나, 심묘만이 지난날과 다름없이 평온했다.
“이 일은 우리와 관계가 없어요. 그저 어떻게 처리할지 보면 될 일입니다.”
심구가 심묘의 표정을 주시했다.
“교교, 진국 태자가 암살당했는데 놀랍지 않니? 태자 전하가 범인인 것도 의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심묘는 살짝 웃었다.
“뭐가 의아해? 태자 전하와 진국 태자가 상의할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상의하는 도중 격렬한 의견 차이가 발생해 태자 전하가 충동적으로 그를 죽였을 수도 있어. 그간 명제에 이런 사건이 없지 않았잖아. 별것이 아닌 일에 놀랄 필요 있어?”
심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묘의 해명에도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심묘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격렬한 의견 차이는 살인을 저지르기엔 부족한 동기였다. 더구나 황보호는 일국의 귀한 태자이자, 연맹해 대량에 맞서고자 뜻을 모은 동료였다.
심신과 나설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린 심묘야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자신들은 조정의 관리이니 작은 일로도 연루될 수 있었다. 더구나 황보호는 명제에서 죽었고, 명제 태자는 유력한 범인 후보였다. 황보호의 호위들이 이미 진국에 이 일을 전했을 테니 아들과 딸을 명제에서 잃은 진국 황제의 벽력같은 질타를 누가 감당할까?
명제와 진국의 동맹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량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미지수였다. 이 밤,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장군부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들은 황보호와 태자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미래에 발생할 변수가 걱정스러워 근심할 뿐.
사경행이 심묘를 찾아왔을 때 심묘는 창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황보호가 죽었다. 전생에서 진국에 인질로 있던 5년간은 벗어날 방법이 없는 악몽이었다. 명안 공주와 황보호는 매일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자신을 괴롭혔다. 진국 태자인 황보호가 앞장서 사람을 괴롭히니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따라 하기 바빴다.
그러나 심묘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황보호와 명안 공주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지는 않았다. 전생에 장군부를 처참하게 상하게 한 것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껏해야 자신의 인생에 돌을 던진 것뿐이다. 이번 생에 그들이 먼저 계략을 꾸미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죽었다. 심묘는 얼떨떨했다.
이번 생에 자신은 복수의 길을 다짐하고 장군부가 실패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나 황실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장군부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원수는 시작부터 대단히 강대한 존재이니 아직 승부수를 던지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때때로는, 자신이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혹도 들었다.
그때 나무에서 그림자가 내려와 심묘의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심묘가 정신을 차리자 사경행이 아름답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날 생각한 거야? 넋을 놓았네?”
심묘가 창문을 닫으려 했으나 사경행은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 손으로 심묘의 어깨를 눌러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다른 손으로 창문을 닫았다.
“얼지 않게 조심해.”
창문 바깥 한쪽 구석에 서서 떨고 있는 종양이 보였다. 심묘가 사경행의 팔을 치우고 탁자에 앉았다.
“일은 어때요?”
“문제없어.”
사경행도 앉으며 심묘에게 차를 달라고 손짓했다. 심묘는 화를 참으며 사경행에게 찻잔을 건넸다.
“당신은 진국 사람들이 진상을 발견하지 못한 거라 확신해요?”
사경행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발견 못 했어. 사람들이 모두 너와 나처럼 똑똑한 건 아니야.”
사람을 칭찬하면서 자신도 빠뜨리지 않는 사경행을 보며 심묘가 눈을 흘겼다. 맞은편에서 천천히 차를 마시는 사경행을 보니 마음속에 파도가 쳤다. 오늘 일은 자신과 사경행이 함께 계획한 것이다.
사경행의 수하 중에는 특별한 재주꾼이 많았다. 외모를 정묘하게 바꾸는 사람, 목소리를 똑같이 모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한번 본 필적을 똑같이 베껴 쓰는 사람도 있었다. 사경행은 황보호의 초대장을 바꿔치기한 다음 약속 시간도 변경했다. 산에 오른 후 사경행의 사람은 ‘태자’로 바뀌고, 태자 곁 고개 숙인 호위가 ‘태자의 목소리와 말투’로 말했다. 황보호와 태자는 최근 들어 자주 보긴 했지만 서로 진정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황보호는 이상한 점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후 일련의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으로써 명제 태자가 황보호를 죽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수완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조만간 오해는 진실이 될 터였다. 동맹 체결이 없던 일이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진국과 명제는 철천지원수가 될 것이다. 이에 문혜제는 진국 황제의 노기를 풀어주기 위해 태자를 희생시킬 게 분명했다.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넌 왜 황제가 틀림없이 태자를 희생시킬 거라 생각하지? 친아들인데?”
심묘는 살짝 웃었다.
“내 둘째 숙부 기억해요?”
“기억해.”
“심원도 숙부의 친아들이지만 심원에게 사고가 나자마자 숙부는 서둘러 심원과의 관계를 분명히 했어요. 황제도 그와 같을 거예요. 황실에는 혈육의 정이 희박하지요. 천하 대의를 위한다면서 부모도 봐주지 않아요. 태자가 누명을 쓴 것을 알아도 황제는 쓴 열매를 삼킬 수밖에 없을 거예요.”
심묘의 말은 황가를 비웃고 있었다. 눈꼬리에 흉악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사경행은 생각에 잠긴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황가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는 심묘가 있는 힘을 다해 가려도 그 감정을 감출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사경행은 지금 그것을 포착했다. 그는 의심스러웠으나 따져 묻지 않았다. 도리어 환하게 웃었다.
“넌 황실을 잘 아는 듯하구나. 직접 경험한 듯 말하니.”
심묘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사경행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부수의에게 시집간 후 황위 쟁탈은 더욱 격렬해졌다. 아홉 황자 중 죽은 사람도 있고, 폐인이 된 사람도, 행방불명된 사람도 있었다. 간신히 생명을 건진 사람은 부수의가 등극한 후 날조된 죄명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것이 황가의 본성이었다.
부수의와 문혜제 사이도 외줄타기처럼 위태위태했다. 문혜제는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했고 부수의는 아버지가 일찍 죽길 바랐다. 서현비와 동숙비,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궁중에서 혈육 간 정을 품는 사람이 바보였다.
심묘는 전생에 사람의 양심을 믿었다. 그래서 형제와 부친에게 손을 쓴 부수의가 자식에게도 손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잊었다. 애증을 떠나 어찌 되었든 부수의는 부명과 완유의 아버지였다. 자신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수의는 딸을 흉노에 화친 보내고, 아들을 죽음의 길로 핍박했다. 이 빚은 반드시 받아낼 것이었다.
심묘의 눈 아래 드리운 고통스러운 기색을 본 사경행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느 부분이 심묘의 상심을 건드린 것인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다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곤란한 점이 있으면 내게 말하거라. 내가 해결해주마.”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물론 심묘는 사경행이 다 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두 명의 태자를 죽였다. 그의 의도대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혜제는 누군가의 계략에 빠진 것을 알 테지만 반박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었다. 사경행은 사람의 말문을 막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핍박하는 데 능수능란했다. 그는 대담하고 능력 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게 남을 속여 약점을 잡히지 않으니 세상에 그가 못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전생에 만났으면 더 좋았을걸. 그러나 심묘는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당신더러 이 강산의 모습을 바꾸라 하면 할 수 있나요?”
푸른빛의 옥 찻잔을 든 청년이 심묘의 말을 듣고 미소를 띠었다. 그의 용모는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봄기운을 품은 해당화처럼 고귀하고 우아했다. 그러나 눈빛은 칼같이 예리했고 말투는 조소를 띠고 있었다.
“명제의 황권을 무너뜨리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네가 원하면 모두 네 것이다.”
* * *
명제 황실은 세상 사람을 속이지 못했다. 황보호가 명제 태자의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점점 퍼져 나갔다. 문혜제는 황보호의 호위를 가두려 했다. 지금 일은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변해서 통제하지 못하면 큰 난리가 날 터였다.
물론 진국 태자부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국 황제의 말을 문혜제에게 빠르게 전했다. 진국 황제는 문혜제에게 합당한 설명을 요구했고 그 설명에 납득할 수 없다면 병사를 이끌고 명제를 평정하겠다고 경고했다.
예전이라면 명제도 진국에 맞설 테지만 지금은 대량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진국을 상대하면 명제는 그대로 역사 속에서 사라질지도 몰랐다. 증좌가 확실하니 문혜제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태자도 감옥에 가뒀다. 특별히 돌보는 사람을 두긴 했으나, 종국에는 태자를 버려 명제를 지킬 셈이었다.
문혜제의 결정에 다른 황자들이 어찌 생각하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조정 신하들의 마음은 서늘해졌다. 태자가 범인이라고 여기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는데도 문혜제는 태자를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문혜제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다고 비난할 수만도 없었다. 그가 태자를 감옥에 가둔 것은 진국 황제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태자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런 뒤숭숭한 상황에서는 황보호의 호위 손에 태자가 죽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차라리 죄수가 되면 감옥에서 많은 사람이 지키니 변고가 일어날 리 없었다.
애석하게도 황실 사람 중에는 문혜제의 생각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처벌에 황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황후가 양심전에 쳐들어와 노기등등하게 캐물었다.
“폐하, 태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을 아시면서 왜 그를 가두셨나이까? 장래 조정 대신들이 태자를 어찌 볼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문혜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이오.”
선황이 살아 있을 때도 황위 쟁탈은 지금처럼 맹렬했다. 그 속에서 황후 친정의 지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문혜제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 문혜제가 즉위한 후 황후의 친정은 권력을 빼앗겼기에 그는 황후의 체면을 더욱 챙겨주었다. 더구나 황후는 태자의 생모였고, 내명부의 수장 역할을 잘 해냈다.
“폐하, 명령을 거둬주시길 신첩이 간청하나이다. 태자는 앞으로 조정 대신과 마주해야 하는데, 폐하께서 이렇게 하시면, 천하 백성의 오해를 살 겁니다.”
황후는 문혜제의 결정에 지금까지 반박하지 않았으나 어머니로서 아들 일에는 민감했다. 황후는 태자의 미래에 의외의 사고도 발생하길 원하지 않았다. 오물 한 방울도 몸에 묻히게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진국 태자를 모해했다는 죄명이 증명되면 목숨마저 보전하기 어려웠다. 황후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나 조정 일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일단 위험의 징후가 보이면 커지기 전에 잘라버려야 했다.
“짐이 하는 일에 당신이 간섭하는 건 옳지 않소.”
요 며칠간 이 일에 대응하느라 몹시 애를 쓴 문혜제는 답답했다. 기어코 황후까지 끼어들자 성질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노기를 겨우 참고 짧게 대꾸했다. 문혜제와 오랫동안 부부로 지낸 그녀는 문혜제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다. 황후는 표정을 누그러뜨린 후 부드럽게 말했다.
“신첩도 폐하께서 답답하신 걸 압니다. 방금은 태자가 걱정돼 신첩이 충동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부디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폐하께서는 직접 어린 태자를 가르치셨습니다. 태자의 마음속에서 폐하는 가장 영명한 성군이십니다. 지금 신첩과 폐하는 이 일과 태자가 무관함을 압니다. 온후한 태자가 어떻게 살인을 하겠습니까? 만약 했대도 바보처럼 대낮에 실행하진 않았을 겁니다. 폐하, 태자는 무고합니다. 설마 태자가 날조된 죄명을 등에 지고 나쁜 평판에 시달리는 걸 가만히 보고 계실 겁니까?”
회유하는 황후의 말은 문혜제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 느슨해졌다. 자신도 아홉 황자 중 태자를 가장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태자가 이유 없이 꺾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때, 태감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현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황후의 표정은 변함없었으나, 그녀는 소매 안에서 양손을 팽팽히 쥐었다. 서현비는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 두 명의 황자를 낳아 평소 문혜제의 총애를 받았다.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의 야심을 황후도 모르지 않았다. 서현비는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길 바랐다. 그러니 태자에게 사고가 생기면 서현비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