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보시다시피 김빈우 소령은 울토르 중대에 파견될 때부터 신체를 클론의 것으로 위장해 놨습니다. 더구나 신체 곳곳에 심어둔 정보 조회 칩마저 조작해 클론 칩으로 바꾸어 놨지요. 이 정도로 숨겨놨으니 정체를 알아내려면 이런 스캐너보다는 의무실에서 실제 검사를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부상 코드입니다.”
말을 마친 마커스는 가만히 서 있는 빈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암호화된 홀로그램을 띄웠다. 승인받은 안구를 가진 사람만이 인식하고, 두뇌 칩에 승인받은 프로그램을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홀로그램이다.
빈우가 그 홀로그램을 보자 머릿속에서 하나의 프로그램이 작동했다. 잠수에서 떠오르는 부상 프로그램이다.
“반응했습니다. 김 소령이 부상 코드에 반응했습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마커스의 말투가 약간 풀렸다.
“하, 그렇다면 일단 ‘정상적’인 방법으로 ‘잠수’했다는 얘기군.”
라캉 대령이 대놓고 비꼬는 어투로 말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고토 준장만이 희미하게 비웃을 뿐이다.
바깥 사정이 어떻든 간 빈우의 머릿속에선 복잡한 계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뇌 칩이 부상 코드를 받아 부상을 시작했고 뇌 안에 묶어놓았던 부분을 차례차례 풀어나간다.
“빈우야, 훈련받은 대로 해. 훈련받은 대로. 암호를 풀어. 떠올려.”
지금 마커스가 하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이다. 훈련받을 때 많이 들었던 말이다. 훈련받은 대로 암호를 해독하며 암시를 푼다.
암호를 해독하는 순서와 방식이 정확히 맞아야 한다.
“천천히…. 떠올려, 떠올라, 물 위로. 끄집어내.”
수면을 가르며 물 위로 올라가듯 깊숙이 잠수했던 자아를 떠올린다. 흐릿하던 것이 또렷해지고 막혔던 게 뚫려 간다. 마지막으로 해야만 할 일이 강압적으로 떠오른 빈우가 말했다.
“내…. 내 초코 쿠키와 닭고기 파이는 어디 있지?”
그 말에 마커스가 손에 든 플라스틱 판 두 개를 들어 보여 주었다.
부상의 마지막 코드.
아이가 그린 것 같이 삐뚤빼뚤한 음식 그림들이 빈우의 눈으로 들어와 뇌 속에서 기억을 자극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연방의 시민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연방군 군인, 군사 정보국의 김빈우 소령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인간이다.
클론으로 위장했던 기록과 군인으로서의 기록이 서로 구분되며 빈우는 자기 자신을 확실히 되찾을 수 있었다.
연방의 시민이자 인간으로 살아왔던 기억.
군에 지원하고 정보부에 들어갔던 기억.
클론 프로젝트, 울토르 프로젝트에 지원했던 기록.
클론으로 위장하고 전투한 기록.
일련의 기억과 기록들이 꿈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 순간 빈우의 두뇌 칩 정보가 갱신되었다.
>군번 82-A5-713845
>소령 김빈우
“흥. 본인이었군.”
“이게 ‘잠수’란 말입니까. 대단하군요.”
툴툴대는 라캉 중령과는 달리 눈앞에서 클론의 두뇌 칩이 인간의 것으로 바뀌는 것을 본 응우옌 중령은 감탄한다. 그 와중에 마커스는 스캐너를 들고 빈우의 몸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신체 내부에 심어 놓은 식별 코드도 이제 정상 작동합니다. 김빈우 소령 본인이 맞습니다.
마커스는 확인한 사실을 이노우에 준장에게만 메세지로 보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빈우에게도 살짝 보여 주었다. 안심하라는 의미일 거다.
작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스캐너를 내려놓는 마커스를 보며 빈우가 피식 웃자 마커스도 주먹으로 빈우의 가슴을 가볍게 친다.
“이 자식, 사람 애먹이고 말이야.”
마커스의 쓴웃음이 아마 빈우의 얼굴에도 똑같이 떠 있을 거다.
그리고 아샤는, 아나스타샤는 울먹이며 이쪽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얼른 달려가서 달래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심각한 일이 있다.
“자, 자, 자~ 그럼 바로 시작해볼까. 김 소령.”
홀로그램 너머의 이노우에 준장이 주의를 환기하듯 손뼉을 치며 앞으로 당겨 앉았다.
여기서 시작이라면 당연히 빈우가 상부에 아무런 보고 없이 무단으로 잠수한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음, 그러면… 2216년 6월 8일부터입니까?”
빈우의 기록이 옳다면 그날이다.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된 날.
울토르 중대의 지휘관이자 정보부 요원이었던 빈우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클론으로 위장한 날.
“응~ 그래, 6월 8일 03시 30분 경이지. 그럼 그때 기록부터 비교해 보면서 얘기를 하지.”
“지금 바로 말입니까? 김 소령은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클론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정신적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응우옌 중령이 바로 심문하는 것은 너무 빠르지 않으냐는 어투로 물어봤지만.
“필요 없다네.”
단칼에 거절이다.
원래대로라면 잠수에서 부상한 요원들은 자아 회복을 위한 휴식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정보국 사람들은-특히 고토 국장은-빈우의 안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서두르고 있었다.
‘좀 이른데.’
정보국에게 중요한 미덕은 ‘속도’ 보다 ‘신중’ 이다.
그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작년에 솔리드 베타에서 일어난 사건일까, 아니면 방금 마카로니 시에서 벌어진 사건일까. 일단 그들은 빈우가 잠수했던 당시의 기록을 원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러나 그날의 기록은 상당 부분 유실되었다. 부대의 책임자인 빈우의 기록은 물론이고 함 내의 기록과 클론들의 기록조차도. 복구를 해봤지만 빠진 부분이 너무 많다.
해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서로가 가진 정보와 기록을 비교해 빠진 부분이나 오류를 고쳐가야 한다.
마커스가 기록 홀로그램을 띄우자 거기에는 페가서스급 강습함 솔리드 베타가 나타났다.
연방 표준시로 2217년 6월 8일 03시 34분.
당시 클론 중대의 모함인 솔리드 베타는 다른 임무 부대로 배속되기 위해 단독으로 점프를 했었다.
홀로그램 화면에는 워프 공간으로 들어가는 솔리드 베타가 보인다. 그러나 도착 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게이트는 있었지만 솔리드 베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이노우에 준장이 지적했다.
“여기서부터야. 점프한 솔리드 베타가 통상 공간으로 나오지 않은 게. 처음에는 점프가 실패한 줄 알고 시작 지점에 확인 통신을 보냈지.”
점프가 실패하면 물체는 시작 지점으로 도로 튕겨 나온다. 드물지만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솔리드 베타의 소식은 어디에도 없더라구. 그것도 92분간.”
점프는 아주 안전한 이동 방법이다. 성공하면 도착 지점에 가는 것이고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도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다. 연방이 지금까지 수많은 점프를 했었지만, 점프 중 실종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행여 다른 게이트로 나왔나 싶어 조사해 봤지만, 도약 가능한 거리의 게이트에선 솔리드 베타의 소식은 없었어. 그러다가 92분이 지나자 짜잔~ 시작 지점으로 배가 되돌아왔지. 공격을 받은 채.”
홀로그램에는 원래 출발 지점에 나타난 솔리드 베타가 보였다. 그리고 이노우에 준장의 말대로 선체 여기저기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빈우는 당사자였기에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제는 두뇌 칩 안에 있는 당시의 기록을 정확히 열람할 수 있었다.
“네, 당시 울토르 중대는 워프 공간 안에서 샤다이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상상도 못 한 기습이었죠.”
점프를 시도한 울토르 중대는 워프 공간 안에서 샤다이의 기습을 받았다. 점프한 배는 워프 공간을 지나 다시 통상 공간으로 나오는 데 워프 공간에서는 오직 해당 함선만이 존재하며 다른 물체들과는 접촉할 수 없다. 그러나 솔리드 베타는 점프 전이나 후가 아닌 점프 도중 워프 공간 안에서 샤다이에게 공격받은 것이다.
“김 소령, 자네 말대로 워프 공간에서 다른 존재와 접촉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야. 보고를 받았을 때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구. 나조차도. 그러나 자네가 남기고 우리가 찾아낸 기록이 확실한 증거였지.”
잠시 시간이 지난 화면에는 페가서스급 동형함들이 상처 입은 솔리드 베타에 도킹하고 있었다. 저들도 군사정보국 소속임이 분명하다.
“솔리드 베타가 빠져나왔을 때 우린 급히 대응반을 파견했어. 극비 중의 극비인 울토르 중대가 공격받았으니 비상사태였거든.”
화면은 다시 페가서스의 내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클론 중대원들은 깡그리 전멸. 수면 상태로 대기 중이던 B, C열 예비용 클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파괴되었지.”
죽 나열되는 것은 어벤져 장갑복의 파편 조각들이다. 그리고 운 좋게 남은 클론의 시체 파편들 약간.
“소령 역시 자네의 장갑복만 격납고에서 발견되었네. 플라스마에 공격받은 장갑복은 헬멧과 등 부분 일부만 찾을 수 있었고 시신은 발견할 수 없었지. 우리는 장갑복에 남겨진 전투 기록만 회수하는 게 고작이었다네.”
화면에 보이는 것은 빈우 전용의 어벤져 장갑복, 이었던 것의 일부였다. 그 부위는 고열에 녹아내린 헬멧 뒷부분과 장갑복 척추 프레임 약간이었다.
“정말 예술적으로 남지 않았나? 예비 메모리칩이 아슬아슬하게 안 녹았지?”
빙긋 웃으며 이노우에 준장이 말을 이었다.
“우린 자네가 전사한 줄 알았어.”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플라스마에 맞고 장갑복이 저것 밖에 안 남았는데 인체가 남아 있을 리 없으니까. 장갑복에 있던 메모리칩이 남아 있는 것만 해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장갑복에서 회수한 기록만 봐도 최악의 상황이더군. 자네의 두뇌 칩에 남아 있는 기록은 어떤가?”
이노우에 준장은 빈우의 장갑복에서 회수한 당시의 기록을 재생시켰다. 동시에 빈우도 자신의 기록을 재생시켰다. 클론이었을 때는 결코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숨겨진 기록을.
-2216년 6월 8일 03시 30분.
정보국에서 복제한 기록과 빈우의 두뇌 칩에서 나온 원본 기록이 비교되며 재생되고 있었다. 이제 모자랐던 부분이 맞춰지기 시작할 것이다.
* * *
솔리드 베타는 포말하우트 항성계로 점프하기 위해 점프 게이트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기록은 전투 지휘소의 조타석에 앉은 빈우의 시선 영상과 음성이었고 그는 함내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클론은 수면기에서 자고 있고 최소 경비 인원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으며, 그 외의 함내 작업은 로봇들에게 맡긴 상태였다.
-게이트 활성화. 점프 준비 완료.
-점프.
인공지능의 알림이 뜨자 빈우는 점프를 명령했다. 열린 게이트 안으로 함선이 들어가고 뒤쪽으로 게이트가 닫힌다. 그리고 앞쪽으로 곧바로 게이트가 열려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뭐지? 점프 실패인가?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면 다시 점프한-
다소 의아해하는 빈우의 목소리를 자르고 인공지능의 경고가 울렸다.
-경고! 경고! 이것은 점프 실패가 아닙니다. 출발지점과 도착 지점의 점프 게이트가 열리지 않습니다. 현재 알 수 없는 이유로 점프 공간에 갇힌 상태입니다.
-갇혔다고?
처음 접한 일에 놀란 빈우의 목소리에 함선 관리 인공지능은 대답 대신 또 다른 경고를 울렸다.
-경고! 경고! 정체불명의 함선 접근 중! 방위 90-25, 거리 6500.
정체불명의 함선은 처음 보는 형태였는데 은빛 유선형의 함체를 미루어 보아 마치 샤다이의 함 같았다. 그러나 이제까지 보았던 어떤 샤다이의 함보다 컸다.
-샤다이로 추정되는 정체불명 함선 계속 접근 중.
점프 공간에 갇히는 것만 해도 전대미문의 사건인데 다른 함과 마주치기까지 하다니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빈우의 판단은 냉철했다.
-정체불명의 함선은 적함으로 정한다. 적함을 향해 준비되는 함포부터 사격. 호위기 발사시켜. 중대원은 전원 긴급기상 후 함내 방어 메뉴얼 A-3로 배치.
적의 정체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아군은 아니다. 반면 가장 위험한 적일 확률은 매우 높다. 이럴 때는 선제공격을 하는 게 최선의 수일 것이다.
빈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불리했다. 솔리드 베타의 모든 함포와 미사일이 적에게 날아갔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기존의 샤다이 함이라면 나름 피해를 주었겠지만, 이번의 함에게는 명중하기도 전에 모두 요격당했다.
-경고! 방어막 45%! 경고! 방어막 소실!
반면 적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솔리드 베타의 함선 방어막을 절반 넘게 날려 버렸고 그다음 공격에는 정확히 방어막을 모조리 벗겨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밀 공격들은 이쪽의 함포와 추진기만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1번, 3번 주포 대파. 주 추진기 손상. 주 추진기 대파.
-전방 미사일 발사구 대파. 4에서 7번 부포 소실.
인공지능의 음성 경고가 함선 피해 상황 표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적은 솔리드 베타를 무력화하고 있었다. 함내 관성 제어장치도 피해를 보았는지 적의 공격에 함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빈우는 전투 통제실을 뛰쳐나가 장갑복을 입으러 달려갔다.
-함선의 모든 추진력을 상실했습니다. 적함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본 함을 나포하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침 과정을 밟겠습니까?
-아니. 함내 방어 메뉴얼 D-2로 전환해.
인공지능의 권고를 거부한 빈우는 마지막 수를 뒀다.
처음 내린 함내 방어 매뉴얼 A-3가 지정된 장소에서 구역 방어를 하는 것이라면 D-2는 모든 병력을 모아 적함으로 침투하는 반격 작전이다.
-울토르 중대 전원 격납고로.
격납고에는 셔틀과 함재기가 있어 역습을 위한 D-2 계획에 있어 안성맞춤이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경고가 뜬다.
-적함이 3번 미사일 발사구에 접촉. 샤다이로 추정되는 적들이 발사구를 통해 침입합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역시나 은빛 유선형의 갑옷들이다. 솔리드 베타에 침투한 적들은 일견 샤다이의 장갑복 같았지만 이제까지 봤던 녀석들과는 전혀 달랐다. 기존의 스팸과 비교해 볼 때 이놈들은 덩치도 더 크고 한눈에 봐도 전투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