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장
며칠 동안, 사경행은 바빴다. 영락제의 병세가 깊어지자 사경행은 직접 고가와 엽가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 많아져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심묘도 한가하지 않았다. 고가와 엽가는 농서성에서 오래 지냈기에 황실이 그들을 일벌백계한다면 황실의 잔인함에 신하들이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심묘는 관리 집안의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은연중에 그녀들을 감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처음에 귀부인들은 대량과 많은 부분이 다른 명제에서 온 심묘에게 호감을 표하지 않았다. 게다가 심묘가 무장가문의 딸이니 식견 같은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심묘와 이야기를 나누며 인식이 크게 변했다. 심묘는 아주 예의 바른 데다가 자기들이 모르는 것을 적지 않게 알았다. 의상의 형식을 얘기할 때도, 국세에 대해 말할 때도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심묘는 전생에 명제 후궁에서 별로 잘 지내지는 못했지만, 그곳의 생활은 그녀의 견문을 넓혀주었다. 다른 국가의 사신들도 진기한 이야기들을 해주곤 했다. 아는 것이 많으면 자연히 쓸 수 있는 것도 많은 법. 조그만 일도 어느 곳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다 다른 법이었다. 권모술수로 뒤얽힌 이해관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건 심묘가 환생한 후 갖게 된 장기였다.
짧은 사이에 귀부인들과 심묘는 친밀해졌다. 그녀들은 작은 일에도 심묘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그 작은 일 중에는 국가 정세 문제와 관련된 일도 있었다. 심묘는 황실과 친척인 예왕부의 왕비이니, 심묘를 통해 황실의 의중을 알 수 있겠다고 생각들 한 것이다. 게다가 심묘는 자신들보다 훨씬 어렸으나 굉장히 온화하고 침착해 자연히 그녀의 언행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렇듯 심묘와 사경행은 급변하는 정세를 위해 노력했다. 물론 고가와 엽가도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고가는 딸 하나를 잃은 데다 강경한 영락제의 태도를 보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접촉해온 각지 인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엽가는 수수방관하는 듯했으나,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고가와 공범이 된 듯했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황실의 태도는 미묘했다. 처음에는 끌어들이려 하더니 무언가 암시하듯 지금은 완전히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동안 심묘는 엽미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밀리에 주시했다. 엽미가 궁에 재난을 불러온 일로 엽무재는 매우 진노했다. 엽미 때문에 영락제와 고가에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거만한 고정순은 공로에만 의지하고 똑똑하지 않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나, 대단한 수완을 지닌 젊은 영락제는 달랐다. 하지만 영락제가 엽미에게 아무 벌도 내리지 않자 더욱 불안했다. 그가 무언가 준비하는 듯했다. 엽무재는 엽미에게 화를 쏟아낸 다음 그녀의 외출을 금지했다.
마침내 오늘 엽미의 금족령이 풀렸다. 엽 부인은 엽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엽부가 소유한 머리 장신구 점포로 향했다. 그런데 한 귀인이 갑자기 엽부를 방문하겠다고 알려왔다. 엽 부인은 도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들이 소유한 점포이니 별문제가 없으리라고 여기고는 엽미에게 고르고 싶은 것 다 고른 후 돌아오라고 했다.
점포 주인은 엽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장 비싼 장신구 몇 가지를 가져다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엇을 꺼내놓아도 엽미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계속 내키지 않는 얼굴로 다른 것을 가져와 보라 하자 점포 주인도 인내심을 잃었다. 까다로워도 너무 까다롭게 고르는 엽미를 보며, 주인은 자신이 보유한 장신구 중 가장 비싼 것도 눈에 차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진귀한 물건을 찾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속으로 욕했다.
엽미는 주인의 짜증스러운 표정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며칠 엽무재에게 냉대를 당한 것이 분해서 엽가는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고 생각을 굳혔다. 엽무재는 이익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때고 타인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엽미 자신은 엽가를 이용해 위로 올라가려 했는데, 결국 힘이 모자라 바둑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엽무재가 준비한 것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아름다운 장신구 위를 스쳤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달아날 수 있을지, 만일 달아나면 어디로 갈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머리 장신구 상점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는 스물을 갓 넘은 듯하고 평범한 얼굴에 살집도 있었으나 옷차림은 부귀했다. 곁의 여자는 젊고 산뜻하며 아름답게 단장했다. 여자가 들어오자마자 짙은 향기가 나서 청루의 여인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대인, 반드시 순금 팔찌를 사주셔야 합니다.”
남자가 웃으며 대범하게 말했다.
“오늘 내 기분이 좋으니 네 마음대로 골라보거라.”
청루 아가씨가 어느 댁 공자를 봉으로 잡은 것 같았다. 점포 주인은 줄곧 집중하지 않는 엽미에게 불만스러웠던 차에 새로운 손님이 오자 반색하며 다가섰다. 그는 엽미에게 보여주었던 장신구를 여인 앞에 흔들며 미소 지었다.
“이것들은 모두 새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가씨, 한번 보시지요.”
여자가 엽미를 옆으로 밀쳤다. 엽미는 짙은 향에 불쾌해하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보았다. 순간 남자와 눈이 마주친 엽미는 당황했다. 남자 역시 엽미를 보고 멍해졌지만 곧바로 놀라고 기쁜 기색을 띠었다.
“이미!”
장신구를 고르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경계의 시선으로 엽미를 보았다. 남자가 엽미를 ‘이미’라 부르자 점포 주인도 귀를 쫑긋 세웠다. 남자는 엽미와 옛날부터 친분이 있는 듯했다. 엽미는 그의 시선을 피해 나가려다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점포 주인을 힐긋 본 그녀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왕 만났으니 잠깐 따로 얘기 좀 해요.”
청루 여인이 절박한 표정을 하고 남자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대인, 저와 머리 장신구를 고르셔야지요.”
남자는 귀찮은 듯 품에서 금표를 몇 장 꺼내 여자에게 던졌다.
“혼자 고르거라.”
돈을 얻은 여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와 함께 문을 나선 엽미는 면사를 걸치며 입을 열었다.
“찻집을 찾아봐요.”
어느 찻집. 남자는 엽미를 보고 호기심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네 곁에 어째서 이리 많은 호위가 있는 거지? 네가 동생과 함께 아무런 말도 없이 흠주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찾았는데. 이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엽미의 심장이 뛰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죽마고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씨 가문은 흠주의 상인 가문이었고, 이 남자의 가문인 금씨 가문도 상인 가문이었다. 그는 금가의 장자, 금성명이었다. 금 대인과 이 대인의 우정은 깊었다. 엽미 자신이 소녀이고 금성명이 소년이었을 때, 금 대인은 자신이 금성명에게 시집오면 좋겠다고 농담하곤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상인 가문의 주모가 되는 건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은 금성명을 혐오했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상하면서도 귀엽게 행동해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보물처럼, 아니 신처럼 귀하게 모셨다.
그 후 이씨 부부가 죽자 이가 점포 몇 개는 금가에서 돌봤다. 의지할 데가 필요하니 자신은 금성명에게 더욱 극진히 대했다. 금 대인은 그런 모습을 오해했는지 자신에게 혼사를 물으려 했다. 부모가 없으니 혼사를 결정하는 사람은 본인이었다. 당연히 마음에 차지 않았다. 상인 집안의 본처가 되느니 차라리 관가 집안의 소첩이 낫겠다 싶었다.
그때, 우연히도 엽가 사람이 나타났다. 자신은 망설이지 않고 즉시 엽각과 농서성으로 길을 떠났다. 당연히 금가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금성명도 자신이 농서성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터였다. 이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엽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흠주에서는 금가의 보살핌을 받아 동생과 잘 지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누가 찾아와 내 친부모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내가 승상 엽가의 딸이라는 것이지요. 난 놀라고 의심했으나, 그들은 내게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끌고 왔어요.”
놀란 금성명이 물었다.
“승상 엽가? 농서성의 그 엽 승상 말이야?”
엽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후에야 나는 그들이 사람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오라버니도 알겠지만, 엽가에는 상태가 좋지 않은 공자만 있지요. 기세 좋게 가족을 찾았는데 잘못 찾았다고 하면 체면을 잃게 되는 꼴이니 그들은 기어코 날 엽가의 딸로 삼았어요. 나는 몇 번이나 거절하려고 했지만, 내 말을 조금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엽 승상은 사실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에요. 그…… 그는 날 벼슬길의 패로 쓰려고 해요. 내 혼사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요.”
엽미는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어여쁜 엽미가 구슬프게 울자 금성명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친딸이라도 그렇게 무정할 수는 없는데! 네 혼사를 마음대로 하려 하다니. 아니, 오히려 친딸이 아니니 더욱 그래서는 안 돼. 가증스럽군! 우리 관아에 고발하자!”
엽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어요. 관리는 서로서로 보호해줘요. 더구나 엽 승상의 기세는 농서성의 하늘을 손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예요. 그래서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편지도 저지당했어요. 사실 나와 각이는 이미 엽가 사람에게 연금당한 채예요. 오늘 이 외출도 아주 이례적인 일이에요.”
금성명은 분노로 안색이 나빠졌다. 엽미 남매가 흠주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 후, 부친 금 대인은 엽미가 자기에게 시집오고 싶지 않아 도망쳤을 거라고 했다. 그때 감정이 상했었지만, 지금 아름답게 우는 엽미를 보니 앙금도 사라졌다. 오히려 궁지에 몰린 엽미를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욕했다.
엽미가 고개를 들어 금성명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난 언제나 오라버니를 그리워했고, 언젠가 자유를 찾을 수 있길 바랐어요. 오라버니, 날 도와줄 수 있나요?”
금성명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줄게. 내가 뭘 하면 될까?”
엽미가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살포시 웃었다.
“오라버니, 지금 난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아요. 내가 엽가를 떠날 수 있게만 도와주세요. 오라버니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더는 겁먹지 않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금성명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엽미는 예전에도 자신에게 온순하긴 했으나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은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금성명은 마음이 들떴으나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엽가는 위세가 대단한 승상 가문인 데 반해, 자신은 일개 상가 집안의 공자에 불과했다.
“그게…… 엽가는 처리하기 아주 까다로워.”
엽미는 말없이 아름다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금성명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이미야, 너는 내가 왜 농서성에 왔는지 아니?”
엽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금성명에게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오늘 그와 대화를 한 것도 그를 이용해 엽가를 떠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금성명이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내게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쪽도 상인 집안이어서 작년에 명제에 갔었어. 올해 명제 황제 쪽 상인과 인연을 맺었다는군. 관리 하나를 잘 잡은 것 같아. 난 흠주에서 별볼일 없는 상인 집안을 꾸리는 것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 돌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 친구도 마침 내게 명제에 오라고 초청했지. 내가 농서성에 온 건 몇 점포를 처분하고 그 친구를 만나 상의하기 위해서야.”
금성명이 덧붙였다.
“사실 난 좀 머뭇거렸어.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하지만 지금 널 만났으니 두려울 게 없어. 명제 정경성으로 함께 가자. 당장 관리가 된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돈을 많이 벌면 나중에라도 가능할 거야. 엽가가 대량 하늘을 한 손으로 가릴 수 있다 해도, 명제 하늘에는 손을 뻗을 수 없을 거야. 이미야, 넌 어떻게 생각해?”
엽미는 금성명이 말하는 동안 빠르게 계산을 끝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나 마음에 쏙 들었다. 명제로 도망친 다음 새 인생을 시작하면 된다라. 엽미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오라버니는 과연 제 의지처예요.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무서웠는데, 이렇게 오라버니를 다시 만나서 다행이에요.”
아름다운 엽미가 자신을 의지해오니 금성명은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엽미의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 엽미는 혐오감을 강하게 누르고 금성명이 자기 손을 만지게 가만히 두었다. 이전이라면 이럴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참고 보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한 귀부인이 초청한 다과회에 참석했던 심묘는 부로 돌아가기 위해 나오는 중이었다. 뒷덜미를 주무르며 마차에 오르려다가 멀지 않은 찻집에서 남자와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면사를 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심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걸음과 자태가 영락없이 자신과 평생 다툰 미 부인, 엽미였다.
엽미와 말하는 남자는 그녀와 매우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다. 심묘는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로웠다. 남자를 보니 부귀한 집 자제 같지는 않고 장사꾼 같은 저속함이 엿보이니 상인 출신인 듯했다. 심묘는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엽미가 이쪽을 발견하지 못하게 마차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남자와 엽미는 관례에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보아 두 사람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했다. 잠시 후, 엽미는 마차에 올라 떠났고,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넌 저 남자를 따라가거라. 네가 듣고 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알아오거라.”
심묘는 잠시 생각한 후, 모경에게 분부했다. 모경에게 비밀리에 엽미를 계속 감시하라는 임무를 맡긴 터였다. 저 남자는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사람이니 당연히 알아봐야 했다. 모경은 명령을 받들어 떠났다.
심묘는 마차에 앉아 생각했다. 남자는 고귀한 출신이 아니었다.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장 중시하는 엽미가 엽가의 사람이 된 지금에 와서 평민과 말을 섞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와 찻집에 가서 함께 차까지 마시다니. 엽미는 늘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용했다. 특히나 남자를 잘 이용했다. 그녀가 이번에도 남자를 이용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게 분명했다. 거만한 그녀가 신분이 낮은 남자와 정답게 이야기하는 건 오직 목적이 있을 때뿐이니까. 과연 무엇을 하려는 걸까.
* * *
엽미는 저녁이 다 돼서야 엽가로 돌아왔다. 평소 아주 늦게나 돌아오던 엽무재는 오늘 이례적으로 일찍 부에 돌아와 있었다. 엽미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그는 그녀를 주시하며 물었다.
“어디 갔었느냐?”
근래 엽가가 직면한 환경 때문에 줄곧 물 만난 물고기 같던 엽무재도 곤란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침착하던 문인의 분위기도 사라지고 온화하던 용모도 음산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엽미는 당황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답했다.
“어머니께서 머리 장신구 점포에서 장신구를 고르자고 절 데려가셨어요.”
“어머니?”
엽무재는 반문했다. 엽미는 엽무재의 괴상야릇한 말투가 불만스러웠다. 자신이 엽 부인의 혈육이 아닌 것은 자신도 그도 알지만, 자신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투와 표정은 자신이 엽가로 와서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는 듯했다. 엽미가 침묵하자 엽무재가 다시 물었다.
“머리 장신구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안 골랐어요.”
“너는 네 결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지. 네 것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는 건 당연히 알 테지?”
엽무재의 말속에 다른 뜻이 있는 듯했다. 그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네가 거리에서 만난 그 남자는 누구지?”
엽미는 얼떨떨했지만 다음 순간 바로 화가 치밀었다. 자신의 곁을 따르는 엽부 호위가 그에게 알렸을 것이다. 호위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아 따라다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감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다가 엽무재에게 모두 보고했다. 하지만 감히 엽무재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전에 흠주에서 알던 공자입니다. 저희 집안과 아주 친했습니다. 만일 부친께서 믿지 못하시면 사람을 보내 그의 내력을 조사해 보십시오.”
금성명은 상인 집안의 자제였다. 엽무재가 조사한다 해도 무엇도 찾지 못할 터였다. 엽미가 침착하게 대답하자 엽무재도 조금 표정을 풀었다.
“내가 너무 인정사정없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지금 농서성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힘이 있다. 게다가 넌 엽가의 딸이 되었으니 일거수일투족을 사람들에게 주시당할 것이다. 너로 인해 약점이 잡힌다면 너뿐 아니라 엽가 모두 재난을 입을 것이다.”
엽무재는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넌 똑똑한 아이니 당연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알 것이다. 너와 엽가는 하나이니 당연히 서로 도와야 한다.”
엽미는 엽무재의 말을 듣고 표정을 굳혔다. 엽무재는 역시 자신을 이용해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탈출 계획을 세우면서 엽무재와 몇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엽각이 그녀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엽각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누나, 어딜 갔다가 이제 돌아오는 거야. 오래 기다렸어.”
엽미는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산만했다. 그녀는 금성명의 일을 엽각에게 말하려고 했다. 흠주에 있을 때 엽각은 금성명이 매형이 되길 바랐다. 금씨 가문과는 오랜 교류가 있었으니 이가를 잘 돌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 엽미 자신은 금성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엽각은 금성명이 잘할 거라고 자신을 설득했었다. 지금 자신이 금성명을 따라 명제로 도망친다면 당연히 엽각도 데려가야 했다. 하지만 과연 엽각이 순순히 동의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너 흠주 금가의 금성명을 아직 기억하니?”
엽미의 물음에 엽각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금성명? 기억해. 그런데 갑자기 그자는 왜 얘기해? 설마 누나, 그에게 시집가겠다는 건 아니지?”
엽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그자를 아주 좋아하지 않았니?”
“그때는 우리가 상인 집안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관리 집안이야. 누나, 지금 누나 신분에 어디 금성명이 가당키나 해? 상인 집안이 관리 집안 딸과 혼인한다니, 사람들이 이가 빠지도록 웃을걸?”
그는 매우 흥분했다. 엽미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너는 내가 누구에게 시집가야 했다고 여기는데?”
그는 은밀한 표정으로 다가와 미소 지었다.
“누나 신분이면 황자에게 시집가도 돼. 하지만 대량에는 아쉽게도 황자가 없어. 사실 아버지는 누나를 입궁시킬 마음이 있어. 내가 직접 보니 폐하는 아직 젊으신 데다 준수하게 생기셨더라고. 게다가 황후마마에게 매우 차갑지. 누나가 궁에 들어가면 용모와 재능이 있으니 궁은 누나의 것이 될 거야. 그때 누나와 내 부귀가 끝이 없겠지.”
엽각의 눈이 빛났다. 한참 땅을 파헤치던 사람이 마침내 보물을 찾아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런 장래의 모습을 열망하고 있었다. 엽미는 그를 바라보았다
“넌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거야?”
엽각이 가슴을 탕탕 쳤다.
“누나, 언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졌어? 날 믿어. 누나는 대량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될 거야. 그러니 아버지 말대로 입궁해. 아버지가 누나를 해칠 리 없어. 입궁하면 엽가가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줄 텐데,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어?”
엽미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엽각아, 근래 너 아주 바쁜 것 같던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바쁜지 누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니?”
엽각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아버지는 내게 농서성의 관직을 주실 생각이야. 근래 날 데리고 이곳저곳 동료를 만나러 가주셨어!”
그는 무언가 의식한 듯 단숨에 입을 가렸다. 놀라고 당황한 모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엽미를 바라보았다. 엽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보니 그랬구나.”
엽각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엽미를 한 번 보았다. 엽미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도하고는 탐색하듯 물었다.
“누나, 입궁이 내키지 않는 거야?”
엽미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한 번 보고 바로 웃었다.
“내키지 않는다니? 네 말대로 좋은 일인데 왜? 입궁 후 일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높은 지위에 앉을 텐데, 부귀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지. 혹시 넌 내가 멍청해서 쟁취할 수 없을 거라고 여기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시집가려 했어. 폐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니 폐하의 여인이 되면 당연히 나쁠 것 없지.”
엽미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웃으며 찬성했다. 엽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나도 그렇게 아버지께 말했거든! 아버지는 누나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으니 잘 권유하라고 했지만, 난 아버지가 누나를 잘 몰라서 그러신다고 여겼지. 누나가 얼마나 똑똑한데, 이런 좋은 일을 거절하겠어? 바보도 아닌데 왜 회피하겠어.”
경계를 늦춘 그는 엽무재가 자신에게 누나를 설득하라고 명령한 것도 다 털어놓았다. 엽미는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아버지는 날 모르시겠지. 하지만 너는 내 동생인데, 아직도 날 잘 모르는 거야?”
“누나, 만일 입궁해서 폐하의 총애를 얻으면 절대 나를 잊지 마. 지금 아버지는 내가 관리의 길을 걷게 도와주려 하고 계셔. 나중에 누나의 도움이 있으면 내 길은 더욱 순조로워질 테고 대량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의 명령을 들어야 할 거야. 그때는 우리 마음대로 뭐든 다 할 수 있어. 그 꼴사나운 황후는 진열품이겠지. 후손을 품은 정비도 죽었으니 누나가 입궁하면 그 순간 이미 승부는 난 거야. 누가 누나의 적수가 되겠어? 일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될 거야.”
엽미도 따라 웃었다.
“당연히 그럴 거야.”
엽각은 엽미의 동의를 얻어 뒷걱정을 해결한 듯 만족해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의 벼슬길이 어떻게 흘러갈지 엽미와 논의하다가 방을 나갔다. 그러나 엽각이 떠난 직후 엽미의 표정은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엽무재는 빠르게 엽각을 매수했다. 의외는 아니었다. 엽각은 평생 무거운 권력을 손에 쥐길,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길 바랐다. 엽무재가 그런 그에게 그림의 떡을 쥐여줬으니 엽각은 자신을 위해 누나를 희생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애초에 입궁이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황제의 여자가 되는 건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복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영락제는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며, 똑똑한 예왕이 옆에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모르기에 그렇게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엽각은 자신과 놀랍도록 닮았다. 자신들은 똑같이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이익을 눈앞에 두었을 때 남매의 정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엽각은 자신이 입궁하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님을 알게 되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벼슬길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자신 역시 스스로를 희생해 그의 길이나 닦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엽각은 자신의 적이었다.
엽미는 방 안을 두어 바퀴 돌았다. 초조했다. 오래 생각한 그녀는 마침내 결심한 듯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엽 부인이 그녀가 엽부에 도착했을 때 준 몇십여 벌의 의상이 담겨 있었다. 하나같이 좋은 옷감에 지금 유행하는 색상이며 무늬였다. 엽미는 상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 * *
심묘는 탐문한 소식을 전하는 모경의 입을 주시하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금성명?”
“상점 주인의 자제라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흠주에서 농서성으로 직접 와서 집안이 오랫동안 관리하고 있던 상점 몇 개를 정리했으니, 앞으로 몇 년간 금씨 가문은 장사할 생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상인이 장사할 생각이 없다니, 그럼 뭐로 먹고산대요?”
모경의 말에 경칩이 끼어들었다.
“금성명이 어디로 떠날 모양이더냐?”
심묘가 읊조리자 모경은 멍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의 추측대로입니다. 금성명은 멀리 떠나는 듯 물건을 은표로 바꿨고 상당량의 은자도 준비했습니다.”
무언가 깨달은 심묘가 명했다.
“다시 가서 금성명이 근래 어떤 사람들과 교류했는지 자세히 조사하거라. 그리고 그자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아보거라. 준비하고 있는 물품을 보면 실마리를 알 수 있을 게다. 외출은 짧은지 긴지, 북쪽으로 가는지 남쪽으로 가는지 알아보거라. 그자와 밀접한 관계인 사람이 있다면 더욱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고 엽미 남매에 대한 탐문도 늦추지 말아라. 금성명과 엽미사이에 개인적 왕래가 있다면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
모경은 명령을 받들고 떠났다. 등잔 밑에서 경칩과 함께 옷을 꿰매고 있던 곡우가 물었다.
“마마, 그 엽가 소저와 상인 집안 아들은 무슨 관계인가요? 혹시 엽 소저가 금 공자를 사모해서 서로의 신분 차이에도 개의치 않고 그와 함께하려는 걸까요?”
심묘는 살짝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는 등나무를 아느냐?”
경칩이 듣고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압니다! 제가 시골에서 살 때 곳곳에 등나무가 자랐는데 봄이 되면 뽑아내야 합니다. 뽑지 않으면 그 옆의 나무가 휘감겨 죽습니다.”
“엽미는 바로 그 등나무 같은 이야.”
심묘의 말처럼 엽미는 등나무 같았다. 등나무는 매우 강력한 생명력을 지녀서 어디에나 있었다. 어느 남자든 그녀의 ‘나무’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나무에 기대 계속 위로 기어올라 햇빛과 영양분을 흡수해 강인하게 성장했다. 그녀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멈추지 않고 올랐기에, 그녀에게 휘감겨 있던 나무는 양분을 다 써버리고 말라 죽곤 했다.
경칩과 곡우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 후 경칩이 작게 말했다.
“그 소저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등나무는 얼핏 보기에는 아주 강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양분을 제공하던 나무가 죽으면 꼼짝없이 함께 죽어야 해. 무언가에 의지하다가 의지할 것이 없어질 때, 가장 처참하지.”
엽미는 금성명을 이용해 무언가 얻으려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금성명은 상점을 정리하고 떠나려는 것 같으니, 엽미는 금성명이라는 배를 타고 엽가의 깊은 물을 떠나 기슭으로 도망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묘 자신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결말을 정해줄 차례였다.
* * *
연이은 며칠간 사경행은 부로 돌아오지 않았다. 철의도 종적을 감춘 터라 심묘가 종양에게 그들의 행방을 물으니 그는 모른 척했다. 심묘는 더 묻는 대신 부의 호위들이 종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인다는 점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얼마 후 농서성에 갑자기 한 가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원진남장 고가 고정순이 군대를 인솔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가 여양성을 함락시켜 황실과 정식으로 맞선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식에 대량 백성들은 모두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했다. 고정순은 병사가 적지 않았는데, 줄곧 비밀리에 사병을 모집하고 말을 구입해 병력을 확충했다고 했다. 넓은 여양성이 순식간에 점령당했다니 그의 세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고가가 기어코 황실과 대항할 계획을 실행한 셈이다.
심묘가 데려온 심가 호위들 역시 아주 놀랐으나 심묘는 담담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격언 중에 나중에 발휘하기 위해 먼저 절제한다는 말이 있었다. 사경행과 영락제는 고정순이 일부러 승리를 거머쥐도록 놔두는 것일 터였다. 고가에 먼저 달콤한 맛을 보게 하면, 고정순같이 단순한 이는 황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고 착각해서는 방심할 것이었다. 그때 고가를 일망타진하면 되는 일이다.
자신은 사경행을 믿었다. 고가가 정말 황실과 맞설 능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일을 걱정스러웠다. 백성들은 고가가 대량을 일구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굳게 믿었다. 고가도 입이 있어서, 황실이 그들이 반란하도록 핍박했으며 효무제의 죽음과 영락제가 연관되어 있다는 허튼소리를 퍼뜨렸다. 경현 태후의 외척이 대권을 장악해 영락제 모자가 효무제를 시해한 것이라고도. 영락제가 황위에 오를 때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셈이었다.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
물론 효무제가 죽고 나서 경현 황후는 벼락같은 수완으로 여러 황자들을 제거했다. 의문점 따위는 남기지 않았으나 세심한 사람들은 의아했을 것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심스러웠으나 감히 경현 태후의 눈꺼풀 아래에서 의혹을 표할 사람은 없었다. 이후에는 황위를 계승한 영락제가 대량을 번성케 하자 구태여 과거 일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이 일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고가의 이야기에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부 백성은 고가의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여겼다. 경현 황후가 말끔히 처리했다고 하나 결국 영락제에게 말썽을 가져오고 말았다. 지금 영락제가 백성들의 입을 막고 시장의 유언비어를 통제하면 사람들은 길에서도 말도 못 하고 눈짓으로만 대화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평생 이런 수완으로 백성들을 제한할 수 없었다. 민심을 따르지 않는 황제는 훗날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고가도 참 염치없네요. 감히 폐하께 누명을 씌우다니.”
경칩의 말에 곡우가 탄식했다.
“이미 반란을 일으켰잖아. 그래야 내가 사는데 더러운 말이 뭐 대수겠어? ……하지만 고가는 정말 흉악해요. 모두가 피해를 보게 하다니. 이겨도 장래 민심을 생각할 때 이긴 게 아닌 게 되겠어요.”
미간을 찡그린 심묘는 잠시 생각한 후 분부했다.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경칩이 멍해져 물었다.
“마마, 명제에 편지를 쓰시게요?”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 종이를 가져오너라. 성문에 거는 죄인을 찾는 방문(榜文)보다 더 커야 한다.”
그녀의 필체는 생동감이 넘치고 거리낌 없이 자유분방했다. 재간과 예기를 남김없이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작 써 내려가는 심묘는 냉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아주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일인 듯 글을 쓸수록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붓을 내려놓은 심묘는 거대한 종이를 들고 흔들어 먹물을 말렸다.
“이게…… 뭐예요?”
경칩과 곡우가 다가가서 종이를 보았다. 심묘의 글자는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나 동시에 맹렬했다. 종이 위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와 심장을 찌르려는 것 같았다. 글자를 모르는 자기들에게도 이 글이 매우 중요한 내용임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상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결과는 아주 중요하지.”
먹물이 말랐을 때 그녀는 경칩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탁본 가게에 가져가 3,000장 탁본하거라. 그리고 호위들에게 야밤을 틈타 곳곳으로 붙이게 하거라. 빨리해야 한다!”
곡우와 경칩은 감히 시간을 허비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그녀들은 조심스럽게 종이를 가지고 문을 나섰다.
심묘는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예로 대세를 다스릴 수 있고 글로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 대세는 이미 정해졌으나,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자신은 고가의 일을 황실에 이득으로 바꾸어 황실 편의 사기를 올리고자 했다. 문무의 길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고가가 소문으로 혼란을 주니 자신도 기이한 병법을 쓰기로 했다. 최후 승자가 누구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쪽이 원하는 바는 분명했다. 고가의 패배. 그뿐만 아니라 고가가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완패해야 했다.
그날 밤에도 사경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심묘는 혼자 예왕부의 일을 조리 정연하게 처리했다. 수시로 귀부인들을 모아 그녀들의 기분도 헤아렸다. 낮에는 몹시 바빠 사경행을 떠올릴 시간도 없었지만, 밤에 잠들 때면 쓸쓸했다. 그녀는 사경행을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햇살이 농서성 안 곳곳을 환히 비출 때, 한 사람이 자기 집 대문에 붙은 흰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에는 빽빽하게 글이 쓰여 있었다. 백정인 집주인은 글자를 몰라 마침 이웃집 마수재(馬秀才)가 지나가자 그를 불렀다.
“마수재, 자네는 책을 읽는 사람이니 이게 뭔지 좀 봐주게.”
마수재가 백정의 대문으로 걸어가 글을 보고 “좋은 글씨군!” 하고 찬탄했다. 그는 한 문장씩 읽기 시작했다.
“천하 동포에게 고한다…….”
불과 며칠 사이에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는 농서성 전역에 전해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대량의 다른 곳에도 전해졌다. 눈처럼 하얀 종이는 곳곳에 붙어 있었다. 학자들은 필체와 문장에 감탄하며 대부분 그 종이를 따로 보관했으며 글을 쓴 이를 알고 싶어 했다.
“옛 왕조는 약했으나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번성했으되 혼란스러워진 것인가? 폐하께서 등극하시자 곡식 창고는 가득 차고 바람과 비가 알맞다. 지금 도적을 위해 주인을 의심하고 있다. 도적은 군주를 배반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굴었다. 그 도적의 말을 믿다니 창피하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충성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구나!”
한림원. 방문을 읽는 사람의 주위로 학자들 여럿이 둘러싸고 있었다. 수치스러워하는 사람과 격분하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이 글은 먼저 근래 고가의 반란을 언급했다. 고가 도적이 대역무도한 일을 벌였음을 비난했으며, 그들이 퍼뜨린 소문을 언급했다. 뒷부분에서 그 유언비어를 여러 사람이 믿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가워졌다. 분명 영락제의 재위 동안 대량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국가는 부강하고 국민은 평안했다. 효무제의 재위 때보다 뒤떨어지지 않은데, 자신들은 영락제의 은혜와 공적을 생각하지 않고 도적놈의 망언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니 못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게다가 지금 대량은 문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인재를 많이 배출한 대량에는 학자와 무장이 골고루 있었다. 무장은 방법을 생각해 간신으로부터 군주를 보호하고, 문신은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봐야 했다.
이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는 모두 구절이 날카로워 글쓴이의 높은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글의 정치 견해를 제쳐놓아도 아주 좋은 글인데, 내용도 도리에 맞아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반성했다. 고가의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무너져 버렸다. 영락제는 명군으로 백성에게 어질고 너그러웠다. 그런데 고가는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들은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니었다. 하마터면 유언비어를 믿을 뻔했으니 무지몽매한 일이었다.
뜬소문에 동요하는 백성들을 깨우쳐주지 못한 학자들 역시 면목이 없었다. 무관들은 이 글을 보며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충성심에 불타올랐다. 그들은 고가 토벌군에 들어가 도적을 베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했다.
이후 영락제가 아버지를 시해하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말을 다시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종양은 밤에 붙인 방문 하나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이렇게 쉽게 유언비어를 사라지게 할 거라고는 더더구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심묘에게 더욱 탄복했다.
“마마의 한 수는 어느 학자나 문인보다 훌륭합니다. 학자들이 이렇게 한 사람을 추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 글을 마마가 쓰셨다는 걸 알면 아주 놀랄 겁니다.”
심묘는 웃었다.
“고가는 지금 여양성에 있으니, 농서성 일에 관여하지 못해. 기껏해야 유언비어로 선동할 사람을 군중 속에 들여보낼 뿐이지. 하지만 대량의 백성도 바보는 아니야. 두 가지 말 중 하나는 근거가 없고, 하나는 도리에도 맞고 근거도 있다면 너는 어느 것을 믿겠느냐?”
종양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백성들이 폐하를 믿기 때문이야. 그래서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거지. 고가가 기존에 이미 민심을 얻어 백성들이 그들을 굳게 믿고 지지했다면 그런 글을 열 장 스무 장 쓴들 헛수고였을 것이다.”
종양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뗐다.
“어쨌든 마마의 수는 탁월하셨습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시면 매우 좋아하실 겁니다. 게다가 마마께서는 장군부 출신이신데 이렇게 문인의 재능도 갖추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심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다니.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는 세상 사람을 속이는 글에 불과했다. 필요할 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고가든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 역시 고가의 수작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전생에 부수의가 황제가 되었을 때도 의심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때 배랑은 이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를 통해 의심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덕분에 부수의는 명제의 유일한 명군으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자신은 그때 그 수를 고정순에 사용했다. 이제 민심은 이쪽으로 넘어왔으니 고가가 황실의 명성을 파괴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 * *
대량 영주의 작은 마을.
청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길가 서원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배랑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배랑이 슬쩍 안을 들여다보니 육순이 훌쩍 넘은 듯한 서원의 선생이 머리를 흔들며 글을 읽고 있었다.
“옛 왕조는 약했으나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번성했으되 혼란스러워진 것인가? 폐하께서 등극하시자 곡식 창고는 가득 차고 바람과 비가 알맞다. 지금 도적을 위해 주인을 의심하고 있다. 도적은 군주를 배반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굴었다. 그 도적의 말을 믿다니 창피하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충성스럽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구나!”
글을 다 읽은 선생이 학생들에게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농서성에서 널리 퍼진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라는 글이다. 단지 한 부만 탁본했을 뿐이니, 너희 전부 베껴 한 부씩 내일 제출하거라.”
배랑은 멍해졌다. 순간 무언가 생각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서원 안쪽에 한번 더 시선을 준 후 떠났다.
* * *
미앙궁.
현덕 황후는 종이를 들고 웃으며 또박또박 영락제에게 들려주었다. 영락제는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자세 역시 불편해 보였다. 글을 다 읽은 현덕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경행이 정말 보물 같은 아내를 얻었네요. 장군 집안의 여장군으로 여겼는데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는 장원이에요. 지금 대량 서원에서는 암암리에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탐문하고 있는데, 여자가 썼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예요.”
영락제는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여우처럼 교활하오.”
현덕 황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반박했다.
“폐하를 도운 거예요. 예왕비 덕분에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가 모두 사라졌는걸요.”
“짐은 마음에 두지 않소.”
현덕 황후는 영락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회유했다.
“폐하는 마음에 두시지 않아도, 항상 경행을 위해 계획하셔야 해요.”
영락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영락제가 그녀를 불렀다.
“청정.”
현덕 황후는 저도 모르게 “응.”이라고 대답해버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이 이름을 듣지 못했다. 청정은 자기가 출가하기 전 규방 이름이었다. 영락제는 현덕 황후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 두루미의 입안에서 반 정도 탄 훈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후회하오?”
현덕 황후는 웃었다.
“신첩은 후회한 적 없습니다.”
“짐이 죽은 후, 그대는 경행을 잘 따르시오.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개가해도 되오.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바꾸면 그대는 잘 지낼 수 있을 거요.”
현덕 황후의 눈 속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는 눈물을 억누르고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폐하의 안중에 신첩은 그렇게 가치가 없습니까?”
그녀는 곧 자조의 빛을 띠었다.
“그래요. 폐하의 안중에 신첩은 줄곧 중요하지 않았지요.”
영락제는 아무 말도 없었다. 현덕 황후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알겠습니다. 신첩은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서둘러 그녀를 따라나선 도 고고는 위로를 건넬 적절한 시기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현덕 황후는 웬만한 일은 화낼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유한 사람이었다. 영락제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도 그에게 얼굴을 붉힌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오늘 처음으로 영락제에게 화를 냈다.
영락제는 말없이 타오르는 훈향에 시선을 고정했다. 공중에 향기가 자욱했다. 하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었다. 마치 사람의 기억처럼, 정처럼.
* * *
엽미는 자기 방 안에서 오랫동안 단장했다. 엽가 사람이 된 후로 엽 부인이 수시로 부족함 없이 챙겨주었으니 미모가 더욱 꽃폈어야 마땅하건만, 오늘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빛난다고 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얇은 원사로 만든 분홍색 긴치마와 복숭아꽃이 수놓인 윗옷은 한참 고심해 고른 만큼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나, 이 역시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다. 미간 사이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게 그 이유인 듯했다.
엽미는 수심을 가리기 위해 오래도록 공을 들여 치장했다. 한참 후 부드러운 눈빛을 가진 절색의 미인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선 엽미는 마침 걸어오던 엽각과 마주쳤다. 엽각이 의아한 시선으로 세심히 단장한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누나, 어디 가?”
“손가 소저 부에서 차를 마시고 오려고.”
엽미는 웃으며 말했다. 잘 다녀오라는 엽각의 인사를 뒤로하고 그녀는 엽부 호위들과 함께 손부로 갔다. 손부 역시 관리 집안이었으나 세도가라고는 할 수 없는 작은 가문이었다.
엽미가 손부로 들어가자 하인이 얼른 그녀를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방에는 금성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찻물이 차게 식어 있으니 꽤 오래 기다린 모양이었다. 엽미를 본 금성명의 눈이 즉시 환해지면서 흠모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미야, 너는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구나.”
엽미는 속으로 구역질이 났으나 달콤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오늘 외출은 아주 어려웠어요. 자칫 오라버니를 못 만나는 줄 알았지요.”
“손가 대형과 내가 우정이 있어 참 다행이다. 손 소저의 명의로 네게 초대장을 보내지 못했다면, 이렇게 네 얼굴을 한 번 보기도 어려웠겠지.”
금성명이 탄식했다.
“모두 오라버니의 능력이에요.”
엽미는 여전히 사탕처럼 다디단 미소를 지은 채 금성명을 추어올렸다. 미인이 자신을 우러러보자 금성명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라버니, 언제 날 데리고 엽부를 떠날 수 있나요? 이제 엽부에는 조금도 더 못 있겠어요.”
“네 마음은 안다. 그렇지만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해. 엽가는 보통 집안이 아니니 만전을 기해야 해.”
어떻게 엽가를 상대로 만전을 기한다는 것인지. 엽미는 분수를 모르는 금성명을 보며 마음속으로 냉소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엽무재의 세력을 파악해보고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 여겨 손을 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언제까지 끌 건가요?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엽가의 부귀영화도 싫어요. 그저 오라버니와 즐겁게 살고 싶은데…….”
젊은 여인의 달콤한 유혹에 견딜 수 있는 남자는 드물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색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엽미의 눈빛은 매력적이고 말투는 부드러워 하나하나가 소리 없는 초청이었다. 금성명은 목이 말랐다. 엽미를 멍하니 바라본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는 단숨에 엽미의 손을 잡은 채 충동적으로 말했다.
“이미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나도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하지만 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두려우니 내게 네 마음을 입증해주면 좋겠어.”
금성명은 있는 힘을 다해 엽미를 품에 바짝 껴안았다.
“네가 만일 내 사람이 된다면 되도록 빨리 널 구해줄게.”
엽미는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지만, 머뭇거린 건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그녀의 두 손이 금성명의 목덜미를 뱀처럼 기어올랐다. 그녀는 그의 귓가에 숨을 토했다.
“좋아요.”
* * *
밤은 아주 짧았다. 부드러운 분위기의 휘장 안에서 잠시 후, 바스락바스락 옷을 입는 소리가 들렸다. 금성명은 엽미의 매끄러운 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이미야, 나와 조금 더 있자. 아직 어둡지 않은데 일찍 돌아가서 뭐 하려고?”
엽미는 금성명을 등지며 어깨를 돌렸다. 그녀의 눈 속에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금성명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니 서둘러 엽부에서 나와야겠네요. 엽 승상은 날 단단히 단속하고 최근에는 볼 때마다 입궁하라고 독촉하고 있어요. 내가 입궁하게 되면 오라버니와는 이 일생 인연이 없을 거예요.”
엽미가 입궁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금성명은 바로 몸을 곧추세웠다.
“그럴 수 없어!”
금성명은 엽미와 관계를 갖고 나니 더욱 그녀를 놓기 아쉬웠다. 그는 엽미와의 관계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이제 다른 여인을 만난다 해도 아무 감흥이 없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흰쌀밥을 먹어보면 보리밥은 먹기 싫어지는 법. 금성명은 아무 데도 보낼 수 없다는 듯 다급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엽미는 그의 품에 기댄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연히 나도 원하지 않아요. 내 마음속에는 오라버니 한 사람뿐인걸요. 하지만 지금은 어찌할 수 없어요. 그러니 서둘러 떠나야 해요. 오라버니와 함께 명제에 도착하면 신선 부부처럼 매일 자유롭고 즐거울 거예요.”
엽미는 애정도 있고 의리도 있는 미인이었다. 금성명은 마음이 흡족해지면서, 일순 호방한 감정이 들었다.
“네 말이 옳아. 오늘 돌아가 잘 준비하마. 생각해보니 수로로 가는 게 낫겠어. 수로는 은폐되어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신 다른 길보다 빠를 테니까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겠네.”
엽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 승상이 의심할 수 있으니 닷새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오라버니는 그때까지 떠날 준비를 잘해두시구요. 나도 엽가 사람들을 잘 대응할게요.”
금성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달라붙었다. 이후, 옷매무새를 잘 정리한 엽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를 떠났다. 엽부 호위는 마차에 오르는 그녀에게 별일이 없는 것을 보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홀로 있는 마차 안에서 엽미가 소매를 걷어 올리자 하얀 팔 위로 울긋불긋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조바심이 난 금성명이 거칠고 우악스럽게 굴었던 것이다. 금성명에게 한껏 시달린 엽미는 몹시 피곤했다. 잠시 팔을 바라보던 그녀는 소매를 내렸다. 금성명 같은 남자에게 몸을 맡겨야 했다니.
이 수모와 굴욕은 모두 엽무재가 준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속여 함정에 빠뜨리지 않았다면 오늘 금성명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엽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엽부는 자신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어야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딘 값을 받아야 했다. 엽미의 눈에 흉악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닷새 후, 사경행이 돌아왔다. 여양성 전투에서 고가는 철저히 패배했다. 고가는 여러 해 인재를 끌어들이고 힘을 키웠기에 승리를 낙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적수도 그러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적수는 그들보다 더욱 오랫동안,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영락제는 황제가 된 날부터 고가를 끌어내릴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리 오랜 세월 준비한 계획이니 고가에 뒤처질 리 없었다.
영락제가 진짜 힘을 드러내자 혼란을 틈타 난동을 부리려던 신하들은 즉시 마음을 바꿔먹었다. 그들은 냉수를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효무제에게 억눌리던 소년 태자가, 경현 태후의 도움을 받던 소년 황제가 흉악한 야수로 성장했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고정순은 여양성이 격파되자마자 앞일을 깨닫고 미쳐버렸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던 그는 고완아를 포함해 온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 고정순은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웃으며 크게 외쳤다.
“나는 일생 종횡무진 세상을 돌아다니며 적이 없었다. 오늘 나이 어린 놈 손에 죽다니! 달갑지 않구나!”
사경행은 그의 목을 베고 냉담히 말했다.
“무지하구나.”
당시 고양과 계우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사경행은 고정순을 끝냈다. 드디어 대량 왕조에 도사리고 있던 백년 세가 고가는 자취를 감췄다. 고가의 잔존 세력은 곳곳으로 도망쳤으나, 모두 묵우군의 손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