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의 귀환
외전. 삼가 새해 축하드립니다.
폐후의 귀환
심묘가 깨어나고 맞이한 첫 번째 연말.
농서성에 가랑눈이 흩날렸다.
사경행은 궁에 연회를 열어 친척과 친구를 초대했다. 사숙과 사무는 유모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고, 심신과 나설안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밤을 새우기에는 나이가 있어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반드시 눈을 뜨고 새해를 맞이한 뒤 귀가하려 한 건 나담과 풍안녕 같은 젊은이들뿐이었다.
고양이 입을 열었다.
“멍하니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니, 술놀음을 즐기는 건 어떱니까?”
“아, 안 돼! 싫어요!”
나담이 가장 먼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술놀음을 못 해서 그러는데, 다른 거로 바꾸는 건 어떤가요?”
“하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마조(馬弔) 어때요? 이건 제가 할 줄 알거든요.”
나담은 풍안녕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어때?”
풍안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좋아.”
“우리 사촌 동생은?”
심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할게.”
심묘는 이런 놀이에 원체 관심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흥이 오른 모습에 찬물을 붓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마조는 4명이 모여야 진행할 수 있는 놀이었다. 심구는 마조를 할 줄 몰랐고, 이 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심묘 자신, 풍안녕, 나담, 계우서 4명뿐이었다.
사경행은 심묘의 뒤에 꼭 붙어 서 있었다. 그는 존귀한 신분을 갖게 되었더라도, 사석에서는 여전히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사람들과 어울려 마조를 한다면, 어사의 탁상에 얼마나 많은 상소문이 쌓일지 몰랐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는 곁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게다가 마조를 하는 심묘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나담은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패를 냈다. 고양은 나담을 뒤에서 지켜보다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가 나서서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러웠다. 풍안녕과 계우서는 잘 하는 편에 속했지만, 계략 부분에서 심묘보다 한 수 밑이었다. 이 놀이에서 볼거리란 심묘가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말살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심묘를 향해 은전이 끊임없이 데굴데굴 굴러 들어왔다.
계우서는 답답한 듯 볼멘소리를 냈다.
“여러분, 황제께서 곁에 있어 두려우신 건가요? 황후마마께서 이길 수 있도록 일부러 져주는 것 맞죠? 벌써 몇 판을 한 건지, 이제 귀가할 은전마저 없습니다. 이러다가 궁에서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겠어요.”
나담이 감탄했다.
“우리 사촌 정말 대단해! 다들 ‘은전에는 눈이 달려서 부자한테만 굴러 들어간다.’라는 말 모르시죠? 우리 넷 중에서 내 사촌 동생이 가장 부자니까, 은전이 당연히 우리 동생을 따라다니는 거죠!”
풍안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해라. 나도 이제 은전이 다 떨어졌다.”
심구가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게 조금 있답니다.”
풍안녕의 볼이 새빨개졌다.
나담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온몸에 닭살 돋게 해줘서 참말로 감사합니다.”
먼 곳에서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잔을 들어 새해를 맞이했다.
* * *
모두가 궁에서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심묘는 옷을 갈아입으러 사경행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침전으로 이동했다.
복도에 들어서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배랑이었다.
타지에 있던 배랑은 심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궁에 급하게 돌아왔고, 지금은 잠시 머무는 중이었다. 그는 곧 다시 먼 곳으로 떠나야 했다.
배랑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여객’이 되었다.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유랑일 것이고, 유랑하는 삶을 사는 것 또한 하나의 복일 터. 심묘는 그런 배랑이 부러웠다.
“황후마마.”
배랑이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배 선생께서는 무슨 연유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셨나요?”
배랑이 미소를 지었다.
“소인은 소란스러운 상황을 즐기지 않습니다.”
심묘도 그를 따라 미소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은 심묘는 암울과 절망으로만 가득 차 냉기만 풍기던 심교교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주는 사경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심묘는 다른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먼 곳에서 폭죽 소리가 전해졌다. 심묘는 배랑과 함께 걸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배 선생,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배랑은 깜짝 놀랐지만,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황후마마도 삼가 새해를 축하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두 사람에게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심묘, 지금 뭐하는 거지?”
심묘가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사경행이 서 있었다. 표정이 얼마나 냉랭한지, 누가 보면 간통한 부인을 잡은 남편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사경행은 심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배랑을 한 번 보더니, 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뒤도 안 돌아보며 자리를 벗어났다.
심묘는 그에게 잡힌 채로 침전까지 끌려갔다. 침전의 궁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랐지만, 그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심묘는 사경행의 손을 뿌리쳤다.
“사경행, 지금 제정신이에요?”
남자는 실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그 사람이랑 술 마시라고 했지?”
술을 마시다니. 술은 나담 일행과 함께 마신 것이고, 배랑은 우연히 마주쳐 잠시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그것도 선향 하나도 끝까지 태우지 못할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이상한 이유로 화내지 말아 줄래요?”
“그 사람이랑 불꽃놀이까지 보고 말이야.”
사경행은 굳은 얼굴로 추궁했다. 말투에는 억울함과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심묘는 흠칫 놀라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고는 금방 마음이 약해졌다. 방금까지 차올라 넘칠 뻔한 부아는 순식간에 가라앉아, 이제는 이 남자를 도대체 어찌 바라보아야 할지 난감한 마음뿐이었다.
사경행은 심묘가 깨어난 후 그녀에게 무슨 일이 또 일어날까 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가 심묘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강해지는 소유욕에서 특히 잘 드러났다. 심묘는 절세 미남인 사경행이 경국지색이 아닌 자신을 왜 이토록 아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그 고생을 해가며 온종일 자신을 지킬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배랑과의 일은 오래전 일인데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사경행을 향해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우연히 마주쳐서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어요. 불꽃놀이 같은 건 보지도 못했고요. 그런 건 오로지 당신과 함께 볼 거예요.”
사경행은 자신이 눈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여전히 냉담한 척을 했다.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마.”
“배 선생은 당신보다 아름답지 않은 걸요.”
심묘는 그의 준수한 눈썹과 눈꼬리를 살포시 어루만졌다.
“본궁이 면수(面首)를 거두거든 당신처럼 미모가 출중하고 유일무이한 사람을 찾을 겁니다. 설마 제가 남자면 다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요?”
“면수?”
사경행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래전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니! 그는 화가 난 나머지 허탈한 웃음만이 나왔다.
“심교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심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세상에서 당신만이 저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어요.”
사경행은 그녀를 한참 지긋이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것이니,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제가 직접 제 두 손으로 갖다 드리죠.”
그가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사경행은 무방비한 심묘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주인님을 편하게 잘 모시려고 합니다.”
“사경행! 부끄럽지도 않아요?”
“응.”
“어서 내려줘요. 나는 아직······.”
“조용.”
“사경행?”
“음?”
“나와 함께하는 새해, 축하해요.”
* 천산다객 작가님이 한국 독자분들을 위해 급히 전달해 주신 새해맞이 외전입니다.
작가님을 대신해서 인사 드립니다.
올 한 해 <폐후의 귀환>을 아껴 주신 점 감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