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장
여자의 얼굴은 연꽃 같았고 허리는 버드나무 같아 마치 선녀처럼 보였다. 얇은 옷을 입고 느릿느릿 걸어오자 오후의 태양이 한층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사람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고양이처럼, 어떤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른함을 띠고 있었다. 심묘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본 빛을 다시 마주하는 듯했다.
심묘의 의복과 머리는 형편없는 꼴인 데다가 안색마저 창백했다. 여자를 주시하는 모습은 굶주린 이리 같았다. 기회를 엿보는 사나운 범, 혹은 위험을 감지한 독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의 관저에 와서 자신의 부군을 구했다는 무용담을 뽐내며 나타났다. 전생의 숙적과 이번 생의 원한. 악연은 끊을 수 없는지 심묘는 다시 한번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바라보고 섰다.
“미낭이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심묘의 날카로운 눈초리는 그녀가 미낭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명제 황제 부수의의 보물이자 새로운 태자 부성의 모비였다. 게다가 심묘 자신과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이기도 했다. 바로 미 부인이었다.
계 부인이 화사한 웃음빛을 띠며 그녀를 소개했다.
“이 아가씨가 바로 그 약초를 가져온 이미 소저다.”
심묘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녀를 매섭게 응시했다. 미 부인은 후궁 안에서 오랜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부성을 새로운 태자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힐 수 있었다. 삼궁육원(三宮六院) 일흔두 비, 누구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 부수의는 그녀만을 총애했다. 보통 여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보다 예쁜 사람은 그녀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그녀보다 똑똑하면 그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그녀는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고,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났다. 늘 궁리하고 계산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그녀가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이라고 평했다. 그렇다고 오만방자하다고 흠을 잡지도 않았다. 그녀가 분수를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언제 가장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후궁 안 비빈들은 그녀가 원하면 이 세상 남자 중 그녀의 치마폭에 굴복하지 않을 자는 없을 거라고 시샘하고 동경했다.
전생에 미 부인이었던 이미는 지금 심묘 자신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보수적인 의상이었는데도 그녀가 입자 무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향도 나는 것 같았다. 화려한 그녀가 맞은편에 서니, 심묘는 더욱 난처해 보였다. 심묘의 시선이 이상함을 눈치챈 그녀는 심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일순 매우 놀라는 얼굴이었으나 격에 어긋나 실례를 범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 부인과 계우서는 이미가 놀라는 모습을 바라보고 동시에 심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심묘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두 사람 역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심묘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었다. 그 얼굴에는 예의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우서 모자는 자신들이 잠시 착각한 모양이라고 넘겼다.
“반듯한 사람이네요.”
심묘가 작게 말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당숙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심묘의 말은 마치 정실이 처음 들어온 첩실을 내려다보며 트집 잡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과 다투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실 자리를 달라는 오만불손한 고완아도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어째서 처음 보는 이미에게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 건지 의아했다.
나담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당숙이 남매가 출중하게 생겼다고 말했는데 이각은 그렇지 않았다. 기껏해야 봐줄 만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미를 보자 출중하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담은 여태 자신이 아는 여자 중 가장 특별한 사람이 심묘라고 여겼다. 용모는 둘째 치더라도 심묘는 뼛속 이면이 단정하고 대범해서 누구라도 부러워할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는 다른 느낌이었다. 심묘가 크게 피어난 모란, 꽃 중의 왕이라고 한다면 이미는 양귀비였다. 사랑스럽고 화려하며,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사악한 아름다움이 사람을 강하게 유혹했다.
“이 소저는 대량의 사람인가?”
이미가 심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 농서성에는 막 왔습니다.”
“이 소저와 이 공자는 흠주 사람이야. 농서성에 와서 방을 보고는 경행의 목숨을 구해줬단다.”
계 부인이 웃으며 덧붙였다.
“처음 와서 방을 보았다? 전하의 행운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 소저의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심묘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이미를 보았다.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심묘의 적의를 눈치챘다. 그녀가 시시콜콜 따지며 질투하는 본처처럼 굴자 이미는 당황스러웠다. 이각이 한 걸음 다가와 심묘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예왕 전하의 건강이 나아지셨다니, 저와 누나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요 며칠 후한 대접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이각의 말은 대범했다. 누이를 낮잡아보는 게 분명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계 부인은 당혹스러워하며 얼른 중재에 나섰다. 심묘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지만, 묻는 건 나중 일이었다. 일단 은인인 이각과 이미를 붙잡는 게 더 시급했다.
“누가 누구에게 감사하다고 하는가? 그대들은 경행의 목숨을 구했거늘, 어떻게 실례했단 말을 하는가. 우리는 아직 보답도 못 했는데……”
이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계 부인.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우연히 방을 보았을 뿐입니다. 당시 많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약초는 우리 두 사람이 가지고 있어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내어드려야지요. 약초와 예왕 전하 사이에 연이 있는 셈입니다. 저희에게 보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들이 이미를 칭찬했다. 생김새도 예쁜데 성격도 좋으며 대범하고 권세를 탐하지 않는다니. 이미는 이 세상에 몇 없을 사람이었다. 반면 심묘는 갑자기 이유 없이 사람을, 그것도 은인을 괴롭히니 그녀의 미모를 시샘하는 게 분명했다. 왕비의 기백과 도량을 갖추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미는 송구스럽다는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옷이 더러워져서 왕비마마의 의상을 빌렸습니다. 소녀가 깨끗이 빨아 이전과 똑같은 상태로 마마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셔요.”
심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생에 자신은 진국에서 명제로 돌아오고서 처음으로 미 부인을 보았다. 비빈이 늘어나 있었지만, 이는 일찍부터 예상했으니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 부인은 여러 비빈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었다. 부수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그녀 한 명뿐이었다.
사실 자신은 냉혹한 부수의가 한 여자를 깊이 아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 보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 부인은 부수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일 뿐임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은 육궁을 다스리는 황후였지만, 실제로는 미 부인이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아들 부성이 부명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턱을 조금 치켜든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조소했던 그녀는 지금 겸손한 태도로 스스로를 ‘소녀’라 낮추고 이쪽을 ‘왕비마마’라고 높였다. 하늘의 뜻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려운지, 세상은 자신에게 두 번의 삶을 주었다. 그러나 세상은 작기도 했다. 두 번째 생에서 전생의 원수를,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또다시 만날 줄은.
이미는 대답이 없는 심묘를 보고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이각을 끌고 나가려고 했다. 계 부인은 말리고 싶었으나 예왕부의 주모는 심묘였다. 예왕부에서 예왕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그녀의 결정을 번복할 권한이 없었다.
“잠시만.”
심묘가 갑자기 그들을 잡았다. 이각과 이미는 얼떨떨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심묘가 물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의 목숨을 구했으니 예왕부의 은인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 떠나면 예왕부는 손가락질당하고 박정하다는 말을 들을 게다.”
이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예왕부가 박정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저희가 원해서 떠나는 겁니다.”
“전하께서 완전히 나으시면 떠나거라.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꼴이니 예왕부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심묘가 살짝 웃었으나 그녀의 말에는 의심의 기색이 드러났다. 가보로 내려오는 약초가 사실은 가짜라서 사경행의 병이 재발할 수도 있다는 의혹이었다. 그때는 사기꾼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곤란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계 부인과 계우서는 곤란했다. 심묘는 공격적인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이 남매에게 이렇게 적대적인지 의아했다. 게다가 이들은 심지어 사경행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은인에 박정한 태도를 보이다니, 도리에 맞지 않았다. 설령 의심이 들어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심묘의 발언은 사실 다른 의도를 품고 있었다. 자신은 이 두 사람이 의심받는다면 반드시 머무르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후에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흉악한 일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대로 자기들의 명예가 더럽혀지게 놔두지 않을 터였다. 과연 예상대로 이각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가득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왕 전하께서 쾌차하시는 걸 보고 떠나겠습니다.”
원하던 대답을 들은 심묘가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이네. 예왕부는 두 사람에게 ‘은정’을 빚졌으니 두 사람이 남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잘 ‘보답’하겠는가?”
심묘는 의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이도 저도 아닌 태도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이미가 그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자, 심묘는 시선을 감지하고 웃음을 띠었다.
“난 아직 일이 좀 있어서 여러분과 함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모가 저 대신 여러 부인과 함께해주세요.”
심묘는 계 부인에게 부탁한 후 몸을 돌렸다. 나가려던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이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이 옷은 널 참으로 돋보이게 만드는구나. 마치 널 위해 만든 옷 같다. 네 몸에 잘 맞으니 내게 돌려줄 필요 없다. 내가 네게 선물한 거라 여기면 되겠구나.”
심묘는 옷을 주겠다고 말했으나 물건을 하사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기민한 당숙도 심묘의 영문 모를 행동의 이유를 찾지 못해 얼떨떨했다. 심묘가 떠난 뒤 당숙이 나담을 바라보았다.
“묻지 마세요. 나도 몰라요.”
나담이 혀를 내밀며 심묘를 따라 나갔다. 계 부인이 민망한 듯 이미와 이각을 바라보았다.
“마마께서 요 며칠 전하의 병세를 걱정하느라 조금 예민해지셨으니 두 사람이 양해해주세요.”
“간절한 마음이실 테니 당연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계 부인은 그런 이미에게 더욱 흡족해하며 그녀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계우서도 이각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 형, 가십시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가 돌아온 것을 보고 기쁜 기색으로 맞이했다.
“마마, 돌아오셨군요. 연락이 없어 혹여나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심묘를 살펴보더니 약속한 것처럼 넋을 잃었다. 그녀는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경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대체 무슨 일을 겪으신 거예요?”
심묘의 의상이며 얼굴이며 멀쩡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무엇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혼비백산한 표정이었다. 경칩과 함께 대경실색했던 곡우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영리하게 말했다.
“마마, 일단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씻으신 뒤 뜨거운 죽을 드세요. 전하는 무사하시니 우선 푹 쉬고 난 뒤에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곡우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경칩을 끌고 뜨거운 물을 준비하러 갔다.
잠시 후 심묘는 목욕통에 들어갔다. 물 온도는 딱 알맞았으나 얼음산에 들어앉은 듯 몸이 떨렸다. 미 부인이 어떻게 예왕부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어떻게 사경행의 목숨을 구한 은인까지 됐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미 부인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참아냈다. 그녀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냉담한 태도에 사람들은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아마 자신이 미인을 질투한다고 여길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지금 뭐라고 쑥덕대던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미 부인이 어떻게 대량에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 다른 것에는 일체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전생에 자신이 진국에서 돌아왔을 때 미 부인은 이미 궁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부수의가 동쪽 정벌 중 만난 신하의 딸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생 부수의는 아직 친정(親征)에 나선 적 없으니 미 부인과 만날 일이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가 어딜 가든 미 부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녀가 대량에 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전생에서도 미 부인은 대량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그녀가 아직 부수의를 만나기 전이다. 전생에 그녀가 사경행과도 조우했던 것인가. 그랬다면 어떻게 부수의의 총애받는 비가 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왜 명제에 간 건지, 혹시 그것이 사경행의 뜻인 건지 심묘는 온몸이 떨렸다.
전생에 자신은 사경행을 따라 대량에 오지 않았다. 사경행도 명제 조공연회에 예왕의 신분으로 오지 않았다. 그와 자신은 어떠한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자신은 부수의의 아내였다. 만약 당시 사경행이 지금처럼 중태에 빠졌고, 미 부인 남매가 그를 구했다면? 사경행과 그들 남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을 터였다. 적어도 적대적 관계는 아니었을 터였다.
대량 친왕이 배후에 있는 대량 여인이 명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가 됐다면 그녀는 첩자일 수도 있다. 대량 예왕인 사경행이 정경성 임안후부의 소후야로 지낸 것처럼, 미 부인이 대량에서 보낸 첩자였다면 여러 가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왜 부성을 낳았고, 그를 태자로 올리기 위해 그토록 애썼을까.
심묘는 미간을 팽팽히 찡그렸다. 가장 두려운 것은 전생 미 부인과 사경행의 관계였다. 전생에서 대량 황실이 미 부인을 명제로 보냈다면 자신의 죽음은 대량 황실과 연관된 셈이었다.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부명과 완유. 만약 방금의 가정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자신과 사경행의 사이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넋을 잃은 심묘는 물이 차가워졌는지도 몰랐다. 심묘가 오랜 시간 나오지 않자 경칩이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정신을 차린 심묘는 그제야 한기를 느꼈다. 몸을 깨끗이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나담이 방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심묘에게 다가왔다.
“심묘야, 너는 이미 소저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바본 줄 아니? 넌 항상 사람들에게 정중하잖아. 그런데 좀 전에 이미 소저를 대할 때는 아주 무례했어. 꼭 상재청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야. 그때도 이상했지만, 이후에 상재청이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게 밝혀져서 네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했지. 혹시 이미 소저도 그런 거야? 이미 소저를 상재청보다 더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심묘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믿을 거야?”
나담은 멍해졌다.
“정말 나쁜 사람이야? 보기엔 안 그렇던데.”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증좌가 없으면 아무리 말해도 헛일이다.
“언니도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 가봐.”
나담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제부를 보러 가지 않으려고?”
심묘는 멈칫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어.”
나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 며칠 너무 힘들었지. 게다가 잘 먹지 못해서 몸도 너무 야위었어. 쉬어, 방해하지 않을게. 이미 소저가 마음에 걸리면 언제든 이야기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대량에서 너한테 가족이라곤 나밖에 없잖아.”
나담이 떠나자마자 심묘의 안색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녀는 경칩에게 명했다.
“모경을 불러오너라.”
최근 들어 심묘가 지금처럼 장중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살기까지 띠고 있었다. 경칩과 곡우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서둘러 모경을 찾으러 나갔다. 모경이 들어오자 심묘는 방문을 꽉 닫았다.
“그 남매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지?”
심묘가 중요한 일을 분부할 거라고 여긴 모경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편방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나 대신 그들을 죽여다오.”
모경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은 심묘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남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악천후 속 비바람을 맞고 자란 들꽃이었다. 주위엔 늘 그녀를 해치려는 악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걸음걸음 함정을 파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심묘는 지금까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지혜를 발휘해 재난을 잘 피했다.
물론 도망치기만 한 게 아니다 보니 그동안 자신에게 이런저런 분부를 내렸다. 하지만 대부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차원의 대응이었을 뿐이다. 오늘처럼 연고도 없는 애먼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건 처음이었다. 모경은 진지하게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마, 그들은…….”
“그들은 나와 원한이 있다. 피맺힌 원한이니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두 사람을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을 테니, 네가 나 대신 그들을 죽여라.”
모경이 대답하기 전에 창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날이 어두워서인지 창문 밖에 배랑이 와 있는 걸 보지 못했다. 심묘는 배랑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방에 들어온 그는 모경에게 잠시 시선을 주더니 심묘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솔하게 살인하는 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심묘가 냉랭히 그를 주시했다. 미 부인이 나타나서 극도로 암담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당연히 배랑을 바라보는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배랑은 심묘의 반감에 영문을 몰라 코를 문질렀다. 그는 가볍게 두 번 기침했다.
“남매는 예왕부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들이 죽으면 예왕부가 의심받을 것입니다. 무수한 호위를 데리고 있는 예왕부가 남매의 목숨도 지키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그대로 믿겠습니까? 반드시 예왕부 사람이 손을 쓴 거라고 여길 겁니다.”
배랑은 심묘를 한 번 바라본 후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오늘 마마의 행동은 너무 지나치셨습니다. 마마는 모르실 테지만, 벌써 바깥에는 마마께서 이미 소저를 질투해 괴롭히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왜 그러셨는지 저도 영문을 몰랐지만, 그들과 원한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가네요. 그러나 그들과 원한이 있다는 건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남매가 사고를 당했을 때 다들 마마를 의심할 겁니다.”
배랑이 단숨에 많은 말을 토해냈다.
“왜 적합한 자가 모경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는 마마께서 예왕부의 수하를 비롯해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걸 증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모경이 혼자서 부의 호위를 다 상대할 수 있을까요? 모경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혼자서 여러 명과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모경이 잡히면 예왕 전하께서 반드시 마마께 이유를 물을 겁니다. 전하께 알리지 않고 모경에게 시키시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들키면 마마의 비밀도 만천하에 드러날 겁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심묘는 잠시 배랑을 주시하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배 선생은 늘 그렇게 이성적인가요?”
심묘는 배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소했다.
“하긴, 당신이 이성적이고 세상만사에 초연하니까 그 자리까지 갔겠지.”
배랑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할 때, 심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의 말이 맞네요.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예왕부 안에서의 살인이라니, 내 생각이 짧았네요. 게다가 한칼에 죽이는 건 오히려 그 두 사람을 위하는 일이 돼버리구요.”
모경은 말이 없었다.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나가보거라. 하지만 눈을 떼지 말고 그들을 잘 지켜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난 그 남매의 내력을 명확히 알아야겠어.”
모경은 짧게 대답하고 떠났다. 심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도 당장은 손을 댈 수 없다. 심장이 할퀴어지고 폐부가 긁히는 듯했다. 이 기분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아 누구에게든 분풀이하고 싶었다.
배랑이 심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심묘에게 물었다.
“남매에게 원한이 깊으신 것 같네요.”
심묘는 격정을 겨우 억누르며 냉소했다.
“왜 그렇게 말하죠?”
배랑은 탐구하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마마께서 사람의 목숨을 원하는 건 처음 봅니다. 마마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경계심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 남매가…… 제 생각보다 아주 대단한가 봅니다.”
심묘는 심장이 뛰었다. 배랑을 바라보니 분노가 더욱 높게 치솟았다.
“배 선생은 늘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잘 읽는군요. 그럼 내게 도대체 무슨 깊고 큰 원한이 있는지도 아나요?”
“제가 말하길 원하시나요?”
“그들은 내게 되돌릴 수 없는 두 명의 목숨을 빚졌어요. 그들이 만 번 죽는다고 해도 보상받을 수 없지요.”
배랑은 심묘의 눈 속의 흉악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심묘는 그를 주시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요?”
배랑은 의외의 대꾸에 어안이 벙벙했다. 근래 심묘의 태도는 온화해져서 자신을 향한 껄끄러운 감정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래서 그녀와의 관계에 이전처럼 긴장이 서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늘 심묘는 온몸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웠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이전보다 더욱 소원했다. 마치 자신과 그녀가 적으로서 대치하는 상황 같았다.
“두 사람은 대량 사람입니다. 마마는 지금까지 대량에 오신 적이 없으니 두 사람과 만나신 적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과 깊은 원한을 맺은 겁니까?”
배랑은 심묘의 태도가 변한 이유가 남매에 있다고 확신했다. 잠시 사색하던 그가 묻자 심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배 선생,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전부 다 했습니다. 내가 그 남매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선생은 아주 정확히 봤습니다. 난 배 선생이 날 위해 계책을 세워주길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선생이 내 일을 저지하지 않길,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길 바랍니다.”
배랑은 갑자기 견디기 어려운 강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강직한 성격인 자신은 일생 구속받지 않길 원했다. 그런데 심묘는 류형을 인질로 삼아 자신이 부수의의 사람이 되길 강요했다. 영문도 모르게 첩자가 된 탓에 멀리 대량까지 오게 되었건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이토록 매몰차게 나오니 당장에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심묘의 냉혹한 눈빛에도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녀를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이 밀려들었다.
“절 믿지 않는 겁니까?”
“난 누구도 믿지 않아요.”
배랑의 태도는 고집스러웠고, 심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팽팽한 신경전 끝에 배랑이 자리를 떴다.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았다. 몸의 기력을 다 쓴 듯 전신이 나른했다. 바로 이미와 이각을 죽일 수 없으니 일단 그들을 예왕부에 가둬두고 추후 큰 원한을 갚아나갈 것이다. 원한을 갚지 못한다면 죽어서 두 아이를 볼 면목이 없을 터였다. 그때, 경칩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마, 전하께서 깨어나셨는데, 마마를 뵙고 싶으시답니다.”
심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알았다.”
대량 황실, 사경행, 이미 남매. 자신은 연결된 관계도를 모두 그렸다. 깊게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만일 자신의 추측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 부인, 이미의 출현은 자신의 계획과 생각을 어지럽혔다.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사경행과 마주 보기 힘들었다. 그에게 마음속의 증오를 들킬까 봐 두려웠으며 그가 자신의 두려운 추측이 사실이라고 증명할까 봐 불안했다.
사경행의 방 안은 짙은 약 냄새로 가득했다. 하인들은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사경행이 깨어났으니 빠른 회복을 위해 요양에 힘써야 했다. 모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더 많아졌다. 약상자를 들고나온 고양이 심묘를 맞이했다.
“막 깨어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마마를 찾았습니다.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조심하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심묘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의를 입은 사경행은 겉옷을 걸친 채 침상에 반쯤 기대어 책을 보고 있었다. 부상을 입어서 그런지, 그는 꽤 야위어 얼굴선이 한층 뚜렷해 보였다. 그러나 귀공자처럼 우아하게 책을 넘기는 모습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
심묘는 걸음을 내딛다가 망설였다. 발을 더 내디뎠다간 곧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릴 것 같았다. 그저 이 문제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영원히 도피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는 것을 자신은 잘 알았다. 그때, 사경행이 고개도 들지 않고 입만 열었다. 목소리는 냉담했다.
“왔으면서 왜 들어오지 않지?”
심묘는 멈칫했다. 그녀는 곧 주먹을 팽팽히 쥔 채 천천히 걸어 들어가 침상 앞에 앉았다.
“괜찮아요? 당숙이 당신이 깨어났으나 더 쉬어야 한다고 해서 방해하지 않았어요.”
사경행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으나 말투에는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했다.
“재밌네.”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책을 향했다.
“감히 나를 쳐다보지 못하는 건가?”
한기를 띤 목소리에 심묘가 미소 지으며 응수했다.
“그럴 리가요?”
사경행도 살짝 웃었으나 눈은 웃지 않았다. 그가 책을 사납게 덮어 옆으로 던졌다. 그는 심묘가 방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작은 불꽃을 품고 있었다.
“심묘, 내가 부르지 않았다면 넌 아예 오지 않을 생각이었느냐?”
분위기가 한층 차가워졌다. 사경행의 안색은 창백했으나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시선이 칼날처럼 예리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한테 뭐 감추고 있는 거 아니야?”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냉정하게 논하면 이번 생과 전생은 분명히 달랐다. 사경행도 미 부인과 반드시 연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부명과 완유가 관련되면 이성을 잃어버려서, 초연하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사경행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면 간단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탓에 감정들이 뒤섞이면, 원망도 사랑도 아닌 수많은 두려움 때문에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질까 봐 괴로웠다.
사경행이 깊은 눈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워 빨리 자리를 떠나려 했다.
“잘 쉬어야 금방 회복할 거예요. 지금은 늦었으니 약을 먹고 일찍 자도록 해요.”
“오자마자 가겠다는 건가?”
사경행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울분이 가득한 것 같았다.
“요사이 넌 날 보러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네가 깜짝 놀라리라 생각했어.”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속눈썹을 드리웠다.
“내 예측이 과했나 보군.”
심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을 더 걷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심묘는 자리에 멈춰 서서 생각을 정리했다. 사경행은 분명 자신이 평소와 다름을 알아챘을 것이다. 민감한 사경행이 더 깊은 속내까지 알게 된다면 자신은 비밀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상재청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남매는 지금까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사경행의 은인이다. 농서성 사람이라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남매였다. 예왕부 내에서 그들에게 사고가 난다면 예왕부 사람부터 의심할 테고, 그러면 예왕부에도 피해가 갈 터였다.
심묘는 자신의 결정이 어떤 재난을 초래할지 알면서도 전생의 원수를 되도록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그들이 이대로 명을 이어간다면 자신은 하루하루 말라갈 것이었다. 사경행을 따라온 대량에서 처음으로 큰 재난을 만난 셈이었다. 그때 약그릇을 들고 온 팔각이 심묘와 마주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왜 벌써 나오셨나요? 주인님과 함께 좀 더 있지 않으시고?”
“나는 먼저 가겠다. 너희가 그를 잘 돌보거라.”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이틀 후, 모경은 심묘를 찾았다.
“남매는 흠주 상인 집안의 자녀이지만 입양되었습니다. 이 상인 집안의 부인은 일찍 죽고, 주인도 얼마 전에 병사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두 사람에게 친자식이 아니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그들은 양부를 안장하고 농서성으로 혈육을 찾으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가 없습니다.”
“그럴 리 없다!”
심묘가 크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제가 얻을 수 있는 소식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흠주에서 알아봤는데, 남매를 어릴 때부터 봤다는 이웃집에서 들었습니다.”
“이미가 명제에 간 적 없다고 확신하는가?”
심묘의 손톱이 손바닥에 깊게 박혔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멀리 간 적이 없습니다. 흠주를 떠난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모경이 계속해서 조사 결과를 고하자 심묘는 눈을 감았다.
“이미와 이각은 예왕부에서 지내는 동안 때때로 계부를 방문했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직 전하를 뵙지는 않았지?”
“네. 허락받지 않으면 누구도 전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경이 성실히 대답했다.
“알겠다. 나가봐라. 계속 남매를 주시하고,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내게 말하라.”
모경이 물러나자 심묘의 눈빛은 점점 가라앉았다. 일 처리에 실수가 없는 모경이 알아봤으니 놓친 부분은 없을 터였다. 그러나 알아낸 정보가 고작 이것밖에 없다니. 남매가 깨끗이 정리해서 실마리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건지, 미궁에 빠진 듯했다. 만약 전후 사정을 명명백백히 밝힌 거라면 이번 일은 전생과 거의 관련 없이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명제 신하의 딸이 갑자기 대량 상인의 딸이 되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자신이 계 부인에게 남매의 저의가 불량하다고 말해도 그녀가 믿을 리 없었다. 어려서부터 흠주에서 자란 상인 집안의 남매가 처음으로 가족을 찾으러 농서성에 왔는데 예왕부를 모해하려 한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묘는 일어나 사경행을 보러 가려 했다. 그러나 이미 남매가 사경행의 은인이라는 명분으로 예왕부에 머물고 있고, 전생 대량 황실과 이미 남매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사경행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끝내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 * *
미앙궁.
현덕 황후는 궁녀의 말을 다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는 인자한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아슬아슬했다. 백 년 인삼을 두 개 찾아 예왕부로 보내 예왕 전하의 몸을 보양케 하여라. 폐하는 이 일을 아시느냐?”
“폐하는 이미 아십니다.”
궁녀가 따라 웃으며 답하자 현덕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좋구나. 폐하와 이 일을 이야기해야겠다.”
궁녀가 낯빛을 바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는 지금 정비마마…….”
현덕 황후가 동작을 멈췄다.
“그렇다면 내가 갈 필요는 없겠구나.”
얼굴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눈 속에 울적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마마, 예왕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 예왕비마마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들었사온데…….”
“그런데?”
“예왕비마마는 예왕 전하의 생명을 구한 남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십니다. 이유는 몰라도 그들을 괴롭히는 태도였답니다. 남매 중 소저의 외모가 예왕비마마보다 뛰어나서 질투하거나, 예왕 전하가 위험에서 벗어나길 바라지 않은 것 같았다고…….”
궁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자신도 대역무도한 말임을 아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예왕비가 어떻게 예왕 전하가 위험에 벗어나길 바라지 않는단 게야!”
현덕 황후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자 궁녀는 놀라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왕비가 질투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이런 큰 풍파를 만들어내다니, 은인이라는 그 남매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구나.”
잠시 후 현덕 황후가 평소의 안색을 되찾고 담담히 말했다. 미앙궁은 적막에 휩싸였다. 현덕 황후의 눈빛은 혼란스러웠고, 그 얼굴은 고독해 보였다.
* * *
십여 일이 지났다. 심묘는 그사이 방에서 나가지 않은 채 좋은 결과를 얻을 방법을 세심히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심해봐도 후환이 남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이미 남매는 이번 생에 매우 민감한 시점에 나타났다. 마치 거대한 산에 둘러싸인 듯, 자신은 손도 댈 수 없었다.
그동안 온 힘을 다해 사경행을 피했다. 그와 마주하면 가슴속에 무수한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미 남매가 사경행과 관련되어 있었다면, 그게 비록 전생의 일이라 해도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부부의 연도 끝을 봐야 할지 몰랐다.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부명과 완유를 생각한다면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마냥 넘길 수는 없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심묘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의 불쾌함을 알아보고 몇 번이나 조심스레 물었으나 심묘는 대충 얼버무렸다. 실은 어젯밤에 심묘는 꿈을 꾸었다. 명제 곤녕궁 안에서 완유와 부명이 자신과 함께 과일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꿈이었다. 그 순간 완유와 부명의 입가에서 붉은 선혈이 흘렀다. 놀라고 당황한 자신은 태의를 찾았는데, 미 부인과 부수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부수의는 사람을 시켜 자신을 옭아맸고, 생사를 짐작하기 어려운 완유, 부명과 함께 궁 안에 가두었다. 그 뒤 큰불이 곤녕궁을 깨끗이 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빠르게 완유와 부명까지 집어삼켰다.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던 자신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창 너머로 미 부인이 엷게 웃으며 입을 벙끗거렸다.
“네가 졌어.”
심묘는 꿈에서 깨어났다. 여름의 아침은 정오처럼 무더웠고, 햇살은 눈이 부셨다. 심묘는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온몸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완유와 부명의 절망스러운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몹시 불안해졌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조금 바람을 쐬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러나 심묘는 뜰로 나가자마자 걷고 있던 이미와 마주쳤다. 이미 역시 심묘를 보고 즉시 발걸음을 멈추어, 심묘에게 인사했다.
심묘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이미를 만날 때마다 전력으로 살의를 억눌렀다. 그러나 어젯밤에 꾼 꿈 때문에 오늘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이미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심묘는 소매 안에 손을 넣고 주먹을 쥐어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덕분에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소저, 어디를 가지?”
심묘가 이미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는 전혀 부드럽지 않고 기이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예왕 전하께서 오늘 저희 남매를 부르셨습니다. 동생은 먼저 갔기에 소녀도 서둘러 가려고 합니다.”
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수줍은 듯한 표정이었다.
“예왕부에 오랫동안 폐를 끼쳤습니다. 오늘 예왕 전하를 뵌 후 저희는 떠날 예정입니다. 마마께서 많이 보살펴 주셨는데, 여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이 남매가 사경행의 목숨을 구했기에 예왕부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깍듯하게 행동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두 사람을 보살피라고 분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 부인이 대신 명했을 터였다.
“왜 벌써 떠나느냐? 우리는 아직 ‘보답’하지 못했는데.”
이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가족을 찾으려 농서성에 왔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미 나으셨으니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심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들이 농서성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가족을 찾는다’라고 하지만, 도저히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이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마, 혹시 소녀가 마마께 무례를 범했는지요? 마마께서는 소녀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이미는 심묘의 적의를 똑똑히 느꼈다. 자신들은 신분을 떠나 어쨌든 예왕을 구한 은인인데 심묘는 이쪽과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리가 분명하고 온화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자신들을 잊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고 봐야 타당했다.
“맞다. 난 자넬 좋아하지 않아.”
심묘는 턱을 괴었다. 자신은 어떤 적에게도 현혹하는 달콤한 말을 속삭일 수 있으나 이미에게만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예왕부를 짊어지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사경행에게 전생을 설명할 방법이 있었다면 대놓고 원한을 드러냈을 터였다.
“이유를 알고 싶으냐?”
심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미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눈 속에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조금은 솔직한 눈빛이 자신의 기억 속 미 부인의 눈빛과 전혀 달랐다.
“본능.”
심묘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 후 심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이미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미는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떠났다. 그런 이미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심묘의 안색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경칩과 곡우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심묘는 이미와 마주할 때마다 대단히 무섭게 변했다. 자기들이 오랫동안 모신 주인이 생소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떠나려고? 네가 갈 수 있을까?”
심묘는 낮게 읊조린 후 몸을 돌렸다. 목소리는 북풍처럼 냉랭했다.
“모경을 불러오너라.”
얼마 되지 않아 모경이 심묘의 방을 찾아왔다.
“마마, 마침 보고할 일이 있습니다.”
심묘가 그를 저지했다.
“내게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이미와 이각을 죽여라.”
의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있던 모경은 멍해졌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이 일은 타당하지 않고, 예왕부에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하나 두 사람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면 더 큰 변수가 생길 것이다. 죄명을 짊어져도 괜찮다. 두 사람이 장래 더 큰 재난이 되길 원치 않는구나. 지금은 두 맹수의 발톱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다 자란 후 죽이려면 간단하지 않을 테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그저 네가 그들을 죽일 수 있는지 묻고 싶구나.”
심묘의 목소리가 방을 배회했다. 지옥에서 말한 듯 살기가 등등했다. 완유와 부명의 꿈을 꾸고 나니 도저히 더는 우유부단하게 있을 수 없었다. 좋은 결과를 얻을 방법이 없다면 두 사람을 죽이고 난 뒤 생각하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 후의 일은 그 후에 생각하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곧 예왕부를 떠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들이 어디로 발길을 향할지는 모르지만, 장차 자기들을 돕고 감싸주는 피난처를 확보하게 될 수도 있었다. 지금 이 남매가 상인 집안 출신일 때 죽여야 뒷날 말썽이 적을 터였다. 그들이 후원자를 찾게 되면 더욱 어려워질 일이다.
일할 땐 시기도 아주 중요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과 의혹은 더욱 짙어질 터였다. 그러니 지금 이미와 이각을 죽이기로 했다. 대량 황실이 전생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선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사경행을 위한 가장 큰 양보이자 유일한 양보였다.
“제게 방법이 없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모경이 무릎을 꿇었다. 심묘는 그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제가 마마께 드리려던 이야기가 바로 이 두 사람과 관련된 일입니다. 방금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남매가 찾으려던 가족이 바로 승상인 엽무재라고 합니다. 두 사람은 엽가의 자식이랍니다. 엽가에서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심묘는 비틀거렸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뭐라고?”
“임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처벌을 바랍니다!”
오랫동안 고요했다. 모경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을 볼 염치가 없었다. 보지 않아도 크게 낙담한 심묘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했다. 자신은 그녀의 무력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심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력하고 처량했다.
“널 탓하지 않는다. 다 때가 있는 법. 게다가 내가 망설여서 좋은 기회를 놓친 것 아니더냐. 그러나 엽가의 보호를 받더라도 두 사람의 목숨은 반드시 취할 것이다!”
말끝에서는 목소리가 갑자기 엄숙해졌다. 칼집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뽑은 듯 예리한 음성에서 살의가 넘쳐흘렀다.
* * *
농서성과 정경성은 서로 달랐다. 정경성은 북방에 위치해 겨울이 되면 은백색으로 덮여 경치가 성대했다. 반면 더 남쪽에 위치한 농서성은 여름이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는 시원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웠다.
뜰 안 가장 외진 건물에서 남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달 아래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산림에서 자란 푸른 대나무처럼 고상했다. 배랑이었다. 그는 돌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심묘는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상념에 잠겼다.
전생의 자신은 배랑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부수의 곁에서 일하는 건 그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고 여겼다. 무엇 때문에 부수의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배랑 같은 사람은 구속받지 않고 생활하는 게 어울렸다. 그는 서책을 들여다보며 옛 성인의 발자취를 좇고 싶어 했다. 바둑을 둘 때 곁에 둔 화초마저 풍아했다. 풍아한 삶을 꿈꿨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조정에 들어갔고, 주군을 위해 남들을 배척하고 제거하는 수완가가 되었다.
“배 선생.”
심묘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배랑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심묘가 인정사정없이 선을 그었기에 자신도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게다가 심묘는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인데 지금 자신에게 다가왔다. 또다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배 선생. 이전에 날 도울 수 있다고 했지요. 그 말, 아직도 유효한가요?”
심묘는 그와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배랑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일입니다. 지금은 한 가지. 난 이미 남매의 목숨을 원해요.”
배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주 어렵습니다.”
“선생의 상상보다 더 어려울 거예요. 이 남매는 엽가와 관련 있습니다. 엽무재의 소생이라니 빠르게 엽미와 엽각이 될 터예요. 그러나 난 그들을 놔줄 수 없어요.”
심묘는 ‘놔주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놔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차이가 분명한데도 배랑 자신은 뜻을 구별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여전히 두 사람의 목숨을 원했다. 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들의 목숨을 원하시는 건가요?”
심묘의 웃는 얼굴이 차가워졌다.
“모든 일에 반드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선생은 내게 이유를 묻지만 난 다른 말을 하고 싶군요. 내가 이유를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선생에게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요?”
배랑이 탁자 위의 바둑판을 한참 바라보았다. 곧 그가 미소 지었다.
“이해했습니다. 다시는 마마께 이유를 묻지 않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선생은 살인에는 정통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난 당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두 사람은 엽미와 엽각이 될 테니 앞으로 엽가를 상대해야 합니다. 조정의 관리를 쓰러뜨리는 방법을 배 선생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생이 나의 막료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배랑은 잠시 멍하게 있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전 부수의 곁에서 계책을 꾸몄으나 적수를 쓰러뜨린 적은 없습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심묘는 미소 지었다. 배랑은 스스로를 잘 몰라도 자신은 그를 잘 알았다. 그는 도량이 넓고 담백했다. 태도 역시 온화하고 교양 있으니 수완이 흉악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부수의가 막 등극했을 때, 주왕 일파는 호시탐탐 재기를 노렸다. 결국, 그들은 배랑의 손 아래 사라졌다.
“날 도와줄 건가요, 말 건가요?”
심묘의 물음에 배랑이 탄식했다.
“지금 엽가는 대량에서 매우 미묘한 위치입니다. 대량 황제 폐하는 엽가를 이용해 고가를 상대하려 하지요. 엽가에 자식이 없으니 통제하기 좋으니까요. 그러나 아들, 딸이 있다면 판세는 깨지게 됩니다.”
배랑은 심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엽가는 황실과 연합해 고가와 다툴 수도, 고가와 손잡고 황제를 배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엽미와 엽각이 나타난다면 더욱 미묘해질 겁니다. 황실이 엽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엽가가 취하는 입장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황실은 당분간 경거망동하지 않을 테고 엽가에 더욱 호의를 보일 겁니다. 마마와 전하는 대량 황실 사람이십니다. 마마가 엽가 남매의 목숨을 취하는 걸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시지만은 않을 겁니다.”
“나도 그 점은 압니다. 그러니 선생이 황실에서 엽가를 처리하도록 방법을 생각해주세요.”
“먼저 움직이는 쪽이 패배하는 상황입니다. 황실은 추이를 살필 테고, 엽가 역시 헤아려볼 겁니다. 마마께서 남매의 목숨을 바란다면 엽가의 약점을 손에 쥐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수는 엽가와 황실 사이에 분쟁을 조장하는 것이겠지요.”
“그럼 고가는?”
심묘의 물음에 배랑은 멈칫했다.
“고가와 엽가의 분쟁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배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예왕부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셨을 테지요. 그러나 지금 같은 때 한 가지 방법으로 두 가지 좋은 결과를 얻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고가가 바보도 아닌데, 이 상황에서 엽가와 다툴 리 없습니다.”
심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마마는 황실의 미움을 사더라도 반드시 엽가를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마마가 황실과 대립하시면 전하와 마마의 사이는…….”
배랑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아꼈다. 부부 사이에 악감정이 생길 거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다시 내려갔다. 엽미 남매를 대하는 심묘의 태도는 같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경했다. 엽미 남매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오는지 의아했다.
심묘가 눈을 내리떴다. 긴 속눈썹이 눈을 반쯤 가렸다.
“다른 길은 없어요. 아마 난 황실과 인연이 없는가 봐요.”
전생과 현생, 어떻게도 황실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떻게 이간질할 생각인가요?”
배랑의 물음에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선생과 상의하려는 일입니다.”
대량과 명제는 다른 전장이었다. 심묘는 농서성의 세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아주 희박했다. 그렇다고 원수가 편히 잘 살게 둘 수도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한 끝에 결국, 완유와 부명의 복수를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마음 편히 사경행과 마주할 수도 없는 지금, 배랑이 유일한 맹우인 셈이었다.
배랑은 장래를 내다볼 수 있었고, 대책을 궁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정의 국세 분석에도 정통했다. 이간질로 적이 봉변을 당하게 만들면서도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술수가 그의 특기이기도 했다. 그와 연합해 반드시 엽미 남매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엽미 남매의 배후에 아주 큰 세력이 있대도 그 세력까지 함께 와해시킬 것이다. 배랑과의 열띤 논의는 심야까지 계속됐다.
심묘는 아주 늦은 시간 방으로 돌아왔다. 경칩과 곡우가 그녀와 함께했다. 심묘는 외투를 벗으려다 멈칫했다. 사경행이 팔짱을 끼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책을 넘기고 있었다.
“어떻게 온 거예요? 당신…… 침상에서 내려올 수 있어요?”
오늘 사경행은 엽미 남매를 만나기로 했다. 심묘는 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사경행과 함께 있는 남매는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다면 두려운 상상이 더욱 끔찍하게 변모할 게 분명했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이 더 어지러워지는 건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사경행이 이렇게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경행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온 거지?”
“잠이 안 와서 돌아다녔어요.”
사경행이 책을 책상 위로 던졌다.
“오? 배랑과 차를 마신 게 아니고?”
거친 비난이었다. 그러나 심묘의 마음은 이미의 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보름.”
심묘가 사경행을 주시했다. 그 역시 심묘를 주시했다. 그의 복잡한 시선에 심묘는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깨어난 지 보름인데, 넌 지금까지 단 한 번 날 보러 왔다. 잊은 건 아니겠지? 넌 예왕부의 왕비이자 나의 아내다.”
심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난 여기서 널 기다렸는데, 넌 배랑과 차를 마시고 바둑을 뒀구나. 심묘, 설마 그 서생을 좋아하느냐?”
사경행은 실망과 분노를 띤 눈빛으로 심묘를 추궁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묘의 마음속에 분노가 솟았다. 자신은 이미의 일 때문에 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예왕부와 연관되어 있어 감히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시기도 놓쳐버렸다. 이렇게 수렁 같은 상황을 견디는 중인데, 다른 남자를 좋아하냐고?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요?”
사경행이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뱉었다. 그는 심묘를 사납게 잡아당겼다. 심묘는 자칫 넘어질 뻔했다. 사경행은 심묘의 뒤통수를 받치고 턱을 잡았다.
“만일 내가 지금 널 원하면 상관이 있지.”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동맹 체결을 너무 서둘러 한 것 같네요.”
사경행이 멈칫했다.
“뭐라고?”
그는 심묘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단숨에 손을 풀었다. 그는 심묘를 등졌다.
“네 심장은 쇠로 만들었느냐? 네 마음은 단지 남을 이용할 때만 움직이는 게냐? 난 너와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이다. 여태 넌 내게 마음을 준 적이 없는 게로구나.”
그 말을 끝으로 사경행은 떠났다. 심묘는 홀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경칩이 들어와 바깥을 바라보았다. 경칩은 근처에 있었기에 사경행과 심묘의 말다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심묘의 안색이 몹시 나빴지만, 경칩은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마, 전하께 너무 서먹하세요.”
심묘는 말이 없었다. 경칩은 눈치를 보면서도 이어 말했다.
“두 분 사이는 마마께서 예왕부로 시집오기 전이 더 좋았어요. 요사이 마마께서 일부러 전하를 피하는 것처럼 보여요. 병중인 사람은 예민합니다. 더욱이 전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으니 더욱 그러시겠지요. 이때 마마께서 관심을 보이시지 않으면, 전하도 매우 언짢으실 거예요.”
“알겠다. 나가보거라.”
경칩이 나간 뒤 심묘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 자신은 사경행과 마주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생의 사경행은 사실 무고했다. “여태 넌 내게 마음을 준 적이 없는 게로구나.” 그 한마디에 오싹했다.
언제 사경행에게 마음이 움직였는지 분명히 기억하지 못했다. 만예호 위에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였을까? 아니면 공주부에서 그가 송신 공주 앞에서 가면을 벗었을 때? 혼롓날 손을 내밀며 마주했을 때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심부 사당에 불을 냈을 때거나 광문당 화원에서 처음으로 그와 대립했을 때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마음이 끌리는 느낌은 요원한 감정이었다. 전생에서 자신은 부수의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이를 교훈으로 삼고 이번 생에서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정을 내주는 데 인색하게 행동했다. 득실을 따져 조심스레 마음을 건네려 했다.
그러나 사경행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쉽게 건넸다. 부부가 되면서 서로가 교환한 것은 대등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도 줄 수 있는 모든 걸 준 후였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기에 이미를 처리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였기에 오히려 사경행을 마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 턱이 없는 그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터. 심묘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적염에게 어렵게 얻은 약초를 넣은 갑은 방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갑 위에 얇은 먼지가 쌓여 있었으나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나날은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나담과 고양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고, 그녀는 고양에게 자기를 속인 일을 따진 것 같았다. 사경행이 거의 다 나았기에 고양은 노태의에게 당부를 남긴 채 나담과 함께 어디로 사라졌다. 계 부인과 계우서도 계부로 돌아갔다. 사경행이 무사하기에 그들이 예왕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배랑은 감기에 걸린 듯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혼자였다.
예왕부 하인들은 사경행과 심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예왕부 사람들은 모두 긴장했다. 사경행이 인사불성일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때, 엽가에서 사람이 왔다. 엽가가 엽미와 엽각을 찾으러 온 것이다. 엽가는 심묘가 엽미와 엽각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아는 듯 심묘에게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를 미리 전하지 않았다. 오늘 방문은 통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심묘는 예왕부의 왕비이니 얼굴은 한 번 비춰야 했다. 예왕부 중앙의 대청, 엽 부인이 엽각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엽미는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엽무재 맞은편에 사경행이 앉아 있었다. 사경행은 자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부상이 다 낫지 않았기에 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었다. 엽무재의 말을 듣고 있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심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엽미였다. 엽미가 얼른 일어나 심묘에게 인사했다. 엽각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은 엽가의 소생이기에, 자신들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는 심묘에게 이전처럼 예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심묘는 엽미의 인사를 만류하지 않고 다 받았다. 엽 부인의 눈 속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엽무재 역시 탐색하는 눈빛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사경행의 옆자리에 앉자 엽무재는 일어났다.
“근래 엽미와 엽각이 예왕부에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예왕비마마의 보살핌에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폐를 끼쳤다는 말은 과합니다. 엽 소저와 엽 공자는 전하의 생명을 구한 은인인데, 얼마를 머무르든 폐를 끼쳤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엽무재가 하하 웃었다. 심묘는 말머리를 돌렸다. 의심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런데 엽 소저와 엽 공자가 찾던 가족이 엽가라니 의외입니다.”
사경행은 찻잔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심묘를 저지하지 않았다.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하는 것 같았다. 엽무재는 사경행의 의중을 읽지 못해 망설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하자니 부끄럽습니다. 십여 년 전 일입니다. 당시 아이를 낳았을 때 산파가 나쁜 사람의 지시를 받아 저를 속이고 아이를 바꿔치기했습니다. 두 사람을 일찍 요절한 아이들로 바꾼 것이지요. 집안의 불미스러운 일을 바깥에 퍼트릴 수 없어 암암리에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우연히 예왕부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엽무재는 진실해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기쁜 듯 환하게 웃었다.
“엽미와 엽각이 예왕 전하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엽가가 전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엽 부인도 엽무재의 말에 맞장구치며 미소 지었다. 심묘는 엽 부인이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기쁨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모양이었다. 엽미와 엽각이 여러 해 보지 못했던 친자식이라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믿을 수 없었다. 전생에 명제 신하의 딸이던 사람이 지금은 대량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끈은 그리 간단히 풀 수 없었다. 엽미와 엽각은 엽 부인 옆에 앉아 있었다. 엽미는 아름답고, 엽각은 총명해서 한눈에 봐도 얻기 어려운 인재였다. 더욱이 분수를 지키며 불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사경행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목하에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욱 호감을 표했다.
하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남매의 처세술은 남달랐다. 엽미가 부수의를 사로잡은 점만 봐도 그러했다. 친자식에게도 주저 없이 손을 쓰는 이기적인 부수의가 귀애할 정도니 그녀에게 남달리 뛰어난 면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거참 공교롭네요. 흠주는 농서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잖아요. 엽가가 십몇 년간 못 찾았는데, 예왕부에 들어오자마자 찾았네요. 정말 인연이에요. 엽 소저, 그렇지 않은가?”
심묘가 엽미를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물론입니다. 예왕부는 행운을 부르는 곳입니다.”
엽미가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심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흔쾌히 동조했다. 심묘는 시선을 옮겨 엽무재를 바라보았다.
“오늘 엽 대인이 방문한 건…….”
엽무재가 얼른 말했다. 부끄러운 듯했다.
“엽미와 엽각을 엽부로 데려가려 합니다. 아버지로서 오랫동안 두 사람을 떠돌게 했으니 잘못이 큽니다. 지금 가까스로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내일 족보를 바꿀 것입니다. 더는 고생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은 우리 엽가의 자손입니다.”
마지막 말에 스스로 감동했는지, 엽무재가 남매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눈물이 빛났다. 심묘는 이 어설픈 연극에 재미를 느끼지 못해 냉담한 시선을 유지했다. 이후 엽무재는 사경행에게 몇 마디 아첨하는 말을 늘어놨다. 자식들을 되찾았으니 더욱 황가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자는 신호로 보였지만, 공기는 어딘가 미묘했다.
대량 황실은 엽가를 끌어들여 고가를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엽가는 중요한 위치였다. 그러나 엽가는 줄곧 중립적인 모습을 보이며 뜻을 보이지 않았다. 엽미 남매가 엽가로 들어가면 엽가는 고가와 맞설 힘이 생기는 셈이다. 그러니 황권 아래 굴복할 필요가 없는데, 엽무재는 지금 영락제 쪽에 서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예왕과 영락제는 아주 친밀하기에 예왕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영락제에게 충성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묘의 심장이 점점 가라앉았다.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이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엽가가 영락제 편에 서면 자신은 남몰래 엽가를 와해시킬 수 없었다. 영락제를 도와주는 힘을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락제는 말할 것 없이 사경행도 그 일을 원치 않을 터였다.
자식을 죽인 흉수와 동맹을 맺는다면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의 태도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었다. 사경행은 엽무재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싱겁지도 짜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태도를 표명해야 할 문제는 적절히 선을 그어 피했다. 분명하지 않은 말로 빙빙 돌렸다.
엽무재와 엽 부인이 나서서 오래 이야기했으나 사경행은 명확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지금 사경행은 연극배우처럼 보였다.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모습으로 엽무재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이는 엽가가 황실에 호의를 표해도 황실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예의상 왕래한다는 의미가 강했다.
조급해진 엽무재 부부는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오늘 사경행의 태도는 예측하기 어려웠고 언행에는 빈틈이 없었다. 예측할 수 없었기에 엽무재 부부는 화낼 수도, 안심할 수도 없었다. 예상과 달리 오히려 사경행이 우세를 점해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사경행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심묘도 사경행의 태도가 의외라고 여겼다. 그러나 엽가가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 건 이상했다. 사경행은 똑똑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들의 의중을 확실히 할 것이다. 한편으론 사경행이 엽가에 명확히 호감을 나타내지 않고, 엽가 남매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각별히 눈여겨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안심하기도 했다.
결국, 누구도 사경행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사경행은 부드럽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걸림돌이었나, 엽무재는 그를 원하는 데로 치우지 못했다. 하늘이 저물어가는데도 사경행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니 오늘 방문은 헛된 일이었다.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엽가의 뜻을 전했으니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는지 엽무재는 작별 인사를 했다.
사경행이 당숙에게 배웅하라 분부했다. 그들이 대청을 나가려 할 때 엽 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물었다.
“며칠 지나면 예왕 전하의 생신이지요?”
심묘는 순간 멍해졌다. 심묘는 사경행의 생일을 몰랐다. 이전 명제의 임안후부 소후야의 생일은 진짜가 아니었다.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 사경행에게 들은 바가 없었다. 눈이 예리한 엽 부인이 당황한 심묘의 모습을 보고 살짝 웃었다.
“예왕비마마는 모르시는 것 같네요?”
엽미와 엽각도 걸음을 멈췄다. 엽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미묘한 시선이었다. 아내가 남편의 생일을 모른다는 건 기이한 일이었다. 사경행은 엽 부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셨다. 심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엽 부인, 엽 소저와 엽 공자의 생일은 기억하나요?”
엽 부인은 곤혹스러웠다.
“그게…….”
심묘는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덧붙였다.
“먼저 엽 소저와 엽 공자의 생일부터 잘 챙기도록 하세요. 십 년도 넘게 놓쳤으니.”
자기 집안일부터 잘 관리한 뒤 다른 집안의 일에 마음을 쓰라는 뜻이었다. 남아도는 힘으로 쓸데없는 짓,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엽 부인에게 굴욕을 준 셈이었다. 엽 부인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엽무재의 얼굴도 부자연스러웠다. 엽미는 엽각을 끌고 심묘에게 인사한 뒤, 급히 이별을 고했다.
떠나는 일행을 보며 심묘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이 손을 쓰기 전 엽가가 엽미 남매를 비호하게 됐으니 두 사람은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 셈이다. 지금부터는 엽가 먼저 처리해야 하게 됐으니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량 황실과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더욱 어려웠다.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심묘는 머뭇거리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던 데다 완유와 부명이 관련되어 있어 사경행에게 분풀이를 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성적이었다. 사경행과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 심묘를 스쳐 지나갔다. 생소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심묘는 끝내 그를 잡아 세우지 못했다. “당신과 할 말이 있어요.”라는 한마디는 한참 동안 입에서 맴돌 뿐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던 곡우와 경칩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심묘와 사경행이 냉전 중인 걸 깨달았다. 모시는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으니 자기들도 당연히 심란했다. 방금 심묘는 분명히 화해하려는 뜻을 보였는데 사경행은 냉담했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의 마음이 상할까 걱정했다.
경칩과 곡우는 심묘를 오래 따라 그녀의 성격을 분명히 알았다. 이렇게 되면 자존심이 강한 심묘가 먼저 나서서 화해를 청할 리 없었다. 경칩이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큰일이야. 막 혼례를 치렀는데 계속 이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
곡우도 낮은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방으로 돌아온 심묘는 생각할수록 서운했다. 생소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사경행의 태도에 속이 상했다. 자신은 전생 명제에서 여러 해 황후였고, 당초 부수의의 환심을 사려 애쓴 것 외에는 다른 사람에게 굴복한 적이 없었다. 진국에서도 부명과 완유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인내했던 것뿐이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그렇지 않으면 미 부인과 그리 오래 다투지 않았을 터였다. 단순히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중도에 타협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몰라서 안한 게 아니었다.
사경행의 소원한 태도에 심묘도 그와 잘 이야기해보자는 생각이 옅어졌다. 두 사람은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사경행은 평소 남과 다투는 걸 경시했고, 심묘는 자신의 마음을 잘 숨겼기에 두 사람이 고집을 부리면 진퇴양난이었다. 그때, 팔각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간식을 심묘의 탁자 위에 놓았다.
“주방에서 새로 만든 간식입니다. 특별히 명제 쪽 간식을 따라 했는데, 마마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심묘와 사경행이 냉전 중이기에 예왕부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경칩과 곡우가 심묘의 편을 들듯이 묵우군 사람들은 당연히 사경행을 감쌌다. 그래서 팔각의 방문은 심묘에게 예상외의 일이었다. 팔각의 본심이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느냐?”
팔각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아둔해서 마마께서 바로 눈치채셨네요. 경칩과 곡우의 권유로 온 겁니다.”
문밖의 경칩과 곡우의 안색이 괴상하게 변했다. 팔각은 스스로 아둔하다고 말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평소 그녀는 매우 영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아 자기들을 말려들게 했으니 몹시 당혹스러웠다.
심묘는 실소했다.
“너는 내게 무엇을 권하고 싶으냐?”
“주인님께서 크게 다치셨는데도 마마가 얼굴을 며칠 동안 비추지 않으셨으니, 모두 마마가 차가운 분이시라고 여겼습니다. 주인님이 깨어난 후에도 딱 한 번 보러 가셨으니 모두 주인님이 안쓰럽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요 며칠, 마마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마, 모두 충심이 깊어 그러니 부디 탓하지 말아 주세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 사실인데 누굴 탓하겠느냐.”
팔각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마의 성격은 결코 차갑지 않습니다. 마마는 말씀하지 않으실 뿐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를 데리고 밤새 숲을 돌지도, 고인을 찾아가지도, 주인님을 위해 약초를 구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마마는 왜 주인님께 이 일을 말씀드리지 않으십니까?”
심묘가 담담히 설명했다.
“전하를 구한 사람은 내가 아니며, 구해온 약초 역시 쓸모가 없었지. 모두 헛수고였다. 그러면서도 자리를 비워 부인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무슨 공이 있다고 말하느냐?”
전생에 자신은 후궁 안에서 부수의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부수의가 천하에 청렴한 명성을 얻도록 늘 감축하고 소박하게 지냈다. 그러나 부수의를 위해 법령을 만든 이각을 이길 수는 없었다. 말하면 비웃음을 사고, 동정을 불러올 뿐이니 말하는 것만 못했다.
팔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모두 마마의 마음인걸요!”
“마음?”
팔각이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마마가 주인님을 구했는지 아닌지 상관없이, 설령 그 약초가 효과가 없었대도, 마마의 마음은 진실합니다. 하지만 마마가 마음을 숨기고 감추시는데, 주인님이 어떻게 아실 수 있을까요? 마마께서 숲을 돌아다니시고, 고인을 찾아야겠다고 고집하셨잖습니까. 그 모든 것이 마음입니다. 마마의 마음은 그 약초보다 훨씬 더 귀중한데, 마마께서 약초가 쓸모없다고 마음을 숨기시는 건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을 잃는 일 아니겠습니까?”
심묘는 멍해졌다. 팔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마마의 마음은 주인님의 병을 치료하는 데 약초보다 더욱 효과가 좋습니다.”
심묘는 천천히 속눈썹을 드리웠다.
“마음을 반드시 말로 해야 알 수 있는 거야?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팔각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주인님은 다릅니다.”
“왜?”
“마마도 아실 테지만 주인님의 삶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묵우군도 주인님이 홀로 만드셨지요. 저희는 주인님을 따른 지 오래입니다. 주인님은 매일같이 각종 계략과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적입니다. 주인님은 가족만큼은 서로에게 진솔하길 바라실 겁니다.”
팔각의 귀여운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마마는 주인님의 아내이시자, 주인님에겐 가장 가까운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마마께서 마마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시면, 주인님도 확신하지 못하실 겁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법이지요. 주인님은 마마의 마음을 중시하기에 지금 분노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주인님은 마마를 의심하시는 게 아니라 본인을 의심하시는 겁니다!”
심묘는 깜짝 놀랐다. “주인님은 마마를 의심하시는 게 아니라 본인을 의심하시는 겁니다!” 마음속의 두꺼운 얼음이 이 말 한마디에 깨진 것 같았다. 봄날, 얼음이 깨진 곳에서 졸졸 흐르는 실개천이 생겨나 토양에 닿았다. 끝없는 벌판에 초록빛이 물결쳤다.
“주인님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신 건 아닌지, 다른 사람보다 못해서 마마가 주인님께 불만을 품으신 건 아닌지 의심하시고 있습니다. 이런 의심이 쌓여서 마마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처럼 행동하시는 겁니다. 그런데도 마마는 계속 마음을 숨기실 건가요?”
심묘는 반쯤 속눈썹을 드리웠다. 마음의 파도가 기복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경행은 당당한 사람이었다. 천군만마를 이끌면서 태연자약하게 미소를 머금는 사람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조정에서, 젊은 나이에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졌음에도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친척, 식구, 형제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주위에 믿을 사람이 없어 그는 어떤 일을 해도 무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솔직하고 정성 어린 마음이 있으며, 소년 같은 천진함이 있었다. 소명풍, 송신 공주를 대할 때, 임안후를 대할 때 분명히 그 마음이 존재했다. 그리고 자신을 대할 때도. 자신은 그걸 잊고 있었다. 그는 생색내지 않았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고, 남몰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전생에 미 부인 남매와 함께했을까. 얼토당토않은 생각이었다. 의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를 향한 불신은 사실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 사경행이 자신에 대한 의심 때문에 이쪽에 의심을 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심묘는 눈을 감았다.
팔각의 말처럼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자신에게 사경행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미 부인과 연관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경행 역시 자신에게 온 마음에 줬기에, 자신에게 냉대를 받자 이쪽을 눈엣가시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심묘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아직 많이 늦지는 않았을 터였다. 팔각이 심묘의 표정 변화를 보고 미소 지었다.
“마마, 주인님을 잘 달래주시길 바랍니다. 근래 주인님의 성격은 매우 냉혹하고 매서워서, 저희 묵우군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알겠다.”
심묘도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살짝 웃었다. 팔각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마마…… 혹시 엽가 남매와 불화가 있으십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심묘는 멍해졌다. 자신이 엽가 남매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건 예왕부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터였다. 처음 만난 사이에 그렇게 냉대하다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추측 끝에 자신이 엽미의 미모를 질투한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팔각도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 불화가 있냐고 묻다니 의아했다.
“마마께서 그 남매에게 너무 냉담하셨습니다. 주인님은 요사이 사람을 시켜 그 남매의 내막을 조사했으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마?”
심묘의 마음이 동요했다. 사경행이 배후에서 엽미 남매의 내력을 조사하고 있었다니. 그러나 그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의 걱정이 지나쳤다는 얘기일 터였다.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하지만…… 중대한 일이니,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라.”
팔각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바꾸었다.
“아무튼, 마마께서 알아차리셔서 다행입니다. 마마, 마음을 숨기지 마세요. 주인님은 지금 화가 나서 보시지 못하지만, 저희는 마마를 따라 괴상한 도사를 찾아갔을 때 분명히 보았습니다. 통찰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테지요. 주인님이라면 더더욱 그럴 테구요. 게다가 주인님께 마음을 숨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화제를 바꾼 팔각은 심묘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주인님의 생일은 다음 달 초삼일입니다. 작년에는 벽소루에 손님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제가 몰래 당숙의 부인에게 물어보니, 올해도 같답니다. 마마, 생일 선물을 준비하시려면 얼른 찾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심묘가 대답하기 전에 팔각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
“주인님은 달래기 쉽습니다. 마마께서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장수면을 직접 만들어주시면 주인님은 틀림없이 기분을 푸실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마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이지요. 주인님과 마마께서는 더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실 겁니다!”
말을 마친 팔각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심묘는 팔각이 들이받은 여닫이 문짝이 열렸다가 닫히는 걸 보고 웃음을 흘렸다. 며칠 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피맺힌 원수를 마주해야 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그 전에 더 시급한 일들을 정리하고서 다음을 준비하는 게 옳았다.
* * *
칠월 초삼일, 사경행의 생일이었다. 예왕부 사람들은 모두 바빴다. 사경행은 번잡하다며 생일축하 연회를 좋아하지 않으나 영락제는 그를 위해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자신이 사경행에게 마음을 드러낼수록 조정 신하들은 그에게 더욱 정중하게 대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생일 연회는 눈도장을 찍기 좋은 명분이기에 예왕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끊임없이 선물이 밀려 들어왔다. 직책이 크든 작든 모두 선물을 보내 아첨했다. 고가, 엽가도 물론 축하 선물을 보냈다. 당숙은 선물 목록을 꼼꼼히 책자에 기록했다. 기록을 마친 선물은 심묘에게 하나씩 보여주었다.
심묘는 장부와 선물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눈이 다 아프기 시작했지만, 감개무량했다. 영락제와 사경행은 친밀한 관계였다. 명제에서 어느 신하의 생일 연회에 이렇게 많은 선물이 왔다면 황제는 반드시 질투할 터였다. 그런데 대량에서는 황제의 주도하에 이리 대대적으로 연회를 여니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당숙이 심묘에게 선물의 위치와 당장 꺼내 쓸 수 있는 선물 목록을 알려준 후에 당부했다.
“마마, 이제 단장하실 시간입니다. 철의가 사람을 보내 마마를 벽소루로 모셔갈 겁니다.”
심묘가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당숙은 미소 지었다.
“마마는 전하의 부인이시니 전하의 생신 연회에 당연히 참석하셔야지요.”
망설이던 당숙이 얼버무리듯 말했다.
“부부는 침상 머리맡에서 싸우고 침상 발치에서 화해한다는 말이 있지요. 전하께서 화가 나셨는데 오늘 마마께서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면 또 얼마나 속상해하실지, 그러니…….”
“알겠어요. 갈게요.”
당숙은 심묘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세심하게 심묘에게 몇 마디 당부를 더 하고 나서야 떠났다. 심묘는 장부를 마저 다 보고 정리한 뒤 방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경칩이 그녀를 도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오늘밤 벽소루에 가실 거지요?”
“예왕부는 주목받고 있고, 나는 막 대량에 왔으니 다들 궁금해하겠지. 가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 가야지. 딱 좋은 기회가 아니겠느냐?”
경칩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명제에서 온 예왕비마마가 어떤 사람인지 다들 보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 아무나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셔요!”
곡우가 경칩을 끌고 가면서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며 속삭였다.
“자꾸 과하게 말하지.”
경칩은 입을 삐죽였다. 방으로 걸어가는 심묘를 보고 곡우에게 귓속말했다.
“마마는 아직 어색하신 거야. 잘못을 인정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마마께는 처음이니까. 그런데 마마께서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시다니, 전하께서 생각보다 더 능력 있으시네.”
“말 좀 조심해.”
곡우는 또 한번 경칩을 나무랐다. 심묘가 방으로 돌아가자 경칩과 곡우도 따라 들어왔다. 곡우가 물었다.
“마마, 오늘밤 무엇을 입을지 고르시겠어요? 저도 어떤 머리를 하면 좋을지 생각하겠습니다.”
“그건 이따가 하고, 일단은 먹을 갈아다오.”
경칩과 곡우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심묘가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곡우와 경칩은 캐묻지 않고 뜻에 따랐다. 심묘가 곡우에게 물었다.
“나담 언니는 곧 돌아오느냐?”
“고 공자께서 오늘밤 생일 연회가 시작하는 시각에 맞춰 벽소루로 오겠다고 하셨답니다.”
나담과 고양은 며칠간 자취를 감추었다. 나담이 그가 자신을 속인 걸 알았으니 고양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러 어디론가 데리고 갔을 터였다. 심묘 자신은 고양의 인품을 알기에 나담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길까는 걱정하지 않았다. 굳이 걱정한다면 오히려 고양 쪽일까. 어쨌든 오늘은 사경행의 생일이니 그의 오른팔이자 막역한 지기인 고양은 당연히 때맞춰 올 것이었다.
심묘는 잠시 생각한 후 붓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두 마디를 쓴 후 종이를 구겨서 바구니 안으로 던졌다. 다시 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머뭇거렸고 그나마도 얼마 가지 못했다. 몇 장의 종이를 버린 뒤에야 붓을 거둘 수 있었다. 심묘는 편지를 편지 봉투에 넣어 경칩에게 주었다.
“조금 이따가 철의에게 건네줘. 생일 연회 때 사경행에게 주라고 해.”
경칩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심묘가 사경행에게 편지를 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이 편지는 응당 심신 부부에게 쓴 편지라고 여겼다. 정경성에 보내는 편지는 이틀 전에 썼는데 왜 또 쓰는 건지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곡우, 여기 적힌 것들을 사 오너라.”
심묘가 종이 한 장을 찢어 몇 글자를 쓴 뒤 곡우에게 건넸다. 곡우와 경칩은 급히 떠났다.
심묘는 한숨 돌렸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해본 적이 드물었다. 이번 생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많은 것을 알기에 실수가 적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부로서 함께 지내다 보면 마음이 맞지 않을 때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도 사경행도 쉽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니 먼저 화해의 물꼬를 틀겠다고 나설 사람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분명히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경행이 먼저 사과할 필요는 없었다.
수많은 축하 선물이 들어왔으니 자신 역시 사경행에게 선물을 주어야 했다. 그러나 예왕부에는 이미 금은보화가 모자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교한 수공예품을 만들기엔 실력이 부족했다. 이리저리 생각하던 심묘는 간단한 선물을 생각해냈다. 팔각의 말처럼, 보기에 까탈스러운 사경행이 사실은 달래기 쉬운 사람이길 바랄 뿐이었다. 한편 가장 마음에 걸리는 일은 오늘 엽미 남매도 벽소루에 온다는 사실이었다. 엽미 남매가 온다면 두 사람이 어떤 모략을 꾸미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방비해야 했다. 특히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사경행이 그들과 만나게 두어서는 안 됐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 해 질 녘이 되었다. 철의가 보낸 사람은 이미 마중을 왔다. 마지막으로 심묘에게 진주 비녀를 꽂아준 경칩이 미소 지었다.
“됐어요, 마마. 오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울 거예요.”
“내가 재녀로 뽑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
심묘가 실소한 후, 경칩이 꽂은 진주 비녀를 자홍색의 옥 매화 비녀로 바꾸었다. 경칩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게 하니 더 낫네요!”
심묘는 사경행이 이 옥 매화 비녀를 준 때를 떠올렸다. 당시 자신은 사경행의 속사정을 몰라서 그를 소문 속 짓궂은 소년으로 판단했고, 그를 경계하며 방비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많은 우연과 기묘한 불가사의를 곳곳에서 마주치게 된다. 지금 자신과 사경행은 부부였다.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생이었다.
이 옥 매화 비녀를 착용하면 사경행의 화를 가라앉힐 수 있을 터였다. 생경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며, 서로 간에 질투나 미움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심묘의 얼굴에 웃음기가 스쳤다.
“사람들이 바깥에서 기다리겠구나. 가자.”
문을 나서자 입구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경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전하는 마마와 같이 가지 않으세요?”
팔각과 함께 마차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회향이 곤란한 듯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먼저 떠나셨고, 저희에게 마마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왕과 예왕비가 함께 가지 않고 따로 간다면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터였다. 경칩과 곡우는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심묘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알겠다. 출발하자.”
심묘는 사경행의 성격을 잘 알았다. 뼛속까지 당당한 사람은 어떤 때엔 완고한 개구쟁이 같았다. 그래서 심묘는 이를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다. 다만 오늘밤 자신의 ‘사과’에 조금 자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