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장 (14/71)

56장

심묘는 옷을 바꿔 입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냥을 위해 그는 편한 옷을 입었다. 좁은 소매에 허리띠, 어두운 무늬가 수놓인 청색 장화. 단정하면서도 상쾌한 모습이었다. 옷은 사경행과 잘 어울렸고 그는 신중하고 우아한 귀공자로 보였다.

“그 의상은?”

심묘를 본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냥을 나가는 데다 무더운 여름에 심묘가 더위를 먹을까 걱정한 경칩은 특별히 시원한 의상을 준비했다. 치마 아래 비단 바지는 통이 넓고 바람이 잘 통했다. 상의는 얇은 망사 천으로 가슴 부분만 단단히 조여 맸는데, 안개 같은 연한 자색이었다. 평소 단정한 심묘가 색다르게 입으니 어여쁘게 피어난 듯 매우 매혹적이었다. 심묘가 자신의 옷을 돌아보며 반문했다.

“예쁘지 않아요?”

“산은 바람이 차가우니 외투를 걸쳐.”

심묘는 어이가 없었다. 6월에 차가운 바람이 불 리 없었다. 게다가 농서성은 사계절 내내 따뜻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네 몸은 사가의 소유야. 마음대로 살갗을 태우면 안 돼.”

“알겠어요. 경칩, 외투를 가져오너라.”

사경행은 그제야 잔소리를 그만뒀다.

모경과 예왕부의 호위는 이미 준비를 마쳤다. 개중에는 팔각도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부에 남겨두는 게 낫겠다 싶어 사경행이 묵우군 회향과 팔각을 심묘의 여종으로 분장시켰다. 사경행의 준비가 주도면밀하자 심묘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

황가 사냥에 심묘는 가지 않아도 되었으나 예왕부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의 오른쪽 눈꺼풀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걱정하는 낯빛의 심묘를 본 사경행이 심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답답해?”

“불안해요.”

“내 명은 길어. 부인, 걱정하지 마.”

심묘가 눈을 흘겼지만, 사경행은 입꼬리를 당긴 채 그녀를 끌고 부 입구로 걸어갔다.

“마차가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때 모경이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말에 올라탄 사경행은 심묘의 손을 잡아당겼다. 심묘가 가볍게 올라 말에 타자, 사경행 품에 폭 안긴 모양새였다.

“마차는 너무 느려. 활쏘기할 줄 알던데, 말도 탈 줄 알아?”

사경행은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대답하려 할 때 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사고가 생길 리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

사경행이 말을 채찍질하자, 말이 길게 울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이 엄청난 속도로 구불구불한 시장 안에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자 모두 놀라 무어라고 소리쳤다. 사경행은 크게 웃으며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심묘는 이번 생에서 사경행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말을 달려 광문당 입구에 나타난 귀공자. 그는 말 위에 단정히 앉아 건방진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재 그의 호흡이 귓가를 스쳐 자신의 뺨에 닿을 것 같았다. 그의 낮고 기쁜 웃음소리에 자신의 기분도 절로 좋아졌다. 사실 자신은 이런 자유를 열망했다. 전생에서도 담 위에 서서 멀리 날아가는 매와 종횡하는 말을 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열렬하게 바랐으나, 이미 깊은 궁에 갇힌 몸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 곁에서 자식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음껏 즐거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명제에서와 다름없이 당신은 대량에서도 무례하네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지.”

사경행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심묘를 한 번 바라보곤, 턱을 그녀 머리 위에 놓은 채 낮은 소리로 웃었다.

“너도 정경성에서 지금처럼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심묘는 멍해졌다. 사경행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심교교, 난 좋아.”

“나도 그래요.”

심묘가 웃으며 답하자 사경행이 동작을 멈추었다.

“너도 이런 내가 좋은 거야?”

심묘가 밝게 웃었다.

“아니요. 나도 이런 내가 좋아요.”

사경행이 이를 갈았다.

“심교교, 날 희롱하다니. 그동안 날 희롱한 사람은 모두 죽었어.”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여름의 미풍을 따라 멀리 날아갔다. 회향과 팔각이 이를 보고 귓속말을 했다.

“우리 주인님의 일방적인 구애라고 하지 않았어? 마마는 냉담하시다고. 그런데 두 분 사이가 엄청 좋아 보이는데.”

“마마는 차갑지 않으셔. 마마는 좋은 분이시라구.”

팔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아침 태양이 온 대지를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 심묘와 사경행은 수렵장에 도착했다. 수렵장은 산속에 있었다. 그래서 화란봉을 올라야 했다. 화란봉은 대량의 기이한 봉우리로 빽빽하고 웅장한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험준하지만 보기 힘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했다. 그러나 험한 만큼 맹수가 출몰하는 위험 지역도 있었다.

수렵장은 선황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선황이 살아 있을 때 전해 내려온 법에 따라, 60년 제전 때 황제는 수렵장 안 사냥터에 들어가 사냥한 수사자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역대 황제가 사냥 중 위험한 맹수를 만났을 땐, 금위군이 곁에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금위군이 맹수보다 위험했다.

심묘와 사경행의 등장은 시선을 끌었다. 사람들은 말 한 필에 함께 타고 온 그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이미 와 있던 정비가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어떻게 저렇게 오실 수가. 예의에 맞지 않습니다.”

영락제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의 이런 행동에 매우 불만인 것 같았다. 사경행은 심묘를 부축해 말에서 내린 뒤 영락제에게 다가갔다.

영락제는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기질은 냉담하나 준수하게 생긴 영락제와 사경행이 함께 서자 그 자리에 모인 남자들의 풍채를 모두 합친 것보다 잘나 보였다. 사경행과 심묘는 영락제에게만 인사했다. 자신에게는 인사를 하지 않는 두 사람을 본 정비는 입술을 깨물다가 갑자기 심묘를 보며 웃었다.

“예왕비마마, 오늘 예왕 전하와 함께 오셨군요. 두 분의 정이 깊어 말에 같이 타다니 정말 부럽네요. 전하께서 사냥터에 가실 때 마마도 함께 데려가시는 거 아닌가요?”

심묘가 답하기 전에 영락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함께 들어갈 필요 없다.”

정비는 영락제가 대답할 거라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다. 자신은 심묘가 예왕과 함께 사냥터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왕이 보호한다 해도 맹수가 많으니 그녀가 꼭 다치지는 않아도 매우 놀라 난처한 모습을 보이면 통쾌할 것 같았다. 채하연에서 심묘가 고가 사람의 체면을 짓밟은 일을 들었고 이에 그녀에게 쓴맛을 보여줄 작정이었는데, 영락제가 이렇게 나오다니 참아야 할 듯했다. 그에게 미움을 살 수는 없었다.

한편 심묘는 영락제가 자신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님을 알았다. 오늘 형제 두 사람이 사냥터에 들어가는 일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두 사람은 이미 준비를 잘했겠지만, 예상외의 인물이 더 추가되면 변수가 늘어날 수 있다. 영락제는 자신이 들어가 그들의 계획에 영향을 줄까 걱정한 것일 터였다.

사경행은 웃으며 정비를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을 지켰으나 정비는 그의 시선에서 경고를 읽었다. 영락제를 제외하고 가장 무서운 사람이 예왕이었다. 심지어 부친보다 더 두렵기도 했다. 정비가 더는 말하지 않자 사경행이 심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폐하, 별일 없으면 교교를 데리고 좀 돌아다녀도 되겠습니까? 막 대량에 와서 이곳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락제의 안색 따위 살피지도 않고 심묘를 데리고 떠났다. 몇 걸음 걷자 멀리서 계우서가 흥분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단숨에 달려온 계우서는 그들 앞에 섰다.

“3형, 형수.”

심묘는 해맑게 웃는 계우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대량 좌도 가문의 공자는 명제의 풍선전당포 주인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심묘는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계 공자, 왜 계속 전하를 3형이라 부르는 거예요?”

당황한 계우서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형수한테 얘기 안 한 거야?”

사경행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계우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심묘에게 미소 지었다.

“사실 셋째 사촌 형이라고 불러야 맞아요. 3형의 어머니가 내 이모랍니다. 우리는 이종사촌 형제예요.”

계우서의 어머니는 사경행의 어머니와 친자매였던 것이다. 계우서는 황제의 친척이자 사경행의 사촌 형제였다. 늘 계우서 흉을 보면서도 사경행이 그와 계속 일을 한 이유가 있었다. 계우서가 헤헤 웃더니 두 손을 마주 비볐다.

“내 어머니도 형수를 만나셨더군요. 어머니는 형수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어요. 단정하고 정숙해 대갓집 규수답다고 하셨지요. 나더러 어째서 3형처럼 명제에서 형수 같은 미인을 데려오지 않았냐고 꾸중도 하셨고요.”

사경행의 눈치를 보던 계우서가 말을 마치자 사경행이 평온히 말했다.

“계우서, 너 탑뢰에 가고 싶은 게냐?”

“에이, 농담이야, 농담.”

계우서가 벌떡 일어나 엉덩이에 불붙은 듯 재빨리 달아났다.

“고양 형도 오늘 온다던데, 난 고양 형을 보러 갈게. 3형은 천천히 놀아.”

심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고양도 왔나 보군요. 어째서 안 보여요?”

“고양은 늦게 올 거야. 방위 대신이거든.”

“아, 그렇구나.”

많이 놀라지 않는 심묘를 보고 사경행이 미소 지었다.

“역시 고양의 신분을 알고 있었구나.”

심묘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고양의 신분을 아는 건 전생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전생의 명제 조공연회에는 사경행이 아닌 고양이 왔다. 이번 생에서 사경행이 고양의 신분을 밝힌 적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처음부터 고양이 사경행의 사람인 것을 아는 태도를 묵인했다. 다행히 지금도 이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냥이 시작되면 날 따라 수렵장에서 토끼나 들새를 사냥할 수 있어. 사시가 되면 폐하와 난 안으로 들어가야 해. 호위는 남겨둘 테니 돌아다녀. 내가 늦어져서 돌아오지 않으면 이모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 이모가 널 예왕부에 데려가 줄 거야.”

심묘가 의심스럽다는 듯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까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일을 처리했다. 명제에서 황실 사람이 그리 호시탐탐 노리는 임안후부의 소후야였음에도 계획했던 일을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을뿐더러 담대한 성정도 지닌 사람인데 평소답지 않았다. 오늘 사경행의 모든 것이 매우 의심스러웠다.

심묘의 근심을 눈치챈 사경행이 애매하게 웃었다.

“안심해, 나와 폐하는 완벽하게 준비했어. 게다가 아직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죽겠어?”

심묘는 그를 밀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 앞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다니. 그때,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는 시선을 느낀 심묘가 주변을 살폈다. 엽 부인이었다. 그녀 역시 가볍고 편한 옷을 입었다. 멀리서 심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시선에 심묘는 다시 불편해졌다.

“오늘 엽가 사람도 사냥해요?”

“엽무재는 승상이니 당연히 따라오지. 그러나 신하들은 밖에 있어야 해. 안에는 들어가지 못해. 엽 부인을 주시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어?”

사경행이 묻자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인지 모르겠어요. 엽가 사람은 기분이 나쁘네요. 당신도 조심해요.”

“폐하는 엽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거수일투족 주시하고 있지만, 아직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어.”

사경행은 여전히 신중한 표정인 심묘를 바라보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들은 바깥에 있으니 국면에 영향을 줄 수 없어. 걱정할 필요 없어.”

심묘가 다시 엽 부인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그녀는 이미 다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묘는 마음속의 불안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오늘 대량의 고위 관원들이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러 왔다. 담력이 큰 사람들은 사냥터를 제외한 수렵장으로 따라갔고, 그렇지 않으면 수렵장 밖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고완아도 이곳에 있었다.

고완아는 정성스레 단장한 듯했다. 정교한 옷차림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심묘가 없었다면 그녀가 이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러나 심묘 때문에 그녀의 분홍색 옷은 경박해 보였다. 혼자 있을 땐 아름다워 보였지만, 예왕 부부와 함께 있으니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았다.

이는 고완아를 탓할 수 없었다. 사경행과 심묘 사이에는 묘한 조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왕은 황실의 자손이니 우아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심묘는 명제 보통 관리인 무장 집안의 아가씨인데도 부귀한 기운이 흐르고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두 사람 사이의 완벽한 분위기에 고완아는 낄 수 없었다. 그건 선녀에게도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고완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시선은 사경행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심묘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꿀처럼 맑고 달콤했다.

“예왕비마마, 이곳에서 뵐 줄 예상하지 못했네요. 채하연에서 그렇게 헤어져서 아쉬웠어요.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인연이네요.”

고완아는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 채하연에서 거만하게 횡포를 부리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속으로 실소했다. 고완아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사경행이 믿을 거라 여기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날 고부에 있던 다른 부인들의 언행은 넘어갔지만, 그녀의 이야기만은 사경행에게 모두 다 말했다. 그런데 아쉬웠다니, 사실은 원한이 사무쳤을 것이다.

심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경행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아름다운 눈에 깊은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예왕 전하, 오늘 매우 위풍당당해 보이세요. 언니의 궁에서 만났을 때 전하께서 제 금 연주가 출중하다 칭찬해주셨지요. 연습을 열심히 해서 전보다 더 많이 늘었답니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제 솜씨를 평가해주실 수 있을까요?”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 앞에서 고완아가 거짓말할 리 없었다. 사경행이 정말 고완아의 연주를 듣고 출중하다 칭찬한 건가 싶었다. 심묘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본 사경행이 입술을 치켜들어 약 올리듯 웃었다.

“기분 나빠?”

사경행의 얼굴을 본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사경행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고완아를 바라볼 때, 그의 웃는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폐하와 이야기하러 갔다가, 정비마마를 마주쳤었지. 정비마마가 네가 정화궁에서 금을 연주한다고 하더군. 폐하도 듣고 싶어 하시기에 따라간 것뿐이다. 나는 그날 까마귀와 참새가 아름다움을 겨룬다고 했지. 비꼬는 것과 칭찬도 구분하지 못하니 좀 더 훌륭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아야겠구나.”

심묘는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고완아가 그렇게나 아둔할 줄 생각지도 못한 데다가 사경행은 체면을 봐주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비꼬았다. 고완아의 얼굴이 바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실 정화궁에서 고완아는 심장이 두근거려 예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가 자신을 칭찬한다 여겼다. 그런데 지금 예왕에게 사실을 들으니, 자신은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사경행이 한마디 더 한 후 심묘를 끌고 떠났다.

“후궁의 궁에 갔다는 말은 앞으로 함부로 꺼내지 말아라. 네가 고의로 말을 퍼뜨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죄명을 짊어질 수는 없구나.”

심묘는 혼자 남겨져 멍하니 서 있는 고완아가 내심 불쌍했다.

“고가 사람은 대단한데, 어째서 아가씨들은 모두 저 모양인가요?”

정비와 고완아는 이전에 머저리였던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나 자신은 심가 이방과 삼방이 고의로 그렇게 길렀다지만, 고완아와 정비는 고 부인의 친딸이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음과 생각이 권력 쟁탈에만 집중되어 있으니 자녀 교육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고가는 줄곧 딸에게 너그러웠어. 그들은 아들만 제대로 인재로 길렀지.”

하기야 고가 소저는 고가에서 태어났으니 아무렇게나 커도 일생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거만하고 제멋대로 굴어도 배후에 버팀목이 되는 집안이 있으니까.

사경행은 심묘와 함께 수렵장 가장자리로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말을 골랐다. 사경행이 다가가자 철의가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한 필은 덩치가 큰 검은색 준마였고, 한 필은 마르고 작은 밤색 말이었다. 사경행이 심묘를 밤색 말 위에 올려주고 자신은 검은색 말에 탔다.

영락제 쪽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위군이 영락제를 따라 수렵장으로 들어갔다. 고수(鼓手, 북 치는 사람)가 박자에 맞춰 북을 치기 시작했다. 오래된 악장(樂章, 제전 등 나라의 공식 행사에서 쓰는 음악) 같았다. 북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높은 단 위 궁수가 활을 쏘았다. 화살은 곧장 날아가 먼 곳에 있는 과일을 명중시켰다. 그러자 북 치는 사람이 큰북을 쳤다. 사냥이 시작됐다!

사경행은 심묘를 데리고 수렵장에 머물렀다. 모경을 비롯한 호위들도 곁을 따랐다. 그러나 사냥터를 제외한 수렵장은 위험하지 않았다. 사고가 생길 리 없기에 확률이 아주 희박한 의외의 상황을 대비할 뿐이었다.

“당신은 언제 사냥터로 들어가요?”

심묘는 말을 타며 사경행에게 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말을 타지 않았으나 밤색 말은 온순해서 제어하기 수월했다.

“사시가 되면 폐하께서 신호를 줄 거야. 그러니 아직 괜찮아. 여우 잡아볼래?”

“여우?”

사경행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고삐를 끌었다.

“따라와.”

사경행은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그 혼자 잡은 사냥감만 해도 한 짐이었다. 심묘는 그가 민간의 사내였다면, 사냥으로 집안을 부유하게 만들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활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줄곧 심구가 그의 실력을 과장한다고 여겼는데 오늘 보니 정말 백발백중이었다.

“또 뭐를 원하지? 뭐든지 잡아줄게.”

사경행이 환하게 웃었다. 심묘가 입을 열기 전에 종양이 급히 달려와 숨을 헐떡거렸다.

“주인님, 큰일입니다. 폐하께서 사냥터에 들어가셨습니다! 철의와 제가 곳곳을 살폈으나 폐하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습니다. 화란봉 바닥에서 말굽 흔적을 봤습니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갔다고? 내게 신호도 없이 혼자?”

그의 눈빛이 반짝였고 갑자기 낮게 소리쳤다.

“제기랄!”

사경행이 모경에게 분부했다.

“너희는 부인을 보호해 밖으로 나가거라. 철의는 날 따라와라.”

“지금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불안한 예감이 점점 커져 심묘는 사경행을 붙잡았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사경행이 그녀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가라앉은 기색이 스쳤다.

“계획이 바뀌었어.”

심묘가 주먹을 쥐고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릴게요.”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채찍을 높이 든 그의 뒤로 철의가 바짝 따라붙었다.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흙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말고삐를 팽팽히 잡았다.

“마마, 돌아가시지요.”

모경의 말에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이곳을 돌아다닐 기분이 아니었다. 모경과 호위 무리가 함께함에도 심묘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쿵쾅거렸다. 오늘은 위험이 겹겹으로 즐비해 있었다. 영락제의 지위는 생각했던 것처럼 견고하지 않았다. 병권을 쥔 고가를 우두머리로 해 은은히 모반의 기미가 있었다. 그러나 고가는 이전 선황에게 충성한 세가였다. 왜 고가가 영락제에게 반기를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선황과 영락제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어 선황이 그에게 지위를 물려주길 원치 않은 건지, 영락제의 지위도 모종의 수완을 통해 얻은 거라 가슴에 원한을 품은 선황의 지지세력이 그를 끌어내리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과 영락제는 오늘 일을 단단히 준비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영락제는 신호를 주지 않고 홀로 사냥터로 들어갔다. 금위군 중 누군가 영락제를 위협해 앞당겨 들어갔을 가능성과 영락제가 사경행과 상의하지 않고 홀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심묘는 두 번째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수렵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음흉한 생각을 숨긴 사람이 이곳에서 손을 쓰긴 어려웠다. 그러니 그들은 반드시 사냥터 안으로 들어간 뒤 손을 쓸 터였다.

그러나 영락제가 왜 앞당겨 들어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사경행을 이렇게 긴장하게 한 건지 의아했다. 심묘는 이렇게까지 엄숙한 사경행은 처음 보았다. 울적한 기분으로 수렵장을 나설 때 매가 길게 울었다. 순간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 생각을 빠르게 부정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렵장에서 나오자 계 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계 대인과 함께 사냥을 가지 않고,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 같았다. 대량에 아는 사람이 없는 심묘는 그녀에게 먼저 인사했다. 계 부인도 웃으며 답했다.

“마마,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습니까? 안에서 오래 있으실 거라 여겼습니다. 수렵장에는 여우가 많아요. 운 좋으면 진귀한 흑색 여우를 사냥할 수 있지요. 흑색 여우 가죽으로 목도리를 만들면 따뜻하고 아름답답니다.”

“저도 구경하러 온 겁니다. 사냥은 안 해요. 부인, 제게 높임말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친척이니 교낭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저도 뻔뻔스럽게 부인을 이모라고 부르겠습니다.”

계 부인은 잠시 멍하게 있더니 이윽고 따스하게 웃었다.

“경행이 말했군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교낭이라 부를게요.”

심묘가 환하게 웃었다. 나설안은 오라버니만 있어 자신에게 이모는 없었는데 이렇게 이모가 생기자 신선했다. 게다가 계 부인은 시원스럽게 정말 자신을 교낭이라 불러주었다. 쾌활한 계 부인이 어떻게 계우서를 길러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늘 경행은 사냥할 테니 나와 바깥에서 기다려요. 해가 떨어지면 돌아올 거예요. 그때 계부에서 식사해도 좋겠네요. 경행이 돌아온 뒤, 아직 우리 부에서 같이 식사를 못 했네요.”

계 부인이 심묘의 손을 잡고 걸으며 제안했다. 심묘도 웃으며 승낙했다. 그러나 사경행을 생각하자 또다시 걱정스러워져 물었다.

“이모, 사냥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맹수를 사냥하는 건데 걱정이에요.”

계 부인은 탄식했다.

“이것은 개국 이래 내려온 규칙이라……. 사실 폐지하려 했는데, 선황 폐하께서…….”

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심묘를 보며 웃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금위군도 갔잖아요. 맹수는 흉악하지만, 금위군도 살생을 할 줄 알아요. 게다가 두 사람은 무공이 높아서 괜찮을 거예요.”

심묘는 따라 웃었지만 계 부인은 진상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내막을 알면 이런 순진한 표정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금위군이 있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들이 있어서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함부로 계 부인에게 상의할 수도 없었다. 대량에 아는 사람이 없고 사경행이 안배한 것들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묘는 배랑을 불러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적어도 그와는 이런 일을 상의할 수 있을 터였다.

<12권에서 계속>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