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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67장 (19/71)

폐후의 귀환

14권

67장

심묘는 서재 안에서 빠른 속도로 글을 쓰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종이를 빽빽이 채워갔다. 모경은 그런 심묘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 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심묘의 손목이 처음으로 멈췄다. 검은 먹물이 가득한 흰 종이에는 지도도 그려져 있었다. 심묘는 모경에게 종이를 말리라고 명한 후 홀로 생각에 잠겼다. 때때로 눈살도 찌푸려가며 매우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모경이 문을 여니 종양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철의와 함께 엽미 남매를 뒤쫓았습니다. 성 모퉁이에서 헤어졌기에 철의는 엽미를 따라가고 저는 엽각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엽각이 탄 마차가 갑자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부가 낭떠러지 근처에 마차를 세운 후 말을 놀라게 만들어 마차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엽각은 죽었을 겁니다.”

모경은 얼떨떨했다.

“절벽? 그 마부는 누구야? 엽각과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모경의 물음에 종양이 코를 문질렀다.

“급히 돌아와 소식을 알리느라 그 마부의 배후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조사할 것 없다. 마부는 엽미의 사람이야.”

심묘의 말에 종양이 멍해졌다.

“엽미가 마부에게 엽각을 죽이라고 사주했다구요? 엽각은 그녀의 남동생입니다. 게다가 어차피 죽일 거라면 구태여 도망가는 동안 데리고 다녔겠습니까?”

“도망칠 때는 표적이 필요한 법이야. 엽각은 엽미의 친동생이니 표적이 되기 가장 쉽지. 내 생각에 마부는 엽각을 죽였을 뿐 아니라 그 절벽 아래로 엽미 남매의 옷을 던졌을 것 같구나. 사람들이 두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고 여길 수 있도록.”

모경과 종양은 그제야 깨달았다. 엽미는 퇴로를 찾긴 했으나 추격당하다 잡힐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죽었다고 여기도록 꾸미기로 했다. 황실 사람들이 아무리 한가해도 이미 죽은 사람의 뒤를 쫓을 리는 없었다. 엽각은 그녀의 친동생이니 보통 사람들은 그녀가 도망칠 때 당연히 그와 함께할 거라 여길 것이었다. 그러니 낭떠러지에서 남매의 옷 조각을 발견하면 엽미도 그 마차 안에 있었다고 생각할 터였다. 엽미는 엽각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종양이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친동생인데, 이렇게나 독하고 악랄한 수단을 쓰다니…….”

심묘는 그다지 마음 쓰지 않았다.

“엽미는 진작에 엽각을 버리기로 결정했을 거야. 그다음에는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이용한 것뿐이야. 이게 엽미의 능력이야.”

동시에 미 부인의 능력이기도 했다. 그녀는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도록 만들었다. 전생에 그녀의 남동생은 후궁 안에서 그녀가 더 강한 권세와 더 넓은 영향력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으니 그녀는 동생과 정이 깊었다. 그런데 현생에서는 그 남동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이익도 줄 수 없고, 심지어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유일한 혈육을 죽인 것이다.

창밖에서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종양이 창문을 열자 눈처럼 하얀 비둘기가 날아 들어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종양은 비둘기 다리에 묶인 종이를 폈다. 빠르게 읽은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했다.

“철의의 말에 따르면 엽미와 금성명은 부두에 도착해 수로를 이용할 것 같답니다.”

바깥에 습기가 가득한 바람이 세게 불었다. 한바탕 비가 올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그럼 그들이 바다로 나간 후 쫓기 어려울 겁니다. 저와 종양이 그들을 잡아 마마께 데려올까요?”

“아니.”

심묘는 막 마지막 한 장을 다 쓴 참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말린 후 편지 봉투 안에 넣고 종양과 모경에게 명했다.

“묵우군에서 동작이 민첩한 사람 몇 명을 뽑아 이 편지를 가지고 엽미를 따라 명제까지 가도록 해라.”

종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명제로 갑니까?”

“모경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금성명의 옛 친구가 명제에서 장사를 하는데, 최근 서로 왕래가 잦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그들이 명제로 가려는 게 분명해. 더구나 국외로 가야 엽미가 대량의 병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가서 엽미가 지니고 있는 물건을 주시하거라. 숨겨두거나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살펴. 발견하면 그 물건을 이 봉투 안의 것과 바꾸어라.”

그녀는 봉투를 모경에게 주었다. 모경은 편지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빨리.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

모경이 봉투를 받아들자 심묘가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이렇게 명제로 가게 그냥 둡니까? 마마, 그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으셨나요?”

종양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맞다. 그들은 내 적이지. 하나 지금 그들을 놔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저승으로 보내는 길이지.”

심묘가 냉랭히 말했다.

“빨리 가거라. 가능하다면 그들이 배에 오르기 전에 물건을 바꿔. 그게 가장 좋을 것이다. 배에 오른 후 바꾸려면 곤란해질 테니.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계속 그들을 따라가 꼭 물건을 바꾸어라. 수시로 상황을 전하고. 다른 분부가 있다면 내가 다시 전하겠다.”

두 사람은 엄숙히 말하는 심묘를 보고 긴장한 낯빛으로 편지를 품고 빠르게 떠났다. 심묘는 한 손으로 탁자를 짚고 팽팽히 입술을 오므렸다. 그녀의 시선에 살의가 스쳤다. 자신은 미 부인이 죽길 매우 바랐다. 오래 끌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빠를수록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영웅들이 천하 강산을 차지하려 다투고 있었다. 대량도 진국도 명제도 모두 같은 것을 원했다. 부수의는 이미 진국과 연합했으니, 앞으로 이 싸움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 복잡한 때에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죽일 테지만 그 전에 충분히 이용하는 게 더 좋은 수였다. 개가 개를 물게 하는 방법이 아주 좋으리라.

미 부인의 뼛속 깊이 숨겨진 이기심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친동생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손해 보는 거래를 할 리 없었다. 그녀는 엽가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물건을 얻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권세를 얻기에는 보유한 금은과 보석이 턱없이 부족하니 그 물건에 사활을 걸 것이었다.

엽무재는 대량에서 오래도록 조정 일을 했다. 그런 엽무재가 아주 중요하게 여겨 꼭꼭 숨겨놓은 물건이니 필시 대량 조정의 불결한 비밀에 관련된 내용이리라. 거기에는 황실의 것도 조정 신하의 것도 있을 터. 비밀을 알면 상대의 약점을 쥐는 셈이니 엽무재는 정성 들여 증좌를 수집했을 것이었다. 다른 대신들을, 심지어 황실을 견제할 패로 쓰기 위해서. 어쩌면 그 비밀은 대량 조정의 멸망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엽미는 이를 이용해 명제의 높은 관리에게 붙을 심산이다. 하지만 심묘는 그녀의 계획을 조금 더 키울 생각이었다. 그녀가 명제 황실의 문을 두드리도록 만들 것이다. 부수의는 적국의 비밀을 안고 온 여인을 매우 환대할 게 틀림없었다. 더욱이 얼굴도 예쁘고 자태가 아름다운 엽미는 반드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생처럼 부수의의 마음을 빼앗을 터였다.

하지만…… 만일 그 물건이 가짜라면 어떻게 될까. 엽미가 군사 지도, 조정 신하들의 비밀, 군신의 의견 차이 등 적을 쳐부술 수 있는 약점을 가져오면 명제는 대량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 가짜라면……!

명제는 잘못된 판단으로 잘못된 곳에 병력을 배치할 것이다. 병력을 잘못 사용하면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진국과의 사이도 벌어질 터였다. 최후의 승패는 이미 정해졌다. 그들이 공들여 쌓은 탑은 하루 만에 무너질 것이다. 물론 엽미는 자신이 가져온 물건이 잘못됐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녀 스스로 완벽한 물건을 훔쳐왔다고 자부할 테니 부수의가 물건의 진위를 의심해도 헛일이었다. 그녀는 매우 무서운 여인이니 결국 부수의는 그녀의 말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싸움은 결과가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지금 엽미를 명제로 보내줘도 절대 후환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부수의가 전생에 가장 사랑한 여인이 이번 생에도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길 바랐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가 큰 선물을 건네 그가 막다른 골목에 서는 걸 반드시 보고 싶었다. 그게 엽미를 직접 해치우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더욱이 이 일은 사경행에게 이로우면 이로웠지 손해는 절대 없었다. 이 작은 한 수로 천하 강산이 뒤집힐 변화가 일어날 테니, 남은 일은 즐겁게 구경하는 일일 터였다.

* * *

과연 모경의 말처럼 밤중에 세찬 폭풍우가 몰아쳤다. 다음 날 아침 모경을 비롯한 세 사람은 흠뻑 젖어 돌아왔다. 그들은 엽미와 금성명은 명제로 향하는 선박에 탔으며, 심묘의 추측처럼 엽미는 상자 하나를 꼭꼭 숨겨두고 있다고 보고했다. 금성명은 그 상자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하고, 엽미 역시 다른 이에게 들킬까 봐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묵우군 사람은 상자 안 물건을 심묘가 건넨 편지 봉투의 것과 바꾸었다. 철의가 품속에서 그를 꺼내 심묘에게 건넸다. 심묘가 펼쳐 보니 과연 자신의 예상과 같았다. 엽무재가 여러 해 수집한 조정과 황실의 약점들이었다. 심지어 황실의 비밀스러운 일들도 꽤 여럿 적혀 있었다. 심묘는 사경행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물건들은 사경행이 직접 처리하는 게 나을 터였다.

심묘는 모경과 철의, 종양에게 휴식을 명한 후 엽홍광을 보러 갔다. 고양은 아직 그 방에 있었다. 그는 심묘에게 엽홍광은 목숨을 보전했으나 깨어난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그의 부상은 위중했다. 모경과 종양이 조금이라도 늦게 데려왔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고양이 침상에 누워 있는 엽홍광을 한번 더 바라보더니 심묘에게 물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폐하는 엽가를 깨끗이 처리하시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엽가 공자를 예왕부로 데려오시다니, 설마 양자로 들이실 건 아니지요?”

“폐하께서는 엽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심묘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고양이 웃었다.

“별다른 계획이 있으시겠습니까? 고가 때처럼 화근을 철저히 제거하시겠지요. 설마 동정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안 합니다. 폐하는 아주 잘하시는 겁니다. 엽가와 고가를 깨끗이 처리해야 조정이 더욱 안정될 겁니다. 하지만…….”

심묘는 엽홍광을 한 번 보았다.

“이 아이는 엽 승상이 한 일과 관련 없어요. 잘못이 있다면 성이 엽씨이며 엽부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이 아이가 버틸 수 있을지, 깨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천천히 지켜봅시다. 폐하께서 인정을 베푸시길 바랄 뿐이에요.”

“정말 희한하네요. 명제에서는 이렇게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푸시는 걸 보지 못했는데, 어째서 엽 공자에게만 유독 인자하십니까? 엽 공자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길래 다르게 대하시는 겁니까?”

“그의 얼굴 때문입니다.”

고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계속 캐묻자 심묘가 살포시 웃었다.

“얼굴?”

고양은 엽홍광의 얼굴을 보았다. 오래 봐도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그는 부채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겠으면 관둬요.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사경행은 명제로 출정해야 하지요?”

고양은 고개를 돌려 심묘를 깊은 눈으로 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최근 사경행이 계속 여양성에 있댔죠? 하지만 여양성의 일은 거의 끝났을 거예요. 잔존 세력이 있다 해도 이젠 꼭 사경행이 직접 정리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겠지요. 칼이 대량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데 사경행은 계속 자리에 없다니. 엽가를 처리한 것도 너무 갑작스러워요. 폐하의…… 옥체가 그토록 좋지 않나요?”

“사실 마마께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속인다고 속으실 분도 아니고, 오히려 불쾌하게만 여기시겠지요? 또 그렇게 되면 나담도 제게 화를 낼 거구요.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폐하의 옥체는 결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사경행이 황위를 물려받는다는 일은 이미 마마께 말했을 겁니다. 지금 폐하는 황위를 인계하고 있고 경행은 사람을 움직여 명제로 갔습니다.”

고양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이어 말했다.

“명제에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해야겠지요. 정경성의 척후가 보낸 소식에 따르면 부수의는 진국 황제와 맹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량을 공격하고 정벌해서 국토를 반씩 나눠 가지기로 했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군요. 삼키다 목에 걸리지 않을까 겁이 날 만도 한데 말이에요.”

심묘는 냉소했다. 부수의는 권세를 갖자마자 바로 욕심을 품었다. 그는 대량 사람에게 공손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진국과 연합하자마자 감히 야심을 품었다. 고양은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엄숙했다.

“부수의가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지요. 고가는 깨끗이 제거되었습니다. 황실은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은 것처럼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사실 적지 않은 손실이 있어요. 게다가 고가는 대량의 힘 있는 병력이었지요. 그런데 이리되었으니 이제 대량의 병력은 사실 연합한 두 나라의 병력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부수의가 폐하의 병세를 알고 있으니 수시로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난 경행을 믿지만, 이 싸움은 절대 만만하지 않아요.”

심묘는 조금 울적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 역시 이 싸움이 쉬우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전쟁은 모두 어렵지요.”

“아무튼 경행은 군대를 인솔해 명제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경에서 번번이 일이 터지고 있어요. 지금은 탐색전 수준이지만, 오래지 않아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할 겁니다. 경행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최근에서야 준비를 시작했어요. 경행이 미리 마마께 말하지 않은 건 마마가 마음 쓰실까 걱정해서 그랬을 겝니다.”

침묵하던 심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해해요.”

“그럼 마마도 절 따라 명제로 가시겠습니까?”

고양의 물음에 심묘가 미소 지었다.

“가능할까요?”

“왜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을 바라본 심묘는 담담히 말했다.

“폐하의 병은 어떻게 될지 모르고, 이 전투 역시 언제 끝날지 몰라요. 폐하에게 정말 뜻밖의 일이 생기면 세상에 황위를 경행에게 물려준다는 조서를 발표해야 하지요. 황후는 국토를 떠날 수 없는 법이에요. 백성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난 그리 위대하지 않으나 경행에게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게 할 수 없어요. 경행은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요. 그러니 나는 그를 대신해 여기 대량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 * *

엽미가 도망치고 이틀 후, 영락제는 엽무재가 고정순과 결탁해 모반을 일으키는 데 참여했다며 엽부 전체를 깨끗이 없앴다. 엽가는 고가보다 대처하기 쉬웠다. 엽가에 무력이 없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고가와 엽가는 서로 의지했기에 고가가 무너진 후의 엽가는 상황을 뒤집을 능력이 전무했던 것이다. 이전 많은 사람이 엽무재를 따랐으나 고가를 쓸어버린 영락제의 수완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감히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엽무재는 영락제가 직접 죄를 선고해 참수시켰다. 엽무재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은 아니었다. 심묘는 바꿔치기한 엽미의 물건 중 황실에 관련된 것을 골라 현덕 황후에게 건넸다. 엽무재는 황실을 견제하기 위해 비밀리에 적지 않은 수완을 발휘했는데, 그 물건들은 도리어 엽가의 죄를 증명하는 증좌가 되었다. 엽무재를 참수하면서 황실은 위엄을 크게 세웠다.

엽미와 금성명을 따라간 묵우군 병사는 수시로 소식을 전했다. 그들의 도피는 매우 순조로웠다. 대량 사람들은 대부분 엽미 남매가 도망칠 때 다급한 마음에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믿었다. 대량의 병사들이 계속 수색했으나 시체는커녕 옷가지 외에는 별다른 유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으니 시체를 찾지 못해도 죽음 자체에 의문을 품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은 대량에 엽가의 생존자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확히 따지면 아니었다. 엽홍광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고양은 그의 생사가 운명에 달렸다고 했다. 평생 이렇게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어느 비 오는 밤, 사경행은 돌아왔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씨는 서늘했다. 심묘는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등불 아래서 책을 보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자 날씨도 점점 추워져 탁자 위 차가 빠르게 식었다. 순간, 문이 삐걱 열렸다. 한기를 띤 바람과 비가 조금 안으로 들이쳤다. 심묘가 고개를 들어보니 사경행이 문을 닫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비에 젖은 겉옷을 벗었다. 멍하니 넋을 잃은 심묘를 본 사경행의 입가가 올라갔다. 심묘의 곁에 다가간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좋지 않은데. 내 부인이 멍청해졌어.”

심묘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당신, 어떻게 돌아온 거예요? 말 한마디도 없이?”

사경행은 근래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리던 심묘도 끝내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안부는 알려줘야 하는데, 예왕부 사람들 모두 그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정말 골치가 아팠다.

“폐하가 시키신 일이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어. 너와 이야기하면 돌아가고 싶을 테니 꾹 참은 거야.”

사경행은 심묘를 달래며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날 그리워하는 걸 알았다면 일찍 돌아왔을 거야.”

“앞으로도 이럴 거면 아예 돌아오지 않아도 돼요.”

심묘의 노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경행은 정의롭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다.

“네 기분이 풀린다면 오늘은 네 마음대로 해. 난 절대 반항하지 않을 거야.”

심묘는 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미쳤어요?”

사경행이 심묘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분 풀었으면 됐어. 내가 한 가지 일을 들었는데, 엽미를 놔줬다며?”

“놔준 게 아니에요. 엽미는 명제에 가려고 엽무재가 수집한 대량의 기밀문서들을 훔쳤어요. 아마 이를 통해 명제 귀인에게 의지할 생각이겠지요. 하지만 내가 물건을 바꿨다는 건 모르고 있죠. 군사 지도 같은 것을 넣었으니 효과가 있을 거예요. 과연 엽미가 그것으로 명제의 황후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사경행은 얼떨떨했지만 바로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부인의 수완은 아주 독한걸!”

엽미는 매우 기뻐하며 그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명제의 귀인을 찾아갈 것이다. 군사 지도같이 중요한 물건은 바보가 아닌 중요 인물이 두고두고 이용해야 하니, 이것을 아예 황제인 부수의에게 바친다면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엽미가 가진 지도는 사실 심묘가 그린 것이었다. 부수의가 이 지도를 바탕으로 전쟁을 준비한다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를 것이다. 심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요. 난 뱀과 전갈 같은 마음을 가진 독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불만이에요?”

“아주 좋아. 난 독한 여자가 좋아.”

사경행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엽미에게 준 것과 같은 문서를 또 만들어뒀어요. 조금 이따가 줄게요. 명제와 대량이 전쟁할 때 이를 토대로 명제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을 테니 잘 활용하면 당신은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심묘가 덧붙였다.

“첫 전투에서는 져줘요. 그래야 부수의가 지도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기면 그 지도를 진짜라고 확신할 거예요. 그러면 이를 바탕으로 병사를 배치할 테니 당신은 그를 역이용하면 돼요.”

사경행은 미소 지으며 수긍했다.

“계산이 아주 대단하네.”

“언제 떠나요?”

심묘가 물었다. 잠시 침묵한 후 사경행은 입을 열었다.

“아는 거야?”

“당신은 나를 얼마나 오래 속일 수 있다고 여겼어요?”

심묘는 탄식했다. 말이 없는 사경행을 본 심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녀는 차 한 잔을 사경행에게 건넸다.

“술 대신 이 차를 마셔요. 당신의 일이 순조롭길 기원할게요.”

사경행은 멍하니 차를 건네받았다. 그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기면 돌아와서 내 소원 하나 들어주는 거 잊지 말아요.”

“무슨 소원을 빌고 싶은데?”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 속에 웃음기가 짙었다. 심묘는 잠시 생각 후 말했다.

“우선 장부에 달아둬요. 아직 생각나지 않으니, 잘 생각한 후에 말해줄게요.”

사경행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나도 소원이 있는데, 난 지금 당장 말할게. 나를 만족시켜줘.”

“무슨?”

사경행은 심묘를 어깨에 들쳐 메고 걸어갔다.

“나와 같이 목욕하자.”

심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미앙궁의 꽃도 많이 떨어졌다. 봄날 빽빽하던 풀과 여름 내내 피어 있던 꽃이 가을이 되어 말라 떨어지니 유달리 슬퍼 보였다. 그래서 궁녀들은 국화를 심었다. 자주색, 흰색, 노란색 꽃이 큰 송이로 피어나 쓸쓸함을 조금이나마 가렸다. 하지만 가을날은 여전히 스산했다. 꽃을 조금 더했다고 본질이 변할 리는 없었다.

보슬보슬 가을비가 방으로 들이쳤다. 도 고고가 창문을 닫고 작은 화로를 두 번 헤집은 후 조용히 물러났다. 영락제는 침상 위에 반쯤 기대 누워 있었다. 그는 준수하게 생겼으나 평소 늘 차가운 얼굴로 표정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준수함은 빛을 발할 때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영락제의 인정사정없고 냉담한 심계와 수완만 볼 뿐이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영락제 안에 있는 ‘사치’라는 이름의 소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예왕인 사연과 현덕 황후였다. 경현 태후도 물론 사치를 잘 알 테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었다.

현덕 황후는 화차를 끓이고 있었다. 작년에 처음 내린 눈을 모아 나무 밑에 묻어뒀다가 꺼내 꽃잎과 함께 주전자에 넣은 다음 약한 불에 천천히 끓이다 벌꿀을 한 국자 넣으니 맑고 달콤한 향기가 방 안 가득히 풍겼다. 차를 한입 맛본 현덕 황후는 미소 지은 후 차 한 잔을 영락제에게 건넸다. 어선방에서 막 올린 음식에 곁들여 마시니 따뜻하고 달콤해서 마음도 조금 녹아내릴 만했다.

“작년에 신첩과 도 고고가 같이 채집한 초설(初雪)입니다. 아주 달콤해요. 올해도 눈이 내리면 신첩은 또 채집할 겁니다. 폐하께서도 내키시면 그때 같이 가시지요.”

현덕 황후를 바라보던 영락제가 잠시 침묵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 겨울이라……. 짐이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그대와 함께 가리다.”

그 말에 현덕 황후의 손이 떨렸다. 뜨거운 찻물이 그녀의 손 위로 떨어지면서 그녀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를 본 영락제는 손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손을 닦으며 나무랐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소?”

그러나 현덕 황후 손에 떨어진 물기는 마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현덕 황후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손등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상을 입을까 걱정될 만큼 뜨거운 눈물이었다.

“폐하는 어찌하여 이렇게 가슴을 찌르는 말을 하셔서 신첩의 상심을 불러오십니까?”

영락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청정…….”

“입궁 후 신첩은 철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몰라야 하는지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지요. 폐하께서 무엇을 하시든 신첩은 절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어째서 지금까지도 절 이렇게 차갑게 대하십니까?”

현덕 황후는 영락제를 탓했지만, 말투는 평온했다. 억울해도 그에게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폐하는 절 달래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게 맑은 정신을 유지하라고 하시네요. 하지만 폐하, 제가 얼마나 마음 아픈지 정녕 모르십니까?”

영락제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후 그는 새로운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등 위 떨어진 눈물을 닦아주었다.

“청정, 모후를 제외하면 짐이 죄책감을 느끼는 여인은 그대 하나요. 그대만이 유일하게 짐의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이요. 정신을 맑게 유지하라는 의미를 짐도 분명히 알고 있소. 하지만 짐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소.”

현덕 황후는 잔에 담긴 화차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미 결정하셨나요?”

“짐은 결정했소. 모후는 천하 강산이 영웅을 배출했다고 하셨소. 짐은 영웅은 못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대량을 지탱할 것이오. 고가, 엽가 양가를 처리했으니 만족스럽소. 남은 길은 경행이 걸어가야 하오. 그 후의 일은 짐이 관여할 수 없소. 하지만…….”

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짐은 모후의 말처럼 대량이 번성하길, 깨끗한 명성을 지키며 대대손손 황위를 길게 잇기를 희망하오. 청정. 짐은 이제 언제 쓰러질지 모르고, 또 쓰러진다면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르오. 그날이 오면 짐이 그대에게 당부한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하오. 정신이 맑든 혼미하든 어떻든 다 좋소. 이후에는 그저 그대가 즐겁게 지내길 바랄 뿐이오.”

현덕 황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찻잔 가장자리를 계속 어루만졌다. 한참이 지난 후 고개를 들어 영락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렴풋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폐하, 신첩과 처음 만났을 때 신첩이 화차를 끓여 폐하께 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그녀의 모친은 그녀를 데리고 입궁해 경현 태후를 만났다. 경현 태후가 영락제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여러 집안의 아가씨들을 부른 자리였다. 그녀들은 황후가 되기 위해 영락제 앞에서 다채로운 재주를 뽐냈다.

하지만 청정은 홀로 구석에 앉아 평온히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지만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존귀한 황후의 자리도 생기 있고 출중한 젊은 황제도, 그녀의 안중에는 없는 것 같았다. 경현 태후가 그런 그녀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다. 청정은 색다른 대답을 했다.

“소녀는 우둔하여 뛰어난 기예는 없습니다. 평소 집안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위해 차를 끓였을 뿐이지요. 그래도 소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좋아하셨습니다.”

그 소박한 답변에 여인들은 경시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차를 끓이는 일 따위는 하인에게 시키면 되는 일이다. 관가의 아가씨면서 출중한 기예를 익히지 않고 차를 끓일 줄 안다고 말하다니, 집안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경현 태후는 그녀의 대답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나중에 경현 태후가 영락제에게 말했다.

“나는 청정 그 아이가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차를 끓이는 품성을 볼 때 그녀는 신중하고 심성이 온화하니 너와 평생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풍랑이 일든 가늘고 긴 물결이 일든, 그 아이는 어렵고 힘든 일도 기꺼이 받아들일 테다. 참 좋은 여인이고 얻기 드문 여인이지.”

경현 태후의 말이 떠오른 영락제는 현덕 황후를 다시 바라보았다. 현덕 황후는 차 위를 떠다니는 꽃잎을 가볍게 불고 있었다. 그녀는 모후 경현 태후의 말처럼 심성이 온화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묻지 않고 묵묵히 함께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구석에 앉아 차 한 잔을 들고 살짝 웃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세상은 변해도 그녀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영락제의 시선을 알아챈 현덕 황후가 곱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 오늘 우리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이미 가을이 왔답니다. 오늘은 이전처럼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고 금을 뜯고 글을 써요. 어때요?”

“좋소.”

영락제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한겨울의 마른 나무 같던 얼굴이 웬일로 미소를 머금고 있어 현덕 황후도 조금 놀랐다. 그녀는 영락제가 말을 물릴까 싶어 얼른 일어났다.

“그럼 경행이 보내온 옥함 바둑을 가져오겠습니다. 경행이 선물한 후에도 신첩과 폐하는 딱 한 번만 사용해서 그 좋은 바둑을 낭비하고 있으니까요.”

영락제는 현덕 황후가 귀여웠다.

“도 고고더러 가져오라 하면 되오.”

“고고는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신첩이 잘 숨겨뒀거든요. 폐하, 이곳에서 신첩을 기다리십시오.”

현덕 황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달려가듯 자리를 떠났다. 정숙하고 유순한 현덕 황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내비치지 않는, 소녀 같은 아름다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영락제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바라보고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안타까운 빛이 머물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린 채 맹렬히 기침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수건을 치웠다. 그의 입가는 깨끗했지만, 손수건의 주름 속에는 붉은빛이 가득해 눈에 띄었다. 순간 멈칫한 영락제는 손수건을 소매 안에 넣었다. 그는 바둑함을 들고 달려오는 현덕 황후를 보며 살짝 웃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시간은 평온히 지났다. 잔물결이 일 뿐 나날은 평온했다. 나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수천 번 돛을 올리고 내린 후 수많은 혼란이 끝을 맺은 듯 곳곳이 안정되고 평안했다.

그동안 사경행과 심묘는 곳곳으로 돌아다니거나 부 안에서 연주하고 글씨를 썼다. 때때로 사경행의 흥이 돋으면 그는 고양과 대련하기도 했다. 심묘는 나담과 무언가 연구한 후 밤이 되면 사경행과 군사 지도를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한 사람은 공격을 잘하고, 한 사람은 수비를 잘하니 장단이 아주 잘 맞는 셈이었다. 사경행은 빙빙 돌아 적을 죽음에 빠뜨리는 계책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빠르고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는 양날의 칼 같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심묘와 의견이 대립할 때마다 늘 그는 자기 생각대로 결정을 해버려서 심묘는 더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밤이 되면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묵묵히 침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심묘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으면, 사경행은 몸을 굴려 그녀를 품 안에 껴안고 ‘벌’을 내렸다. 시간은 평온히 흘렀으나 사람들은 헤어질 때를 알기에 매 순간을 아쉬워하며 함께 지냈다. 전쟁이 시작되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함께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리워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날은 결국 도래했다.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명제는 국경을 넘어 기습을 가했다. 진국은 다른 쪽으로 침입해왔다. 진국은 대량의 북부 어촌 기슭을 침략해 마을 주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그들은 그곳을 거점으로 내륙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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