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12권
57장
사냥터 바깥, 숲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에 천막이 쳐 있었다. 오늘 온 사람들은 모두 왕족과 귀족이기에 많은 얼음을 준비했다. 그래서 서늘한 이곳에서 아가씨들과 귀부인들이 차를 마시고 간식을 먹었다. 때때로 가족이 사냥감을 들고 돌아오면 환호하며 앞으로 달려가 주변에 자랑하곤 했다. 신선한 즐길 거리로 여기는 듯했다.
심묘의 마음이 점점 가라앉았다. 심묘는 멀리 겹겹 구름이 둘러싸인 화란봉을 바라보았다. 화란봉은 기이한 봉우리로 길이 험준했다. 높은 화란봉은 정상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즐겁게 잡담을 나누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정말 수사자를 사냥하는 건지, 아니면 구천 위 용을 사냥하는 건지 불안했다. 그때, 엽 부인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그녀는 계 부인 옆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왜 안에 들어가지 않으세요?”
“제가 어디 사냥을 하나요? 보기만 하는 거지요.”
계 부인도 미소로 답했다. 계가와 엽가는 왕래가 없지만, 체면상 웃으며 이야기해야 했다. 엽무재는 승상이니 관직이 계 좌도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엽 부인은 들어가지 않으세요?”
“난 안 가요. 말을 타면 멀미가 나서 견딜 수 없어요.”
계 부인의 물음에 손을 휘저은 엽 부인이 심묘에게 눈길을 보냈다.
“예왕비마마는 왜 벌써 나오셨어요? 예왕 전하와 함께 들어가시는 걸 봤는데, 왜 더 놀지 않으시고?”
엽 부인은 무언가 탐색하는 것 같았다. 심묘는 그녀가 오늘 사냥터의 진상을 아는 건가 의심스러웠다. 대량에서 고가와 엽가는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가문이었다.
“태양이 너무 강해 현기증이 나서 나온 겁니다. 게다가 전 살생하는 장면을 볼 수 없어요.”
긴장한 심묘가 인상을 찡그렸다.
계 부인이 미소 지었다.
“마마의 마음이 여린 걸 탓할 수 없지요. 평범한 사람은 토끼를 죽이는 것도 보길 원치 않지요.”
엽 부인이 꼬치꼬치 심묘에게 따져 물을까 걱정한 듯 계 부인이 일부러 화제를 바꾸었다.
“근래 엽 공자가 아팠다던데, 괜찮아졌나요?”
엽 공자는 소첩이 낳고 엽 부인이 데려다 키운 적자를 말했다.
“괜찮아요. 고질병이라 비가 오기만 하면 몹시 아파하는데, 오래도록 방법이 없네요.”
말투는 냉담했다. 심묘는 엽 공자가 엽가 적자라 하인들이 공손하게 대하긴 했지만, 모두 속으로는 몸이 불편한 그에게 장래가 없다고 여긴다는 걸 팔각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엽 부인 역시 그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심묘는 만난 적 없는 엽 공자가 조금 가여워졌다.
계 부인은 엽 부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엽 부인의 주의를 돌리려는 것 같았다. 엽 부인은 곧 성가셔진 듯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계 부인과 심묘는 앉아 사경행과 영락제를 기다렸다.
“소식이 없는지 보고 오너라.”
태양이 점점 기우는데, 영락제와 사경행은 아직 행방이 묘연했다. 심묘가 모경에게 분부했다. 계 부인은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냥에는 인내심이 필요해 종종 늦을 때도 있어요. 화란봉의 길이 가팔라서 다음 날에 돌아온 적도 있었구요.”
심묘도 자신이 너무 예민한 건가 싶었다. 그러나 계 부인의 눈 속에도 은은한 초조함이 내비쳤다. 심묘의 마음이 팽팽해졌다. 사경행의 일을 몰랐다면 정말 안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경행도 홀가분하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해가 지자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황제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신하들 역시 수렵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묘는 계 부인에게 이런 상황이 종종 있는지 다시 물었다.
“아까도 얘기했듯 가끔은 이렇답니다. 그러나 아주 드문 일이긴 해요.”
신하 몇몇은 야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름이라도 밤에는 이슬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긴 천으로 장막 같은 것을 만들었다.
걸어 다니던 심묘는 고완아가 중년 남자와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애교를 부리며 간청하는 듯했으나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고완아는 곧 마차에 올라탔고 호위들과 함께 떠났다. 이곳에 있으려 했으나 남자가 허락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심묘의 시선을 느낀 듯 남자가 떠나려는 심묘 쪽으로 사납게 고개를 돌렸다. 흉악한 얼굴이었다. 체구는 우람한 곰 같았고, 온 얼굴에 탐욕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성격도 매우 급해 보였다. 심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음산했다. 팔각이 속삭였다.
“고가의 가주, 고정순 장군입니다.”
고완아의 아버지, 고가의 무장이었다. 같은 무장인 심신도 아주 용맹하지만 이 사람처럼 잔혹해 보이진 않았다. 고정순은 살기를 감출 수 없는 것 같았다. 심묘는 고 부인과 고완아, 정비가 그다지 총명하지 않은데 고가가 어떻게 대량에서 명성과 지위를 유지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지금 고정순을 보니 바로 이해가 됐다. 죽음의 신의 현신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버티고 있으니 영락제도 쉽게 고가에 손을 쓰지 못할 터였다. 그때, 고정순이 딸을 먼저 보낸 이유가 화란봉의 결과를 기다리기 때문인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심묘는 그를 한 번 바라보고 자리를 떠났다.
고가 사람을 비롯해 엽 부인도 이곳에 남았다. 돌아온 엽무재는 엽 부인과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고가, 엽가 양가가 모두 있는데, 영락제가 이곳에서 재난을 당하면 그들이 이 기회를 틈타 대역무도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심묘는 걱정스러웠다. 사방을 둘러보니 나머지 대신들은 장막 안에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 사냥이 재미있는 놀이라고 간주해, 영락제와 사경행이 수사자를 사냥해 돌아와 제전에 제물로 올리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심묘가 걸음을 멈춰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은 조용했다. 여름밤, 미풍이 가볍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상쾌했다. 그러나 이런 밤 경치가 정말로 평온하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교낭, 바깥이 추우니 장막 안으로 들어와요.”
계 부인이 그녀를 불렀다. 심묘는 미소로 답하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계 대인은 장막 안에 없었고 대신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 부인이 심묘에게 뜨거운 차를 건넸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 없을 거예요. 오히려 교낭이 감기 걸리면 경행이 내게 죄를 물을 테니 그땐 감당 못 할 거예요.”
“어디 이모께 그러려구요.”
심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와 선황 폐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맞나요?”
계 부인이 당황한 기색을 급히 숨기며 미소 지었다.
“왜 갑자기 선황 폐하에 대해 묻는 거예요?”
계 부인이 전력을 다해 숨겼으나 심묘는 그녀의 원망을 느낄 수 있었다. 선황은 대량 조정과 사경행, 영락제에게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다. 계 부인은 선황의 처제이니 선황에 대해 잘 알 터였고, 그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에 심묘는 숨기지 않기로 했다.
“전하께서 조금 이야기를 꺼냈으나 그다지 분명치 않아서 궁금했어요.”
놀란 계 부인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경행이 교낭과 이런 얘기까지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건 경행의 집안일이니 내가 교낭에게 이야기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때가 되면 경행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줄 테니 기다려봐요.”
계 부인은 선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심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자신의 추측에 더욱 힘을 실었다. 역시 선황은 사경행 형제에게 잘하지 않았고, 선황후의 친정에도 마찬가지로 대한 것 같았다. 심묘가 깊은 생각에 빠지자 계 부인도 뭔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심묘에게 말을 건넸다.
“교낭, 피곤할 테니 좀 자도록 해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어요.”
계 부인이 권했지만, 심묘는 잠을 잘 기분이 아니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잠시 앉아 있을게요. 잠이 오지 않네요.”
심묘가 완곡하게 거절하자 계 부인도 더 권하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계 부인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나이가 있기에 심묘처럼 밤을 새우기는 힘들 터였다. 곧 졸기 시작한 그녀에게 피풍의를 덮어주고 심묘는 밤새 앉아 있었다.
* * *
희미한 아침 햇살이 장막을 비출 때 멀리 산림 안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계 대인은 다른 쪽에서 동료와 술을 마셔 아직 취해 있었다. 그는 계가의 장막으로 들어갈 때 나오던 심묘와 마주쳤다. 심묘가 당황해하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이모는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어요. 자고 계시니 목소리를 작게 하세요.”
계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식사하러 가라는 계 대인의 말에 심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장막에서 나왔다.
밖에 있는 부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부귀하고 편한 생활을 즐겼으니 장막 안에서 밤을 보내기가 힘들었을 터였다. 유약한 사람 몇몇은 어제 관저로 돌아갔으니, 남은 사람들은 영락제에게 아첨하려는 생각, 아니면 드물게 힘든 체험을 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영락제가 데려온 궁중 요리사 몇 명이 식사를 준비했다. 회향이 심묘에게 죽 한 그릇을 건넸고, 심묘는 죽을 먹으면서 팔각에게 물었다.
“전하 쪽에서 무슨 소식은 없느냐?”
팔각이 예상대로 고개를 젓자 심묘는 한층 더 답답했다. 태양은 이미 산머리에 드러나 한 시진쯤 지나면 온통 밝아질 터였다. 사경행이 산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해도 지금쯤이면 내려와야 했다. 사냥 때문에 산에 이틀이나 머무는 선례는 한 번도 없었다. 짐승을 사냥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해도 너무 오래 끌고 있었다.
“너희 묵우군에는 무슨 신호 없느냐? 너희 주인이 이번 일을 너희와 상의하지 않았느냐? 일에 성공하면 무슨 신호를 준다든지.”
팔각과 회향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본 뒤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은 저희에게 이번 일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심묘는 가볍게 한탄했다. 멀리서 기지개를 켜는 고정순과 엽무재가 시야에 들어오자 머리가 한층 아팠다. 그때, 잘 아는 사람이 눈에 보였다. 멍해진 심묘는 죽 그릇을 팔각에게 주고 그에게 다가갔다. 계우서였다. 마음이 얼기설기 뒤엉킨 심묘는 얼른 계우서를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끌고 갔다.
“어떻게 돌아온 거예요?”
“형수, 그게 무슨 뜻이에요?”
계우서의 답변에 심묘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경행과 같이 있지 않았어요?”
계우서는 의아했다.
“아니요. 전 밖에 있었어요. 황실 사람만 안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저도 따지면 황실 친척이지만 자격이 부족해요.”
기이했다. 심묘 자신은 계우서가 사경행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계우서가 가지 않았다면, 사경행과 영락제 두 사람만 싸우고 있다는 소리이다.
“제대로 대답해줘요. 사경행은 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계우서가 억울해하며 코를 문질렀다.
“형수, 사람을 잘못 골랐어요. 3형은 큰일을 할 때 날 데려가지 않아요. 위험할수록 날 뺀다구요. 명제에 있을 때도 난 풍선전당포만 관여했지 다른 건 절대 건드릴 수 없었어요. 사냥터에는 고양 형이 함께 갔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3형은 고양 형만 데려가고, 내가 따라가려 해도 허락하지 않아요.”
“고양? 고양도 신하인데, 그는 어떻게 간 거예요?”
“고양 형은 3형 수행원으로 변장해 따라갔어요. 고양 형은 똑똑하고 의술을 아니 무슨 일이 생기면 도울 수 있거든요.”
심묘의 마음이 단단해졌다. 의술을 할 줄 아는 고양을 데려갔다니 안심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국세가 위태로운 건지 더더욱 걱정스러웠다. 자신은 사경행이 입이 거칠지만 사실 계우서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경행은 그를 보호하려고 일부러 자기와 연루시키지 않는 것이다. 소명풍 때와 같은 방법이었다. 이렇게 거리를 두면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계가는 보존할 수 있을 터였다.
계우서는 심묘의 표정을 보고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3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아니요.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초조할 뿐이에요.”
계우서가 단호하게 말했다.
“형수가 분별없는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좀 전은 분명 이상했고 어제 고양 형을 봤을 때도 희한했어요. 3형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요. 이전에 명제에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대량에 오자마자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아무도 내게 알려주시지 않으니 답답하네요.”
사경행은 명제에서 임안후, 송신 공주, 소명풍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혼자 짊어지는 습관이 있었다. 지금은 계우서의 차례였다. 그러나 이 일은 확실히 모르는 게 나았다.
“미안해요. 그건 나도 대답해줄 수 없어요. 나도 그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니까요.”
“사냥터는 황실 사람만 들어갈 수 있으니 그 안에서는 위험할 리 없어요. 그런데 3형과 폐하는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요. 형수, 짐작 가는 거라도 없으세요?”
“뭘 몰라?”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 부인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는지 몰라도 그녀가 계우서와 심묘를 바라보는 얼굴은 상당히 괴상했다.
“경행과 행지가 왜?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계 부인은 심묘를 불러 함께 계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심묘가 계우서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팔각과 회향은 고정순과 엽무재를 경계하느라 바빠 계 부인을 조심치 않았기에 그녀는 심묘와 계우서의 대화를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수랑 잡담 좀 한 거예요.”
계 부인은 언짢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어미를 속이지 말아라. 넌 명제로 경행을 찾아간 뒤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명제에서 무엇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지.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넌 계가의 공자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은 상관해야겠다. 너,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 게냐. 왜 그런 말을 했지? 경행과 행지가 위험한 게냐?”
계우서는 말문이 막혀 도움을 청하듯 심묘를 바라보았다. 난처해진 심묘가 입을 뗐다.
“이모, 오해이십니다. 저와 우서는 그냥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전하가 돌아오지 않아 다급해 우서에게 물어본 건데, 우서도 아무것도 모르네요. 제가 생각이 많은 것이니 이모는 우서를 탓하지 마세요.”
계 부인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매서웠다.
“교낭, 이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에요. 난…….”
그때, 팔각이 달려와 말했다.
“마마, 돌아오셨습니다. 폐하께서 하산하셨습니다.”
계우서는 대사면을 받은 듯 얼른 계 부인을 바라보았다.
“봐요. 3형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말했지요. 어머니, 허튼 생각 마시고 갑시다. 우리 3형과 폐하께서 잡으신 사자를 보러 가요.”
계우서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심묘도 영락제 일행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계 부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도 얼른 가봐요.”
계 부인은 팔짱을 낀 채 탄식했다. 심묘가 평온한 표정을 지으니 무어라 덧붙이기 어려웠다.
한 무리의 금위군이 걸어왔다. 우두머리는 영락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락제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왔다. 영락제 허리에 찬 패검이 피로 물든 것 같아 보였다. 황가 사냥이라고는 하지만 황제가 직접 위험을 무릅쓸 리 없었다. 호위가 활을 겨누고 황제는 명령할 뿐이다. 그런데 패검이 피로 물들었다는 건, 영락제가 직접 손을 썼다는 뜻이다.
영락제의 표정은 종전과 같아 기분을 알기 어려웠다. 기다리던 정비가 애처롭게 그를 맞았다.
“폐하, 나오셨군요. 신첩은 이곳에서 괴롭게 밤새웠습니다. 폐하를 걱정하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답니다.”
영락제는 냉담히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말이 없었다. 심묘는 엽무재의 표정이 평소와 같으며, 고정순의 표정이 음산한 것을 보았다. 그때 금위군 몇이 말 위의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에 주위 여자들이 놀라 소리쳤다. 커다란 사자의 사체였다. 핏자국이 얼룩덜룩하고 등에는 무수한 화살 구멍이 나 있어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것 같았다. 즉시 대신들이 축하의 말에 아첨을 담아 건넸다.
“폐하, 영민하고 용맹스러우십니다. 대량 조정의 복입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추앙했다. 심묘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표정은 평온했으나 마음속에는 한차례 파도가 들이치고 있었다. 사경행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영락제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고정순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물었다.
“폐하, 어째서 혼자십니까? 예왕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사람들은 그제야 예왕이 없는 것을 눈치챘다. 영락제가 팽팽히 고정순을 주시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길이었다.
“예왕은 부상을 당해 이미 성으로 돌아가 치료 중이다.”
사람들이 전부 떠들어댔다. 심묘의 심장이 즉시 얼어붙었다. 사경행이 위급하지 않다면 영락제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예왕의 부상을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감추지 않는 걸 보아, 부상이 심각해 어차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계 부인이 심묘의 손을 꽉 잡으며 그녀를 달랬다.
“사냥터에서는 부상을 면하기 어려워요. 실수로 조금 다친 것 같은데, 많은 호위가 보호했으니 분명 큰일은 아닐 거예요.”
그러나 계 부인의 얼굴에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심묘는 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몇 마디 적당히 맞장구쳤으나 마음은 거칠게 요동쳤다. 영락제는 사경행의 부상 정도를 신하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사경행을 먼저 보냈을 것이다. ‘생채기’ 수준의 문제가 아닐 터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철의나 고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더욱 초조해졌다.
영락제는 많은 말을 하기 싫은 듯했다. 수사자를 사냥했으나 표정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왕의 부상 정도를 추측하며 예왕이 다쳐 영락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거라고 여겼고, 감히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정비조차 입을 다문 채 조심스럽게 옆에서 영락제를 섬겼다.
수사자를 사냥했으니 사람들은 사냥터에 더 남을 필요가 없었다. 영락제가 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자, 여러 신하와 그 가족들 역시 짐을 꾸렸다. 사람들은 조심스러웠으나 고정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락제에게 60년 제전 일을 물었다. 영락제는 평소 고정순의 체면을 챙겼지만, 오늘은 대꾸도 없이 차갑게 떠났다. 그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속닥거렸다. 그러나 고정순은 조금도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즐거워하는 듯도 했다. 그의 흉악한 얼굴에 웃음이 더해져 더욱 공포스러웠다.
심묘도 서둘러 예왕부로 돌아가려 했다. 사경행의 부상이 걱정스러웠다. 계 부인과 계우서가 자신을 따라오려 하자 심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부상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모와 우서가 지금 오시면 남에게 약점을 들킬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서 어떤 일이지 볼 테니 이모와 우서는 전하가 나아지길 기다렸다가 오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혼란에 빠져선 안 됩니다.”
계우서와 계 부인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들 역시 황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굴러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심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긴 두 사람은 더는 따라가지 않았다.
심묘와 모경 일행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예왕부로 서둘러 돌아갔다. 팔각과 회향이 심묘를 위로했다.
“마마, 안심하십시오. 주인님의 무공은 따라올 자가 없는 경지입니다. 웬만해서는 주인님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적의 귀를 혼동시키기 위한 계략일 겁니다.”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느낌이 좋지 않다.”
심묘는 좀 전 대체 어떻게 태평한 모습을 유지했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로 몹시 불안했다. 지금 이곳이 예왕부가 아닌 게, 사경행이 어떤지 보지 못하는 게 더없이 한스러웠다. 심묘의 모습을 본 팔각과 회향은 서로 마주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왕부에 도착하자 심묘는 마차에서 내렸다. 부 안은 유달리 조용했다. 평소라면 당숙이 마중 나왔을 텐데 오늘은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더욱 애가 탄 심묘는 두말하지 않고 뜰로 걸어갔다. 마침 당숙이 사경행의 침소 앞에 서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심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당숙도 마침 그녀를 보았다. 심묘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물었다.
“전하는 어때요?”
“전하의 부상이 아주 심각합니다. 고 공자께서 지금 치료하시는 중입니다. 오랫동안 이렇게 크게 다치신 전하는 보지 못했습니다.”
심묘는 더는 듣지 않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에는 짙은 피 냄새가 가득했다. 철의도 있었다. 그는 침묵한 채 수건을 대야에 헹궜다. 대야 안 선혈은 사람을 몸서리치게 하기 충분했다. 고양은 미간을 찡그린 채 심묘를 맞이했다. 그는 멍해졌다가 곧 입을 열었다.
“마마…… 알고 계셨나요?”
심묘가 빠르게 사경행에게 다가갔다. 사경행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안색은 백지장 같으며,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복부에는 중중첩첩 화살 상처가 있었다. 가장 깊은 건 칼에 베인 상처로 지난번에 본 것과 달랐다. 명백히 새로 생긴 것이다. 옛 상처가 낫기 전에 또 상처가 나 더욱 흉악해 보였다. 심묘의 가슴을 가장 차갑게 한 건 상처 주위의 피가 짙은 자주색이라는 것이었다. 심묘가 사경행의 상처를 가리키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저건…….”
“독에 당했습니다.”
고양이 그녀의 말을 바로 이었다. 심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해독할 수 있나요?”
고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한 가지 독이 아니라, 여러 종류를 혼합한 겁니다. 해독하려면 먼저 무슨 독인지 구분해야 해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그리 오래는 못 버티실 겁니다.”
“버티지 못하면 버틸 방법을 찾아요. 경행의 목숨이 당신 손에 달렸으니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심묘가 가혹하게 소리쳤다. 고양은 또다시 멍해졌다. 자신은 심묘가 보이는 것처럼 온화하고 선량하지만은 않은 사람인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것 같은 격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철의도 얼떨떨해졌다. 줄곧 소부인이 묘책을 찾아내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또 성정이 부드럽고 온화하니 사경행과 함께하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죽은 선황후와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묘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기분을 가라앉힌 뒤 고양에게 물었다.
“경행이 지금 며칠을 버틸 수 있고, 당신이 독을 푸는 데는 며칠이 필요한가요?”
“옛 상처를 건드려 좋지 않습니다. 길어야 일주일 버틸 텐데, 독을 푸는 데는 최소 반 개월이 걸릴 듯합니다.”
고양은 처음으로 환자 앞에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경행은 평온히 침상에 누워 있어 잠든 귀공자 같았다. 고귀한 외모 아래 많은 칼날이 쑤셔 박혀 있었다. 심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
“잠시만 기다려요.”
그녀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경칩과 곡우, 두 사람은 사냥터에 가지 않아 방 밖에서 심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묘가 돌아오자 얼른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심묘는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화장대 아래 서랍을 더듬어 작은 갑을 꺼내, 상자 안에 든 둥근 약병을 꺼냈다. 심묘는 약병을 쥐고 빠르게 고양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귀원환 세 알이 있는데, 도움이 될까요?”
심묘가 출가할 때 풍안녕이 준 혼인 선물이었다. 귀원환은 명제 전 왕조에서 이름을 드날렸던 명의가 남긴 물건으로, 목숨 부지를 도와주는 약이었다. 심묘는 이 귀원환이 사경행에게 쓸모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를 본 고양이 크게 기뻐했다.
“어디서 구한 겁니까?”
그는 약병을 받아 한 알을 꺼내 세심히 살펴보고 냄새도 맡았다.
“맞습니다, 귀원환. 이게 있으면 열흘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심묘가 안도했다.
“그러나 열흘 안에 해독약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해낼 수 있을지 상관 말고, 시도해봐요. 안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못 한다고 생각지 마세요.”
심묘가 의연하게 당부했다. 철의와 당숙은 의아한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심묘는 평온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허둥거려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머리를 맑게 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다.
고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을 놔 귀원환이 몸 곳곳에 퍼지도록 해 전하를 안정시킬 겁니다. 모두 나가세요.”
심묘는 사경행을 한 번 바라보았다. 심장이 팽팽했다.
방을 나온 심묘가 당숙에게 말했다.
“먼저들 가봐요. 혼자 있고 싶어요.”
당숙이 멈칫했다가 당부의 말을 건넸다.
“마마, 건강에 주의하세요. 온 힘을 다해 마마를 돕겠습니다.”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묘는 방문 밖에 서서 뜰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피곤했다. 한참 동안 서 있던 그녀는 천천히 뜰의 계단에 앉았다. 대량은 일찍 더워졌다. 6월의 날씨는 무더웠다. 그러나 심묘는 바닥도 바람도 차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기에 옷을 싸매며 사경행이 죽은 뒤를 생각했다.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야 했다. 냉정하게. 누군가 이 생각을 읽는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비난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반드시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이성적으로 장래를 분석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사경행이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해진 건지. 장래 이 사람이 없으면 남은 세월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단맛을 맛보지 않았다면, 몰랐다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늦었다. 그를 잃는다는 사실을 어찌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신발 소리가 들렸다. 배랑이 계단에 앉은 심묘를 보며 옆에 앉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대량의 예왕이니 쉽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습니다.”
심묘는 침묵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그녀의 눈빛을 보자 배랑은 마음이 시큰했고 입안이 떫었다. 심묘의 이런 모습을 본 적 없었다. 그녀는 늘 모든 것이 준비된 모양새로 기세 높게 자신을 압도했다. 한 마리 맹수와 같이 기세등등했다. 그래서 정왕부 감옥에 갇혔을 때 심묘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지, 자신의 생사를 걱정할지 궁금했다. 그녀가 사람을 걱정할 땐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면서.
그러나 상상은 상상에 불과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생사를 염려하는 심묘는 자신이 그려본 모습과 달리 보통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옆에 앉은 심묘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심묘는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선생이야말로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난 상관 말고 먼저 돌아가 쉬어요.”
배랑이 한참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함께 있을게요.”
심묘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그에게 권하고 싶지 않았다. 사경행을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고양은 밤새 바삐 움직였고, 심묘도 뜬눈으로 온밤을 지새웠다. 사냥터에서 사경행의 귀환을 기다리던 전날 밤에도 자신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간 눈을 감지 않았으나 정신은 또렷했다.
닭이 세 번 울 때 고양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계단에 앉은 심묘와 배랑을 보며 멍하니 물었다.
“밤새 여기 앉아 있던 겁니까?”
심묘는 마비된 무릎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행은 어떤가요?”
“일단 안정됐어요. 귀원환의 효능이 좋네요. 지금부터는 해독법을 찾을 테니, 누구도 방해하지 마세요.”
고양이 심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사이 마마께서 전하를 돌봐주세요.”
당숙이 재빨리 고양에게 물었다.
“고 공자가 열흘 안에 나오지 않으면?”
고양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공기가 더더욱 가라앉았다.
“가봐요.”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심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해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남편을 둔 여인 같지 않았다. 고양이 맹세하듯 진지한 목소리로 약조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평생이 괴로울 것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떠나자 당숙이 심묘와 배랑에게 말을 건넸다.
“마마, 배 공자. 어젯밤 꼬박 이곳에 계시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셨지요. 지금은 전하 상태가 안정되었다니 조금 쉬세요. 전하께서 나으시기도 전에 두 분이 병나시겠습니다.”
“방으로 가져오세요. 방에서 쉬는 게 편합니다. 계 부인께 전하의 병세는 안정되었으나 아직 깨어나시지 않았으니 잠시 방문을 삼가달라고 전하세요.”
심묘의 분부에 당숙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배랑도 심묘가 침상 옆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고 자리를 떠났다. 그의 눈빛은 매우 어두웠다. 곡우가 죽 한 그릇을 가져오자 심묘는 그걸 받고 그녀를 바로 내보냈다. 방에는 심묘와 인사불성인 사경행, 그 곁을 지키는 철의만 남아 있었다. 심묘는 죽을 먹으면서 철의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는가?”
철의가 주저하자 심묘는 그를 엄숙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날 넌 사냥터로 따라갔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분명히 알 것이다. 날 속일 수는 없다.”
철의가 얼른 입을 열었다.
“마마를 속일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주인님의 계획은 저도 잘 모릅니다. 사냥 도중에 변고가 생겨 사냥터에서 폐하의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누군가 금위군 안에 매복해 기습했는데 주인님이 이를 막다가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그 칼에 독이 있었으니 누군가 폐하를 시해하려 작정한 겁니다.”
심묘는 단추를 끼워 맞추듯 상황을 추측해보았다. 황가 사냥은 영락제와 고가의 대국이었다. 영락제는 목숨을 걸고 고가를 와해시키려 했고, 영락제가 최후를 각오했다는 걸 알 리 없던 고가는 이 기회를 틈타 영락제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영락제는 이 계획을 사경행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경행이 알면 동의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심묘는 침묵한 채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 장난기가 많고 오만하지만 모든 일을 손바닥 안에 두었다. 많은 계략을 강구했고 부상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항상 웃는 얼굴로 고통을 숨겼다. 늘 강건하니 사람들은 그도 보통 사람처럼 아프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심묘는 마음이 아팠다. 사냥터로 들어가기 전에 사경행이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한 말을 떠올리자 더욱 속이 상했다. 귀원환의 효과는 길지 않았다. 고양이 열흘 안에 해독약을 만들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떡해야 할지……. 심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손톱이 점점 손바닥을 찔렀다.
* * *
미앙궁.
영락제가 상소를 매섭게 바닥에 던졌다. 현덕 황후는 탄식하며 허리를 굽혀 상소를 주웠다.
“고가는 담력이 크고 마음도 야박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짐 앞에서 거만을 떠는구나. 그놈의 피부를 벗기고, 피를 마시지 못해 한스럽다.”
“고가는 병권에 기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어요. 이번에는 막다른 처지에 몰려 도박을 한 셈입니다. 경행이 몸을 던져 구하지 않았다면…….”
영락제의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현덕 황후는 말을 줄였다. 영락제의 눈 속에 아픈 기색이 스쳤다.
“차라리 짐이 죽어야 했는데.”
“경행은 정과 의리를 아는 아이입니다. 폐하는 그 아이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아셨지요. 그래서 언질을 주시지 않았구요. 모든 게 폐하께서 준비하신 대로 흘러갔대도 경행은 절대 기뻐하지 않았을 겁니다. 폐하는 그 아이의 마음은 고려하지 않으셨어요.”
현덕 황후의 말은 가시를 품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영락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불만스러운 영락제는 황후의 말을 듣고 분통을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현덕 황후가 한발 앞서 그를 일깨웠다.
“폐하, 화내지 마세요. 아직 경행은 누워 있습니다. 일단 깨어나길 기다리세요. 고가에 대한 처벌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요.”
영락제는 눈을 감았다.
“짐도 아오. 짐에겐 경행 그 아이뿐이오.”
“경행의 부상은 고 공자가 살피고 있으나 예왕부에서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 지금 고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짐도 아오.”
영락제가 입가를 살짝 굽혔다. 그의 모습은 사경행과 닮아서 웃고 있어도 차갑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짐을 처리하려 했으나 짐이 죽지 않았지. 이번엔 짐이 그를 처리할 차례요. 병권은 둘 다 가지고 있지. 고가는 오래 살았소. 이번에 경행이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짐은 고가 구족을 모두 순장할 거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강조했다.
“경행이 살아도 그들은 도망갈 길이 없소.”
현덕 황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황궁 하늘에 높이 떠 있던 6월의 태양을 짙은 구름이 덮어 가렸다.
* * *
고양의 관저.
막 부로 돌아온 고양의 어깨에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고양, 당신은 분명 대량 사람이면서 내게 명제 사람이라 속였어요. 태의가 아니고 대량의 방위 대신이라면서요? 이 사기꾼!”
나담이 씩씩대며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초췌해 보였고 눈 아래가 검푸르렀다. 그러나 고양을 바라보는 시선은 또렷한 것이 반드시 해명을 들으려는 모양이었다. 관저 안에 있는 고양의 약방에는 다양한 약재가 많았다. 고부와 예왕부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약을 만들러 고양은 관저로 돌아온 것인데 예상치 못하게 나담을 만났다.
나담의 여종은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양을 바라보았다. 황가 사냥의 날, 고양의 분부대로 나담이 혼자 나가지 못하게 했으나, 탈출한 그녀가 신하 대열 속에서 고양을 보고 말았다. 나담은 작은 일에는 둔하나, 큰일에는 대단히 눈치가 빨랐다. 즉시 돌아온 나담이 여종에게 캐물었고 여종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부득이 다 털어놓았다.
나담은 이를 받아들일 방법이 없었다. 고양이 순수한 의원이라면 대량 사람이든 명제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대량 방위 대신이면서 명제에서 태의로 지냈다니 적국의 첩자와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나담 자신이 어린 시절 본 연극에서 용맹하고 의로운 사람 대다수는 첩자의 흉계에 죽었다. 그런데 고양이 첩자라니. 그가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평소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좋게 생각하던 차였다. 자신을 친절히 돌봐준 이가 실은 악당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나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서 나담은 제대로 된 해명을 듣기 위해 고양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가 비열하고 파렴치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고양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사경행의 일로도 몹시 곤란한데 나담까지 자신을 쪼았다. 이전이라면 그녀에게 좋게좋게 설명했을 테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고양은 심묘를 떠올렸다. 홀로 외국에 왔는데 남편의 목숨까지 위태로우니 견디기 어려울 터였다. 이럴 때 곁에 친구가 있어주면 한결 마음이 나을 거라고 판단한 고양은 남종에게 분부했다.
“나 소저에게 잘 설명해주거라. 난 들어갈 테니 누구도 들여보내지 마.”
말을 마친 그가 바로 약방으로 들어가자 나담이 사납게 따졌다.
“이봐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한테 분명히 이야기하라구요, 도대체…….”
남종이 얼른 그녀를 막았다.
“아가씨, 사실 지금 일이 조금 곤란합니다. 공자는 오늘 진찰하러 외출하신 겁니다. 예왕 전하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나담이 멍해졌다.
“예왕 전하? 제부가? 무슨 일인데?”
남종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말씀드리자면 긴 이야기입니다.”
* * *
사경행의 침상 앞에 엎드려 있던 심묘가 눈을 깜박이며 일어났다. 잠시 눈을 붙이니 정신이 맑아졌다. 사경행을 보니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을 확인한 심묘는 안심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의 이번 생은 평온한 편이라 여겼다. 전생에서 걸어본 길이니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일을 알고 있어서 궁지에 몰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전생에서처럼 무력한 기분을 맛봤다. 자신에게 생긴 일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에게 생긴 일보다 더 괴로웠다.
그러나 자신은 의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오로지 귀원환 세 알과 고양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다니, 초조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심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사경행의 손을 잡자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당숙이 따뜻한 차와 간식을 준비해 왔다가,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않아 초췌한 심묘의 모습을 보고 걱정했다.
“마마,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드세요. 계속 아무것도 안 드시면 지치십니다.”
심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머뭇거리던 심묘가 입을 열었다.
“당숙, 전하께서 대량에 막 돌아왔을 때도 이랬나요?”
사가군에는 문혜제의 사람이 숨어 있었다. 사정의 심복이기도 했던 그자는 북부 변경 전쟁터에서 사경행의 목숨을 노렸다. 사경행은 죽진 않았으나 중상을 입었다. 생사가 위험했는데, 당시에도 고양이 옆에 있었다. 사경행은 운이 좋고 명이 길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예왕은 없었을 것이다. 당숙이 멍해졌다가 울적한 시선으로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마마도 아시는군요. 대량에 돌아오실 때 전하께서는 들것에 실려 오셨습니다. 의원들은 모두 치료할 수 없다고 했지요. 고 공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는데 전하께서는 일어나셨습니다. 분명 기적이었지요.”
그가 회상에 잠긴 채 털어놓자 심묘는 속눈썹을 드리웠다.
“대량에서도 전하의 목숨을 원하는 사람이 적지 않네요.”
당숙이 그 말에 조금 놀라 심묘를 한 번 바라보곤,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강산을 지키기가 어디 그리 쉬울까요? 당초…….”
말하다 멈춘 그는 화제를 바꿔 심묘에게 당부했다.
“마마, 부디 몸을 챙기십시오.”
당숙은 주방에 약을 달이라고 전해야 한다며 나갈 채비를 했다. 당숙이 나가려 할 때, 심묘가 그를 불렀다.
“당숙, 선황 폐하와 전하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해서도 아시나요?”
당숙의 걸음이 비틀거렸다. 멈칫한 그가 천천히 말했다.
“마마를 속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선황후마마의 부 시종입니다. 그러나 마마께서 이 일을 알고 싶으시면 전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소인이 말씀드릴 수 없음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당숙이 나가자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대량 황실의 비밀은 명제보다 적지 않았다. 사경행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 건지, 선황과 영락제 형제 사이는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이 자신에게 전하지 않았기에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지금 상황에서 잘못을 범하면 어떻게 될지 예측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곡우가 급히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마, 마마……!”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럴 때일수록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매사 신중해야 했다. 경솔함도 초조함도 내비쳐서는 안 됐다. 남에게 약점을 잡히면 안 되는 법이거늘.
“무슨 일인데, 그리 소리를 지르느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야.”
심묘는 멍해졌다. 곡우의 뒤로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나담이었다. 나담은 애타는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며 큰 걸음으로 달려왔다. 나담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경행을 보고 중얼거렸다.
“과연 그자가 날 속이지 않았네…….”
놀란 심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자신에게 항상 관대하던 심묘가 차가운 얼굴로 격분하자 나담은 놀라 목을 움츠렸다.
“말하자면 길어…….”
나담은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심묘에게 이야기했다. 놀란 심묘가 나담을 질책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대량과 명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언니 홀로 다른 사람의 부에 머물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앞으로 내가 외숙모와 외숙부를 어떻게 보라고? 내 부모님은?”
나담도 자신의 잘못을 알기에 작게 웅얼거렸다.
“나도 잘못한 거 알아. 너희를 일심전력으로 따라가려다 보니……. 그렇지만 나도 고양이 대량 사람인 줄은 몰랐어. 내게 이전에 농서성에 들린 적 있어 이곳에 관저가 있다고 속였다고…….”
심묘는 고개를 숙인 나담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지만, 방금 한차례 소리를 질렀더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은 이미 발생했으니 이제 와 잘잘못을 따져봤자 아무 소용없었다. 게다가 나담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고양이 그녀에게 어떤 실례도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았다. 왜 그가 나담을 거두었는지는 몰랐지만, 보아하니 그녀를 잘 보살핀 것 같았다.
나담은 심묘가 자신을 돌려보낼까 봐 바로 화제를 바꿨다.
“고양은 제부의 해독약을 만들러 약방으로 들어갔어. 난 그가 허튼소리 한 거라 여겼는데, 정말이네. 제부의 부상이 정말 그렇게 심한 거야?”
심묘도 그녀를 속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풍안녕이 준 귀원환을 썼어. 열흘간은 경행의 목숨을 보장할 수 있어. 하지만, 이후 고양이 해독약을 만들지 못하면…… 위험할 거야.”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심묘가 긴 속눈썹을 드리웠다.
“생각 중이야. 폐하께서도 이를 아시니 이름난 의원을 끌어모을 테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걸릴 텐데, 서두르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잠시 침묵하던 나담이 손을 내밀어 심묘의 손을 잡았다.
“제부같이 뛰어난 사람한테 사고가 생길 리 없어. 너희는 오래 함께할 거고, 난 내 어린 조카를 기다릴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같이 지켜줄게.”
심묘는 사경행의 상태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온종일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물을 먹이며, 할 일이 없을 때는 대량의 정치와 역사를 기록한 책을 가져다 읽었다. 대량에 대해 알아야 장래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아는 게 없어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나담도 밤에 잘 때 빼고는 늘 심묘의 곁에 있었다. 가만히 못 있는 성격인 그녀가 드물게 오래 앉아 있었다. 함께해주는 것만으로 심묘의 마음은 한결 나았다. 그도 그럴 게 나담은 한 가족이었다. 고양도, 계우서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가족처럼 가까울 수는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흘이 지났다. 그간 사경행은 단 한 번도 깨어나지 않았다. 고양의 약방 문은 꽉 닫혀 있었다. 영락제는 궁에서 의술이 가장 고명한 노태의를 보내 사경행을 진찰하게 했다. 노태의 덕분에 사경행의 맥은 안전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모든 희망을 고양에게 쏟았다. 그들은 고양이 열흘 안에 해독약을 만들 수 있길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응답해주지 않은 것일 터였다. 그러나 나흘째 날, 사경행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맥박이 어지럽고 불안정해지면서 호흡이 매우 짧고 거칠었다. 안색도 놀랍게 창백했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 상처가 갑자기 곪기 시작해 위험했다.
노태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예왕의 상처는 고양이 잠시 침술로 억눌러 놓았지만, 독은 막을 수 없어 기세가 만연해졌다고 했다. 귀원환이 없었다면 예왕은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거라며, 그러나 지금 버텨낸다 해도 고양이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한탄했다. 노태의의 의술은 고명하지만, 고양만은 못했다. 고양도 어찌하지 못하니 그는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계속 고개를 저은 그는 황궁으로 돌아가 보고를 올렸다.
갑작스러운 악화에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심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사경행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는 쪽으로 저울추가 기우는 걸 막을 방법이 없으니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당숙이 오래 망설이다가 심묘에게 물었다.
“마마, 계부 쪽에 알려야…….”
당숙의 표정은 매우 슬퍼 보였다. 지금 그의 말은 계 부인이 마지막으로 사경행을 한번 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묘는 지금까지 계부 사람에게 진상을 밝히지 않았다. 계 부인이 걱정하길 바라지 않았고, 고가나 엽가에 소식이 전해져 기회를 노릴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아요.”
심묘는 단호히 그의 말을 끊었다. 당숙은 당황했고, 철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배랑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심묘는 배랑의 말이 이치에 맞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긴장한 상황에서 슬픔을 피할 수는 없으나 더 중요한 것은 뒷일이었다. 지금은 장래를 위해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심묘는 이유 모를 분노를 느꼈다. 전생에 완유가 출가할 때도 배랑은 이렇게 구름처럼 엷고 바람처럼 가볍게 말했다.
“공주마마는 이미 출가하셨으니 마마, 반드시 앞의 일을 보셔야 합니다.”
이번 생에도 그의 입에서 비슷한 말을 들을 줄은. 심묘가 냉랭히 자신을 바라보자 배랑이 멍해졌다. 그의 마음이 또 한번 천천히 가라앉았다.
* * *
나담은 다급히 고부로 돌아가 고양을 찾았다. 그러나 고양은 누구의 방해도 허락하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나담이 분노했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제부가 이렇게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보라는 거야? 제부는 그러려니 해도 불쌍한 우리 심묘는 요 며칠간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고. 시집오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우리 심묘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나담은 통속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런 유의 소설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자살하는 주인공이 많이 등장했다. 평소 심묘는 냉정했으나 아직 어린 나이였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에 남편이 죽으면 아무리 그녀라도 받아들일 수 없을 터였다. 어린 아가씨가 과부살이라니, 안될 일이었다.
고부 하인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나담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나담의 신분도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격도 충동적이고 불같아서 평소 고양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으니 하인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고양이 약방에서 약을 만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운 없는 하인들이 나담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천하에 이름난 명의라더니 독도 해독하지 못하다니! 며칠 후까지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
나담은 눈가가 붉어지고 목이 멨다. 그러더니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게 창피한 듯 방으로 달려갔다.
사납게 문을 닫은 나담은 침상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나가 사람은 불공평한 일을 보아 넘기지 못했고, 약한 자를 돕는 선량한 특성이 있었다. 더욱이 심묘는 가족이었다. 나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눈을 뻔히 뜨고 사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이처럼 무력한 사람이 또 있을지. 심묘를 볼 염치가 없어 나담은 종일 방에만 있었다. 식사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야 그나마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괴로워도 심묘의 괴로움과 비교할 수는 없을 테지만.
고부 사람들은 이런 나담에게 놀랐다. 고부 하인들은 어려서부터 고양을 따랐는데, 고양은 여자에게 온화했으나 여인을 부로 데려와 머물게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담을 볼 때마다 놀리길 좋아하니 이전과 매우 달랐다. 하인들도 머리가 아둔하지 않아서 나담을 장래 안주인으로 보았다. 그 장래 안주인이 식사를 거부했다. 며칠 뒤 주인이 이런 나담을 보면 반드시 마음 아파할 터였고 이에 피를 보는 건 바로 자기들이었다. 그래서 하인들은 그녀를 위로하기로 했다. 누가 그 역할을 맡을 것인지 분분히 논의하다가 끝내 분월이라는 아가씨가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분월은 고양이 악질적인 지방 세력가에게서 구해낸 빈곤한 집안의 딸이었다. 고양에게 구출되지 않았다면 청루에 들어가 신세를 망쳤을 터라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닌 그녀는 견문도 넓고 영리했다. 뛰어난 말재주를 가져서 고부 안에서 풀리지 않는 일도 그녀가 손을 대면 잘 해결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월에게 희망을 걸었다.
계속 울기만 하던 나담은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머리끈 두 개로 머리를 묶은 어린 여종이 식사를 들고 왔다. 그녀는 묵묵히 그릇을 탁자에 올리고 상을 차렸다. 냄새가 좋았으나 나담은 먹기를 거절했다. 지금 자신은 먹을 자격이 없었다.
“나가. 난 먹지 않을 거야.”
“아가씨, 몸을 고생시키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몸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이 식사하지 않으면 병으로 드러눕기 쉬워요. 아가씨가 병이 나면, 예왕비마마께서 더더욱 슬퍼하실 겁니다.”
그러나 나담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먹지 못하겠어.”
“아가씨, 예왕 전하는 좋은 분이시니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겁니다. 지금 이 고비는 무사히 지나갈 테고, 결국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큰 사고 후 죽지 않으면 복이 올 거라 하니 예왕 전하께 장래 크나큰 복이 올 테지요.”
분월이 계속해서 전심전력으로 위로했으나 나담은 쓴웃음만 지었다.
“허울 좋은 말은 누구라도 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몇 마디 상서로운 말로 사람을 낫게 한다면 세상에 의원이 왜 있겠어? 네 말이 듣기 좋아도 무슨 소용이야?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제부가 조금이라도 좋아져야 심묘도 안심할 텐데.”
분월은 늘 덜렁대고 사려 깊지 못한 나담이 생각보다 속이 깊어 내심 놀랐다. 사람은 상심할 때 누군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해주길 원했으나 그 위로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듣기 좋은 말은 그녀를 달래지 못했다. 또다시 탄식한 나담의 시선에 슬픔이 더욱 짙어졌다.
“아가씨, 맞는 말씀이시지만 그래도 어떤 말은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좋습니다. 예왕 전하께서 좋아지길 바라는 말처럼요.”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지금은 너무 다급한 상황이야. 이럴 때 내가 어떻게 평소처럼 먹고 마실 수 있겠어. 너도 더는 권하지 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네 마음은 알지만, 여기가…….”
나담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너무 아파.”
분월은 처음으로 얼마 안 되는 재주를 다 써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생각을 짜내 나담에게 위로의 말을 다시 건넸다.
“아직 열흘이 지나지 않았잖아요? 이전에 어린 자매가 있었는데, 그 아이 집안에 세 살짜리 남동생이 있었어요. 그 아이가 악질을 얻어 사람들은 사흘도 못 살 거라 말했어요. 당시 고 공자도 진찰했는데, 아이가 사흘 안에 단명할 거라 말했어요. 그런데 그 자매는 운이 좋아서 고인을 만났어요. 동생의 운명을 바꿀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매는 남동생을 데리고 고인을 찾아갔어요. 사흘 후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분월은 이야기꾼처럼 생동감 있게 이야기했다. 나담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어떻게 됐는데?”
분월이 손뼉을 탁 쳤다.
“그 남동생은 이전보다 더 건강해졌어요.”
나담이 멍해져 캐물었다.
“어떻게?”
“저도 아주 신기했는데 그렇게 된 까닭을 알지 못했어요.”
“그 남매는 지금 어디에 있어?”
“궁금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매는 귀찮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결국 부를 나갈 나이가 되자 그 자매는 동생을 데리고 대량을 떠났죠. 지금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라요. 당초 그녀가 그 고인이 머문 곳을 제게 그려줬고, 제가 고 공자께 드렸어요. 이후 공자께서 사람을 데리고 보러 가셨으나, 자매가 말한 집은 없었고 황무지만 있었죠. 그 사람이 이사를 간 것인지 아니면 자매의 기억이 틀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뒤로 그 고인을 본 사람은 없어요.”
나담은 잠시 침묵했다가 곧 입을 열었다.
“너 아직 그 고인이 머무는 곳 지도를 가지고 있어?”
분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어요. 하지만 모두 그 고인을 찾아 운명을 바꾸려고 했으나 성과 없이 돌아왔어요.”
“그럼 그 지도를 줄 수 있어?”
분월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고인을 찾아가시려구요? 자매와 남동생의 일은 오래돼서 그 고인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게다가 공자도 찾지 못하셨는걸요……. 아가씨도 찾지 못하실 거예요.”
분월은 후회했다. 자신은 나담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사흘밖에 못 살 거라는 어린아이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예왕은 분명 살아날 거라는, 다분히 위로 차원의 말이었다. 그런데 나담은 그 고인을 찾아가려는 듯했다.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다. 고인이 그렇게 찾기 쉬우면 다들 편하게 살 터였다. 그렇지만 나담은 거듭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차 부탁했다.
“지도만 보여줘. 나도 꼭 고인을 찾으려는 건 아니야.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려니 너무 괴로워. 찾으러 가든 말든, 얻을 수 있든 말든, 적어도 제부와 심묘를 위해 나도 뭔가 하고 싶어.”
나담의 진실한 말에 분월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분월이 잽싸게 나갔다 돌아왔다. 나담에게 손수건에 수놓은 지도를 건넨 분월이 부끄러워했다.
“저는 그림을 잘 못 그리고 글자도 몰라요. 자수는 할 줄 알아서 자매의 그림을 따라 수를 놓은 건데, 아가씨가 보고 이해하실는지 잘 모르겠어요.”
나담은 대량에 와서 매일 바깥을 돌아다녔다. 외진 곳일수록 더욱 흥미로워 농서성의 길에 아주 익숙했다. 그녀가 분월의 손수건을 보고 길을 알아보았다.
“성 서쪽 봉두장의 남쪽 같은데?”
분월이 멍해졌다.
“아가씨도 아세요? 자매가 봉두장을 지나 남쪽으로 걸어가면, 산 아래 가옥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공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가봤는데 봉두장 남쪽에는 가파른 절벽만 있지, 가옥은 없었답니다.”
나담이 지도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봉두장은 이곳에서 멀지 않아. 말을 타고 한나절이면 갈 수 있어.”
“아가씨, 그건 안……!”
“나 심묘한테 좀 다녀올게. 넌 여기 있어.”
분월은 나담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고인을 진짜 찾아갈까 걱정했다. 그러나 예왕비는 사리를 분별할 테니 나담을 따라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나담이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게 둘 리도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조금이나마 생기를 되찾았으니 안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