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11권
52장
“하긴 평남백부 소명풍이 병에 걸린 시기가 아주 공교롭긴 합니다. 그자가 중병에 걸리고, 평남백도 관직에서 물러나 모습을 감추고 있으니 정경성에서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습니다.”
부수의는 웃었다.
“자네는 소명풍이 정말 병에 걸린 거라 여기는가?”
“전하,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소명풍과 임안후부 사경행은 친한 친구지. 평남백부가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난 건 괴상한 일이다. 더욱이 소명풍은 전도가 유망했지. 그런데 갑자기 위급한 병에 걸렸다며 직접 사직을 요청했다. 몇년 못살 거라 하더니, 보거라. 시간이 지났는데, 소명풍은 멀쩡히 살아 있지 않느냐. 평남백부는 분명 목숨 보전을 위해 어려운 시기가 아닐 때 물러난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 일깨워줬겠지. 참견했다가 괜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도 나섰다? 사이가 좋은 절친이나 할 수 있는 일일 게지.”
막료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임안후부에는 아직 임안후 사정이 있습니다. 왜 그들을 일깨운 게 사정이 아니라 사경행입니까?”
부수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정은 자신도 보전하기 어렵다. 사정은 군 공로가 탁월한 것에 기대 부황 앞에서 여러 번 방자하게 굴었고, 그래서 부황은 그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으셨지. 총명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도록 적당히 했을 텐데. 오히려 사경행이 만만찮다.”
부수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경행도 건방지게 일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대범하지만 악질적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맞다. 그러나 자네가 잊은 것이 있다. 그자는 벼슬에 오르지 않았지. 사람들은 모두 사정과의 불화 때문에 사경행이 일부러 인생을 허비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다. 국화연회에서 두 서출 동생을 대하는 사경행의 무술은 대단했다. 당대 견줄 자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드러내지 않았으니 자신의 재능을 감추었다고 볼 수 있다. 사경행은 어린 나이에 시국을 자세히 연구하고 이후 추세를 추측했으니 사경행이 임안후부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평남백부를 일깨운 사람은 사정이 아니라 사경행이지. 사경행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막료가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전하, 사경행을 너무 높게 보는 게 아니신지요. 사경행이 평남백부를 일깨웠어도 무언가 부족합니다.”
“무언가 부족하다? 사가군을 더하면 어떠한가?”
부수의가 반문했다. 막료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놀란 눈으로 부수의를 보았다.
“전하의 뜻은?”
“요컨대 임안후부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사경행이었다. 적은 나이에 재능이 충분했고 두뇌도 뛰어났지. 사경행이 권력을 쥐면 명제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자가 건재했다면 임안후부라는 살점 많은 뼈다귀는 영원히 뜯어먹을 수 없었을 테고.”
“다행히 사경행은 이미 죽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임안후부는 다시 되돌릴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 위험한 적은 성장하기 전에 죽여야 하는 법이지. 그러나 난 지금 왜 소명풍과 예왕이 한데 엮인 것인지 궁금하구나.”
막료가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부수의는 화제를 돌렸다.
“그뿐 아닙니다. 송신 공주마마도 예왕 전하를 조사하시는 듯합니다. 소명풍의 사람도 장군부를 지키고 있습니다. 심 소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 같습니다. 송신 공주마마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풍, 예왕, 송신 공주, 심묘 이들은 반드시 특별한 관계에 있다. 더욱이 심묘와 예왕은 부황이 성지를 내린 사이다. 부황은 자신의 물건을 남에게 내주시지 않는 분이지. 장군부는 부황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데 부황이 심묘를 보내실 리 없다. 심묘가 예왕비가 되는 건 명제로서는 조금도 이득이 없는 장사니까.”
“전하의 뜻은?”
막료가 낮게 읊조렸다.
“이 혼사는 예왕이 먼저 꺼냈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부황을 핍박해 이를 얻어낸 것이다.”
부수의는 갑자기 기이하게 웃었다.
“자네는 의아하지 않은가? 난 예왕과 심묘 사이가 평범하지 않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예왕이 여인을 위해 천하를 바꾸는 사람은 아니라 여겼는데, 내가 틀린 것 같구나. 예왕이 심묘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러니 온갖 수로 성지를 받아낸 것이지. 세상에 이유 없이 발생하는 일은 없다. 소명풍과 송신 공주는 평생 정경성을 떠나지 않았으니, 예왕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왕을 잘 아는 듯 보이는구나. 예왕과 심묘도 몇 번 만난 것에 불과한데, 어째서 심묘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하는 걸까? 혹 예왕이 이전에 명제에 왔던 건 아닐까?”
막료는 대경실색했다.
“예왕 전하가 예전에도 정경성에 왔었고, 심지어 몇 사람과 우정을 나눴다는 말씀이신지요?”
“예왕임을 드러내고 온 건 당연히 아니었겠지. 아마 처음에는 그들을 속였을 거야. 아니면 예왕이 명제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 정경성에 살았다던가. 그자가 가면을 쓴 게 수상하지 않으냐? 대량 황실 사람은 하나같이 외모가 출중하다는데, 예왕은 무엇 때문에 진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우리가 아는 얼굴일 게 틀림없다.”
막료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부수의가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는 내 추측이니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사람을 보내 알아보고 있으니, 곧 예왕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게 될 터다.”
잠시 후, 부수의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물었다.
“배랑은 어떤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습니다.”
막료의 대답에 부수의는 또 한번 미소 지었다.
“계속해. 죽게 하지는 말고. 장군부 사람은 하나같이 강골이구나. 정말 대단해.”
그 웃음에 한기를 느낀 막료는 공손히 물러갔다.
* * *
며칠이 지났다. 장군부 사람은 ‘심묘가 예왕에게 시집간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혼사는 정해졌고 혼서와 빙례 목록도 받았으니 원하지 않아도 일은 진행 중이었다. 그나마 빙례가 유례없이 후해 예왕이 심묘를 중시하는 게 분명히 드러났으니, 심신과 나설안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심신은 다른 사람이 심묘를 얕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싫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예왕이 어마어마한 빙례를 준비해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혼수를 어느 정도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왕이 보낸 빙례 수준에 혼수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장군부가 가장 부유했던 시기였어도 준비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심신과 나설안은 무장 출신으로 군 공로가 탁월해 적지 않은 하사품을 받았다. 두 사람은 평소 정경성에 없어 심부의 공동 자금에 넣은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잘 가지고 있다가 이후 심구와 심묘에게 각각 반씩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가군 재건에 적지 않은 은자가 들어가서 장군부는 이전처럼 부유하지 않았다.
심구는 예왕이 허풍을 떤다 여겼다. 빙례 목록은 부호 집안의 며느리 열 명에게 줘도 충분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때 철의가 예왕의 명령을 받아 금 기러기 그릇을 가져왔다. 심구는 놀라 비틀거릴 뻔했다. 태후도 소중히 간직할 ‘행운을 기리는 재물’을 예왕은 가벼이 선물했다. 예왕이 금덩이를 흙덩이로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네 혼수가 예왕이 보낸 빙례의 반도 안 되면 대량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어? 혼수가 적다고 우습게 볼 거야. 우리 장군부의 아가씨가 얕보여서는 안 돼. 내 방에 있는 골동품을 같이 가져가. 곤궁해도 체면을 잃을 수는 없어.”
심구는 장래 아내를 위해 모아둔 은자를 심묘에게 건넸다. 심신은 심구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부는 정경성에서 일등을 다투는 대부호인데 심구의 말에 따르면 아주 곤궁한 상태였다. 집 안 골동품까지 팔아 혼수로 삼아야 한다니 심묘는 아주 우스웠다.
연말이기 때문에 정경성은 크고 작은 일을 수월하게 넘겼다. 문혜제는 장군부 사람이 심묘의 혼사에 불만을 가진 것을 알기에 특별히 심신과 나설안에게 한동안 병부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사정을 봐주었다. 심묘와 함께 지내다가 그녀가 떠나면 복귀하라고 했다. 덕분에 심신과 나설안은 심묘 일에 온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심구와 나릉 역시 틈틈이 나설안을 도와 심묘 일을 챙겼다.
장군부 사람들이 대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리사는 새로 요리한 음식을 올렸으며 숯불은 빨갛게 타올랐다. 나담이 웃으며 심묘에게 말을 건넸다.
“심묘야, 혼롓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속도를 내야 해. 얼른 수놓는 아가씨도 불러야지.”
명제에서는 출가할 때 스스로 혼례복에 수를 놓았다. 대개 정혼은 일찍이 정해지기에 몇 년 전부터 수를 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만약 정혼이 늦게 정해지면 재봉사가 혼례복을 만들되 상징적인 도안을 몇 개 수놓아 스스로 한 셈으로 치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새 가정의 화목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장군부는 태자와의 혼사 일이 생기면서 심묘에게 적합한 청년 인재를 물색했으니 그때부터 혼례복에 수를 놓기 시작하면 딱 좋았다. 그런데 문혜제의 성지가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심묘가 직접 혼례복에 수를 놓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나머지도 아주 급히 진행해야 했다.
나설안은 골치가 아픈 듯 안색이 좋지 못했다.
“바빠서 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잊을 뻔했구나. 교교는 나담 말대로 혼례복 준비에 착수하거라. 얼른 친한 부인에게 물어보마. 아마 그 부인은 어디 의상과 장신구가 좋은지 잘 알고 있을 게다. 교교의 혼례복을 적당히 만들 수 없지. 교교는 아름다워서 혼례복을 입으면 더욱 아름다울 거야.”
나설안은 심묘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 순간 심묘는 사경행이 자신을 껴안더니 “껴안자마자 바로 알았지.”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교교야, 얼굴이 빨간데 괜찮아? 의원을 불러 보게 할까?”
심구의 물음에 나릉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담이 웃으며 나설안과 혼례복에 어떤 도안을 수놓을지 이야기할 때 남종이 급히 달려왔다.
“주인어른, 마님, 문밖에서 누가 뵙길 청합니다.”
“이 며칠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대문을 걸어 잠그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냐? 왜 막지 않은 게야?”
심신은 불만스러웠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심묘와 보내기 위해 장군부에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돌려보냈다. 심신의 불호령에 남종은 겁먹은 얼굴로 작게 고했다.
“대량 예왕 전하께서 오셨기에…….”
나담이 눈을 크게 떴다. 심구는 벌떡 일어나 노기등등하게 외쳤다.
“예왕이 왜 여길?”
“소인은 모릅니다.”
남종이 말을 잇기 전,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혼례복을 가져다주러 왔습니다.”
남종 뒤에서 키 큰 사람이 걸어 나왔다. 자금색 장포가 흔들렸다. 예왕은 오만하게 웃었다. 세상에 꺼릴 것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분위기였으나 은 가면이 묵직한 느낌을 주어 균형을 맞추었다. 게다가 용모를 가면으로 가렸어도 드러난 윤곽은 아주 멋졌다. 그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자 고귀하고 강렬한 광채가 더해졌다.
그러나 주인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들어오다니? 예왕은 장군부가 자기 부인 양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심구는 대로해 검을 뽑을 뻔했으나 겨우 억누르고 탁자를 세게 쳤다. 접시가 거칠게 흔들렸다.
“예왕!”
심구의 부름에 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제 여동생과 혼인하시려는 겁니까? 무슨 꿍꿍이입니까?”
나담은 턱이 빠질 뻔했다. 심구는 예왕을 심하게 적대시하고 있었다. 속으로야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마주 본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말하면 큰 실례였다.
“교교는 온유하고 사리 분별을 잘하지요. 게다가 단정하고 대범하기까지 하니 흠모한 지 오래되었소. 전부터 혼인하길 바랐는데 다행히 황은을 받아 바람이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경행이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말했다. 심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부드러운 말투로 상황을 친절히 설명하는 사경행이라니,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심신과 심구는 눈을 부릅떴다. 심묘를 칭찬하면서 좋아한다고 하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폐하의 은혜로 바람이 헛되지 않았다고 덧붙이니 어이가 없었다. 장군부 사람들은 예왕이 문혜제를 억압해 성지를 받아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폐하의 은혜를 강요한 자가 뻔뻔스럽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니 기가 찼다. 심구와 심신은 폭죽처럼 작은 불씨에도 곧 폭발할 것 같았다.
반면 나설안의 시선은 온유했다. 여자가 남자를 보는 것과 남자가 남자를 보는 것은 달랐다. 여자는 남자를 세심하게 보았다. 예왕은 심묘를 ‘심 소저’라고 부르지 않고 ‘교교’라고 불렀다. 오로지 장군부의 권세를 이용하려 했다면 예왕은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이렇게 부드러울 필요가 없었다. 진심인지 연기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마음을 써줘 나쁠 건 없었다.
심묘가 부수의를 짝사랑할 때, 부수의는 단호하게 거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장군부 사람들은 심묘가 부수의와 함께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심묘라는 사람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장군부가 황위 쟁탈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고민하며 그녀의 가치를 따져보는 게 틀림없었다.
나설안은 자신의 예상보다도 더 예왕이 심묘를 위해주는 것 같아 흡족해하며 차분히 예왕을 관찰했다. 그의 외모와 기질을 보니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황자는 보통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다. 어느 쪽에서도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딱 부수의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예왕은 여유롭고 거침없이 일을 처리했다. 이는 그가 진짜 성격을 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성격이 황실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설안은 심묘의 남편이 거짓된 얼굴로 심묘를 대하지 않길 바랐기에 만족스러웠다.
나설안이 예왕을 불렀다.
“예왕 전하.”
“내 이름은 연, 자는 경행입니다. 부인은 날 경행이라 불러도 됩니다.”
심묘는 차를 뿜을 뻔했다. 나설안도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다. 황실 사람은 위계질서를 가장 중요시했다. 이는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을 자로 불러도 된다는 예왕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명제에서 대량 사람은 대단히 고귀한 손님이니 자신을 굽힐 필요가 없었다. 진정으로 장군부를 가까이하는 모습이었다. 나설안이 예왕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경행, 먼저 앉으십시오.”
예왕이 앉자 그녀는 경칩에게 분부했다.
“차를 올리거라.”
심구와 심신은 놀란 기색으로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심구는 나설안이 예왕에게 차를 내놓는 것이 매우 달갑지 않았다. 자신처럼 예왕을 못마땅해했던 그녀가 갑자기 왜 이렇게 그에게 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릉은 살펴보는 듯한 시선으로 예왕을 바라보았다.
“경행은 정경성 임안후부 사 소후야의 이름이 아닌가요?”
갑작스러운 나담의 말에 심묘는 찻잔을 들다가 손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사경행은 정말 간덩이가 부은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의 아명을 말하다니. 그는 이미 소명풍과 송신 공주에게 진짜 신분을 밝혔다. 사경행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거나 의혹을 살 일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더 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도 심묘는 취한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예왕 전하는 임안후부 사 소후야가 누군지 모르시겠네요.”
예왕이 고개를 돌려 나담을 보았다.
“오, 그 사람은 누군가?”
나담이 꺼낸 말에 심구가 길게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임안후부의 장자입니다. 임안후부, 그러니까 사가는 우리 심가와 이름을 같이하는 무장세가입니다. 명제 사람들은 모두 남쪽의 사가, 북쪽의 심가라 말할 정도니까요. 사가의 소후야, 사경행은 얻기 드문 소년 영웅입니다. 혼자서 여러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예를 갖춘 데다 군대를 부리는 책략은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생김새도 잘생겼었지요. 명제 사람들이 경모하는 소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출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애석하게도 하늘이 뛰어난 인재를 질투해 북부 변경 전쟁터에서 죽었지요.”
한탄하던 심구가 화제를 돌렸다.
“동명이인이 공교롭게도 용모, 무예, 책략 모두 세상 으뜸이었으니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사경행이 살아 돌아와 전하와 겨루면 얼마나 승산이 있을까요?”
심구의 말에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왕은 심구에게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심 소장군은 그 사 소후야를 몹시 그리워하는 듯하군.”
“당연합니다.”
심구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설안이 빈번히 눈치를 줬지만 개의치 않고 심신의 격려가 담긴 눈빛을 보며 말을 이었다.
“사경행은 저한테도 영웅이고,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심구는 예왕 앞에서 사경행을 끝없이 추켜세우고 있었다.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심구와 모르는 사이인 척하고 싶었다. 이마를 짚은 채 슬쩍 사경행을 보니 그는 아주 즐거운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누군가와 비교당하게 되면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면을 써서 표정을 분명히 볼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예왕의 입꼬리가 시종일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목소리도 예의 바르고 온화했다. 게다가 눈빛마저 기쁜 것 같았다. 심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경행을 찬양하는데, 예왕은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흡족해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안타까운 일이군.”
예왕의 반응에 심구는 크게 낙담했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아주 만만찮은 상대였다. 그러나 나설안은 도리어 한층 만족스러웠다. 예왕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심구의 무례한 언행과 말은 없어도 그를 지지하는 심신의 태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설안은 예왕과 시간을 보낼수록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용모가 준수하고 우아한 데다 머뭇거리지 않는 태도와 씩씩한 기개를 갖추었으니 볼수록 호감이었다.
장모는 사위를 볼 때, 볼수록 만족한다는 말이 있다. 나설안도 마찬가지였다. 예왕은 이미 일등 사윗감이었다. 소명풍보다 신중하고, 태자보다 솔직하며, 풍자현보다 대담했다. 물론 나릉은 한 가족이니 비교하지 않았다.
나설안뿐 아니라 나담도 예왕에게 매우 만족했다. 게다가 예왕은 대량 사람이니 신기한 견문을 많이 알 것이었다. 예왕이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다는 점도 그가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이유였다. 그가 비록 조공연회 때는 안하무인이었지만, 심묘의 가족인 자신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여줄 터였다. 더욱이 자신과는 지난번 심묘 납치 때 만났으니 구면 아닌가.
“제부와 심묘는 아주 잘 어울려요. 심묘는 제부처럼 좋은 흥취가 있는 사람과 사는 게 맞아요.”
나담의 ‘제부’ 소리에 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어쨌든 예왕은 황제의 친동생이고, 나담의 신분은 그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러나 나담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나설안과 심신은 조심스럽게 예왕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예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었다.
“사촌 누이가 좋게 봐주어 고맙소.”
예왕의 호칭에 심구가 격분했다.
“누가 사촌 누이인가요? 함부로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심구 오라버니, 그게 무슨 예의야?”
나담이 심구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예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 나이가 제부보다 어리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전 나담이에요.”
심구는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예왕을 주시했다. 자기 눈에는 그가 잘생긴 낯짝과 고귀한 신분으로 여자들을 함부로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설안과 나담이 그에게 호의를 품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얄미웠다.
나릉은 이 묘한 광경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겨우 웃음을 참고 괴로운 얼굴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심묘는 나담에게 집중하느라 나릉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나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사경행에게 잘못된 인상을 받고,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가운 조소, 신랄한 풍자, 위협적인 행동 세 가지를 고루 갖춘 사경행과 왕래하는 건 철사로 된 길을 맨발로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는 속내를 쉬이 읽을 수 없는 음흉한 사람이었다. 태연자약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사경행을 보고도 나담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심신은 나설안과 예왕이 친밀해지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헛기침한 그는 이야기를 끊고 딱딱한 얼굴로 예왕을 바라보았다.
“혼례복을 가져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꾸물거리십니까? 차를 드시러 온 것은 아닐 텐데요.”
나설안은 심신에게 눈총을 준 후, 그 앞에서 단 한 번도 구사한 적 없는 온화한 말투로 사경행에게 말을 건넸다.
“경행, 오늘 특별히 교교의 혼례복을 주러 온 건가요?”
“사혼(賜婚) 성지가 급히 내려와 교교가 혼례복을 만들 시간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명제에 올 때 폐하의 지시로 대량의 실력 좋은 자수 아가씨와 재단사를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제게 좋아하는 아가씨를 만나면 그녀와 혼인할 때 천하에서 가장 좋은 혼례복을 주라고 하셨지요. 3개월 공을 들인 혼례복을 가져 왔으니 부인께서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3개월이라는 소리에 심묘가 멍해졌다. 갑자기 며칠 전 사경행이 자신을 껴안고 치수를 쟀던 일이 떠올랐다. 혼례복을 3개월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면 이미 자신의 치수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가 또 허튼소리로 자신을 속인 셈이었다. 화가 난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자 그는 도리어 살짝 웃었다. 그의 웃음은 시냇물처럼 맑았으며 눈빛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나설안은 더욱 기뻤다. 원치 않는 혼사를 앞두고 매일매일 걱정이었는데, 예왕을 직접 보니 참 괜찮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보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다운 천진함을 일절 보이지 않던 딸이 예왕 앞에서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왕 역시 심묘를 매우 총애하는 것 같았다. 지금 보니 둘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인 성싶었다. 예왕은 나설안에게서 부수의보다 천 배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3개월 전은 성지가 없었는데, 거짓말하는 거지요? 설마 선견지명이 있어 3개월 전에 이미 교교와 혼인할 걸 알았단 건 아니겠지요? 게다가 당신이 어떻게 교교의 치수를 안단 말인가요?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몸에 맞지 않는 혼례복은 교교가 입지 못합니다.”
심구의 물음에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심구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듣고 싶었다.
“3개월 전 거리에서 우연히 교교를 만났습니다. 그때 마음이 사로잡혔고, 교교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 결심을 했소. 그래서 일찍이 만들어놨으니 좋은 마음으로 받아주길 바랍니다.”
과연 사경행은 고수였다.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기쁜 듯했다. 그러면서도 힐끗 심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심구는 역시 사경행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치수는 알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소.”
사경행이 웃었다. 그가 철의에게 손짓하자 철의가 거대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향나무로 만든 듯 향기가 나부꼈다. 향기를 맡은 심신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들은 탁자를 둘러싸며 상자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마음이 평온하긴 했으나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전생에서는 자신이 혼례복에 한 땀씩 수를 놓았다. 부수의와의 혼인을 앞두고 온 마음을 쏟아 많은 것을 준비했다. 일생 중 가장 아름다울 새신부로서 자신이 오색찬란 화려하길 원했다. 그러나 부수의는 당시 재능을 숨기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사길 꺼렸다. 그래서 심묘는 자신의 소망을 버리고 간단하고 소박한 혼례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붉은 치마에 어두운 붉은색 비단실로 나란히 핀 연꽃 한 쌍을 수놓았었다. 이는 화목한 부부를 상징했다. 얇은 천으로 된 겉옷에는 복숭아꽃을 수놓았다. 겉옷 안에 수를 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자수 솜씨에 꽤 흡족해하면서, 신방에서 부수의가 혼례복의 수를 알아볼 수 있을지 확인해보려 했다. 영리한 데다 손재주 있는 모습을 보면 부수의가 아주 좋아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자신은 신방에서 꼬박 하룻밤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부수의는 오지 않았다. 붉은 초가 녹아 없어지고 마음이 차게 식은 아침이 되어서야 부수의가 술에 취해 서재에서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밤을 새운 심묘는 황제, 황후에게 문안을 드리다 혼미한 정신에 실수를 저질렀고, 이에 부수의는 창피를 당했다며 불평했다. 그는 3개월 후에야 자신을 찾아왔다.
그 혼례복에서부터 자신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날의 억울함은 앞으로 당할 셀 수 없는 억울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묘 자신은 줄곧 다른 사람에게 잘하면 그 사람의 마음도 결국에는 움직일 거라고 여겼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잘해주면 감동해서라도 자신을 좋아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부수의는 호의를 일체 누리기만 할 뿐,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부군, 제 혼례복을 잘 살펴보세요. 특이한 점이 없나요?”
자신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평생 물어보지 못했다. 혼례복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은 평생 그 비밀을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들었던 혼례복의 은밀한 비밀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희미하게 회상하던 심묘는 나담의 호들갑에 정신을 차렸다. 나설안이 상자에서 천천히 의상을 꺼내 펼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혼례복을 상하게 할까 봐 매우 조심하는 몸짓이었다.
대단히 화려한 진홍색, 매우 가는 비단실, 천만 가닥이 뒤섞여 만들어진 무늬는 최고의 재단사와 자수 아가씨가 만든 것이었다. 진홍색 옷감에 세밀하게 금빛이 반짝거렸다. 금가루를 발랐는지 혼례복 전체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윗옷은 비단으로 만들어 매미 날개처럼 얇고, 진홍색 노을처럼 광택이 흘렀다. 꽃이 수놓인 붉은 장포는 열두 색채 실로 휘감은, 상서로운 용과 봉황이 수놓여 있었다. 금색 용은 강력하고, 봉황은 아름다웠다. 용과 봉황의 눈알은 아주 작은 검은색 보석으로 장식했고, 용의 비늘과 봉황의 날개는 모두 작게 자른 묘안석을 바느질로 한땀 한땀 꿰매 표현했다. 목에서 앞가슴까지 덮는 어깨 덧옷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귀한 세공품을 끼워 넣고 물총새의 깃털로 장식해 아주 아름다웠다.
그중 제일은 봉황 모양 장식이 달린 관이었다. 관의 가장자리는 금으로 테를 두르고 중간에는 보석 열두 개를 끼워 넣었다. 보석 사이에는 진주 여섯 알로 간격을 두었다. 심구는 멍하니 보석을 세어보았다. 봉황 눈알을 표현한 홍옥(紅玉, 루비)만 해도 백여 개가 넘으니 모두 헤아리려면 한세월이 걸릴 듯했다.
나설안은 무거운 봉황 관을 보며 넋을 잃었다. 기분을 형용할 수 없었다. 명제 여인들의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관이었다. 황후의 봉황 관에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사람의 예상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이 관의 장식은 봉황이었다. 봉황은 새들의 왕으로 황후나 공주만 쓸 수 있었다. 심묘는 예왕과 혼인해 예왕비가 되지만 신분이 공주는 아니니 꿩을 해야 맞았다.
“경행, 교교가 이 봉황 관을 쓰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아닌가요?”
나설안의 걱정에 예왕이 미소 지었다.
“부인, 안심하십시오. 이 봉황 관은 폐하도 아십니다. 대량 황실에는 폐하와 저뿐. 저와 혼인하면 교교도 황실 사람입니다. 괜찮습니다.”
나설안이 뭐라고 다시 말하려 할 때 나담이 크게 소리쳤다.
“어머, 너무 예쁘다!”
나담이 나무상자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꽃신을 꺼냈다. 꽃신은 대단히 작고 정교했다. 붉은색 신발에 작은 봉황이 수놓여 있었다. 작은 신발에 봉황을 수놓기는 쉽지 않은데 자수 아가씨의 솜씨가 정말 천하일품인 성싶었다. 게다가 봉황 날개는 작은 보석으로 채워져 있고, 신발 바닥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그림까지 새겨져 있었다. 걸음걸음 연꽃이 피어난다는 뜻이었다. 신발 가장 윗부분에는 둥글고 큰 진주가 두 개 박혀 있었다.
심묘는 멍해졌다. 이런 상등의 진주는 구하기 몹시 힘들었다. 아주 실력 있는 채굴꾼만이 깊은 해역으로 들어가 캐올 수 있다는, 진귀한 남해산 진주인 게 틀림없었다. 기억에 문혜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서현비도 남해산 진주를 한 개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머리 위에 그 진주를 착용하곤 했다. 여기에 그 남해산 진주가 두 개 있다는 사실을 알면 분노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한참 침묵하던 심신이 느리게 내뱉었다.
“생각이 깊군.”
이렇게 호화롭고 세밀한 혼례복은 명제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예왕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심묘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아닌, 공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출가할 수 있었다. 혼례복으로 아예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
“교교가 기뻐하면 그만입니다.”
사경행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심묘는 두근거렸다. 세밀하고 아름다운 관과 의복, 아름다운 꽃신을 바라보았다. 황후였던 전생에서도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본 적은 없었다.
전생 시집갔을 때는 부수의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이라 자신 역시 원하는 만큼 화려함을 누리지 못했다. 부수의가 등극해서도 자신은 진국의 인질이 되었기에 화려한 옷은 입지 못했다. 돌아와서도 미 부인과의 경쟁 때문에 황후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장중하고 우아한 의상을 입었다. 짙은 색상과 경직된 도안 때문에 미 부인보다 나이가 어림에도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자신의 행복은 부수의에게 시집간 날부터 점점 사라졌고, 연이은 고통과 핍박 속에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숙원을 이루라고 하늘이 사경행을 보내준 건가 싶어 심묘는 실소했다. 사경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도와주며 완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혼례복을 보자 심구도 더는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솔직히 심구 자신은 절대로 이렇게까지 정교하고 세밀하며 비싼 혼례복을 사랑하는 아가씨에게 만들어 줄 수 없었다. 한평생 함께할 아가씨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지만, 못 하는 것은 못 하는 거였다. 예왕이 이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왕이기 때문이었다. 심구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런 사람과 함께 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터였다. 예왕의 성격도 오늘과 같이 좋다면 그녀의 일생도 순탄할 것이었다.
나설안은 예왕을 식사에 초대했다. 초대는 아주 열정적이어서 예왕도 거절하지 않고 미소로 응했다.
“교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왕에게 좋은 마음을 품었던 심구가 놀라 즉시 끼어들었다.
“교교와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저랑 말합시다. 갑시다. 우리 뜰에 가서 대결을…….”
나설안이 심구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 왜 자꾸 허튼소리를 하느냐? 예왕 전하가 너 같은 사람과 비교가 되느냐?”
나설안은 예왕을 바라보았다. 눈 속 웃음기를 가릴 수 없었다.
“교교의 방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너무 오래는 말하지 말아요. 식사해야지.”
나설안은 자기도 모르게 친자식인 심구와 심묘에게 하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예왕을 대하고 있었다. 예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대량 황제의 동생임에도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심묘와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니 예를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내는 눈빛을 봤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었다. 심묘도 분명 예왕에게 마음이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가장 잘 알기도 했고, 심묘가 나릉, 소명풍, 풍자현에게는 무심했기 때문이었다.
나설안은 심묘와 예왕이 많은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즐겁게 주방에 분부했다.
말이 없던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내 뜰로 가요.”
심구가 따라가려 하자 심묘가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는 오지 마세요.”
심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교교야!”
나담이 그의 소맷자락을 낚아챘다.
“오라버니!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다 큰 남자가 뭘 같이 가자고 해? 대련하고 싶으면 나릉 오라버니와 하면 되잖아.”
나담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릉이 쓴웃음을 지었다.
“형님이 대련하고 싶으시면 당연히 해야지요.”
심구는 자신이 장군부 여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묘의 남편이 될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겠다는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자신의 신세가 처량했다.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감언이설로 여자들을 꾀는 남자에게 이대로 심묘를 줄 수는 없었다. 심구가 심신을 바라보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버지, 그냥 놔두실 거예요?”
심신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신이 심구를 바라보았다.
“식사한 후에 예왕과 대결해보거라. 무공을 시험해 보자꾸나.”
“네!”
심구의 눈이 밝아졌다. 주먹을 쥐었다 편 그는 손을 비볐다. 과연 부친은 자기편이었다. 예왕에게 장군부 여인과 아무나 혼인할 수 없음을 반드시 알려주리라!
* * *
심묘는 사경행을 데리고 자기 뜰로 갔다. 백로, 상강은 뜰 안 화초를 정리하다 심묘가 남자를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고 놀랐다. 곡우와 경칩이 예왕에게 문안을 올리자 정신을 차린 다른 여종들도 서둘러 인사했다.
심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사경행을 규방으로 데려갔다. 어차피 사경행이 자신의 방에 오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늘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 가서 아주 익숙할 터였다. 그런데도 사경행은 곳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심묘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도 아니면서 무슨 볼 게 있어요?”
“처음으로 정문으로 들어가는 거잖아. 정문으로 들어오는 느낌은 색다르네. 아주 좋군.”
자리에 앉은 사경행이 웃으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방문할 명분을 주지 못했다고 원망하는 거예요?”
“똑똑하군.”
심묘의 비꼼에도 사경행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차를 마셨다.
“그건 당신이 온 거잖아요. 초청한 사람은 없었어요.”
심묘가 이를 갈자 사경행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부인은 내게 잘해주셔. 사촌 누이도 좋고.”
심묘는 눈을 흘겼다. 그녀들이 사경행의 잔혹한 면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상을 알고 나서도 그에게 지금 같은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무슨 할 말이 있어요?”
“지난번 내게 부탁한 일을 알아냈다.”
“부탁?”
근래 바빴던 심묘는 사경행에게 어떤 부탁을 했는지 잊고 있었다.
“배랑의 소식.”
사경행의 시선이 빛났다. 심묘는 소식이 끊어졌던 배랑을 떠올리고 진심으로 초조해졌다.
“무엇을 알아냈나요? 사고를 당한 거예요?”
“되게 걱정스러운가 보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배랑은 나 대신 일 처리를 해준 사람이니까요.”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그다지 좋다고 할 순 없어. 부수의가 배랑의 신분을 알아챈 듯해. 정왕부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며 그에게 진상을 말하라 협박하고 있어.”
심묘는 마음이 죄어왔다.
“배랑이 아직 살아 있긴 하군요!”
사경행은 심묘를 주시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으니 부수의도 쉽게 배랑을 죽이지 않을 거야. 그런데 너는 배랑이 배신할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네?”
“배랑은 배신 못 해요.”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심묘는 자기 말에 확신이 있었다. 배랑은 너무 냉정해서 도리에 맞지 않을 때가 있을지언정 그의 충성심만은 트집 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 원칙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전생에 그는 부수의를 대신해 일을 처리하며 부수의에게 충성했다. 재능이 넘치는 그를 주왕의 사람이 포섭하려 한 적도 있었다. 상승세를 타고 있던 주왕은 배랑에게 부수의보다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었음에도 그는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다.
부수의는 혼인 후에도 심묘 자신에게 냉담했다. 그가 함께해줄 때는 남편으로서 책임을 분명히 하는 때뿐이었다. 많은 시간을 홀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부수의의 환심을 얻으려 했던 자신은 부수의가 배랑을 가장 신임하는 것을 안 후로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배랑은 정왕부에서도 자신의 선생이었다. 그는 참을성 있게 자신을 가르쳤고, 명제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부수의를 위해 자신을 가르친 것뿐이었다. 전생의 그는 부수의를 보좌하며 전심전력으로 부수의가 황제 자리에 앉도록 도왔다. 부수의 곁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이용했다. 심묘 자신 역시 이용당한 사람이었다. 부명과 완유를 위해 무릎까지 꿇었으나 배랑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눈을 뻔히 뜨고 심가의 멸문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심가 멸문에 힘을 보탰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배랑이 배신할 거라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수의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에요. 누가 배신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을 직접 죽여요. 일단은 배후를 찾으려고 살려놨겠지만, 목숨이 붙어 있다 해도 지금쯤 그의 사지가 온전할지…….”
심묘는 드물게 초조함을 드러내며 몸서리쳤다. 부수의가 배신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 자신은 두 눈으로 직접 본 적 있었다. 감옥이 어떤 곳인지도 직접 보았다. 그때부터 부수의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앞에서는 온화한 척하지만, 뒤에서는 독하고 악랄한 수완을 쓰는 사람이었다.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경행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부수의가 배반자를 다루는 방법을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평소 심묘였다면 사경행의 의혹 때문에 말을 아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배랑을 생각하느라 이를 생각하지 못했다.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배랑을 구출할 방법이 있나요?”
“이유는?”
사경행이 차를 마시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상대방을 움츠리게 하나 그에게 완전히 적응한 심묘는 즉시 대답했다.
“수수방관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사경행은 침묵했다.
심묘 자신도 이 이유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았다. 배랑과 협력하기 전 자신은 배랑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광문당 학생과 선생이라 해도 평소 나눈 말은 몇 마디도 되지 않았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인데 중요한 일을 맡기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 눈에는 아주 이상할 것이다.
더욱이 사경행은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소홀히 하는 작은 일에도 주의를 기울이니 무섭게 민감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많은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전생의 일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자기 자신조차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다시 캐물을 거라 여겼으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심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경행은 이전에는 방법을 찾아 자신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알려고 했으나 친구가 된 후에는 줄곧 정중했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기 원치 않는 일은 캐묻지 않았다. 물론 그가 스스로 알아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앞에서는 자신을 존중해주었다.
사경행이 낮게 읊조렸다.
“정왕부에는 호위가 많은 데다 부수의의 시선 아래서 사람을 구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아.”
심묘의 마음이 움직였다.
“직접 움직이려고요?”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직접 구해달라 했으니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지.”
심묘는 주저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지금 송신 공주와 소명풍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플 것이었다. 그런데 부수의까지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부수의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일을 벌일 사람이었다.
“조심해요. 전 시집가자마자 과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그런 저주를 할 수 있지? 걱정하지 마. 과부가 되지 않을 거야.”
심묘는 더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사경행은 신중한 사람이니 직접 정왕부에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리라. 사경행의 농담에 자신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나설안의 여종이 식사가 준비됐다고 알렸다.
심묘와 사경행은 화기애애하게 장군부 사람들과 식사했다. 사경행은 까다로운 송신 공주도 좋아했으니 시원스러운 나설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견문이 넓고 예의도 발라서 나릉도 그에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신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밥을 너무 많이 먹었네. 매부, 잠시 후 나와 대결해봅시다. 종일 집에 앉아만 있으면 안 되지. 남자들은 반드시 팔다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심구는 심신이 예왕과 무공 대결을 해보라는 말을 계속 곱씹으며 식사 도중 한마디를 던졌다. 심묘는 젓가락질을 멈췄고 나설안은 심구를 질책했다.
“심구, 너 좀이 쑤시는구나? 어미가 대결해주랴?”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아, 그러고 보니 매부는 무공을 할 줄 압니까?”
심구는 자기 뜻을 몰라주는 나설안에게 억울한 눈빛을 보낸 후 예왕에게 물었다.
“조금 압니다.”
예왕이 웃으며 답하자 심구는 정색했다.
“그럼 됐네요. 황실 사람은 거의 권술 사부를 초청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배려해드릴 테니. 하지만 저는 평소 군대 병사들과 겨루다 보니 경중이 없습니다. 혹여나 부주의하면……. 매부가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심구가 ‘매부’라고 칭하긴 하지만, 그의 눈빛과 말투로 보아 반드시 때려눕히겠다고 작정한 듯했다. 당장에라도 예왕을 끌고 연무장에서 대결하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나담과 나릉은 흥미롭게 둘을 지켜봤다. 사실 나릉도 예왕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세상 사람이 예왕에 대해 아는 바는 아주 적었다. 대량 황실 모두가 잘생겼으며 예왕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신상에 관한 정보는 거의 그것뿐이었다. 그는 비밀투성이의 사람이었다. 무공 이야기 역시 특별히 나온 적이 없으니 실력이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을 거라 예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나릉과 달리 나담은 직감을 믿었다. 지난번 예왕부에 가서 도움을 요청할 때 예왕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 느꼈었다. 심구와 예왕의 대결이 누구의 승리로 끝이 날지 나담은 즐겁게 구경하기로 했다.
분노한 나설안은 지금 당장 심구를 때리지 못해 한스러웠다. 그러나 예왕이 장군부를 방문했으니 자신은 주모로서 기백과 도량을 유지해야 했다. 뾰족한 방법이 없자 나설안은 심신을 바라보며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상관하지 않을 건가요?”
평소 나설안에게 매우 순종적인 심신이었으나 이번에는 눈꺼풀 한 번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는 무심하게 반찬을 집어 먹었다. 남의 일인 듯했다.
“무슨 상관 말이오? 젊은 사람들의 일은 그들이 해결하게 해야지.”
심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 심구가 이렇게 여러 번 나설안의 인내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심신이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심신이 사경행의 무공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 같았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렸다. 혼례복을 가져다주러 왔다가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리니, 이것도 사경행의 능력이다 싶었다. 정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심신마저 수긍하니 나설안은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심구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예왕을 끌고 뜰로 향했다. 나설안은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해 뒤를 쫓았다. 심신도 당연히 뒤따랐다. 나담은 나릉을 끌고 구경하려 했다. 심묘는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뜰을 둘러쌌다.
나설안은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 손을 부드럽게 쓰라고 심구에게 경고했다. 예왕은 고생을 모르는 황실 사람이니 병사들 다루듯 거친 태도로 그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심구는 그 말을 왼쪽 귀로 듣고 오른쪽 귀로 흘려버렸다.
신바람이 난 심구는 무기를 펼쳤다.
“매부, 무엇을 원하나? 먼저 고르시오.”
장창, 미늘창(끝이 두세 가닥으로 갈라진 창), 쇠몽둥이, 칼몸이 굽은 칼, 채찍, 큰 추, 장검……. 거대한 도끼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모두 둔중하고 휘두르기 어려운 병기들이었다. 이에 나설안이 이마를 짚었다.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니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예왕이 당황하는 빛을 띠자 심구는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매부,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먼저 선택하시지요.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 심구는 유쾌해 보여도 진중할 때는 장수다웠다. 처세술도 분명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아둔해 보이며 어린아이 같았다. 사경행에게 자신의 오라비가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몹시 부끄러웠다.
사경행이 병기를 힐끗 보더니 짧은 비수를 들었다. 심구는 사경행이 짧은 비수를 선택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듯 당황해했지만, 곧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매부의 안목은 좋네요. 비수를 선택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장검이 비수만 못할 때도 있지요. 조금은 녹슬었으나 무겁지 않아 매부가 휘두를 만하겠네요.”
“고맙습니다. 전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예왕이 웃자 심구가 차갑게 흥 소리를 냈다.
“그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고 날 탓하지 마시길. 사실 그걸 선택한 건 좀 아닌데.”
예왕이 입가를 끌어당겼다. 아랑곳하지 않는 웃음에는 비꼬는 기색이 살짝 담겨 있었다. 심구가 긴 창을 뽑아 창끝으로 예왕을 겨누자 나설안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형님, 오시지요.”
예왕은 점잖고 예의 바르게 대결에 임했으나 방금은 분명히 도발하는 말이었다. 심구가 긴 창을 들고 먼저 돌진했다.
“큰소리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이후 세월이 흘러 심구가 심 노장군이 되었을 때 그의 위엄은 온 천하를 뒤덮었다. 그의 혁혁한 공로를 무수한 사람이 흠모했다. 승전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라 백성들은 그를 전쟁의 신이라 불렀고, 무를 익히는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숭배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온화한 햇살이 내리쬐던 오후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보지 못했다. 창을 들고 돌진한 심구와 예왕이 한데 섞였으나 빠르게 갈라졌다. 심구의 창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예왕은 두 손가락으로 비수를 잡은 채 심구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장군부 사람들 중 상황을 이해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예왕이 손을 풀어 비수를 손가락 끝으로 품위 있게 가지고 놀다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구를 보았다.
“형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심구의 안색이 자홍색으로 변했다. 나담이 중얼거렸다.
“심구 오라버니가…… 진 건가?”
사람들은 놀랐다. 심구의 무공은 명제 젊은이 중 다툴 자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심신이 직접 가르치기도 했고 오랜 무장세가의 후손이었기에 타고나기도 했다. 게다가 심구는 어려서부터 전쟁터를 따라다녔기에 진짜 검과 창을 겪은 숙련가였다. 그러나 예왕과 겨루던 심구의 창은 멀리 떨어져 있고, 예왕의 비수가 심구의 목에 놓여 있으니 어찌 봐도 심구의 패배가 확실했다. 심구는 이를 악물었다. 달갑지 않으나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박을 했으면 안 좋은 결과일지라도 승복해야지.”
나담이 가장 먼저 손뼉을 쳤다.
“제부, 대단하다! 명제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심구 오라버니를 이기다니.”
나릉이 얼른 나담의 입을 막았다. 나담은 심구의 사촌인데 예왕을 칭찬하면 심구가 더욱 난처하지 않겠는가. 나릉은 불안한 마음으로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다른 사람에게 졌으니 그녀는 마음이 불편할 터였다. 그러나 나설안은 의기소침한 심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예왕에게 다가갔다.
“경행, 무공이 훌륭하군요.”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혔으나 겉만 화려할 뿐입니다. 형님보다 믿음직하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예왕이 웃으며 겸손해하자 나설안이 손을 저었다.
“젊은 사람이 그리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실력이면 자랑해야지요. 그래야 젊은 사람이지요.”
심묘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미 자신이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칭찬을 하고 있으니, 그의 콧대가 곧 있으면 하늘을 뚫을 정도였다. 이후 남자들을 제외하고는 손님과 주인이 모두 기뻐하는 자리였다. 나설안과 나담은 예왕에게 무공에 대해 여러 번 물었다. 그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무엇이든 할 줄 안다고 답변해 나설안은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예왕이 떠난 후 나설안이 예왕을 평가했다.
“예왕은 완벽해. 신분을 떠나서 담력과 식견, 인품과 용모, 모두 출중해.”
“가면을 썼는데 얼굴을 어떻게 알아요? 너무 좋게만 여기시는 거예요. 얼굴에 상처가 있어서 추하면 어떡하시게요? 게다가 인품을 어떻게 한 번 보고 전부 알 수 있나요?”
뚱한 심구의 핀잔에 나설안이 나무랐다.
“네가 뭘 알아? 갖춘 사람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빛이 나는 법이야. 그 아이는 얼굴이 보이지 않으나 기백과 도량이 좋아. 만약 네 말대로 얼굴에 흉이 있어 멋지지 않대도 기백과 도량만으로도 부족한 점을 채우고 남을 거야. 게다가 너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으니 인품이 어떠한지 사람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눈빛은 꾸미려 해도 꾸미지 못해.”
그래도 심구는 여전히 입을 삐죽였다.
“착각하시는 거예요.”
“심구, 이제 좀 그만하거라. 무공을 겨루자니, 대체 무슨 심보야? 그래 놓고 지기까지 했지. 경행이 몇 초식도 안 돼서 목에 칼을 뒀는데, 무슨 염치가 있다고 흉을 보느냐? 다른 사람을 질투할 시간에 네 무공이나 더 연마하거라.”
나설안이 심구를 바라보며 엄하게 꾸짖었다.
“알겠어요. 아버지와 함께 연습할게요! 지금 바로! 즉시!”
나설안의 잔소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심구는 재빠르게 도망갔다. 나설안은 탁자 위 상자를 바라보았다. 심묘의 혼례복과 장신구를 담은 나무상자였다. 귀하디귀한 것들이니 잘 챙겨두어야 했다. 상자를 창고에 보관하려 할 때 상자 덮개 위 공간이 보였다. 나설안이 의아해하며 공간을 확인하자 그곳에 있던 붉은 천 가방에서 작은 책자가 떨어졌다.
심구는 심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 예왕은 무공을 절대 몇 년 익힌 게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연습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몇 초식 만에 저와 승부를 가리는 건 불가능해요. 게다가 초식이 아주 매서워서 평범한 병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네요. 황실 자제가 그렇게까지 무공을 열심히 연마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이번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진 거예요. 다음에는 꼭 이기겠어요!”
심구의 말에 심신이 손을 휘저었다.
“됐다, 넌 그의 적수가 아니다.”
심구가 대경실색했다.
“아버지! 실수 한 번 했다고 절 못 믿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번에는 제가 방심했다니까요. 아름다운 백면서생(글만 읽고 경험이 없는 사람) 얼굴 뒤에 재능을 깊이 감추고 있을 줄은…….”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라, 어디 무예뿐이랴?”
심신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드러났다.
심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무슨 뜻이에요? 우리를 속인 게 있나요? 예왕은 좋은 사람이 아닌 건가요?”
“됐다.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무공이나 열심히 연마해라.”
심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단 한번 패배했을 뿐인데 닭 잡을 힘도 없는 서생 취급을 받다니. 오늘부터 매일 연무장에 가서 수련하리라! 씩씩거리며 떠나려던 심구는 출발 전에 심신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심신이 슬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심신은 확실히 아주 슬펐다. 감정은 점점 커져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생각을 떨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감히 다른 사람에게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다. 혹시 소문이 났다간 어떤 파란(波瀾)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심구에게 예왕과 겨루라고 한 것은 예왕이 장군부의 사위가 될 자격이 있는지 보려고 한 것이었다. 심신 자신에게 예왕은 문혜제의 성지에 적힌 이름에 불과했다. 때문에 예왕과 심묘의 혼인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기는커녕 예왕이 악의와 야심을 품었다고 보았으니 심묘가 혼인 후 모진 고생을 겪으리라 걱정했다. 그러나 오늘 나설안과 예왕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설안을 잘 알고 있는 자신은 그녀가 예왕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왕에게 나설안이 만족했다면 예왕은 그저 성지에 쓰인 이름이 아니었다. 장군부의 사위가 되려면 많은 시험을 거쳐야 했다. 무공은 그중 한 가지 항목이었다. 세계 제일의 무공을 바라지는 않으나 심묘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은 갖추었어야 했다.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적어도 그녀의 안위를 보호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시킨 대결이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일의 실마리를 알고야 말았다.
심신 자신은 심구와 예왕의 초식을 모두 보았다. 특히 예왕이 비수를 목에 갖다 댈 때의 초식은 더욱 똑똑히 보았다.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잘 알았다. 사정.
오래전부터 심가와 사가의 정치적 견해는 달랐다. 심가는 규칙을 중시했다. 반면 사가는 상식적이지 않은 패를 내 상대의 허를 찔러 승리를 쟁취했다. 의견의 차이를 조율하지 못하자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다툼은 자신들의 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친구가 아닌 적이라는 옛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신은 소년 때부터 비밀리에 사정과 대결했다. 심가에는 대대로 내려온 창술이 있어 창을 살기등등하게 휘둘렀다. 반면 사가에는 자신들만의 창술이 없었다. 그래서 사정은 비수를 목에 겨누는 초식을 익혔는데 이로 다른 사람의 흠모를 받았다. 창을 쓰는 적을 찔러 죽이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도 했다. 창술이 아무리 뛰어난 장수도 말에서 서로 겨눌 때 불시에 비수가 들어와 턱을 찌른다면 피할 방법이 없었다.
이 초식 덕분에 사정은 자신에게 거의 연전연승했다. 그는 이 초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았고, 적자 사경행에게만 알려주었다. 두 서자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 사경행도 어렸을 적 이 초식을 썼다. 당시 자신도 그 모습을 보았다. 사경행은 어린 나이에도 이 초식을 최고 수준으로 사용했기에 의아하게 여겼었다. 심지어 사경행은 목을 겨누는 초식을 바꿔서 썼는데 사정보다 더욱 매서웠다.
그런데 오늘 예왕이 그 초식을 사용했다. 사정의 초식이 아니라 사경행이 바꾼 초식이었다. 고의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조금 느리게 움직였을 뿐이다. 덕분에 자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사경행은 북부 변경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런데 대량 예왕이 어떻게 사경행의 초식을 똑같은 동작으로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일을 해도, 같은 수단을 써도 온전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왕과 사경행은 아주 똑같았다. 찰나였지만 하나로 겹쳐져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자 자연히 예왕이 사실 사경행이 아닐까 하는 기이한 생각이 솟아났다. 그러나 사경행은 이미 죽었지 않은가! 허무맹랑한 의심에 스스로 우스웠지만, 그 생각을 쉬이 떨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예왕이 초식을 그렇게 느리게 선보인 것은 자신에게 일부러 진짜 신분을 알리려고 한 행동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역시 망설여졌다. 조사 후 일이 분명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심묘가 위험에 얽히는 걸 조금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추측대로 예왕이 사경행이면 그와 얽힌 일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 * *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 연말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연말은 새해를 기다리기는 즐거운 기간이었다. 잘 먹고 마시며 잘 놀기에 매일 즐거웠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배랑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매일 그는 살점이 찢기는 고통을 겪었다. 지쳐 쓰러져도 고문은 계속되었다. 차라리 한칼에 시원하게 죽여주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 만큼 잔인한 고문이었다. 그는 정왕부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얼마나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를 고문하는 옥졸을 제외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부수의도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고문당한 그의 양다리는 이미 피와 고름으로 흥건했다. 옥졸은 내일 그의 슬개골을 도려낼 거라고 위협했다. 슬개골을 도려내면 평생 무릎을 꿇고 살아야 했다. 배랑같이 자기가 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자만심 넘치는 사람에게는 일생의 악몽 같은 일이었다. 부수의는 확실히 사람의 약점을 잘 알았다. 높은 학식과 경륜을 지닌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하다고 느끼는 게 하는 방법을 잘 찾아냈다. 언젠가 다시 해를 본다고 해도 자신은 살아갈 의욕을 모두 잃은 후일 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심묘를 배반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이성은 줄곧 사실대로 말하라고, 그러면 모든 게 잘 해결될 거라고 타일렀다. 죽어도 상쾌할 것이라고 다독였다. 애당초 자신과 심묘는 절친한 사이도 아닌 데다가 심지어 그녀는 류형을 담보로 자신에게 첩자가 되길 강요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심묘는 매번 흉악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무고한 사람에게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배신한다 해도 심묘는 절대로 류형에게 분풀이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성의 꼬드김에 못 이겨 입을 벌리다가도 배랑은 입을 닫았다. 말을 하면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범하는 것 같았다. 전생에 심묘에게 큰 빚을 진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듯 신의를 지켰음에도 구하러 오는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저도 모르게 실망하고 있었다. 심묘는 자신을 잊은 듯했다. 역시 자신은 희생해도 크게 손해 보지 않는, 대수롭지 않은 돌 하나였다.
그때, 갑자기 바깥이 떠들썩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몰라도 소란스러웠다. 탁탁, 무슨 물건이 끊어져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열기가 그가 있는 쪽으로 습격해왔다.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다는 소리에 배랑은 당황했다. 이곳은 부수의의 비밀 감옥이었다. 감옥에는 부수의와 그의 심복, 감옥을 지키는 옥졸만 들어올 수 있었다. 감시가 엄격하기에 평소 변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우연히 화재가 일어났다 해도 빠르게 진압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은 그 예상과 다르게 진행돼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다. 검은 연기가 나부끼며 감옥으로 들어왔다. 혼란스러운 신발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배랑 자신의 감옥은 가장 안쪽에 있어서 평소 옥졸 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앞쪽에 불이 났다면 안으로 갈수록 불길이 거세지니 안은 더욱 위험했다. 그러니 자신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곧 죽을 사람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 자가 있으랴.
열기가 세차게 밀려왔다. 어쩌면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배랑이 눈을 감을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죽었나?”
놀라고 의아한 배랑은 눈을 떴다. 감옥 앞에 흑색 옷을 입은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검은색 복면을 써서 얼굴이 분명히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또렷이 보였다. 구슬처럼 빛나는 시선은 사나운 불길에도 허둥대지 않았다. 배랑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조금 귀찮은 듯 열쇠로 감옥 문을 열었다.
배랑은 눈앞의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목적을 갖고 지금 이곳에 왔을 리도 없었다. 마주하는 눈매는 어딘가 익숙했다.
* * *
늦은 밤, 심묘는 낮에 심구가 보내준 장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심구는 자신이 책 보는 것을 좋아한다 여겨서 곧 출가할 자신을 위해 수많은 유일본을 찾아 보내주었다. 어떤 것에는 조정의 큰일이 쓰여 있었고, 어떤 것에는 남녀의 애정사가 쓰여 있었다. 심묘는 애정사를 골라 나담과 풍안녕에게 주고, 조정과 관련된 책은 남겨두었다. 장래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심묘 자신은 밤 시중을 성가셔해 평소 경칩과 곡우도 일찍 물리니 두 사람이 올 리는 없었다. 심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의 그 사람은 평소와 달리 들어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답답해진 심묘는 뜰로 나갔다. 나쁜 사람이 습격해올까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 자가 접근하면 종양이 바로 해치울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심묘는 나무 아래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등롱을 들고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나 사경행이었다.
사경행은 자줏빛 장포를 입지 않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자줏빛 의상을 입을 때면 난세의 귀공자 같았고, 검은 옷을 입을 땐 귀신 같았다. 그래도 얼굴 위 웃음기는 지난날과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다가가는데도 여전히 가만히 있으니 조금 이상했다. 평소였다면 초청하지 않아도 당당히 방에 들어와 차를 마셨을 텐데. 심묘는 그의 곁에 섰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사경행이 입꼬리를 당겨 웃는가 싶더니 그 순간 쓰러졌다. 심묘는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그의 등이 온통 축축했다. 등롱의 희미한 불빛에 손을 비춰보자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핏자국이 드러났다. 유달리 추운 겨울에는 후각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사경행이 쓰러지고 나서야 농후한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종양!”
심묘가 작게 외쳤다. 그러나 주위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종양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다니. 그렇다고 감히 장군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심묘는 사경행을 안고 거의 끌다시피 방으로 데려갔다. 사경행을 침상에 눕히고 의원을 부르려 일어날 때, 사경행이 정신이 든 듯했다.
“아무도 부르지 마.”
당황한 심묘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상처는 어떻게 된 거예요?”
사경행은 간신히 품을 더듬어 약병을 꺼냈다. 그는 심묘가 더 캐묻기 전에 다시 혼절했다. 잠시 고민하던 심묘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손을 씻으려 떠놓은 온수에 깨끗한 수건을 적셨다. 망설이던 심묘는 천천히 사경행의 옷자락을 풀었다.
사경행의 윗옷은 온통 피에 젖었고, 차가운 바람 때문에 굳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심묘가 옷을 몸에서 떼 내려고 할 때마다 사경행은 미간을 찡그렸다. 혼미한 중에도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심묘는 어쩔 수 없이 가위를 불에 달군 후 조심스럽게 그의 의복을 잘랐다.
등불 아래 사경행의 균형 잡힌 몸이 드러났다. 근육질의 몸은 단단했다. 심묘는 이유 없이 얼굴이 뜨거워져서 더욱 서둘렀다. 자신은 남자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부명의 몸을 본 적이야 있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사경행을 보호하기 위해 경칩과 곡우를 부르지 않았다. 야밤에 홀로 남자의 옷을 벗기고 있으니 여러모로 상당히 곤란했다. 그러나 사경행의 옷을 다 벗기자 심묘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사라지고 무거움이 서렸다.
사경행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다. 깊지 않은 것도 있으나 너무 많아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위험하다는 건 어린애도 알았다. 심묘는 얼른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상처 주변의 핏자국을 닦았다. 그리고 사경행이 건넨 약병에서 가루약을 꺼내 뿌렸다.
붕대로 쓸 만한 깨끗한 천을 찾았으나 한참 동안 찾지 못해 별수 없이 새로 만든 속옷으로 사경행의 상처를 감쌌다. 다행히 예전에 병사를 치료하는 심구를 본 적이 있어 그대로 따라 했다. 조금 엉성했지만 어쨌든 피를 멎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한숨 돌린 심묘는 기혈보충 환을 찾았다. 나담이 준 것으로 월경 때 먹으면 혈색이 좋아진다고 했다. 심묘는 환을 찧어 뜨거운 물에 푼 후 사경행에게 먹였다.
응급처치를 마쳤을 때 밤 경치는 흩날리지 않는 짙은 안개에 싸였다. 가축의 잠꼬대도 들리지 않는 시간. 사경행은 침상에 누워 몸에는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그 붕대는 자신의 속옷이어서 이상해 보였다. 심묘는 입가를 씰룩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은 후에 손을 뻗었다.
사경행의 윗옷은 많이 젖었으나 바지는 젖지 않았기에, 아까는 그의 상체에만 상처가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상처를 확인하는 게 나을 터였다. 사경행을 뒤집으려다가 실수로 심묘는 사경행의 허벅지를 만졌다. 심묘는 불에 닿은 듯 손을 움츠리려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손에 닿은 사경행의 피부는 단단했다. 그러나 매끄럽지 않은 것이, 오히려 두꺼운 딱지 같았다. 심묘는 살짝 사경행의 긴바지를 젖혔다. 사경행의 아랫배 깊은 곳에 섬뜩한 상처들이 보였다. 오늘 생긴 어수선한 상처와는 그 양상이 아주 달랐다. 오늘 상처는 많았지만 깊지 않아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아주 깊었다. 오래된 상처임이 틀림없었다. 오래 지나고도 이렇게 깊어 보이니 다쳤을 때는 뼈가 보일 정도였을 것이다. 심묘는 몸서리가 쳐졌다.
사경행이 명제에 있을 때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대량에서 다친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크고 작은 상처 모두 뼈가 보일 정도로 다쳤던 것같이 깊었다. 이렇게 많은 치명상을 사경행이 어떻게 견딘 건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심묘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그녀는 사경행의 다리를 더듬고 있었다. 순간 사경행이 답답한 듯 신음을 내며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심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경행이 깨어나 이 상황을 오해하고 놀릴 수 있었다. 사경행을 바라보니 두 눈을 뜨지 않고 미간을 찡그린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깨지 않은 것 같았다.
심묘는 안도하고는 감히 더 더듬지 않았다. 상처가 의문스러우나 당장은 본다고 뭘 더 알아낼 수도 없을 터였다. 사경행의 윗옷은 찢어졌으니 자신의 큰 외투를 사경행에게 덮어주었다. 이후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를까 걱정한 심묘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그를 지켰다.
희미한 아침 햇살이 창으로 들어왔다. 닭이 우는 소리에 심묘는 깨어났다. 눈을 뜨니 자신은 침상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다. 분명 침상 곁에서 사경행을 지키고 있었는데 도중에 잠든 모양이었다. 피곤했는지 자는 중 옮겨진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 사경행이 떠오른 심묘는 후다닥 일어났다. 텅 빈 방에서는 사경행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놀라 멍하니 있을 때 웃음 띤 목소리가 들렸다.
“날 찾는 거야?”
어디서 찾은 것인지 대충 자기에게 맞는 중의를 입은 사경행이 걸어왔다. 세수한 듯 물방울이 턱을 따라 흘러 옷자락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졌다. 심묘는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부상으로 혼절한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신이 맑아 보였다. 어젯밤의 위태로운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몸은 괜찮아요?”
사경행이 웃었다.
“물론.”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기혈보충 환이 효과 있네요. 나담 언니가 절 속이지 않았어요.”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혈보충 환? 그게 뭐지?”
“여자 기혈보충 용도예요. 월경을 할 때 한 알 먹으면 몸이 좋아진대요. 당신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기혈이 허할 거라 생각해 세 알을 먹였어요.”
심묘는 미소 지으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회복이 이렇게 빠른 걸 보니, 환의 공로인 것 같아요.”
사경행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심묘는 그가 난감해하는 걸 보고 흡족해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 어젯밤 날 더듬었으니 그 보답을 받은 셈 치지.”
심묘가 넋이 나가자 사경행의 웃음이 묘해졌다.
“어젯밤 누가 어딜 더듬었는지 몰라.”
심묘의 안색이 여러 색으로 변했다.
“깨어 있었어요?”
“말은 나오지 않았으나, 정신은 맑았어.”
사경행이 탁자에 걸어가 앉았다. 그는 이곳이 예왕부인 듯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는 뜨거운 차를 따르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머뭇거리며 다시 물었다.
“당신 상처는 어찌 된 일이에요? 어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널 위해 일을 처리했지. 정왕부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거야. 부수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더군.”
사경행은 홀가분한 듯 미소 지었다. 심묘가 눈을 크게 뜨며 기지개를 켜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정왕부에 간 거예요? 정왕부 감옥에?”
사경행이 눈빛을 반짝였다.
“넌 정왕부를 많이 아는구나. 감옥이 있는 것도 아네. 어제 산책 간 김에 네 배 선생을 구해냈지.”
심묘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사경행이 배랑을 직접 구출하러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었다. 부수의는 결코 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작은 단서라도 잡히면 신분이 민감한 사경행은 많은 말썽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이 사경행에게 배랑의 구출을 부탁한 건 그에게 능력 좋은 수하들이 많기 때문인데, 본인이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갈 줄이야.
정왕부에 다녀왔다니 사경행의 상처도 단박에 이해됐다. 부수의는 신중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에겐 적이 많이 있기에 정왕부는 철옹성처럼 경계가 삼엄했고, 외부인은 무기를 지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정왕부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 역시 모두 부수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죄수였다. 감옥은 정왕부의 많은 비밀을 숨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부수의가 감옥 방비에 들인 노력은 감옥을 제외한 정왕부 전체에 들인 것보다 더 컸다. 그곳에 침입해 사람까지 구해내고 살아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묘가 멍해진 것을 보고 사경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째서 네 배 선생의 생사를 묻지 않지?”
의심스러운 질문을 받고서야 심묘는 정신을 차렸다.
“배랑은 살아 있나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잘 살아 있지. 불똥 하나 닿지 않았어.”
심묘는 그의 말속 한 단어를 붙잡아 물었다.
“불?”
“내가 정왕부 감옥에 불을 질렀거든.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린 거야.”
심묘는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감옥 안에 갇힌 사람은 모두 부수의가 알고 싶은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경행이 불을 질러 부수의가 영원히 그 비밀들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큰 손해를 입은 부수의가 어찌 쉽게 사경행을 용서할까?
동시에 심묘는 사경행에게 탄복했다. 자신 스스로 담력이 크다 여겼으나, 전생의 기억에 의지해 감히 시도하는 것이었다. 반면 사경행은 언제나 뜻대로 일을 처리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도 그는 하늘이 견고하지 못하다고 싫어할 사람이었다.
심묘가 놀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물었다.
“배랑은 지금 예왕부에 있나요?”
“고양이 지금 치료하고 있어.”
심묘는 고양이 배랑을 치료하는데, 사경행은 왜 고양의 치료를 받지 않은 건지 이상했다.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뜰로 달려오다니, 설마 사경행이 이쪽의 의술이 고양보다 고명하다 여기는 건가. 심묘가 분명히 질문하려 하자, 사경행이 웃었다.
“날 왜 그런 얼굴로 보는 거지? 나에겐 확실히 선의는 없어. 네가 부탁한 게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당신의 상처는 왜?”
심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정왕부는 호위가 많아. 게다가 감옥에는 죽음을 각오한 군대가 있지. 그런 곳에 많은 사람이 잠입하면 불편하니 혼자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
사경행이 드물게 그녀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당신의 옛 상처요. 심한 것 같던데 대량에서 다친 거예요?”
당황한 사경행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명제에서 당신의 생명이 위독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요. 예전에 다친 상처 같던데, 어떻게 다친 거예요?”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내게 관심 있는 거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알고 싶어요. 대량에 가기 전 준비한다고 생각해줘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낯선 사람과 마주하면 안 되잖아요.”
자신이 말한 이유는 겉만 번지르르한 표면적인 것이었다. 그의 상처에 대해 알고 싶은 진짜 이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경행은 이쪽의 일들을 깊이 알고 있었다. 전생의 일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의 전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은 사경행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예전에는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사경행같이 위험한 사람의 비밀을 많이 알수록 목숨이 위태로워질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일을 모두 알고 싶었다.
사경행이 찻잔을 바라보며 웃었다.
“북부 변경에서 얻은 상처야.”
심묘가 고개를 들었다. 사경행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북부 변경에서 계획을 앞당겨 대량에 돌아가 신분을 회복하려 했어. 하지만 사가군 안에는 황실 사람이 있었더군. 밖으로는 북부 변경에서 공격이 들어오고, 안에서는 황실 사람이 공격하는 수법이었지. 사정을 겨눈 계획이었지만 내가 목표가 되었지. 나 역시 대비하긴 했지만 임안후가 신임하는 사람이 날 해칠 흉계를 꾸밀지는 몰랐어. 대량의 묵우군이 비밀리에 협력했으나 중상을 입었어. 이후 폐하께서 보낸 사람이 명제 황실의 계략을 알아채고 명제에 내가 죽었다 소문을 냈고. 문혜제는 자기 계략이 성공했다 여겼겠지만 사실 난 대량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어. 반년이 지나서야 걸을 수 있었지.”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보면 명제에서 입은 상처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심묘의 마음속에 큰 파도가 쳤다. 의아했던 점 하나가 풀렸다. 전생과 비교하면 현생에서 많은 일이 바뀌었다. 사가 두 부자도 그중 하나였다. 전생에는 임안후 사정이 먼저 출정했다가 패배하고 전사했다. 이후 임안후부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사경행마저 황실 군령을 받아 출정한 다음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사경행이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가 부자가 전쟁터에서 사망한 것은 분명 명제 황실이 꾸민 일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이번 생에서는 상황이 변하면서 사경행이 부친보다 먼저 출정했다. 임안후부를 처리하려던 문혜제는 이 틈을 타 사경행으로 목표물을 변경했다. 사경행의 죽음에 사정은 좌절했고, 동시에 벼슬길에도 관심을 잃었기에 황실이 그에게 손을 쓸 필요도 자연히 없어졌다. 사경행이 겪은 일이 이러하다면 그가 소명풍에게 말한 대로, 명제는 사경행에게 기른 정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를 말살하려 한 것이 확실했다. 임안후부는 대대로 명제를 세우고 유지해오는 데 크게 공헌했으나 공로가 너무 높아지니 황실이 토사구팽한 것이다.
사정이 신임했던 자가 황실이 보낸 첩자라면, 임안후부의 일거수일투족 역시 거의 문혜제의 눈꺼풀 아래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사경행이 사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그가 첩자가 누군지 확신하지 못해도 황실 사람이 임안후부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일 수도 있었다. 방씨, 사장무, 사장조도 암암리에 문혜제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형제가 죽었으니 방씨는 모든 힘을 잃은 셈이었다. 이제 임안후부에는 후계자가 없으니 문혜제는 임안후부에서 관심을 아예 거둘 터였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가 큰 재난에서 요행히 살아남은 것을 축하했다.
사경행의 명제 생활은 소명풍의 상상처럼 그리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대량이 사경행을 임안후에게 보낸 것은 그의 지위가 만족스러운 것을 비롯해 그가 옥청 공주와 사이도 각별하니 더욱 아들을 총애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임안후부에도 위기가 숨겨져 있어 보통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핍박받으며 어른도 견디기 힘든 생활을 한 것이다. 황실의 허울뿐인 호의와 화목하고 원만한 겉모습 속에 살기가 가득한 암굴이 자리했고, 사경행은 그곳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자랐다.
북부 변경 전쟁터에서 대량의 협력이 없었다면, 혹은 그들이 한발 늦었다면 지금 이곳에 사경행은 있지 못할 터였다. 사경행은 심묘의 표정을 보며 평온을 유지하려고 애썼으나 호흡 사이 사이에 기복이 있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가 두려운 거지? 대량에는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널 건드릴까?”
“대량에도 황실 사람이 있어요.”
심묘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러나 사경행은 손을 거두며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나도 황실 사람이야. 폐하 외에 넌 누구도 겁낼 필요가 없어. 폐하를 화나게 해도 내가 널 탈 없이 보호해줄게. 대량은 나의 기반이니 누가 감히 널 얕보면 온 대량과 맞서는 거야. 명제에서 있었던 난처한 일은 앞으로 꺼내지 마. 자존심 상하니까.”
그가 조소하자 심묘는 마음이 시큰했다. 그가 명제에서 보낸 시간이 즐겁지 않았으니 아예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천진하며 걱정 없이 자라야 했을 아이가 힘든 생활을 한 아픈 세월이 가슴 아팠다.
경칩과 곡우가 그녀를 깨우러 들어오기 직전에 사경행은 떠났다. 그가 떠나자마자 종양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심묘가 그를 노려보았다.
“어젯밤 어디 있었어요?”
사경행이 부상을 입은 위급한 상황에서 종양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떠난 지금에야 돌아온 것이다. 종양이 미안한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부인, 어제 공교롭게도 임무가 있었습니다. 빠르게 돌아올 거라 여겼습니다만 다소 지체되어 지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소부인, 혹 무슨 분부라도?”
“아니에요.”
그의 표정은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으며 진실했다. 심묘는 손을 휘두른 후 창문을 닫았다.
종양은 나무로 뛰어올랐다. 억울했다. 사실 주인이 자신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어젯밤 내내 나무에서 담요도 덮지 않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하룻밤을 꼬박 찬 바람을 쐬었는데 소부인에게는 책망까지 들었다. 게다가 주인은 포상도 주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마음 아파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종양은 스스로를 동정했다. 게다가 어젯밤 주인의 상처를 고양이 치료하려고 했지만, 그가 치료를 거부했다. 그래 놓고 피가 흐르는 몸을 이끌고 장군부로 향한 것이다. 소부인의 마음을 왜 안타깝게 했는지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사경행은 예왕부로 향했다.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종양이 만들어둔 길이었다. 종양이 이미 예왕부와 장군부 사이 주택들을 개조해 주택과 주택을 가로막는 벽을 없앴다. 그러고 나니, 장군부와 예왕부는 커다란 큰 뜰을 가운데에 두고 이어진 모양새였다.
추운 겨울,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품이 맞지 않는 중의와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흑색 옷 덕에 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그는 가면을 쓰지 않았고 표정은 평소처럼 가볍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에는 무거움이 가득했다. 자신은 심묘에게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수많은 상처는 북부 변경에서 생긴 것만은 아니었다. 대량에서 생긴 것도 있었다.
물론 북부 변경의 상처가 가장 깊었다. 사가군 천군만마 중 사정이 가장 신임하는 부장이 준 것이었다. 그 상처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기에 대량에서 반년 동안이나 요양했다. 그동안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셀 수 없었다. 물론 고양은 기를 쓰고 자신을 염라대왕 손에서 구해냈다. 고양은 당시 칼이 조금만 위로 치우쳤거나 자신이 일각만 늦게 치료를 받았다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라 했다. 자신의 부상은 고양과 영락제를 비롯해 심복 몇몇만 알고 있었다. 부상이 낫고 나서야, 자신은 대량의 신하들 앞에 당당한 예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황실에 갑자기 친왕이 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영락제가 황제의 위엄으로 진압해도 자신을 해치려 하는 세력은 여전히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이익과 상관이 있기에 자신의 등장으로 몇 사람의 이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기습, 암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생사를 가를 만한 순간도 많아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대량에서의 투쟁은 명제에서보다 더 위험했다. 명제에서는 자신의 신분이 이렇게 높지 않았던 데다 명제 황실은 자기 혼자가 아닌 임안후부 전체를 겨눴었다. 그래서 공격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량에서는 예왕이라는 칭호 자체가 위험을 뜻했고, 모두 자신의 목숨만을 원했다.
그러나 깊고 위험한 위기를 넘긴 다음 날이면 조정에는 여전히 웃음을 품은 예왕이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야 신하들은 예왕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무서운 적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며 자신을 존중하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자신을 죽이지 못해 분통이 터졌겠으나, 앞에서는 공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2년 가까운 세월을 들여 대량 예왕의 신분을 완전히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기를 쓰고 얻은 것이었다. 이제는 감히 자신을 의심하거나 도발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없었다. 햇살을 받으며 영원히 고귀하고 우아한, 먼지조차 묻지 않을 사람이 된 것이다.
사경행은 느리게 걸었다. 푸른 장화가 눈을 밟아 뽀드득 소리가 났다. 나무 위 얼음 결정이 흔들려 빛을 반사하니 보석을 걸어놓은 것 같았다.
“알고 싶어요. 대량에 가기 전 준비한다고 생각해줘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낯선 사람과 마주하면 안 되잖아요.”
심묘의 말이 떠오른 그의 입가에 담담한 웃음기가 느리게 떠올랐다. 그녀는 준비할 게 없었다. 모든 화근을 자신이 그녀 대신 철저히 제거해둘 테니까.
* * *
예왕부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우람한 체구인 데다 긴 칼을 차고 당당한 위용을 드러냈기에 전쟁터에서 고초를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간 사이가 굳세고 꼿꼿했기에 그의 방문 의도는 좋지 않아 보였다. 입구를 지키는 호위가 서둘러 불청객을 막아 섰다.
“예왕 전하를 만나게 해주게.”
남자의 강한 기세에도 예왕부 호위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초대장이 없다면, 전하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남자가 화를 내려 할 때 놀라고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 장군님?”
철의였다. 그는 호위에게 눈을 매섭게 부라리고 심신을 온화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심 장군님, 하인이 분별없이 굴었으나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전하를 뵈러 가시지요.”
호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제야 눈앞의 대한이 누군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심신을 바라보았다. 기별도 없이 갑자기 예왕부를 방문한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심신은 화를 눌러 참았다. 자신은 자나 깨나 예왕과 관련된 의혹이 떠올라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힐 거라고 여겼지만 도리어 더욱 생각이 났다. 자신은 의혹이 들면 반드시 명확하게 의혹을 해결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더구나 이는 심묘의 일생 대사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예왕부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든 일단 이 의혹을 풀어야 했다.
그러나 예왕부의 예의 없는 호위를 만나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마음에 더욱 풍랑이 세게 일었다. 이쪽이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걸 눈치챈 듯 철의가 열심히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명제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예왕부 모든 사람이 심묘의 혼사 일로 바쁘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은 아닌 듯, 철의의 말대로 예왕부는 곳곳에 등롱을 달고 비단 띠를 매 이 혼사를 매우 경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예왕부 사람이 혼사를 중시하는 것을 보자 심신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철의가 어느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는 전하의 서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미 장군님의 방문을 고했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심신은 예왕과 나눌 이야기는 사적인 비밀이니 남이 들으면 안 되리라 생각했다. 하인이 서재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안심이었다. 반면에 혼자 들어오라고 하는 건 자신이 그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예왕의 무예 실력을 떠올리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자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을 터였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심신은 평온한 얼굴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갑자기 흰 털북숭이가 뛰어나왔다. 눈꼬리가 올라간 백호였다. 잘 자랐으나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백호가 심신을 향해 길게 울었다. 심신은 백호가 튀어나온 순간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내리칠 뻔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철의가 백호를 껴안고 떠나자 심신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서재로 들어갔다.
예왕이 책을 보고 있었다. 앉은 자세는 그다지 단정하지 않다. 보는 둥 마는 둥 대충대충 책장을 넘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왕 전하?”
나설안과 다른 호칭이었다. 예왕은 장군부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행’이라 격의 없이 불러도 좋다고 했지만, 나설안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심신 역시 자신의 의혹을 무시한 채 그를 ‘경행’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노장의 눈으로 봤을 때 고작 약관을 조금 넘긴 예왕이 이렇게 책을 보며 자신을 맞이하는 건 허세를 부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깊이 숨긴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 둘 중 하나였다. 예왕이 장군부를 방문하기 전에는, 예왕을 영락제의 친동생이라는 명분에 기대 일을 거만하게 처리하는 오만방자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심구와의 대결을 보고서 예왕이 쉽게 볼 사람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심 장군, 나와 바둑을 두시겠습니까?”
예왕 역시 ‘심 대인’이나 다른 친근한 호칭으로 심신을 부르지 않았다. 의도가 있는 듯했다.
“전 바둑을 잘 못 둡니다.”
“바둑 전쟁.”
예왕이 바둑판을 탁자에 놓으며 심신에게 흰 돌을 건넸다.
“심 장군과 내가 나라를 다스린다고 가정합시다. 바둑판은 국경, 돌은 병사라 생각하고 전쟁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심신의 혈관에는 무장의 피가 흘렀다. 전쟁이란 말에 반사적으로 흥분했으나, 한편으로는 젊은 예왕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언짢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요.”
두 사람은 바둑돌을 들었다. 예왕의 전략은 놀이를 즐기는 귀공자 같은 겉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나이에 걸맞지 않을 만큼 아주 노련하고 악랄했다. 바둑은 사소한 것이 대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에 매 수 진지하게 둬야 했다. 그러나 예왕은 오랜 시간 생각하지 않는 듯, 놓고 싶은 곳에 주저 없이 바로 놓았다. 내키는 대로 두는 듯했지만, 그가 두는 수는 모두 매우 교묘했다.
심신의 솜씨도 나쁜 편이 아니었으나 그는 번번이 열세에 빠졌다. 예왕이 매번 자신의 수를 먼저 읽으니 이 판의 수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한 판이 끝났다. 당연히 심신의 패배였다.
“장군이 졌습니다.”
심신이 손을 휘저었다.
“다시 하시지요.”
“다시 해도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단호한 예왕의 답변에 심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군이 패배할 겁니다.”
문혜제도 자신의 체면을 봐주건만, 나설안을 제외하고 감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심신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폭발하기 전, 예왕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욱이 심 장군이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바둑을 두기 위함이 아니었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입꼬리가 올라간 예왕의 모습을 보자 심신은 노기가 목에 걸린 듯 답답했다. 예왕은 사람을 희롱해놓고 화제를 돌려 말문을 잇지 못하게 만드는 교묘한 능력이 있었다. 젊었을 적 임안후 사정을 보는 것 같았다. 서로 의견을 고집할 때마다 사정은 이렇게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후 입을 닦았다. 고지식하고 진지한 자신은 늘 사정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나중에는 자신도 그에게 독설로 맞받아칠 수 있게 되었지만, 예왕은 그보다도 한 수 위 같았다.
사정을 떠올리니 예왕부를 방문한 목적이 생각났다. 자연히 예왕에게 화낼 생각도 없어졌다. 심신은 예왕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 전하께서 제 아들과 대결할 때 비수를 목에 두는 초식을 쓰셨지요.”
심신의 질문에 예왕이 웃었다.
“그 초식 말입니까? 그렇게 느리게 했으니 심 장군이 분명히 봤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왜 그 얘기를 하십니까? 다시 한번 보여드릴까요?”
심신은 마음이 덜컹했다. 역시 고의였다. 일부러 초식을 느리게 해서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왕이 순순히 인정하자 기분은 오히려 더욱 복잡해져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의구심이 물밀 듯 밀어닥쳤다.
“그 초식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아주 일찍부터 할 줄 알았지요. 심 장군도 예전에 보지 않았습니까?”
심신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벼락에라도 맞은 듯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자신은 사정의 아들이 이 초식을 사용하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당시 사경행의 초식은 그의 아버지보다 더 월등했다. 그런데 지금 예왕이 예전에 보지 않았냐고 되물었다. 예왕은 예전에 명제에 온 적이 없었고, 자신은 다른 사람이 이 초식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였다.
심신의 마음에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용솟음쳤다. 놀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지 숨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시원했다. 매일 밤 잠들지 못하게 하던 의심이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그때, 예왕이 가면을 벗었다.
“사경행……!”
심신은 헉 숨을 들이마셨다. 예상했던 결과임에도 두 눈으로 보는 바를 믿기 어려웠다. 장군부와 임안후부의 관계는 좋지 않았으나 자신은 임안후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사경행을 좋게 보았다. 사경행은 짓궂지만 정경성 귀족 아이들에게는 없는 솔직함과 대담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외모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예왕은 성숙하고 영준해 보였지만 미간 사이에 여전히 소년일 적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심신의 말투는 집안 어른이 아이를 훈계하는 모양 같았다. 심신은 자신이 사정을 도와 그의 아들을 훈계하는 듯한 터무니없는 착각이 들었다. 사경행은 살짝 웃으며 심신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장인, 차를 마시고 천천히 들으세요.”
반 시진 동안 심신은 사경행에게 어마어마한 비밀의 자초지종을 전부 들었다. 사경행이 대량의 예왕이라니……. 그의 신세가 기이한 만큼 그의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아 놀라웠다. 게다가 그는 호랑이의 담력을 가졌는지 대량의 예왕으로 명제에 돌아왔다. 신분이 폭로되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경행의 상황을 모두 알게 된 심신의 마음은 분개, 후회, 망설임,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엉켰다. 그러나 심신은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런 상황이시라면 교교는 시집 보내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심신의 말투는 인정사정없고 날카로웠다.
“전하의 목적은 명제 조공연회 참석이 아닙니다. 대량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겠지요. 언젠가 대량이 명제를 침공하면 그때 전하와 저는 싸워야 합니다. 전하와 혼인한 교교가 그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애꿎은 교교가 전하와 명제 사이에서 고통받지 않겠습니까? 전 교교가 그런 난처함을 겪길 바라지 않습니다.”
심신의 태도는 단호했지만, 말속에는 딸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샘솟았다. 그의 걱정에 사경행이 괘념치 말라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장인,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교교는 제 신분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마주한 국면을 장인보다 더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요. 장인도 장군부와 명제 황실의 관계를 분명히 알고 있겠지요.”
심신은 그의 뜻을 알아채고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무슨 뜻이요?”
사경행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바둑판을 가리켰다. 바둑판 위에는 심신의 흰 돌은 거의 없고 사경행의 검은 돌이 가득했다. 심신은 처참하게 패배했지만, 바둑판은 그렇게 치열해 보이지 않았다.
“난 명제 황실 사람이 되어 장인과 바둑을 두었습니다. 장인은 무언가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심신이 사납게 고개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노기를 띠고 있었다.
“허튼소리 하지 마십시오!”
“헛소리가 아닌 걸 저와 장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사경행이 갑자기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는 나른한 표정을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심신을 직시했다.
“명제가 장군부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분명히 보지 못했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사실상 교교가 비밀리에 대처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장군부를 이렇게 온전히 보전하지도 못했겠지요. 나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닐뿐더러 교교 혼자 장군부를 보호하길 원치도 않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교교만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니. 아직 어린 아가씨일 뿐인데 안타까워 더 지켜볼 수가 없군요.”
심신의 입가 주변의 수염이 곧게 섰다. 그는 사경행의 말속 빗장을 붙잡아 캐물었다.
“교교가 무슨? 전하의 뜻을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장인, 장모는 종일 서북에서 주둔하면서 천하를 마음에 품었지요. 반면 바빠서 친자식인 교교는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장인은 심가 이방, 삼방을 좋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교를 예친왕과 사통했다고 몰아가기 위해 와룡사에서 교교에게 최음제까지 썼어요. 장인은 심원이 어떻게 죽었는지, 임완운이 어떻게 미쳤는지, 심귀, 심만, 형초초, 형관생에게 어떻게 사고가 생겼는지 모르지요. 그들은 모두 교교의 계략으로 정리됐습니다. 그래서 장군부도 무탈한 겁니다. 명제 황실이 장군부를 감싼 게 아니고. 황실은 지금까지 장인을 조금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신의 뻣뻣한 표정을 바라보며 비꼬는 듯했다.
“장인이 소춘성으로 물러날 때 어떻게 온전할 수 있었는지 아십니까? 소욱이 갑자기 나섰기에 황제가 살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정말 공교로운 일이지요. 장군부는 매번 온전히 물러날 수 있었으니, 정말 하늘의 복이지요. 장인이 심 노부인 생일에 서북에서 돌아왔을 때 심가 사당에 불이 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건 교교가 직접 지른 겁니다. 장인이 심부 사람의 야심을 확실히 알도록 위험을 직접 무릅쓴 한 것이지요. 이런데도 장인이 내게 교교를 제대로 보호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심신은 또 한번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말문이 턱 막혔다. 사경행이 언급한 일들은 자신과 나설안이 정경성에 돌아온 후부터 발생한 일들이었다. 자신들 역시 의아함을 밝히려고 매번 조사했으나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후 병부의 일이 많아져 그 일들을 잊고 지냈다. 심묘가 자세히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들을 소홀히 한 부분도 있었다. 사경행에게 자초지종을 듣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가 이방, 삼방이 그런 결말을 맞은 건 교교가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심 장군은 그녀의 수단이 악랄하다 탓하지 마십시오. 교교가 아니었다면 장군부는 지금 무덤 속에 있을 겁니다.”
사경행은 비꼬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 숨이 막힐 정도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장인은 좋은 장군이지만 교교에겐 좋은 부친이 아니었습니다. 난 교교가 왜 이런 일을 혼자 감당하는지, 장군부에 빚을 진 듯 행동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심 장군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요. 장군부가 운이 좋아 교교 같은 딸을 키운 것이지요. 교교는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장군부를 보호했으나 이제 곧 명제 황실은 교교를 처치하려 할 겁니다. 그런데 심 장군은 지금 교교가 나 때문에 난처하다고 말하네요.”
그는 냉랭히 조롱했다.
“장인은 진짜 교교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심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와 교교는 우정이 아주 깊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동고동락했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계책을 꾸몄지요. 난 교교의 목숨을 구했고, 교교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런 나도 교교와 혼인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교교의 부군이 될 수 있습니까?”
심신은 매우 피곤했다. 사경행이 말하는 심묘는 자신에게 익숙지 않고 생소한 사람이었다. 심묘가 겪었다는 일을 자신은 고작해야 일부만 알 뿐이었다. 사경행의 말처럼 자신은 딸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녀를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신은 바둑판을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오래오래 바라보다 눈이 시큰거릴 때 그는 겨우 입을 뗐다.
“모두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아시는 교교와 관련된 일, 모두 제게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