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13권
62장
심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색 휘장이 보였다. 휘장 끝에는 향주머니가 걸려 있었는데, 씁쓸한 약 냄새를 희석하기 위해 걸어둔 것 같았다. 향기와 약 냄새가 뒤섞여 묘한 향이 났다. 심묘는 옆을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가 침상 머리맡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턱에는 희미하게 푸른 수염이 나 있었다. 평소 단정하고 화려한 모습과 달랐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손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자신의 손을 다 덮은 그의 긴 손가락은 따뜻했다. 멍하니 바라보던 심묘가 조금 움직이자 사경행도 곧 일어났다. 눈을 뜬 심묘를 본 사경행이 멍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깨어났구나!”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경행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살폈다.
“불편한 곳 없어? 고양더러 들어와 진찰해보랄까?”
그는 평소 권태롭고 냉담한 사람이라 어떠한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 행동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답지 않게 초조함을 드러냈다.
“난 괜찮아요. 배 선생은 어때요?”
심묘의 물음에 사경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심묘는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배랑을 미워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배랑이 미웠다. 그가 전생에 자신의 피를 미 부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미 부인의 ‘운명 바꾸기’가 진실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을 도운 셈이었다. 게다가 부수의에게 ‘발본색원’이라는 말을 해 부명을 죽음으로 몰았다.
배랑에 대한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부명을 생각하면 결코 배랑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스스로 목숨을 내놓아 자신에게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주기도 했다.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순수하게 감사하거나 순수하게 증오할 수 없는 사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관계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점.
배랑과 다시 ‘빚지고 빚을 갚는’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일은 전생 일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에게 다시 무언가 빚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게 빚을 돌려받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가 달려들 때 배랑이 자신 대신 칼을 맞은 걸 기억했다. 만일 그가 죽으면 두 번의 생 모두 연루되니 깨끗이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사경행의 표정을 본 심묘는 그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런 일에 화를 낼 때의 사경행은 꼭 나수가 나가군에서 키우는 늑대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사경행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배 선생이 내 목숨을 구했으니, 생명의 은인이에요. 이유 없이 목숨을 빚졌으니 이런 은혜는 감당할 수 없어요.”
그제야 사경행의 안색이 조금 풀렸다.
“고양이 진찰했는데 어젯밤 한 번 깨어났어. 명줄이 긴 셈이지.”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네가 깨어나지 않았어. 네가 계속 일어나지 않으면 난 그 도사를 벨 생각이었어.”
심묘는 멍해졌다.
“도사? 당신, 적염 도장을 말하는 거예요?”
사경행이 경시의 눈빛을 띠었다.
“도장인지 뭔지, 떠돌이 사기꾼이야.”
‘적염 도장’은 오늘 아침 예왕부를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 대청 안에 있는 매우 좋은 골동품을 사례로 받아가겠다고 말하며 가져갔다. 도사라는 작자가 종일 금은을 찾으니, 어느 곳의 고인인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적염이 꽃병을 가져갔다는 말을 듣고 의심했다. 긴 꿈을 통해 의혹은 적지 않게 풀렸으나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꿈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전생의 일 같았다.
적염 역시 인연이었다. 진국에서 명제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그를 만났다. 당시에는 기근으로 고향을 떠난 유랑민이 밥벌이를 위해 도사 분장을 한 거라고 여겼고, 부친의 너그러운 마음을 떠올리며 그에게 물을 건넸을 뿐이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일이 연루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만일 전생에서 적염의 말을 듣고 정경성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그 후의 처참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 길이 돌아올 수 없는 황천길임을 알아도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 그 깊은 궁에 있으니 혼자 살아남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심묘는 아주 분명히 기억했다. 꿈속에서 자신의 시체는 부수의의 명령으로 큰불 속에서 잿더미가 되었다. 무엇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원한은 너무 커서 사라질 수 없었다. 게다가 미 부인은 묘한 술수를 써서 자신이 귀신이 되지도 못하게, 환생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자신이 남긴 모든 것은 태워져서 사경행의 붉은 끈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영혼 역시 진작 세상에서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그 붉은 끈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환생할 수 없는 나날 동안, 자신의 영혼은 사경행의 손목에 매인 붉은 끈에 머물러 있었다. 궁 전체가 까맣게 불탄 그날까지.
자신은 부성이 사가 형제의 손에 죽는 모습을, 미 부인과 부수의가 성루 위에 꽁꽁 묶여 많은 화살에 가슴이 뚫려 죽는 모습도 모두 보았다. 일생 원망한 황궁이 타올라 잿더미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루지 못한 심원 때문에 사라지길 원치 않았던 영혼은 마침내 평온해졌다. 이후 붉은 끈이 끊어지자 풀려났고, 배랑이 자기 목숨을 대가로 내놓아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서 자신은 새 생명을 얻었다.
“왜 그래?”
사경행이 말이 없는 심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을 차린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당시 사경행은 자신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조했다. 취중에 한 농담일 뿐이었는데 그가 정말로 약속을 지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부수의와 미 부인을 없애 대신 복수해주었다. 심묘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경행, 바라는 것이 있나요?”
사경행이 그녀를 한 번 보았다.
“왜? 네가 이뤄주게?”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할게요.”
심묘의 표정은 더없이 정중했다. 사경행이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곧 입꼬리를 일으킨 사경행이 심묘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아. 내 심원은…… 네가 반드시 할 수 있는 거야.”
“뭔데요?”
“내 아이를 낳아줘.”
그가 구름처럼 담백하고 바람처럼 가볍게 말했다. 심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코를 만지며 다시 말하려 할 때, 심묘가 대답했다.
“좋아요.”
사경행은 멍해졌다.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이전과 달리 인내하고 절제하는 단정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듯 정말 즐거운 모습이었다. 사경행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네가 아직 다 안 나았구나.”
심묘가 그의 손을 떼어냈다.
“사경행, 생일에 아주 놀랐겠어요?”
사경행은 심묘의 표정이 평온하고 온화하자 안심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입을 열었다.
“너는 아느냐? 나는…….”
그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모습을 떠올리면 참을 수 없이 두려웠다. 피바다에 빠진 심묘는 전혀 의식이 없어 보였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 누군가에게 심장이 움켜잡힌 듯했다. 사가군을 데리고 북부 변경 전쟁터에 갔다가 흉계에 당해 생사가 위험할 때도 지금처럼 두렵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잃을까 봐 겁나는 사람이 있었다. 약점이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약점은 바로 심묘였다.
“사과할게요. 당신의 생일은 이미 오래 지났을 테니, 오늘 대신 축하하면 어떤가요?”
사경행은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마음으로만 받을게.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고생하지 마.”
“찰과상일 뿐이에요. 우리, 나가요.”
사경행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깨어난 심묘는 확실히 이상했다. 심묘는 노는 데 열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전보다 자신을 친근하게 대했다. 깨어나기 전 그녀는 습관적으로 단정한 모습을 유지했다. 오래 냉전을 벌일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심묘가 이렇게 나서서 기분을 맞춰주다니 아주 의외였다.
“너, 나 몰래 미안한 일을 저지른 거야?”
“그래요.”
심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랑과 관련된 거야?”
사경행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이렇게 이상하게 굴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생각이 어떻게 이리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묘가 물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기쁜 건지 화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경행이 입을 열기 전,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보게.”
고양이었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보러 왔어. 장기는 다치지 않았으니 괜찮을걸세.”
그가 사경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도 나가서 움직이게. 요즘 방에만 있어서 볕을 쬐지 못하지 않았는가. 날씨가 좋으니 늦게 돌아오지만 않으면 되네.”
그는 곧 약상자를 들고 떠났다. 사경행과 심묘는 얼굴을 마주하고 침묵했다. 잠시 후, 사경행이 미소 지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농서성에 와서 제대로 밖을 돌아다닌 적이 없어요. 이곳에 익숙해질 겸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여기 일을 이야기해요.”
심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맞다. 그날, 팔각에게 폭죽을 여러 개 사 오게 했는데, 아직 남아 있을 거예요. 그것도 같이 가져가요.”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벌건 대낮에 무슨 불꽃놀이야?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심묘가 반문했다.
“대낮의 불꽃놀이, 당신은 본 적 없어요?”
“누가 바보같이 대낮에 폭죽을 터트리겠어?”
“난 본 적 있어요.”
사경행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밤보다야 덜할지는 몰라도, 대낮이라고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에요. 당신이 못 봤다니까 내가 같이 봐줄게요.”
심묘가 살짝 웃으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며칠간 침상에 누워 있던 탓에 발을 내딛자마자 다리가 시큰거렸다. 침상에서 내려가자마자 아픔에 숨을 들이마셨다. 사경행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끼고 일어났다.
“내가 도와줄까?”
“도와줄 거예요?”
사경행이 몸을 구부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본 심묘는 그의 생각을 대략 눈치챘다.
“네가 부탁하면 도와주지.”
그는 역시나 자신이 고분고분 부탁하길 원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였다. 어렸을 때도 진중하고 영리해서 어른이 생각하기 어려운 궁리와 계획을 짜내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못된 장난을 좋아하는 소년처럼 사람을 놀리며 즐거워했다. 심묘는 용맹하며 아름다운 사경행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순간, 그녀는 사경행의 뺨에 입을 맞췄다. 사경행은 당황했다. 심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시선을 돌려 침상 맡에 걸린 향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이 눈살을 찌푸리며 심묘를 보았다.
“교교, 네 병이 가볍지 않은 거 같아. 고양더러 다시 봐 달라고 하자.”
사경행이 밖을 나가려 하자 심묘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사경행!”
멈칫한 사경행이 고개를 돌리자 음흉한 표정이 보였다. 속았다고 후회하기도 전에 그가 다가와 자신을 번쩍 들었다. 심묘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크게 웃고 있는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사경행이 그대로 문을 나서자 예왕부 하인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심묘는 전생에 이렇게까지 남자와 친근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일 일은 더더욱 없었다. 미 부인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부수의에게 안긴 채 나타난 적은 없었다. 미 부인과 부수의가 이리했다면 어리석은 군주와 나라를 망치는 미인이라는 화젯거리에서 절대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사경행은 아주 아둔한 군주 같았다. 전생에 단정하고 장중한 황후였던 자신이 이번 생에는 화근이라는 꼬리표를 짊어지는 건가 싶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던 심묘는 하인들이 입을 가리고 웃자 사경행을 꼬집었다.
“뭐 하는 거예요. 빨리 내려줘요!”
“부끄러운 거야?”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한 대 때리고 싶은 얄미운 말투였다.
“방금 누가 대낮에 음란하게 내 정조를 더럽히려…….”
정조를 운운하다니, 심묘는 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때, 나담이 걸어왔다. 평소 대담한 그녀도 두 사람과 마주치자 몹시 당황해했다. 사경행은 결국 심묘를 내려놓았다. 나담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어색해했다. 심묘가 그녀를 바라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요사이 언니도 고생했어.”
“아니야, 아니야.”
나담은 계속 손을 내저었다. 심묘 옆에 있는 사경행이 조금 두려웠다. 심묘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사경행에게 분노를 쏟아낸 후부터 그를 마주하기가 불편했다. 어쨌든 사경행은 지위가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진 대량의 예왕이니, 이전 자신의 행동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만약 자기 때문에 심묘에게 화풀이한다면 책임이 큰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 심묘와 사경행의 친밀한 모습을 보니 그 일 때문에 말다툼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었다.
“맞다, 이거 적염 도장이 떠나기 전에 네게 주라고 한 거야. 깨어나면 보라고 했어.”
나담은 소매 안을 더듬어 물건을 꺼내 심묘에게 건넸다. 작은 나무 상자 위에는 닭과 뱀이 새겨져 있었다.
“웬 닭과 뱀? 왜 그렸는지 모르겠네.”
나담의 말을 심묘가 정정했다.
“이건 봉황과 용이야.”
나담은 말문이 막혔다. 적염의 조각 실력은 정말 빈말로도 칭찬할 수 없었다. 심묘가 아니었다면 조각이 용과 봉황인 것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심묘가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두 개의 붉은 끈이 있었다. 나담이 말했다.
“이건…… 붉은 끈이네. 엄청 귀중하고 특별한 물건인 줄 알았더니, 차라리 약초나 주지. 적염 도장은 정말 인색해. 그 산골짜기 안에 약재도 많더니만 이런 걸 주다니…….”
끈을 바라보는 심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전생에 자신이 적염에게 받은 끈이었다. 그 끈은 자신과 수년간 함께하다 사경행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자신의 영혼은 그 붉은 끈에 머물 수 있었다. 그렇게 사경행과의 인연을 이을 수 있었다. 심묘는 붉은 끈 하나를 손목에 묶었다. 그런 그녀를 본 나담이 놀라 물었다.
“너…… 그걸 하고 다니게?”
심묘는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붉은 끈을 보았다. 그녀는 곧 나머지 하나를 들어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손 내밀어요.”
“난 안 할 거야.”
“손 내밀어요.”
심묘가 강경하게 나오자 사경행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안 해.”
심묘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얘기했다.
“이 끈은 평안을 기리는 거예요. 당신과 내가 함께 착용하면, 당신에게 위험이 생겼을 때 바로 느낄 수 있어요. 내게 위험이 생겼을 때 당신도 느낄 수 있구요.”
나담이 옆에 서서 작게 물었다.
“정말…… 그런 효험이 있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 심묘는 상관없었다. 적염은 능력이 특출난 도사이니 그가 아무 의미도 없는 끈을 주었을 리 없었다. 나담의 말처럼 보기에는 보통의 끈이지만 자신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었다. 금은보다 더욱 기념할 가치가 있는 끈이었다. 사경행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심묘를 막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목에 붉은 끈을 두르고 단단히 매듭지었다.
나담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아하고 부귀한 예왕이 손목에 붉은 끈을 매고 있는 건 멋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붉은 끈은 그다지 값비싸 보이지도 않아서 두 사람의 화려한 복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됐어요.”
사경행은 얼른 소매를 내려 눈에 띄는 붉은색을 가렸다.
“좋아. 물건도 줬고, 두 사람은 할 일이 있는 것 같으니 방해하지 않을게요. 심묘, 좋아 보여서 안심이야.”
심묘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을 한 나담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사경행이 그런 그녀를 이끌었다.
“가자, 불꽃놀이 보러.”
예왕부 하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종양이 철의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분명 다치신 건 마마신데, 주인님도 머리를 다치신 걸까요? 대낮에 불꽃놀이라니.”
철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빗자루를 넘겨줬다.
“바닥이나 청소해.”
* * *
미앙궁.
현덕 황후는 낮은 침상에 기대 책을 보고 있었다. 궁녀의 이야기를 들은 현덕 황후는 책을 내려놓고 안심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괜찮다니 다행이다. 근래 계속 사고가 생겨서 복을 빌러 갈 참이었다.”
심묘의 암살 시도 사건을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나 영락제와 현덕 황후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고양도 방법이 없으니 궁중 태의는 더욱 속수무책이었다. 현덕 황후의 말대로 예왕부에 연이어 사고가 생겼다. 사경행이 깨어나자마자 이번엔 심묘 쪽에 사달이 났다. 그녀가 무사히 깨어났다니 일단은 다행이지만…….
현덕 황후는 다시 책을 볼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창 옆으로 다가갔다. 어젯밤 한바탕 비가 내려 오늘 날씨는 아주 상쾌했다. 어젯밤 광풍이 불었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창문 옆 자두나무를 제외하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듯 나무의 가지와 잎이 온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현덕 황후는 혼잣말했다.
“대량도 평탄치 않구나.”
그녀 말대로 폭풍전야였다. 철옹성 같던 예왕부에도 두 번이나 사고가 생겼다. 그것도 사경행이 명제 조공연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기간 동안에. 영락제가 고가에 손을 쓰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렸으니 분명 경고이거나 반격의 신호였다.
“오늘 정비마마가 폐하를 찾아가셨습니다. 들어갈 때 눈물 바람이었는데 나올 때도 표정이 좋지 않으셨답니다. 정화궁 궁녀들의 말로는 정비마마가 돌아오신 후 몇몇을 처벌하며 물건을 내던졌다고 합니다. 기분이 아주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도 고고는 현덕 황후의 궁녀로 현덕 황후가 황실로 온 후 계속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현덕 황후를 따른 충심 있는 심복이었다. 현덕 황후가 살짝 웃었다.
“고가가 손해를 봤으니 정비를 통해 폐하의 의중을 알아보려는 게지. 며칠 전 고 부인이 입궁하지 않았더냐?”
“폐하께서는 더는 정비마마를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비마마는 며칠간 마마께도 행동을 조심했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정말 고가에 손을 쓰신다면 정비마마는 어떻게 되실지…….”
현덕 황후는 담담히 말했다.
“폐하께서 생각이 있으실 게다. 나는 알 수 없구나. 그러나 궁에 들어온 후부터 이런 이치는 진즉 알고 있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워하는 도 고고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너는 내가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도 고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현덕 황후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난 황후가 된 후 내가 여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황제의 부인은 다른 부인과 다르다. 폐하와 함께 백성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화와 복은 돌고 돌며 생사를 함께하는 것이지. 나는 지금까지 두렵지 않았다. 내가 유감인 것은…….”
현덕 황후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다.”
“당초 정비마마만 아니었다면.”
도 고고는 이를 갈았다. 원망과 불만, 증오가 가득 담겨 있었다. 현덕 황후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으나 오히려 더욱 애달파 보였다.
“됐다. 정비가 없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어쨌든 폐하의 아이를 낳지 못했을 것이다. 너도 알잖느냐. 궁중 여인 중 폐하의 아이를 낳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을 수가 없지. 내게 아이가 없는 것은 분명 유감이지만 궁중 여인 모두 그럴 테니, 나만 유감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내겐 흔들리지 않는 지위가 있으니.”
* * *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 심묘와 사경행은 예왕부로 돌아가는 길 위였다. 대량은 명제보다 민풍이 더욱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서 부부끼리 거리를 다니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사경행은 그 유명한 예왕이니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동안 농서성에는 예왕비와 예왕이 겉으로는 사이좋아 보이나 사실 얼음처럼 차가운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돌아다니니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가 정말 소문과 같았다면 이렇게 친밀하게 지낼 수 없었다.
심묘는 대량에 온 후 처음으로 거리에 나왔다. 이곳이 익숙한 사경행은 잠시 걷다가 물건을 고르길 반복했다. 심묘는 새로운 것을 탐내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담의 영향을 받은 듯 크고 작은 물건을 마차 한 대만큼 구매했다. 두 사람이 앞에서 물건을 고르면 철의와 종양이 뒤에서 금권을 지불했다. 심묘가 여전히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자 사경행은 수시로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심묘는 홀가분했다. 홀가분한 그녀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고 난 뒤 전생의 달갑지 않던 원망과 증오가 전부 풀어진 것 같았다. 당연히 원한은 갚을 테지만, 다시 사는 인생에 복수만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두운 세월 속에도 작게 반짝거린 별빛이 있었고, 그 빛은 자신에게 전생에 나쁜 것만 남은 것은 아니라고 깨우치게 했다.
다시 사는 삶은 더욱 진귀했다. 그러니 이전보다 더욱 용감하고 확고하며 솔직하게 살리라고 다짐했다. 당당하게 감정을 바라보고 새로운 인생을 열렬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농서성과 정경성은 정말 다르군요. 대량의 각 지역은 저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면서요? 언젠가 이름난 산과 강을 찾아 구경하면 좋을 것 같아요.”
심묘는 세상 모든 게 신기한 아이의 눈빛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경행이 웃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말은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워요. 어떤 때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는 학자가 부러워요. 속세 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 또한 큰 행복이지요.”
사경행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심묘의 손을 꽉 잡았다.
“명제와 대량의 일이 매듭지어지길 기다렸다가 네가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자.”
“이건 당신의 심원인가요? 아니면 나의 심원?”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에 사경행은 당황했다. 심묘가 깨어난 뒤 그녀에게 말한 자신의 소원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음흉함을 품은 웃음기가 스쳤다.
“오늘 계속 내 심원을 얘기하는데, 이미 두 달은 지나서 아주…….”
심묘는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얼른 가요. 보고 싶은 게 많거든요.”
뒤에서 따르는 종양의 안색은 부자연스러웠다. 철의의 얼굴도 붉은색이었다. 알콩달콩한 신혼부부 사이에 껴 있는 것만으로 괴로운데, 둘이 이토록 서슴없이 애정행각을 벌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사경행과 심묘의 사이가 좋은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 자신일 때는 또 다른 얘기였다. 차라리 탑뢰를 지키러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달이 점점 높이 떠오르자 거리 위 인적도 드물어졌다. 심묘는 사경행과 온종일 돌아다녔기에 점차 피곤해졌다. 그러나 오늘 심묘는 오랜만에 신바람이 났다. 경칩과 곡우는 예왕부로 돌아온 두 사람의 표정에 여전히 기쁨이 가득한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사경행이 목욕을 하러 가자 심묘도 방으로 돌아갔다. 경칩은 이미 그녀를 위해 뜨거운 물을 준비해두었다.
“마마, 먼저 씻으시지요. 나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게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온종일 외출하셨으니 피곤하실 겁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물은 아주 따뜻해서 물에 들어가 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씻고 나온 그녀가 침상에 눕자 곡우가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마마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잠에 빠져들던 심묘의 정신이 돌아왔다. 사실 자신은 늘 웃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늘 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국세가 어렵거나 불리해도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늘 미소를 띠고 있으면 적은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 터였다. 설령 적을 헷갈리게 할 수 없더라도 구역질 나게 만들 수는 있을 터였다. 어쨌든 적을 상대할 때 어떻게든 쓸모가 있는 수단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자신은 늘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듯하게 가장하는 웃음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 같을 리 없었다.
곡우의 말을 들은 경칩이 심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곡우의 말대로였다. 심묘의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졌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만족감이 가득해 상등의 옥처럼 보였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때 경칩은 심묘의 손목 위 붉은 끈을 발견했다. 나담이 건넨 것임을 모르는 경칩은 그 끈이 의아했다.
“마마, 이 붉은 끈은 새로 사신 건가요? 색다르지만 옷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붉은 끈을 본 곡우는 옛 기억을 꺼냈다.
“보타사에서 이런 붉은 끈을 팔지 않았어? 동전 하나에 부부의 연을 구할 수 있다며 다섯 가닥 끈을 주었는데.”
경칩도 따라 웃었다.
“다섯 개의 부부의 연이 동전 하나라니, 너무 싸다.”
보타사의 일을 떠올린 경칩은 심묘가 붉은 끈을 매고 있으니 의아했다.
“마마는 이런 것을 믿지 않으시는데, 왜 사신 거예요? 게다가 전하께서 이 끈을 보시면 또 불만스러워 하실 겁니다. 부인은 이미 예왕비인데, 또 무슨 연을 원하는 게냐? 하시면서요.”
경칩이 사경행의 불만스러운 표정과 말투를 따라 하자 심묘와 곡우는 웃음이 터졌다. 성정이 활달한 경칩다운 장난이었다. 곡우가 웃으면서도 경칩을 나무랐다.
“짓궂네. 전하를 놀리다니.”
웃던 심묘가 손을 휘둘렀다.
“식사는 전하의 방에 차리거라.”
심묘와 사경행 두 사람은 줄곧 따로 잤기에 사경행은 자기 방에 있었다. 심묘의 말을 들은 경칩은 당황했으나 곧 미소를 지었다.
“마마, 전하와 함께 식사하시려구요?”
경칩과 곡우는 기뻤다. 심묘와 사경행이 매번 따로 잠드니 두 사람은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이번 재난으로 두 사람의 감정이 더욱 깊어진 듯했다. 화가 도리어 복을 부른 셈이었다.
“이 끈은 아주 영험해.”
심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곡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들었으나 무슨 의미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심묘는 집중해서 끈을 보느라 곡우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붉은색을 바라보니 저절로 가벼운 탄식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마음은 아주 홀가분했다.
결국, 이런 날이 왔다. 이해득실을 따지던 이전과 달랐다. 이번에는 자신이 전부 준비했다. 이번 생과 전생은 달랐기 때문에 장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장래를 그에게만 맡겨두지 않을 터였다. 자신은 성장했고, 이제 사모하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서로 보호하고 싶은 것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원수의 일도 해결해야 했다. 간단한 일이었다.
심묘는 경칩에게 수건을 가져오게 했다.
“머리를 감아올려다오.”
사경행이 중의를 걸치고 걸어 나왔다. 그는 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오랫동안 목욕했다. 홀로 있을 때의 얼굴은 나른한 웃음기를 지우고 냉정한 표정이었지만 밤 경치로 인해 그다지 분명히 보이진 않았다. 사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냉소적인 겉모습 아래 세상을 비웃는 냉담함이 생겼을 뿐이었다.
방 정중앙에 정교한 요리와 간식이 차려져 있었다. 사경행이 미간을 찡그렸다.
“철의.”
그는 방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몹시 청결한 성격의 사경행은 잠을 자는 곳인 침실을 어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식사는 반드시 대청에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을 불러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심묘가 술 단지를 껴안은 채 들어왔다. 술 단지가 무거운지 심묘가 비틀거리자 사경행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 술 단지를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뭐 하는 거야?”
“창고를 뒤져서 이 단지를 찾았어요. 십주향이라고 하더군요. 몇 년 묵었을 거래서 가지고 왔어요.”
심묘의 말에 사경행이 멈칫했다. 술 단지를 열어보니 과연 깔끔하고 달콤한 술 향기가 났다.
“대단하네. 십주향을 알다니. 아니, 그런데 당숙이 가만있었어?”
십주향은 아주 좋은 술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는 평생 한 모금 마셔 볼 기회조차 없는 귀한 술이었다. 가격을 떠나서 물량 자체가 없어 거래가 드물었다. 그러니 아무리 은자가 많아도 구하기 어려운 진귀한 술이었다. 예왕부에도 겨우 세 단지뿐이었고 심묘가 꺼내온 술은 개중에서도 무려 50년이나 묵은 것이었다. 당숙이 아까워하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 뻔했다.
“나, 마셔봤어요.”
심묘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마셔봤다고?”
사경행이 의심스럽다는 듯 되물었으나 심묘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전생에 궁중 연회에서 안 마셔본 술이 없었다. 그래서 이 술의 향도 맛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하자면 너무 많은 얘기를 해야 하니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술잔 가져오는 걸 잊었어요.”
심묘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밥을 담는 사발을 힐끗 보더니 두 개의 사발에 십향주를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경행의 시선에 경악이 어렸다.
“심묘, 너 술고래야?”
“난 당신과 식사하러 온 거예요. 음식이 있는데 술이 빠지면 안 되죠.”
사경행은 팔짱을 끼고 심묘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전 일이 떠올랐다.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잊을 뻔했네. 벽소루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술을 마셨지……. 심교교, 너 앞으로 조심해.”
벽소루에서 술을 마시는 심묘는 한층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우아하고 호방해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남자들의 시선도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자신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겨우 견뎠다. 바로 심묘를 안고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얼마나 억눌렀는지 몰랐다.
“앞으로 밖에서 술 마시지 마. 내 앞에서만 마셔. 아무리 내가 같이 있다고 해도 너무 많이는 마시지 말고. 더욱이 다른 사람 앞에서……. 심교교, 내 말 듣고 있어?”
사경행이 으름장을 놓는 척하며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이미 심묘는 듣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십주향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술 향은 달콤하고 맑았으나 목구멍으로 들어가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얼얼했다. 끝맛이 후끈하고 시원해서 심묘가 찬탄했다.
“역시 십주향이야.”
사경행은 어이가 없었다.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심묘가 사경행을 한 번 바라보았다.
“당신은 안 마셔요?”
심묘는 또다시 술 사발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오늘 곤드레만드레 취할 작정으로 온 건 아니겠지? 십주향은 그렇게 마시는 술이 아니야. 지금 넌 소가 모란꽃을 먹는 꼴이라고.”
“지금까지 내게 감히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어요.”
심묘가 사경행에게 눈을 흘기자 사경행은 말문이 막혔다. 심묘는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심가 대방이 정경성을 떠나고, 자신이 북부 변경으로 가던 날 처음으로 심묘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 심묘 안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가 술만 마시면 그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소 그 누구보다 신중하던 사람이 취하면 주사가 대단했다. 이성을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도 저질렀다. 심묘가 지닌 장군 가문의 씩씩한 기개, 아니 막무가내 기질은 술에 취해야만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십주향은 깔끔하고 진해서 뒷심이 강한 술이다. 취하고 나서야 얼마나 독한 술인지 알게 된다. 사경행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심묘가 그에게 술을 채운 사발을 건네주었다.
“당신도 얼른 마셔요.”
사경행은 내키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심묘가 고집스럽게 손을 내밀자 사경행은 자리에 앉아 술을 받았다. 심묘는 사경행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음미하며 술을 마시는 사경행은 과연 품위 있어 보였다. 자신을 보고 소가 모란을 씹는 모양새라며 놀란 만도 했다. 한동안 그 모습을 감상하던 심묘는 다시 사발을 들고 고개를 들어 마셨다. 사경행이 몇 모금 더 마셨을 때, 심묘는 다 마신 사발을 엎어둔 채 입을 닦았다. 심신이 병사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 같았다.
“다 마신 거야?”
심묘는 두 번 작게 기침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사경행은 심묘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사발 안에 호박처럼 빛나는 술로 시선을 내렸다.
“술기운을 빌려 말하려고 하다니. 너 나 몰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이전에 내 비밀이 뭐냐고 물었죠? 당신이 당신 비밀을 얘기해주지 않아도 말해줄게요.”
술잔을 바라보던 사경행이 심묘에게 시선을 돌렸다.
“듣고 싶어요?”
사경행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내게 덫을 놓는 것 같은데?”
“당신이 알고 싶다고 여기고 말해줄게요.”
심묘는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상하지 않았어요? 나와 소명랑이 나눈 말, 예친왕을 처리한 일, 풍선전당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 심가 이방, 삼방 그리고 부수의를 왜 겨냥하는지 의아했을 거예요. 분명 이전에는 부수의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증오하게 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심묘는 사경행이 다소 의심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당신은 내게 경계심을 품고 날 조사했을 거예요.”
사경행의 얼굴에 불편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는 심묘의 말처럼 사람을 시켜 심묘의 내막을 조사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을 거예요. 내 배후에 수단이 고명한 사람이 있거나 심가 배후에 고인의 가르침이 있으리라 생각했겠지요.”
사경행은 침묵했다. 풍선전당포의 주인이자 ‘백효생’인 계우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을 밝혀내는 수완이 탁월했다. 그러나 심묘에 대해서는 어떤 수를 써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당신은 내가 여러 해 겪은 일의 대소를 논하지 않고 빠짐없이 조사했을 거예요. 명제 68년. 내 부모님이 정경성에 돌아오기 전, 부수의가 심부에 온 날 내가 연못 물에 빠진 일을 알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달라졌지요. 부수의를 사모하던 내가 그날 이후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사경행의 눈 속에 불만이 스쳤다. 심묘가 부수의를 사모한 일은 자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경성 모두가 아는 일이 아니었다면 심묘가 연기한 거라고 치부하고 싶을 정도였다. 부수의의 외모, 재능, 지위는 출중한 편이지만 1등을 다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부수의에게 심묘가 정신을 못 차렸다니 치욕스러웠다. 그런 위선적인 남자와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물에 빠진 이후로 난 심가 이방, 삼방과 거리를 두었어요. 심청 언니와 심모 언니에게도 이전처럼 우호적이지 않았지요. 심지어 심 노부인에게도 맞섰어요.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사람이 갑자기 정신을 차릴 때가 있지.”
사경행의 말처럼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성장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심묘가 이전에는 어리석었으나 나이가 들어 모종의 일로 심부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청 언니에게 떠밀린 바람에 물에 빠져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했죠. 그때, 아주 긴 꿈을 꿨어요.”
심묘는 탁자 위에서 춤추는 등불을 바라보았다. 눈 속에 안개 같은 실의가 점점 차올랐다.
“그 꿈은 아주 길고, 무엇보다 아주 현실 같았어요. 마치 내가 직접 겪은 것 같았지요. 당신은 그런 꿈을 믿을 수 있나요?”
심묘는 미소 지었다.
“예언 같았어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국의 어떤 태수가 나무 아래에서 잠깐 졸았는데, 황제가 되어 화려한 궁중에서 쇠락할 때까지 일생을 보냈대요. 그런데 깨어나 보니 꿈에 불과했다더군요. 그 꿈속의 일은 허황된 일이었던 거지요. 그러나 진실인지 거짓인지 잘 분간할 수 없어서, 그 꿈이 현실인지, 지금이 현실인지 알 수 없었대요.”
심묘를 주시하는 사경행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내 꿈은, 옛이야기 속 남국의 태수보다 길고 고통스러웠어요. 난 꿈속에서 앞으로의 일을 겪었어요. 꿈에서 난 정왕부로 시집을 갔고, 심가는 정왕부와 함께했지요. 꿈속에서 조정 분쟁, 황자들의 황위 쟁탈 끝에 부수의가 승리하는 걸 보았어요. 그는 명제 황제가 되었고, 난 황후가 되었지요. 매우 영광스러웠어요.”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신은 내 꿈이 아름다운 꿈이라고 여길 거예요. 부수의를 좋아했으니까 그런 꿈을 꿨을 거라고요. 나도 아름다운 꿈이길 희망했으나, 사실은 태어난 이래 가장 두려운 악몽이었어요. 꿈에서 내겐 아들과 딸이 있었어요. 부명과 완유. 이름처럼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지요. 명제는 이민족의 침입을 받았어요. 명제는 날 인질로 삼아 진국의 병사를 빌렸고, 난 진국에서 5년을 지내면서 황보호와 명안 공주를 만났어요.”
사경행의 표정이 점점 엄숙해졌다.
“난 진국 황실을 좋아할 수 없었어요. 그들은 늘 내게 치욕을 줬지요. 활쏘기 장난을 치며 내 머리 위에 사과를 얹게 하고 고의로 빗맞혔어요. 그 후 난 몰래 활쏘기 연습을 했고 연습 때는 백발백중이었으나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그들을 명중시키지 않았어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거북이처럼 느리게 흘렀지만, 어쨌든 5년이 지나 명제로 돌아갈 수 있었지요. 궁에 돌아오자 부수의 곁에는 총애를 받는 비가 하나 있었어요. 미 부인이라고 불렸지요. 미 부인은 부성이라는 아들도 낳았지요. 부수의는 미 부인을 총애하며 부성을 아꼈고, 난 냉대를 당해 황후지만 암암리에 비웃음거리가 됐어요.”
심묘는 담담했다.
“이후 부수의는 심가를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난 초조했으나 후궁의 사람이니 감히 조정 일에 간섭할 수는 없었지요. 심구 오라버니는 형초초의 정조를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벼슬길이 끝장났고, 그걸로도 모자라 간부(奸夫)를 죽인 죄로 수감까지 되었다가 결국 연못에서 익사했지요. 내 어머니는 상재청의 독사 같은 혓바닥 때문에 병세가 깊어진 끝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나날이 기력을 잃으셨죠. 끝내는 병권마저 뺏기고 온종일 술만 마셨지요. 이방, 삼방은 차츰차츰 승진하며 득세했구요.”
심묘는 웃음을 띠었다.
“나와 미 부인은 후궁에서 매일 다퉜어요. 단지 내 자존심 때문에 황후의 위치를 뺏기기 싫어서 그토록 발악한 건 아니었어요. 총애도 집안의 도움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그 지위마저 잃으면 내 아이들도 보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결국 난 패배했고 완유는 화친을 위해 흉노로 가는 중 병사했고, 부명은 폐위당한 후 자결을 강요당했어요. 심가도 당연히 멸문했지요. 난 냉궁에서 흰 천을 하사받아 태감의 손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눈을 뜨자 난 심부였고, 내 침상에 누워 있었어요. 아주아주 긴 악몽을 꾼 거지요.”
심묘는 냉담하게 몸서리쳐지는 꿈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흐릿했다. 무궁한 고통을 말로 다 할 수 없어서 웃음으로 대신한 것 같았다.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묘는 술에 취할 때마다 늘 ‘황후’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녀가 어린 나이부터 황후가 되겠다는 야심을 가졌다고 여겼다. 하지만 때때로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종종 냉대당한 폐후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그 점이 항상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당신은 내 꿈을 믿어요?”
사경행이 반문했다.
“넌 믿느냐?”
심묘는 가볍게 웃었다.
“믿지 않았다면 오늘 당신 앞에 있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겠죠. 꿈에서 깨어난 후 난 그 꿈속의 일이 발생할까 두려웠어요. 그래서 엄격한 기준을 세웠고, 그에 맞춰 생활했어요. 동시에 그 꿈이 악몽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지요. 그러나 내가 진지하게 임할수록 그 꿈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 실제라는 걸 깨달았어요.”
심묘는 사경행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소명랑에게 말을 전한 건 소가가 곧 멸문할 터였기 때문이에요. 세가를 두려워하는 황제 때문에 소가는 모두 참수당하게 될 운명이었어요. 오로지 당신만 소가 부자의 시체를 거둘 것까지 알고 있었죠. 소가 이후 거론되는 세가는 심가였지요. 난 심가를 보호하기 위해 소가를 일깨운 것인데, 의도치 않게 당신의 눈에 띄어버렸구요.”
당시 사경행은 소명랑의 ‘토사구팽’ 이야기를 듣고 심묘를 찾아냈다. 이후 쭉 그녀를 경계하며 탐색했다. 두 사람은 여러 번 논쟁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럼 네 꿈속에서 난 어땠지?”
사경행이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아주 멋졌어요. 사가는 점점 몰락했고, 임안후는 전사했어요. 당신은 아버지를 대신해 출정했지만, 역시 전쟁터에서 죽었지요. 그러나 지금처럼 예왕의 신분으로 명제에 돌아왔어요.”
심묘는 살짝 웃었다.
“병마를 데리고 온 당신은 명제를 멸망시켰어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그래요.”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래? 꿈속에서 너와 내가 인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당신은 끝까지 한낱 꿈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술에 취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나도 차라리 한바탕 꿈이면 좋겠어요.”
심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난 확실히 꿈에서 형초초도 상재청도 봤어요. 그 이전에 난 그들을 만난 적이 없었지요. 그 악몽 때문에 난 그녀들을 조심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 꿈의 도움을 받아 많은 일을 완성할 수 있었네요.”
사경행은 그녀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는 부드러운 위로가 담겨 있었다.
“넌 아주 잘 싸워왔어.”
“과거 일은 모두 지나갔어요. 난 있는 힘을 다해 꿈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피했어요. 그런데 그 꿈속의 두 아이는 없네요.”
사발의 어귀를 매만지던 사경행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길 거야.”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하는 말, 분명히 들어요. 그 꿈속에서 나와 평생을 다툰 미 부인, 새로운 태자의 모비이자 조정을 장악한 여인의 이름은 이미예요. 부수의가 동쪽으로 정벌을 갔을 때 만난 신하의 딸로 부드럽고 사람의 마음을 잘 살폈어요. 그런데 지금 난 그녀를 다시 만났어요. 당신도 기이하지 않나요? 당신이 사냥터에서 다친 후 깨어났을 때 내가 쌀쌀맞았던 건 그때 이미를 만나 매우 당황했기 때문이에요.”
심묘가 사경행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미는 지금 엽미라고 불려요. 내 말, 이해하나요?”
사경행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그가 고개를 들어 심묘를 마주 보았다.
“그럼 엽미가 바로 네 꿈속의 원수야?”
“나는 평생, 뼈에 사무치도록 미 부인을 원망했는데, 내 손으로 찔러 죽이지 못했어요. 이번에 다시 만났으니 심원을 이룰 좋은 기회라고 여겼는데, 한발 늦어 엽가에서 되찾은 딸이 돼버렸네요. 사경행, 내 원한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미 부인은 결코 선량한 사람이 아니에요. 권세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할 거예요. 결코 의미 없는 일은 하지 않아요. 예왕부는 그런 사람의 은혜를 입었으니 언젠가 그쪽의 칼이 되어 보은해야 할지도 모르죠. 당신은 조심해야 해요.”
사경행은 다시 사발을 들었다. 그는 그릇 안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웃고 있었으나 눈 속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엽미? 부수의의 안목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범속하네. 나는 그와 달라. 네 꿈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꿈속의 원수도 원수인 셈이야. 네 마음에 짐을 지웠으니 용서할 수 없어. 네 원한을 내게 줘. 내가 너 대신 복수해줄게.”
심묘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가 먼저 제지했다.
“직접 원수를 없앨 거라고 하지 마. 너는 내 사람이니 네 원한은 바로 내 원한이야. 이 세상 너와 나의 원수는 셀 수 없으니 구별하지 말자. 언젠가 내 원수를 만나면 네가 나 대신 복수해주고 싶을 테니 비긴 셈으로 치자.”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에게 원수가 있어요? 누구?”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손을 뻗은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말해도 다 믿으니 정말 귀여워.”
“무엄하다!”
심묘는 술에 취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황후의 위엄을 드러냈다. 사경행이 동작을 멈추었다. 심묘도 당황스러웠다. 사경행이 그녀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아직도 황후가 되고 싶은 거야?”
“그런 꿈이라면, 두 번 다시는 꾸기도 싫어요.”
심묘는 십향주 한 단지를 거의 다 비웠다. 사경행이 저지하려고 했으나 심신도 어쩌지 못하는 심묘의 고집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이전처럼 술주정을 부리지 않았다. 술을 다 마신 후 그녀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그녀는 빈 술 단지를 껴안고 비틀거리며 나갔다. 사경행은 경칩과 곡우에게 그녀를 잘 돌보라고 분부했다. 놀란 경칩과 곡우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 막 나으셨는데 왜 또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는지. 회복에 좋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사경행은 심묘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여름 미풍이 불어와 약간의 술기운을 완전히 걷어냈다. 덕분에 머릿속이 거울처럼 투명해졌고 살짝 홍조가 돌던 얼굴 역시 깨끗해졌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평온하지는 않았다. 심묘의 말을 다 듣자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불가사의했지만, 순식간에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자신은 귀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귀신은 믿지 않지만 심묘는 믿었다. 자신은 그녀를 잘 알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사람을 속이려 한다면 빈틈이 없을 터였다. 명제에서 그녀가 웃는 얼굴로 심가 이방, 삼방, 형초초, 상재청을 공격해 저승길로 보낸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온화한 얼굴 아래 참혹한 계략을 부릴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가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이고 있으니 결코 거짓일 리 없었다.
오늘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 끙끙 앓았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말을 끝낸 뒤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표정을 드러낼 리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을 유지했다. 자신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녀가 비밀을 털어놓기로 한 걸 후회할지도 몰랐다.
심묘의 꿈이 모두 사실이라면 결코 즐거운 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수의와 혼인했기 때문에 그런 처참한 결말을 맞은 거라면……. 노여움을 억누를 수 없던 사경행이 똑바로 서서 철의를 불렀다.
“철의.”
부름과 동시에 철의가 나타났다.
“엽미 남매가 명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거라.”
철의는 의외라고 생각했으나 의문을 드러내지 않고 그대로 명을 받들었다.
엽미는 심묘의 원수였다. 그녀가 나타난 곳이 명제가 아니라 대량이라는 점은 꿈속과 달랐으나, 그녀가 원수라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엽미 남매를 봤을 때 적의를 드러낸 심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경행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초승달을 바라보다가 백호를 찾았다. 교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주인을 만나자 기뻐 어쩔 줄 몰라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사경행은 교교와 놀며 정신을 팔았다. 밤이 점점 깊어지고 교교가 졸기 시작하자 사경행도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사경행은 방 중앙으로 걸어가 외투를 벗고 잠시 앉아 있으려 했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침상을 보니 혹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얕은 숨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린 그가 재빨리 침구를 들췄다. 직후 놀란 얼굴로 멍하니 보던 그가 미소 지었다.
“뭐 하는 거지?”
침상에는 심묘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이불을 덮고 베개를 껴안은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좀 전의 그녀는 평온해 보여서 취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지금은 취기가 오른 듯 희고 깨끗한 얼굴이 새빨갰다. 맑고 투명한 눈도 한층 촉촉했다.
“나 자러 왔어요.”
사경행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뭐라고?”
“그 여자가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잠자리를 같이해야 한다고 했어요. 남녀의 동침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즐거우며 이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래요. 난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당신도 없을 테니, 같이 해보려구요.”
“대체 무슨 헛소리야.”
심묘의 말을 들은 사경행의 얼굴이 붉어졌다.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심묘를 마주 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했다. 게다가 ‘그 여자’는 또 대체 누구인지. 그때 심묘가 말한 꿈이 떠올랐다. 추측건대 그 여자는 그녀의 꿈속, 후궁 안 ‘자매’가 아닌가 싶었다.
“난 당신과 연구해보고 싶어요.”
심묘는 단정한 자세로 침상에 앉아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그 말을 들은 사경행이 서둘러 탁자로 걸어갔다. 차가운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신 그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아주 딴 사람 같아지는 심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즐겁다’라는 말을 이럴 때 쓰다니.
“난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야.”
한참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여긴 사경행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찻물을 내뿜고 말았다. 심묘는 동작이 아주 빨랐다. 그녀는 이미 겉옷을 벗고 속옷만 입은 채였다.
“내가 못생겨서 싫은 거예요? 그래서 날 건드리지 않는 거예요?”
심묘가 아주 속상하다는 듯 눈썹을 팔(八) 자로 만들었다. 그녀의 피부는 누구도 밟지 않은 한겨울의 눈처럼 새하얬다. 그러나 창백하지 않고 윤기가 나서 우윳빛이 돌았다. 아니, 우윳빛보다도 더 빛나고 투명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더 귀여워 보이게 했다. 물기 어린 시선은 정말 탐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얼른 다가간 사경행이 고개를 돌린 채 그녀에게 이불을 둘러주었다.
“네 병이 가볍지 않구나.”
심묘가 당당히 말했다.
“우리는 부부예요. 부부가 부부의 일을 하자는데 대체 왜 그래요?”
사경행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심묘의 눈을 피했다.
“네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후일 다시 이야기하자.”
심묘는 의심스러웠다.
“두 달 동안 기다려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미 두 달은 훌쩍 지났어요.”
사경행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며 받아쳤다.
“나라고 남의 위급한 상황을 늘 이용해먹지 못해 안달 난 줄 알아? 나를 어찌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가 아녜요. 난 진정한 부부가 되고 싶고, 당신의 소원도 이뤄주고 싶은데.”
“착하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른 날 다시 이야기하자.”
사경행은 이불을 여며주고 떠나려 했다. 더 있다가는 정말 참지 못할 것 같았다. 혈기 넘치는 남자의 품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문제였다. 그러나 심묘가 술에 취했을 때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싫었다. 그녀를 존중하기에 이런 방식은 원치 않았다. 하나 심묘가 막 일어난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가 여며준 이불도 미끄러져 내렸다. 심묘는 아예 침상에 반 엎드려서 사경행의 목을 껴안았다.
“싫어요.”
사경행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품에 안긴 심묘의 피부는 보드라웠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도 느낄 수 있었다. 희미하게 여인의 향기도 전해졌다. 자신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으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독한 술이 머리 위로 부어진 듯 이성이 점점 희미해졌다.
“바로 오늘, 오늘이 지나면 난 후회할 거예요.”
심묘가 단정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가 생각보다 별로 안 취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단정했다. 사경행은 멈칫하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후회?”
심묘는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침상에 반 엎드린 자세가 불편한 듯 고개를 비틀었다. 사경행을 자세히 바라보던 심묘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네 미모가 아름답구나. 복이 있는 셈이니 날 따르면 어떠하겠느냐?”
사경행은 할 말을 잃었다. 또 왔다. 몇 년 전, 술 취한 그녀에게 강제로 입맞춤 당한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널 따르라고?”
그의 목소리에서 위험한 기운이 드러났지만, 심묘는 알아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생 부귀영화를 보장해주마.”
심묘가 그의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사경행은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취했을 땐 소녀에게서 볼 수 있는 순진함과 풋풋함이 있었다. 익지 않은 과일처럼 싱그러운 매력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행동이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어떤 절세미인의 매혹적인 시선도 그녀의 포옹에 비할 수 없었다.
“네가 원치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겠다. 날 놓치면 넌 평생 후회할 거야.”
“아직도 다른 사람 찾을 생각을 하는 거야? 응?”
심묘의 위협 아닌 위협에 사경행이 힘을 주어 앞으로 엎어졌다. 사경행의 목에 매달려 있던 심묘는 그의 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그가 살짝 웃으며 심묘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황후께서는 아주 건방지시군요. 내게 시중들라더니 그새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겁니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데, 벌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심묘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침상 아래를 더듬어 책자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걸 들고 반짝이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보자!”
사경행이 당황한 얼굴로 책자를 받아 보았다. 그의 안색이 여러 번 변했다.
“어디서 가져온 거지?”
“어머니가 주신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과 연구해보고 싶다고.”
사경행은 얼떨떨했다. 잠시 후 그가 가볍게 웃었다.
“연구하자고?”
심묘는 닭이 쌀을 쪼아먹는 것처럼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소신은 당연히 마마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도록 섬길 겁니다.”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광야의 늑대처럼 위험하게 변했다.
“마마, 정말 후회하지 않을 겁니까?”
“너야말로 날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심묘가 중얼거리자 사경행이 소매를 휘둘러 방 안의 등불을 전부 꺼뜨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말이 맞아.”
널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야.
* * *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무가 울창했으나 여름 태양은 나뭇잎 틈 사이로 창을 통과했다. 바닥에 얼룩덜룩한 작은 빛 조각이 그려졌다. 홰에 앉은 닭이 시원스럽게 울었다.
심묘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몸을 뒤척였는데 앞이 막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당황해하며 눈을 떴고, 그 순간 눈앞의 광경에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은 사경행의 품에 안겨 있었고, 양손은 그의 허리 쪽에 있었다. 시선을 올리자 준수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도화 눈은 웃는 듯 마는 듯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심묘는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어나 앉으려 하자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녀는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이불이 미끄러지며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몸 위의 흔적이 똑똑히 보였다. 옷들은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탁자를 보니 술을 마신 듯했다. 온 방에 부드럽고 야릇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어났어?”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묘는 평온한 안색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당황스러운 티가 역력했다. 사경행은 심묘를 보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어젯밤엔 용감하더니 지금은 무서운가 봐?”
심묘는 속으로 놀랐다. 사실 자신은 술에 만취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백지 수준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취하기 전, 자신이 사경행에게 전생 이야기를 할 때까지였다. 전생의 일을 어찌 이야기할까 고민하다가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하는 게 가장 믿기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이야기하면 믿으려야 도저히 믿을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 결국 용기를 내려고 술을 마셨다. 다행히 사경행이 자신의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왜 사경행과 함께 잔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어젯밤에 뭘 했는지 알아?”
혼란스러워하는 심묘를 본 사경행이 느긋하게 말했다. 심묘는 감히 사경행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불을 보며 침착한 척했다.
“뭘 했겠어요? 잠잤겠지요.”
“네가 내게 함께 자자고 했어. 그리고 난 너의 시중을 들었지. 아주 잘.”
심묘는 자칫 사레가 들릴 뻔했다. 오랜 궁중 생활로 절제가 몸에 뱄던 자신이 그럴 리 없었다. 그렇게 염치없는 일을 했을 리 없었다. 보나 마나 사경행이 또 거짓말로 자신을 놀리려는 게 분명했다.
“네가 그러더군. 널 따르면 앞으로 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전도유망할 거라고. 그래서 별수 있나? 그대로 따랐지.”
“취했을 때 한 말을 구태여 사실로 여길 필요가 있나요. 게다가 당신이 속이는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그런 말 못 해요.”
심묘는 화제를 바꾸며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정말 무엇도 기억나지 않으니 잡아뗀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사경행이 차분하게 베개 아래를 더듬어 꺼낸 책자를 뒤적였다.
“그래? 넌 장모가 준 물건을 꺼내며 나와 연구하고 싶다고 했지. 난 널 위해 의혹을 풀어줬고. 기억 안 나?”
사경행이 책자를 심묘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심묘는 힐끗 보았으나 책자를 보고 피를 토할 뻔했다. 저 책이 이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친 나설안이 자신에게 규중 비밀스러운 일을 알려주기 위해 준비한 특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자신이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었으니 사경행이 찾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그가 가지고 있다니, 자신이 그에게 주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어떤 일을 한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그에게 ‘잘 시중들라’고 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심묘는 벼락을 맞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기분이었다. 사경행은 곤란해하는 심묘를 보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지난밤 넌 날 끌고 몇 가지를 연구했지. 세월이 기니 급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넌 배움에 얼마나 목말랐는지 매우 어려운 자세도 시도해보자…….”
“그만!”
심묘가 황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부끄러움에 온 얼굴이 새빨개졌다.
“술을 마시면 일을 그르쳐요. 왜 막지 않는 거예요?”
사경행은 억울한 모양이었다.
“내가 어디 감히? 따르지 않았으면 네가 내 머리를 찍으려 했을걸?”
심묘는 할 말이 없었다. 몹시 난감했다. 자신이 몸을 흔들며 사경행을 유혹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차릴 체면이 조금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사경행은 아주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넌 오늘밤에도 연구해보자고 했어.”
“오늘밤은 괜찮아요.”
심묘는 빠르게 그의 말을 자르고 침상에서 내려 바깥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한 발 내딛기도 전에 사경행에게 다시 잡혀 그의 품에 갇혔다. 사경행은 고개를 숙여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나른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후회하는 거야?”
심묘는 멍해졌다. 사경행의 눈은 아주 아름다웠다. 심묘는 때때로 다 큰 남자의 눈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생긴 건지 의아하기도 했다. 끝없는 정을 품은 듯한 그의 도화 눈은 명제에서도 늘 여자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사경행은 냉담했다. 이런 남자는 위험하니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터였다. 이런 남자를 짝사랑하면 힘들 테지만, 만약 그에게 사랑받는다면 일생일대의 행운일 것이다. 그는 상대를 존중하고 소중히 대할 줄 알며, 짓궂지만 사랑스러웠다.
사경행이 심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거만하고 버릇없는 시선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그의 시선은 자기에게 그녀가 가장 중요한 사람임을 증명했다. 심묘의 시선이 사경행의 손목, 붉은 끈에 닿았다. 붉은 끈을 매는 것을 싫다고 한 그가 심묘가 매준 그대로 끈을 차고 있었다. 심묘는 고개를 들어 솔직하게 말했다.
“후회 안 해요.”
단지 조금 부끄러울 뿐……. 심묘가 뒷말을 삼킬 때 사경행의 눈빛이 확연히 밝아졌다.
“하면 한 거지. 후회는 안 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부인데.”
심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사경행의 시선을 피했다. 사경행이 심묘의 얼굴을 감싸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정말?”
“정말!”
사경행은 한참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진득한 시선에 난처해진 심묘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노렸다. 순간 그가 심묘를 확 잡아당겼다.
“보자.”
“뭘 봐요?”
“어젯밤 네가 한사코 거부해서 네 상처를 제대로 살필 수 없었어. 찰과상이지만 자세히 봐야겠다.”
사경행이 심묘를 더욱 끌어안자 중의만 입은 그의 가슴이 크게 드러나 심묘의 얼굴이 불타듯 얼얼해졌다. 심묘가 사양했다.
“괘, 괜찮아요. 안 봐도 돼요.”
“안 돼.”
사경행이 심묘를 자기 몸 위로 당겼다. 심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바깥에서는 경칩과 곡우가 바닥을 청소하며 안의 인기척을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공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안의 이야기를 조금도 들을 수 없었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새장 안 새를 골리던 종양이 입을 열었다.
“너희 둘, 여기만 한 시진이나 청소했어. 더 청소하다간 입구 석판도 쓸려나가겠다.”
경칩과 곡우는 당황스러웠다. 비질을 하던 그녀들의 손이 멈췄다. 경칩은 종양에게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가냐고 물어보고 싶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들은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종양은 얼굴이 두꺼워 그녀들의 의중을 읽고 크게 손을 휘둘렀다.
“안심해. 매우 순조로우니까.”
경칩과 곡우는 부끄러워 얼굴을 더더욱 붉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안심했다. 경칩이 곡우에게 득의의 미소를 보이자 곡우는 나무라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경칩과 곡우는 어젯밤 심묘의 명대로 식사를 사경행의 방에 준비한 다음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심묘가 방에 돌아오자 경칩은 얼른 나설안이 준 책자를 꺼내 건넸다. 심묘는 그 책자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그녀는 얼버무렸다.
경칩은 심묘가 술에 취할 때마다 기억을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묘와 사경행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려고 했다. 당초 심묘가 출가할 때 나설안이 자신들에게 반드시 심묘를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했다. 심묘와 사경행, 두 사람 사이는 좋아 보였지만, 혼인하고 나서도 오래도록 부부의 밤을 보내지 않았다. 경칩은 심묘와 사경행이 이쪽 일은 잘 모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일부러 책자를 건넨 것이다.
심묘가 술에 취한 틈을 타 두 여종이 그녀를 인도한 셈이다.
“이 책자에 쓰인 것이 궁금하시지요? 예왕 전하만이 마마를 위해 궁금증을 풀어주실 수 있어요.”
경칩은 당시 자신의 표정이 마치 청루의 마마(기생어미) 같았을 것을 생각하니 민망해졌다. 심묘는 술에 취해 아무것도 모르고 책자를 들고 문을 나섰다. 곡우가 막으려 해도 늦어서 부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여종은 긴장되고 불안해서 밤새 바깥을 지키느라 눈 밑이 검푸르러졌다. 밤새 심묘는 사경행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종양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어젯밤 자신들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 속으로 안도했다. 심묘와 사경행이 계속 함께한다면 이것저것 요령이 생길 것이리라.
그때, 세 사람을 본 당숙이 종양에게 소리쳤다.
“아침부터 일은 하지 않고 여기서 뭐 하는 게야? ”
반면 경칩과 곡우를 향해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째 기운이 없어들 보이는데?”
경칩과 곡우는 심묘가 데려온 사람이라 종양처럼 훈계하기 어려웠다. 종양은 당숙의 차별 대우에 흥 소리를 내며 떠나갔다. 경칩과 곡우도 오래 머물기 어려워 당숙에게 몇 마디 얼버무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모든 사람이 떠나길 기다렸던 당숙은 사경행의 방문 앞에 서서 혼자 실없이 웃다가 급히 떠났다.
“보약을 달여야겠어.”
* * *
예왕부는 어젯밤부터 매우 즐거웠다. 묵우군 모두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따로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팔각과 회향 두 사람은 이 일을 몰랐다. 잠시 배랑을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상은 심묘보다 훨씬 심각했다. 목숨은 건졌으나 칼이 뼈에 이르러 고양조차도 힘들 거라 여겼다. 그래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고양을 부르기 위해 팔각과 회향이 배랑의 곁을 지켰다. 배랑은 어제 몇 번 깨어났으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팔각과 회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심묘와 사경행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정오, 회향이 묽은 죽을 들고 왔다. 배랑은 다른 것은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배랑이 여전히 잠들어 있으리라 여겼는데 예상외로 그는 창문가에 서서 넋을 잃고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 공자?”
처음 배랑과 대면한 회향은 멈칫했지만 기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죽그릇은 옆에 두었다.
“깨어났군요.”
배랑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는 그제야 그녀가 예왕부 사람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마마도 깨어나셨군요.”
회향은 막 깨어난 배랑이 어떻게 다 알고 있다는 듯 단정적인 말투를 사용하는지 의아했지만, 일단 상황을 전했다.
“어제 깨어나셨습니다. 마마는 중상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공자의 상처가 심하지요. 당신 덕분입니다. 공자가 마마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배랑은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내가 마마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소. 내가 마마께 빚을 졌소.”
회랑은 배랑의 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뭐라구요?”
그러나 배랑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또 넋이 나가 있었다. 심묘를 대신해 다친 후,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아주 길고 실제 같았다. 그 꿈에서 심묘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이유와 자신이 그녀에게 모종의 가책을 느낀 이유를 깨달았다.
꿈속에서 주지승이 말했다. 목숨을 희생하면 다시 삶을 살 기회를 얻을 수 있겠으나 ‘어쩌면’에 불과하다고. 헛되이 희생하는 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시 삶을 살게 되어도 얻느니 못한 기회가 될 수 있고 이로 인해 오히려 더 고통받을 수 있다고도. 그러나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과 부수의의 냉대는 다르다고 할 수 없었다. 둘 다 심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녀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따진 후, 그녀를 버렸다. 사람은 버리면서 사는 법이다. 자신과 부수의는 심묘를 버렸다. 이번 생에서는 그녀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들을 버렸다. 반면 사경행은 유달리 운이 좋았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일을 알게 된 후, 배랑은 다시 심묘와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곁에서 돕겠다고 했던 것은 자신도 모르게 전생에 느꼈던 가책을 상환하려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방법이 없었다. 이 인연은 복잡하게 뒤엉켜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르지 못하면 도리를 지킬 수 없었다. 이 잘못된 인연을 끝내야 했다. 처음부터 품지 말아야 했다. 품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니 지금 반드시 잘라내야 했다.
“배 공자, 우선 죽부터 드세요. 잘 드셔야 빨리 회복합니다. 곧 고 공자가 와서 침을 놔줄 거예요.”
배랑이 잠시 후 말했다.
“고맙소.”
“별말씀을. 마마의 목숨을 구했으니 공자는 예왕부의 은인입니다.”
“번거롭지만 붓과 종이를 좀 가져다주시오.”
부탁하는 배랑의 입술은 창백했다. 눈빛은 어두웠으나 말투는 매우 확고했다.
* * *
심묘와 사경행이 잘 지내자 예왕부 사람들은 한숨 돌렸다. 화가 복이 되어 두 사람은 화해했을 뿐 아니라 한방에서 자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었다. 당숙은 매우 기뻐하며 매일 몸에 좋은 약재를 달여 사경행이 마시게 했다. 물론 심묘를 살뜰하게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경행은 엽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엽미 남매는 대량에서 나고 자랐으며 흠주에서의 생활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심묘도 무엇 때문인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번 생을 살며 무심코 많은 일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부수의의 운수나 미 부인 남매의 신분이 그 예라고 여겼다. 그러나 절대로 달라지지 않은 점도 있었다. 전생에 미 부인은 원수였다. ‘엽’가 사람이 된 이번 생 역시 그녀가 철천지원수라는 점은 여전했다.
배랑은 점점 나아졌다. 심묘는 배랑을 한 번 보러 갔으나 방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멀리서 그가 침상에서 내려와 스스로 약을 먹는 모습을 보자마자 떠났다. 그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그야 결코 전생의 일을 모를 테지만 전생의 일을 아는 자신은 평온한 상태로 그와 마주할 수 없었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사경행은 이를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녀에게 이전보다 많이 철들었다고 에둘러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그녀와 한층 긴밀한 사이가 되고자 했다. 게다가 각방을 쓴 기간을 보충하려는 듯 굉장한 열의를 보였다. 그의 애정 공세에 심묘는 요 며칠간 나른하고 활기가 없는 상태였다. 양기를 보충했으나 음기가 빨려서 힘든 것 같았다.
그러나 늘어져 있을 여유는 없었다. 대량 국세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그 속 다툼의 소용돌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영락제는 황실 사냥 후 고가를 대처하기 위해 준비한 그물을 걷기 시작했다. 고가는 황실을 대처하느라 바빴고, 사경행도 분주했다. 심묘도 쉴 수 없었다. 명제에서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장군부 사람들이 그녀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하나는 나설안이 쓴 것으로, 장군부는 모두 잘 지내고 있으니 심묘가 대량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절대 참지 말고 반드시 자기들에게 알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또 부부는 둘도 없는 조력자이니 사경행과 서로 존중하며 이해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 후 심묘의 상황을 물었다.
다른 편지는 심구가 쓴 것이었다. 심구의 편지는 나설안의 편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뒷부분에 이르러서야 그는 명제의 국세를 언급했다. 심묘는 출가 전 심구에게 명제 황실을 조심하라고 암시했다. 명제 황실은 사람을 끌어들여 빠져 죽게 하는 진창 같아서 장군부는 처세를 잘해야만 보전할 수 있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늘 황실과 관계를 분명히 구분해야 했다. 같이 진창에 빠지면 안 됐다. 설령 깨끗한 명성을 포기하더라도 목숨을 우선시해야 했다.
심묘가 정경성을 떠난 지 반년 정도 지났다. 명제의 국세는 일촉즉발이었다. 매일 변화가 생기는 곳에서 반년이 흘렀다. 명제의 국세는 손쓸 새 없이 달라졌다. 문혜제의 병세가 위중해진 게 가장 큰 변화였다. 기침으로 시작한 병세가 깊어져서 지금은 조회도 못 볼 정도였다. 때때로 조회에 참여해도 원기가 없어 몇 마디만 들은 채 조회를 파한다고 했다. 궁중에는 문혜제가 1년도 못살 거라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심묘는 편지를 보며 웃었다. 자신은 문혜제가 1년도 못 살 거라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는 이렇게 빨리 죽지 않았으니까. 물론 문혜제의 서거 뒤 이상한 점이 없으리라 단언하기 어려웠다. 명제 황실은 여러 이익이 뒤얽혀 복잡했고, 황자들의 관계는 대량의 형제들처럼 서로를 위하는 아름다운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 모두 윗자리에 앉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희생시키는 자들이었다. 부황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구는 편지에 문혜제가 와병 생활을 하며 가장 총애해온 서현비를 크게 나무랐다고 언급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현비는 지위가 낮아지고 온 서가 역시 문혜제에게 분풀이를 당했다고 했다. 당연히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도 연루되었다. 두 사람은 조정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구체적인 일은 심구도 모르지만 서현비와 부수안, 부수현 모두 문혜제의 총애를 잃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들 형제는 더는 황위 쟁탈에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리왕 일파는 갑자기 부수의와 친교를 맺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위 쟁탈전에서 고지를 점하고 있던 리왕 일파였다. 주왕 일파도 실각한 판국에 갑자기 데면데면하던 부수의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아주 이상했다. 이 일파는 리왕을 황제로 세우려 했는데, 은은히 부수의를 추종하다니 이는 분명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이 이쯤에 이르자 필체는 눈에 띄게 조잡해졌다. 심구의 기분이 평온하지 않은 게 명백했다. 명제 황위 쟁탈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금이 가장 정점인 듯했다. 욕심도 없고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부수의, 그리고 그의 모비인 동숙비는 문혜제의 최측근이 되었다. 중병인 문혜제가 총애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었다. 이 추세면 태자의 자리는 비어 있으니 문혜제가 황위를 부수의에게 넘길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래서 신하들 대부분은 부수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수의는 장래의 명제 황제였다. 부황의 신임을 되찾은 그는 점점 장군부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문혜제가 진작 장군부의 병권을 회수했기에 부수의는 심신에게 새로운 군대를 주었다. 심신과 심구에게 완전히 새로운 군대를 인솔하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봐도 함정이었다. 부수의는 함정을 파놓고 장군부 사람을 기다렸다. 한 발자국만 잘못 떼도 부수의의 올가미에 걸릴 수 있었다.
심구는 지금 장군부는 심신이 병에 걸렸다는 구실로 잠시 병권을 받고 있지 않으나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부수의가 장군부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한 가지 방법만 쓰지는 않을 터였다. 다행히 장군부를 돕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수의는 풍가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부, 그리고 부수의에게 협조하길 원치 않는 신하들과 연합하면 장군부는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편지 속에 망연함이 전해졌다. 여러 대 명제에 충성한 장군부와 황실이 대치하고 시기하고 있으니 탄식할 만했다.
심묘는 편지를 끝까지 읽고 접었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사경행이 물었다.
“걱정되나 봐?”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수의가 장군부에 손을 뻗기 시작했어요. 아직 1년도 안 됐는데 빠르네요. 지금 정경성에는 부수의에게 대놓고 맞설 사람이 없어요. 주왕과 정왕이 그렇게 세도를 부렸는데, 서현비와 함께 몰락했다는군요. 리왕도 그에게 굴복당한 모양이고요. 부수의의 수완은 정말 만만찮네요.”
전생에 명제의 황제였던 부수의는 이번 생에선 심가를 등에 업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대세였다. 적을 과소평가한 것 같았다. 장군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준비해둔 것들로는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급습했다.
“이상하지 않아. 부수의는 황위를 차지하려고 아주 일찍부터 준비를 시작했어. 주왕 형제가 우세였대도 그보다 출발이 늦었지. 리왕은 더 말할 것도 없어. 외가의 지지가 없으면 그만큼 떨어지니까.”
사경행이 가볍게 웃자 심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수의는 왜 여전히 장군부를 겨누는 걸까요? 장군부에는 병권이 없으니 더는 자기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아요. 임안후부를 봐요. 임안후부는 그대로 뒀으면서 장군부는 놓지 않고 있으니…….”
부수의는 의미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지금 장군부를 억누르려는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집요하게 구는 것일까. 잠시 침묵하던 사경행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너 때문에?”
“나?”
심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넌 대량으로 시집왔지. 게다가 부수의는 이전부터 나와 네 관계를 의심했어. 대량이 장군부의 후원자가 아닐까 의혹을 품은 게지. 나도 대량에 와서 계속 부수의의 동정을 주시했어. 부수의가 임안후부와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조사했으니 지금쯤이면 내 신분을 알아챘을 거야. 장군부와 내 관계를 오해해서 장군부가 대량에 의탁했거나 다른 생각을 품었다고 여길 거야.”
그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부수의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아. 수완도 흉악하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반드시 화근을 철저히 없애려 들 거야. 장군부는 지금 자기에게 불안 요소이니 필시 전력을 다하여 제거하고 싶겠지.”
“그 부분은 나도 잘 알아요.”
심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전생에 부수의는 심가 대방을 깨끗이 몰살했다. 사경행이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넌 걱정할 것 없어. 정경성에 배치해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네 가족의 안전을 보호할 능력은 있다고.”
“당신이 준비해둔 사람이 있다구요? 왜 내게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당연하잖아. 괜한 얘기를 하면 생색내는 것밖에 더 돼? 장군부 역시 내 가족인데 잘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정경성에 남겨둘 리 없지.”
사경행이 “장군부 역시 내 가족”이라고 말할 줄은. 심묘는 벌꿀을 한 숟가락 먹은 듯 입안이 달콤해졌다. 눈에도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풍가가 본격적으로 오라버니와 힘을 합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심묘는 풍가가 전생에 걸었던 길을 다시 따라가지 않도록 특별히 심구에게 풍가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도 자신과 풍안녕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던 가문 사람들끼리 깊은 우정을 쌓을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 풍안녕도 전생처럼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엉망인 그 사촌에게 시집가지 않을 것 같았다.
사경행이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침 너와 할 이야기가 있었어. 부수의가 진국 황제와 비밀리에 왕래하고 있어.”
심묘는 멍해졌다.
“병사를 빌리려고요?”
심묘는 진국에서 인질로 지내던 5년이 생각났다. 지금 부수의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 다른 인질을 찾은 건가 싶었다.
“아마 비공식적인 협의를 했겠지.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영토를 떼어준다는 거야.”
사경행의 말에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위에 오르기 위해 진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건가요? 그렇지만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면 장래에 많은 영향을 받을 거예요. 부수의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 텐데요.”
사경행의 시선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대량에 대처하기 위해서야.”
“대량을 공격하려는 거예요? 미쳤네요.”
심묘가 다시금 인상을 쓰며 그를 바라보았다. 명제와 진국이 연합하면 힘은 이전보다 당연히 커지겠지만, 그래도 대량의 국력에는 못 미쳤다. 대량의 압승이라고 말할 순 없어도 대량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볼 터였다. 명제와 진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러 해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다가 왜 갑자기 분쟁을 일으키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부수의와 진국 황제는 눈엣가시를 가만두지 못하는 성격이지. 게다가 대량은 지금 고가, 엽가 양가 때문에 혼란스러워.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사경행이 웃으며 담담히 설명했다. 심묘는 잠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언젠가는 공격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전쟁이 시작되면 대량에 상당한 타격을 줄 터였다. 사경행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걱정할 것 없어. 내게 맡겨.”
“나도 예왕부 왕비라구요.”
심묘는 사경행에게 눈을 흘겼다.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사경행이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 황후에서 왕비가 됐는데, 싫지 않아?”
“할 건 다 해놓고 그런 말을 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심묘는 흥 콧소리를 냈다. 사경행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회향이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 하자 회향이 심묘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을 본 회향의 눈에 고민의 기색이 스쳤다. 영문을 모르는 심묘가 회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있다면 말하거라.”
심묘 자신에게는 더 이상 사경행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은 없었다.
“오늘 정오, 배 공자가 외출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고 공자도 걸어 다니는 것이 더 치료에 도움이 되니 먼 거리만 아니면 된다고 허락하신 데다, 배 공자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부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오늘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고가 생긴 거야?”
배랑은 무공을 하지 못하니 위험한 일이 닥치면 스스로 보호할 수 없었다.
“저희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팔각이 배 공자의 방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회향이 소매 안을 더듬어 편지를 꺼내 심묘에게 건넸다.
“배 공자의 의복과 귀중품이 몇 개 없어졌습니다. 저희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배 공자는 떠난 것 같습니다.”
편지를 살펴보려던 심묘가 멈칫했다. 사경행의 표정도 변했다.
“선생이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은 없느냐?”
“특별한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오늘 날씨가 좋다고만 했습니다.”
심묘는 말을 잃었다.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봐.”
사경행이 자리를 피해주려고 일어나자 심묘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사경행이 심묘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봐요.”
멈칫한 사경행이 곧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맴돌았다. 편지를 펼치자 배랑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배랑의 글씨는 그의 분위기처럼 청아해 이름난 선비의 품위가 느껴졌다. 쓴 이가 전생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편지는 오랫동안 예왕부에 머물며 많은 말썽을 불러왔는데 두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줘서 고맙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심묘가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 류형의 남은 생을 편안하게 해주길 바란다고 부탁하는 걸 잊지 않았다. 자신은 부수의를 피해 임시변통으로 예왕부에 숨어 있었지만, 앞으로도 예왕부에 계속 있으면 서로 불편한 상황이 적잖이 생길 테니 살아 있는 동안 곳곳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겠다고, 그래서 작별을 고한다고.
배랑은 심묘가 부수의를 조심하는 것을 알기에 정왕부에서 지내던 기억을 토대로 그에 대해 아는 것들을 남기니 앞으로 그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를 심묘에게 전해주었으니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됐고 서로 빚진 게 없는 셈이었다. 배랑은 또 만날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배랑의 편지는 아주 간결했다. 아쉬움이나 미련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러 심묘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 한 것 같았다. 행간이 소원하고 곳곳에서 예의를 드러냈다. 점잖은 문체 때문에 그가 광문당 선생이었고 심묘가 그의 학생이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른 한 장에는 빽빽하게 부수의와 관련된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의 대소 구분 없이, 그야말로 부수의의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그의 인사와 심복, 장래의 계획, 그가 끌어들이려는 사람과 와해시키려는 사람의 목록까지. 부수의의 모든 것을 낱낱이 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 편지 덕에 그를 처치하는 일이 아주 수월해졌다. 그야말로 그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터였다. 심묘를 따라 무심하게 편지를 보던 사경행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사경행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부수의가 배랑을 아무리 신임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깊이 알 수는 없었다. 배랑은 그가 깊이 숨겨놓은 바둑돌을 하나하나 밝혔다. 그의 일을 전부 아는 것 같았다. 심묘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내용 중 몇 개는 몇 년 후에나 발생할 일들이었다. 지금 부수의 본인조차도 편지에 적힌 사람들의 일부는 모를 터였다. 그런데 배랑이 그것마저 다 알고 있다니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배랑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야 부수의의 ‘장래의’ 바둑돌, ‘장래의’ 계획을 자신에게 알려줄 수 있었다. 분명 이전에 배랑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언제부터 안 건지 의아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자신은 사경행의 생일날 암살 시도에 당해 의식을 잃고 전생의 꿈을 꾸었다. 혹시 배랑도 그날 같은 꿈을 꾼 것일까. 심묘가 회향을 바라보았다.
“요즘 배 선생에게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느냐?”
“다른 점이요?”
회향은 곰곰이 회상해보았다.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계속 멍하니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 공자는 워낙 조용하신 분이라 그저 요양 중이라 더 그렇다고 여겼습니다.”
심묘는 회향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배랑에게 전생의 일을 아는지 묻고 싶었다. 그는 부수의를 오래 따른 사람이었으니 부수의에 대해 가장 잘 알 터였다. 심묘가 다시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배랑이 전생을 기억했다면, 자신이 그를 마주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분명 그도 그럴 터였다. 자신들은 운명적 원수라고 할 수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료라고 할 수도 없었다. 깊은 궁중에서 배랑은 분명 잘못을 저질렀지만 피맺힌 원한은 직접 청산했다.
“사람을 보내 붙잡아 올까?”
사경행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심묘가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떠나기로 했으니 가게 둬요.”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배랑이 이렇게 떠난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결말일지도 몰랐다. 심묘는 편지를 쥐었다. 그녀의 눈 속에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사경행이 그런 심묘를 바라보았다.
“여기 적혀 있는 건…….”
“모두 진짜예요. 이걸 오라버니께 보내줘요. 우리는 명제에 있지 않으니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지요. 오라버니와 아버지에게 건네주면 그들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이게 있으면 장군부는 패를 늘릴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중요한 편지를 명제로 보내다 약탈당하면……”
사경행은 심묘의 걱정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묵우군 사람이 가면 돼. 그동안 묵우군이 편지를 전달하면서 남에게 약탈당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심묘는 안심하며 사경행에게 배랑의 편지를 건넸다.
“너무 늦었어. 그러니 이제 좀 쉬자.”
“어디가 늦었어요? 하늘이 이제 막 어두워졌는데. 배 선생을 찾아올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그의 안전은 보장해야 해요. 다친 사람인데 만약 또 습격을 당하면…….”
의아한 심묘가 말했다.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사경행의 품에 가로로 안겼다. 사경행이 심묘를 침상으로 던지며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너, 배랑에게 계속 관심을 보일 거야?”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