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장
장군부는 며칠간 대단히 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묘의 성지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울한 기색이었다.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까 봐 있는 힘껏 기쁨을 가장해도 슬픔을 덮을 수는 없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그들은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이 혼사를 없던 일로 만들 방법을 찾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문혜제가 조정 문무 관리 앞에서 선포한 건 심신의 항명 가능성을 아예 없애기 위해서인 듯했다. 황제의 명은 지엄하니 이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심구는 심묘를 보며 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심묘에게 구하기 힘든 보석을 자주 보냈다. 그러면서 ‘오라비가 능력이 없어서 이런 것만 줄 수 있을 뿐’이라고 힘없이 덧붙였다.
심묘는 우울한 장군부의 분위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 일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님을 알지만,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사경행이 진정 무엇을 위해서 한 일인지 심신이 알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심묘 자신은 명제에서는 장군부가 눈에 밟혀 여러 일을 처리하기엔 불편했다. 반면 대량에서는 사경행의 명의를 빌리면 되니 많은 일이 수월해질 터였다. 그래서 자신은 정말로 홀가분했으나 다른 사람은 자신이 연기하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심묘가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 백로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서둘러 중앙 대청으로 오시래요. 예왕부 사람이 빙례(聘禮, 신랑 측에서 보내는 예물) 목록을 가져왔습니다.”
빙례 목록이라니, 심묘는 멍해졌다. 사경행이 정말 간덩이가 부었구나. 장군부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기는커녕 원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빙례 목록을 보내다니. 불에 기름을 끼얹는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그다운 행동이었다.
중앙 대청에 도착하니 나설안이 긴 목록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설안 옆에 선 심구와 심신도 목을 길게 뻗어 목록에 집중했다. 나담은 입을 가리고 있었고, 나릉은 복잡한 시선으로 서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심묘는 장군부 사람 외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사람을 본 심묘는 사레에 들릴 뻔했다. 그 사람은 수염이 난 중년 남자로 심묘는 그를 본 적 있었다. 그는 사경행의 호위로서, 용맹한 기백이 가히 호걸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종양은 그를 ‘철의’라 불렀었다. 오늘은 금분홍 실로 새와 구름이 수놓여 있는 진홍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축하하기 위해 입은 것 같은데 피부가 검은 철의와 어울리지 않았다. 영웅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둔해 보일 정도였다.
심묘를 본 철의가 인사했다.
“왕비마마.”
“함부로 부르지 마시죠.”
심구가 소리를 지르며 철의를 노려보았다. 눈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철의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심묘는 웃고 싶었다. 빙례 목록은 보통 중매 부인이 읊게 하는데, 그렇게 돈 많은 예왕부에서 사람을 사지 않고 철의 같은 건장한 남자를 보내다니, 일부러 이런 것이 확실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심묘를 나담이 불렀다.
“심묘야, 왜 멍하니 서 있어? 빨리 와서 여기 봐봐.”
나담은 심묘에게 눈짓했다. 새가 지저귀듯 높은 목소리는 흥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빙례 목록은 정교했고 긴 향나무 두루마리에 금가루가 칠해져 있었다. 봉투 위에는 청록색 묘안석이 있어서 더욱 화려했다. 심신 부부는 허영을 좋아하지 않으나 이는 예왕이 심묘를 중시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인지 부부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나설안이 빙례 목록을 철의에게 넘겨주었다.
“읽어보시게.”
명제에서는 빙례 목록을 신랑 측에서 읊었다. 오랜 시간 읊을수록, 빙례가 두터울수록, 여자 측은 더욱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철의는 이런 일에 그다지 익숙지 않은 게 명백했다. 그는 첫 항목부터 무미건조하게 읽었다.
“황화리(黃花梨) 찬 해당화 발보상(拔步床, 대형 침상) 하나, 산지삼병풍 나한상(罗汉床, 한족 침상) 하나, 황화리 상자, 황화리 큰 궤, 녹나무 책장, 녹나무다옥 격자 한 쌍, 동부홍병 한 쌍, 나전 황화리 앉은뱅이책상 하나, 나전 황화리 금전 궤짝 한 쌍…….”
첫 항목은 가구였다. 너무 많아 듣는 사람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장군부에 다 들여놓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적어도 주택이 세 채는 더 있어야 했다.
두 번째 항목은 장식품이었다.
“침향목 옥을 박아넣은 여의, 석박 유등 하나, 도금한 작은 탁상시계 하나, 은 회중시계 하나, 녹옥 비취 분재 하나, 은도금 육방석재매화 분재 하나, 남색·흰색·검은색의 세 가지 빛의 십팔자 냉채 하나, 분채 찻잎 단지 하나, 죽매 쌍환 거울, 부귀영화 액자…….”
모두 하나하나 비싼 물품이었다. 이것만으로도 평범한 집안은 몇 년 치 생활비를 지불해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대량의 예왕이라고 해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렇게 쓸 수는 없었다. 나담은 두려워져 심묘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예왕 전하는 무슨 소금 장사라도 하시나…….”
나설안과 심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예왕의 빙례 목록은 두꺼웠다. 그러나 그들이 의아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철의가 다음 장을 읽었다. 세 번째 항목은 생활용품이었다.
“회양목 나무 빗 여섯 갑, 상촉 통발 두 갑, 자단목치장갑 하나, 박달나무 양치질 그릇, 세숫비누 막 단자, 유리알 문발, 초록 장식띠 오채술, 원앙 베개 여덟 개…….”
장군부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철의가 계속해서 네 번째 항목 의상 부분을 읽었다.
“큰 모피 기장(만주족 여성 의상), 백색 족제비 가죽, 각종 목화 기장 열두 종. 의상 서른두 종, 홑적삼 비단, 명주 비단 꽃무늬 두루마기 열두 종, 오복 모란 백나비 치마 열두 벌, 각색 상등 비단 삼십 필, 향운사 여섯 필, 무늬 비단 스무 필, 구름무늬 비단 열 필, 채색 비단 열 필, 각색 명주 열두 필, 자수 단자(缎子, 새틴) 서른여섯 필, 수놓은 신발 스무 쌍…….”
견딜 수 없던 나설안이 물었다.
“저…… 혹시 예왕 전하의 빙례 목록을 잘못 가져온 건 아닌가, 이건…… 합당치 않네.”
공주에게나 있을, 아니 공주에게도 이렇게 후하지 않을 빙례 목록에 장군부 사람들은 당황했다. 철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예왕부의 빙례 목록이 맞습니다. 부인께서는 계속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그가 다섯 번째 항목인 금은 장신구를 읽었다.
“산호 금박 진주 봉랍 침향나무, 청옥 네 개, 백옥 가객 네 개, 수정 각색 부속 두 쌍, 진주팔찌, 비취팔찌, 산호팔찌…….”
그가 여섯 번째 항목인 골동품, 서화를 읽었다.
“직금채 자기병 네 개, 홍옥주전자 한 개, 화형 투색병 한 개, 선덕 쪽약 백색 매병 한 개…….”
철의는 이어서 일곱 번째 항목인 서적 네 상자, 문방사보(文房四譜, 종이, 붓, 먹, 벼루) 한 상자를 읽었다. 여덟 번째 항목은 여종, 하인, 호위였다. 아홉 번째 항목은 마필과 마차였다. 다 읽기 끝나기 무섭게 열 번째 항목이 이어졌다…….
장군부 사람들은 점점 말문이 막혔다. 반면 철의는 뛰어난 이야기꾼처럼 술술 읽었다. 막힘 없는 기세였다. 한줄 한줄 읽을 때마다 그의 뒤에서 눈부신 황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 줄을 읊은 철의는 길게 숨을 토하고 빙례 목록을 접었다. 그제야 철의는 고개를 들었다.
“토지와 상점은 예물에 넣지 못했습니다. 모두 대량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부 하면 황금 일만 근은 될 겁니다.”
철의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황금 일만 근이라니 나담은 기절할 것 같았다. 철의는 이어서 말했다.
“예왕부는 장군부에서 예왕부 사이의 모든 주택을 팔 겁니다. 나중에 토지 계약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받아주시길.”
그가 공손히 빙례 목록을 나설안에게 건넸다. 그러나 나설안은 철의가 건넨 목록을 받지 않았다. 장군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모습이었다. 나설안 역시 감히 받을 수 없었다. 황금 일만 근에 이렇게 긴 빙례 목록이라니 장군부가 명제 제일 갑부가 될 것 같았다. 예왕이 대량의 국고를 모두 옮겨 온 것 같았다. 예왕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심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심구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탐색하듯 물었다.
“예왕 전하께서 이런 빙례 목록을 쓴 걸, 대량 황제 폐하는 아시나?”
당황한 철의가 곧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폐하께서는 물건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많은 수량도 아닙니다.”
장군부 사람들이 몸을 떨자 철의는 그들을 달래듯 덧붙였다.
“대량 황실의 금은보화는 모래와 자갈처럼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분위기는 더욱 숙연하고 경건해졌다. 과연 대량은 기름이 흐르는 것만큼 부유하구나. 명제 국고를 가득 채울 정도의 후한 빙례가 대량 사람들에겐 모래와 자갈 같다니.
“장군과 부인께서는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저희는 대량 황실의 예에 맞춰 준비했을 뿐입니다.”
나설안과 심신은 예왕이 예의를 알며 심묘를 각별히 여긴다고 느껴 안도했다. 심묘의 빙례는 문혜제가 황후에게 준 것보다 더 후할 터였다. 평범한 신하는 그런 부를 갖추지도 못했겠지만, 갖추었더라도 혼인할 때 빙례가 황실보다 과하지 않게 고려할 터였다. 그러나 예왕은 명제 사람이 아니고 대량 사람이니 그런 부분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빙례 목록이 황실보다 두꺼워도 누가 뭐라고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신과 나설안은 마침내 안심했다. 성지를 바꿀 수 없으니 심묘가 예왕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영광스러운 출가는 많은 아가씨의 희망이었다. 이 빙례는 심묘에게 어찌 보면 보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예왕에 대한 나쁜 감정이 적지 않게 사라졌다. 자연히 철의에게 느끼는 감정도 나아졌다. 나설안이 친근하게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주단자는 보내지 않는 겐가?”
혼인을 앞두고 궁합을 보는 법이었다. 그러나 심묘의 혼인은 특별히 문혜제가 직접 내렸기에 아직 궁합을 보기 전이었다.
“전하는 이미 유명 대사를 통해 심 소저와의 궁합을 보셨습니다. 두 분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500년 동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께서 사주단자를 주시면 전하의 사주단자를 토지 계약서와 함께 보내겠습니다.”
철의의 태도는 매우 진실해서 결점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나담이 끼어들었다.
“그럼 혼인 날짜는 언제인가요? 폐하의 성지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았어요.”
철의가 웃었다.
“혼서도 다 작성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연말이 지난 후 대량으로 돌아가십니다. 그날, 심 소저와 성혼한 후 혼례복을 입은 채 대량까지 가실 겁니다.”
명제에서 출가해 대량에 간다는 것이었다. 대량으로 돌아가 대량의 백성에게 공식적으로 선포하다니 천하 사람에게 심묘의 예왕비 신분을 알리려 하는 것 같았다. 심신과 나설안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 속에서 의혹의 기색을 읽었다. 심묘가 푸대접받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왕이 이렇게까지 심묘에게 잘해주는 걸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정말 심묘를 좋아하는 건지,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의아했다.
나릉의 눈빛은 어둡고 희미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의 꽃무늬를 세는 것 같았다. 장군부 사람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오직 심묘만이 평온해 보였다. 심묘가 철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철의는 얼른 천만의 말씀이라며 사양했다. 그는 며칠 지나 물건을 보낼 거라 말하고 장군부를 떠났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보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심신과 나설안은 무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왕의 목적이 장군부와 명제 황실을 이간질하기 위한 거라면, 혹은 명제 황실이 장군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거라면 성지가 내려왔을 때 예왕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것이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빙례를 준비하다니, 은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는 과했다. 대량의 국고가 좁아서 은자를 보관할 수 없대도 이렇게 많은 부귀를 장군부와 나눌 필요는 없었다.
심구도 이를 눈치채 노기등등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건가? 우리 장군부가 돈이 부족해 보여서 이렇게 많은 물건을 보내는 거야? 우리가 심묘를 파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많이 보내면 다른 사람이 장군부를 어떻게 보겠어?”
심구의 말에 심신과 나설안은 침묵했다. 심구의 말이 맞았다. 황실도 질투할 정도의 빙례인데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량에서 보낸 빙례였다. 감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정경성 많은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배가 아파 잠을 못 잘 터였다. 더욱이 심신의 원수들은 피를 토하려 할 것이었다.
나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쨌든 제부는 대범하게 손을 썼어요. 소심한 거보다는 나아요. 여자에게 많은 돈을 쓸 수 있는 남자가 좋은 남자예요. 이렇게 많은 물건을 보냈으니 앞으로도 심묘를 푸대접하지 않을 거예요.”
나담은 무엇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제부’ 소리는 듣는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 물건들은 또 어디에 다 둘지.”
심신의 말에 나설안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맞아요. 우리 주택 안에 이렇게 많은 물건을 놓을 수 없어요. 창고에 장신구와 골동품을 둔다 해도 가구와 의복은 어디에 둔단 말이에요?”
이에 심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예왕부에서 사두었던 주택을 다시 판다고 하니 곧 그 주택은 장군부 것이 될 거예요. 그곳에 물건을 가져다 두면 어때요? 아니면 아예 예왕부로 들어가 살아도 될 거예요.”
심묘의 말에 심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경 골목은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모두 황실 가족과 친척이 사는 곳으로 장군부 사람은 머물 수 없었다. 자신들이 그곳에 산다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몰랐다.
순간 철의의 말이 생각난 심신의 눈에 서글픈 기색이 스쳤다.
“연말 이후 떠난다니. 교교, 너…….”
연말이 지나면, 심묘는 대량으로 떠나야 했다. 장군부 사람들은 침묵했다. 이별, 가족과의 헤어짐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슬픔에 젖는 게 두려운 심묘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예왕 전하가 많은 빙례를 보냈는데, 혼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심묘의 말에 목이 말라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나담이 차를 나릉에게 뿜었다. 그녀는 나릉의 옷을 신경 쓰지 않고 외쳤다.
“혼수? 세상에!”
하늘의 벼락이 머리 위로 떨어진 것 같았다. 빙례를 받은 만큼 혼수를 해가야 하는 것이 도리였다. 빙례보다 많을 필요는 없으나 너무 적을 수는 없었다. 너무 적으면 시댁에서 미움받을 수 있었다. 반대로 혼수가 빙례보다 많으면 예쁨을 받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집안의 총애를 받는 아가씨들은 혼수의 수량을 빙례 이상으로 준비했다.
심신이 심묘를 아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예왕이 장군부에 많은 빙례를 보냈으니 비슷한 혼수를 보내려면 명제의 국고를 비워도 모자랄 터였다! 예왕이 장군부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준 셈이었다.
* * *
늦은 밤, 심묘는 등불 아래 앉아 있었다. 낮에 철의가 길고 긴 빙례 목록을 가져와 외치던 걸 떠올렸다. 웃음이 났다. 사경행은 확실히 제멋대로였다. 이렇게 많은 빙례를 보내다니,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빙례 목록은 결국 알려질 것이다. 장군부는 명제 모든 사람에게 흠모를 받는 동시에 질투도 당할 터였다. 사경행이 이렇게 긴 목록을 쓴 걸 과연 영락제가 알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 갑자기 마음이 쓰라려졌다.
전생에서 자신이 부수의에게 시집갈 때 그는 이렇게 후한 빙례를 보내지 않았다. 황실의 기본적인 빙례는 고사하고 관리 집안의 빙례에도 안 되는 규모였다. 그때 부수의는 정왕부는 청렴하고 그 역시 검소해 낭비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도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때 심신과 나설안은 고운 딸이 손해 볼까 걱정해 심부 재산의 반을 혼수로 보냈다. 그 혼수들은 모두 부수의의 야심을 뒷바라지하는 데 쓰였다.
부수의는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려 했고 사람들의 인심을 매수하려면 당연히 은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자신은 심부의 골동품과 그림들도 가져다 은자로 바꿨다. 이렇게 심부의 재산을 다 주었으나 부수의는 한 번도 자신에게 보답한 적이 없었다. 물론 사랑하는 이를 위하는 일이었으니 보상을 바란 적 없었다. 하나 스스로 나서서 한 일이어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실망하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황제가 된 부수의는 미 부인과 부성에게는 후하게 대접했으니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완전히 무시한 셈이었다.
이제 자신은 사경행과 혼인해야 했다. 기분을 형용하기 어려웠지만, 마음은 움직였다. 전생의 자신은 불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열렬한 감정을 품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경행은 예상보다 더 많이 자신에게 주고 있었다. 덕분에 이 혼사는 좀 다를 거라는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창문을 두 번 두드렸다. 바깥을 거닐던 종양이 창문을 열고는 심묘에게 인사했다.
“소부인, 주인께서 부인을 데려오라십니다.”
심묘는 조금 놀랐지만,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마침 심묘 자신도 사경행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처음과 달리 이번 예왕부로 가는 길은 수월했다. 한 번 쓴맛을 본 종양은 곳곳의 풀을 찾아 심묘가 벽을 넘을 수 있게 했다. 그는 다음번에는 아예 벽을 연결해 힘을 더 덜자고 생각했다.
심묘가 예왕부에 도착하자 예왕부 하인들이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소부인!”
심묘는 말을 잇지 못했으나 종양은 유쾌하게 설명했다.
“소부인, 모두 부인을 아주 좋아합니다.”
심묘는 기분이 복잡했다. 종양의 안내에 따라 후원에 도착하자 멀리 백호가 심묘를 향해 달려와, 심묘의 옷자락을 물었다. 그때,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교교, 이리와.”
사경행이 나무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의 발아래 백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를 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심묘가 그에게 다가가자 백호가 기뻐하며 따라왔다. 백호는 몇 번 보지 않은 심묘에게 친근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누가 보면 그녀가 백호를 키운 사람이라고 여길 터였다.
심묘는 사경행의 곁에 섰다.
“날 왜 찾았어요?”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옷 재단.”
“옷 재단?”
심묘가 더 묻기 전 사경행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녀를 품에 가볍게 껴안은 다음 곧 그녀를 놓아주었다. 동작이 너무 날쌔 안고 풀어주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심묘는 화가 났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말하자니 시시콜콜 따지는 것 같고, 말을 안 하자니 그만 이득을 보게 해주는 것 같았다.
“네 성격에 얌전히 혼례복에 수를 놓지는 않을 테지. 대량에서 수놓는 아가씨를 찾았는데 네 의복 치수를 몰라서 말이야.”
위아래로 심묘를 보던 사경행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껴안자마자 바로 알았지.”
“뻔뻔한, 파렴치한!”
심묘가 타박하자 사경행은 천천히 ‘오’ 하고 소리를 냈다.
“방금은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던걸.”
그는 매번 몇 마디 말로 사람을 화나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심묘가 비꼬았다.
“아주 능력이 좋네요. 한 번 껴안고 치수를 알다니, 이전에 이런 일이 적지 않았나 봐요?”
사경행은 그녀를 주시했다. 심묘의 등이 저릿할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양팔을 벌렸다.
“질투하는 건가? 그럼 너도 날 껴안던가.”
심묘가 비웃듯 말했다.
“누가 당신을 껴안고 싶다고. 맞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사경행이 다시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일이지?”
“빙례 목록을 받았어요. 왜 그리 많은 빙례를 보낸 거예요? 우리 장군부에는 많은 물건을 두지 못해요. 게다가 당신은 재화가 넘칠지 몰라도 장군부는 그 정도로 혼수를 많이 보내지 못해요. 일부러 그런 거죠?”
심묘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거? 난 더 보낼 생각인데?”
심묘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할 때, 바깥에서 호위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호위는 사경행을 보며 난색을 드러냈다.
“전하. 누가 찾아왔는데, 미친 듯 전하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해를 불러올까 두려워 그를 잠시 묶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데?”
“평남백 소가 큰 공자 소명풍입니다.”
심묘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예왕부 바깥 대청, 소명풍이 오랏줄에 묶여 있었다. 그의 입도 천에 막혀 있었다. 분노한 소명풍은 호위를 노려보면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소명풍은 오래전부터 예왕부와 장군부, 공주부를 감시했다. 탐색할수록 의혹은 더 깊어졌다. 예왕이 죽은 사경행이라는 가정. 처음에는 우스운 의심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측은 더욱 견고해졌다. 사경행과 관계가 있던 심묘는 지금 예왕과 혼인하게 됐다. 사경행이 예왕이라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소명풍은 사경행의 일에 유난히 집착했다. 사경행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며 자란 동무이자 많은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준 스승이었으니, 그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은 일생 전체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경행이 예왕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예왕부에 들어가 잠복하면 가면을 쓰지 않은 예왕을 볼 수 있을 테고, 그럼 모든 진상을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미친 짓이었지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아주 바보는 아니니 막무가내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수하가 부 입구에서 예왕부 호위를 유인하고, 그 혼란한 틈을 타 몰래 들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소명풍은 예왕부의 호위가 모두 고수라는 것을 간과했다. 호위들은 단숨에 그를 잡았고, 소명풍은 낙담했다. 실망은 컸으나 소명풍은 이왕 잡혔으니 사실을 확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기를 쓰며 발버둥 치는 와중에 신분을 밝힌 것이다. 제발 예왕의 주의를 끌 수 있길 바라며.
문밖을 지키던 수염 난 호위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소명풍의 마음이 긴장으로 팽팽해졌을 때 그가 주위 사람에게 눈짓했다. 곧 포승줄이 풀리고 입의 천도 사라졌다.
“전하께서 당신을 만나려 하십니다. 따라오십시오.”
소명풍이 남자를 따라 들어가자 예왕부 하인들은 그를 자세히 살폈다. 소명풍은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돌릴 수 없었다. 예왕에게 실례한 죄는 예를 갖추고 사과하면 될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곳은 명제 영토이니 예왕은 명제 관리 집안의 체면을 봐줘야 하지 않을까라고도.
그러나 곧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명제 황제인 문혜제도 우습게 보는 예왕이 일개 백성을 신경이나 쓸까 싶었다. 게다가 소가는 이미 관직에서 내려왔으니 문혜제에게 평남백부는 좋은 패가 아니었다. 일이 벌어져도 문혜제는 평남백부를 옹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동생 소명랑이 있으니 자신이 죽는대도 소가의 대는 끊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예왕이 소가 전체를 처벌하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웠다.
소명풍은 점점 식은땀을 흘렸다. 남자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남자가 도착을 알렸다.
“소 공자, 도착했습니다.”
소명풍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이곳은 예왕부 후원이었다. 겨울밤, 연못은 바람이 불어와 추웠다. 나뭇가지 위에 걸린 등롱이 은은히 화원의 돌 탁자를 비췄다. 돌 탁자에는 남자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거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소명풍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남자는 소명풍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소명풍은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왕부 호위의 예의 없음이 다 예왕 때문인 것 같았다.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을 받지 않겠는가. 예왕은 문혜제에게도 공손하지 않으니 예왕부 호위가 손님에게 그다지 예의를 차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정경성에서 이렇게 거리낌 없이 일 처리를 하는 건 임안후부 소후야 사경행밖에 없었는데. 사경행을 생각하니 소명풍은 심장이 뛰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탁자 곁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다리가 무거웠으나 곧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탁자 아래에 복슬복슬한 흰 털뭉치가 엎드려 있었다. 소명풍은 그 형체를 보고 큰 고양이라 여겼지만, 고양이는 그의 인기척을 듣고 ‘어흥’ 울며 하얗고 뾰족한 이를 드러냈다. 호랑이였다. 어린 새끼라고는 하지만 호랑이를 키우다니, 예왕이 정말 특이하구나 싶었다.
소명풍은 돌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예왕은 그를 등지고 있어 소명풍은 여자를 먼저 보았다. 여자는 용모가 수려하고 온화하며 단정했다. 소명풍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심 소저! 심 소저, 어떻게 이곳에?”
“소 공자, 너무 오지랖이 넓구려. 내 왕비가 내 부에 있는 게, 무슨 잘못된 일이란 게지?”
희미한 불만을 품은 도도한 목소리가 울렸다. 심묘는 자칫 쥐고 있던 찻잔을 놓칠 뻔했지만, 소명풍에게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명풍의 시선이 자신을 등진 예왕에게 닿았다. 예왕의 몸매는 굳세고 길었다. 등롱의 미미한 빛에 옷깃의 섬세한 금실 무늬가 드러났다.
“예왕 전하.”
예왕은 말이 없었다. 소명풍은 주의를 집중했다. 심묘가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예왕비가 될 심묘와 예왕의 연은 이전부터 이어졌으니 둘 사이는 분명 돈독할 터였다. 설령 예왕이 자신을 죽이려 해도 자신과 심묘는 안면이 있으니 그녀가 그저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성싶었다. 소명풍은 용기를 냈다.
“오늘 제가 온 것은 한 가지 일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말하라.”
예왕의 간단한 대답에 소명풍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
“예왕 전하와 제 옛 친구가 매우 비슷합니다. 그 친구는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습니다. 송구하지만…….”
그는 잠시 멈췄다.
“송구하지만 제 의혹을 풀 수 있게 전하께 가면을 벗어달라 간청드립니다.”
소명풍은 고개를 숙이고 예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초조한 기색이었다.
“네가 말한 옛 친구는 사경행인가?”
예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담담한,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목소리는 낮고 듣기 좋았다. 소명풍은 순간 기뻤으나 순식간에 평온해졌다. 예왕은 명제에 몇 개월째 체류하고 있었다. 사경행은 명제의 소년 영웅이니 명성이 작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사경행과 소꿉친구였다. 어쩌면 누가 예왕에게 그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습니다.”
“사경행은 죽었는데, 넌 자취를 감췄다고 하는구나.”
예왕의 목소리로는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소명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북부 변방에서 전사했다 말합니다. 시체는 저도 봤습니다. 그러나 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제 행동이 전하께 미움을 사고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인 건 압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떤 일은 심력을 다 해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소명풍은 예왕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직접 만나본 예왕이 예상보다 막무가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합리적인 듯하니 자신의 말에 감동하면 예왕이 관대하게 대해줄 것 같았다. 백호가 낮게 울자 예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쪽짜리 가면에서 차갑고 어두운 빛이 스며 나왔다. 일어난 예왕은 소명풍보다 한 뼘 정도 커서 소명풍은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사경행도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컸다. 그 시절 소년들은 서로의 키를 비교하는 데 시간을 썼다. 자신은 그 한뼘 차이를 따라잡겠다고 매일 과식했다. 그때 사경행은 비웃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넌 제2의 소명랑이 되려는 거야?”라고 타박하곤 했다.
심묘는 무언가 말하고픈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 얼굴을 보고 싶은가?”
예왕의 물음에 소명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왕이 은색 가면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그의 코는 오뚝했고, 입가의 웃음기는 지난날과 같았다. 장난기 심한 소년에서 성숙하고 아름다운 젊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였다. 사경행이 입을 삐죽거리고 웃었다.
“정신이 나간 거야?”
소명풍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소명풍은 주먹으로 사경행의 어깨를 때렸다. 이전 그들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소명풍이 사경행을 향해 욕을 했다.
“나쁜 놈! 어마어마한 사기를 쳤구나. 나도 속이다니, 의리도 없이!”
심묘는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이렇게 쉽게 가면을 벗고 신분을 인정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송신 공주 때도 그랬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여도 신분의 변화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귀한 감정일수록 쉽게 검증할 수 없었다. 검증 결과를 감당할 수 없으면 영원히 고통받을 뿐이었다.
심묘 자신이라면 사경행처럼 시원하게 밝히지 않았을 듯했다. 자신은 감히 미지의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자신은 그와 같은 결단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머뭇거림은 그의 사전에 없는 말이었다.
소명풍이 사경행의 가슴을 거듭 쳤다.
“너, 너 어떻게 예왕이 된 거야? 방금까지 예왕이 나에게 살심(殺心)이 동하면 오늘 목숨을 잃을 거라 생각했어. 지금 목숨은 건진 셈이네.”
말속에 흥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경행은 소명풍을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에 더 우둔해졌구나.”
소명풍은 그 말을 흘려들으며 손을 내저었다.
“난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믿지 않았어. 너 같은 사람은 만팔천 살은 살 거야. 심 소저에게서 호두환을 봤고 송신 공주마마도 날 찾아오셨다고.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살아 있을 줄 알았다고! 어째서 날 보러 오지 않은 거야?”
소명풍은 노기등등했다. 믿음을 얻지 못해 매우 화난 것 같았다. 사경행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소명풍은 숨이 가빠왔으나 평소 사경행에게 당하던 게 있어서 생각보다는 빨리 노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소명풍은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는 의미심장했다.
“심 소저는 네 신분을 알고 있었나 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넌 소원을 성취했구나. 아주 감쪽같이 숨겼어.”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경행이 귀찮은 듯 입을 열었다.
“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와 네 형수에게 무슨 할 말 있어?”
심묘와 소명풍은 ‘형수’라는 소리에 동시에 놀랐다. 소명풍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넌 살아 있었으면서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야? 게다가 송신 공주마마도 네 신분을 의심하시는 것 같던데, 넌 왜 공주마마께 말씀드리지 않는 거야. 네 아버지도…….”
사경행이 그의 말을 끊었다.
“소명풍, 난 대량의 예왕이야.”
순간 만물이 조용해졌다. 심묘는 작게 탄식했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사경행의 진짜 신분을 알면 정경성 안에서 그의 편에 설 사람은 없었다. 그가 명제를 배반했다고 여길 터였다. 진실이나 그의 고충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결과’와 ‘속임수’에만 주의할 게 뻔했다.
송신 공주는 사경행을 친아들처럼 아꼈으나 그의 신분을 알자마자 얼굴색을 바꾸었다. 속아 넘어갔다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소명풍도 지금이야 오랜 지기의 생환에 기쁠 테지만 곧 그의 마음속에서 다른 감정이 반기를 들 것이다.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소명풍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너,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가 예왕인 척 가장한 건 북부 변방에서 무슨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 예왕의 신분은 확실히 고귀하지만, 오래도록 가장하진 못할 거야. 결국은…….”
“난 대량의 예왕이야.”
소명풍이 주절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뜰 안 낙엽이 바람에 날렸다. 백호는 둥글게 몸을 말아 웅크리고 쉬고 있었다. 달도 별도 없는 밤, 등롱만 미약한 빛을 뿜었다. 소명풍이 놀란 시선으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내 진짜 신분은 대량의 예왕이야. 임안부후 사정의 아들이 아니야. 위장이 아니라고.”
사경행이 냉담히 말했다.
“아니야! 너와 난 십여 년을 알았고, 어릴 때부터 함께 했어. 네가 대량의 예왕이면 어떻게 내가 모를 수 있어?”
“사가 소후야는 태어나자마자 죽었어. 진정한 임안후부의 소후야는 이미 죽었다고. 내가 아니야.”
소명풍이 멍하니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혼란스러웠다.
“네 말은 네가 처음부터 임안후 아들이 아니고, 대량 황실 사람이라는 소리야? 정경성에서 성장했으나 사실 명제 사람이 아니고 대량 사람이라고? 넌 대량 영락제의 친동생이며 대량의 예왕이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해? 불가능해!”
소명풍은 이해할 수 없어 도리질하며 거듭 물었다. 사경행의 얼굴이 굳었다. 준수한 얼굴에 냉담한 기색이 스쳤다. 소명풍은 사경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귀찮을 때 이런 표정을 짓곤 했다. 그의 말은 진짜였다. 소명풍은 목화솜이 목을 꽉 틀어막은 것 같았다. 옛 친구를 만난 기쁨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텅 빈 마음에 격렬한 분노가 일었다.
“넌 언제 네 진짜 신분을 알았어?”
“사물을 구별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사경행의 답변에 소명풍이 두 걸음 물러났다.
“사물을 구별하고 기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넌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대량 사람인 걸 알았구나?”
사경행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심묘는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구태여 이렇게까지 진실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가 이렇게 말할수록 소명풍의 배신감은 깊어질 것이다. 적절한 거짓말은 자신에게, 다른 사람에게 사실을 받아들이기 수월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건만.
그러나 심묘는 바로 다음 순간 탄식했던 것을 반성했다. 자신이 사경행이었어도 이렇게 솔직하고 성실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을 터. 정말 친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아낀다면 최후에는 진실을 밝혀야 했다. 그게 도리를 지키는 길이었다.
어쨌든 심묘의 예상처럼 소명풍의 안색은 매우 복잡하게 변했다. 놀람, 의혹, 분노가 뒤섞인 그는 냉소하며 반문했다.
“오, 그럼 넌 지금 명제에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명제는 대량만 못하니 집어삼키려는 거야?”
소명풍의 말은 날카로웠다. 심묘는 사경행을 곁눈질했다. 소명풍은 많은 비밀을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가깝게 지낸 사이에서는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쉬웠다.
“그럼 또 어때?”
사경행의 말투는 꽤나 삐딱했다. 그는 소명풍의 말을 부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차분하고 느긋하게 행동했다. 심묘는 잠시 고민했으나 역시 참전을 포기했다. 장기 두는 것을 구경하면서 훈수를 두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군자였다. 오늘 자신은 군자의 마음을 익힌 구경꾼이었다.
더욱 분노한 소명풍이 사경행에게 소리쳤다.
“난 오늘 어떤 사람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악당인지, 무엇을 배은망덕이라 하는지 알게 됐어. 네가 임안후와 친하지 않은 게 옥청 공주마마 때문이라고 여겼는데, 넌 처음부터 그들과 관계가 없었구나. 임안후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면서, 넌 편히 임안후부의 부귀를 누렸어. 심지어 동생들은 서자이긴 해도 친아들이었는데, 생활은 너에게 비할 수도 없었지. 넌 늘 송신 공주마마를 네 가족이라 말하더니 공주마마도 속였어. 마마는 네 부고에 온종일 고통받았다고. 넌 날 형제라더니……. 하, 나와의 우정도 이유가 있어서일지도 모르지.”
소명풍이 냉소했다.
“넌 명제를 좋아하지 않고 정경성을 좋아하지 않아. 네가 자란 곳인데, 키운 은혜가 낳은 은혜만 못한 거야? 넌 명제가 너에게 준 것들을 누려놓고, 대량의 예왕이 되었구나. 대량은 국가가 부유하고 백성이 강하며 군대가 튼튼해. 넌 부귀영화를 위해 명제의 모두를 버린 거야. 사경행, 넌 정과 의리가 없어. 소인배야. 군자는 물론이고, 적자에도 어울리지 않아. 내 형제는 더더욱 아니야. 빨리 대량으로 꺼져.”
“그만!”
심묘가 사납게 일어나며 소명풍의 말을 끊었다. 소명풍의 말은 받은 상처를 전부 돌려주겠다는 듯, 너무 가혹했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가면을 쓰지 않아 사경행의 표정은 다 보였다. 그는 화를 내지도 웃지도 않은 채 냉담하고 평온히 소명풍을 바라보았다.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 마치 소명풍의 말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했다.
심묘의 마음에 갑자기 파도가 쳤다. 얼굴에 비꼬는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오, 소 공자. 참으로 정의롭고 위엄 있으시군요. 곧 정의를 이루실 것처럼 보이네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공자가 말하는 배은망덕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네요.”
사경행은 멍해졌다. 소명풍이 심묘에게 눈을 치켜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소 공자도 배은망덕하다는 말입니다.”
심묘는 살짝 미소 지어 단정하고 신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명풍의 무례를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전생의 자신은 미 부인과 다투며 매일 적지 않은 언쟁을 벌였다. 원래는 사람을 비꼬는 데 아주 뛰어나지 못했으나, 미 부인에게 적지 않은 것을 배웠다.
“다른 사람을 지적하기 전, 스스로 어떤지 먼저 보는 게 좋아요. 소 공자는 예왕이 배은망덕하다, 당신을 이용했다고 했지요. 저도 소 공자에게 묻고 싶네요. 어려서부터 사경행이 공자를 얼마나 도와줬나요? 당신이 벼슬에 오르고부터 사경행이 공자를 대신해 은자로 뇌물을 줬지요. 공자가 권법을 배우려 하자 사경행은 공자에게 스승을 찾아줬구요. 폐하가 평남백부를 억압하자 사경행은 공자에게 평남백의 관직이 순조로울 때 물러나도록 했지요. 사경행이 없었다면 공자는 지금쯤 평남백부 가묘(家廟)에 위패를 올리지 않았을까요?”
심묘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러나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당신은 사경행이 공자를 이용했다, 공자와의 우정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셨지요. 하지만 정경성에서 소 공자가 사경행의 소꿉친구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누구도 허약한 공자를 괴롭히지 않은 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세요? 평남백부의 명망? 사실은 사경행의 절친이라 감히 못 건드린 게 아닐까요? 세상일은 이렇게 간단해요. 소 공자는 내 말이 듣기 싫다 생각하지 마세요. 어려서부터 사경행은 당신에게 많은 길을 열어줬고, 평남백부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어요. 이런 대우를 받았으면서 자신을 이용했다고 말하면 나도 누가 날 이용해주길 바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심묘의 웃음은 맑았다. 그러나 말은 나뭇잎을 때리는 비처럼 한기가 흘렀다.
“다른 사람 덕분에 이익을 누려놓고 말마다 꾸짖고 있으니, 이게 배은망덕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소 공자, 나는 당신이야말로 정과 의리를 모른다고 말하고 싶네요. 당신은 사경행이 준 것을 모두 편안하게 누리고선 이제 와 억울하다 하시는 건가요?”
소명풍은 심묘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말을 듣자 사경행과의 일들이 떠올랐다. 사경행은 가볍고 냉소적이었다.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니 그를 구속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무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늘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사경행은 두말하지 않고 때렸다. 그 사람이 황제의 친척이라도 봐주지 않았으니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객관적으로도 사경행은 자신에게 잘했다. 그래서 자신도 이토록 오랫동안 그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터였다.
심묘는 말을 끝내자 후련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소명풍이 사경행을 비난하는 걸 참고 넘길 수 없었다. 말을 다 한 지금에야 좀 난감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사경행이 소명풍을 이용할 마음이 있었는지에 대해 심묘는 반드시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전생에 평남백부가 멸문당했을 때, 소욱 부자의 시체를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의심 많은 문혜제의 분풀이를 겁낼 때 사경행만이 나서서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게다가 사정이 죽어 임안후부가 위험한 상황일 때 사경행은 출정을 자원했다.
사경행은 많은 일을 했으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로를 논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았다. 늘 냉소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나쁜 점만 기억하고 그의 좋은 점은 점점 잊었다. 그는 의리를 중시한 진정한 영웅으로서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이것이 부명이 평가한 사경행이었다. 아이의 눈은 진짜 좋은 것은 알아본다. 심묘는 부명의 말을 믿었다.
그런 사경행이 소명풍에게 욕을 먹으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신분이 바뀌면 모든 사람은 힘들어할 게 뻔했다. 예왕은 겉으로 보기만큼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닐 터였다. 자신이 예왕이라는 사실을 태연자약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터이니.
심묘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경행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심묘를 의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소명풍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말문이 막혔다. 기분은 복잡하고 괴로웠다. 친한 친구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으니 기쁨에 겨워야 했다. 그러나 지금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소명풍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사경행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난 너희에게 빚진 것 없다. 혹 빚진 게 있더라도 이미 다 갚았다. 임안후부의 명성이 높을수록 황제는 임안후부를 누르려 했을 거야. 임안후 수하 사가군은 그 수가 수만이지. 여기에 부모 자식 사이가 좋아 자식이 가업을 이어받았으면 황제는 안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임안후와 가까울수록 죽음이 앞당겨졌겠지. 내가 몇 년을 더 살려면 임안후부를 먼저 보존해야 했어. 길러준 은혜로 부의 안정을 지켜줬으니 충분히 보답한 게 아닐까?”
사경행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소명풍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거리를 두지 않았다면 황제의 눈엣가시인 사정은 이미 죽었을 거야. 임안후부는 날조된 죄명 아래 명예도 잃었겠지. 그러나 지금 아들이 죽고 대가 끊어졌으나 적어도 임안후부는 존재해. 황제도 임안후부를 신경 쓰지 않고. 옥청 공주가 있었으니 임안후의 존엄을 보호할 수 있어.”
심묘는 사경행의 출중한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이런 것은 조금도 중요치 않은 것처럼.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이 말을 속에만 담아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경행은 솔직한 사람이지만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진상과 사실에 대해서는 솔직했지만, 자기 마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솔직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억울함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걱정과 의기소침함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인생을 방관하며 세상을 하찮게 여긴다고 여겼고, 세상에 무엇도 그를 괴롭힐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의 계획이었다. 임안후부의 명예를 계속 보존하기 위해 ‘불효하다’, ‘방자하다’, ‘부모 형제에게 무례하다’라는 누명을 홀로 짊어졌다.
“나는 대량에 있는 동안 네 생각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않았어. 그리 간단하지 않아. 네가 나였다면 하루도 안 돼서 울며 어머니를 찾아갔을걸.”
사경행이 나무 위 고드름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소명풍은 목구멍이 다시 막혔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이익은 없어. 무언가를 얻으려면, 쟁취해야 해. 소명풍, 너의 나날이 편안했다고 나의 하루도 그랬으리라 안일하게 추측해서는 안 돼. 난 네 상상보다 더 많은 일을 겪었다.”
사경행이 가볍게 탄식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그의 눈꼬리가 휘어져 보기 좋은 호를 그렸다. 그의 용모는 섬세하게 붓질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눈 안에 웃음기는 없었다. 눈빛은 도리어 겨울의 찬 바람처럼 살을 에었다.
“가장 중요한 건 명제는 내게 기른 정을 주지 않았어. 말살했을 뿐이지.”
소명풍은 비틀거리며 떠났다. 큰 충격을 입은 듯 혼비백산한 모양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에게 몇 마디 하려 했으나 사경행은 무심한 얼굴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심묘에게 일찍 부로 돌아가 쉬라고 재촉했다. 이 일을 다시 꺼내지 않으려는 모습이라 심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에 따랐다.
사람은 고통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동정을 얻길 좋아한다. 그러나 어찌해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처럼 사람을 괴롭게 하는 법. 게다가 사경행은 자기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그는 여전히 천하 강산에 자신을 못 할 게 없는 강대한 사람으로 보여주길 바랐다.
그러나 심묘는 “명제는 내게 기른 정을 주지 않았어. 말살했을 뿐이지.”라는 그의 한마디가 자꾸 맴돌았다. 잘 고민하면 무언가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장군부에 돌아올 때까지 심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명제가 사경행을 말살했다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심묘는 전생 일을 떠올렸다.
전생에 사정과 사경행이 전사한 후 사장무, 사장조 형제의 관직이 상승해 방 씨도 함께 좋은 생활을 누렸다. 현재의 임안후부는 자식들은 모두 죽었으나 사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정이 건재하는 한 임안후부도 건재할 터였다. 사정이 아내를 다시 맞이하면 아들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참혹해 보여도 전생보다는 많이 나은 셈이었다.
이번 생과 전생의 다른 점은 3년 전부터 일어났다. 전생의 사경행은 현생과 달리 더 이후에 북부 변경으로 출정했다. 그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많은 일이 변화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사경행의 결정을 바꾸었는지 의아했다. 지금까지는 심묘 자신 때문인가 싶었지만, 동시에 명제의 무언가가 변화를 촉발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의 자신은 임안후부의 일을 알았을 때 탄식했다. 속으로 임안후부에 황실이 손을 댄 건 아닌가 의심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사가 부자가 뻔뻔하게 행동해도 명제에 충성했는데 단지 황실을 위협할까 걱정해 말살했다면 황가가 너무 무정한 것이라 생각했다.
황실은 현생에서도 사가 부자를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경행이 나서서 출정하면서 황실의 ‘계획’을 바꾸었다. 황실의 소망이 이뤄져 사경행은 ‘전사’했으나 사정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사정은 사경행이 죽고 좌절하면서 임안후부를 철저히 함락하는 ‘계획’은 급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사가의 두 서자는 그 이후 모두 의외의 사고로 사망했다. 사정은 재기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그냥 둬도 지장이 없었다. 그래서 황실은 그를 위로하며 신하를 돌보는 자비를 보였다. 사경행이 장래 발생할 모든 일을 예측했다면 그가 소명풍에게 말한 것처럼 먼저 출정하는 것이 임안후부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심묘 자신의 추측에 불과했다. 진상이 무엇인지 다음에 사경행에게 직접 물어볼 요량이었다. 전생에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으나 이번 생에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 * *
정왕부의 밤은 아주 환했다. 부수의는 자리에 앉아 느릿느릿 반문했다.
“소명풍이 예왕부에 갔다고?”
“그렇습니다. 귀신이라도 봤는지 비척비척 돌아갔습니다.”
부수의가 손을 휘젓자 수하가 물러났다. 곁의 막료가 한 발짝 나와 물었다.
“평남백 소명풍이 심야에 예왕부에 가다니. 혹시 예왕 전하와 사적인 관계가 있는 걸까요?”
“평남백부는 벼슬을 하지 않으니 예왕이 협력할 사람을 원한다면 소명풍을 찾진 않았을 것이다. 평남백부는 본래 아주 좋은 바둑돌이었다. 소명풍이 갑자기 중병에 걸리고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쓸 수 없게 되었지만. 하지만 그 덕분에 자기들은 재난을 피했으니, 행운이 따른 셈이지.”
부수의의 시선이 차가웠다.
<11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