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장 (71/71)

64장

예왕부로 돌아가는 길 위, 심묘는 현덕 황후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비는 일단 ‘모자의 평안’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현덕 황후는 어떠한 문제도 만들지 않을 테니 겉보기에는 매우 원만한 결말이지만, 자신은 어찌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예왕부로 돌아오니 하늘이 곧 밝아질 것 같았다. 지금 다시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쉴 기분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귀가한 걸 본 곡우와 경칩이 얼른 음식을 준비했다. 심묘와 사경행은 방문을 닫고 탁자에 앉았다. 심묘는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정비마마가 임신했으니 고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인정과 도리에 따르면 영락제에게는 자식이 없으니 정비가 품은 아이는 진귀했다.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의외의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장래의 태자는 그녀의 아들일 터였다. 고가는 정비의 아이를 등에 업고 다시 거침없이 활보할 터였다. 그러나 현덕 황후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영락제에게 다른 아이가 있지 않은 이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주 의아했다. 영락제의 고가 처리 계획은 이대로 좌초되는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폐하는 이미 고가에 손을 썼어. 정비의 임신과는 상관없어.”

사경행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정비 배 속의 아이와 고가의 결말은 다른 일이라는 뜻이었다. 정비는 아이 때문에 잠시 목숨을 보전할 뿐이고, 고가는 계획대로 멸문된다는 얘기. 심묘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마마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의아했어요. 황후마마가 유산한 이유가 정비마마 때문이라면서요? 고의 여부를 떠나서 황후마마의 성격이 아무리 너그럽다 해도 어떻게 정비마마가 오래도록 평안한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나요?”

심묘에게 차를 따라주던 사경행이 멈칫했다. 심묘는 그를 주시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폐하는 왜 지금까지 자식이 없는 거예요? 고의인가요? 아니면 부득이한 건가요?”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영락제에게 후손이 없는 것은 기이했다. 모든 황제는 후손이 많길 바랐다. 황자가 많을수록 서로 세력을 나눠 조정이 쉽게 안정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전생의 부수의도 자식이 적지 않았다. 사실 영락제의 정치적 업적이 출중하고 백성도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데도 지금까지 조정에 암류가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대를 이을 후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에 조정 신하들이 상당한 불안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의 황제에게 자식이 없다면 영락제처럼 조정의 균형을 유지하며 집권하긴커녕 진작에 황제의 옷을 벗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묘했다.

“알고 싶은 거야?”

“당신이 황실 사냥터에서 돌아온 후 인사불성일 때부터 난 일의 변화를 예감했지만, 당시 난 대량의 국세를 잘 몰랐기에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지요. 그래서 봉두장에 적염 도장을 찾아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렇게 또 한번 아무 도움도 못 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이 큰일을 할 때 나도 조력자로 돕고 싶어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면 도우려는 마음 하나로 어떻게 도울 수 있겠어요?”

사경행은 심묘를 바라보다가 탄식했다. 안심 반, 자조 반이 담긴 탄식이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교교는 계략에 능할 뿐 아니라, 자상하기도 하구나.”

심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날 밥만 축내는 머저리라 여기면 안 돼요.”

“내가 감히 어떻게 널 그렇게 얕보겠어. 네가 알고 싶어 하니 나도 숨기지 않을게. 너는 내게 비참한 꿈을 이야기해줬지. 지금 내가 해주는 이야기는 꿈이 아닌, 진짜로 일어난 일이야.”

미소를 띠고 있던 사경행의 시선이 점점 날카롭게 변했다.

“대량에서 정경성까지는 속도를 내도 3개월은 지나야 도착해. 넌 내가 왜 임안후의 아들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지? 오래도록 출신을 알면서도 대량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도 말이야.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갈 수 없었어.”

사경행의 진짜 이름은 사연으로, 자는 경행이었다. ‘숭고한 덕행을 몹시 우러르니 바르게 행한다’라는 뜻이었다. 자만으로도 이를 지은 사람이 사경행이 어떻게 자라길 바랐는지 알 수 있었다. 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의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부황인 효무제, 사의륭이었고 그의 자를 지은 사람은 그의 모후인 소 황후, 경현 황후였다.

사의륭은 즉위 전, 대량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황자였다. 그는 병권을 쥐고 대량을 안정시켰다. 재능 있고 호방하며 기개가 늠름했다. 그러나 대량 황실은 장자가 황위를 잇는 규칙이 있었기에 막내인 그는 황위에 오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규칙이 구속하기에는 사의륭이 너무 뛰어났다. 뛰어난 사람은 야심이 아예 없거나 야심이 넘쳤는데, 애석하게도 사의륭은 후자에 속하는 부류였다. 게다가 태자는 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했기에 사의륭은 자연스럽게 황위 쟁탈의 길에 뛰어들었다.

사의륭의 길은 매우 순조로웠다. 그는 선천적으로 뛰어났으며 황후의 소생이었다. 게다가 군 공로가 혁혁했다. 사의륭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형, 태자를 해칠 계획을 꾸몄다. 황후는 화병으로 죽고 황제는 제압당했다. 사의륭은 순탄하게 황위에 올라 효무제가 되었다.

황위 쟁탈 도중에는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혈육의 정, 남녀 간의 사랑이 그 예였다. 사의륭은 그걸 잘 알았고 모두 떨쳐내 끝내 원하는 바를 쟁취해냈다. 애초에 그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야심가인 그는 승상 소가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소가는 문신 안 우두머리로, 소가 딸을 황후로 삼으면 문신 세가 대부분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소가 딸은 절색의 용모를 지닌 데다가 총명하고 대범했지만, 효무제에게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 부부의 인연은 매우 계산적이었다. 그래서 효무제와 경현 황후 사이에는 불화가 없었다. 서로에게 철저히 예의를 지켰으니 사이가 나쁠 수 없었다. 명군 효무제와 선량한 성품의 경현 황후는 보기 좋은 부부였다. 경현 황후는 오래지 않아 지금의 영락제인 사치를 낳았고, 그는 태자가 되었다. 대량의 국토는 점차 커졌다. 국력은 삼국 중 제일이 되어 모든 게 원만하고 좋아 보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환과 고난을 함께했다고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현 황후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에 효무제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였다. 효무제는 야심이 있었고, 경현 황후는 신중했다. 효무제의 수완은 고명했고, 경현 황후도 지혜로워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공동의 적이 사라졌을 때 그들의 창끝은 서로를 겨누게 되었다.

야심가인 효무제는 본인이 야심과 욕망 때문에 황위를 빼앗았기 때문에 소가도 황실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야망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경현 황후가 현량함과 총명함을 드러낼수록 효무제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소가의 세력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효무제는 후궁을 많이 들였는데, 그중에는 소가와 세력이 비슷한 세가 출신들도 있었다. 그는 그녀들을 발탁해 조정에서는 소가와 그 가문들이 다투도록, 후궁에서는 경현 황후와 세가의 여인들이 다투도록 유도했다.

경현 황후는 줄곧 효무제를 위해 궁을 성심성의껏 관리했다. 그러나 세가 여인들이 점점 자신들의 아들을 위해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계략이 사치의 태자 위치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이르자 경현 황후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유약한 여인이라도 아이를 보호하려면 맹수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경현 황후는 유약한 토끼가 아니었다. 그녀는 소가에서 가장 우수한 딸이었다. 똑똑한 그녀는 격렬히 반격하기 시작했다.

효무제와 혼란스러운 시절을 보낸 경현 황후의 능력은 부귀하고 편안하게 살던 세가의 여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도전하는 건 굴욕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에 불과했다. 경현 황후는 연승했고, 사치는 평안 무사했다. 그녀의 두뇌와 강세는 후궁 여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녀가 진압에 나선 이후로 감히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총명한 경현 황후도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효무제를 언짢게 한 것이다.

효무제는 점점 경현 황후를 대놓고 방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소가를 견제하기 위해 친자식인 사치도 예뻐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경현 황후의 실수를 찾아 그녀의 적수들에게 알려주었다. 적수들이 다시 싸울 수 있도록 무기를 손에 쥐여준 것이다. 싸움에 불을 다시 붙인 효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경현 황후의 적수들을 두둔하며, 경현 황후가 무엇을 하든 그녀가 틀렸다고 비난했다. 그는 경현 황후와 소가를 억누르는 데 조금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경현 황후는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여전히 효무제를 부군으로 여겼다. 지혜로운 사람도 어리석을 때가 있었다. 경현 황후는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고 사치가 평탄하게 성장해 대량을 무사히 이어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효무제가 친자식인 사치를 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효무제는 갑자기 경현 황후에게 부드럽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경현 황후는 그가 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소 승상이 ‘자발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효무제는 수완이 고명한 사람이었다. 소가 역시 매서웠지만 효무제만은 못했다. 소가는 오랜만에 황후를 배출했기에 그녀를 위해 소가의 희생을 감수했다.

경현 황후가 일을 알았을 때는 이미 되돌릴 기회도 사라진 후였다. 그녀는 효무제의 부드러운 행동이 모두 계산된 것이라는 걸 깨닫고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이때 그녀는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배 속 혈육은 사치와 달랐다. 효무제의 거짓되고 계산적인 행동 아래 생겼으니까. 경현 황후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아들이라면 그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으로 자랄까 두려웠다. 아이의 부친은 가족을 해칠 음모를 꾸미고도 수치스러운 줄 모르는 검은 야심가이기에, 아이는 그를 닮아서는 안 되었다. 사람의 진심을 좋을 대로 이용하는 비열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경현 황후는 임신했기에 전처럼 많은 일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이 틈을 타 사치를 공격했다. 사치에게 약을 먹인 것이다. 매우 강한 독약이었다. 소 승상과 우정이 있는 고가 가주가 나서지 않았다면 사치는 바로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치는 살았으나 고가 가주는 독이 이미 온몸에 퍼졌다고 했다. 시간을 버는 것일 뿐, 사치는 서른다섯 살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다. 게다가 독은 그의 자식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사치가 자식을 낳으면 선천적으로 허약할 테니 좋은 일이 아니라고 했다.

고가 가주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신의였다. 그가 한 말이니 사치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과 같았다. 사치의 목숨을 노린 사람은 그의 목숨을 얻지 못했으나 그의 일생을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현 황후는 소가에서 가장 우수한 적녀로 경현 황후가 되어 어진 명성을 천하에 떨친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가족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은 음모에 빠져 마흔 살까지도 살지 못할 운명이었고, 배 속 아이는 악랄한 계책 아래 만들어진 결실이었다.

독을 쓴 사람을 찾아내니 효무제가 새로 선발한 총비였다. 경현 황후는 총비를 어화원으로 끌고 와 그녀의 죄를 엄하게 물었다. 당시 어화원 안에서 지켜보던 궁녀와 태감이 몇 번 기절할 정도였으나 경현 황후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효무제는 총비를 매섭게 욕했고, 직접 총비의 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경현 황후를 위로했다. 경현 황후는 그의 온화한 말을 들으며 마음을 얼음처럼 차갑게 굳혔다.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효무제가 이 일의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경현 황후는 효무제와 오랫동안 부부로 지냈을 뿐, 실상 자신은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효무제가 사정을 아는지 몰라도, 적어도 총비는 자신의 적수로 삼기 위해 그가 일부러 뽑은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나 사람은 그 때문에 죽은 셈이었다.

경현 황후는 재난을 당한 아들 때문에 다른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하는 어머니인 척 연기하며 효무제를 방비했다. 사치의 독이 완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밖에 퍼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했으나, 아무리 조심해도 장래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배 속 아이가 곧 태어난다는 것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복중 아이가 아들이라면, 장래 사치에게 일이 생겨 아이가 사치를 대신해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이 아이 역시 제2의 사치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딸이라도 황실에 묶일 터였다. 경현 황후는 아이가 궁에 남아 강제로 운명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자신은 장래 반격을 꾀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후 소가와 사치가 겪은 고통을 갑절로 돌려줄 셈이었다. 그런데 막 태어난 아이가 있다면 좋지 않았다. 아이 때문에 대업을 그르칠 수 있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때 살쾡이를 태자와 바꾸는 병법이 떠올랐다. 진짜 태자는 그가 얻을 모든 것과 멀리 떨어지고, 살쾡이로 그에게 속하지 않는 것들을 얻는 병법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연, 자는 경행이다. 이 아이가 성장해 대장부가 되면 음모와 계책은 쓸 수 있어도 절대로 사람의 진심은 이용하지 말라고 하거라.”

아이를 낳은 경현 황후는 비밀리에 심복을 불렀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포대기 속 아이를 한 번 바라본 후 아이를 심복에게 건넸다.

“데려가거라.”

3개월 동안 심복은 명제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도중 말이 죽어 바꿔 탈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사연이 처음으로 인간 세상과 접촉했으나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위험이었다. 그는 도피 생활 중에 옹알옹알 말을 배우며 세상과 교류하는 법을 익혔고, 마침내 정경성에 도착했다.

정경성의 임안후부는 분위기가 어두웠다. 옥청 공주에게 유산의 기미가 보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복은 원래 경현 황후의 명령대로 관직을 하지 않는 평범한, 그러나 재산은 많은 부유한 가문에 사연을 보내 그가 조정의 계략과 분쟁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거리를 정탐하고 있을 때 우연히 옥청 공주의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아이 이름 역시 경행이라 지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심복은 이 우연을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찬 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렸다. 비바람 소리가 여인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아이의 점점 약해지는 숨소리를 덮었다. 사씨 성의 경행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는 사연과 매우 인연이 깊었지만, 그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 포대기를 껴안은 심복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그는 곧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후 사연은 사경행이 되었다. 자가 아닌, 이름으로 경행의 삶을 살게 되었다. 임안후부 사 소후야로, 경현 황후의 기대와 옥청 공주의 희망을 품은 채 그는 이 세상에서 숨을 쉬었다.

심복이 처음 선택했던 부잣집은 하루아침에 멸문을 당했다. 내막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으나 경현 황후의 수를 눈치챈 효무제가 만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수를 쓴 게 분명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어쨌든 심복이 결정을 바꿔 사경행이 생사의 기로에서 도망치도록 도왔으니 이 역시 운명이었다.

임안후부에는 좋지 않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방 씨와 그녀 소생의 두 아들이 계속 못된 짓을 했기 때문이다. 사경행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것은 부친 사정의 총애였다. 그러나 사정의 총애가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사정이 출정해 부에 없을 때 어린아이인 사경행은 맹수의 입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경현 황후의 심복이 몰래 돕지 않았다면 그는 흙이 되어 진정한 임안후부의 적자와 지하에서 만났을 것이다. 게다가 명제 황제는 암암리에 사가를 억눌렀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사경행은 무사히 성장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장래의 험난한 여정과 마주할 때 버틸 수 있도록 잔혹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게 한 심복의 혜안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냉소적인 얼굴로 제멋대로 말을 타고 정경성을 돌아다녔다. 그는 짓궂었으며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경현 황후의 기대처럼 대장부로, 홀로 설 수 있는 남자로 자랐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함부로 조롱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는 모든 진심을 존중했다. 송신 공주에게, 소명풍에게, 임안후에게, 심묘에게 그랬다. 물론 암암리에 적과 바둑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경현 황후는 작은아들을 그리워하며 큰아들을 위한 반격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당신은 대량이 소가 손에 떨어지는 걸 가장 겁내지 않았나요? 당신이 가장 마음을 쓰는 게 이것 아닌가요? 난 당신 것을 빼앗아 짓밟을 거예요. 그때, 당신은 지금까지 한 모든 행동에 조금이라도 후회를 느낄까요?’

경현 황후는 소가에서 나온 딸이었다. 지혜가 많고 계략이 풍부해서 남자에게 지지 않았다. 분노한 그녀는 원기가 왕성한데 효무제는 늙기 시작했다. 궁의 여인들은 그의 마음을 분산시켰고, 가지고 있던 야심도 근심 걱정이 사라진 후 점점 사그라들었다. 효무제는 안락한 죽음을 맞이했다. 효무제가 눈을 감기 직전, 오직 경현 황후만 그의 곁에 있었다.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와 저는 부부니, 폐하께서 저승길을 걸으실 때 외롭지 않게 도와드릴 거예요. 폐하께서 총애한 비빈들 전부 폐하와 함께하도록 할 거예요. 그리고 폐하의 후손들도. 태자를 제외하고 한 명도 빠뜨리지 않을 거예요.”

효무제는 눈을 크게 떴으나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경현 황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구부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작은아들도 잘 지낸답니다. 폐하께서 명제로 사람을 보내셨으나, 사람을 잘못 죽이셨어요. 조정이 편안해지면 제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거예요. 대량을 이어받을 사람이 있는 셈이지요. 저는 마음이 여립니다. 두 사람은 성이 아직 사씨예요. 만일 제 마음이 폐하처럼 단단했다면 대량의 왕조는 바뀌었겠지요. 폐하, 잘 가세요. 대량은 제가 이어 받겠습니다.”

침상 앞에 앉은 경현 황후는 미소 지었다. 아주 온화했다. 효무제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다.

경현 황후는 경현 태후가 되고 사치는 영락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경행은 아직 명제에 있었다. 그는 어둠 속 길을 더듬어 나갔다. 사경행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생부가 자신을 뒤쫓아 죽이려 했고, 생모가 생부에게 어떤 식으로 시달렸는지를 포함해서 모두 알았으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경현 태후는 그녀의 말처럼 대량 후궁을 깨끗이 정리했다. 효무제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황후 모자를 겨눴던 거만하고 횡포한 비빈들은 모두 효무제의 저승길 길동무가 되었다. 경현 태후는 영락제가 된 사치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늙어서 조정 일에 많이 관여하지 못한다. 후궁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이후로 이 후궁 안에 소인배는 없을 것이다. 너도 약조해다오. 이 강산을 네 손바닥에 단단히 쥐고 영원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하지 않겠다고.”

영락제는 모후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황권은 약했다. 효무제의 심복이었던 고가와 엽가가 대단히 교활한 방법으로 권력을 훔쳐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세가는 망해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망하지 않은 두 세력은 뿌리 뽑기 어려웠다. 영락제는 암암리에 방법을 찾아 이 양가를 처리하려 애썼다.

그러나 영락제의 힘이 되어주던 경현 태후가 2년 후 불시에 죽었다. 그녀는 고가의 상소를 보다가 갑자기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고가는 그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지쳐 생명이 다한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현 태후는 그 전날까지도 생생한 표정으로 올해 대전을 새로운 형식으로 바꾸고, 방법을 찾아 사경행을 대량에 데리고 오자고 말했으니 믿기 어려운 변명이었다.

세상일은 예측하기 어려워서 경현 태후는 평생 작은아들 사연과 다시 만날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녀의 죽음으로써 서로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떨어지게 되었다.

* * *

경현 황후의 일생은 한 편의 소설 같았다. 승상의 귀한 딸에서 호사스러운 황후가 되고, 남편의 배신과 모함으로 아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물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처럼 나중에 후궁을 깨끗이 처리했으니 후련한 부분도 있었다. 그녀는 역경 속에서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끝까지 유감스러운 일은 있었다. 영락제의 중독을 완치할 수 없었던 것과 사경행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락제와 사경행은 경현 황후를 쏙 빼다 닮았다. 젊은 시절 경현 황후는 대량에서 열렬히 추종하는 절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경현 황후의 미모뿐 아니라 그녀의 머리도 이어받았다. 영락제는 황실에서 지냈으니 아무래도 효무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계략을 쓸 때, 영락제는 각 방면의 세력 균형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척 관계를 통해 힘을 만들었지만 사경행은 달랐다. 그는 멀리 명제에 있어 조금도 효무제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 경현 황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컸다. 그는 명제 황실과 대립해야 했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절대 비열한 사람은 아니었다.

심묘는 사경행의 신세가 이처럼 곡절이 많고 기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측을 훨씬 더 웃도는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경현 황후의 일생을 들은 그녀는 내심 여러 번 탄복했다. 경현 황후와 자신의 전생이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러나 경현 황후는 승자였다. 자신은 경현 황후와 달랐다. 아무리 앞날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자신은 스스로 혈육과 떨어져 지내겠다고 결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경행은 심묘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마음에 두지 말라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날 동정할 필요 없어. 난 모후를 보지 못했으니 깊은 정은 없어.”

그는 광풍 속에서 홀로 성장했다. 아버지의 위협에 쫓기고, 어머니를 만나지도 못했으나 평범한 사람보다 배포가 컸다. 그는 많은 일을 웃고 넘어갔다. 그다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사람에게 기대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묘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난 당신과 마지막까지 함께할 거예요.”

사경행의 눈빛이 움직였다. 그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날 동정할 거라면 몸으로 위로해주는 게 낫지 않겠어?”

사경행이 웃은 순간 슬픈 분위기는 사라졌다. 심묘는 그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면 폐하의 병세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전 고가 가주는 영락제가 서른다섯 살 이상 살지 못할 거라 단언했다. 그렇다면 영락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올해 폐하께서 서른여섯이 되셨고 축하하는 연회도 열었지. 때때로 단언은 불확실할 수 있지. 하지만 폐하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단 건 사실이야.”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고가와 엽가 사람은 이 일을 알아요?”

“당시 효무제가 죽은 후 모후가 궁에서 내막을 아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는군. 지금 이 세상에서 폐하의 병을 아는 사람은 고가 가주, 나와 너, 황후마마밖에 없을 거야.”

심묘는 경현 황후의 수완에 놀랐다. 경현 황후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뒷걱정을 없앤 것이었다.

“그럼 황후마마는 폐하께 시집가기 전에 폐하의 병세를 알았나요? 아니면 시집간 후에…….”

사경행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너는 뭘 묻고 싶은 거지?”

심묘는 현덕 황후가 영락제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에게 시집을 갔을지 의문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과부로 산다는 뜻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집간 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일생을 속은 셈이었다.

“너라면 무슨 선택을 할 거지?”

“내가 당신에게 시집갈 때는 당신을 위해 과부로 살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사경행의 물음에 심묘는 단호하게 답했지만 번민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말은 솔직했지만, 사경행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사경행은 도리어 매우 기뻐했다. 그는 심묘를 품에 안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 지었다.

“오? 지금은 과부로 살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뜻이지?”

그는 생각에 잠긴 심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넌 당초 내게 시집올 때도 날 아주 사모했던 것 같은데?”

“누가 당신을 사모했다고!”

사경행이 얼마나 세게 끌어안았는지 심묘는 그의 품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묘는 화를 내며 그를 밀쳤다. 사경행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난 여자를 아끼니 너는 절대 젊은 나이에 과부로 살게 되지 않을 거야.”

심묘는 기가 찬다는 듯 미소 지으며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안심해요. 지금 과부로 평생 수절하는 여자는 몇 명 없어요. 과부로 살기에는 몹시 힘든 데다가, 농서성에는 남자가 웃음을 파는 청루도 무척 많다네요.”

심묘는 이전처럼 사경행 앞에서 단정한 언행을 유지하려 애쓰지 않았다. 때때로 사경행이 화를 낼 말도 서슴지 않았다. 과연 사경행이 동작을 멈춘 채, 심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자 기루를 찾아가려고?”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온화했으나 심묘는 이유 없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경행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큰 걸음으로 침상을 향해 걸어갔다. 놀란 심묘가 비명을 지르자 사경행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이렇게 내게 ‘노력하라’하니 남편으로서 감히 게으름을 피울 수 없지.”

바깥을 지키던 철의는 불시에 들리기 시작한 두 사람의 소리에 당황했다.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어 그의 검은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한참 후, 두 사람은 한바탕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경행의 팔뚝을 베고 있던 심묘가 무언가 떠오른 듯 그를 밀치며 물었다.

“당신,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황후마마는 알았던 거예요, 몰랐던 거예요?”

사경행은 탄식했다.

“황후마마같이 똑똑한 여인이 모르고 혼인했다면 일이 커졌겠지. 모후는 폐하를 위해 아내를 고를 때 황후마마를 입궁시켜 다 말했어. 모후는 일생, 사람의 진심을 이용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셨으니까. 설령 세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상대에게 도리를 지키셨지.”

“다 알고도 시집오다니, 황후마마는 진심으로 폐하를 좋아하셨나 봐요.”

사경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덕 황후의 친정은 세력을 떨치는 가문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외부와 교류가 많은 세가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경현 태후는 영락제를 위해 현덕 황후를 아내로 골랐다. 현덕 황후의 친정이 긴 세월 동안 왕조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온 점을 높게 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덕 황후는 이름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며 성실했다. 총명하며 대범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평생 동반할 사람이니 인품은 더욱 중요했다. 현덕 황후는 인생의 단맛과 부귀뿐 아니라 쓴맛과 고통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대갓집 규수로 시련을 감당할 기량과 도백이 있었다.

경현 태후의 예상대로 현덕 황후의 친정은 권세를 믿고 날뛰지 않았다. 이전처럼 충직하고 온후했다. 현덕 황후가 영락제에게 정이 있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황실에서 진정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현덕 황후는 영락제가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평온하게 지냈다.

“단지 권세를 위해 시집오신 거라면 황후마마도 앞으로 자신을 위해 생각하셔야 해요.”

심묘의 말에 사경행은 웃었다.

“황후마마는 매우 똑똑한 분이시지. 하지만 탐욕이 없어.”

탐욕은 없는 게 가장 좋았다. 그 한 단어로 인해 많은 비극이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재물을 좋아하고 권세를 탐하면 부귀영화를 욕심내고 감정을 원하게 되는 법이었다.

“지금 정비마마가 임신하셨는데, 당신은 고가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

심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경행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무심하게 말했다.

“정비의 임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전복시킬 수도 있어. 고가는 후손에 기대면 근심 걱정이 없을 거라 여기지만 잘못 생각한 거야. 후손이 있는 황제, 반대편의 사람들을 끌어올 수 있겠지. 고가 수하 병사 중 기회주의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고가 편을 들 수 있으면 황실 편을 들 수도 있어.”

“그 점만 가지고는 불가능하지 않아요?”

심묘의 물음에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넌 어떻게 생각해?”

“오래 준비했다니, 정비마마의 임신은 의외인 것이 분명해요. 처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리라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정비마마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치고, 원래 어떻게 고가를 처리할 생각이었나요?”

“간단해. 폐하는 등극하고 나서부터 죽 고가와 엽가 양가를 처리할 방법을 찾으셨지. 여러 해 고가가 사병을 거느리고 그 수를 불린 증좌를 찾아왔고, 그 증좌가 거의 다 수집되었으니 밝힐 때가 됐어. 증좌가 확실하니 세상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지. 이게 첫 번째야. 두 번째는 적의 적을 포섭하는 거지. 고가의 병권은 대량에서 강하지만 대량에 다른 장군이 없는 건 아니야.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거의 폐하의 사람이 되었어. 게다가 묵우군도 계속 힘을 비축했어. 이제 증좌를 드러내고, 고가에 사형 집행을 선고하면 돼. 하지만 고정순은 일생 목이 뻣뻣했으니 이번에도 죄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황실에 반기를 들 거야. 일망타진하기에 딱 좋지.”

심묘는 사경행과 영락제가 사람을 처리하는 수완이 직접적이고 유용한 것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경현 황후에게서 같은 피를 물려받은 형제라서 그런 것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구태여 여러 해 준비할 필요가 있나요? 더 일찍 맞설 수 있었을 텐데.”

심묘의 말처럼 일찌감치 시작했으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사경행이 그녀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아가씨,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우리 사가 남자들은 간단한 것을 좋아해. 세력이 엇비슷한 것은 좋아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철저히 해야 하지. 고가의 기반은 너무 깊어서 일찍 정리한다면 깨끗이 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무르익어 깨끗이 뽑아낼 수 있으니 더 좋지 않아?”

심묘가 미간을 찡그렸을 때, 사경행의 말이 또 들렸다.

“네가 도박을 좋아하는 것을 알아. 세력이 미미할 때도 감히 명제 예친왕에게 계략을 꾸몄지. 하지만 너무 위험해. 난 손해가 큰 걸 좋아하지 않아. 희생이 많으면 이겨도 진 셈이야.”

심묘는 사경행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당시 자신은 감히 혼자서 예친왕과 대치했고 부수의에게도 덤볐다. 그러나 조약돌로 놋그릇을 쳐 펴는 모양새로 계속 고군분투하다 보면 결국에 가장 많이 상처 입는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게다가 그 후 심가도 점점 연루되어 더더욱 많은 것에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이전같이 안심하고 손쓸 수도 없었다. 사경행의 말이 도리와 이치에 맞았다.

이번에는 특히 그랬다. 세력이 엇비슷할 때 겨루면 시간이 지체되어 가장 큰 손해 보는 쪽은 대량의 백성이었다. 지금같이 충분한 실력을 키운 후, 적을 일망타진하면 손쉬우면서도 대가도 가장 적게 치를 수 있었다.

“고가는 그렇게 정리하고, 엽가는 어떻게 해요?”

심묘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물었다.

“이전 폐하는 엽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 엽가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고 상태가 좋지 않은 공자만 있으니까 상황을 바꾸지 못해. 그러나 네가 내게 ‘꿈’ 이야기를 했으니 엽가 형제는 원수야. 원수를 어떻게 편으로 끌어들이겠어? 그건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야. 걱정하지 마. 네 원수는 내가 대신 갚아줄 테니.”

한참 침묵하던 심묘가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말하기는 쉬워도 일찍 계획한 바를 실제로 바꾸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 계획과 관련된 모든 일을 다시 생각해야 하니 많은 말썽이 생길 수 있었다. 계획을 짤 때 변수가 생기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거늘, 사경행은 자신을 위해 장래의 위험을 모두 짊어지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다니, 이번 생은 정말 운이 좋았다.

심묘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본 사경행은 심묘의 턱을 들어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쯧쯧 혀를 찼다.

“어째 감동한 모양이야? 그럼 몸으로 내게 보답하는 게 어때?”

심묘는 사경행을 팍 밀쳤다. 그가 진중한 말을 오래 잇지 못하는 병을 앓는다는 사실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엽가는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니까요?”

심묘가 목소리를 높이자 사경행은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어렵지 않아. 엽가는 우리 황실과 함께 못하면 당연히 고가와 한편이 될 거야. 고가, 엽가 양가의 사적인 왕래에 관련된 증좌를 찾으면, 고가에 일이 생겼을 때 엽가도 함께 처리할 수 있어. 넌 똑똑하면서 어떻게 모함 하나 할 줄 몰라?”

심묘는 어안이 벙벙해 그를 바라보았다. 사경행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겠다는 말을 아주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모르고 보면 그가 광명정대한 큰일을 하는 줄 알 터였다. 게다가 일국 승상을 모함하는 일은 결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엽가는 사실 고가보다 처리하기 쉬워. 엽가는 조정 문신과 세력이 복잡하게 엮여 있으나 고가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하면 엽가도 연루될 테지. 그를 따르는 문신들도 바보가 아니니 모두 엽가와 관계를 분명히 할 거야. 게다가 효무제가 남긴 양대 심복은 세력이 소모되어 예전만 못해.”

심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 힘이 소모된 게 아니라, 당신들의 힘이 그만큼 성장한 거예요.”

새끼 호랑이가 마침내 백수의 왕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산림 속에서 자기가 왕이라며 설치던 여우들은 이제 정리될 차례였다.

“날 존경하는 거야?”

사경행이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심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히 말했다.

“네. 참 존경할 만하네요.”

“부인이 이런 성원을 보내니 남편으로서 부인의 시중을 잘 들어야겠지.”

엄숙하게 말한 사경행이 몸을 굴려 심묘를 자기 가슴 아래에 가뒀다.

* * *

엽부.

엽미와 엽각이 방에서 이야기 중이었다. 탁자 위에는 아주 정교한 솜씨로 만든 간식거리가 놓여 있었다. 엽무재는 거만한 학자이지 가난한 학자는 아니었다. 방 안 진열은 매우 우아했고 서예와 그림, 난초가 많았다. 자세히 보면 그 서예와 그림은 모두 명가 진품이었다. 난초도 상등의 화초이며 하다못해 탁자 위 문진도 값진 물건이었다. 엽가의 부귀가 거짓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엽미는 연꽃이 수놓인 선명한 노란색 윗옷과 긴치마를 입었다. 옷감과 재봉 솜씨가 아주 좋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예쁘게 생긴 그녀가 이렇게 단장하니 궁중 귀인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듯, 아름다운 정취가 온몸에서 흘렀다. 엽각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의복과 장신구는 이전처럼 소박했으나 질은 몇 단계나 더 높아 보였다. 엽가가 두 사람에게 아주 잘해주는 게 분명했다.

“누나, 이전에 말한 게 대체 무슨 뜻이야?”

엽각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엽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담담히 말했다.

“엽 부인이 딸을 찾는대서 내가 그 딸이라 말했다는 얘기야. 그간의 일이 너무 혼란스러워 내가 진짜 부인의 딸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된 게 분명했거든. 덕분에 우리가 이처럼 좋은 머물 곳을 찾았으니 잘됐잖아.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상점은 돌볼 수 없어. 게다가 지금 관리 집안 딸이 되었으니 상점의 딸보다 훨씬 좋은 셈이지. 너도 똑같아. 엽 승상이 있으니 네 벼슬길은 아주 순조로울 거야.”

엽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런 건 알아. 그러나 엽무재는 근본적으로 나와 누나의 신분을 믿지 않잖아?”

하늘에서 공짜 떡이 떨어지는 일이 있다는 말을 엽미와 엽각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엽가 사람이 그들을 찾아온 후 두 사람은 행운을 믿게 되었다. 엽가 사람은 십여 년 전 엽 부인이 아이를 낳을 때 나쁜 사람의 이간질로 딸이 바깥에 떠돌게 됐다고 말했다. 엽미한테 그녀가 잃어버린 그 딸이랬는데, 그 사연은 진짜일지 몰라도 그 딸이 그녀라는 얘기는 거짓이었다. 당연했다. 엽미와 엽각은 친남매니까.

그러나 사람은 편집적일 때가 있다. 아주 이성적으로 보이는 엽 부인 역시 그랬다. 그녀는 딱 잘라 엽미가 그녀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엽무재가 어떻게 타일러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굳이 엽미와 관계를 맺어 엽각도 엽부로 들여왔다. 진실을 아는 남매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을 때, 엽무재가 두 사람을 만나러 왔다. 엽무재는 부인과 달리 정신이 똑바른 모양인지 단도직입적으로 엽미 남매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다음에 그가 한 얘기는 예상외였다. 그는 엽 부인을 저지하는 대신 남매의 거짓말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엽무재가 자기들에게 엽가 자녀의 신분을 주겠다고 했지만, 대단히 똑똑한 엽미는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득실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멋모르고 감히 뛰어들었다가 불구덩이에 갇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엽가의 상황을 알아본 후 지금 엽가는 황실과 미묘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엽가에 상태가 좋지 않은 공자 한 명만 있다는 사실에다가 엽가와 황실과의 힘겨루기를 더하니 답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뒤이을 후손이 없으니 엽무재는 당연히 ‘자식’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서로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절름발이 공자는 경쟁자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엽부의 부귀는 최후 엽각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었다. 엽가의 이름에 의지해 엽미 자신 역시 호사스러운 가문에 시집가면 앞날은 잘 풀릴 것이었다. 엽무재가 나중에 다른 생각을 품어도 자신들은 바보가 아니니 당연히 원하는 물건을 얻을 터였다.

그래서 자신들은 엽가 소저와 공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엽 부인은 진정으로 자신들을 믿었으나 엽무재는 자신들을 방비했다. 그러나 이쪽의 입장도 다를 것 없었다. 엽가는 그들에게 발판이자 후원자였다. 위로 더 빨리 올라갈 수 있게 도움을 받을 뿐이었다.

“신분을 믿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와 나는 상인 가문에서 자란 장사꾼이야. 지금 이건 손해야. 난 이렇게 상황이 변할 줄은 예상 못 했어.”

엽각은 엽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나, 더 분명히 이야기해.”

“예전에 난 엽가가 대량에서 힘이 크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여겼어. 황실과의 관계가 미묘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요 며칠은 이상해. 엽가는 결코 내 생각처럼 좋은 상황이 아니야. 오히려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 같아. 물론 일이 잘 해결돼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도 있을 테지만, 만일 하나 잘못되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될 거야.”

엽각의 안색이 바로 나빠졌다.

“누나 말은 지금 엽가의 국세가 아주 위험하다는 거네?”

엽미는 냉소했다.

“위험한지 아닌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엽 승상은 늙은 여우라 깊이 숨겨두고, 우리가 엽가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해. 엽 부인은 날 믿으나 엽 승상을 더욱 믿지. 부인에게 정확한 사정을 듣는 건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려울 거야. 어쨌든 나는 불안해. 아주 좋지 않다고 느껴.”

엽각이 곰곰이 생각해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누나의 생각이 너무 많은 걸지도 모르지. 엽가는 대량의 승상 세가야. 어떻게 누나 생각 같은 상황이겠어? 엽가 사람이 우리를 지켜보는 건, 우리가 엽가 사람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야. 어쨌든 우리는 같은 배에 탔어. 그렇지 않으면 누나가 예왕비마마 암살 일을 꺼냈을 때 엽가도 동의하지 않았을 거야. 애석하게도 예왕비마마의 명이 길었던 거지. 그 서생이 구해줘서 재난을 피했어.”

엽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예왕비마마는 정말 운도 좋아.”

그 웃음을 지켜보던 엽각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하지만 누나, 왜 엽가 사람에게 예왕비마마를 죽이라고 한 거야? 정말로 예왕부에 들어가고 싶은 거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거야. 고려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엽미가 멈칫했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왕비를 처음 봤을 때, 그쪽을 이 세상에 놔두면 안 되겠다 느꼈다면 넌 믿겠어?”

엽각은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고, 엽미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막 엽가 사람을 따라 농서성에 도착했을 때, 예왕은 부상을 입은 채 황성 사냥터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엽무재는 자신을 통해 예왕부와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는 자신에게 약초를 주며 포상이 걸린 방을 보고 찾아온 척하라고 했다. 젊고 아름다운 자신을 예왕의 은인으로 만들어 예왕부에 머물게 한 다음, 그와의 사이에서 모종의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엽가 사람으로서 예왕을 도와주면 엽가 사람은 의심을 면할 수 없었다. 가족을 찾으러 왔다가 우연히 엽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했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로서 예왕부의 대문 앞에 섰다.

그때 처음으로 예왕을 보았다. 자신은 사랑에 목매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어떤 남자도 사랑할 수 있고, 어떤 남자도 버릴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손에 쥔 도구보다 더 유용한 게 있다면 그것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자신에게 화려한 의상이 어울리듯 진귀한 장신구, 부유한 주택을 주는 남자가 당연히 고귀한 부군이었다. 예왕은 그런 자신이 살면서 본 가장 좋은 도구였다.

걸출하고 아름다워서 병색이 완연한 채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천성적인 부귀가 흘렀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더구나 엽무재에게 그가 매우 수완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들은 터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고. 이렇게 괜찮은 도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주 당연했다. 그가 자신을 냉대할수록 반드시 차지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에게 왕비가 있댔으나 첫날에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다만 왕비가 명제 무신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못마땅했다. 무신의 딸이니 대단히 저속하리라 여겼다. 게다가 천리만리 떨어진 나라에 홀로 와서 지지자도 없을 터였다. 그런 왕비 따위는 자신의 상대가 될 자격도 없다고 느꼈다. 예왕비를 처음 본 그날까지는 그랬다.

그날, 예왕비의 옷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머리도 단정하지 않았다.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데도 그녀는 단정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보였다. 고고한 맹수처럼 위세를 드러냈다. 자신은 예왕의 은인이니 가장 영광스러워야 했다. 저잣거리의 백성만도 못한 차림새인 그녀는 난처해야 했다. 그게 이치에 맞았다. 그러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그녀의 손에서 무엇도 뺏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더욱이 예왕비는 자신에게 매우 쌀쌀맞았다. 때때로 자신을 향한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만큼 자신도 그녀가 매우 불쾌했다. 그녀는 부모에게 사랑받고 오라비 역시 그녀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다고 했다. 친한 친구와 자매도 있는 데다 예왕도 그녀를 총애한다고 했다. 냉전 중이라지만,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면 냉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뼛속까지 사랑해야 그 기분이 일거수일투족에 연관되는 법이었다.

자신과 그녀의 처지를 비교할수록 더욱 달갑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이 세상 좋은 것들을 예왕비 혼자 다 누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지식한 그녀는 애교를 부릴 줄도 몰랐다. 대체 어떻게 예왕의 총애를 얻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잘 지내는 것은 가장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은 그녀를 질투하고 혐오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바꾸는 것을 좋아했고, 그걸 장기라고 할 만큼 자신만만했건만 그녀의 것은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그래도 언제나 최후의 방법은 있었다. 예왕비의 것을 가지려면 그녀 자체를 사라지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엽무재에게 그녀가 죽으면 예왕비 자리가 비니 자신이 예왕의 마음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예왕을 뺏고 싶다고 말하는 게 그녀가 자신보다 좋은 걸 얻는 모습을 볼 수 없다거나 그녀에게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터였다. 자신을 통해 예왕부와 관계를 맺으려 했던 엽무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예왕비는 죽지 않았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구해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엽가는 경솔하게 손을 써서 예왕이 엽가를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주시하게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엽무재는 자신에게 화풀이를 했다.

자신은 평생 원하는 물건을 가지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이용했다. 다른 사람의 것을 자유자재로 빼앗았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사람 마음이든 상관없었다. 줄곧 순조로웠는데 예왕비 때문에 처음으로 난관에 부딪혔다. 자신은 그녀의 남자를 뺏지 못했고, 그녀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고, 그녀의 행운을 뺏지 못했다.

“예왕 전하와 예왕비마마의 감정은 매우 돈독하대. 며칠 전 듣자니 두 사람이 함께 농서성을 구경했다는군. 예왕 전하가 예왕비마마를 정말로 아끼시는 모양이야. 예왕비마마의 용모는 누나보다 못한데 무엇 때문에 예왕 전하가 흔들리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엽각이 먼저 침묵을 깼다.

“누나, 지금도 여전히 예왕부에 들어가고 싶어?”

엽미는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어수선했다. 예왕 앞에서 매력을 전혀 발산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흠주에 있을 때는 남자를 이용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왕에게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으니 사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은 고완아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대량의 모든 관가 소저를 보는 시선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엽미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 말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엽 승상이 이 일을 꺼내지 않으니, 지금은 많이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신경 쓸 일은 엽가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내는 거야. 만일 엽가가 재수 없는 일을 당하더라도 너와 나는 연루되면 안 돼. 그것부터 생각해야 해.”

엽각은 떠듬거리며 말했다.

“사실, 지난번에 엽 승상이 날 찾아와 누나를 입궁시킬 생각이 있다고 했어.”

입궁 소리에 놀란 엽미는 갑자기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아름다웠으나 의미심장했다.

“엽 승상은 예왕과 결탁하기 어려워지니까 나더러 황실로 들어가라는 거야?”

엽무재가 얘기한 입궁은, 당연히 황제의 여인으로 입궁하라는 뜻이었다. 엽미는 냉소했다.

“황실엔 지금까지 자식이 없어. 이상해. 만일 입궁했는데 나한테도 자식이 없으면 황제가 서거할 때 난 그와 함께 순장될 거야. 엽 승상은 황실과 친교를 맺으려 할 뿐, 내 생사는 상관하지 않는구나. 난 입궁하지 않을 거야. 엽 승상을 단념하게 해야 해.”

엽미 자신도 입궁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태 황실에 아들이 없으니 이는 황제의 문제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아들이 없는 여인은 후궁에서 오래 살 수 없었다. 후궁은 말할 것도 없이 높은 가문의 후원에서도 아들이 없다면 평생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가만히 본분만 지키며 살아야 했다. 그것도 복을 누리는 자나 그렇게 살아 있을 수 있었다.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은 높은 위치까지 기어올라 한없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자신의 명예와 부귀보다 중요한 건 무엇도 없었다. 지금 황제의 여인이 되는 건 큰 손해였다.

“나도 누나가 이럴 거라 여겼어. 하지만 바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해.”

엽각이 곤란해했다. 엽미는 그를 곁눈질하며 가볍게 물었다.

“너 정말 엽 승상에게 말 못 하는 거야?”

엽각은 엽미의 시선을 피했다.

“누나, 날 못 믿어?”

엽미는 미소 지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하여간 너와 난 신분을 분명히 해야 해. 엽가는 진정한 우리 가족이 아니야. 엽 승상은 야심을 위해 우릴 얼마든지 희생시킬 자야. 난 지금 엽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앞으로 엽가는 어쩔 생각인지 분명히 알아볼 거야. 엽가에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 해도 우리 두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괜한 문제에 휘말릴 수는 없어. 안전하게 물러나는 게 상책이야.”

하지만 엽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누나, 그리 급한 건 없지 않겠어? 만약 위급하다 해도 엽가는 이미 퇴로를 찾아놨을 거야.”

엽미는 냉소했다.

“엽가 사람이? 과연 큰 재난이 눈앞에 닥친 걸 알까나 모르겠어.”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게 들렸다.

“큰누나, 둘째 형.”

엽각이 문을 열자 남종과 엽홍광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엽무재는 특별히 아들을 위해 바퀴가 달린 의자를 만들어 스스로 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 그가 얼마나 절름발이 아들을 애지중지하는지 알 수 있는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엽 부인은 첩실 소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엽홍광은 엽미와 엽각을 아주 잘 따랐다. 여러 해 홀로 외로웠던 차에 갑자기 형과 누나가 생겨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서 엽부에서 자란 아이 같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세상은 엽부가 전부였다. 부를 나간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고 교류하는 친구도 없이 책으로만 세상을 경험한 아이니 성격과 사고가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무슨 일이야?”

엽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엽홍광은 엽무재를 닮지도 엽 부인을 닮지도 않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생모를 닮은 듯, 이목구비가 매우 섬세했다. 그도 미소로 화답했다.

“아버지께서 누나와 형에게 서재로 오라고 하셨어. 난 오는 김에 구연환(九連環)을 가져왔고. 큰누나가 구연환 고수라고 해서 가져왔어.”

엽미가 구연환을 건네받았다.

“내가 풀고 나면 직접 셋째에게 가져다줄게.”

“큰누나 고마워!”

엽홍광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엽미는 살짝 웃으며 엽각을 바라보았다. 엽각의 눈 속에서 가라앉은 기색이 드러났다. 엽무재가 자신들을 서재로 부른 건 새로운 일 처리를 시키기 위함인 게 분명했다. 그는 먹고 입을 것을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은 유용한 바둑돌로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리라고 판단하고 있다면 큰 오판이었다. 자신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머무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거래를 성사할 차례였다.

* * *

정비의 회임 소식은 다음 날 온 대량에 퍼졌다. 이전까지 영락제가 자식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 각종 소문이 분분했다. 가장 많은 이야기는 영락제에게 말 못할 병이 있어서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조정 안 다툼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정비가 회임한 것이다.

정비의 회임은 큰 의미를 가졌다. 지금 그녀가 회임했으니 영락제의 문제는 아닌 듯 보였다. 영락제의 문제가 아니라면 영락제가 의도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았다는 소리도 될 수 있었다. 욕심을 부리는 조정 신하는 딸을 입궁시키려 했다. 다른 쪽에서 중립을 지키던 조정 신하들도 새로운 결의를 시작했다. 정비의 회임은 대량 조정과 후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심묘와 사경행도 이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폐하께 아이가 없으니 후궁이 깨끗하고 분쟁이 별로 없었죠. 하지만 정비마마의 회임이 소문나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딸을 입궁시키려 하고 있으니, 후궁이 어지러워질까 걱정이네요.”

돌멩이 하나 때문에 잔잔한 물이 출렁거리는 건, 가장 무섭고도 쉬운 일이었다.

“낳을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사경행은 가볍게 웃었다. 영락제는 황실 여인들에게 피임약을 마시게 했다. 정비는 의외의 일이었다. 이 의외의 ‘사고’ 때문에 황실은 더욱 확실하게 관리할 테니 앞으로 기회는 터럭만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고가도 너무 성급했네요. 궁에서 소문이 나기 전에 자기네가 먼저 소문을 냈어요. 지금 온 대량이 알고 있으니.”

“빨리 행동할수록 빨리 죽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다니.”

사경행이 피풍의를 걸치자 턱을 괴고 있던 심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경행은 자신을 도와 의복을 정리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네가 만일 내 아이를 회임한다면 나도 온 대량 사람이 알도록 소문낼 거야.”

갑자기 심묘가 사경행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당신, 만일 다른 여자가 당신의 아이를 회임하면…….”

“어떻게 할 건데?”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묘는 그의 옷깃을 매섭게 끌어당기며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대량의 모든 사람이 예왕부가 멸문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사경행이 크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숙인 그는 그녀의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난 부 안에 사나운 부인이 있어. 그 부인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사나운?”

심묘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따지려 들 때, 바깥에서 팔각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마마.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심묘는 손을 풀고 나지막이 경고했다.

“돌아와서 다시 말해요.”

사경행은 바쁜 와중에도 여유롭게 호색한다운 웃음을 지었다.

“네 선택에 따를게.”

“꺼져요.”

그 말을 끝으로 심묘와 사경행은 서둘러 입궁 준비를 마저 했다. 이 며칠 사경행은 번번이 궁으로 달려가 영락제와 고가의 일을 상의했다. 고가는 은근한 압박을 받아 병력을 배치하던 중이었으나 정비가 회임했으니 영락제가 자기네를 어찌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비 배 속에 자기들의 후손이 있으니 황실의 마음을 얻었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었다. 혼란스러운 고가가 여기저기 세력을 안배하기 시작하면서 사경행은 더더욱 바빠졌다. 그사이 심묘도 배랑이 남긴 편지를 토대로 명제의 장래 국세를 추측했다. 장군부가 부수의의 감시에서 벗어나도록 돕기도 했다.

궁에 도착하자 사경행은 어서재로 영락제를 보러 갔다. 심묘는 현덕 황후를 만나기 위해 입궁했기에 마중 나온 도 고고를 따라갔다. 전과 달리 길마다 양탄자가 깔려 있고 궁녀들도 많이 돌아다녔다. 심묘는 의아해하며 도 고고에게 물었다.

“정비마마께서 길을 걷다 자신이 혹 넘어지면 배 속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이라고 분부하신 겁니다. 시중드는 궁녀도 이전보다 더 많아졌구요. 근래 궁중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몹시 고생스럽습니다. 황후마마는 정비마마와 언쟁하기 싫으셔서 정비마마가 후궁을 뒤집는 것을 그냥 두고 계십니다.”

도 고고는 심묘를 현덕 황후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정비에 대한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지나친 일은 아니지만, 사람을 귀찮게 하고 기분을 언짢게 하고 계십니다.”

“그럼 폐하는 어떠신가?”

심묘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 도 고고가 괴상하게 웃었다.

“폐하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비마마가 답답해하시며 이런 일을 벌이시는 게지요. 아, 오늘 엽가 소저와 공자도 입궁했습니다. 엽가 소저는 정비마마를 방문했으니 정화궁에 있을 겁니다. 마마, 입궁하실 때 엽가 사람을 보지 못하셨나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봤네.”

도 고고가 말하는 엽가 소저와 공자는 당연히 엽미와 엽각일 터였다. 그러나 엽미와 엽각이 정비를 보러 왔다니 의아했다. 고가와 엽가는 특별히 사이좋은 관계가 아닌데, 어째서 지금 온 건지, 본심은 따로 있고 계략을 꾸미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엽미는 그렇다 쳐도 어리석은 정비가 계략 같은 걸 감당할 리 없었다. 심묘는 엽가가 사람을 잘못 찾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심묘는 순간 마음속이 어지러워졌으나 오늘은 현덕 황후를 만나러 왔을 뿐임을 다시 상기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심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현덕 황후는 미앙궁이 아닌 어화원에 있었다. 여름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대량의 여름은 길었지만, 여름 끝자락이 되자 더위도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이 찾아왔다. 화원에 앉아 그런 선선한 바람을 쐬면 특별한 운치가 있었다. 차를 끓여 마시던 현덕 황후가 심묘를 보고 차를 맛보자며 불렀다.

“이 추산황은 올해 새로 딴 찻잎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차란다. 너도 마셔보거라.”

현덕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차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녀 역시 찻잎처럼 향기가 짙고 여운이 깊은 여인이었다. 심묘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술과 치아 사이에 씁쓸한 맛이 맴돌았으나 끊임없이 향이 느껴졌다. 매우 독특하고 좋은 차였다.

“어때?”

현덕 황후의 물음에 심묘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후마마께서 끓이신 차는 일품입니다.”

현덕 황후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나는 별다른 취미는 없지만, 차를 끓이고 맛보는 건 아주 좋아한단다. 이 차는 쓴맛이 나서 젊은 아가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넌 좋아할 것 같았단다. 아마 내가 너와 닮았다고 느껴서겠지.”

심묘는 천만의 말씀이라 사양했고, 현덕 황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그날 밤 돌아간 후 경행은 너와 궁중 일을 이야기했겠지?”

심묘는 약간 당황했지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야기했습니다.”

“넌 사정이 궁금했을 테고, 경행은 너를 아끼니 당연히 전부 말했을 테지. 다 들은 너는 기분이 어떠했느냐? 지금 이 국세에 어떤 방법이 있을까?”

현덕 황후는 심묘의 견해를 물어보고 있었다. 심묘는 서슴없이 답했다.

“고가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정비마마 배 속의 아이로는 다 기울어져 가는 정세를 끌어올릴 방법이 없어요. 폐하와 전하는 이미 결정하셨으니, 나머지는 두 분의 결정에 따라 저절로 좋아질 겁니다.”

현덕 황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아이는? 넌 그 아이를 남겨야 할 것 같으냐?”

심묘는 잠시 멈칫했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를 남기고 말고는 대국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 문제입니다. 이 결정은 마마의 견해를 고려해야 하지요.”

현덕 황후는 탄식했다.

“내 생각이라. 내 마음에는 가시 하나가 틀어박힌 것 같구나. 가시를 뽑아야 할 텐데, 내가 모질지 못하구나.”

그녀는 자조하듯 씁쓸히 웃었다.

“황후의 자리는 정말 내게 맞지 않는구나. 이 일에 익숙해지면 또 저 일에 익숙해져야 하니.”

심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현덕 황후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예왕비, 네가 예왕부의 온전한 여주인인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앞으로 부담이 더 무거워지고 소임도 복잡해진다면, 잘할 수 있겠느냐?”

현덕 황후는 화제를 바꿨다. 심묘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현덕 황후가 무언가 암시하는 것 같았다. 이전이라면 자신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테지만, 사경행이 영락제의 일을 말해주었다. 만일 영락제가 불혹을 넘지 못한다면, 그들이 어찌할 생각인지 자신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심묘는 마음을 안정시키며 대답했다.

“마마, 장래의 일은 정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하의 곁에서 함께하며 전하가 무엇을 하시든 보좌할 겁니다.”

현덕 황후는 심묘를 잠시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넌 야심이 없어 좋구나. 그렇지만 야심이 없는 건 나쁘기도 해. 하지만 경행은 폐하가 아니니 네 운은 아주 좋아. 넌 분명히, 언젠가 반드시 아주 높은 곳에 도달할 것이야.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지. 그때는 싫어도 싫다고 할 수 없을 것이야. 나도 그렇게 해야 했어. 세상의 도리이기 때문이지.”

현덕 황후의 말을 들은 심묘는 그녀의 기분을 추측해보면서 평온히 말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도리라고 해도 본심을 지킬 수 없다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도달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스스로 환경을 바꿀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현덕 황후는 오랫동안 넋을 잃고 깊은 눈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매우 복잡했다. 흠모인지 자조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내 반평생은 이미 지났지. 이제는 바꾸려 해도 시간이 없어.”

현덕 황후는 짧은 사이에 많은 풍파를 겪었는지 활기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우아하고 대범했으나 지난번과 달리 눈빛에는 고생에 지친 노부인의 피곤함이 담겨 있었다. 심묘는 정비 때문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오늘 엽가 남매도 정비마마를 뵈러 입궁했다면서요?”

“고가에 황실의 후손을 품은 딸이 나오자 농서성의 벌레들이 난동을 부리려 하는 게지. 엽가는 본래 나를 보러 입궁했지만 그들의 본심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고 그들을 내보냈다. 엽가는 정비가 회임했다 하니 정비 쪽을 탐색해보려는 게야.”

현덕 황후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엽가가 새로 찾아온 그 아가씨는 아주 아름답더구나.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똑똑하고, 야심도 있어. 그런 여인이 후궁에서 생존하기 가장 적합하지.”

“엽미가 후궁으로 들어온다구요?”

심묘의 시선이 멍해졌다. 전생 미 부인은 명제 부수의의 황후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미 부인의 태생이 대량 사람으로 바뀌면서 장래도 같이 변한 건가. 미 부인은 영락제의 여인이 되어 대량의 황후가 되려는 건가. 심묘가 자신의 엉터리 같은 생각에 가소로워 할 때 현덕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 담담했다.

“아마도. 하지만 농서성의 후궁은 이름만 있고 실체는 존재하지 않아. 엽 소저가 이곳에서 권력과 이익을 다투려고 한다면 계산을 잘못한 거야. 게다가 폐하는 지금 다시 사람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으셔.”

“만일 엽미에게 다른 방법이 있다면요?”

심묘가 물었다. 엽미는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해서 목적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생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었다. 그녀가 이득을 취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길 바라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녀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었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해도 조심해야 했다. 다시 한번 자신의 부주의로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다.

현덕 황후는 의아한 시선으로 심묘를 바라보았다.

“넌 그 엽가 소저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구나. 물론 엽미의 심보가 나쁜 것은 나도 이미 알아차렸다. 궁에 여러 해 있었으니, 엽미의 두 눈에 흐르는 탐욕이 그대로 보이더구나. 네가 그녀를 방비하는 것도 당연하다. 황실 사냥터에서 경행이 다친 후 예왕부에서 있었던 일로, 바깥에서는 네가 엽미를 질투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하더군. 나는 그때 엽미가 간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추측했단다. 오늘 보니 확실히 그렇구나.”

“네, 말씀대로 저는 그녀를 싫어합니다.”

현덕 황후는 드물게 눈을 활기 있게 깜빡이며 심묘를 놀렸다.

“경행 때문에? 걱정하지 말거라. 경행은 아주 똑똑해서 자신보다 영악한 여자는 좋아하지 않아. 엽미처럼 탐욕적이고 야심 있는 여인은 더욱 싫어하지.”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현덕 황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우둔한 사람이란 말인가.

“폐하는 경행과 엽가와 연루되지 않기로 이미 논의를 마치셨단다. 나는 너도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나도 엽가 사람을 싫어해. 엽가는 문신이지만 문신의 기개가 없고, 오히려 교활하고 위선적이지. 신하로서 도리를 지키지 않으려는 마음도 품었고. 엽가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지. 하지만…….”

현덕 황후는 무언가 생각난 듯했다.

“엽가의 작은 공자는 괜찮아. 그 아이와 이야기해봤는데, 정말 아이처럼 순수하단다. 애석하게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엽부에서 그다지 중시를 받지 못하지만 말이야.”

심묘 역시 엽가의 절름발이 공자에 대해 들은 적은 있으나 그의 품성이 어떤지는 몰랐다. 현덕 황후의 말을 들은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했다.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 운수까지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머지않아 대량의 국세는 팽팽히 긴장할 거야. 예왕부도 단단히 주시당하겠지. 경행은 평소 바깥에 있어 예왕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은 위험해질 수도 있단다. 너도 더욱 조심하거라.”

심묘도 현덕 황후를 따라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고가, 엽가 양가를 처리하면서 농서성에 태풍을 불러오게 될 것이고, 자신은 예왕부의 왕비로서 당연히 적의 표적이 될 것이었다. 현덕 황후는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넌 지금부터 이런 것들을 배우기 시작해야 해.”

심묘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도 고고가 궁녀와 서둘러 걸어왔다.

“혜빈과 영 귀인이 다투는데 지금까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마마, 가보시겠습니까?”

정비의 회임 때문에 궁중 여인들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여태까지는 모두 자식이 없으니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해도 대수롭지 않아 했건만, 정비의 회임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한 명이 하늘에 오르니 다른 사람도 하늘에 오르려 했다. 사심이 생겼으니 당연히 갈등도 늘어났다. 게다가 이런 곳에 대신들이 여인을 더 보내려고 하니, 후궁은 평온함을 잃고 소란스러워졌다. 당장은 아주 큰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앞으로도 이 소요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편안함은 포기해야 할 터였다.

현덕 황후는 피곤한 표정을 드러냈다.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해도 이런 말썽이 생기면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었다.

“마마, 가보시지요. 전 괜찮습니다.”

심묘는 현덕 황후를 따라 후궁 여인들의 싸움을 구경할 생각이 없었다. 대량의 후궁은 자신과 관련도 없으니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현덕 황후는 부득이 일어나며 심묘를 바라보았다.

“가볼 테니 예왕비는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쉬거라. 심심하면 화원을 산책해도 된다. 멀리만 가지 않으면 돼.”

심묘와 함께 있는 팔각과 회향은 모두 무공을 할 줄 알았다. 그러니 의외의 사고가 생길까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궁에는 시위가 있으니 안전했다. 심묘가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현덕 황후와 도 고고는 떠났다. 심묘는 찻잔을 들고 현덕 황후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은 늘 현덕 황후의 말속에는 숨은 뜻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락제가 정말 오래 살지 못하면 그가 죽은 후 대량을 이을 사람은 누구일까. 후궁 여인들이 회임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영락제는 자기 아들에게 황위를 잇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아이를 낳아도 선천적으로 허약할 테니 대업을 맡을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을 터다.

이렇게 되면 대량 황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사경행 한 명밖에 없었다. 전생에서 사경행이 황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적어도 자신이 죽고 명제가 멸망했을 때까지는 영락제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럼 현생에서 사경행은 황제가 되는 건가. 사경행이 황제가 되면 자신은 또다시 황후가 되는 셈이었다.

예로부터 황제의 후궁에 한 명의 여인만 있던 선례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현덕 황후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은 사경행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 사경행이 황제가 된다면 “나도 이제 그만두리라.” 말하며 그와 단호하게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렵게 이루어진 연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삶에서 겨우 이룬 부부 인연을 단번에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해진 심묘는 바람을 쐬기 위해 연못가로 향했다. 팔각과 회향이 뒤따랐다. 화원 안에는 나무가 빽빽했고, 겹겹이 뻗어 나온 나뭇가지 아래로 작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길은 사방으로 연결되어 곳곳마다 새로운 경치를 보여주니, 풍취가 매우 풍아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심묘는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연못가로 걸어가자 그녀의 얼굴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시원한 바람 덕에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한참 서 있던 그녀는 돌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슬슬 현덕 황후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어림잡으며 심묘는 시선을 돌려 숲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때 심묘의 시선이 멈추었다.

심묘는 한 곳을 팽팽히 주시했다.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 모든 피가 머리로 솟구치면서 똑바로 앉아 있기 힘들었다. 팔각과 회향도 긴장해서 옆을 바라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갑자기 심묘가 숲속의 오솔길로 달려갔다.

“마마!”

팔각과 회향이 놀라 서둘러 따라갔다. 심묘는 빠르게 달렸다. 머리카락과 옷에 나뭇가지가 붙어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손은 맹렬히 떨렸고 입술은 창백했다. 눈을 아주 크게 뜬 그녀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방금 숲속의 나뭇가지 사이로 소년의 얼굴을 또렷이 보았다. 어색한 미소를 띤 익숙한 표정의 소년.

분명 부명이었다! 자신의 아들, 부명! 잘못 볼 리 없었다. 잘못 볼 리 없다고 생각한 심묘는 기를 쓰고 달렸으나 어화원의 길은 사방으로 나 있어 각각의 길은 서로 다른 곳으로 통했다. 소년은 눈 깜짝할 사이 빽빽하고 무성한 나무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허망해진 심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앞에는 길이 없었다. 어두운 호수와 인공산, 정자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소년을 찾을 수 없었다.

뒤따라온 회향과 팔각은 우뚝 멈춰 선 심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표정은 귀신을 본 듯했다. 세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인기척은 전혀 없이 조용할 때, 갑자기 앞에서 짧은 외침이 들리고 이어서 무거운 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인공산의 끝자락에는 긴 계단이 있는데, 계단 아래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여자의 몸 아래에는 붉디붉은 핏물이 고여 있었다. 당황한 심묘와 팔각, 회향은 가까이 다가가 여자를 살펴보았다. 정비였다. 정비는 아랫배를 감싸 쥐고 있었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녀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몸을 움츠리며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심묘가 계단을 바라보니 곳곳에 소지품이 떨어진 게 그녀가 위에서 굴러떨어진 게 분명했다.

“구해줘…….”

심묘를 본 정비는 힘들게 손을 내밀며 내뱉고는 바로 기절했다.

“마마, 이게……!”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비마마는 황실의 후손을 품고 있다. 게다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은 일이 소문 나면 예왕부에 좋지 않을 것이다.”

심묘는 이런 불쾌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으나, 예왕부가 불명예를 얻는 것도 원치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팔각이 얼른 자리를 떠났다. 곳곳을 살펴본 회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벌써 도망쳤겠지. 궁에서 사람을 해치다니, 범인의 담력이 작지 않구나.”

그녀는 사경을 헤매는 정비를 보고 탄식했다. 궁중 여인의 유산을 본 적이 있기에, 정비 배 속의 아이는 태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묘는 정비에게는 동정심이 들지 않았으나 아이는 불쌍했다. 정비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재난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를 생각하니 숲에서 본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장이 갑자기 움츠러들었다. 그 소년이 정말 부명이라면, 무엇 때문에 자신과 만나길 원치 않는 건지 마음이 아팠다. 그 아이가 부명이 아니라면…… 어째서 부명과 똑같이 생긴 건지 의아했다. 궁중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정비의 일이 해결되면 현덕 황후와 사경행에게 그 소년을 찾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 소년을 본 것이 착각일 리 없었다.

팔각은 사람들을 데리고 급히 돌아왔다. 모두 사경을 헤매는 정비를 보고 놀랐다. 영락제는 정비의 회임에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했으나, 어쨌든 그녀는 영락제의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아이를 살릴 방법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많은 말을 나누는 대신, 정비를 빠르게 정화궁으로 옮기고 태의를 불렀다. 또 사람을 보내 영락제와 현덕 황후에게 이 일을 알렸다. 심묘는 어쨌든 처음으로 정비를 발견한 사람이기에 그녀와 상관이 있든 없든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회향은 불안했다. 황실의 일은 안 그래도 복잡한데, 후손과 관련된 일이니 음모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영락제와 현덕 황후가 정화궁에 도착했다. 사경행은 보이지 않았다. 심묘는 부명의 일을 이야기하려 했으나 사경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영락제는 주변 사람에게 당시 정비의 곁에 궁녀가 하나도 없었는지 물었다. 궁녀가 있었다면 정비가 계단을 부축도 없이 내려오지도 않았을 테고, 심묘에게 도움을 청했을 리도 없을 터였다. 현덕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비는 엽가 소저와 정화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았느냐? 어째서 어화원에 간 게지? 엽가 소저는 또 어디로 갔고?”

현덕 황후는 조금도 심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방에서 갑자기 짧은 비명이 들렸다. 정비의 궁녀가 달려 나와 현덕 황후와 영락제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안에서 걸어 나온 태의는 땀을 닦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 노신이 무능하여 정비마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방 안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야 현덕 황후가 입을 열었다.

“죽어? 정비가 왜 죽은 건가?”

태의는 얼른 몸을 굽혔다.

“정비마마께서 회임하신 후 최근 몸이 약해지셨습니다. 매일 보약을 올렸으나 정비마마에게도 복중 아기씨에게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너무 세게 떨어져서 아기씨를 보호하지 못했고, 정비마마도 과도하게 놀라시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심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정비는 어리석었다. 자신이 품은 장래의 태자가 죽었다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과도하게 놀란’ 것이 치명적인 원인이 돼 죽고 말다니. 심묘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이 없던 영락제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무표정해 감정을 읽기 힘들었다. 현덕 황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비가 왜 갑자기 떨어진 거지? 곁의 궁녀는 또 어디로 가고?”

정화궁의 궁녀가 얼른 무릎을 꿇은 채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는 엽가 소저와 궁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어화원으로 산책을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마는 저희가 곁에서 따르는 것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감히 마마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엽가 소저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마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왕비마마께서 모시고 온 겁니다.”

정비의 궁녀도 정비처럼 말솜씨가 좋아서 자신의 죄를 흔적 없이 감추려 했다. 하지만 정비가 죽었으니 그녀를 따르던 궁녀 모두 처벌을 면할 수 없었다.

“엽가 소저는 어디에 있느냐? 여봐라, 엽가 소저를 찾아오너라!”

현덕 황후는 심묘를 의심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황실 자손과 관련된 일은 늘 큰일이었다. 게다가 후궁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후궁의 주인으로서 현덕 황후는 당연히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 현덕 황후는 불호령을 내렸지만, 영락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생각인지 알 수도 없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어디에 가서 여태 오지를 않는지 생각하다가 사건의 전말을 요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엽미가 손을 써서 정비를 죽였다는 가설을 세울 수도 있지만, 그녀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후궁에 들어오려 해도 정비의 소식을 얻기만 하면 되지, 굳이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엽미는 직접 손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주하거나 종용해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이었다. 자기 손에는 피는커녕 먼지 하나 묻히지 않았다. 엽미가 정말 정비를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 아둔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와 정비가 함께 나간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정비가 죽으면 맨 처음 의심받는 사람은 본인이었다.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정비를 밀었을까.

심묘가 추리에 빠져 있는 동안 뒤에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비마마!”

심묘가 고개를 돌려보니 호위 몇 명이 엽미를 데려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는 엽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녀는 앞으로 두 걸음 다가왔지만, 현덕 황후의 호위에게 저지당했다. 현덕 황후는 차가운 시선으로 엽미를 보았다.

“엽 소저, 어딜 갔다가 지금에서야 오는 게냐? 정비는 죽기 전 너와 같이 어화원으로 갔다. 그러고 나서 정비에게 사고가 생겼는데, 어째서 넌 보이지 않았지?”

엄하게 질책하는 모습이었다. 현덕 황후는 평소 진중하고 온화했지만 엄한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는 황후의 품격이 흐르고 있었다. 황후의 추궁에 엽미는 움츠러들었다.

심묘 역시 차가운 눈초리로 엽미를 보았다. 엽미는 고개를 숙인 채 변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저는 정비마마와 정화궁에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정비마마께서 날씨가 시원하니 바람을 쐬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정비마마의 궁녀도 따라가려 했으나 마마는 사람이 많으면 불편하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어화원을 산책하는 건 위험하지 않고 제가 곁에 있으니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기 달랐다. 정비는 원래도 거만했으나 회임 후 성격이 전보다도 훨씬 더 나빠졌다. 정비는 예쁘게 생긴 엽미를 보고 불쾌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녀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아마 정비는 엽미를 여종 다루듯 괴롭혔을 것이고, 남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 더욱 그녀를 핍박하기 위해 궁녀를 대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정비다운 수완이었다.

“그 후 저와 정비마마는 어화원을 산책했습니다. 갑자기 정비마마께서 춥다며 제게 명주 피풍의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피풍의는 정화궁에 없으며 재인의 거처에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궁중이 처음이라 길이 익숙하지 않아 그 처소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제가 피풍의를 가져왔을 때, 황후마마의 호위가 찾아와 정비마마께 일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엽미는 무릎을 꿇었다.

“제가 떠나기 전 정비마마는 멀쩡하셨습니다. 그사이 도대체 어떤 변고가 생겼는지 저는 정말 모릅니다! 마마, 믿지 못하시면 사람을 시켜 재인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분이 저를 위해 증언해주실 겁니다. 저는 당시 피풍의를 가지러 갔는데 어떻게 정비마마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현덕 황후는 미간을 찡그렸다. 사람들은 정비의 성격을 잘 알았다. 엽미를 여종처럼 부리면서 먼 곳에 있는 피풍의를 가져오라고 한 것은 확실히 정비다운, 정말 한결같은 수완이었다.

“도 고고, 사람을 데리고 그 재인의 처소로 가서 분명히 물어보거라. 만일 엽미의 말이 거짓이라면 전부 엄벌에 처할 것이다.”

“그 재인의 성은 조입니다.”

현덕 황후가 분부하자 엽미가 서둘러 덧붙였다. 도 고고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정화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엽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떨고 있었다. 몹시 억울해하는 기색이었다. 웃는 그녀는 고양이처럼 사랑스러워 보는 사람을 홀리곤 했는데 묵묵히 눈물을 흘리는 지금은 또 매우 가련해 보였다. 눈에 물안개가 자욱한 채로 가냘픈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자, 동정심에 그녀를 품에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엽미는 미묘한 위치에 꿇어앉아 있었다. 영락제가 고개를 숙이면 그녀의 아름다운 옆얼굴과 고운 몸매를 볼 수 있을 위치였다. 현덕 황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입가를 휘었다. 심묘는 엽미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왜 자신이 미 부인에게 패했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엽미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자신은 부수의를 좋아했기에 멍청하게도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모든 진귀한 것을 주었다. 하지만 엽미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면을 드러냈다. 그러면 남자는 자신이 가진 가장 진귀한 물건을 그녀에게 바치게 됐다.

심묘는 영락제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엽미의 수법은 영락제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영락제는 엽미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사가 두 형제를 매혹하려면 미색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가 모른다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영락제는 사경행보다도 더 여자의 미모에 냉담했다.

도 고고가 돌아오기 전 고가에서 사람이 왔다. 정비와 그녀의 배 속 아이가 죽은 일에 가장 분노할 사람은 죽은 정비와 말을 맞추던 고가 사람일 것이다. 고정순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고 부인을 데리고 정화궁에 들어왔다. 궁인들은 그를 막을 수 없었으며 영락제는 굳이 막지 않았다. 고 부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안타까운 딸의 운명을 큰 소리로 탄식하며 울었다.

심묘는 어릿광대 보듯 고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딸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면 입궁하자마자 정비를 보러 갔어야 했다. 그런데 고 부인은 황제와 황후 앞에서 처참하게 울고만 있었다. 딸 때문에 마음 아픈 것은 거짓이리라. 정비보다는, 정비가 어렵게 품은 황실의 후손 때문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사납게 생긴 고정순이 살기등등하게 표정을 굳히자 그는 정말 지옥에서 온 악귀 같았다. 사람들은 만일 지금 수가 틀어지면 그가 황제를 시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폐하, 정비마마의 배 속에 있던 황손이 해를 입었습니다. 이 일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닙니다. 정비마마를 여태껏 키운 신에게, 신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을 헤아려 설명해 주십시오!”

심묘는 고정순의 말을 듣고 웃을 뻔했다. 영락제를 찾아와 공개적으로 비난하다니. 효무제의 심복이라는 점을 믿고 이렇게 담력이 크고 건방진 건가 생각하던 심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영락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은 신하이니 황제에게 이런 불경한 태도를 드러낼 수 있을 터였다.

“황손이라, 큰일이지. 고 장군,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면 불필요한 짓을 할 필요는 없소.”

고정순은 말문이 막혔다. 그동안은 영락제가 자기에게 예의를 차렸으나 지금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황실이 고가를 처리하려고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알았으나 정비가 회임하면서 그래도 고가의 패가 많아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 패를 완전히 잃었으니 예전처럼 영락제와 공공연히 맞설 수 없었다.

당초 풋내기라고 우습게 봤던 태자는 강력한 황제가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예상보다 더 뛰어났고 고가의 세력은 이미 약해져 있었다. 세상에는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서 약한 사람이 있다. 고정순은 영락제가 자신보다 더 횡포하게 나오는 데 놀라 일단 분노를 가라앉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고 부인은 울음을 그치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정비마마께 사고가 났을 때 예왕비마마는 그 자리에 계셨다지요? 살인범을 보셨나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정순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왕비마마가 정비마마를 발견하셨을 때는 분명 사고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못 보실 수 있습니까? 하다못해 정비마마께서 무어라 말씀하지는 않았습니까?”

심묘가 대답하기 전에 영락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왕비는 단지 옆을 지나친 것일 뿐, 살인범을 못 본 게 죄는 아니다. 고 장군, 살인범을 찾지는 않고 탓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탓하니 이는 잘못되었다.”

심묘는 약간 놀라웠다. 줄곧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영락제가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폐하, 이 세상에 죄상을 감추려고 이목을 다른 데로 돌리는 일은 적지 않습니다.”

고정순의 냉소에 현덕 황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예왕비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황후의 신분으로 보증하지요.”

영락제와 현덕 황후가 일제히 심묘를 두둔하자 고정순도 더는 뭐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는 간신히 웃었으나 더욱 흉악해 보였다.

“정비마마에게 사고가 난 이후에 내가 보긴 했지만, 엽가 소저는 사고 전에 정비마마와 함께 있었네. 고 장군은 엽가 소저에게 물어봐도 좋을 걸세.”

심묘는 고정순의 관심을 돌렸다. 화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일은 엽미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니, 죄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처지가 될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엽미를 위해 손해를 볼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정순은 바닥에 무릎 꿇은 엽미를 노려보았다. 눈 속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지금 고가는 황실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해 긴장 상태였기에 고정순은 맹우를 찾으려 했다. 심묘는 이를 꿰뚫어 보았다. 그에게 엽가보다 더 좋은 맹우는 없었다. 하지만 고정순보다 더 똑똑한 엽무재는 지금 어느 쪽에 설지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정순은 엽가가 자신의 편을 들길 바랐다. 딸과 손자는 이미 죽었으니 장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길 터. 죽은 사람 때문에 맹우에게 미움 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으리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집안은 권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식을 얼마든지 희생시키곤 했다. 아들조차 희생하는 판에, 딸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호위가 걸어와 영락제에게 말을 전했다.

“폐하, 누군가 정비마마를 계단 아래로 민 범인을 봤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 영락제와 현덕 황후가 입을 다물고 있자, 고정순이 입을 열었다.

“누구냐? 그 사람이 말한 범인이 누구지?”

“하늘의 뜻으로 마침내 정비마마를 살해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구나. 그 사람을 찾으면 마마 대신 피로 피를 씻으리라.”

고 부인이 서둘러 합장하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데려오너라.”

영락제가 차갑게 말했다. 심묘는 고개를 돌려 엽미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속수무책인 상황에 억울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심묘는 그녀의 손에 주의했다. 손등을 덮은 긴 소매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가락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엽미는 왼손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 원을 만들고 손가락끼리 문지르고 있었다.

미 부인과 평생 다툰 심묘는 그 동작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미 부인은 계략을 꾸미고 목적이 달성되기 직전일 때 이런 손동작을 하곤 했다. 심묘의 가슴이 뛰었다. 살인범을 봤다는 증인도 엽미의 계략 중 일부인 듯했다. 그때 바깥에서 수레바퀴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심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궁녀 한 명이 누군가를 데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담요가 있었고 양손은 담요 위에 단정히 올리고 있었다. 궁녀는 바퀴 달린 의자를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밀고 왔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앉은 사람은 섬세하고 수려하게 생겼고, 열다섯 살을 넘기지 않은 듯 어린 소년이었다. 상아색 장포를 입은 소년은 점잖게 앉아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놀라 허둥대고 있었다.

심묘는 서 있던 자리에서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눈 속에 눈물이 가득 차 자칫 흐를 것 같았다. 부명. 시간이 갑자기 되돌아갔다. 밝은 노란색 장포를 입은 소년이 손에 홍매화 한 묶음을 들고 자신에게 웃음을 띤 채 말하는 것이 보였다.

“모후, 소자가 뜰에 매화가 핀 것을 보고 나무에 올라 꺾어 온 겁니다. 모후께서 매일 이 홍매화를 바라보시면 마음이 편안해 병도 빠르게 나으실 수 있을 겁니다. 누님이 없어도 소자가 계속 모후 곁에서 함께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자가 태부에게 잘 배우겠습니다. 소자가 장래 강해지면, 누구도 감히 모후를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그 아름답고 섬세한 소년이 엽미에게 다가가 작게 외쳤다.

“큰누나.”

심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은 엽가의 첩실 소생인 엽홍광 공자였다. 궁녀가 엽홍광을 데리고 영락제와 마주했다. 엽홍광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제 다리가 불편해 예를 올릴 방법이 없음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영락제가 손을 휘저었다. 엽홍광은 처음으로 많은 사람과 마주한 듯 두려워 보였다. 그는 의자의 바퀴를 밀어 엽미 곁으로 가까이 갔다. 이를 본 심묘의 시선이 멈칫했다. 부명이 어떻게 미 부인에게 친밀한 태도를 보이는지 당황스러웠다. 당장 부명을 미 부인 곁에서 떨어뜨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은 지금 부명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집요한 까닭인지 엽홍광도 심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호기심과 공포가 가득했다. 심묘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마주하자 그는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그는 불안한지 무릎 위로 장포의 가장자리를 쓰다듬었다.

“엽 공자? 자네가 정비마마를 해친 범인을 보았나?”

고정순이 미간을 찡그린 채 물었다. 엽홍광은 고정순의 흉악한 모습에 놀라 도움을 청하듯 엽미를 바라보았다. 부명이 미 부인에게 의존하는 모양이라 심묘의 마음은 고통스러웠다.

“홍광, 네가 정비를 민 사람을 봤다고 말했다던데 사실이냐?”

현덕 황후가 상냥한 얼굴로 물었다. 현덕 황후는 엽홍광을 좋게 생각하는 듯 매우 온화했다. 엽홍광은 현덕 황후는 그리 무섭지 않은 듯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더냐?”

현덕 황후가 다시 물었다. 고개를 숙인 엽홍광은 두려운 듯했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심묘에게 닿았다. 엽홍광은 느리게 손을 내밀어 심묘를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예요.”

심묘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렸다.

현덕 황후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가 엄하게 엽홍광을 질책했다.

“홍광, 네가 만일 거짓말을 하면 군주를 속인 죄로 머리가 잘릴 것이다. 아느냐!”

영락제도 차갑게 말했다.

“분명히 보았느냐?”

황제와 황후는 엽홍광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태도였다. 엽홍광은 담력이 작아 보였으나 황제와 황후의 압력에도 확고하게 심묘를 보며 단정했다.

“바로 저 부인입니다.”

심묘는 비틀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부인이라니. 부명이 저 부인이라고 말했다. 자기 아들이 지금 원수를 곁에서 돕는 증인이 된 모양이었다. 황당무계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심묘의 모습을 제 발이 저려 저런 것이라 해석했다. 실눈을 뜬 고정순이 곧장 다가가 심묘를 끌고 오려고 했다. 팔각과 회향이 즉시 심묘 앞을 막아섰다. 갑자기 고정순이 손을 쓸 태세에 들어가자 호위들도 얼른 현덕 황후와 영락제를 보호했다. 영락제가 소리쳤다.

“고정순, 네가 정화궁에서 손을 쓰다니 반역을 하려는 것이냐!”

고정순은 팔각, 회향을 공격하면서 크게 외쳤다.

“폐하, 우리 고가는 정비마마를 잃었고, 지금 범인이 눈앞에 있습니다. 고부가 먼저 딸의 원수를 죽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후 고부를 처벌하셔도 됩니다. 이 일을 세상에 묻는다면 백성들은 고부가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고정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영락제의 안색이 분노로 검푸르게 변했다. 고정순의 초식은 매서웠다. 그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는 듯했다. 팔각과 회향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순간에도 심묘는 멍한 시선으로 엽홍광을 바라보았다. 엽홍광은 심묘의 시선을 피하며 엽미와 귓속말을 했다.

그때, 고정순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본 사람은 없었다. 퍽 소리가 들리더니 금 원보(金元寶, 금으로 만든 말발굽 모양의 화폐)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고정순이 무릎을 감싸 쥐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조용한 목소리가 바깥에서부터 울렸다.

“내가 없다고 어느 어중이떠중이가 내 여인을 괴롭히느냐?”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누구나 그 속의 날카로운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서 나타난 사경행이 손에 금 원보를 들고 있었다. 방금 그가 금 원보를 던져 고정순의 무릎을 다치게 한 게 명백했다. 그가 큰 걸음으로 심묘에게 다가왔다. 창백한 심묘를 보고 그녀가 놀랐다고 여긴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수하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고정순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고 장군, 내게 무슨 불만이 있는가?”

한기가 가득한 차가운 말투에도 고정순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경행이 자신에게 망신을 준 것에 분노하며 더욱 성을 냈다.

“정비마마가 살해당했습니다! 엽가 공자가 예왕비마마가 해를 끼친 걸 직접 봤다고 합니다. 딸의 복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엽가 공자?”

사경행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엽홍광에게 닿았다. 그는 느리게 엽홍광에게 다가가 소년을 굽어보았다. 사경행은 좌중을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엽홍광은 그런 사경행의 시선이 불편해서 마주하지 않으려 시선을 피했다.

“네 어느 눈이 예왕비가 정비를 미는 것을 보았지?”

사경행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그는 엽홍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싸늘히 덧붙였다.

“네 어느 눈으로 보았느냐? 내가 그 눈을 파내주마.”

공공연한 위협이었다. 그는 고정순과 영락제가 있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사경행이 금 원보를 만지작거리며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지금 다시 말해보거라. 넌 무엇을 보았지?”

엽홍광은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황제 앞에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긴장한 그는 도움을 청하듯 엽미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으나 자신이 의지할 곳은 엽미뿐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엽미는 나서서 돕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엽홍광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고정순의 기고만장한 태도에 분노한 영락제와 현덕 황후는 사경행이 등장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자신의 손해를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고정순이 어찌 당하는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고정순은 기고만장한 사경행에게 눈을 부라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는 황제이기 때문에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지만, 사경행은 달랐다. 사경행이 대량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에게 의심을 품은 조정 신하들을 향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응대했다. 그들 중 좋게 끝을 맺은 사람은 없었다. 사경행은 수단이 악랄해 사소한 원한도 모두 대갚음해주었다. 그러니 공공연히 그와 얼굴을 붉히는 건 최대한 피해야 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엽홍광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묘는 오히려 평온해졌다. 그녀는 사경행과 발을 나란히 하고 엽홍광을 바라보았다.

“넌 정말 내가 정비마마를 아래로 미는 걸 보았느냐?”

엽홍광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그사이 담력이 많이 늘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게 말해주렴. 넌 그때 어디에 있었니?”

심묘의 질문에 엽홍광이 당황했다.

“넌 계단 위에 있었니, 아니면 아래에 있었니?”

심묘는 차근차근 물었다.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워서 온화한 누나 같았다. 엽홍광은 긴장해 목을 움츠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꼼짝하지 않던 엽미의 몸도 떨렸다. 심묘는 그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싹 조였다.

“생각해봐. 위였니? 아래였니?”

“아, 아래요.”

심묘는 작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심묘를 고정순과 고 부인이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현덕 황후의 눈빛에는 온기가 돌아왔다. 영락제는 심묘를 주시했고, 사경행은 팔짱을 끼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엽홍광을 보았다.

“그것참 이상하네. 그 층계는 아주 길고 가파르던데. 그래서 정비마마도 그만 넘어지신 거야. 그렇게 길고 가파른 계단인데, 넌 어떻게 아래에서 위에 있던 나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니? 정비마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엽홍광은 더더욱 당황했다. 그는 나이도 어렸고 평소 부를 나오지 않아 낯선 사람을 상대하기 어려워했는데, 심지어 이곳은 황궁이고 황제의 면전이었다. 영락제를 보고 이미 긴장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심묘의 말을 듣자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엽미가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심묘는 다시 물었다.

“엽 공자, 다시 생각해보렴. 혹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니? 위에 있었니, 아래에 있었니?”

엽홍광이 얼른 말했다.

“위, 내가 잘못 기억했어요. 위예요!”

그는 단정하듯 다시 한번 위를 강조했다. 엽미가 맥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렸다. 심묘는 변함없이 웃었으나 시선은 날카로웠다.

“오? 엽 공자는 다리가 불편해서 그렇게 긴 계단은 혼자 올라갈 수 없어. 누군가 널 안고 올라가든지, 네 바퀴 달린 의자를 들고 올라가야 해. 그러려면 네 곁에는 하인이 있었을 거야. 그런데 어째서 내가 정비마마를 민 것을 본 사람은 너 하날까?”

방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엽홍광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온 얼굴을 붉힌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거짓말을 들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같았다.

“너는 군주를 속인 게 무슨 죄인지 아느냐?”

영락제가 차갑게 말했다. 군주를 속인 사람은 머리를 잘랐다. 엽홍광이 좀 더 영악했다면 심묘의 질문에 다른 구실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인은 물건을 가지러 가서 잠시 혼자 있었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보통 이 정도로 대담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순순히 죄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핑계를 대는 법인데, 엽홍광은 쉽게 거짓말을 인정했다. 이런 일을 해본 적 없어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폐하. 관리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범했으니, 엄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직접 형부에 던지거나 혹은 죄인 수레에 태워 거리를 돌아다니게 할까요?”

사경행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사람이나 지금처럼 예왕부 사람을 괴롭힐 테니 제가 어떻게 편히 살 수 있겠습니까?”

말투는 무심했지만 사경행은 공적인 일로 사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고 있었다. 엽미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고정순의 얼굴은 더욱 나빠졌다. 누가 벌을 받을 것인지 분명해 보였다.

“엽홍광, 너는 감히 궁에서 거짓말을 했다. 터무니없이 예왕비를 비방하려 했지.”

현덕 황후가 엄하게 질책하자 엽홍광은 놀라 울 뻔했다. 엽미를 제외하면 익숙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엽홍광은 무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엽미는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엽가 공자는 나이가 어리니, 잘못했더라도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시 정비마마에게 사고가 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 범인을 잡으려다가 무언가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때 심묘가 엽홍광이 죄명에서 벗어나게 해주려 나섰다. 사람들은 심묘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사경행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엽홍광은 그녀를 중상모략했고, 그녀는 악독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을 해친 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가 이방, 삼방, 더 나아가 명제 황실까지, 그녀가 손대지 못한 적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연고도 없는 엽홍광에게 살길을 열어주려 하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날 모해한 거지? 누가 네게 이런 말을 하라고 가르친 거니?”

심묘는 살짝 몸을 굽혀 시선을 엽홍광과 나란히 한 후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엽홍광의 몸이 떨렸다. 꿰뚫을 듯 쳐다보는 심묘의 시선은 엽홍광 눈빛 속의 당혹을 분명히 잡아냈다. 엽홍광은 거짓말을 너무 못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파악했다. 특히 사경행의 눈빛이 한층 더 엄숙해졌다. 그러나 엽홍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심묘를 보고 확고히 말했다.

“시킨 사람은 없습니다.”

시킨 사람은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더 이상 심묘가 범인이라고는 고집하지 않았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눈살을 찌푸린 현덕 황후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비 일은 형부에 넘겨 심리할 것이다. 엽홍광, 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장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은 궁에 자객이 있는지 조사하고 정비의 시체를 거두는 것이다. 고 장군, 또 무슨 할 말 있는가?”

현덕 황후는 고가 부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말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정순은 현덕 황후를 사납게 쳐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락제가 정비를 총애하자 자신들은 정비가 현덕 황후를 대신하길 바랐다. 하지만 현덕 황후는 평소 약점을 잡히지 않았고, 덕분에 계획은 오래도록 성공하지 못했다. 정비가 영락제를 여러 번 꼬여봤으나, 영락제는 현덕 황후를 폐위시키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비가 뜻밖에 회임 소식을 알려왔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건만, 결국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사실 정비가 이미 죽었기에 뭐라고 하든 늦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락제가 자신에게 무언가 보상해주길 바랐다. 오늘 이렇게 막무가내로 군 것 또한 딸의 비참한 죽음 때문에 상심해서가 아니라 손안에 쥔 황손을 잃어 애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경행이 나타난 바람에 횡포한 기운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 잔인하면 더 잔인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떻게 해도 수확이 없음을 깨달은 고정순은 달갑지 않게 말했다.

“신이 명령을 받듭니다.”

영락제의 눈에 살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가 부부가 떠났다. 그들은 죽은 정비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출궁했다. 그들이 떠나길 기다린 영락제가 입을 열었다.

“너희도 돌아가거라.”

현덕 황후는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재인이 증명했으나 그래도 엽미는 정비와 함께 있었으니 의문점을 전부 씻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엽홍광은 심묘를 중상모략했으니 이 두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락제는 추궁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현덕 황후는 의아했으나 영락제의 몸이 눈에 띄지 않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놀라 다른 것은 돌볼 틈이 없었다.

“그래, 지금 바로 돌아가거라.”

사경행은 미간을 찡그렸다. 엽미와 엽홍광이 감사를 표한 후 분주히 떠나는 것을 사경행은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만 보았다.

“별일 없으면 저도 먼저 물러갑니다.”

사경행은 기분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영락제의 결정이 만족스럽지 않은 게 분명했다.

심묘와 사경행이 궁 밖으로 향하려는 순간, 엽미와 엽홍광을 만났다. 심묘는 당황했다. 갑자기 엽홍광은 남종에게 멈추라고 명령하고는 심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사경행의 안색이 나빠졌다. 엽가 사람은 위험인물이니 심묘에게 접근했을 때 일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짝 따라가 침착하게 소매 안에서 비수를 뽑았다.

엽홍광이 심묘 앞에서 멈추자 엽미의 얼굴 위로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엽미는 엽홍광을 저지하고 싶었으나 철의와 종양에게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엽홍광은 고개를 들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붉은 얼굴에는 창피한 기색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망설였지만 결국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심묘를 한번 더 바라보더니 스스로 바퀴를 밀며 떠났다.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엽홍광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심묘의 표정은 복잡했다.

돌아가는 마차 안. 사경행은 심묘가 계속 말이 없는 것을 보고 말했다.

“묵우군에 말해서 그 녀석을 잡아다 탑뢰에 가두도록 할게. 하루 이틀 갇혀 있으면 배후가 누군지 털어놓을 거야.”

그가 말한 사람은 물론 엽홍광이었다. 오늘 정화궁에서 엽홍광의 태도를 보면 누군가 그에게 심묘를 모략하라고 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심묘는 사경행을 향해 눈을 흘겼다.

“무슨 자백이 필요해요. 엽미 외에 누가 있다고?”

엽미는 다른 사람을 속여도 심묘는 속이지 못했다. 사경행이 심묘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그럼 왜 즐겁지 않은 거야? 오늘 그 녀석을 본 후로 이상해. 내가 없던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심묘는 그의 팔을 밀어젖혔다.

“당신, 내가 꿈속에서 일남일녀를 낳았다고 말한 것 기억해요?”

그 순간 사경행의 장난스럽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엽홍광을 처음 봤을 때, 꿈속 그 아이 같았어요. 내 아들과 너무 닮았어요. 난 그가 꿈속 아이라고 여겼지만, 엽홍광은 엽미 편에 서서 날 비방하는 것을 도왔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난 아주 상심했구요. 하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니 조금 닮은 것일 뿐 결코 꿈속 아이와 같지 않았어요. 생김새만 어느 정도 닮은 것뿐이고 다른 부분이 훨씬 더 많더군요.”

짧은 경악과 큰 상심 후 심묘는 계속해서 엽홍광을 주시했다. 그와 부명의 생김새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으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부명은 부수의의 환심을 얻지 못했고, 모친과 미 부인이 날카롭게 맞서는 상황에 치여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조숙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 부인의 편에 서지 않았다. 미 부인을 도와 심묘 자신과 대립하지 않았다. 언제나 호탕하고 정직하며 선량했다. 우수한 태자가 지니고 있을 품성을 타고났고, 어느 상황에서도 그 품격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엽홍광은 일반적인 관리 집안의 공자 같았다. 다리가 불편했기에 열등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엽홍광을 향해 마음의 물결이 흔들리지 않았다. 모자 사이에는 감응이 있어서 만일 그가 부명이라면 자신이 바로 무언가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 그러니 엽홍광은 부명이 아니었다. 단지 부명과 매우 닮았을 뿐이다. 잠시 이성을 잃을 뻔했으나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보다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엽홍광에게서 부명의 형상을 볼 수 없자,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안심했다. 부명이 정말 엽가 사람이라면 엽가는 그를 이용해 자신에게 대처하고도 남을 테니까. 이는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닮았어? 그래서 네가 유달리 너그러운 거야?”

사경행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런 이유도 있어요. 그 얼굴을 보면 어찌해도 독한 수를 쓸 수 없어요. 게다가 당신도 이 사건의 배후는 다른 사람인 것을 알 거예요. 엽홍광은 이용당했을 뿐이지요. 그 아인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아요. 그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을 준비해오다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만드네요. 하지만 의아한 게 있어요. 이 일이 정말 엽미와 관련됐다면 엽미는 왜 정비마마를 밀었을까요? 지금 이 일은 그녀의 일 처리 방식과 많이 달라요. 너무 성급하다고 느껴지는걸요.”

사경행이 웃었다.

“단지 의외의 사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의외요?”

* * *

엽미와 엽홍광도 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 있었다. 엽홍광은 계속 불안해했다. 남종은 그를 안아 마차 안 엽미 곁에 앉혔다. 평소 온화하고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네던 엽미는 마차 안에서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엽홍광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가 입을 달싹일 때 엽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셋째, 너 아까 예왕비마마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엽미는 웃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무엇 때문인지 엽홍광은 두려웠다. 망설이던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했어.”

엽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엽홍광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

“예왕비마마는 좋은 분 같아. 내가 그렇게 마마를 비방했는데, 마마는 화내지 않고 내게 온화하셨어. 마마는 좋은 분이셔. 내가 절름발이라고 경시하지도 않으시고……. 큰누나, 난 거짓말로 좋은 사람에게 누명을 씌운 거야.”

엽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말했잖아. 만일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폐하와 황후마마께서는 반드시 날 의심하셨을 거야. 내가 의심받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온 가문이 연루될 건데, 설마 넌 부모님까지 연루되는 걸 보고 싶은 거야? 황실 사람은 옳고 그름을 상관하지 않아. 부모님은 나이도 많으신데 그렇게 체면이 깎이고 괴로움을 당해 몸이 상하면 어떻게 해?”

엽미의 말은 사악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엽홍광에게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엽홍광도 선녀 같은 누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엽미에게 책망을 당하고 분풀이를 당하자 엽홍광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엽미가 하는 말만 가만히 듣고 있었다.

“게다가 넌 어떻게 예왕비마마가 누명을 썼다고 믿어?”

“예왕비마마가 아니라고 하셨어. 폐하와 황후마마도 마마를 믿었고. 누나, 왜 거짓말해야 해? 그들이 누나를 의심하지 않게 하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왜 예왕비마마를 지목해야 하는 거야?”

엽홍광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엽미는 얼굴에 분노를 숨기지 않고 음산한 표정으로 엽홍광을 바라보았다.

“넌 예왕비마마는 믿으면서 나는 믿지 않는 거야?”

엽홍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예왕비마마가 그런 사람 같지 않다고 느꼈을 뿐이야.”

말끝마다 심묘를 믿는다는 엽홍광에게 엽미는 분노를 숨길 수 없었다. 영락제도, 현덕 황후도, 사경행도. 심지어 지금 엽홍광까지 심묘를 믿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요술을 부려서 늘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일을 떠올리자 엽미는 견딜 수 없어 몸을 떨었다. 자신은 정비가 그리 거만하고 어리석을지 몰랐다. 엽무재의 지시로 정비를 통해 황실 소식을 알아보려 했을 뿐인데, 그녀가 궁 밖의 사람인 자신을 질투할 줄은. 하지만 그녀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괴롭히기 시작했는데도 자신은 화내지 않고 잘 참고 있었다. 부로 돌아갈 때까지만 참으면 될 일이었다. 정작 화를 낸 것은 정비였다. 정비는 자신의 얼굴을 할퀴려 했다.

자신도 손해만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실랑이 도중 자신은 실수로 정비를 밀어버리고는 당황해서 도망쳤다. 엽무재가 자신을 위해 황제에게 미움을 살 리 없으니 혼란을 틈타 도망치려 했다. 스스로 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엽씨 가문이 적인지 아군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농서성에 오래 머물렀으나 퇴로를 확보해줄 사람 같은 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운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막다른 골목 끝에 또다시 활로가 나타났다. 정비가 죽은 것이다. 정비가 죽었으니 자신이 그녀를 밀었다는 증좌는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났으니 더는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다시 평온을 되찾은 다음, 방법을 강구해 총애받지 못하는 재인 한 명을 매수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신에게로 돌아올 의문을 깨끗이 씻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엽홍광을 증인으로 삼아 흐린 물을 더욱 흐리게 만들기로 했다.

엽홍광에게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엽부 전체가 연루될 거라고 위협하자 그는 손쉽게 넘어왔다. 엽홍광은 어려서부터 엽부에서만 자라서 바깥 정세와 처세술을 잘 알지 못했다. 담력도 작아 두려움에 질린 채 얼른 승낙했다. 하지만 심묘가 또박또박 잘못된 점을 지적했으니, 이 모함은 쓸모가 없어졌다. 또 예왕이 고정순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예왕부에 죄를 짓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도 깨달았다.

자신은 지난번에도 엽무재에게 심묘를 암살하자고 제의했고, 지금은 엽홍광을 사주해 심묘를 비방했다. 사경행이 배후를 조사해 자신을 찾아내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현덕 황후와 영락제가 예상외로 자신을 놔주었다. 심묘도 깊이 따지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것이, 더 깊은 음모가 있어 보였다. 어쨌든 엽무재도 이번 일을 조만간 알 것이었다. 실수로 정비를 죽이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간악한 그가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도 알 수 없었다.

분하고 두려웠지만, 그보다 낙담이 더 컸다. 농서성은 자신과 상극인 듯했다. 흠주에 있을 때는 뭐든지 뜻대로 했는데, 이곳에서는 여러 번 난관에 부딪혔다. 엽가와 인연을 맺은 후 자신의 지위가 빠르게 상승할 거라고 여겼지만, 엽가의 정세는 알기 어려운 데다 미움을 사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미움까지 샀다. 농서성에 계속 있을 수 없으니 엽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하지만 엽가를 떠나 농서성에서 달아나는 일은 지금 자신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에 오르기는 쉬우나 내리기는 어려웠다. 엽무재가 쉬이 놔주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계속 이곳에 있으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엽각과 잘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엽미는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 고개를 들어 엽홍광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하지만 엽홍광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무릎 위 덮개를 쓰다듬을 뿐,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 * *

정비 일로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한 사경행과 심묘가 예왕부로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상태였다. 목욕 후 식사까지 마친 심묘는 탁자 위 서신을 정리하면서 사경행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일이었네요.”

사경행의 수하가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오늘 궁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히 보고했다. 이미 엽미가 실수로 정비를 죽인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던 심묘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엽미가 손쓴 것을 고가가 알게 돼도 수면 위로 일을 끌어올리지는 않을 거야.”

사경행이 침상에 기대어 서신을 정리하는 심묘를 보며 말했다.

“그럼 폐하께서 진상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실까요? 엽미를 처리할까요?”

“알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엽미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대도 엽가는 남겨둘 수 없어. 엽미가 실수로 살인을 했다 해도 엽가는 도중에 찾아온 딸 하나를 희생하는 것뿐이니, 엽무재가 마음 아파할 리 없지.”

사경행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비와 그녀 배 속 아이, 누가 신경을 쓰겠어?”

심묘는 탄식했다. 영락제는 고가를 극도로 미워해서, 정비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품은 아이에게도 애정이 없었다. 당연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정비가 죽어 속으로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비를 사랑하지 않았대도 아이는 그의 혈육이었다. 물론 태어나도 아이는 선천적으로 허약할 테니 이 세상을 헤쳐나가기엔 괴로웠을 터다. 하늘이 그를 대신해 선택했다. 모든 것은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오늘 정비마마에게 사고가 생겼을 때 폐하는 바로 오셨지만, 당신은 없었어요. 대체 뭘 하러 갔던 거예요?”

심묘의 물음은 자연스러웠다. 사경행은 솔직한 사람으로 황실의 비밀스러운 일을 심묘가 묻기만 하면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심묘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사경행의 대답을 기다리던 심묘는 그가 늦도록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행동을 멈추었다. 사경행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따뜻했고, 자신을 아주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심묘는 당황했다.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 와봐.”

“왜 그래요?”

심묘는 천천히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사경행이 심묘의 팔목을 잡아챘다. 사경행에게 팔목이 잡힌 심묘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심묘가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사경행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자기 턱을 그녀의 머리 위에 놓고 담담히 물었다.

“지난번에 네게 황후가 되고 싶은지 물었지, 기억해?”

“기억해요.”

심묘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다시 물을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 바람은 오직 하나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잘 살고 싶어요. 황후가 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게는 좋은 일이 아니에요.”

사경행이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나도 내키지 않지만, 지금은 해야 해. 고가 가주가 폐하는 반년도 못 버티실 거래. 오늘 폐하께서 황위를 물려준다는 조서를 쓰셨어. 난 운명을 믿지 않지만, 시간이 없어.”

그는 낮게 탄식하며 심묘의 손을 자기 손바닥에 놓았다.

“나도 네가 싫어하는 걸 알아. 하지만 날 위해 참아줄 수 없을까? 적어도 난 널 폐후로 만들지 않을 거라 보증할 수 있어. 넌 대량 황제의 유일한 여인이 될 거야. 그리고 네가 치러야 할 대가는 바로.”

그가 심묘의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평생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거야.”

심묘는 말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그녀를 더욱더 꼭 끌어안아 자기 품속에 가두었다. 오래 지나 심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사경행도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어떠한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오만한 남자였다. 짓궂은 소년일 때부터 지금까지 눈 속의 냉소적인 기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에 심묘는 마음이 움직였다.

“그럼 내게 무슨 이익이 있나요?”

심묘가 웃으며 묻자 사경행은 잠시 얼떨떨해했다. 안도하고 한없이 기쁘면서도 그녀의 수락이 믿기지 않았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모두 네게 줄게.”

“만약 내가 원하는 걸 당신도 원하면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넌 뭘 원하는데?”

“유주 13경.”

“네가 가져.”

그가 시원스레 손을 휘둘렀다. 심묘가 연지나 백분같이 소소한 물품을 달라고 한 듯한 반응이었다.

“막북(고비 사막 이북 지역) 정원성.”

심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네가 가져.”

사경행은 눈꺼풀도 깜박이지 않았다.

“강남 예주, 정서 동해, 임안 청호, 낙양 고성.”

“전부 네가 가져!”

사경행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영락제가 들었다면 분노해 피를 토했을 것이다. 효무제가 들었다면 사경행에게 집안을 망친 놈이라 욕하고 심묘에게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는 요녀’라는 죄명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사경행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물론 심묘도 사경행의 강산을 뺏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사경행의 부담이 너무 무거워 보여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가 짊어진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바랐다.

“전부 날 주면 당신은 뭘 원해요?”

심묘의 물음에 사경행이 음흉하게 웃었다.

“하룻밤에 열세 번?”

심묘는 말문이 막혔다. 사경행이 심묘를 끌어당긴 후 정색하고 말했다.

“부인이 나를 원하지 않을 리 없지.”

“당숙에게 얼음을 가져오게 해 당신의 열기를 식히도록 해야겠어요.”

사경행이 심묘를 덮쳐 넘어뜨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부인이 있는데, 얼음이 왜 필요할까?”

바깥에서 종양이 귀를 막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옆을 지나던 경칩이 그를 보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종양, 어째서 그렇게 떨어요? 혹시 어디 아파요?”

경칩은 손을 내밀어 종양의 이마를 짚었다. 젊은 남자인 종양이 낯뜨거운 소리를 듣고 얼굴이 빨개졌는데, 여인의 차갑고 작은 손이 이마에 닿자 그는 바로 바닥에서 뛰어올랐다. 경칩이 오히려 더 놀랐다.

“나는 단지…… 왜 그래요?”

종양은 귀신을 본 듯 경칩을 한 번 보더니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황급히 도망쳤다. 뒤에 남은 경칩은 당황스러웠다. 나무 위에 있던 철의는 이 모든 모습을 다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종양을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안고 있던 검을 더욱 품속으로 당겼다.

나무 아래 있던 당숙은 방문이 꽉 닫힌 걸 보고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주방에 보양탕을 끓이라 분부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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