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장 (69/71)

61장

자리에 앉아 있던 사경행이 철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일어나려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울 낌새를 보이자 계우서가 얼른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왜 도망치려는 거야?”

“놔.”

사경행이 계우서를 쳐다보자 그는 순순히 손을 놓았다.

“도대체 뭘 하러 가길래 이리 비밀스러워?”

“넌 또 무슨 상관이야?”

고양의 물음에 사경행이 눈을 흘겼다. 그는 엽 부인과 이야기 중인 엽미 남매를 한 번 보며 은밀히 눈을 빛냈다. 이 남매를 대하는 심묘의 태도는 확실히 기괴했다. 마치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엽가 남매 또한 수상해 보였다. 묵우군에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머릿속은 철의가 자신에게 건넨 편지 내용으로 가득했다. 그 편지는 심묘가 자기에게 쓴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사과의 말은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연회를 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정자에서 만나자고, 할 말이 있다고 전했다. 심묘가 사과하지는 않았어도 여러 사람의 눈을 피해 만나자 했으니 그녀로서는 크게 양보한 셈이다.

그동안 자신은 일부러 낯빛을 엄숙하게 유지했으나, 사실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차가운 얼굴은 연기였을 뿐이고, 실은 편지를 받고서 내내 들떠 있었다. 냉랭하게 대하니 심묘가 마음을 바꾼 듯했다. 바라던 결과였지만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그녀를 앞에 두고 말도 걸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니. 하루에 열두 번도 더 포기하고 싶었다. 게다가 전당 안에서 그녀의 모습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심묘가 금을 연주할 때 전당 안 남자들은 하나같이 흠모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니, 이는 자신에게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 * *

심묘와 대화를 마친 배랑은 정자를 떠나려 했다. 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여덟, 아홉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부딪혔다.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보지 못한 배랑은 넘어졌다. 팔각과 회향은 사경행을 마중 나갔기에 이곳에 없었다. 심묘는 벽소루를 찾은 어느 관가 도령이 달려온 것이라고 여겼다. 배랑이 낮게 신음했다. 그가 심하게 넘어진 것 같아 심묘는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배랑에게 다가가니 아이는 얼굴을 바닥을 향해 엎드린 채였다. 배랑이 아이에게 괜찮냐고 말을 걸 때 심묘도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가 아이를 부르려 할 때, 아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빛은 몹시 흉악했다.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심묘는 전혀 방비하지 못했다. 은색의 빛이 정면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피하려 해도 늦었다 싶었는데, 그때 배랑이 잽싸게 그녀를 안고 몸을 굴렸다. 배랑이 그녀를 보호한 것이다.

이어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배랑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기를 쓰고 심묘를 보호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신경 쓰지 않고 배랑을 발로 차고, 칼의 방향을 돌려 심묘의 몸을 찌르려 했다. 멀리서 인기척이 들릴 때 아이가 손을 내리찍었다. 배랑에게 한 것처럼 칼이 심묘의 복부를 찌르고 빠져나갔다.

사경행은 회향, 팔각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회향이 심묘의 이야기를 전했다.

“마마께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님께서 아직 화나셨을까 걱정하시며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마를 보면 부디 자상히 돌봐주십시오.”

사경행은 무표정했으나 눈 속에 웃음기가 스쳤다. 골목을 돌자 바로 정자가 보였다. 순간 콧속에 농후한 피비린내가 퍼졌다. 사경행이 멈칫했다. 팔각과 회향도 멍해졌다. 등롱처럼 밝은 달빛이 바닥을 분명하게 비췄다. 선경처럼 우아한 풍경에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거대한 피 웅덩이 속에 익숙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 * *

오늘밤 예왕부의 분위기는 유달리 심상치 않았다. 하인들의 안색도 하나같이 무거웠다. 하늘이 무너진 듯 심각했다. 사람들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철의가 사경행의 곁을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인님, 종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경행이 그를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눈 속에는 검은 폭풍이 몰아쳤다. 순식간에 사람을 휩쓸어버릴 것 같았다.

“못했다고?”

철의가 몸서리쳤다. 이어 말하려 할 때, 고양이 안에서 나왔다. 술자리에서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직 술기운이 은은히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눈은 맑은 걸 보아하니 그다지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사경행에게 곧장 다가왔다.

“다행히 괜찮네. 칼이 급소에 닿지는 않았어. 지금은 놀라서 기절했을 뿐이야. 진정제를 먹였으니 내일 일찍 깨어날 걸세.”

사경행의 눈빛이 안정되었다. 철의도 안도했다.

“그러나 배랑의 상처가 위급하네. 너무 깊게 찔렸고, 많은 피를 흘렸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이겨낼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하네.”

배랑이 깨어날 수 있을지는 운명에 달렸다는 뜻이다.

“배 선생이 마마를 대신해 칼을 막은 것 같습니다.”

철의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했다. 예왕부에서 배랑의 위치는 미묘했으나 지금은 그의 희생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은 사경행을 본 고양이 입을 열었다.

“이건 좋은 일이 아닐세. 배랑이 깨어나지 못하면 심묘는 평생 가책을 느낄 걸세.”

심묘는 감정이 아주 분명한 데다가 빚지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누군가에게 빚진다면 반드시 갚으려고 했다.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한 배랑이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어찌 행동할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성문은 봉쇄했느냐?”

사경행이 낮은 목소리로 철의에게 물었다.

“봉쇄했습니다. 묵우군 암부의 사람이 전부 출동했으나 주위에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마께서 구조를 요청하시지도 못한 것으로 보아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 듯합니다. 범인은 수완이 고명한 게 분명합니다.”

철의의 말에 사경행이 명령했다.

“생각할 것 없다. 살아 있다면 죽여라.”

“그럼 배후의 사람은…….”

“다시 조사하라!”

철의는 명령을 받들어 떠났다. 사경행이 고양을 바라보았다.

“넌 오늘밤 이곳에 남아.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알겠네. 자네도 쉬게나.”

고양의 표정도 매우 엄숙했다. 벽소루와 멀지 않은 곳에서 예왕비에게 손을 쓰다니 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애당초 감히 예왕부를 건드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량 안에서 이렇게 대담한 사람은 고가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고가가 심묘에게 손쓸 명분은 전혀 없었기에 내막이 의미심장했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신호였다. 어두운 곳에 숨은 세력이 밖으로 나와 난동을 부렸고, 그들은 첫 희생자로 예왕부의 심묘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 사경행은 많은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는 침상에 누운 심묘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은 심묘는 여느 때보다 안색이 창백했다. 그는 탄식하며 심묘의 침상 가까이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음식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에는 심묘가 자신을 위해 벽소루 주방에서 만든 장수면이 있었다.

사경행은 음식 바구니에서 장수면 그릇을 꺼냈다. 하얀 면, 청록색 청경채, 달걀노른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상할까 걱정해 특별히 찬물로 먼저 헹구었다고 팔각이 귀띔해주었지만, 만든 지 너무 오래 지나 푹 퍼진 상태였다. 아예 죽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막 끓였을 때는 맛있는 냄새가 났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차게 식어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사경행이 젓가락을 들어 퍼진 장수면을 먹기 시작했다. 팔각과 회향은 심묘가 아침부터 곡우에게 폭죽을 사 오라고 했다고도 자신에게 알렸다. 술과 안주가 있는 데다 연회를 여는 곳과 멀지 않은 정자는 호수와 가까우니 불꽃놀이를 보면 좋을 거라고 했다. 장수면을 건네며 자신에게 사과하려고 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냉전을 벌였지만 심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사실 팔각이 요즘 심묘도 몹시 심란해했다고 얘기해주자마자 마음이 풀어졌다. 지나간 일은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얼른 화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과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심묘는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한여름임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차가워졌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다리가 꽁꽁 얼어붙은 듯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실은 다가가 생사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면은 밀랍을 씹는 듯 맛없었으나 사경행은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빈 그릇을 탁자에 둔 그는 심묘의 손을 잡았다. 깊은 후회가 겹겹이 자신을 감쌌다. 애초에 심묘와 싸우지 않았다면 그녀도 자신에게 사과하러 정자에 가지 않았을 테니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나담이 예왕부에 급히 찾아왔다. 고양을 만난 나담이 물었다.

“심묘는 어때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다행히 괜찮소. 배랑이 대신 칼을 맞았지만.”

“배 선생? 그럼 배 선생은 어떤가요?”

멍해진 나담이 묻자 고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다지 좋지 않소.”

“당신도 구할 수 없나요?”

고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난 의원이지, 부처가 아닙니다. 의술로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저승에 갈 사람은 없겠지요.”

“난 오늘에서야 심묘가 제부와 다툰 것을 알았어요. 제부가 아플 때 심묘가 보러 가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벽소루에서 부인들은 전부 심묘가 냉혹하고 매정하다고 욕하더군요. 대체 뭘 안다고들! 심묘는 괴상한 도사를 찾아가 제부의 약을 구해 왔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양이 놀라 물었다.

“괴상한 도사? 약을 구했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오?”

나담은 당황했다. 심묘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얼떨결에 약속을 깨버렸으니 낭패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서 심묘를 봐야겠어요.”

나담은 말을 얼버무리며 심묘가 있는 방으로 가려 했다. 고양이 그녀를 막았다.

“가지 마시오. 사경행이 안에 있소.”

나담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녀가 고양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오늘밤 이곳에 남는 건가요?”

“이곳에 남아 배랑을 돌봐야 하니 먼저 돌아가시오.”

나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갈 거예요. 심묘가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이야기하고 갈래요.”

나담의 완고한 성격을 아는 고양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심묘의 암살 시도 사건은 밖으로 퍼지지 않아, 벽소루에 있던 사람 중 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사경행이 일찍 자리를 떠난 거라 여겼다. 그래서 예왕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아무도 몰랐다. 오직 예왕부 사람들만이 불안에 떨며 결과를 기다렸다. 밤은 유달리 길었다.

여름에는 날이 일찍 밝았다. 태양이 빛을 발하고 새가 울기 시작했으나 심묘와 배랑의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사경행이 고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고양이 미간을 팽팽히 찡그렸다. 그는 심묘의 맥을 짚고 또 배랑의 맥을 짚은 후 돌아왔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이상하네. 배랑이 심한 상처를 입긴 했어도 아예 반응을 못 할 정도는 아닌데. 마치 잠든 것 같네. 마마도 부상이 깊지 않고 진정제 효과도 진작에 떨어졌을 거야. 깨어나야 할 때가 지났는데 깨어나시질 않네.”

“그래서?”

사경행의 표정은 가라앉은 물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의 서슬 퍼런 시선을 감히 마주하기 어려웠다. 고양이 침을 삼키고 작게 대답했다.

“그…… 게 조금 이상하네.”

당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전하처럼 독에 당하신 걸까요? 고 공자가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고양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아닐세. 두 사람의 맥 상태는 독에 당한 것이 아니라네.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깨어나지 않고 있단 말이지.”

나담은 초조했다.

“그럼 어떡해요?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잘 리 없어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예요.”

고양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반나절만 더 기다려보세.”

반나절 동안 사경행은 심묘의 침상 옆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깊도록 심묘는 깨어나지 않았다. 배랑도 마찬가지였다. 인내심이 바닥난 당숙이 고양에게 물었다.

“고 공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마마와 배 공자가 깨어나지 않으니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까?”

고양도 괴로웠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묘와 배랑은 아무런 이유 없이 깨어나지 않았다. 의원은 환자의 증상을 바탕으로 치료하는데 두 사람의 맥은 평범한 사람이 잠든 것과 같았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경행의 눈빛이 점점 차갑고 날카로워졌다. 고양은 그의 눈빛이 부담스러워 잠시 자리를 피했다. 그때 소식을 들은 계우서가 급히 달려왔다.

고양을 찾아온 계우서가 상황을 묻자 나담은 불안과 초조를 더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요사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먼저는 제부, 이번엔 심묘. 심묘에게 변고가 생기면 난 고모와 고모부께 뭐라 설명해야 하죠?”

나담이 코를 훌쩍였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량에 오면서 심묘를 잘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이러고도 내가 무슨 혼수라고.”

고양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건 당신 탓이 아니오.”

“내가 곁에 있었다면 적어도 이렇게 심하게 다치진 않았을 거예요.”

나담은 분노하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부한테도 책임이 있어요. 제부가 심묘와 같이 있었다면 적이 심묘를 따라다니며 손을 쓸 수 있었겠어요? 미행할 기회도 찾지 못했을 거예요.”

고양은 할 말이 없었다. 사경행과 심묘 사이의 일은 자신이 끼어들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와 잘잘못을 따진다고 심묘가 깨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묘가 깨어나지 못하면 제부도 크게 후회할 거예요. 부인들 말만 듣고 의심했으니까요.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무정하다고 비난했지요.”

나담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부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심묘는 제부를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헛되이 다른 사람만 좋은 일 시킬 수는 없어요. 심묘가 말하지 않으니 제가 대신 말하겠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나담의 말을 들은 계우서가 기이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담이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공로요! 엽가 그 남매가 세운 것보다 더 큰!”

나담은 씩씩거리며 사경행을 찾아갔다. 고양은 그녀가 이성을 잃고 무슨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 얼른 뒤를 따랐다. 입구에 도착하니 사경행이 가라앉은 얼굴로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심묘가 사고를 당한 뒤 사경행의 안색은 계속 어두웠다.

“예왕 전하!”

나담은 사경행을 ‘예왕’이라고 불렀다. 이전처럼 친밀하게 ‘제부’라고 부르지 않았다. 사경행이 나담을 보았다. 심묘가 깨어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 인내심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나담은 거리낄 게 없었다. 나담은 한 번 화가 나면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권력가라 해도 무섭지 않았다.

“심묘가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지금 그 애는 병상에 누워 있으니 저라도 나서서 말하겠어요. 난 꺼릴 것이 없고, 심묘처럼 생각이 많지도 않아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 보는 건 심묘일 테니까요.”

당숙과 철의도 의아한 얼굴로 나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예왕 전하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을 때 심묘가 전하를 보러 가지 않았다고 욕하더군요. 전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심묘가 무정하다고 여기는 건가요? 그래서 불만이 생겨 심묘와 싸운 건가요?”

나담이 사경행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심묘가 그때 전하를 보러 가지 않은 건, 전하를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약을 구하러 성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에요.”

약을 구하러 성을 나갔다는 말에 사경행이 철의를 바라보았다. 철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히 사경행의 눈을 마주할 수 없어 눈을 내리떴다. 하지만 억울했다. 자신도 사경행에게 알리지 말라는 심묘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예왕부로 돌아온 후에 다시 알리려고 했으나 그 뒤 사경행과 심묘의 사이는 점점 냉랭해졌고, 냉담한 그를 감히 건드릴 담력은 없기에 말을 전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이야기하려 했는데, 이런 변고가 생길 줄은.

“제대로 말해.”

사경행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나담에게 다가갔다. 나담은 고양을 한 번 보았다.

“그때 고양은 전하의 해독약을 만든다고 했지요. 심묘는 귀원환 세 알을 모두 내줬지만, 찰나의 목숨만 보장할 뿐, 열흘 안에 해독약을 만들지 못하면 전하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나흘째 되는 날 상황이 위급해졌지요. 노태의는 전하가 이레도 못 버틸 거라 말했어요. 그때 봉두장 고인 얘기를 들었어요. 그 고인은 하늘을 거스르고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심묘는 그 길로 나와 호위를 데리고 봉두장으로 향했지요.”

사경행의 시선이 매섭게 흔들렸다. 심묘는 냉정하고 영리했다. 이해득실을 철저히 따지는 사람으로 귀신이나 미신은 더욱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하늘을 거스르고 사람의 운명을 고친다는 황당한 말을 믿다니 뜻밖이었다. 그만큼 초조했다는 의미였다.

“봉두장은 농서성과 멀지 않으나 고인이 머무는 곳은 찾기 어려웠어요. 우리는 밤새 찾았지요. 심묘가 시간을 지체했다간 전하를 구하지 못할까 몹시 걱정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걸었어요. 숲에서 자칫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요. 늑대 무리도 있었으나 심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횃불을 들고 고집스럽게 길을 찾았지요. 결국 우리는 그 고인을 찾아냈고요. 고인은 사정을 듣더니 무공이 높은 자를 해치는 환술을 걸어놨다며 나와 심묘만을 데리고 산골짜기로 데려갔어요. 어떤 독이든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심묘가 대가를 치러야만 줄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 대가는 은자가 아니었어요. 온 산골짜기에 있는 홍수초의 벌레를 하나하나 골라내고 비료를 뿌리는 일이었지요.”

고양과 계우서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당숙과 철의도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당숙은 심묘가 돌아온 날 왜 그렇게 난처한 모습이었는지 깨달았다.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담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해가 되었다. 심묘는 그날 밤, 잠도 자지 못하고 사경행을 위해 꽃의 벌레를 잡고 비료를 뿌린 것이다. 높은 지위에 오른 심묘가 손에 흙을 묻히길 서슴지 않다니. 그녀의 마음이 더욱 귀중해 보였다. 당숙은 탄식했다.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나요? 심묘는 귀한 집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어요. 아무리 능숙한 농부라도 온 산골짜기의 홍수초를 혼자서 돌볼 수 있을까요? 심묘는 이미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그날 밤새 한눈팔지 않고 홍수초의 벌레를 잡았지요. 그 애는 평생 거름을 본 적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소매를 걷어붙였어요. 이런 심묘에게 누가, 대체 무슨 이유로 전하를 위하지 않았다고 하는 건가요?”

나담은 말할수록 더 화가 나는 듯했다.

“엽가 남매가 전하를 구한 것은 거짓이 아니에요. 그들은 분명 전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죠. 하지만 심묘도 할 만큼 했다구요. 심묘가 전하의 곁에 없었다고 하는데, 예왕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심묘가 부를 떠나기 전에 전하의 침상을 얼마나 오래 지켰는지, 몇 걸음이라도 떨어진 적이 있는지. 제대로 눈도 붙이지 않고 식사도 거르면서 전하 곁을 꼬박 지켰다고요. 그런데도 엽가 남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나요?”

나담이 사경행을 노려보았다.

“제가 다 억울하네요. 예왕 전하는 명제에서 심묘와 혼인했을 때 그 애한테 한 약속을 벌써 잊었나요? 왜 심묘를 믿어주지 않았어요? 물론 심묘도 잘못한 게 있지만, 전하는 정말이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 아이의 진심만은 의심해서는 안 되었어요.”

나담은 온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 채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긴말을 마친 후 그녀는 사경행을 표정을 살폈다. 그의 안색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그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평온한 그의 안색은 도리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함 아래 모든 걸 집어삼킬 폭풍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다 말했느냐?”

사경행이 천천히 반문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차가워서 흥분한 나담도 목을 움츠렸다. 고양이 급히 나섰다.

“지금은 이런 일로 추궁할 때가 아니라네. 당장 두 사람을 어떻게 해야 깨울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네.”

사경행이 냉소했다.

“그건 간단해. 엽가 남매를 잡아 오면 될 일이야.”

계우서는 얼떨떨했다.

“3형, 어떻게 하려고?”

“심묘가 엽가 남매를 주시하고 있으니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그들이 배후에서 사주했든 아니든 상관없어. 용서할 수 없어.”

사경행은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고양이 사경행을 붙잡았다.

“그들은 권력과 세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닐세. 엽가라고. 엽가를 건드려서 어떻게 하려고?”

“놔.”

사경행은 차갑게 말했다.

“냉정해지게. 심묘가 엽가 남매를 주시하면서도 이렇게 오래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건 예왕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단 뜻일세. 자네가 이러면 심묘를 방해하는 꼴이네.”

고양의 다그침에 계우서도 맞장구쳤다.

“맞아. 엽가는 함부로 건드릴 집안이 아니야. 형이 손을 쓰면 예왕부에 말썽을 불러올 거야.”

사경행은 이를 악물었다.

“심묘는 참아도 난 못 참아. 엽가는 선을 넘었어.”

“3형…….”

계우서가 사경행을 설득하려 할 때, 팔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항상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팔각이 당황한 목소리로 고했다.

“주인님, 누가 왔습니다.”

“누구?”

철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팔각의 추태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그게…… 그날 마마와 저희가 봉두장에 갔을 때 만난 도사입니다.”

철의의 물음에 팔각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뭐라고?”

나담은 눈을 크게 떴다. 사경행의 소매를 잡고 있던 계우서도 손을 놓고 팔각을 바라보았다.

“도사?”

팔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청. 낡아빠진 옷을 입은 괴상한 도사가 이것저것 더듬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모양이 대갓집에 처음 와본 사람 같았다. 회향과 종양은 곤란한 얼굴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분명 적염을 만난 적은 있었으나 그가 자신들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자 불편했다.

사경행 일행이 대청에 도착했을 때 적염은 꽃병 위 보석으로 만든 두루미의 눈을 빼려고 했다.

“이거 빈도(貧道, 도사가 자기를 낮추는 겸양어)가 가져가도 되겠나?”

“적염 도장!”

나담이 그를 보자마자 크게 외쳤다. 그녀를 본 적염이 웃었다.

“나 소저, 오랜만이요.”

나담은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도장이 심묘에게 사고가 생긴 것을 알고 오신 거죠? 심묘의 운명을 바꿔주려고?”

나담은 적염이 사람을 괴롭히는 나쁜 성정을 가지긴 했지만, 능력은 있다고 여겼다. 심묘가 적염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염이 그녀의 뒤에서 침묵하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빈도는 운명을 바꾸지 못하오. 점을 칠 뿐이지요. 거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하늘의 뜻을 믿지 않는다.”

사경행의 말에 적염 도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의 뜻을 믿지 않는 사람이 왜 하늘의 뜻에서 답을 찾으려고 고집부리시오? 부인의 운명은 다른 사람이 추측할 방법이 없소. 전부 부인의 선택에 따를 뿐이지. 당신과 나, 모두 어떻게 할 수 없다오.”

나담은 적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다급히 캐물었다.

“도장, 심묘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부인이 가져간 약초는 아직 있소?”

적염이 묻자 나담은 곤혹스러웠다.

“에? 우리가 돌아왔을 때, 제부는 이미 회복 중이어서 약초를 쓸 일이 없었어요. 심묘가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알 것 같습니다!”

경칩이 외쳤다. 그녀는 사람들을 데리고 심묘의 방으로 갔다. 과연 화장대 아래 먼지가 가득 쌓인 갑이 있었다. 갑을 여니 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약초가 들어 있었다. 나담이 예리하게 눈을 반짝였다.

“바로 이거예요!”

“가져가서 달이시오.”

적염이 수염을 매만졌다. 사경행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제지했다.

“잠깐. 내가 왜 당신을 믿어야 하지?”

적염은 길게 탄식했다.

“빈도를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당신도 다른 선택은 없지요. 이 약재는 부인이 찾았으나, 당신이 평안 무사할 테니 빈도도 헛수고라고 여겼소. 당신의 운명에는 이 약초를 쓸 재난이 없으니 부인의 행동은 본래 허사가 될 것이었소.”

사람들은 멍해졌다.

“그러나 허사가 아니었지.”

적염의 얼굴에 기쁘고 안심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도 사랑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해주는 사람은 자신도 구해지지요. 봉두장에서 부인이 대충 요령을 피웠다면 이 약초를 얻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도 없었을 것이요. 이 약초는 당신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찾았으나 사실은 부인을 구하는 물건이지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사실 부인 자신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소.”

“그럼 도장은 이 약초가 제부에게 쓰이지 않고 심묘에게 쓰일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도장은 심묘의 재난을 예측했기에 약초를 얻도록 한 거예요?”

나담이 어렴풋이 추측했다. 적염이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발전이 있으니 가르칠 만하군.”

그때 사경행이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이 그녀에게 벌레를 쫓고 비료를 뿌리게 했나?”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적염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고양의 뒤에 숨어 가볍게 두 번 기침했다.

“부인의 운명에 이 재난이 있었고, 빈도는 그 재난을 작게 만들었소. 벌레 쫓기를 목숨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양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심묘는 왜 깨어나지 않는 게요? 살펴보았으나 도무지 원인을 찾을 수 없었소. 깨어나야 할 때가 지났는데 일어나질 않소. 무슨 원인이 있소?”

“빈도가 말했듯, 이건 부인의 운명 속에 정해져 있는 재난입니다.”

“무슨 재난이고 뭐고 뭔 소린지 알아듣질 못하겠어요. 똑바로 말해주세요. 심묘가 이 약초를 먹으면 일어날 수 있나요?”

나담이 답답해하자 적염이 살짝 웃었다.

“이 약초는 부인에게 먹이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먹여야 하지요.”

다른 사람이라면 배랑이었다. 사경행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감히 농간을 부리면 네 목숨을 거둘 것이다.”

적염은 딱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괴팍한 기운이 너무 강하군요. 그 사람은 부인을 위해 목숨을 포기했소. 운명 안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오. 부인이 약초를 구했으니 마침 그 빚을 청산할 수 있소.”

“그럼 형수는 어떻게 합니까?”

계우서가 끼어들었다. 적염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해서 마치 잠든 것 같았다. 그러나 창백한 안색은 실은 조금도 편안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인은 산골짜기 홍수초에서 벌레를 골라냈소. 그때 골라낸 것은 자기 마음속 벌레라오. 이 재난은 부인에게 행운이자 불행이오. 빈도는 부인과 세 번 만날 인연이 있소. 마지막 만남은 이 연분을 위한 것이지요. 인간사는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니 유감스러운 점도 불만스러운 점도 있소. 부인이 얻으려는 답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오.”

적염은 실눈을 떴다.

“지금 부인은 방법을 찾았고, 코앞까지 갔소.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당신도, 빈도도 못 하오. 그러니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시오.”

그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인연이라오.”

* * *

모래바람이 깃발을 흔들었다. 길을 따라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해와 달과 별도 구색을 갖춘 것에 불과했다. 호송하는 호위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마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다지 정중하지 않았다.

여종 같은 여인이 마차로 들어갔다. 그녀가 마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 한 그릇을 건넸다.

“마마, 죽이 조금 식었으나 아직 먹을 만합니다. 근처에 마을과 여관이 없으니 이거라도 드세요.”

마차 안 여인은 젊었으나 초췌했다. 그녀는 몇 년 전에나 유행하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 자체도 정교하지 못할뿐더러 그녀의 몸에 맞지 않게 품도 컸다. 그녀가 마차 발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백로야, 여기가 어디냐?”

백로는 웃으며 답했다.

“아직 한참 더 가야 합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 국도에 갈 겁니다. 제가 물어보니 닷새 안에는 정경성에 도착할 수 있을 거랍니다.”

상강도 따라 웃었다.

“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고생 끝의 낙이 올 겁니다.”

심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진감래라지만 잃은 사람은 되돌릴 수 없지.”

그녀가 말한 사람은 경칩과 곡우였다. 백로와 상강의 눈에도 상심이 드러났다.

경칩은 부수의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권세 있는 신하의 첩이 되었다. 그녀는 심묘를 위해서 기꺼이 궁을 나섰으나 그 신하의 본처가 경칩을 곤장형에 처해 그녀는 맞아 죽었다. 그때 임신 중이던 심묘는 그 소식을 듣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다 하마터면 배 속의 아이마저 잃을 뻔했다.

이후에 심묘는 진국으로 향했다. 장장 5년 동안의 인질 생활이었다. 그동안 심묘는 조금도 자신의 위엄을 챙기지 않았다. 언젠가 명제로 돌아가 부명과 완유를 만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고 견디며 보전을 꾀했다. 그러나 그사이 대가를 많이 치렀다.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다. 곡우는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황보호의 손에 죽고 말았다. 그녀를 떠올리며 심묘는 두 주먹을 쥐었다.

남은 여정에도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몰랐다.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마차 대열만 보면 누구도 마차에 탄 이가 일국의 황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진국으로 갈 때 데려간 사람들은 5년 동안 죽거나 흩어졌다. 모경이 없었다면 자신은 살아서 명제로 돌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심묘는 탄식했다. 처참한 5년을 참고 견뎌냈다. 다행히 모든 고통이 헛되지는 않아 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었으나 마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게다가 앞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눈살을 찌푸린 심묘가 발을 들어 바깥을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냐?”

모경이 앞쪽 상황을 전했다.

“괴상한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합니다.”

모경이 말을 마치기 전에 그의 등 뒤로 먼지투성이 늙은이가 나타났다. 늙은이는 심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부인,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니 물 좀 주십시오.”

늙은이의 옷차림은 기괴했고 악취까지 진동했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행색이었다. 모경은 늙은이가 심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심묘는 황후인데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을 만나 혹여 사고를 당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때, 심묘가 웃었다.

“지금 하늘이 무심하여 가뭄이 들었지. 한 잔의 물은 목숨과 같다. 그에게 물을 주거라. 나도 물 한 잔은 모자라지 않구나.”

모경이 맑은 물을 한 그릇 늙은이에게 건넸다. 늙은이가 꿀꺽꿀꺽 마시고 배를 두드리더니, 호위병을 밀치고 심묘에게 그럴듯하게 인사했다.

“부인의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이 빈도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물 한 잔의 은혜를 빈도가 꼭 갚을 겁니다.”

심묘가 당황해하다가 곧 미소 지었다.

“빈도? 당신은 도사인가?”

괴상한 늙은이가 심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법명은 적염입니다. 부인은 귀한 운명인데 목숨이 짧아 귀한 운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백로가 미간을 찡그리곤 심묘를 바라보았다.

“마…… 부인, 떠돌이 사기꾼인 것 같습니다. 허튼소리에 귀 기울이실 필요 없습니다.”

모경 역시 괴상한 늙은이를 서둘러 쫓아내려 했다.

“잠깐. 길이 심심했던 차이니 잠시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자꾸나.”

심묘의 말에 늙은이가 허세를 부리며 절을 했다.

“부인의 미간 사이 검은 기운이 있으니 좋지 않습니다. 이 길의 막바지는 흉조로, 말머리를 돌리면 이 재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빈도가 권하겠습니다. 이 길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니 가지 마십시오. 가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말이 갈수록 지나치네요! 당신, 누굴 저주하는 거예요?”

안색이 검푸르게 변한 상강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심묘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늙은이가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하는데도 오히려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진국에 오래 있었기에 명제의 어떤 사람과 마주해도 고향 사람이니 반가웠다.

“도사의 깨우침, 고맙네. 그러나 난 이 길을 반드시 가야 하네. 내 자식들이 이 길 끝에 있으니 난 가야만 해.”

늙은이는 깊게 탄식하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우연히 만났으나 당신에게 인연을 드리겠습니다.”

늙은이는 소매를 더듬어 붉은 끈을 꺼내 심묘에게 건네려 했으나 모경이 막아섰다. 할 수 없이 그가 붉은 끈을 모경에게 건넸다. 이리저리 봐도 이상한 점은 없자 모경은 심묘에게 끈을 넘겼다.

“이 붉은 끈은 빈도가 부인에게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것입니다. 부인이 허리에 매고 있으면, 인연을 이룰 수 있을 겝니다. 부인, 기억하세요. 하늘의 뜻은 기이하고 변화가 많습니다. 일의 성공 여부는 노력에 달렸습니다. 빈도는 운명을 볼 수 있으나 바꿀 수는 없습니다. 부인을 위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빈도가 아닙니다. 하늘은 생명을 아끼는 덕목을 지니고 있지요. 재난이 있으면 연분이 있으니, 이 붉은 끈은 언젠가 부인이 풀어야 합니다.”

정중히 말한 그는 웃으며 몸을 돌려 큰 걸음으로 떠났다.

“마마, 절대 마음에 두지 마세요. 행색도 괴상하더니, 정신이 똑바르지 않나 봐요.”

불길한 예언을 들은 상강과 백로는 불만스러웠다. 백로는 늙은이를 욕하며 나쁜 기운을 쫓았다.

“그 물건도 만지지 마세요. 불길해요.”

백로의 말에 상강도 얼른 맞장구쳤다. 그러나 심묘는 붉은 끈이 매우 귀여웠다. 이유 없이 좋아서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에 끈을 묶은 후 미소 지었다.

“인연이라 말하지 않더냐?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이니 착용할 것이다. 거짓이라도 지장 없을 테고, 효과가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느냐?”

심묘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상강과 백로는 더 뭐라고 하기 어려웠다.

모경은 마차 대열을 출발시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괴상한 늙은이는 분명히 같은 방향으로 향했건만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사람 발자국을 덮는 법이지만,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으니 몹시 괴이한 일이었다.

* * *

명제로 돌아온 심묘에게 ‘고진감래’는 찾아오지 않았다. 인간 세상은 늘 변했다. 국세도 변하며, 사람의 마음도 변하기 마련이었다. 명제에서의 생활은 황후라는 허울 좋은 지위를 회복한 것 말고는 진국에서의 생활과 다른 점이 없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진국에서 치욕당하던 날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진국에서 겪은 치욕은 표면적이었지만 명제에서는 암암리 보이지 않는 피해를 겪었다. 누구에게 말한다 해도 스스로 웃음거리만 될 일들이었다.

심묘는 곤녕궁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 시든 홍수초를 보는 그녀의 표정에서 활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홍수초는 모경이 구해온 것으로 매우 얻기 힘든 영초였다. 예쁘게 생긴 풀은 바람에 펄럭이는 붉은 소매 같다고 ‘홍수초’라고 불리었다. 최근 홍수초가 시들었지만 심묘는 풀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명제로 돌아오고 요 몇년 동안 자신의 생활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진국에 간 사이 궁에 들어온 미 부인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총명했다.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매력으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겨 모두 자기에게 푹 빠지게 만들었다. 자신이 어려서부터 사모한 남자의 마음도, 그녀가 가져갔다.

부수의가 총애를 가득 담은 시선으로 다른 여인을 보는 광경은 몇 번을 보아도 적응할 수 없었다. 늘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차갑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의 총애를 받을 수 있는 여인이 자신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있던 딱지가 떨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딱지가 지는 나날이 계속되자 고통에 점점 둔해졌다. 아픔도 점점 원망과 불만으로 변했다. 미 부인보다도 그녀의 아들 부성 때문이었다. 부성은 부수의의 총애를 늘 넘치게 받았다. 반면 부명은 정당한 태자이자 덕과 재능을 겸비했고, 하루도 게으르게 보내지 않는데도 부수의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부수의는 직접 부성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와 정치를 논했으나, 부명에게는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부명은 평범한 황자가 아니라 태자이니 누구보다 성숙하고 진중해야 한다며, 부황에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나 심묘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부명의 실망한 눈빛을 볼 때마다 극도로 마음이 아팠다.

심부의 상황 역시 별로 좋지 않았다. 심구와 형초초 역시 잘 지내지 못했고 심신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심가의 명성은 갈수록 나빠졌다. 부수의가 심가를 억누르기 위해 여러모로 손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도 그의 의도를 파악했지만, 후궁에서는 조정의 일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조정 일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랑과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수의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와 자신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와 부수의의 관계에 비할 수는 없었다.

부수의를 향한 마음은 점차 얼어붙었다. 여러 해 차가운 눈초리 받고 미 부인에게까지 경시당하니 그를 사모하려 해도 사모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황후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은 오직 부명과 완유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 부인은 부수의를 부추겨 흉노와의 화친을 구실로 완유를 희생시켰다. 그녀의 수완은 점점 더 고명해졌다. 부수의가 부성을 편애함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심가는 점점 쇠약해졌고 미 부인의 편을 드는 사람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사람들은 여러 어려움을 틈타 자신과 심가에 해를 가하려고 시도하길 멈추질 않았다. 게다가 미 부인의 동생 이각이 부수의를 대신해 큰일을 처리하자 미 부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심묘 자신도 조정 대신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태자와 황후를 갈아치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인 자신을 폐위하고 미 부인을 황후로 삼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수의는 체면을 중요시하니 더더욱 행동에 옮기길 망설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미 부인과 다투는 사이, 몸과 마음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오죽하면 황궁에 불을 질러 깨끗이 태우고 싶었다. 그러나 부명이 있기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수심에 잠겨 있을 때 백로가 들어왔다.

“마마, 연회 의복이 준비되었습니다. 머리를 빗으시지요.”

심묘가 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강은 1년 전, 미 부인의 수완에 당해 죽었다. 그녀는 심묘 곁의 시녀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심묘의 곁에는 백로만 남아 있었다.

* * *

오늘밤의 연회는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부수의가 신하에게 상을 내리는 연회였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임안후부 소후야 사경행이었다. 임안후 사정이 북부 변경에서 전사하자 이번에는 그의 아들이 출정하기로 했다. 사실 시기는 좋지 않았지만 사경행은 군말 없이 수령 인장을 받아들였다.

심묘와 사경행은 접점이 없었다. 심가와 사가는 미묘한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임안후 사정이 전사한 뒤부터는 사경행이 임안후부를 지탱한다는 얘기는 심묘도 건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남쪽에는 사가, 북쪽에는 심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심가는 하루하루 쇠락하고 있었다. 사가 역시 쇠락의 길로 접어들은 듯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가야 할 길이 있었다.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연회장은 떠들썩했다. 부수의 얼굴의 한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쁨이 대신하고 있었다. 냉혹한 그가 이 정도로 즐거워하는 일은 드물었다. 심묘는 부성이 그에게 술을 올리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서늘해졌다.

부명은 심묘의 곁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완유도 공주의 품격에 걸맞게 차분히 앉아 있었다. 신하들은 태자와 공주가 어린 나이에도 대인의 품격이 있으며 이렇게 장중한 기질은 쉽게 기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칭찬했다. 예의상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대로 애교를 부리고 장난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일찍 철들 리 없었다. 어른스러운 언행을 갖추게 된 데는 속사정이 있었고, 그 속사정에는 수많은 핍박이 자리했다.

완유와 부명은 부성처럼 부수의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부수의는 그들을 생판 남처럼 홀대했다. 그의 냉대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어른스럽게 변했다. 심묘는 다시 부수의를 바라보았다. 그는 수시로 미 부인과 시선을 교환했고, 그녀와 웃으며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몹시 정이 깊어 보였다. 부수의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기뻐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다가 심묘는 고개를 돌렸다. 술자리 왼편에 있는 사경행에게 시선이 닿았다. 그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어두운 자주색 장포를 입은 그는 수려하고 늠름했다. 그러나 입꼬리를 올린 채 천천히 술을 마시는 모습은 떠들썩한 연회와 어울리지 않았다.

심묘는 속으로 실소했다. 임안후부 소후야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느껴졌다. 두 사람은 떠들썩한 자리에 있지만 사실 전혀 기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경행은 생사를 짐작할 수 없는 핏빛 길을 가야 했고, 자신은 일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무작정 걸어야 했다. 사면초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심묘도 잔을 들어 한 모금, 한 모금 자제하며 술을 마셨다. 황후는 늘 단정하고 정숙해야 했다. 총애받는 비처럼 아름답게 술을 마셔 사람을 홀리면 안 되었다.

연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심묘는 미 부인이 부수의에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폐하, 오늘밤 신첩이 좋은 술을 준비했답니다. 신첩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시지요. 부성도 폐하와 바둑을 겨루고 싶답니다.”

부수의가 크게 웃더니 미 부인의 코를 살짝 잡았다.

“부성은 항상 남을 이기려 들지. 정말 너와 닮았구나!”

심묘는 ‘태자와 완유도 1년 내내 폐하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라는 말을 삼켰다. 두 아이의 눈 속 울적한 기색에 마음이 아팠지만, 아픔을 참고 담담한 얼굴로 궁에 돌아갔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잠들 수 없었다. 두 아이 역시 새해가 다가와도 그다지 즐겁지 않아 했다. 심묘는 두 아이를 겨우 달래 잠재웠다. 그때 담 너머에서 폭죽 소리가 들렸다. 깊은 밤, 미 부인의 궁에서 솟아오른 불꽃은 아름다웠다. 세 사람은 매우 즐거울 것이었다.

옷을 걸친 심묘는 백로에게 술상을 차리게 한 후, 매우 외진 곳에 자리해 오가는 사람이 적은 화원으로 걸어갔다. 화원 모퉁이에서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 불꽃은 반만 보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아주 화려했다. 하늘을 밝게 비추니 제대로 보는 불꽃은 장관일 터였다. 심묘가 술잔을 들었다. 백로가 마음 아파하며 뭐라고 위로할 기세이기에 심묘는 손을 저어 아무 말도 못 하게 했다.

“저 불꽃은 참 아름답네. 언젠가 완전한 불꽃을 볼 수 있을까?”

심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취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안 되겠지.”

그때, 신발 소리가 들렸다. 신발이 쌓인 눈을 밟아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백로가 놀라 작게 외쳤다.

“당신들……!”

누군가 나무 사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호위처럼 보이는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체격이 컸으며, 자주색 장포를 입고 청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도화 눈은 밤중 불꽃 아래 한층 매력적으로 보였다.

“임안후부…… 소후야?”

심묘가 실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사경행은 의외라는 듯 쯧쯧 혀를 찼다.

“황후마마께서는 술고래시군.”

뒤에 있던 호위가 그에게 알렸다.

“주인님, 떠나야 합니다.”

백로는 긴장했다. 사경행이 왜 아직 궁 안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황후이고 그는 신하였다. 만일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군가 보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근래 심묘의 궁중 생활은 나날이 어려워졌다. 구실이 잡히면 사람들은 전후 사정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녀를 몰아세울 것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약점을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백로가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황후마마께서 취하셔서 곧 돌아갈 예정입니다. 소후야께서는 못 본 척해주십시오.”

사경행이 심묘를 힐끗 보고 웃었다. 그는 흥미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잠깐!”

심묘가 그를 불러세웠다. 백로는 당황스러웠다. 심묘의 입을 가리지 못하는 게 애석했다. 진국에서 돌아온 뒤, 심묘는 지금처럼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술 한 잔에 천 가지 근심을 푼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람은 취했을 때 홀가분해지기에 평소 못 하던 일을 하곤 했다.

“그대가 북부 변경으로 간다고?”

사경행이 팔짱을 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황후마마, 무슨 분부하실 일이 있나이까?”

철의와 백로가 심묘를 주시했다. 심묘가 웃더니, 자신이 마시던 잔을 들어 술을 가득 따랐다.

“소년 영웅, 천고(千古, 아주 드묾)의 인물이로다. 뛰어난 재주, 빼어난 외모를 갖췄으니 세상에 둘도 없구나!”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백로는 당장에 심묘를 끌고 갈 수 없어서 한스러웠다. 만취해서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칭찬하다니 예의에 맞지 않은 일이었다.

“북부 변경은 지내기 좋지 않은 곳이네.”

심묘가 다가서서 사경행의 어깨를 토닥였다. 심묘는 키가 작기에 그의 어깨를 토닥일 때 발돋움을 해야 했다. 심묘는 그를 바라보며 취기에 진담을 담아 걱정했다.

“아버지는 그곳이 작은 풀조차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라고, 독사와 벌레만 많다고 하셨다. 지세가 기괴하니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도 하셨지. 그대가 가면 위험이 많을 것이다.”

“마마의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사경행이 예의상 감사를 표했다.

“천년 역사책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치욕이니, 일편단심으로 천자에게 보답하거라.”

심묘가 술잔을 높이 들어 단숨에 마셨다. 백로와 철의가 놀랐다. 백로는 그녀가 남 앞에서 이렇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하지 못해 놀랐고, 철의는 호방한 황후에 놀랐다. 심묘가 입을 문지르곤 작게 트림했다.

“네게 주는 술이니 반드시 개선장군으로 당당히 돌아와야 한다.”

사경행은 심묘를 주시했다. 그녀의 입가는 여전히 술로 젖어 있었다. 술에 입가가 반짝이자 보기 좋았다. 달빛 아래,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수려함이 있었다. 황후의 속박을 벗으면 사실 매우 수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얼굴에 짓궂은 기운이 드러났다.

“폐하께서 마마를 냉대하시나 봅니다.”

백로는 눈을 크게 떴다. 사경행의 말은 무엄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노한 심묘가 큰소리를 내 다른 사람에게 이 상황이 발각될까 봐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감히 심묘를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심묘는 말없이 비틀거리며 술 단지를 껴안았다. 그녀는 술잔을 채워 사경행에게 건넸다.

“그대도 마셔라.”

“제가 왜 마셔야 합니까?”

사경행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대와 나는 동병상련이다.”

“누가 마마와 동병상련이라는 건지요?”

사경행은 심묘가 가소로웠다. 심묘는 술잔을 들고 사경행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백로는 대경실색했다. 지금 이 모습은 부적절했다. 철의도 매우 놀랐으나 사경행이 가만히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었다. 사경행의 입속으로 술이 들어왔다. 그가 심묘를 밀어내자 술이 후두둑 옷으로 떨어졌다. 심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너와 나는 정이 있으니 네가 개선하여 돌아오면 나와 함께 불꽃놀이를 보자꾸나.”

사경행은 오늘 일을 결코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당혹스러움을 입에 담기도 싫었다. 주사를 부리는 사람은 이성이 없다더니, 평소 단정하고 예의 바른 황후도 술에 취하자 다른 사람 같았다. 사경행은 옷에 묻은 술을 털어내며 차갑게 뱉었다.

“황후마마는 폐하를 찾아가 보시지요.”

심묘는 울적해하며 한탄했다.

“나는 지금까지 폐하와 함께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다.”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나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순간 그는 마음이 조금 여려졌다.

“좋습니다. 소신이 승낙하지요.”

심묘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럼 그러겠다는 말인가?”

사경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로만 하면 안 되지. 증표가 있어야지.”

심묘는 머리 위 비녀를 더듬었다. 백로는 당황스러웠다. 황후의 물건이 사경행에게 있다면 사통했다는 증좌가 될 수 있었다. 말려야 할 텐데, 지금 심묘는 제정신이 아니라 말린다고 들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백로의 눈에 심묘의 허리에 있는 붉은 끈이 들어왔다.

“마마, 그 붉은 끈이 딱 좋겠어요.”

심묘의 시선이 붉은 끈에 닿았다. 그녀는 끈을 풀어 사경행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사경행의 시선의 심묘의 긴 속눈썹에 머물렀다. 겨울 한기에 굳었던 몸이 스르르 녹는 것처럼 이유 없이 마음이 간지러웠다. 붉은 끈을 잘 묶은 심묘가 그를 향해 웃었다.

“이것이 네게 주는 증표다. 그럼 난 이제 네가 개선하기만을 기다리겠다.”

사경행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황후마마의 하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소신은 증표를 황후마마께 드릴 수 없으니 황후마마의 소원을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소원?”

심묘가 그를 보았다.

“개선해 다시 만나면, 소신이 마마의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마마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속한 게다! 두말하지 말거라!”

그때,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하늘 구석에 번쩍이는 불꽃이 일었다. 두 사람은 함께 불꽃을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서로의 마음이 통한 듯한,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백로도 멍해졌다. 불꽃은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으나 이 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침상에서 일어난 심묘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이마를 짚으며 일어난 심묘는 탁자로 걸어갔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잔 게냐?”

백로가 그녀에게 뜨거운 탕을 건넸다.

“마마, 어제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술에서 깨시는 게 먼저입니다.”

심묘가 멈칫했다.

“많이 마셨느냐? 연회에서는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

백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연회에 나온 술의 도수가 높았나 봅니다.”

심묘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일은 여러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취할 정도로 마시지 않는데.”

백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자기 허리춤을 본 심묘가 물었다.

“붉은 끈은 왜 안 보이느냐?”

백로는 심묘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중간에…… 떨어뜨리셨나 봅니다.”

심묘는 탄식했다.

“역시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태양이 뜨거울 때, 출정 준비를 마친 군대가 성문에 대기했다. 사경행은 위풍당당한 군마 사이 나른하고 담담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이 차가워서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주인님, 모두 준비됐습니다.”

철의의 말에 사경행이 뒤를 돌아보았다. 성문을 나선 후 할 일은 의도와 상반되는 일이었다. 과거는 단호하게 끊어내고 다시는 연관되지 않을 터였다. 결국은 떠나야 했다.

“이곳에 미련 둘만 한 건 없네. 자네와 아무 관련도 없지.”

사경행 곁에 선 고양이 부채를 흔들었다.

“3형은 돌아오지 않겠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계우서는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확신할 수 없다.”

고양과 계우서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손목을 향했다. 손목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그 끈은 단정하고 세심하게 묶여 있었다. 매듭이 견고해서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끈을 본 계우서가 물었다.

“그건 여인들이 착용하는 거 아니야? 형이 그건 뭐하러 맸어?”

“누군가와 송별주를 마셨어. 소원 하나도 빚졌지. 돌아와서 갚아야 해.”

사경행은 시선을 거두고 말채찍을 높이 들었다.

“출발!”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해가 뜨고 지는 건 예전과 같았다. 꽃도 여러 번 피고 여러 번 졌다. 달조차 차면 기울어지는데, 인간 세상이 변하는 것은 더욱 당연했다. 심가는 더욱더 쇠락했고, 심묘는 더욱더 냉대받았다. 심묘는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그럴수록 더욱 늘그막에 최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노부인처럼 보였을 뿐이다.

완유는 화친 가는 도중 병사했다. 심묘는 좌절했다. 여전히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눈 속에 침울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녀의 두 눈은 부명을 볼 때만 미약하게 빛났다. 오직 그때만 잿더미 속 잔열이 다시금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국사, 황후마마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궁중 아름다운 여인이 웃음 띤 얼굴로 청색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배랑은 여인을 마주했다. 그녀는 어두운 밤 어둠에 숨어 돌아다니는 고양이처럼 영리하고 아름다웠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항상 이익을 우선시하던 부수의가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손쉽게 남자의 마음을 쥘 수 있었다.

또 권력자로서도 수완이 매우 뛰어났다. 잠시 고개를 숙여 앞날의 도약을 도모하는 데 능할 뿐만이 아니었다. 나서서 명분을 언급하거나 보물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먼저 그녀에게 주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서도 쉽게 빼앗았다. 사람들끼리는 싸우게 만들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황제의 마음에 기대 원하는 물건을 반드시 손에 쥐었다. 꽃같이 예쁘고 귀여워 보였으나 이면에는 뱀 같은 마음씨가 존재했다. 겨우 열 몇 살인 어린 공주까지 저승길로 내몬 여인이었다.

이쪽에 비하면 심묘의 잔인함은 새 발의 피였다. 충성스러운 장군 가문 출신은 아무리 모질게 행동해도 그 속에 인자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인자함 때문에 상대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미 부인이 멍하니 넋을 잃은 배랑을 불렀다.

“국사?”

정신을 차린 배랑이 물었다.

“귀비마마, 황후마마의 피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무엇을 할 건지는 그대가 알 필요 없습니다.”

미 부인의 웃는 얼굴은 꽃 같았다. 귀비에 올랐어도 여전히 최초의 품계인 ‘미 부인’을 사용하는 그녀는 너무나 교태롭고 매력적이어서 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품고 있다는 걸 잊게 했다. 미 부인이 창밖 두 나무 사이에 낀 등나무의 잎사귀를 가리키며 웃었다.

“지금 황후마마가 어떤 처지인지 국사도 분명히 알 거예요. 이 등나무는 잎사귀가 나는 시기에 두 나무 사이에서 자라지요. 등나무는 점점 자라며 기어오를 곳을 찾습니다.”

미 부인은 방긋 웃으며 배랑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선택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에요. 하지만 왼편 나무, 오른편 나무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지요. 이 두 나무는 같은 곳에 있기에 한 토지를 쟁탈해야 합니다. 토지는 많지 않으니 나무 하나는 반드시 잘려나갈 거예요. 이 등나무는 잘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기어오른 나무가 잘리면 함께 뿌리뽑힐 테니까요.”

배랑은 잠시 두 나무를 바라보았다.

“국사, 그대는 등나무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 부인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미 부인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배랑이 떠나자 궁녀가 뒤에서 걸어 나왔다. 미 부인에게 차를 따르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마마, 국사가 정말 황후마마의 피를 가져올까요? 국사와 황후마마는 아직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요.”

궁녀의 말처럼 배랑은 미 부인과 지낸 시간보다 심묘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미 부인이 미소 지었다.

“국사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으면 완유 공주의 화친 때 수수방관하지 않았겠지. 게다가 국사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있어. 그자처럼 ‘청렴한’ 사람은 한 점의 오류도 허락하지 않아. 당연히 화근을 없애려 하겠지. 난 국사를 도와주는 거라고.”

궁녀는 미 부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비위를 맞추려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의 운명을 마마가 가지실 수 있다는 중의 말은 사실일까요?”

궁녀가 다른 얘기를 묻자 미 부인의 눈 속에 원망의 기색이 스쳤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육궁의 주인은 나야. 황후의 운명을 내가 가질 수 있다면 부성도 안정적으로 명제 강산을 이어받을 테니, 나도 자비를 크게 베풀어야지. 그들 모자에게 노잣돈을 태워줄 거야.”

궁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심묘의 병세는 쉬이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부명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 심가의 상황을 알고 싶어 궁을 나섰다. 그때, 배랑이 보였다. 둘은 서로 인사는 했지만, 심묘의 태도는 아주 쌀쌀맞았다. 완유의 화친혼 때 수수방관한 배랑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며, 심지어 완유는 그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그는 완유의 화친에 반대하지 않았다. 부수의에 대한 미움이 배랑으로 옮겨가 심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배랑이 상자 하나를 꺼내 심묘에게 건넸다.

“황후마마, 병이 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마마의 기침에 좋을 겁니다.”

심묘가 배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눈에 익은 약초가 있었다. 심묘가 약초를 들고 바라보는 순간,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약초의 가시에 찔린 것이다. 백로가 놀라 소리치며 심묘의 손가락을 싸맸다.

배랑은 심묘의 손가락 끝을 주시했다. 멍한 시선이었다.

“이것은 홍수초인데, 기침에 효과가 있습니다.”

심묘는 냉소하며 약초를 상자에 넣어 다시 배랑에게 건네며 차갑게 말했다.

“필요 없다. 이 약초는 내게도 하나 있었으나 시들었지. 내가 키웠을 때 이 약초에 가시는 있지 않았다. 마음이 없는 선물은 받지 않는 게 현명하다지. 받을 수 없으니 가져가시게.”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심묘는 배랑을 다시 보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배랑은 상자를 팽팽히 쥐었다. 그는 복잡한 시선으로 심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심묘는 걷기가 힘에 부치는지 두 걸음 뗐다 잠시 쉰 뒤 다시 걷길 반복했다. 배랑이 상자를 바라보았다. 사람은 늘 선택을 해야 했다. 자신이 막 조정에 들어왔을 때는 청렴하고 깨끗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오점이 없이 깨끗한 사람은 드물었다.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유감스러웠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익과 폐단은 함께했다. 어느 나무가 베이고, 어느 나무가 토지를 독점할지 결과는 뻔했다. 미 부인이 심묘의 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나쁜 사람을 도와 나쁜 일을 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겐 보호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정도 은밀한 바람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배랑은 심묘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켜야 할 도리를 무시하는 사람과는 의논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한배에 탔으니 이제는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선택한 나무와 함께 궁의 깊숙한 곳에서 자랄 것이었다.

* * *

그 큰불은 사흘 내내 타올랐다. 유일하게 냉궁만 완전히 불탔다. 냉궁의 슬픔, 피맺힌 호소, 저주, 깊은 절망은 모두 큰불 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잔해와 제멋대로인 소문뿐이었다.

심 황후가 죽었다.

나라를 배신했다는 죄명으로 심가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형당했다. 태자는 폐서인이 된 후 자결했다. 미 부인이 새 황후가 되고, 부성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다. 폐후인 심 황후는 냉궁에 갇혀 고독하게 지내다 불을 피하지 못하고 타 죽었다. 탄식할 일이었다. 명제 황제는 인자해서 부부간의 정을 생각해 심가가 불충했음에도 황후를 저승에 보내지 않았다. 그녀를 용서하고 냉궁에서 생활하게 했다. 그러나 황후의 운명에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역사는 승리자의 손에 의해 쓰이는 법이다. 후궁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세대가 교체된 후궁은 심묘의 흔적을 깨끗이 지웠다. 심묘는 큰불에 타버렸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심가 대방 중 살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녀의 가족은 모두 죽은 셈이었다.

새로운 황후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성격을 버리고 무섭게 돌변했다. 동생과 한마음 한뜻으로 부수의를 잘 구슬렸다.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자 조정 대신들도 그녀에게 통제당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다고 느낀 대신들이 부수의를 일깨우려고 하면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좌천당하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배랑은 차가운 눈초리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피곤했다. 심묘가 죽은 뒤,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명제의 천지가 뒤집혔다. 미 부인 남매의 수완은 뛰어났다. 곧 명제 강산이 미 부인의 손에 떨어질 것 같았다. 보다 못해 자신도 한 번 부수의를 일깨우려 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 후로는 부수의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마땅한 결과 같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은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다. 훌륭한 황제는 어리석은 황제로 변할 수 있었고, 충신도 다른 마음이 생길 수 있었다. 배랑은 잠을 잘 때마다 한 쌍의 눈의 환영에 놀라며 깨어났다. 흑백 대비가 분명한 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나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심묘의 눈이었다.

배랑은 자신이 선택을 잘했다고 여겼다. 대세에 순응했으니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더는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실은 대세의 흐름에 따르고 싶지 않았다. 심묘가 그렇게 죽기를 원치 않았다. 언제부터 그녀에게 다른 감정이 생긴 건지 자신도 몰랐다. 자신은 그녀의 선생이었을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인은 부수의와 혼인해 정왕부의 주모가 되었다. 부수의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배우며 황후가 되었고, 끝내 폐후가 되었다. 사실 심묘는 아둔했다. 똑똑한 축에는 도저히 넣을 수 없었다. 배우는 속도도 느렸고 고집도 셌다. 그러나 후궁 안에서는 쓸데없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모습은 종종 우습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부수의가 부럽기도 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으나 늘 심묘에게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늘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를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은 감정보다는 이성을 선택했다. 착오를 인정할 수 없었다. 심묘를 향한 기이한 마음을 없애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진국의 인질로 가기를 제의했다. 그러나 5년 후 심묘가 돌아왔을 때도 애석하게도 자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후 차가운 눈으로 심묘가 미 부인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심묘는 점점 어두워지고 말라 시들어갔다. 부수의가 자신에게 심가를 어찌 처리할지 물었을 때 ‘발본색원(拔本塞源, 일의 화근을 철저히 뿌리 뽑음)’을 제시했다. 심가를 없애 자기 마음속 풀을 베고, 뿌리를 뽑길 바랐다.

그러나 부수의가 부명까지 제거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독한 호랑이도 자기 자식은 해치지 않았다는 말이 있건만, 부수의는 혈육에게도 손을 댔다. 완유는 여정 중 의외의 사고를 당했다고 덮을 수 있겠지만, 부명은 그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부명의 부고를 들은 심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크게 뜬 눈에선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 * *

큰불은 사흘 내내 냉궁을 태웠다. 배랑의 후회도 천천히 타올랐다. 배랑은 보타사 주지승을 찾아가 죄업을 없애는 방법을 물었다. 주지인 노승려가 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후회를 되돌릴 약이 있을 리 없었다. 배랑은 노승의 가르침을 원했다.

“시주가 꿈에서 계속 옛 친구를 보는 건 그 친구에게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시주의 꿈에서 사라지지 않는 건 원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다른 세계에 태어날 방법이 없으니 해탈하지 못하는 겁니다.”

놀란 배랑은 해결책이 있는지 물었다. 승려가 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배랑에게 물었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리고 생을 반복할 기회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시주의 생명이 필요하다면 동의하겠습니까?”

“동의합니다.”

배랑의 답변에 승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십시오.”

배랑은 승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돌아가라고 하십니까?”

“시주는 생명을 대가로 치르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라니,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친구의 심원(心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인의 심원대로 되길 기다렸다가 시주가 생명을 바친다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승려가 합장했다.

“소승도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배랑은 승려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심묘의 심원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녀는 고독한 일생을 산 후에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자식이 죽고 가족이 멸문당했다. 그러니 아마 그녀는 원수는 지옥에 떨어지길, 심가는 깨끗한 명성을 회복하기를 원할 터였다. 다시 반복할 기회가 있다니. 그러나 이를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은 계속됐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목숨을 이용해 잘못을 만회하기로.

* * *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기러기가 오고 갔다. 왕조의 명운이 다해갈 때, 쇠락의 기운을 풍기기 마련이었다. 지금의 명제는 이전의 명제가 아니었다. 잡다한 세금과 과중한 부역에 백성들의 삶은 하루하루 피폐해졌다. 황제는 우매했고, 탐관오리로 가득 찬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태자는 종일 사리사욕을 꾀하느라 바쁜 주제에 빨리 새로운 황제가 되지 못해서 한이 맺혔다.

황실이 병권을 회수했지만 부릴 만한 좋은 장수가 없었기에 명제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주변 국가들은 명제를 한입에 물어뜯으려 했다. 진국을 공격해 삼킨 대량이 마침내 명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세력은 쉽게 타도되는 법이었다. 대량은 정경성 성문 아래까지 파죽지세로 쳐들어 왔다. 성문 밖에 군대가 막사를 치고 주둔하니 정경성 전체가 긴장했다. 백성들은 대문을 꽉 닫았다. 망국의 기운이 자욱했다.

커다란 군영 안 막사. 한 남자가 앉아서 장검을 닦고 있었다.

“명제의 명운도 막바질세. 오늘밤 황궁 안을 깨끗이 정리한다고 하네.”

고양이 부채를 흔들며 걸어 들어왔다. 목소리로는 그의 기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명제 황실은 깨끗이 정리할 터였다. 공주를 비롯해 비빈, 궁녀까지 모든 궁중 여인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적의 손에서 치욕을 당하기보다 죽음으로써 기개를 지키자는 셈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녀들이 모두 기개를 지키고 싶을까? 사실 그녀들 중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장검을 닦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졌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심 황후의 시체는 찾았어?”

마침 휘장 문을 열고 들어온 계우서가 답했다.

“물어봤는데 냉궁은 완전히 전소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대.”

고양은 냉소했다.

“부수의가 뒷일을 걱정해 깨끗이 처리했나 보네.”

“심가는 정말 불쌍하다. 그리고 심가가 있었다면 명제가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계우서의 탄식에 사경행이 냉담하게 말했다.

“멸망을 자초한 거지.”

그는 손에 들린 붉은 끈을 한 번 바라보았다. 색은 조금 바랬으나 여전히 견고했다. 무수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 붉은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심묘는 시원하고 높은 목소리로 승리를 기원해주었고, 자신은 고개를 끄덕여 그녀와 약속했다. 그러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몇 년 사이 명제가 빠르게 쇠락해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대량이 공격하지 않았어도 오래가지 못했을 터였다. 심묘의 소원대로 그녀와 불꽃놀이를 함께 보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생에선 기회가 없었다. 사경행이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성을 공격한다.”

* * *

대량의 깃발이 높이 휘날렸다. 6월의 하늘은 변화무쌍했다. 검은 구름이 성을 에워싸고, 광풍이 크게 일었다. 잠시 후 큰비가 내릴 것 같았다. 궁에는 사람이 없었다. 온 들판에 피가 흐르고, 곳곳에 시체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목매어 자결’한 시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도망치다 잡힌 궁중 여인, 대량 군대가 참수한 하인들의 피도 땅을 붉게 물들였다.

배랑은 차를 따르고 있었다.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일어나 향을 풍겼다. 그는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 심묘가 죽은 날도 하늘이 어두컴컴하다가 갑자기 큰비가 쏟아졌다. 대량의 군대가 도착했으니 명제의 명운도 다한 셈이다. 부수의와 미 부인은 곧 죽을 것이다. 심묘의 소원도 이루어질 터였다. 이날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자신이 범한 실수를 마침내 되돌릴 기회였다. 그는 작은 병을 열어 술주전자 안에 부었다. 그리고 술잔을 가득 채웠다.

‘당신의 심원은 곧 이뤄질 거요. 애석하게도…… 당신의 심원을 이뤄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구려.’

* * *

대량의 대군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성루 위, 명제 황제와 황후는 양손을 뒤로 한 채 깃대에 묶여 있었다. 사람은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살길을 없애기도 한다. 평소 미 부인과 부수의가 한 일들이 그러했다. 이번에는 그들이 그 기분을 느낄 차례였다. 명제 대신들은 황제와 황후를 대량에 바치고 항복했다. 이로써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며.

우두머리가 쓰러지면 따르던 자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다. 온 권력을 장악하다시피 했던 미 부인도 지금은 아무 힘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 부성은 그의 최측근이던 사장무와 사장조에게 목이 잘렸다. 그의 목은 대량 장군의 손에 바쳐졌다.

성루 아래 큰 말 위에 앉은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얼굴을 보이면서 그의 전신을 비추었다. 갑옷이 선혈에 물들어 있음에도 그에게서는 여전히 부귀한 기운과 타고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누각 위, 물고기처럼 묶인 부수의와 비교되었다.

“사경행!”

부수의는 이를 갈았다. 임안후부 사 소후야, 사정의 아들, 사장무와 사장조의 이복형! 전쟁터에서 전사한 소년이 이런 모습으로 다시 세상 사람들 앞에 출현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경행이 아니었다. 그는 대량 영락제의 친동생, 귀한 예왕이자 대량의 젊은 장수였다. 소문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묵우군의 수장이었다.

“오랜만이군. 부가의 아들.”

사경행이 그와 인사했다. 영락제를 대신해 전쟁하는 영락제의 친동생이 기개 있고, 호탕한 사람임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영웅이 임안후부 사 소후야라니. 미 부인이 사경행을 팽팽히 주시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자 몹시도 두려웠다. 한평생 남자를 통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으며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멀쩡한 명제가 함락당한 건 모두 부수의의 탓이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가 몹시도 경멸스러웠다. 반면 성 아래 사경행에게서는 타고난 부귀한 기운이 풍겼기에 미 부인은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계우서에게 물었다.

“심묘가 저 여자에게 진 건가?”

계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저 그런 여인인데, 명제 황제 안목이 참 높네.”

두 사람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얘기를 주고받았다. 병사들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동조했다. 그 소리를 들은 미 부인은 부끄러워 뺨이 벌게졌다. 모욕을 당한 부수의는 사경행을 바라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외쳤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치욕을 참을 수 없구나!”

“대장부인 척하는 거 봐. 3형, 빨리 죽고 싶나 봐.”

계우서가 비아냥대자 사경행이 나른하게 웃었다.

“난 널 죽이지 않으려 했다. 직접 손대기 싫었기 때문이지. 그러나 나는 네 황후에게 빚진 것이 하나 있다. 게다가 지금 이 모습은 익숙하지 않으냐? 네가 여러 해 전 내게 하려던 짓과 같은데. 네가 내게 주려던 것을 돌려주마.”

그가 손을 뻗자 고양이 장궁과 은 화살을 넘겨주었다. 곧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미 부인이 화살에 맞았다. 사경행은 일부러 급소를 피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붉디붉은 피가 흘렀다. 미 부인은 고통에 현기증을 느꼈다. 여태 침착한 척 가장하던 부수의의 안색도 결국 변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죽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다.

사경행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가 손을 펼치자 고양이 은 화살 두 대를 건넸다. 두 대의 화살을 장궁에 올린 그가 휘파람을 불자 대량의 수만 대군이 일제히 활을 들고 성루 위 두 사람을 겨눴다. 높은 누각 위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소리를 냈다.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 같았다. 검은 구름이 흩어져 드러난 태양이 대지를 내리쬐어 온통 뜨겁게 달구었다. 사경행이 웃음을 보였다. 그의 미소는 차가웠지만, 미간 사이 소년의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성루 아래에 선 그가 놀라고 두려운 표정의 부수의와 미 부인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미안하구나, 부수의. 여인의 부탁을 받았으니 네 하찮은 목숨을 가져가마!”

수만 개의 화살이 맹렬히 미 부인과 부수의를 향해 돌진했다. 천지를 가릴 것 같았다. 태양빛은 화살비에 가려져 한 줄기도 새어 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죽음의 비가 두 사람을 삼켰다.

* * *

궁중. 남색 도포를 입은 남자는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자는 것 같았다. 순간, 그의 옆 등롱이 기울어져 넘어지면서 불이 발에 붙었다. 천으로 된 발은 잠깐 사이에 불길이 되었다. 불길은 느리게 번져 중화궁을 태우고, 금란전을 태웠다. 황궁은 열렬한 불길에 휩싸였다. 온통 붉은빛이었다.

계우서가 놀라 물었다.

“3형, 사람을 보내 불을 끄게 할까?”

“괜찮아.”

사경행이 저지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명제 황궁은 불결하니 태우는 것도 괜찮지. 대낮의 연기와 불이라. 약속을 그런대로 지키겠군.”

“무슨 뜻이야?”

계우서는 사경행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경행은 잠자코 붉게 물든 황궁의 모서리만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 아래 고독하게 술을 마시는 여인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가 읊조렸다.

“명제는 네게 빚을 졌지. 내가 네 대신 명제를 멸망시켰다. 네 심원이 이루어졌구나.”

그때 단단히 묶여 몇 년간 떨어지지 않던 붉은 끈이 갑자기 끊어졌다. 사경행은 돌아서서 나갔다. 떨어진 끈은 남은 불길 안에서 잿더미로 변했다. 그리고 잿더미 속 여인의 긴 탄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재난이었으며, 알고 보니 인연이었다.

눈으로 본 것은 진짜가 아닐 수 있었다. 귓가에 들린 것도 진짜가 아닐 수 있었다. 두 번의 생에서 사경행은 높은 곳에 서서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냉소적이지만 진실한 사람이었다. 온 마음을 다해 계략을 꾸미지만 의리를 중시했다. 한잔 술 때문에 많은 군마를 끌고 왔다.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을 위해 “미안하구나, 부수의. 여인에게 부탁을 받았으니 네 하찮은 목숨은 가져가마!”라고 통보했다. 그의 삶은 무겁지만 자연스럽고 품위 있었다. 가장 어두웠으며 가장 진실했다. 비열함 속에서 계속된 투쟁은 인간 세상을 업신여기며 차가운 눈빛을 띠게 했지만, 그는 끝내 작은 빛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심원은 그만이 풀 수 있었다.

고양이 부채를 접었다.

“비 오네. 여름 날씨는 정말 알 수가 없어.”

사경행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성으로 들어간다.”

“뭘 하려고?”

“황권을 전복해야지.”

* * *

심묘는 긴 꿈을 꿨다. 꿈은 아주 길고 길었다. 마치 한 생을 산 것 같았다. 스스로 관객이 되어 자신이 옹알옹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 때부터 성장하는 모습을 모두 보았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어린 아가씨, 얌전하고 풋풋한 소녀, 꽃다운 나이가 된 부인, 존엄한 육궁의 주인. 큰불에 휩싸인 냉궁에서 잿더미가 된 폐후의 모습까지도 전부 보았다.

꿈속에서 어린 자신이 부수의를 사랑해 심신에게 시집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걸 보며 우둔한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곳에서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눈을 뻔히 뜨고 모든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겪은 일들을 바라보니 하나하나 참담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재차 경험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자신의 소녀 시절은 부수의에게 시집가면서 끝나버렸다. 소녀일 적에는 사람들에게 우둔한 머저리라고 불릴지언정 근심 없고 매일 자유로우며 즐거웠다. 그러나 정왕비가 되고 나서부터 외부의 핍박을 받으며 암투극에 말려들었다.

자신의 아들과 딸도 재난을 피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심가 대방은 점차 쇠락했다. 봄날 예쁘게 피어났던 꽃은 여름이 오면 시들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떨어진 꽃은 더욱 썰렁하고 초라했다.

꿈의 마지막에는 사경행이 나타났다. 그는 짓궂은 소년이 아니었으며, 전쟁터에서 죽은 소년 영웅도 아니었다. 후세처럼 거만했다. 말을 탄 채 장궁을 들고 몇 마디를 나눈 사이 나라 하나를 멸망시켰다. 그는 맑고 환한 달빛 아래 자신이 건넨 술을 마셨었다. 그는 명제를 끝낸 날,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한 심원을 대신 실현해주며 유감스러워했다.

사경행의 곁에서 심묘는 대낮의 연기와 불을 보았다. 그는 그날 밤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사이이지만, 자신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심원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다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전생의 연분은 너무 짧았다. 아름다운 연분은 운명의 희롱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애석했지만 지금, 그 짧은 연분은 이어지고 있었다. 많은 의문이 깨끗이 사라졌다. 해답도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1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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