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장
예왕부로 돌아온 후 사경행은 다시 외출했다. 그는 늘 일이 많았다. 그러나 심묘는 절대 캐묻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대량의 구조도 잘 몰랐다. 그러나 사경행이 고가와 엽가를 설명해주어서 대량과 명제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대량은 부유하고 강대해 태평성세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암류는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심지어 대량은 강대하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야심을 갖기 더 좋은 환경이었다.
영락제와 사경행이 부친에게 보이는 태도도 매우 기이했다. 많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고민하던 중 명제에서 사경행이 곳곳으로 어떤 물건을 찾던 게 떠올랐다. 심부 사당에 큰불이 났음에도 들어와 그것을 찾을 정도였으니 필시 귀중한 것일 터였다. 이후 예친왕부 밀실에서 고양과 함께 그것을 얻은 듯했으나 그 물건이 무엇인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병법과 관련된 것이라고 여겼으나 예친왕부 밀실에 그런 것을 두지 않았을 테니 도대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깊게 고민하던 심묘는 다른 일이 떠올랐다. 배랑이었다. 그는 사경행의 군대를 따라 대량에 왔다. 부수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함께 온 류형은 적절한 곳에 배치했지만, 대량에 와서 배랑과 마주한 적은 없었다. 배랑은 겸손하고 온화해 보이나 사실 자기가 남보다 한 수 위라 생각해 자만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류형 때문에 자신을 대신해 일 처리를 하다가 부수의의 의심을 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보호했으니 배랑에게 무엇을 더 해달라 요구할 다른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이에 심묘는 배랑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배랑의 방은 예왕부 동쪽 끝에 있었다. 예왕부 정도 되는 규모에서는 뜰 한두 개를 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랑에 대한 대우도 좋았다. 그러나 심묘가 머무는 곳에서 가장 멀었다.
심묘가 배랑의 방에 갔을 때 배랑은 뜰 안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의 곁에 푸른 옷을 입은 두 명의 시녀가 있었다. 꽃 같은 얼굴의 두 사람은 수시로 배랑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때때로 그를 바라보며 모종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심묘는 이 모습이 이상했다. 심묘는 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바라보며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배랑은 재학이 끝없어 부수의가 등극하자마자 국사가 되었다. 배랑은 준수하게 생겼고 늘 푸른색 옷을 입어 겸손하며 초탈한 모습이었다. 고아한 풍채였다. 조정 대신들은 그에 대한 부수의의 신임이 깊은 걸 알아 감히 그와 맞서지 않았다. 그러니 배랑은 명제에서 아주 명성이 높은 셈이었다.
부수의는 그를 대신의 딸과 짝지어주려고 했으나, 배랑이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부수의는 배랑이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불편해한다 여겨 그의 뜻을 존중해줬다. 심묘 자신도 진국에 인질로 가기 전까지는 배랑과 관계가 좋았던 터라 그에게 마음에 둔 특별한 아가씨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마, 신의 뜻은 거기에 있지 않나이다.”
자신의 물음에 배랑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배랑의 성격은 아주 냉정해서 부수의를 도와 일하는 방식 역시 철두철미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냉철한 사람처럼 보이니 여인과 감정을 나눌 여지도 없을 성싶었다. 전생에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배랑은 혼자였다. 사모하는 아가씨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었다.
그랬던 배랑이 지금 두 여자와 함께 있으니 심묘는 얼떨떨했다. 하지만 배랑은 광문당에 있을 때도 준수한 외모와 품위 있는 태도 덕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나이도 적절하니 여자들이 따를 만했다.
배랑의 곁에서 부채를 부쳐 벌레를 쫓아주던 시녀가 심묘를 보고 놀라며 인사했다.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다른 시녀도 얼른 인사했다. 배랑은 그제야 심묘를 발견했다. 심묘는 미소 지으며 다가가 두 사람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시녀가 난처하게 배랑을 바라보자 그가 손을 휘저었다. 심묘는 두 사람의 어여쁜 뒷모습을 바라보며 짓궂게 말을 건넸다.
“배 선생이 미인과 동무가 된 모습을 다 보네요.”
두 시녀의 눈빛에는 사모의 마음이 가득했다. 배랑이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의 그늘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 두 시녀는 예왕부에서 자신에게 보낸 사람이었다. 이전이라면 곁에 두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이곳은 명제가 아니었고, 그녀들은 자신의 하인이 아니었다. 예왕의 명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습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심묘를 보자 배랑은 또다시 마음이 시큰해졌다.
“선생이 날 따라 대량에 온 건 어쩔 도리가 없어서입니다.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류형의 일로 선생을 핍박해 선생은 부득이 날 도왔지요. 결국 고향까지 등지게 만든 셈이니 미안합니다. 떠나려면 떠나십시오.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돕겠습니다.”
배랑이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줄곧 당당했던 그녀가 자신에게 먼저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무언가 내려놓은 듯, 대단히 평온해 보였다. 류형을 볼모로 삼아 자신을 핍박할 때, 그녀가 자신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 적의인 듯했으나 단순히 적의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에 세심히 조사했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심묘는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 미묘함은 결국 손안에서 사라져버렸다. 잘된 일이라고 축하해야 할 텐데, 이토록 허무한 건 왜일지. 배랑은 혼란스러웠다.
심묘는 배랑을 바라보았다. 감개무량했다. 줄곧 배랑을 ‘자신에게 많은 빚을 진 사람’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사경행으로부터 배랑이 부수의의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후 사람이 자신인 걸 말하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을 때, 그 생각은 사라졌다. 부수의가 배반한 사람을 징벌하는 수완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상황에서도 배랑이 이쪽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니,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배랑을 증오해온 건 전생에 그가 시종일관 부수의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부수의가 자신의 가족을 처리할 때 그는 수수방관했고, 부명을 폐위할 때도 만류하지 않았고, 완유를 화친혼을 핑계로 멀리 보낼 때도 저지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돕고 싶은 정이 있어도 도우면 안 되는 사이가 있다. 하지만 배랑과 자신은 도우면 안 될 사이는 아니었는데, 그는 온정을 베푸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배랑은 부수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사이가 틀어져 아예 원수지간이 되었다. 다시는 부수의에게 의탁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전 불만들을 끌어안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복수는 스스로 해야 했다. 괜한 이유로 원망해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한편 배랑은 마음속의 실의를 누르고 심묘에게 물었다.
“마마는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당황한 심묘가 반문했다.
“저 말입니까?”
배랑의 시선이 기민했다. 둘도 없는 국사로 돌아간 듯했다.
“예왕부는 보이는 것처럼 견고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대량의 황실 안에는 조금의 변수가 존재할 거라 예상됩니다. 예왕부에 스스로 보호할 방법이 있어도, 마마의 길이 반드시 순조로운 건 아닙니다.”
심묘는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히 그래요. 선생의 말은…….”
“제게는 마마를 도와드릴 조그마한 힘이 있습니다.”
“힘?”
“세상을 다스려나갈 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니라 해도, 미력한 힘을 부릴 수는 있습니다. 류형과 저는 마마에게 의지해 대량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마마가 안정되어야 저희에게도 이득이 있곘지요.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저는 마마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예왕부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제가 대량 조정 일에 참여할 수 있다면, 마마를 위해 계책을 꾸민다면, 마마에게도 나쁠 얘기는 아닐 겁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심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 선생, 생각을 잘하세요. 선생은 내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더는 당신의 인생을 나와 함께 묶을 필요가 없어요. 내게 의지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능력에 기대도 잘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구실은 말할 것도 없어요. 당신은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배랑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심묘는 그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와의 관계를 분명히 구분 짓길 원치 않았다. 언제 이런 이유 모를 집념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고집을 부렸다.
“거듭 생각한 후 내린 결정입니다.”
심묘는 깊게 탄식했다. 그녀가 말을 받으려 할 때, 경칩이 바깥에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편지봉투가 들려 있었다.
“마마, 채하연의 초대장입니다. 예왕비마마를 초대한다 해서 제가 받아왔으니, 읽어보십시오.”
농서성 귀부인들에게 얼굴을 보이라는 소리였다. 막 대량에 온 심묘에게 벌써 초대장을 보내다니 손이 빠른 사람이었다.
“초대장은 누가 보냈느냐?”
“농서성 장군가, 고 부인이 보내신 겁니다.”
심묘는 멈칫했다. 문신 엽가, 무신 고가, 대량의 양대 세가는 황실과 관계가 아주 미묘한 것 같으니 초대하는 의도가 좋으리라 여기기 어려웠다.
그날 밤, 사경행이 돌아오자 심묘는 초대장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경행은 심묘에게 가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했다. 고가와 엽가, 양가는 거만하지만 지금 예왕부와 척을 질 수는 없다며, 충분히 거절할 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옛말처럼 대량의 구조를 잘 모르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단 고가가 자신에게 무슨 속셈을 품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사경행은 당연히 심묘의 결정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와 상의한 심묘는 초대에 응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틀 뒤, 채하연의 날이 밝았다. 일찍 일어난 심묘가 식사할 때, 사경행은 이미 부에 없었다. 대량에 돌아온 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나가 늦은 밤에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대량 황실도 보기처럼 평온하지는 않다는 분명한 증좌였다.
경칩이 심묘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심묘는 경칩과 곡우를 비롯한 그녀의 여종을 데려왔다. 자신이 예왕부에서 편안히 지내려면 그녀들이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주 탁월한 판단이었다. 예왕부에는 시녀들이 아주 드물었다. 요리를 담당하는 몇 명을 제외하면 하인들은 거의 모두 남자였다.
집사인 당숙의 말에 의하면, 사경행이 예왕으로 봉해진 뒤 예왕부에서 시녀 분장을 한 첩자를 몇 명 잡았다고 했다. 호의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틈을 노리는 게 걱정돼 그 뒤 예왕부는 시녀를 최대한 줄였다고 했다. 이 때문에 예왕부는 지금까지 여인들에게는 철옹성이었다.
“마마, 농서성에서 처음으로 연회에 참석하시는 것이니 아름답게 단장하셔야 해요. 반드시 우리 명제의 체면을 세워주세요.”
경칩과 곡우는 물건을 살 때 사람들이 심묘가 전생에 복을 쌓아 예왕에게 시집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들은 이 이야기가 못마땅했다. 심묘는 명제 정경성에서 일등을 다투는 아가씨였다. 똑똑한 것은 말할 것 없고, 성격도 온화하고 선량하며, 그녀의 기백과 도량은 공주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데 무슨 이유로 그녀가 자기 분수보다 뛰어난 사람과 혼인했다고 평가하는 건지 기가 찰 따름이었다. 곡우는 이 기회에 심묘가 진면모를 보여 좌중을 놀라게 하면, 다시는 아무도 제멋대로 지껄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 걸 뭘 마음에 둬? 그들 마음이 편해지자고 하는 말이야. 우리와는 상관없어.”
곡우의 불만을 알고 있는 심묘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경칩은 장신구 상자에서 비녀를 골랐다.
“마마, 곡우의 말이 맞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 마마가 얼마나 우월하신지 보여주셔야 해요.”
그때, 당숙이 문을 두드렸다. 심묘가 그에게 들어오라 하자 당숙과 젊은 여자가 함께 들어왔다. 심묘보다 어린 것 같았다. 나이가 어리고 살집이 있어 매우 귀여웠다. 가늘게 뜬 눈, 희고 보드라운 피부와 둥근 몸 때문에 순간 심묘는 소명랑이 생각났다. 당숙이 웃음 띤 얼굴로 소녀를 소개했다.
“오늘 마마께서 채하연에 가신다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마마께 조언해줄 사람을 찾으라 분부하셔서 팔각 소저를 데려왔습니다. 팔각 소저가 마마께 많은 것을 설명해드릴 겁니다.”
“당숙, 고마워요.”
심묘가 웃으며 답하자 당숙이 손을 휘두르며 천만의 말씀이라고 사양했다.
“마마께서 초대에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받아들이셨네요. 마마의 담력에 탄복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생소한 곳에 오면 두려울 터였다. 더구나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낯선 사람이 먼저 초대한다면, 초대를 받은 이도 겁먹기 쉬웠다.
“차나 마시고 이야기하러 가는 자리예요. 무슨 담력이 필요하겠어요?”
당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당숙이 심묘를 보는 시선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가 물러가자 심묘는 팔각을 바라보았다. 팔각은 똑바르게 서서, 실눈을 뜬 채 심묘와 마주했다. 팔각의 태도는 어딘지 어수룩해서 귀여웠다. 채하연에서 자신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확실히 피곤할 터였고, 옆에 잘 아는 누군가 있으면 안심이 될 게 분명했다. 사경행의 세심함에 심묘는 살짝 웃으며 팔각에게 말을 건넸다.
“예왕부 시녀는 아닌 것 같으니, 넌…….”
팔각이 미소 지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예왕부의 시녀가 아니라 묵우군 사람입니다. 오늘, 특별히 마마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묵우군?”
심묘는 멍해졌다. 명제에서 이 군대가 사경행의 일을 여러 번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사경행이 비밀리에 양성한 군마인데, 대단한 실력을 지닌 것 같았다. 사경행의 이런 움직임을 영락제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너 무공을 할 줄 알아?”
“저는 살인도 할 줄 압니다.”
팔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경칩과 곡우는 깜짝 놀랐다. 과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더니. 귀엽게만 보이던 팔각은 살인도 할 수 있는 숙련가였다. 이에 심묘는 흡족했다. 과연 사경행이었다. 팔각과 함께 가면 자신의 안전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래, 네가 나와 함께 가자. 경칩은 부에 남아서 백로, 상강과 함께 창고 정리를 하거라. 곡우, 너는 나와 함께 출발하자.”
경칩은 당연히 자신도 갈 줄 알고 채비를 마친 후였다. 그러니 부에 남아야 한다는 말에 몹시도 억울했고 팔각에게도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차마 애꿎은 팔각에게 화낼 수는 없어, 그저 심묘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심묘는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채하연 연회 장소인 고부로 서둘러 갔다. 이번에는 모경을 데려가지 않았다. 그녀가 데려간 호위는 모두 예왕부 사람이었다. 모경은 명제 사람이기에 고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반면 예왕부 사람을 호위로 데려가면 고부 사람들이 쉽게 손을 쓸 수 없을 터였다.
대량의 국토는 햇볕을 많이 받았다. 겨울도 명제처럼 춥지 않으니 여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명제라면 아직 봄 날씨인 5월에 대량은 초여름이었다. 한여름까지는 아니라지만 꽤 더운 날씨였다.
마차가 움직이자 심묘와 곡우는 발을 올려 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대단히 떠들썩했다. 공격당한 소국의 백성들이 오히려 성문을 열어 대량의 군대를 환영한다는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행복한 생활을 보장할 수 있다면 국가 이름 따위는 백성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확실히 영락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재능이 뛰어났다. 대략 한 시진 후 마차가 멈췄다. 팔각이 발을 들었다.
“마마, 고부에 도착했습니다.
곡우와 팔각이 심묘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렸다, 고부 입구에는 많은 마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구에는 맞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게…… 어째서 맞이하는 사람이 없을까요? 혹시 잘못 온 걸까요?”
곡우는 당황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잘못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가 대문은 꽉 닫혀 있지 않았다. 특별히 심묘를 위해 열어둔 것 같았다. 심묘가 입구를 힐끗 보곤, 곡우에게 물었다.
“초대장에는 몇 시진이라고 되어 있느냐?”
곡우가 얼른 초대장을 꺼내 확인했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입니다. 하지만 아직 오시가 안 됐습니다.”
“우리 초대장에만 오시인 것 같구나.”
심묘는 담담히 대꾸했다.
“마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마차가 즐비하니 손님이 있는 것은 명백해. 그러나 우리가 초대 시간보다 더 일찍 왔다면 손님이 저렇게 많을 리 없지. 입구에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 것도 그렇고. 문을 열어둔 건 우리가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다른 사람의 초대장의 시간은 사시(巳時, 오전 9~11시)일 테다. 일부러 우리를 늦게 오도록 한 것이지.”
심묘는 헛웃음이 났다. 명제든 대량이든 귀부인의 수완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제야 깨달은 곡우가 성을 냈다.
“마마를 놀리면 얻는 게 있대요?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요!”
심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얻는 것? 얻는 거야 많지.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데 제멋대로 들어가면 무례한 일이야. 그럼 명제의 장군부가 예의를 모른다고 흉볼 수 있지. 들어가지 않아도 실례야. 초대에 응해놓고 가지 않으면 말에 신용이 없다고 할 거야. 꼬투리가 잡히면 고개를 숙여야 할 테니 뒤로 갈수록 비웃음을 살 테지.”
처음부터 꼬투리가 잡히면 안 됐다. 고개를 숙이면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심묘 자신은 미 부인과 여러 해 다투었기에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마마, 들어가실 건가요?”
“들어가자.”
팔각의 물음에 심묘가 치마를 들고 문 쪽을 향했다. 이에 곡우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마마, 들어가면 꼬투리가 잡히고, 안 들어가면 신뢰를 잃는다면서요. 둘 다 좋지 않은데 왜 들어가려 하세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큰 실수를 하게 만들면 돼. 그러면 내가 저지른 잘못은 신경 쓰지 않게 되지.”
심묘가 살짝 웃었다.
* * *
고부 대청.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농서성에서 대단히 유명한 무장인 고가의 위치가 높은 만큼, 관저도 몹시 화려했다. 오늘 채하연은 고 부인이 직접 준비했기에 그녀를 향한 아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 부인은 올해 마흔 살이 넘었다. 젊을 때는 미인이었지만, 나이를 먹은 뒤 살이 빠지면서 인상도 각박해졌다. 장군부의 주모에 걸맞은 장중함과 대범함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과하게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최대한 부귀를 드러내야 영예롭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잇값을 못 하면 꼴사나워 보인다는 사실은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았다.
둥근 얼굴의 부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 부인은 정말 복이 많아요. 정비마마는 폐하께 총애를 받으시고, 효성스럽지요. 이번 채하연에 폐하께서 특별히 선물을 보냈으니, 정비마마를 생각하는 폐하의 마음을 알 것 같네요.”
고 부인은 득의양양했으나 이를 숨기고 겸손한 척했다.
“폐하께서 너그러우셔서 정비마마를 아껴주시는 거지요. 덕분에 우리 온 집안이 덕을 보네요.”
다른 키 작은 부인이 웃었다.
“부인, 무슨 말이세요? 둘째 소저도 도위에게 시집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면서요. 내게도 복을 좀 나눠주세요.”
고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치 아픈 얼굴이었다.
“아직 셋째와 넷째가 남아 있잖아요. 난 정말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에요.”
둥근 얼굴의 부인이 얼른 과장해 말했다.
“머리가 아프시다니요? 셋째 공자는 훌륭한 인물이에요. 어린 나이에도 무공이 출중하니, 장래 어느 댁 아가씨가 복이 있어 공자와 혼인할지 알 수 없네요. 넷째 아가씨는 더욱 말할 것 없지요. 선녀 같은 생김새에, 금, 바둑, 글, 그림 모두 능통한데, 마음 쓸 게 어디 있나요?”
고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 과찬입니다. 셋째는 남자아이니 몇 년 기다려도 괜찮으나 넷째의 혼사는 더 이상 끌 수 없어요. 정말 머리가 아프답니다.”
“어머니, 또 부인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하시는 거 아니지요!”
갑자기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청 안에 묘령의 소녀가 나타났다. 이 소녀는 열여섯 정도 되어 보였다. 나비, 구름, 새가 수놓인 옅은 자색 치마를 입고, 연꽃무늬로 마감한 앵두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비 모양 진주 비녀를 착용한 소녀는 아름다운 데다 부유한 생활을 누린, 부귀한 아가씨 특유의 산뜻함이 있었다. 봄날 나비처럼, 경쾌하게 풀을 밟은 사슴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고가 넷째 소저, 정비의 동생, 고완아였다.
고 부인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어디 감히 우리 완아 흉을 봐?”
고완아가 입을 삐죽이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청에는 다른 관리 집안의 소저도 있었으나 그녀에 비하면 앉은 자리가 어두침침해 보일 정도였다. 고완아가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명제의 심가 소저는 오지 않은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기에, 부인들과 소저들은 이를 듣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고완아는 ‘명제 심가 소저’라고 말했다. 심묘를 ‘예왕비마마’라 부르길 원치 않는 게 분명했다. 이는 명백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사실 사람들은 고완아가 예왕부로 시집가 예왕비마마가 될 거라고 믿었다. 고완아도 예왕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심묘가 나타나 끼어든 것이다. 이에 고가 사람들은 불만스러웠고 고완아는 더욱 달갑지 않았다.
오늘 고부가 이 채하연을 연 본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부인 대다수는 재미난 구경을 하러 오거나 고완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 것이었다. 명제 심가 소저는 지금은 영광스러울지도 모르나, 농서성에 기반이 없으니 그 콧대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예왕은 출중하고 재능이 넘치니 한 여인에게 오래 마음을 줄 리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가 소저의 결말이 좋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고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겨 지체되는 모양이다.”
고완아는 불만스러웠다.
“정말 간이 크네요. 다른 부인과 아가씨들은 모두 정시에 왔는데 혼자만 늦다니요. 명제엔 규칙이 없는 걸까요?”
그때, 둥근 얼굴의 아가씨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언제 들어왔는지 몰라 놀랐다. 그 아가씨가 웃으며 물었다.
“말씀 좀 여쭙습니다. 이곳이 채하연을 하는 곳인가요?”
당황한 고 부인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습니다. 혹 예왕비마마이신가요?”
“제가 아닙니다. 왕비마마는 여기 계십니다.”
여종이 고개를 돌려 심묘를 부축해 들어왔다. 사람들은 심묘의 얼굴을 보고 멍해졌다. 심묘의 눈썹은 초승달 같았고, 눈은 둥글고 크며 맑았다. 코는 작고 곧았고 입술은 불그스름해 매우 수려했다. 온화해 보이나 턱을 들고 등을 쫙 펴서 걸어오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다들 그녀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오른 귀인의 모습이었다.
심묘는 연청색 나비와 구름이 수놓인 치마에 연한 자주색 백목련 비단 상의를 입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꽃과 봉황 형상의 보석이 달린 떨잠을 착용해 귀한 신분에 맞는 적절한 차림새라고 할 수 있었다. 새 옷을 맞추고 단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관리 집안 소저들은 그녀의 단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심묘와 고완아는 둘 다 자주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고완아의 자색은 엷었지만 심묘의 자색은 짙었다. 어린 소녀가 연자주색을 입으면 온화하고 활발해 보이지만, 짙은 자주색을 걸치면 노숙하고 융통성 없어 보였다. 그러나 심묘의 자색은 그녀에게 딱 맞아 화려하고 부귀하여 손색이 없었다. 반면 고완아는 그저 예쁜 연극배우 같았다.
고완아는 평소 자신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즐겼으므로, 모두가 심묘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자 매우 화가 났다. 게다가 심묘는 자신의 예왕비 자리를 뺏은 원수였다. 고 부인의 시선이 반짝였다.
“예왕비마마, 이제야 오셨군요. 부인들이 마마를 기다렸답니다.”
심묘가 살짝 미소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들이 이렇게 일찍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네요. 초대장에 오시라 적혀 있었는데, 전하는 내게 늦지 않도록 더 일찍 가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늦을 줄은 몰랐어요. 전하가 원망스럽군요. 내게 사시쯤…… 가야 좋을 거라 일깨워주시지.”
고 부인은 깜짝 놀랐다. 심묘가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심묘의 말에 주위 부인들은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심묘는 외부 사람이니 부인들은 당연히 고가를 두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뻔하디뻔한 수단을 쓴 게 들켰으니 고가는 도리어 비웃음을 살 터였다. 사실 자신은 심묘의 초대장에 손쓸 생각이 없었지만, 딸 완아가 제안하자 나쁘지 않다고 여겨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 밝혀지니 후회스러웠다. 심묘가 예왕에게 이 일을 이야기한다면 총명한 예왕이 내막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그가 고가에 불만을 품는다면……. 안 쓰느니만 못한 한 수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예왕비마마는 어째서 사람을 보내지 않고 무작정 들어오셨나요?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으니, 저희가 푸대접했다고 하실 수는 없습니다.”
고완아는 심묘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심묘를 위아래로 살폈다. 맞이하는 사람이 없는데 부로 들어오는 것은 실례였다. 그러나 심묘는 웃으며 고완아를 바라보았다. 심묘의 웃음은 온화했다.
“바로 내가 하려던 말입니다. 이렇게 큰 부에 대문을 지키는 호위병이 없으니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왕부 호위들에게 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 기회를 틈타 들어오지 않도록요. 괜찮지요?”
고완아와 고 부인은 피를 토할 뻔했다. 심묘의 무례를 지적해 모욕을 주려 했건만, 몇 배로 돌려받은 셈이었다. 예왕부 호위들이 고부의 문을 지키다니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연히 고부는 일부러 입구에 사람을 배치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심묘의 말은, 마치 고부가 빈곤해 문을 지키는 남종 하나도 둘 수 없는 처지라는 것 같았다. 예왕부 호위가 고부의 문을 지키고 있다니 백성들이 뭐라 수군거릴지 눈에 선했다. 심묘가 입가에 머금은 친절이 더욱 짙어졌다.
“부인, 내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장래 필요하시면 전하께 말씀드려 인마(人馬)를 좀 댁에 보내드리겠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예왕부가 정녕 보낸다 하더라도 감히 받을 수 없었다. 그중 몇은 첩자일 수도 있었다. 주위 부인들은 심묘가 쉽게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다. 고가는 심묘가 실수를 범해 위용을 잃는 모습을 보려고 이것저것 준비했으나, 그녀는 그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고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왕비마마, 자리에 앉으시지요.”
고 부인이 간신히 웃음을 지으면서 심묘에게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안배했다. 하지만 심묘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늘은 무언가 쟁탈하거나 말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기회에 대량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는 것이 방문의 목적이었다.
팔각이 몸을 구부려 심묘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둥근 얼굴의 부인은 추밀사의 원 부인, 고가와 친교를 맺고 있습니다. 키 작은 부인은 호부상서의 위 부인, 엽가와 인척을 맺었고 고가와도 관계가 좋습니다. 가장 왼편 노란 옷을 입은 부인은 남편이 조정에서 좌도를 맡고 있습니다. 부인의 아들은 마마도 아시는 계 공자입니다.”
계우서의 친어머니라니. 심묘가 그 계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정한 생김새라 계우서와 성격이 전혀 달라 보였다.
심묘는 이런 부인들이 부자는 아니라도 고귀한 집안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과연 고가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정비가 현덕 황후도 안중에 없더니 과연 배후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었다. 이러니 영락제와 사경행이 고가를 철저히 억누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고가는 많은 관리 집안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자기들 부의 존망도 걸려 있으니, 그들 세가가 눈을 뻔히 뜨고 고가가 와해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 심묘 곁에 한 사람이 걸어와 앉았다. 팔각이 몸을 곧추세웠다. 심묘가 고개를 돌리자, 예쁘고 귀여우며, 오만하고 건방진 고완아가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예왕비마마, 주제넘지만 한마디 여쭈어도 될까요?”
“말해요.”
“예왕 전하와는 아신 지 얼마나 됐나요?”
심묘는 속으로 실소했다. 고완아가 무엇을 위해 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사경행이 명제에 있던 시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 오직 영락제와 사경행의 사람만이 알았다. 대량 사람은 사경행이 여러 해 스승을 따라 열국들을 두루두루 다녔고, 매우 신출귀몰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예왕과 자신이 ‘안 지’는 소춘성에서 정경성으로 돌아온 조공연회에서부터 세어야 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다.
“1년 조금 넘네요.”
고완아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무시하는 기색을 짙게 띠었다.
“그렇군요. 예왕비마마와 예왕 전하는 아직 서로 잘 모르시는 부분이 많겠네요.”
심묘는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소저는 전하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 같네요?”
“마음에 두지 마세요. 명제에서 심가가 어떤 위치인지 압니다. 대량에서 우리 고가는 명제에서 심가의 위치보다 높으면 높지, 낮진 않아요. 예왕 전하는 좋은 사람이니 대량의 모든 소저가 예왕부로 시집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보통 세가는 전하와 어울리지 않아요.”
고완아가 심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왕비마마, 예왕 전하는 아주 야심 있는 분이십니다. 전하는 농서성에 돌아오신 뒤부터 조정의 큰일을 맡고 계세요. 영웅은 남녀 간의 정에 구애받지 않지요. 마마는 전하께 어떤 도움을 드리실 수 있나요? 지금은 생활이 달콤할 테지만, 장래에 마마가 전하께 쓸모없어진다면 전하는 마마를 헌신짝처럼 버리실 겁니다.”
심묘는 고완아를 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만한 소저라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것에 연연한다 여겼다. 그러나 고완아는 국면을 분명히 보고 있으며, 몇몇 이익 관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요?”
“폐하께서는 날 예왕 전하의 왕비로 삼을 생각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왕 전하께서 두 명의 왕비를 두실 수는 없지요. 그러니 마마는 첩이 되세요. 제가 본처가 되어야 하니까요.”
큰 선심을 쓰는 듯한 말투였다. 심묘는 고완아를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혜를 베푸는 듯한 그녀의 말투엔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국면을 분명히 보고 있는 그녀의 말에 자신은 고가 사람이 총명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나니 고완아가 바보인 건지, 바보인 척하는 건지 의아했다.
“고 소저, 그런 이야기는 전하와 나누어도 될 이야기입니다. 나와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알아요. 오늘 마마께 말씀드리는 건, 마마께서 먼저 예왕 전하께 첩이 되겠다고 이야기해주시길 원해서예요.”
심묘는 실소를 참고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거절했다.
“그건 못하겠네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고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진심으로 거절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둘의 목소리는 아주 작다고 할 수 없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심묘도 숨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첩을 자처하는 일, 난 못해요. 부군을 위해 첩을 받아서 자식을 늘리는 일 또한 하지 않을 겁니다. 예왕 전하께서 장군부로 와서 혼담을 꺼낼 때, 예왕부 후원에 다른 여인을 두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이 먼 대량으로 시집오지 않았을 거예요.”
주위 부인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일은 불공평했다. 대다수 남자는 여러 명의 여인을 첩으로 거느렸다. 대량이든 명제든 상관없었다. 부부 둘이서만 지내는 일은 보기 드물었다. 평범한 집안의 남자조차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는데 부귀한 집안, 관리, 황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예왕은 젊고 용모가 출중한 데다 지위가 높으며 권력까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일생 한 명의 여인만 있을 리 없다고 여겼다. 명제 심 소저가 너무도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비웃었다. 반면 고완아의 안색은 분노로 검푸르러졌다. 그녀는 한 글자씩 강조했다.
“예왕비마마, 질투가 심하시네요. 여자가 질투가 심하면 덕행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심묘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난 질투를 잘해요. 예왕 전하께서 이 조건을 꺼내지 않았다면 혼인하지 않았을 거예요.”
고완아는 원망스러웠지만 더는 할 말도 없었다. 주위 부인들은 의아했다. 고완아는 심묘의 호적수가 되지 못하고 완패한 모양새였다. 심묘는 대량에 처음 왔는데 영락제도 두려워하는 고가에서 이렇게 위세를 부리니, 어디서 나온 담력으로 미움을 사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둔한 여자인가 싶었다.
그러나 심묘는 두렵지 않았다. 고완아는 자기가 사경행과 혼인하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 했으나, 뭘 모르는 소리였다. 사경행은 처가에 기대 위로 오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영락제가 설령 사경행에게 혼사를 지시해도, 그 짝이 고완아일 리 없었다. 영락제가 감히 사경행과 고가를 혼인시킬 리 없었다. 그는 정비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궁에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완아가 예왕부에 들어오면 대량 황실은 모두 고가와 관련된다.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부수의가 자신을 이용해 심부와 한데 묶이길 자처한 건, 심신이 황실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는 충직하고 온후한 성정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가는 야심이 만만찮았다. 영락제가 하고많은 아가씨 중 고완아를 선택할 리는 절대 없었다.
고 부인과 고완아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맞은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예왕비마마는 과연 감정에 충실한 분이시네요. 예왕 전하께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정과 의리를 중시하시니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군자시군요.”
계 부인 옆에 빼빼 마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다갈색으로 수놓은 치마를 입은 부인은 짙은 피부색에 단정한 용모였다. 그러나 인정이 없어 보였고, 그녀의 긴 눈은 사람을 바라볼 때 깊이 꿰뚫어 보는 듯해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한 번 봐도 영리하고 엄숙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승상부의 엽 부인입니다.”
팔각이 심묘에게 차를 따라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 사람이 바로 소문 속 대량의 양대 세가 승상부 엽 부인이었다. 고 부인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엽 부인은 조용히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심묘는 대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엽 부인이 심묘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왕 전하와 예왕비마마는 사이가 매우 돈독한 것 같네요. 며칠 후 황가 사냥을 할 때 마마도 함께 오시겠어요?”
“그건 전하와 상의해야 합니다.”
심묘가 웃음을 띠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오늘 채하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이 좋지 않음을 뻔히 아는데, 바보도 아니고 미끼를 덥석 물 이유는 없었다.
“왕비마마는 황가 사냥의 묘미와 재미를 모르실 거예요. 분명 즐거우실 겁니다.”
엽 부인이 포기하지 않고 재차 권했다. 심묘는 엽 부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사냥을 함께 가겠다고 답하길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고 부인과 고완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오늘 심묘 때문에 망신을 샀으니 몹시 불만스러울 터였다. 그래서 분노를 삼키느라 급급해 지금 엽 부인의 말에 맞장구칠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때, 엽 부인 곁에 앉은 계 부인이 미소 지었다.
“여러분, 예왕비마마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예왕비마마는 아직 어리시고, 또 대량은 처음이시니 여러모로 낯설게 느끼실 겁니다.”
계 부인이 나서서 곤경에 빠진 심묘를 구해줬다. 심묘가 의외라는 듯 바라보자 계 부인이 그녀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 부인의 남편은 조정 좌도였다. 부군의 관직이 낮지 않으니 엽 부인도 반박하지 못하는 듯했다. 다시 사냥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을 것 같자, 엽 부인이 심묘를 탐구하듯 바라보았다. 심묘는 그녀의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후 채하연은 미적지근하게 흘러갔다. 고완아는 심묘에게 화가 난 듯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남은 고 부인은 심묘를 무심하게 대했다. 채하연의 주최자는 고 부인이니 다른 부인들도 일부러 심묘를 냉대했다. 그러나 심묘는 어린 시절부터 냉대를 적지 않게 당해서 이를 마음에 두지 않고 차를 마셨다. 그동안 팔각이 몰래 알려주는 여러 부인들의 관계를 들으며 전부 기억하려고 애썼다.
떠날 때 그녀를 배웅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마차를 타려는 심묘를 잡아 세운 사람이 있었다. 계 부인이었다. 그녀는 심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서가 명제 정경성에 있을 때 왕비마마의 돌봄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우서를 대신해 왕비마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심묘는 일단 감사 인사를 받았지만 난감했다. 계우서의 풍선전당포를 이용해 적지 않은 일에 성공했다뿐이지, 계우서를 살뜰히 챙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계 부인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심묘에게 다가왔다.
“마마께서도 보셨겠지만, 고가 넷째 소저는 일심으로 예왕부에 시집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쪽의 생각일 뿐, 마음에 두지 마세요. 이뤄질 일이었으면 진작에 예왕비가 됐을 겁니다. 그저 말만 저러는 거예요. 엽 부인이 말한 사냥은 돌아가셔서 전하와 이야기해보세요. 그 안 사정은 어려우니, 마마께서 다른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진심 어린 눈빛과 부드러운 말에 심묘는 조금 감동했다. 계우서는 모친으로부터 온화한 성정을 물려받은 듯했다. 고가 입구에 다른 부인들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본 계 부인이 얼른 작별 인사를 했다.
“왕비마마께서 시간 나실 때 저희 부로 놀러 오셔도 좋습니다. 농서성은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저도 마마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계 부인은 빠르게 떠났다. 돌아가는 길에서 심묘는 줄곧 채하연의 일을 생각했다. 고완아의 말은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엽 부인이 사냥에 초청한 일은 아주 신경 쓰였다. 심묘가 팔각에게 물었다.
“오늘 연회에 엽 부인의 딸은 보이지 않은 것 같은데, 엽가의 소저는 왜 데려오지 않았느냐?”
팔각이 멍하니 있다가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엽가에는 소저가 없습니다.”
“소저가 없어?”
“대량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승상부 엽 승상과 엽 부인에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일찍 요절했습니다. 이후 엽 부인과 엽 승상 사이가 소원해졌고 그 뒤에 얻은 첩에게 하나 본 아들이 승상부의 엽 공자입니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엽가 같은 고위 관직 세가에 어째서 아들 하나만 있는 건지 의아했다.
“승상부에 대를 이을 아들이 하나뿐이라는 게냐?”
팔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 공자를 낳은 뒤, 엽 승상은 암살 시도를 받아 자식을 더 낳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도 심묘가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팔각이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소첩이 엽 공자를 출산할 때 몸이 약해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엽가 사람이 소첩을 목 졸라 죽였다고 합니다. 엽 공자는 엽 부인이 적자 신분으로 키웠지요. 그러나 적자 신분이라도, 엽 공자는 엽 부인의 중시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건 왜지?”
친아들이 아니라도 아들이 없는 상황이니 엽 부인은 그 적자에게 잘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니 의아했다.
“엽 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와 발이 불편합니다. 그러니 벼슬에 오를 방법이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엽가가 머지않아 쇠락할 거라 말합니다.”
팔각의 설명을 들은 심묘는 그제야 머릿속이 맑아졌다. 과연 엽 부인이 마음 들어 하지 않을 만했다. 머릿속이 환히 켜지는 듯했다. 고가는 딸을 입궁시켰는데 엽가는 그러지 않은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엽가가 야심이 없는 게 아니라 딸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차선으로 친척의 딸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보내도 소용없으리라 판단했을 터였다. 어차피 친딸이 아니니 자신들 입맛대로 조종하는 건 어려웠다. 이렇게 대충 구조를 알게 되자, 심묘는 대략 영락제의 계획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엽가의 아들은 절대로 고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엽가가 고가와 연맹해 야심을 달성해도 고가만 이익을 볼 뿐이었다. 영락제는 이를 이용할 심산 같았다. 동맹을 맺어도 상대만 이득을 볼 경우 배반하는 특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영락제는 고가와 엽가의 내분을 일으킬 터였다. 먼저 엽가를 굴복시킨 뒤 남은 고가를 상대하면, 그때는 고가가 병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쓰러뜨리기 한결 수월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엽가와 고가는 오랫동안 친분을 맺었기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두 세가를 이간질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심묘는 고민에 빠져 어느새 마차가 예왕부에 도착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팔각이 “주인님!”이라고 외치자 누군가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넋을 잃었느냐?”
심묘는 그제야 사경행을 보았다. 오늘 그는 웬일로 일찍 돌아와 있었다. 암적색 관복 차림을 한 그는 위풍당당한 자태였다. 놀란 심묘가 그의 소매를 잡고 서재를 향해 급히 끌고 갔다.
“마침 잘됐어요. 나 물어볼 게 있어요.”
사경행은 잠시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곧 그녀가 끌고 가기 쉽게 힘을 풀었다. 팔각과 곡우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팔각이 실눈을 떴다.
“마마는 정말 대단하시네.”
“당연하지!”
곡우가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으려 할 때 당숙이 뒤편에서 나왔다.
“뭘 보고 있어. 어서 일하러 가지 않고!”
팔각과 곡우가 혀를 내밀며 얼른 떠났다. 당숙이 꽉 닫힌 큰 문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아직 첫날밤을 보낸 기색도 없는데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 * *
심묘는 오늘 채하연에서 있었던 일을 사경행에게 이야기했다.
“황가 사냥?”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치 않은 것 같아요.”
사경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매년 6월 초에 황실은 수렵을 해야 해. 선황이 정하신 규칙이야. 그러나 나와 폐하는 바깥에서 돌아다니지,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
“왜요?
“위험해서.”
사경행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당황한 심묘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무서우냐?”
“내가 뭐가 무서워요? 그러니까, 누군가 폐하와 당신에게 손을 쓴단 거예요? 황가 사냥터에는 금위군이 있을 텐데 누가 그런 큰 담력이 있어서?”
갑자기 사경행이 화제를 바꾸었다.
“묵우군, 너도 보았지? 그들은 나의 사람으로 대량 군대와 무관해. 폐하도 알아. 왜 사적으로 군대를 키워야 하는지 알겠어?”
“황실 군대를 믿을 수 없어서?”
심묘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 사경행이 정답이라는 듯 손뼉을 쳤다. 심묘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대량의 명군 영락제를 대량 사람 모두가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럴지 모르나 관병과 대신은 소문처럼 그리 충성심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대량 황실 내부에서 서로 대립하지는 않아도 외환이 있는 것이다.
황실 군대는 대를 이어 내려온다. 그런 황실 군대를 믿을 수 없다니 선황에서 이어진 사람들은 지금 영락제를 원치 않는 셈이다. 이전 사경행이 선황에 대해 박정하게 대했던 것이 떠오른 심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가 머뭇거리다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명제 정경성에 흘러들어온, 그 내막은 도대체 뭐예요?”
사경행의 시선이 변했다. 심묘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사경행이 웃으며 손을 내밀어 심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우리 왕비가 왜 이렇게 질문이 많을까? 내 비밀을 알고 싶으면 네 것과 교환하자구. 몸과 교환해도 좋고.”
그의 교활한 웃음에 심묘가 눈을 흘겼다.
“그보다 넌 고완아의 말에 조금도 화나지 않은 것 같네. 네 부군을 원한다는데 노발대발하지 않다니. 심교교, 정말 섭섭하다.”
불만 가득한 말이었으나 심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어쨌든 당신도 승낙하지 않을 거잖아요? 고가는 야심만만하니 당신은 독사를 곁에 둘 마음이 없을 거예요.”
사경행이 크게 웃으며 그녀를 주시했다.
“난 이미 독사를 기르고 있는걸. 미인 독사.”
사경행은 세 마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병에라도 걸린 듯했다. 심묘는 능글능글하게 구는 그와 더 이상 말하기 싫어졌으나 지금 궁금한 바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당신은 엽가를 어떻게 생각해요?”
심묘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사경행이 답했다.
“엽가 사람은 고가보다 총명해. 감추고 견딜 줄 알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그런가, 고가처럼 건방지지도 않아. 폐하와 나는 엽가를 건드려 두 가문을 이간질할 거야.”
심묘가 손가락을 움츠렸다. 오늘 마주한 엽 부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만 보아도 생각처럼 엽가를 쉽게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경행은 이상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거라고 여겼다.
“황가 사냥에 당신도 참가하나요? 계 부인이 내게 다른 사람의 계략에 당하지 말라 조언했어요.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사경행의 시선이 조금 차가워졌다.
“이번에는 가기 싫어도 따라가야 해.”
“무엇 때문에요?”
“올해는 선황이 규정한 60년 제전이야. 반드시 폐하께서 수사자의 머리를 올려야 해. 내년에 바람이 좋고 비도 적당하길 기원하는 거지. 폐하가 명군이라는 증명도 될 거야.”
“맹수잖아요.”
수렵장은 당연히 목숨과 안전을 우선으로 여기고 만든다. 그 안에서 사냥하는 사람은 모두 높은 관직의 귀족이니 목숨을 잃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자라니,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텐데.
사경행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웃는 얼굴은 차가웠다.
“맹수는 겁날 게 없어. 맹수는 몰래 화살을 쏘지 않으니 사람보다 안전하지. 그 안에는 금위군만 데리고 들어갈 수 있어. 선황이 내린 규칙이야. 금위군이 충성스러운지 아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선황이 우리 두 사람에게 남긴 거고 나와 폐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걱정하는 심묘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안심해. 네게 사고가 생길 리 없어. 예왕비로 따라가는 거니 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어.”
“당신은 자신 있어요?”
심묘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사경행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고도 이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사경행이 심묘를 주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심묘의 심장이 딱딱하게 굳는 듯했다. 순간 사경행이 미소 지었다.
“거짓말이야.”
심묘가 노려보는데도 사경행은 태연히 기지개를 켰다.
“사냥을 끝내고 궁중 일을 이야기해줄게. 네가 온종일 이런저런 생각 하지 않도록.”
심묘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사경행이 자신에게 그의 비밀을 이야기해줄 생각인 것 같았다. 사경행이 명제 정경성에서 성장한 과정과 영락제와 사경행이 선황에 취하는 태도, 그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느꼈다. 무거운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경행은 가볍게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 그가 겪은 일은 보통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비밀을 비로소 알 수 있어 기뻤다.
하지만 황가 사냥에 대한 불안은 여전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고, 평온해지려 노력했으나 쉽사리 진정할 수 없었다. 심묘는 침묵하며 사경행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 * *
미앙궁. 현덕 황후는 궁녀가 채하연의 일을 보고하는 걸 듣고 있었다.
“첩을 자처하는 일, 난 못해요. 부군을 위해 첩을 받아서 자식을 늘리는 일 또한 하지 않을 겁니다. 예왕 전하께서 장군부로 와서 혼담을 꺼낼 때, 예왕부 후원에 다른 여인을 두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도 이 먼 대량으로 시집오지 않았을 거예요.”
궁녀가 심묘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똑같이 전하자 현덕 황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 평온한 태도를 보이는 현덕 황후가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자 소녀 적의 유쾌한 모습이 엿보여 한층 매력적이었다.
“황후, 무슨 일로 그리 즐겁게 웃는가?”
영락제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렸다. 냉혹한 표정의 그가 미앙궁으로 들어왔다. 그는 깔깔 웃는 현덕 황후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현덕 황후는 여전히 즐겁게 웃었다.
“채연, 예왕비의 말을 폐하께 들려드려라.”
채연이라는 궁녀는 고개를 숙이고, 심묘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말했다. 영락제는 소매를 휘두르며 분노했다.
“터무니없는 말을 제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예의도 없고 매우 방자하다.”
황제의 분노를 궁녀는 감당할 수 없기에 채연은 놀라 몸을 떨었다. 현덕 황후가 나무라는 시선으로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채연에게 눈짓하자 채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갔다. 현덕 황후는 미소 지으며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경행의 아내는 그와 참 잘 어울리네요. 둘 다 시원하니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에요.”
“경행이 함부로 구는 건 그렇다 치지만 당신도 그 아이를 따라 함부로 구는 것이오? 게다가 보아하니 황후는 심묘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군.”
영락제가 불만스럽다는 듯 현덕 황후를 보았다.
“대량에서 이렇게 재미난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어요. 똑똑한 데다 드물게 진실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네요.”
그녀는 웃으며 영락제가 자기 곁에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투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영락제는 차갑게 말했다.
“그저 온갖 궁리를 해 이익을 꾀하는 여자일 뿐이야.”
“정말 그렇다면 영리한 경행이 어떻게 알아채지 못했겠어요?”
그러나 영락제는 사경행이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여겼다.
“경행은 어려서 시비를 분간하지 못하고 여인에게 홀린 것이오.”
영락제가 완고한 것을 아는 현덕 황후가 탄식했다. 그녀는 그와 다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저는 예왕비가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사람이면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이 질투가 많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거요. 황후는 부군에게 첩을 들이지 않게 하는 행위가 옳다고 여기는 거요?”
영락제는 매우 불만스러웠다. 이에 현덕 황후가 담담하게 웃었다.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요. 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인은 몇 없어요. 예왕비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녀의 복이겠지요.”
“황후.”
영락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후를 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실언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예왕부의 일에 마음을 쓰지 마세요. 경행은 스스로 알아서 잘하니 끼어들어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현덕 황후는 결코 놀라거나 두려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짐도 짐 나름의 생각이 있소.”
영락제는 낮게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현덕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달 황가 사냥 준비는 다 되셨나요?”
영락제의 표정은 덤덤했다.
“준비 명령을 내릴 뿐이지. 짐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다.”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폐하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짐은 정비를 데려갈 거요. 짐이 외출하면 궁은 당신이 돌봐야지.”
현덕 황후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곧 고개를 든 그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짐이 가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은 경행이오. 어린 나이에 명제에 잠복해야 했기에 짐은 경행에게 가책을 느끼오. 그러나 지금은 천하를 의논해서 결정할 때. 짐은 아직 당초의 약속을 지켜줄 수 없소. 장래 경행이 짐을 원망하든, 짐의 고심을 이해하든 상관없소. 모후께서 돌아가시기 전 그 아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해 애석할 따름이구려.”
영락제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울적한 기색이 드러났다.
“모후께서 지하에서 경행이 지금 이렇게 출중하게 자란 걸 보시면 기뻐하고 안심할 거예요.”
현덕 황후가 위로했다.
“황후.”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현덕 황후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대가 고생했소.”
“폐하와 걱정을 함께하는 건 제 복입니다.”
현덕 황후가 예의 평온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리 큰 고난도 그녀를 흔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는 폐하와 수십 년을 함께했습니다. 폐하는 제게 잘해주시니 저는 늘 만족스럽습니다.”
영락제가 현덕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시선으로 현덕 황후를 바라보던 영락제는 청동 두루미 입에서 모락모락 나는 푸른 연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덕 황후는 평온하게 자신의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와 나눈 대화는 평범한 가정의 일상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촉촉했다.
* * *
6월 초, 어제까지 부슬부슬 비가 내렸는데 신의 보살핌으로 오늘은 밝은 태양이 높이 솟았다. 산은 진창이지만 날씨는 좋았다.
나담이 기지개를 켰다. 대량의 여름은 길고 무더우나 방에는 얼음이 충분히 있어 쾌적했다. 방 안 여종이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 오늘은 어디로 가보고 싶으세요?”
나담이 작은 산처럼 쌓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고 의원이 돌아오면 물어볼래.”
“고 공자는 오늘 돌아오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 만약 아가씨가 외출하고 싶으시면 호위를 불러 저와 동행하시면 됩니다.”
“일이 있다고? 환자를 진찰하러 간 거야?”
여종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에 나담이 손을 휘저었다.
“그럼 마음대로 돌아다닐래.”
나담이 대량에 온 지 곧 한 달이 되었다. 그녀는 고양과 함께 지냈다. 고양은 의원에게 국경은 없다며 대량에 온 까닭을 설명했다.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 돌아다녔는데, 대량에서도 잠시 거주했던 적이 있어 이 관저는 그의 소유라고 했다. 나담은 이상하다 여겼으나 부의 모든 사람이 그의 말처럼 이야기하자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장군부에서 보낸 사람은 고양에게 쫓겨 돌아갔다. 그는 심묘가 나담을 데리고 잘 보살피겠다 했다고 전하라 했다. 고양이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지 몰라도 그 후 장군부 사람은 그녀를 더 쫓아오지 않았다. 이번 일은 결국 나담의 마음속의 주판알을 움직였다. 나담은 농서성을 다 돌아보고 나면 심묘를 찾아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지금 당장 심묘를 만난다면 그녀는 바로 자신을 정경성으로 돌려보낼 터였다. 충분히 놀지도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담이 뜰로 나가자 거리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나담의 질문에 여종이 웃었다.
“오늘은 황가 사냥의 날로, 올해는 60년 제전이 있어 더욱 특별합니다. 폐하께서 직접 수렵장 사냥터 안에서 사냥을 하시고 금위군도 따라갑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환호하는 겁니다.”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나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우리도 가서 보자. 폐하의 용안도 볼 수 있겠지?”
안색이 변한 여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파가 한데 모여 있는 데다 폐하께서는 커다란 양산을 쓰고 계셔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나담이 낙담하자 여종이 미소 지었다.
“다른 곳도 재밌을 겁니다. 일단 저는 가는 길에 먹을 간식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여종이 떠난 뒤, 나담은 몰래 후원 쪽 문으로 빠져나왔다.
“먼발치에서 보면 괜찮겠지.”
뜰 안에서 빠르게 나담의 그림자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