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장
예왕부.
심묘는 여전히 인사불성인 사경행을 보며 미간을 팽팽히 찡그렸다. 사경행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엿새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노태의의 말에 따르면 엿새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고양이 늦지 않게 해독약을 만들어내길 기도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지 절망스러웠다. 그때 나담이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 심묘에게 물었다.
“심묘, 혼인 선물로 내가 준 나침반 아직 가지고 있어? 있으면 빌려줄 수 있을까?”
심묘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로 뭘 하게?”
나담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가지고 놀려구.”
아무리 나담이 무신경하고 담이 크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 놀 기분일 리 없었다.
“날 속일 필요 없어. 뭘 할 건지 말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도 주지 않을 거야.”
화가 나고 다급했으나 나담은 늘 심묘가 조금 무서웠다. 옅은 한숨을 쉰 나담이 분월의 말을 털어놓고는 심묘의 표정을 살폈다.
“그 고인을 찾아가고 싶어. 그 사람이 분월 지인의 운명을 바꿔줬으니 제부의 운명도 바꿀 수 있을 거야. 지금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니 고인이라도 찾아보고 싶어.”
심묘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 공자가 한 번 가봤다며? 고 공자도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 사람을 언니가 어떻게 찾아?”
“심묘, 나도 생각이 있어서 가보겠다는 거야. 조부께서 젊을 때 환술을 한번 본 적 있다 하셨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기운을 숨겨서 사람들은 직선으로 간다고 여기지만 사실 굽은 길을 간대. 오고 가고 빙빙 돌아서 어찌해도 나오지 못한대. 예전에는 귀신이나 요괴가 술수를 부린 거라고 여겼대.”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환술?”
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도 젊을 때 한 번 보신 게 다래. 그 재주는 점점 잊혀 지금은 본 사람이 없을 거라 하셨어. 그러니 그 고인이 환술을 부리는지도 몰라. 특별히 무공을 연마한 사람을 겨눈 환술이니, 무공이 높을수록 빠져나오지 못해 진법 안에서 죽는 거야.”
“고 공자가 그 남매가 말한 가옥을 찾지 못한 이유가 환술이라고 여기는 거야? 언니 말처럼 무공을 익힌 사람을 겨눈다면 고부의 하인은 왜 찾지 못했을까?”
심묘는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날카로운 심묘의 반박에 나담은 맥이 풀렸다.
“날 믿어줘. 제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니를 믿어.”
나담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멍해졌다. 심묘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 나침반은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계속 남쪽을 가리키는 거지? 사람들은 환술의 영향을 받아도 그 나침반은 아닐 거라는 거잖아? 언니는 봉두장 남쪽에서 나침반을 따라가겠다는 거고.”
“맞아! 환술이 있더라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심묘를 빤히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심묘, 너 정말 날 믿는 거야?”
“난 언닐 믿어. 또 내 운도 믿어. 언니 말처럼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여러 시도를 하는 게 한 가지 길을 사수하는 것보다 나아. 결과가 어떻든 한번 부딪쳐봐야지. 나도 언니랑 함께 갈게.”
나담은 입을 벌렸다.
“같이 가자고?”
“정말 그 고인이 살아 있다면 그 고인이 자취를 숨긴 이유도 분명 있을 거야. 혼자보다는 둘이 설득하는 게 나아. 게다가 내 남편 일이야. 다른 사람 손만 빌릴 수는 없어.”
나담은 이런 심묘의 모습이 낯설었다. 줄곧 이성적이며 진중했던 심묘가 ‘요술’ 같은 얘기를 믿고 직접 나서겠다니 의외였다. 심묘는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바뀌었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바를 실행하는 양 확고한 모습이었다.
“나침반 가지고 함께 가자.”
그녀는 모경과 종양을 불렀다.
“너흰 날 따라 봉두장으로 가자. 철의, 사경행을 잘 돌보며 내가 돌아오길 기다려라.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결정해. 폐하께서 물으시면 처벌은 내가 받겠어.”
심묘는 외투를 들고 문을 나섰다.
“마차를 준비하라!”
왕비다운, 흠잡을 데 없는 명령이었다. 뒷모습에서 은은히 위엄이 새어 나왔다.
* * *
예왕부 사람들은 심묘가 이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거라 예상치 못했다. 봉두장은 농서성과 멀지 않으나 오가는 데 반나절은 걸리니 가는 길에 변고가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소문 속 고인은 분월 지인의 주장에서만 존재했다. 누구도 보지 못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존재할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찾아가는 건 심묘답지 않았다.
그러나 심묘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했다. 그녀는 당숙에게 이후 며칠간의 일을 분부하고 나담을 데리고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떠날 때쯤 그녀는 자신과 나담이 외출한 일은 바깥에 알리지 말라 한번 더 분부했다.
변장한 심묘는 팔각, 회향과 모경, 종양, 그리고 나담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멱리를 쓰고 평범한 복장을 하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철의는 걱정스러웠으나 심묘를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심묘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당숙이 물었다.
“마마께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나?”
철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요. 적어도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에게는요.”
철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분부했다.
“마마께서 외출한 일이 절대 들켜선 안 된다. 소문이 새어 나가면 결과는 목숨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마차 안 나담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 조금 자둬. 너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 못했잖아. 도착하면 깨울 테니 좀 쉬어.”
심묘는 마차도 흔들리고 마음이 어지러워 쉬고 싶지 않았지만, 나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러다 정작 중요한 때 기력이 없어 일을 그르칠지도 몰랐다. 그래서 심묘는 눈을 감았다. 점차 몽롱해진다 싶더니 푹 잠들었다. 누가 몸을 흔들어 눈을 뜨니 나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야, 일어나. 도착했어.”
마차는 황무지에 세웠다. 오후에 출발했는데 지금은 저녁이었다. 햇빛이 저녁 늦게까지 비추는 6월인데도 이곳은 음산하고 으스스해서 전혀 다른 계절 같았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잔가지가 뒤얽혀 하늘도 가릴 것 같았다. 모경과 종양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무슨 괴상한 곳인지. 사람도 없네요.”
“이전에 이곳에 자수 점포가 있었대요. 수놓는 아가씨가 봉황 꼬리를 아주 잘 놓아 유명했다는데,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결국 망해서 문을 닫았대요.”
종양의 말에 팔각이 자기가 알던 얘기를 해주었다.
“지도에 보면 좁은 길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아무 길도 없네.”
나담은 자수 지도를 펼쳐 이리저리 살폈다. 과연 지도를 보면 여기 좁은 길이 있고, 그 길을 걸어가면 논밭과 가옥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는 길이 있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왕래가 없었던 것 같아. 풀이 높게 자라 길이 안 보이는 건가?”
나담의 말에 모경과 종양이 주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팔각과 회향도 주변을 주의 깊게 살폈다.
“상당히 울창하네요. 해가 완전히 지면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맹수가 출몰할 수도 있고요. 익숙지 않은 길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마.”
회향의 말처럼 호위들은 심묘의 안전을 보호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운명을 바꾸는 고인을 찾으려다 심묘마저 위험해지면 안 됐다. 묵우군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한밤중에 생소한 숲에서 길을 찾아내는 특기는 없었다. 사실 회향을 포함한 호위들은 나담이 말하는 그 고인에게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다. 나담의 생각은 기발하지만 천진했다. 그래서 나담을 따라 이곳에 온 심묘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모경만이 조금의 의문도 없이 심묘의 명령을 받들었다. 묵우군 호위들은 심묘를 잘 모르지만, 모경 자신은 명제에서부터 그녀를 따랐다. 게다가 그때는 살얼음판을 걷듯 매일매일 위태로웠는데도, 그녀는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그녀의 명에 따를 때마다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은 심묘를 의심하지 않았다.
심묘가 지도를 보며 나담에게 물었다.
“분월의 말에 따르면 그 남매는 봉두장으로 들어간 뒤 남쪽으로 계속 걸었다는 거지?”
“맞아. 지도 위 남쪽으로 좁은 길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여기는 좁은 길이 없는걸.”
“일단 가보자.”
심묘의 단호한 말에 사람들이 멍해졌다. 얼빠진 종양이 물었다.
“마마, 어디로요?”
심묘가 나담에게 나침반을 가져오라 손짓했다.
“남쪽으로.”
“하지만 이곳에 좁은 길은 없는데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것이 아닐까요?”
심묘가 놀란 회향을 한 번 바라보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가보기나 하자꾸나. 어차피 지금 어느 것이 옳은지 구별할 수도 없다. 남매는 계속 남쪽으로 갔다고 했으니 따라가 보자. 좁은 길이 어디 있든 상관없어. 동서남북 네 방향 중 남쪽이면 돼. 방법이 없을 때, 시도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심묘는 손수 나침반을 들고 앞으로 걸어갔다.
“심묘, 기다려!”
나담이 심묘의 뒤를 쫓자 팔각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
“따라가자!”
태양이 빠르게 산 너머로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숲속은 나무가 무성해 몹시 어두웠는데, 해가 지자 아예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행히 종양이 충분한 불쏘시개를 가져와 횃불을 켤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에는 한 종류의 나무만이 자라고 있었다. 전부 같은 나뭇가지처럼 보일 지경이니 앞뒤를 구분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볕이 없다 해도 6월 날씨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추웠다.
외투를 가져온 이들은 외투를 더욱 꼭 조였다. 갑자기 늑대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모경과 종양이 동시에 손을 허리의 패검 위에 놓았다. 회향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늑대가 나타났네요.”
“늑대는 불빛을 두려워해. 다들 양손에 불을 들어. 늑대는 교활한 짐승이야. 불이 밝으면 늑대 무리도 함부로 접근하지 않을 거야.”
심묘의 말에 회향은 멍해졌다. 팔각의 둥근 얼굴에도 의아한 표정이 드러났다.
“마마, 늑대를 상대하는 방법도 아세요?”
묵우군 사람이나 강호 사람이라면 알 수도 있겠으나, 심묘는 관리 집안의 소저였다. 사냥꾼 집안 출신이 아니라. 모두 얼떨떨해하자 심묘가 가볍게 웃었다.
“어디서 들은 것뿐이다.”
전생에 완유가 시집가기 전, 흉노에는 도처에 늑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걱정하는 마음에 늑대를 쫓는 방법을 찾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막상 그녀는 흉노 땅도 밟지 못했다. 알려준 방법을 사용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애석할 따름이었다. 심묘의 눈 속에 아픈 기색이 스쳤으나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전처럼 평온했다.
“계속 가자.”
“계속이요? 마마, 이미 몇 시진을 걸었지만,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대로면 밤새 걸어도 도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회향의 말에 종양도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듯합니다.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심묘가 잠시 침묵하더니 나담을 바라보았다.
“나침반의 방향은 줄곧 남쪽이야?”
나담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방향은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두 사람 말도 맞아. 풍경이 계속 똑같아.”
“분명 길은 틀리지 않은데, 풍경이 같다니 기이하네. 무엇이든 아주 오래 살면 요괴가 된다고 하지. ……기왕 왔으니 좀 더 가보자. 지금 그만두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러나 너희 말도 일리가 있다. 계속 똑같은 풍경이니까. 나무의 키도 같아서 얼마나 왔는지 가늠할 수가 없구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말을 마친 심묘가 잠시 고민하더니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나담에게도 손수건을 건넨 그녀는 손수건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이렇게 하자. 오히려 보이는 게 우리를 속이고 있을지도 몰라. 나와 나담 언니는 눈을 가린 뒤 나침반을 따라가겠다. 팔각, 회향은 앞에서 나침반을 봐. 종양과 모경은 뒤에서 따라오고. 자, 다시 앞으로 가보자꾸나.”
모경이 망설였다.
“마마, 이렇게 해서 될까요?”
“나도 너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도 무슨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구나. 그러나 전하께는 시간이 없어. 한 걸음 걸으면 그만큼 가능성이 더 생긴다고 생각하고 마저 가보자꾸나.”
나담도 얼른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가봐야 알 수 있지. 입으로 수백 번 말한다고 무슨 소용이겠어?”
회향은 심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포함한 묵우군 병사들은 예왕부로 시집온 그녀를 몰래 훔쳐보며 그녀의 도량이나 기백이 주모에 걸맞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경행에게 큰 애정이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니 무정하다고 할 수 없었고, 어린아이처럼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소문을 믿고 아둔하게 행동하니 똑똑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회향의 생각만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이면 무의식중에 진심을 드러내는 법. 급한 상황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건 이성과 지혜가 아닌 본능이었다.
모경은 묵묵히 심묘의 뒤를 따라갔다. 회향과 종양, 팔각은 멈칫하다가 아무 말 없이 계속 따라갔다.
농서성의 신하들은 황가 사냥의 날 예왕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어디에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감히 묻는 사람도 없었다. 예왕의 지위는 미묘해서 그에게 반발하는 누군가는 그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에게 의탁한 누군가는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기도했다.
사람들이 아무리 추측해도 예왕부는 철옹성 같아서 바람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예왕부의 상황을 모르니 신하들은 궁금해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여전히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걱정하는 사람은 계속 걱정했고 기뻐하는 사람은 계속 기뻐하며 시일이 흘렀다.
* * *
고부. 고완아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고 부인에게 애교를 부렸다.
“어머니, 예왕 전하를 보러 가고 싶어요. 혹 위중한 상태이시면 어떡해요?”
고 부인이 그녀를 위로했다.
“어디 그리 위중하려고? 정말 위중하면 사방으로 의원을 찾을 텐데 지금 예왕부는 바람 소리 하나 없으니 별일 없을 게다. 너는 왜 그렇게 야단법석이느냐?”
“모르겠어요. 왠지 모르겠지만, 불안해요. 모두 그 여자 때문이에요. 심묘가 시집오자마자 예왕 전하께 이런 큰일이 생겼으니, 그 여자가 액운을 몰고 온 거예요. 전하는 그 여자가 과부 팔자인 것도 모르고 혼례를 올리신 거죠. 빨리 이혼하지 않으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고 부인이 웃었다.
“그래그래.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단다. 전하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면 네 큰언니가 알아서 자리를 주선해줄 거야. 지금은 안 돼.”
“어머니, 약조하신 거예요. 날 속이시면 안 돼요.”
고완아는 불만스러웠지만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떠난 뒤, 고 부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곁의 여종에게 분부했다.
“완아를 잘 지켜보거라. 당분간 외출하지 못하게 해. 주인어른의 일을 망치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녀의 말투는 음산했고 표정은 흉악해서 잔혹한 고 장군처럼 보였다.
승상부. 엽무재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고정순은 한눈에 봐도 평생을 전쟁터에 구른 사람처럼 보였다. 미간 사이 흉악한 기운은 흉신(凶神) 같아 보였다. 어린아이는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놀라 울음을 터트릴 만한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전형적인 무장의 모습이었다. 반면 엽무재는 온화해 보여서 모르고 보면 어느 집 서생 같았다. 그러나 그의 대에서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신하들은 감히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영락제도 대놓고 척을 지지 않으니 생긴 것처럼 무해한 사람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엽 부인이 바둑돌을 놓고 미소 지었다.
“예왕부는 정말 경계가 삼엄하군요.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으니, 지금 전하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정말 걱정스러워요.”
“부인, 계획이 있으면서 왜 번뇌하시오?”
엽무재가 웃으며 바둑돌을 떨어뜨렸다. 엽 부인이 나무라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엽무재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바둑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엽 부인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돌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소식이 없으면 나쁜 상황일 거예요. 잘난 척하는 사람은 어지간한 일로는 오래 잠적하지 않아요.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늦도록 나타나지 않는 건 그럴 수 없어서 일 거예요.”
엽무재는 다시 한번 웃었다.
“다른 사람을 현혹하기 위해 그러는 건지도 모르오.”
“나리, 제가 여인이라 조정 일을 모른다고 놀리시는군요. 틀림없이 남을 속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 그게 무슨 말이오?”
엽 부인은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예왕부의 일은 아직 알 수 없으나, 폐하는 지금 고가를 처리하려고 하시잖아요. 폐하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시는 건 분명 예왕 전하의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뜻하는 거예요.”
엽무재가 크게 웃었다.
“부인은 아주 잘 꿰뚫어 보고 있구려. 조정 일까지 그리 잘 보고 있으니 내가 다 창피해지오. 부인, 내가 어찌해야 할지도 얘기해보구려.”
엽 부인은 고개를 숙여 웃었다.
“예왕 전하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 먼저 본 이후에 움직여야 합니다.”
엽무재가 반박하지 않자 엽 부인은 더욱 신이 난 모양으로 이야기했다.
“폐하는 고가와 여러 해 암중 바둑을 두고 계셨지요. 근래는 우리 엽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바보가 아닌데 어디 다른 사람의 패가 될까요? 어부지리를 얻기 위해 폐하와 고가가 싸우게 둬야 합니다. 이전에는 예왕 전하 때문에 우리는 폐하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번에 전하께서 재난을 피하지 못하면 달라집니다. 폐하 혼자서 이 넓은 천하를 다스리시기는 어려워요. 결국, 고가에 조종당할 겁니다.”
“예왕 전하가 어디 당신의 말처럼 그리 신비하겠소?”
엽무재는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엽무재가 바둑돌을 잡은 채 멈췄다.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엽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 정말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소. 부인은 전하께서 이번에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보오?”
엽 부인은 오래 생각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엽무재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 부인을 바라봤다.
“나리, 전하께서 막 대량에 돌아온 당시 중상을 입었던 것 기억하시지요? 폐하께서 다른 사람은 속이셔도 우리는 못 속이십니다. 당시 전하가 고비를 넘기지 못할 거라 여겼으나 어디서 온 행운인지 살아났지요. 그 후 전하는 조정 안 판세를 휘어잡았고요.”
엽 부인이 웃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두 번의 행운은 없습니다. 한 번은 하늘이 그를 비호했으나 이번에도 보우하겠습니까? 예왕 전하는 여기까지라고 정해진 겁니다. 이전에는 비껴갔으나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겁니다.”
엽무재는 엽 부인이 바둑알을 놓는 모습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렇소? 내 생각은 당신과 정반대요. 약과 침이 아무 소용없다는 큰 재난을 겪고 살아남았으니, 그때 예왕 전하의 장래는 전도가 양양하다 정해진 것이요. 이전에도 피했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 거요.”
엽 부인은 화내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받았다.
“그럼 우리 눈을 떼지 말고 결말을 기다려봐요.”
엽무재도 웃으며 바둑돌을 내려 뒀다.
“부인이 진 것 같구려.”
엽 부인이 보니 과연 그러했다. 그녀가 애교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나리, 제가 이야기하는 틈에 바둑알을 놓으시다니 관대하지 않으시네요. 다시 한판 둬요.”
엽무재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일에 합시다. 오늘은 홍광의 과제를 검사해야 하오. 시간이 거의 다 됐소.”
“그럼 나리 먼저 일어나셔요. 아무렴 홍광의 공부가 더 중요하지요.”
엽 부인은 엽무재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색은 점점 차가워졌다. 잠시 후, 그녀가 신랄하게 비아냥댔다.
“절름발이가 책을 많이 읽은들 무슨 소용이람. 평생 부 안에만 있을 텐데.”
그녀는 분노를 삭이기 어려운 듯 탁자 위 바둑판을 통째로 밀어 우르르 떨어뜨렸다.
“그 여우 같은 것과 똑같아.”
방 안 시중드는 여종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엽 부인이 엽 공자, 엽홍광을 제일 싫어하는 것은 부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소첩이 낳고, 엽 부인의 손에서 자란, 부실한 적자. 엽홍광은 엽가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 * *
희미한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 틈을 통해 땅 위로 흩뿌려졌다. 은가루가 뿌려진 듯 보기 좋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햇살이 쫓아내자 심묘 일행 모두 조금이나마 안심되었다. 팔각과 회향이 걸음을 멈추고,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부축을 받는 심묘와 나담을 바라보았다.
“마마, 하늘이 이미 밝았습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묵우군 호위들은 심묘 같은 아가씨가 인적을 찾을 수 없는 황량한 숲을 밤새 걸었다는 얘기를 절대로 믿지 못할 터였다. 오랫동안 특수한 훈련을 받은 자신들과 달리 나담과 심묘는 가냘픈 아가씨일 뿐이었다. 하룻밤을 쉬지 않고 걸은 나담은 몹시 초췌했다. 그러나 무공의 기초도 쌓지 않은 심묘는 여전히 정신이 맑은 모양이었다.
회향과 종양은 심묘가 장군부에서 부모로부터 따로 훈련을 받은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불굴의 의지력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심묘는 냉궁에 갇혔을 때 종종 미 부인과 그녀를 따르는 비빈 무리 때문에 밤을 새워가며 옷을 빨았다. 게다가 지금은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급한 상황이다. 일심으로 숲을 빠져나가려 하는데 잠이 올 리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걸은 게냐?”
심묘의 물음에 종양이 답했다.
“밤새 걸어 멀리 왔을 텐데 중도에 남긴 기호를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면, 적어도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눈을 가리길 잘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눈에 속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숲속에서 나가지 못했는걸.”
나담이 힘없이 말했다.
“조금만 더 가보자. 이제 곧 도착할 거야.”
심묘의 말에 회향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젯밤 자신들은 여러 번 심묘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녀는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이쪽을 가혹하게 질책했다. 묵우군 사람들은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특징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고양이를 본 쥐와 같았다. 종양도 답답했다. 심묘는 온화하며 신중한데, 한번 화를 내면 어찌 그리 무서운지 현덕 황후도 이렇게까지 무섭지 않았다.
모두 다시 묵묵히 걷기 시작했지만, 나담은 사실 이미 다리가 마비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대도 묵우군 호위들의 체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심묘가 저토록 강인하게 버티고 있으니 혼자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풀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신경을 돌릴 수 있을 만한 걸 찾으면 몸의 고통도 조금은 잊힐 터였다. 노력은 열매를 맺어 잠시 후 평범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나담이 심묘를 끌어당겼다.
“오, 여기 꽃이 있어. 이전에는 꽃을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바라보니, 과연 숲 안에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디작은 꽃이었다. 그때, 모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닭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회향과 팔각, 종양이 귀를 세웠다.
“맞아요.”
“이곳에 왜 닭 울음소리가?”
그들의 동조에 심묘가 중얼거렸다.
“설마 앞에 가옥이 있나? 소리가 들린다면 분명 멀지 않을 게다. 곧 이 숲을 나갈 수 있겠구나.”
사람들은 숲을 나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투지가 솟았다. 빽빽하던 나무가 조금씩 듬성듬성해지자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더 많이 내리쬐어 마음은 더욱 편안해졌다. 흥분한 나담은 졸음이 달아났다.
“정말 나갈 수 있겠어. 우리 빨리 가자.”
그때, 숲 막바지에 좁은 길이 보였다. 사람들이 잠시 말을 잃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심묘가 먼저 좁은 길로 향했다. 길을 따라 걸으니 농지가 나왔다. 화초와 채소가 심겨 있었는데 매우 난잡했다. 잘 관리하지 않는 듯, 제멋대로 자라 엉망이었다. 그 뒤편에 가옥이 하나 있었다.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울 만큼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팔각이 먼저 달려갔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왔다.
“마마, 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다는 말에 나담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
“어째서 사람이 없는 거람?”
이곳은 그들의 상상과 크게 달랐다. 절세 고인이 머무는 곳이 이렇게 너절할 리 없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조차 없으니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화초가 있으니 사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이곳에서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오겠지.”
그때, 징이 부서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 귀빈이 오셨는데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심묘는 고인의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당신이군요!”
심묘의 외침에 팔각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마마, 저 사람을 아십니까?”
심묘는 실눈을 뜬 중년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명제 보타사에서 자신의 금 땅콩을 받은 도사였다. 가사를 걸치고 있진 않았지만, 그때처럼 누더기나 다름없는 헌 옷을 입고 있으니 비슷한 차림새였다. 자신에게 “진짜 봉황은 갇혀서 고생한다.”, “지난 일은 꿈과 같으니, 얽히는 것은 절대 삼가라.”, “불운이 극에 달하면 행운이 온다.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귀인이 서쪽에서 올 것이다.”라고 말했던 그 도사였다.
심묘는 고인이 명제 보타사에서 만난 괴이한 도사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의 괴상한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뒀다. 그를 다시 찾으려 했지만, 행방을 수소문해도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를 다시 찾을 수 없던 게 당연했다. 대량에 있는 사람을 명제에서 찾았으니 그야말로 헛일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분월의 말에 따르면 그 남매가 이 도사와 만난 것은 꽤 예전이다. 그렇다면 이 도사가 대량에서 머문 시간이 적지 않은 듯했다. 대량 사람인가 싶었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가 명제에 나타난 건 설명할 수 없었다. 단순히 점괘를 봐주려고 보타사까지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도장(道場, 도사 또는 법사의 호칭)…….”
괴도사는 심묘를 보고 수염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적염입니다. 부인은 사람을 구하려고 오셨습니까? 오래 기다렸습니다.”
나담이 멍해져 물었다.
“적염 도장, 우리가 찾아올 걸 알았나요?”
적염이 웃으며 허리에 달린 첨통을 흔들어 착착 소리를 냈다.
“점괘가 그렇더군요.”
여전히 도인다운 풍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 도사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심묘는 이자가 자신들이 찾던 그 고인이라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였다. 보타사에서 자신에게 봐준 점괘가 모두 들어맞았기에 그의 능력은 이미 검증된 터였다.
“내 부군이 중상을 입었는데, 도장께서 운명을 바꾸실 수 있다고 해서 특별히 찾아왔습니다. 부디 내 부군의 목숨을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중한 예로써 사례하겠습니다.”
심묘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심묘가 적염과 서로 아는 듯해 놀라고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심묘가 사기꾼에게 홀린 것이 아닌가 싶어 못내 걱정스럽기도 했다. 운명을 바꾸다니, 너무 허황된 일이었다. 게다가 이 도사는 어찌 봐도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심묘는 적염이 자신의 중생(重生, 두 번째 삶)을 알아보며 전생에 황후였던 것까지도 알아보았으니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염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한 손에 물고기를 담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낚시하러 다녀온 것 같았다. 그러나 낚싯대에 달린 낚싯바늘은 곧게 펴져 있었다. 이런 바늘로 물고기를 낚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과연 그의 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다.
“도장, 내 제부를 구해주실 수 있나요?”
적염이 대답이 없자 나담이 초조해하며 다시 부탁했다. 적염은 바구니를 문 앞에 놓은 뒤 허리를 폈다. 그는 심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오한 시선이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습니다. 저는 천기를 누설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어찌 감히 운명을 바꾸겠습니까? 큰 벌을 받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분월의 친구 남동생을 구해줬잖아요. 그건 운명을 바꾼 게 아닌가요?”
나담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 어린아이는 명이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그 아이와 날 만나게 했지요. 내가 그 아이를 구해준 것도 그저 순리에 따른 일입니다.”
적염의 말에 회향, 종양, 모경, 팔각은 멍해졌다. 자신들은 이를 그 남매의 허튼소리라 여겼었는데, 눈앞에 있는 자가 모두 이를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감히 묻건대, 도장과 내 인연은 어떻습니까?”
적염이 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천기는 누설할 수 없습니다.”
그는 천기는 누설할 수 없다며 두 번이나 말을 돌렸다. 이에 심묘는 더 참지 못했다.
“양심이 없군요. 지금 좋은 사람이 간악한 사람에게 해를 입었습니다. 나쁜 사람은 득의양양합니다. 살인을 계획한 사람은 금 허리띠를 두르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백골이 되다니요. 이게 무슨 하늘의 뜻인가요? 이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나요?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심묘는 단숨에 자기 속내를 말하니 상쾌했다. 적염은 심묘에게 욕을 먹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과연 흉악한 용과 함께 지내더니 당신도 사납게 변했군요. 좋습니다.”
나담은 작게 중얼거렸다.
“미쳤나 봐, 욕을 먹고 저리 좋아하다니…….”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하늘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사람이 관여하고, 하늘의 뜻은 운세를 주관하니, 사람은 운명을 주관하지는 못합니다.”
그가 살짝 웃고 불진(拂塵, 먼지떨이처럼 생긴 법기)을 들었다. 불진을 드니 좀 전과는 달리 세속에서 벗어난 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의 느낌이 은은하게 풍겼다.
“나는 하늘의 뜻을 따를 뿐, 그 사람의 운명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또 그의 운명은 고귀해서 내게는 바꿀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이곳에서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니, 다른 인연을 맺게 해주겠습니다.”
적염의 모호한 말에 사람들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유일하게 심묘만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은 정말 그 사람을 구하고 싶습니까?”
“그렇습니다.”
심묘의 대답에 적염이 웃었다.
“그렇게 구하고 싶다면 절 따라오시지요.”
적염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심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시 그의 뒤를 따랐다. 모경 일행도 얼른 따라나섰다. 그때, 적염이 고개를 돌려 모경 일행을 바라보았다.
“너흰 올 수 없다.”
“어째서죠?”
종양이 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심묘의 안위를 보호하러 함께 이곳에 온 것인데, 심묘 혼자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는 괴인을 따라가게 둘 수 없었다. 혹여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경행이 깨어난 뒤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이 앞에는 내 사부가 쳐둔 환술이 있다. 내 사부의 환술은 나를 포함해 누구도 풀지 못한다. 생문은 하나, 다른 건 모두 사문이지. 무공을 익힌 사람을 겨눈 거라 무공이 높을수록 빠르게 죽지. 이 부인은 무공을 못 하니 들어갈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들어가면 모두 죽는다.”
“당신이 부인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속인 후 당신이 어딘가로 부인을 데리고 갈 수도 있잖아요!”
회향의 말에 적염이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였다. 그는 갑자기 무뢰한처럼 돌변했다.
“날 믿지 못한다면 나도 가지 않겠다. 너희는 부인을 데리고 서둘러 돌아가라.”
회향은 분노해 피를 토할 뻔했다.
“너희는 이곳에 기다려라. 난 도장과 함께 갈 테니.”
“부인!”
팔각도 이를 찬성하지 않았다. 그때, 나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내가 무공은 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 괜찮을 거예요.”
적염은 그제야 나담을 본 듯,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괜찮겠네요. 무공이 없는 사람과 비슷하니 같이 갑시다.”
나담은 순간 발끈했다. 무공이 없는 사람 수준이라니! 자신의 무공은 예왕부의 호위들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코 평범한 사람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면 어쨌든 그 덕에 자신도 심묘를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나담은 기분을 가라앉혔다.
“심묘야, 내가 같이 갈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울 수 있을 거야.”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담은 충동적이나 화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적염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르니 심묘 자신도 불안하던 차였다. 적염의 실력을 인정하는 것과 그에게 의심을 품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늘 방비에 힘써온 자신이 고작 두번 본 사람을 무턱대고 신뢰할 수는 없었다.
호위들은 심묘가 이미 굳게 마음먹었음을 깨달았다. 결정한 심묘는 말릴 수 없었다. 그나마 나담이 따라가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담에게 한바탕 당부하며 묵우군에서 신호로 사용하는 폭죽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으면 폭죽을 터트리라고, 어떻게든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적염이 성가시다는 듯 재촉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지금 출발해요.”
이에 심묘가 빠르게 대답했다. 세 사람은 길을 떠났다.
적염이 앞장서서 걷는 길은 매우 괴상했다. 숲과 떨어진 곳 같은데 길이 사라졌다가 적염이 돌고 돌면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길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가 걷는 길은 흙이 고르지 않아 걷기 힘든 건 둘째 치더라도 모두 막다른 곳처럼 보였는데, 늘 새로운 길이 나왔다. 나담은 혀를 차며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심묘도 놀라웠다.
“도장. 이곳이 익숙한 듯 보이는데, 전에 오신 적 있나요?”
“저는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지냈으니 당연히 익숙하지요.”
나담의 물음에 적염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여기 나무들 대다수는 제가 심은 것입니다.”
나담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대량 사람이군요. 이전에 당신과 심묘가 한 번 봤다면서요? 언제였나요? 심묘는 이전에 대량에 온 적이 없어요. 대량에 온 이후에 만난 건가요?”
나담은 적염을 보는 심묘의 의아한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가 분명했다. 적염이 의미심장하게 심묘를 한 번 보았다.
“저와 부인 사이에는 두 갈래 인연이 있어 어디서든 반드시 만나게 돼 있습니다.”
나담은 적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만 긁적였다. 심묘는 그의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이번에도 적염이 자신의 상상보다 더 많은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일단 사경행의 일을 해결한 후에 전생의 일을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적염이 무언가 눈치챈 듯 빙긋 웃었다.
“부인은 사람도 구하고 싶고 묻고 싶기도 하군요. 하지만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둘 다 하실 수는 없지요.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반드시 얻는 게 있습니다. 부인,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니 잘 생각해 선택하십시오.”
심묘는 깜짝 놀랐다. 적염은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말뜻은 전생 일을 묻고 싶으면 사경행을 구할 수 없고, 사경행을 구하고 싶다면 전생 일에 대해 침묵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심묘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부인, 결정했나요?”
나담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적염과 심묘의 대화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했으나 자신은 심묘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자기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녀가 하는 말을 단박에 알아듣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나담은 두 사람의 대화를 추측해 이해하길 애초에 포기한 터였다.
잠시 후, 심묘가 담담히 말했다.
“답안은 스스로 찾을 수 있으나 사람을 구하는 일은 그렇지 않지요. 난 의술을 모르고 운명을 바꾸지도 못합니다. 부득이 도장에게 폐를 끼쳐야겠네요. 어떻게 비밀과 생명을 같이 논할 수 있을까요? 도장, 당연히 사람을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적염은 크게 웃었다.
“부인의 말은 진실하지 않네요. 그 사람이 더 중요하니 그를 위해 포기한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이번엔 소리내지 않고 볼웃음만 지었다. 신비한 미소였다.
“부인의 거친 기운이 적지 않게 흩어졌네요.”
심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적염은 더 말하지 않고 걸었다. 어린아이처럼 버드나무 가지를 주우며 입으로 알 수 없는 곡조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그들은 오래 걸었다. 하지만 괜히 참견했다가 일을 그르칠까 싶어 나담은 감히 적염을 원망하지 않았다. 심묘는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이 몇 시진인지 모르지만,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햇빛이 미약해졌을 때, 적염이 걸음을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나담과 심묘의 눈앞에 거대한 산골짜기가 나타났다. 산골짜기에는 화초 향기가 가득했다. 6월, 한여름임에도 꽃은 빽빽이 피어 있고, 석양이 곳곳으로 금색 노을을 뿌려 오색 빛이 흐르는 모양이었다. 무릉도원에 도착한 듯 비현실적이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나담이 감탄했다. 그녀의 뒤에서 적염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부인, 무언가 발견하셨나요?”
심묘가 화초의 향기 속에 약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며 곳곳의 화초를 바라보았다. 화려하긴 하지만, 별다르게 눈에 띄는 생김새는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던 심묘가 입을 열었다.
“약초인가요?”
“맞습니다. 나는 부인의 부군을 구할 수 없고,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부의 약초 계곡 안에서 자라는 약초는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으니 약초를 가져가면 부인은 부군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사경행의 부상에 대해서는 언질도 주지 않았는데 적염이 증세를 정확히 말하자 나담은 또 한번 탄복했다. 반면 심묘는 적염의 실력을 대략 짐작했기에 의연했다.
“도장, 내 부군의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그 약초를 주시길 바랍니다.”
적염이 웃었다.
“이 약초는 내 사부가 남긴 것으로 줄곧 이 약초 계곡에 두었습니다. 세상에 단 한 포기만 있지요. 평범한 사람이 먹으면 장수할 수 있고, 중독된 사람이 먹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귀한 약초를 내가 어찌 공짜로 부인에게 드리겠습니까?”
“당신은 자비를 베푸는 도사 아닌가요? 물론 보답은 할 겁니다. 금은을 원하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나요? 내 능력으로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도장을 위해 무엇이든 내드리겠어요.”
“내가 부인의 생명으로 교환하자고 하면?”
심묘의 말에 적염이 간사하게 말했다. 심묘가 당황해 말을 잃자, 분노한 나담이 대신 외쳤다.
“당신, 너무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조건을 걸 수가 있어요?”
적염은 손을 휘저었다.
“출가인은 자비를 품지요. 나 역시 도사로서 살인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방금은 농담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인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
그는 아직 멍한 심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인, 제 의혹을 풀어주실 수 있나요?”
심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적염이 자신에게 생명으로 교환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심구, 심신, 나설안이 있는데, 자신이 책임지고 돌보는 사람도 여럿인데 사경행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명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감정이 깊어졌을 때 상처를 입으면 그 고통은 비할 데가 없을 만큼 아주 컸다. 전생의 모든 것이 그 예였다. 다시는 사랑에 깊게 빠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사경행에게 마음을 쓰고 있지만,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농후한 사랑은 감히 할 수 없었다. 목숨까지 걸어가며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
“심묘야?”
나담이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심묘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적염을 바라보았다.
“말해보시지요.”
적염이 쪼그리고 앉아 덤불 사이의 작은 꽃을 가리켰다.
“보세요. 이것은 홍수초로, 기침을 치료할 수 있는 영약입니다. 그러나 근래 어찌해도 꽃이 피질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같습니까?”
심묘 자신은 의원이 아니었다. 의술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약초를 분별조차 못 하는데 생장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적염을 따라 쪼그리고 앉아 약초를 세심히 보았다. 약초의 꽃봉오리에 검은 점이 빽빽하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벌레가 생긴 것 같네요.”
적염이 괴로운 얼굴로 동의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홍수초는 연약해서 약물로 구충할 수 없습니다. 벌레를 제거하려면 부득이 그것들을 일일이 손으로 조심스레 떼어내야 합니다. 자칫하면 꽃잎이 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요?”
나담의 물음에 적염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따라 일어선 심묘를 보며 웃음 지었다.
“저는 동작도 거칠며 평소에도 그다지 세심하지 않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자칫 꽃잎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홍수초는 아주 얻기 드문, 매우 진귀한 영약입니다. 부인이 저 대신 벌레를 깨끗이 잡아주시길 청합니다.”
그제야 이해한 나담이 눈을 크게 떴다.
“벌레를 잡아 홍수초의 상태가 좋아지면 해독초를 주실 건가요?”
심묘의 물음에 적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할게요.”
심묘도 바로 수긍했다. 잠시 꽃을 돌보고 약재를 얻는다면 이문이 크게 남는 장사였다.
그때, 적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심묘와 나담을 데리고 몇 걸음 걸었다.
“홍수초 밭은 여깁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홍수초를 보고 멍해졌다. 약초 농지는 대부호의 모든 농지를 합친 것보다 넓은 듯했다. 그나마도 홍수초가 고르게 자란 게 아니라 다른 풀과 섞여 아무렇게나 자라 있었다. 대단히 빽빽해서 홍수초를 찾아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홍수초의 벌레를 깨끗이 제거하려면 최소 몇 주는 족히 걸릴 거 같았다.
나담이 펄쩍 뛰며 분노했다.
“우리를 놀리는 건가요? 이 많은 걸 다 어떻게 해요?”
적염이 실눈을 떠 심묘를 보았다.
“부인도 못 할 거라 여기십니까?”
심묘는 깊은 눈으로 적염을 바라보았다.
“다 하면 도장은 정말 약초를 주실 건가요?”
나담이 다급히 말렸다.
“심묘야, 모르겠어? 지금 일부러 널 골탕 먹이는 거야. 사람을 구할 마음이 있다면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을 부탁하겠어? 어디가 자비를 품은 출가인이라는 거야?”
“아가씨의 말이 맞습니다. 천하에 공짜는 없지요. 이 세상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습니다. 무언가를 원하면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부인이 내 약재를 원하니 나도 내 화초의 벌레를 제거해주는 것으로 값을 받길 원하는 거죠. 이는 매우 공평한 일입니다. 이제 부인이 결정하실 차례입니다. 홍수초에 있는 벌레를 깨끗이 제거하고, 약초에 비료를 뿌려주면 아까 말한 약초를 내드리겠습니다.”
그는 불진을 휘둘렀다.
“절 속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대강대강 하면 절대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도울 수 없습니다. 부인,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심묘는 나담을 한 번 바라본 후 대답했다.
“할 수 있어요. 도장도 꼭 약속을 지켜주길 바랄게요.”
심묘는 바로 약초 농지로 뛰어가 진지하게 벌레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고귀한 예왕비는 당당한 장군부의 적출 아가씨였다. 그런데 초야 촌부에게 꽃을 가꾸는 농부 취급을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농사에 이골이 난 농사꾼도 혼자서는 이렇게 많은 벌레를 잡지 않을 것이었다. 거기에 비료까지 뿌려야 한다니.
나담은 연약한 심묘가 비료를 뿌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명제에 있는 심신과 심구가 이를 알면 당장 심묘를 데려가겠다고 성화를 부릴 터였다. 그러나 심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담이 이를 악물고 도와주려 했으나 심묘의 호된 소리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거기 서. 내가 언니를 미워하길 바라지 않으면 끼어들지 마.”
그녀의 엄숙한 말투에 나담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담은 답답했다. 심묘가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다면 분월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담이 크게 소리쳤다.
“저 괴도사가 널 속이는 게 분명해! 그만하자!”
심묘는 고개도 들지 않고 진지하게 화초를 살폈다.
“나는 도장을 위해 하는 게 아니야. 가능성이 있으면 뭐라도 해봐야지. 언니, 진심으로 날 위한다면 등롱을 좀 찾아와줘. 하늘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으니 불빛이 있으면 좋겠어.”
나담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 깜짝할 사이, 적염은 불진을 치켜들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담이 서둘러 그를 쫓았다.
“도장, 가기 전에 내 이야기 좀 들어봐요……!”
심묘는 꽃 무더기 안에 쪼그리고 앉아 벌레를 골랐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레를 골라내고 비료를 뿌리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자존심은 아무 때나 꺼내 들어선 안 됐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할 때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책략이 쓸모없을 때는 얌전히 고된 노동을 하되 헛수고는 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전생의 자신이 평생에 걸쳐 깨달은 도리였다.
자신이 미 부인과의 무의미한 경쟁을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면 적어도 그녀가 부명과 완유를 겨누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자존심 때문에 손해 본 건 결국 자신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보복은 뒤에 해도 충분한 일이다.
적염이 약속을 지킨다면 고생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에서 작물을 돌보는 일은 비록 힘들어도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것보다 더 떳떳하고 정당했다. 다만 이 산골짜기에 홍수초가 가득해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반면 손에 쥔 시간은 며칠도 남지 않았으니 그게 문제였다. 심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담이 등롱을 들고 왔을 때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산골짜기의 밤은 수도의 밤과는 아주 달랐다. 선선한 바람, 빛나는 별과 달빛, 매미 울음소리가 가득했으나 심묘는 이를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등롱을 들고 약초를 하나하나 더듬으며 무거운 비료를 든 채 비틀거렸다. 모기와 파리 때문에 여린 피부가 빨갛게 부었고 고운 손도 생채기투성이가 되어 성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심묘는 밤새 쉬지 않았다. 나담은 그런 심묘를 도울 수 없는 처지에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만 흘렸다. 적염이 언젠간 곱절로 호되게 당하길 기도하면서.
다음 날 오후가 되자 비로소 심묘는 땀을 닦을 수 있었다. 빈 비료 포대를 잘 놓아둔 심묘는 적염을 불렀다. 적염이 웃었다.
“볼 필요 없습니다. 아주 잘 해내셨습니다.”
적염이 행낭(行囊, 짐가방) 안을 더듬어 통을 하나 꺼냈다. 심묘에게 건넨 통에는 약초 한 포기가 담겨 있었다.
“바로 그 약초입니다. 부인이 홍수초의 벌레를 잘 제거했으니 저도 부인 부군의 부상이 나을 수 있게 돕겠습니다. 약속은 지킨 겁니다.”
약초를 받았지만 나담은 조금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당신은 이윤을 남겼네요.”
“부인의 의지에 감동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나든 부인은 오늘의 진심을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부인이 요행을 바랐으면 벌레를 깨끗이 몰아낼 수 없었고, 이 약초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도장, 고맙습니다.”
심묘는 약초를 받자마자 팔다리를 가누기 힘들 만큼 심한 피로를 느꼈다. 사실 근래 거의 쉬지 못하던 터였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머리가 무겁고 몸이 불편해졌다.
심묘가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나담도 마지못해 적염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기괴한 요구는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더욱이 그는 끝까지 심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묘는 나가와 심가 안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으로,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도 태연자약한 사람인데 이렇게 여지없이 희롱당하고 반박도 못 하는 처지가 됐으니 아주 달갑지 않았다.
“도장, 장래 홍수초에 다시는 벌레가 생기지 않길 바랄게요. 앞으로 심묘처럼 이 많은 일을 처리해줄 사람은 찾지 못할 테니까요. 그 누구도 전심전력으로 밤새워 일할 리 없다구요.”
적염이 하하 크게 웃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또 나와 부인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총 세 번 만나게 돼 있는데, 이번이 두 번째니 아직 한 번이 남았습니다.”
나담이 입을 삐죽거리며 심묘를 부축했다.
“만나고 싶지 않네요. 심묘야, 부축해줄 테니 가자.”
나담은 적염을 바라보았다.
“도장도 빨리 오세요. 제부가 이 약초를 기다리고 있어요.”
적염이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적염의 시선이 심묘의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닿았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둔 그의 눈 속에 깊은 연민이 스쳤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헛되이 힘만 들였어.”
* * *
회향과 팔각은 홰나무 아래에 서서 나담과 심묘가 들어간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종양과 모경은 나무 아래 칼을 품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미간은 팽팽히 찡그려져 있었다. 회향이 외쳤다.
“오셨다!”
팔각과 회향은 얼른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적염의 뒤로 나담과 심묘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담은 괜찮으나 심묘는 어디에서 나뒹군 듯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머리도 헝클어진 데다 몸에서 이상한 냄새도 났다. 팔각과 회향이 서로 바라보았다.
“마마, 이게……?”
팔각의 물음에 나담이 대신 답하려 했으나, 심묘가 소매를 당기며 그녀만 알아볼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나담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가야 한다면 지름길을 알려주겠습니다.”
적염이 빙빙 돌자 갑자기 광활한 농지가 나타났다. 얼기설기 얽힌 농지 안 좁은 길이 또렷이 보였다. 적염은 이 길이 예전 그 남매가 걸은 좁은 길이라 했다. 분월이 준 손수건 지도와 완전히 일치했다.
“이 길을 따라 앞으로 가면 출구로 나갈 수 있을 거요. 저는 일찍이 부인에게 액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적염이 심묘를 바라보며 웃자 심묘도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도장은 앞으로 또 액운이 올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액운은 하늘의 뜻에서 생기는 법이니 천기를 누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곧 저와 부인은 한 번 더 만날 것입니다. 그때도 부인이 홍수초 위 벌레를 깨끗이 쫓듯 진심으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액운도 쫓고 살길을 열 수 있을 겁니다.”
도사가 신비롭게 웃었다. 그의 말은 여전히 모호하고 불분명해 다른 사람은 영문을 몰랐다. 심묘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자신들이 예왕부에서 출발하고 이틀 밤이 흘렀으니 오늘은 엿새째였다. 귀원환은 열흘밖에 못 버티는 데다 노태의가 사경행의 독이 만연해지기 시작해 칠일 전후로 위험하다고 했다.
적염과 작별한 심묘 일행은 농지 사이 좁은 길을 걸었다. 이 길은 적염의 말대로 그저께 자신들이 걸은 숲길보다 훨씬 나았다. 마차에 도착했을 때, 회향은 궁금함을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마, 그 도사는 도대체 마마께 무엇을 요구했나요?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회향이 질문하자 모두의 시선이 심묘에게 쏠렸다. 회향만 궁금한 게 아니었다. 엉망이 된 심묘의 모습을 보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일단 서둘러 돌아가자.”
그러나 심묘는 마차에 오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심묘가 많은 이야기를 원치 않는 것을 본 회향은 어쩔 수 없이 더는 묻지 않았다. 모경은 말을 채찍질해 빠르게 몰았다.
마차 안에서 나담이 심묘에게 물었다.
“심묘야, 너 왜 아무 말도 안 해?”
사경행을 위해 심묘가 이렇게 큰 고통을 감수했으니 누가 들어도 감동할 터였다. 아무리 반려자를 위한대도 쪼그리고 앉아 밤새 쉬지 않고 약초를 골라내는 일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심묘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있으니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자랑할 게 아니야. 게다가 소문이 나면 예왕부 체면을 훼손할 수 있어. 그러니 언니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마.”
“제부한테도 안 돼?”
심묘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쉬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넌 밤새 조금도 쉬지 못했잖아. 엄청 피곤해 보여.”
심묘는 마차에 기대 천근만근 무겁던 눈꺼풀을 감았다. 그제는 밤새 걸었고, 어제는 밤새 바삐 움직인 터였다. 이제 손가락도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더 이상 버틸 필요가 없자 바로 잠이 들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이라 마차가 거칠게 흔들리는데도 한 번도 깨지 않았다.
“마마, 부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눈만 붙였던 것 같은데 누군가 자신을 깨웠다. 심묘가 눈을 뜨자 팔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아침, 태양이 높이 떠 있었다.
심묘는 이마를 문질렀다. 예왕부 대문에 사람이 아무도 없자 마음에 찬 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예왕부는 줄곧 경비가 삼엄했다. 더욱이 문지기는 묵우군에서 빼낸 호위로 평소 빈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문지기마저 없으니 일이 생겨도 무슨 일이 생긴 성싶었다. 나담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으나 심묘가 상심할까 두려워 꾹 참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종양과 회향, 팔각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마마,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모경의 말에 심묘는 서둘러 예왕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이 텅 빈 것을 보자 더 의심스럽고 불안해졌다. 저도 모르게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해 순간 사람과 부딪칠 뻔했다. 놀란 사람이 심묘를 보고 멍해졌다.
“마마, 돌아오셨네요.”
당숙이었다. 당숙은 난처해 보였다. 평소 똑 부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심묘가 얼른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부 안에 왜 아무도 없어요?”
“마마, 어째서 지금에야 돌아오셨어요. 전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소식이 결국 밖에서 퍼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몰려들었습니다. 탐색하기 위해서겠지요. 저희도 최선을 다해 숨기려고 했으나 조정 사람들까지 맴돌아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계 부인 마님도 몇 번 마마의 행방을 물었고, 폐하께서도…….”
“심묘도 제부의 목숨을 구할 고인을 찾느라 바빴어요. 우리는 이미…….”
나담이 변명을 채 다 하기도 전에 당숙이 자기 이마를 팍 쳤다.
“맞다! 좋은 소식을 말하는 걸 잊었네요.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심묘와 나담이 동시에 멍해졌다.
“깨어났어요?”
“마마가 떠나신 그날 밤 전하의 상처가 갑자기 벌어졌습니다. 독성은 어찌해도 가라앉히지 못했지요. 궁중 태의가 귀원환으로도 전하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고 공자에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하는 몹시 위중한 상태이셨습니다.”
당숙의 말만으로도 그날의 파란만장함을 그릴 수 있었다. 듣는 사람들은 심장이 떨어지는 듯해 가슴을 부여잡았다. 성격 급한 나담이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뒷말을 보챘다.
“그래서요?”
“그 뒤 수도 곳곳에 전하께서 임종을 앞두셨다는 소식이 퍼졌고, 계 부인 마님은 조급해져 의술이 고명한 사람이 전하를 구해내면 거금으로 사례하겠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그 방을 보고 찾아온 사람이 약초를 주어서 고 공자가 약환을 만들어 전하께 먹였지요. 전하의 상처는 점점 좋아졌고, 오늘 새벽에 한 번 깨어나셨습니다. 고 공자와 노태의가 진찰한 후에 전하의 상처는 점점 회복될 거라고, 독도 해독됐다고 했습니다.”
당숙이 말을 마치고 잠시 탄식했다.
“모두 전하의 목숨이 다하지 않았다고 했지요. 이전에도 전하께서 버티지 못하실 거라고 했으나 전하는 일어나셨어요. 이번에도 그러셨지요. 아마 선황후마마께서 하늘에서 전하를 보살펴 주시나 봅니다.”
심묘는 사경행이 나아간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호위들은 명치를 문질렀다. 저 아래로 추락했던 심장이 겨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담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건 분명 경사였으나, 심묘가 어렵게 적염에게서 약초를 구해왔는데 한발 늦은 셈이니 몹시 안타까웠다. 사경행에게 약초를 건넨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어쨌든 사경행이 나았으니 그 사람은 고마운 이였다. 그러나 심묘가 온 마음을 다한 일이 쓸모없어졌고, 헛된 걸음을 하게 된 셈이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막 깨어나신 전하께서 마마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부를 비우셨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혀 요양을 못 하실까 걱정됐습니다. 마마께서 오래도록 오지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걱정하던 차인데, 다행히 무사히 오셨군요.”
당숙의 세심한 생각을 심묘가 칭찬했다.
“잘했어요.”
심묘는 자신이 적염을 찾아간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잡힐까 봐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종의 일에 너무 상심한 것이 드러나면 이 역시 분명히 약점이 될 터였다. 언젠가 자신을 처리하려면 사경행의 몸에 손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비열한 자들이 생길지도 몰랐다. 더욱이 사경행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볼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사경행이 완전히 나은 후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될 터였다.
“먼저 전하를 보러 갈게요.”
당숙이 심묘를 저지했다.
“전하는 고 공자가 끓인 약을 드시고 지금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지금 말고 이따 가시지요.”
심묘가 망설이다 당숙을 보았다.
“부 입구에는 왜 사람이 없고, 또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건가요? 무슨 일이 있나요?”
당숙은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근래 너무 많은 일이 생겨 제가 이 일을 마마께 알리는 것을 잊었네요. 전하께서 깨어나신 일은 온 농서성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절박한 순간을 넘겨 평안 무사하시지만, 계 부인과 계 공자는 안심하지 못하셔서 계속 부에 머물고 계십니다. 두 분께 마마께서는 의원을 찾으러 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하의 목숨을 구한 은인도 부에 잠시 머물고 계십니다. 오늘 전하께서 깨어나셨기에 계 부인과 계 공자가 은인에게 인사하러 가셨습니다. 계 부인과 계 공자가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으나, 은인은 사례를 거절하셨습니다. 지금 대청에 계십니다.”
나담이 물었다.
“그럼 무얼 원한대요? 방을 본 것 아니에요? 사례를 원하는 게 아니면 대체 왜?”
당숙은 나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계 부인도 재차 물으셨구요. 그런데 은인께서는 사례를 전부 거절하셨습니다. 그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왔을 뿐이고,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의술로 전하를 낫게 한 것도 아니니 보상은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요. 그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영초(靈草, 뛰어난 효험이 있는 약초)를 챙겨왔을 뿐이라며 극구 사양하시더군요.”
나담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참, 품성이 대단하신 분이네. 난 못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면 아주 귀한 걸 텐데. 만난 적도 없는 생소한 사람을 구하는 데 쓰다니 보통 분은 아니신가 봐.”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당숙이 웃으며 그 말에 동조한 후 심묘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계 부인도 이 일로 머리가 아프시고 저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습니다. 마침 마마께서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무엇을 드리면 좋을지 마마께서 결정하시지요.”
심묘는 천천히 속눈썹을 드리웠다.
“전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 일단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지금 대청에 계신댔죠?”
“그렇습니다. 저도 지금 가려 했으니 같이 가시지요.”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담도 서둘러 따라갔다. 가는 길에 당숙이 갑자기 생각난 듯 덧붙였다.
“그 두 분은 막 농서성에 와서 이곳이 그다지 익숙하지 않답니다. 가족을 찾아왔다고 말씀하셔서 계 부인이 근래 찾고 계시지요. 우리 예왕부도 힘을 보태고 있지만, 바깥에 방을 게시해 찾으면 더 빨리 찾을 것 같습니다.”
“두 분? 두 사람인가요?”
심묘의 물음에 당숙이 답했다.
“남매입니다. 나이는 마마와 비슷해 보이는데, 두 분 모두 생김새가 출중합니다. 품행도 단정하니 성숙하고 현명한 분들입니다. 하인들에게도 아주 친절히 대해주시고요. 성정도 순박하고 다정해서 계 부인께서 좋은 배필을 찾아주려고 하십니다. 청년 준걸과 대갓집 규수를요.”
예왕부 하인들 중 많은 이가 사경행이 직접 묵우군 안에서 길러낸 사람들이었다. 묵우군은 아니더라도 모두 사리 분별이 뛰어났다. 또 그들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일을 했다. 자기 내키는 대로 일을 하는 것 같은 사경행이 엄격한 수하를 길러낸 것이다. 아무리 순박하고 다정해도 이런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짧은 시간 내라면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예왕부 사람이었다. 심묘는 직감적으로 ‘은인’들이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느꼈다.
호기심을 느낀 나담이 말을 받았다.
“아주 좋은 사람들이네요.”
당숙이 아주 기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게다가 주인님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예왕부 모두에게 일생의 귀빈이시지요.”
그들은 대청 입구에 도착했다. 들어가니 중앙에 계 부인과 계 대인이 앉아 있었다. 계 부인과 대화를 나누던 계 대인이 심묘를 보았다. 계 부인이 빠르게 심묘에게 다가왔다.
“교낭, 돌아온 거니?”
대청 안에는 부인도 몇몇 더 있었다. 모두 심묘가 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심묘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계 부인을 바라보자 그녀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경행의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야……. 대낮에 내쫓기 어려워 별수 없이 이곳에서 맞이했단다.”
사경행의 위치는 대량에서 아주 미묘했다. 그래서 그의 생사는 조정 안 많은 사람들의 생사와 이익에 관련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대신이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힘드니 계 부인을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자기들 부인을 보낸 것이다. 오늘 사경행이 깨어났다고 하니 이 부인들은 일부러 와서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했다.
“요 며칠 어디 갔느냐? 당숙이 네가 의원을 찾아갔다고 말했으나 네 행방을 전혀 모르더구나. 하마터면 이 무리조차 상대하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왔구나.”
계 부인이 작은 소리로 심묘를 훈계했다.
“경행이 깨지 않아 너도 초조했겠지. 급한 마음에 의원을 찾아간 것은 나도 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부군의 곁에 있어야지. 오늘 경행이 깨어나자마자 너를 찾았단다. 그런데 네가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실망했겠어. 네 신분을 잊지 말거라. 넌 관리 집안 소저가 아니라 예왕부의 왕비다. 일할 때 파장을 생각하거라. 네 일거수일투족을 많은 눈이 주시하고 있다.”
듣기 거북했으나 심묘는 계 부인이 자신을 위해 한 말임을 알았다. 게다가 계 부인은 사경행과 혈연관계였다.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부 밖으로 나섰으니 확실히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지적이 억울하지는 않았다.
계 부인이 심묘와 대화를 끝내자 대청 안에 있던 부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심묘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왕비마마, 나오셨군요. 저희가 요 며칠간 계속 왔는데, 마마를 통 뵙지 못해 염려스러웠습니다. 전하의 일로 크게 상심하셔서 자리에 앓아누우신 건 아닐지 걱정이 절로 들더군요. 얼굴도 비치지 못하실 정도니, 이러다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설레발도 쳤지 뭡니까. 마마께서 괜찮아 보이시니 저희도 안심이네요.”
부인은 심묘가 예왕비의 직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있었다. 부군이 중상을 당해 누워 있는데 병상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방도 알리지 않고 자리를 비워 손님도 맞이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뿐더러 무정하다고 비아냥대는 말이었다. 계 부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으나 심묘는 오히려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집안이 혼란스러워 부인께 걱정을 끼쳤군요.”
내 집안일이니 외부 사람은 상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묘는 강한 사람을 만나면 강하게 나갔다. 사경행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람을 대처할 때는 신중했고, 똑똑하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랄한 공격에 부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때 심묘의 차림새를 보고 다른 부인이 놀라 말했다.
“예왕비마마, 이게 무슨? 의상이 더러운데, 혹시 넘어지셨나요?”
말을 마친 부인은 사납게 코를 막으며 매우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소리에 계 부인과 계 대인은 멍해졌고 당숙은 당황해했다. 대청 안 사람들 시선이 전부 심묘를 향했다. 심묘의 의상은 흙과 먼지가 잔뜩 묻어 몹시 더러웠다. 머리도 헝클어져, 손으로 대충 정리한다고 수습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게다가 몸에서 이상한 냄새까지 났는데, 얼핏 맡기에 비료 같았다.
관가 부인들은 명제 사람인 예왕비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젯거리가 생기자 즉시 수군거렸다. 그녀들은 심묘가 초조해서 제대로 꾸미지 않고 나온 것이다, 갑자기 넘어진 것이다 등등 각자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했다. 나담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심묘가 이렇게 된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 씩씩거렸다.
당숙이 부 입구에서 심묘를 봤을 땐, 사경행과 은인의 일로 심묘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게다가 평소 심묘는 단정하며 귀한 모습이었으며 의상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지금 같은 모습은 본 적 없었다. 계 부인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심묘는 자신의 조카며느리니 자신에게도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심묘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런 이상한 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심묘는 일부러 트집 잡는 사람들 앞에서 귀중하게 입은들 그들의 속내가 변할 리 없다고 여겼다. 그를 잘 알기에 심묘는 지금 이 모습이 창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도 사이좋게 차를 마실 관계는 아니었다.
보다 못한 계 부인이 끼어들어 중재하려 할 때, 갑자기 바깥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형은 재능이 뛰어나군요. 이 구연환(九連環, 아홉 개로 이루어진 고리)은 난 풀지 못하거든요. 3형을 제외하면 이 형이 가장 빠를 겁니다.”
계우서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다른 젊은 남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매우 맑으면서도 살짝 잠긴 듯한 목소리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과분한 칭찬입니다. 하지만 절대 예왕 전하와 절 함께 논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게 어디 그런 자격이 있으려구요.”
심묘의 심장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이 맑고 투명하며 잠긴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다. 그러나 누구인지 단박에 떠오르지 않았다. 심묘는 당황한 낯빛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른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매가 긴 탓에 손가락 끝만 드러났는데 희고 부드러운 손에 혈흔이 보였다. 게다가 맹렬히 떨리고 있었다.
계우서의 목소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또렷하게 들렸다.
“그런 말 말아요. 3형이 깨어나면 꼭 겨뤄봐요. 3형은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니, 이 형도 반드시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대청의 발이 들리고 두 사람이 얼굴을 보였다. 앞에서 걷던 계우서는 심묘를 보고 멍해졌다. 그는 부인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형수, 돌아왔군요! 요 며칠 철의에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줬어요.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심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우서 뒤에 따라온 사람을 단단히 주시했다. 젊은 남자는 대략 약관이 좀 넘어 보였다. 그는 밝은 노란색 장포를 입고 푸른색 천으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있었다. 큰 특징은 찾을 수 없는 외양이었으나 이유 없이 시선이 갈 만큼 ‘지적인’ 분위기를 온몸에서 발산했다. 특히 그의 눈은 여름 태양처럼 열렬한 열정을 띠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심묘가 쓰러질 뻔했다. 나담이 민첩하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 부축했다. 나담은 심묘가 이틀간 너무 무리했기에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여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심묘가 휘청거린 걸 보지 못한 계 부인은 서둘러 심묘에게 그 남자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경행을 구해주신 은인 중 한 분인 이 공자야.”
젊은 남자가 심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미소 지었다.
“저는…….”
심묘의 마음속에 수천 개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이각!” 자신은 영원히 이 이름을 잊지 못할 터였다. 영원히, 이 열렬하게 취한 듯한 눈을 잊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짧은 시간 안에 부수의의 오른팔로 성장한, 배랑에 버금갈 정도로 신임받는 중신이 된 미 부인의 동생, 이각.
심묘는 이번 생에서 이 남자를 다시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낯선 타국, 자신의 관저에서 그럴듯하게 등장하리라고는. 심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을 외부인이라고 배척하는 부인들 앞에서 기이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흥분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당장 이각을 조각내 그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뜯어 먹지 못해 한스러웠다.
전생 자신의 비참한 최후는 눈앞의 사람이 누이와 손잡고 하사한 것이었다. 미 부인은 부수의의 진심을 얻었고, 이각은 그녀의 권세를 얻어 등용되었다. 이각은 부수의를 세심하게 시중들었고, 미 부인이라는 거목에 기대 더욱 총애받았다. 이 남매는 서로 의존하며 높은 지위로 올라갔다. 미 부인은 완유를 출가시켰고 이각은 부명을 폐위시켰다. 미 부인은 심가 대방을 모해해 온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형시켰다. 이각은 이방, 삼방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현생에서도 그 악연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알았지만, 사경행의 은인이라 자처하는 그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은인.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심묘는 당숙이 ‘남매’라고 말한 게 떠올랐다. 그때 심묘의 흉악한 시선을 본 계 부인은 깜짝 놀라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교낭……!”
“은인이 두 분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또 다른 분은 어디에?”
심묘가 살짝 웃으며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스스로는 말투의 기괴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여종이 찻물을 엎질러 내가 옷을 갈아입게 했어. 이 부에 다른 여인의 옷은 없잖아. 그래서 내가 교낭의 옷을 가져왔단다.”
계 부인이 말할 때 계우서가 문밖을 보고 말했다.
“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