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장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명제와 진국은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급한 성미를 누르지 못하고 거센 기세로 침입했다. 아주 자신 있다는 뜻이었다. 대량은 당연히 맞서 싸우기로 했다.
사경행이 수령 인장을 청했고, 영락제는 그를 대장군에 봉했다. 사경행과 함께 30만 병력이 출정했다. 단순히 침략에 대한 반격이 아니었다. 대량은 오랫동안 나뉘어 있던 명제와 진국을 집어삼키기로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웅이 천하를 쟁탈하자 정세는 폭풍처럼 거세게 바뀌었다. 호걸들이 나타나고 인재들이 등장했다. 자고로 난세는 영웅을 만드는 법이었다.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대량 백성은 처음에는 두렵고 불안했지만, 황실이 태산처럼 안정적인 것을 보고, 또 선봉에 선 예왕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백성들의 마음에는 호방한 감정이 솟아났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사경행의 출정 날짜는 내일이었다. 나담은 고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량에서 지내며 심묘를 따라 적지 않은 일을 경험했다. 고양과 잠시 오해가 있었으나 곧 풀었다. 그는 사람을 놀리길 좋아하지만,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나담은 고양을 따라 명제로 돌아가려 했다. 부수의는 장군부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니 장군부에 협력한 나씨 가문도 놔줄 리 없었다. 나담은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지만, 조부 나수는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계속 대량에 있으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와도 지금 상황에서는 도울 방법도 없고, 오히려 자칫 연루되었다가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심묘가 대량에 있으니 그녀와 함께하면서 협력하는 게 더 이로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담 역시 자신이 떠나면 심묘 혼자 만리타향인 대량에서 지내야 하니 마음이 좋지 않던 차였다. 나담은 결국 고부에 남기로 했다. 그녀는 고양이 물건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약상자를 정리해 사람들에게 한 상자씩 들고 나가게 했다. 나담은 의자에 앉아 그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고양은 정리를 다 끝내고서야 나담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평소에는 시끄럽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하오? 기분이 좋지 않은 거요?”
“내일 떠나네요. 꼭 제부를 잘 보호해줘요.”
고양은 말문이 막혔다.
“내게 사경행을 보호하라고 한 거요? 그가 나를 보호하는 게 맞겠지.”
나담이 어색하게 변명했다.
“어쨌든 당신은 그의 부하잖아요. 물론 당신도 주의하구요.”
고양은 순간 멍해졌다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는 살짝 웃었다. 나담은 고양에게 괴롭힘당하지 않으면, 거꾸로 그를 괴롭혔다. 물론 고양도 그녀를 괴롭히기 좋아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마다 시끄럽게 다투었다. 부드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아주 드물었다. 모든 일을 대강대강 하는 나담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당부하는 일은 드물었다. 오늘 나담의 말은 아주 귀한 셈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고양은 모르는 척 물었다.
“주의하라니, 무엇을 주의하라는 거요?”
준수한 고양은 평소에도 태도가 우아하고 온화했다. 하지만 나담에게 다가간 그의 웃음은 교활했다. 나담은 얼굴을 붉혔다. 그를 밀어낸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뭘 주의하겠어요. 당연히 죽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지.”
고양이 천천히 부채를 흔들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은 좋은 일 아니오? 고부가 그대의 손에 들어오게 될 테니. 하인들은 당신의 수족이 될 거고, 금은보화를 마음대로 쓸 수도 있지. 그리고 상점과 밭…….”
나담은 제멋대로인 이야기에 기분이 나빠져 얼른 그의 말을 끊었다.
“잠깐. 누가 당신의 물건을 신경이나 쓴다고요? 우리 나씨 가문이 가난한 줄 알아요? 게다가 당신은 날 바보로 아는 거예요? 모두 당신의 물건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당신이 죽으면 내 물건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미친 거예요?”
“무슨 상관이라니, 당신은 정말 몰라서 그러오?”
나담은 의심스러웠다. 그녀는 탐색의 기색을 가득 눈에 담고 그를 쳐다보았다.
“뭘 알아요? 혹시…… 고부에 있는 물건이 내 아버지가 주신 거예요? 당신은 사실 내 아버지의 사람인 거예요?”
나담은 입을 가리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날 감시하라고 당신을 보낸 거예요?”
고양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운명이라고 여기며 체념하면서도 나담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평소에는 영리해 보이는데, 어째서 이럴 때는 또 이렇게 아둔한지.”
“이봐요. 분명히 말해요.”
고양이 손가락을 들어 나담의 입술 위에 놓았다. ‘쉿’ 하는 동작이었다. 순간 나담은 당황했다. 고양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천천히 뜨거워지고 얼굴도 달아올랐다.
“나와 그대가 무슨 관계인지 천천히 생각해보고, 내가 돌아왔을 때 말해주시오.”
고양은 서적 몇 권을 나담의 머리 위에 놓았다.
“지금은 이것을 정리합시다.”
고양은 정돈을 시작했다. 나담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의외로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입을 삐죽거리던 그녀는 순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도대체 끝난 거야, 만 거야?”
“금방 끝날 거예요.”
“아, 아파.”
“거의 끝났어요. 엄살 부리지 말아요. 살살할게요.”
문밖에서 듣고 있던 종양과 모경, 경칩, 곡우 네 사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옷을 아직 안 말린 게 생각났어요. 이만 말리러 갈게요.”
경칩의 말에 곡우가 얼른 덧붙였다.
“나도 도울게.”
종양이 입을 열었다.
“나도 가서 이불을 말릴래.”
모경 역시 매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다. 나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철의만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 사경행은 유감스럽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마침내 끈을 묶은 심묘는 만족스러워 사경행의 손을 토닥였다.
“됐어요.”
사경행은 손목에 매인 붉은 끈을 보았다. 여인들이나 착용하는 끈을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나 묶다니 머리가 아팠다. 심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많으니 다 끊어지지는 않겠지요?”
사경행은 입을 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난 심묘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순간 사경행은 당황했다. 술 단지는 이미 비어 있었고 방 안에 술 냄새가 가득했다. 심묘의 얼굴색은 불그스름해 붉은 모란꽃같이 아름다웠다. 출정이 정해진 이후 심묘는 늘 심란했는데, 드물게 유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묘는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사경행은 이미 냉정해진 상태였다. 심묘는 술에 취한 후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몇십 번이나 입 맞추었다. 술에 취한 심묘는 취하지 않은 심묘와는 완전히 다른 여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만취한 그녀는 호색가 같았다. 잘생기고 당당한 예왕인 자신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가와 유혹한 여자는 무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집적거린 여인은 단 한 명이었다. 그녀는 술에서 깨면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모진 마음을 지니기도 했다.
“이 면수는 확실히 잘 생겼네. 꽃의 여왕이라 할 수 있겠어.”
사경행이 무표정한 얼굴로 심묘를 주시하며 대꾸했다.
“부인의 높은 평가 감사합니다.”
만족한 심묘가 입을 열었다.
“네게 상으로 은자를 줄 테니, 가져가서 옷을 새로 사거라.”
그녀가 소매 안을 더듬고 더듬어 물건 하나를 사경행의 손에 쥐여주었다. 사경행 자신이 명제에 있을 때 그녀에게 준 옥패였다. 옥패라는 것을 사경행이 분명히 보기 전, 심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잘못 주었구나. 이것은 내 부군이 내게 준 거야.”
그녀는 얼른 옥패를 거뒀다.
“부군? 네게 부군이 있는 걸 기억하고 있었어?”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묻자 심묘는 그를 노려보았다.
“알지. 내 부군은 너보다 멋져.”
사경행은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곧 출정해야 해.”
그녀는 머리를 사경행의 어깨에 기댔다. 잠시 뒤척여 편안한 자세를 찾은 그녀는 하품한 후, 피곤한 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술을 마신 거야. 술에 취하면 부군이 떠날 때 깨어 있지 않을 테니까. 깨어 있지 않으면 보지 않아도 돼.”
“왜 보고 싶지 않은데?”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부군은 남녀의 정에 연연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가 가는 것이 아쉬워…….”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말을 하는 심묘의 호흡은 일정했다. 정말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미소를 짓던 사경행은 점점 미소를 거뒀다. 고개를 숙여 품 안에 잠든 여인을 바라보던 사경행이 읊조렸다.
“네 멋대로 해도 돼.”
심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경행은 심묘를 안아 침상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침상 맡에 앉은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자는 심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철의가 작게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출발할 시간입니다.”
사경행은 몸을 구부려 심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큰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힌 후, 심묘는 느리게 눈을 떴다. 헤어지기 아쉬웠다. 맑은 정신으로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서 놓칠 수도 없었다. 이별은 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신은 그가 부담 없이 떠난 후 절세영웅이 되어 돌아오길 바랐다. 문밖에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신중했다. 발소리는 두 명의 것이 섞여 있는데도 자신은 듣고 싶은 발소리 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발 소리는 방을 지나갈 때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점점 멀어졌다.
기나긴 밤이 지나가고 하늘이 밝아왔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지만 심묘는 일어나 앉았다. 대야를 가지고 들어오던 경칩이 앉아 있는 심묘를 보고 놀랐다.
“마마, 깨어 계셨나요?”
“경칩, 입궁해야겠으니 준비를 도와다오.”
* * *
사경행이 떠나고 열흘이 흘렀다. 시간은 그가 있을 때보다 아주 많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이전과 같은 예왕부인데, 어떻게 해도 심묘는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묵우군 사람이 일부 남아 예왕부를 지켰고, 철의는 사경행을 따라갔다. 계우서는 계가의 외아들이라 계 부인 때문에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대범한 성격의 계우서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군대 안에 섞여 떠났다. 계 부인은 편지를 보자마자 쫓아가려 했으나 계 대인에게 저지당했다.
“우서는 평소 사리에 어둡고 경솔하오. 그러니 이번에 그의 심지를 단련시킬 수 있을 거요.”
커다란 농서성 안, 심묘와 우정을 나눈 사람은 하룻밤 사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고양이 떠나자 고부에서는 고양의 제자를 보내 엽홍광을 정기적으로 진찰하도록 했다. 하지만 엽홍광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나담도 하루 사이 아주 점잖아졌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니지 않았다. 때때로 명제 쪽 국세에 먼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나담은 대량과 명제의 교전에 괴로워했다. 그래서 심묘는 오랜 시간을 들여 명제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부수의와 문혜제를 포함해 황실이 심가와 나가를 억누른 일 전부를. 이야기를 다 들은 나담은 침묵하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묘도 그녀를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이 일은 스스로 천천히 잘 생각해야 했다. 어차피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냐 기냐의 차이일 뿐, 도출하는 결론은 매한가지일 터였다.
농서성의 나날은 평온했다. 백성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이어갔다. 출정한 장병들을 믿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태평성세에 익숙해서 전쟁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못 느낀다고 할 수도 있었다.
심묘와 농서성 귀족 부인들 사이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심묘가 전력을 다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했지만, 부인들 역시 아주 어리석지는 않았다. 황실의 큰 위협인 고가와 엽가는 이미 없어졌고 대량 황실의 권력은 굳건했다. 예왕은 황실의 친족이고 심묘는 현덕 황후와도 사이가 아주 좋으니, 부인들은 서둘러 심묘의 비위를 맞추었다.
심묘는 자주 입궁해 현덕 황후를 보러 갔다. 그녀는 현덕 황후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현덕 황후는 재능 있는 여인이고, 전생의 황후였던 심묘는 안목이 꽤 넓었다. 두 사람은 옛것을 논하고 새것을 이야기했다. 직접 겪은 일화에서 세상의 국세까지, 두 사람은 매번 의기투합했다. 현덕 황후도 심묘를 좋아했기에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유달리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심묘는 오늘도 현덕 황후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가을이라 갈수록 찬 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당숙은 따뜻한 양젖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경행이 떠난 후 부의 사람이 많이 줄어 당숙은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때때로 심묘에게 점포 일을 설명하는 일을 제외하면 한가했다. 그래서 그는 음식을 들고 와 좋은 명분하에 심묘에게 건네주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마마가 전보다 수척해지셨다면 반드시 저를 나무라실 겁니다. 제가 음식을 가져 왔으니 드시지요.”
“냄새가 아주 좋네요.”
경칩이 말했다. 당숙은 바깥을 한 번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양젖을 따뜻하게 끓여 달콤합니다. 마시면 배 속이 따뜻해지니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겁니다. 요 며칠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궁에 오갈 때 건강을 해치지 않으셔야지요.”
심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당숙, 고맙네.”
심묘는 양젖을 한 모금 마셨다. 순간, 배 속이 한바탕 요동쳐 자칫 토할 뻔했다. 후다닥 그릇을 내려놓은 심묘는 입을 막은 후 미간을 찡그렸다. 곡우와 경칩이 흠칫 놀라고, 당황한 당숙도 얼른 물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젯밤 찬 바람을 쐤더니 양젖이 조금 비린 것 같네. 지금은 못 마시겠어.”
“약을 지어오겠습니다. 마마, 불편하시면 이 양젖은 마시지 마십시오. 저녁에는 담백한 국을 올리라 분부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심묘는 피풍의를 걸치고 경칩과 곡우를 바라보았다.
“가자.”
모경과 종양은 이미 마차를 준비해두었다. 두 사람은 사경행을 따라 명제에 가지 않았다. 사경행은 무공이 높고 충성심이 강한 두 사람을 남겨 그녀의 일을 돕도록 했다. 농서성에도 근심 걱정이 있으니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다.
심묘가 입궁하자 현덕 황후가 미앙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심묘를 미소로 환대했다.
“오늘은 조금 늦게 왔구나.”
“나오기 전에 조금 소동이 있었습니다. 근래 폐하의 건강은 나아지셨나요?”
현덕 황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시단다. 어제는 나와 화원을 산책하셨어. 하지만…… 나를 속이시는 걸 거야. 폐하는 나를 속이는 걸 좋아하시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안 하시는구나.”
멈칫한 심묘는 그녀를 격려했다.
“마마께서 걱정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폐하는 마마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현덕 황후는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겠지. 다른 이야기를 하자꾸나. 어제 새로운 찻잎을 얻어 주방에 계화병을 만들라고 했다. 고서에 한 왕조의 문인이 계화병 안에 찻잎을 넣었는데, 찻잎의 맑은 향기와 찻물이 섞여서 훌륭한 다과가 되었다고 하더구나. 오늘 너도 오니 이게 좋겠다 싶어서 분부했단다. 폐하께 말씀드리면 비웃으실 테니 널 찾았지.”
“마마, 정말 저를 너무 치켜세워 주십니다. 저는 무장 가문 출신이라 그렇게 우아한 일은 잘 모릅니다.”
심묘가 웃으며 겸손하게 나오자 현덕 황후가 도리어 나무랐다.
“그런 말은 삼가거라. 대량에서 학식이 풍부하다고 손꼽는 문인들도 너처럼 견문이 넓지는 않아. 그런 네가 뭘 모른다면 온 대량의 문신들을 비꼬는 셈이 아니겠느냐?”
그녀는 찻잔을 심묘에게 건넸다.
“자, 빨리 맛보거라. 어떠하냐?”
현덕 황후는 차 끓이는 것을 좋아했다. 찻잎이 물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보는 것 역시 좋아했다. 물의 온도는 딱 맞아야 했다. 높아도 낮아도 안 되었다. 우리는 시간도 딱 맞아야 했다. 이러한 취미 덕분에 현덕 황후의 성격이 온화한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어떤 찻잎이 상등품인지, 어느 물로 끓이는지, 어떤 벌꿀이 잘 어울리는지 연구하려면 학식도 갖춰야 했다. 심묘는 현덕 황후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온화하고 총명한 사람과 함께하면 세월이 평안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심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찻물은 아주 향기로웠다. 짙은 향기 속, 차는 쓴맛이 났으며 뒷맛은 달콤했다. 아주 맛이 좋다고 말하려던 심묘는 갑자기 구역질이 나와서 손을 떨며 차를 쏟았다. 입을 가리려고 할 때, 심묘는 다시 한번 헛구역질을 했다. 당황한 현덕 황후는 얼른 심묘의 찻잔을 받았다. 심묘의 안색이 좋지 않자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가 불편한 게냐?”
심묘는 속이 울렁거리는 게 조금 가라앉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마마, 죄송합니다. 최근 감기에 걸린 듯 속이 불편하네요. 오늘 외출할 때도 이랬는데…….”
순간 심묘는 말을 멈추었다. 얼굴 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현덕 황후도 처음엔 당황하다가 심묘의 표정을 본 후 무언가 생각난 듯 놀랐다.
“너 혹시…….”
심묘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빠르게 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빨리, 태의를 불러오너라!”
현덕 황후는 흥분한 얼굴로 바로 일어나 도 고고를 불렀다.
심묘는 탁자 위 찻잔을 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사경행이 떠난 지 10여 일, 자신의 월경 주기는 줄곧 정확하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다고만 생각했지, 회임일 가능성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최근 확실히 식욕도 변하긴 했다.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흥분됐다. 자신에게 아이는 요원한 말이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 아이는 세상의 고통, 기쁨과 슬픔을 마주하게 될 텐데 자신이 그 아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가 찾아와주길 간절히 희망했다. 아이가 온다면 이번 생 하늘이 자신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태의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현덕 황후는 심묘보다 흥분해서는 태의가 바로 심묘를 진맥할 수 있도록 했다. 수염이 희끗희끗한 태의는 신중한 표정으로 심묘를 진맥했다. 깊이 생각한 그는 일어나 심묘와 현덕 황후에게 예를 올린 후 미소 지었다.
“예왕비마마, 축하드립니다. 맥이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으니 좋은 맥입니다. 회임하신 지 이제 1개월 남짓이 되었을 겁니다. 예왕부에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심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인가?”
심묘가 드물게 어리벙벙한 모습을 보이자 현덕 황후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엄숙한 척 연기하며 장단을 맞추었다.
“예왕비가 묻는구나. 진짜더냐? 착오가 있다면 용서하지 않고 엄벌에 처할 것이다!”
태의는 편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소신은 감히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왕비마마, 만일 소신을 못 믿으시면 다른 태의를 불러 다시 진찰하셔도 좋습니다.”
심묘를 놀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심묘는 진지했다.
“좋다. 그럼 번거롭지만 몇 분 더 모셔주시게.”
태의는 당황스러웠다. 현덕 황후는 기뻐했지만 심묘는 믿기지 않는 듯 거듭 확인하려 했다. 현덕 황후도 회임했을 때 감히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이를 생각하자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그녀는 빠르게 미소 지었다.
“예왕비의 말에 따라 다시 몇 사람을 불러오너라.”
현덕 황후의 말대로 태의 몇 명이 더 와 심묘를 진맥했다. 진맥 결과는 모두 같았다. 심묘는 회임 한 달 차가 확실했다. 심묘는 회임 사실을 받아들였다. 아이가 생겼으니 사경행이 곁에 없는 동안 외롭지 않으리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더욱 외로울 수도 있었다.
현덕 황후는 매우 기뻤다. 대량 황실에는 여태 영락제와 사경행 두 사람만 있었다. 영락제는 자식이 없어서 사가에 후대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심묘가 회임했으니 사가의 후대가 생긴 것이다. 현덕 황후는 사람을 시켜 영락제를 불렀다. 심묘의 회임 소식을 알게 된 영락제도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현덕 황후는 미소 지었다.
“폐하, 생각해보세요. 장래 이 아이가 폐하를 백부라고 부르고, 절 백모라고 부르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무슨 재미?”
영락제의 말은 조금 고약했다. 그는 여전히 심묘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묘 때문에 사경행과 치열하게 대립했음에도, 그는 끝내 사경행의 생각을 돌리지 못했다. 사경행에겐 늘 져주고 마는 그이니 더는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화근을 보는 태도로 심묘를 대했다.
“폐하도 참. 이 일은 황실 전체의 기쁜 일이에요. 예왕비가 장래 여럿을 낳았으면 좋겠네요. 아이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한 예왕부를 생각해보세요. 아주 좋을 거예요.”
현덕 황후의 눈에서 부러움의 기색이 느껴졌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게 명백했다. 심묘는 멈칫했고, 영락제의 시선에는 침통함이 스쳤다. 영락제는 곧 입을 열었다.
“오늘밤 물건을 정리해 궁으로 들어오너라. 바깥에 소문이 돌면 안 된다. 궁녀들이 널 주도면밀히 보호할 것이다.”
영락제의 말에 심묘는 살짝 멍해졌다. 현덕 황후도 얼른 덧붙였다.
“폐하의 말씀이 옳다. 농서성은 평온해 보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착오가 생길 수 있다. 이 일은 반드시 숨겨야 해. 외부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경행에게는 비공식적으로 편지를…….”
심묘가 갑자기 현덕 황후의 말을 끊었다.
“황후마마, 한 가지 요청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이 일은 전하께 전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하는 지금 출정에 나서셨으니 이 일을 알게 되면 걱정하실 겁니다. 누군가 고의로 이 일을 이용한다면 틈을 보이실 수 있으니 숨기는 편이 좋겠습니다.”
현덕 황후와 영락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현덕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네가 경행에게 말하길 원치 않으면 아이와 관련된 괴롭고 즐거운 일 모두 홀로 감당해야 한다. 경행은 언제 돌아올지 몰라. 너는 아주 오랜 시간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 나는 여러 이유로 회임 소식을 숨겼던 여인들을 많이 보았단다. 숨기는 건 간단하지만 숨긴 채로 지내는 건 몹시 힘들단다. 넌 그 외로움을 참을 수 있겠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살짝 웃은 심묘는 자신도 모르게 배를 어루만졌다. 회임을 알게 되자 몸 안의 작은 생명이 함께 호흡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결과가 좋다면 고생해도 가치가 있습니다.”
영락제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좋다. 이렇게 되었으니 경행에게 알리지 않겠다.”
현덕 황후가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심묘는 영락제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폐하, 감사합니다.”
현덕 황후는 탄식했다.
“어쩔 수 없지. 너는 내일 궁으로 들어오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야겠다. 부인들이 수시로 널 찾아와 네가 몸조리하는 걸 방해하면 안 되니까.”
심묘는 거절하지 않았다. 확실히 예왕부에는 그녀 홀로 있었다. 일부 남은 묵우군이 예왕부를 호위하지만,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은 늘 있었다. 하지만 황실은 고가, 엽가 양가의 일 때문에 역사상 유례없이 위신을 세우고 있었다. 궁에 머물면 확실히 좀 더 안전한 셈이었다. 배 속 아이에게 득이 된다면 심묘는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현덕 황후는 즉시 도 고고에게 미앙궁과 가장 가까운 편전을 찾아 심묘가 머물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심묘가 예왕부에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밖에서 돌아온 나담도 경칩, 곡우와 함께 심묘의 회임 소식을 듣게 되어 놀라고 기뻐했다. 당숙 역시 아주 기뻐했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아꼈다. 심묘는 전쟁의 결정적인 시기이니만큼 사경행을 한눈팔게 만들면 좋지 않다고, 그에게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숙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경행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못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아쉬운 대로 경현 태후에게 향을 올리러 가겠다고 했다. 그녀도 이 좋은 소식을 알아야 했다.
놀라고 의아한 나담은 심묘의 배를 쓰다듬고 싶었으나 감히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조심스럽게 심묘의 배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잠시 기다리던 그녀는 낙담했다.
“왜 아무것도 안 느껴지지?”
“이제 겨우 1개월 남짓인데, 무슨 태동이 있겠어?”
심묘는 실소했다.
“심묘, 고모부와 고모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야? 아시면 아주 기뻐하실 거야.”
잠시 생각한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부수의와 대치 중이야. 그러니 난 그들의 약점이야. 아이까지 더해지면 이것저것 걱정만 늘어날 테니 좋은 생각이 아니야. 게다가 사경행은 조만간 명제에서 그들과 만나게 될 거야. 가족들이 알게 되면 사경행도 알게 돼.”
잠시 생각하던 나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고모부네는 몰라도 여기 이모는 알지. 남자아이일지 여자아이일지 모르지만 희고 통통한 예쁜 아이일 거야. 아주 좋아.”
나담은 근래 가라앉아 있었다. 예왕부 사람들도 조금 걱정할 정도였는데, 다행히 기쁜 소식을 듣고 지금은 종전의 생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야말로 근래 가장 큰 경사입니다. 시끌벅적해지겠어요.”
미소 짓고 있던 당숙이 머리를 탁 짚었다.
“자칫 잊을 뻔했네요. 먹는 것에 주의해야겠습니다. 마마께서 회임하셨으니 문제가 조금이라도 생겨선 안 됩니다. 그리고 층계, 문 등 모든 모서리를 천으로 싸매야겠습니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당숙 때문에 심묘는 웃었다. 전생에 자신이 부명과 완유를 회임했을 때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숙비는 관례에 따라 자신에게 나쁜 게 없는지 안부를 묻고 자양제를 보냈을 뿐이다. 심가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혼자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지금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자신은 평온한데 오히려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번거롭게 할 필요 없네. 황후마마께서 내게 궁에서 지내라고 하셨어. 부에 호위만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나와 궁으로 들어가야 해.”
당숙은 멍해졌지만 바로 심묘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
“네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때 나담이 물었다.
“심묘, 나도 가야 해?”
“당연히 가야지.”
“하지만, 나는…… 궁중 예의를 몰라. 나 때문에 괜히 곤란해질 텐데?”
“왜 곤란해져? 모두 언니의 무공이 높은 걸 알아. 사람들이 날 두려워할수록 난 더 안전한 셈이야. 나와 아이의 안위는 전부 언니에게 맡길게. 우릴 잘 보호해줘야 해.”
나담이 난감해했다.
“심묘, 놀리지 마. 하지만 네 말도 맞아. 너와 나는 함께해야 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지. 그래, 나도 같이 궁에 들어갈게. 그럼 나 먼저 정리하러 갈게.”
나담이 고부로 돌아간 후 심묘도 일어났다. 회임은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지만, 모든 것들이 운명대로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창문을 열자 가을 달빛이 매우 환했다. 달은 점점 둥글어질 터였다. 곧 중추절이 다가올 것이다.
중추절은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이는 즐거운 명절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사경행도 장군부 사람들도 모두 곁에 없었다.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겠지만……. 심묘는 배를 쓰다듬었다. 자신은 어머니가 되었다. 그래서 자신은 푸근한 마음으로 달빛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하늘은 사람에게 영원히 냉혹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하늘은 자기편이었다. 하늘은 자신이 일생을 다시 살도록 했고, 자신이 깊이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도 하사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지금 내리쬐는 달빛은 완전히 다른 달빛이었다. 그녀는 작은 소리로 배 속 아이에게 속삭였다.
“보렴. 너와 아버지가 같은 달빛을 쐬고 있단다.”
* * *
심묘는 황궁으로 들어가 지내기 시작했다. 현덕 황후는 그녀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미앙궁 곁 편전에서 지내게 했으며, 궁녀들이 아니라 심묘의 사람들을 붙여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현덕 황후는 심묘와 대화하고 차 마시길 좋아했다. 이제 그 자리에는 나담도 함께했다. 활달한 나담을 보고 현덕 황후는 첫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엽홍광의 일만 제외하면. 엽홍광도 궁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났다. 하지만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깨어난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를 진찰한 태의는 너무 크게 놀라 미친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엽홍광은 늘 화원에서 귀뚜라미를 잡고 나비를 덮치며 즐거워했다.
심묘는 부명과 닮은 엽홍광을 바라보며 그의 일생이 부명처럼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평안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해 일생을 그르친 게 안쓰러웠다. 심묘의 눈빛이 가라앉은 것을 본 현덕 황후는 그녀가 엽홍광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현덕 황후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괴로워 말거라. 어쩌면 그리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몰라.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 엽가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괴로웠겠어. 게다가 폐하는 화근을 철저히 없애는 분이시니 저 아이가 멀쩡했다면 즉시 목숨을 거두셨을 거야. 지금은 괴롭게 하는 일과 마주하지 않아도 돼. 영원히 아무런 근심이 없을 테니 이 또한 어떻게 보면 좋지 않으냐?”
영락제는 처음에는 엽홍광이 멍청한 척 연기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사람을 보내 감시를 하기도 했으나 태의의 진찰대로 엽홍광은 진짜 바보가 된 게 확실했다. 게다가 원래도 몸이 불편하고 허약했던 그는 이번 부상으로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영락제도 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입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니, 낭비될 것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엽홍광의 처지는 영락제에게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켰다. 소년 시기에 독에 중독됐을 때 자신도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랐다. 이 점은 서로 같은 셈이었다. 드물게 연민이 생긴 영락제는 엽홍광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바보가 된 엽홍광은 여전히 아무런 근심 없이 웃고 지낼 수 있었다. 자기의 생사가 여전히 황제의 손에 잡혀 있고, 자신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나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엽홍광처럼, 아이처럼 맑은 얼굴로 웃고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개월 후 사경행은 명제 경계선에 도착해 명제의 군대와 싸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가군과 심가군은 흠곡관에서 뭉쳤고, 진국의 군대도 그곳에 들어왔다. 진국과 명제의 연합군과 사경행이 거느린 대량군이 정식으로 대치했다. 전쟁은 늘 무정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내는 건 시작만큼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서로의 세력이 비등비등했다.
심묘는 사경행에게 그려준 군사 지도를 들고 매일 연구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실마리도 알 수 없었으나 점점 조짐이 보였다. 규칙을 따르는 바둑 수처럼 명제와 진국 연합군은 잘 설계한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가고 있었다.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군사 지도는 반드시 부수의의 손에 있었다.
명제, 진국 연합군과 대량의 교전. 그 싸움 속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사경행은 전생에서처럼 많은 적군을 한 번에 쓸어버리지 않았다. 물론 전생에서는 진국과 명제의 연합은 없었고, 당시 대량은 진국을 먼저 공격한 후 명제를 멸망시켰다. 심묘는 사경행이 책략을 바꾼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영리하고 교활한 사냥꾼이었다. 지금은 사냥감을 함정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뒤엉켜 진흙탕을 구르는 대신 깔끔하게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결국 부수의는 지금 미끼를 문 셈이다. 심묘는 기쁘고 안심되는 한편, 미 부인인 엽미의 수완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것이 변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부수의의 마음을 얻었다. 군사 지도 따위를 바친다고 부수의가 여자를 깊이 신임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래지 않아 사경행의 편지가 대량에 도착했다. 편지 안에는 명제의 국세가 적혀 있었다. 문혜제는 병세가 위중해져 서거했고, 부수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등극한 부수의는 바로 진국 황제와 친교를 맺었고, 양국은 함께 대량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주왕 부수안과 정왕 부수현을 포함한 명제의 몇몇 황자들은 이미 감옥에 있었다. 부수의는 여유롭게 가족을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문혜제에게 핍박당한 심가는 나가와 연합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 황실에서는 그들을 ‘역도’라고 불렸지만, 백성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심가가 오래도록 유지한 깨끗한 명성은 그리 쉽게 꺾이지 않았다. 사경행의 사람이 심가를 비밀리에 교섭해 심가는 귀순의 명분으로 사경행과 동맹을 결성했다. 심가는 정식으로 명제를 배반하고 대량의 편이 된 것이다.
사경행은 마지막에 대수롭지 않은 듯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별로 요긴하지 않은 소문을 적는다고 했다. 정경성에는 황실 염문설이 돌고 있었다. 황실 상인의 먼 친척의 질녀인 미인 한 명이 선녀처럼 아름답고 지혜로워서 황제에게 총애받는 보물이 되었다는 소문. 황제는 그녀에게 ‘미 부인’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후궁의 다른 여인들을 무릎 꿇렸다.
편지를 내려놓은 심묘는 미소를 지었다.
“심묘,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이렇게 오래 봐? 그리고 너 지금 세 번이나 웃었어.”
말하던 나담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 저 고양이는 어떻게 나무에 오른 거지? 어떻게 저렇게 높이 올라갔지?”
검은색 고양이가 화원의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높을수록 나뭇가지는 가늘어져서, 고양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흔들거렸다. 매우 위험해 보였다. 심묘는 웃었다.
“빨리 올라갈수록 높게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 더 빠르고 매우 아프지. 천천히 보자고.”
* * *
4개월쯤 지났다. 전쟁은 시작되면 쉽게 멈출 수 없었다. 삼국이 관련된 대전쟁이니 더욱 어려웠다. 사방에 봉화가 오르면 다음 날 다른 쪽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기고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났다.
진국과 명제는 결사의 각오로 전쟁에 임했기에 그만큼 많은 병력을 전쟁에 투입했다. 그에 비해 대량이 데려온 병사의 수는 적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명제와 진국 연합은 우세를 확실히 점하지 못했다. 전쟁은 길어졌다. 대량은 서두르지도 여유를 부리지도 않았으나, 진국과 명제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특히 그랬다. 이전에는 크든 작든 진국과 명제가 이기는 싸움이 잦았다. 특히 초반에는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수확이 크지 않더라도 사기를 높일 수 있기에 진국과 명제, 양국의 장병들은 으스대기에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연합군의 우세가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승리도 했으나 점점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 형세는 유주 13경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유주 13경은 명제, 진국, 대량, 삼국의 국경에 위치하는 곳으로 줄곧 명제의 국토였다. 유주 13경은 국경 지대이긴 하나 대량과 진국이 손쓸 마음을 보이지 않아서 줄곧 평화가 유지됐다. 대량과 진국이 그곳을 탐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세가 복잡해서 공격하기 어려웠다.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손실만 입고 물러나야 할 위험이 컸다. 날카로운 뼈가 많이 붙은 뼈다귀를 먹는 것과 같아서 야심 말고도 큰 용기가 있어야 했다.
사경행이 거느린 대량 장병이 바로 그곳, 유주 13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주 중요한 거점이기에, 대량이 차지한다면 전쟁 국면을 바꿀 결정적인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경행이 순조롭게 유주 13경을 점령한다면 이 전쟁은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었다. 이후에는 명제와 진국을 썩은 나무를 꺾듯이 쉽게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반대로 사경행이 이 뼈다귀를 먹지 못하면 대량 군대는 원기가 크게 상할 터였다. 명제와 진국을 패퇴시키기는커녕 양국의 협공에 맞서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전투는 대량이든 명제와 진국이든 판돈이 큰 셈이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가지고 승패를 겨루는 것과 같았다.
미앙궁. 현덕 황후는 심묘와 이 일을 이야기했다.
“군대를 인솔한 장군이 네 부군인데, 어째서 조금도 긴장하지 않느냐?”
심묘는 살짝 웃었다.
“저는 당연히 전하를 믿습니다.”
사경행은 교활했다. 엽미의 잘못된 군사 지도는 여전히 부수의의 손에 있었다. 부수의는 지도를 확신하게 됐는데, 물론 이것은 심묘의 능력이지만 사경행도 그 안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전쟁 초반, 사경행은 계속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며 부수의가 여러 번 단맛을 보게 했다. 사실상 부수의의 승리는 명제와 진국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지 못했으나 연합군이 스스로 훨씬 강하다고 착각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부수의가 이미 확신한 후였기에 그 후 대량이 몇 번 이겨도 부수의는 우연이라고 여겼다. 그는 사경행이 이긴 곳은 모두 대수롭지 않은 도시이며 자신이 이겨서 지키는 도시는 모두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사경행이 우세한 형세임을 알 수 있지만 부수의와 진국 황제는 그 점을 소홀히 했다.
최근 몇 번의 싸움에서 연합군이 승리했고, 대량 군대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 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연합군의 공격은 점점 맹렬해져서 상대를 단숨에 해치우려는 듯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주 13경은 전략상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부수의는 심묘가 그린 군사 지도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병력을 안배했다. 사경행에게 이 소식보다 기쁜 소식은 없었다. 부수의가 인력과 재력을 많이 쏟아부을수록 최후에 받을 타격은 더욱 커지는 셈이었다.
사경행은 노름꾼을 유혹해 그가 조금은 금품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노름꾼은 자신의 운수가 좋고 손재간이 좋다고 여겨서 곧 모든 것을 걸 터였다. 사경행은 큰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노름꾼은 가산을 탕진하고, 도박장에서 쫓겨날 것이었다. 부수의는 사경행의 수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진국 황제는 부수의보다는 더 신중한 편이라 유주 13경에 다른 식으로 병사를 배치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수의가 패배한다면 홀로 남은 진국도 별로 힘을 쓸 수 없었다. 돌파구를 찾기만 하면 남은 일은 쉬워졌다. 하나씩 각개격파해나가면 그만이었다.
나담이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심묘의 배 위에 얹었다.
“애석하게도 유주 13경의 소식은 편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네. 요 녀석은 정말 빨리 자란다.”
심묘는 고개를 숙여 자기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전쟁 중이라도 생활이 예전과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평화로운 나날 속에 심묘 자신도 평온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믿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 속 어린 생명이 자신과 함께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되자 더욱 용감해지고 굳세졌다. 책임을 짊어졌어도 마음은 안정적이었다.
심묘와 나담이 현덕 황후와 이야기 나누는 사이, 도 고고가 조급한 표정으로 급히 들어왔다. 도 고고는 얼굴 위로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 지었다.
“마마, 예왕비마마, 축하드립니다. 방금 조정에 소식이 왔습니다. 유주 13경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답니다. 예왕 전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정말이냐?”
현덕 황후가 단숨에 일어났다. 기다리던 소식에 진중한 그녀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 고고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아주 기뻐하시며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습니다.”
“하늘이 돌보셨네요.”
나담이 합장하며 중얼거렸다.
유주 13경에서 승전보가 들렸으니 반년 넘게 이어진 전쟁은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다.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고, 혼란스러운 천하는 마침내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웅대한 계획과 패업은 오래지 않아 현실이 되리라. 심묘는 배를 어루만지며 기뻐했다. 자신은 사경행이 반드시 해내리라 믿었다.
“예왕비마마, 조급해 마십시오. 예왕 전하께서 마마께도 편지를 보냈다 하셨으니 곧 편지가 당도할 겁니다.”
도 고고가 웃으며 심묘에게 고하자 현덕 황후는 심묘를 놀렸다.
“정말 부럽구나. 나와 폐하께는 따로 편지하지 않고 부인만 생각하다니. 형제의 명분은 헛되었네.”
나담도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다른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네.”
도 고고는 기쁜 일 덕분에 상쾌한 듯 이어 말했다.
“나 소저도 실망하지 마세요. 소저에게도 편지를 쓴 사람이 있습니다. 고부의 공자가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나담은 의심스러웠다.
“고양? 고양이 내게 편지를 보냈다구요?”
심묘와 현덕 황후는 서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주 13경의 승전보로 온 농서성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영락제는 오랫동안 열지 않은 연회를 열어 기쁜 소식을 더욱 널리 알렸다. 다만 심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임 소식이 소문날까 조심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궁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바깥에서는 계속 이런저런 추측이 오갔다. 그러나 현덕 황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호하자 사람들은 점점 심묘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설령 그녀의 회임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궁중 연회에 회임한 심묘가 참석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심묘는 조용히 사경행의 ‘사적인 편지’를 읽고 싶었다. 그의 ‘사적인 편지’는 전쟁의 긴장이 고조된 이후로 좀처럼 받을 수 없었다. 편지 한 통을 보내는 것도 어려운 듯, 그는 최근 몇 개월간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드디어 심묘는 편지를 열었다. 편지에는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다며, 자신의 공로를 한바탕 과시했다. 하는 김에 부수의는 군주의 자격이 없는 머저리라고 혹평했다. 그는 황위 쟁탈에서 목표를 이룬 황자일 뿐이지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는 아니라고 비웃었다. 명제 조정은 이미 아주 어지러워서 신경 쓸 거리도 안 된다고 쓰여 있어 심묘는 조금 안심했다.
그리고 그는 미 부인이 된 엽미를 언급했다. 부수의가 엽미를 높이 치켜세워 명제 조정에는 수군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엽미는 얼마 후 마음대로 어서재를 출입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부수의는 그녀를 단순히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간주하는 게 아니라, 복을 불러오는 복덩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심지어 몇 번 ‘승리’한 싸움에서는 그녀에게 공이 있다며 상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이후 엽미는 명제 조정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했다. 부수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부수의는 그녀의 행동을 눈감아주었다. 정말 그녀가 아름답고 총명하며 능력이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일을 전하는 사경행의 편지는 조소로 가득했다.
사경행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명제와 진국이 죽을 곳을 찾아오길 기다렸다. 이번 유주 13경에서 대량이 승리했으니 그가 나서지 않아도 엽미는 부수의에 의해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조정 신하들에게 엽미가 복덩이라고 칭찬하길 서슴지 않던 부수의는 마음이 넓지 않았다. 그 복덩이 때문에 중요한 전투에서 손해를 본 걸 알게 되면 그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사경행도 손을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엽미를 대량의 첩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부수의는 배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여지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사경행의 편지를 본 심묘는 그가 나른하게 붓을 들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써 내려가며 기뻐하는 표정을 상상했다. 심묘는 편지지를 잘 접었다. 편지 봉투에 다른 것이 들어 있는 듯해 편지 봉투를 흔들다가 뒤집었다. 봉투 안에서 붉은 팥알 두 알이 굴러떨어졌다. 붉은 팥은 그리움을 뜻했다.
그는 편지 안에 그립다는 말을 쓰지 않고 붉은 팥알로 마음을 전했다. 그는 잠시도 심묘를 잊지 않았다고 증명했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가 너무나 유치했지만 심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심묘는 향주머니를 꺼내 붉은 팥알 두 알이 보물인 양 소중히 집어넣었다.
“다섯 번째 편지.”
* * *
명제 정경성.
황궁 내 음산한 감옥 안 곳곳에 농후한 비린내가 자욱했다. 피비린내는 다른 역겨운 냄새와 섞여 극도로 혐오감이 들게 했다. 감옥 가장 안쪽, 여인 하나가 발가벗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벽 위 족쇄에 묶여 있었고 두 다리는 얼음같이 차가운 구정물에 닿아 있었다. 구정물 근처에 있는 커다란 쥐들이 수시로 그녀의 발등에 기어올라 발가락을 물어뜯었다. 몇 개의 발가락은 이미 물어뜯겨 피범벅이 되었고, 피비린내가 다시 굶주린 쥐들을 끌어당겼다. 쥐들은 그녀의 발가락을 더욱 힘 있게 물어뜯었다.
눈을 뻔히 뜨고 쥐에게 몸이 뜯기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리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면 더 큰 고통이 올 따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미 부인, 엽미였다.
며칠 사이, 엽미는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엽미는 지금까지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부수의가 이렇게 무정한 사람인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유주 13경 전투에서 패배했음을 전해 듣고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자신의 지혜로 부수의를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부수의는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후궁 비빈들 앞에서 그녀를 잡아다가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엽미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부수의는 대량이 무슨 목적으로 그녀를 파견한 건지 말하라고 압박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엽미는 해명할 기회를 잡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용모는 더 이상 무기가 되지 못했다. 지하 감옥에 들어온 첫날, 부수의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붉게 달군 인두로 그녀의 두 뺨을 지지게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한쪽 눈에도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의원을 불러 치료할 처지가 되지 못하니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 엽미는 지금까지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사람에게 짓밟혀도 잡초처럼 튼튼하게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녀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외모가 망가지는 것이었다. 외모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기라고 여겼으니까.
아주 틀린 생각만은 아니었다. 감옥에 잡혀 오기 전까지 이 무기는 가는 곳마다 통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들었고, 자신을 무시한 사람을 밟고 올라가 여유롭게 살 수 있게 했다. 그러니 그 무기가 망가져 버리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엽미는 절망에 빠져버렸다.
절망을 느낀 그녀는 투지도 잃었다. 쥐가 발가락을 물어뜯는다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한쪽 눈이 멀고 두 뺨에 화상 자국이 있으니,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울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위해 목숨도 바치도록 유혹할 수 있었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모자라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목숨을 잃더라도 절벽 위의 야생화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야생화는 더러운 잡초로 변했다. 심지어 울퉁불퉁 상처가 있는 잡초이니 생명을 걸고 손에 넣으려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여러 날 몸을 섞은 관계인데도, 부수의는 조금도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아예 죽인다면 모든 일은 끝일 텐데, 그는 자신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그 외모를 망가뜨려 자신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들렸다. 넓은 지하 감옥 안에서 소리는 유달리 또렷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엽미는 하나 남은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부수의가 서 있었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엽미, 짐이 네게 최후의 기회를 주마. 네가 아는 걸 전부 말하거라.”
“신첩이 무엇을 압니까?”
엽미는 여전히 자신을 ‘신첩’이라 칭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여전히 명제 후궁 안, 부수의의 총애를 받는 비빈이라는 환상에서 깨지 않을 수 있다는 듯이. 부수의는 혐오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추한 그녀의 모습에 구역질이 나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짐이 분명히 조사했다. 너는 대량의 첩자니, 그들과 편지를 전달하는 경로가 있을 것이다.”
엽미는 소리 내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목이 쉴 대로 쉬어서 그녀의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렸다. 지난날의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는 부수의가 왜 자신을 첩자로 여기는지 몰랐다. 오히려 부수의가 실패한 원인을 남에게 떠넘기려고 한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가 병사를 잘못 배치하고 전략을 잘못 세웠으면서도 모든 죄를 자신에게 넘기고 있다고 말이다.
“신첩이 뭐라고 해도 폐하는 믿지 않으실 겁니다. 신첩이 경로를 말하면 폐하는 믿으실까요? 아니면 신첩이 거짓말했다고 여기실까요?”
“네가 말하면 짐이 네게 온전한 시체를 하사해주마.”
부수의가 냉랭히 말했다. 엽미는 다시 한번 웃었다. 그 웃음은 악귀의 것을 닮아 있었다.
“폐하의 거래 조건은 너무 안 좋군요. 온전한 시체가 무슨 조건이 됩니까? 만일 폐하께서 신첩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상처를 치료해준다고 하시면 아는 모든 일을 말하도록 고려해보겠습니다.”
엽미가 흥정을 시도하자 부수의는 차갑게 조소했다.
“짐은 배반한 사람을 여태껏 살려둔 적이 없다.”
“그래서 폐하는 아예 신첩을 망가뜨리시는 겁니까? 당초 대량 예왕비가 폐하를 애타게 사모해 뒤쫓아 다녔다는데, 애석하게도 폐하는 그녀를 냉대해 흐지부지됐다지요.”
지금 부수의는 사경행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심묘의 신분도 알았다. 엽미가 심묘를 언급하니 부수의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자신은 평생 모든 일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양으로 손아귀에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과정에 우여곡절은 있더라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성사시켰다. 단 하나 예외가 심묘였다.
심묘의 감정을 이용해 심가를 손에 쥘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갑자기 그녀가 마음을 바꿔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대량의 예왕과 혼인했으니 온 세상 사람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때린 것과 같았다. 덕분에 자신은 손해를 입었다. 게다가 지금 심가는 자신과 맞서서 일을 몹시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엽미가 심묘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픈 곳을 더욱 찌르고 있었다.
“예전에는 예왕비가 단지 운이 좋고 출신이 좋아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생활을 한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예왕비는 신첩의 생각보다 더 총명하네요. 폐하 곁에 남으면 폐하께 충성하든 아니든 좋게 죽지 못할 것을 알았나 봐요.”
“무엄하구나.”
“신첩은 폐하께 졌습니다. 폐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첩과 금실 좋게 달라붙어 계시더니, 직접 신첩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네요. 폐하는 신첩이 용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아실 겁니다. 지금 신첩이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플 것도 아시겠지요. 하지만 폐하, 신첩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폐하의 결말이 과연 신첩보다 나을 것 같습니까? 폐하의 모든 실수를 신첩에게 미루면 좋은 결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기시는 건가요?”
부수의의 안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이런 저주를 들으면 누구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엽미에게 분노할 대로 분노한 상태인데, 그녀는 기름을 붓고 있었다.
“폐하께도 좋은 결말은 없을 겁니다. 폐하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심묘가 당초 폐하를 택하지 않고 예왕을 택한 것부터가 폐하가 예왕의 백 분의 일도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그러니 잘 보십시오. 신첩은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감금된 죄수입니다. 하지만 폐하의 결말은 절대 신첩보다 좋지 못할 겁니다. 폐하도 패배할 겁니다. 유주 13경은 시작일 뿐, 폐하는 철저히 실패하여 돌이킬 수 없을 거예요. 이 명제는 결국 폐하의 손에서 멸망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