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장 (63/71)

53장

배랑은 눈을 떴다. 생소한 곳이었다. 단정한 차림의 시녀들이 자신을 시중들고 약을 달여왔다. 자신의 기억은 정왕부 감옥에서 복면을 쓴 검은 옷의 사내가 불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것에 멈춰 있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내가 누구인지, 자신을 왜 구한 것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배랑은 시녀에게 물어 이곳이 예왕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심묘와 예왕 사이에 교류가 있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두 사람 사이가 어느 정도로 깊은지는 몰랐다. 예왕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 심묘가 자신을 구해달라고 예왕에게 부탁한 게 틀림없었다. 심묘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니 감동이었다. 감옥에서 신의를 지키고자 목숨을 내놓은 건 어리석은 일이 아니었다.

그때 바깥에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왕진 가방을 챙겨 자신 앞에 앉는 걸 보아 이쪽을 진맥하려는 것 같았다. 배랑은 처음에는 예왕부에서 데려온 의원이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의원의 얼굴을 분명히 알아보고는 당황해 소리쳤다.

“고 태의!”

배랑은 숨을 헐떡였다. 그의 동작이 너무 커서 상처가 벌어질 정도였다. 고양이 얼른 그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놀라지 마시오. 상처가 벌어지니 조심하시고.”

배랑은 고양을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이 용솟음쳤다. 고양은 태의원에서 가장 어린 태의였다. 의술이 고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누구도 그를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황실은 이 젊은 태의를 좋아했다. 평소 문혜제는 말재주가 뛰어나다며 고양을 아꼈다. 생긴 것도 준수해 다른 황실 사람들도 태의원 늙은이들보다 그를 더욱 마음에 들어 했다.

태의가 이유 없이 궁 밖 사람을 진찰할 리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예왕부였다. 배랑은 혹시 예왕이 자신을 위해 고양을 잠시 데려온 것일까 생각했으나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의술이 고명한 의원은 언제 어디서든 귀했지만, 정경성에 그런 의원이 고양 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굳이 고양을 빌려달라며 황실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만약 고양과 예왕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면? 가능했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배랑은 의혹을 품은 시선으로 고양을 바라보았다.

“고 태의가 어째서 이곳에?”

고양이 배랑을 진맥하며 담담히 답했다.

“예왕 전하께서 당신을 진찰하라 해서 온 거요. 그런대로 안정됐지만, 다리의 근골이 크게 다쳤소. 침을 놔주리라.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두 다리 전부 못 쓰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하구려.”

부수의는 배랑에게 악랄한 수단을 썼다. 고양이 이를 짚어주자, 내내 침착하던 배랑은 자신이 사지 성히 살아남은 것은 요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큰불에서 누가 자신을 구하지 않았다면 다음 날 슬개골이 잘렸을 것이다.

“부수의의 수완은 정말 잔인하군. 그렇게 잔혹해 보이진 않던데.”

고양은 왕진 가방에서 금침을 꺼냈다. 그는 천천히 배랑의 바짓가랑이를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배랑이 움찔했다. 고양은 황실을 진찰하는 태의인데 정왕 부수의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렀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말할 때 존중의 빛이 전혀 없는 것이, 하찮은 시정잡배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태의의 신분인데 친분이 없는 사람 앞에서 언행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니 괴상한 일이었다.

“나와 예왕 전하 사이에 우정이 있는지 묻고 싶지 않나?”

고양이 정성껏 배랑에게 침을 놓으며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물었다. 배랑은 멈칫했다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고 태의, 제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자넬 속이지 않겠네. 난 예왕의 사람이야.”

배랑은 고양의 진짜 신분에 놀랐다. 고양이 대량이 보낸 첩자인 건지, 대체 명제 황실에는 왜 잠복하는 건지 의아했다. 문혜제를 독살하려고 하는 건지, 예왕에게 매수되어 모반을 꾸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 감추지 않고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 더욱 놀라웠다.

“내가 왜 이런 큰 비밀을 알려주는지 의아하지 않나?”

고양은 배랑의 속내를 읽는 듯했다.

“그렇소. 정말 모르겠소.”

배랑의 빠른 수긍에 고양이 빙긋 웃었다.

“정왕부에 큰불이 났고 부수의가 자네의 백골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지. 부수의도 바보는 아니니 누가 자네를 구출한 걸 알겠지. 자네를 구출한 사람이 자기 감옥에 불도 지른 게 뻔하니 부수의는 이 빚을 당연히 자네에게 씌울 것이오. 정왕부를 건드렸으니 명제에서 예왕부만 자네를 보호할 수 있소.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왕부와 한데 묶인 것이지. 이렇게 된 이상 자네도 우리 사람인데 비밀 이야기를 못 할 까닭이 있겠소?”

고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배랑을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한배에 탄 셈이오.”

배랑은 모든 것을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고양의 말속에서 단숨에 단서를 파악했다.

“정왕부의 큰불도 당신들이 지른 거요?”

“당연한 소리를.”

배랑은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그 감옥은 정왕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갇힌 사람은 모두 부수의에게 쓸모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큰불 때문에 그곳이 깨끗이 사라졌으니 부수의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을 터였다. 세상에 감히 이렇게 과감히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고양의 말이 맞았다. 정경성에서 부수의를 두려워하게 할 수 있는 곳은 예왕부이며, 예왕부만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배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장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예왕 전하께서 직접 날 구한 거요?”

“그렇지 않다면 누가 자넬 구해낼 수 있었을까? 감히 이런 위험을 무릅쓸 사람은 없소.”

배랑이 탐색하듯 재차 물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왜 날 구한 거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아서인가요?”

그는 고양이 심묘의 일을 아는지 몰랐다. 그래서 감히 심묘의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잘못 하다간 심묘에게 말썽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고양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금침으로 그의 무릎을 찔렀다. 배랑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그렇소. 우리 왕비마마께서 부탁하셨기 때문이요.”

배랑은 당황했다.

“예왕비마마? 예왕비마마께서 왜……?”

배랑 자신은 예왕에게 비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예왕비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배랑이 의아해하자 고양이 자상하게 웃었다.

“자네가 선생이었던 걸 생각해서겠지요. 예왕비마마는 한때 자네의 학생이셨으니까.”

“그렇다면 마마는…….”

“심묘요.”

* * *

연초에는 무릇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이니 즐거운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다지 즐겁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장군부의 사람들이었다. 심묘가 대량으로 시집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겨를은 없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빠르게 흘렀고 장군부 사람들은 매일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지냈다. 심묘의 혼수, 호위, 하인뿐 아니라 고생스러운 긴 여정을 대비해 마차와 말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심신이 준비한 심묘의 혼수는 사경행의 빙례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그래도 매우 넉넉했다. 어차피 대량에서는 쓸 수 없으니 상가와 토지는 포함하지 않았고, 이동이 번거로우니 가구도 챙기지 않았다. 진귀한 장신구도 일부였다. 그럼에도 왜 휘황찬란한 혼수였냐면, 주로 은자를 혼수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은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니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통휘전당의 은표라서 대량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오라비는 이런 은표 말고는 줄 게 없구나. 교교야, 많지 않지만 그래도 받아줘.”

심구는 심신 부부 몰래 심묘에게 두툼한 은표 뭉치를 건넸다. 심묘는 부끄러운 듯 말하는 심구를 바라보았다. 쪼글쪼글 접힌 은표에 온 마음이 따뜻해졌다. 병부 병사들은 매일 심구를 위해 전심전력이기에 그도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보답하곤 했다. 게다가 심구와 그들은 때때로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심구의 녹봉은 아직 아주 많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그러고 나면 남는 게 얼마 안 됐다. 그러니 지금 그가 가진 것들 대다수는 예전에 군 공로로 받은 하사품이었다. 그런 심구가 여동생의 혼인을 위해 자기 몫을 남기지 않고 모아둔 은표를 모두 주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 부모님이 준 은자로도 평생 먹고 입는 데 걱정 없어. 그러니 줄 필요 없어.”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오라비는 오라비지. 내가 주는 게 부모님이 주시는 거랑 어떻게 같아?”

심구가 은표를 심묘의 손안에 쥐여주고 서둘러 떠났다. 심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이후 모경을 시켜 심구 몰래 이 은표를 돌려주리라 생각할 때, 심신이 바깥에서 걸어왔다.

“교교, 아비가 너와 할 말이 있다. 서재로 가자꾸나.”

나설안이 듣고 따라가려 했다.

“잘됐네. 나도 네게 설명할 게 있는데.”

“부인은 조금 이따 설명해도 늦지 않을 테요. 나와 교교 둘이서 짧게 몇 마디 하리다.”

나설안은 아마 심신이 자기 몰래 심묘에게 줄 다른 선물을 준비했거니 하고 싱겁게 웃었다. 그녀가 순순히 돌아서자 심묘는 심신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심신은 하인에게 바깥에서 문을 지키라고 분부한 후, 심묘에게 탁자에 앉도록 했다. 심묘 앞에 간식과 차를 놓으며 맞은편에 앉아 깊게 탄식했다.

“며칠 지나면 출가하는구나. 모경을 대량으로 보낼 생각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심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왕 전하는 영락제의 친동생으로 지위가 매우 높지만, 황실에는 늘 시비가 많으니 늘 편안한 생활은 아닐 것이다. 대량에 도착하면 절대 억울하게 지내지 말거라. 누가 널 괴롭히면 바로 예왕 전하에게 말씀드리거라. 예왕 전하가 널 귀하게 맞이하니 앞으로도 널 잘 보호해줄 것이다. 그러니 혼자 감당하지 말고 꼭 말하려무나.”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전하도 널 보호하지 못하면 나와 네 어미가 나설 테니 두려워 말거라. 심가군에서 몇 명을 골라 심부 혼수 호위로 가장해 함께 보낼 것이다. 솜씨는 모경보다 못해도 평범하진 않다. 절대로 네가 억울함을 당하는 일은 없게 해주마.”

심신의 간곡한 말에 심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명제를 떠날 생각은 없으세요?”

심신이 심묘를 보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심묘는 이왕 말을 꺼냈으니 이참에 전부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전 대량으로 시집가니 폐하께서 장군부에 좋은 감정이 없으실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변함없이 무장이시지만, 장래에도 폐하께서 부모님을 중용하실지는 알 수 없어요. 폐하의 생각은 추측하기 어려워요. 추후 다른 생각을 가지신다면……. 차라리 병권을 반납하고 저와 함께 대량으로 가요. 명제에 남아 있으면 언젠가 병권은 전부 회수당할 거예요.”

심묘의 말은 완곡했다. 예전의 심신이었다면 심묘의 말에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경행과 긴 이야기를 나눴기에 심묘가 암시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심묘는 이렇게 자신을 여러 번 일깨우고 있었는데 왜 자신은 제대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하라는 가훈을 기억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린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씁쓸했다.

“황실이 장군부를 억누르려 하고, 장군부의 병권을 두려워하니 장군부가 쉽게 명제를 떠나게 하지 않을 게다. 더구나 그들은 장군부를 이용해 너를 견제하려 할 거야.”

심묘는 당황했다. 심신이 명제 황실의 냉담함과 무정함에 대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를 지키라는 심 노장군의 가르침을 받아 줄곧 충성스러웠다. 몇십 년 동안 믿은 것을 뒤집으려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어떤 사람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은 이를 이미 끝낸 것 같았다.

“네가 하는 걱정을 나도 안다만, 지금은 갈 수 없구나.”

“아버지가 결심만 하시면 떠날 수 있어요. 황실이 장군부를 이용해 절 견제한다면 반대로 절 이용해 장군부를 견제할 수도 있어요. 계획을 잘 짜면 이득을 보려는 쪽이 손해를 보게 만들 수 있어요.”

심묘의 마지막 말은 악랄했고 말투도 날카로웠다. 심신이 크게 웃었다.

“전에는 교교가 부드러워 우리 무장가문 출신 아가씨 같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나와 아주 비슷하구나. 여장부의 품격이 있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원한 뜻을 품을 줄 아니, 아주 좋다! 교교가 이렇게 똑똑하니 방법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장래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심묘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심신을 바라보았다.

“장래? 어떤 장래요?”

“황실 사람은 장군부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지. 언젠가 명제가 강성해진대도 장군부는 도마 위 생선이 되어 도륙당할 것이다.”

심신은 길게 탄식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러나 네 어머니와 심구, 그리고 네가 연루되는 게 걱정되는구나. 더욱 심가는 오랫동안 청렴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명성이 훼손당하길 바라지 않는다.”

심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심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추측했으나 믿기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곧 심신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황실의 충성스러운 하인, 나 심신은 그만하련다.”

심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심신이 시원하게 웃었다.

“날 설득할 필요는 없다. 네 아비는 충정을 중하게 여기지만, 흉악한 사람에게까지 충성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런 이에게 온 가족의 목숨을 바칠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지금 장군부 전부가 널 따라 대량으로 가면, 언젠가 대량이 명제를 공격할 때 명제 백성은 장군부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라 욕하고, 네가 나쁜 사람을 도와 나쁜 일을 한다고 욕할 것이다. 이유 없이 명성이 더럽혀지는 걸 볼 수 없구나. 우린 명제에 남고 너 홀로 대량에 간다면, 어느 날 명제와 대량이 전쟁을 벌여도 넌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홀로 대량에 있으니 어쩌지 못함을 알기에, 명제 백성들도 널 탓하지 않을 게다. 게다가 장군부는 명제에 있어서 대량과 결탁은 불가능하니, 당연히 날조된 더러운 명성을 짊어지지 않겠지.”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는 심가군 명의로 명제와 대량의 전쟁에 뛰어드실 건가요?”

만류하는 소리에 심신은 또 한번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다. 그 전에 황제는 반드시 장군부에 손을 쓸 것이다. 황실이 적절한 시기에 손쓰지 않는다면 그땐 내가 나서면 된다. 나는 폐하께서 우리에게 손을 쓰게 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심신이 탁자 위 찻물을 보았다.

“황실은 의심이 많아. 장군부에 관한 근거 없는 소문을 듣는다면 폐하는 바로 행동에 나서시겠지. 이미 우리 장군부를 오랫동안 경계해 오셨으니.”

그의 말은 역설적이었다. 장군부는 문혜제를 대신해 여러 해 전쟁을 하고 강산을 지키며, 여러 번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다. 그런데도 몇 마디 비방하는 말이 들리면 문혜제는 심신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것을 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장군부 전체를 말살하려 할 터였다. 황위를 위협한다는 의혹이 든다면 문혜제는 그 싹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심신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황실이 우리 장군부에 도의를 다하지 않는 날, 그날이 바로 장군부가 봉기하는 때다.”

장군부는 오명을 짊어지길 원치 않았다. 청렴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도, 비열한 황권의 희생양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다. 천하 백성에게 황실이 먼저 장군부를 버렸으니, 장군부가 황실에 의리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깨닫게 할 것이었다. 명제 백성들에게는 혁혁한 군공을 세운 위무대장군의 성망이 황실보다 더 높았다. 심신은 이를 이용해 황실과 겨룰 심산이었다. 이것이 장군부의 명제 황실에 대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심신의 이런 모습은 평소 그답지 않았다. 장군부 사람은 시원스럽고 솔직해서 남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전쟁을 제외한 대부분 방면에서 백지처럼 순수했다. 그렇기에 심묘는 이번 생에서 혼자 모든 일을 해결하려 했다. 장군부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계산하지 않으니 자신이 계략을 꾸미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악랄해 보일까 두려웠었다.

그러나 지금 심신은 비밀스럽게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절대 나서서 이런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제안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심묘의 머릿속에 번뜩 사경행의 나른한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입을 떼다가 곧 멈추었다. 심신은 심묘의 고뇌를 알아본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줄곧 네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정경성에서 잘 성장했구나. 네가 아주 대견하다. 이렇게 훌륭히 컸으니 우리가 곁에 없어도 너는 스스로를 잘 보호할 수 있을 게다.”

“아버지, 장군부가 위험해지면 대량에 꼭 편지하세요. 전 장군부의 딸이니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그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 교교,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가씨이니 천제에게 보내도 부족함이 없을 텐데. 예왕 전하에게 시집간다니 아주 손해가 막심하구나.”

심신이 미소 지었다. 심묘는 코가 시큰거렸다. 가족과 헤어진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전하는 교활하고 음험하지만, 신의는 있는 분이다. 너와 혼인했으니 널 보호해줄 게다. 걱정하지 말아라. 넌 좋아하는 사람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알겠어요.”

심묘가 작게 대답했다. 심신은 심묘를 잠시 바라본 후 미소 지었다.

“몇 년 지나면 반드시 널 찾아간다고 약속하마.”

심묘가 살짝 웃었다.

“기다릴게요, 아버지.”

심신과 심묘는 서재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눈 후, 더욱 친밀해졌다.

* * *

심묘는 뜰에서 심신의 무공 연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심구가 질투하듯 말했다.

“교교. 너는 근래 아버지께만 달라붙어 있고, 나한테는 관심도 없구나.”

심신과 마음을 터놓고 비밀을 이야기한 심묘는 심신이 장군부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걱정을 던 셈이었다. 이후 황실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 심신을 격려하기도 했다. 전생에 황실에서 오래 지냈기에 명제 황실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심묘가 황실에 대해 너무 잘 알자 심신은 의아해했다. 심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모든 공로를 사경행에게 돌렸다. 덕분에 심신은 사경행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수완의 사내라는 생각에 등골이 다 서늘했다.

심묘는 사경행에게 심신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물었다. 사경행은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지만, 심묘는 대강 눈치채고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장군부가 명제에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사경행은 명제에 자신의 동료가 있으니 장군부에 사고가 생길 리 없다고 장담했다. 심묘는 마음을 놓았다.

성혼 전날 밤. 다음 날 자신은 장군부에서 출가할 터였다. 꽃가마를 타고 온 성을 돌아 시끌벅적 축하한 후 명제를 떠나 대량으로 갈 것이다. 가져갈 것 모두 가져가고, 데려갈 사람도 데려갈 것이다. 심묘는 배랑도 잊지 않았다. 배랑 혼자 정경성에 남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부수의는 반드시 그를 찾으려 할 테니, 출가 대열에 섞여 같이 대량으로 가는 게 나았다.

그러나 류형 때문에 배랑은 대량으로 가겠다고 쉽게 승낙하지 않을 테니, 그를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배랑은 심묘의 편지에 시원스레 동의한다고 회답했다. 심묘는 혹시 사경행이 배랑을 위협했나 싶었지만, 곧 그가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배랑이 죽거나 살거나, 사경행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을 사람이었다.

심묘의 혼인으로 온 장군부가 잠을 못 이루는 것처럼 공주부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송신 공주는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의심을 사기 싫어 하인들도 일찍 물렸다. 예왕이 사경행인 걸 안 후부터 자신은 많은 의심을 품었으나, 예왕부로 가 사경행에게 이것저것 캐묻지는 않았다. 정경성 어디에나 황실의 눈과 귀가 존재하니 재난을 불러들이는 행동은 삼가야 했다.

자신이야 조정 일에 관심 없는 공주지만, 황실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누가 무언가 발견해 사경행의 신분을 밝혀내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자신은 그래도 사경행에게 옛정을 가지고 있었다. 예왕을 조심하고 의심하고 경계하면서도 고독했던 과거를 함께한 사경행을 잊지 않았다.

사람의 감정은 아주 복잡해서 순수한 애정과 원망은 찾기 어려웠다. 애정과 원망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면 세상 많은 일은 아주 수월해질 터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난처한 것은 애정과 원망이 뒤섞인 것이다. 독하지도 못하면서 무심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지금 자신이었다.

내일은 심묘의 혼롓날이니 사경행도 명제를 떠날 터였다. 사경행이 대량으로 돌아가면 그가 다시 명제 땅을 언제 밟을지, 언제 명제 정경성을 평정할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사경행의 이모면서 동시에 명제의 공주였다. 지금 혈육의 정과 눈앞 강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물론 그 혈육이 먼저 자신의 신뢰를 깨버렸지만 말이다.

고민하던 송신 공주는 종이와 붓을 꺼냈다. 붓에 먹물을 묻혀 글을 쓰려다 멈췄다. 혼란스러웠다. 이 편지를 보내면 사경행이 어떤 사람인지 모두 알 테니 그가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는 자신이 사경행과의 옛정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밀한 사람에서 증오하는 사람으로 변한 상황이니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결말을 예상할 수 없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사경행의 부고 소식에 목숨을 버릴 생각도 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사경행을 어려운 길로 밀어야 했다. 이를 악문 그녀는 붓을 들어 빠르게 편지를 썼다.

* * *

평남백부.

소욱과 소 부인은 닫혀 있는 소명풍의 서재 문을 바라보았다. 소명풍은 그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아가씨와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했다. 지난번에는 태자가 앞을 막더니 이젠 예왕이 등장했다. 딸을 사랑하는 심신도 어쩔 수 없이 성지에 따라 심묘를 대량으로 시집 보내는데, 장군부보다 지위가 낮은 평남백부로서는 끼어들 도리가 없었다.

“명풍이 심 소저를 잊는 수밖에 없어요.”

소 부인이 탄식하자 소욱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이 쉽지. 명풍은 정이 깊잖소. 심 소저를 잊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설득해도 별 소용없겠지. 지금은 그저 명풍 혼자 생각하게 둡시다.”

소 부인이 소욱에게 눈을 흘겼다.

“당신은 감정도 없어요?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지켜만 보라니, 내 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아프다구요.”

“하지만 들어가서 충고하거나 타일러도 소용없을 거잖소.”

소욱은 억울했다. 그때, 바깥에서 소명랑이 두꺼운 책을 들고 달려왔다. 소명랑은 나이가 들면서 활발함이 사라지고 점점 제2의 소명풍처럼 되었다. 그러나 온화하고 예절 바른 소명풍과 달리 소명랑은 거만한 면모가 있었다. 지금 역시 부모와 마주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소욱은 소명랑이 이전만큼 귀엽지 않다고 아쉬운 소리를 하곤 했다. 소욱은 얼른 그를 불렀다. 소명랑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네 형이 지금 충격을 받아 마음이 좋지 않은 듯하구나. 아비가 중요한 일을 너에게 맡기마. 네 형을 좀 격려해주거라.”

소명랑의 성격은 변했으나 소명풍과는 여전히 친근했다. 이전 경단처럼 동그랬던 소명랑은 배움이 늦어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럴수록 소욱에게는 호된 나무람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소명풍이 나서서 그를 보호했고, 소욱에게도 그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길 청했다. 은혜를 아는 명랑은 자신의 형이 어릴 적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아, 맞아. 명랑아, 너 형에게 글자를 알려달라고 하렴. 아니면 놀이를 같이 하자고 해. 혼자 있으면 외로울 테니까.”

소 부인까지 합세하자 소명랑은 두 사람을 보며 어른인 척 말했다.

“네, 가서 형님을 위로할게요. 그런데 그러려면 먼저 심묘 누나의 혼사로 괴로워하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나요?”

소욱과 소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소명랑이 소명풍의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환한 불빛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금을 털어놓는 말을 나눌 테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먼저 들어가세요. 형님이 강에 뛰어들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시간이 흐르고 소 부인이 고마움을 표하며 몸을 돌렸다.

소명랑은 소명풍의 서재를 향했다. 문을 열자 소명풍이 서재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매우 초조하고 심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명랑은 가까운 의자에 단정히 앉아 소명풍을 바라보았다.

“형님, 좋아하면 쟁탈해야지.”

“뭐?”

소명랑이 정중한 얼굴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대장부는 패기가 있게 행동하고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는대. 난 형을 지지할 거야. 형이 심묘 누나를 좋아하면 가서 혼인을 막아. 누나를 빼앗으라고. 형이 더 뛰어나잖아.”

소명풍은 그제야 소명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실소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 소저가 시집가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소명랑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소명풍을 바라보았다.

“그럼 왜 괴로워하는 거야? 심묘 누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부모님이 오해하시는 거야. 내가 대체 언제 심 소저를 좋아했다고?”

“형이 몰래 심묘 누나를 조사했잖아.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뭔데?”

소명랑이 캐묻자 소명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야. 다만…….”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 위로 또다시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명랑이 그를 보며 의아한 시선을 띠었다.

“형 표정 지금 정말 괴상해.”

“명랑아, 임안후부의 사경행을 아직 기억하냐?”

갑작스러운 소명풍의 물음에 소명랑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사가 형? 당연히 기억하지. 형의 가장 친한 친구 아니야? 형이 사가 형이 먼 곳에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 후부터 사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잖아. 사가 형이 돌아온 거야?”

소명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도 그가 내 가장 친한 친구라 생각하냐?”

“당연하지. 사가 형은 흉악한 독설가지만 우리, 아니 형한테는 아주 잘해줬잖아. 형님도 예전에 형이 임안후부의 막내고, 사가 형은 형의 형이라고 말했잖아?”

소명풍은 침묵했다. 소명랑이 호기심을 품고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형, 사가 형과 다툰 거야?”

소명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나 잠시 나갔다 올게. 너 여기에 가만히 있어. 어디도 가지 말고.”

밤의 장막은 온 정경성을 덮었다. 공주부와 평남백부의 암류는 암초 아래 출렁이며 변화를 꾀할 준비를 했다. 평온한 수면 아래 모든 것을 훼멸할 화염을 품은 화풍(火風)이 무르익었다.

* * *

정왕부.

부수의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생기 충만하며 준수한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다. 정왕부의 감옥이 불에 타버려서 부수의는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술 뻔했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풀 곳이 없었다. 게다가 배랑의 시체가 없다는 보고까지 받았으니 더욱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불을 내고 배랑을 구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감히 정왕부에 침입해 자신이 중시하는 것들을 제멋대로 파괴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배랑과 그를 도운 자를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했지만, 아무리 조사를 해도 의심했던 장군부와 연관된 실마리는 전혀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은 심묘와 예왕의 혼롓날이었다. 내일 이후 심묘는 예왕을 따라 대량으로 떠나니 예왕의 비밀은 더욱 알 길이 없어졌다.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보여 몹시 달갑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수의가 파견한 호위가 들어와 부수의에게 인사했다.

“전하, 공주부와 평남백부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부수의의 눈빛이 밝아졌다.

“무엇인가?”

호위가 부수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부수의는 바로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하늘의 도움이구나! 즉시 사람을 보내고 너도 따라가라. 무엇도 놓쳐서는 안 된다.”

호위는 명령을 받아 즉시 떠났다. 부수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천천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왕, 송신 공주, 평남백, 심묘. 너희 사이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는지 알아낼 것이다.”

* * *

정월 보름, 드물게 길일이었다. 혼인과 장례 양쪽 모두에 이로운 날이었다. 하늘이 밝아오자 경칩과 곡우는 심묘를 깨워 몸치장을 시작했다. 심묘는 혼례 전날 밤잠을 설치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염려가 무색하게 유달리 달게 잤다. 아무런 근심 없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잠을 잘 잔 덕분에 안색이 아주 좋아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백로와 상강이 심묘에게 정교한 간식을 가져왔다.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 조그마한 떡이었다.

“아가씨, 드시고 배를 채우세요. 오늘 혼롓날이니, 가볍게 드셔야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배가 고파선 안 되니까요.”

백로가 작은 죽그릇을 들고 이어 말했다.

“마님께서 일찍 일어나 직접 끓이신 죽이에요. 드시면 매사가 상서롭고 뜻하는 대로 된답니다.”

심묘가 그릇을 들어 죽을 천천히 마셨다. 감동이었다. 전생의 자신은 반드시 부수의에게 시집가겠다고, 가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심신을 협박했다. 심신은 방법이 없어 부득이 허락했기에 그 혼사를 축복하는 사람은 적었다. 나설안도 마지못해 허락했으니 혼례 전 죽을 끓여줄 기분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장군부 모두가 전심전력으로 자신의 혼례를 준비했고 앞날을 축복했다.

죽을 다 먹었을 때 나설안이 들어왔다. 그녀 뒤로 중년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여자의 용모는 출중하지 않으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정교한 몸치장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설안이 웃었다.

“정경성의 매 낭자야. 오늘 특별히 네 희낭이 되어주실 거다.”

심묘는 의아했다. 매 낭자는 정경성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관리 집안 출신인데 어려서부터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연지와 수분(水粉, 액체 분), 의상, 장신구 장사를 했다.

정경성 내 관리 집안의 무수한 부녀자들은 천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미를 좇는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면 은자는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 방면에서 매 낭자의 물건은 탁월했다. 아무도 매 낭자를 장사치라며 낮잡아보지 않았다.

게다가 매 낭자는 손재간도 출중했다. 명제의 왕야가 비를 맞이할 때 그 비빈과 친했던 매 낭자는 희낭 역할을 맡았다. 명제 개국 이래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꼽으라고 하면 다들 당시 그 비빈을 꼽았다. 그러나 매 낭자의 물건은 은자로 구해도 그녀의 솜씨는 그리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녀를 희낭으로 삼으려면 그녀와의 우정이 필요했다.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오래도록 매 낭자는 희낭을 하지 않았다.

심묘는 의아했지만 기뻤다.

“예상치 못하게 매 낭자가 수락해주셨네요.”

매 낭자는 웃음을 띠었다.

“왕비마마,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이전에 우연히 왕비마마를 뵙고 마음이 바른 분이시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운을 얻고자 뻔뻔스럽게 온 겁니다. 왕비마마께서 제 손재간을 싫어하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뛰어난 상인답게 매 낭자는 입심이 좋았다. 심묘는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혹시 심신이 매 낭자에게 큰 대가를 지불한 게 아닌가 생각도 했으나 매 낭자는 결코 돈이 궁하지 않았다. 장사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할 터였다.

“왕비마마, 새신부의 단장은 아주 오래 걸립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시지요. 저는 치장해드릴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매 낭자가 심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설안이 얼른 심묘를 재촉했다. 의상을 바꿔입자 매 낭자가 명주실을 꼬아서 얼굴의 솜털을 뽑았다. 머리를 빙빙 틀어 얹고, 장신구를 바꾸고, 지분을 발라줬다. 매 낭자는 심묘를 치장해주며 치켜세웠다.

“근래 장신구와 지분을 팔며 많은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정경성 아가씨 중 왕비마마와 같은 기백과 도량은 본 적이 없네요.”

매 낭자가 웃으며 나설안을 바라보았다.

“부인, 제가 말이 좀 많아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왕비마마는 부인과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인은 시원하고 솔직하신데, 왕비마마는 온화하고 점잖으시네요. 부인도 훌륭하시지만, 마마는 더욱 귀한 티가 나서 궁중 귀부인과 비교해도 손색없으십니다.”

딸의 칭찬을 들은 나설안은 당연히 기뻤다. 그러나 궁중을 이야기하자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어디 그렇게까지 대단하겠어요. 하지만 교교는 진중해서 제 아버지보다도 나은 아이랍니다.”

매 낭자가 심묘의 눈썹을 그려주며 말했다.

“빈말이 아닙니다. 신분이 고귀해도 뼛속에 그런 무게가 없어서 치장을 빼면 일반 백성과 다를 것 없는 사람이 있지요. 반면 무명옷을 입고 가시나무 비녀를 한 채 앉아 있어도 높은 자리에 앉은 느낌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왕비마마는 후자이십니다.”

매 낭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두 번 보기 어려운 귀한 운명이십니다. 더욱이 이렇게 좋은 혼례복과 장신구가 있으니 저는 왕비마마를 정경성 제일로 단장할 겁니다. 제 명성에 먹칠할 수는 없지요.”

심묘는 매 낭자의 손에 몸을 맡겼다. 매 낭자의 말은 재미나서 심묘도 그녀의 얘기에 집중했다. 신부 단장은 족히 반 시진이 걸렸다. 얇게 지분을 바르고 양털로 만든 작은 붓으로 눈썹을 잘 다듬었으며 자연스럽게 연지를 발랐다. 눈썹은 초승달 같고 입술은 꽃잎 같았다.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곳은 눈이었다. 심묘의 눈은 맑고 투명하며 흑백이 명확해 막 태어난 어린 사슴처럼 순수했다. 매 낭자는 눈꼬리를 곡선으로 그려서 순수하며 온화하고 점잖아 보이는 눈을 만들었다. 황후의 모습이었다. 나설안은 순간 스친 생각에 놀랐다.

매 낭자의 말에 나설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잠시 후에 선물을 드릴 사람들이 올 테니 부인은 이곳에서 왕비마마와 함께 계십시오. 저는 향기로운 잎을 찾아와 왕비마마께서 지니시도록 하겠습니다.”

심묘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나설안은 거울 속의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았다. 기쁘고 아쉬웠다. 그녀는 심묘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교교. 오늘 출가하니, 어미가 너에게 몇 마디 말할 게 있단다.”

“말씀하세요.”

“딸을 시집 보낼 때 어미가 몇 마디 당부한단다. 그러나 내가 네 아버지와 혼례할 때, 네 외조모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 게다가 난 형제만 있고 자매는 없었어. 새언니도 어려서 내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네게 해줄 말은 나 혼자 생각해봤단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해주마.”

나설안이 자애롭게 심묘의 손을 토닥였다.

“부부가 함께 살면 솔직함이 가장 중요하다. 나와 네 아버지는 여러 해 서로에게 비밀이 없단다. 상대방의 비밀을 발견하면 급하게 캐묻지 말고 그가 말해주길 기다려라. 넌 침착한 아이지. 외부 일에도 쉽게 영향을 받지 않으니 좋은 일이야. 하지만 감정은 참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의 일이니 자연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에 두게 될 거란다. 그러면 너도 모르게 침착할 수 없을 때도 생길 것이야. 그때는 솔직하게 행동하렴. 부끄러워 말고 겁내지 말아라. 그 사람은 너의 남편이자 너와 일생을 함께 보낼 사람이야.”

나설안이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경행이 내게 첩을 들이지 않을 거라 보증했으나 사실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단다. 황실 사람의 후원에 어떻게 여자가 하나만 있을까? 지금은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부득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단다.”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그렇다고 우리 장군부 딸이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기만 하면 안 되지. 네 남편이 후원에 다른 여자를 두면 질투하고 큰 소리로 야단법석을 떨 수 있어. 현명한 부인은 도량이 크다는 말은 전부 허튼소리다. 세상 사람이 여인의 불공평함을 단속하려는 것일 뿐이야. 그런 날이 오면 넌 그를 남편으로 여길 필요 없단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상관치 말고 네 마음을 생각해라. 네가 떠나고 싶으면 우리가 언제든지 널 도우마.”

심묘는 나설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나씨 가문에는 첩이 없었다. 나설안 역시 그녀가 인정한 한 사람과 일생을 살았다. 나설안의 말을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사색이 될 것이나 심묘는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는 늘 자식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자식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녀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부수의의 생모인 동숙비는 매번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여자는 어질고 너그러워야 한다며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부수의에게 측비를 얻게 했다. 아무리 친부모는 아니라지만, 지금의 나설안과 선명하게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나설안이 소매 안에서 작은 책을 꺼냈다.

“교교, 이거. 챙겨뒀다가 혼인 예식이 끝나고 시간이 날 때 보거라.”

“이게 뭐예요?”

심묘는 책을 받으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설안은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렸다. 심묘가 펼쳐 보려고 하자 나설안은 얼른 심묘의 손을 붙잡았다.

“네가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란다. 지금은 보지 말거라. 나중에 너 혼자 있을 때 보려무나.”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 더 하려다 나설안의 어색한 안색을 보고 갑자기 깨달았다. 얼굴이 얼얼해졌다. 춘화가 분명했다. 전생에는 심부가 어수선해서 이 책자를 챙기는 것을 잊었다. 더구나 부수의는 자신의 신방에 들어오지 않으니 따로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부수의가 제대로 부부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부수의는 늘 바빴고 성의가 없었다. 춘화를 본 적은 없으나, 부부가 신혼 때 춘화를 연구한다고는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자신은 겪어보지 못했다. 이번 생에 다시 한번 혼인하며 전생의 한을 풀게 될까.

나설안과 심묘가 곤란해할 때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나담이 풍안녕을 끌고 들어왔다. 나담은 나설안을 보며 인사했다.

“고모, 심묘에게 선물을 하러 왔어요.”

나설안은 두 사람이 자신들을 궁지에서 벗어나게 해줘 안도의 한숨을 쉬고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거라. 난 나갔다가 다시 오마.”

나담은 심묘를 둘러싸고 한 바퀴 돌더니 감탄했다.

“심묘야, 오늘 너무 예쁘다.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아.”

풍안녕은 끝까지 꼬투리를 잡는 성격이지만 지금은 나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명제에서 제일 아름다운 단장일 거야.”

심구에게 차가운 얼굴로 외면당한 후 풍안녕은 장군부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심묘가 출가하는 날이기에 심구가 두려워도 용기를 내서 온 것이었다.

“매 낭자가 희낭이라며? 역시 예쁘네. 못 알아볼 뻔했어.”

그 말에 나담이 희희 웃더니 등 뒤에서 상자를 꺼냈다.

“심묘는 원래 예쁘게 생겼어. 심묘야, 내가 주는 선물이야.”

심묘가 상자를 열자 쇳덩이 같은 장난감이 들어 있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를 본 풍안녕이 선수를 쳤다.

“이게 뭐래? 나담 언니, 이런 걸 심묘에게 주는 거야? 너무 못생겼다.”

“네가 뭘 알아. 이건 나침반이라는 거야. 병영에서 사용하는데, 대략 알려주는 거랑 달리 이건 아주 정확하대. 동쪽에서 전해진 물건인데 지금은 항해에서 사용해. 나릉 오라버니가 열 개만 가지고 와서 병영에서 사용한다 말했어. 내가 어렵게 한 개를 구해온 건데, 싫으면 말아.”

나담이 입을 삐죽이자 심묘가 얼른 상자를 닫았다.

“고마워.”

“심묘에게 부족한 건 없을 거야. 예왕 전하께서 많은 빙례를 보냈으니, 모자란 게 없겠지. 금은 장신구를 선물하는 건 굴욕을 자초하는 것이고. 그래서 실용적인 것을 주는 게 낫겠다고 여겼어. 이 나침반을 가져가. 대량에 가면 사람도, 땅도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 거야. 언젠가 길을 잃어버릴 때 큰 쓸모가 있을 거야.”

심묘가 미소 지었다.

“언니 말이 맞아. 금은, 장신구보다 더 특별해.”

나담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풍안녕을 바라보며 위세를 부렸다.

“풍안녕, 넌 뭘 가져왔는지 꺼내 봐. 금은이나 장신구면 관둬. 시시하다고.”

풍안녕은 나담에게 눈을 흘겼다.

“나침반 하나가 뭐라고. 우리 풍가는 그런 물건을 선물하지 않아.”

풍안녕은 상자를 열어 작은 병을 꺼냈다.

“귀원환 세 알이야. 귀원환이 뭔지 알아? 전조의 대유의(儒醫, 의사이면서 유학에도 통달한 이)가 목숨을 부지했던 물건으로 가격이 비싸도 팔 물건이 없을 정도야.”

설명을 마친 풍안녕이 둥근 병을 다시 넣어 상자째로 심묘에게 건넸다.

“네 성격이 있는데 대량에 가서 지낸다고 가만히 죽어 지내겠어? 혹시 무슨 일을 당하면 이 귀원환을 한 알 먹어. 네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아니다. 위험을 불러오는 사람은 천 년을 산다니 넌 반드시 오래 살 거야.”

심묘가 살짝 웃었다.

“고마워.”

풍안녕의 말은 새침데기 같아도 그녀의 마음씨는 한결같았다. 귀원환은 아주 진귀한 물건이었다. 전생에서 부수의가 귀원환 한 알로 능력 좋은 막료를 매수하기도 했다. 귀원환 한 알에 인재 한 명의 가치가 있으니 환의 가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 환을 세 알이나 가져왔으니 아주 대범한 선물이었다.

“네가 친구가 없으니 나라도 잘 준비해야지. 네 위신이 깎이지 않게.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풍안녕의 눈가가 붉어졌다. 말하다 목이 잠겼으나 풍안녕은 한사코 말을 이었다.

“난 너랑 헤어지기 싫은 게 아니야. 하지만 난 네게 이렇게 큰 선물을 했는데 난 혼인 선물을 받지 못하니 억울하잖아.”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네가 혼인할 때, 선물을 보낼게. 네가 억울하지 않게 편지도 자주 쓸게.”

풍안녕은 그제야 울먹거림을 멈추었다. 심묘는 갑자기 소매를 더듬어 편지 한 통을 꺼냈다. 그 편지를 풍안녕에게 건넸다.

“이 편지, 오늘 이후에 읽어보고 네 오라버니에게 전해줘.”

나담과 풍안녕은 동시에 당황했다. 순간 나담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웃었다.

“설마 심묘, 너 풍 공자에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풍 공자의 구혼을 거절해서 미안하다고 편지까지 쓴 거야? 그런데 왜 풍안녕에게도 보라고 해?”

“그런 건 아냐. 아무튼 안녕아, 앞으로 무슨 말썽이 생기면 장군부로 와서 오라버니를 찾아. 오라버니가 도와줄 거야.”

전생에서 풍가는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 게다가 풍안녕은 사람 탈을 쓴 짐승에게 시집가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번 생에 심묘 자신과 풍안녕은 친구인 셈이니 풍가의 일을 일깨울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풍안녕이 풍 대인에게 건네면 그는 헛소문으로 치부할 테지만, 풍자현이 건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었다. 풍자현은 이미 벼슬길에 올랐으며 풍 대인은 그를 신뢰하니 이 내용을 분명 진지하게 고려할 터였다. 심구는 모를 테지만, 자신이 명제에 없으니 이제 그가 대신 나서서 풍가를 도울 수 있었다.

풍안녕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누가 그렇게나 흉악한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그러나 이 말을 심묘는 듣지 못했다. 심묘는 자매가 없고 명제에 친구가 별로 없어서 그녀에게 선물을 가져온 사람 대다수는 심신과 나설안의 체면을 보고 온 것이었다. 그들은 심묘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보낸 물건은 대부분 금은, 장신구였다. 심묘를 보며 질투하는 자도 있고 흠모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심묘의 혼례복과 치장에는 끝없이 찬탄했다.

축하 시간도 끝나고 길시(吉時)가 되었다. 신부 맞이 마차 행렬은 이미 장군부 대문 앞에 와 있었다. 나설안과 매 낭자가 심묘의 방에 들어왔다. 매 낭자는 심묘에게 붉은 천을 덮어줬다. 심묘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

장군부 대문은 인파로 뒤덮였다. 정경성 사람들이 장군부 딸의 출가를 보려 부 입구를 겹겹이 감싸고 있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니 북새통을 이뤘다.

“심가 소저의 출가는 엄청나게 호화롭네. 저 마차를 봐. 보통 사람은 쓰지 못할 거야.”

“저기 봐. 향주머니가 엽전이 아니라 모두 은 부스러기야. 정말 보통이 아닌걸.”

다른 사람이 말참견했다.

“대량의 국토가 풍요롭다고 했을 때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네. 대량 친왕 전하의 혼인이, 우리 황제 폐하의 혼인보다 성대하잖아.”

“쉿, 그런 헛소리 하지 마. 생각만 해. 대량 예왕 전하가 보낸 빙례는 전부 99개라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

“어어어, 왔다!”

빙례는 혼롓날 당일 신부에게 보낸다. 빙례가 한 상자씩 신부 친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람들이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빙례는 여자 측과 남자 측의 체면을 세워주기도 한다. 물론 체면 때문에 혼롓날 일부러 빈 상자만 준비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빙례 상자를 크게 열어 안의 물건이 무엇인지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했다. 골동품, 서예와 그림, 장신구, 가구, 보석, 의상, 백은. 온갖 것이 다 있었다. 상자 가득 아주 빽빽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에 질투로 핏발이 섰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날뛰는 도적이라 해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상자를 든 남종 주위를 대량의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장병들이 검을 뽑아 들고 서 있으니 그 위엄이 대단했다. 정연한 걸음걸이를 보니 누군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즉시 처벌할 것 같았다. 이에 사람들은 먼저 길을 내어주었다.

“하나, 둘, 셋, 넷.”

누군가 호기심에 정말 빙례 상자를 하나하나 헤아려보기 시작했다. 긴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놀라고 감탄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끊임없이 들렸다. 마지막 하나가 오자 누군가 외쳤다.

“99개! 99개의 빙례야!”

99개의 빙례. 태자와 태자비가 혼인할 때도 42개였으니 두 배보다 더 많은 셈이었다. 예왕은 대량의 친왕인데도 이 정도인데 대량 황제가 혼인하면 얼마나 웅장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심묘의 혼인이 명제 황제보다 더 호화로운 것은 분명했다.

군중 사이로 경탄이 물결쳤다. 명제에서 심묘보다 더 영광스러운 혼인을 치를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심묘에게 선물을 건넨 관리 집안 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심가의 머저리, 사촌 언니보다 못하다고 늘 비웃음을 당하던, 부수의에게 업신여겨지던 심묘가 이렇게 좋은 혼사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심 소저는 정왕 전하를 좋아하지 않았나? 그래도 이는 축하할 일이지. 정왕 전하는 청렴해서 전하와 혼인했다면 지금 호화로움의 백 분의 일도 누리지 못했을 거야.”

그 말은 공교롭게도 부수의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군중 속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예전에는 청렴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람들을 속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가 났다. 자신이 예왕보다 못하다고, 자신은 그를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고 비아냥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어제 보낸 호위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기에 실패했을 거라고 짐작하던 차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그들의 행방을 찾는 한편 심묘의 혼사를 보러 왔다. 대량의 예왕이 어느 정도까지 날뛸지 보고 싶었다. 확실히 예왕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렇게 웅장한 모습을 보인 예왕 덕분에 명제 황실이 인색해 보였다. 그러나 밉살맞게 굴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왕은 명제 사람이 아니기에 명제의 규칙으로 그를 벌할 수는 없었다.

부수의는 분을 삼키며 장군부 입구에서 부축을 받으며 나오는 심묘를 지켜보았다. 심묘는 조심스레 발을 들어, 치마가 타지 않게 화로를 넘고 있었다. 그녀의 동작은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사람들은 빛이 흐르는 심묘의 혼례복을 보며 감탄했다. 부수의는 갑자기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샘솟았다. 심묘의 모습이 매우 거슬렸다.

그러나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알지 못했다. 심묘가 자신을 쫓아다니던 시절, 자신은 멍청한 그녀를 혐오했다. 오직 장군부의 병권을 얻기 위해 그녀를 이용할지 말지 고민했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심묘는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접은 듯했다. 그 후에야 자신이 심묘를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도 아둔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활했다.

장군부도 매우 기이했다. 분명 손에 쥔 바둑알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저 멀리 달아나 있었다. 심지어 자신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감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대업을 이루기 전 애정 따위로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하지만, 순간 화롯불을 발로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일이 자꾸 풀리지 않으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그때, 군중이 웅성거리며 반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 빠르게 말을 몰아 오고 있었다. 진홍색 비단 장포는 강렬한 불처럼 보였다. 달리는 말 위에서 옷자락이 나부꼈다. 사람들의 눈에 화상을 입힐 정도로 우아하고 강렬한 모습이었다.

심묘와 가까워진 사내는 말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젊은 남자의 은색 가면은 진홍색 장포를 반사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몸을 구부려 신부인 심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내로 맞이하러 왔다, 심교교.”

그의 말투는 부드러운 듯 단호했다. 손을 뻗은 모습은 진지했으나 자연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건방져 보이기도 했으나 예법에 어긋나 보이지는 않았다. 천지 만물은 평온해졌다. 사람들은 이 사내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심묘는 붉은 천을 뒤집어쓰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듣고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고, 순간 무언가 손가락에 끼워졌다. 가볍고 부드러운 촉감. 심묘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할 때 주위 사람들은 더욱 놀라 서늘한 공기를 들이켰다.

역대 친왕이 지니는 반지는, 재력이 아니라 신분과 권력을 상징했다. 예왕은 지금 그 반지를 심묘에게 주었다. 심묘에게 반지가 있으니 사람들은 그녀를 예왕처럼 대우해야 했다. 그녀는 이 반지를 이용해 수하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부인을 아끼는 사람은 본 적 있으나 이렇게까지 아끼는 것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주위 젊은 아가씨들은 심묘를 흠모하며 질투했다. 예왕은 품위 있고 신분도 고귀한데 마음 씀씀이마저 대담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가씨들은 예왕이 이렇게 수려하니 곁에 여인이 많을 테고, 절세미인이 아닌 심묘는 조만간 예왕에게 버림받을 거라고 자기를 위로했다. 그러나 예왕이 이렇듯 전례 없는 방식으로 심묘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니, 그녀들의 실낱같은 기대감도 무너졌다. 이렇게까지 아내를 총애하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들은 심묘가 어떻게 이런 좋은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 전생에 어떤 덕을 쌓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화에 복이 깃들어 있고, 복에 화가 숨어 있는 법. 심묘가 전생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안다면, 감히 그녀의 운명을 부러워할 자는 하나도 없을 터였다.

예왕은 반지를 끼운 심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심묘는 손등이 저릿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단시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붉은 천을 쓰고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니 다행이었다.

예왕이 몸을 세우자 매 낭자가 웃으며 외쳤다.

“빙례를 보내고 혼수를 올리시오.”

혼수를 올리면 신부의 어머니가 직접 신부에게 마단(麻团)을 먹이는 의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단자 안에 들어 있는 마단은 땅콩, 연박, 참깨가 섞여 있는 음식으로 귀한 아들을 낳으라는 의미였다. 나설안이 마단을 작게 떼어내자 심묘가 붉은 천의 한쪽을 살짝 들어 나설안이 먹여주는 마단을 삼켰다.

나설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교교, 절대 억울하게 살지 말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심신이 몰래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무수한 병사를 거느린 장군이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심묘에게 늘 빚을 진 기분이었다. 더욱이 사경행과의 대화 때문에 마음이 더더욱 아팠다. 줄곧 심묘가 온실 속에서 자랐다고만 생각했다. 그 온실이 실은 사람을 깨물지 못해 안달 난 뱀과 쥐로 가득했고, 그 안에서 심묘가 힘겹게 성장한 것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이를 보상할 틈도 없이 심묘는 시집을 가게 되었다. 죄책감에 괴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젖먹이 아기에서 옹알옹알 말을 배우는 어린 아가씨로, 지금은 아름다운 새신부로 혼자서 잘 성장했으니 감격스러웠다.

심구가 심묘에게 다가왔다. 신부의 형제는 신부를 꽃가마에 태우는 역할을 맡는다. 심묘가 심구의 등에 업혔다. 심구는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교야, 너무 말랐다. 후에 다시 볼 때 오늘보다 더 말라 있으면 예왕과 결판을 낼 거야. 빨리 조카딸을 낳아줘. 조카도 좋고. 곧 널 보러 갈게.”

심구의 목소리는 꾸밈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전쟁터의 용맹이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심구의 목덜미에 머리를 묻었다. 어린 시절 애교를 부렸던 것처럼 그에게 속삭였다.

“꼭.”

예왕은 그 장면을 보고는 미간을 팽팽히 찡그렸다.

심구가 심묘를 꽃가마에 태웠다. 꽃가마의 발이 내려오자 매 낭자가 외쳤다.

“천하 경사, 신부의 기쁨만 못하구나. 누추한 골목에 살며 가진 게 밥 한 그릇과 물 한 표주박에 없더라도, 두 사람은 즐거움 버리지 마시라. 신랑과 함께 삼월의 어짊을 잊지 마시라. 오늘 두 집안이 혼인을 맺으니, 부부가 되어 서로 금실 좋게 지내며 헤어지지 말지어다. 가마를 들라!”

매 낭자의 목소리는 맑고 크며 내용도 듣기 좋았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인들이 서둘러 금박이 붙은 동전을 뿌렸다.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상서로운 말을 더하며 위로금과 사탕을 주웠다. 대단히 떠들썩했다.

심묘는 꽃가마 안에 있어서 바깥이 어떤 광경인지 보이지 않으나 인기척은 다 듣고 있었다. 주위가 한층 더 떠들썩해지자 불안해졌다. 처음으로 꽃가마를 탄 것도 아닌데 긴장할 것 없다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손의 떨림은 멎지 않았다. 심묘는 고개를 숙여 손가락의 경옥 반지를 바라보았다. 윤이 나고 깨끗한 광채가 돌아 아주 아름다웠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반지를 쓰다듬었다.

가마꾼이 꽃가마를 들었다. 예왕이 찾은 가마꾼은 솜씨가 좋아서 꽃가마를 안정적으로 들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왕은 말 위에 앉아 가장 앞에서 걸었다. 말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든 큰 꽃을 걸어 생기가 넘쳤다. 그의 나른하고 우아한 태도에 백성들은 환호했다.

사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예왕은 명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량은 지금 명제와 관계가 미묘했다. 그러나 지금 명제 백성들은 예왕의 대범함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그를 숭배하는 양 행동했다. 예왕 부부의 혼사를 만민이 기뻐한다고 할 만했다.

예왕의 뒤로 꽃가마가 따랐다. 양쪽에 위치한 예왕부 마차는 계속해서 동전을 뿌렸다. 정경성을 한 바퀴 돈다는데 동전을 멈추지 않고 뿌리니 대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장군부의 혼수 대열이 늘어섰다. 장군부가 준비한 상자를 헤아려보니 모두 50개로 예왕이 보낸 빙례의 반이었다. 혼수는 예왕의 빙례보다 못했지만 절대 적지 않았다. 태자와 태자비도 혼수는 42개였었다. 그때보다 장군부가 8개나 더 많이 준비한 것이다. 게다가 장군부는 부유한 상인 집안도 아니니 형편이 좋다고는 해도 은자가 넘쳐나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혼수를 준비했으니 심신 부부에게 심묘가 얼마나 소중한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대열을 따라 말을 타고 가던 나설안이 고개를 돌려 심신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예왕 전하께서 보냈으니 받아야지. 99개 상자를 빙례로 받았는데, 우리 부에서 혼수를 그에 맞추지 않으면 모두 우리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오.”

나설안도 수긍하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심묘의 혼수 50개 중 20개는 예왕이 준 것이었다. 예왕이 혼례복을 줄 때 상자 안에 심묘의 혼수 목록이 있었다. 예왕도 빙례가 너무 많은 것을 알기에 장군부가 대등하게 혼수를 준비하지 못할 것을 짐작했고, 그래서 그는 혼수품도 미리 준비해준 것이다. 그 20개도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그러니 예왕은 장군부에 119개의 빙례를 보낸 셈이었다. 이에 심구도 예왕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했다. 예왕은 심묘와의 혼사에 은자를 아끼지 않으니 심묘를 아낀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리 곳곳에서 경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부수의는 이 시끌벅적한 군중을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 모두가 눈에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라앉은 안색으로 차갑게 몸을 돌려 꽃가마를 등지고 떠났다.

부수의만큼 답답한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문혜제였다. 문혜제는 수하를 통해 예왕의 혼사가 황제보다 더 성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치욕이었다. 예왕이 돋보일수록 명제 황실의 처량함이 도드라졌다. 문혜제는 이 혼사의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원치 않던 혼사였으니까. 예왕이 변방의 도성으로 위협하지 않았다면 결코 성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협박에 굴복해 예왕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좋은 바둑알인 장군부까지 버려야 했다.

자신에게는 이 혼사를 떠올리는 것조차 견디기 힘든 굴욕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혼사를 물어보지 않았다. 태감에게서 예왕이 선물을 보냈다는 얘기를 들은 후 자신은 양심전으로 돌아가 어떠한 방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꽃가마는 명제의 정경성을 한 바퀴 다 돌았다. 혼례는 양 집안의 일이니 성문에 도착해서는 대량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예왕은 정경성에서 모든 혼례 의식을 하길 고집했다.

부모 알현은 정경성의 제단에서 거행했다. 정경성 제단은 황제가 황후와 혼인할 때 쓰는 곳인데, 심묘는 이곳을 쓰도록 허락을 받았다. 당연히 황실이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예왕이 문혜제에게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문혜제는 이번에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제단 위에서 매 낭자가 심묘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꽃가마에서 내려주었다. 나설안과 심신은 제단의 다른 쪽에 앉았다. 천지에 절하고 부모에게 절하고, 부부가 맞절했다. 나설안과 심신은 심묘와 예왕의 절을 받았으나 예왕의 부황과 모후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기에 두 사람은 술을 바닥에 뿌려 인사를 대신했다.

부부 맞절을 함으로써 의식이 끝났다. 심묘는 예왕비가 되었다.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라야 하니 그녀는 이제 대량 사람이 된 셈이었다. 멀리 군중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계우서가 옆의 사람에게 탄식했다.

“아,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3형이 심묘와 혼인을 하네. 3형이 심묘를 특별히 대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형수님으로 삼을지는 몰랐어. 하지만 생각해보니 잘된 일이야. 3형의 성격을 평범한 아가씨가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옆에 선 사람은 예왕부 하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변장한 배랑이었다. 배랑은 심묘를 따라 대량으로 가는 데 동의했다. 심묘의 말처럼 자신은 부수의에게 죄를 지었으니 명제에 남으면 신변이 위험할 뿐 아니라 류형도 연루될 수 있었다. 부수의에게는 눈과 귀가 많으니 그가 비밀을 캐면 자신과 류형과의 관계도 알아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자신이 대량으로 떠나면 추후 부수의가 무엇을 발견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류형을 위해 대량 행을 결정했다.

배랑이 예왕의 정체를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왕부에서 요양하던 그는 한밤중에 뜰로 나갔다. 뜰에는 예왕이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배랑은 예왕에게 인사했다. 예왕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배랑은 예왕이 작정하고 무언가를 감추려 하면 절대로 들키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는 일부러 실수인 척 자기 얼굴을 보인 게 분명했다. 신분을 밝히며 무언가 암시한 셈이었다.

두 사람의 혼사를 지켜본 배랑은 예왕이 왜 그랬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계속 심묘에게 예왕과 혼인을 잘 생각해보라 조언했었다. 예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왕이 사경행이니 이는 적합한 이유가 아니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예왕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평범한 사이가 아니었다.

배랑은 제단 위 아름다운 한 쌍을 보았다. 남자는 재능이 출중하고 여자는 용모가 아름다웠다. 대단히 잘 어울리는 부부였다. 심묘는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했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했다. 게다가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정한 바는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 부수의를 대하는 모습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었다. 사실 심묘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그녀를 위협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 데다가 이제 예왕비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날개를 더한 셈이었다.

배랑의 시선이 예왕에게 닿았다. 착실히 국력을 쌓아온 강력한 대량이 언제까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거라고 그 누가 믿을까. 곧 심묘는 구천에 나래를 펼치는 봉황이 되고, 예왕은 천하 강산을 지배하는 용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을 느꼈다.

계우서가 배랑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정을 담아 배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름답고 덕이 있는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지. 배 선생, 너무 괴로워 마. 배 선생의 품위 있는 태도를 흠모할 대량 소저가 많을 거야. 내가 작약 소저 자매도 선생에게 소개해주겠네.”

계우서는 배랑 때문에 탑뢰에 갇혔던 일을 잊지 않았으나, 배랑이 상심한 걸 보자 그를 위로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배랑은 속마음을 들켜 부끄러웠으나 심묘를 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계우서는 낮게 탄식했다.

고양 역시 사경행을 따라 대량으로 갈 예정이다. 그러나 그는 명제의 태의였다. 신분을 정리하고 가져갈 것도 챙겨야 했다. 태의원의 유명하고 진귀한 약재를 대량으로 가져가는 고양을 문혜제가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복잡하며 잡다한 예식을 소홀히 하지 않고 다 끝내자 오후 무렵이었다. 성을 나갈 시간이었다. 심묘는 정경성 성문 너머 ‘멀리’ 시집을 간다. 높은 산과 강물을 넘어 대량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장군부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배웅하러 나섰다. 그러나 나담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심묘가 대량으로 데려가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혼자 정경성을 돌아다니겠노라 말했다. 사람들은 어찌할 수 없어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었다.

* * *

공주부.

송신 공주는 방 안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공주마마, 예왕 전하의 꽃가마가 곧 성 입구에 도착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송신 공주가 초조하게 손을 휘둘렀다. 수하가 물러나자 그녀는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예왕의 신분을 폭로한 편지를 문혜제에게 전한 후였다. 자신은 명제 공주로서의 책임을 선택한 것이다.

충성과 의리를 둘로 나눌 수 없기에 혈육의 정과 국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량과 명제 사이의 거리는 친모자에 버금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편지로 인해 사경행이 고통받는다면 필시 괴로울 테지만, 사경행이 무사하게 대량으로 간대도 후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미련과 정분을 끊기로 선택한 것이다.

예왕의 신분이 폭로된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은 문혜제를 잘 알고 있었다. 대량의 국력 때문에 사경행을 죽이지 못할 것이나 그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건 가능했다. 불명예를 등에 지게 되면 대량으로 돌아가도 사경행의 생활은 절대 평안할 수 없을 것이었다.

편지에 모든 것을 설명하고 문혜제를 만나러 가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문혜제를 직접 만나지 않으면 사경행을 배반한 게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문혜제는 지금까지 어떠한 행동도 없었다. 마차 대열이 성 입구에 도착했으니 심묘와 사경행은 곧 대량으로 떠날 터였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건 문혜제답지 않았다. 많은 의혹이 떠올랐으나 무슨 일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자신은 사경행과 마주할 방법이 없었고 볼 면목도 없었다.

“다시 가서 알아보거라.”

그녀가 다른 수하를 불러 분부했다.

* * *

예왕비의 꽃가마가 성 입구에 도착했다. 매 낭자는 희낭의 일을 완벽하게 끝냈고, 경칩과 곡우는 심묘를 꽃가마에서 내려오게 부축했다.

심묘는 심신, 나설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자신은 정경성을 떠나기에 이제 명제의 많은 일에 상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몇 마디 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나설안도 심묘에게 신신당부했다.

“대량은 명제와 달라. 늘 스스로 잘 돌봐야 한다는 걸 기억하거라. 덥고 추운 데 잘 신경 쓰고, 건강해야 한다. 편지를 자주 보내고 억울함을 당하면 반드시 예왕 전하에게 말씀드리거라.”

심신도 사경행에게 몇 마디 했다. 심신은 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었다. 사경행이 솔직하게 말했기에 심신도 그를 다른 태도로 대했다. 심신은 사경행에게 심묘가 대량에서 어떠한 괴롭힘도 당하게 놔두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사경행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구는 다음에 심묘를 볼 때 그녀가 조금이라도 초췌해 보이면 심가군을 데리고 예왕부를 평정할 거라 위협했다. 예왕은 이에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나설안이 막지 않았다면, 심구는 예왕과 싸우려 했을 것이다. 나설안이 눈물을 닦았다.

“교교, 꼭 편지하거라.”

마차의 발이 내려졌다. 호위는 차례대로 무거운 혼수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긴 마차 대열의 가장 앞에 예왕이 있었다. 그는 심묘가 탄 마차 옆을 오가며 발을 사이에 두고 심묘와 대화를 나눴다. 여종들은 키득대며 웃었다.

여정은 아주 요원했다. 대량에 도착하려면 몇 개월은 더 걸릴 터였다.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 전생에 진국에 갔을 때는 지금처럼 편안하지 않았고 데려간 하인도 아주 적었었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기도 쉽지 않았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녁이 되기 전에 오늘밤을 보낼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할 때, 마차 대열이 갑자기 멈췄다. 심묘의 마음이 팽팽해졌다. 성 밖에는 늘 강도가 있었다. 그래서 강도가 나타난 건지 걱정스러웠다. 사경행의 수하들이니 전부 무공이 출중하겠지만, 강도의 수가 많다면 그래도 조금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심묘는 붉은 천을 거두고 마차의 발을 들었다. 놀란 경칩과 곡우가 소리쳤으나 심묘는 이미 마차에서 내린 뒤였다.

사경행이 말고삐를 앞에 세운 게 보였다. 길 중앙에는 검은 두립(斗笠, 삿갓)을 쓴 사람이 말을 타고 있었다.

“이봐. 형제로서 빚을 졌어.”

심묘는 그의 등장에 당황했다. 소명풍의 목소리였다. 이목을 피하려 얼굴을 가린 것 같았다. 먼저 이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하기야 이곳은 정경성과 거리가 있어 사경행과 대화를 나눠도 위험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이미 말에서 내려 소명풍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소명풍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 사납게 사경행에게 던졌다.

“내 축하 선물이야. 공주부에서 보낸 편지를 중간에 내가 가로챘지.”

사경행이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었다.

“알고 있어. 그래도 고마워.”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경행의 말에 소명풍이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넌 수완이 좋으니 공주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겠지. 내가 이 편지를 가로채지 않았어도 네가 가져갈 방법이 있었을 거야. 내가 괜한 참견을 했나?”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란 녀석은.”

소명풍이 사경행의 옷깃을 꽉 붙잡아 때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경칩과 곡우는 놀라 입을 가렸다. 그러나 철의를 비롯한 사경행의 호위는 막지 않았다. 소명풍이 손을 풀며 한숨을 쉬었다.

“망할 놈.”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배웅해줄지는 몰랐는걸. 아주 기뻐.”

소명풍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으로 널 보는 거야. 충성과 의리를 둘 다 선택할 수는 없는 법이야. 이번에 난 의리를 택했지만, 다음부터는 충성을 택할 거야. 이후로는 너와 난 형제가 아니야. 네 생각을 알기에 권유하지도 만류하지도 않을 거야. 너와 나는 결국 맞서게 되겠지.”

소명풍은 깊은숨을 내쉰 후 진지한 목소리로 한 글자씩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 넌 내 형제야.”

세상일 중 어떤 일들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운명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친한 사람을 가장 생소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붙잡아 두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심묘는 소꿉친구인 두 사람이 웃으며 정경성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희롱하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소명풍이 천천히 주먹을 쥐어 사경행 앞에 내밀었다. 두 사람이 어릴 때 늘 하던 동작이었다. 정경성 남자아이들은 늘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의 정이 깊은 걸 증명했다. 소명풍 역시 어린 시절 이 동작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해서 사경행과 늘 하곤 했다. 성장하면서 이 동작이 남사스러워지자 하지 않게 되었지만.

사경행이 웃음을 터트린 후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주먹을 내밀어 부딪쳤다. 소명풍이 고개를 들고 하하 크게 웃었다.

“좋구나.”

소명풍이 말에 올라탔다.

“오늘이 지나면 너와 난 형제가 아니야. 그러나 아직 날이 바뀌지 않았으니.”

그가 말고삐를 당기자 말이 길게 울었다. 소명풍은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을 한번 더 축하할게.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자손이 가득하길. 손님이 아주 많고 오래 건강하길 바란다.”

시원스러운 목소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의 끝말은 점점 석양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희미한 뒷모습만 보였다. 사경행 역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미간 사이는 차가웠다. 그가 말에 올라 채찍질을 했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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