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번외 하나
최근 나담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가 사람들도 농서성으로 이사를 와서 이곳에 정착했지만, 심묘는 황후가 된 이후 예전처럼 한가하지 않았다. 초일과 십오를 돌봐야 했고, 후궁을 적절히 다스려야 했다. 나담은 대량 후궁에 심묘밖에 없는데 관리할 게 무엇이 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심묘가 바쁜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담은 무료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가로이 있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종일 노닐며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나담의 부모인 나연태와 마 씨는 불만스러웠다. 특히 마 씨는 나담과 마주치기만 하면 온종일 잔소리했다.
“너는 지금 나이가 적지 않아. 황자들도 한 살이 넘었어. 네가 노처녀가 된대도 상관할 수 없다만, 그렇다고 온종일 덜렁거리면 어쩌자는 것이냐?”
나담은 성가신 것이 싫었다. 그래서 먹고 자고 놀 때 혼자여도 상관없었다. 혼인을 하면 귀찮은 게 많았다. 이것저것 신경 쓰고 남편의 마음도 생각해야 했다. 남편만 신경 쓰면 그나마 다행이지, 여인들이 그득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후원이 되지 않게 하려면 자식을 많이 낳아야 했다. 아이를 낳으면 육아도 해야 했다. 청춘은 순간인데 이런 일에 청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럴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이름난 산과 큰 내를 돌아보는 게 훨씬 적성에 맞다고 여겼다.
사실 나가도 고루한 풍습에 얽매인 집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에는 딸의 출가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는 늘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법. 게다가 평소 뭐든지 건성건성하는 나담은 나이를 먹도록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거리의 연극배우같이 준수하게 생긴 사람들을 남녀 구분 없이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으나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화초나 풀을 좋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담 스스로 애정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담아, 너 솔직히 말해보거라. 정말 사모하는 남자가 없느냐?”
질문을 받은 나담은 귀찮은 듯 말했다.
“어머니, 내가 어디 마음 준 남자가 있을라구요?”
“지금 나천도 좋아하는 아가씨가 있단다. 나천은 너보다 어리잖느냐. 이 세상에 좋은 남자도 많은데 넌 왜 한 명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니?”
낙담한 마 씨는 나천까지 끌어들였다. 나담이 입을 삐죽였다.
“많으면 뭐 해요. 내가 만나지 못했는데.”
마 씨는 탁자를 팍 쳤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게 둘 수 없구나. 지금 교교는 황후마마니 청년 준걸을 몇 명 알 게다. 내가 교교를 만나 네가 맞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해야겠다.”
나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마 씨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진심이세요? 내가 시집을 못 갈 것도 아닌데.”
“이대로 뒀다간 노는 데만 계속 정신이 팔려 있을 게다. 안 돼. 넌 반드시 시집을 가야 해. 안 가면 내가 널 외출하게 가만 놔두는지 보거라.”
나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 씨는 문을 나섰다. 그녀는 나설안과 함께 입궁해 심묘를 찾았다. 심묘는 황후가 됐지만,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 앞에서 늘 지난날과 다름없이 온화했다. 나가 사람과 심가 사람이 보기에 그녀는 변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심묘와 담소를 나누던 마 씨는 나담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픈 듯했다. 그녀는 심묘에게 물었다.
“교교, 넌 평소 귀인을 많이 만나잖니. 혹시 나담과 맞선을 볼 사람이 없을까? 가세가 어떤지는 상관없어. 가장 중요한 건 인품이야. 품행이 바르기만 하면 돼. 그리고 나담은 단순하니 부에서 잔꾀 부리는 일을 몰라. 그러니 남자의 집에 엉망인 친척이 없으면 해. 아! 준수하게 생긴 공자들이 좋을 거야. 나담은 잘생긴 외모를 좋아하니 일단 잘생겨야 좋아할 거야.”
말을 하긴 했지만 마 씨는 몹시 부끄러웠다. 심묘가 의아한 시선으로 나설안을 한 번 보았다. 나설안도 마 씨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교교야. 네가 나담을 위해 훌륭한 남편감을 좀 찾아보렴.”
심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맞선 상대를 찾는 것은 당연히 문제없지만……. 나담 언니가 정말로 사모하는 사람이 없다던가요?”
“그 아이 성격에 참으로 그걸 깨닫겠다. 깨닫길 기다리자니 불가능한 일이야. 나담이 교교 네 반만이라도 이치를 알면 나도 이렇게 마음 졸이지 않을 거야.”
마 씨가 손을 휘저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묘는 영웅을 알아보는 혜안이 있어서 세상에 드문 절세남자인 효경제에게 마음을 정해 미담을 만들었다. 게다가 효경제도 얼마나 일편단심인지 일국의 군주인데도 후궁에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았다. 세상에 많은 여인이 심묘를 흠모할 터였다.
나담은 이런 심묘에 비할 수도 없었다. 마 씨는 착잡했다. 이렇게 나이를 먹도록 절세남자를 좋아하기는커녕 보통 남자를 만날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마 씨와 나연태는 이전 딸에게 혼담을 꺼내러 오는 사람 때문에 문지방이 부서지면 어쩌나 즐거운 상상을 했었다. 나부에 딸은 하나뿐인데 아들이 있는 모든 집안에서 구혼하러 온다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부의 문지방은 아주 튼튼했다. 모기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 마 씨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담 언니도 맞선 보는 데 동의했나요?”
심묘가 물었다.
“그 애가 동의하겠니? 그렇지만 더는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어. 교교, 너는 나담과 사이가 좋으니 번거롭겠지만 시간 날 때 그 애를 좀 타일러주렴. 아가씨가 종일 청루를 돌아다니다니 어찌 된 일이야. 게다가 농서성의 도박 골목도 잘 알고 있으니. 정말 가문의 골칫거리가 따로 없단다.”
시끌벅적한 나담은 규칙과 예의를 잘 지키지 않았다. 말도 대범하게 뱉었기에 꾸중도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기죽는 법이 없었다.
“좋아요. 언니를 위해 준걸들을 찾아볼게요. 하지만 두 사람이 이뤄지는 것은 나담 언니에게 달렸어요.”
심묘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그럼. 고맙구나. 교교야.”
마 씨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 * *
밤중, 심묘는 긴 두루마리를 들고 계속 넘겨보고 있었다. 그래서 밤이 깊은데도 잠들지 못했다. 상소를 다 처리한 사경행이 침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두루마리를 보고 있었다.
“먼저 자라고 하지 않았더냐?”
“다 보지 못한 게 있어서요.”
심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두루마리를 향하고 있었다. 사경행이 그 두루마리를 빼앗았다. 두루마리 위에는 남자의 작은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 남자의 이름과 성, 가세, 관직 심지어 좋아하는 것과 장기가 적혀 있었다. 그 두루마리를 살펴본 사경행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건 무엇 때문에 보는 거지?”
심묘는 그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도로 찾아왔다.
“비켜요. 이모가 나담 언니를 위해 맞선볼 만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방해하지 말아요.”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담? 나담이 시집을 간다고?”
“이모가 아주 마음을 쓰고 계세요. 고양은 대체 무슨 생각이래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심묘가 사경행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라니?”
사경행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심묘가 핀잔하듯 그를 흘겨보았다.
“나담 언니 말이에요. 내가 볼 때, 고양이 나담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 같아서요. 나담 언니가 자기 감정을 깨닫길 기다린다면 평생을 기다려도 안 될 거예요. 나담 언니는 눈치채지 못하니 그렇다 치고, 고양은 영리한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끌까요? 의도가 있는 걸까요?”
사경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깊이 생각한 그는 입을 열었다.
“고양이 나담을 좋아한다고?”
심묘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찔렀다.
“당신, 눈 삐었어요?”
“내가 고양 생각을 어찌 알아?”
사경행은 억울해했다. 그는 조정 일을 잘 파악하고 조리 정연하게 말했으나 친구와 관련된 일에는 대단히 둔했다. 심묘는 고양에 대해 사경행에게 물어보길 포기했다. 여태까지 고양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면 지금 와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그때, 사경행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양은 똑똑한 사람이야. 똑똑해도 실수할 때가 있지.”
심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말은 고양이 자신의 마음을 알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담 언니가 말하길 기다린다는 거지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부군처럼 환경에 잘 순응하지 않지.”
사경행이 입꼬리를 올렸다. 심묘는 그를 흘겨보았다.
“왜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낯짝이 두껍지 않다고 말하지 않구요?”
사경행의 안색이 푸른색으로 변할 때, 심묘의 말이 울렸다.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총명하면 오히려 실수할 수 있지요. 고양은 무엇이든 손안에 쥐려고 해요. 나담 언니가 깨닫길 기다리다가 실수할까 걱정이네요.”
사경행이 생각에 잠긴 채 심묘에게 물었다.
“뭘 하려고?”
심묘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연히 나담 언니를 도울 거예요.”
그녀는 사경행에게 다가서서 으름장을 놨다.
“고양에게 말하지 말아요!”
고양은 사경행의 사람이니 그가 우연히 한두 마디 흘리면 일이 다 틀어질 터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른하게 웃었다.
“그건 오늘밤 부인의 태도를 보고.”
* * *
심묘는 다음 날 책자 한 권을 만들었다. 책자에는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나설안에게 전해 나부로 책자를 보냈다. 감격한 마 씨는 심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겠다고 채비를 하려 했지만 나설안이 그녀를 만류했다.
“아직 나담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르잖아요. 잘되면 그때 이야기해요.”
하지만 마 씨는 심묘가 고른 사람이니 어련할까 싶었다. 나수와 나연태도 함께 와서 책자를 보고는 흡족하다는 듯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연태는 대량에서 관직을 맡고 있기에 책자에 소개된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묘가 고른 세 사람은 모두 청년 준걸이었다. 가세가 좋고 출신이 깨끗했다. 게다가 품성이 아주 단정했다.
나담은 마 씨가 그저 말만 하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마 씨가 강경해도 심묘는 자신의 편을 들어줄 테니, 맞선을 보게 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심묘는 마 씨에게 책자를 보냈다. 방 안에 앉은 나담은 거울을 향해 심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탄식했다. 지금 자신은 자금도 끊기고 외출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얌전히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생활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키지 않아 미적거렸다.
하지만 마 씨도 강경하게 나오지만은 않았다. 나담이 강압적으로 대할수록 맞부딪치는 성격이란 걸 모친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 씨는 나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는 일은 불효라 여긴 나담은 결국 세 사람을 만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이제 별수 없이 세 공자를 한 명씩 만나러 가야 했다.
첫 번째 공자는 내각 대학사 가문의 공자였다. 정치적으로 재능이 뛰어나고 고상하며 예의 발랐다. 하지만 나담은 그와 만나는 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공자를 만나는 내내 반쯤 졸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마 씨에게 이 사람과 살면 재미가 없어서 얼마 가지 못해 바람이 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놀란 마 씨는 바로 두 번째 공자를 소개했다.
두 번째 공자는 무장으로, 예비 부장이었다. 지금은 어리지만 몇 년 지나면 더욱 전도유망해질 것이라 장담했다. 이 공자는 나이는 어려도 사람을 대하는 부분은 노련했으며, 출중하게 생겼으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나담은 이 사람과 혼인하면 밤중에 베갯머리에서 죽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정도로 공자의 인상이 흉악하다고 말이다.
마 씨는 그 말을 듣고 매일 건성건성 놀기나 하는 나담이 무장과 혼인한 뒤 다툴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약 남편의 성격도 만만치 않아서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생활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마음속에서 두 번째 공자를 또 지웠다.
세 번째 날,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중승(中丞) 가문의 작은 공자인 하 공자였다. 하 공자는 올해 약관으로 문관이지만 무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셈이었다. 나담을 만난 그는 그녀의 허리에 달린 작은 검을 칭찬했다. 그 검은 나담이 거금을 들여 구입한 것으로, 보기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나 예리한 검이었다. 보통 사람은 그 검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하 공자는 첫눈에 좋은 검임을 알아보았다.
기분이 좋아진 나담은 하 공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얘기를 오래 나누었다. 그는 얼굴이 준수하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숙했을 뿐 아니라 아주 많은 곳을 가보아 견문도 넓었다. 그는 자신이 가본 지방의 신기한 일들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담은 이야기를 듣느라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높은 학식과 경륜이 있으나 뽐내지 않고 어렵고 모호한 말 대신 나담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재미나게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진진해서 두 사람은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름다운 데다가 재미있기까지 한 사람이라니, 나담은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앞으로도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즐거운 하루였다. 하 공자도 나담이 마음에 든 듯했다. 두 사람은 내일도 만나기로 했다. 나담이 부로 돌아오자마자 마 씨가 캐물었다.
“그 하 공자는 어떠하더냐?”
“좋아요. 친구 하기 아주 제격이에요.”
마 씨와 나연태는 기쁨에 겨워 울었다. 나담은 오로지 호감만으로 사람을 평가했다.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나담의 측근 여종에게서 두 사람이 매우 즐겁게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들은 마 씨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밤중에 마 씨와 나연태가 이 일을 이야기했다.
“우리, 하부에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 부인에게 서신을 보내 후일 이야기를 나눌게요.”
“뭐가 급하오? 아직 어찌 될지 모르오.”
나연태의 말에 마 씨가 탄식했다.
“하긴 그래요. 나천은 나도 마음을 쓰지 않아요. 마음이 쓰이는 건 나담의 혼사예요. 사실 난 그 고 공자를 좋게 봤어요. 그도 나담을 좋아하는 듯 보였는데…….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착각했나 봐요.”
마 씨는 내색은 안 했지만, 고양을 좋게 보고 있었다. 준수한 데다 자신의 부를 만들어 가족들과 따로 지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담이 그에게 시집간다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주모로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인들만 잘 관리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고양은 어떠한 뜻도 보이지 않았다. 대량의 세가 출신이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가 아무리 좋은 남편감이라도 딸을 좋아하지 않은 것 같으니 마 씨도 마음을 접었다. 아쉽긴 했지만, 딸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없으리라고는 걱정하지 않았다.
나담은 턱을 괴고 있었다. 그녀도 고양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양과 못 만난 지도 꽤 되었다. 고양은 고가의 부에서 살지 않으나 족보에는 다시 들어갔다. 고담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일이 많아진 고양은 나담을 찾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한 달 전이었다. 나담은 마음이 맞는 친구를 전처럼 자주 볼 수 없어 적잖이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하 공자가 그 자리를 대신해 줄 듯했다. 그는 입담이 좋고 어머니도 아주 좋아하는 눈치니 친구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오늘 하 공자와 찻집에서 만난 일을 누군가가 몰래 보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다음에 또 그를 언제 볼지 고민했다.
* * *
계우서는 앵무새의 먹이를 주고 있었다.
“오래도록 나담이 놀러 오지 않네. 근래 왜 오지 않는 걸까?”
“무슨 소리야?”
고양은 당황했다. 계우서가 갑자기 나담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반드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계우서는 낮게 읊조렸다.
“오늘 돌아오는 길에 나담과 어떤 남자가 함께 걷는 걸 봤어. 매우 즐거워 보이던데. 이제 다른 사람과 놀러 다니려는 건가?”
고양이 멍해졌다.
“뭐라고?”
다음 날, 나담은 하 공자를 또 만났다. 하 공자는 능력 있고 전도유망하다 들었는데, 자주 시간을 내 놀 수 있다니 의외이긴 했다. 어쨌든 하 공자는 그녀가 보지 못한 새로운 곳을 알려주었다. 나담은 매일 농서성의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녀서 농서성 지리를 거의 다 파악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작은 가게나 식당을 많이 알고 있었다. 덕분에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나담은 눈과 귀가 즐거웠다.
나담은 그간 위축된 기분에서 벗어나 농서성에 처음 온 사람처럼 물건도 잔뜩 샀다. 두 사람은 취향이 잘 맞아 볼수록 활력이 넘쳤다. 이날도 해가 질 때까지 놀고는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하 공자는 나담을 배웅해주었다.
고양은 나부에 도착했다. 마침 나천이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외출하려는 듯한 차림새였고, 이전의 감상적인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키가 많이 컸고 여린 얼굴에는 사내다운 의연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통통 튀는 성격은 여전히 같았다. 역시 남매다웠다. 고양을 발견한 나천이 먼저 외쳤다.
“고 의원!”
고양은 말문이 막혔다. 이 남매는 자신을 ‘의원’이라 부르길 좋아했다. 자기는 보통 의원이 아니라 관직에 있는 몸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고 의원, 누나를 찾아왔나요? 누나는 부에 없어요.”
고양은 당황했지만 얼굴에 굳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나천이 손을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 하 공자랑 나갔는데, 어디로 놀러 갔는지 찾을 수가 없네요.”
“하 공자라…….”
고양은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고양이 다시 입을 열기 전, 나천이 소리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돌아왔네요!”
나천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출중한 공자와 나담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따라오는 남종은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나담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공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신과 창장 남북 쪽을 여행하면 재미날 거예요!”
하 공자는 미소 지었다.
“그럴 수 있다면 아주 영광이겠네요.”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고양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누나! 고 의원이 찾아왔어!”
나천이 나담을 향해 외쳤다. 나담은 그제야 고양을 알아보았다.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간 고양은 나담을 향해 먼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문 속의 하 공자를 바라보았다. 하 공자는 준수하고 우아해 보였다. 나담과 즐겁게 이야기하던 하 공자는 고양을 보더니 그녀에게 상자를 건네며 나긋하게 말했다.
“손님이 오셨으니 방해하지 않겠소. 어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본 것인데 그대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소. 싫어하지 않길 바라오.”
그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고, 나담도 사양하지 않고 기뻐하며 받았다.
“고마워요. 마음에 들 게 분명해요. 평소에도 당신의 안목을 믿거든요.”
두 사람은 옆에 고양이 서 있는 걸 무시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고양은 이 상황에 점점 짜증이 났다. 담소를 한참 나누고서야 하 공자를 보낸 나담이 고양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고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 없으면 찾아올 수 없소?”
“그건 당연히 아니죠. 그렇지만 당신 아주 바쁜 거 아니었어요?”
그녀는 고양과 이야기하면서 하 공자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팔찌가 들어 있었다. 나담은 진주 비녀나 장신구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팔찌는 금으로 된 사슬에 섬세한 칼 모형이 장식되어 있었다.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칼 장식은 정교하고 귀여웠다. 나담은 팔찌가 마음에 들어 눈을 떼지 못했다. 고양은 더욱 불만스러워졌다.
“이렇게 된 거 나와 함께 갑시다.”
“내가 왜…….”
나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양은 나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도 무공을 익혔으나 고양에게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평소 겸손하고 단정해 보이던 고양이건만 무공은 약하지 않았다.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자 결국 나담은 고양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나천이 두 사람 뒤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빨리 돌아와, 누나!”
고양은 나담을 데리고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서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나담은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파 손목을 주무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당신, 미쳤어요?”
나담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던 고양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나는 아주 바빴는데, 그대도 한가하지 않았나 보오?”
“네?”
나담은 고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양의 말투는 괴상했다.
“하 공자와 노느라 아주 즐거운가 보오. 안 지 겨우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평소에도’라는 말을 쓰다니. 하 공자와 아주 친한가 보오? 그자를 아주 믿나 보오?”
고양의 언행은 오늘따라 몹시 해괴했다. 나담은 그가 평소와 다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해 당황스러웠다.
“어디 아파요? 그리고 내가 누구와 친한지 당신에게 이야기해야 해요? 오늘 왜 그래요? 약을 잘못 먹었어요? 당신 조부님이 꾸짖었나요?”
고양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내가 당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 노닐 생각이었소?”
나담은 추궁하는 듯한 고양의 태도에 영문을 알 수 없어 얼떨떨했다. 하지만 자신도 참을성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 너무 제멋대로네요. 당연히 다른 사람과 놀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방에서만 있으라고요? 답답해 죽을 거예요! 세상에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친한 벗을 많이 만들어야지요.”
“친한 벗? 당신은 맞선을 보며 미래의 부군을 찾기 시작하지 않았소?”
나담은 멍해졌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의 말은 그녀가 맞선을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신은 하 공자가 어떤 것 같소?”
고양은 평소의 온화한 말투로 물었다. 고양의 표정이 평소와 같아지자 나담은 드디어 그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고상한 서생 같지도 않고 거칠지도 않고 아주 재밌어요.”
“하 공자와 다시는 만나지 마시오.”
“왜 그러는 거예요? 어째서 계속 괴상한 말만 해요? 맞아요. 하 공자는 맞선 상대고 어머니가 먼저 내게 만나러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친구를 사귀든 부군을 고르든, 모두 내 일이에요.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설마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관여하려는 거예요?”
“맞소.”
고양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나담은 다시 멍해졌다.
“난 당신이 스스로 깨달을 거라 여겼소. 하지만 내가 틀렸구려. 당신의 아둔함에 감탄해 마지않소. 아니면 사실 당신은 너무나 똑똑해서 일부러 날 곤란하게 하는 거요?”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담은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자신보고 아둔하다고 욕한 것에만 신경이 쓰였다.
“당신이야말로 아둔하군요. 아둔할 뿐 아니라 당신은 생트집을 잡는 거예요. 난 하 공자와 노는 게 좋아요. 당신이 뭐라 하든 난 계속 만날 거예요! 어째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양이 그녀를 품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의 입술은 그처럼 따뜻했다. 단정했으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거절은 용납하지 않았다. 나담은 입술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아무리 남녀관계에 무지한 자신이라도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양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고양은 좋은 친구이며 자신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겉모습은 온화하고 말은 잘하지만, 사실은 뱃속 가득 고약한 심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군자였다.
지금 그 군자가 당당하게 자신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고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입술을 훔쳤다면 자신은 칼을 뽑아 그를 찔렀을 것이다. 그렇게 못하더라도 직전까지 때렸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왜? 고양이라서? 너무 친밀한 사이라서? 농서성으로 와서 고양과 함께 지냈던 오랜 시간, 그는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수시로 조금씩 스며들었다. 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자신 역시 너무 따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겁내지 않게 조금씩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 걸까. 지금 관례에 벗어난 일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다니.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나담은 오싹해졌다. 그녀를 본 고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말투도 부드러웠다.
“앞으로 하 공자는 만나지 마시오.”
나담은 부끄럽고 분했다.
“당신 왜…….”
“아직도 알아채지 못한 거라면 나는 정말 당신의 둔함이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것을 더는 의심하지 않을 거요.”
고양이 가볍게 웃었다. 나담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창백해졌다. 그리고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혹시 날 좋아해요?”
고양이 작게 “아이고!” 하고 외쳤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니까 이제야 아는군.”
나담은 억울했다. 그는 자신에게 혼담을 꺼내지도 않았고,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적은 편지를 주지도 않았다. 사경행이 심묘에게 하듯 달콤한 말을 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의 마음을 알아채느냐 말이다.
“처음에는 당신이 재미있어 그저 놀려주고 싶었소. 그 후, 당신과 다른 사람의 사이가 좋으면 내 마음이 불편했소. 사실 이렇게 내버려 둔다면 당신도 곧 깨달을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으면 평생이 걸려도 깨닫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게 됐소.”
고양이 나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나담에게 달아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 말 알겠소?”
그의 품에 갇힌 나담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어요.”
고양은 기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럼 됐소. 그럼 부로 돌아갑시다.”
“어느 부로 가는 거예요?”
“당연히 나부지. 장모님과 우리 혼사를 의논할 때요.”
고양은 구름처럼 담백하고 바람처럼 가볍게 웃었다. 정신을 차린 나담이 고양을 바라보았다.
“고양,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번외 둘
풍안녕은 늘 자신이 심구를 겁낸다고 여겼다. 아주 의아한 일이었다. 자신은 풍부의 천금 소저였다. 어려서부터 도도하고 까탈스러웠다. 풍 대인과 풍 부인의 총애를 독차지하다시피 했기에 부의 모든 사람은 늘 자신에게 양보하고 굽혔다. 그래서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으로 자랐다. 하지만 이 세상에 딱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도 딱 둘 있었다.
첫 번째 사람은 심묘였다. 풍안녕도 자신이 왜 심묘와 함께 노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머저리라는 좋지 않은 명성을 가졌던 심묘는 더 이상 우스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 광문당에서 함께 지내면서 곧 심묘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은 자신보다 뛰어나 보이는 사람을 쉽게 숭배하는 법이다. 그래서 풍안녕 자신도 심묘와 친해지고 싶었다. 광문당에 있는 다른 소저들은 더 이상 눈에 차지 않았다. 오로지 심묘에게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심묘는 자신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첨하거나 칭찬하기는커녕 가까워지지 않아도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그 점이 오히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앞에서만 허울 좋은 말을 하는 다른 소저보다 심묘가 더 진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조금 이상한 게 아닐까 생각은 했지만.
풍안녕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심묘의 오라버니, 심구였다. 심구는 누구에게나 평판이 좋았다. 어리석다고 악명이 자자한 여동생이 있어도 그의 평판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심묘와 점점 친해지면서 자연히 심구도 가까운 거리에서 몇번 더 만나게 되었다. 청년 영웅다운 그는 따사로운 햇살 같았고, 말을 잘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가 두려웠다.
생각해보니 그는 다른 부귀한 공자들처럼 자신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무장인 심구는 호방하지만 섬세한 면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낯선 사람처럼 대했다. 심묘의 친한 친구라고 해서 특별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자신이 늘 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해왔기에 그런 심구의 태도를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볼멘소리를 하려 할 때마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병사를 부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겁먹고 매번 물러섰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임안후부의 사경행이 정경성의 남자 패왕이라면 자신은 적어도 여자 패왕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자신인데, 어째서 이 남매에게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라버니 역시 자신이 집에서만 씩씩하다고 놀려대기 시작했다. 풍안녕은 분해서 씩씩거렸다. 다시 심구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당당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매번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나게 되면, 반사적으로 늘 목을 움츠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심묘의 사촌 언니, 나담도 이를 알아챘다.
“안녕은 어째서 장군부에만 오면 늘 조용해지는 거야?”
심묘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지. 심구 오라버니를 만나면 조용해진다고 하는 게 맞겠지.”
풍안녕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냈다.
“허튼소리 하지 마. 내가 조용하게 있고 싶으니까 조용히 있는 거지. 이것도 다른 사람의 허락을 받아야 해?”
그때, 나담이 풍안녕 뒤를 보며 외쳤다.
“심구 오라버니, 어떻게 갑자기 온 거야?”
순간 풍안녕의 얼굴이 굳으면서 그녀는 급히 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 나담은 그런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심묘 말이 진짜네. 풍가 대소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심구 오라버니야?”
분노한 풍안녕은 다시는 나담과 말을 섞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부로 돌아갔다.
그 후 일어난 일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억지를 부려 심묘와 나담과 함께 외출했는데, 잠깐 떨어져 있던 사이에 그녀들이 납치를 당했다. 납치를 당한 것도 구하지 못한 것도 모두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이었다. 풍안녕은 계속 자책했다. 심구는 책임을 따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상황을 추궁했다. 이후 심구가 더욱 두려워졌다.
누가 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풍가 형제는 심구가 자신을 추궁한 일을 알고 있었다.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비들이 화를 냈다.
“그 심 공자도 너무하네! 이미 일이 일어났으니 먼저 심 소저를 찾아다녀야지. 어째서 너 같은 어린 아가씨에게 따진 거야? 네가 무슨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너도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데!”
풍안녕은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야. 그의 말이 맞아. 본래 내 잘못이야.”
그녀는 심묘를 걱정하면서 자신을 미워했다. 심구 역시 자신을 아주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심묘는 살아 돌아왔고 나쁜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 후 감히 장군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심묘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웠다. 심묘가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았지만 일어났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장군부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심묘를 보고 나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심구를 볼지도 모르니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나담의 거듭된 초대에도 장군부를 방문하지 않았다. 자신은 심구에게 고개를 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넘길 수도 없어서 이렇게 스스로 벌을 받기로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조정의 일을 논할 때 심묘의 혼사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장군부가 황실의 표적이 됐다니! 심묘가 태자와 혼인하는 것은 결코 장군부에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심묘에게는 더욱 좋지 않았다. 그녀는 정략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그때 자신의 큰오라버니를 떠올렸다. 풍자현은 성정이 온화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게다가 그는 품행이 올바른 군자였다. 억지로 혼인해 첩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마자 얼른 장군부로 혼담을 꺼내러 가자고 큰오라버니를 설득했다.
풍자현은 예상치 못한 제안에 꽤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이전부터 여동생에게서 심묘에 관한 많은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동생이 도도하고 고집이 세지만 분별력은 좋아서 좋은 사람과 지내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좋다고 느끼는 사람은 적어도 간교한 사람은 아니라고 보증할 수 있었다. 풍자현은 풍안녕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심묘에게 거절당했다.
심묘와의 혼담은 물 건너갔지만 풍안녕과 장군부의 관계는 조금 느슨해졌다. 부로 돌아가는 길에 심구를 만났던 것이다. 심구도 자신이 장군부를 방문한 이유를 알 것이었다. 과연 그는 방문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심구는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그의 고맙다는 인사에 왜인지 심장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풍안녕의 측근 여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아가씨는 심가 큰 공자님을 세심히 생각하시네요. 그 때문에 기뻤다가 우울했다가…… 심가 큰 공자님에게 마음이 향하신 거예요?”
“무슨 허튼소리야?”
풍안녕이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아름다운 눈썹을 곤두세웠다. 깜짝 놀란 여종이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였습니다.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풍안녕의 대답은 오래도록 들리지 않았다. 여종이 불안해할 무렵, 풍안녕이 입을 열었다.
“됐다. 일어나거라.”
풍안녕은 거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일을 인정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은 셈 칠 수는 없었다. 여종도 분명히 알아차릴 수준이라면 심묘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심묘가 자신의 마음을 알면 심구에게 말을 할지, 그래서 심구도 이 마음을 알게 될지 초조했다.
풍안녕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아가씨는 예쁘고 귀여웠다. 큰 눈, 고운 코, 입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었다. 성숙한 여인이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신인데, 유독 심가의 남매만 어려웠다. 심묘는 늘 신비했으니 그렇다 하겠지만,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공명정대한 심구를 무서워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사실 무서운 건 심구 자체가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란 걸 깨달았다. 심구가 자신을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여인이라 여길까 두려웠다. 시시비비를 구별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인으로 볼까 두려웠다.
사모의 마음을 품게 되면 사람들은 어느 부분에서 부족하지 않은지, 늘 자신을 되돌아보곤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뛰어날수록 그에게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건지 의심하곤 한다. 늘 그의 앞에서 가장 좋은 모습만 보이기 위해 열심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고 잘못한 건 없는지 두려워하는 법이다. 그리고 긴장할수록 실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상대방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망신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심묘의 일로 심구가 분노하자 그가 자신을 싫어할까 두렵고 괴로웠다. 그런데 오늘 그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하자 너무 기뻤다. 자신은 그 때문에 울고 웃었다. 거리에서 유행하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그리움에 붉은 팥을 심었노라.
팥이 익자 알알이 떨어지는데,
그대는 내 사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사는 저속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마음속을 그대로 노래한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망이 없었다. 심구는 자신을 특별히 대한다고 볼 수 없었다. 풍안녕은 울적했다. 홀로 노래한들 무슨 쓸모가 있을까.
이런 상황 속에서 심묘가 천 리 밖 대량으로 출가했다. 단순히 정경성의 친구가 한 명 줄어들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심묘가 대량으로 시집갔다는 것은 자신이 다시는 장군부에 갈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숨겨온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음을 뜻했다. 풍안녕은 매우 낙담했다.
* * *
세상일은 크게 변했다. 명제의 정세가 예상치 못하게 돌변했다. 위독한 문혜제를 대신해 정왕 부수의가 대권을 손에 쥐었다. 나머지 황자들은 죽거나 감옥에 갇혔다. 관리 집안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똑똑한 사람과 관리, 궁중 사람들은 이를 알았지만, 세상일에 신경 쓰지 않는 풍안녕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근래 풍 대인이 늘 무거운 표정을 짓고 오라버니들도 매일 바쁘니 조정 일이 많은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풍 대인이 풍안녕을 방으로 불렀다.
“안녕아, 네 나이가 적지 않으니 이제 출가를 할 나이구나.”
풍안녕은 민감하게 풍 대인의 의중을 눈치챘다. 하지만 혼례는 자신에게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시 대꾸했다.
“아버지, 전 아직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전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곁에 있고 싶어요.”
풍 대인은 그녀를 귀여워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바보 같기는. 어느 아가씨가 시집을 가지 않고 계속 부에 남는단 말이냐? 혹시 노처녀가 되고 싶은 게냐? 네 사촌 오라버니가 며칠 후 올 테니, 네가 그에게 정경성 거리를 알려주거라.”
풍 대인의 의중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평소에도 할 말을 다 하는 풍안녕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무슨 뜻이에요?”
풍 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의 없이 이게 무슨 모습이냐? 뜻은 무슨 뜻. 네 사촌 오라버니가 정경성에 오니 네가 사촌 동생으로서 맞이하는 게 어떠냐는 의미다.”
“맞이하라구요? 제가 하인도 아닌데 왜 그를 맞이해요? 게다가 큰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도 있잖아요. 전 안 가요!”
풍 대인이 차가운 얼굴로 으름장을 놨다.
“반드시 네가 가야 한다!”
풍 대인은 풍안녕이 어렸을 적부터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인들 앞에서 풍안녕에게 큰소리를 쳤다. 상심하고 억울한 풍안녕은 아예 일어났다.
“아버지, 우리 풍가는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 딸을 파는 일을 하지 않아도 돼요. 사촌 오라버니와 전 여러 해 만나지 않았어요. 오라버니는 어색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불편해요. 할 말도 없어요! 게다가 아버지는 저를 보내 친분을 쌓게 한 다음 그와 저를 혼인시키려는 것 아니에요? 전 안 할 거예요! 동의 못 해요! 동의하는 사람을 보내세요!”
나담과 붙어 지내면서 그녀도 한층 거리낌 없이 말을 뱉는 습관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풍 대인이 사나운 기세로 풍안녕의 뺨을 때렸다. 풍안녕은 당황스러웠다. 뺨이 얼얼하고 아팠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풍 대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네 방으로 돌아가 반성하거라. 우리 풍가에 이렇게 염치를 모르는 딸이 있다고 말하지 말거라!”
주위의 하인들이 모두 놀랐다. 풍 대인은 풍안녕이 새끼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에 풍안녕이 광문당 선생에게 공부 때문에 손바닥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풍 대인은 그 선생과 기를 쓰고 다투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지금 풍안녕의 뺨을 때린 것이다.
풍안녕이 울며 뛰쳐나갔다. 그녀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닫고 침상에 누워 맘껏 울었다. 자신은 어린 시절 그 사촌 오라비를 한번 본 적 있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사촌 여동생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게다가 소년 시절부터 좋은 시를 썼다. 하지만 친절하고 재주는 많은지 몰라도 선량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은 어린 나이인 그가 여종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구역질이 난 자신은 이 일을 가족에게 말했지만, 사람들은 다들 잘못 보았다고 여길 뿐 조금도 믿어주지 않았다. 덕분에 자신은 그 사촌 오라비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를 맞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만나기도 싫었다. 세 살 어린아이도 아니니 부친의 뜻을 알아들었다. 부친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좋지 않은 사촌 오라버니와 자신을 혼인시킬 생각이었다.
풍안녕은 마음이 아팠다. 좋아하는 남자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기는커녕 자신을 폐나 끼치는 여인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데다가 부친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일생을 함께 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모자라는지 뺨까지 내려쳤다. 심묘와 나담이 모두 떠난 후라 이 슬픔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억울함을 말할 방법이 없었다.
풍안녕은 고집이 아주 셌다. 풍 대인이 앞으로 자기를 총애하지 않을 수도 있건만, 그녀는 종전처럼 고집스럽게 단식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풍안녕은 어떻게든 그 구역질이 나는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가 단식 선언을 하면 집안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풍 대인의 태도만 더욱 강경해졌을 뿐이다. 정경성 밖의 일을 처리한 후 돌아온 풍자현이 부친과 여동생이 맞서는 걸 알고 그녀를 위로하러 왔다.
“동생아, 아버지를 탓해선 안 된다. 아버지는 지금 방법이 없으셔. 정경성은 국세가 불안하고 우리 풍가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야. 그래서 아버지는 네가 화를 피할 수 있도록 일찍 시집을 보내려는 게다. 조가 사촌 형님의 집안은 재산이 많으니 시집가면 넌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재능과 용모를 다 갖추었어. 게다가 집안 친척이니 널 푸대접하지 않을 게야. 네가 억울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라. 이런 일이 없었다면 장래 네가 원하는 사람과 혼례를 올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안녕아, 네가 참거라. 아버지도 방법이 없으셔. 사촌 형님에게 시집가는 게 장래를 알 수 없는 우리를 따르는 것보다 나을 게다.”
풍안녕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근래 집안사람들이 모두 바쁜 것을 보고 의아하긴 했지만 물을 때마다 풍 대인에게 쫓겨났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풍안녕은 지금까지 자신의 혼사와 집안 상황을 함께 생각해보지 않았다.
“오라버니, 무슨 말이야? 풍가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거란 얘기야? 풍가가 위험한데, 풍가의 딸인 내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 혹시 아버지는 내가 시집가면 모든 화를 피해 편안하게 살리라고 여기시는 거야? 한 가족인데 동고동락해야지!”
풍자현은 탄식했다.
“네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니. 하지만 많은 일은 네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아. 네가 풍가와 동고동락하려는 건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 하지만 부모님이 과연 그리 생각하실까? 우리는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아. 꿍꿍이를 품은 사람이 널 데리고 풍가를 위협하면 어찌하겠니?”
잠시 말을 멈춘 풍자현은 곤란한 듯 덧붙였다.
“넌 어려서부터 응석받이로 자랐어. 네가 풍가에 남아도 도울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부모님만 더 걱정하시게 될 거야. 심지어 풍가의 약점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조가에 시집가면 부모님을 안심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가의 도움도 얻을 수 있을 게다.”
풍안녕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안녕아…….”
풍자현은 말이 없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깊게 호흡한 그녀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시 생각해볼게.”
풍안녕이 말을 아까자 풍자현은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풍안녕이 이런 상황을 순식간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리라 여겼다.
풍안녕은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재난이나 행운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자신이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맞이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방해물이 될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천진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하늘이 인색한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 미웠다. 하늘은 어린 자신에게는 복을 주었지만, 이제는 불안정한 장래를 주었다. 계속 고집을 부리며 어린아이처럼 지내는 것과 어른이 되어 가족을 보호하는 것, 둘 중 선택을 해야 했다.
풍안녕은 심묘를 떠올렸다. 심묘는 심가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여러 곳에서 그녀를 방해했다. 그래서 늘 심사숙고해야 했다. 그때 그녀도 이렇게 고민했을까. 풍안녕은 다시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용월태(花容月態, 아름다운 얼굴과 맵시)의 도도한 소저도 그런 큰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당연히 무리일 터였다. 심지어 다시는 이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었다. 도도하게 생활하려면 뒤에서 자신을 총애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나 오라버니처럼 자신에게 너그러울 리 없었다. 평생 풍가의 비호를 받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풍안녕은 결정을 내렸다.
* * *
풍가의 사람들은 풍안녕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깜짝 놀랐다. 그녀는 풍 대인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녀는 사촌 오라버니인 조 공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곧 그의 아내가 될 것이었다. 풍가 사람들은 안타까웠지만, 그들도 방법이 없었다. 몇 개 되지 않는 길 중, 이 선택만이 풍안녕이 잘 지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풍안녕이 조금도 억울해하지 않길 바랐다. 만약 억울함을 당하더라도 그나마 덜 받길 원했다.
조가 사촌 오라버니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서 풍안녕은 성격도 바꾸었다. 하룻밤 사이 사람이 변한 것처럼 과묵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철이 들고 온유해졌다고 칭찬했으나 풍가 사람들은 애석해했다. 풍안녕은 그들이 괜찮냐고 걱정스럽게 물어오면 미소 지으며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조 공자는 풍안녕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예쁘고 귀엽게 생긴 그녀가 유순하게 행동하자 그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눈 깜짝할 사이 혼인을 논의할 때가 되었다. 풍가와 조가는 두 사람의 사주단자를 교환했다.
풍안녕이 방 안에 앉아 바깥 화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여종이 급히 달려왔다.
“큰일이에요! 큰일 났어요, 아가씨!”
“무슨 일이야?”
풍안녕은 놀라 물었다.
“사촌 도련님이 취선루에서 맞았대요! 장군부의 심 대공자에게 맞았답니다!”
풍안녕은 조 공자가 맞았다는 말에는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으나, 때린 이가 장군부 공자라는 얘기에는 깜짝 놀라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누구에게 맞았다고?”
다급하게 말을 잇는 여종은 곧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심가 큰 공자, 심묘 아가씨의 오라버니요! 조 공자가 지금 혼인을 취소하겠다고 화내고 계세요.”
* * *
풍안녕은 대청으로 달려갔다. 풍 부인과 풍 대인은 조 공자를 타이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 공자는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운 듯 풍안녕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풍안녕은 조 공자의 얼굴에 자줏빛의 푸른 피멍이 든 것을 발견했다. 심하게 맞은 것이 분명했다. 새까만 눈언저리를 본 그녀는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럽고 분한 조 공자는 화를 내며 그녀의 코에 손가락이 닿을 거리에서 손가락질하며 욕했다.
“심구와 밀접한 사이면서 왜 구태여 나와 혼례를 치르려 했지? 우리 조가에 시집온 후 내게 불명예를 씌우려 한 게냐?”
“입 다물거라!”
풍 대인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조 공자의 말은 몹시 듣기 거북했다. 피치 못한 사정이 있어 그에게 풍안녕을 시집 보내려고 한 것이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딸을 파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총애한 딸아이가 이런 모욕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신중히 말하세요. 난 오라버니의 집안이 남의 말만 듣고 판단할 리 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군요.”
풍안녕도 웃음을 거두었다. 그녀는 절친한 심묘에게 배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조 공자는 일순 조용해졌으나 바로 냉소했다.
“뭘 믿고 이렇게 고결하다고 나오는 거지? 너와 심구가 상관이 없다면 어째서 그가 네 대신 나선 게지?”
자기 대신 나섰다는 말에 풍안녕은 미간을 찌푸렸다. 풍자현이 옆에 선 남종을 바라보았다.
“아노, 어찌 된 일인지 네가 말해보거라.”
아노는 풍부의 남종이었다. 풍자현은 정경성의 거리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조 공자에게 안내 역으로 아노를 잠시 붙여주었었다. 앞으로 나온 아노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조 공자를 한 번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 공자는 겉으로는 풍안녕을 알뜰히 보살피고 그녀에게 예의를 철저히 지켰지만 사실 뱃속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가 풍안녕과 혼인하려는 것은 그녀의 가세와 용모가 자신과 걸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직 첩은 없으나 손댄 여인은 꽤나 많았다. 그가 취선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정경성에서 사귄 어중이떠중이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조 공자, 풍 소저는 도도하다던데, 앞으로 술을 마시고 노는 일은 조금 삼가야 하지 않겠나?”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겐가? 남자가 바깥에서 연회를 즐기는 일은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풍류일세. 그리고 우리 조가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네. 풍 소저도 온순하고 영리해 보이지 않았다면 우리 조가에 들어올 수 없었네.”
“온순하고 영리하다니? 풍 소저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조 공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와전된 소문이네. 아니, 생각해보니 풍 소저도 자기의 처지를 알고 일부러 나의 비위를 맞추는 것 같기도 하네. 관두세. 어쨌든 영리하게 노력하고 있는 걸 보니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 않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면 나도 많이 예뻐해 줄 걸세.”
말을 마친 조 공자가 웃을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한 대 얻어맞은 그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를 후려친 남자는 주먹질을 세 번, 발길질을 두 번 했다. 조 공자는 울며 부모님을 찾았다.
“사위를 고르는 풍가의 안목이 형편없구나! 이런 약골이 풍가 소저와 혼인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멍해졌다. 조 공자는 체면을 잃은 데다 얻어맞은 게 분해서 그 사람의 신분을 물었다. 그 사람은 장군부의 큰 공자였다. 조 공자는 장군부에 항의해 미움을 살 수 없자 풍가로 와 따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노의 말을 들은 풍 대인과 풍 부인의 안색이 검푸르게 변했다. 그들은 심구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분노는 조 공자를 향했다. 오늘 일의 전말을 알지 못했다면 자신들은 끝까지 조 공자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것이다. 풍안녕을 깔보면서 혼례를 치르겠다고 하다니, 그녀를 이런 놈에게 시집을 보낸다면 불구덩이에 떠미는 꼴이었다.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평생 진심으로 그녀를 소중히 대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 우스웠다.
풍 대인이 대로했다.
“내가 보니 자네는 맞을 만했구먼. 풍가를 깔보는 자네 같은 큰 인물을 우리 풍가는 감당하지 못하겠네. 꺼지게나!”
조 공자는 당황했다. 그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듣지 못했어요? 꺼지라구요.”
풍안녕이 냉랭히 말했다. 그녀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오래전 조 공자가 여종을 데리고 노는 것을 본 그녀는 그에게 어떠한 환상도 품지 않았다. 다만 풍가를 돕기 위해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서로의 감정이 틀어졌으니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조 공자는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안색이 검푸른 풍자현이 사람을 부르자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은 조 공자를 데리고 나갔다. 풍 부인은 풍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