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장 (15/71)

60장

벽소루는 농서성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싼 식당이었다. 보통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높은 관리도 이곳에서 음식을 한 상 차리면 매우 체면이 서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생일 연회로 식당 전체를 빌리는 일은 대단한 호사였다. 이 호사는 많은 은자를 치러야 했는데 예왕부는 계속 이곳에서 술자리, 연회를 열고 있으니 부귀가 넘치는 셈이었다.

주인 자리에 앉은 사경행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입가는 올라가 있었지만 무심한 얼굴로 사람들의 아첨과 축하의 말을 들었다. 자금색 장포는 온 좌석을 덮어 멀리서 보면 밤하늘에 별이 흐르는 듯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술을 올리는 사람이 많아 그의 웃는 듯 마는 듯한 도화 눈은 취기를 띤 것 같았다. 그러나 취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빛은 맑고 환했다.

여자 손님들은 사경행을 보며 흠모의 시선을 던졌다. 예왕은 젊은 나이에 걸출한 능력을 뽐냈으며 외모와 풍채도 훌륭했다. 게다가 어딘지 위험한 아름다움을 뽐내서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빠져들었다. 지위도 높고 재산이 많으니 여인들은 그의 곁에 가기 위해 다투었다. 그에게 정식으로 맞아들인 왕비가 있다고는 해도 측비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하기야 측비가 아닌 첩이어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경쟁을 벌일 터였다.

고완아 역시 모친 곁에 앉아 눈이 빠지게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사경행을 처음 봤을 때부터 사모의 감정을 키웠다. 평소 남자란 모두 저속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는데 사경행을 보자마자 온 마음을 뺏겨 버렸다. 자신도 사경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사경행을 겹겹이 둘러싸고 아첨하는 중이었다. 관리 집안 소저라는 신분이 있으니 아무리 대담하다고 해도 많은 사람 앞에서 애교를 떨 수는 없었다.

고완아는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했다. 애가 타고 갑갑해지자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응당 자신이 누려야 할 지위를 명제 여자에게 빼앗기다니! 노여움을 참을 수 없었다. 심묘를 갈기갈기 찢지 못해 한이 맺혔다. 잠시 후, 고완아는 기분을 풀고 재미난 구경을 할 겸 엽가 쪽을 돌아보았다. 존재감 없는 아들 하나뿐이던 엽가에 잃어버린 일남일녀가 돌아왔다고 했다. 고완아는 눈을 굴려 엽각과 이야기하고 있는 엽미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자마자 마음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자신이 먹는 것, 입는 것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그래서 다른 여자들을 볼 때면 늘 내려다보았다. 대량에서 자신을 넘을 만한 여인이 없다고 여겼다. 공주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력을 떨치는 엽가도 안중에 없었다. 엽가에는 애초에 비교할 소저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엽미를 보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엽미는 아름다웠다. 용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어서 그녀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사랑스럽다고 말하기엔 천진하고, 천진하다고 말하기엔 성숙했다. 보통은 갖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아주 똑똑한 게 틀림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여러 부인을 만난 것일 텐데도 그녀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분수를 아는 여인은 엽가 딸이라는 신분까지 가지고 있었다. 엽 부인은 그녀에게 가책을 느끼는지, 매우 총애하는 모습이었다. 지위와 권세의 차이가 없으니 고완아는 엽미에게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더구나 엽미는 예왕의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자신보다 예왕부와 한층 더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이가 갈렸다. 사경행은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가 심묘와 혼례를 올린 후에도 지금까지 이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심묘는 명제의 소저인 데다 농서성에 의지할 일가도 없으니 아무 기반도 없는 셈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대량에서 1, 2등을 다투는 귀족 가문 출신이니 장래 틈을 타 그녀를 없애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엽미는 달랐다. 엽가는 줄곧 고가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친구라 할 수 없으나 원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만일 엽가가 예왕부와 인척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고완아는 입술을 세게 깨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때, 엽 부인이 과장되게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왕비마마가 보이시지 않는군요. 예왕비마마는 오늘 오시지 않는 걸까요?”

여러 부인들이 소곤거렸다. 사실 사람들도 심묘가 오지 않은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여태 조용했던 이유는 운을 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엽 부인이 물꼬를 트자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프신 걸까요? 얼마 전 엽미와 엽각을 데리러 예왕부에 갔을 때 예왕비마마를 뵀는데, 몹시 초췌해 보이셨어요. 맞아요. 예왕 전하께서 누워 계시니 마마도 마음을 졸이셨을 거예요. 그때 몸이 상해서 예왕 전하를 돌볼 틈도 없으셨던 것 같더라고요.”

엽 부인의 말에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엽 부인은 짧은 말로 엽가가 엽미 남매 일로 예왕부와 친밀해졌음을 드러냈다. 동시에 심묘를 깎아내렸다. 예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심묘가 잘 보살펴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몸이 아팠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경행은 사람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엽 부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입가에는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시선은 엽 부인 쪽을 향하지 않았다.

“혹시 두 분이 싸우신 걸까요?”

누군가 작게 말했다. 고 부인이 온화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당초 예왕비마마께서 예왕부는 본인 외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는다고 밝히셨으니 두 분 사이가 나쁠 리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하실 리 없지요. 사이가 그렇게 좋다니 싸우시지 않았을 거예요. 많은 생각 하지 말아요.”

고 부인은 심묘가 고완아에게 한 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고 부인의 말은 심묘가 거만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만한 사람이니 남편과 의견 차이로 다투었대도 이상할 게 없음을 암시했다. 고완아는 모친의 말을 듣고 심묘와 엽미 때문에 불쾌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엽미에게 불만스러웠으나 심묘와 사경행의 사이가 나쁘다면 즐겁게 구경할 용의가 있었다.

“예왕부는 다른 여인은 들이지 않나요?”

그때 엽미가 엽 부인을 바라보며 놀란 듯 말했다. 엽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예왕비마마께서 하신 말씀이야.”

나담은 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했다. 자신은 시간에 맞추어 왔는데 심묘는 아직인 모양이었다. 부인과 소저 중 아는 사람이 없기에 경솔하게 이야기했다간 심묘에게 화를 불러올 수 있어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지나친 말을 주고받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안 오시는 건 아니겠지?”

어느 부인의 말에 나담이 반박하려 할 때, 입구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사람들은 입구를 바라보았다. 심묘가 주렴을 걷고 웃음을 머금은 채 걸어왔다. 심묘의 생김새는 매우 수려했다. 초승달 같은 눈썹, 강처럼 맑은 눈, 물고기의 꼬리처럼 살짝 솟은 입꼬리까지 모두 아름다웠다. 저녁노을과 자줏빛 백합이 수놓인 어두운 치마에 정향나무가 수놓인 비단 상의, 짙은 자주색의 조롱박 팔보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그녀가 나타나자 화려하던 전당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장중한 자주색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녀의 눈같이 하얀 피부와 그림 같은 용모를 돋보이게 했다. 한 걸음씩 걸어올 때마다 치맛자락이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여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겉모습만 두고 본다면 엽미도 부족하지 않았으나, 심묘는 내면의 아름다움도 내보였다. 그녀는 봄날 시냇물처럼, 여름 밤하늘처럼, 가을 초승달처럼, 겨울 살얼음처럼 아름다웠다. 누구 하나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동시에 매섭게 차가운 기운도 맴돌아 그녀를 높이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살짝 턱을 든 채 여인들 중앙에 앉았다. 표정은 온화하고 점잖았다. 이곳에 모인 부인과 소저들도 모두 고위 관직의 귀족이지만 미모와 풍채, 어느 것 하나 심묘에 비할 수조차 없었다. 심묘는 나담이 건네주는 술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늦게 왔으니 벌주를 한잔하겠습니다.”

심묘는 깨끗하게 한 잔을 비웠다. 대범하며 우아했다.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았다. 사경행이 자리에 있기에 아첨하는 성격도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몇몇은 심묘의 호탕함에 호감을 품었다. 그들은 그녀를 따라 잔을 들고 웃음을 띠었다.

“예왕비마마, 기개가 있으십니다. 저도 함께 건배하겠습니다.”

나담은 눈을 깜박거렸다. 심묘는 오늘 유달리 아름다우며 기질도 더욱 특별했다. 나담도 얼굴을 빛내며 허리를 더욱 곧게 세웠다.

심묘는 살짝 웃으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당당한 신분을 대량 조정 안 여러 사람에게 알려야 했다. 엽미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미 부인의 앞이니 어떤 패배도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은 자식의 존엄까지 짊어지고 있으니까. 전생에서 얼마나 처참하게 패배했든 이번 생은 전생이 아니기에 털끝만큼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엽미도 멍하니 심묘를 보았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심묘는 엽미를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으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엽미 남매는 그럴듯하게 자신 앞에 몇 번이고 나타났다. 이번에는 엽가를 등에 업었으니 또다시 무서움을 모르고 활개 칠 터였다.

나담이 심묘를 살짝 끌어당겼다. 그녀는 심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심묘, 제부와 말다툼한 거야?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걸?”

심묘는 살짝 눈을 굴려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는 관료가 술을 올리자 무심하게 술잔을 들었다. 자신 쪽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몹시 냉담한 태도에 마음이 울적해졌다. 철의가 편지를 그에게 전하지 않은 건가 싶었지만, 그가 편지를 봤는데도 냉담한 거라면 오늘밤 그와 화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어느 부인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다 왔으니, 함께 예왕 전하의 생일을 축하합시다.”

사람들이 건배하며 사경행의 생일을 축하했다. 사경행이 미소로 응답하며 술 한 잔을 다 마셨다.

“엽 부인이 엽 소저와 엽 공자를 막 찾았다지요. 엽 소저는 이렇게 아름다우니 재주도 뛰어날 거라 예상됩니다. 엽 소저는 예왕부와 인연도 깊으니 재주를 드러내 생신을 축하드리는 건 어떤가요?”

한 부인이 꺼낸 말에는 엽미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여인이 시험장이 아닌 곳에서 함부로 재능을 펼치는 일은 경박하다고 흉볼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엽미는 상인 집안에서 성장했는데, 재능과 기예를 갈고닦았을지 알 수 없었다. 부인이 트집을 잡는 것이 명백했다. 엽가는 세력이 큰 만큼 정적도 적지 않았다.

엽각의 얼굴 위로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엽 부인이 반박하려 할 때 엽미가 미소 지었다.

“못할 건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흥취가 깨질까 봐 감히 부끄러운 솜씨를 보일 수 없네요.”

제의한 부인은 그녀가 ‘부끄러운 솜씨를 보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사경행 쪽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예왕 전하, 허락해 주십시오.”

사경행이 그제야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쪽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입가를 치켜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해보거라.”

오만한 말투 때문에 어느 댁에서 데려온 무녀에게 재주를 선보이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그러나 엽미는 개의치 않는 듯,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일어난 그녀는 먼저 심묘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이지요. 부족한 재주나마 여러분을 더욱 즐겁게 해드리고 싶네요. 농서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예의를 모른다고 싫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 천진한 모습을 드러내니, 아주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심묘는 엽미의 눈 속에서 도발의 기색을 분명히 보았다.

“일찍이 양어머니께 흠주의 수묵무를 배웠는데,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심묘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엽미가 빠르게 의상을 갈아입고 왔다. 그녀는 눈처럼 하얀 긴 치마를 입고 넓은 허리띠로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새하얀 치마가 아름다운 얼굴과 단아한 자태를 두드러지게 했다. 죽 늘어선 병풍 네 폭 전부에 선지(宣紙, 동양화와 서예에 쓰는 종이)를 부착했다. 붓과 먹도 준비됐고 금을 타는 연주자도 자리에 앉았다. 첫 소절이 시작되자 엽미가 긴소매를 바닥 위에 털었다. 곧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수묵무는 미 부인이 가장 잘 추는 춤이었다. 그녀는 금기서화에 모두 정통했다. 모든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하기에 모자람 없는 실력이었다. 후궁 안에서 총애를 독차지하려면 당연히 매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수묵무는 그중 하나에 불과했다. 수묵무는 나풀나풀 춤을 추며 먹물을 묻힌 소매로 그림을 그리는 춤이었다. 한 곡의 춤이 끝나면 그림이 완성되었다. 풍아하고 독특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니, 몹시 풍류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 수묵무는 심묘에게 눈엣가시였다. 이 춤을 볼 때마다 견딜 수 없었다. 전생에서 부수의는 흉노와의 화친을 명분으로 완유를 머나먼 북방으로 시집 보내려 했다. 자신은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사용하며 그를 오래 설득했으나 부수의의 마음은 바위처럼 단단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유는 고군분투하는 모친을 지켜보며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노래 한 곡을 만들어 직접 부수의에게 들려주겠다고 했다.

완유는 오랜 고민 끝에 하고 싶은 말을 가사에 담았다. 부수의가 부녀의 정을 생각해 자기에게 살길을 열어주길, 혼례를 없던 일로 해주길 바랐다. 심묘 자신도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며 그녀가 쓴 가사를 보고 함께 다듬었다. 노래를 완성한 후 부수의를 곤녕궁에 초청했다. 완유가 연주를 마치자 냉담한 부수의도 감동한 기색을 비쳤다. 그런데 갑자기 초청받지도 않은 미 부인이 등장했다.

“폐하, 이곳에 계셨네요. 신첩이 오늘 새로운 춤을 배웠는데,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황후마마도 계시니, 같이 감상하시지요.”

미 부인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춤을 췄다. 몸짓 하나하나가 어여쁘고 사랑스러웠다. 부수의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미 부인을 보느라 자신들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완유의 눈 속에 스친 실망의 기색을 자신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터였다. 앳된 얼굴의 아가씨는 점점 생기를 잃더니 고요해졌다. 다음 날 완유는 자신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모후, 소녀를 위해 애쓰지 마세요. 소녀는 화친을 위해 흉노에 가겠습니다.”

화친을 위해 혼례를 올리는 일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완유는 자신보다 더 일찍 부수의의 무정과 미 부인의 수완을 분명히 본 것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장래로 달려가는 것이 만연한 음모와 모함에 시달려야 하는 궁에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을 거라고 여겼을지도 몰랐다. 그 후 그녀는 번뇌를 내려놓은 듯 매일 초연하게 지냈다.

그러니 자신은 눈앞의 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눈처럼 하얀 긴소매가 빠르게 휘둘러졌다. 긴소매에 묻은 것이 먹물이 아니라 완유의 피 같았다. 엽미는 자신에겐 눈엣가시, 뼛속에 박힌 못이었다.

그러나 심묘를 제외한 모두에게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춤이었다. 엽미의 허리는 유연했고 동작은 사랑스러웠다. 눈에는 맑은 물결이 출렁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으면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했다. 나비는 잠시 손안에 머물렀다가 고운 빛깔의 날개를 펼쳐 다시 경쾌하게 날아갔다.

여자들조차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니 남자들의 반응은 뻔했다.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엽미의 춤선을 훑었다. 엽 부인과 엽무재의 표정도 점점 득의양양해졌다.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딸을 낳아 모든 대량 남자가 그녀를 흠모하니 이 역시 일종의 영예라고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니까.

이에 고완아는 또다시 질투하며 이를 갈았다. 반면 심묘는 차가운 눈빛으로 엽미가 가볍게 나부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전생의 일을 더듬고 있었다. 자신이 미 부인을 처음 본 것은 진국에서 명제로 돌아왔을 때였다. 곤녕궁에서 문안을 받을 때 궁중 비빈은 예상대로 더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신경 쓰이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 문안을 오지 않은 이.

비빈들은 그녀의 지위를 논하지 않고 ‘미 부인’이라고만 불렀다. 특별한 존칭인 게 분명하니 그녀의 존재도 평범하지 않았다. 부수의가 그녀를 아주 총애한다는 이야기였다. 슬프고 괴로웠으나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차가운 부수의가 총애한들 그리 깊지 않으리라, 오래가지 못하리라 믿고 싶었다.

이후 자신은 업무를 논의하기 위해 어서재로 부수의를 찾아갔다. 문턱을 넘어설 때, 문진을 떨어뜨린 한 후궁을 마주했다. 처음 보는 여인이었으니 ‘그’ 미 부인이 확실했다. 미 부인이 여태 아프다는 핑계로 문안에 오지 않아 서로 처음 마주한 것이었다. 그녀는 색과 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찌푸린 얼굴, 웃는 얼굴 모두 그림 같았다. 그러나 거만하게 성질을 부렸다. 부수의가 품어주지 않는 언행이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부수의는 노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와 말다툼한 미 부인은 고개를 돌려 떠났다.

당시 그 모습을 본 자신은 미 부인이 아름답기는 해도 성격이 강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여겼다. 곤녕궁으로 돌아온 후에는 완유와 부명을 돌보느라 바빠서 미 부인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서재에서 미 부인과 대립했던 부수의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와 함께 어화원을 산책했다. 그가 미 부인을 매우 총애하는 사실을 깨닫고 멍해졌다. 지금까지 그런 부수의를 본 적 없었다. 그는 그렇게 성격이 좋지 않았다. 부수의는 그의 ‘재능 있는 사람’들 앞에서만 온화함을 드러냈다. 그는 여인에게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미 부인은 어제 그를 화나게 했지만, 다음 날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게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그 여인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인식했다.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손바닥 안에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인이었다. 부수의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좌였다. 그녀는 거만하고 무례한 성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정도’는 넘지 않았다. 길들이기 어려운 그녀에게 부수의는 점점 빠져들었다.

반면 자신과 미 부인은 날카롭게 맞서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과 마주할 때마다 무례하게 행동했고 빈정대는 말을 늘어놨다. 더욱이 그녀는 부명과 부수의의 관계를 여러 번 이간질했다. 애석하게도 부수의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는지 오랫동안 부성을 편애하며 부명은 냉대했다. 미 부인은 두려운 존재였다.

미 부인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심묘는 눈앞의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번 생에서 미 부인은 엽가의 귀한 딸이었다. 사소한 것에도 신중하고 세심하게 대응했으며, 나아가고 물러설 때를 영리하게 판단했다. 전생에서처럼 거만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정말 그녀의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미 부인과 평생 대치한 자신은 그녀의 무서움을 잊지 않았다. 여우처럼 교활한 여인이었다. 무언가를 원하면 직접 쟁탈하지 않고 굽이굽이 돌고 돌아 결국 얻고 마는 사람이었다. 선량한 척하며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도 했다. 하루빨리 그녀의 진짜 속내를 파악해야 했다. 사경행이 부수의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어, 그녀의 손바닥 위에 놓일까 두려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심묘는 속으로 냉소했다. 그녀가 사경행을 바라볼 때 사경행의 시선도 심묘에게 닿았다. 그는 심묘가 자기 쪽으로 시선을 둔 데 놀란 듯 멈칫했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밖을 바라보는 모양이 무언가 숨기는 것 같았다.

그는 중앙의 열렬한 춤을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심묘는 얼떨떨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솟구쳤다. 솔직히 미 부인에게 원한만 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깊숙한 곳에는 열등감도 있었다. 용모를 논할 때 자신은 미 부인만 못했고, 그렇기에 전생에 부수의가 자신을 버렸다고 여겼다. 게다가 사경행은 부수의보다 몇천 배 몇만 배는 더 수려했다. 엽미가 그런 사경행을 혹여나 마음에 품는다면, 이번 생이라고 결과가 다를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경행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엽미에게 한 번도 쏠리지 않았다. 부수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과 미 부인이 같은 자리에 있을 땐 자신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과연 사람은 달랐다. 미 부인과 자신이 다르듯, 부수의와 사경행도 달랐다.

심묘는 엽미의 춤이 언제 끝났는지도 몰랐다. 전당에 열렬한 박수 소리가 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엽미는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이마 위 투명하게 빛나는 땀방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향기가 날 듯한 뺨은 붉어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수묵화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기린이 상서로운 구름을 밟고 있는 그림이었다. 사경행의 생일을 축하하는 그림은 실물처럼 생동감 있었다. 대작이라 할 만했다.

학사부 대인이 감탄했다.

“엽 소저, 과연 재능과 기예가 모두 탁월하군. 그림이 생생해서 아주 우수한 작품이네. 우리 학사부의 아가씨들은 이런 능력이 없다오.”

어느 부인이 얼른 맞장구쳤다.

“춤도 잘 추네요. 엽 부인은 정말 복도 많으세요. 엽 소저가 부인을 닮아 아름답네요.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뿐 아니라 빛나는 재주도 있다니요. 우리 농서성에서 이렇게 춤도 잘 추고 그림도 잘 그리는 사람은 또 없을 겁니다.”

엽 부인은 웃으며 칭찬을 받아들였다. 고완아는 샘이 나서 손수건을 비틀었다. 몹시 달갑지 않은 눈빛이었다. 누군가 사경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왕 전하는 이 그림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사람들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엽미도 사경행을 보았다. 그는 술잔을 들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질문을 듣지 못할 정도로 넋을 잃은 모양새였다.

“전하?”

고양의 부름에 겨우 정신을 차린 사경행이 대꾸했다.

“왜?”

“엽 소저의 축하 그림이 마음에 드시는지 여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왕의 태도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엽미는 온 마음을 담아 축하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정신을 딴 데 두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의 재능에 주의하지 않았으니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터였다. 사경행은 그림을 훑어보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에 드네.”

형식적인 태도였다. 엽미의 웃는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심묘의 눈 속에는 웃음기가 스쳤다. 그는 이럴 때 온 마음을 기울여 정신을 딴 데 팔 사람이 아니었다. 고의였다. 그가 왜 엽미를 난감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엽미가 심묘의 웃음기를 알아챘다. 그녀를 주시하던 엽미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예왕부에 있을 때, 예왕비마마도 재능과 기예를 다 갖추셨다 들었습니다.”

엽미는 이목을 심묘에게 돌렸다.

“예왕비마마께서는 활쏘기가 특출하시다지요? 분명 다른 솜씨도 뛰어나실 텐데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예왕 전하의 생신일이니 마마께서 분위기를 돋워주시는 건 어떨지요? 소녀는 마마를 깊이 흠모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제 견문도 넓혀주시면 아주 기쁘겠습니다.”

사람들은 엽미가 심묘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숭배하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직접 그녀의 기예를 보고 싶어 하는 모양이라고. 그들은 얼굴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신들도 심묘가 장군 가문의 딸로 활쏘기를 잘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춤을 잘 춘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녀가 만일 춤을 췄는데 실력이 어쭙잖다면 망신당할 수 있었다. 춤을 추지 않으면 그녀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가씨라는 소문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심묘는 살짝 웃었다.

“나는 예왕부의 왕비다. 어찌 가녀와 무희처럼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겠는가?”

전당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엽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 건 스스로 위신을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엽미는 엽가의 귀한 딸인 데다 아름답고 재치 있기에 사람들은 이 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심묘가 이렇게 비꼬니 미묘했다.

엽 부인과 엽무재의 안색이 나빠졌다. 엽 부인이 입을 열려다가 닫고 말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딸의 평판이 더 나빠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 고 부인과 고완아는 엽가의 난처함에 기뻐했다. 심묘와 엽미의 다툼을 가장 즐겁게 보는 관객이었다.

사경행은 웃음을 머금고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심묘의 말이 타당하다는 듯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담은 심묘가 엽미를 공격하는 걸 보고 아주 상쾌했다. 사경행의 생일날 엽미가 춤을 추어 모두의 관심을 받으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게다가 감히 예왕비인 심묘에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하라니 법도에 맞지 않는 무례한 요구였다.

그러나 계 부인은 심묘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사경행의 생일이어서 조정 신하를 모두 초청했는데 심묘가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들면 이후 사람들은 예왕비가 예의를 모른다고 책망할 터였다. 게다가 그녀가 엽가의 귀한 딸을 질투해서 시시콜콜 따졌다는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 자연히 예왕부의 체면도 크게 훼손될 수 있었다.

엽미는 제자리에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주저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핍박받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특히 남자들은 영웅심에 취했는지 약자 편을 들며 수군거렸다. 영웅이 미인을 구한다는 옛말처럼 엽미를 위해 정의를 구현하고픈 눈치였다.

심묘가 전당 안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한눈에 보였다. 엽미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눈살을 찌푸리고 탄식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오늘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바로 다음 날 농서성 사람들은 모두 엽미의 편에 설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심묘가 일어났다.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심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은인인 엽 소저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우니, 내키지 않지만 해보겠습니다. 마침 며칠 전 노래 한 곡을 배웠는데, 엽 소저를 위해 연주하지요.”

고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왜 엽 소저를 위해 연주하신다는 겁니까? 전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심묘가 냉담히 대꾸했다.

“이 노래는 매우 슬픕니다. 경사스러운 분위기에 맞지 않기에 축하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노래가 좋다고 느껴서 배워둔 건데, 마침 은인인 엽 소저가 날 흠모했다니 자그마한 답례 차원에서 연주하겠습니다. 좋은 것은 당연히 함께 나눠야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엽미를 바라보았다. 엽미도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물론이지요.”

두 사람은 수면 아래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엽미는 사랑스러웠고 심묘는 단정해, 제각기 다른 아름다움으로 우열을 가를 수 없었다. 심묘가 중앙으로 걸어가자 엽미가 물러났고 경칩이 얼른 심묘의 의자를 찾아다 주었다.

“금을 가져오너라.”

심묘의 분부에 곡우가 오래 지나서야 돌아왔다.

“벽소루에는 초미금만 있답니다. 마마…….”

초미금의 음색은 독특했다. 심묘를 여러 해 따르던 곡우도 그녀가 초미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곡우는 심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계략을 부린 엽미를 원망했다. 이러나저러나 체면을 잃는 건 심묘였다. 더욱이 이 낯선 타국에는 장군부의 체면을 생각해서 심묘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이 꿍꿍이를 품고 그녀에게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엽미가 수묵무를 추었다. 꼴 보기 싫은 여자였지만, 그녀의 춤 솜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묘가 무엇으로 상대하든 부족할 터였다.

“괜찮다. 초미금을 가져오너라.”

여인들이 심묘의 말을 듣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예왕비마마는 기예에 서툴다고 하지 않았어? 금을 연주하실 줄은 아나?”

“금을 뜯을 줄 아신대도 초미금은 무리야. 엽가 소저 앞이니 지지 않으려고 하시는 게지.”

“에효, 불쌍한 예왕부. 체면을 잃겠어.”

“과연 명제 사람은 상류에 오를 수 없네. 허세로 실력을 메꿀 수 없는데. 본인 수준을 가늠 못 하시나 봐.”

그들은 작은 소리로 말했으나, 조롱하는 시선은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담은 자신만만했다. 심묘의 연주를 들은 적은 없으나 심묘가 못할 것이 없다고 느꼈다. 말을 꺼냈으니 반드시 해내리라고 믿었다.

계우서가 고양에게 귓속말했다.

“형수가 정말 금 연주를 해? 풍선전당포에서 조사한 정보로는 형수는 금 연주 선생을 한 번도 부른 적 없어. 선생도 없이 통달했다면 대단한데?”

고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네. 조용히 지켜보세.”

배랑도 손님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광문당에도 금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었으나 심묘는 그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실력은 보나 마나 뻔했다. 동료 선생에게 심묘가 줄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가 도발에 응한답시고 금을 찾으니 의아했다. 그는 사경행을 한 번 바라보았다. 심묘가 사경행을 위해 고집을 피우는 게 틀림없었다. 사경행은 살짝 미간을 찡그린 채, 술잔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심묘가 향을 피우고 손을 씻은 뒤 담담히 말했다.

“이 곡은 <혈영(혈연을 노래하다)>이라고 하는데, 젊은 공주가 적국으로 화친혼을 떠나게 되는 심정을 담은 곡입니다. 거칠고 우악스러운 데다 나이가 오십도 넘은 황제에게 시집가게 된 공주가 부황이 생각을 바꿔주시길 바라며 비통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만든 노래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득한 달빛 같았다. 엽미의 열렬한 춤으로 달아오른 사람들은 단숨에 평온해졌다. 심묘의 말을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녀가 금 줄을 튕겼다. 첫 음이 시작되자 전당 안은 더더욱 조용해졌다. 초미금의 소리는 둔탁하고 무거웠다. 보통 금 소리처럼 맑고 높지 않아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심묘의 연주는 먼 곳을 더듬는 듯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연주가 마음을 어루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어 느린 곡조에 맞춰 노래하기 시작했다.

“장강은 도도히 서쪽에서 흘러오고, 수면에는 구름 걸린 산이 있으며, 산 위에는 누대(樓臺)가 있다. 산과 물은 서로 맞닿아 있고, 누대는 하늘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달빛을 머리에 이며 걷고, 별빛을 몸에 받으며 걷는다. 홀로 여관에 머물며 간단히 식사하자 고향 생각이 난다. 고향은 이미 가을이 아닐지. 베개에 누워 근심하고 말 위에서 걱정하니, 죽은 후에야 멈추리라.”

평소 심묘의 목소리는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침통한 기색을 담고 있어 사람들은 눈언저리가 붉어지고 심장이 시큰거렸다. 귀엽게 생긴 어린 공주가 혼례 예장을 하고 괴로운 얼굴로 궁 모퉁이에 앉은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황실의 공주는 자기 뜻대로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었다. 높고 큰 궁전 깊은 곳, 천진난만할 나이인 공주는 가볍지 않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마차에 올라 모후와 작별을 고했다. 황제는 무정해서 천년 대업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딸을 희생시켰다. 고향을 떠나는 아득한 여정. 그녀는 홀로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고 물 아래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았다. 바람과 비를 보고 구름을 보았다. 모든 게 그녀보다 자유로웠다.

“아주 가까이 있다가 멀리 떨어진다. 삽시간에 달이 저물고 꽃잎이 흩날린다. 손은 이별을 고하는 술잔을 잡고, 눈에는 이별의 눈물이 고였다. 몸 건강하라 간신히 말하고, 죽을 듯 아파하며 아쉬워한다.”

수려하고 단정하게 생긴 심묘가 옥같이 하얀 손으로 줄을 튕길 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표정은 차가우나 무궁한 고초를 차마 더 말할 수 없는 듯, 더는 노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흑백의 대조가 뚜렷한 눈은 맑고 투명해 보였다. 은은히 아픈 기색은 끝이 없었다. 그녀가 마치 거센 빗속에서 휘청거리는 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비를 가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노래에 전당 사람들은 목이 메었다. 눈가도 붉어졌다. 심장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엽미가 춤을 출 때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때 심묘는 갑자기 줄을 빠르게 퉁기기 시작했다. 금 소리가 빨라지더니 노래 가사도 날카롭게 변했다.

“국사를 그르친 군주, 간신이 대권을 장악한다. 관아의 규정이 지나치고 형벌은 무거워 백성의 원망이 가득하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걸 보았는가. 도둑이 관직을 맡아 관리가 도적질을 하니 참으로 슬프도다. 차라리 이 강산이 무너지길 바란다. 반백 년이 지나면 쓸모가 없어 깨어진 비석의 흥망성쇠를 차가운 눈초리로 보리.”

심묘의 미간 사이는 엄숙했다. 소리마다 피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는 것 같았다. 눈 속의 살의는 숨겼으나 분노와 원망은 사라지지 않아 자리에 앉아 있는 엽미 남매에게 날아갔다. 완유는 이 부분을 부수의에게 다 들려주지 못했다. 뒷부분은 심묘 자신이 냉궁 안에서 줄이 끊어진 금을 연주하며 보충한 것이다. 전반부는 완유의 간청, 후반부는 자신의 규탄이었다. 금 소리는 밤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을 텐데도 미 부인과 부수의는 듣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연주를 듣고 있는 그녀에게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사경행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엽미는 한기를 느꼈다. 이 가사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을 터인데 왜인지 자신을 향한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 길고 희미한 금 소리도 따라서 멈췄다. 심묘도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감히 예왕비가 거칠게 자라 악기도 연주할 줄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금을 연주하고 노래하여 전당 안 사람들을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만드니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노래를 불러서 마음 아픈 옛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울적했다. 심묘가 침묵을 깨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 노래는 즐겁지 않아 생일에 연주할 노래는 아닙니다. 그러나 엽 소저가 원하니 특별히 엽 소저를 위해 연주했습니다. 엽 소저, 만족하는가?”

그녀가 엽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도 따라서 자신에게 떨어지자 엽미는 불안했다. 심묘의 말은 이쪽이 그녀에게 금 연주를 해서 추태를 보이라고 핍박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자신도 그녀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금 연주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금 연주는 전당 안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줬으니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엽미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마마께서는 정말 소문처럼 재능과 기예가 모두 뛰어나십니다. 이 <혈영>은 절 탄복시키네요. 하나……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네요. 후반부에서는 규칙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의심스러워하는 엽미의 말처럼 후반부는 격렬하게 분노하고 원망하며 절망하는 가락이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노래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심묘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앞부분과 뒷부분은 당연히 달랐다. 앞부분은 완유가 부수의를 감동시키기 위해 써서 슬프고 구성졌다. 그러나 뒷부분은 자신이 딸을 잃은 후 쓴 부분으로, 독한 남녀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심묘가 미소를 지었다.

“전반부는 어린 공주가 핍박을 받아 시집가는 심경을 담은 것이고, 후반부는 그 어린 공주의 생모, 황후가 딸을 잃은 절망과 비통함을 담은 겁니다.”

“이 노래는 정말 사람의 심금을 울립니다. 예왕비마마는 어디서 이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예요.”

어느 부인이 묻자 심묘는 웃음을 띠며 차분히 설명했다.

“이야기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노래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시 듣고 마음이 무거워진 이야기라 기억해뒀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도 알고 계신가요? 화친으로 출가한 공주는 어떻게 되나요?”

젊은 아가씨가 얼른 끼어들자 심묘는 냉담하게 답했다.

“공주는 화친 가는 길 위에서 죽고, 황후 역시 냉궁에 들어가 흰 천을 하사받고 죽었답니다.”

사람들은 모두 탄식했다. 옛이야기가 너무 비참하다고 수군거렸다. 엽 부인은 즐겁지 않았다. 심묘의 연주와 노래는 엽미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엽미는 아름답고 자태가 다양했으며 열렬한 춤은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심묘는 조용히 앉아 연주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노랫말로 엽미의 우세를 빼앗았다. 엽미의 수묵무는 금세 잊혔다.

심묘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여인들은 심금을 울리는 애달픈 이야기와 연주에 마음이 움직인 것 같았다. 다들 심묘와 적지 않게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이를 눈치챈 엽 부인이 입을 열었다.

“기쁜 날에 사람을 슬프게 만드셨네요.”

“여러분의 흥을 깨버렸으니, 내 잘못입니다.”

연회석으로 걸어간 심묘는 술잔을 들었다. 그녀가 든 술잔은 남자들이 마시는 큰 잔이었다. 그런데도 심묘는 술을 한가득 부었다. 노란 감주 위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비쳤다. 그녀의 속눈썹은 길었고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한 잔 마셔서 사죄하겠습니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 술을 마셨다. 사경행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일어나려다가 참는 눈치였다. 심묘가 급히 마시자 삼키지 못한 술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려 옷깃을 살짝 적셨다. 옷감의 색이 짙어지자 그녀의 백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더욱 도드라졌다.

“먼저 건배하는 것으로 존중을 표합니다.”

심묘는 다 비운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심묘의 호탕한 모습에 얼굴을 펴고 웃으며 잔을 들었다.

“예왕비마마의 주량이 좋으십니다. 한잔 올리겠습니다. 건배!”

심묘가 미소로 화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엽미 남매를 보았고, 엽미 남매도 그녀를 주시했다. 심묘가 먼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녀가 마신 한 잔 술은 온 벽소루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 주흥이 무르익는 분위기자 심묘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잠시 나가 바람 좀 쐬겠습니다.”

그녀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바깥에서 팔각과 회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 멀지 않은 정자로 함께 향했다. 심묘는 목구멍이 얼얼했다. 상등의 감주에 그녀는 취기를 느끼지 못했으나 눈가는 매웠다. 뜨거운 눈물이 가득 나왔다. 아까의 술은 길 위에서 비참하게 객사한 어린 딸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조차 비참하다고 여기니 그 이야기를 몸소 겪은 완유의 고통은 결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홀로 화친 대열을 따라 멀리 떠날 때, 그녀의 기분이 과연 어땠을까. 사나운 불길 안에 갇힌 듯 절망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하자 더욱 마음이 미어졌다. 그 아이에게는 어떠한 출구도 없었다. 감정을 자제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완유와 부명의 고통을 자신이 겪었길, 차라리 자신이 백번 천번 죽었길 바랐지만, 운명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차가운 달빛이 마음을 바람이 불지 않는 황무지처럼 만들었다.

정자에는 술과 음식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팔각이 말했다.

“마마, 폭죽도 이미 사뒀습니다.”

심묘는 모든 것을 사경행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모두 말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장래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자신이 무엇과 마주하게 되든, 모두 이겨낼 수 있었다. 전생에서 자신을 괴물처럼 보는 듯한 시선도 참아 넘겼다. 어차피 전생보다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있을 수 없었다. 이번 생 역시 그렇게 된다 해도, 견딜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예왕 전하를 기다리시는 겝니까?”

배랑이었다. 그는 정자 안의 물건을 보고 웃었다.

“마마께서 이런 일을 하실 줄 생각지 못했습니다.”

“선생은 왜 나왔나요?”

“이런 연회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술도 잘 못 마시니 먼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마마의 이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습니다. 예왕 전하와 화해하실 생각입니까?”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 사람은 없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왕 전하께서 그 일에 성공하셨네요.”

배랑의 웃는 얼굴 속에 잠시 울적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다시 심묘를 보는 얼굴은 여전히 구름처럼 담담하고 바람처럼 가벼웠다.

“의외지만, 또 막상 의외라고 느껴지지도 않는군요.”

심묘는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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