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장 (22/71)

70장

날씨가 맑고 화창하며 공기가 상쾌했다. 드물게 좋은 가을 날씨였다. 심묘는 뜰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근래 드물게 일찌감치 상소를 다 보았다. 나담은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연을 가져왔다. 아직 동심을 잃지 않은 그녀는 연을 날리며 궁녀들과 즐겁게 놀았다. 나담의 웃음소리를 들은 심묘도 얼굴에 맑은 미소를 드러냈다.

그때 등 공공이 바깥에서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보기 드물게 표정이 무거웠다. 그는 심묘에게 내전으로 향하셔야 한다고 고했다. 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자 심묘는 서둘러 경칩의 부축을 받아 내전으로 향했다. 내전으로 들어가자마자 등 공공이 입을 열었다.

“예왕비마마, 큰일입니다. 고가 잔당이 성을 공격했습니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가 사람들은 여양성에서 이미 전부 제거된 것 아닌가?”

“고가 잔당 중 둘째 소저의 부군이 무관인데, 그가 비밀리에 사병을 기른 것 같습니다. 당시 교외에 따로 주둔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가에 사고가 생기자 엽무재는 그에게 큰돈을 대주었답니다. 그들은 그 자금으로 수를 불려 말과 마차를 준비한 다음, 도시를 공격하고 성 수비군과 싸우는 중입니다.”

한참 후 심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권세가는 몰락 후에도 영향력이 남아 있다더니. 고가와 엽가는 황실과 대치하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짜냈구나. 그들은 날 원하겠지.”

그녀는 등 공공을 바라보았다. 등 공공이 이마 위 땀을 닦았다.

“마마…….”

고가와 엽가의 잔존 세력으로는 대군을 이끄는 사경행과 맞설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지금 이때 공격하는 것은 엽무재와 고정순이 이루지 못한 뜻을 이어받으려는 게 아니라 소소한 복수 정도였다. 지금 대량의 국정은 심묘가 혼자 책임지고 결정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사경행의 아이도 있었다. 그들이 심묘를 죽이고 아이 역시 죽인다면 사경행은 따라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좌절할 터였다. 고가와 엽가의 입장에서 대량 황실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복수였다. 고정순과 엽무재는 죽은 사람이건만, 구역질이 날 정도로 사악했다.

“성에 병마는 얼마나 있지? 궁의 금위군은 몇 명인가?”

심묘가 물었다.

“금위군은 마마를 보호하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반란군은 농서성 밖의 백성들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에 들어와서도 가차 없이 칼을 휘두를 겁니다. 몹시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또 사람들 안에 섞여 들어올 테니 많은 인원을 보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궁이 허점을 보일 겁니다.”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궁과 백성 둘 중 하나를 택하라?”

등 공공은 침묵했다. 직설적인 물음에 그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금위군을 내보내 백성을 보호하게나.”

등 공공은 멍해졌다.

“예왕비마마, 마마의 생사를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마마께 위험이 생기면 제가 어떻게 예왕 전하를 뵙겠습니까?”

“내 목숨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네. 그들이 정말 성 밖에만 있을 거라 여기는가? 성안에도 그들이 들어와 있을 것이네. 그들은 백성들에게 공포를 이끌어내려 할 것이야. 금위군이 궁만 신경 쓴다면 백성들은 쉽게 선동당할 것이고. 민심이 안정을 잃으면 황궁이 철옹성이라도 결국 무너지는 법이야. 특히 전하께서 돌아오시는 이때, 착오가 생겨선 안 되네.”

등 공공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심묘가 덧붙였다.

“게다가 나도 내 목숨으로 장난치지 않아. 전하께서 떠나기 전 내게 남겨준 사람들이 날 보호할 걸세.”

심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고정순과 엽무재의 최후의 한 수는 상황을 몹시 난감하게 만들었다. 만일 자신이 자신만 생각해 백성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으면 나중에 사경행이 등극해도 황실은 이기적이고 냉혹하다는 불명예를 얻을 것이었다. 황제가 막 황위에 올랐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것이다. 천하의 민심을 잃는다면 시작부터 기반이 견고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니 금위군이 황궁만 돌보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심묘 자신에게도 패가 있었다. 사경행이 예왕부에 남긴 묵우군 사람들이 함께 입궁해 생활하고 있었다.

등 공공은 심묘의 생각이 뚜렷한 것을 보고 다시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따라 빈틈없이 처리했다. 그러나 심묘는 보이는 것만큼 담담하지 않았다. 홀로 남은 그녀는 미간을 바짝 조였다. 이전이라면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곧 몸을 풀 시기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배 속 아이를 잘 보호해야 했다. 이 역적 잔당은 이 민감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쓸 터였다.

소식을 들은 나담은 서둘러 심묘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심묘의 생각을 바꾸게 하려고 애썼다.

“심묘야, 일단 나와 다른 곳에 숨자. 아이를 낳은 후 다시 생각해. 지금은 궁도 안전하지 않아. 네가 궁에 있다는 걸 역적들은 당연히 알 거야. 궁을 수비하는 사람이 적어지면 반드시 공격을 개시할 거야.”

심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떠나면 그들은 내가 도망갔다는 소문을 낼 거야. 황궁은 전쟁터와 같은데 내가 물러나고 역적이 차지한다면 어떻게 황실이 위엄을 세울 수 있겠어?”

“하지만…….”

나담은 여전히 말하려 했지만 심묘는 그녀의 말을 딱 잘랐다.

“하지만은 없어. 일단 지키고 있으면 사경행이 곧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만 견디면 돼.”

과연 심묘의 예상처럼 다음 날 거리마다 예왕비가 백성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사람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지금 조정에는 책임지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수비군과 싸우는 역적 잔당이 성에 들어오면 농서성은 피로 이루어진 강이 흐를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선량한 백성들은 이용당하기 쉬웠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천자의 비호였다. 이 유언비어가 사실이라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도망쳤으니 남은 그들은 도마 위 생선처럼 유린당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황실이 무정하다고 크게 욕했다. 예왕비가 덕이 없어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예왕 역시 공로만 생각해 농서성 백성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욕했다.

심묘는 금란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자금색 장포에서 빛이 흘렀다. 그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머리를 틀어 올려 많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궁성으로 가자.”

조정 신하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예왕비마마,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는 당초 심묘가 조정을 관리하는 것을 가장 심하게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매우 성실하게 심묘를 따랐다.

“모험을 해야 백성들이 위험 속에서 황실이 자기들을 버리지 않았음을 믿을 것이네.”

심묘가 일어나자 경칩과 곡우가 얼른 부축했다. 만삭인 그녀는 걷기가 불편했다. 심묘는 백관을 거느리고 궁성의 성루로 갔다. 성루 아래로 백성이 모여들었다. 모경이 묵우군을 데리고 왔고 금위군도 준비를 마치고 대기해 자객의 기습에 대비했다.

“예왕비마마다!”

백성 중 예왕비를 알아보는 사람이 외쳤다. 그 소리에 성루 아래로 백성들이 물샐 틈 없이 밀려 왔다. 농서성 백성 대부분이 온 것 같은 규모였다. 심묘는 아래를 보고 천천히 말했다.

“최근 떠도는 말은 농서성을 공격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역도의 말이다! 고가와 엽가 역당이 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다!”

바람 속 그녀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사람을 위로하는 힘과 결연한 의지도 충만해서 사람들은 확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예왕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성이 있으면 내가 있고, 성이 망하면 나도 망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하고, 더욱이 그대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성 아래가 떠들썩해졌다. 의심하는 자도 있고 믿는 자도 있었다.

“대량의 장병은 정벌에 나가 있으나 나는 농서성에 있는 사가 사람이다. 사가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며 나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무장 세가에는 비겁하고 졸렬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패할 수 있으나 도망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미미한 잔당이 어떻게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겠는가? 우스운 소리다!”

심묘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자금색 장포를 입은 여인을 보았다. 여인의 당당한 모습에 사람들은 그녀가 오만한 예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뜬소문을 믿지 말고 말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황실 사람이 있는 궁에 누가 감히 오겠는가?”

자금색 장포가 바람에 휘날렸다. 잠시 침묵하던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고함소리가 높은 하늘을 부술 정도였다. 승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더욱 필요한 것은 패기만만한 맹세였다. 황제가 없어도 이 여인에게 대업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용기와 담력이 있어서 탄복했고 마음이 놓였다. 백성들은 열렬히 지지를 표했다.

그녀 뒤에 선 문무백관들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가득했다. 이 여인은 말로 사람의 마음을 선동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 가장 뜨거운 부분을 짚어 사람들의 피를 들끓게 했다. 그녀는 농서성의 성문을 한 겹 단단하게 만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농서성의 소문은 거의 진정되었다. 혹여나 황실을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 이들이 즉시 반박했다. 예왕비가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직접 성루에서 민심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이다. 안심한 백성들은 민심의 힘을 드러냈다.

하지만 고가, 엽가 잔당은 성 밖에서 더욱 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미친 듯이 날뛰었다. 심묘는 계속 올라오는 상소문을 살피며 금위군을 성 수비군으로 다시 내보냈다. 매일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출산이 임박한 날에 무리를 거듭하자 점차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 * *

날이 밝자 심묘는 일찍 일어났다. 달려온 나담이 심묘를 보고 말했다.

“심묘야, 누가 널 찾아왔어.”

심묘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평소 그녀는 조정에서 집무를 보며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눴기에 특별히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특히 대량에는 친척이나 친구가 없었다. 찾아올 사람은 궁중 사람밖에 없었다.

“내가 부축해줄게. 나가서 봐.”

나담이 심묘를 부축했다. 대청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탁자에 앉아 있었다. 경칩이 그 사람에게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청색 장포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는 여전히 고결하고 도도했다. 심묘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배 선생?”

배랑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당초 그는 가장 좋은 선택지인 이별을 선택했다. 그때 전생의 기억 때문에 두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마주해야 할지 몰랐었다. 심묘를 본 그가 살짝 웃었다.

“농서성이 어지럽고 궁 상황이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전 특별한 능력이 없지만 적어도 어려움을 함께할 수는 있지요.”

심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침묵했다.

“너무 깊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저는 명제 사람으로, 적어도 대량에선 마마와 같은 고향 사람이지요. 게다가 마마와 저는 학생과 선생으로서 우정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고향 사람이 마마를 도와주는 거라 여기십시오.”

배랑이 웃었다. 그의 태연자약한 미소를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심묘는 그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해 보였다. 그래서 심묘도 홀가분해졌다. 자신에게 과거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미래가 더 중요했다. 배랑이 있다면 확실히 많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또 당신에게 빚을 지네요.”

배랑은 그녀를 대신해 칼을 맞은 적이 있었다.

“빚?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배랑이 작게 웃더니 고개를 들고 심묘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죠. 지금 가장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 * *

농서성에서 가장 급한 일은 역적 잔당을 깨끗이 처리하고 성안 백성의 안위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조정 일과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회임한 심묘는 간신히 이 일들을 처리했었다. 게다가 곧 해산할 예정이라 큰 움직임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배랑이 온 후 심묘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부수의의 막료였던 배랑은 조정 일에 잘 대처했다. 게다가 이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기에 각 방면을 빈틈없이 잘 돌봤다. 처음으로 대량 조정 일을 보는 것이건만 자유자재로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농서성 안의 병사 부족은 그도 해결하지 못했다. 성안의 백성을 보호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여력을 나눠 역적의 잔당도 처리해야 했으니 이도 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히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이렇게 대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한두 달 버티면 사경행이 돌아올 테니 역적을 소탕할 수 있을 거예요. 이 기간만 버티면 됩니다.”

심묘가 고심하는 배랑에게 말했다. 배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묘가 상소를 보는 일을 도왔다. 두 사람은 전생과 관련된 일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멍청한 척하는 게 지내기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배랑은 제정신이 아닌 엽홍광을 볼 때마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엽홍광과 부명이 너무 닮은 탓이었다. 그래서 엽홍광을 대하는 배랑의 태도는 유달리 온화했다. 엽홍광 역시 참을성 많은 배랑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고가 역적도 이 사실을 잘 압니다. 어제 성 수비군이 고가 역적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보고했습니다. 일이 이상할 때는 나쁜 의도가 있는 법이지요. 그들이 무언가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배랑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심묘는 탄식했다.

“그들이 무엇을 준비하든 우리의 처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대량은 국경 지대를 견고히 지켰어요. 농서성은 철옹성이라 움직임이 있어도 조정 관리들이 서로 질투하는 것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고가가 한 수를 남겼을지 누가 알았을까요? 고가는 황실에 대한 원한이 깊어 그들이 승리할 희망이 없는 것을 알고 이 한 수를 숨겨둔 겁니다. 정말 두 번 죽어 마땅해요.”

상소를 든 심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농서성을 잃을 수는 없어요. 뒤로 물러서는 건 한 걸음도 허락 못 합니다.”

그때 나담이 음식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오래도록 상소만 봤을 테니 이제 식사해요. 특히 심묘! 넌 지금 너 혼자가 아니야. 아이도 있다고. 네가 굶으면 내 조카도 굶는 거야. 그러면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어?”

나담이 바구니에서 떡과 국을 꺼냈다.

“배 선생도 드세요. 주방에서 직접 만들었으니 아주 깨끗하다고 보장합니다!”

평소 나담은 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 자신은 배랑처럼 조정 일을 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온 마음을 심묘의 아이에게 쏟기로 했다. 궁에는 일이 많아 일 처리가 어지러웠다. 심묘는 회임했으니 먹는 것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데, 소홀해질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매일 어선방을 지켰다. 도 고고, 경칩, 곡우, 누구에게도 시키지 않고 직접 작은 의자에 올라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심묘가 살짝 웃었다.

“고생했어.”

배랑의 시선이 심묘의 튀어나온 복부에 닿았다. 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며칠 남았습니까?”

“확신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느낌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그녀는 배를 쓰다듬었다. 눈 속에 부드러운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전란으로 어수선할 때 태어나다니, 정말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네요.”

“무슨 전란으로 어수선해? 네 말은 틀렸어. 지금 천하는 태평해지고 안정되었으니 번영하기 좋은 시기야. 제부가 돌아오면 이 녀석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아버지가 돌아오는 거야. 온 세상이 아이의 탄생을 환호하고 축복할 거야. 이런 특별한 영예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런 좋은 일을 어째서 나쁜 일처럼 말하는 거야?”

나담의 불만스러운 말에 심묘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는 그렇게 얘기를 잘하는데 왜 공연 같은 무대에 안 서는 거야?”

나담은 득의양양했다.

“하긴 내가 공연을 하면 천하제일일 거야.”

배랑은 두 사람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이 시간만 참고 견디면 되지요. 역적 잔당이 사고를 일으키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 날, 배랑의 희망이 깨질 조짐이 보였다. 결정적일 때일수록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되었다. 이 시간만 참고 견디면 사경행이 돌아올 테니 농서성의 위험은 해결될 것이었다. 역적이든 도적이든 모두 대량의 영토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었다. 지금 명제와 진국은 없으니 천하에 대량만 있었다. 이 태평성세의 강산은 모두 사경행의 손에 떨어질 터였다.

그러니 역적들은 하늘 끝으로 도망가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영원히 평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살아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살아서 떠날 생각이었으면 농서성을 공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심묘와 심묘의 아이를 죽여야 목숨을 건 싸움이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가는데, 백성들은 선동되지 않았고 황실은 평안했다. 잔당들은 조급해졌다. 그들은 서둘러 농서성을 혼란하게 만들고, 돌아온 예왕이 아내와 자식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무너지게 하기 위한 마지막 수를 꾀했다.

이틀 후, 그들은 농서성을 향해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배랑의 말처럼 일이 이상할 때는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사실 이 계획은 엽무재가 영락제 퇴위를 강요하기 위해 만든 계획이었으나 오늘 사용하게 되었다. 엽무재의 계획은 고가 장병이 황실의 금위군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당은 고가 장병처럼 용맹스럽지 않았다. 물론 황실 금위군도 영락제 시절만큼 수가 많지 않아 전력은 비등비등했다.

황실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금위군을 더 내보냈다. 궁중 병사의 수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심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등 공공이 말했다.

“예왕비마마, 다시 궁으로 사람을 부르시지요. 궁에 이보다는 병사가 많아야 합니다.”

“한두 사람 더 많다고 될 일도 아니야. 바깥도 사람이 부족하니 놔두시게. 오늘밤은 이렇게 버텨내면 돼. 잔당도 쉬어야 하니, 오늘밤이 지나면 그들의 사기도 한풀 꺾일 거야. 오늘밤이 지나면 그 뒤의 일은 많이 쉬워지겠지.”

하지만 도 고고는 마음이 불안했다.

“걱정입니다. 예왕비마마, 황손은 정말 괜찮겠습니까?”

심묘는 부드럽게 복부를 쓰다듬었다. 근래 들어 아이는 배 속에서 힘껏 움직였지만, 오늘밤은 매우 평온했다. 어미의 마음을 아는 듯했다. 심묘는 미소 지었다.

“자나 보네.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다니 아주 착해.”

배랑이 말했다.

“결정을 내렸다면 이곳을 지킵시다. 하지만 만전을 기해 준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묵우군 사람을 전부 불러 마마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합니다. 황궁은 지켜야 하지만 사람 목숨이 더욱 중요합니다. 백성이 마마가 대피한 사실을 알아도 최후에 대피했으니 탓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예왕비마마는 황실의 혈통을 보호하셔야 합니다.”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모두 정신 차립시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단결해야지! 고비랄 것도 아니야. 이 1년을 견뎠는데 이름 없는 쥐새끼가 무서울 게 뭐 있어?”

나담은 나가 사람답게 성장했다. 뼛속 깊이 씩씩한 기개와 용기가 위험한 때일수록 드러났다. 그녀의 말에 궁중 사람들의 더운 피가 끓어올랐다. 미앙궁 궁녀와 태감들은 무릎을 꿇고 황궁과 존망을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

심묘는 대전 중앙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대전은 아주 넓었다. 배랑은 한쪽에 앉아 상소를 보았다. 심묘는 신하들이 보낸 문서를 보았다. 나담은 어디서 찾아온 것인지 모를 구연환을 가지고 놀았다. 도 고고와 등 공공은 수시로 따뜻한 찻물을 가져왔다. 다들 각자의 일을 하며 바빠 보였다. 덕분에 긴장된 분위기도 희석되었다.

수시로 금위군이 성안 상황을 보고했다. 역적은 흉악하고 잔인해서 곳곳의 백성을 학살하며 곳곳에 공포감을 조장했다. 다행히 심묘가 보낸 금위군과 성 수비군이 있어 잔당은 상승세를 타지 못했다.

그러자 교활한 역적들은 민심을 어지럽히면서 동시에 황궁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바깥 멀리서 충돌하는 소리와 장병들의 외침이 들렸다. 간혹 불빛이 반짝거리기도 했다. 누구도 진심으로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역적들이 황궁을 향해 활시위를 여러 번 당겼다 풀었다 반복하는 듯했다. 아주 끝까지 당겼다가 느슨하게 풀고, 또 끝까지 잡아당기길 거듭하니, 사람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어려운 가운데 밤은 유달리 길었다. 향로 안에 나부끼는 연기도 덩달아 느리게 퍼지는 성싶었다. 연기는 공중으로 흩어져 조용히 향기를 뿜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출 때, 바깥의 소리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등 공공과 도 고고도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때 금위군 수령이 궁으로 들어왔다.

“예왕비마마, 고가 잔당은 성 밖으로 물러갔고 성안 역적은 전멸했습니다. 성 수비군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위기는 지나갔다. 나담이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한밤 내내 구연환을 만지작거렸으나 풀지 못했다.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구연환에 집중하지 못했으니 풀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나담은 하품을 했다. 기뻤지만 피곤함을 숨길 수 없었다.

“심묘야, 위기는 끝났어. 난 너와 밤을 함께했으니 아주 조금은 공로가 있는 셈이야.”

심묘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나담보다 상태가 나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해도 그리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모두 수고했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모두 공로를 따져 상을 줄 것이다.”

금위군 수령이 고개를 숙였다.

“예왕비마마도 수고하셨습니다.”

턱 밑에 칼을 들이대는 듯 긴장된 상황에서 차분하고 침착하게 한밤 동안 앉아 있었다는 자체가 병사들과 함께 싸운 것과 같았다. 여인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니 탄복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심묘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보았다. 그녀가 농서성을 이끌고 백성들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성은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었다. 상소를 보던 배랑도 고개를 들어 심묘를 바라보았다. 살짝 웃은 그의 얼굴에 홀가분한 기색이 드러났다.

도 고고는 심묘의 몸을 걱정했다.

“상황이 진정됐으니 마마께서는 먼저 휴식하시지요. 한밤을 앉아 계셨고 잠도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데 마마께서는 회임하셨잖습니까?”

도 고고의 부축을 받은 심묘는 한 걸음을 떼었다. 순간, 배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를 본 나담이 심묘에게 다가왔다.

“오래 앉아 있어 몸이 굳었나 봐. 내가 주물러줄게. 다리에 쥐가 오면 걷기 어렵지.”

심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니야. 산파를 불러줘.”

도 고고와 나담이 동시에 멍해졌다. 정신을 차린 도 고고가 즉시 반응했다. 도 고고의 목소리는 흥분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다급했다.

“빨리! 빨리 산파를 불러오라!”

* * *

농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산파가 달려왔다. 도 고고는 안전을 위해 산파 두 명을 데려왔다. 아무리 난산이라도 그녀들이 맡으면 작은 일거리가 된다고 자신할 만큼 노련한 이들이었다.

우두머리 격인 이 산파가 말했다.

“예왕비마마, 긴장하지 마십시오. 아이를 처음 낳을 땐 힘들지만 두 번째 낳을 땐 익숙해집니다. 아주 원활하지요.”

이 산파보다 나이가 많은 류 산파가 그녀를 욕했다.

“귀인 앞에서 무슨 헛소리야.”

류 산파는 심묘를 바라보았다.

“예왕비마마는 매우 침착하시네요. 아이를 여럿 받아 보았으나 마마처럼 조용한 산모는 처음 봅니다.”

심묘는 부축을 받아 침상에 누웠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 일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 두렵고 당혹스러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이 낳는 일이 처음이 아니라고 여길 뻔했다. 하지만 둘째를 낳는 여인이라도 이렇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심묘의 속마음은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일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때 부수의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고생 속에 불안감을 안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 이 아이는 사람들의 기대를 가득 받고 세상에 나올 것이다. 사경행과 자신을 비롯해 장군부 사람들이며 모두가 아이를 보물처럼 대할 것이다. 하지만 진귀한 것일수록 부서질까 더욱 두려운 법이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어지러웠다. 심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깊게 내뱉었다. 그녀는 머릿속 무질서한 생각들을 내버리려고 노력했다. 이 산파가 설탕물과 달걀을 섞은 그릇을 심묘에게 건넸다.

“예왕비마마, 먼저 뭘 좀 드세요. 드셔야 힘을 써요. 아이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심묘는 식욕이 없으나 마지못해 한 그릇을 다 마셨다. 류 산파가 또다시 감탄했다.

“예왕비마마는 조금도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네요. 부귀한 집안 부인들은 성격이 여리거나 까탈스럽답니다. 이런 것들은 속이 불편하다며 먹기 싫어했어요. 하지만 아이를 낳을 때 힘이 없어 괴로운 건 그녀들이지요. 예왕비마마는 잘하시니 아이도 아주 순조롭게 낳으실 겁니다.”

산파들은 심묘가 온화하고, 자신들의 출신을 트집 잡지 않자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녀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도록 이야기를 거는 중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분만은 시작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 가슴이 두근거려. 심묘가 남자아이를 낳을지 여자아이를 낳을지 너무 궁금했는데 이제 알게 되겠네.”

“황자든 공주든 예왕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매우 기뻐하시고 아껴주실 겁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담의 말에 도 고고가 웃으며 덧붙였다. 등 공공도 긴장감을 드러냈다.

“황실의 첫 번째 후손입니다. 하늘에 계신 태후마마, 폐하, 황후마마 모두 기뻐하실 일이지요.”

예왕부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줄곧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모경의 얼굴도 새빨개졌다. 종양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자리에 멈추어 있지를 못했다.

“철의와 내기를 했는데, 나는 공주마마에 걸었어. 재산 전부를 걸었는데, 잃으면 큰일 날 거야.”

경칩이 코웃음을 쳤다.

“황자 전하가 태어날 거예요.”

종양은 경칩을 바라보았다.

“헤, 뭘 믿고 황자 전하래. 내가 볼 때 공주마마야.”

“황자, 황자 전하라구요!”

경칩은 종양에게 쏘아붙였다. 곡우가 원만히 수습하려 나섰다.

“그만 떠들어. 소란피우지 말고. 당숙은 어디 계셔?”

당숙은 한쪽 구석에서 작은 목소리로 기도드리고 있었다.

“사가 조상님께서 보호하사 예왕비마마 모자가 평안하고 모녀가 평안하길, 모두 평안하길…….”

오전부터 오후까지 기다린 끝에 저녁이 되어서야 분만이 시작되었다. 산파들은 궁녀들에게 맑은 물, 수건, 깨끗한 가위 등 각종 물건을 준비해오라고 시켰다. 나담도 들어가 보려 했으나, 도 고고가 말렸다. 도 고고와 몇몇 궁녀, 경칩과 곡우가 들어갔다.

심묘는 침상 위에서 낮게 신음했다. 가능한 한 소리를 참으려 했으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다. 누군가가 가위로 복부를 휘젓는 듯했다.

“예왕비마마! 더 힘을 주세요! 기운을 써요! 아기씨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시간이 1년 같았다. 궁녀들이 수시로 은 대야를 들고 오갔다. 대야 안의 핏물은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나담은 곁의 궁녀를 붙잡고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요? 어째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요?”

궁녀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여자는 아이를 낳을 때 모두 피를 흘립니다. 겁내지 마세요.”

배랑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생의 부수의는 부명과 완유의 출생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시 부수의 곁을 지나가던 자신에게 대신 가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심묘는 전생에 아이를 낳을 때도 자신과 함께였다. 이번 생 역시 자신이 함께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좋았다. 누구나 곁에 여러 사람이 함께해줄수록 쉽게 고난을 이겨내는 법이니까. 이럴 때, 그녀를 지지해주는 동무는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더 좋았다.

시간은 유달리 길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을 때, 산파가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다! 황자 전하셔! 아, 한 분 더 계셔!”

“쌍둥이! 쌍둥이! 예왕비마마, 복이 있으십니다!”

곧이어 안에서 응애 소리가 들렸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매우 우렁찼다. 사람들은 이 기쁜 일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담은 흥분해서 거의 기절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산파의 놀란 외침이 들렸다.

“예왕비마마, 버티세요! 잠드시면 안 됩니다. 잠드시면 안 돼요!”

배랑의 심장이 팽팽해졌다. 도 고고의 처절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왕비마마, 견디세요!”

성격이 급한 나담은 두려움을 뿌리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배랑도 망설일 때, 도 고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배 선생! 배 선생 들어오세요!”

배랑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묘는 이불을 덮고 있었다. 안색이 대단히 창백했다. 그녀가 류 산파와 이 산파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네, 아이가 괜찮으면 됐네.”

“예왕비마마…….”

두 산파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해?”

나담은 울먹거렸다.

“마마께서 허약한 몸으로 아기씨들을 낳으시느라 지치신 겁니다. 태아가 불안정하게 자리를 잡았고, 너무 많은 피를 흘리셔서…….”

류 산파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 나, 난 안 될 것 같아. 나담 언니, 부모님과 오라버니를 만나면 노년까지 모시지 못해서 불효했다고 전해줘.”

나담은 기를 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심묘야, 그런 말 하지 마. 허튼소리 하지 마. 넌 괜찮을 거야. 기쁜 얼굴로 고모와 고모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불효니 뭐니 이런 말은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나담은 이미 울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심묘는 유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곁에 서 있는 배랑을 바라보았다. 배랑은 얼떨떨했다. 그의 입가는 떨리고 있었다. 평소 평온하고 태연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마는 버티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마마께 빚진 것은 아직 다 갚지 못했습니다. 마마는 장수하시고 건강하며 근심 없으셔야 합니다.”

배랑은 그의 말대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다.

“배 선생은 내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와, 나와 약속해줘요. 내 아이들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들이 건강히 자랄 수 있도록 지켜줘요.”

심묘는 힘들게 숨을 헐떡였다. 모든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사경행에게 말해줘요.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줄곧 날 보호해주고 감싸주어서 고맙다고. 그와 부부라서, 난, 나는 매우 기뻐…….”

“예왕비마마!”

도 고고가 외쳤다.

“내 아이들을 보여줘…….”

두 산파는 얼른 강보로 감싼 아이들을 심묘에게 보여주었다. 눈물이 고인 도 고고가 말했다.

“두 분 모두 아주 건강합니다.”

심묘의 시선이 두 아이에게 닿았다. 그녀는 힘겹게 손을 뻗어 두 아이의 얼굴을 더듬었다.

“이 두 아이가 자라면 아주 잘생기고 예쁠 거야. 사경행을 닮든, 나를 닮든……. 나와 사경행은 고생을 많이 했으니 하늘이 좋은 분이라면 반드시 이 아이들을 고생시키지 않을 거야.”

도 고고는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나담이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난 너희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단다…….”

심묘의 시선이 두 아이에게 머물렀다. 그녀의 눈 속에 깊은 그리움이 스쳤다. 두 어린아이 얼굴을 보며 멀리 천길 밖의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 * *

천 리 밖, 큰 장막 안. 젊은 장군은 가슴이 갑자기 아팠다. 아픔은 가슴부터 몸의 모든 곳으로 퍼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가 한쪽 팔로 탁자를 짚고 크게 숨을 헐떡였다. 놀란 고양이 얼른 그를 진맥했다.

“문제도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걱정 어린 고양의 말에 사경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순양을 공격한다.”

“이렇게 갑자기 결정하는 겐가?”

고양이 놀라 되물었으나 사경행은 몸을 돌려 바깥으로 걸어갔다.

“속전속결.”

* * *

대량은 진국 순양을 공격해 점령했다. 드디어 길게 이어진 삼국의 세상이 젊은 예왕의 손에 모두 들어온 것이다. 여러 영웅들이 천하를 쟁탈했으나 웅대한 천하는 결국 대량의 손에 떨어졌다. 승리하면 왕이 되고 패하면 도적이 되는 법이다. 싸움에서 패한 진국 황제는 도망쳤지만 결국 섬멸당했다. 세상에는 대량 황제만 있었다. 명제 황제와 진국 황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했다. 나라를 잃은 국민은 당장은 슬프고 비통할 테지만, 새로운 군주가 이전 군주보다 어질고 너그럽다면 곧 새로운 군주를 더욱 좋아할 것이다. 백성은 바보가 아니었다. 명군은 어디서든 지지를 받기 마련이었다.

대량의 장병이 고향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은 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군대에 입대한 장병이 있는 집안사람들의 얼굴에는 빛이 났다. 전쟁터에서 죽은 장병이 있는 집안사람들은 애석해했지만 긍지를 느꼈다. 농서성의 백성들은 뛰어다니며 승리한 대군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궁중은 쓸쓸했다. 기쁨의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유달리 태양빛이 강렬했다. 나담은 뜰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따뜻했다. 뜰 바닥에는 온통 책이 깔려 있었다. 경칩과 곡우가 책을 말리고 있었다. 나담은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예전에 소춘성에 있을 때, 심묘는 늘 이렇게 책을 말렸어요. 책이 망가지지 말라고. 왜 그렇게 책을 말리는 것을 중요시하나 싶어 이상하게 바라보았지요. 지금 내가 심묘를 대신해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녀 옆에 서 있는 배랑은 말이 없었다. 그가 걸친 청색 장포는 여전히 단정하건만, 얼굴은 초췌하고 나이 들어 보였다. 심묘의 분부가 없기에 그는 상소를 볼 수 없었다. 별수 없이 매일 책만 들여다봤지만,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런 날들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때 도 고고가 두 아이를 안고 나왔다. 나담이 얼른 일어나 한 명을 넘겨받았다.

“작은 황자님들은 매우 건강하십니다. 유모가 말하길 밤에도 매우 순해 소란피운 적 없답니다.”

도 고고가 웃으며 말했다. 나담의 얼굴 위에도 살짝 웃음기가 보였다.

“이렇게 영리하다니, 심묘의 성격을 닮았나 보네요.”

나담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배랑은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어두웠다.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조금도 구별이 안 가. 너무 똑같이 생겼어.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 어쩌지?”

나담은 화제를 바꿨다. 도 고고가 미소 지었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옷을 구별해 입히면 구분할 수 있지요. 게다가 아이들은 성장하며 성격이 달라질 테니 당연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나담은 여전히 고민했다.

“그럼 호칭은 어떻게 해?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심묘가 아이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못해서…….”

쪼그리고 앉아 고민하던 나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늘 얘기하지 말자 해놓고 얘기하게 되네. 관두자.”

도 고고가 나담을 위로하려 할 때, 곡우와 경칩이 급히 들어왔다.

“예왕 전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뭐라고?”

배랑과 나담은 멍해졌다. 대량 군대는 적어도 한 달은 더 있어야 농서성으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 곡우가 작게 말했다.

“예왕 전하께서 몇 명만 이끌고 먼저 서둘러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잠시 후 배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봅시다.”

사경행은 큰 걸음으로 궁에 들어왔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변했다. 영락제와 현덕 황후가 세상을 떠난 커다란 궁전은 전반적으로 쓸쓸했다. 곁의 등 공공이 미소 지었다.

“전하, 먼저 두 황자님을 보러 가시지요. 도 고고와 나 소저가 함께 있습니다.”

사경행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묘는?”

그때, 아이들을 안은 나담과 도 고고가 대청 뒤편 병풍을 돌아 걸어왔다. 뒤따라 배랑도 보였다. 포대기 안 아기들은 방금 잠에서 깬 듯했다. 그들은 활발하게 작은 팔을 휘둘렀다. 포동포동하고 작은 손이 태양 아래 유달리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사경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심묘는?”

그가 느리게 다시 물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배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마마를 보십시오.”

* * *

고담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부는 마마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마마의 신체는 기름이 다 된 등과 같으나 마마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십니다. 미련이 남으신 듯, 최후의 숨결을 놓지 않고 계시지요. 그 최후 숨결에 기대 금침으로 혈을 봉해 마마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목숨만 구했을 뿐입니다.”

“조부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고양이 물었다. 그는 집을 떠나 고가의 신념과 정반대인 벼슬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오래도록 고가와 왕래하지 않았다. 그런 고양으로부터 ‘조부님’ 소리를 듣자 고담은 몸이 조금 떨렸다.

“마마는 영원히 잠들어 계실 게다. 호흡을 하고 맥박이 있으나 눈뜰 방법이 없지. 깨어나셔도…… 네가 치료한 엽 공자처럼 어떤 모습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고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깨어난 심묘가 엽홍광처럼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오래도록 잠들어 있을 그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사경행을 바라보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건…….”

계우서는 ‘산송장’이라는 세 글자를 목으로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 모두 고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고담이 사경행에게 물었다.

“전하, 기다리기를 원하십니까?”

“얼마나 오래 기다리든 상관없다. 교교는 교교의 약속을 이행했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교교를 평생 기다리면 또 어떠하냐? 교교의 목숨은 나의 것이니, 내 승낙 없이는 염라대왕도 가져갈 수 없다.”

사경행의 얼굴은 차갑고 엄숙했다. 영락제의 얼음 같은 모습을 닮아, 여전히 오만하고 냉소적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나담이 그 적막을 깼다.

“심묘가 쉬도록 나가요. 지난 1년간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

눈을 감은 심묘는 매우 편안하게 잠든 것 같았다.

* * *

사경행은 아이들에게 아주 잘했다. 그를 따른 지 오래된 수하와 친구들은 인내심 있게 아이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놀라 턱이 빠질 뻔했다. 젊은 아버지들은 아이가 태어났음을 기뻐하지만, 아이 돌보기는 영 엉성하고 세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사경행은 ‘부드럽고 참을성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경행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매일 시간을 내어 두 아이와 함께 지냈다. 직접 대소변을 치우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고, 일의 대소를 논하지 않고 유모의 일 처리에도 참견했다. 두 아이는 이름 없이 아명만 있었는데, 사경행이 지은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초일’과 ‘십오’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아명을 너무 마음대로 지었다고 싫어했으나 사경행은 그럴듯하게 아명의 뜻을 설명했다.

“초일과 십오는 달빛이 가장 밝을 때야. 그리고 내 아들 아명을 내가 짓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야. 꺼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그의 말처럼 무엇도 상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의 아명에 상관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가 아이를 돌보는 것에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참견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영락제가 황위를 물려준다는 유조를 남겼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천하는 태평하니 사경행은 황제로 즉위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가 등극하고 나면 황후 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었다.

심묘는 지금 누워 있었다. 평생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깨어나도 바보일 수도 있었다. 역대 황후 중 이런 황후는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월은 너무 길고,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었다. 사경행은 지금 심묘에게 지조를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담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심묘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억울함을 당하게 됐으니 당연히 몹시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경행을 욕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심가군은 대량 군대와 함께 돌아오고 있기에 아직 농서성에 도착하지 않았다. 장군부 사람들도 당연히 심묘의 일도 알지 못했다. 자신은 농서성에 있는 심묘의 유일한 가족이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1년간 심묘가 한 고생을 전부 다 털어놓았다. 임산부인 심묘가 그를 대신해 농서성을 지키고, 황궁과 대량 황실의 위엄을 지켰다고 전했다. 매우 위험한 시기, 위험을 분명히 알면서도 심묘는 이를 감당해냈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도 모두 감내했다고 강조했다.

사경행은 침묵하며 나담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나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예상외의 반응에 나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겨우 대꾸했다.

“제부가 알면 됐어요.”

나담은 지금 기분을 형용할 수 없었다. 가슴이 꽉 막혀서 뻑뻑한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달리고 달리던 그녀는 어떤 사람과 부딪쳤다. 고양이었다. 놀란 고양이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나담은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하고 떠났다.

사경행은 연못가로 걸었다. 차를 마시려던 그는 등 공공을 불러 술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가 있는 연못가의 정자는 현덕 황후와 영락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술을 마신 곳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황제와 황후가 부부의 정이 깊은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하지만 사경행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은 영락제보다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적어도 심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살아 있으면 깨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심묘가 평생 깨어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재미없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곁의 사람을 잃고 평생을 쓸쓸히 사는 고통을 황제의 자리 따위가 보상해줄 리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배랑이었다. 그는 마음씨가 담백하고 겸손하며 자신에게 엄격하기에 평생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가 떠올랐다. 대나무숲에서 세속을 떠나 차를 마시며 금을 타는 도도한 문인 같았다. 그런 배랑이 사경행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에 술을 따랐다. 옥으로 만든 술잔이 달빛 아래 작게 빛났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마는 빛을 품었다.

“내일이면 등극하시는군요. 경하드립니다.”

배랑의 말에 사경행이 입술을 치켜들고 웃었지만,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예왕비마마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배랑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경행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배랑을 주시했다.

“배 선생은 예왕비에게 아주 관심이 많군?”

배랑은 사경행의 시선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예전에 예왕비마마와 사제간이었지요. 후에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고난을 함께한 친구였습니다. 전 무엇을 바꾸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사경행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담담히 물었다.

“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기느냐?”

“예왕비마마는 황후 자리나 어떠한 권세 있는 위치에 연연하지 않으셨지요. 오히려 번잡하다고 이야기하셨지요. 하지만 마마가 이를 짊어지셔야 한다면 마마는 책임지실 것입니다. 마마는 결코 세상 사람들에게 자비를 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저 마마께 중요한 사람을 위해 책임을 지시겠지요. 마마께 중요한 사람은 심가 가족, 나가 가족, 두 황자님, 그리고 전하십니다. 예왕비마마의 일생은 유달리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은 마마에게 매우 엄하고 가혹해서, 마마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좋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감히 지나친 바람은 갖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유일한 바람이 있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길 바라는 것이라면서요.”

사경행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배랑이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마마는 지금까지 좋은 시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마마는 온갖 수를 다 짜내야만 얻을 수 있었지요. 아주 작은 희망도 마마는 몹시 갖기 힘드셨지요. 고진감래의 상황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셨는데, 이젠 깊이 잠드셨으니 확실히 하늘은 마마에게 불공평합니다. 게다가 마마는 지금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으니 더욱 안쓰럽습니다.”

배랑은 술잔을 쥐고 살짝 웃었다.

“예왕 전하, 지금 대업은 이루어졌고 등극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강산을 소유했고 어쩌면 장래에 미인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나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후회하게 되면 일생을 되돌릴 기회가 없으니 매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사경행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했다. 곧 그가 배랑을 보고 물었다.

“후회한 적 있는가?”

“있지요. 마지막에 아주 작게나마 만회를 하긴 했지만,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배랑의 탄식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침묵했다. 그때, 도 고고가 급히 달려왔다. 사경행이 배랑과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본 그녀는 곤란한 듯했다.

“전하, 두 황자께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십니다. 유모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가셔서 보시지요.”

초일과 십오는 매일 사경행이 돌봐주었다. 성격은 사경행과 똑같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달래도 소용없었고 사경행이 달래야만 울음을 그쳤다. 말하자니 기이했다. 심묘는 매우 조용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인데, 두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귀찮게 달라붙었다. 이전에는 괜찮았으나 사경행이 돌아오자 성질을 부렸다. 다른 아버지였다면 기겁해서 도망칠 정도였지만, 다행히 사경행은 이런 아이들을 잘 돌보았다.

“내가 가서 보지.”

사경행이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배랑을 바라보았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였다. 충고도 고맙게 받지.”

그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다 마셨다.

“난 지금까지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후회시킬 일도 하지 않지. 걱정이 지나쳐.”

사경행과 도 고고가 떠났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배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자조하듯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나친 걱정이라, 정말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으니 얄밉습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씁쓸해졌다.

* * *

사경행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날, 태양은 밝고 바람이 따듯했다. 그는 효경제가 되었다.

우뚝 솟은 금란전 위, 성난 용이 몸을 뒤집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문무백관과 조정 신하가 모두 모여 있었다. 젊은 황제는 용포를 입고 있었다. 금실로 수놓은 용 무늬는 용포의 가장자리까지 정교하고 화려했다. 위풍당당하며 금빛 찬란해 눈이 부셨다. 반듯한 관모를 쓴 그는 준수하고 빼어났다. 그러나 냉소적인 아름다운 눈에는 가을의 차가운 바람처럼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조정에는 간교한 꾀를 써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감히 이 젊은 황제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대량 역사 이래 가장 어린 나이에 등극했으나 전쟁터에서 진국과 명제를 소탕한 명장이기도 했다. 황위를 물려준다는 조서는 이미 선포되었기에 그가 옥새를 손에 쥐기만 하면 대량 조정과 천하는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터였다. 예를 올린 그는 신하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조정 신하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후를 세우라.”

모두 심묘가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효경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젊은 황제가 심묘를 보물처럼 껴안고 와 자리에 앉히는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는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고양, 계우서를 비롯한 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의 신하들은 대경실색했다. 누군가 앞으로 나가 효경제에게 고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효경제가 고개를 돌려 그 신하를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에 안 되지?”

“……마마는 아직 잠들어 계십니다. 황후마마 자리에 어떻게 인사불성의 사람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어느 나라에서든, 산송장 황후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효경제는 일부러 그를 놀리듯 말했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짐은 할 것이다. 어떠한가?”

이 늙은 신하는 영락제가 살아 있을 때 매우 존중받은 신하였다. 그는 소신을 내려놓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마마를 위해 영원히 황후마마의 자리를 비워두려 하십니까?”

신하들이 수군거렸다. 깨어나지 않는 여인이 영원히 황후 자리를 지킨다면 장래 궁에 새로운 여인이 들어와도 누구도 영원히 황후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여인이 낳을 아이는 영원히 초일과 십오를 넘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효경제가 조용히 웃었다. 신하들은 멍해졌다. 처음 입을 연 늙은 신하도 허둥거렸다.

“황후 자리가 비어 있다니, 짐의 후궁에는 한 명의 여인만 있을 것이다. 어디 비어 있다는 말을 하느냐?”

효경제가 입을 열자 좌중 모든 사람이 놀랐다.

“폐하…….”

늙은 신하가 더 말하려 했다.

“서애경, 짐은 그대 집안에 두 명의 손녀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 한창 좋은 나이지?”

신하는 놀라는 한편, 걱정이 되었지만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곧 사라졌다.

“짐이 그녀를 무관 송소장에게 시집 보낼까 하는데 어떠한가?”

효경제가 말한 송소장은 젊고 유망한 장수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전쟁터에서 한쪽 눈을 잃어 더는 전도유망하지 않았다. 서애경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짐은 그대의 견해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며 그대들의 꾸짖음을 들으러 온 것도 아니다. 짐은 그대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자리에 앉은 그는 신하들을 굽어보았다.

“짐은 천자의 주인이다. 짐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 하지만 짐의 후궁에 대해, 짐의 사적인 일을 통제하려 하면 짐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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