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장
심묘는 감개무량했다. 세가의 부흥과 몰락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 같아도 사실 오래전부터 징후를 찾을 수 있었다. 고가는 감히 역모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황실은 여지를 남기지 않고 고가를 참혹하게 멸문했다.
“돌아올 때 시정 안에 퍼진 ‘천하 동포에게 고했다’를 들었어. 모든 문인이 사귀고 싶어 하던데, 재능이 출중한 호걸이 누구인지 모르겠는걸?”
사경행이 심묘를 보며 입가를 휘었다. 심묘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요.”
사경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묵우군에게 찾아보라고 해야겠어. 찾아서 남자면 의형제를 맺고, 여자면…….”
“여자면 뭐요?”
심묘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를 대비하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사경행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끌고 와서 베어버리게. 감히 내 부인보다 재능이 있다면 그것 또한 죄야.”
심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목련이 핀 것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웃는 심묘를 본 사경행의 마음이 쿵쾅거렸다. 갑자기 일어난 그는 그녀를 껴안아 침상에 내려놓았다. 심묘가 발버둥 치며 얼굴을 붉혔다.
“나 아직 목욕 안 했어요.”
“잠시 안고만 있을게. 움직이지 마.”
사경행이 몸을 돌리자 심묘는 그의 몸 위에 엎드리는 모양이 되었다. 사경행은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 어깨에 묻었다. 심묘는 그의 숨결에 간지러워하며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좀 전과 달리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명제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어.”
순간 심묘는 멍해졌다.
“네?”
“고정순이 죽기 전에 폐하의 비밀을 말했어. 부수의도 아는 것 같아. 이 기회를 부수의가 놓칠 리 없어.”
고정순은 죽기 전에 사경행에게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대의 형이 올해도 넘기지 못할 것을 명제가 알면, 대체 언제 출병하게 될지 추측해보시지?”
“고정순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무리 막아도 내부의 적은 막기 어려워. 게다가 궁중은 복잡하지. 궁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커. 고가는 이 소식으로 폐하를 압박하려 했을 거야. 그런데 최후에 생각을 바꿔 명제에 알리는 것을 택했지.”
“적국과 내통하는 걸로요?”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고정순은 대량과 명제가 싸워 서로 손해를 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을 거야.”
심묘도 동의했다. 고정순은 영락제가 선황을 시해하고 황제가 되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으나, 막상 영락제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비밀은 떠벌리지 않았다. 그 비밀을 승부수로 삼아 황실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 위함이었을 터였다. 사경행이 고정순을 어떻게 자극했는지 몰라도 그는 죽기 전 이 소식을 사경행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아마도 황실이 이 상황을 만회할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맞아요. 부수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요.”
심묘의 말처럼 부수의는 ‘포착’하는 게 특기였다.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든 일이든 기회든 모든 것을 포착했다. 오래 살지 못하는 황제에게 일이 생기면 대량에 반드시 혼란이 올 테니 부수의는 이때 출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볼 터였다. 잠시 생각한 심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명제는 대량과 맞설 힘이 부족해요. 부수의는 비밀리에 충분한 힘을 만든 후 손을 쓸 거예요.”
“그 전에 엽가를 먼저 정리할 거야.”
“엽가? 엽가를 일망타진할 생각이에요?”
사경행이 손가락을 튕겼다.
“내년까지 남기라고? 엽가 남매는 네게 넘기기로 결정했어. 어떻게 처리하든 네 맘대로 해도 돼.”
심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사경행의 손목에는 그녀가 묶어준 붉은 끈이 있었다.
“조심해야 해요.”
사경행과 심묘의 추측은 다음 날 사실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부수의의 행동에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심묘는 못내 당혹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조급하고 경솔하게 행동하리라고는…….
예왕부에 심구의 서신이 도착했다. 지금껏 오간 편지에는 대부분 장군부 사람들의 평소 생활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잘 지낸다는 이야기였는데, 오늘 편지는 이전과 달랐다. 더구나 필체 역시 매우 조잡했다. 편지를 쓸 때 매우 서둘렀던 게 분명했다. 날짜를 보니 오래전에 쓴 편지였다. 편지가 심묘의 손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허비됐음을 뜻했다.
편지를 본 심묘와 사경행은 침묵했다. 부수의가 움직였다! 대량을 향한 게 아니라 장군부를 향해서 움직인 것이다. 문혜제는 중병으로 일어날 수 없으니 부수의가 전권을 부여받아 명제 조정 일을 관리했다. 부수의는 증좌를 날조해 직접 장군부를 포위하고 토벌했다. 명제 황실에서 심가의 병권을 거둬들일 때, 심가군에 황실 첩자가 이미 많이 섞였던 터라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부수의는 명제 백성을 기만하고, 장군부에 거칠고 우악스럽게 손을 썼다.
하지만 심신은 이번 일을 일찍부터 준비해뒀다. 그는 명제 황실에 불만이 있는 조정 신하와 연합했다. 그들의 지위는 낮으나 홀로 싸우는 것보다는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소춘성의 나연영과 나연태가 나가군을 데리고 서둘러 정경성으로 왔다. 나가군은 나씨 가문이 키웠기에 황실의 명령보다 나가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몇 년간 심신에게 훈련을 받았었기 때문에 심신은 나가군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사경행이 정경성에 남겨둔 무리가 있었다. 장군부 사람들은 마침내 예왕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으나 워낙 긴박한 상황인지라 예왕에게 반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 게다가 사경행은 이미 심신에게 솔직하게 말해둔 터라 비난할 이유도 없었다. 사경행이 남겨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으나 하나하나 매우 뛰어났다. 더욱이 탐문에 매우 능통했다.
부수의는 장군부가 점점 약해진다고 판단했고, 당연히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장군부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장군부 역시 이날을 위해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부수의는 목표 시간 내에 장군부를 일망타진할 수 없었다. 그의 병력은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편지에서 심구는 장군부가 결국 정경성을 떠났다고 말했다. 부수의의 병사들이 계속 쫓아오긴 했지만, 장군부는 그들에게 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른 신하들과 함께 비열한 황권을 전복시키자고 합의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의 최후를 심구는 언급하지 않았다.
장군부는 대를 이어 명제에 충성했고, 더욱이 심 노장군은 충성과 절의(節義, 절개와 의리)를 가문의 도리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황권과 사이가 틀어져 원수가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황권을 빼앗는 데 성공해도 그 황위를 누가 이을지도 알 수 없었다. 명제 황자 중에는 선량한 이가 하나도 없었다. 누구도 새로운 군주가 될 자격이 없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심신은 자신이 황제가 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편지의 말미에 심구는 자신들은 함소곡 일대로 물러나 있으며, 함소곡 내의 마을에서 진국 사람 다수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편지는 여기서 끝났다. 심묘는 오래 침묵한 후에 입을 열었다.
“부수의가 움직이자 함소곡에서 진국 사람이 나타났다니, 진국과 명제는 이미 연합한 거예요. 부수의가 반드시 그리했을 거예요.”
사경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묘와 눈을 맞추었다.
“넌 네 아버지가 걱정되지 않아?”
“걱정해도 소용없는걸요. 지금 나는 천 리 밖에 있으니, 전략을 세워도 많은 변수를 파악할 수 없어요. 게다가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더는 황실에 맹목적으로 충성하지 않으니,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사경행은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은 같은 편이야.”
심묘는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예요?”
사경행이 심묘의 얼굴을 가볍게 잡았다.
“진국과 명제가 연합했다면 목표는 하나일 거야. 그들은 빠르게 대량을 공격하겠지. 국경선을 넘어 침입해오면 장인과 우리는 사실 같은 편에 서는 셈이지. 장인은 새로운 군주를 세우고 싶지 않고, 스스로도 황권을 건립하기 싫어해. 대량이 명제를 삼키고 진국도 멸망시키면 삼국은 하나가 되니 장인이 선택할 필요가 없어.”
심묘의 마음이 움직였다. 사실 자신은 이전부터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전생에 대량은 진국을 멸망시키고 정경성을 공격해 명제마저 점령했다. 당시 삼국의 국토는 대량에게 귀속되었고, 세상에 황제는 딱 한 명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겠어요? 부수의가 폐하의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니 곧 소식을 퍼뜨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대량은 혼란스러워질 테고, 당신이 책임질 일도 아주 많아질 거예요. 진국과 명제가 연합한다고 해서 대량의 적수는 되지 못할 테지만, 진압하는 과정은 몹시 어려울 거예요.”
사경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남자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 사람은 없어?”
심묘는 멈칫했다. 이렇듯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지거리하는 재주를 갖춘 자는 많지 않았다. 그녀가 또 한번 탄복하는 사이, 사경행은 싱긋 웃었다.
“지켜봐.”
* * *
고가가 무너진 일은 온 대량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천하 동포에게 고하다’를 보고 감화된 백성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불렀다. 고가가 먼저 대역무도한 짓을 벌였으니, 누구도 황실이 무정하다고 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정 신하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고가를 따르던 일파와 고가와 황실 사이를 살피던 기회주의자들, 고가에 확고히 반대하던 무리는 각자 새로운 살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줄을 맞게 선 사람들은 기쁨이 넘쳤고, 줄을 잘못 선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영락제는 절대 너그럽고 인자하며 후궁을 총애하는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누구보다 단단해서 확실히 효무제의 아들다웠다. 악랄한 수단을 써야 할 때 그는 절대 마음이 여려지지 않았다. 당초 정비는 후궁에서 가장 총애받던 비빈이었다. 그런데 영락제는 그 정분을 기억조차 못 하는 듯 단호하게 고가를 처리했다. 정비 배 속의 아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통찰력 있는 사람들은 영락제가 고가를 처리하기 위해 오랫동안 참아왔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조정 신하들은 영락제의 수완과 심성에 두려워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맡은 바를 해나갔다.
고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엽가는 뜨거운 가마 속 개미처럼 조급하고 불안했다. 아무리 영락제가 손을 쓴다고 했다고 이렇게 바로 손을 쓸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가가 이렇게 빨리 역사 속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영락제가 명민한 것은 맞지만, 지금 이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엽무재는 황실이 엽가를 회유할 때 일찍 복종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에서야 놓친 기회를 안타까워했다.
확실히 엽가는 기회를 놓쳤다. 종전 세력가들이 앞다투어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던 유력한 가문은 이미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엽가와 고가는 달랐다. 무장인 고가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면에 나설 수 있었으나, 문신인 엽가는 보조적인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엽가는 고가의 멸망을 따라 함께 붕괴하고 있었다.
많은 기반과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고가도 영락제의 손에서 고꾸라졌는데 엽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국세를 읽은 엽무재는 더욱 절망했다. 영락제가 고가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두 보았으니 엽가의 장래는 눈에 선했다. 엽가는 퇴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엽무재는 터무니없이 건방졌던 고가에 분노했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음을 한탄했다. 그는 별수 없이 달아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엽홍광부터 도망시킬 생각이었다. 엽홍광은 자신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반드시 엽가의 후대를 남겨야 했다.
엽무재가 눈코 뜰 새 없이 계획을 짤 때, 엽미도 한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또 손부에 가 금성명과 한바탕 뒤엉켰다가 돌아왔다. 금성명은 사흘 후 자신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약조했다. 요 며칠 엽무재는 그녀를 감시하는 일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아 엽미는 자유롭게 외출했다. 그녀가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엽무재는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엽미는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더 긴장되었다. 엽무재에게 남을 돌볼 겨를이 없으니, 그만큼 엽가가 대단히 위험한 처지에 몰린 듯했다. 자신은 고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자세히는 몰랐지만 엽무재가 두려워하고 있음은 눈치챘다. 그가 겁내는 것은 고가와 같은 결말을 맞는 것이었다.
한편 자신은 이 며칠간 엽각을 만나지 않았다. 근래 금성명과 명제로 도망친 후의 생활만 고민했고, 엽각을 어떻게 할지는 아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사실, 명제로 갈 계획을 꾸릴 때부터 자신의 머릿속에는 엽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엽각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패였다.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 그를 버리는 게 타당했다.
엽각은 귀가가 늦는 엽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초조해하고 있다가 돌아온 엽미를 보고 따지듯 물었다.
“어디 갔던 거야? 왜 이렇게 늦게서야 돌아와?”
“손 소저가 손수건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거든. 오늘 그녀에게 주고 온 참이야.”
“누나는 지금 승상부 소저야. 손 소저는 왜 누나한테 자수 같은 걸 시키는 거야?”
엽각의 목소리는 평온하지 않았다. 그의 미간 사이 초조한 기색을 읽은 엽미가 물었다.
“넌 근래 어때? 아버지가 널 데리고 곳곳으로 동료를 만나고 있는 거 아니야?”
엽각은 의기소침해졌다.
“말도 마. 처음에만 그랬을 뿐이야. 이 며칠 아버지는 바쁜 것 같아. 내가 물어도 일이 있다고만 하셔. 그래서 무료해 죽겠어.”
그가 엽미를 간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누나, 언제 아버지와 입궁 일을 상의할 거야? 보아하니 아버지는 일부러 날 피하고 계신 것 같아. 바쁘다고 하시지만 전부 구실 같은걸. 만일 누나가 입궁해서 폐하의 환심을 얻으면 아버지도 내게 잘 보이려고 하실 거야. 폐하도 날 중시하시겠지. 내가 벼슬길에서 성공하면 누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
엽미는 속으로 냉소했으나 얼굴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남매잖아. 당연히 널 도울 테니 걱정하지 마.”
잠시 망설이던 엽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와 아버지의 사이가 나와 아버지 사이보다 가까워. 근래 아버지가 특이한 행동을 하시지는 않았어?”
엽각은 엽미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특이한 점? 그런 거 없었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엽미는 질문하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혹시 아버지께 진귀한 물건이 있어? 혹은 비밀이나. 너라면 조금은 알아볼 수 있지 않아?”
엽각은 엽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나, 뭘 하려고?”
엽각은 야심이 있으나 총명함은 부족했다. 대신 잔머리는 좀 있었다. 표면적인 것들에 쉽게 미혹되고 탐욕스러우며 결단성이 부족했다. 엽미는 어려서부터 이런 성격을 여러 번 고치라고 조언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엽각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엽미는 손쉽게 그를 속여 고비를 넘기곤 했다. 엽미는 탄식했다.
“너도 알지만 우리 두 사람은 엽가의 진정한 핏줄이 아니야. 듣자니 요 며칠 아버지는 비밀리에 엽가 혈육을 찾고 있대. 찾지 못하면 그만이지만, 혹여 찾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당황한 엽각은 엽미의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정말로…… 아버지께서 정말로 엽가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엽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각의 표정이 비틀렸다. 분노와 질투가 뒤섞인 모양새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를 이용하고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거야? 무슨 이유로?”
“그래서 달갑지 않다는 거야. 난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다르잖아. 진정한 엽가 사람을 찾지 못하면 절름발이 엽홍광은 너와 다툴 수 없으니 엽가는 모두 네 것이 될 거야. 내가 어떻게 동생의 물건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게 두겠어?”
엽미의 말은 분노한 엽각에게 기름을 끼얹는 셈이었다.
“맞아, 이건 안 될 일이야.”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반드시 아버지의 약점을 찾아야 해. 승상이니만큼 분명 숨겨둔 비밀이 있을 거야. 아무리 철저히 일 처리를 해왔다고는 해도 완벽할 수는 없어. 그 비밀을 알아내면 아버지를 압박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손에도 유용한 패가 들어오는 셈이지.”
엽각 역시 그렇다고 여겼다. 정신을 집중하던 그는 곧 낙담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아. 아무 비밀도 없는 것 같아. 하지만…….”
그의 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 서재에 있는 미인도를 봤어. 그림이 멋지다고 여겨서 만졌는데 아버지께서 엄하게 제지하신 적이 있어. 그 그림에 무언가 있을 거 같지 않아?”
엽미가 캐물었다.
“그 후에는?”
“아버지께서 내게 이 그림에 뭔가가 있지만 지금 난 아직 관리가 아니니 쓸모가 없다고 하셨었어. 내가 관리가 되면 그 물건이 도움이 될 테고, 그때 줄 거라고 말하셨지.”
엽각은 손을 펴서 무언가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귀중한 물건이라 하면 난 그 그림만 생각나. 아버지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아서 깊이 따지지 않았지만. 어때?”
엽미의 눈 속에 기쁜 기색이 스쳤다.
“좋아.”
“그럼 내가 방법을 생각해서 훔쳐 올게.”
엽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엽미는 서둘러 그를 제지했다. 엽각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
“안 돼. 이 일은 널 위한 거지만 내가 생각했으니 반드시 내가 아버지를 위협해야 해. 네가 아버지를 협박하면 네게 불만을 품을지도 몰라. 네가 겉으로는 순종하지만, 속으로는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야. 내가 훔쳐서 그를 위협하면 아버지는 네가 내막을 모른다고 여길 테니 넌 여전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고.”
엽미의 말이 사리에 맞다고 느낀 엽각이 손뼉을 쳤다.
“누나, 생각이 세심하네.”
그는 감격 어린 시선으로 엽미를 보았다.
“누나는 내게 정말 잘해줘. 내가 높은 관직에 오르면 누나가 돌봐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반드시 몇 배로 보답할게.”
엽미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엽각을 바라보며 매우 친근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보답해주길 기다릴게.”
엽각이 떠나자 엽미의 표정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자신은 엽가에서 지내는 동안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은 적이 없고, 엽무재의 계산 아래 이용당하기만 했다. 게다가 엽가를 떠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금성명 같은 남자에게 몸까지 맡겼다. 이 거래는 어찌 봐도 수지가 맞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수지가 맞지 않은 거래를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엽가는 불행한 일을 당하기 직전이었고, 자신은 그전에 떠날 계획이었다. 엽가라는 배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엽가와 한데 묶여 침몰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귀중한 물건을 하나라도 받아가야 했다. 자신이 잃은 것을 조금이라도 만회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금성명이 가려는 곳은 명제였다. 그는 명제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생활이었다. 엽가는 대량의 승상이니 많든 적든 분명 비밀이 있을 것이고, 그 비밀은 대량의 조정 일과 아주 밀접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비밀스러운 소식을 외면하는 나라는 없다. 이 비밀은 엽무재가 오랫동안 축적한 보물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입신양명할 수단이자 엽가에서 자신이 잃은 것들을 보상해줄 무기였다. 엽가에서 잃은 것들은 자유와 몸, 그리고 어리석은 남동생이었다.
* * *
부로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사경행은 또 여양성으로 향했다. 고정순이 여양성을 반란 거점으로 선택한 이유는 성의 세력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묵우군이 고부의 잔존 병력을 제거했다 해도 온전히 제거된 것은 군사력에 불과했다. 사경행은 이번에 깊이 숨은 고정순의 추종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삼천을 잘못 죽일지언정 추종자 한 명을 달아나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직접 정리해야 했다.
사경행이 떠난 후 예왕부의 모든 업무는 심묘가 책임졌다. 예왕부는 대량의 큰일을 적절히 처리했기에 많은 신하가 예왕부를 주시했다. 이런 상황이니 조금의 사고도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심묘는 이전처럼 귀부인들과 왕래하며 그들을 은연중에 교화시켜 국세를 통제했다.
고씨 가문이 만든 재난은 거의 다 지나간 셈이었다. 고가의 반란은 여양성에서 시작되었기에 농서성 백성들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껏해야 고가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라고 크게 욕할 뿐이었다. 민심이 안정적일 때 조정 신하는 감히 멋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한 세가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그 세가는 물론 승상부 엽가였다.
엽무재는 조정에서 여러 해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허약한 소년일 때 황위에 앉은 영락제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남자로 성장했다. 그의 수완은 자기 부친처럼 무정해 엽무재는 엽가에 살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엽무재는 고정순처럼 아둔하지도 건방지지도 않았다. 영락제의 세력을 본 그는 지금 엽가에 황실과 맞설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영락제를 공격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터였다. 엽가는 관저의 운명을 내놓아야 했다.
세상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달가운 심정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걸어갈 사람도 없었다. 엽무재는 탈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일한 자식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수단을 강구했으나 위급할 때 자식도 버릴 수 있다고 독한 마음을 먹은 터였다. 하지만 엽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황실 사람이 감시하고 있으니 무사히 도망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영락제의 움직임은 그의 예상보다 더욱 빨랐다.
심묘가 어사 부인을 만나고 부로 돌아오니 하늘은 이미 거무스름한 빛깔이었다. 마침내 긴 여름이 지나가고 초가을 기운이 두드러졌다. 뜰 안 나무는 잎을 하나둘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얇게 깔린 나뭇잎은 바람에 쓸려가고 또 몇 장이 바람에 흩뿌려졌다. 경칩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빗자루를 들고 뜰 안을 쓸었다.
심묘는 뜰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당숙이 가까이 와 그녀를 보며 친근하게 웃었다.
“마마, 오늘 주방에서 탕을 끓였습니다. 곧 마마께 한 그릇 올리겠습니다. 근래 마마께서 종일 바쁘시니 몸이 상하실까 걱정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을 뿐, 고생이랄 수는 없지요.”
심묘는 살짝 웃으며 여양성에 있는 사경행을 생각했다. 일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 농서성은 평온해 보였지만 사실 위험이 깊게 숨어 있었다. 엽가도 잘 정리해야 했고, 천리 밖에는 명제도 있었다. 심묘는 명제를 걱정하는 한편 대량도 염려했다. 영락제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부수의와 진국이 언제 연합해 대량을 공격할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외의 일이 터지게 되면, 대량 황실에서 중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사경행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 역시 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사경행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없었다. 천천히 계획해서 상대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때, 모경이 급히 들어왔다. 표정이 괴상했다. 근래 그에게 밤낮 구별 없이 엽미 남매의 동정을 감시하라고 한 터였다. 엽미는 금성명에게 달라붙어 그와 함께 대량을 떠나려고 했다. 그녀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도록 할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엽미가 엽무재보다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다.
“폐하께서 엽무재에게 입궁하라고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모경의 말에 심묘는 당황했다.
“입궁?”
모경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엽부는 혼란스럽습니다. 하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려 합니다. 궁에서 보낸 사람이 바깥을 지키고 있고, 안은 매우 어지럽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영락제가 엽가를 처리하려 하는 건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이라 심묘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사경행은 여양성에 있었다. 영락제는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서 사경행과 함께 있을 때 엽가를 처리하는 게 나을 터였다. 하지만 엽무재가 미처 손쓸 틈이 없도록 빨리 실행에 옮기려는 듯했다.
옳은 판단일지도 몰랐다. 엽가가 궁지에 몰리기는 했지만, 재난을 피할 곳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엽가에 숨 돌릴 기회를 준다면 엽무재는 도망칠 구석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러니 영락제는 지금 입궁의 명분으로 엽무재를 연금하려는 게 분명했다. 적을 잡으려면 먼저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야 했다. 엽무재가 연금되면 엽부에는 우두머리가 없는 셈이니 내부에서부터 혼란이 시작될 것이고, 그때 엽가를 정리한다면 손쉬울 터였다.
잠시 생각한 심묘는 입을 열었다.
“너와 종양, 그리고 철의는 바로 엽부로 가거라. 엽미 남매를 주시하고, 만일 그들에게 움직임이 있다면 따라가거라. 그들이 농서성을 떠나려 한다면 생사를 논하지 말고 데려오너라.”
종양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저희 세 사람 모두 엽미 남매를 주시합니까? 큰 재목을 너무 작은 곳에 쓰시는데요. 엽 부인도 만만한 여인이 아니라는데, 저는 엽 부인을 지켜볼까요?”
“엽 부인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엽무재는 엽 부인이 정무에 손대지 못하게 했어. 그러니 엽 부인은 엽무재의 세력과는 교류하지 못한 그냥 똑똑한 부녀자일 뿐이다. 엽 부인은 이 풍파를 뒤집을 힘이 없어. 폐하께서 함께 입궁을 명하지 않으신 건 바로 이 점을 아시기 때문이지. 오히려 엽미 남매가 아주 교활하지. 특히 엽미는 그대로 엽가를 떠날 리 없다. 이익을 위해 반드시 무언가 할 거야. 이 점을 가장 유의해야 한다.”
종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부터 명령을 즉시 따르는 철의와 모경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이 떠나려 할 때, 심묘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들을 불렀다.
“만일 엽부에서 다리가 불편한 공자를 만난다면 그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해. 누군가 그를 해치려 하면 그를 도와주거라.”
* * *
밤중, 엽부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황실에서 엽무재를 ‘초청’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인들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라 당황스러워했지만, 소문을 들어 엽부의 입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가도 앞으로가 막막했다. 모두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부 안의 인심은 흉흉했다. 그러나 황실 사람이 엽무재를 데려가려 할 때 반항하는 주인을 보고 하인들은 결국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각자 의복과 장신구를 챙겨 떠날 준비를 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평소 엽 부인은 하인들을 잘 단속하고 가르쳤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큰일 앞에서 신선이 아니고서야 아무렇지 않은 듯 대처할 이는 없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엽 부인 스스로도 그러했다. 그녀는 금은과 고급 의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부터 엽무재의 계획을 눈치채고 기대를 품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도망 계획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엽무재의 본모습을 지금에서야 똑똑히 본 셈이다. 그가 부부의 정분을 생각하지 않으니 자신도 남편이 없는 셈 치기로 했다. 그녀는 서둘러 가지고 갈 수 있는 금권과 장신구를 모두 챙겼다. 이대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무도 엽무재에게 영락제의 과녁이 되라고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큰 재난이 닥치면 새는 홀로 날아가는 법이었다.
엽미와 엽각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엽각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미간 가득 초조한 기색을 띠고 그가 엽미에게 물었다.
“누나, 정말이야? 승상부는 정말 끝난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 낌새도 없었잖아. 아냐, 폐하께서 아버지를 입궁시킨 건 조정 일을 위해서지 결코 다른 이유는 아닐 거야.”
엽미는 며칠 전부터 장신구를 은자와 금권으로 바꾸었다. 은자와 금권은 언제 어디서든 좋은 무기였고, 위급한 처지에서는 더욱 큰 힘을 발휘했다.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동생을 훈계하듯 다그쳤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서도 넌 여전히 현실을 부정할 거야? 단순히 조정 일을 이야기할 거라면 아버지가 호위를 데리고 도주를 시도했겠어? 분명 형벌이 두려워 도망치려는 모습이었어.”
“징후가 전혀 없었잖아!”
엽각은 여전히 엽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네가 주의하지 않았을 뿐이야.”
엽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엽미를 주시했다.
“무슨 뜻이야? 누나, 설마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 있으면서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나는 추측만 했을 뿐이야. 증좌 없이 직감을 믿은 거였어. 네게 말했어도 증좌가 없는데 네가 믿었을까?”
엽미는 속으로 냉소했지만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일은 잘 준비하면 돼. 너는 내 남동생이야. 엽가에 사고가 생겼다고 우리가 엽가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어. 기회를 찾아 도망쳐야지. 나는 널 데리고 함께 떠날 거야.”
엽각의 표정은 복잡했다. 상황이 달갑지 않아 막막해하는 모습이었다.
“엽부에 있으면 장래가 점차 밝아질 줄 알았는데. 관리가 되기는커녕 이렇게 의지할 데 없이 도망치는 떠돌이 신세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처음부터 엽가를 따라오지 말 걸 그랬어. 흠주에 있을 때보다 더 나쁜 상황이잖아.”
엽미는 모든 금권을 잘 모아 여러 개로 나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야. 먼저 목숨을 보전해야 해. 너도 여기 있지 말고 방으로 가 값어치 있는 것을 모아. 그래야 도망칠 때 쓰지.”
엽각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한 그는 엽미의 방을 나섰다. 그녀의 말대로 물건을 정리하러 간 것이다. 오랫동안 방 밖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자 엽미는 일어났다. 눈 속에 검은 안개가 자욱했다.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춘 그녀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녀는 엽무재의 서재로 걸어갔다. 엽무재의 서재는 닫혀 있었다. 평소 서재에 엽각과 엽 부인도 출입했는데, 엽무재는 때때로 그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신중한 엽무재가 무언가 숨기려 했다면 서재처럼 사람들이 찾기 쉬운 곳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위험한 곳일수록 더 안전하다는 말처럼 엽무재가 역으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부러 보란 듯이 물건을 서재 안에 아무렇게나 뒀을 수도 있었다.
엽미는 이전에 엽각이 알려준 것을 잊지 않았다. 엽무재의 서재에 미인도가 걸려 있고, 그 미인도가 엽무재의 ‘중요한 물건’이었다. 지금 엽무재는 갑작스럽게 황실에 잡혀갔으니 그 물건은 계속 서재에 있을 터였다. 지금 엽부는 흉흉해서 서재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엽미는 수월하게 서재에 들어갔다. 그녀는 빠르게 미인도를 찾았다. 미인도는 엽무재 책상 맞은편 벽에 걸려 있었다. 엽미는 두 손으로 미인도를 더듬었으나, 이상한 곳은 없었다.
엽각은 무엇을 어떻게 발견한 걸까. 단념하지 않고 집중해서 찾았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맥이 빠졌다. 엽무재가 그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미인도를 바라보니 미인이 그려진 곳이 조금 이상했다. 미인은 복숭아나무 아래 잔을 들고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뺨에는 홍조가 보였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듯 아리따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인의 눈은 아주 냉담해서 웃음기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엽미는 등 뒤가 서늘했다.
엽미는 잠시 멈칫했다가 손을 내밀어 그 그림 속 미인의 눈을 더듬었다. 과연 손가락에 닿은 곳이 단단하고 튀어나와 있었다. 힘을 줘서 누르니 탁 소리가 들리며 미인도가 걸린 벽이 움푹 들어갔다. 흥분한 엽미는 서둘러 안쪽에서 철로 만들어진 상자를 꺼냈다. 이 상자는 엽각이 말한 물건이 분명했다. 엽무재의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것이다. 물건을 손에 넣은 엽미는 서재를 재빨리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서재 문이 삐꺽 소리를 내며 열렸다. 놀란 엽미의 눈에 바퀴 의자를 밀고 들어오는 엽홍광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엽미를 맞닥뜨린 엽홍광도 당황했다.
“큰누나?”
엽홍광은 걱정스러웠다. 부는 혼란스럽고 인심도 흉흉했다. 자신은 적자였지만, 몸이 불편해 이 부에서 지위가 높지 않았다. 평소에는 엽무재의 보호가 있어 다들 자신에게 예의를 갖췄으나, 그가 잡혀가듯 입궁했으니 아무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엽 부인은 평소에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부친이 걱정되었으나, 부에서 자신과 대화해줄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의자를 밀어줄 사람도 한 명 없었다. 근심으로 걱정하던 엽홍광은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엽무재의 서재로 찾아왔다. 서재에는 아직 부친의 숨결이 남아 있어, 아직 자신이 그의 비호를 받는 엽 공자라고 느끼게 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서재에 예상외로 엽미가 있었다.
“큰누나, 어째서 이곳에 있어?”
엽홍광이 물었다. 상자를 든 엽미는 엽홍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물건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거든. 궁에서 돌아올 때까지 맡아두라고 하셨어. 하인들이 모두 바빠 보여서 내가 직접 찾으러 온 거야.”
엽홍광의 시선이 엽미가 든 상자에 닿았다.
“무슨 물건? 큰누나가 껴안은 그 상자야?”
“맞아. 셋째 너도 물건을 찾으러 온 거야? 방해하지 않고 나갈 테니 천천히 찾아봐.”
엽미가 서재를 떠나려 엽홍광의 의자를 지나칠 때, 엽홍광의 말소리가 들렸다.
“큰누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서재에 여자를 들인 적이 없어.”
엽미는 단숨에 걸음을 멈췄다. 엽홍광의 눈빛은 매우 맑고 투명했으며 순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날카로웠다.
“큰누나,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어째서 날 속이는 거지?”
엽미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널 속이지 않았어.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아버지께서 돌아오셨을 때 물어봐. 그럼 내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잖아.”
엽홍광은 엽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이어서 물었다.
“그 상자 때문이지? 누나는 그 상자를 훔치려는 거지? 그 상자는 아버지의 것이야. 아버지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돼. 부가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물건을 훔치러 오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엽미는 당황했다. 몸이 약하고 절름발이인 엽홍광은 아무래도 엽무재의 두뇌를 이어받은 듯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데도 아주 총명했다. 엽미는 점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누나, 그 상자를 내려놔. 그럼 나도 누나가 뭘 훔치려 했다고 말하지 않을게.”
엽미는 엽홍광을 달래려 했다.
“셋째, 이 상자는 아버지가 내게 가져오라고 하신 거라니까. 정말로 훔치려는 게 아니야.”
“정말 아버지가 챙겨두라고 하신 거라면 급할 거 없어.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때 누나가 가져다드려.”
엽홍광은 조금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금성명과 약조한 시각이 점점 가까워지자 엽미는 마음이 다급했다.
“만일 내가 싫다면?”
엽홍광은 눈살을 찌푸릴 대로 찌푸렸다.
“정말 훔치려는 거야?”
엽미는 속으로 분노했다. 엽홍광이 이렇게 완고하게 나오니 그를 어떻게 위협하고 회유해야 할지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똑똑하지만 어리석기도 했다. 한눈에 이 상자의 중요성은 알아보면서, 자신이 이 물건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모르다니. 엽미가 말이 없자 엽홍광의 안색이 날카로워졌다.
“큰누나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난 어머니를 모셔올 거야. 어머니께 부탁해 누나를 저지할 수밖에 없어.”
엽 부인은 총명한 여인이었다. 엽부 안 모든 일을 맡은 주모이기도 했다. 게다가 영락제가 신경 쓸 정도의 가치는 없기에 엽부에 남아 있었다. 하인들은 그녀의 지시를 들을 터였다. 엽미는 초조했다. 엽 부인은 엽미 자신을 딸로 여기긴 하지만,자신보다는 엽무재의 편이었다. 그녀가 알게 되면 이 상자가 자기 손에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안 돼!”
엽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럼 그 상자를 내려놔.”
“셋째, 내 말을 들어봐…….”
“여봐라!”
갑자기 엽홍광이 크게 소리쳤다. 놀란 엽미는 바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엽홍광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는 원체 허약한지라 엽미에게 완전히 제압당하고 말았다. 엽미는 그가 소리치지 못하게 입을 막은 채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큰 가위에서 은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엽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빠르게 계산을 끝낸 듯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가위를 들었다. 가면처럼 얼굴을 굳힌 그녀는 엽홍광의 가슴을 향해 가위를 매섭게 꽂았다.
엽미에게 입과 코를 막힌 엽홍광은 불시에 가위로 찔리고 말았다. 몇 번 발버둥 치던 그는 눈을 부릅뜨고 엽미를 단단히 주시했다. 세상에 이렇게 악랄한 여인이 있을 줄이야. 소리 지를 힘도 없는 그는 신음만 냈다.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본 엽미는 냉랭히 말했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네가 너무 말이 많았어.”
엽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를 떠났다. 의자에서 떨어진 엽홍광은 완전히 바닥에 엎어졌다. 피가 점점 바닥을 적셨다. 그는 젖 먹던 힘으로 입구까지 기어가 사람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코앞에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너무나도 요원했다. 엽홍광은 절망했다.
그때, 철의를 비롯한 예왕부 호위가 막 엽부에 도착했다. 엽미의 행방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엽미가 떠났다고 여겼다. 서재를 막 조사하려던 그들은 피바다 속에서 사경을 헤매던 엽홍광을 보고 당황해했다. 종양이 철의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어떻게 하지요?”
모경이 다른 방을 둘러보고 다가왔다.
“엽미 남매가 부에서 달아나려 합니다. 철의 대형은 경공을 잘하시니 따라가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철의는 창문을 통해 뛰어나갔다. 어두운 밤 속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모경의 시선이 바닥의 엽홍광에게 닿았다. 미동이 없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머리를 긁적인 종양은 엽홍광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코끝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모르겠어. 아직 숨이 붙어 있네. 하지만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걸.”
“계략에 걸려든 모양이야. 사람을 불러오자.”
종양은 모경을 저지했다.
“관둬. 엽부 사람들은 정신이 없는데 어디 이 공자에게 신경을 쓰겠어? 털을 잃은 봉황은 닭보다 못하다는 말, 못 들어봤어? 게다가 엽 부인도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 모습을 보면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를 거야. 의원도 부르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데려가자.”
모경은 엽홍광을 껴안았다. 엽홍광은 아주 가벼워 모경은 가볍게 그를 안고 움직일 수 있었다.
“마마께서 이 녀석을 눈여겨보시던데,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크게 노하실 거야. 일단 이 녀석을 데리고 고 공자에게 찾아가자. 살고 못 살고는 자기 운명에 달렸겠지.”
종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엽홍광이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애써 몇 자를 내뱉으려 입술을 달싹였다.
“미…… 물건…… 훔쳐…… 도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종양이 물었지만, 엽홍광의 고개가 다시 기울어지더니 불러도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모르겠어. 하인들이 올 수도 있으니 일단은 데려가자.”
모경의 말에 종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나는 듯 빠르게 서재를 떠났다.
* * *
심묘는 자기 방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영락제가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관련된 많은 일도 앞당겨졌다. 계획은 한 가지 일일 뿐,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세 호위가 돌아오는 시간이 지체될수록 심묘의 마음도 점차 가라앉았다. 교활한 엽미가 이미 눈치를 채고 달아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때, 경칩이 기뻐하며 외쳤다.
“돌아왔어요, 돌아왔어요! 마마!”
문밖에서 곡우의 놀라는 소리도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빨리 고 공자를 모셔와라.”
모경의 목소리였다. 문이 열리고 모경과 종양이 걸어 들어왔다. 사람 하나를 껴안고 있던 모경이 그를 침상에 눕혔다. 지켜보던 심묘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엽홍광!”
“이자가 서재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습격을 받은 것 같은데, 찌른 사람은 엽부 사람 같습니다. 엽미 남매는 마마의 말씀대로 달아나려 해서 철의가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도중 암호를 남겼을 테니 곧 따라가겠습니다. 하인들에게 고 공자를 모셔오라고 지시도 했습니다.”
모경이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엽부에서 누가 이 아이에게 이토록 원한을 품었지?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독한 수를 쓰다니.”
부명과 닮은 엽홍광이 다친 모습을 보자 심묘는 마음이 괴로웠다.
“아마 엽미가 했을 겁니다.”
종양의 말을 들은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이 아이가 여기 오는 도중에 한 번 깨어났습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추측하기에는 엽미가 물건을 훔쳐 도망쳤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엽미가 물건을 훔칠 때 이 아이와 맞닥뜨렸고 증좌를 없애려 죽이려 한 것 같습니다.”
모경의 말에 종양이 덧붙였다.
“하지만 도대체 뭘 훔친 건지 모르겠습니다. 금은, 진주, 보석? 어쨌든 고작 물건을 훔치려고 어린아이에게 손을 쓰다니, 엽미는 정말 지독합니다.”
“이상해.”
심묘가 툭 한마디를 내뱉자 두 사람은 당황해하며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물었다.
“무엇이 이상합니까?”
“이상해. 이 일은 너무 이상해.”
그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더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심묘는 입을 열었다.
“종양, 너는 지금 철의를 따라가라. 엽미는 육로를 통해서든 수로를 통해서든 어쨌든 대량을 떠나려 할 거야. 쫓아가서 시간을 끌어. 막지는 말고. 시간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좋아. 출발을 최대한 지연시켜.”
“막지 말고 시간만 끌라고요?”
종양은 당황스러웠다.
“그래, 막지 마.”
심묘는 침상 위 엽홍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경칩과 곡우를 불러 고양이 오자마자 치료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명했다.
“모경은 날 따라 서재로 가자.”
그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무거운 심묘의 표정을 보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심묘의 눈빛은 칼처럼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심묘는 생각에 잠겼다. 미 부인이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면, 어디로 갔을까. 과연 그녀는 무슨 물건을 훔쳤을까. 알아내야 할 점은 늘어났지만, 아무튼 특별한 방법으로 그녀를 배웅해주겠다는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 * *
엽미와 엽각은 금성명이 준비한 마차로 뛰어올랐다. 금성명도 능력이 없지는 않아 엽부 하인을 매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엽미와 엽각의 움직임은 부 밖을 지키던 황실 사람들에게 금세 발각되었다. 병사들은 그들을 끝까지 쫓았다.
엽각은 마차의 발을 들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빠른 말발굽 소리가 유달리 또렷하게 들렸다. 엽각의 마음이 바짝 죄어왔다.
“누나, 어떡해? 잡히면 우리는 끝이야.”
엽각은 몹시 두려워하며 엽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엽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더 빨리 갈 수 없느냐!”
더욱 초조해진 엽각은 호통을 쳤고, 마부는 더 매섭게 채찍질했다. 말을 모는 속도가 약간 더 빨라지자 엽각의 마음도 조금은 안정되었다. 순간 무언가 생각난 그는 엽미에게 물었다.
“누나,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누나가 도망갈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멀리 못 가고 잡혔을 거야.”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일찌감치 준비했어.”
엽미는 이 마차를 금성명이 준비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오늘 금성명과 함께 도망칠 거라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에 엽각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에게 굳이 밝힐 필요도 없었다. 마차가 곧 모퉁이를 돌았다. 바깥을 본 엽미가 말했다.
“우리 둘이 한 마차에 같이 있으면 더 쫓아오기 쉬울 거야. 이러다 따라잡힐지도 몰라. 차라리 나눠서 움직이자. 조금 이따가 팔보가에서 만나.”
엽각은 긴장된 상황 속에서 굳이 떨어지자는 엽미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갈라지자고? 그냥 같이 가자. 가는 길에 서로 도울 수도 있잖아.”
“함께 가면 황실 사람에게 쉽게 잡힐 거야. 걱정하지 마. 넌 마차에 있어. 내가 내릴게. 마부에게 팔보가로 가라고 말해둘게. 그때 다시 만나자. 성을 나가는 일도 다 준비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거기서 만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마차에서 내릴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은 엽각은 내심 안심했다. 그는 더는 엽미를 만류하지 않았다. 엽미는 길가에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엽각을 태운 마차는 다시 앞으로 달려갔다.
엽미는 마차가 자취를 감춘 방향을 바라보았다. 면사 아래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휘었다. 그녀는 다른 쪽 길을 따라 작은 집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다. 엽미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잘 처리한 거지?”
어둠 속 사람이 다급히 묻자 엽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엽각은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엽미가 내린 후부터 마차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황실 병사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점점 희미해지자 엽각은 마음을 놓았다. 황실 사람들의 추적을 피한 것 같자 이내 마차의 덜컹거림이 불편해졌다.
“속도를 늦춰라.”
하지만 마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불만스러운 엽각은 마차의 발을 들었다. 그리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마차가 달리는 길은 성안의 길이 아니라 산 위였다! 팔보가라는 거리가 이렇게 멀리 있을 리 없었다. 어째서 마부는 이곳까지 마차를 몰고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험한 산길에서 마차의 흔들림은 점점 심해졌다.
“더 앞으로 가지 말아라! 팔보가로 돌아가!”
엽각의 외침에도 마부는 계속 앞으로 달렸다. 엽각은 분개했으나 큰 소리가 나면 황실 사람이 눈치챌까 두려웠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마부는 점점 속도를 줄였다. 마차는 마침내 멈추었고 앞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부가 마차에서 내렸으리라고 생각한 엽각은 발을 들어 바깥의 마부를 보며 욕을 했다.
“당신, 내려서 대체 뭘 하려고? 빨리 팔보가로 가지 못해?”
마부가 엽각을 한 번 보았다. 엽각은 그제야 마부가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더 덩치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부의 일이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긴 해도, 이 사람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건장한 마부는 없었다. 엽각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감히 크게 소리치지 못했다. 만약 마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가 그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저항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말의 뒤로 간 마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순간, 그가 손에 쥔 무언가로 말의 엉덩이 부분을 세차게 찔렀다. 놀란 말은 앞발을 높이 들더니 앞을 향해 질주했다. 말이 갑작스럽게 달려가자 엽각은 마차 안에서 엎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엽각은 허겁지겁 마차 발을 휙 젖히고 앞을 내다보았다.
엽각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낭떠러지였다. 천길 나락, 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이리저리 부딪치며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 절벽 가장자리에 마차의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잠시 후, 신발이 나뭇잎을 밟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절벽 아래 떨어진 마차 위로 두 개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엽각이 마지막으로 처절하게 외친 “누나!”라는 외침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