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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장 (64/71)

54장

심묘가 정경성을 떠난 지 한 달 남짓이 지났다. 그동안 정경성에서는 붉은 새색시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꾼들은 식당이든 주점이든 어디에서든 예왕의 성대한 혼례를 세세히 묘사했고 손님들은 즐거이 들었다. 그렇듯 장엄하고 화려한 혼사는 일평생 보기도 어려웠으니. 몇 번을 들어도 지겹지 않은 이야깃거리였다.

심묘가 예왕비가 되어 예왕을 따라 대량으로 간 후, 정경성 안에는 두 가지 일이 생겼다. 첫 번째 일은 오랫동안 장사해온 풍선전당포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는 것. 하룻밤 사이 소유한 점포와 건물을 싼값에 전부 처분하더니 주인과 점원 역시 모두 사라졌다. 이에 풍선전당포 주인의 집안에 은자가 필요한 급한 일이 생겨 갑작스럽게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풍선전당포를 이용하는 사람은 한정적이었으나 어쨌든 오래 장사하던 점포가 갑자기 사라지니 익숙하지 않았다. 주인이 바뀌고서야 백성들은 풍선전당포 주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두 번째 일은 위무대장군 심신이 승진했다는 것이다. 그는 군정이 되었고 조정 어림군을 관리했다. 표면상 승진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군정은 인사명령권만 있고 군사훈련권이 없기에 속이 빈 강정이었다. 녹봉은 장군보다 좋았지만, 심신은 녹봉을 받지 않아도 장군부를 이전처럼 유지해나갈 충분한 재력이 있었다.

심신은 줄곧 심가군을 통솔해 호위병으로 삼았는데 갑자기 어림군을 담당하게 된 셈이었다. 어림군은 문혜제의 사람이기에 심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통찰력 있는 사람은 문혜제가 심신을 방비하려 함을 알았다. 문혜제는 딸을 아끼는 심신이 대량으로 시집간 딸아이를 위해 비밀리에 대량에 의지하게 된다면 큰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심신은 명제에서 오랫동안 대장군으로 생활했다. 그의 충심을 온 세상이 알지만, 황제는 의심이 많았다. 심신이 자신을 신하라 해도 다른 사람이 그를 군주로 추앙할 수 있으니 황제가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조정 사람은 이를 분명히 알아보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황실이 무정하다고 비난했다. 황제가 성지를 내린 혼사면서 그 혼사에 꺼림칙한 점이 있다고 심신을 핍박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문혜제는 이런 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전심전력으로 진국 황제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중이라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대량이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른다는 불안에 하루하루 초조했다. 위험이 곧 닥칠 테니 그 전에 적어도 진국과 연합을 맺어놓아야 할 터였다.

* * *

정왕부는 근래 무거운 분위기였다. 부의 주인 역시 가라앉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달 동안 배랑의 행방을 찾지 못하다니, 그가 하늘로 날아갔단 말인가? 살았으면 사람을 데려오고 죽었으면 시체를 가져오라. 찾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아라.”

부수의는 초조한 듯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꺼져라.”

척후들이 명을 받들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그는 이마를 짚었다. 불편한 표정이었다. 배랑을 구한 사람이 자신의 감옥을 불태운 이후 무엇을 해도 불편했다. 감옥의 죄수들은 다 쓸모가 있어 살려둔 것이었는데 큰불에 전부 잿더미가 되었으니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더욱이 배랑의 행방은 여전히 작은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오리무중이었다. 줄곧 배랑의 배후가 장군부라고 의심했으나, 조사 결과 장군부의 의문점은 전부 사라졌다. 장군부는 조금도 관련이 없었다. 정경성에서 눈과 귀가 밝다고 자부했는데, 고작 한 사람의 행방도 찾지 못하니 상대가 자신보다 수완이 고명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적수를 두고 즐거울 리가 없었다.

“전하, 정경성 안팎으로 소식이 없으니 혹시 배랑이 성을 나간 건 아닐까요?”

막료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불가능하다. 성 수비군에 내 사람이 있어 근래 성을 나간 사람을 모두 그려서 보고하게 했다. 받은 초상화에는 배랑과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막료는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부수의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지 못한 사람도 있지. 예왕이 혼인하고 성을 나갈 때, 예왕부 호위 관병을 막을 수는 없었지.”

막료의 눈이 밝아졌다.

“배랑은 예왕의 혼인 무리에 섞여 함께 나간 걸까요?”

“예왕부의 경계가 삼엄한데 어떻게 섞여 나갈까? 게다가 배랑과 예왕은 아무 접점이 없는데 어떻게…….”

부수의는 냉소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말을 멈추었다. 자신은 줄곧 배랑을 ‘장군부’ 사람이라 여겼다. ‘장군부’를 주관하는 사람은 심신이니 그가 배랑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신의 대업을 방해해온 자는 사실 심묘였다. 배랑이 충성한 사람이 ‘장군부’가 아닌 ‘심묘’라면 말이 됐다. 배랑이 심묘의 사람이라면? 지금 그녀는 예왕비가 되었으며, 이전부터 예왕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예왕이 심묘를 봐서 배랑을 구해줄 수도 있었다. 배랑과 예왕도 관련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부수의는 사납게 일어났다. 생각할수록 배랑이 심묘의 사람이라는 의혹이 농후해졌다. 정왕부 감옥에 불을 지르고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은 채 안전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일 처리가 귀신 같은, 그 능력을 헤아릴 수 없는 예왕이라면 가능했다.

“제기랄!”

부수의가 탁자를 쳤다. 자신은 줄곧 예왕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 보낸 척후는 지금까지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발각되어 살해됐다고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그때, 바깥에서 급히 호위 하나가 들어왔다. 자신의 심복이었다. 그는 빠르게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공주부에서 황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제가 편지를 탁본했으니 보십시오.”

부수의는 얼른 편지를 받았다. 송신 공주는 문혜제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1년 내내 입궁도 잘하지 않는데 먼저 편지를 쓰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송신 공주와 예왕도 무언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예왕과 심묘가 떠나버렸고, 이후 송신 공주는 남다른 일을 하지 않아 답답해하던 중이었다.

부수의는 편지를 꺼내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의 표정은 절박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변해서는 놀라고 분노한 듯했다. 극도의 노기를 띤 채 그의 이목구비가 비틀렸다. 막료가 그를 보고 크게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부수의가 사납게 탁자 위 찻주전자를 엎어버렸다. 찻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막료와 심복 모두 놀랐다. 부수의는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종종 분노를 표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크게 드러낸 적은 처음이었다.

부수의는 “잘됐네.” 한마디를 하고는 그 편지를 매섭게 막료에게 던졌다. 얼른 받아 본 막료는 놀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송신 공주의 편지에는 예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송신 공주는 옥청 공주와 관계가 좋았기에 그녀가 옥청 공주의 자식인 사경행을 돌본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경행을 위해서라면 임안후부와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대량 예왕과 사경행이 매우 흡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물론 증좌는 없었다. 대량 예왕과 죽은 사람이 닮았다 하니, 황당했다. 그러나 부수의는 오랜 시간 공주부를 주시했기에 송신 공주의 말이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대량에서 온 예왕은 사경행이었다.

막료가 손으로 편지를 받쳐 들었다. 사경행이 예왕이라니, 명제는 사경행에게 박수갈채를 보낸 셈이었다. 임안후부에 있을 때 사경행이 대량과 사적으로 왕래했다면 대량은 명제를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전, 전하.”

막료가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온 얼굴에 놀라고 두려운 기색이 가득했다. 반면 부수의는 이미 냉정을 되찾은 표정이었으나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사경행이 죽지 않았다면 북부 변방에서 있었던 사가군의 일은 언젠가 반드시 들통날 것이다.”

사가군에는 황실 사람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사정의 심복이 사경행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사경행이 죽지 않았다면 그 내막을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이는 황실 사람이 임안후부에 부린 모든 술수를 사경행이 다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 명제 조공연회에 사경행이 참석한 것은 복수를 위해서인가 싶었다.

부수의는 책상을 짚었다. 곁에서 어찌할 줄 모르던 막료가 한마디 했다.

“공주마마께서 궁에 편지를 보냈으니 폐하께서 아시면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부수의가 그의 말을 잘랐다.

“소용없다. 사경행은 이미 명제를 떠났다. 부황은 대량의 세력이 두려울 테니 감히 그와 맞서지 못할 것이다. 사경행이 명제에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분쟁할 수 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늦었다.”

막료도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했다.

“어째서 더 일찍 편지하지 않으신 건지, 조금만 일찍 보내셨다면 지금처럼 속수무책은 아닐 텐데.”

부수의는 그를 쳐다보았다. 막료의 아둔함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에 막료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리석긴. 공주는 한참 전에 부황께 편지를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사경행에게 가로막혔을 테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노기를 억눌렀으나, 증오의 빛을 숨길 수 없었다.

“사경행이 잘도 깊이 숨어 있었구나.”

“장군부는 어찌할까요?”

부수의는 냉소했다.

“계속 주시하라. 사경행의 신분에 대해 장군부가 정말 아는 게 없는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것인지 봐야겠다.”

* * *

장군부 사람들은 정왕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심신은 군정이 된 후 직접 군대를 인솔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전처럼 매일 병부에 갈 이유도 없어졌다.

“차라리 폐하께 소춘성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건 어때요? 적어도 소춘성에 있으면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거예요.”

나설안은 원치 않게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는 것에 질려 탄식했다. 그 말에 심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우리를 정경성에 남긴 것은 우리의 움직임을 방비하려는 거니 소춘성에 가게 두지 않을 거요. 정경성에 남겨 교교를 견제할 바둑돌로 쓰는 게 좋을 테니까.”

나설안은 심신의 말이 의아했다. 무언가 암시하는 듯했다. 말뜻을 명확히 하려 들 때 심신이 탄식했다.

“게다가 나담의 소식도 없으니 장인어른과 처남을 볼 면목이 없소.”

나담의 이야기에 나설안은 머리가 아팠다.

“그건 그래요. 교교에게 편지를 보내긴 했어요. 경행의 수하가 빠르고, 이쪽도 오가는 시간이 있으니 좀 걸리기야 하겠지만 어째서 지금까지도 소식을 알 수 없을까요. 불안하네요.”

심묘가 대량으로 갈 때 나담은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 심묘가 자신을 대량으로 데려가지 않아 화가 나서 배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담은 제멋대로 행동했기에 사람들은 어쩌지 못했다. 심묘를 배웅하고 돌아오니 저녁이었다. 나담의 여종이 그녀가 이미 잠들었다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도 나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나설안이 나담을 찾자 나담의 여종이 손에 편지 한 통을 든 채 휘청휘청 걸어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나담이 심묘를 쫓아 의식주가 풍요하고 시정(市井)이 붐비는 대량에 간다고 편지를 남긴 것이다.

모두 나담의 담력이 크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클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경성에 올 때도 몰래 오긴 했으나 그때는 그래도 같은 명제 안에서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일이었다. 따르는 사람도 거의 다 예왕의 사람인데 나담은 감히 생소한 이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놀란 나설안이 서둘러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하루가 지난 후였다. 예왕 대열은 서둘러 이동하고 있을 테니 보낸 사람이 언제 그들과 만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달 넘게 소식을 받지 못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나설안과 심신은 이 일로 걱정이 가득했다.

“편지가 도착하면 경행이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나담을 돌려보낼 거예요.”

* * *

장군부에서 자기 때문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음을 나담은 알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다른 데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나담은 예왕부 군인 무리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나씨 가문 사람이었고 덕분에 남장도 그럴듯하게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여자인 걸 들키지 않고 씩씩하게 행군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부모가 이 일을 알게 되면 그녀의 다리를 분질러놓았을 테지만 본인은 대량으로 간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담은 첫날 저녁부터 매일 밤 고통을 겪었다. 심묘에게야 당연히 가옥이 준비되었으나 군인들은 열 몇 명씩 무리를 지어 한방에서 자야 했다. 몇 명은 침상, 몇 명은 바닥, 심지어 몇 명은 의자나 탁자에 누워 잤다. 나담은 잠자리를 가리지 않았기에 침상이든 탁자든 의자든 바닥이든 상관없었으나 낯선 남자들과 함께 자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잠꼬대에다 각종 냄새까지 더해지니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시로 발이 몸에 올라와 죽기보다 괴로웠다.

나담이 가장 무서운 것은 목욕이었다. 강이 보이면 무작정 달려가 씻는 군인들처럼 씻을 수는 없었다. 몇 번 밀려 들어갈 뻔했던 나담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결국 그녀는 몸에 매우 추한 흉터가 있어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다고 했다. 군인들은 그녀가 예민하다고 느꼈지만 씻기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량에 갈 때까지 계속 씻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그녀는 내심 고민했다.

대량 마차 대열이 오늘 묵는 곳 근처 농가 뒤편에는 온천이 있었다. 온천물이 맑아 군인들은 앞다투어 물에 들어갔으나 나담은 당연히 가지 않았다. 그러나 달이 높이 뜨고 보는 사람이 없자 그녀는 옷가지를 껴안고 몰래 더듬거리며 밖을 나섰다.

나담은 온천 언저리에서 주변을 살폈다. 깊은 밤, 모두 깊이 잠들었고 간이 변소도 있으니 한밤중 멀리 있는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을 터였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목욕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지금까지는 늘 사람이 없는 밤을 틈타 숨 가쁘게 씻었으니까.

나담은 하늘 위 달을 바라보았다.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장군부로 돌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스스로가 장했다. 다행히 장군부 사람이 쫓아오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쫓아와도 돌아가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 된 이상 심묘와 이야기해볼까 싶기도 했다. 심묘의 입은 칼 같으나 마음은 두부 같아 여기까지 따라온 이상 그녀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묘의 방에서 잘 수 있고, 몰래 목욕하느라 곤란한 일은 없지 않을까.

그때 멀리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는 것 같았다. 놀란 나담은 어찌할 바 몰랐으나 그렇다고 계속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신발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담은 바위 쪽에 벗어둔 의복을 껴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담은 수영할 줄 알지만, 오랫동안 물속에서 잠수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신발 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멈춘 후 오래도록 다시 나지 않았다. 나담은 점차 숨을 참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지금 짧은 상의만 입고 있어서 물에서 나오면 자신의 순결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고집스러운 나가의 피를 이어받은 나담은 죽을힘을 다해 물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곧 눈앞이 하얗고 머리가 멍해져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죽는다니, 대량도 못 가고 목욕하다 그대로 빠져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애석했다.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수 실력이 뛰어나군요. 그렇지만 그대로 버티면 질식사할 거요.”

나담은 더 참지 못하고 사납게 수면으로 솟구쳐 올랐다. 나담은 머리만 물 위로 내놓고 몸은 온천수 아래 숨겼다. 다행히 안개가 끼어 자신의 몸은 분명히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창피해 죽었을 텐데, 요행히 그것은 피했다.

“쯧, 난 당신이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나담은 그 사람을 성난 눈으로 쏘아보았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담은 당황했다.

“고, 고 의원.”

등롱을 든 채 물가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나담을 보는 남자는 고양이었다. 흥에 겨운 듯 그는 한겨울임에도 부채를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한가하고 나태한 자태에 나담은 언짢아졌다.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당황한 나담의 물음에 고양은 웃음을 머금고 웃기만 했다. 나담은 의아했다. 그는 태의인데, 어째서 정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왔을까. 잠시 후 나담은 그가 외진 곳으로 왕진을 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고 의원, 이리 궁벽한 곳까지 왕진을 오갈 줄은 몰랐어요. 녹봉이 아주 적은가 봐요. 고생하시네요.”

나담은 동정을 숨길 수 없었다. 고양은 나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오.”

나담이 그를 보았다.

“그럼 왜 이곳에?”

고양 역시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럼 당신은 왜 이곳에?”

나담은 당당히 말했다.

“난 심묘의 혼수 사촌이에요. 심묘와 함께 대량에 갈 거예요.”

고양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자신이 혼수라니, 참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오, 얼마 전 장군부에서 보낸 듯한 편지를 가지고 예왕비마마를 찾는 사람을 보았소. 예왕비마마가 어디 계신지 모른다며 내게 길을 묻더군.”

놀란 나담이 외쳤다.

“당신, 설마 심묘를 만나게 한 거예요?”

고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그 사람이 피곤해 보여 충분히 휴식한 후 가라고 했소.”

나담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고양에게 당부했다. 목소리와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역력했다.

“고 의원, 절대 그 사람과 심묘가 만나게 하지 말아요.”

“어째서?”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에요. 날 모함하려 하니 절대 안 돼요.”

고양이 웃었다.

“당신을 모함한다고? 당신이 예왕부 대열에 섞여 대량에 간다는 모함을?”

“당신, 당신…….”

나담은 연이어 몇 번 ‘당신’이라 더듬댈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고양이 고민했다.

“어쩌지. 내가 예왕 전하께 말씀드리면 당신은 내일 정경성으로 돌려보내질 거요.”

“안 돼요!”

한 달 동안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했는데 그 고생이 무용지물이 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담이 결심한 듯 고양을 바라보았다.

“말해봐요. 어떻게 해야 내 비밀을 지켜줄 거죠?”

“당신이 일찍 이 말을 했다면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나담은 고양이 줄곧 이 말을 기다린 듯한 기분이 들어 언짢았지만, 대량으로 가는 게 더 중요했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어요?”

나담이 묻자 고양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저 나와요.”

나담은 그제야 자신의 꼴을 기억했다. 맨살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충분히 추태를 보였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두 뺨이 단시간에 붉어졌다. 다행히도 어두운 주변 탓에 고양은 그녀의 뺨을 보지 못했다.

“내 옷은 전부 젖어서 나갈 방법이 없어요. 내 대신 옷을 찾아봐요.”

나담은 발각될까 두려워 의복을 껴안고 잠수했기에 옷이 전부 젖어버렸다. 잠시 생각하던 고양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담이 대경실색했다.

“뭐 하는 거예요?”

옷을 벗은 고양이 침착하게 그녀에게 건넸다.

“당신에게 옷을 빌려줄 뿐인데, 무슨 생각을 한 거요?”

“돌아서요.”

귀까지 빨개진 나담은 오늘 유달리 고양이 꼴 보기 싫었다. 고양이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볼 것도 없으면서.”

그러나 나담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물속에서 나온 나담은 바위 뒤로 숨어 빠르게 고양의 옷을 걸쳤다. 당연히 품이 커서 맞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에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옷을 다 입은 나담은 바위 뒤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돌아서도 돼요.”

고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아섰다.

“조건이 무엇인지 말해봐요.”

나담의 말에 고양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잠은 어찌 잔 거요?”

“모두와 함께 잤어요.”

나담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앞으로 내 방에서 자요.”

고양의 권유에 나담이 분노했다.

“뭐라고요? 남녀는 함께 잘 수 없어요.”

“당신이 여자요?”

화를 내는 나담을 보며 고양이 웃었다.

“흥,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남자는 아니지.”

나담이 즉시 반박했다. 고양은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유유히 말했다.

“그 편지를 지닌 사람은 아직 내 거처에 있소.”

“잘게요, 잔다구요. 바로 자러 갈게요.”

고양의 협박 아닌 협박에 나담이 얼른 말했다. 고양이 부채를 흔들며 걷자 나담이 뒤를 따랐다. 오늘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이전에는 훨씬 수월하게 괴롭힐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본성이 이제야 드러난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 * *

심묘는 매일 긴 거리를 이동했고, 3개월 후 마침내 대량의 영토를 밟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년은 걸렸을 거리였으나 사경행의 대열은 시간을 절반이나 단축해 수도에 도착했다.

전생에서도 심묘는 대량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에게 대량은 매우 풍요로운 국가로 각인돼 있었다. 수도인 농서성은 더 할 터였다. 부명은 자신에게 농서성이 얼마나 번성한지, 책에 나온 것처럼 정말 태평성세인지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부명과 완유는 먼지가 되었으나 지금 자신은 부명의 꿈을 품고 대량의 농서성에 발을 디뎠다.

심묘는 이미 옷을 바꿔 입고 있었다. 사경행은 특별히 그녀를 위해, 친왕비의 지위에 걸맞은 의상을 준비했다. 마차 대열이 농서성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수비군은 사경행을 알아보고 통과를 허가했다. 성대한 마차 무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예왕 전하께서 왕비마마를 데리고 돌아오셨다!”

심묘는 두근거렸다. 사경행이 명제에서 혼인한 걸 백성들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는 걸 보아 사경행이 혼사 얘기를 이미 대량에 전한 듯했다. 그는 영락제도 이 혼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으나 자신은 믿지 않았었다. 그때 마차 발이 들어 올려졌다. 사경행이었다.

“농서성의 경치를 보고 싶지 않아?”

그는 가면을 벗고 있었다. 대량에서는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명제에 있을 때와 표정부터 달랐다. 심묘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농서성의 경치는 정경성과 달랐다. 정경성은 번화했으나 부귀한 가문이 있는 쪽만 그랬다. 술집이 비일비재해도 보통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농서성은 달랐다. 백성이 입은 옷의 재질이 모두 좋으며 그들의 표정과 자태 모두 건강해 보였다. 게다가 거리를 활보하는 모든 행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대량 백성은 안정된 생활을 한다더니 과연 세간의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점과 식당 역시 크고 훌륭해 보였다. 전생에서 진국은 가보았지만, 진국에서는 이처럼 동경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심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열심히 살펴보았다. 사경행은 그런 그녀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급할 거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널 데리고 돌아다닐 거야. 농서성은 작지 않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지 않았기에 가까운 곳에 있던 백성들은 호기심에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왕 전하께서 왕비마마께 잘하시네. 아주 총애하시나 봐.”

“어쩐지 그동안 폐하의 성지를 승낙하지 않으시더니 왕비마마께 특별한 감정이 있으셨나 봐.”

“왕비마마는 선녀처럼 아름다우시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오래지 않아 소세(@왕)자가 생길 테지.”

순간 심묘의 얼굴이 붉어졌다. 대량 백성은 호의를 품은 듯 사경행과 자신의 혼사를 축하하고 칭찬했다. 여태 자신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여겼었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대고,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일생을 망쳐도 거기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양 태연자약하다고. 그러니 당연히 사경행과 혼인한 자신을 대량 백성들이 비난할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은 명제 사람이니까. 그러나 예상외로 칭찬과 축하가 쏟아지자 묘한 감동에 젖고 말았다.

대열 뒤편에서 계우서가 고양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환영 뒤에 3형의 노력이 숨어 있지. 형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퍼트렸잖아.”

“역시 영웅은 미인의 관문을 넘기 어려워.”

고양은 부채를 흔들며 길게 탄식했다.

“왜 갑자기 그래?”

“폐하께서 진노하셨을 거야. 게다가 몇몇 가문 소저는 3형을 사모하고 있으니 형수를 귀찮게 할 거고.”

“걱정할 게 뭐야. 심묘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붙었을 때 누가 고통스럽게 될진 아직 몰라. ……대량에 오니 명제에서의 시간이 조금 그리울 거 같네.”

“그러게 말이야.”

“가자구.”

계우서가 탄식하며 고양의 어깨를 토닥였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다운 정겨운 말투였다.

* * *

대량의 궁전은 아주 컸고 누각과 편전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황금색 유리 기와, 진홍색 담장. 황실은 금색과 붉은색을 좋아하는 듯했다.

대전. 한 남자가 용좌에 앉아 있었다. 금으로 만든 보좌에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용 머리는 의자 등받이에 새겨 있으며 붉은색 보석 두 개가 박혀 있었다. 용 꼬리는 손잡이를 휘감고 있었고 꼬리 끝의 작은 비늘 조각은 진짜 같아서 용이 구름과 안개를 타고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태양이 지려고 하는데도 아직 촛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광명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 위엄 있는 뒷모습은 유난히 고독하고 적막해 보였다.

그때 신발 소리가 들렸다. 긴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느릿느릿 용좌로 다가섰다.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기를 띤 채 입을 열었다.

“폐하, 신첩과 한마디도 안 하시고 또 혼자 이곳에 앉아 계시는군요.”

남자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온 사람을 맞이했다.

“황후군.”

현덕 황후가 살짝 웃었다.

“폐하, 무슨 일로 번뇌하십니까?”

영락제가 이마를 짚었다.

“경행이 오늘 돌아왔네. 명제 여인을 데리고 왔지. 수차례 그 여인과 왕래를 끊으라 말했거늘 듣는 둥 마는 둥 했지. 끝내 그 여인과 혼인해 대량으로 데려왔소. 그것도 정비로.”

“폐하, 예왕비를 원치 않으시는군요.”

현덕 황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뿌리가 우리와 같지 않으면 마음도 반드시 다른 법이오.”

“폐하께서 예왕비를 싫어하셔도 경행은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릿길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 예왕비를 데리고 함께 오지 않았을 테지요. 빙례를 99개나 준비하지도 않았을 거고, 천하 백성에게 좋은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을 겁니다. 더욱이 폐하를 거역하지도 않았을 거구요.”

“아름다운 용모로 아첨한 걸 테지.”

영락제는 현덕 황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노기를 억누르느라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예왕비는 대량 사람이 아니니 대량에 충성하지 않을 게 당연했다.

현덕 황후가 위로했다.

“예왕비가 남보다 특출한 점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경행은 생각이 깊은 아이입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위해 많은 미녀를 골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더니 지금 예왕비를 아주 총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폐하, 경행을 한번 믿어주실 수 없는지요?”

“짐은 경행을 믿소. 다만 예왕비를 안 믿는 거요.”

“하지만 폐하께서도 방법은 없으시잖습니까. 아닌가요?”

“황후는 짐이 무능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요?”

영락제의 대꾸에는 불만이 넘쳐흘렀다. 현덕 황후는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경행에게 모질게 마음을 쓰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경행이 제멋대로 굴고 거리낌이 없는 거지요. 일을 저지른 후 보고한 건 폐하께서 분노하셔도 정말 자신을 처벌하진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영락제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러나 시간이 없소. 짐도 경행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고, 그 아이의 혼사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으나 그 여인은 신분이 너무 특수하오. 경행이 그녀의 말을 믿어 장래 국세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소. 짐은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걸 절대 윤허할 수 없소. 강산 대업을 위해 짐은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고,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도 있소.”

현덕 황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두 사람을 입궁시킬 것이오. 짐이 경행의 마음을 미혹한 예왕비를 직접 봐야겠소. 그러면서 경행에게 자기 신분을 잊지 말라, 명제의 인연 때문에 본분을 잊지 말라 일깨울 거요. 일이 이렇게 됐지만 짐은 경행이 측비를 얻도록 할 수도 있지.”

영락제는 긴 계단을 내려와 조용한 대전을 걸어 나갔다. 현덕 황후는 제자리에 서서 근심 어린 시선으로 그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곧 탄식하며 그를 따라 나갔다.

대량에는 친왕이 한 명뿐이었다. 바로 영락제의 친동생 예왕이었다. 예왕의 성장 과정은 매우 신비했다.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예왕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나이부터 고인(高人,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는 군자)을 따라 곳곳을 돌아다닌 것이 그 까닭이라고 했다. 심지어 영락제를 가장 오래 따른 공공도 예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예왕이 농서성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성들은 제단 위에 서 있는 예왕의 당당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우며 우아하고 부귀해 보였다. 농서성의 여심은 예왕에게 쏠렸으나 워낙 그가 갑작스럽게 등장했으니 다들 그가 신분을 사칭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황실은 삼엄하고 냉혹하니 사칭을 용납할 리 없었다. 더구나 예왕의 얼굴은 세상을 떠난 황태후를 닮았고, 영락제와도 비슷했다. 대량 황실 사람다운 외양과 풍채였다.

예왕은 친왕 신분을 회복하자마자 바로 조회에 참석했다. 조정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이를 반대했다. 대량의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예왕이 조정 큰일을 논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행패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입을 모았다. 분노한 영락제는 소란을 피우는 신하 몇 명을 본보기로 삼아 처벌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 대부분이 반대했으니 그들 모두를 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예왕이 조정에서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여러 개 해결하자 반대하는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다. 조정 일을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문제를 척척 해결하니 신하들도 그에게 특출난 능력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대량 백성은 모두 예왕을 떠받들었다. 백성들은 그를 잘생기고 성격 좋고 능력 좋은 청년으로 여겼다. 게다가 은자가 아주 많다는 것이 가장 우호적인 요인이었다. 예왕부는 황궁처럼 화려했던 것이다. 영락제는 명군이면서 동시에 동생에게 매우 너그러운 형이었다. 그는 예왕부가 황궁과 비슷한 수준으로 단장했음을 알았지만 조금도 책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가는 백성들은 가끔 예왕부 대문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어느 댁 규수가 운이 좋아 예왕의 비가 될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녀가 궁중 비빈보다 좋은 삶을 누릴 것이라고 늘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 부는 오늘 명제 아가씨를 주모로 맞이했다. 심묘가 예왕부에 발을 들여놓자, 군복을 입은 호위 무리가 똑바로 서서 그녀에게 경례했다.

“왕비마마, 환영합니다.”

사경행이 심묘의 어깨를 감싸고 들어가며 사람들을 불렀다.

“물건을 들여라. 신방 준비는 잘 됐느냐?”

“전하, 이미 다 되었습니다.”

안쪽에서 50대로 보이는 집사가 달려왔다. 인자하게 생긴 그가 서둘러 심묘에게 인사했다.

“왕비마마,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수고했다.”

사경행의 격려에 집사가 웃었다.

“아닙니다, 제 소임을 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무탈히 돌아오셔서 아주 기쁩니다.”

집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심묘를 관찰했다. 자신을 살펴보고 있단 걸 알았지만 심묘는 그의 소박하고 정직한 눈빛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집사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냉소적인 사경행이 좋은 소리를 할 리 없었다. 심묘는 집사를 보며 살짝 웃었다. 집사는 놀라고 기쁜 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경행이 불만스럽다는 듯 심묘를 끌어당겼다.

“보지 마.”

집사가 말한 준비가 잘된 신방에 도착하자,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침상은 일고여덟 명이 잘 수 있을 정도로 컸고, 푹신한 깔개와 이불 모두 화려한 붉은색이었다. 신방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벽에 춘화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희미한 등롱, 난로, 훈향까지 준비돼 있었다.

“다른 곳을 찾아서 자야겠어요.”

“마마, 왜 그러십니까? 부족한 점을 말씀하시면 고치겠습니다.”

심묘가 당황해하자 집사가 물었다. 사경행이 집사를 힐끗 보았다.

“벽에 저건 뭐지? 뜯어.”

집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고집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겁니다. 전하와 마마께서는 성혼의 예를 치러야 합니다. 두 분, 아직 신방에 들지 않았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오랫동안 찾아 걸어둔 겁니다.”

심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집사는 너무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수줍어하는 어린 아가씨는 아니지만 이렇게 숨김없는 말은 부끄러웠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경행이 살기등등한 시선으로 집사를 주시했다.

“당숙, 고맙네! 그러나 가르칠 필요는 없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사경행이 이를 갈았다. 당숙은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심묘는 서둘러 문을 나섰다. 더는 들어줄 수 없는 대화였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 시간이 지나갔다. 심묘는 대량에 처음 왔으나 여린 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빼어난 곳에서 뛰어난 인물이 난다는 말처럼 대량은 트집 잡을 게 없었다. 예왕부 하인들 역시 매우 공손해 시중에 미흡한 점이 없었지만, 자신은 아직 ‘왕비마마’ 소리가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당숙은 특별히 명제 사람의 입맛을 고려해 몇 가지 담백한 요리를 만들었다. 사경행은 예왕부에 오자마자 외출했다. 그는 매우 바빴다. 당연했다. 명제에 있을 때와 달리 사경행은 대량의 정무로 바쁜 ‘예왕’인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심묘는 세수를 한 후 신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예왕부는 이 신방 외에 자신이 지낼 만한 방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경칩과 곡우가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백로와 상강도 승진했다. 경칩이 심묘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농서성에 오기 전에는 낯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까탈스럽게 굴까 두려웠어요. 그런데 안심이네요. 예왕부 사람들이 아가씨를 아주 깍듯하게 모시니까요. 전하께서 잘 말씀해주셨나 봐요.”

“아직 아가씨라 불러? 마마라고 해야지.”

곡우의 말에 경칩이 얼른 바꿔 말했다.

“맞다, 맞아, 마마. 모두 대량이 좋다고 말하던데 과연 명성이 헛되지 않았어요. 저도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심묘가 그녀를 놀렸다.

“정경성은 나빴어? 어째서 이곳을 더 좋아하는 거야?”

“나쁜 게 아니라, 이곳 사람이 마마께 더 잘하는 것 같아서요. 마마는 예왕비시니 장래 더 좋아질 거예요.”

심묘는 실소했다. 명제에 있을 때 심부 이방과 삼방은 못된 생각을 품고, 심 노부인은 더욱 대방에 호의가 없어서 자신과 가족들의 처지는 위태로웠다. 여종들 역시 당연히 그 생활에 어려워했다. 게다가 자신이 머저리라는 소문이 돌자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반면 대량은 달랐다. 자신은 예왕이 총애하는 예왕비이니 주위 사람들이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이 좋은 건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나쁜 기억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갈수록 마냥 좋아질 거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명제가 어떻게 나올지는 둘째 치더라도 사경행이 계획한 일부터 간단하지 않을 터였다. 대량의 위기는 명제보다 작지 않을 것이었다. 더 복잡하고 위험할 게 뻔했다. 중도에 그만둘 수 없을 테니 무리해서라도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늘은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웠다.

“전하를 뵙습니다.”

경칩과 곡우의 인사에 심묘가 고개를 들었다. 사경행의 눈짓에 경칩과 곡우는 얼른 물러났다.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심묘가 머리를 빗는 걸 기다렸다.

“좀 익숙해졌느냐?”

“별문제 없어요. 과연 명성이 헛되어 퍼진 게 아니네요.”

사경행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뗐다.

“하지만 좀 경계해야 해.”

심묘는 의심스러웠다.

“무슨 일을 저지른 거예요?”

“폐하께서 내일 너와 내게 입궁하라 부르셨어. 폐하께서는 성품이 완고하고 엄격해. 이번 혼사에 큰 불만을 품으셨으니 아마 너를 위협할 거야.”

심묘가 그를 흘겨보았다.

“역시 당신은 몰래 일을 저질렀네요. 내 부모님께는 폐하께서 허락했다 속였으면서.”

사경행이 웃었다.

“잠깐일 뿐이야. 폐하께서 불만스러워하신대도 뭐 어때? 천하에 네게 불만 있는 사람은 많아. 명제에도 많았지. 너는 그들을…….”

그는 목을 베는 시늉을 하고 축 늘어졌다.

“처리하지 않았어?”

그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심묘가 웃었다.

“당신, 지금 무언가 암시하는 거예요?”

“아니, 우리 사가는 명제 황실과는 달라. 골육상잔은 하지 않아.”

“당신들에게 정과 의리가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네요.”

“내 말을 못 믿겠어?”

사경행의 물음에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실은 무정해요. 지금이야 정말로 친밀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이익에 대한 갈등이 없어서예요. 처지가 달라지는 순간, 쟁탈하든가 방비하든가 어쨌든 손을 쓸 거예요. 그때가 되면 형제라는 허울만 남을 테고요.”

그녀는 평온히 말했으나 말 사이사이 싫어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사경행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심묘를 잠시 주시했다.

“왜 그렇게 봐요?”

심묘가 그 시선에 불편해하자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젓고 탄식했다.

“황실에도 좋은 감정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네.”

심묘는 입술을 오므리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믿는다고 말하기엔 전생에 너무 많은 일을 보고 겪었다. 이 세상 여인 대다수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팔자가 사나워졌다. 미 부인과 자신이 반평생 싸운 이유는 한 남자의 총애를 다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궁중 남자들은 달랐다. 자신은 소첩을 매우 아끼던 황자가 그 소첩을 이용해 능력 있는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어려서부터 함께하며 참고 견디며 보전을 꾀한 아내를 버리고 대신의 딸을 아내로 삼은 걸 본 적도 있었다. 서로의 세력 간 균형을 꾀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마음을 주고받은 아내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꼴이었다.

그런 남자들이 형제의 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형제끼리, 부자끼리 칼을 겨누는 일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황실 혈육의 정을 믿지 않았다. 그런 정이 정말로 있을지도 모르지만, 없는 셈 치는 게 훨씬 더 안전했다.

사경행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화제를 바꿨다.

“앞으로 너도 알게 될 거야. 폐하께서는 성군이셔. 너와 친해지려고 하시지는 않겠지만.”

심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영락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사경행뿐일 터였다.

“설령 널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으니 감히 널 건드릴 사람은 없어. 황후마마는 좋은 분이시니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기회가 있다면 많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심묘는 사경행이 자신에게 일을 넘겨주는 것 같았다.

“내일 당신은 가지 않나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리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왜, 혼자서 갈까 봐 겁나? 함께 갈 거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반드시 날 따돌리고 너를 혼자 만날 궁리를 하고 계실 거야. 무슨 말을 하든 마음에 두지 마. 한 귀로 다 흘려버려.”

심묘는 잠시 침묵했다.

“알겠어요.”

사경행이 웃으며 턱을 괴고 그녀를 보았다.

“심교교.”

“왜요?”

그의 눈 속 웃음기가 넘쳤다. 좋은 뜻은 아닌 듯했다.

“농서성에 오고서부터 아주 얌전해졌네. 걱정하지 마. 부군은 널 버리지 않을 테니.”

심묘는 깊게 심호흡한 후 화장대를 정리했다.

“나 잘 건데, 당신은 언제 나갈 거예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가다니? 내 신방인데 내가 왜 나가야 하지?”

심묘는 눈을 크게 떴다. 사경행도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누웠다. 심묘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던가? 책에서 보면 부부인 척할 때 한 사람이 서재에서 자고 한 사람이 신방에서 잤다. 그런데 왜 사경행은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지……?

“그럼 내가 나가서 잘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심묘의 팔뚝이 잡혔다. 그녀는 침상 위로 쓰러졌다. 힘 있는 팔이 그녀를 감싸 품에 안았다. 심묘의 콧속으로 사경행의 살냄새가 스며들었다.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고, 호흡은 뜨거웠다. 그녀는 감히 고개를 들어 사경행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굳은 채로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사경행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두 달.”

“뭐라고요?”

심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한 그의 눈과 마주했다. 그의 눈은 심묘를 잡아먹을 듯 강렬했다. 심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경행이 그녀를 껴안고 나른하게 말했다.

“너에게 두 달의 시간을 주마. 두 달이 지나면 난 참지 않을 거야.”

심묘는 당황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사악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난 군자가 아니야. 지금까지도 좋은 사람은 아녔어.”

심묘가 사납게 일어났다.

“서재로 가서 잘래요.”

사경행이 그녀를 끌어당겨 붙잡았다.

“내가 밖에 가서 잘게.”

심묘는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장군부에서는 심신을 비롯한 가족이 있기에 사경행은 이처럼 자기 좋을 대로 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농서성에는 장군부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에게 거절할 방법도 없었다. 자신과 사경행은 부부였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할 수 있는 사이였다.

사경행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떠났다. 방에 남은 심묘는 가슴을 문질렀다. 미친 듯 뛰던 심장은 아직도 쿵쿵대고 있었다. 사경행은 대량에 온 후 더욱 제멋대로 굴었다. 조금도 꺼리지 않고 자신을 다 드러냈다. 명제에 있을 때 보인 그 행태가 자기를 억누른 것이라니 놀라웠다. 심묘는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지만 평범한 부부가 어떻게 사는지는 전혀 몰랐다. 전생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에는 어린아이처럼 아둔했다. 이 세상 부부는 어떻게 지내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한참 후에나 정신을 차린 심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쓰고 누웠다. 어떻게든 될 터였다. 노력하면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었다. 다른 일은 전생의 길을 의지하고, 이 일은 현생에서 더듬거리며 방법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순응하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 * *

심묘는 아침 일찍 사경행과 영락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했다. 첫 알현이기에 심묘는 친왕비 품계의 조복을 입었다. 그녀는 사경행이 나올 때 그의 모습에 놀라 입을 벌렸다. 대량과 명제의 조복은 당연히 달랐다. 명제는 세밀한 아름다움에 중점을 뒀다면 대량은 아주 화려했다. 사경행은 기린이 수놓인 자금색 조복을 입고 관모를 쓰고 있었다. 푸른 장화, 마노 허리띠는 사경행을 더더욱 위풍당당하게 만들었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심묘는 사경행과 함께 식사한 후 황궁으로 향했다. 어젯밤 일 때문에 사경행이 조금 불편했다. 사경행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일부러 그 얘기를 꺼냈다. 사경행은 대량에 와서 더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를 처음 만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던 심묘는 사경행의 익살 덕분에 한결 홀가분해졌다.

예왕부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궁문 시위가 사경행을 보고 즉시 통과를 허가했다. 곡우와 경칩은 심묘 뒤를 따라가며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녀들은 심묘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심묘는 대량 황궁의 궁녀와 태감들이 맡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흘깃흘깃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 대량 황실을 방문했으니 그들이 예왕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호의만 담긴 시선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자신에게 너그러우나, 궁의 사람들, 특히 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를 수 있었다. 사경행의 신분은 민감하니 앞다투어 예왕비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예왕의 체면에 직결될 뿐 아니라 명제 장군부의 품격도 대표했다. 그래서 심묘는 등을 더욱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고 장중한 분위기로 황후의 태도를 드러냈다. 사경행은 그런 심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른하게 웃던 그가 속삭였다.

“그리 긴장할 것 없어. 너 그러다 황후마마처럼 보이겠는데.”

심묘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계속 농담이나 하다니. 궁중에는 눈과 귀가 많으니 분명 영락제의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이런 사경행의 태도가 영락제의 귀에 들어가면 예왕비가 사람을 망치는 미인이라는 소문을 만들 수도 있었다. 자신은 공손하고 현명한 황후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국가에 재앙을 가져오는 요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사경행이 그녀의 손을 잡자 심묘는 황급히 벗어나려 했다.

“누가 보면…….”

“누가 보면 어때서? 내가 네 손을 잡는데 다른 사람의 동의가 필요해?”

사경행은 불만스러웠다. 심묘가 뭐라고 쏘아붙이려 할 때 둘은 편전에 도착했다. 문밖에 서 있던 뚱뚱한 태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예왕 전하, 평안하셨습니까? 폐하와 마마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는 제대로 예의를 갖추면서도 심묘에게는 인사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심묘를 앞으로 밀었다.

“등 공공, 내 애처네. 왜 인사를 하지 않는가?”

심묘는 사경행에게 다시 눈을 흘겼다. 등 공공은 주인인 영락제의 명령을 따르느라 자신을 일부러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사경행은 영락제의 의도를 일부러 들추어냈다. 오늘 그가 말다툼을 하러 온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등 공공의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심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뗐다.

“왕비마마시군요. 소신이 견식이 짧아 분별력이 없습니다. 왕비마마,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심묘는 사경행과 달리 온화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사경행이 등 공공을 힐끗 보았다.

“됐네. 폐하께서 내게 불만을 품으신 게 분명하군. 오늘 왕비가 날 설득하지 않았다면 폐하를 뵈러 오지 않았을 걸세.”

심묘는 입꼬리를 올려 웃는 사경행의 소매를 당겼다.

“뭐가 겁나? 넌 예왕부의 주모니 무엇도 두려워할 것 없어. 걱정하지 마. 누가 널 괴롭히면 부군이 책임지고 구해줄게.”

사경행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영리한 등 공공의 얼굴 위로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스칠 때 편전 안쪽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놀란 등 공공이 서둘러 두 사람을 안내했다.

“예왕 전하, 왕비마마, 저를 따라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심묘는 사경행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구름무늬가 새겨진 매끄러운 대리석 위로 부드러운 융단이 깔렸다. 심묘는 들어가면서 바로 고개를 숙였다. 처음 황제를 알현할 때 황제의 명이 없으면 고개를 들지 않는 게 예법이었다. 영락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빈틈없이 행동했다.

“동생이 폐하를 뵙습니다.”

사경행이 무심하게 뱉었다. 방자한 사경행과 달리 심묘는 허리를 깊이 굽혀 인사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한참 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네가 심묘인가? 고개를 들라.”

심묘가 고개를 들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남자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서른 살쯤 된 것 같았다. 위로 올라간 눈썹, 별 같은 눈, 높은 코와 얇은 입술. 사경행과 꽤 닮은 이목구비였다. 사경행은 날카로운 표정과 아름다운 외모, 용맹한 기개가 잘 융합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귀공자처럼 여유로웠다. 반면 영락제는 오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온유한 기질은 보이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사경행에 비해 더욱 강직해 보였다. 그러나 한기를 띤 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은 형제지간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 역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 형제는 모습은 둘 다 우아하고 부귀했지만, 기질은 아주 다른 듯했다. 사경행은 일을 처리할 때 태만하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영락제는 아주 가혹하면서도 몹시 침착해 보였다. 심묘는 명군 영락제의 젊고 단정한 외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의아했다. 자신이 생각한 백발노인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심묘가 영락제를 관찰할 때 영락제도 그녀를 관찰했다. 영락제의 시선은 날카로워 위압감을 주었다. 얼굴도 차가워서 곧 노기를 드러낼 것 같았다. 평범한 아가씨가 그와 마주한다면 그 시선에 놀라 울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심묘는 평범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눈빛에 익숙했다. 부수의는 지금의 영락제보다도 차가운 얼굴을 보인 적이 아주 많았었다.

심묘가 평온함을 잃지 않자 본 영락제의 눈 속에 엄숙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경행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충분히 보셨습니까? 더 보시면 동생이 불편해질 겁니다.”

심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은 줄곧 사경행과 영락제의 관계가 어떤지 추측하려 했다. 하지만 사경행이 이렇게까지 예의 없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영락제는 사경행에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심묘는 두 형제가 명제 황실에 비해 진심으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황실은 규칙이 많고, 형제들은 각자 입장이 다르기에 서로 간에 정이 있기가 어려웠다. 황실 형제끼리 우호적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사경행은 오랫동안 명제에 있었는데 지금 영락제와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평범한 집안의 형제처럼 보였다.

“경행, 자꾸 그렇게 말하면 내가 화낼 것이다.”

웃음을 머금은 소리가 들렸다. 심묘의 시선이 영락제 곁의 여인에게 닿았다. 영락제의 아내, 대량의 황후, 현덕 황후였다. 황후는 영락제보다 젊어 보였다. 청자색 테두리에 금색 수를 놓은 조복을 입고 허리띠를 한 모습이 매우 소박하고 간결했다. 대부호 집안의 교양 있고 총명하며 조용한 여자인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영락제 곁에 앉아 부드럽게 웃으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사경행이 현덕 황후를 칭찬한 걸 기억했다. 까탈스러운 사경행이 칭찬하는 여인은 많지 않았다. 그런 그가 높게 평가했으니 분명 특별한 점이 있을 터였다. 사경행의 말을 떠나서 심묘 자신도 첫눈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현덕 황후의 우아하고 침착한 기질을 앞에 두니 조금 부끄러울 정도였다.

현덕 황후가 심묘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제의 심가 소저. 어떤 소저가 경행의 마음을 차지했나 궁금했는데, 경행의 안목이 뛰어나구려.”

심묘는 황송하다고 대답했다. 현덕 황후의 이어지는 칭찬에 영락제는 불만스러웠다. 그가 현덕 황후를 힐끗 보고 불만스러운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제와 대량의 규칙은 다르다. 대량에 시집왔으니 대량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사경행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규칙은 제가 당연히 가르쳐줄 겁니다. 폐하께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왕부 사람은 제가 다스리니 폐하는 폐하의 일을 다스리십시오.”

사경행이 심묘를 보호하며 영락제의 체면을 봐주지 않자, 영락제는 마침내 분통을 터트렸다.

“이렇게까지 네 아내를 보호하는 게냐? 짐의 한마디 말도 허락하지 않고? 짐이 이 자리를 네게 내어줄까?”

사경행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됐습니다. 그 자리에는 폐하께서 앉아 계십시오. 저는 흥미 없습니다. 제가 어렵게 혼인을 하고 왔는데 폐하 때문에 아내가 도망가면 어떻게 합니까? 일생 외롭게 지내라구요?”

심묘는 사경행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만약 사경행이 부수의와 형제였더라면, 부수의가 황위에 오른 후 사경행은 아마 열 번은 더 죽었을 것이었다. 영락제가 일어나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영락제는 몸을 돌려 떠났다. 하지만 사경행이 따라가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영락제가 노기등등하게 명했다.

“따라오너라.”

“황후마마, 교교를 부탁합니다.”

사경행이 유감스럽다는 듯 현덕 황후에게 부탁한 후 심묘를 안심시켰다.

“좀 이따 데리러 올게.”

사경행과 영락제가 자리를 비운 후, 현덕 황후가 웃으며 일어났다.

“대량 황궁에 와본 적 없으니 황궁을 구경하는 건 어떠한가?”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걷길 권하자 심묘는 얼른 승낙했다.

두 사람은 어화원을 걷기 시작했다. 현덕 황후는 사람이 좋아서, 보통의 황후 같지 않았다. 그녀는 심묘에게 농서성에 좀 익숙해졌는지 물었다. 친언니처럼 세심하게 돌봐주는 듯해 심묘의 마음도 평온해졌다.

“경행은 농서성에 돌아온 후, 계속 혼자였단다. 그 아이가 어느 댁 아가씨에게 마음을 두는 것을 보지 못했어. 그런데 명제에서 혼인해 돌아오다니. 놀라긴 했지만 안심했단다. 평생 짝을 찾지 못해 홀로 살까 걱정했거든.”

심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전하가 어찌 홀로 지내시겠습니까? 명제에 있을 때도 많은 아가씨가 전하를 흠모했으니 혼자일 리 없습니다.”

현덕 황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넌 그 아이가 누구에게 특별히 잘하는 것을 본 적 있느냐?”

이번에는 심묘도 당황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경행과 폐하가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그들 형제는 아주 닮았단다. 폐하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성격이 차가우시지. 경행은 부드러워 보이나 사실 차가운 사람이야. 그 아이도 자신의 신분을 알기에 원할 수 없는 물건은 원하지 않는 것이지.”

현덕 황후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경행과 너, 두 사람 사이에는 비밀이 없겠지.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생활을 숨겼단다. 신분이든 감정이든 숨기는 것이 점점 능숙해졌고 마음도 단단하게 변했지. 그건 황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야. 나는 줄곧 경행이 폐하처럼 평생을 보내면 손해라 생각했단다. 다행히 경행이 폐하보다 운이 좋아 널 만났구나.”

심묘는 현덕 황후와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지만, 사경행의 말대로 그녀가 아주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판단했다. 온 힘을 다해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상재청과 달리, 현덕 황후는 조용히 만물을 적시듯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다. 후궁 안 여인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언행이 진실했다. 그러나 사경행이 영락제보다 운이 좋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의아했다. 대답하기 곤란한 이야기라 심묘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폐하께서 당부하실 게 있어 경행을 데려가셨을 거야. 폐하는 경행이 매일 즐겁게 보내길 바라시지. 하지만 동시에 그 아이가 편안한 생활에 젖어 자기의 본분을 잊을까 걱정하고 계시기도 한단다. 폐하는 매우 힘들어하고 계시다. 폐하께서 널 상처 입혀도 네가 탓하지 않길 바란다.”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는데, 감히 제게 원망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염려 마시옵소서. 황후마마,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심묘가 미소를 띤 채 현덕 황후를 바라보자 그녀가 웃으며 탄식했다.

“처음 널 봤을 때, 나는 어쩐지 네가 익숙했다. 네가 똑똑한 것도 바로 알았단다. 하지만 똑똑한 사람도 편견으로 일을 바라보기도 하지. 네가 풀지 않으면 매듭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심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현덕 황후의 말속에는 분명 다른 뜻이 있었다.

“폐하는 경행을 매우 아끼시지. 너와 그 아이의 혼인에 동의하셨으나 썩 달가워하지는 않으신단다. 경행에게는 폐하의 결정에 저항할 방법이 있으나 너는 그렇지 못하지. 넌 명제의 아가씨니 대량에서 많은 제한을 받을 테다. 나는 네가 좋지만, 폐하의 아내로서 폐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구나. 네가 편안하길 바라마.”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현덕 황후가 심묘의 물음에 답하려 할 때,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오늘 흥이 돋아 어화원 산책을 오셨나요?”

화원의 작은 복도 쪽에서 궁인이 몇몇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가운데 여인은 붉은 자금색 치마를 입고 마노 옥화를 머리에 장식해서 여름 햇살보다 더 화려했다. 궁중 여인답게 매우 아름다웠으나 과하게 화려한 단장 때문인지 살짝 경박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매혹적으로 걸어와 현덕 황후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현덕 황후가 안중에 없다는 건방진 태도였다.

“오, 정비시구려.”

현덕 황후가 무심하게 인사를 받았다. 정비는 스물 남짓으로 보이는데, ‘비’라 불리다니. 가세가 혁혁하든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 같았다. 심묘는 정비가 현덕 황후보다 어리고 예쁘다는 것 외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정비의 기질은 현덕 황후보다 많이 모자라서 영락제가 총애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정비는 그제야 심묘가 있다는 데 신경을 쓰는 듯했다.

“이분은 어느 부의 부인이신지?”

심묘는 지금 부인 복장을 하고, 머리도 그에 걸맞게 올린 상태였다. 그래서 어린 얼굴이지만 소저로 여겨질 리 없었다.

“이분은 예왕 전하의 부인, 예왕비네.”

현덕 황후는 정비와 길게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간단히 소개했다. 순간 정비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의아스러운 듯 “예왕비?”라고 외친 후 심묘를 위아래로 관찰했다. 영락제의 날카롭고 자세히 살피는 시선과 현덕 황후의 호의 어린 시선과는 다른, 물건을 관찰하는 듯 무례한 시선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콧소리를 냈다.

“흠. 절세미인이라서 전하께서 혼인하고 오신 거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제 안목이 나쁜 건지 특별할 곳이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녀가 경박하게 웃었으나 심묘는 신중히 말을 아꼈다.

“정비가 특별함을 알아본 적은 거의 없지.”

현덕 황후의 안색이 조금 차가워졌다. 심묘는 조금 의아했다. 현덕 황후가 자신을 위해 나서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리고 현덕 황후의 얼굴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그녀가 냉혹한 표정을 짓자 영락제와 놀랍게도 닮은 모양이었다.

정비는 심묘를 보고 갑자기 웃었다. 현덕 황후의 비꼬는 말이 효과가 없는 것인지, 정비가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마와 예왕비마마가 함께 화원을 산책하다니 사이가 좋은가 봐요. 마마, 혹 예왕비마마에게 비밀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반드시 해야 하실 겝니다. 예왕비마마는 대량에 처음 와서 많은 일을 모를 테니까.”

심묘가 정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비 역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예왕 전하는 매일 바쁘실 테니 예왕비마마와 대량의 일을 이야기할 시간이 있겠어요? 아, 근래 제 넷째 여동생이 예왕 전하께서 언제 돌아오실지 물어봤어요. 곡을 한 곡 배웠는데 예왕 전하께서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란다구요.”

“정비.”

현덕 황후가 낮게 경고했다. 동시에 심묘는 정비가 왜 자신을 겨눴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명제에서도 사경행은 많은 아가씨들이 따랐다. 대량에서는 예왕의 신분까지 더해지니 사경행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예왕비인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여자들도 당연히 생겼을 터였다.

현덕 황후의 주의에도 정비는 심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고혹적으로 웃었다.

“예왕비마마, 언제 한번 제 넷째 동생을 부로 초청해주세요. 넷째는 친구와 교류하길 좋아하니 좋은 말동무가 되어드릴 겁니다. 자매가 많으면 예왕비마마께도 외롭지 않으실 테구요.”

후원에 많은 자매를 두라는 말에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냉담하게 넘기려는 순간 사경행이 자신에게 끼워준 경옥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묘가 미소 지었다.

“그건 안될 것 같습니다.”

정비는 당황했다. 현덕 황후도 멍하니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이런 말을 할 거라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전하께서 예왕부 모든 일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크게는 부에 있는 창고의 은자, 작게는 상가 매상, 여종과 호위 등 많은 일로 몹시 바빠서 당분간은 손님을 접대할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심묘는 온화하게 웃으며 조금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전하의 신임을 감히 헛되게 할 수 없습니다. 넷째 소저가 전하를 찾아가도 좋습니다만 저는 당분간 손님을 초청할 시간이 없답니다.”

정비는 말문이 막혔다. 심묘가 자신은 손님을 맞을 시간이 없다고 사양하고 있지만, 사실 자랑하는 것이었다. 예왕이 자신을 아낀다고 뽐내는 뜻이기도 했다. 총애하지 않으면 예왕부의 모든 일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예왕을 꽉 쥐고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심묘는 자신이 예왕부에서 지위가 높은 걸 자랑했다. 게다가 암암리에 자신은 일 때문에 바쁜데 정비의 넷째 동생은 종일 한가해 다른 집에 폐나 끼치니 어질고 정숙하지 않다고 비웃는 것이기도 했다. 현덕 황후가 입꼬리를 조금 올렸고, 정비는 분노로 얼굴이 파래졌다.

심묘는 평소 다른 사람과 적이 되지 않으려 했다. 더욱이 지금은 사람도 땅도 낯설어 상황을 잘 알지 못하니 더더욱 조심하려 했다. 그런데 정비가 먼저 자신을 건드렸다. 이번에 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장래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이 분명했다. 하늘이 준 기회이며 사경행이 뒤에서 지지해주는데 그냥 넘어간다면 바보였다.

“마음이 상냥한 여인은 다른 사람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긴다더군요. 정비마마께서 이렇게 저를 걱정해 함께할 자매를 찾아주시려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정비마마도 외로울 때가 있으실 테니 장래 자매를 찾아 입궁시키시지요. 그럼 정비마마도 나날을 더욱 즐거이 보내실 겁니다.”

격노한 정비는 숨 쉬는 것도 잊을 뻔했다. 정비는 심묘에게 자신의 넷째를 예왕부 후원의 ‘자매’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했고, 여기서 ‘자매’란 당연히 첩을 뜻했다. 이를 눈치챈 심묘는 정비에게 궁중에 몇 명 ‘자매’를 들이라고 한 것이었다. 정비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신이 지금 한창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도 매년 입궁하는 여인이 여럿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진귀한데 경국지색 ‘자매’가 늘어나는 것을 자처할 수 없었다. 예왕비의 입은 칼날을 품은 듯 예리했다.

“정비가 외로우셨구려. 내일 내가 폐하께 근래 썰렁하니 새로운 자매를 불러들이라고 말하겠네.”

현덕 황후가 미소 지으며 끼어들었다.

“외롭지 않아요. 전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정비는 다급하게 부정했다. 자신은 황후가 아니었다. 총애에 의지하는 후궁에게 총애가 나누어지는 것보다 무서운 일은 없었다. 심묘는 현덕 황후가 자신을 두둔해주기에 마음속으로 또 한번 감사를 표했다. 물론 현덕 황후가 말로만 위협하는 것일 테지만, 자신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정비마마, 거절하지 마세요. 저를 자상히 돌봐주셨으니, 저도 답례를 해야지요.”

심묘의 말은 정비가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었다.

“풉.”

멀지 않은 곳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영락제와 사경행이 언제 왔는지 화원 뒤쪽에 서 있었다. 나무 때문에 그들 두 사람이 온 것을 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락제의 얼굴은 냉담했다.

“예왕, 네 아내의 말솜씨가 좋구나.”

아무래도 불만스러운 듯했다. 방금 심묘와 현덕 황후가 일부러 정비를 놀리는 것을 들은 것이다. 정비가 억울해하며 영락제에게 달려갔다.

“폐하…….”

사경행이 걸어와 심묘의 머리를 토닥였다. 백호를 칭찬하듯 기쁜 기색이었다.

“교교는 정말 철들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볼 줄도 알고.”

그는 영락제를 힐끗 보았다.

“정비가 자매를 원하니 그 뜻을 들어주시지요. 궁 안에 한가한 사람을 더 거둘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당황한 정비가 입술을 깨물며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가련한 모양새였다. 심묘는 실소를 꾹 참았다. 정비는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휘둘렀는데, 머리가 없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황후와 자신이 작당하고 그녀를 괴롭힌 것 같은 모양이었다. 한편 심묘는 영락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왜 이런 여인을 총애하는지, 취향이 좋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언제부터 네가 짐의 일에 상관했느냐?”

“폐하의 비빈도 제 왕비에게 관여하지 않습니까?”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비를 보았다. 그는 준수하고 평소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궁중 여자들은 그를 좋아했으나, 한편으론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예리해 몸을 오싹하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정비, 그대는 내가 그대의 넷째 자매의 연주를 들을 거라 확신하느냐?”

정비가 몸서리쳤다. 평소 자신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래도 감히 자신을 건드려 문제를 자초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현덕 황후도 자신과는 말씨름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심묘와 예왕 때문에 이런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심묘의 말솜씨가 좋아도 자신에게는 그녀에게 죄를 씌워 벌할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예왕은 자신이 함부로 휘두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예왕이 막 농서성에 왔을 때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사람들은 장난스럽고 태만한 사경행의 모습을 보고 말썽꾸러기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대신들이 얕볼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실력을 드러내자 대신들은 늙은 쥐가 고양이를 보듯 예왕을 감히 건드리지 않았다. 자신의 부친도 이전부터 자신에게 예왕과는 절대 적이 되지 말라 경고했다. 영락제도 예왕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데 자신 같은 비빈은 더 말할 것도 없다면서.

정비가 간신히 웃었다.

“예왕 전하는 매우 바쁘신데 어디 넷째의 연주를 들을 시간이 있으시려구요. 신첩이 넷째를 잘 타이를 테니 예왕 전하께서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사경행이 웃으며 심묘의 어깨를 감쌌다.

“난 마음에 둘 시간도 없다. 왕비도 한가하지 않고. 정비 그대는 그렇게 시간이 남아 돌면 폐하의 걱정을 함께하는 게 마땅할 터인데, 아직도 아내의 본분을 잘 모르나 보군.”

정비는 입술을 깨물며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영락제의 안색은 가라앉아 있었다. 사경행이 자신의 눈앞에서 재차 자신의 비빈에게 치욕을 주니, 당연히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았겠으나, 지금은 사경행이 심묘를 위해 이렇게 행동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불쾌했다. 품속에 끌어안고 오냐오냐하는 모습이라니, 영락제가 차갑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왕비, 이것은 네 뜻이냐?”

심묘는 온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부군을 따를 뿐입니다.”

현덕 황후는 놀라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영락제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여러 번 예측을 넘어서고 있었다. 현덕 황후는 무언가 생각난 듯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락제는 침묵한 채 심묘를 오래 주시했다. 그의 시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심묘는 멍청한 척하려는 것인지,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다만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사경행이 심묘를 끌어당겼다.

“폐하,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니 함께 할 일이 많아서요.”

“짐과 한 말을 기억하거라.”

“음.”

영락제가 그를 붙잡았으나 사경행은 대답을 피했다. 영락제의 말을 마음에 둔 것 같지는 않았다. 심묘와 사경행 두 사람이 떠난 후 영락제는 현덕 황후와 정비를 상대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현덕 황후와 정비는 영락제가 분노한 것을 알기에 따라가지 않았다.

정비가 현덕 황후를 바라보았다.

“마마와 예왕비마마는 사이가 좋은가 봐요. 그녀를 두둔하시다니, 두 분이 일찍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여길 뻔했네요.”

“예왕비는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다. 총명하고 현명하니 당연히 사랑을 받는 거지.”

현덕 황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마마, 잊지 마세요. 예왕비마마는 명제 사람이에요. 명제 사람이 대량에 온 것인데,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마마, 괜한 이를 도우려다 위험을 자초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책망하시면 마마도 곤란해지실 거예요.”

“대량에 시집왔으면 대량 사람이지. 혹 정비는 예왕부도 의심하려는 거냐? 예왕비와 예왕은 부부니 한 몸이나 다름없다.”

오만방자한 정비였지만 말로 현덕 황후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정비는 냉소했다.

“마마는 예왕비마마를 매우 신임하시니 예왕비마마의 편에 서시겠네요.”

현덕 황후는 가부를 단언하지 않았다. 정비가 갑자기 웃었다.

“하지만 어쩌죠? 마마께서 지금은 예왕비마마를 도울 수 있어도 평생은 못 도와요. 예왕부에 여인이 한 명만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제 넷째 동생에게 기회가 없어도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거예요. 폐하께서는 예왕비마마를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현덕 황후는 정비를 쏘아보았다.

“예왕부의 일에 나와 너 두 사람은 손을 댈 수 없다. 예왕 전하가 생각이 있을 게다.”

“저도 감히 그럴 수 없는 것을 압니다. 마마께 한마디 충언 올리겠습니다. 마마는 보살이 아니에요. 선한 마음으로 누굴 도와주려면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보아야 해요. 마마의 오늘이, 예왕비마마의 내일이랍니다.”

정비가 웃었다. 기세를 되찾은 듯 득의양양하게 고개를 든 정비는 궁녀들을 데리고 떠났다. 현덕 황후 입가의 온화한 웃음기가 점점 가라앉았다. 그녀의 시선에 근심의 기색이 스쳤다.

* * *

예왕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심묘가 물었다.

“폐하와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조정의 자질구레한 일.”

자질구레한 일로 영락제가 사경행을 특별히 불러 단둘이 이야기할 리 없었다. 심묘는 오늘 일은 반드시 자신과 상관있는 일이라고 추측했다. 좀 전 영락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티를 노골적으로 냈다. 사경행이 자신을 중시하는 것도 탐탁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신분이 미묘해서 그럴 수도, 혹은 영락제에게 더 좋은 선택권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심묘가 말이 없자 사경행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오늘 다시 보았어. 그런 흉악한 모습 오랜만에 본 거 같아.”

“흉악하다구요?”

심묘가 반문하자 사경행이 탄식했다. 그는 회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명제 와룡사에서 널 봤을 때 잔혹한 술수에 얼마나 놀랐는지. 장래 어느 댁 공자가 재수 없어 저런 호랑이 같은 부인을 얻을까 생각했지.”

심묘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나랑 말싸움하고 싶은 거예요?”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야지. 이래야 우리 사가 사람이지.”

사경행이 농담으로 주의를 환기하자 심묘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영락제와 나눈 대화를 자신에게 숨겨 생긴 불만도 깨끗이 사라졌다.

“폐하와 당신이 한 말, 말하기 싫으면 말아요. 그보다 정비마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폐하는 마마를 매우 총애하시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녀는 한참 단어를 골랐다.

“무슨 특별한 점이 없는 것 같아요.”

사경행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정비가 심묘에게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고 했는데, 지금 심묘 역시 똑같이 돌려주고 있었다.

“정비는 고 장군의 적출 장녀야. 고 장군은…… 명제에서 장군부의 위치와 같아.”

심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비의 집안은 병권을 쥔 집안이었다. 그렇다면 영락제가 그녀에게 유달리 너그러운 것을 탓할 수 없었다.

“대량과 명제는 달라. 명제에는 무장이 별로 없어서 장군부와 임안후부가 국토의 반을 나눠 지켰지. 반면 대량은 문무의 비중이 엇비슷해. 편파적이지 않지. 그래서 무장도 여럿이고 병권이 한데 집중되기 어렵지. 하지만 그중 고 장군은 병사가 아주 많은 사람이야. 그래서…… 방자하지.”

사경행의 눈빛에 한기가 스쳤다.

“정비마마의 언행을 보니 고씨 세가가 어떤 태도일지 알 만하네요.”

후궁 여인은 자기 가족의 명성과 세력을 대표했다. 가족의 세력이 강할수록 믿는 곳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몰랐다. 단순히 총애에 기대서만은 무례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자신보다 후궁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배후에 장군부가 없었다면 부수의는 자신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미 부인이 아들 부성을 태자로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수완이 높고 절색인 것도 있지만 공훈을 쌓은 형제를 둔 덕이기도 했다. 미 부인을 떠올리자 심묘는 기분이 묘해졌다. 전생의 그녀는 자신이 진국에 갔을 때 나타났다. 지금은 자신은 대량에 있는데도 그녀가 여전히 나타날지 불안했다.

“맞아. 정비는 거만하고, 고가는 방자하지. 폐하도 고가를 억누르려는 마음은 있으시나 이는 천천히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지.”

사경행은 심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걸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상호 제약하여 균형을 이루게 할 수는 없어요?”

사경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가는 선황의 사람이야. 선황께서 남기신 사람은 무장 고가, 문신 엽가지. 양가를 제외하면 폐하에 의해 거의 정리되었어. 고가, 엽가는 기반이 아주 깊고 따르는 도당(徒黨)이 많아서 단숨에 뿌리 뽑으려면 황실도 맥이 상할 거야. 그래서 폐하도 성급히 처리하시지 않는 거야. 그들도 이 점을 매우 잘 알지. 믿는 데가 있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거야.”

심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선황은 사경행과 황제의 친아버지였다. 그런데 사경행이 왜 ‘부황’이라 부르지 않고 ‘선황’이라 부르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황제가 바뀌면 신하도 모두 바뀐다지만 영락제는 정통성 있는 황위 상속자였다. 그러니 선황의 사람인 고가, 엽가는 황제를 있는 힘을 다해 보좌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어째서 양가는 야심만만하고, 영락제는 그들을 억누르려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선황이 영락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건지, 고가와 엽가에게 검은 야심이 생긴 건지 심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순간 심묘는 이 상황이 우스워졌다. 명제에서 심가와 사가는 성실했는데 의심 많은 황실이 그 두 세가를 억누르려 했었다. 이와 반대로 대량은 간신이 날뛰는데 황실이 참고 견디고 있었다.

“황후마마는 어느 집안사람이에요?”

“가씨 세가 사람. 가씨 세가는 사관 출신이야.”

사경행의 답변에 심묘는 당황했다.

“사관은 권력이 작고 실권은 없어요. 폐하께서 사관 집안 아가씨와 혼인해 황후로 삼으셨으니 분명 황후마마를 매우 사랑하시나 보네요.”

사경행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왜 정비마마가 황후마마께 불경하게 행동하는 걸 그냥 두시는 건가요? 폐하께서 감히 그러지 못하게 막으신다면 정비도 별수 없이 얌전해질 텐데요.”

영락제가 황후를 총애하면 아무리 배후가 든든한 비빈이라 해도 감히 황후에게 무례를 저지르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비는 황후 앞에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영락제가 자신을 혼내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아는 모습이었다. 권세 없는 여자를 황후로 삼을 만큼 깊이 아끼면서도 막상 그녀를 감싸주지는 않는다니. 모순적이었다.

사경행이 담담히 웃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폐하는 나와 달라. 황후마마와 너도 다르지.”

심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래서 고가 넷째 소저가 당신을 사모하는 건가요?”

사경행이 멍해졌다가 바로 웃었다.

“뭐야, 너 질투하는 거야?”

“기이하네요. 고가가 조정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이 있다면 이미 딸 하나를 입궁시켰으니 목적을 달성했어요. 그런데 왜 또 딸을 황실에 보내려는 건가요? 게다가 당신에게? 당신은 예왕이지 황제가 아니에요.”

말을 마친 심묘는 당황했다. 사경행이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속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은 양손으로 심묘의 허리를 감싼 후 그녀의 어깨 위에 고개를 올리다시피 하며 끌어안았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기 머금은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곧 네게 내 비밀을 다 들키겠는데.”

비밀이라는 소리에 심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되짚어 보았다.

“당신, 내게 아직도 비밀이 있어요?”

“너도 내게 비밀이 있지 않아?”

심묘는 멈칫했다. 사경행이 손을 풀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린 채 시선은 단단히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심묘는 그 눈빛에 눌려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차라리 교환할까? 내 비밀과 네 비밀을 서로 밝히는 거야.”

심묘는 마음이 흔들렸으나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비밀이 있다 해도, 난 궁금하지 않아요.”

사경행은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너라면 곧 내 비밀을 알아낼 수 있겠지.”

심묘는 그의 눈을 피하려 했다. 사경행이 축 늘어졌다.

“알아서 내 비밀을 밝혀봐. 네 비밀은…… 넌 내가 아는 것 같아 모르는 것 같아?”

심묘는 순간 허둥거렸다. 자신에게는 전생이라는 비밀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솔직히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심구, 심신, 나설안 앞에서도 침묵을 유지했다. 아무리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 해도 이런 괴이한 일을 이야기하면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미쳤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몰랐다. 설령 그 이야기를 믿어준다 해도 그들이 자신을 책망할까 두렵기도 했다. 전생의 자신은 너무 아둔하고 연약해서 자식과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으니까.

사경행에게는 더더욱 밝히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서 자신이 부군인 부수의를 위해 전력을 다한 것을 사경행이 안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사경행이 원수를 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길 원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진 걸 바로 눈치챘다. 사경행의 시선이 깊어졌다. 낮게 탄식한 그는 그녀를 품에 껴안았다.

“위협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알리기 원치 않으면 나도 묻지 않으마. 하지만 날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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