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난 이런 거 쓴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이러면 좀 더 자세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다.
빈우는 헬멧 커버를 벗고 맨눈으로 팬티를 관찰했다. 그러나 시각정보 수집은 장갑복의 센서가 더 좋아서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다음은 팬티를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겉보기로는 팬티 곳곳에 입었던 흔적이 있다. 섬유가 닳은 부분이라거나 레이스가 해진 부분이라거나. 하지만 그 외의 흔적이라거나 사용했던 체취가 없다. 대신 뭔가 다르면서 그러나 익숙한 냄새가 나서 빈우는 좀 더 자세한 조사를 하기로 했다.
팬티를 입으로 가져가 미각 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빈우는 뒤통수에 작은 충격을 느꼈다.
“뭐야?”
황당해서 돌아보니 옆에 있던 동료가 빈우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그 녀석만이 아니다. 주변 몇몇 녀석들의 시선도 빈우를 향하고 있었다. 놈들이 헬멧을 쓰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맨눈으로 봤다면 형제들의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광선에 빈우는 쪽팔려서 뒤졌을 거다. 아니 시선보다 더한 감정의 화살 끝이 두뇌 회선을 통해서 빈우의 머릿속을 콕콕 쑤셔댄다.
‘뭐야 저거?’
‘저런 건 또 어디서 났대?’
‘가지가지 한다.’
민망해진 빈우는 두뇌 통신을 끊고 헬멧 커버를 닫았다. 그리고는 마음껏 외쳤다.
“에라이 다른 사람한테 까인 거라면 모를까 자기 자신한테 까이다니! 쪽팔려서 씨발!”
그런데 빈우는 음성 통신이 켜진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니 원래 당연히 켜져 있는 건데 두뇌 통신에 익숙해진 클론들이라서 신경을 안 쓴 탓이다.
-두뇌 통신 끊고 음성으로 외치는 건 또 뭐냐.
-그런 건 구석에서 하자.
-상담받지?
이번에는 형제들이 드물게 육성으로 갈군다. 중대 회선으로 잡담하는 건 무슨 심보냐, 그럴 거면 헬멧은 왜 쓴 거냐 등등. 음성까지 끄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무슨 일이 생길까 몰라 그냥 이를 갈며 욕하는 빈우였다.
“그래 입으로 욕해줘서 정말 고맙다 새끼들아.”
빈우가 시답잖은 장난질을 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작전 시작시각이 다가오자 중대원들이 이동해서 강하 포드에 들어갔다.
장갑 보병을 작전 지역에 투입하는 방법에는 강하 포드를 쓰는 게 가장 일반적이다.
대기권 돌입을 위한 든든한 내열 기능에 대공포화를 견디기 위한 적당한 방호력, 자세 제어와 착지를 위한 빈약한 추진력을 가진 이 강철의 관에는 장갑 보병이 네 명 들어간다.
포드 두 개면 일개 분대고 중대원 전원이 들어가기 위해선 25개의 포드가 필요하다. 강습함은 한 번에 30기의 포드를 사출 가능하니 한 번에 중대원 전원이 강하할 수 있지만 한꺼번에 강하하는 경우는 잘 없다.
중대원들이 짠 세부 작전은 이러했다. 빈우가 속한 1소대가 궤도 엘리베이터의 지상 터미널로 강하한다. 2소대는 항구의 바다에 입수하여 배수로로 우회한 뒤 1소대의 상황을 지켜보다, 궤도 엘리베이터 터미널에 가세하거나 시가지로 돌입한다. 3소대는 셔틀로 강하해서 상공에서 예비대로 기다리다가 필요하면 투입하기로 한다.
방어가 견고할 거라 예상되는 궤도 엘리베이터부터 직접 두들기는 건 중대의 전통이라면 전통인데 주변의 고층 빌딩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빈우라면 저기에 대공 포대나 중화기를 촘촘히 박아놨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1소대가 궤도를 변경해서 저기부터 조지겠지.
마음만 같아선 궤도 포격으로 수상하다 싶은 곳을 모조리 갈아버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럴 권한은 중대에 없었다. 클론들의 작전 권한은 장갑 보병 중대에만 있지, 모함인 솔리드 베타는 인공지능에 의해 운용된다.
같이 온 진압 함대는 어떨까 싶었는데 그쪽은 아예 지상에는 관심을 끈 상황이다. 정찰용 드론들을 행성 궤도에 뿌리고는 있는데 궤도 공격능력이 없는 개척 행성에 뭐 하는 짓인가 싶다.
어차피 울토르 중대는 임무를 위해 타 부대에 파견을 나가도 각자 정해진 임무만 할 뿐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다. 울토르 중대가 중대의 일을 하면 진압 함대는 자신들 만의 임무를 할 것이다.
빈우는 그런 것을 좀 더 캐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작전 시작시각이 다가왔다.
시간이 되자 빈우가 탄 강습함 솔리드 베타가 함대에서 떨어져 나와 마카로니 4의 대기권 강하 궤도로 진입했다. 원래라면 이런 강습 작전 시에는 모함이 궤도 포격으로 엄호 사격 정도는 해주겠지만, 솔리드 베타의 조함 AI는 마카로니 4에 행성 방어능력이 없다고 추정하고-무슨 배짱으로-그냥 맨땅에 헤딩하듯이 포드 진입 궤도로 들어갔다.
이제 강습함은 정해진 위치에서 중대원들을 사출한 다음 다시 궤도 위로 올라와 대기하겠지.
>강하 개시.
드디어 출격의 시간이 되어 강하 포드가 사출된다. 함대의 엄호나 기타 지원 없이 돌입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이 더럽다.
강습함의 관성 제어 범위에서 벗어나자 포드의 가속도가 느껴진다. 곧이어 대기권 진입과 함께 진동이 시작된다. 조금 더 있자 포드 외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잠시나마 동료들과의 두뇌 통신이 끊긴다.
HUD로 현재 부대의 전개 상황과 목표지점이 표시되고 착지 시간은 점차 가까워져 갔다. 고도가 더 낮아지자 포드에서 더미가 발사되었다. 강하 포드의 열원과 전자파를 흉내 낸 더미들은 지상 부대의 공격으로부터 대원들을 일차적으로 지켜준다. 그리고 더미들이 발사되기가 무섭게 위험 경보가 울렸다.
-대공사격이다. 회피 기동.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고층 빌딩들에서 위장막이 걷히고 대공사격이 솟구쳐 올라온다. 자기 가속탄 계열로 추정되는 금속탄들이 1소대 포드 무리로 날아와 덮친다. 대공 포대는 총 3대. 민간 기술력으로 만든 레일건이라 큰 위협은 안 되지만 신경에 거슬린다.
함포 사격까지는 안 바래도 함재기의 폭격으로 대공 진지로 추정되는 곳을 박살 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몸으로 때우게 될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연방은 평화주의자에다 구두쇠라서 무분별한 파괴행위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정성스레 지어놓은 건축물을 박살 내는 것보단 장갑 보병들을 밀어 넣어 상처 없이 통째로 삼키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1소대, 작전 변경. 대공 진지부터 제압한다.
>2소대, 예정대로 진입. 이후 터미널 배수로로 진입한다.
>3소대, 셔틀로 강하하여 궤도 엘리베이터 터미널로 돌입한다.
두뇌 통신으로 즉시 작전이 수정, 보강된다. 궤도 엘리베이터로 강하하던 1소대 포드들이 방향을 바꿔 대공 진지를 향했고 모함에서 기다리고 있던 3소대가 셔틀로 옮겨 탄 뒤 1소대의 임무를 이어받았다. 셔틀은 중간까지 내려와 3소대 중 3개 분대만 강하시킨 뒤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귀환 지점에서 대기할 것이다.
>1분대 목표 북동쪽 포대, 로미오골프 알파
>2분대 목표 동쪽 포대, 로미오골프 브라보
>3분대 목표 남서쪽 포대, 로미오골프 찰리
>4분대 목표 로미오골프 찰리
1소대 회선으로 분대별 세부 목표가 지정되고 빈우가 탄 강하 포드는 날아드는 포화를 향해 직접 쏟아져 내려갔다. 분대원은 8명이지만 장갑 보병 8명이면 저딴 급조 대공 포대는 순식간에 박살낸다.
대공포화가 점점 가까워지는지 경보음이 더 격하게 울린다. 강하하면서 위장용 더미를 먼저 뿌려놨지만, 이 정도 고도가 되면 열원, 전자파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쏠 거리다. 물론 포드들은 회피 기동을 하며 낙하하지만 그래도 맞을 놈은 맞는다.
갑자기 포드를 뒤흔드는 강력한 충격. 이럴 때 느끼는 감각은 하나다.
-아. 좆 됐다.
이 정도 충격이면 포드가 제구실을 못 하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대원들을 태운 포드는 순식간에 자세를 잃고 빙빙 돌며 떨어진다. 현재 고도는 3천. 이제는 밖으로 뛰쳐나가 제트팩을 써서 강하해야 한다. 예정이 바뀌었으면 작전도 바뀌어야겠지.
-2분대 2조 피탄! 포드 버리고 제트팩으로 강하한다.
빈우가 변경한 내용은 이의 없이 분대원들과 소대원들이 공유한다. 찢어진 포드 외벽을 타고 몰아치는 강풍 사이로 목표 대공 포대가 핑핑 돌아간다. 빈우가 폭발 볼트를 작동시키자 포드의 문이 폭발해 튕겨 나갔다.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다. 모두 느끼고 있으니까. 대원들은 입구에서 가까운 순서부터 뛰어나갔다. 그리고 빈우가 마지막으로 뛰쳐나가자마자 바로 뒤에서 포드가 대공사격에 박살이 났다.
‘자치정부의 기술로 만든 무기로 이 정도 위력이 나올까?’
턱도 없는 소리. 애초에 대부분의 군용 물품은 민간용 프린터로 만든 장비 가지고는 이빨도 안 들어간다. 그렇다면 저 레일건은 사람이 직접 만든 거란 얘긴데 자치정부 중에서 대기권에서 강하하는 포드를 맞추고 파괴할 정도의 레일건을 만들 기술력을 가진 곳은 드물다.
빈우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왼손의 총방패를 들어 정면을 감쌌다.
그리고 기절했다.
* * *
보리밭이다. 익숙한 보리밭이다.
눈이 지루할 만큼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이제까지 봐왔고 앞으로 계속 보게 될 보리밭.
태양이 보리밭에 떨어지자 하늘을 물들인 석양이 땅에도 스며든다.
노랗게 눈부신 것이 붉고 따뜻하다.
그 따뜻한 빛이 따뜻한 그녀에게도 스며든다.
머리카락에 휘감긴 석양이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미소에도 흘러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마치 석양처럼 따뜻하고 눈부시게 웃는다.
이리 오라며 손을 내밀고 뒷걸음치는 그녀를 잡으려 하지만 나는 아직 작다.
손이 짧고 다리가 여리고 나이가 어리다.
막 달려가면 그녀의 허벅지 즈음에 매달려 머리를 묻을 거다.
나는 그녀가 좋다.
나에게 눈높이를 맞춰 앉는 그녀의 얼굴이 황혼에 다가간다.
부드럽고 따뜻하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미소를 어루만지고 싶다.
아장아장 뒤뚱뒤뚱 달려가자 그녀는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손바닥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부드러운 볼살을 거머쥐자 익숙한 감촉이 느껴진다.
딱딱하고 허연 해골이다.
일그러진 눈구멍에 이를 악문 해골.
어벤져 장갑복의 헬멧에 그려 넣은 스컬마크다.
* * *
“니기미.”
빈우는 피와 흙먼지가 뒤섞인 침을 뱉으며 자신의 장갑복 헬멧을 들고 일어섰다. 추락할 때 충격에 떨어져 나간 걸 정신없는 와중에 어떻게 기어가서 잡은 것 같다.
일그러지고 구멍이 난 헬멧을 막 아물어가는 머리에 뒤집어쓰자 다시 동체와 연결된다. 이어서 장갑 안의 유동젤이 원래의 형상에 최대한 가깝게 얽히고설켜 굳어지고 그 위로 적층 장갑이 다시 겹쳐진다. 마지막으로 복구된 HUD에 자신을 노리는 화선이 표시되었다.
“야 이 씨발!”
빈우는 제트팩을 급가속시켜 앞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빈우가 뒹굴던 자리로 포화가 쏟아진다. 피하고 보니 맞아도 별 탈 없을 간지러운 공격이지만 맨머리에 그냥 맞았다면 좀 위험했을 거다.
화선을 추적하자 거기에는 전차가 있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장갑 보병이라 해도 이런 평지에서 전차를 만나면 알보병하고 도토리 키재기를 한다. 전차의 기관포와 도약 지뢰는 보병을 조용하게 만들고 주포와 미사일은 장갑 보병을 얌전하게 만든다. 물론 상황이 받쳐준다면 반대로 장갑 보병이 전차 뚜껑을 신나게 까고 다니겠지. 허나 더 중요한 것은 전차도 전차 나름이란 거다.
“저딴 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빈우를 공격한 전차는 스콜피온 전차였다. 녹색 연맹이라는 자치정부 행성 방위군이 쓰는 주력 전차인데 그쪽 동네에선 꽤 괜찮은 놈인지라, 다른 자치정부에서도 이놈을 사다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괜찮다는 성능도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그런 거지 연방군 기준으로 본다면 영 아니올시다 되겠다.
빈우는 반격하기 전 먼저 확인을 했다. 중대 회의에서 결정 난대로 목표로 삼은 전차에 인간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인명 수색 모드로 설정된 센서가 전차를 훑었지만, 인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즉시 스콜피온 무인 전차는 붉은색 타겟, 적성 목표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빈우의 코일건은 현재 대물파괴용으로 설정되어 있던 터라 탄환 교환 없이 곧바로 사격을 가했다.
초음속 니켈강 탄환이 총구를 나서자 공기와 마찰하며 불꽃과 굉음이 발생했고 곧이어 정면 장갑을 꿰뚫린 전차에서도 화염과 폭음이 솟구쳐 올랐다. 재수 없게 탄약이 유폭 되었는지 포탑이 거하게 날아오른다.
적은 전차 하나뿐이었고 다른 전차나 병력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보병이나 인간 병력이 같이 있었다면 문제가 좀 심각했을 거다.
물론 보병이 호위하는 전차는 조금 더 위험하긴 하지만 그것보다 빈우는 클론이라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기에 보병에게 꼼짝도 못 하고 두들겨 맞으며 도망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동료들과 합류하는 게 먼저다. 폭발광이 보이는 목표지점으로 달려가며 빈우는 상황을 파악했다. 시간은 포드에서 피격당하고 정신을 잃은 지 32초가 지났고 위치는 목표물에서 동남쪽으로 1200미터가량 떨어진 평지다.
다음 자신의 현재 상황을 보면 손상 부위는 장갑복의 왼쪽 총방패와 헬멧이고 둘 다 복구할 수 있다. 몸쪽은 왼쪽 이마에 꽤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현재 수복 중이고 십 분 내로 완치될 거다.
“어이구, 죽다 살았네.”
왼손의 발포 장갑 방패가 걸레 조각이 되어 덜렁거린다. 프레임은 살아있으니 재생성은 되겠지만 이걸 보면 정말 구사일생이라고 느꼈다.
아마 포드를 뛰쳐나갈 때 오지게 재수 없이 대공 포탄에 처맞았고 방패를 뚫은 포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 같다. 만약 방패가 없었다면 스치는 것만으로도 사망이었을 거다.
그 후 착용자인 빈우는 정신을 잃었지만 장갑복은 자동 제어로 감속하며 추락을 했고 그 결과 이렇게 땅바닥에 꼬라박았다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