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장 (61/71)

50장

서현비가 얌전하고 정숙한 모양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들 둘이 장성했는데도 서현비의 용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매일 양젖으로 목욕한다고 하는데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 멀리서 보아도 피부가 매우 매끄러웠다. 동시에 부인 특유의 성숙함과 우아함도 보였다. 궁중에 있는 삼천 미녀 중에서도 서현비의 용모는 확실히 독보적일 정도였다. 그래서 서현비의 오만함을 알면서도 늘 그녀를 예뻐하는 문혜제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서현비는 문혜제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서현비가 미소 지었다.

“최근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여 신첩이 어선방의 요리사에게 자설 제비집을 만들게 했습니다. 폐하, 한번 맛보시지요. 그런데 황후마마도 이곳에 계실지는 몰랐습니다.”

황후는 서현비와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냉담하게 웃었다. 그러나 서현비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마마, 오늘 폐하를 찾아오신 건 태자 전하 때문인가요?”

문혜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나, 황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하시는구려.”

서현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문혜제를 한 번 보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서현비는 궁인에게 바구니를 놓게 하며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폐하께서 이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니 걱정스럽습니다. 마마께서는 어찌 폐하의 마음을 알아주시지 않고 이 결정적인 시기에 폐하께 폐를 끼치시나요? 태자 전하의 일은 한 사람의 생명만 관련된 게 아닙니다. 멀쩡한 진국 태자가 명제에서 사망했는데, 그날 진국 태자와 있던 사람은 태자 전하였습니다. 신첩은 당연히 태자 전하가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믿지만, 증좌가 있습니다. 증좌가 있는데 어떻게 죄를 묻지 않겠습니까? 진국 사람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마마의 말을 듣고 태자 전하를 풀어주시면 진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마마는 태자 전하만 염두에 두면 안 됩니다. 천하를 생각하셔야지요.”

서현비의 말에 황후의 안색이 변했다.

“입 다물라.”

황후의 일갈에 서현비가 놀라는 척하며 물러났다. 그녀는 억울한 듯 문혜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신첩은 마마를 생각해 말씀드린 것인데, 마마는 그리 여기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신첩은 정말 억울합니다.”

문혜제는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 역시 서현비가 이간질해 불화를 일으키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말을 부인할 방법이 없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었다. 황보호 암살에 연루된 건 태자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에 한 터럭의 착오도 허용할 수 없었다. 일을 잘못 처리하면 앞으로 명제에 어떤 재난을 불러올지 누구도 분명히 알지 못했다. 문혜제는 태자를 생각하니 갑갑했다. 눈앞의 신경전에도 환멸을 느꼈다.

“모두 물러가라. 짐 혼자 조용히 있겠다.”

황후는 문혜제가 마음을 풀려 할 때 서현비가 훼방을 놓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앞의 성취가 모두 쓸모없어져 불만스러웠다. 서현비는 선수를 쳤다.

“폐하께서 방해받길 원치 않으시니 신첩들은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옥체를 보중하시길 바랍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소서.”

문혜제는 고개도 들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황후는 원치 않아도 부득이 서현비와 함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양심전을 나온 황후가 서현비를 보며 냉소했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그러나 네가 낳은 아들이 내 아들을 대신할 방법은 영원히 없을 게다.”

“마마의 말씀은 황송할 따름입니다. 태자 전하는 고귀한 분이십니다. 저는 일심으로 전하가 잘되시길 바랍니다. 게다가 형제 사이는 우애가 좋아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전하를 대신하겠습니까?”

서현비가 깔깔 웃었다. 그녀는 황후의 초조한 표정을 감상했다.

“제가 대신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마마입니다.”

서현비는 귀밑머리 옆의 진주를 요염하게 매만지며 떠났다. 홀로 남겨진 황후는 그 자리에 서서 이를 갈았다.

황후와 서현비가 양심전에 방문한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동숙비는 침상에 앉아 금 연주를 듣고 있었다. 연주는 높은 산 속 흐르는 물 같았다. 동숙비는 다른 사람과 다툼을 싫어하며 부처를 믿었다. 평소 사당에 가지 않을 때는 편전에서 금을 연주하기도 했다. 궁중 사람이 아니라 외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궁중 사람들은 그녀를 가장 소홀히 여겼고 그녀가 어떻게 황제의 눈에 들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녀 아래 앉은 남자는 옥색 비단 장포를 입고 있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아 그 역시 연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한 곡이 끝나자 여인이 금을 껴안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동숙비가 손짓하자 궁녀가 상으로 은을 주었다. 은을 건네받은 여인은 편전을 나섰다. 편전 안 사람이 모두 물러나자 부수의가 웃었다.

“어머니, 오늘 유달리 기쁘신 것 같네요.”

“황후마마는 가만히 있지 않으셨지. 직접 양심전에 가 태자 전하를 위해 사정하셨고 서현비도 따라갔지. 서현비와 황후마마 간의 묵은 감정이 곧 폭발할 테니 기뻐할 만하지 않겠느냐.”

동숙비는 아들을 따라 인자하게 웃었다.

“태자 전하가 곤궁해졌으니, 서현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두 형제도 태자 전하를 대신해 권력을 차지하려 할 테고, 서현비도 궁중에서 힘을 쓸 겁니다.”

동숙비가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도요새와 무명조개가 서로 다투지 않으면 어부가 어떻게 이익을 얻겠느냐?”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부수의는 동숙비와 닮아 평소 냉혹해 보여도 웃을 때는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경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넌 요즘 어떠냐?”

동숙비의 물음에 부수의가 미소 지었다.

“조금 재미난 비밀을 발견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 대답에 동숙비는 나무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네가 알아서 잘하니 네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겠다. 그러나 넌 응당 혼인할 나이야. 네 나이는 적지 않으니 더 시간이 흐르면 아니 된다. 서현비는 널 권력 없는 여자와 혼인시키지 못해 한스러워하고 있다. 심묘가 계속 널 사모했다면 넌 심묘와 혼인해 장군부의 조력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의 성격이 변한 것은 둘째 치고 장군부와의 혼사를 네가 감당할 수 없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동숙비의 탄식에 부수의가 웃었다.

“저뿐이 아닙니다. 심묘를 명제에서 감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태자 전하를 제외한 황자가 장군부와 인척을 맺으면 부황께서 경계하실 겁니다. 그런데 변고가 생겨 태자 전하도 심묘를 차지할 수 없게 되셨지요. 하늘은 우리 편에 선 듯합니다. 명제에서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관리 집안은 장군부와 혼인하지 않을 터이니, 가업만 클 뿐 심묘는 시집을 잘 갈 수 없습니다.”

부수의가 조금도 유감스럽지 않다는 듯 대꾸하자 동숙비가 탄식했다.

“네 말이 옳다. 태자는 이번 일로 곤두박질쳤다. 진국 태자의 일은 절대 쉬이 해결될 리 없다. 넌 누가 주모한 것 같으냐? 주왕? 리왕?”

부수의는 형제를 믿지 않기에 일파를 만들지 않았다. 황위 쟁탈에서 주왕 일파와 리왕 일파가 우세해지자 문혜제는 최근 노골적으로 태자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문혜제가 태자와 심묘를 혼인시키려 했으니 주왕과 리왕은 조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적인 태자를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이 절묘한 시기에 진국 태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태자가 계략에 당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주왕이나 리왕이 이렇게 대범하게 손을 쓰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부수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두 사람이 한 건 아닙니다.”

동숙비가 듣고 멍해져 물었다.

“설마 다른 사람이 했다는 것이냐?”

부수의의 머릿속에 예왕과 심묘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왕과 심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지만 심묘의 배후에서 지시해주는 사람이 예왕인 게 틀림없었다.

문혜제는 황후를 이용해 장군부가 태자부와 인척을 맺으려는지 탐색했다. 그러나 예왕 때문에 문혜제는 태자와 심묘의 혼인을 미루게 되었다. 이봉각에서 향 품평을 하려고 했던 일은 분명 심묘를 겨눈 계략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황보호와 태자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심묘는 여전히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날 심묘도 이봉각에 가려 했으나 노부인과 부딪친 일 때문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교묘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예왕이 배후에서 조종한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정말 그가 꾸민 일이라면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명제에 있으면서도 양국 태자에게 계략을 꾸미다니.

“왜 그러느냐?”

잠시 넋을 잃은 부수의를 동숙비가 일깨웠다. 부수의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 * *

계우서와 고양은 드디어 탑뢰에서 풀려났다. 두 사람은 탑뢰 안 죄수를 보며 각양각색의 수완을 배웠다. 그나마 고양은 괜찮았으나 곱게 자란 계우서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매일 구역질을 하느라 식사를 못 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풀려난 두 사람은 눈물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목이 메었다.

“난 풍선전당포로 가서 목욕한 다음에 옷을 갈아입을 거야. 그럼 이만.”

계우서는 휙 달려갔다. 고양은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보며 힘이 빠졌다. 사경행이 이렇게 무정할 줄은 몰랐다. 심묘의 이야기를 전하는 걸 까먹었다고 자신들을 탑뢰에 가둘 줄이야. 탑뢰는 무공이 높은 철의도 제대로 버티지 못한 곳이다.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자신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홍릉은 풍선전당포로 돌아온 계우서를 위해 목욕물을 준비했다. 목욕과 식사를 마친 계우서는 서재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먼지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서재에는 기밀이 많아 다른 사람들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계우서는 스스로 빗자루를 들고 청소했다.

서재가 가까스로 볼 만해지자 계우서는 탁자 위 두껍게 쌓인 편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참 후 몽롱한 정신으로 마지막 편지를 펼쳤지만, 내용을 보자마자 잠기운은 단박에 사라졌다. 그의 안색이 점점 엄숙해졌다.

배랑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이 큰일을 또 누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계우서는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배랑을 관찰하고 있었다. 심묘가 배랑을 부수의에게 보낸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배랑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해도 과연 그가 배신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쓸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는 상당히 의문스러웠다. 첩자로서 임무를 완수하려면 높은 충성심이 필요했다. 심묘와 그의 사이는 깊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리고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편지를 사경행에게 보여주려고 일어나던 계우서는 순간 멈칫했다.

“3형이 날 또 가두진 않겠지.”

고양과 계우서는 황후가 태자의 혼사를 염두에 두기 위해 심묘를 부른 일을 사경행에게 보고하지 않았었고, 사경행은 직접 두 사람을 탑뢰에 던져 넣었다.

“배랑도 심묘에게 마음이 있으니 혼인하겠다고 말한 거겠지. 3형도 심묘를 중시하니 두 사람은 연적인 셈이야. 그러니 3형은 그 선생을 구하고 싶지 않겠지. 나도 작약 소저가 승상가 공자에게 웃어준 걸 보고 불쾌해했잖아? 이후 그 녀석이 다쳤을 때 아주 즐거웠으니까 같은 이치겠지. 3형에게 이 일을 보고하지 말아야겠다. 새로운 소식이 없으니 아직 죽지 않았을 거야. 며칠 후에 이야기하자.”

혼잣말을 중얼거린 계우서는 마음대로 결론을 내렸다. 계우서는 스스로 잘했다고 여겼다. 당연히 지금 이 행동이 미래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는지 알 수 없었다.

* * *

심구와 나릉은 병부에서 성 수비를 맡고 있기에 근래 매우 바빴다. 황보호의 죽음은 그들에게도 말썽거리였다. 진국 태자부 호위들을 죽이면 진국 황제가 더더욱 분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황보호의 원수가 명제 태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려 했으니 살려두면 혼란을 가져올 것이었다.

고심 끝에 죽일 수는 없으니 일단 연금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진국 황제가 직접 선발한 고수이기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오늘은 진국 태자부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내일은 도망칠 수 있었다. 이에 명제는 성 수비군을 배로 늘렸다. 정경성 곳곳을 순찰하며 진국 호위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무고한 백성에게 풀지 않도록 방비했다.

일을 바삐 끝냈는데도 이미 하늘은 어두웠다. 심구와 나릉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연말이 가까운 정경성의 거리는 늘 번화했지만 근래에는 거리에 행인이 매우 적었다. 황보호의 일로 성 수비군이 백성들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심구는 탄식했다.

“형부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면 성 수비군도 오래 못 버틸 거야. 태자 전하는 감옥에 갇혔고 진국은 합당한 설명을 원하고 있어. 황제 폐하는 태자 전하를 차마 벌하실 수 없으니 백성만 고통받게 생겼어.”

나릉이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연말은 태평하지 못하네요. 어떻게 결론이 나든 정경성은 혼란스러울 거예요.”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 걱정을 보았다. 잠시 후 심구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 일단 이 이야기는 하지 말자. 어제 어머니께 들었는데, 교교의 혼사를 정하실 것 같아. 태자 전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국세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군부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헛된 희망을 품지 않게 일찍 혼사를 정할 것 같아.”

심구가 이어 말했다.

“넌 어찌 생각해?”

나릉이 얼굴을 붉혔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심구가 한 손으로 나릉의 어깨를 잡았다.

“넌 무공을 익힌 사람인데 왜 문인처럼 말하는 거야? 넌 다 좋은데 낯가죽이 얇은 게 흠이야. 네가 나서서 교교에게 말해야지.”

나릉이 난감해하며 웃기만 하자 심구는 그를 타일렀다.

“교교는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여도 도도하고 고집이 세. 교교가 먼저 널 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사나이 대장부가 되어서 좋아하면 먼저 말해야지. 넌 날 못 이기지만 시국이 좋지 않으니 합격이야. 네가 내 제부가 되면 나도 좋아.”

심구는 트집을 잡을 듯 나릉을 보았다. 호탕한 그의 말 때문에 나릉은 더욱 난감했다.

“그건 심묘가 동의해야 가능해요.”

심구는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말하지 않는데, 교교가 어떻게 네 생각을 알아? 말하지 않으면 몰라. 네가 먼저 기회를 잡아서 심묘와 얘기를 해야지. 나릉아, 사실대로 말할게. 소명풍은 병을 앓아서 싫고, 풍자현은…… 쯧쯧, 교교와 나담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가 풍가와 엮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어. 이리저리 봐도 네가 제일 나아.”

“고마워요. 기회가 있다면 꼭 그럴게요.”

나릉이 거듭 미소만 짓자 심구는 답답해졌다. 그가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 할 때, 말 한 마리가 반대편에서 달려왔다. 거리는 어둡건만 매끄러워 보이는 털을 가진 말 때문에 눈이 부셨다. 이렇게 좋은 말을 탄 사람은 영웅일 게 뻔했다. 심구와 나릉은 말에 시선이 닿았다.

말을 탄 사람은 멀리서 봐도 품위 있는 태도였다. 영민하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 사람은 말고삐를 당겼다. 말을 타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 승마 기술이 출중한 게 분명했다. 심구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좋구나.”

“심 소장군.”

그때, 말을 탄 사람이 그를 불렀다. 심구는 멍해졌다. 남자는 화려한 자금색 장포를 입고 있어서, 등롱 빛 아래 광채를 내뿜었다. 키가 크고 굳센 몸매를 가진 남자는 은 가면을 쓰고 있었고 턱선은 윤이 날 정도였다. 입꼬리를 올린 채 남자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멋스러워 보였다.

“예왕 전하.”

심구와 나릉이 얼른 그 사람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말을 탄 사람은 예왕이었다. 두 사람은 조공연회에서 예왕을 본 적이 있었다.

“격식을 차리지 마시오. 잘못 봤다 여겼는데, 정말 심 소장군이었구려.”

예왕은 심구만 바라보며 말했다. 나릉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심구는 놀랐지만 기쁘기도 했다. 예왕은 문혜제도 신경 쓰지 않는다 들었는데 자신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의 바른 말투였다. 심구는 예왕의 의도를 경계하는 한편 어깨가 으쓱해졌다. 자신의 명성이 널리 퍼져 예왕도 자신을 우러러보는 건가 싶었다. 그래서 심구는 나릉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나릉은 예왕의 허리에 달린 장신구가 낯에 익었다. 그 장신구의 무늬는 아주 특별해서 한 번만 봐도 기억할 수 있었다. 안색이 좋지 못한 나릉이 예왕에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예왕 전하, 허리의 장신구는 어디서 난 것입니까?”

심구는 의아한 시선으로 나릉을 바라보았다. 나릉은 분별 있는 사람이었다. 평소 진중하게 행동하던 이가 예왕에게 사적인 것을 묻는, 실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보통 예왕과 인사하려면 그가 자신과 인사를 하고 싶은지 그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예왕이 먼저 인사를 건넸음에도 나릉에게서 이를 영광으로 여기는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예왕은 유달리 기분이 좋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허리의 장신구를 풀어 만지작거리다가 미소 지었다.

“이것 말인가? 어느 아가씨가 준 것이오.”

예왕은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평소 교류가 없던 사람 앞에서 자신의 애정 관계를 이야기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심구 자신은 예왕의 사적인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나릉이 왜 그런 것을 묻는지도 의아했다. 많은 것들을 알수록 일찍 죽을 뿐이었다.

나릉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예왕의 장신구를 단단히 주시했다. 예왕은 나릉을 흘깃 보더니 장신구를 다시 허리에 걸었다.

“일이 있기에 먼저 떠나야겠소. 심 소장군, 시간이 있다면 예왕부로 와도 좋소. 나는 심 소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 예왕이 말고삐를 당겼다. 그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품위 있게 떠났다. 심구와 나릉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심구가 웅얼거렸다.

“예왕 전하가 혹시 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나?”

심구는 예왕이 왜 자신에게 예왕부로 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왕은 명제 황자들에게도 이런 초대를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심구는 예왕이 자신의 무예가 마음에 든 것인가 싶었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나긴 했다. 심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나릉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릉아, 왜 그래? 몸이 불편해? 어째서 안색이 그리 나쁜 거야?”

정신을 차린 나릉은 간신히 웃었다.

“아뇨, 돌아가요.”

심구는 예왕이 사라진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예왕 전하는 그 아가씨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 정표를 허리에 달고 있다니. 어느 댁 아가씨가 이런 영광을 얻었을까. 꿈에서라도 그랬으면 하는 아가씨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심구는 나릉의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릉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 * *

사람들의 예상처럼 황보호 암살 사건은 많은 말썽을 불러왔다. 태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러 번 태자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형부는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었다. 문혜제는 태자를 영원히 가둬두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러자 태자의 수하들도 형세를 살폈다. 사람이 떠나면 인정도 없어진다는 말처럼 태자가 갇히자 몇몇은 다른 황자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조정의 판도는 또다시 변화하고 있었다.

날은 추웠지만 나담과 심묘는 새해 옷감을 사러 외출했다. 나설안은 그녀들이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니 의복도 여러 벌 필요하다고 하며 온 정경성을 돌았다. 이에 부로 돌아온 심묘는 피곤했다.

심묘가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 방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에 그녀는 오로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데 집중했다. 사경행은 고개를 돌렸다.

심묘의 몸은 여전히 여렸지만, 이전과 달리 꽃봉오리가 피어난 듯 풋풋하고 향기로웠다. 넉넉한 중의가 살짝 달라붙어 여인의 고운 몸매가 보일락 말락 했다. 흔들리는 등불 아래 그녀의 물기를 머금은 눈,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가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젖어 뺨에 붙었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새하얀…….

사경행은 두꺼운 피풍의를 심묘에게 던졌다. 겨우 피풍의를 잡아챈 그녀가 비틀대며 화를 냈다.

“뭐 하는 거예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입어. 감기 걸리지 말아야지.”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말을 듣자 확실히 좀 추운 듯해 피풍의를 걸쳤다. 사경행은 방에 남자가 있어도 개의치 않는 듯 머리를 말리는 데 정신이 팔린 심묘를 보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심묘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전생의 그녀는 부수의를 사모했으나 언제나 혼자만의 마음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은 적은 없었다. 막 시집간 심묘에게 부수의가 품은 감정은 최대한 좋게 말해 감사와 존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심묘의 얼굴이 붉어지거나 심장이 뛰는 일은 없었다. 그 후 그녀가 황후가 되고 나서는 매일 얼굴이 예쁘고 화려한 여인들과 태감을 마주하느라 부수의의 감정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묘는 한참 후에야 자신을 관찰하는 사경행의 시선을 느꼈다. 불현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뭘 봐요?”

“난 계속 네가 부끄러움을 모른다 여겼다. 조금은 아는 듯하니 그나마 다행이로군.”

심묘는 사경행의 말을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이 턱을 괴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날 왜 찾은 거지?”

심묘는 종양에게 사경행을 불러달라고 했다. 소식을 전할 사람이 있으니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종양은 정말 쓰기 편했다. 머리를 털던 심묘가 손을 멈추고 주저하다가 물었다.

“배 선생이 오랫동안 편지를 하지 않았어요. 정왕부에서 배 선생에게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알아봐 주세요.”

배랑은 늘 편지를 보내 정왕부의 일을 전했는데 근래 편지가 오지 않았다. 일이 생겼다고 추측한 심묘는 풍선전당포로 향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곁의 사경행에게 직접 맡기는 게 더 좋을 듯했다. 그러나 심묘는 ‘배 선생’을 말하면서 조금 머뭇거렸다. 사경행이 배랑의 일을 언급한 적은 없었으나 심묘는 사경행이 자신과 배랑 사이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다.

사경행의 시선이 멈칫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배랑? 그 서생에게 아주 관심이 많구나.”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에요.”

전생의 배랑에게는 불만과 원망이 있었으나 지금 배랑은 자신의 편이었다. 심묘는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다. 사경행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대신 알아보지.”

사경행이 승낙했지만 심묘는 사경행이 무성의하게 끄덕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침묵하자 분위기는 부자연스러워졌다. 심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뗐다.

“아직 태자를 풀어주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상황은 어때요?”

“걱정하지 마. 태자는 곧 끝날 거야.”

당황한 심묘가 되물었다.

“뭐라구요?”

“진국 황제는 이미 마지막으로 경고했어. 태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황보호의 복수를 위해 명제를 평정하겠다고.”

사경행은 찻잔을 기울여 찻잎이 뜨고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정을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말투였다.

“이런 시기에 황제는 감히 모험을 할 수 없겠지.”

“어쩐지……. 하지만 이렇게 빨리 대응하다니, 진국 황제는 조사를 하지 않은 건가요? 진국은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거라는 거예요? 어째서? 설마 아들을 죽인 흉수를 잡을 생각이 없는 건가요?”

심묘는 다급히 고개를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진국의 여러 가지 대응을 생각했지만, 그들이 이렇게 빠르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태자가 죽은 일은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니 진국이 충분히 조사를 한 후 문혜제와 양보 없이 맞설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사경행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순진하긴.”

심묘는 어이가 없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순진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황실은 진상이 무엇인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결과가 중요하지. 황보호는 살아 돌아올 수 없잖아. 진국은 태자와 공주를 잃었으나 진국에 다른 황자가 없는 건 아니야. 어쨌든 진국에는 이로 인해 큰 혼란이 일어났겠지. 명제는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그러니 태자가 흉수가 아니더라도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해. 태자가 죽어야 명제와 진국은 서로 동등한 입장이 되는 거야.”

사경행은 찻잔을 쥐고 담담히 말했다. 사경행의 웃는 얼굴은 차가웠다.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놀랐다. 그의 말은 무정하지만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명제와 진국은 국력이 비슷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진국은 태자를 잃어 황위 쟁탈의 풍랑이 거세게 일 터였다. 그런데 원인을 제공한 명제는 아무 탈도 입지 않고 멀쩡하다면 화가 나는 일 아닌가.

수렁에 빠진 진국은 방법을 찾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수렁에 명제를 함께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익이 걸리면, 한 줄로 묶여 동고동락한 동맹도 이와 마찬가지로 진흙탕에 구르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익을 세밀히 계산해야 했다.

문혜제는 이를 이미 눈치챘기에 빠르게 태자의 죄를 언도한 것일 터다. 태자가 살아 있으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니 태자를 지워버리는 속셈이었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천하 강산을 위해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했다.

심묘의 침묵에 사경행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일석이조인 셈이야. 잘했어.”

“전 생각만 했어요. 공로가 있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이 계략은 심묘가 냈으나 사경행이 완벽하게 실행했다. 황보호와 태자를 음해한 일은 간단히 성공시킬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사경행의 수하들이기에 가능했다. 이에 심묘는 사경행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여겼다. 사경행은 살짝 웃었다.

둘은 심묘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심묘가 두 번 연달아 하품하자 사경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기 전 심묘는 그를 불러세웠다. 한참 머뭇거리던 심묘가 입을 열었다.

“최근 송신 공주마마가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나요?”

“아니.”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신, 어쩔 거예요?”

“글쎄.”

사경행은 창문을 넘었다.

심동릉은 왕필과 감옥의 가장 안쪽에 갇혀 있었다. 문혜제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일단 두 사람을 제외한 원외랑부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세는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왕필 하나로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감옥을 지키는 옥졸은 두 사람에게 좋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감옥에 갇힌 사람 중 지위가 높은 사람은 적지 않았다. 더구나 민감한 사안과 연결된 사람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옥졸은 목숨이 위험했다. 게다가 원외랑은 그리 높은 관직도 아니니 좋게 대우할 가치가 없었다.

심동릉은 감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웠다. 곧 지위가 빠르게 상승할 거라는 단꿈을 꾸었는데,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났다. 이전에는 자신과 왕필은 서로 존중하며 화기애애하게 지냈으나 사고가 나자마자 사이에 틈이 드러났다.

왕필은 자신을 비난했다. 향 품평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태자 전하도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자신들의 결말이 좋을 리가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바보가 아닌 왕필은 이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나마 태자는 황후가 그를 위해 뛰어다닐 터였다. 반면 원외랑부는 떳떳하지 못한 은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동릉은 열심히 해명했다. 자신 역시 황보호가 이렇게 죽을 줄 알지 못했으니까. 이 일은 음모였다. 누군가 태자를 음해해 두 사람도 함께 연루된 것일 뿐 자신은 무고하다고 변명했다.

옥졸이 그들에게 식사를 건넸다. 종전과 다른 음식들이었다. 밥과 반찬은 신선했고 심지어 고기반찬도 곁들여졌다. 심동릉은 조금은 기뻤다. 근래 그들이 먹은 밥은 쉬거나 딱딱하게 말라 있어 먹기 힘들었었다. 이렇게 식사다운, 풍성한 음식은 오랜만이었다.

“우리에게 주는 건가요?”

심동릉의 물음에 옥졸은 그녀를 바라보며 괴상하게 웃었다.

“그렇다. 너희 것이다.”

갑자기 왕필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가 물었다.

“이보오. 이게 무슨 의미요?”

“오, 똑똑한 사람이로군. 최후의 한 끼를 먹고 황천길에 오르는 거지.”

심동릉은 젓가락을 떨궜다.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왕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모든 힘이 빠져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흥분한 심동릉이 사납게 일어났다.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듯 목소리는 비틀려 날카로웠다.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진국 태자 전하가 암살당한 건 정말로 우리와 관련 없습니다. 이렇게 오래 갇혀 있었는데 진상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나요? 언제 우리를 풀어준다고 합니까?”

심동릉은 질문을 연달아 쏟아냈다. 이렇게 해야 마음속 공포를 몰아낼 수 있는 것처럼. 왕필은 심동릉을 바라보며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옥졸은 미간을 찡그리며 두 발자국 물러났다. 그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태자 전하의 죄도 선고되었는데 감히 너희가 무고하다고 말하다니?”

왕필이 멍해져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 인정하신 거요?”

옥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아니지. 억울하다 해도 너희는 태자 전하와 함께하니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설령 그 일에서는 결백하더라도, 소금 밀매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지.”

옥졸의 웃음은 사악했다. 왕필이 몸을 떨었다.

“그…… 그건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옥졸은 손을 휘저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이미 소문이 자자해. 원외랑부를 수색할 때 금은이 가득 담긴 궤를 옮겼다더군. 정오가 될 때까지 한참을 실었다고도 하던걸. 부귀를 계속 누리기만 했으면 평생 손해 보지 않았을 텐데. 왕 공자도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식사해. 내세에 좋은 사람을 찾아봐.”

심동릉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금은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소금 밀매까지 발각되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자신과 왕필은 살아날 길이 없었다. 경제가 좋지 않아 국고조차 부족했다. 그러니 소금을 밀매해 부유해진 원외랑부를 매섭게 징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미 원외랑부는 가문이 끝난 셈이었다.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할 터였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갖은 방법을 써서 혼사를 바꿔치기했고, 원외랑부에서의 새로운 인생에 아주 만족했다. 권세가 하늘에 달하진 않았으나 은자 덕분에 먹고 입는 것은 걱정할 것 없었으니 생활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힌 것도 모자라 죽음을 면하지 못하는 신세로까지 전락했다. 어째서 부귀영화가 일장춘몽으로 변했는지 허망하고 허망했다.

왕필을 위해 이 계략을 꾸미지 않았다면 이런 결말은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동릉은 왜 자신이 심묘에게 쓸 계략을 짰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묘에게 맞선 사람은 모두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랬는지 답답했다.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했다. 그 순간, 심동릉은 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건 심묘가 배후에서 수완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심동릉은 팔찌를 풀었다. 하고 온 머리 장신구는 감옥에 갇힌 후 이미 다 쓴 터였다. 이 팔찌는 왕 부인이 자신에게 준 것으로 대단히 비싼 장신구였다. 심동릉은 팔찌를 옥졸의 손에 쥐여주며 다급히 말했다.

“이보세요. 날 좀 도와 내 동생 심묘에게 찾아가 주십시오. 동생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전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심동릉은 간절했다. 예쁘게 생긴 심동릉이 눈물을 보이며 가련하게 부탁하자 옥졸은 마음이 여려졌다. 그가 팔찌를 챙겼다.

“좋아. 널 도와주지. 그러나 난 전달만 할 걸세. 심 소저가 오는 것은 장담 못 해.”

옥졸의 뒷모습을 향해 심동릉이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왕필은 냉소했다. 피곤한 표정이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것인지 그녀를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당신은 심 소저가 구해줄 거라 여기는 거요?”

심동릉은 옥졸에게 말할 때와 달리 악랄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몰라요. 동생이 날 구하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한다면 나도 잘못을 인정할 거예요. 그러나 날 구하지 않는다면 장군부 역시 편안하게 지낼 수 없어요. 우리는 한 가족이니 고통은 당연히 같이 분담해야 해요.”

옥졸은 심동릉의 말을 심묘에게 전했다. 그러나 심묘는 그의 말을 중도에 끊으며 가지 않겠다고 표명했다. 그녀는 경칩더러 은자를 옥졸에게 주게 했다.

심가 중 대방만이 철옹성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심신은 정경성을 떠났으나 다시 돌아왔다. 게다가 이전보다도 그의 위치는 더욱 단단했다. 더구나 행동거지에 철저히 조심해 절대로 약점을 잡히지 않으니, 황제인 문혜제도 그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니 옥졸은 한낱 사형수 때문에 무거운 권력을 쥔 무장에게 미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을 끌지 않고 즉시 돌아갔다.

심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경칩이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며 물었다.

“저는 아가씨께서 심동릉 아가씨를 보러 가실 줄 알았어요.”

곡우는 경칩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가씨가 뭐 하러 보러 가셔? 심가 이방은 우리와 관련이 없어. 게다가 죽을죄를 지은 죄수를 보러 갔다가 괜히 아가씨가 연루되면 어떡해?”

경칩이 혀를 쏙 내밀었다.

“전에는 아가씨께서 심청 아가씨를 만나셨잖아.”

경칩과 곡우가 서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다투기 시작하자 심묘가 나섰다.

“심동릉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분명 함정을 팠을 테니 만나지 말아야 해.”

경칩의 안색이 갑자기 변했다.

“함정이요? 심동릉 아가씨가 아가씨를 해치려 한다고요?”

“조심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돼.”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심부 아가씨들 중 심모와 심청은 어머니가 지나치게 오냐오냐해서 성정만 악랄하지 권모술수는 깊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 일을 분명히 보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심동릉은 달랐다. 심동릉은 어려서부터 임완운 때문에 눌려 살았다. 심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니 이런 환경 속에서 생존한 심동릉의 심지는 일반인보다 단단하고 질길 터였다.

조용히 지낸 덕분에 임완운은 심동릉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능력을 증명하고 남았다. 그러니 함부로 그녀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심모와 심청은 한번 툭 건드리면 허둥대다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사람이었지만, 심동릉은 마지막까지도 방법을 강구할 사람이었다.

“맞아요. 가지 않으셔야 해요. 그렇지만 심동릉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감옥에 있어서 무엇도 바꿀 수 없잖아요.”

염려하는 곡우를 심묘가 달랬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난 가지 않을 테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심동릉이 그저 내게 도와달라고 부른 거래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러니 가도 소용없어. 반대로 날 끌어들이려고 해도 아예 만나지 않으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거야.”

경칩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맞아요. 가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어요.”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문혜제의 처벌 결정이 이렇게 빨리 내려진 데는 분명 소금 밀매도 한몫했으리라. 문혜제는 자신의 눈을 피해 부를 키우는 사람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금 밀매가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의아했다. 사경행이 소식을 흘린 것인지 심묘는 턱을 받치고 고민했다.

* * *

궁중, 양심전 밖.

황후는 온종일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날이 밝을 때부터 지금까지 꿇고 있었다. 궁녀와 태감이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날씨는 매서워 바닥에는 살얼음까지 낀 상태였다. 깔개도 없이 온종일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한기에 온몸이 뻣뻣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평소 건강에 문제가 없던 황후지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마마, 돌아가시지요. 오늘 폐하께서는 바쁘시니 구태여 몸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러다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소인이 무슨 낯으로 마마를 뵙습니까.”

황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폐하께서 생각을 바꾸실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다.”

태감이 황후의 말을 문혜제에게 전하자 문혜제는 노발대발했다.

“그냥 두어라! 둬! 감히 짐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황후에게 포기하라고 전하라!”

태자의 처벌이 결정된 후 황후는 직접 문혜제를 만나 사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혜제는 아예 만나주지 않았다. 황후는 최후의 수단을 써 양심전 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오랫동안 꿇고 있으면 문혜제가 체면 때문에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 여겼다.

통찰력 있는 사람이면 황보호의 일에서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문혜제도 처음에는 태자를 감쌌다. 그러나 원외랑부의 소금 밀매 사건은 문혜제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게 했다. 태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로 다른 일을 돌볼 틈 없는 문혜제가 황후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러나 황후도 방법이 없었다. 문혜제와 부부의 연을 맺은 자신은 그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이 아들을 위해서라면 평생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다. 하루 무릎을 꿇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그때,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요괴가 요염하게 걸어오는 것 같았다. 홍실과 금실로 짠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이 황후에게 말을 걸었다.

“마마, 어찌 이곳에 꿇어앉아 계시나요? 저는 마마께서 제게 이런 큰 예를 올리시는 줄 알고 놀랐답니다. 앞으로 이런 장난은 하지 마세요.”

황후가 이를 악물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서현비였다. 황후는 태자의 소금 밀매가 발각된 일에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이 연루되어 있을 거라고 의심하던 차였다. 태자가 죽으면 두 사람의 강적이 사라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증좌가 없어 따질 수 없었다. 서현비는 바로 그 사실을 이용해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었다.

“마마, 어찌 들어가시지 않나요? 혹시 무슨 잘못을 저질러 무릎을 꿇고 폐하에게 용서해달라 사정하시는 건가요? 원하시면 제가 마마를 대신해 사정해 드릴까요?”

서현비가 꽃이 피어나듯 고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이에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필요 없다.”

조정의 다툼은 후궁에도 영향을 끼치는 법. 그 때문에 후궁의 여인들끼리 대립하기도 한다. 더구나 주왕 일파와 태자 일파의 다툼은 황위와 관련됐으니 당연히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태자가 끝장나면 황후 역시 그 자리에 얼마나 더 앉아 있을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언젠가 문혜제가 늙어 죽고 주왕이 황제가 된다면 황후의 결말은 어찌 될지 뻔했다.

평범한 관리 가문의 후원도 더러운 수완을 이용하니, 궁중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순간 방심하면 가족까지 그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조심히 살아가야 했다.

서현비가 또 한 번 웃었다.

“마마께서 원치 않으시면, 강요드리지 않겠습니다. 마마께서 여전히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시겠다면 마마의 흥을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야지요.”

서현비는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황후를 지나쳤다. 태감이 그녀가 방문했노라 문혜제에게 고했다. 황후는 서현비의 뺨을 꼬집지 못해 한스러웠다. 그녀가 문혜제에게 어떤 말을 올릴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불에 기름을 끼얹을 것이 뻔했다. 문혜제는 줄곧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니 태자에 대한 노기는 걷잡을 수 없게 번질 터였다. 그러나 그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서현비가 들어가려 할 때, 태감이 급히 달려오더니 서현비에게 죄송하다는 기색을 비쳤다.

“현비마마, 예왕 전하께서 지금 폐하를 뵙길 요청하셨습니다.”

예왕이라는 소리에 서현비와 황후가 동시에 멍해졌다. 예왕이 이곳에 무엇 때문에 온 건지 의아했다. 서현비는 평소 거만했지만, 큰일에는 감히 경망을 떨지 않았기에 즉시 돌아섰다.

“그럼 난 조금 더 이따가 다시 오마.”

황후는 서현비보다 나이가 있기에 조정 일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았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예왕은 평소 궁문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태자에 대한 처벌이 정해지고 나서 황제를 알현하겠다니 좋지 않은 뜻을 품고 온 것이 분명했다.

문혜제의 시위가 빠르게 나와 태감에게 몇 마디 하자 그는 밖으로 나갔다. 황후와 서현비는 자줏빛 의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반쪽짜리 은 가면을 쓴 채였지만, 유유한 표정이 잘 드러났다. 황후는 일국 황후로서 외부 사람에게 곤궁한 모습을 보여 부끄러웠다. 서현비는 예왕의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 어떤 사람은 그의 뒷모습만 보아도 천성적으로 귀한 기운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서현비는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기만 할 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예왕이 황후의 곁을 지나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아 마치 황후가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 같았다. 예왕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고, 황후는 더더욱 난처해졌다.

문혜제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담담하고 가벼운 태도의 문혜제는 지난번 예왕에게 노발대발한 사람과 동일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등은 조금 굳어 있었다. 예왕은 그를 폐하라 불렀지만,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자리에 앉으니 문혜제가 손님인 것 같았다. 예왕의 시선에는 존경이나 숭배의 빛은 하나도 없었다. 문혜제는 이 젊다 못해 어린 예왕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다는 기분이 들어 순간 멍해졌다.

“근래 짐이 매우 바빠 예왕 전하를 뵙지 못했구려. 잘 지내시는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문혜제는 예왕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친근한 말투였다. 지금 진국은 명제에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는데, 이때 대량이 명제를 압박한다면 명제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할 터였다. 대량에 잘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양보를 하든, 고개를 숙이든,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었다. 다른 일은 장래에 다시 이야기하면 되었다.

예왕이 미소로 답했다.

“폐하 덕에 저는 잘 지냅니다. 듣자니 폐하께서는 이 며칠 좋지 않으셨다면서요?”

문혜제는 놀랐으나 얼굴 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식을 잘못 가르친 거지요. 예왕 전하에게 부끄럽소.”

“폐하를 탓할 수 없지요. 폐하께는 다른 황자들이 있잖습니까. 그러나 진국 황제도 가련합니다. 명제의 조공연회로 방문한 태자와 공주가 모두 목숨을 잃다니, 참 안타깝네요.”

문혜제의 웃는 얼굴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예왕의 말대로였다. 진국 황제가 줄곧 태자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길 요구하는 건 두 나라의 균형을 맞추려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량과 진국, 두 나라가 조공연회를 왔는데 대량은 멀쩡하니 조금도 손해 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진국은 태자와 공주가 모두 죽었다. 공교로웠다.

차후 명제가 진국의 국력이 낮아 태자와 공주도 지키지 못했다고 몰아갈 여지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진국의 체면이 깎인 일이기 때문에 진국 황제가 격분한 것이다. 명제의 태자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진국 황제는 명제에 대한 원한을 버리지 않을 터였다.

“짐은 빠르게 이 일을 처리할 걸세.”

“진국 황제는 쉽게 손을 떼지 않을 겁니다.”

문혜제가 가슴이 답답한 걸 숨기고 완곡히 대꾸하자 예왕이 가볍게 웃었다. 문혜제는 이 이야기를 더 잇고 싶지 않았으나, 예왕은 그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 좋을 대로 떠들어댔다. 문혜제는 예왕이 자신의 어색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분명 고의였다. 일부러 자신의 속을 뒤집는 것이다.

문혜제는 신하에게 하는 것처럼 큰소리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예왕은 명제의 신하가 아니었다. 심지어 예왕은 황제인 영락제보다 더 사납고 흉악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문혜제는 얼굴을 굳힌 채 겨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예왕 전하가 짐을 찾아온 건 무슨 일인지?”

예왕은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두드렸다. 적막 속에서 예왕이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니 문혜제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예왕이 방문한 건 저번의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예왕이 대량과 명제 경계선의 도성 이야기를 꺼내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문혜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주 무거운 적막이었다.

곧 예왕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는 조금도 걸리는 게 없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제 일생 대사를 도와주십시오.”

“무슨?”

문혜제는 당황했다. 예왕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할 때 예왕이 이어서 말했다.

“대량의 황제 폐하는 제 혼인을 바라고 계십니다. 명제에서 혼인할 여인을 데리고 오라고 당부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폐하께 말씀드리는 제 뜻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문혜제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예왕이 명제에서 여인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음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억지로 너그러운 미소를 드러냈다.

“그런가? 문제없네. 영웅은 미인의 관문을 넘기 어렵다고 하지요. 예왕 전하는 청년 준걸이니 당연히 꽃 같은 미인과 혼인을 해야 하지 않겠소. 예왕 전하는 어느 댁 아가씨가 마음에 드시는가?”

예왕이 문혜제를 주시했다. 아름다운 눈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문혜제는 멍하니 예왕을 바라보았다.

“장군부, 심묘입니다.”

문혜제는 더는 억지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온몸이 잘게 떨렸다. 당장 예왕을 처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분노로 눈앞이 다 새하얘졌다. 더는 자애로운 웃음기를 유지하지 못해 입가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누…… 구?”

“위무대장군의 적녀 말입니다. 폐하,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태자 전하가 그 소저를 측비로 삼고 싶어 했는데 말입니다.”

예왕은 자신을 정말 업신여기는구나. 여러 생각이 솟구친 문혜제는 냉소하고 싶었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어떤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다. 명제와 진국의 동맹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만 한다고 여겼는데 양으로 분장한 늑대였다. 이것이 그의 수였다.

위무대장군 적녀와 혼인해서 장군부의 병권도 갖겠다니. 그러나 문혜제는 대량에게 장군부의 병권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대량에는 이미 많은 장병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명제의 우수한 장병들은 거의 해체되었다. 사씨 세가도 쇠퇴해서 명제의 명성을 유지해주는 세가는 장군부 하나였다.

이 판국에 장군부마저 없어진다면 명제는 그야말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터였다. 그때 가서 대량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테니 명제는 한입에 삼켜질 테지. 과연, 예왕과 대량이 대단하구나. 문혜제는 간신히 웃음을 짜냈다.

“예왕 전하의 안목이 뛰어나시구려. 그러나 심 장군이 딸을 아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안다오. 전하가 심 소저와 혼인을 고집해도 딸을 아끼는 심 장군은 보내길 원치 않을 걸세.”

예왕은 반지를 가지고 놀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게 뭐가 어려운가요? 심 장군이 원치 않으면,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면 되지 않습니까?”

당황한 문혜제의 귀에 예왕의 말이 이어서 들렸다.

“대량과 명제는 사이가 좋으니, 폐하께서 제 체면을 봐주시라고 믿고 왔습니다만. 그러면 저도 돌아가 폐하께 도성의 일을 보고할 수밖에 없겠네요.”

예왕은 기지개를 켜며 담담히 말했다. 문혜제는 화가 너무 나서 온몸이 떨린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장군부는 기름이 많은 고기였다. 그런데 예왕은 이 고기를 빼앗을 뿐 아니라 기름까지 챙겨갈 셈이었다. 자신이 성지를 내리면 심신이 충심으로 명제에 남는다고 해도 그를 원망할 터였다. 그렇다고 성지를 내리지 않으면……. 문혜제는 예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인지 분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문혜제는 이 가벼워 보이는 남자가 매우 무서운 수완가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명제와 진국의 동맹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경솔하게 대량과 맞서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 예왕이 꺼낸 어려운 문제에는 정답이 없었다. 어떤 답이든 모두 틀린 답이었다. 손해를 보는 건 모두 명제였다.

“폐하, 생각은 다 하셨는지요?”

예왕의 시선이 문혜제에게 닿았다. 고양이가 늙은 쥐를 잡고 노는 듯했다. 그러나 문혜제는 화를 내지 못했다. 황제가 된 이후 무수하게 많은 곤란한 일을 처리했으나 예왕의 일처럼 답답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이렇게 무례하고 버릇없이 군 사람은 없었다. 문혜제는 생애 처음으로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장군 세가들을 처리한 것을 후회했다. 명제에 심신 같은 용맹한 장수가 많이 남아 있다면 지금 대량 앞에서 조금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 씁쓸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후회한다고 바뀔 일은 없었다.

문혜제가 대답하지 않자 예왕이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폐하의 뜻을 알았습니다.”

“잠깐!”

문혜제가 나가려는 자세를 취한 그를 잡았다. 예왕은 서서 오만하게 웃었다.

“폐하, 잘 생각하십시오. 일국 황제의 말 한마디는 무겁습니다.”

문혜제의 웃는 얼굴은 우는 표정보다 더 나빠 보였다.

“명제와 대량은 친교를 맺었으니 짐은 당연히 좋은 일을 성사해주기 위해 노력할 걸세. 심 소저가 전하와 혼인하면 양국의 복이지 않겠소. 짐은 즐겁게 지켜보겠네. 걱정하지 마시게. 오늘 성지를 만들 테니 곧 조정에서 발표하겠네.”

문혜제는 대단히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했지만, 곧 말을 내뱉었다.

“도성의 일은…… 대량 폐하에게 보내는 선물로 하지요.”

예왕이 기분 좋게 떠난 후 문혜제는 녹초가 된 채 의자에 기댔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고, 얼굴은 붉게 부풀었다. 분노, 수치, 굴욕, 원망이 그의 얼굴 위로 교차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바꿀 힘이 없었다. 분명 자신은 일국 황제인데 무능함을 인정해버렸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난감한 일이었다.

문혜제 곁의 고 공공은 감히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천자가 이런 처지에 빠진 걸 보니 놀라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문혜제가 침착하게 말했다. 고 공공이 얼른 대답했다. 문혜제의 시선은 무거웠다. 예왕은 도성의 일을 보고하는 걸 잠시 보류하겠다고 했다. 이는 장군부와의 혼사로 잠시 얻은 안정이었다. 이 안정이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묘가 예왕에게 시집을 간다면, 자신은 더 이상 심신을 신용할 수 없을 터였다. 예전에 심신을 억압했던 것은 심신의 공이 황실을 가릴까 걱정해서 했을 뿐이었다. 위무대장군은 여러 대에 걸친 충신이기에 심신의 충심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딸이 대량에 있으면, 대량이 심묘를 이용하면 심신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신, 이 바둑알이 쓸모없어지면 명제의 국세는 더욱 곤란해질 터였다. 대량을 방비하려면 명제는 서둘러 진국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양국이 협력해야만 대량에 맞설 수 있었다. 황보호와 명안 공주의 일로 분노한 진국에게 명제는 반드시 성의를 보여야 했다. 태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문혜제는 눈을 감았다.

문혜제의 처벌은 태자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빠르고 다급하게 내려왔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태자는 감옥 안에서 자진했다. 통찰력 있는 사람은 이 일이 태자의 명성을 위한 일임을 알았다. 태자는 평범한 죄수가 아니었다. 다른 나라 태자를 암살했다는 죄명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될 수는 없었다.

백성들은 속일 수 있었으나 관료들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태자가 실제로 자진한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황실은 더러운 것이 묻으면 먼저 숨기려 했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보기 좋게 바꾸곤 했다. 태자의 자진 소식이 전해지자 황후는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이후 그녀는 중병에 걸려 곤녕궁에 틀어박혀 요양해야 했다.

후궁은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황후가 중병에 걸린 이유가 단지 태자 때문인지 의심하는 시선이 있었다. 태자가 죽었으니 황후는 남은 생을 의존할 곳이 없었다. 황후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고 보장하기도 어려웠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황후가 문혜제에게 원한을 품었으니 문혜제는 이것도 대비해야 했다. 병 때문에 나오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연금당한 것인지 황제의 수족만 알 터였다.

황후가 낙엽처럼 지고 나면, 후궁의 새 주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당연히 서현비였다. 그녀에게는 문혜제의 총애와 두 명의 황자가 있었다.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 형제는 리왕 일파와 결사적으로 다퉜으나 리왕에게는 황제로부터 총애받는 모비가 없었다. 주왕과 정왕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래서 다른 비빈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없는 듯 조용히 지냈다. 부주의하게 행동해서 공격받을 여지를 줬다간 무슨 험한 일을 겪을지 몰랐다.

그러나 가장 처참한 결말을 맞이한 곳은 궁 밖에 있었다. 원외랑부 왕필이 향 품평회를 제안했기에 왕필과 심동릉은 처벌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명은 그게 아니었다. 원외랑의 소금 밀매가 죄였다. 덕분에 온 원외랑부가 연루되었다. 왕필과 심동릉는 참수당하고, 왕부에 있는 다른 남자들은 귀양을 갔다. 팔자는 후원의 여자에게 더욱 가혹해 여자들은 유배지에서 군의 기녀가 되었다. 문혜제가 분풀이를 위해 더욱 성질을 부린 것임을 아는 사람은 알아보았다. 그러나 황제의 생각은 헤아릴 수 없으니, 명령을 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경칩에게 며칠간 일어난 일들을 들으며 차를 마셨다. 나담은 눈꽃 사탕을 입에 넣었다. 눈꽃 사탕은 종양이 심묘에게 가져온 것으로, 대량 황실에서만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를 나담이 발견한 것이다. 눈꽃 사탕을 한 번 먹어본 나담은 매우 좋아하며 심묘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심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진국 태자의 일로 정말 떠들썩하네. 태자 전하 하나로는 부족한가 봐.”

나담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벽에도 귀가 있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그러나 자신 역시 문혜제의 잔혹한 결단력에 놀랐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전생의 부수의도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심부의 뿌리를 뽑으려 했다. 친자식인 부명과 완유의 생사 역시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자신은 세상에 이렇게 무정한 사람이 있나 생각했다. 지금 보니 부수의의 잔혹한 술수는 동숙비가 아니라 문혜제로부터 물려받은 듯했다.

황실 사람에게 혈육의 정, 남녀의 사랑, 우정 같은 건 모두 믿을 수 없는 뜬구름인 셈이었다. 강산과 권력만 좇는 그들에게 안정을 위해 아들 하나 희생하는 건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또다시 아들을 낳아줄 다른 여인이 있기 때문이리라.

나담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눈꽃 사탕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고모와 고모부는 드셨고, 심구 오라버니도 먹었는데, 나릉 오라버니만 먹지 않았어. 이건 나릉 오라버니를 위해 남겨줄까?”

어쩐지 부탁하는 말투였다. 심묘는 먹는 것으로 시시콜콜 따지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담이 탄식하며 매우 애석해했다.

“네가 어디서 파는 눈꽃 사탕인지 기억하면 좋을 텐데. 소춘성의 간식은 다 먹어봤고, 정경성의 간식도 거의 다 먹어봤는데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야. 네가 기억 못 한다니까 별수 없지. 내가 내일부터 알아봐야겠어. 꼭 이 가게를 찾을 거야!”

심묘는 침묵했다. 이 사탕은 대량의 황실 요리사가 만든 것이니 온 정경성을 다 뒤져도 이 ‘가게’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담의 질문에 ‘가게’라 하지 말고 ‘노점’이라고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나릉 오라버니도 간식을 좋아해. 나랑 비슷한 정도일걸?”

사탕을 말하던 나담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요 며칠 오라버니가 이상해.”

“왜?”

심묘는 나릉의 변화를 몰랐다. 나담이 턱을 괴었다.

“병부에 가는 것 말고는 온종일 뜰에서 무공 연습만 해. 좀 지나쳐. 원래 그러지 않았는데. 이 며칠 내가 찾아가 말을 걸어도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더라고. 무슨 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아. 심묘, 넌 똑똑하잖아. 오라버니가 왜 그러는지 알겠어?”

“나도 오라버니를 늘 쫓아다니지 않는데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인지 어찌 알겠어? 걱정하지 마. 병부 일이 바빠서 그럴 거야.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심묘는 근심하는 나담을 보고 위로했다. 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심구와 나릉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정당으로 향하자 나담이 외쳤다.

“심구 오라버니, 나릉 오라버니! 와서 눈꽃 사탕 먹어.”

방에 들어선 나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심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그는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앉았다. 심구는 사양하지 않고 눈꽃 사탕을 집어 입에 넣고 말했다.

“너희, 오늘 한가한가 봐?”

심구는 가볍게 나담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남종이 심신과 나설안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마침 부모님도 돌아오셨네. 다 같이 식사하러 가자.”

그러나 막상 심신과 나설안을 만나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가장 눈치가 없는 나담도 심신과 나설안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신의 안색은 검푸르고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설안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평소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심신 부부는 이를 자식 앞에서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어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또 무슨 큰일이 생겼는지 노여움을 억제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심신과 나설안을 따라온 남종은 크게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곧 물러갔다.

나담과 나릉은 걱정스러웠지만 묻기 어려웠다. 심구도 묻고 싶었으나 심신의 표정을 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심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심묘는 심신과 나설안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머니, 아버지. 왜 즐겁지 않은 모습이세요? 바깥에서 무슨 못마땅한 일이 있으셨나요?”

심신과 나설안이 동시에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신의 시선에는 후회, 분노, 답답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설안의 시선에는 깊은 가책과 무기력함이 스쳤다. 심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부모의 좋지 않은 표정이 자신과 관련된 일임을 빠르게 깨달았다.

나설안이 깊게 심호흡한 후 미소를 띠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조정에서 조금 일이 있었어. 교교야, 배고프지. 우리 식사부터 하자꾸나.”

그러나 웃는 얼굴은 간신히 만들어낸 듯했다. 나담의 시선도 무거워졌다. 얼마나 위급한 일이기에 시원하고 대범한 심신 부부가 숨기려 하는 건지, 그렇게 곤란한 일인 건지 걱정스러웠다.

심묘는 아무 말 없이 심신 부부를 바라보았다. 심묘의 표정은 나설안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구는 얼떨떨했다. 몇 년 전의 심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심묘는 교만하고 방자했다. 매번 심신에게 물건을 독촉해 받아낼 때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지금의 심묘는 많이 변한 것 같았으나 뼛속 깊이 밴 습관은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교교, 어머니 말을 듣거라.”

심신이 이렇게 심묘에게 엄하게 한 적은 없었다. 나담이 걱정스레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심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담담했다.

“아버지, 어머니. 왜 사실대로 말씀하지 않으세요? 적어도 근심을 함께 분담할 수 있잖아요. 제가 해결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일을 감추면 서로 소원해질 뿐이에요. 전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저도 오라버니처럼 장군부 사람이라구요.”

심신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심묘가 심신을 바라보는 눈은 시냇물처럼 맑았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저와 관련된 게 아닌가요?”

심묘의 말에 나설안이 화들짝 놀랐다. 나담과 나릉도 의아해하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구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심신이 심묘를 잠시 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조정에서 폐하께서 성지를 내리셨다. ……예왕 전하와 네 혼사가 정해졌다.”

방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설안은 감히 심묘의 눈을 보지 못했다. 심신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그가 얼마나 지쳤는지 대신 말해주었다. 나담은 입을 크게 벌렸고, 나릉 역시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심구는 탁자를 쾅 내려치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가장 평온한 사람은 당사자인 심묘였다. 그러나 평온해 보여도 마음속에 파도가 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경행이 일을 벌이리라곤 예상했으나 이렇게 공공연하게 행동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심구는 일각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절박하게 말했다.

“예왕 전하는 대체 왜 그런 황당한 요구를 한 겁니까? 교교는 명제의 아가씨인데 어떻게 대량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냐구요. 폐하께서 미친 게 아닌가요?”

“심구야, 말을 신중하게 해라.”

나설안이 심구를 나무랐다. 황실 사람은 곳곳에 척후를 두는 법. 벽에도 귀가 있는데 심구는 대역무도한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심구는 심묘를 바라보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교교를 예왕 전하에게 시집 보낼 수 없어요. 당당한 대량 예왕 전하가 어째서 내게 먼저 인사를 하는가 했더니, 교교 때문이었구나. 가증스러워.”

심구는 머릿속을 스친 기억에 손뼉을 쳤다. 이를 들은 심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왕 전하를 봤느냐?”

“지난번 나릉과 부로 돌아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제게 예왕부에서 시합을 하자며 초청을 했구요. 예왕의 본심을 알았다면, 즉시 말 다리를 잘라 낙마로 죽게 했을 텐데.”

심구가 씩씩거렸지만, 심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릉도 무언가 생각난 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복잡한 나릉의 시선을 느꼈으나 그에게 영문을 물을 기분은 아니었다. 심묘는 심신을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성지를 공포하신 건가요? 폐하께서 왜 갑자기 제게 성지를?”

명제에는 혼인 적령기의 아가씨가 적지 않았다. 황실에도 공주가 몇 명 있으니 하필 자신을 콕 집었을 필요는 없다. 물론 심묘는 이것이 사경행의 뜻인 것은 알았지만, 그가 어떻게 문혜제로 하여금 성지를 내리게 했는지가 더 알고 싶었다.

심신이 심묘를 바라보며 침통해했다. 그는 길게 탄식하며 천천히 오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교교, 아버지가 무능해서 미안하구나.”

오늘 문혜제는 조회를 파할 무렵 화제를 돌렸다. 대량의 예왕이 명제에서 왕비를 데리고 갈 뜻이 있다고 말이다. 조정 대신 중 몇 명은 흥분하고 몇 명은 불안해했다. 딸을 아끼는 사람은 대량으로 시집 보내길 원치 않았으나, 높은 곳을 노리는 사람은 딸을 예왕에게 시집 보내길 바랐다.

그러나 문혜제는 그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성지를 내렸다. 예왕과 혼례를 치를 아가씨는 위무대장군 심신의 적녀 심묘라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묘는 심신이 애지중지하는 딸임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심묘를 대량에 시집보낸다니, 심신은 당연히 원치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명제는 심신이 그 언제보다도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문혜제는 어째서 심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지 여우처럼 교활한 조정 신하도 이번에는 문혜제의 마음을 알아챌 수 없었다.

심신은 당연히 분노했다. 칼을 뽑아 금란전을 벨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자신의 억울함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딸이 억울함을 겪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혜제는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성지를 내렸으니 장군부에게 반대할 기회도 없다는 뜻이었다. 반대한다면 항명의 죄로 장군부 모두가 죽을 터였다. 울화가 치밂과 동시에 문혜제의 의도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얼마 전 심묘를 태자에게 시집 보내려 했으면서 이번에는 예왕에게 보내겠다니.

조회를 끝낸 후, 문혜제는 심신을 불렀다. 그는 심신에게 성지의 진상을 이야기했다. 결국 심신은 이것이 예왕의 뜻이며 예왕이 명제 변방의 도성 문제로 문혜제를 위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혜제는 명제 변방의 도성은 사실 명제의 전 국토를 뜻하는 것이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 요구를 승낙한 것이라고 해명한 다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짐은 명제의 주인이다. 눈을 뻔히 뜨고 백성의 생사를 고려치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심 장군과 심 소저를 억울하게 할 수밖에 없네. 한 사람으로 천하 백성의 안위를 바꾸는걸세. 심 소저도 짐의 결정을 이해해줄 걸세.”

신하는 반드시 군주의 명령을 들어야 했다. 더구나 문혜제는 진실하게 심신에게 이유를 설명하며 사죄했다. 이전 심신이었다면 그를 이해하며 감격했을 터였다. 그러나 문혜제의 말을 들은 심신의 온몸에 한기가 스쳤다. 평생 충성해온 황제가 허상에 불과한 듯했다.

심묘도 천하 백성 중 하나인데, 무엇 때문에 그녀만 희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신 자신은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청춘 역시 명제를 위해 바쳤다. 천하 창생(蒼生,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딸도 보호하지 못하는 자신을 누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후 문혜제가 계속 말했으나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문혜제가 심묘가 더욱 영광스럽게 시집갈 수 있도록 무언가 보내준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귀에는 모두 우스갯소리일 뿐이었다. 혼자만의 희생으로는 부족하니 딸도 내놓으라는구나. 허무함이 골수까지 사무치는 듯했다.

자신은 심묘의 곁에 있던 시간이 길지 않아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녀와 상당히 소원했다. 최근 들어 심묘와 사이가 좋아지긴 했으나 그녀의 성격이 많이 변해 하룻밤 사이 훌쩍 자란 듯했다. 그래서 오히려 늘 마음이 아팠다.

심묘는 정성 들여 키운 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한 송이 어여쁜 꽃이 한 그루 굳센 나무가 되었다. 그녀가 빨리 성장해야 했던 이유가 분명했고, 이젠 다 커버린 탓에 응당 누려야 했던 많은 것을 잃었을 터였다. 마음속 가책을 품고 있던 차에 이젠 그녀를 볼 면목마저 잃었으니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심신의 긴말이 끝나자 적막이 흘렀다. 심구조차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혜제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눈을 뻔히 뜨고 심묘가 먼 나라로 시집가는 것을 볼 수도 없었다. 심묘에게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모습을 본 적도 없고, 성격이 어떤지도 모르며,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않은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이국 타향에서 지내야 했다. 심구는 감히 이후 심묘의 일생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군요.”

심묘의 표정은 평온해서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성지를 듣고도 지금까지 심묘가 의아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설안은 그녀가 답답함을 참고만 있다고 여겨 더욱 걱정스러웠다.

“교교, 그렇게 마음속으로 참을 필요 없다. 일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어머니, 괜찮아요. 성지가 내려왔으니 항명할 수 없어요. 게다가 예왕 전하와 혼인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에요, 왕비가 되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게다가 얼굴은 보지 못했으나 예왕 전하의 품위 있는 태도를 보면 분명 괜찮게 생겼을 거예요.”

심묘가 부드럽게 웃자 심구는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너랑 예왕은 전혀 모르는 사이잖아. 그가 남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르잖아.”

“세상 모두 그렇지 않아? 어떤 사람과 평생 함께 살아도, 그의 처세는 몰라. 예왕 전하에게 시집가는 건 생각처럼 그리 최악의 일만은 아니야. 정경성에 머물러도 나는 누군가의 계략에 당하기 쉬워. 언젠가 장군부는 날 보호하지 못할 거야.”

담담한 심묘의 말에 심신의 눈에 침통함이 스쳤다. 손에 쥔 병권이 커질수록 속박도 많아졌다. 황제는 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견제하려 했다. 심묘는 이미 태자와의 혼사 때문에 곤경에 빠졌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또 다른 고비에 맞닥뜨릴 수 있었다. 장군부는 그녀를 보호할 힘이 부족했다.

평범한 사람은 죄가 없다. 오히려 재능이 있는 사람이 시샘을 받아 화를 입는 셈이다. 심신은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병권이 거추장스러워졌다. 심묘는 그런 부친을 위로하듯 살짝 웃었다.

“대량은 좋은 곳이에요.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대량은 국가가 부강하고 국민은 평안해 밤에는 문을 잠그지 않는 태평성세래요. 백성은 즐겁고 도적은 토벌당하니 아주 살기 좋은 나라예요.”

“얼마나 좋은 곳이든, 너 혼자서…….”

나설안은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대량의 예왕비는 높은 지위지요. 절 누구도 괴롭힐 수 없어요. 예왕 전하가 저와 혼인하려는 건 아마 제게 정이 깊어서일 거예요. 그러니 제게 잘해주시겠지요.”

심묘가 이렇게 말하는 일은 드물어서 사람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보 같기는, 반드시 그런 건…….”

나설안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똑똑한 심묘가 예왕이 그녀 자신이 아닌 장군부를 원하는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밝은 모습을 보이는 건 모두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일 터였다. 나설안은 마음이 더더욱 쓰라렸다.

“좋은 일인데, 왜 다들 즐겁지 않아 보일까요? 이러면 안 돼요. 성지가 내려왔으니 곧 혼수 준비를 해야 할 거예요.”

은은한 미소를 띤 심묘에게는 누굴 원망하거나 불행에 빠진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매우 자연스러워 마치 이 혼사를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 같았다. 심신 부부는 치밀어 오르는 비애를 감당하기 어려운 듯 말을 잃었다.

심묘가 여러 번 설득한 후에야 사람들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모두 음식을 입에 넣을 뿐 맛은 느끼지 못한 채 각자 생각에 빠졌다. 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제각각 흩어졌다.

나담은 심묘의 팔을 끌고 심묘의 뜰에 들어갔다. 그때, 나릉이 심묘를 불렀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야?”

“심묘야, 정말 예왕 전하에게 시집갈 거야?”

나담은 괴상한 시선으로 나릉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차분히 미소 지었다.

“성지가 내려왔으니 내가 바라고 말고는 상관없어.”

“난 네가 원치 않는다고 말할 거라 여겼어. 예전에 소춘성의 공자를 거절했듯이.”

나릉의 시선은 울적했으나, 그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띠었다. 심묘는 웃기만 했다.

“축하해.”

나릉의 웃음은 씁쓸했다. 심묘가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어렵게 나릉을 보낸 후 나담이 심묘를 끌고 뜰로 갔다. 나담은 방 안에 들어가 하인들을 내보내고 모든 문을 닫았다. 이후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낮게 물었다.

“심묘야, 넌 알았어?”

“뭘?”

심묘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예왕 전하가 폐하를 압박해 너와 혼인할 생각이었던 거 말이야.”

숨도 쉬지 않고 후다닥 내뱉은 나담의 말에 심묘는 놀랐다. 평소 나담은 무슨 일에도 둔했지만 어떤 일에는 특별히 직감이 뛰어났다. 심묘는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그럴 리가?”

나담은 흥이 올라 말을 이었다.

“왜 몰랐어? 넌 똑똑하잖아. 지난번 우리가 납치당했을 때, 난 네 말을 예왕 전하에게 전했고 예왕 전하는 오래지 않아 널 찾으셨어.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어. 두 사람 사이는 아주 특별한 거지? 그렇지 않으면 예왕 전하가 왜 널 도와주셨겠어? 책에서 그러잖아. 영웅은 미인을 구한다고.”

“언니는 책을 좀 적게 봐야겠다.”

나담이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예왕 전하의 능력은 대단해. 당시 고모와 고모부는 널 며칠 동안 찾지 못했는데, 전하는 단숨에 널 찾았어. 우리 나씨 가문 사람은 사람을 볼 때 능력을 봐. 전하는 능력 있는 남자야. 생긴 것도 잘생겼다니 보기 드문 일이지. 잘생긴 남자는 대부분 겉만 번지르르하지 실제는 재능이 없거든. 보기만 좋고 쓸모가 없는 거야. 우리 부에 늘 오는 고 의원 봐봐. 생긴 것은 잘생겼지만, 몸이 약해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잖아. 그런 남자는 믿을 수 없어. 기껏해야 눈요기만 하지.”

나무 위에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종양은 자칫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보기는 좋으나 쓸모가 없다니, 나담은 아주 용맹했다. 종양은 고양이 이를 알고 분에 못 이겨 피를 한 움큼 토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심묘는 나담을 흘겨보았다.

“됐어. 언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심묘, 난 네가 똑똑한 걸 알아. 그리고 너 역시 장군부 안에서 날 제일 잘 아는 사람이고. 남동생 나천도 너처럼 재치있지만, 나랑 통하지는 않아. 그래서 한 가지 바람이 있어. 네가 대량에 갈 때 나도 데려가. 나, 너의 혼수가 될래.”

나담이 기대에 찬 눈으로 심묘를 보았다. 심묘는 나담이 한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뭐라고?”

“나 대량엔 안 가봤어. 대량은 좋은 곳으로, 맛있는 것, 재미난 것이 많다고 들었어. 이번에 나와 나릉 오라버니가 정경성에 온 건 경험을 쌓기 위한 거야. 경험은 많이 할수록 더 좋은 거라구.”

“언니는 몰래 마차에 숨어 탄 거잖아.”

“의리 있게 날 데려간다고 말해.”

“안 데려가.”

심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반 시진 동안 나담은 심묘에게 비비적거렸다. 그러나 심묘는 처음 밝힌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사경행이 있다 해도 대량에서의 일은 순조롭지 않을 터였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하지 못하는데 그녀까지 끌어들일 수 없었다.

나담이 가고 심묘는 탄식하며 창문을 열었다. 겨울밤은 싸늘했다. 사경행은 정말 혼자 결정한 후 자신에게 ‘성지를 내렸다’. 이제 자신에게 하나씩 설명을 할 차례였다. 그러나 매일 뻔질나게 이곳을 드나들더니 정작 설명이 필요한 지금은 또 보이질 않았다. 그가 나타나지 않는 건 무슨 의미인지, 자신을 잡은 물고기라 여기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심묘가 팍하고 창문을 닫았다. 사경행은 참으로 뻔뻔했다.

심신 부부의 뜰. 심신은 나설안과 심묘의 혼사를 상의 중이었다.

“교교와 함께 대량으로 가자고?”

나설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교가 대량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어떡해요. 멀리 있는 우리는 교교가 억울함을 당하는 줄도 모를 거예요. 다른 나라에 시집간 아가씨가 남편 집안에서 살해당한 일 기억나죠? 그 친정은 딸의 소식을 오랫동안 몰랐댔잖아요.”

나설안의 불길한 말에 심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겨우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오! 하지만 내가 가겠다 해도 아마 폐하가 놓아주시지 않을게요.”

나설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대량과 명제의 국세는 긴장 상태라서 우리가 대량으로 간다면 폐하는 반드시 우리가 배신한 거라 여기실 테니……. 난감하네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그 말에 심신 역시 유감스러웠다. 그는 벽에 걸린 서화를 보며 넋을 잃었다. 심 노장군이 자신에게 물려준 서화 ‘정충보국(精忠報國, 사사로운 감정 없이 오로지 국가에 충성하다)’이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평생 충성하며 나라에 헌신했으나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제가 신하를 죽이려고 하면 그 신하는 죄 없이도 죽어야 했다. 장군부도 신하였으니 마찬가지였다. 문혜제는 줄곧 심신 자신을 경계하고 억제하며 통제했으나 감히 불만을 품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왜 자식까지 상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황제가 모두 이런 방식으로 충심에 보답하는 건지, 단지 문혜제만 그러는 건지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문혜제가 심묘를 위해 조금이라도 예왕에게 맞섰다면, 그러려고 노력이라도 했다면 지금처럼 불만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혜제는 시원스레 승낙했다. 천하 강산 앞에서 심묘는 티끌만도 못했다. 대량이 강대하다 해도 명제가 예왕 앞에 고개를 숙이며 스스로 신하로 칭하니, 예왕의 압박에 문혜제의 마음이 어지러운 건가 싶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무능이 혐오스러웠다. 그 자신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지만, 대량 예왕보다 문혜제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변할 것을 누군가 예측했다는 것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예왕 전하는 왜 갑자기 교교와 혼인하려는 걸까요? 대량은 병권이 모자라지 않아요. 군신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라도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심신이 나설안을 힘겹게 달랬다.

“내일 내가 알아볼 테니 이만 잡시다.”

그러나 그날 밤은 아무도 잠들 수 없었다.

* * *

문혜제는 조회 때 조정 문무 대관 앞에서 성지를 선포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 내에 정경성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다. 관리들과 백성들 모두 이 일을 논했다.

엄숙한 공주부에서 송신 공주는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조카가 이렇게 능력이 있었나 싶었다. 사경행은 분명히 심묘를 다른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예왕의 신분을 찾았으니 사경행이 아무리 심묘를 총애해도 그녀와 혼인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사경행은 능력이 출중해 원하는 일을 이루었다.

그날 오후, 송신 공주는 문혜제를 만났다. 그녀는 문혜제가 이유 없이 성지를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유를 알려고 고집했다. 송신 공주에게 정중한 문혜제는 일의 내막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밝혔다. 송신 공주는 등이 오싹했다.

그 아름다운 소년은 늘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용 이모’라 불렀다. 기억 속 모습과 달리 지금 사경행은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스스로 원하는 물건을 얻으려 몇 년간 잠복했고 끝내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쥐었다. 뻔뻔한 태도, 맹렬한 수완, 인정사정없는 위협…….

두려웠지만, 여전히 사경행의 신분을 문혜제에게 알려야 할지 말지 결정할 수 없었다. 말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경행은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명제의 백성이 사경행의 진면목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를 ‘한창나이에 죽은 소년 영웅’이라고 우러러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송신 공주는 사경행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도 자신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고, 왕래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남편의 기일은 원래도 추운 계절이었으나 한 해는 유독 더 추웠다. 하필 그때 감기에 걸린 자신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평소 밤에는 시녀가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기에 혼자서 오한에 떨었다. 당시 다섯 살이던 사경행은 어떻게 자신이 아픈 것을 알고 뜨거운 죽을 끓이게 한 후 한 숟갈씩 떠 먹여주었다. 작은 나무 의자를 가지고 와 침상 옆에 앉아 시도 읽어주었다. 예쁘게 생긴 어린 남자아이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누구든 감동할 터였다.

이후 근 이십 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자신들은 분명 모자가 아니지만, 모자보다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런 처지가 된 건지, 마음이 아팠다. 적이나 다름없는 나라의 황족이니 원수였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사경행을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날도 공주부는 일거수일투족 주시당했다. 송신 공주는 공주부가 감시당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주부는 왕래가 적기 때문에 호위들이 나태해 감시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 * *

평남백부 소명랑은 여종이 유락(乳酪)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거절했다.

“난 안 먹을래. 형님 가져다줘.”

소명랑은 ‘아름다운 걸 좋아할’ 나이였다. 둥근 흰 경단이었던 시절이 무색하게 지금 소명랑은 귀여운 ‘소공자’로 지내길 원했다. 그래서 냄새가 좋아도 단것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소명랑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여종을 붙잡았다.

“됐다, 형님에게 가져가지 마. 심묘 누나가 혼인을 앞두고 큰형이 살쪘다고 싫어하면 어찌해?”

여종은 소명랑의 소대인 같은 모습을 보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명랑은 길게 탄식했다.

“네가 그렇게 난처해하니, 원하지 않지만 먹어줄게. 어머니께 내가 형님의 유락을 뺏어 먹은 거 말하지 마.”

소명풍은 유락 같은 간식에 관심을 둘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계속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소욱이 동정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욱은 소명풍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들아, 아비도 네 마음이 난처한 것 안다. 그러나 이 성지는 폐하가 직접 내리신 게다. 아비도 힘을 쓸 수가 없구나. 그저 운이 나쁜 것이다. 마음에 둔 아가씨가 너와 연분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 기왕 맺어질 수 없게 되었으니 심 소저가 멀리 가 차라리 다행이다. 앞으로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할 테니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잊힐 게야.”

소욱과 소 부인은 소명풍이 문혜제의 성지에 상심할까 걱정했다. 거듭 위로했지만, 소명풍은 어두운 낯으로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에 소 부인은 소명풍이 잘못된 선택을 할까 걱정해 소욱에게 그를 격려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명풍은 귀찮은 듯 말했다.

“아버지, 절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에요.”

“아들아, 네 마음을 아비가 어찌 모르겠느냐? 아비도 네 나이를 겪었단다. 괜찮다, 세상에 널린 게 여자다. 잘 생각하거라.”

“좋아요. 아버지, 알겠어요. 전 지금 혼자 생각하고 싶어요. 자살하지 않을 테니 잠시 혼자 있게 해주세요. 가능하지요?”

온화한 소명풍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소욱은 더 말하면 소명풍의 연약한 마음이 더욱 엉망진창이 될까 걱정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네가 선녀 같은 아가씨를 아내로 맞을 수 있게 노력할 테니 상심하지 말거라.”

소욱이 떠나자 소명풍은 탁자에 앉았다. 마음이 이유 없이 초조했다. 갑자기 황제가 심묘에게 성지를 내리다니 이상했다. 게다가 심묘와 태자를 이어주려던 황제가 이번엔 그녀를 예왕과 엮다니 더욱 의외였다.

문혜제의 의중을 추측할 여유가 없는 소명풍은 심묘 쪽 일부터 검토했다. 심묘와 사경행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호두환을 본 이후로 자신은 심묘와 사경행이 특별한 관계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경행이 살아 있다고도 의심했다. 사경행의 소식을 알아보려면 심묘를 주시해야 했다. 그러나 하필 이때 심묘와 예왕이 혼인한다니, 의혹을 확인할 기회도 잃는 셈이었다.

곧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에 소명풍이 불안해할 때, 바깥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냈다. 그 자신이 보낸 척후였다. 그는 공주부와 장군부의 감시를 책임지고 있었다. 소명풍은 송신 공주가 무언가 알고 있다 느꼈고, 심묘는 더 말할 것도 없어서 감시를 붙였다.

척후는 소명풍에게 보고했다.

“공자님께서 제게 조사시킨 일에 단서가 있습니다.”

소명풍은 기뻐하며 똑바로 앉았다.

“빨리 말해 보거라.”

“공주부의 호위를 따라가 보니 예왕부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송신 공주의 분부일 겁니다. 예왕부의 호위 몇 사람도 장군부에 잠복한 것 같은데, 감시를 하는지 심 소저를 보호하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소명풍은 미간을 찡그렸다. 송신 공주는 예왕을 감시하고 예왕은 심묘를 감시하고 있었다니, 어째서 모두 예왕과 관련되어 있는지 의아했다. 자신은 사경행의 행방을 찾으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예왕이 나오다니, 순간 한 가지 두려운 생각이 스쳤다. 소명풍의 심장이 극렬하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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